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의 사유세계 - 주자학의 패권
호이트 틸만 지음, 김병환 옮김 / 교육과학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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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년 여진족이 중국 북방을 정복하여, 북송北宋이 몰락하자 "유가 지식인들은 충성과 절개를 지키지 못하였거나 심지어 오랑캐에게 몸을 의탁한 사대부들에게 큰 수치심을 느꼈다." "많은 유학자들은 문화와 도덕관을 부흥시키는 것이야말로 국가를 재건하고 외적의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 아래 "어떤 전통이 비로소 ‘도道’에 대한 정확한 해석인지, 어떤 전통이 유교 사회의 가치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심도있게 토론하였다."(26) 그러나 고종은 "진회(秦檜, 1090-1155)의 주화파가 의견이 다른 인사들을 탄압하는 것을 용인하였으니, 특히 금과의 전쟁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도학인사들을 배척하였다."(30)


이런 상황에서 "도학道學 인사들은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유대를 형성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였으며, 사회 정치 문화를 개선함으로써 도덕가치를 부흥시키고 유학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서원은 도학 집단의 중요한 활동 중심이었으며, 그들은 서원에서 각종 예의 규범을 실행하였고 단체의 책임감과 응집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학생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예를 행하고 제단 앞에서 유가의 성현과 선사先師들을 향해 향을 피워 공경을 다함으로써 도학 전통 내부의 연속성과 응집력을 강화했다. 도학 인사들은 서로 이끌고 도와주었으며, 관직 추천이나 승진 시에 특히 서로를 후원하여 훗날 그들이 매우 크게 성공할 수 있게 하였다."(15) 


대표적인 도학자인 정이는 "오늘날의 학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문장에 능한 자는 문사文士라 하고, 경전을 담론하는 자는 강사講師에 가까우며, 오직 도를 아는 자만이 바로 유학자이다"라고 말했다. 즉, "'도道'를 아는 학자만이 비로소 '유儒'라고 불릴 수 있으며, 전통적인 문학과 유가의 <오경五經>을 연구하고 익히는 것은 더 이상 유학자를 가늠하는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19) 이들은 구양수(歐陽修, 1007-1072),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소식(蘚軾, 1036-1101)같은 문사형 인사들이나 전통 방식을 옹호하는 '세유世儒'에 맞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했으며, 그 중심에는 동시대 학인들과의 논쟁과 대립을 통해 도학 이론을 가다듬은 주희朱熹가 있다.


장구성張九成은 "불교가 유교의 기본인 삼강오상三綱五常을 파괴하고 윤리적 실천의 결핍을 초래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는 참선 정좌에 만족하지만, 도덕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수신 양성을 그치지 않아 더욱 완전한 자아와 사회를 건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36) 호굉胡宏은 "앎[知]이 실천[行]에 앞선다고 독실히 믿었고, 불교가 유가의 ‘심心’과 같은 개념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고 여겼다. 호굉은 선종의 영향을 뿌리 뽑고 경전과 역사를 연구하여, 고대의 이상적 제도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38)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본심을 체득하는 수양 공부를 중시했으며, 수양을 통해 "인仁과 지智가 합일된 연후에야 군자의 학문이 성취된다"고 보았다.(45)


1160년대에 이르러, 주희는 "소식형제와 장구성 및 여본중이 유가경전과 노자, 장자, 붓다의 사상을 혼합"하여 "이단의 사설邪說이 차츰 발전하여 기세를 떨친다고 생각했다."(52) 장식張栻은 "그들도 사실 유가의 도덕을 따르지 않는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면서도, "그렇기에 ‘우리 도당[吾儒]’과 각종 이단의 가르침을 추구하는 무리들을 구분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57) 장식은 "유가의 기본인 가정·사회 윤리가 인간의 삶과 국가 생존의 근본"(63)이라 믿었으며, "반드시 격물格物의 수양 공부로 리理에 대한 인식을 강화해야만 비로소 주관적 편견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67)


여조겸呂祖謙은 “한 스승만을 따르지 않았고 한 학설만을 추종하지 않”는 학문 방식을 통해 다른 도학파들의 사상을 결합하였다.(106) 그는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편견의 원천이 되는 곳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고치기 위해 도덕적 노력, 즉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9) 그는 "풍속은 단지 우리들이 만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풍속이 어떻게 좋아질 수가 있겠는가?”라면서, 학생들이 과거 시험에 적극적으로 응시하여, "정치의 중심지인 조정에서부터 사회를 변화시킬 것"을 요청했다.(118-9)


주희와 여조겸은 "불학과 도학과의 경쟁, 교육제도 개선 그리고 유학의 발양"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의식과 단결을 강화할 수 있는 서원 재건에 주력한다. 여조겸은 주희와 함께 "왕안석 신법 중 교육제도의 폐단을 비판하며, 학교교육이 과거科擧를 위한 문장연습에 치중하고 있는 점에 반대"하고, "유가경전의 학습과 도덕 교육을 강조"하여, 서원을 중심으로 "정이·정호와 장재의 학설을 심도있게 연구한다."(147) 주희와 여조겸은 "'천심天心'이 곧 '군자의 마음'이라고 여겼다." 주희는 "성인이 그 마음을 극진히 해서 천天과 본성을 알게 되고 만물과 합하여 일체가 될 때, 성인의 마음은 ‘천심’과 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161)


1180년대 이후로 "주희는 정치적 함의가 짙은 ‘오당吾黨’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도학 동도同徒들을 지칭했으며, 그들의 문화적·정치적인 사명을 제시하여 간접적으로 조야의 여러 유생과 학인들을 향해 도전했다."(172) 그는 "흑과 백을 구별하지 않으면 옳고 그름을 논할 수도 없다. 함부로 ‘무당無黨’을 말하는 것은 도를 더 혼란하게 한다”고 하면서, 당을 구별하지 말 것을 제창하는 인사들을 질책하고, 도학에 한층 짙은 정치적 색채를 입혀나갔다. 주희는 "국내 학술의 폐단은 두 가지 설에 불과하다. 강서의 돈오頓悟와 영강의 공리주의인데, 만약 온 힘을 다해 이들과 쟁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도는 밝아질 수 없다"는 말로 도학 내부에서 사상 논쟁을 벌여나갔다.(177)


진량陳亮은 "모든 원칙을 판단할 수 있는 추상적인 혹은 초월적인 표준은 없다고 여겼다."(223) 그는 주희의 불변하는 기본 가치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여, "도道가 역사 발전과 인류의 행위에 내재되어 있으며,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237) 주희는 유일한 도를 바탕으로 모든 만물과 제도를 평가해야 비로소 “천지의 불변하는 이치와 고금에 통용되는 옳음을 나 자신 안에서 얻어”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영원히 존재하는 불변적 도덕규범의 도와 역사 속에서 단속적으로 실현된 도라는 함의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도를 구분한다." 주희가 보기에 "도道는 본래 소실된 적이 없고, 단지 인간이 도를 준수하지 못했을 뿐이다."(241-2)


주희가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학문 연구와 도덕 훈련을 강조한 것과 달리, 육구연陸九淵은 모든 사람이 "맹자가 말한 '본심'과 인의예지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육구연은 "사단은 곧 마음이며,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 곧 마음이다. 사람에겐 모두 이 마음이 있으며, 마음엔 모두 이 이치가 있으니, 마음이 곧 이치理致”라는 말로 '심즉리心卽理' 사유를 전개하였다.(255) 주희는 "마음이 곧 리理"라는 논리는 불교도의 견해와 같은 것으로, 이는 경전經典 연구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소홀히 하면서, 쉬운 수양 방법으로 본심의 각성覺醒에 도달하려는 방식이라고 준엄하게 비판했다.


주희는 "지식에 매우 의미 있는 독자적 지위를 부여했으며, 지식이 도덕윤리의 기초라고 생각했다."(287) 그는 <대학大學>, <중용中庸>의 주석을 지으면서 자신이 공자와 맹자로부터 북송사자北宋四子에게 직접적으로 전승된 도통道統의 계승자임을 은연중에 암시하였다. 육구연은 "전통과 도통을 정의하는 주희의 권위를 의심"하면서, "동도同道들과 학문을 토론하여 ‘하나의 올바른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300) 주희는 그의 말이 합당한 표준이 되지 못한다고 반박하면서도, "표준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주희는 육구연이 자기 마음속의 판단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전통적인 경전의 판단에 의거하지 않았다"고 공격할 뿐이었다.(299)


"1241년 1월, 송나라 이종은 칙령을 반포하여 정통 사상으로 도학을 전면 수용"하였다. 남송 정부가 입장을 바꾼 이유는 "몽고인들이 북방에서 공묘를 건설하고 과거제도를 시행"하는 등, 자신들이 "유가 문화를 후원하는 신정권이며 나아가 중국의 합법적인 통치자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315) 주희의 후학들은 자신들이 "대도大道를 혼란케 하는 학자와 대항한다고 자임하였다."(310) "주희, 주돈이, 장재 및 정씨 형제의 초상화가 공자사원"에 모셔졌고, 주희의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註>는 도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번영"시켰다고 공인되었다. "왕안석의 위패는 공묘에서 퇴출되고, 태학은 도통을 전수한 성인과 현인들에게 경의를 표할 것을 명령"받기에 이르렀다.(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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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플러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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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철학, 진리와 이성(의 관계)에 대한 다원화된 질문들의 향연. 과학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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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의 형성과 전개
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 논형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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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사人事'에 의해 '천재天災'가 발생한다는 논리를 '천견론天譴論'이라고 칭한다. 저자에 따르면 천견론은 과학이나 신앙이 아니라, 정치 공간에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동원된 정책 수단이다. 정치의 득실과 재이災異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은 순자荀子나 왕충王充 같은 송대宋代 이전의 사상가들이 이미 주장한 바이지만, 송대에도 천견론은 소멸되기는커녕 군주가 "이치[理]에 의거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이끄는 방편이었다. 신종대를 보면, 재해와 이변은 신법에 반대하는 대신들이 왕안석의 전횡을 타도할 때 뿐만 아니라, 왕안석에 의해 "일어나야 할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것을 경하"하는 대응 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30)


왕안석은 그저 재이와 연관된 사태를 소멸시키려는 사고방식에서 한걸음 나아가 "군주는 재이를 계기로 자신의 행동이 '천하의 올바른 이치[天下之正理]'에 맞는지를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군주된 자의 근심은 이치를 궁구하지 않는 것"에 있으며, "궁리窮理야말로 정치의 요체"인 것이다.(56) "재이가 구체적인 사상에 대한 '응보[應]'가 아니며 군주의 수덕修德에 의한 궁리가 중심 과제"가 되면서, "리理의 권위를 보증"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여기서 변함없이 '천天'이 등장한다. 단, 이때의 천天은 "리理의 근본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고 군주의 시책에 일일이 끼어들어 쓸데없이 참견을 하는 유의지자有意志者"의 의미를 상실한다.(57)


이로써 재이는 "어떤 개별적 현상에 의해 기계적으로 발생"하는 사태가 아니라 "군주의 마음의 준비에 대한 감시와 억제 기능을 가진 현상으로서 파악"되었다.(71) 주희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일신一身의 사욕私慾을 이겨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으로 돌아간다"고 주석을 달았을 때, '예禮'의 치환이 '천리의 절문'인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주희는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우선시하는 욕망이 기질氣質로서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여 "'천리의 절문', 즉 규범으로서의 예禮에 합치한 말과 행동을 해 나가는 것이 당연히 사람으로서의 올바르고 본래적인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80)


"북송北宋에서 맹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제일인자는 왕안석이다."(98) 왕안석은 "당대唐代 이래로 중시되어 오던 시부詩賦를 시험과목에서 제외하고, 그 대신에 책策(시사문제에 관한 대책)과 논論(역사비평)을 중시하였다." 또한 "'겸경兼經'이라는 명칭 하에 <논어>와 <맹자>를 모두 과거의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결국 <맹자>는 이러한 계기를 시작으로 하여 경서로서의 취급을 받게 되었다."(101) 왕안석은 "본성[性]은 서로 가까운 것이지만, 습관[習]이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論語> 陽貨)는 공자의 말을 빌어, 성性에 선험적인 시비是非나 선천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性이 원인이 되어 구체적인 형태로서 발현한 상태가 문제"라고 말하였다.(99)


주희는 "본성 그 자체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왕안석과 호남학파의 주장을 배척하고, 인의예지仁義禮知를 본성으로 인정한 한유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장재張載의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합한 것'이라는 규정"을 기본으로 삼아, 사람은 본래 선한 본성을 갖추고 있으며, 다만 "기질의 소위所爲에 의해 악행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 세상에서 악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질을 선으로서의 본성으로 되돌리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인의예지를 "사람의 마음에 미리 부여된 리理로 간주하는 것"이 주희의'성즉리설性卽理說'이다. 아울러 이러한 리理는 그 "본래적인 올바름과 선함"의 근본 원리인 천天에 기대고 있기에, 성性은 리理를 통하여 우주와 연결된다.(110-2)


주희는 자신을 비롯한 도학자들이 맹자를 마지막으로 끊어진 도통道統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했다. 주희와 그 문류門流가 보기에 당대는 공자와 맹자가 통치자에게 도道를 가르치던 상황과 유사한, 그들 나름의 '르네상스'였다. 주희에 따르면 "요순에서부터 공자·맹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그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도道'는 그 후 천사백 년에 걸쳐서 단절"되었는데, "그것을 다시 부흥시킨 이가 바로 주돈이이고, 그러한 성과가 <태극도설>이다."(157) 주희가 '성性과 정精'을 분리한 것처럼, "리理에는 형상이 없으며 기氣에 붙어 있는 것"이라는 자신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창할 때 "<태극도설>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구절은 아주 적당한 재료"였다.(168-9)


이제 "도道의 담당자는 군주의 지위를 얻은 자에게만 한정될 수는 없다. 오히려 공자 이후는 '왕王'이 아니라, '사師'라고 하는 것이 도통 계승자의 성격이 되었다."(199) 주자학이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독서인讀書人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서 그들에게 살아 있는 목표를 제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때의 독서란 "성인이나 현인들이 글로 써서 남긴 텍스트 등을 통하여 마땅히 그러해야 할 세상의 올바른 모습에 관하여 배우는 작업이었다."(202) 사서학四書學을 학습하여, 오경五經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 "<주례>는 국제國制, <의례>는 가례家禮로 삼고, 여기에 <예기>를 더한 삼례의 학을 부흥시키는 것"이 주희의 실천적 목표였다.(221)


<주례>를 중핵으로 삼아, "치민治民을 위해서는 확고한 (국가) 조직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고 방식"은 왕안석의 신학에서 유래한다. 이에 대항하여 등장한 "정이의 도학道學·리학理學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위정자 자신의 인격 도야와 민중에 대한 풍속 교화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통치 제도를 중시하는 주례형周禮型과 수양 교화를 중시하는 대학형大學型"은 서로를 배제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수레의 양쪽 바퀴와 같은 관계로 청말淸末에까지 이르렀다. 다만 주자학에서는 이념으로서의 수기치인이 압도적인 무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형大學型으로 그 무게 중심이 기울어지게 되었다."(243-4)


비록 왕수인이 주창한 명대의 양명학이 각자에게 '천리로서의 양지良知'가 갖추어져 있다는 취지에서, '심心·성性·리理'를 구별하는 주희의 사고방식에 반대했지만, 이들의 관점이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바로서의 리理에 대하여 존경의 염念을 가지고 경건하게 유지하는" '존덕성尊德性'과 "학문에 의해 견문을 넓히고 리理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해가는" '도문학道問學'을 이항 개념으로 구분 짓고, 주자학과 양명학을 대비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후세에 만들어진 이미지에 근거한 이야기이다."(131-3) 제3자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에게, 주자학이나 양명학이나 모두 '송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었다.


"주자학을 따르든지 아니면 양명학에 영합하든지 간에 명대明代 독서인들이 공통 과제로서 삼았던 것"은, '송학'이 품고 있던 문제인 "수신을 완성한 인물이 지도자가 되어 형성·유지해갈 질서를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자 실천방안이었다. 여기서 "정돈된 질서, 즉 그들의 용어로 '예교禮敎'가 한층 더 전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것이 거경궁리居敬窮理에 의한 것이든지, 아니면 현성양지現成良知 이든지 간에 궁극적인 목표는 동일하였다. 단지 그 방도가 달랐을 뿐이다."(250) 실천론을 배제하고 심성론心性論으로 축소시킨 '송학'은 한당漢唐의 훈고학을 재평가하는 자신들의 방법론을 '한학漢學'으로 칭한 청대 고증학자들이 창안해낸 개념이다.(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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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하늘 아래 노란 꽃
류진운 지음, 김재영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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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는 지진이 나고 홍수가 몰아쳐도 그 자리에 온갖 꽃을 피우지만, 사람심사는 혁명이네 이상이네 하면서 목숨을 갈아엎는데 심취한다. 투쟁 뒤에 합일이, 고통 뒤에 성취가 온다지만, 어느 누가 기껏 노란 꽃(죽음을 의미함)이나 피우려고 땅 속 거름 역할을 반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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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백성 사이의 漢 현대의 고전 4
히하라 도시쿠니 지음, 김동민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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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漢代 사상은 가혹한 권력 집행으로 국가 기반이 급속도로 무너진 진秦의 전철을 피하면서도, 확고한 지배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여 전개되었다. 동중서董仲舒는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내세워, 유학을 점지하였고, 한무제武帝는 이를 전격적으로 수용하여 제국의 사상이 나아갈 길을 예비하였다. 유가가 이상으로 삼은 봉건제도의 경제적 기반은 농민이었기에, 지식계급의 농민 보호는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현실적 요구였으며, "'백성의 부양을 받는食於人' 지배계급을 인정하는 유가의 이론은 정치권력의 입장에서는 매우 적절"한 통치 기제였다.(35) 


한대 유학자들이 통치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전으로 삼은 텍스트가 바로 <춘추春秋>이다. "노나라의 역사서에 지나지 않는 <춘추>에 대해 공자가 독자적인 견해와 비판정신을 가지고 필삭을 가했다고 해석한 것은 <맹자>부터이고, 나아가 이러한 해석을 기초로 해서 <춘추>에 경서經書로서의 권위를 부여하는 데 이른 최초의 문헌은 <순자>라고 일컬어진다. 경서로서의 <춘추>를 조술하여 부연 설명한, 넓은 의미에서의 해석서로는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 등 세 가지가 있다."(147) 이들은 성인으로 추앙받은 공자의 권위로 윤색된 <춘추>를 빌어 한漢이 주周를 계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면서 왕조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한나라가 유교를 채용한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명분名分'이다. "포악한 진나라를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그것을 대신했던 한나라 입장에서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없애고" 법치를 부정함으로써 진나라와는 상반된 지배 원리를 표방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대의 유교는 이미 법가 이론을 포괄하면서도 위정자의 권한을 침해할 우려가 적은 적절한 타협 대상이었다. 한대 사상가들은 국가의 권위와 유교의 권위를 환치시켜, 백성들을 "국가 의지에 대한 복종이 곧 유교적 당위라고 착각하는 상태"에 빠뜨렸으며, 강고한 권력 집행을 "'유술儒術 또는 유가의 옛 의리'로 치장"하여 국가 운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데 기여하였다.(38-9)


그러나 유가는 법가와 달리 "군주권의 팽창을 무제한적으로 용인하지 않았으며, 군주권의 억제를 위한 이론도 준비했다." 동중서는 '하나로의 통일을 중시한다大一統'는 이념 아래, 군주권이 "천명天命에 의해서 그 권위가 확립"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백성은 아직 선이라고 할 수 없는 성性을 하늘에서 부여받았기 때문에 왕으로부터 성을 완성하는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며,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의 성을 완성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 자"로 규정된다.(43-4) 여기서 "군주권은 '천天'이라는 관념에 의해 주체성을 상실한다. 천명에 의해 이뤄지는 한 군주권은 하늘의 제약 아래 놓여 있을 수 밖에 없다."(45) 


천天 관념을 거부하는 통치자의 횡포와 전단專斷을 저지하기 위해 준비된 사상이 '재이설災異說'이다.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각종 이상 현상 중에서 "작은 것을 '재해災', 큰 것을 '이변異'이라고 칭"하는데, 재이설은 이러한 변괴를 군주의 행위와 결합시켜 해석한다. "정치가 그 마땅함을 잃어버리면 민중의 불평과 원망이 "사악한 기운을 발생시켜서" 인간세계의 음양은 조화를 잃는다. 이것이 곧바로 자연계의 음양에 감응해서 그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하여 뒤틀리게 만든다. "음양이 뒤틀리면 요사스러운 기운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재이가 발생하게 된 원인이다." 따라서 군주는 "하늘에 순응해서 덕을 닦고", 선정을 베풀어 음양의 조화를 도모해야 한다.(48-9)


동중서에게 재이는 군주의 전단을 견책하는 수단이며, 과거의 사실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데 "전한 말기에 접어들면서 그것이 갑자기 주술적인 예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55) "<춘추>는 행위를 평가할 때 외적인 사실과 결과를 무시하고, 내적인 심의心意만을 문제삼는다. 의지의 선악만을 따지는 이러한 '특이한 논단筆法'을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마음을 따져서 죄를 결정하는 것原心定罪'이다." 즉, "<춘추>는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예측되는 장래의 행위에 대해서도 그 심의의 선악을 살펴서 포폄을 가한다." 나쁜 의지를 품고 있다면 "'아직 그러한 행위가 발생하기 전에未然之前' 예방하는 것을 최상"으로 여기는 예언의 성격이 덧붙여진 것이다.(56)


선악을 미리 판단하는 사유는 필연적으로 형벌 주관주의를 불러온다. <춘추공양전>의 원심정죄론에는 범죄의 환경원인론環境原因論이 깔려 있다. 이는 "환경이 나쁘기 때문에 죄가 발생하며, 특히 생활의 빈곤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의식이 풍족해야 예절을 알기 때문에 위정자는 민중을 위해 좀더 좋은 환경을 준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고방식이다."(151) 원심정죄론은 덕치德治를 염두에 둔 사상이지만, '국가 권력의 남용'과 '법적 안정성의 결여'라는 부작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범죄자의 내부 심리에 개입해서 엄형중벌嚴刑重罰의 방향으로만 일방적으로 유추 해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국가주의자가 주장한 '춘추의 의리'였다."(153)


일찍이 맹자는 "인의의 덕을 통해서 난세를 통일하고, 천하에 평화를 가져오려고 했던 왕도주의를 정치사상의 중핵"으로 삼으면서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확실하게 구별했다."(217) 맹자가 처한 현실이 "패도 그 자체였기 때문에 더욱더 왕도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담이나 왕충 같은 공양학 학자들은 패자를 왕자의 대립개념이 아니라 왕자의 낮은 단계로 상정하고, 패도를 문장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인정"하는 논리를 수용했다.(241) 이들은 위정자에게 윤리적 의무를 심어 왕도로 이끌고자 노력했지만, "판단은 군주의 의지를, 평가는 국가의 이해를 기준으로 결정"(207)되는 절대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을 군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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