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역사 3 - 전란의 시대 : 고려후기편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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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이 죽던 1219년 봄, 20만의 군대가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방, 알타이 산맥 사면에 위치한 이르티슈 강 상류에 집결했다."(108) 징기스칸은 "타타르 정복전을 시작하기 전에도 무려 7년 동안 꼼짝 않고 군대를 조련"(112)하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부족간의 전투에 길들여져 있던 몽골군을, 국가 단위의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전략적인 군대로 탈바꿈시켰다. 반면 고려는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연이어 겪으면서 서경 세력을 일소하여, 북계 방어의 중심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1225년 고려 국경 부근에서 몽골 사신 저고여가 살해됐지만, 고려는 어떠한 해명도 없이 태평한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국제 정세에 둔감한 모습마저 보였다. 당시 몽골은 서방 정벌과 금나라, 남송 공략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징기스칸이 사망한 "1227년에는 모든 군대가 회군하여,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 내부 정비에 신경쓰느라 고려에게 아무런 압박을 가하지 않고 있었다.(118) 그러나 징기스칸의 셋째 아들 "우구데이가 즉위하면서 몽골은 서방원정을 중단하고 중국으로 시선을 돌린다."(120)


몽골은 "갈수기나 강이 언 후에 도강하는 전례를 깨고 1231년(고종 18) 8월 아직 압록강의 물이 창창할 때에 도강을 하더니 바로 의주를 포위했다."(117) 속도와 기동력, 생존력이 탁월한 몽골군은 부대를 나누어 사방을 공략하면서 적을 분산시키고, "흩어진 적보다 빠르게 집결하여 적의 머리와 심장을 치는"(125) 전술을 구사하였다. 몽골군은 그들의 명성에 걸맞게 "한 달 만에 평안도 지역을 거의 석권하고, 일부는 황해도까지 내려오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다."(122) 안주성 전투에서 정면 대결에 크게 패한 고려군은 수성전에 주력하면서 "다시는 몽골군과 정면대결을 펼치지 않았다."(131)


12월 1일 개경이 포위되고, 1232년 1월 강화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항복할 마음이 없었던 최이는 "강화회담을 추진할 때부터 다음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147) 그것은 항구적인 방어가 가능한 요새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고, 전국을 비우는 '청야전술'이었다. 그가 선택한 강화도는 육지와 가까운 섬이자 "개경 사람들이 이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고, "분지처럼 외곽이 산으로 감겨 있는" 천혜의 방어지였다.(152) 또한 최씨 가문의 사병들이 육지를 지키고, 수군이 바닷길을 장악했으므로 "전국이 분탕되어도 강화는 안전했다."(155)


최씨 무신정권은 이기기 위한 전략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백성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며, 정권 유지에 급급했다. 따라서 대몽골전쟁은 "몽골군과 전선을 형성하고 싸운 전쟁이 아니라 몽골군이 고려 땅을 짓밟고 돌아다니는 전쟁이었다."(159) 간혹 야별초가 몽골군을 물리친 사례가 있었지만, 이들의 파견은 "국가가 행정력과 지배력을 놓지 않으려는 시도였다." 정부는 몽골군이 물러난 "평화기(?)에 세금과 주민에 대한 관리권까지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164)


전황이 지지부진하자 몽골은 "고려를 압박해서 빠른 시일 내에 항복을 받아내기로 방침을 정하고 (1253년부터) 7년 간 한 해도 쉬지 않고 고려를 침공한다. 약탈도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전략적 타격으로 바뀐다."(196) 1258년 동북면(함경도)이 반란을 일으켜 몽골에 투항하고 강화에 대한 공략수위가 높아지자, 내분이 일어나 최씨정권의 마지막 계승자인 최의가 살해되고, 원종이 즉위한다. 원종은 무신집단의 위세에 눌려 폐위와 복권을 거듭했지만 몽골군의 도움으로 1270년 5월 무신정권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개경 환도를 선포하였다.(205-6)


고려 왕조 내내 지방의 향리층은 나름의 분업체계와 위계질서 아래 향촌사회의 치안을 담당하고, 전시에 지방군의 장교로 변신해 활약하는 체제 수호 집단이었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들이 마을마다 땅과 노비를 빼앗고 대토지를 점유하자, "지배층의 제일 하단을 형성하는 무사, 군인층의 경제적 기반이 먼저 와해된다."(257) 지방사회가 사족과 향리로 분화되고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고려군의 장기인 수성전이 부실해졌고, 이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공에 속절없이 국토를 유린당하는 계기가 된다.


추수철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왜구는,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실어나르는 조운선을 강탈하기 위해 "아예 개경의 입구인 예성강 하구에 자리를 잡았다."(301) "1350년의 간지를 따서 '경인庚寅의 왜구'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동아시아 전체"를 휘젓고 다녔으며, 대만을 점령하고,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였다.(308) "1374년(공민왕 23, 우왕 원년) 4월 350척의 대선단이 경상도 합포(마산 일대)로 상륙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왜구는 내륙으로 거침없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가히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할 만큼 위세가 대단하였다.(309)


1376년에는 전남의 중심도시인 영산과 나주가 약탈당하고, 전주마저 함락되었다. 1377년 3월에는 수군증강계획에 따라 건조 중이던 병선 50척이 왜구의 기습을 받아 소실된다. 선단수에서 현저하게 밀리던 고려 수군을 구원한 것은 최무선의 화약이었다. 1380년 왜구는 500척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이끌고 진포에 진출하더니 "배를 묶어 수상요새를 구축하고 내륙으로 들어갔다." 최무선의 화통군은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던 왜선을 화기를 사용하여 불살라버렸다. "(근 30년 만에) 해전의 양상이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341)


당시의 화약은 "염초, 유황, 목탄을 섞어서 점토처럼 이긴 것"으로, 불을 붙여서 한참 태우다가 일정한 온도가 되면 폭발하는 원리였다. 따라서 화통을 사용하려면 "먼저 갈고리로 배를 붙잡고 철질려를 던져 왜구가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적절히 시간을 맞춰 화통을 왜선으로 던져야 했다.(353) 1375년 화통도감을 설치한 최무선과 1381년 해도원수로 임명되어 강력한 수군을 조련한 정지의 결합은 관음포 해전에서 화약무기의 파괴력을 극대화시킨 최상의 선택이었다. 이후로 "고려 수군과 왜구의 전력은 1:2에서 2:1로 역전되었다."(354) 


왜구와의 전투는 1419년(세종 1) 대마도정벌 때까지 줄곧 이어졌지만, 14~15세기의 집권층은 "일본이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시작할 만큼 성장했음을 깨달았다."(356) 이 깨달음은 조선까지 이어져서 대대적인 수군 창설과 "일본과의 전면전을 전제로 한 대규모 군사개혁"으로 이어진다. "편제상으로 육군뿐이던 군제가 육군과 수군으로 이군화되고, 수군지휘부와 수군기지가 전국적으로 설치되었다."(357) 대륙과 한반도의 질기고 오랜 인연이 해양에서 불어오는 태풍과의 대결로 넘어가는 전환기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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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역사 2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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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2년(태조 25) 거란은 고려와 친선과 우호를 도모하기 위해 30여 명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은 거란이 "동족인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국가이므로 이웃나라로 대접할 수 없다"(13)고 말하면서 사절단을 섬에 유배하고 낙타 50필은 만부교 아래 묶어서 굶겨죽였다. 왕건이 거란에 대해 강경일변도로 나간 이유는 후삼국 시절 발해 지배층이 대규모 유민을 이끌고 남하하여 자신의 정권 수립과 안정에 지대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탈하면, 당장 "북쪽 국경이 동요하고, 서북지방과 서경이 동요"(19)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은 고려라는 신생 국가의 운명의 추를 바꾸어 놓을 만큼 거대하고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거란과 여진, 만주족에 이르기까지 "소위 동이족에 속하는 민족들이 중원을 넘볼 때마다, 먼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해동을 복속시켜 놓는 일이었다. 그들이 중국을 향해 서진하였을 때 배후를 찔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20)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단호히 맞서는 자세는 한반도에 자리잡은 국가의 숙명이지만, 거기에는 철저히 다져놓은 내실과 사전에 대비된 시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거란은 926년에 발해를 멸망시키고, 다음 해에는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를 차지하였다. 그들은 "지금의 북경지방을 중심으로 하북성 북부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하면서 "농경지역을 확보하고 한족 관리와 문화를 흡수"(22)한 대국으로 발돋움한다. 고려는 통일 후 47년 만인 "982년(성종 2)에 겨우 전국에서 12개의 대읍을 선정해 목사를 파견"(50)할 정도로 중앙의 장악력이 미비한 상태였다. 이러한 힘의 우열을 간과한 결과 초래된 "거란 전쟁은 한때 고려의 생명을 위협했고, 고려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길고도 치열한 전쟁이었다."(13) 


993년(성종 12) 8월, 소손경군이 기습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는 곧바로 "전국에 병마제정사를 보내 병력을 모집했고, 10월에야 겨우 군대를 편성했다."(89) 그러나 병사를 채우는 데 급급했던 조정은 주력을 동원한 방어전은 기획하지도 못한 채 항복협상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 때 거란의 공세가 고려와 여진의 동맹을 차단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서희는 강화회담에서 "압록강을 경계로 거란과 고려가 동시에 여진족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이 지역을 나누어 점령하자"는 제안을 내놓아 위기를 넘기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다.


994년(성종 13)부터 거란과 고려는 여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누구보다도 이 지역(강동 6주)의 정략적 가치를 잘 알았던 서희는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통로 상의 요지를 점령"하고 성을 쌓아 북방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106) 1005년 고려에서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목종이 쫓겨나고 현종이 즉위했다."(111) 송과 '전연의 맹'을 맺어 형님의 나라로 올라선 거란은 세력 다툼에서 밀려나 외부의 협력자를 원하는 고려 지배층의 분열과 협조를 기대한 듯 "사신을 보내 미리 침공 통보를 하고" 정벌에 나섰다.


거란은 11월 25일 통주성에서 강조의 주력부대를 섬멸하고, 12월 6일 곽주성마저 점령했다.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던 서경세력이 일찌감치 항복의사를 내비치자, 궁지에 몰린 현종이 강화를 청하려는 찰나, "극적으로 탁사정이 이끄는 동북군 본대가 서경에 도착했다."(146) 서경이 거란군의 치열한 공격을 받고 있던 12월 16일, 은밀히 흥화진의 포위망을 빠져나온 양규와 700명의 결사대가 곽주성 탈환 작전을 전격적으로 성공시킨다. "하룻밤 사이에 거란군은 압록강과 대동강 사이에 유일하게 마련해 두었던 중간기지를 상실했다."(162)


거란군은 "놀라운 기동력과 세련된 부대 운영으로" 전투에서 여러차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압록강 이남에서 단 한 개의 성도 자신의 영토로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거란의 침공과 (국왕 반대파인) 강조의 사망은 현종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낳았다."(190) 개경을 함락했지만 보급선이 단절된 거란이 철병하자 현종은 국가 행정망 조직에 전념한다. 그는 "거란의 3차 침입이 있던 1018년 무렵에는 전국의 행정망을 경京 4개, 목牧 8개, 부府 15개, 군 129개, 현 335개, 진鎭 29개로 편제"(201)하여 군현제의 기본 골격을 만들어냈다. 


어느 편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어느 편도 물러서지 않는 "전쟁을 끝내려면 획기적인 전기가 필요했다."(211) 소배압은 지루한 공방전을 끝내기 위해 개경 직공 작전을 구상하고, 1018년 9월부터 준비에 착수했다. 소배압 부대는 이번에도 과감한 기동력으로 개경 입구에 이르는 데 성공하지만, 현종이 도주를 택하지 않고 개경 사수를 천명하자 난관에 봉착한다. 1019년 2월 2일 거란군과 고려군은 귀주성 앞에서 일대회전을 벌인다. 주력부대가 공방을 벌일 때 김종현의 1만 병력이 거란군의 등 뒤로 연결된 태천-귀주를 잇는 길에서 나타났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포착한 고려의 병사들은 20년을 지속한 긴 전쟁과 고통의 종식을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232) 앞뒤로 협공 당한 "거란군 사상자와 포로가 수만 명이고,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 명이었다."(234) 처참한 패배를 당한 거란은 "고려와 여진을 평정하고 중원을 침공한다는 전략을 수정"하여 지금까지의 승리에 만족하기로 했다. "개경으로 귀환한 강감찬과 고려병사들은 거국적인 환영과 환대를 받았다."(235) 그러나 현실에 안주한 거란은 "제국을 형성해온 목표와 에너지를 잃어버리더니, 1122년 허무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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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역사 - 삼국편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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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2,3세기까지도 삼국은 부족연맹 사회였다.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은 각기 자신의 군대를 끌고 집결하고, 그들의 서열에 따라 편제되었다."(20) 이런 군대는 국지전에서 강한 단결력을 발휘하지만, 부족 간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국가 규모의 전투에서는 뚜렷한 한계를 노출한다. 삼국은 군의 편제와 전술을 일원화하기 위해 신분제도와 경제 체제를 포함한 전체 사회의 개조작업을 벌였다. 한반도의 패권이 걸린 임진강, 한강 유역을 놓고 벌어진 "고구려(고국원왕)와 백제(근초고왕)의 공방전은 요동을 두고 벌어진 중국과 고구려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삼국 간에 피할 수 없는 대립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렸다.(80) 


소수림왕의 개혁을 물려받은 광개토대왕이 백제의 북쪽 국경인 예성강으로 치고 내려오자 위기에 몰린 "백제와 신라는 왕실 간의 결혼으로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저항했다." 절대 우위의 고구려가 처한 어려움은 한반도가 너무나 "좁은 반도인데다가 동쪽 땅의 1/3은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 어느 쪽을 치든지 충청도를 경유"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백제를 공격하면 신라군에게, 신라를 공격하면 백제군에게 보급로가 노출되는 것이다."(97) 고구려는 "광개토왕의 대정복전과 장수왕의 (백제) 위례성 함락"이라는 기념비적 성과를 거뒀지만, 고구려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수,당과의 치열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하는 불운에 시달렸다.


거센 공격에 시달리면서도, 국가 체제를 정비한 백제(성왕)는 서기 551년 한성과 주변의 5군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한성이 백제에게 점령되자 한강 이남에 진출했던 고구려군"의 배후가 위험에 노출되었고, 결국 신라의 북진을 차단하기 위해 죽령과 조령 일대에 배치한 부대를 철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땅은 백제의 소유가 되지 못했다." 곧바로 소백산맥을 넘어 진격한 신라군이 "손쉽게 죽령 이북의 10개 군을 차지"하고 넘어와, 한강 하구에서 "성왕을 살해함으로써 신라와 백제는 단단히 원수가 되고 말았다." 백제는 "한강을 되찾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를 쳐서 괴산, 보은, 충주 지역을 빼앗아야 한다는 피맺힌 교훈을 배웠다."(125-6)


"고구려가 수와의 전쟁에 돌입하자 백제는 신라에게 맹공을 가했다. 수 양제의 침공이 있었던 진평양 33년(611년)에 요충이던 가잠성(위치 미상)이 백제 수중에 떨어졌고, 46년(624년)에는 함양 등지의 여러 성이 다시 백제에게 넘어갔다."(126) 그러나 신라는 전투에서 더 많이 패하면서도 한강 유역을 지켜냈다. 그 이유는 고구려가 요동에 발이 묶여 남방공략에 전념하지 못하는 사이, 신라는 남한강 수로를 통해 "어떤 나라보다도 한강 전선에 신속하게 병력과 물자를 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131) 


7세기는 삼국 항쟁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선덕왕 7년(638년)에는 고구려의 남하 거점인 고량포 지역을 방어하는 칠중성(파주군 적성면)이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 신라로서는 "북쪽 대문이 열린 셈이었다."(233) 위기의 때를 맞이하여 신라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진골 내부를 장악한 진골전통과 대원신통, 가야파 세 세력이 김춘추를 축으로 하는 결혼 동맹을 맺어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들은 고구려와 백제의 대공세를 자신들의 힘으로 버틸 수 없음을 자각하고, "적극적으로 대당외교에 매달렸다. 그리고 2년 후에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이 시작된다."(248)


고구려는 수의 맹공을 견뎌냈지만, 대륙을 재통일한 당은 "고구려를 그대로 놓아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180) 5호 16국 시절 대륙을 교란한 이민족 왕조는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처럼 부족체제의 작은 집단에서 출발"한 세력들이다.(230) 흩어져 있던 북방 유목민이 결집하면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중국 왕조에게, 요동방어선을 장벽으로 삼아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강국 고구려는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서 평양성 전투의 영웅이던 영류왕(건무)을 토막쳐서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자, 644년 당은 이를 구실 삼아 고구려 원정에 나섰고, 고구려를 거의 패망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고구려 공략에 실패하자 당은 신라 무열왕 7년(660년)에 전격적으로 백제 파병을 결정하고,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대군을 한강 유역으로 보낸다. "신라도 여기에 맞추어 경주와 한산주의 군대 5만을 동원했다."(259) 안타깝게도 "백제에겐 요동방어망에 비견할 만한 요새지대가 없었다. 특히 당군의 진격로였던 서해안에서 부여로 진출하는 길목은 잘하면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낮은 평원지대였다.(272) 예상 외의 위기는 시간을 다투는 싸움이었다. 불운하게도 일본과 지방의 구원군이 도달하기도 전에 8월 2일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무너졌고, 소정방은 "9월 3일 의자왕 일행을 데리고 당으로 귀국했다."(270)


665년 8월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한 "(신라의) 문무왕과 (당의) 유인궤는 공주 취리산에서 만나 백제 평정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고 양국 간에 맹약을 맺었다."(286) 이로써 신라가 한강 이남의 패권을 확고히 거머쥐게 되었다.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세 아들 간에 권력다툼이 벌어지는데, "이것은 형제간의 분열이 아니라 고구려 지배층의 분열이었다."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맏아들 남생이 "당에 망명할 때 국내성 이하 6개 성, 10만 호가 그의 세력권 아래 있었고, 목저성 등 부여쪽 3개성이 그의 편에 붙었다."(287)


공식적으로 고구려는 668년에 망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흡수하여 물자와 병력 부족을 만회한 신라군은 "백제에 주둔했던 유인궤와 당의 영웅 설인귀의 군대를 혈전 끝에 격퇴하여 어쩌면 평양지역의 총독이 되기를 원했던 설인귀의 마지막 꿈을 좌절시켰다. 동이(東夷)의 땅을 완전히 차지하려면 또다시 엄청난 대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당은 신라와 곧 화해하였다." 이민족 군대와 연합했다는 사실 때문에 삼국통일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200년에 걸친 지독한 갈등의 최대 희생자는 백성들이었다. 지친 백성들을 위하여 100년 동안의 평화가 그들에게 주어졌다."(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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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기정 옮김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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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1937년 6월 4일 보천보(普天堡) 공격으로 세간에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보천보는 호수 308호에 경관 5인이 상주하는 산중의 작은 마을"로서, 이 공격은 경관 2명을 사살하는데 그쳤지만, "이웃에 있는 인구 1만 3,000명의 혜산진"을 통해 전국에 이름을 알리는 뛰어난 선전효과를 거두었다.(31) 최용건, 김책, 김일성은 소련이 조직한 항일부대인 88특별여단의 조선인 최고위 지도자들로서, 최용건과 김책은 나이와 투쟁 경력에서 김일성에 한참 앞섰지만, "조선으로 진공작전을 펼친 김일성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41)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조선에 우호적인 정권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리자, "국내계를 중심으로 소련계와 만주파 등이 결집하여 북조선의 공산당 중앙 조직이 만들어졌다."(52) 이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를 기점으로, 박헌영이 장악하고 있는 서울 중앙으로부터 독립을 결심하고,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했다. 공산당 선전부는 김일성이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누가 정말 오늘 조선민주혁명의 지도자인가를 증명한다"(61)고 적었으며, <김일성 장군>이라는 소책자를 간행하여 일찌감치 개인숭배 작업에 착수했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에게 군사적으로 실패를 안겨주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정권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53년 1월 "박헌영, 이승엽 등 남로당계가 해방 전의 전향과 해방 후의 배신을 추궁당해 체포"되었고, 소련계 지도자인 "허가이는 정전협정 성립 직전인 7월 2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민들이 정전협정 조인(1953.7.27)으로 "B-29의 공습이 끝났다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동안 "8월 3일 이승엽 등 남로당계 12명은 미국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그중 10명에게 사형판결이 내려졌다."(105)


전후 북한 정권이 야심차게 벌인 농촌 부흥 운동은, "수단을 가리지 않고 곡물 매입계획을 달성"하는데 매달린 나머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김일성은 곡물 매입 실패를 "다른 나라 당들의 이론과 투쟁경험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인"(114) 탓으로 돌리면서, 자주성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가 주장한 '우리 식 체제'는 "모든 노동자는 당의 요청에 대답하여, 천리마의 속도로 사회주의화를 목표로 전진"(137)하라는 '천리마 운동'으로 발현된다. 당과 국가체제를 동일시하는 북한의 국가사회주의체제가 성립된 순간이었다.


1967년 김일성은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공고히 하면서, "베트남전쟁에 호응하여 남조선혁명을 조직하고, 필요하다면 다시 혁명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전인민이 항일유격대원의 정신"으로 무장할 것을 촉구했다.(161) 이로써 항일유격대원을 모범삼아 "김일성이 유격대 사령관이며 전인민이 유격대 대원"인 '유격대국가' 이념이 선포된다. 그러나 기대했던 남조선의 "혁명적 대사변"은 일어나지 않았고, 군 최고위급 간부들이 실패한 작전에 책임을 지고 전원 해임되었다.(173)


1970년대 들어 북한은 '유격대국가'에서 '극장국가'로 변모한다. 극장국가란 "권력이 의례를 통해 과시되면서 연극화하는 국가"를 말하며, 그 역할을 담당한 것은 "수령의 아들 김정일"이었다.(181) 1972년 김정일은 영화 <꽃 파는 처녀>의 제작을 지도하고, "조선혁명박물관 건립과 그 앞의 광장에 거대한 김일성 동상을 세우는 작업을 주도했다."(183) 여기에 더해 김정일은 1974년부터 "경제건설의 방식으로 '속도전'을 주창"하고, 생산현장에서 "3대혁명적기쟁취운동을 조직하도록 지도했다."(188) "혁명적 대사변"이라는 목표가 사라지자 국가를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체제로 변모시킨 것이다.


경제위기는 오일쇼크와 대외 차관 감소라는 악재와 중첩되어 커져만 갔다. 여기에 안이한 자연개조사업으로 일관하던 주체농법의 실패는 돌격 일변도의 체제 구조에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위기 타개책은 또다시 정신 무장이었다. 1980년 전후로 "새롭게 '가족국가론'이 제창되어, 유격대국가라는 건물 위에 간판처럼 내걸렸다." 여기서 중심이 된 것은 "어머니 당"이라는 새로운 용어였다. "수령이 아버지이고, 당이 어머니이며, 대중은 그 자식"(198)이라는 가족주의 국가디자인은 1990년대 들어 '충효'를 강조하는 '전통적 국가론'으로 나아간다.


1989년 동유럽 붕괴와 1991년 소련 연방 해체는 내부 동력을 상실한 북한 체제가 자생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제거했다. 이제 북한은 "핵카드를 구사하여 미국을 교섭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벼랑끝전략으로 돌진해갔다."(231) 여기에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의 사망은 영생불멸하는 '사회적, 정치적 생명체'의 "뇌수"인 수령 직책 또한 영생불멸이며, 아무도 이를 계승할 수 없다는 논리적 모순마저 야기했다. 인민들 사이에서도 "김일성은 영원히 북한의 당과 혁명의 수령이라는 감정이 고조되었다."(242)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고민하던 김정일은 자신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라는 사실로부터 출발"(244)하여 "삶의 순간순간을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과 효성으로 빛내이는 참다운 진정한 충신, 지극한 효자"(233)가 되자는 구호를 내세워 내부 결속을 다졌다. 김정일은 1995년 대규모 수해로 극심한 식량위기가 닥쳐오자 '고난의 행군' 정신을 천명하면서, 인민군대를 "우리식 사회주의의 기둥이며 혁명의 대학"(255)이라고 규정하여, 군을 당 앞에 내세우는 '선군정치'로 위기를 정면돌파해 나아갔다.  


2000년 들어 북한은 푸틴의 러시아와 관계를 정상화하고, 남북정상회담과 북미대화를 성사시켰으며, 2002년에는 북일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남한과는 국지적 도발에 따른 긴장 고조로, 일본과는 납치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미국과는 부시정부의 강경책과 이라크 침공으로, 신통치 않은 결과만을 낳았다. 북한은 점점 더 핵무기에 의존하게 되었고,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은 "자신이 갖고 있던 국방위원회 위원장, 당 총비서,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최고 군사령관이라는 네 가지 직책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김정은에게 물려주지 않은 채" 심근경색으로 사망한다.(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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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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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1941년 5월 19일 "중국 남부의 칭시에 모여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을 결성"한다.(26) 호치민의 게릴라 부대는 2차세계대전의 전세가 기울던 1945년 5월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여,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인도차이나를 재장악하지 못하도록" 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아갔다.(32) 그러나 포츠담회담에서 "영국군이 16도선까지 베트남 남부를 점령하고, 영불 합의에 따라 이 지역의 통치권이 프랑스로 넘어가면서"(43) 식민지 베트남의 망령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드골은 프랑스가 라오스를 재점령한 후 "식민지가 없다면 프랑스는 강대국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55)고 말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주권 행사를 천명했고,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의 효과적인 조직화와 재무장"(61)을 위해 유럽과 연합하는 데 동의했다. 이에 맞서 "1950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이 호치민을 베트남의 유일한 지도자로 인정"하고, "소련도 이에 뒤질세라 재빠르게 동일한 조치를 취"하자, 미국 역시 남베트남의 사이공 정부를 인정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의 열기가 타올랐다.(66)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북베트남의 지압 장군은 프랑스에 대한 대공세에 나서 디엔비엔푸(1954.5.7)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공산주의 세력 차단에 집착했던 미국은, 호치민의 희망을 저버리고 고 딘 디엠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 프랑스와의 임무 교대를 자원한다. "디엠은 권력을 가졌던 마지막 민간인이었다."(152) 디엠정권의 부패와 학정에 실망한 미국이 군사쿠데타(1963.11.2)를 묵인하자, 남베트남은 "이후 20개월 동안 10번의 정권 교체를 경험"하면서 허수아비로 전락했다.(153)


1964년 가을 무렵부터 북베트남은 "정규군을 호치민루트를 통해 남파하기 시작했다." 케네디의 암살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권력을 이양받은 존슨은 '자유 세계의 경찰국가론'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국가의 자존심"을 지키고 "백악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베트남을 수호해야 했다."(159) 케네디에게 인계받은 보좌관들과 현지 군 관계자들은 미국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남베트남이 붕괴된다는 논리를 펴면서 "폭격과 확전이 지상 과제라고 주장"했다.(215) 존슨은 미국이 강력한 무력을 과시하면, 북베트남이 타협을 수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8월 5일 북폭을 시작으로 미국은 "아무런 선전 포고도 없이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을 결행한다.(206)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우세한 화력과 승리는 무관하다는 사실만 입증될 뿐이었다. "군사작전에 동원된 미군 병사들 중 4명당 3명은 비전투요원"으로, "장병들은 공기를 제외하고 전량 미국에서 수입한 물자로 미국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256) 1966년 한 해에만 남베트남 지상군의 21%가 탈영했다. 전면전도 없는 상태에서 게릴라들에 대한 끝없는 수색 작전에 지친 미군은 "기강 해이와 사기 저하"(291)에 물들어갔다. 군부의 모든 사건, 사고가 여과 없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고,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불만과 좌절감이 확대 재생산되었다.


"1968년 1월 31일 밤 공산군은 베트남의 명절인 구정에 때를 맞춰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무모한 화력전은 북베트남군에게 큰 피해를 남긴 채 재빨리 수습되었지만, 승리를 자신하던 미국 시민들에게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안겨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저는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347) CBS의 뉴스캐스터 월터 크론카이트가 한 말이다. 마침내 1968년 11월 1일, 존슨 대통령은 "정찰 비행을 방어하기 위한 필수적인 공습 외에는 북베트남에 대한 공군과 해군의 폭격을 일체 중지한다고 발표했다."(423)


전쟁이 마무리국면에 접어드는 듯 했지만, 존슨 행정부를 계승한 닉슨은 "하노이의 늙은 지도자들이 지쳐서 결국은 정치적 협상을 모색할 것"이라는 잘못된 신념마저 물려받았다. 닉슨은 54만 3,000명의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하는 한편,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비밀리에 "캄보디아에 있는 게릴라 '성역'에 대한 B-52 전폭기들의 공습"(440-1)과 지상군 투입을 승인했다. "명분 없는 싸움만 했다는 좌절감이 깊어진" 미군 병사들의 구호는 "베트남에서 죽는 마지막 미군이 되지 말자"(474)로 바뀌었다. "1971년 전투에서 부상당해 입원한 환자가 5,000명 미만이었으나, 마약 남용으로 치료받는 환자의 수는 이보다 4배가 많은 2만 529명을 가리키고 있었다."(503)


1972년 11월 7일 재선에 성공한 닉슨은 다시 한 번 하노이와 하이퐁에 대한 크리스마스 대폭격을 감행했다. 이는 "북베트남 사람들에게 가능한 많은 피해를 주어 자신의 의도대로 전쟁의 막을 내리게 하자는 '인륜을 파괴하는' 계산"(549)이었지만, 전세계 여론이 악화되는 부작용만 초래하고 말았다. "1973년 1월 23일 파리에서 키신저와 레 둑 토가 확정한 마지막 평화협정안은 1972년 10월에 제시되었던 내용과 동일했다."(552) 


1975년 미국이 더 이상의 직접 개입을 회피한다는 확신 아래 북베트남 정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자,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은 미국에게 원조 약속을 지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닉슨은 이미 6개월 전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을 사임한 상태였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대답은 '북베트남에 대한 정찰 비행을 복원한다'였다."(567) 미국만 바라보던 티우와 남베트남 장성들은 국가 수호에 미련이 없었다. 북베트남군이 지척까지 다가온 사이공은 여전히 평화로운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지만, 티우 대통령은 국민을 버리고 망명길에 오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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