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일본을 찾아서 1 이산의 책 40
마리우스 B. 잰슨 지음, 김우영.강인황.허형주.이정 옮김 / 이산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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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에서 히데요시를 거쳐 이에야스에 이르는 통일 과업은 제1의 권력을 향한 무가武家의 노정이었지만, 근대 국가 체제와 유사한 중앙집권화를 수립하지는 못했다. "문제는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이 평화가 정착되고 관료화되긴 했으나, 결코 실질적으로 통일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다이묘들은 에도(江戶)에 위치한 쇼군의 호의에 의존하면서도, 자신들의 영지에서 "자치의 주요 요소인 행정·군사·재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은 도쿠가와 체제를 "중앙의 쇼군(막부)과 지방의 다이묘(번)라는 이중 구조를 가진 ‘막번幕藩 국가’라고 분석"하면서, 서구의 봉건체제와는 다른 '중앙집권적 봉건제’(centralized feudalism)로 규정하였다.(66)


번은 막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일조해야 하지만, "막부에 직접 세금을 내지는 않"았고, 번의 군사력을 실질적으로 통제받지도 않았다. "요컨대 수십 개의 번은 자신의 군사·행정·법령·세제를 구비한 거의 독립적인 국가"였으며, 주민들은 "자기 번을 하나의 나라로 인식"했다. 따라서 "막번 국가의 ‘번’이라는 부분은 일본의 중앙집권화와 국민국가로의 발전에 있어서 심각한 걸림돌"이었다.(93-4) 막부와 번은 대립하기보다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쌍무' 관계로서, "막부건 다이묘건 모든 봉건 당국은 농촌지역을 계속해서 통제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해관계를 같이했다."(101) 이러한 협조 관계가 1860년대에 이르러 어긋나기 시작하면서 "막부는 점차 지방세력으로 전락했다."(102)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과 '무인 통치'로, 메이지 유신은 이러한 구습을 타파한 결정적인 전환으로 이해되지만, 그 면모가 단절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도쿠가와 시대는 무역과 국제관계를 장려하는 활발한 시도들"(115)이 꾸준히 있었고, 이에야스는 서양과의 무역에도 열의를 보였다. 막부는 "17세기 유럽에서 가톨릭 진영과 경쟁을 벌이고 반목하던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이 일본에 들어온 덕분"에 대외관계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았다.(121) 막부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상급 영주에 대한 충성심 이상의 종교적 신앙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검증했고, 서남지역-특히 규슈-의 유력 다이묘들이 직접 외국인과 접촉하는 기회를 차단했다.(126)


1640년대 만주족이 대륙을 석권하면서 아시아 정치 지형이 급변하자 막부는 "일본 상인을 동남아시아에 있는 사상적 오염의 근원지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다.(142) 그러나 일련의 금수 조치가 외부세계에서 들어오는 상품·지식·기술을 입수하는 경로까지 막은 것은 아니다. 일본과 교역하는 네덜란드 상인들은 "지난 번 선박이 들어온 이후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의무를 지켜야 했다.(139) 일본의 엘리트층은 "쇄국체제를 통해 서양의 사상과 종교의 차단을 시도하는 동시에 중국의 문화 전통을 터득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다. 네덜란드와의 무역은 사실상 "아시아, 그 중에서도 중국 상품을 거래하는 무역이었다."(143,146) 


막부는 조정이 부여하는 명예를 중시했기 때문에, 조정을 공경하고 우대했다. "17세기 말에는 예전에 소멸되었던 의식들이 막부의 관대함과 호의로 재정지원을 받아 다시 등장하였다. 천황의 즉위례卽位禮 가운데 하나인 대상제大嘗祭는 예전에 누렸던 영예로운 위치를 회복했고, 중세 이후 거행되지 않았던 의식들이 조정의 일정표에 다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정치적으로는 무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일본사회에서 정통성과 명예의 산실로 남아 있었고 그 중요성이 증대"되었다.(159-160) 18세기에는 "천황을 ‘일본적인 것’의 중심으로 여기게 하는 데 공헌한 또 하나의 조류인 고물주의古物主義"가 나타나면서, 정치적 내셔널리즘의 구심점을 이룬다.(161-2)


일종의 도덕률로서 무사도가 정립된 것도 도쿠가와 시대이다. 야마가 소코는 "사무라이는 농민·직인·상인의 일을 하지 않으며, 오직 무사도를 실천하는 데 매진할 뿐이다. 세 서민 계층의 사람들 중에 도덕적 원칙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사무라이는 그 자를 즉석에서 처벌하여 이 땅의 올바른 도덕적 원칙을 유지한다”고 말했다.(166) 그러나 전쟁이 멈춘 지 2세기가 지난 17세기에 이르면 "영웅적인 과거를 말해주는 가련한 유품들은 평범한 현재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에도의 관리들은 "사무라이의 과도한 지출을 억제하고 신분에 맞게 체면치레를 하도록 하"고자 검약령을 공포했지만, 상급 사무라이의 삶마저 '지배계급'과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래였다.(175)


일본 전역을 하나로 이어준 핵심 계기는 다이묘가 에도와 영지를 1년마다 왕복하는 참근교대(參勤交代, 산킨코타이)제이다. 참근교대제는 "일본 전역의 지방경제를 연결, 순환시켰으며, 일본 통일에 있어 이에야스의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보다 더 많은 공헌을 한 전국적인 교통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온갖 종류의 상품이 중앙으로 흘러들었고, 지방경제는 번의 정치적 경계를 넘나들 정도로 성장했다."(201) 각 성의 행정중심지로 설계되었다가 도시로 발전한 조카마치를 중심으로 "일본은 자급자족보다는 교환에 더욱 치중하게 되었다." 지역과 도시의 상호교류는 "일종의 국민문화"를 탄생시켰고, 각 구니(國)를 둘러본 상황 인식은 "비교와 평가의 근거를 제공했다."(241-2)


중세 일본은 개인이 담당한 ‘직분’과 그 직분에 따른 '책임'이 역(役, 야쿠)으로 고정된 사회였다. 따라서 과거제를 통한 인재등용 같은 "유교적 이상을 따르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며, 실제로도 그랬다."(290) 하야시 라잔은 유학과 신도 사상의 일치를 시도하여 "중국의 성인들이 주장했던 단계가 과거 일본에서 실현되었다"고 주장했으며, 오규 소라이는 고대의 성인 못지않은 이에야스가 창안한 사회 질서에 '대일본大日本'이라는 호칭을 선사했다.(304) 야마가 소코도 '중국'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했다. 유교의 정명正名이 가리키는 정치적 정통성이 천황을 향하게 되면서, 유학은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되었다."(306)


"국학(國學, 고쿠가쿠)은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한학(漢學, 간가쿠)에 대한 의식적인 저항을 배경으로 발전했으며, 일본과 일본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했다."(307) 가모노 마부치는 신앙이 이성보다 강하다는 논리 아래, 중국의 이성주의에 대한 일본의 헌신과 신앙의 우위를 피력했으며, 히라타 아쓰타네는 고대의 제정일치를 되살려 "신의 후손이라는 후광에 힘입어 인민을 다스리는 존재는 바로 천황"이라고 강조했다.(312) 국학은 "태고의 일본이 간직했던 진실함이 외국, 특히 중국사상에 의해 오염된 것을 개탄하는 한편 유용해 보이는 외국사상은 무엇이든 원래 일본 것이라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하면서 농촌지역에 광범위하게 뿌리 내렸다.(315)


불교도 "개인의 신앙을 자신이 등록된 특정 사찰인 단나데라(檀那寺)가 증명해주는 데라우케(寺請) 제도"를 통해 호구등록 업무를 맡으면서 점차 지배구조 안으로 흡수되었고, 난학(蘭學, 란가쿠) 역시 도쿠가와 봉건체제에 균열을 내기보다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것"에 대한 학문적 열정을 기반으로 일본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323-4) 이처럼 외래 사상과 민간 신앙의 전체주의적 융합은 "봉건적 신분제와 법령이 가하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사회 내의 모든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를 일치하도록 만들었고, "각 집단은 더 큰 전체에 기여하는 일의 중요성을 이미 납득하고 있었다."(333)


"도시의 풍요로움과 농촌의 고난, 성공한 상인들의 안락과 궁핍한 사무라이들의 불안 사이의 극명한 대비를 지켜보며 무언가 균형이 허물어졌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356) 위기를 극복하고자 8대 쇼군 요시무네가 주도한 교호(享保) 개혁부터 간세이(寬政) 개혁, 덴포(天保) 개혁이 줄을 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각각의 개혁기는 문제 처리가 더 힘들어지고 선택의 여지가 더 줄어들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383) 18세기 말엽에 이르면, "막부는 자강自强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번을 보호해주기에는 너무 나약했고, 번이 스스로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허락해주기에는 너무 강한" 어정쩡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384)


훗카이도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과 조우하고, 격동하는 서구의 상황-프랑스 혁명의 불길-을 알게 된 막부는 정부 차원에서 "서양의 지식을 연구하던 전문가들을 기용했다."(397)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외국의 해안은 임의적인 입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1825년에 막부는 "서양인을 망설이지 말고 내쫓으라는 ‘외국선박 격퇴령’을 공포했다."(398-9) 그러나 곧 아편전쟁의 결과를 접한, 미즈노 다다쿠니는 "준비상태가 형편없는 시점에서 전쟁과 같은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선박 격퇴령을 철회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409) 마침내 1853년 흑선을 이끌고 온 페리가 "엄포를 놓는 개인 서신과 함께 백기白旗를 일본측 협상자들에게 보냈다."(414)


"서양 침입자들로부터 기인한 위기감은 곧 교토의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이는 영주와 번에 대한 개별적인 충성심을 능가하게 되었다." 최초의 막부 사절단이 조약 비준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 간 1860년, 미토 번의 사무라이들이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를 암살하고 "폭력으로 점철된 10년의 서막을 열었다."(443) 반反외세세력은 막부가 외세와 손을 잡으려 한다는 인식 아래, "토막(討幕, 도바쿠), 즉 “막부를 토벌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웠다.(460) 여기에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1866년 조슈와 사쓰마가 동맹을 맺었고, 도사 번 사절단이 "쇼군에게 그 직위와 칭호를 단념할 것을 제안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 다이세이호칸) 건백서를 제출"한다.(464)


반외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가 "일본의 국체를 위태롭게 하고, 일본에 외국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국의 신성한 땅을 더럽히고 천황에 대한 무언의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외국인의 입국으로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나 요시다 쇼인같은 국수주의자들마저 서양을 무찌르기 위해서 "서양에서 배우고 그 힘의 비결을 알아내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했다.(474-5) 후쿠자와 유키치와 니시 아마네 같은 서양 체험자들은 "일본국민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일본의 중앙집권화와 통일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면서, '문명개화'를 향한 열의 앞에 "자신들이 거의 선지자적인 위치에 있음을 발견했다."(480-1)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하겠다는 일본의 열의가 결실을 맺은 또 하나의 이유는 "도쿠가와 시대의 독특한 토지소유 개념" 덕분이다. 도쿠가와 시대에 각 번을 관장하던 영주들은 "자신의 번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쇼군은 조정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임기가 끝날 때까지 행사하는, 영주들 중의 일인자에 불과했다. 정통성의 근원은 고립된 천황이었다."(503) 이처럼 천황을 전면에 내세운 메이지 유신은 "어린 지배자-고메이 천황의 후계자인 무쓰히토-를 위해 마련된 <5개조어서문>으로 막을 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천황은 1868년 4월 5일 공가公家와 다이묘들이 모인 앞에서 이 서문을 발포했다."(501)


<5개조어서문>은 "불명료한 용어를 사용해 상황변화에 따라 그 의미를 확장할 수 있게 작성"된 성공적인 국가문서의 한 예이다. "'상하'가 합심할 것이라는 말은 신분상의 구분이 계속될 것임을 뜻했다." 또한 "유교적 의미를 내포한 '천하의 공도'"가 '누습'이 폐지된 자리를 차지했다. 더욱이 "지식의 추구는 황국의 기반을 굳건히 다지는 목적에 부합하게 선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나마 "전세계에서 널리 지식을 구할 것이라는 약속에서만 변화를 지향하는 구체적인 표현이 발견된다." 도쿠가와 말기의 행동가들은 이 조항이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외치면서 서양식 근대화를 추진"하는 일본 정부의 이중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개탄했다.(507)


1871년에 단행된 폐번치현廢蕃置縣으로 쓰시마의 다이묘들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천민은 평민(平民,헤이민)으로 신분이 승격되었고, 농민들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와 거주 이전의 자유가 부여되었다. 새로 공포된 "호적법戶籍法에 따라 가家가 새로운 행정구역의 기본단위가 되었고, 호주는 가족의 행위와 의무를 책임지게 되었다." 1873년 1월에 공포된 "징병령徵兵令은 현역 3년과 예비역 4년의 의무적인 복무를 요구했다." 지조개정(地租改正, 지소카이세이) 역시 사회의 격변을 가져왔는데, 이제 "농민들은 토지에 대한 단일한 소유권을 인정받았고, 이전에 마을 단위로 부과되던 각종 세금은 토지소유자의 책임이 되었다."(545-6)


이처럼 "중앙에서 입안한 정책이 지방을 탈바꿈시키면서 사분오열의 위기에 빠진 것 같던 일본이 순식간에 중앙집권적 국가로 면모를 일신했다. "(522) 메이지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국가 대 국가로서 '근대적인 관계'를 맺자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막부에 이어) 다시 한번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를 시도"하였다. 이 제안이 거절당하자 신정부의 지도자들은 "응징 차원의 군사원정을 단행할 수 있는 빌미를 잡았다"고 말했다. 이와쿠라 사절단 멤버인 기도 다카요시 같은 이들은 "전쟁이 일본의 통합을 앞당기고 근대화를 가속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540)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한 사무라이들은 정부의 대외 강경책을 자신들의 건재함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메이지 정부 지도자들의 명성은 유신 주체들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공헌을 보호하는 다수의 공인된 전기에 의해 유지되어왔다. 집단적으로 이런 기록은 교토를 중심으로 해서 국가의 통일과 구원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천황의 통치권 회복을 위한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거의 악습을 철저히 일소했다는 이러한 ‘메이지 편향’ (Meiji Bias)은 메이지 유신을 "오랫동안 미루어졌던 도덕적 확실성으로의 회귀이자, 모든 진정한 일본인의 피할 수 없는 의무로 제시되어온 가치들을 고수하는 일과 동일시"하였으며, "막부의 노력을 경시하고, 역사가들로 하여금 1860년대에 일본을 분열시켰던 심각한 의견 차이와 당시의 폭력을 간과하도록 부추겼다."(4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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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과 개혁 일본 근현대사 7
아메미야 쇼이치 지음, 유지아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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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총동원체제를 이끈 4가지 정치 조류

(1) 국방국가파 : 도조 히데키 등 육군통제파, 기시 노부스케, 가야 오키노리 등의 상공관료를 중심으로 한 혁신관료, 신흥 재벌을 중심으로 위로부터 군수공업화를 강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군수공업화는 전근대적 관습과 계층별 격차를 어느 정도 평준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사회복지나 노동복지 문제도 일정부분 공업화에 맞춘 형태로 개선되었다.

(2) 사회국민주의파 : 1920년대에 노동조합법이나 소작권법을 만든 관료들로 제1차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1937년 6월) 때 참여한 인사들과 쇼와연구회 계열 사람들이다. 사회운동을 중시하여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 경영자, 여성 등의 평등화와 현실 정치 및 경제 과정에의 참가를 요청했다.

(3) 자유주의파 : 1920년대의 재계 주류와 그것에 기반을 둔 기성정당 세력이나 관료들로, 20년대에는 다나카 키이치, 와카쓰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 등, 40년대에는 하토야마 이치로, 요시다 시게루 등이 있다. 철저한 산업 합리화, 군축, 재정 정리 등 과격하다고 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집행하여, 군부와 대중 쌍방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40년대에는 반(또는 비) 총력전체제를 주장했다.

(4) 반동파 : 마사키 진자부로 등 육군 황도파, 스에쓰구 노부마사 등 해군 함대파, 미쓰이 코시 등 관념우익, 대다수의 지주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시작된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 또는 군축운동에 의해 기득권을 빼앗겼고, 총력전체제에 의해서도 대거 기득권을 빼앗겼기 때문에 총력전체제에 대해 매우 반동적으로 반응했다.

▷ 국방국가파와 사회국민주의파의 연합 세력 득세(아시아태평양 전쟁 초·중기), 반동파와 자유주의파 연합 대두(전쟁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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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태평양전쟁 일본 근현대사 6
요시다 유타카 지음, 최혜주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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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 시작된 미일교섭의 최대 쟁점은 중국 문제였다. 미국의 철병 요구에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이 응하려 하자, 육군은 강경하게 반대 입장을 편다. 도조 히데키(1884-1948) 육군대신은 "철병 문제는 심장이다. (중략) 육군으로서는 이것을 중대시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주장대로 했다간 지나사변(중일전쟁)의 성과를 궤멸하는 것이다. 만주국도 위험하다. 더욱이 조선 통치도 위험하다"고 주장하였다. "일종의 도미노이론이지만, 이에 따라 교섭 타결의 전망을 잃어버린 고노에 내각은 어쩔 수 없이 총사직을 하여, 10월 18일에는 도조 히데키 육군대장을 수반으로 하는 도조 내각이 성립한다."(29-30)


강경 입장으로 돌아선 일본은 1941년 11월 5일 어전회의의 <제국국책 수행요령>에서 '영미란전쟁을 결의'하면서 "무력 발동의 시기를 12월 초두로 정하여 육해군은 작전 준비를 완성한다"고 결정한다. 차후 "외교 교섭을 계속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그 성격은 개전 결의를 위장하기 위한 '기만 외교'로서의 측면을 강화해 간 것이다."(31) 그러나 해군은 육군과 달리 "대영미 개전이라는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 관료적 이해(대미 전비 확충)를 추구하는 얼핏 모순되는 방침"을 취하였다. 즉 "군비 확충에 필요한 예산과 물자를 획득하기 위해 무력남진정책을 추진하되, 충분한 승산이 없는 대미영전은 회피하고 싶다는 것이 해군의 속마음이었다."(60)


육군은 "북방에서의 대규모 작전 행동이 불가능한 동계 중에 영미에 대한 남방 작전을 종료시킨 다음 1942년의 독일군의 춘계 공세에 호응하는 형태로 대소전을 개시"할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미일교섭이 지연되고 대미영 개전 시기가 늦춰지면, 이 작전 구상은 붕괴되어 버리기에, 육군은 "외교 교섭에 기한을 두는 것에 구애"받을 수밖에 없었다. 즉, "군사 논리에 따라 외교가 규정"되는 전도현상이 발생한 것이다.(63) 문제는 "전쟁에 대한 벼랑 끝 외교 정책의 정치적 귀결이다." 국내의 강경론이 정책 결정 과정을 역규정하면서, 대미 타협 주장이 국론을 분열시켜 강경파에 의한 쿠데타나 내란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신중론을 잠식했던 것이다.(68)


진주만 기습으로 대표되는 초기작전은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위기의 징후는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해군의 잠수함부대는 상선과 유조선 등에 공격을 집중하여 일본의 해상 교통로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에 비해 일본 해군의 잠수함부대는 주목표를 미해군 함정에 두었기 때문에 충분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반대로 강력한 대잠 능력을 가진 미해군에게 궤멸당했다." 더구나 말레이해전 후 1년도 되지 않아 "연합군 함선의 방공 능력이 한층 향상됨에 따라 육공기에 의한 백주 공격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1942년 8월부터 시작된 "과다카날 섬을 둘러싼 공방전에서 솔로몬 해역은 문자 그대로 육공기의 '무덤'이 되었다."(74-5)


1941년 12월에 있던 중부태평양의 "웨이크 섬 공략 작전은 이도(離島,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를 둘러싼 공방전에서 제공권 장악이 갖는 결정적인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아울러 육상 전투에서도 "일본군의 주력 전차인 97식 중전차와 95식 경전차는 미군의 M3 경전차"에 고전하는 형편이었다. "장갑 면에서도 탑재포의 관통력 면에서도, 미군 전차의 대전차전 능력이 일본군의 것을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중기가 되면 "한층 강력한 M4 중전차를 전선에 투입하는데, 이미 이 단계에서는 일본의 전차병에게 97식 중전차나 95식 경전차는 '철로 만든 관(棺)'에 지나지 않았다."(75-6)


"1942년 5월 7일부터 8일에 걸쳐 싸운 산호해 해전은 사상 최초의 공모끼리의 전투였다. 미국 측에서는 공모 '렉싱턴'이 침몰했고, '요크타운'이 손상을 입었으며, 일본 측에서는 소형 공모 '쇼호'가 침몰하고, '쇼가쿠'가 대파되었다. 전술적으로는 일본군이 조금 우세한 전투였지만 일본군은 해상으로부터의 포트모르즈비 공략작전을 어쩔 수 없이 연기할 수밖에 없게 되어 전략적으로는 패배했다. 또 대파된 '쇼가쿠'와 다수의 함재기를 잃은 '즈이가쿠'의 2공모는 모두 1개월 후인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할 수 없었지만, 미해군은 '요크타운'의 수리를 단기간에 마치고 전열에 복귀시켰다. 이것은 미드웨이 해전의 운명을 가르는 것이 되었다."(105-6)


미드웨이 공략작전의 주목적은 "미 주력 함대의 격멸이었지만, 둘리틀 중좌가 폭격대를 이끌고 일본 본토에 첫 공습을 가한 것도 작전의 실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체면을 구긴 일본 해군은 본토의 초계 라인을 동쪽으로 연장할 필요가 있었고, 전초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미드웨이 섬 공략이 필요했다. "6월 5일 미드웨이 섬 공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일본은 미해군의 급강하 폭격대에 공격을 받아 눈 깜짝할 사이에 '아카기' '가가' '소류'의 3공모를 잃어버렸다. 남은 '히류'의 반격으로 미공모 '요크타운'을 대파시켰지만(나중에 일본군의 잠수함 공격으로 침몰), '히류'도 미군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결국 미드웨이 해전은 일본 해군의 대패로 끝났다."(106-7)


1942년 8월 7일 시작된 과다카날 전투에서의 손실은 "전쟁 경제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해 전력을 급속하게 증강시키고 있던 미국보다, 일본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다. 특히 초기작전의 성공을 지탱해온 숙련된 항공기 탑승원을 다수 잃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나아가 전사자들 가운데 "직접 전투에 의한 전사자는 5,000~6,000명에 지나지 않고, 남은 것은 기초 체력의 자연 소모에 따른 '영양실조증, 열대성 말라리아, 설사 및 각기 등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전사자 중의 약 70%는 선박에 의한 식량 및 의약품의 보급이 끊어진 상황 아래서 생긴 광의의 아사자였다. 그리고 과다카날 섬의 이 비극은 그 후 각 지역의 전장에서 반복된다."(109)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조선 내에서 황민화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1942년 10월에는 조선청년특별연성령이 공포되고, 취학하지 않은 17세 이상 21세 미만의 청년 남자를 각지의 청년특별연성소에 입소시켜, 군대나 군수 산업으로의 동원을 위한 예비 훈련을 의무적으로 행하도록 하였다. 또 같은 해 5월에는 <국어보급운동요항>이 제정되어 일본어 보급 운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 민중에게 우선 심각한 영향을 미친 것은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실시한 인적 자원의 강제 동원, 이른바 '강제연행'이다.(130) 일본 전시 체제는 생활 수준 유지를 중시한 독일과 달리 본토에서도 "전시 체제의 강화와 국민 생활의 궁핍화가 병행"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143)


1943년 4월 18일에는 "솔로몬 제도의 전선 기지를 시찰 중인 야마모토 이소로쿠(1884-1943)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비행기 안에서 전사했다.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야마모토의 전선 시찰을 사전에 탐지한 미군은, 16기의 전투기에 의한 잠복 공세로 야마모토의 탑승기를 격추한 것이다." 5월 12일에는 "알류샨 열도의 애투 섬에 미군의 1개 사단이 상륙"하자, 일본군 수비대는 최후의 돌격을 행하고 전멸한다. 대본영은 여기서 "통신이 완전히 두절, 전원 옥쇄(玉碎)한 것을 인정한다"라는 형태로 처음 '옥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고도(孤島)의 수비대가 전멸할 때마다 처참한 전장의 현실을 은폐하는 옥쇄 캠페인이 전개되었다."(156-7)


※ 일본군이 무력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우려가 대두되어 1944년 2월 25일 퀘제린섬, 루오트섬 전멸 발표부터 '옥쇄' 표현 삭제


"오키나와전에 패배한 뒤에도 일본군의 항전이 계속되지만, 중요한 것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전사자 대부분이 마리아나 함락 전후의 절망적 항전기에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1944년 1월 1일 이후의 전사자(패전 후의 전사자 포함)가 전체의 87.6%에 달하는데, 이는 종전 결단이 늦춰지면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잃어버렸는가"를 잘 보여준다.(203) 1945년 3월 9일의 도쿄대공습을 시작으로 이어진 도시 폭격으로 패전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지만, 천황은 "다시 한 번 전과를 올리고 나서가 아니면 (전쟁 종결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서, 전쟁 책임자 처벌 문제를 회피하는 조건에서 강화를 성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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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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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해도 좋지만, 여전한만큼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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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 일본 근현대사 4
나리타 류이치 지음, 이규수 옮김 / 어문학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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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메이지 헌법 체제에 대항하여 러일전쟁 이후부터 1920년대까지 벌어진 정치적 자유 획득 운동을 가리키며, "국가적 가치에 대한 비국가적 가치의 자립화를 특징으로 한다."(294) 그 첫걸음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배상금이 포함되지 않자, 도쿄 히비야 공원에 군집한 대중이 내무대신 관저와 강화에 찬성한 국민신문사를 불태우면서 7일 동안 격렬하게 항의를 벌인 히비야 방화사건(1905.9.5)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사태가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 수행"된 것이다. "번벌과 압정에 대한 비판은 '국민'이라는 이름 아래 팽창주의적인 국권"을 요구하는 형태를 띄었으며, 이는 내셔널리즘과 결합된 '제국'의 데모크라시였다.(24-5)


'민본주의'는 요시노 사쿠조가 데모크라시의 번역어로 삼은 말이다. "당시 데모크라시에는 '민주주의'라는 또 하나의 번역어가 있었는데, 이 뜻은 '국민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것으로 군주국 일본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배척당했다. 요시노는 민본주의를 주권의 존재가 아니라 주권 운용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정치의 목적을 '일반 인민의 이복(利福)'에 두었고, 정책의 결정은 '일반 인민의 의향'에 따르는 것이라 말했다." 다시 말해, "주권은 천황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인민을 위한' 정치, '인민의 의향'을 중시하는 정치로서 민본주의를 제창한 것이다."(45-6) 국가를 앞세운 민본주의 논의는 '안으로는 입헌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를 주창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러일전쟁 이후 시베리아 출병과 매점매석 등으로 쌀값이 폭등하자, "물가의 등귀와 생활난이라는 말이 잡지와 신문에 자주 등장"하고 민심이 악화되었다. 생활고가 야기한 쌀소동 사태는 정당 정치를 낳아 최초의 본격 정당 내각인 하라 내각이 탄생(1918.9.29)한다. 하라 내각은 선거 자격을 직접국세 10엔에서 3엔 이하로 낮추어(1919.5) 유권자 수를 "134만 명에서 286만 명"으로 늘리고, "소선거구제를 도입하여 의원정수를 381의석에서 466의석으로 늘렸다."(116) 여당인 정우회와 야당인 헌정회는 모두 적극적으로 지역 이익의 도입을 도모하였고, "국가에 의해 사생활 영역에 대한 합리적 개선이 시도되어 근대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국민'의 육성이 촉구되었다."(120)


쌀소동 이후, 사회개조를 주장하는 움직임은 네 가지 조류로 나뉜다. 첫째는 "정당정치의 확대와 민의 존중을 주장"한 민본주의 논의의 진전이고, 둘째는 사회주의 운동의 복권이다. 셋째는 "일본과 천황을 전면에 내세워 '국체'에 입각한 개조를 추구한 국가주의 단체" 운동이었고, 넷째는 국가와 시정촌이 주도한 새로운 사회 편성 시도였다.(130) 데모크라시 논의가 여전히 '국민'을 근거로 이루어졌지만, "노동자와 농민, 차별받는 사람들에게도 1920년 전후의 시기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이 다수 조직되어 가와사키 조선소와 야하타 제철소의 노동쟁의를 비롯해 아시오와 히타치 광산 등 쟁의 건수도 늘어났다."(147)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식민지 조선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하라 내각은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대검(帶劍)을 중지"시켰으며, "다음 해에는 통치 방침을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로 변경하여 '문화통치'를 추진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등 조선어신문도 창간되었다."(176) 도쿄제국대학에서 니토베 이나조의 뒤를 이어 식민정책강좌를 담당한 야나이하라는 전제적 착취나 동화 정책이 아닌 "자주 노선에 입각하여 별개의 '역사적 사회'를 지닌 조선인과 협동하는 방향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 역시 "조선과 일본과의 '제국적 결합'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식민지 통치론"에 불과했다.(181-2)


관동대지진(1923.9.1) 당시 "조선인 학살에 직접 관여한 자가 '민중'이었다는 사실은 식민지 사람들을 차별, 배제하면서 그들에게 공포의 심성을 품은 제국 사람들의 존재 양태를 보여준다." 그간 정부를 향해 각종 소요를 일으키던 잡업층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을 진재 사태 속에서 분출"하였다.(202) "개인주의의 진전과 모더니즘 문화의 대두, 사회운동의 전개"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공격받았고 내셔널리즘이 강화되었다. '국체'와 '순풍미속(醇風美俗)'을 전면에 내세워 도시화에 따른 문제를 해결하고 국민 통합을 일궈내려는 움직임은 "1923년 11월 내려진 '국민정신작흥조서(國民精神作興詔書)'로 집약되었다."(205)


1925년 기요우라 내각이 착수한 '보통선거―치안유지법 체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통치기구가 재편성된 것의 귀결이었다. 귀족원과 추밀원 개혁, 노사관계와 소작관계의 입법화 등 하라 내각 이후의 사회 재편성과 관련된 일련의 흐름이 보통선거법과 치안유지법으로 체계화되었다." 이는 "정당을 '정치적 지배계급의 하나의 분지(分肢)'로부터 '국가 의지 결정의 중심'으로 만든 개변"이었고, 한편으로는 한층 확대된 선거권 부여(25세 이상의 제국신민 남성에게 선거권 부여)를 통해 "사람들을 '국민'으로 자각시켜 주체적으로 국가와의 일체화를 촉구"하려는 움직이었다. "통합(보통선거)과 배제(치안유지법)를 통해 선별적으로 '국민화'를 도모한 것이다."(239)


다이쇼 천황이 사망(1926.12)한 후 출범한 다나카 내각의 초점은 무엇보다 '외교 문제'였다. 다나카 내각이 동방회의에서 발표한 '대지정책강령(對支政策綱領)'은 만몽 지역을 중시하여, "제국의 권리 이익과 재류방인의 생명 재산이 침해될 염려가 있을 때에는 '단호한 자위 조치'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또 중국으로부터 만주 지역을 분리하는 '만몽분리론'도 제시되었다. 여기서 헌정회의 외교정책이었던 협조외교(시데하라 외교)는 무단 외교(다나카 외교)로 전환되었다."(255) 아울러 치안유지법을 개정하여, "국체변혁의 죄에 최고형을 사형으로 상향 조정하고, 대상 범위를 '결사의 목적 수행을 위해서 행동하는 자'로 변경"하는 등 자의적 규정을 부가했다.(262)


하마구치 내각(1929.7.2) 시기에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사상과 운동을 되살리면서 기존 사회관계의 개량을 시도한 관료들이 출현했다. 관료들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운동 주체인 '민중'(노동자와 농민, 여성)의 요구를 포섭하고 국가 주도로 사회개조를 실천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여 실현하려고 노력했다."(266) 그러나 사회개조 운동이 급진화되면서, 노동쟁의와 소작쟁의가 늘어나고 "이와 병행하여 군부의 헤게모니가 대두할 징후"가 나타나자, 정당정치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었다.(269) 이 모든 혼란을 집어삼킨 만주사변은 "대립과 대항의 존재를 해소하고 소거"시켰다. '끓는 조국애의 피, 일본에 넘쳐 흐른다!'는 <도쿄아사히신문>(1931년 11월 19일)의 표제어였다.(286-7)


※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 구분

(1) 러일전쟁기(1905년) ~ 제1차 호헌운동(1912~1913년) : 번벌(藩閥) 정치 타파를 내건, 전국적인 도시 민중 운동. 군비 확장 반대와 악세 폐지를 요구하면서 조슈번벌의 핵심인 가쓰라 타로 내각을 무너뜨렸다. 이는 일본의 민중운동이 천황제 정부에 승리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정당에 기초하지 않던 정부가 이제 천황의 조칙(詔勅)이라는 권위와 위세를 통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다. 운동을 주도한 계층은 러일전쟁 이후 자본주의 발전이 만들어 낸 비특권 자본가 계층과 ‘단나슈’로 일컫는 도시중간층이었다.

(2) 제1차 호헌운동 ~ 쌀소동(1918년) : 도시중간층을 기반으로 데모크라시 운동의 뿌리가 확대되어 각지에 보통선거 요구를 중심으로 한 자주적인 시민정치결사가 생겨났다. 요시노 사쿠조는 주권 운용을 민중의 의사결정에 맡긴다는 '민본주의'를 헌정의 기본 이념으로 설정하고, 구체적인 정책으로서 안으로는 보통선거와 정당내각제의 채용, 밖으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자행된 무단적 침략정책의 포기를 주장했다.

(3) 쌀소동 ~ 제2차 호헌운동(1924년) :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근로대중의 정치적 자각이 고조되었고, 보통선거운동이 전국적 대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평화에 대한 요망도 제기되어 시베리아 출병은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해 패배로 끝나고, 워싱턴회의를 통한 군비축소는 대중에게 환영을 받았다. 헌정회, 혁신구락부, 정우회의 호헌 3파에 의한 제2차 호헌운동은 정당정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그러나 정당정치가 1929년 세계대공황과 중국민족운동이라는 새로운 사태를 타개하지 못하자 점차 군부 파시즘이 대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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