-
-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 미군정 중위의 눈에 비친 1945~1948년의 한반도
박태균 지음 / 역사비평사 / 2021년 10월
평점 :
1 미군정은 왜 실패했는가─〈맥아더는 완고〉했고, 〈하지는 순진〉했다
"버치는 1948년 38선 이남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서울을 떠났다. 그가 추진했던 좌우합작위원회를 통한 통합 한국 정부의 수립이 실패한 직후였다. 1973년 버치는 한 연구자로부터 미군정 시기를 전체적으로 평가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다." "그는 답장에서 2년 반 동안 스스로의 활동이 실패했던 원인은 맥아더가 이끄는 도쿄의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갖고 있었던 이승만에 대한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맥아더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 하지 장군을 도쿄로 불러 이승만을 영접하도록 했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미국을 대표해서 참여했다. 1973년의 편지에서 태평양 사령부의 잘못된 정책을 지적한 다음, 버치는 한국 내 정치적 문제의 핵심으로 이승만의 문제를 지적했다. 〈이승만은 그에 대한 우리의 혐오를 알고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는데 하지 장군과 버치 중위〉라고 했다."(18-9)
2 여운형에 대한 미군정의 구애─〈잘 도망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중요하다.〉
"미군정은 왜 여운형이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그를 미군정이 주도하는 정국 구상에 끌어들이려 했을까? 쉽게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의 대중적 영향력이었다. 여운형은 사회주의 좌파 계열에서 가장 높은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그는 청년들의 영웅이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따라 소련군과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도 여운형은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소련으로서는 남한의 지도자로 이승만과 김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여운형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이슈는 한국 내 좌파를 분열시키는 것이었다. 해방된 한국에서 조선공산당은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당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건하고 미군정뿐만 아니라 일본 총독부와 소통이 가능했던 여운형을 통해 좌파를 분열시키고 강경한 입장의 공산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수 있다면, 이는 러시아에 우호적인 좌파 전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방안이 될 수 있었다."(28-9)
"여운형에게 타격을 입히는 공작은 이승만의 정치 고문이었던 굿펠로에서 시작되었다. CIA의 전신인 OSS(전략사무국)의 대령 출신인 굿펠로는 이승만이 귀국할 때부터 이승만을 옆에서 도왔던 '좋은 친구'였다. 미 국무성에서 해방 직후 이승만의 귀국 비자 발급을 거부하자, 굿펠로는 비자 발급을 도왔다. 준장 진급에 실패한 굿펠로는 이승만의 요청으로 1945년 12월 25일 방한했고, 하지 사령관의 특별 정치 고문으로 1946년 5월 26일까지 한국에서 근무했다." "미군정은 정치공작을 통해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조선인민당에서 탈당하여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도록 지원했지만, 그를 따라나간 정치인은 많지 않았다. 이러한 공작이 여운형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되지 않았고, 미군정의 지시에 대해서도 제대로 응하지 않자, 미군정은 여운형의 정치적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한 2단계 작업에 들어갔다. 여운형의 비리(친일행위를 찾는 작업에서 시작된)를 찾아서 그의 대중적 영향력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었다."(29-31)
3 여운형의 친일 행적을 찾아라
"1946년 8월 2일 버치는 「여운형의 관계에 대해 제안된 조사」라는 제목의 문건을 작성했다. 여운형이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의 고위층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정보가 있어서 조사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주한 미군정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이 행한 질문의 첫 번째 범주는 여운형과 일본 총독부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었다. 〈여운형과 친한 일본인이 있었는가? 여운형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했는가? 여운형이 총독부의 돈을 받았는가? 그는 반일 활동을 했는데 왜 체포하지 않았는가?〉 두 번째 범주는 그가 공산당과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가 스탈린의 친구였다는 것을 아는가? 그가 모스크바의 지시를 받아서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것을 아는가?〉 마지막으로 여운형이 어떤 인물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자인가, 기회주의자인가? 그는 중국과 러시아의 꼭두각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조사관들이 얻은 정보 중 여운형의 명성에 금이 갈 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32, 36, 39)
4 여운형의 친일 행위에 대한 최종 조사 보고서
"여운형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무력으로 저항한 사례가 없었다. 스포츠를 통해, 그리고 언론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는 스포츠와 언론을 통해 젊은이들을 불러 세워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일본 총독부의 눈에는 여운형이 암살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임시정부나 의열단과는 다른 인물로 비추어졌다. 사실 여운형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고, 의열단 지도자들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질 무렵 비밀결사로 '건국동맹'을 만든 것 외에 그가 다른 정치조직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 역시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운형이 친일의 혐의를 받는다면, 그가 총독과 대화하면서 '자치'를 주장했다는 점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여운형이 주장했던 자치는 소위 친일파들이 주장했던 자치와 다른 맥락이었다. 그의 주장은 완전한 독립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였기 때문에 총독부가 수용할 수 없는 방안이었다."(43-4, 49)
5 〈내가 테러리스트들의 애국적 행위를 중지시켜야 하는가?〉
"귀국 초기 이승만의 독촉중협에는 우익뿐만 아니라 좌익의 주요 정당들이 모두 참여했다. 미군정과 마찬가지로 국내의 정치인들은 이승만이 분열되어 있는 정치 세력들을 통합하는 구심점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문제는 이승만이 '친일파'들의 참여에 대해서도 문호를 열었다는 점이었다. '친일파'는 일본과 친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의 불의의 전쟁에 협력하면서 한국인들을 수탈하고 괴롭히면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전쟁범죄자들이었기 때문에 새로 수립될 국가에 참여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이 지점에서 이승만이 내놓은 구호가 〈덮어놓고 뭉치자〉였다. 통일된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친일 부역자를 비롯한 모든 정치 세력들이 뭉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좌파 정당들은 이러한 무원칙한 이승만의 원칙에 반발하면서 독촉중협에서 탈퇴했다." "결국 〈덮어놓고 뭉치자〉라는 구호는 그 앞에 〈공산주의자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을 빼고〉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했다."(56)
"이승만 대통령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축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돈을 벌었던 친일 부역자들이었고, 다른 한 축은 물리력을 갖고 있었던 경찰과 청년단이었다. 그런데 후자는 미군정에게 가장 큰 고민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불법적인 활동을 자행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보수 우익의 정치 세력들을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미군정의 정책에 부합될 수 있었지만, 미군정으로서는 불법적인 테러를 자행하고 사람들을 납치하고 고문하는 것까지 용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 이승만은 청년단이 다치게 한 사람들은 좌파 정치인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오히려 '애국자'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버치에게 〈당신은 내가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그들의 애국적 행위를 중지시켜야 하는가? 그들이 죽인 사람들은 좌파들이다〉라고 주장했다. 좌파는 인간적으로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보수적인 미국의 가치관에 충실했던 버치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다."(57-8)
6 이승만의 귀국을 막아라
"정치적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이 귀국할 즈음인 1947년 4월 19일 버치 문서의 제목은 「이승만의 외교적 성공」이다. 이승만이 국내외적으로 '실패'했던 4.19혁명으로부터 정확히 13년 전이다." "이승만은 워싱턴 방문을 통해서 미국의 대규모 대한 원조를 얻어냈으며, 모스크바 삼상 협정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남한에서만 임시조선정부가 먼저 수립되는 것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바뀌었다고 선전했다. 또한 남한만의 임시조선정부가 들어서면 그 수장은 이승만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다. 모두 '가짜 뉴스'였다. 그 당시 TV는 아예 없고 라디오도 몇 대 없었던 상황에서 '팩트 체크'를 통해 대중에게 사실을 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버치 문서에 있는 이승만 관련 문건들에서 1945년 이전 그와 함께 하와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은 이미 이승만의 배신과 거짓,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교포들의 분노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쩌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이렇게 견원지간이 되었는가?"(68-70)
7 이승만과 김구─문제는 돈이었다
"버치는 1948년 1월 13일 작성한 문서 「이승만과 김구」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두 사람 사이의 증오는 부분적으로는 개인적인 질투, 허영심, 그리고 극단적으로 다른 그들의 배경과 현재의 지지로부터 나온다. 노여움이 나오는 가장 분명한 이슈는 돈 문제다. (···) 1945년 가을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승만은 현금이 없었다. 반면에 김구에게는 1억 8백만 엔을 포함하여 의지할 수 있는 돈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국민당의 선물이었다. (···) 돈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두 사람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며,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돈에 대한 이승만의 욕심은 권력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권력 그 자체는 돈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작동한다. (···) 반면에 김구는 집단의 수장으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을 추구한다. 돈이 많았을 때 그는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난민을 위해 사용했고, 극빈자를 구호하는 데 썼으며, 그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기부했다.〉"(78-9)
8 내조의 여왕인가, 국정농단의 기원인가─프란체스카 여사
"버치의 문서에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다. 이승만이 1946년 말 미국으로 날아가 마지막 승부수를 띄우고 있을 때였다." "편지 내용의 대부분은 이승만에게 국내 상황을 알리는 내용이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보수 우익의 지도자인 김구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조언을 했다. 하지 사령관과 김구의 좋지 않은 관계와, 김구와 김규식의 관계에 대해서 주목했다. 김규식이 반탁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고, 이에 따라 김구는 김규식을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로 선전할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서 〈분홍색은 없고 빨갱이라고 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달했다." "프란체스카는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발표한 공동성명 5호에 대해서도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프란체스카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녀는 비서이면서 정치적 조언자였다. 그러나 단순한 조언자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86-90)
9 강용흘을 아시나요
"1946년 강용흘은 미군정청의 출판부장에 임명되었다. 1947~48년에는 주한미군 제24군단 정치 분석관 겸 자문관을 역임했다. 미군정에게는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들이 필요했고, 강용흘은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일파들이 군정청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테러리스트들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지금 상황이 식민지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는 〈그들의 정당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있〉으며, 이것이 테러리스트들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았다." "강용흘은 또한 미군정 아래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경찰을 꼽았다." "강용흘이 보기에 해방 정국에서의 암살 사건에 경찰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는 이승만과 김구가 연관되어 있을 것이며, 이들은 모두 배후에 있었다는 혐의로 감옥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2-6)
10 현직 경찰은 왜 장덕수를 죽였을까
"1947년 12월 2일 미군정을 당혹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민주당의 수석 총무였던 장덕수가 암살당한 것이다. 미군정이 미소공동위원회가 더 이상 한국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한 직후의 시기였다. 미군정이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유엔 결의에 따라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감시하에 38선 이남에서의 총선거를 통해 미국에 우호적인 분단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구상이었다.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었고, 소련군과의 협조가 폐기된 상황에서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위원회는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1947년 내내 미군정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에게는 보수 세력 중 가장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던 장덕수를 중심으로 한 한국민주당만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핵심 브레인 장덕수가 현역 경찰이 포함된 2인의 암살범들에게 살해된 것이다."(102)
11 김구의 권위를 떨어뜨려라─1년 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김구 암살
"암살자들은 지시하는 사람이 시키면 필요에 따라 김구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고, 이승만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이들은 미군정이 해체되고 38선 이남에서 정부가 수립되면,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사람과 친분이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고, 곧 풀려날 뿐만 아니라 경제적 보상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정치가들의 암살범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출옥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안두희는 출옥 이후에도 호의호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장덕수의 암살범은 현역 경찰이면서도 자신의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채 암살을 저지를 수 있었다. 〈나(버치)는 김성수에 대한 암살 시도와 장덕수의 암살이 11월 30일 이승만의 늦은 동의의 결과였다고 보며, 김성수의 정당이 이승만으로부터 떠난다는 사실을 이승만이 알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장덕수가 이승만의 정책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가 없다.〉"(114)
"장덕수가 사라진 상황에서 이제 남은 지도자는 이승만과 김구밖에 없다." "그런데 김구가 친일경찰과 관료, 그리고 자산가들을 보호해줄 수 있었을까? 1948년 1월 22일 문서를 보면 (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된) 김구가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김석황의 편지를 〈이승만을 위하여〉 신문사에 공객한 것은 경기도 경찰청장 장택상이었다. 피의자의 유죄가 확정되기도 전에 수사 기밀을 언론에 유출하는 기술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이승만은) 김구의 정치적 권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희망 섞인 말을 했고, 더 이상 잠재적 중요성을 갖는 인물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김구가 자유로운 시민으로 계속 남아 있는 사실에 대한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이승만은 아직도 김구의 영향력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 이승만의 고귀한 지위에 위협이 되는 김구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 실행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안두희의 범행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미 1년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20-1)
12 미군정이 믿는 구석은 경찰, 경찰이 믿는 구석은 이승만
"친일경찰들의 문제는 크게 몇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로 중도파나 좌파 정치인들에 대한 탄압 문제였다. 여운형의 경호원들은 수시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여운형을 경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운형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를 심문하는 것 같았다." "김규식 역시 공정한 시스템이 보장되지 않는 한 그에게 (최고 지도자가 될) 기회가 없다는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 핵심에는 경찰 문제가 있었다." "둘째로 경찰들의 불법적인 행위였다. 특히 경찰의 힘을 이용한 (민간인들의 재산) 강탈이 문제가 되었다." "그래도 최소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세 번째 특징이었다. 바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경찰이 극우 테러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문제가 불거져도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버리지 않았다. 〈반탁운동 세력의 쿠데타 시도는 경찰이 군정에 충성하는 쪽으로 남음으로써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경찰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25, 127, 131)
13 '한민당 코트'라는 말은 왜 나왔을까
"미군정은 정치적 사안에 관계없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경찰밖에 없다고 믿었다. 1945년 12월 30일 군정청을 마비시켰던 반탁운동 세력의 총파업에 경찰만이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가장 충성심이 강한 경찰이 있기에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 운영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경찰에게는 이승만밖에 없었다. 송진우도, 여운형도, 장덕수도 모두 암살되었지만, 이들이 암살되기 전부터 경찰의 희망은 이승만이었다. 1952년과 1953년 유엔군 사령부가 부산에서 한국군을 동원한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제거하고자 하는 작전을 세울 때도 이승만은 이를 알고 있었다. 군 내에도 이승만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지만, 유엔군 사령관이 작전 통제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군을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이 믿을 수 있는 물리력은 경찰밖에 없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기간 동안 진정한 의미의 '경찰국가'가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132)
"1948년 5월 10일 선거에 한국민주당은 유일하게 정당으로서 참여했다. 해방 정국을 호령했던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독립당, 국민당 등은 개인적인 참여를 제외하고 정당 차원에서는 모두 불참했다. 한국민주당이 이 선거에서 프리미엄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미군정 역시 이를 기대했다.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을 미군정이 뼈아파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미군정 시기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다수당이 되면 미국에 우호적인 의원내각제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과는 한국민주당의 참패였다. 득표율은 12.17%에 그쳤으며 전체 200석 가운데 2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정당도 아니었던 독촉국민회가 55석, 무소속이 85석을 얻었다. 한민당은 유일한 정당이었고 다수당이었지만, 전체 의석에 20%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국회를 주도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한민당은 일제에 협력했으며, 동시에 자산가들이 그 중심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136-8)
# 한국민주당 코트 : 좋은 털을 목에 두른 코트를 말한다. 즉 부자들은 일반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14 이승만으로 기울어진 운동장─경찰과 청년단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것이 왜곡되었든, 아니면 강제적으로 주입되었든 간에 그 결과가 '근대'와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모습으로 현대 한국 사회의 기원을 형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제국의 한 모퉁이에서나마 식민지적 근대의 단맛을 느낄 수 있었던 대도시, 그리고 전통 시대의 모습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 지방 사이의 차이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미친 영향은 전혀 주목하지 않고 있다. 식민지 시기를 통해 근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과거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시장에 편입되었던 자본가와 상인들이 한편에 있었다면, 다른 한편에는 조선시대 이래로 계속되고 있었던 지주와 소작인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로 다른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사회경제적 지위와 살고 있는 지역이 달랐던 사람들이 원하고 있었던 사회는 같을 수 없었고, 이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141)
"당시 전체 인구의 80% 이상이 대도시가 아닌 농촌에 살고 있는 사회구조하에서 서구식 민주주의와 보통선거제도를 적용한다면, 결정적인 키를 쥐는 것은 비도시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 제헌헌법에서는 대통령중심제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특이한 형태의 정부 구조를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국회의원 선출을 좌우할 비도시 지역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큰 것이었다." "미군정의 지방 정세 보고에 의하면 1947년 가을이 되면 비도시 지역은 거의 이승만 지지 세력에게 장악되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기울어져가고 있던 한국의 운동장은 미군정에게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우방국 중 신생독립국가에 대해서 내용에 관계없이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강조하고 있었던 미국이었기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던 지방의 상황은 보통선거 실시라는 조건 하에서 미군정 역시 손쓸 수 없는 결정적 조건이었다."(142, 146-7)
15 서북청년단이 못마땅했던 미군정
"서북지역 자산가 계층과 기독교인들은 1946년 토지개혁을 기점으로 해서 남쪽으로 대거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반공 청년단을 조직했고, 자신들의 출신 지역을 조직의 이름에 넣었다. 주목되는 점은 서북청년단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지주가 아니라 아무런 물적, 지적 재산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1946년부터 1957년까지 이승만의 양아들로 불리울 정도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니콜스는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첩보 부대를 오류동에서 창설했다. 니콜스의 부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공산주의 조직들을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1947년 이후 남조선노동당 지도자들의 체포와 심문 그리고 고문, 1949년 한국군 내 공산주의자들의 숙청과 처형, 그리고 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스파이로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니콜스의 활동이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150, 155-6)
16 친일파의 악행을 고발한다
"1947년 9월 버치에게 건의서를 올린 권태석은, (충청도에서 벌어진) 테러는 좌익이 아니라 우익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우익이나 중립적인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 장로까지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친일 지주가 청년단을 통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에 대하여 경찰의 지원 혹은 묵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좌익 척결이라는 명분하에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박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이 좌익을 옹호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초래했다. 아마도 해방 직후 대부분 지역에서 이런 갈등과 테러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훗날 한국전쟁을 통해 강화된 '반공' 권력은 '부역자 청산'이라는 미명하에서 이들의 영향력을 공고히 만들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지역 사회는 재편되었고, 이는 결국 이승만이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 되었다."(167)
17 우익의 정치자금은 어디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들은 어떻게 자금을 마련했을까? 1차적인 자금의 재원은 미군정이었다. 특히 해방 직후 강력한 좌익 세력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운동장의 기울기를 우익 측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일정한 지원이 필요했다." "두 번째 자금 조달 방식은 반半강제로 이루어지는 모금이었다. 이는 특히 1946년 말 이승만의 미국 방문 시 이루어졌다. 1947년 2월에 작성된 「이승만 펀드」 를 조사한 미군정의 결론은 모금이 광범위하게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경찰이나 청년단과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셋째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자산(적산)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적산은 1948년 미군정으로부터 한국 정부로 이양되었다." "새롭게 수립되는 정부의 재정과 재건에 필요한 자산들은 이렇게 정치자금으로 전환되었고 불법 정치자금의 부담은 모두 일반 국민들에게 전가되었다. 일반 국민들은 그만큼 비싼 가격에 물품을 사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들은 봉이었다."(169, 173-5)
18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
"미군정은 1947년 지방을 조사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여론조사를 했다. 〈요즘 관심사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답변한 것은 〈가족을 위해 어떻게 음식을 확보할 것인가?〉(65명)였다." "절대적으로 쌀 생산량이 부족하고,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던 비료와 석탄이 끊긴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음식의 확보'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는 것은 과연 해방이 한국인들에게 가져다 준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한다." "이런 상황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한 북한에 대한 부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토지개혁 이후에 곡물 세금이 70%에 달한다는 것, 반탁운동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문, 김일성의 암살 등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소문과 관련된 관심도 있었지만, 38선 이남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은 토지개혁이었다. 일제강점기와는 다른 무엇을 희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구체적 내용을 떠나 북한의 개혁에 대한 소식은 마음을 들뜨게 했을 것이다."(178-9)
19 미군정이 발간한 『당신과 한국』
"미군정에서 발간한 짧은 한국 소개 책자인 『당신과 한국』은 미군정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이 책자에 콜레라나 홍수 등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1946년 7월 이후에 발간되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만약 한국에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미군정의 통치가 실패한 것을 자인하게 되기 때문에 모두 언급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책임이 미군정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기부터 계속되어 온 조선 자체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미 본토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의 소개말은 한국인들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표시한 것이었다. 일부 오리엔탈리즘적 인식도 보이지만, 미군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감정에 대한 그의 평가 역시 솔직한 것이었다. 해방된 공간에서 다시 외국군의 지배를 받고 살면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던 한국인들. 그러나 그들에게도 하나의 빛이 날아들었다. 서윤복의 보스턴 마라톤 우승 소식이었다."(191)
20 해방 후 최초의 복권, 올림픽 복권
"한국인들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 또 하나의 이벤트는 1948년의 런던 올림픽이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두 차례나 올림픽이 열리지 못했다. 게다가 한국인들에게는 처음으로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기회였다. 몇 종목에 참가하고 몇 등을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독립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다는 낭보가 1946년 12월 미국으로부터 날아들었고, 다음해 6월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 조선체육회를 승인했다. 반면 1940년 올림픽을 개최하고자 했던 일본은 독일과 함께 1948년 런던 올림픽에는 초대받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이 1940년 올림픽에 사용하려고 마련했던 차를 한국의 올림픽 선수단이 해방 이후 사용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런던 올림픽을 소개하는 기사에는 '후원권'이라는 이름으로 발간된 복권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1등 당첨금 1백만 엔은 당시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192-7)
21 장군의 아들인가, 테러리스트인가
"버치가 김두한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버치가 받은, 김두한의 활동과 관련된 보고서는 모두 부정적인 것이었다. 버치는 김두한과 그의 그룹들이 러치 군정장관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법부와 경찰에 의해 비호받고 있다고 느꼈으며, 이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버치는 김두한을 체포함으로써 미국이 법과 질서를 지키는 나라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지 사령관에게 미군정이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해서 정부로서의 권위를 세우기를 희망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번번이 물거품이 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김두한은 풀려났다." "버치가 김두한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김두한이 여운형 암살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 만들어진 「경찰과 여운형」이라는 문서에 김두한 관련 내용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203, 207-8)
22 여운형의 죽음과 친일 경찰
"여운형이 암살된 직후 버치는 암살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메모 중에는 김구를 왜 체포하지 않는가라는 메모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버치는 수사가 진행되면서 곧 생각을 바꾸었다. 배후는 김구가 아니었다. 경찰은 암살이 발생할 때마다 김구가 배후라고 주장했지만, 실상 문제는 당시의 경찰이었다. 그들은 모든 혐의의 화살을 김구에게 향하도록 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미소공동위원회나 좌우합작위원회가 모두 미군정의 〈쇼〉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찍부터 소련과의 타협보다 미국에 우호적인 세력을 중심으로 분단 정부를 세우려고 한 것이 미국의 정책이요, 미군정의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치의 문서 속에 나타나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대처는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단지 하나의 쇼가 아니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있는 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해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미군정의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214, 217)
23 미군정이 만들려고 했던 정부─해방 직후 최초의 헌법 초안
"1947년 6월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조치가 미군과 소련군 사이에 거의 합의에 다다랐다. 조선임시정부에 참여해야 할 정당과 사회단체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냈으며,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조선임시정부의 구성을 위한 법령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7년에 미군정이 만든 임시조선정부의 '헌장(charter)' 초안에는 비록 신탁통치 또는 후견 제도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민주적 통합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헌장의 초안에는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 내용의 기초가 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입법부에 의한 행정부의 권한 견제, 사법권의 독립, 지방자치제도 등 민주적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이후 진행된 반탁운동과 정치 공작, 그리고 수많은 테러 행위들과 여운형의 암살은 한국인들 스스로가 자기들에게 다가온 기회를 차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219, 227-8)
24 농지개혁으로 혁명을 막아라
"미군정이 농지개혁을 위한 방안을 마련한 것은 1947년 12월이다. 그것도 전체 농지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일본인 소유 토지에 국한되었다. 버치는 이러한 농지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 원칙을 제시했다. 하나는 농지개혁의 원칙은 '국가의 권력 및 적절한 법적 절차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개념'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지문제로 인한 광범위한 빈곤이 국가의 안정성을 위협할 경우 국가는 사적 소유권의 원칙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배상금을 지급하면서 농지를 수용하고 재분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농민들이 농지를 소유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적 요소이며, 한국 사회에서의 농지개혁을 위한 노력은 미국의 '의무'라고 못 박았다. 미군정 통치하의 남한을 안정화하고, 미군정이 떠나더라도 공산주의 혁명을 막기 위해서는 농지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버치의 생각이었고, 이 생각은 결국 1950년 농지개혁을 통해 실현되었다."(233-4)
25 버치와 한국민주당의 갈등, 그리고 내각책임제의 실패
"미군정 통치 과정은 '통역 정치'라는 말이 나타날 정도로 통역관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또한 미군정의 중요한 보직에 임명된 한국인들은 대부분 영어권 국가의 대학에 유학한 경험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었다. 그들만이 미군정의 중요 인사와 통역없이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초기 군정청에서 중요한 문제를 통역했던 이묘묵은 절대 권력자로 보였으며, 조병욱의 경무부장 임명도 이묘묵이 선교사 설립 학교 출신이자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했던 경험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보수 우익 내에서 라이벌이었던 이승만과 김구의 갈등은 시작부터 게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유학한 이후 1945년까지 미국에서 살았고, 김구는 그나마 정규 과정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말 그대로 조선의 독립만을 위해서 살았던 인물이었다. 버치가 김규식이나 여운형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영어 실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239)
26 버치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 김규식
"미군정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사실은 김규식이 임시정부 소속으로 보수 우익 인사들과 가까운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반탁운동에 참여하지 않았고 여운형과 같은 온건 좌파 정치인들과도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소련군도 용납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찬성하면서도 주로 좌익 계열의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참여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으로 약칭)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규식은 반탁운동에 반대하면서도 오히려 반탁운동의 리더들이 참여하고 있는 민주의원의 부의장이었다. 민주의원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하여 미군정이 만든 기관이었고, 민전은 좌익이 이에 대응해서 만든 기관이었다. 1946년 여름 이후 김규식은 미군정이 민주의원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좌우합작위원회와 입법의원을 주도하기도 했다.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했던 여운형이 입법의원 참가를 거부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247)
"일찍이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좌우 합작을 위해 민족유일당 운동에 참여했고, 1942년 임시정부에 합류하면서 온건 우파의 핵심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1946년 6월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과 김구, 그리고 김규식이 모인 자리에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뒤로 물러서서 김규식을 지원할 것을 직접 요청했다." "문제는 김규식이 임시정부 내에서 부주석으로서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었지만, 반탁운동에 개입하지 않았고 임시정부 내에서 그와 함께했던 정치인들 중 일부가 민전에 참여했기 때문에 보수 우익 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은 45명의 관선 입법의원에 김규식을 지지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선출하여 김규식의 지도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버치의 문서를 보면 미군정 정치고문단이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들을 선택하기 위해 고심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문제는 나머지 45명의 민선의원 중 대부분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채워졌다는 점이었다."(248-9)
27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실질적인 권력인 미군정과 대립했지만, 이승만은 미군정이 한반도에 영원히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미국에 있었던 이승만은 미국의 정책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정부가 수립될 경우 자신이 권력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미국까지 날아가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던 미군정을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규식이 1948년이 선거에 참여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직은 이승만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만약 김규식이 나섰다면 그는 전쟁이 발발하기도 전에 암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규식에게 남북협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948년 남북 지도자회담이 이승만처럼 북진통일을 추진했던 사람에게는 마지막 시도가 되겠지만, 김규식처럼 평화통일을 희구했던 사람들에게는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는 출발점이었다."(258-9, 264)
28 버치가 평가한 미군정과 해방 한국
"전체적으로 보면 버치가 소장하고 있었던 문서들, 그리고 한국을 떠난 이후 버치에 의해 작성된 편지들을 통해 보면, 미국 본국의 소극적 지원과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미군정의 정책, 한국인들의 태도, 특히 미국을 지지할 것으로 예상했던 보수 우익 정치인들의 비협조, 그리고 러시아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과 선동이 미군정 실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의 중도파 정치인들에게 그는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버치는 그들에게 사무실과 집을 제공해주었고, 경찰과의 분쟁이 발생하면 해결사 역할을 했다. 그리고 친일 문제와 극우 세력의 테러에 대해 함께 분노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버치도 좌우합작위원회가 실패하고 이승만이 정권을 잡자 결국 이승만에게 항복했다. 버치는 한국을 떠나기 직전 이승만을 만났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초보 정치 전문가로서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이승만은 그러한 버치의 태도에 만족해했다.〉"(269, 274-5)
29 현재 한국 사회의 기원을 찾아서─미군정기의 역사
"한국 현대사의 전 과정에서 가짜 뉴스는 계속되어 왔다. 해방 후 한국 사회는 독립운동을 한 진영과 친일 세력 간의 대립 구도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으로 왜곡한 가짜 뉴스들은 이 구도를 좌우 간의 대립 구도로 만들었다. 한국의 식민지화와 일본의 불의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반탁운동을 하는 애국적 우익으로 꾸며졌다. 삼상회의 결정을 찬성한 세력은 소련의 속국이 되기를 원하는 매국좌파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왜곡된 구도 속에서 반독립 세력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우익으로서 한반도의 남쪽에서 주류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합리적인 정치인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기득권 주류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스스로가 기득권자인 언론은 합리적인 정치인들을 빨갱이는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핑크'로 묘사했다. 아니면 철저하게 그들을 외면함으로써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했다. 이도 저도 안 되면 결국 테러라는 최후의 수단이 등장했다."(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