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역사 3 - 전란의 시대 : 고려후기편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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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헌이 죽던 1219년 봄, 20만의 군대가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방, 알타이 산맥 사면에 위치한 이르티슈 강 상류에 집결했다."(108) 징기스칸은 "타타르 정복전을 시작하기 전에도 무려 7년 동안 꼼짝 않고 군대를 조련"(112)하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부족간의 전투에 길들여져 있던 몽골군을, 국가 단위의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전략적인 군대로 탈바꿈시켰다. 반면 고려는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을 연이어 겪으면서 서경 세력을 일소하여, 북계 방어의 중심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1225년 고려 국경 부근에서 몽골 사신 저고여가 살해됐지만, 고려는 어떠한 해명도 없이 태평한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국제 정세에 둔감한 모습마저 보였다. 당시 몽골은 서방 정벌과 금나라, 남송 공략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징기스칸이 사망한 "1227년에는 모든 군대가 회군하여, 후계자 문제로 갈등을 겪"으면서 내부 정비에 신경쓰느라 고려에게 아무런 압박을 가하지 않고 있었다.(118) 그러나 징기스칸의 셋째 아들 "우구데이가 즉위하면서 몽골은 서방원정을 중단하고 중국으로 시선을 돌린다."(120)


몽골은 "갈수기나 강이 언 후에 도강하는 전례를 깨고 1231년(고종 18) 8월 아직 압록강의 물이 창창할 때에 도강을 하더니 바로 의주를 포위했다."(117) 속도와 기동력, 생존력이 탁월한 몽골군은 부대를 나누어 사방을 공략하면서 적을 분산시키고, "흩어진 적보다 빠르게 집결하여 적의 머리와 심장을 치는"(125) 전술을 구사하였다. 몽골군은 그들의 명성에 걸맞게 "한 달 만에 평안도 지역을 거의 석권하고, 일부는 황해도까지 내려오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다."(122) 안주성 전투에서 정면 대결에 크게 패한 고려군은 수성전에 주력하면서 "다시는 몽골군과 정면대결을 펼치지 않았다."(131)


12월 1일 개경이 포위되고, 1232년 1월 강화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항복할 마음이 없었던 최이는 "강화회담을 추진할 때부터 다음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147) 그것은 항구적인 방어가 가능한 요새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고, 전국을 비우는 '청야전술'이었다. 그가 선택한 강화도는 육지와 가까운 섬이자 "개경 사람들이 이주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었고, "분지처럼 외곽이 산으로 감겨 있는" 천혜의 방어지였다.(152) 또한 최씨 가문의 사병들이 육지를 지키고, 수군이 바닷길을 장악했으므로 "전국이 분탕되어도 강화는 안전했다."(155)


최씨 무신정권은 이기기 위한 전략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백성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며, 정권 유지에 급급했다. 따라서 대몽골전쟁은 "몽골군과 전선을 형성하고 싸운 전쟁이 아니라 몽골군이 고려 땅을 짓밟고 돌아다니는 전쟁이었다."(159) 간혹 야별초가 몽골군을 물리친 사례가 있었지만, 이들의 파견은 "국가가 행정력과 지배력을 놓지 않으려는 시도였다." 정부는 몽골군이 물러난 "평화기(?)에 세금과 주민에 대한 관리권까지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164)


전황이 지지부진하자 몽골은 "고려를 압박해서 빠른 시일 내에 항복을 받아내기로 방침을 정하고 (1253년부터) 7년 간 한 해도 쉬지 않고 고려를 침공한다. 약탈도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전략적 타격으로 바뀐다."(196) 1258년 동북면(함경도)이 반란을 일으켜 몽골에 투항하고 강화에 대한 공략수위가 높아지자, 내분이 일어나 최씨정권의 마지막 계승자인 최의가 살해되고, 원종이 즉위한다. 원종은 무신집단의 위세에 눌려 폐위와 복권을 거듭했지만 몽골군의 도움으로 1270년 5월 무신정권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개경 환도를 선포하였다.(205-6)


고려 왕조 내내 지방의 향리층은 나름의 분업체계와 위계질서 아래 향촌사회의 치안을 담당하고, 전시에 지방군의 장교로 변신해 활약하는 체제 수호 집단이었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들이 마을마다 땅과 노비를 빼앗고 대토지를 점유하자, "지배층의 제일 하단을 형성하는 무사, 군인층의 경제적 기반이 먼저 와해된다."(257) 지방사회가 사족과 향리로 분화되고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고려군의 장기인 수성전이 부실해졌고, 이는 홍건적과 왜구의 침공에 속절없이 국토를 유린당하는 계기가 된다.


추수철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왜구는,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실어나르는 조운선을 강탈하기 위해 "아예 개경의 입구인 예성강 하구에 자리를 잡았다."(301) "1350년의 간지를 따서 '경인庚寅의 왜구'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동아시아 전체"를 휘젓고 다녔으며, 대만을 점령하고,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하였다.(308) "1374년(공민왕 23, 우왕 원년) 4월 350척의 대선단이 경상도 합포(마산 일대)로 상륙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왜구는 내륙으로 거침없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가히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할 만큼 위세가 대단하였다.(309)


1376년에는 전남의 중심도시인 영산과 나주가 약탈당하고, 전주마저 함락되었다. 1377년 3월에는 수군증강계획에 따라 건조 중이던 병선 50척이 왜구의 기습을 받아 소실된다. 선단수에서 현저하게 밀리던 고려 수군을 구원한 것은 최무선의 화약이었다. 1380년 왜구는 500척으로 구성된 대함대를 이끌고 진포에 진출하더니 "배를 묶어 수상요새를 구축하고 내륙으로 들어갔다." 최무선의 화통군은 자신감에 도취되어 있던 왜선을 화기를 사용하여 불살라버렸다. "(근 30년 만에) 해전의 양상이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341)


당시의 화약은 "염초, 유황, 목탄을 섞어서 점토처럼 이긴 것"으로, 불을 붙여서 한참 태우다가 일정한 온도가 되면 폭발하는 원리였다. 따라서 화통을 사용하려면 "먼저 갈고리로 배를 붙잡고 철질려를 던져 왜구가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적절히 시간을 맞춰 화통을 왜선으로 던져야 했다.(353) 1375년 화통도감을 설치한 최무선과 1381년 해도원수로 임명되어 강력한 수군을 조련한 정지의 결합은 관음포 해전에서 화약무기의 파괴력을 극대화시킨 최상의 선택이었다. 이후로 "고려 수군과 왜구의 전력은 1:2에서 2:1로 역전되었다."(354) 


왜구와의 전투는 1419년(세종 1) 대마도정벌 때까지 줄곧 이어졌지만, 14~15세기의 집권층은 "일본이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시작할 만큼 성장했음을 깨달았다."(356) 이 깨달음은 조선까지 이어져서 대대적인 수군 창설과 "일본과의 전면전을 전제로 한 대규모 군사개혁"으로 이어진다. "편제상으로 육군뿐이던 군제가 육군과 수군으로 이군화되고, 수군지휘부와 수군기지가 전국적으로 설치되었다."(357) 대륙과 한반도의 질기고 오랜 인연이 해양에서 불어오는 태풍과의 대결로 넘어가는 전환기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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