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모더니티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848년 튈르리 궁전의 약탈과 바리케이드에서 벌어진 창조적 파괴의 달콤씁쓸한 경험을 겪은 뒤 보들레르가 느낀 근대성이라는 개념에는 모순이 있다. 현재와 맞붙어 싸우고 미래를 창조하려면 전통은, 필요하다면 폭력에 기대서라도 전복되어야 한다. 하지만 전통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이해의 닻을 빼앗기고 무력하게 표류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1860년에 이렇게 썼다. 예술가의 목표는 근대를 '영원하고 확고부동한 것'을 다루는 예술의 다른 절반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일시적이고 덧없고 우연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플로베르의 딜레마와도 공명하는 어떤 문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충분히 빠르게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 종합이 도출되고 그것을 손에 넣기도 전에 우리를 끌고 가던 유령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렵다. 그러나 온통 이렇게 서두르는 바람에 엄청난 양의 인간쓰레기가 뒤에 남겨진다. '뿌리 뽑힌 무수한 인생'을 무시할 수는 없다."(28-9)


발자크는 도시에 충만해 있는 근대성의 신화를 제거하여 부르주아들의 혼탁한 욕망이 연출하는 연극을 꿰뚫어보았다. "발자크는 대개 시골 출신이 파리 생활에 적응해가는 통과의례 장면을 묘사하는데, 상인이든, 야심적인 젊은 귀족이든, 아니면 연줄이 좋은 여자이든 상관없다. 일단 적응하고 나면 그들은 절대로, 설령 자기들이 파리에서 겪은 실패 때문에 결국 파멸하게 되더라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시골 출신이라는 것, 시골 권력에 대한 격렬한 부정은 이렇게 발전하여 파리 생활의 창립 신화 가운데 하나가 된다. 즉 파리는 독자적인 실체이며, 어떤 면으로든 그것이 그렇게 경멸하는 지방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신화이다."(52) 파리에서 "하층계급이든 중간계급이든 명문귀족이든 온갖 사회적 지위의 사람들은 모두 '필요'라는 무자비한 여신, 돈과 명예와 오락의 필요가 휘두르는 채찍질로 이리저리 달리고 뛰고 법석을 떤다. 이곳을 관장하는 것은 자본의 순환이다."(54)


발자크는 부르주아들이 친밀성이나 내면적 감정을 느낄 능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차가운 계산과 돈 계산을 기준으로 한 이기주의, 의제자본擬制資本과 이윤 추구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다."(70) "시간과 공간의 말살이라는 관념은 숭고함에 대한 특별히 자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해석이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암시한다. 그렇다면 공간과 시간의 정복과 세계(어머니 대지)의 정복은 무수한 자본주의적 환상에서 축출되었지만 숭고한 성적 욕구라는 것으로 표현된다. 부르주아적 근대성의 신화에 관해 뭔가 결정적인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발자크에게서 미래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무너져 현재의 시간으로 바뀌는 때는 바로 희망, 기억, 욕구가 수렴되는 순간이다. "미래에 대한 열망과 과거의 회상을 통해 현재의 더없는 행복을 세 배로 늘린다." 이것은 개인적 계시와 사회적 혁명의 최고의 순간, 발자크가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고상한 순간이다."(78-9)


발자크는 도시를 "기억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집합적 기억을 위한 특별한 장소를 상상 속에 구축한다. 이것은 혁명의 순간이 오면 '번뜩이는' 어떤 정치적 감수성의 근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작업 중인 도시를 근거로 한 혁명적 변형으로서의 근대성의 신화이다."(85) 그러나 오스망은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이라는 명제로 근대성의 신화를 포장한다. "풍선과 삼각측량용 망루로 무장한 오스망 역시 그것을 땅 위에서 재구성하는 일에 착수하면서 자신의 상상 속에서 파리를 마음대로 처리했다.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발자크는 도시가 자기 속에 있는 하나의 감정적 존재인 것처럼 관련된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지시하고 꿰뚫어보고 해부하고 내면화하는 반면, 오스망은 그 환상적 충동을 전환시켜 표현과 행동의 기술면에서 국가와 자금주들이 선두를 차지하는 확연하게 계급적인 기획을 만든다."(81)


"소수의 예외는 있지만 1840년대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여성운동가, 개혁가들은 도시를 미래의 좋은 사회가 되어야 할 어떤 것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정치적·사회적·물질적 유기체 형태─하나의 신체정치─로 보고 관심을 가졌다."(98) 신체정치 하에서 "정신적 권력은 사제의 손에서 지성인들─과학자와 예술가─의 손으로 넘어가야 하며 속세의 권력은 산업인 본인들 가운데서 지도적 인물이 가져야 한다. 후자의 관심은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최소비용과 효율적 형태의 행정을 고안하여 직접 생산자들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정부의 기능은 "유용한 업무가 방해받지 않도록" 보장해주는 일이 될 것이다. 효율적인 행정이 지시에 의한 통치를 대신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일할 것이다." 생시몽은 1803년에 이미 이렇게 선언했다. 결국 사회체제의 질병이 치유되려면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적절한 생산조직과 유용한 노동이다."(103)


노동자 자신들이 결성한 독립적 생산조합이라는 구상은 공화주의자와 노동자들 사이에서 중심 의제였다. 그러나 프루동은 "생산조합이 개별적인 자유와 주도권을 질식시킬까봐 우려했고,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구분을 철폐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관계들을 좀더 조화롭고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프루동은 공동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만약 "사유재산이 장물"이라면 "공동체는 죽음"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1840년의 공산주의자 회의에 참가한 많은 연사들은 공동체와 공산주의가 호환 가능한 용어라고 말했으며, 프루동은 중앙집중식 정치권력과 의사결정과정을 혐오했다."(116-7) 하지만 프루동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자이므로 그들이 생산한 가치에 따라 급료가 지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 노동의 화폐numeraire라는 것을 주창하려고 애쓰다가 풀 길 없는 혼란 상태에 빠져버렸다."(120)


1848년 6월에 부르주아적 근대성 개념과 맞부딪힌 또다른 근대성 개념은 "인구 전체를 양육할 수 있고, 시골과 성장하는 도시에 사는 프랑스 국민 대다수가 겪고 있던 빈곤과 몰락의 여건을 다룰 능력이 있는 사회공화국social republic의 이상에 기반을 두었다. 그것은 사유재산에 대해서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였고, 걸핏하면 평등, 자유, 공동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놓고 혼란을 빚었지만, 노동과 공동체 활동이 결합된 형태가 보다 적절한 사회관계와 보급 표준의 형태를 위한 대안적 기반을 제공할 것이라는 데 깊은 믿음을 품고 있었다."(130) 이처럼 당대 파리에서는 도시의 적절한 재건설을 추구했던 유토피아 사상가나 도시 이론가들의 온갖 사상이 들끓었지만, 1848년 이후 "그 도시를 소유하고 그것을 자기들만의 특별한 이익과 목적에 맞추어 개조하면서 대중에게는 상실감과 허탈감만 남겨준 것은 오스망과 개발업자, 투기꾼, 자금주, 시장의 힘이었다."(133)


"오스망이 업무를 완수한 뒤인 1869년에 출판된 <감정교육>은 그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생명 없는 사물에 대한 정교한 (그리고 아주 뛰어난) 묘사가 풍부하다. 그 도시는 우리의 감각에서 하나의 독립적인 예술 작품으로 파악되지만 '감정을 가진 존재'나 '신체정치'로서의 성격은 완전히 잃어버린다." 루이 나폴레옹이 그려나간 제2제정의 역사는 "자본의 축적이 가지는 힘에 맞서 황제권력 주위에 신체정치의 감각을 재구축하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자본의 축적이 그러한 정치 형태에 적대적이라고 본 클라크의 관찰은 아주 타당하다. 경제적 해방(예전에는 생시몽주의자이던 미셸 슈발리에가 1860년에 맺은 영국과의 자유 무역 협정으로 시작하는)은 황제 권력을 서서히 좀먹기 시작했다. 제국을 몰락시킨 것은 공화주의자(어쨌든 이들도 대부분 사유재산과 기업의 자유에 이끌리고 있었다)라든가 노동자의 저항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이기도 했다."(133-4) 


1848년에 이미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버린 자본과 노동력의 잉여는 건조환경에 대한 대규모 장기 투자 계획을 통해 흡수될 예정이었는데 이는 공간관계의 개선에 초점을 맞춘 계획이었다. 제국이 선언된 지 1년이 못되어 1,000명 이상이 튈르리 궁의 건설현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미처 등록되지도 않은 수천 명이 철로 공사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1851년만 해도 한산하던 광산과 제련소는 증가하는 수요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 가동하고 있었다. 아마 자본주의 최초의 대위기였을 사건이 자본과 노동력 과잉을 수송과 교통 시스템의 재편 작업에 장기적으로 채용함으로써 극복된 것으로 보였다."(161) "하지만 자본과 노동의 과잉을 흡수하는 그러한 과정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자본주의체제 하에서의 '생산적' 고용이란 항상 이윤을 내는 고용을 의미한다는 것이 문제였다."(162)


생시몽의 영향을 받은 페레르 형제는 "오래전부터 신용 시스템이 경제 발전과 사회 변화의 중추라고 생각했다. 홍수처럼 선전을 쏟아부으면서 그들은 소액 저축을 동원하여 장기 프로젝트를 감당하도록 신용기관들을 치밀한 위계 형태로 조직하여 저축을 민간 차원으로 확산하는 길을 모색했다. '자본의 연합'이 그들의 주제였고, 미래의 발전에 대한 거대하고 대담한 투기가 그들의 실천이었다."(175) "위대한 투기자는 파리와 그 도시 형태를 만드는 책임을 질 뿐 아니라 전 지구를 지휘할 열망을 품는다. 그 열망을 달성하는 수단은 자본 연합이다. 졸라가 생시몽주의 원리가 처음 형성된 지 70년 가량 지난 뒤 그것을 극히 자신만만한 형태로 불러내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는 사실은 프랑스에서 19세기 내내 이 사고 모델이 꾸준히 존속해왔다는 것을 충분히 말해준다. 졸라가 불러낸 공식, "과학의 도움을 받은 돈은 진보를 만든다"는 공식은 모든 차원에서 공감을 얻었다."(182)


부동산 소유권의 사회적 의미와 방향이 빠른 속도로 바뀌면서 "파리의 부동산은 점점 더 순수한 재정적 자산으로, 자본의 일반적인 유통과정에 통합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의제자본 형태로 평가되었다."(185) "1840년대의 자산 소유자 비율을 보면 점포주와 수공업자들이 지배적(절반)이었고 자유전문직과 대상인이 나머지 1/3을 차지했다. 1880년이 되면 이 유형은 완전히 변한다. 점포주와 수공업자의 비율은 13.6%로 떨어졌고 자유전문직도 8.1%로 떨어졌으며, 오로지 지주이기만 한 사람들 계층(53.9%)이 그 공백을 메웠다. 대상인(특히 '회사'라는 새로운 범주와 결합했을 때)만이 예전 지위를 유지했다." "중하류층과 소부르주아들은 부동산 소유권에서 계속 배제되었고, 그들의 자리는 지주와 대상인들로 이루어지는 상류층 부르주아가 차지했다. 그러한 변화는 수공업과 소생산자와 점포주가 대상인과 금융에 종속되는, 상업, 금융, 제조업 구조의 중대한 변화와 일치한다."(187-8)


"좀더 순수한 자본주의적 노선에 따르는 토지와 부동산 시장이 새로운 신용시스템의 성장에 고무되어 재편성된 현상(좌안에서처럼 전통주의자의 저항 중심지도 물론 있지만)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즉 파리 내부 공간의 재편성이 공간을 장악하려는 여러 다른 사용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격 경쟁에 점점 더 예속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노동 인구의 대다수는 변두리(일터까지 더 먼 길을 가야 하는)로 흩어지거나, 아니면 도심 가까이의 집에서 비싼 임대료를 내면서 비좁게 살아야 했다. 공장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노동 과정을 바꿀 것인가, 근교로 나갈 것인가 하는 선택에 직면했다. 파리의 재건설을 통해 노동과 자본의 잉여를 흡수하는 일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병적이라고 여겼던 온갖 부정적인 결과들─퇴거당하거나 격리되는 일이 늘어나고, 일하러 더 먼 길을 가야 하며, 치솟는 집세와 인구과밀의 환경─을 가져왔다."(205)


"1848년 혁명이 파리를 해체하고 재조직했던 만큼, 수도에서 완전고용의 문제는 절박한 사안이었다. 이 문제는 공공사업의 진행 속도가 빨라지자 부분적으로 해결되었다." 그러나 1868년 이후 "정치적·경제적 이유 때문에 그랬듯이 공공사업을 주춤거리게 되면 세금 수입의 감소와 건설 분야의 실업사태는 매우 심각한 사안이 된다. 이것이 부르주아들의 견해와 달리, 일반적인 생각처럼 오스망 반대파가 결코 아니던─그는 그들의 일자리를 만들어낸 주 원천이었으며 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노동자들을 급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코뮌에 참여한 사람들 중 건설노동자의 비중이 기형적으로 컸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212) 1860년대에 실질임금이 감소하자 "사회가 진보한다는 주장은 웃음거리가 되고 축제는 노동계급의 비용 부담으로 개최된 소름끼치는 사치처럼 보였다."(218)


오스망은 권력 기반이 허약한 나폴레옹 3세와 자신에게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도시 안에서 (지주와 상업 자본가, 그리고 노동자 간의) 계급 연대를 꾸려내고, 황제 권력을, 또 그 연장선에서 자신의 권력까지를 좀더 확고한 기반 위에 세우는 일을 도와야 했다."(222) 오스망은 "제2제정기 내내 파리의 국가 기구를 지배했다. 그가 그저 자본의 급속한 축적을 통해 고삐 풀린 사회 세력의 폭풍을 잘 견뎌냈을 뿐이라고 한다고 해서 결코 그의 입지를 축소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폭풍을 절묘한 기술로 타고 넘었고, 놀라운 기술과 전망을 가지고 그 소용돌이치는 힘을 약 16년 가량이나 조율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만든 폭풍도, 길들인 것도 아니었고 프랑스의 경제, 정치, 문화의 진화에 내재하는 깊은 소용돌이였으며, 결국 그것은 중세적 파리를 철거반원demolisseurs에게 내던진 것만큼 무자비하게 그를 내던졌다."(224)


"임대료에 비해 노동자 소득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은 이 도시의 주거 상황에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 "오스망이 벌인 사업은 도시의 슬럼을 없애기는커녕, 노동자 소득이 정체한 시기에 임대료가 전반적으로 상승하는 데 기여하는 것과 정비례하여 슬럼 형성 과정을 촉진했다." "그러한 암담한 주거 상황이 사회적 영향을 낳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미 가족 형성에 강력한 장애물이던 상황을 더 확실하게 약화시켰다."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끈질기게 남아 있던 콜레라와 티푸스의 위협이 비위생적이고 시설이 부족한 주거 때문이라는 증거도 상당히 있었다. 공간이 워낙 부족하다보니 사회생활은 대부분 길거리로 밀려났고, 요리 시설 부족 때문에 이러한 추세가 심화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을 카페나 카바레에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장소가 정치적 선동과 의식 형성의 집단적 중심이 되었다."(286-7)


"가톨릭 우파인 르플레에서부터 사회주의 좌파인 프루동에 이르기까지, 의견의 범위가 워낙 넓다보니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주거 문제를 사유재산의 틀 안에서 다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주택 소유란 정부 보조금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정부는 정치적 기반으로 점점 더 세력이 커지고 있던 지주들의 강력한 계급 이익뿐 아니라 오스망 같은 사람의 결정적인 행동 원칙이던 시장의 자유에 대한 전반적인 집착과도 충돌했다. 강력한 계급 세력 때문에 이데올로기적 혼란이 심해져 주거 문제에 관해서는 오스망의 지휘로 이루어진 빈민가 철거 이상의 일체의 행동이 좌절되고 중단되었다. 주거 개혁이 조금이라도 착수되기 시작한 것은 코뮌이 일어나서, 비참한 슬럼과 안마당이 그 어떤 노동자 도시보다도 더 심한 혁명적 행동의 온상임을 개혁가들이 파악한 뒤의 일이었다."(288-9)


"제국이 보여주는 스펙터클은 원래 나폴레옹 전설의 대중추수주의와 제국 권력을 과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순수하게 정치적 측면의 것이었다. 로마 제국의 외피를 걸치고 유럽 문명의 심장이자 머리가 되겠다는 파리의 도시계획은 오스망이 위임받은 임무 가운데 일부였다."(301) "상품 그 자체가 스펙터클이 되어 갖는 위력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은 신흥 백화점이었다." "상점의 쇼윈도는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게 만드는 유혹 장치로 꾸며졌다. 백화점 내부에 눈에 띄게 높직하게 쌓인 상품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스펙터클이 되었다. 상점들은 길거리로 열려졌고, 사야 한다는 강제성을 느끼지 않은 채 대중들이 들어오도록 부추겼다. 한 부대는 될 만큼 많은 호객꾼과 영업 사원, 매력적인 젊은 남녀들이 내부 공간에서의 행동을 순찰하면서 동시에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노력했다. 그 속에는 노골적인 관능성이 개입되어 있었다."(308-9)


상품화와 스펙터클은 소비와 외관에 근거한 새로운 계급 차별 감각을 양산했고 이는 부르주아들에게 불안을 안겨주었다. "스펙터클을 통치와 화해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문화 내에서 좀더 불온한 요소가 작동하고 있다는 징후가 있었다." 일례를 들자면 "1848년이나 1851년의 항거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의 장례식마다 무덤 옆에서 열정적인 조문을 읊는 거창한 정치적 행사가 되는 관례가 생긴 것이었다. 1869년에 나폴레옹의 조카가 공화파 언론인인 빅토르 누아르와 언쟁을 하다가 그를 살해하자, 누아르의 장례식에 참가한 인원은 적어도 2만 명은 되었다. 페르라셰즈 묘지나 벨빌에서의 하강이 혁명의 조짐으로서 정권에 불행을 예고하는 위협적인 스펙터클과 융합되면서, 이 모든 상징적 질서가 스스로에게 화근이 되었다. 연극성과 스펙터클은 양편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요인이었는데, 제국이 약해짐에 따라 스펙터클의 구심점이 상품화뿐 아니라 정치적인 반대로도 이동한 것이다."(320)


"1870년에도 계급관계의 낡은 패턴─전통적 지주, 수공업 노동자와 장인, 점포주, 공무원─을 여전히 쉽게 식별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계급 구조가 그들 위에 더 확고하게 덧씌워지고 있었고, 그들 자체도 다수의 신흥 상층 부르주아가 구사하는 국가독점자본주의와, 파리의 소규모 산업과 상업의 넓은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교환관계로 모든 노동이 점점 더 포섭되는 현상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탈기술화는 수공업 노동자가 가졌던 권력을 잠식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경제적 세력은 이러한 틀 안에서 이동하고 있었다. 자금주들은 적어도 파리의 산업과 상업 분야에서는 권력을 공고히 했지만, 노동자 가운데 한 작은 집단은 점점 커져가는 비숙련 노동자와 빈민들의 대집단 내부에서 특권적 노동 귀족의 지위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동은 다분히 긴장감을 발생시켰으며, 그 모든 것들이 1868년과 1871년에 파리에서 벌어진 격렬한 계급투쟁에서 구체화되었다."(332)


"낭만주의와 유토피아주의는 각종 사상이 종교에 복종하는 데 대항하는 최전방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다른 방어와 저항의 수단을 찾아내야 했다. 쿠르베가 돌연히 열어젖힌 사실주의 회화로의 돌파구, 1848년의 폭력에 의해 훨씬 더 비극적인 차원에서 주어진 근대성에 대한 보들레르의 타협 없고 치열한 포용, 그리고 처음에는 혼란을 겪었지만 곧 유토피아적 구도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프루동의 태도가 갖는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쿠르베, 보들레르, 프루동은 제휴할 수 있었고 또 제휴했다. 낭만주의와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그들이 환멸은 1848년에 대한 전형적인 사회적 반응이었고, 그것은 사실주의와 실용적 과학을 인간 감정을 해방시키는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낭만주의자였을지도 모르지만 메스로 무장한 낭만주의자로서, 종교와 제국의 권위주의를 떠나 실증주의와 초연한 과학의 방패 뒤에 아지트를 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364-5)


"프랑스의 지리적 상상력은 오래전부터 과중한 환경주의와 인종주의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385) "만약 부르주아들이 걸핏하면 묘사하는 것처럼 노동자가 '야만인'이고 '천박한 대중'이고 그저 범죄자이고 '위험한 계급' 밖에 안 되는 존재라면 1848년은 그들이 어떤 위험을 야기하며 어떤 야만성을 발휘하려는지를 지극히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빅토르 위고는 노동자들이 '문명의 야만인들'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러나 1871년에 그랬듯이 1848년에도 이러한 연상이 나아가는 전반적인 방향은 역시 '문명'과 '질서'의 힘은 혁명가들을 개 또는 그 비슷한 존재로 추정되던 야만인들처럼 쏴죽일 도덕적 권리를 갖고 있다고 단정하는 쪽이었다. 파리에서 노동계급의 '타자'가 그렇게 인종차별적인 용어로 표현된다는 사실이 계급전쟁이 어찌 해서 그렇게까지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수행되었는지를 해명해준다."(386)


오스망은 도시를 자본가와 투기꾼과 환전상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이 그 파티에서 배제되었다고 느낀 사람들도 있었고, 모든 과정이 혐오스럽고 추잡하다고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 보들레르가 제시한 창녀라는 도시의 이미지가 특별한 의미를 띠는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이다. 제2제정은 항상 논쟁 중에 있는 파리의 이미지가 변화를 겪는 순간에 처해 있었다. 오래전부터 이 도시는 여성으로 묘사되었다. 발자크는 그녀를 신비스럽고 변덕스럽고 걸핏하면 타락하지만 또 자연스럽고 구질구질하고, 특히 혁명이 일어나면 예측불가능해지는 존재로 보았다. 졸라가 그린 이미지는 아주 다르다. 그녀는 이제 타락하고 야수 같은 여자가 되었고, "내장이 드러나고 피를 흘리고 있는" 여성이며, "투기의 대상이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탐욕의 제물이 된" 존재이다. 이렇게 야수처럼 변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혁명에서 봉기하는 것 외에 달리 또 있겠는가?"(378)


"부르주아 사유재산권과 계급 지위의 보존이 여성에 대한 통제에 의존하고 있는 남성우월주의 사회에서 자유의 이미지를 드 토크빌이 만난 것 같은─그보다도 더 심한, 창녀─무시무시하고 통제불가능한 종류의 여성으로 그리는 것은 틀림없이 부르주아 남성 심리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네가 그린 여성(<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은 바로 그녀가 그다지 순종적이지 않은 눈길을 한 보통의 창녀 모습이었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을 화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허츠는 계급적대감과 혼합된 거세 공포(졸라가 <제르미날>에서 그토록 명백하게 표현한)가 "정치적 압력을 받으면 남성 히스테리"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혁명적 행동에 가담했던 여성에 반대하는 남성들의 수사법에 담긴 지독한 폭력성은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412) "코뮌의 섬뜩한 후유증은 계급과 성별 간의 적대감이 서로 상승작용을 할 때 어떠한 폭력과 참혹함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었다."(415)


"1870~71년 사이의 경험 및 나폴레옹 3세와 제2제정의 퇴폐적인 '축제 물질주의'를 상대했던 경험으로 가톨릭 신도들은 광범위하게 영혼을 탐구하는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그들 대다수는 프랑스가 죄를 범했다는 인식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속죄의 표현이 등장하고, 신비적이기도 하고 거창하기도 한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비타협적이고 교황지상주의자인 가톨릭 신자들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권위의 존경에 의거한 법과 질서와 정치적 해결책으로 복귀하는 것을 선호했다. 또 법과 질서의 약속을 내건 쪽은 전반적으로 비타협적 가톨릭 신자인 군주주의자 본인들이었다. 자유주의 가톨릭 신도는 이 모든 것이 마땅찮았지만, 교황부터가 그들을 "사실상 프랑스의 골칫거리"라고 무시하는 마당에 무슨 세력을 동원할 만한 처지는 전혀 아니었다. 군주주의와 비타협적 가톨릭주의 사이에 연대가 강화되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건설을 보장한 것은 이 강력한 연대였다."(468-9)


# 프랑스는 회개하노라GALLIA POENIT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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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 천재들의 붉은노을
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 생각의나무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 건축, 현대 음악, 현대 철학, 이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과거를 통해, 혹은 과거와의 대비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무관한 것으로 규정한다. 현대 정신은 역사에 무관심해졌다." 그러나 역사적 변화는 "개인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탐구하도록 강요할 뿐 아니라 사회 그룹 전체에도 죽어버린 신념 체계를 개정하거나 교체하도록 강요한다. 역사의 멍에를 떨쳐버리려는 시도는 모순적이게도 역사 과정의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과거와의 모든 관계에 무관심해진 탓으로 상상력이 해방되어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구조가 마구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때 연속성이 지배하던 곳에 복합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현재하는 역사의 신속한 변화에 대한 의식은 관련성 있는 과거로서의 역사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사회적·정치적 해체의 진동이 날카롭게 느껴지던 세기말의 비엔나는 무역사적인(a-historical) 우리 세기의 문화를 싹틔운 가장 비옥한 온상 가운데 하나였다."(18-9)


신비평(New Critics)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영문학계를 주도하던 문학적 역사주의 연구자들을 무시간적·내면주의적·형식적 분석에 몰두하는 학자들로 교체했다. 정치학계에서는 뉴딜정책이 퇴조함에 따라 전통적 정치철학의 규범적 관심과 공공정책의 문제에 대한 실용주의적 관심이 행동주의자들의 무시간적이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지배에 밀려났다. 경제학에서도 수학적 취향의 이론가들이 사회적 성향의 제도학파와 정책 지향적인 케인즈주의자들을 밀어내고 세력을 확장했다. 음악 분야에서도 쇤베르크와 솅커에게 영감을 받은 새로운 명망가들이 음악학의 역사적 관심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그 자체의 역사적 성격과 연속성에 대한 높은 자각을 본질로 하는 철학에서도 분석철학파가 전통적 문제의 타당성에 도전했다. 새로운 철학은 언어와 논리라는 제한적이고 순수한 기능성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역사 일반과 그 학과 자체의 과거와의 연결을 모두 단절해버렸다."(21-2)


"프로이트의 도시에 있는 새로운 문화 제작자들은 거듭하여 자신들의 행동을 일종의 집단적 오이디푸스적 반항이라는 용어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의 반항 대상에는 자기들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그들이 물려받은 가부장적 문화의 권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폭넓은 전선을 형성하여 공격한 대상은 자신들을 길러낸 고전적 주류 자유주의 체제의 가치였다." "자유주의 이후 시대의 특징인 문화에서의 '현대성(modernity)'이라는 문제는 프랑스에서는 1848년 혁명의 후유증으로, 일종의 부르주아의 아방가르드적 자기비판으로 발생했고, 제2제국 때부터 1차 세계대전 전야에 이르기까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서서히 확산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에서는 1890년대에 대부분의 현대적 운동이 나타났으며, 그 후 이십 년만에 완전히 성숙한 단계에 도달했다. 오스트리아의 새로운 고급문화는 온실에서 자라듯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그 온실의 열기를 공급하는 것은 정치적 위기였다."(29-30)


# 오스트리아의 정치 상황

1. 귀족정치와 절대주의에 대항하던 영웅적 자유주의가 1848년의 충격적인 패배로 퇴장

2. 구질서가 무너지면서 순화된 자유주의자들이 어부지리로 권력 획득, 1860년대 입헌 체제 성립

3. 제한된 참정권을 바탕으로 의회 권력 유지 (도심 중산층에 국한된 취약한 지지 기반)

4. 농민, 도시 기술자, 노동자, 슬라브족 등의 참정권 요구 : 1880년대에 대중 정당을 결성하여 자유주의 체제와 대립

5. 반유대주의, 교권주의敎權主義, 사회주의, 민족주의 등 현대의 대중운동의 물결 속에 1900년 무렵 자유주의 권력 몰락

☞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무기력, 불안, 사회적 생존의 무자비함에 대한 자각 등의 분위기 형성


"오스트리아 부르주아를 프랑스나 영국 부르주아와 구별해주는 기본적인 사회적 사실 두 가지가 있다. 그들은 귀족정치를 없애버리지 못했고 완전히 그들에게 용해되지도 못했다. 또 그러한 취약성 때문에 황제를 경원하면서도 아버지-보호자 같은 존재로 여기고 그에게 의존했으며 깊은 충성심을 보였다. 독점 권력을 쟁취하지 못한 탓으로 부르주아는 항상 뭔가 국외자 같은 존재였고 귀족계급과 통합하고자 애썼다. 수도 많고 부유한 비엔나 거주 유대인 세력은 동화하려는 성향이 강했으므로 이 같은 추세를 더욱 강화할 뿐이었다." 오스트리아 귀족계급은 "속속들이 가톨릭적이고 관능적이며 감수성을 중시하는 문화였다. 전통적인 부르주아 문화는 자연을 신성한 법칙에 따르는 질서를 부과하여 장악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본 반면, 전통적인 오스트리아 귀족 문화는 그것을 즐거움의 무대, 예술로 찬미되어야 할 신성한 은총의 현현으로 보았다."(41-2)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비엔나 중산계급 사회에서 예술이 발휘하던 기능이 변했고, 이 변화에서는 정치가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 비엔나 시민들이 처음에는 귀족계급으로 동화하는 대신에 그 대체물로 예술의 신전을 후원하는 길을 택했더라도 결국에는 예술을 하나의 도피처, 점점 더 위협적인 정치적 현실의 불유쾌한 세계로부터의 피난처로 삼게 되었다." "귀족이 되고 싶은 허세꾼으로서든 예술가 또는 정치가로서든 부르주아란 결코 자신의 개인주의적 유산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존재이다. 호프만슈탈이 "미끄러짐(das Gleitende)"이라 부른 것, 즉 세계가 슬며시 사라져버린다는 느낌이 커짐에 따라 부르주아는 자신에게 적절한 미적 문화를 내면으로 돌려 자아를 갈고 닦으며 자신의 개인적 특이성을 더욱 연마했다. 이런 경향은 필연적으로 자신만의 정신적 생활에 몰입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그것이 예술에 대한 헌신과 정신에 대한 몰두 사이의 연결 고리가 된다."(43-4)


"호프만슈탈과 슈니츨러 두 사람은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즉 고전적 자유주의 인간관이 무자비한 오스트리아의 현대 정치 앞에서 해체된다는 것이었다. 둘 다 낡은 문화의 폐허에서 심리적 인간이 등장한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인정했다. 슈니츨러는 비엔나 자유주의 전통의 도덕적·과학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접근했다. 사회에 대한 그의 직관은 호프만슈탈보다 더 탁월했지만, 죽어가는 문화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는 가을 같은 분위기의 염세주의에 빠져 작품에서 비극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호프만슈탈은 "예술 원리를 정치에 적용했다. 그는 감정의 비합리적 힘을 억누르기보다는 물꼬를 틔워주는 형식을 찾으려 했다. 전체의 제례에 참여한다는 그의 정치학은 시대착오에 물들었고, 그 때문에 비극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적 권리뿐만 아니라 비이성적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정치적 사고와 실천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증언은 포스트자유주의 시대의 중심 이슈가 되었다."(60)


건축 분야로 눈을 볼려보면 "유용성이 아니라 문화적 자기 선언이 링슈트라세를 지배했다. 1860년대의 거대한 프로그램을 묘사하는 데 가장 흔히 사용된 개념은 '쇄신'이나 '재개발'이 아니라 '도시 이미지의 미화(Verschonerung des Stadtbildes)'였다."(69) "전체적으로 링슈트라세의 기념비적 건물들은 주류 자유주의 문화가 내세우는 최고 가치를 훌륭하게 표현했다. 자유주의의 열성적 지지자들은 연병장의 폐허에서 입헌국가의 정치제도를 양산해냈고, 자유 시민의 엘리트를 교육할 학교를 세웠으며, '신인간(novi homines)'을 저열한 출신성분으로부터 구원해낼 모든 문화를 문화를 한데 모으는 박물관과 극장을 지었다." 이 기관들은 옛 문화와 제국적 전통의 연결을 강화하는데, "상승하는 부르주아들은 그곳에서 사회적·경제적 권력의 새로운 형태를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귀족계급과 만난다. 그곳은 승리와 패배가 사회적 타협과 문화적 종합으로 변형되는 '메자닌(mezzanine)'이다."(87)


# 링슈트라세 : 비엔나 중심부에 위치한 순환 도로


지테는 1875년에 비엔나 바그너 동호회에서 연설하면서 현대 자본주의 세계를 반대하고 수공업적 가치를 옹호하는 "자기 자신의 지적 사고틀이 형성되는 데 있어서 (음악가) 바그너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밝혔다. 지테에 의하면, 현대인의 존재에서 근본적 사실은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을 만한 일관된 가치의 조합이 없다는 점이다. 현대 세계를 만든 사람들은 갈릴레오에서 다윈에 이르는 과학자이거나 개척자-정복자와 상인 모험가였다." 그는 "실제 세계 바로 곁에, 그 위에" 서서 현재 인간의 파손된 가치를 응집력 있는 미래의 이미지로 주조해낼 새로운 이상을 주문했다. "지테는 예술가의 특별한 임무가 이 구원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작업임을 인식한 천재로서 바그너를 찬양했다. 과학과 무역의 뿌리 없는 탐색자들이 세계를 파괴하여 고통 받는 민중이 삶의 지침으로 삼을 만한 중요한 신화를 박탈했으므로 예술가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114-5)


지테가 <도시건설>을 출판한 4년 뒤인 1893년에 건축가 오토 바그너는 지테와는 아주 판이한 전제 위에 세워지는 새로운 비엔나 개발계획 경연에서 우승했다. 바그너는 링슈트라세 계획을 지배했던 '표상'과 '도시 이미지의 미화'라는 목적을 폐기하고 "필요만이 예술의 주인(Artis sola domina necessitas)"이라는 모토를 내세웠다. "지테가 역사주의를 확대하여 인간을 현대 기술문명과 효율성에서 구원하려한 데 반해 바그너는 한결같이 합리적이고 도시적인 문명의 가치에 유리하도록 역사주의를 격퇴시키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지테가 "현대 도시주의의 아노미 현상을 상대하기 위한 시각적 모델을 공동체적인 과거에서 불러오는 동안 바그너는 자신이 기쁘게 끌어안은 분방하고 합목적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도시성의 진리를 표현할 새로운 미적 형태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건축가이자 논쟁가이며, 교사이자 도시이론가인 바그너는 링슈트라세 문화를 벗어나 최고의 모더니스트로 등장했다."(119-21)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자유주의자들이 상류 계급에 대항하여 고안해낸 프로그램이 낳은 결과는 하층 계급의 폭발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저항 에너지는 그들의 숙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향해 폭발했다. 귀족계급의 국제주의에 맞서기 위해 게르만 민족주의를 고안했지만, 그들이 받은 답변은 슬라브 애국주의자들의 자치권 요구였다. 자유주의자들이 다민족 국가에 유리하도록 게르만주의의 어조를 완화하자 반자유주의적인 게르만계 프티부르주아는 그들을 민족주의에 대한 배신자로 낙인찍었다. 경제를 과거의 족쇄로부터 풀어놓기 위해 고안된 자유방임주의는 미래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들을 불러들였다. 귀족계급 압제의 시녀라는 죄목으로 학교와 법정에서 발본색원되었던 가톨릭교는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종교로 복귀했는데, 그들 생각에 자유주의란 곧 자본주의였고 자본주의란 유대인을 의미했다."(172)


"자유주의가 실패하자 유대인은 희생양이 되었고, 그 희생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민족의 고향으로 도피하는 시오니즘이었다. 다른 민족들은 혼란이라는 무기로 오스트리아 국가를 위협했지만 시오니스트들의 무기는 분리 주장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위쪽에 있는 옛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대중을 다시 불러모으기는 커녕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전반적인 해체의 힘을 불러냈다. 자유주의는 낡은 정치질서를 해체하기에는 힘이 충분했지만, 그 해체 덕분에 풀려나서 관대하지만 융통성 없는 자유주의의 후원 하에서 새로운 지방분권적 운동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세력을 장악할 능력은 없었다. 새로운 반反자유주의적 대중운동─체코 민족주의, 범게르만주의, 기독교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시오니즘─은 아래로부터 솟아올라 교육받은 중산 계급의 신탁통치권에 도전하여 그 정치 시스템을 마비시키고, 역사의 합리적 구조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훼손하기 시작했다."(173)


"건조하고 합리적인 자유주의 정치와 대조적으로 이런 운동의 강력한 지도자들은 '더 예리한 조성(調性)'(the sharper key)이라 알려지게 된, 즉 자유주의자의 신중한 스타일에 비해 더 무모하고 더 창의적이고 감정의 삶을 더 만족시키는 정치적 행동양식을 개발했다. 새로운 조성의 대표적 대가 두 명─범게르만주의의 게오르크 폰 쇠너러(Georg von Schonerer, 1842-1921)와 기독교사회당의 칼 뤼거(Karl Lueger, 1844-1910)─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영감을 주고 그의 정치적 모델이 된 인물이었다. 세 번째 인물인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은 히틀러의 희생자들을 위해 이교도의 공포정치에 맞서는 가장 설득력 있고 강력한 정치적 답변을 제공하게 될 분야의 개척자였다. 그리하여 비엔나의 지식인들이 20세기의 고급문화로 이어지는 길을 개척하기도 전에, 그 문화의 자식 세 명은 합리주의 이후의 정치를 개척해나가기 시작했다."(174-5)


"민족주의 학생연대가 범게르만주의자 쇠너러를 고대했다면, 사회주의적 반유대주의자 쇠너러는 수공업자 운동이 고대했던 존재였다."(185) "유대인은 오스트리아에서 누구보다도 더 '국가적 국민'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민족 단위를 이루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슬로바키아인이나 우크라이나인처럼 소위 비역사적인(unhistoric) 민족성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는 시민적이고 경제적인 것으로서, 게르만인이나 체코인처럼 하나의 민족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와 반대로 그런 지위를 획득하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다민족 국가의 초超민족적 국민"으로 자리매김했지만, 비극적이게도 "자유주의 신조 그 자체의 운수가 유대인들의 운명과 뒤엉켜버렸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왕국의 핵심 권력을 약화시키려 하는 정도에 비례하여 유대인들은 모든 나라의 이름으로 공격당했다."(186)


"칼 뤼거는 로제나우 기사(쇠너러)와 공통점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자유주의자로 출발했으며, 둘 다 자유주의를 처음에는 사회적이고 민주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다가, 결국에는 반자유주의 신조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배교자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반유대주의를 이용하여 주민들 가운데서 똑같이 불안정한 분자인 기능공과 학생층을 동원했다. 그리고─우리의 논의 목적에는 이것이 결정적인데─두 사람 모두 의회 바깥에서의 정치 기술, 폭도와 오합지졸의 정치 기술을 개발했다."(191) "가톨릭은 뤼거에게 민주주의, 사회 개혁, 반유대주의, 합스부르크 충성심이라는 제각기 상반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던 서로 이질적인 반자유주의 요소들을 통합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거꾸로, 뤼거는 그 산산이 부서진 구성요소들을 한데 끌어 모아 현대의 세속 세계에서 제 갈 길을 찾을 만큼 강력한 조직으로 만들어낼 정치적 지도력을 가톨릭교에 줄 수 있었다."(199)


"자유주의의 정치적 토대가 부식되고 여러 사건들로 인해 그 사회적 기대치가 실현되지 못함에 따라 자유주의 문화에 몰두했던 사람들은 가장 소중한 가치를 구해내기 위한 새 토대를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테오도어 헤르츨이 있었다. 그는 슈멜링의 합리주의적 전제("지식이 자유롭게 하리라") 위에서가 아니라 창조적 환상, 욕구와 예술의 꿈 위에서("욕구가 자유롭게 하리라") 자기 민족을 위한 자유주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방법을 찾았다. 헤르츨은 시오니즘을 제창하여, 자유주의 주도권의 시대에 좀 얄궂게 어울리는 기념비이자 쇠너러와 뤼거가 시작한 창조적 파괴의 위압적 작업에 어울리는 속편을 구축했다." "그가 자유주의를 뛰어넘는 환상의 정치학에 도달한 것은 쇠너러와 뤼거 같은 사회적 적대감과 정치적 기회주의가 아니라 개인적 좌절과 심미적 절망감을 통해서였다."(207)


"알렉스 바인은 헤르츨이 프랑스에서의 유대인 문제에 점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과정을 추적하여, 드레퓌스 대위의 고발이 그 절정이었음을 밝혀냈다. 여러 사건─반유대주의 연극, 장교가 유대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하다가 죽은 사건, 반유대주의 시위, 명예훼손 소송, 파나마 스캔들─을 차례차례 겪으면서 헤르츨은 보도하고, 성찰하고, 점점 더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헤르츨은 프랑스에 있으면서 뤼거와 반유대주의자가 오스트리아의 모든 선거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 각각의 자유주의 질서의 운명에 대한 그의 우려는 한 점에서 만났다. 그 과정에서 그의 사고 속에서 유럽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한 징후─이교도들의 좌절감을 배출하기 위한 벼락─이던 '유대인 문제'는 이제 희생자들이 생사가 달려 있는 문제로 변했다."(220-1)


헤르츨은 "꿈과 백일몽과 무의식과 예술을 분열적 사회 현실을 극복하고 형성하는 힘의 근원으로 긍정했다."(228) 헤르츨이 생각하는 정치 운동의 개념에서는 목표의 내용이 아니라 행동의 형태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국가의 이념은 이와 유사한 심리적 추상주의를 반영한다. 거기에 유대적인 것은 전혀 없었다. 모든 국가는 똑같이 "아름답다"고 그는 결론짓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가진 개별적 장점 때문이 아니라 모든 국가가 국민에게 불러일으키는 심리적 덕목 때문이다. 모든 국가는 "개인들의 최고의 어떤 것[자질]으로, 즉 충성심, 열정, 희생의 기쁨과 이상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는 태도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회적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집단적 에너지를 조직하는 수단일 뿐이다."(231) 헤르츨이 구상하는 약속의 땅은 사실은 유대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자유주의 유토피아였으며, "헤르츨의 시온은 현대 자유주의 유럽의 문화를 환생시켰다."(240)


"<꿈의 해석>은 저자의 이성과 감정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자신의 업적 전체의 정초석이 되는 가장 중요한 과학적 작업이며, 개인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고통스러운 삶을 새롭게 마주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을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준 저작으로 간주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신국> 속에 엮어 넣는다거나, 루소가 <참회록>을 <인간불평등기원론>에 부수적 플롯으로 통합시킨다고 상상해보라.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의 구조를 엮어나가는 과정이 바로 그런 식이다. 외견상 드러나는 과학 논문 방식의 구조에서, 그는 독자들을 위쪽으로, 체계적인 장을 따라 인도하여 심리학적 분석의 더 복잡한 수준으로 끌고 올라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인적 서술에서는 독자를 아래쪽으로, 중요한 꿈을 차례로 이으면서 파묻힌 자신의 자아의 지하 후미진 곳으로 끌고 내려간다."(255-6)


오이디푸스 신화를 다룰 때도 프로이트는 그가 왕이라는 사실에 무관심하다. "니체 및 다른 현대 철학자들이 그랬듯이 프로이트도 오이디푸스의 모색을 도덕적이고 지적인 것으로 보았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Oedipus Rex>은 그 제왕적 주인공이 행동하는 동기가 테베에서 재앙을 물리친다는 정치적 임무가 아니라면, 즉 공화국이라는 무대가 없다면 구상할 수 없는 작품이다. 오이디푸스의 죄책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처벌하려는 노력은 공적인 문제이고 공화국의 질서를 재건할 책임에서 나온다. 그에 비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는 왕이 아니고 자신의 정체성과 그 의미를 모색하는 사색가이다. 정치를 해체하여 개인의 정신적 범주로 들어감으로써 그는 개인적 질서를 재건하지만 공적 질서는 손대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헝가리 꿈에서 죽은 아버지의 유령을 왕으로까지 승격시켰지만, 여전히 정치라는 재앙으로 괴로워하는 테베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275-6)


"고전 문화와 고고학적 발굴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던 프로이트처럼 클림트도 본능적인 삶, 특히 에로틱한 삶의 발굴지로 건너가는 은유적 다리 역할을 고전적 상징에 맡긴다." "클림트는 여성을 관능적 존재로 보았고, 여성의 쾌락과 고통, 삶과 죽음의 잠재력을 철저하게 개발했다. 끝없이 그려댄 소묘에서 클림트는 여성성의 느낌을 포착하려고 애썼다."(307) "클림트는 현대 인간에게 거울을 들이대면서도 쾌락을 부여하는 에로스의 이미지를 추구하지만, 오히려 도덕주의적 문화의 구속으로부터 관능성을 해방시키려는 시도에 수반된 심리학적 문제들을 노출시켰다. 에로스를 탐험하며 즐거워하던 남자는 '촉수를 가진 여자(la femme tentaculaire)'에게 휘감겨 버렸다. 새로운 자유는 불안의 악몽으로 변하고 있었다."(310) "니체의 시인처럼 클림트의 지혜도 삶의 신비스러운 전체성을 긍정하기 위해 고통을─더 나아가서 욕망 그 자체를─꿈속으로 흡수해들인다."(316)


클림트는 후반기에 "우의적 그림이나 인물화로 방향을 돌렸을 때, 자신이 선택한 대상에서 고뇌하는 요소를 약화시키거나 심지어는 치장하기까지 했다. 혹은, 자신의 성취를 좀더 긍정적으로 단언하기 위해 심미적 거리두기를 함으로써 그 작품들이 가진 고통의 잠재력을 중화시켰다." <다나에>에서 클림트는 "다시 한번 그리스 신들을 불러내 현대 인간의 상황을 표현한다. 클림트의 이 마지막 그리스 여성은 선배들인 아테나, 니케, 히게이아 혹은 복수의 여신들, 자웅동체적인 남근 같은 여성들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클림트는 여성 공포증을 극복한 것 같다. 충족된 욕망의 모습이 <다나에>만큼 현란하게 표현된 경우는 드물다. 그녀의 살은 제우스의 황금빛 사랑의 빛줄기에 물들어 벌꿀 같은 금빛으로 가득 차 있다. 클림트는 이제 더 이상 욕구불만 때문에 위협적으로 변한 여성이 아니라 감각이 충족되어 더 없이 행복하게 웅크리고 있는 여성에게서 평화를 찾았다."(365)


"심리적-철학적 전복자로서 사회와 교류하려다가 상처 받고 움츠러든 클림트는 1908년에는 이미 링슈트라세에서 처음 경력을 시작할 때와 같은 화가-장식가의 역할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가 행한 의미의 연원으로서의 역사 및 표현의 올바른 양식인 육체적 사실주의로부터의 단절은 역사와 자연에 대한 기대를 배반당한 계급과 그에게 영원한 사실로 남았다. 그는 역사, 시간의 영역은 이미 지나쳐버려 돌아갈 수 없었으므로, 심미적 추상과 사회적 체념의 영역으로 들어가려고 투쟁했다. 하지만 흔히 그리스 신화를 도상학적 안내자로 삼는 분리파의 내면 항해(voyage interieur)에서 클림트는 심리적 경험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혔다. 클림트가 심미적인 차원에서 비엔나 상류층 세계의 섬약한 둥지 속으로 물러나면서 포기한 탐험을 새로운 깊이까지 끌고 나가는 과제는 더 젊은 정신인 표현주의(Expressionist) 운동의 몫으로 남게 된다."(367)


'교양과 부'를 지닌 비엔나 신흥 상류계급을 대변하는 "새로운 정원 숭배는 정원을 자연의 세련된 적용으로 보는 영국식 낭만주의 전통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급진적 고전주의로 방향을 돌렸다. 정원은 건축으로, 집의 연장으로 구상되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이 경향은 자부심 강한 자수성가형 인간을 이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쇠퇴하고, 전前산업시대의 사회적 모델을 선호하는 추세와 결부되어 있다. 그 모델은 18세기의 귀족이거나 비더마이어 시대의 시민이었다. 미적 측면에서 보자면, 형식주의와 새로운 정원 숭배 현상이 아르누보로부터 아르데코로, 유기체적이고 유동적인 형태에서 결정체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로 이행되었다. 1890년대에는 '분리파'라는 명칭으로 새로운 본능적 진실을 찾는 역동적 탐구에 참여하던 예술가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발견한 불안정한 보물에서 눈길을 돌려 엘리트들의 일상생활과 가정환경을 미화한다는 더 소박하지만 소득이 많은 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436)


유토피아적 아름다움의 대체물인 정원을 멀리하고, 혼란스럽고 무차별적이지만 포용적인 황무지의 진실을 추구한 코코슈카와 쇤베르크는 "서로가 똑같이 위험하고 외로운 작업, 해방이면서 동시에 파괴인 작업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았다. 두 사람 모두 자기들이 자라난 심미적 문화와 세기말의 첫 비엔나 모더니스트들의 작업에 반대하여 저항했다. 이들은 그 문화가 결정적인 추진력을 잃은 바로 그 순간에, 그리고 쿤스트쇼에서처럼 그것이 상류 부르주아의 지배적 관습 문화가 되는 그 순간에 그런 저항을 벌였다. 미술에서의 클림트, 문학에서의 호프만슈탈, 건축에서의 오토 바그너는 교육받은 상류 중산계급이 그 미적 문화를 확장하면서 씌운 정치적 권력의 고삐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계급의 대변자가 되었다. 그러나 젊은 예술가들, 코코슈카나 쇤베르크 같은 표현주의자들은 예술을 현실의 본성을 은폐하는 문화적 화장술로 사용하기를 거부한 합리주의 비평가들과 연대했다."(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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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 새롭게 하라, 놀라게 하라, 그리고 자유롭게
피터 게이 지음, 정주연 옮김 / 민음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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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스트들은 대체로 중도가 부르주아적이고 지루하다고 생각하여 정치나 사상 면에서 극단을 선호했다. "모더니스트들은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가답게 미학적 안전지대를 벗어난 곳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모든 모더니스트가 군말 없이 동의했던 유일한 신념은 이랬다.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이 익숙한 것보다 낫고, 드문 것이 평범한 것보다, 실험적인 것이 상투적인 것보다 낫다." 모더니즘은 "화음과 마찬가지로 저항적 아방가르드 운동을 아무렇게나 모아 놓은 것이 아니며 그 부분들의 총합보다 더 크다. 모더니즘은 사회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 문화 생산물과 그 생산자에 대한 새로운 평가 방식을 낳았다."(26-7) 이처럼 모더니스트들이 "서로 눈에 띄게 다르기는 하지만 뚜렷한 공통점도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단의 유혹, 즉 관습적인 감수성에 저항하려는 충동이며, 또 하나는 철저한 자기 탐구이다."(29)


"모더니스트 진영은 결코 통일된 집단, 자발적인 동맹군이 아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고갱은 인상파들을 시각적 개연성의 노예라고 비판했다. 스트린드베리는 입센의 사상극을 몹시 싫어했고, 몬드리안은 피카소가 입체파에서 추상주의로 나아가는데 실패했다고 실망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조이스의 외설스러움에 대해 강한 우려를 품고 있었다." 가장 일관되고 가장 요란하게 아방가르드의 화합을 깨뜨린 실바도르 달리는 "기괴하고 때로는 불쾌한 초현실주의 작품뿐만 아니라 말로도 대중을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모더니스트 경쟁자들 모두를 비난했다. 달리는 자신이 "회화를 현대 예술의 공허함에서 구해 낼" 운명이라고 떠들었다. 모더니스트들은 부르주아들을 깔본 것과 마찬가지로 동료 모더니스트들도 무시했다. 꼭 깔 본 건 아니더라도 적어도 동료들이 미적 대담성이나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했다."(44-5)


그러나 모더니즘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적, 문화적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모더니즘은 충분히 유복하고 자유로우며, 기꺼이 모더니즘을 지지하는 든든하고 영향력 있는 후원자와 고객들이 없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47-8) 모더니스트들은 사회에 대해 도발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 화가들은 자신들이 불태우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미술관 벽에 자기 작품을 거는 꿈을 꾸었다."(43) 저자는 "모더니즘이 고급문화의 향유자들과 생산자들 모두에게 정신적 해방감을 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것은 예술가들에게 자신들의 자유로운 공상을 진지하게 여겨도 좋다는 면허, 그렇게 오랫동안 주제와 기법을 지시해 왔던 정전을 노려보아도 좋다는 면허, 군림하는 기준을 수정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면허, 아니 더 과격하게 말하면 타도를 외칠지 스스로 결정해도 좋다는 면허, 그 혁명을 완수할 사람이 될 면허를 주었다."(62)


# 모더니즘 혁명의 조건들

1. 산업화, 도시화한 국가들의 부

2. 중산 교양층의 후원

3. 공공 시설 확대 (도서관, 미술관, 음악당)

4. 관객층의 미적 취향 다변화

5. 민주적 사회 분위기 (모더니즘은 예술 취향의 우열을 강력히 옹호한다)

6. 종교의 영향력 쇠퇴 (후기 기독교)


"보들레르는 기성 시와 회화의 지루한 재현을 아주 혐오하면서 동시에 기교가 뛰어난 대부분의 낭만주의자들이 지녔던 억제되지 않은 주관성에 대해서도 견디지 못했다. 그는 "현대적 의미에서 순수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고 반문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객체와 주체를 동시에 포함하는, 예술가의 외적 세계와 예술가 자신을 동시에 포함하는 암시적 마법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늘 주체의 반응이 극히 중요했다. 보들레르는 1859년에는 직설적으로 파리 살롱을 비평하면서 "만약 나무, 산, 강, 집의 집합, 그러니까 우리가 풍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통해서, 나 개인적인 시선, 내가 그 풍경에 부과하는 관념과 감정을 통해서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말했다."(67-8) 이처럼 초창기 모더니즘 시인들은 자기 시대에 몰두하면서, 외부 세계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부 세계를 "고통스러울 만큼 정직하게 인식하게 되었다."(93) 


1874년 4월, 수집가들에게는 생소한 클로드 모네가 뜻을 같이하는 반아카데미 화가 스물아홉 명과 함께 파리에서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보들레르의 그 유명한 강령을 실천하고자 자신들이 속해 있는 현재에 아낌없이 관심을 쏟고 있었다. 역사화, 즉 살롱전에서 수상을 보장받을 수 있는 매우 영예로운 장르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물론 자기성찰을 중시하는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객관적 상관물은 있었다. 그들의 그림에도 풍경, 도시, 초상과 같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소재가 있지만 그것이 화려한 장관을 이루는 것도 아니고 진짜처럼 보이지도 않으며 사실상 다른 소재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그들의 그림이 눈을 끄는 것은 활기 넘치는 강렬하고 뚜렷한 붓놀림과 화려한 색상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본질적으로 인상파 화가들의 자기 몰두는 "아카데미 회화의 규범을 아무렇지 않게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 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거북해했고 기만당했다고 생각했다."(134-5)


"반항을 일삼았지만 이 특이한 모더니스트들은 비타협적이든 아니든 간에 결코 혼자는 아니었다. 같은 반골 동지들뿐만 아니라 그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특히 19세기부터 그들 주변에서 그들의 재능을 알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문화 중개인들이었다. 공연 주최자들은 바이올린 연주자들과 소프라노 가수들을 연주회장마다 끌고 다녔고 미술상들은 탐욕스러운 고객들에게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이런저런 보석을 사지 않으면 소장품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꼬드겼다. 또 연극과 오페라 제작자들은 화려한 무대로 관객을 유인했고 문학과 미술비평가들은 최대한 믿을 만한 어조로 혁신가들의 편을 들거나 비판했다. 이런 문화 중개인들은 대부분 문화 시장에 새로 진입한 미술, 음악, 문학 애호가들을 부추겨서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서는 세련된 것, 어려운 것, 비인습적인 것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방법을 가르쳤고 더불어 그들의 취향을 형성하는 데 개입했다."(145-6)


"1890년이 되기 훨씬 전에 주로 유럽에서 이미 예술적 혁신이 눈에 띄게 가속화되고 있었다. 연주회, 낭독회,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거의 매년 놀라운, 때로운 불쾌한 일이 일어났다. 문학적 대망을 품은 소설가들은 독자들을 점점 더 버겁게 했고 심각한 시인들은 독자들에게 난해한 지식을 요구했으며 실험적 작곡가들은 쉬운 음악을 경멸했고 독창적인 건축가들은 학교에서 배운 전통적 모범에 진저리를 치며 새로운 소재와 검증되지 않은 영역을 대담하게 실험했다. 모든 고급문화 영역의 모더니스트들이 미래행 급행열차를 탄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가장 과격한 혁명가는 바로 화가들이었다."(189) 모더니스트 화가들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여러 방법 중에서 관객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길은 솔직한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런 자기 응시는 주관성의 분명한 예로 병적인 자아도취는 아니면서 정상적인 자기 몰입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195)


반 고흐는 죽기 2년 전인 1888년부터 "자기 화풍을 찾은 뒤 바라던 대로 더 내밀한 유사성을 포착할 수 있었다. 치열할 만큼 정직했기에 자신의 모습을 미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창백한, 때로는 푸르스름한 얼굴, 푹 팬 뺨, 신경쇠약의 증거들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옷이나 배경에도, 신경질적인 붓질로 스타카토 같은 평행선이나 현기증 나는 소용돌이를 그려서 자신을 드러냈다. 가장 확실하게 자신을 나타내 주는 것은 자화상이 아니라 수없이 모방된 생레미의 밤이었다. 이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별들과 비현실적으로 뾰족한 달이 생레미 마을을 비추고 있고 모든 것이 흔들리는 후광에 둘러싸여 있다. 아마도 정신적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켜 고통을 다스려 보려는 헛된 노력이었을 것이다. 후기 작품들은 불안을 억제하지 못하고 불안에 압도당하고 만 것처럼 보인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든 안 붙어 있든 고흐의 작품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다."(201-2)


"모더니스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고 앙소르와 거의 정확하게 같은 시기에 살았지만 훨씬 더 멀쩡했던 노르웨이인 에드바르 뭉크(1863-1944)는 정신이상의 일란성 쌍둥이인 불안증의 화가였다."(211) "뭉크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흔히 현대적 고뇌의 진수로 여겨지는 <절규>는 1893년부터 여러 차례 제작되었다. <절규>에는 성별을 알 수 없는 한 인물이 뺨을 손으로 감싼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이 사람이 서 있는 긴 다리 주위에는 구름이 험악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다. 뭉크의 말에 따르면 심한 불안증을 경험한 뒤 이렇게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관객들은 그 악몽 같은 광경이, 예민한 당시 사람들이 혼잡하고 부산한 1890년대 도시에서 느끼는 신경증적 불안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하지만 뭉크는 예언자도 사회학자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 충격적인 작품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고백이었다."(214)


"바실리 칸딘스키Vasili Kandinsky는 뮌헨에 있을 때, 1909년이거나 1910년이 다 돼 가던 어느 늦은 오후부터 더 이상 날짜 같은 무미건조하고 정확한 지표로 자신의 회고록을 어수선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는 스케치를 마치고 작업실로 돌아갔다. 그 순간이 바로 추상미술이 탄생하려는 찰나였다. 칸딘스키는 이렇게 회상했다. "별안간 내부에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림이 광채를 뿜으며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형과 색만 있었던 그 수수께끼의 그림에 달려들었다. 그러자 곧 상황이 파악됐다. "대상이 내 그림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 사실에 대한 충실한 묘사가 미술에 대한 가장 큰 장벽처럼 보였다. 칸딘스키는 대단히 포괄적인 결론을 내렸다. "자연의 목적과 미술의 목적(그리고 수단)은 본질적으로, 태생적으로, 그리고 우주 법칙에 따라 서로 다르다." 그는 외부 세계와 전혀 상관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231)


말레비치는 물질주의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던 "칸딘스키처럼 러시아 민속 종교에 물들었지만 칸딘스키와 달리 화가인 자신을 신으로 여겼고, 몬드리안보다 더 회화를 자연과 거리가 먼 영역으로 만들었다."(238) "말레비치는 자신의 단순해 보이는 작품들이 숭고한 이데올로기의 구현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無를 대신할 무엇인가를, 자본주의의 탐욕을 대체할 예술적 감수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절대주의를 통해 내가 말하려는 것은 회화에서 순수한 감정 혹은 감각이 절대 우위라는 것이다." 그의 회고대로 정사각형의 형태로 피난했던 것은 객관적 세계라는 짐으로부터 미술을 해방시키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 쳤던 1913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 사각형이 무의미가 아니라 "무목적의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미술 작품과 화가가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 말레비치가 새로운 종교를 위한 때가 됐다고 했을 때 그 새로운 종교란 바로 새로운 미학이었다."(240)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출현한 다다이즘Dadaism의 계획은 "딱 하나라고 할 정도로 단순한데, 그것은 오로지 '부정'이었다. 다국어에 능한 루마니아 시인이자 다다의 열성 창립 회원인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는 다다의 창시자들 중 단연 가장 활발하고 끈덕지게 활동했다. 그는 자신들의 계획을 이렇게 간결하게 표현했다. "다다의 시작은 하나의 예술의 시작이 아니라 구역질의 시작이었다." 다다의 열성적 지지자들은, 가장 강경한 반체제파들을 비롯한 모든 예술가들이 부르주아 착취자 및 속물들과 타협하여 진정한 의미의 전복적 임무에 등을 돌렸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예술을 파괴하고자 했지만 "이것은 자기모순적 명령이었다. 예술을 없애기 위한 운동이 불가피하게 예술 작품을 생산했고, 그중 일부는 모더니즘의 반역 운동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248-9) 


추상파와 입체파는 "세잔의 정물화(1907년)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 정물화들은 탁자, 의자, 과일이 담긴 그릇들을 묘사하면서 사실상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선의 기본 규칙들과 원근법들을 위반했다." 과거의 화가들은 "2차원의 매체에 3차원의 환상을 부여하려고 노력해 왔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화가들은 형태와 색의 농담을 교묘하게 조작하였다. 그런데 최초의 입체파이자 단연 가장 위대한 입체파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는 이 유서 깊은 방법들을 거부했다. 이들은 관객들에게 예술 작품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려고 했다. 그들은 실제로 융합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표면을 조각 냈고 여성의 유방이나 뺨 같은 곡선의 대상을 본래 형태로부터 파괴하여 사실상 아무것도 닮지 않은 기하학적 윤곽으로 변형하였다. 한마디로 입체파들은 고의적으로 대상의 세계를 왜곡해 표현하고 그 단편들을 조합하여 인식하는 일을 관객의 몫으로 돌렸다."(264)


산문과 시의 세계에서는 주관성을 응시하자는 모더니즘의 외침에 동조한 모험적인 소설가들이 사실주의의 성과를 거부하고, 내적 실체에 눈을 돌렸다. "간단히 말해 모더니스트 소설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억제하기, 통일성, 연대순 배열, 결말 같은 용인된 문학의 평가 기준을 전복하고 철저하게 내부로 향했다. 모더니스트의 거울은 주로 작가 자신을 비춘 것이다. 전형적인 모더니스트의 예를 들어 보자. 앙드레 지드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 <위폐범들Les Faux-Monnayeurs>의 주인공 에두아르는 <위폐범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려고 한다. 이 소설은 주로 이 작품의 창조자인 지드가 길게 인용한 에두아르의 일기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니까 <위폐범들>이라는 소설이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건 바로 <위폐범들>이라는 소설 자체에 대해서다. 이것은 전통적인 소설 작법에 대한 모더니즘적 저항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하찮은 현실성은 숨을 헐떡이며 뒤로 처졌다."(325)


# 전통 기법을 폐기한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들

1. 헨리 제임스 : 의사처럼 꼼꼼하게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미묘한 불화를 짚어내는 의식의 탐구 기법을 구사한다.

2. 제임스 조이스 : 풍부한 문학적 인유, 곡예에 가까운 상상력, 탁월한 언어 능력을 지닌 과격한 모더니스트이다.

3. 버지니아 울프 : 이지적인 표현으로 단단히 응축된 자신만의 세상을 그려낸다.

4. 마르셀 프루스트 : 경험은 오류와 부조화의 거대한 행렬이다. 예술만이 기억의 간극을 메울 수 있으며, 무관심하고 무자비한 시간의 파괴를 이길 수 있는 수단이다.

5. 프란츠 카프카 : 무서운 상황과 불안한 주인공을 다루면서도 내밀한 감정적 실체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고, 노련한 보고자만이 가질 수 있는 초연함을 보여준다.


"모더니즘에서 가장 난해한 분야는 음악이다. 20세기 음악의 대격변기에 아무도 의심치 않는 선구자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는 대격변 이상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한 번도 대규모 관객을 확보했던 적이 없었으며 죽은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전문가들만의 관심거리로 남아 있다. 아방가르드 회화나 소설, 건축이 얼마간 시련을 겪은 뒤 주류에 편입한 것과 달리 대부분의 아방가르드 음악은 지금도 여전히 아방가르드에 속한다."(399) "무조주의와 12음 음악은 쇤베르크의 모더니즘 증명서였으며, 베르크와 베베른 같은 후배 작곡가들은 그 새로운 질서가 얼마나 다채로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쇤베르크의 발명품과 무관한 모더니즘의 진로도 있었다. 프랑스인 작곡가 에드가 바레즈Edgard Varese와 미국인 존 케이지John Cage는 참으로 유별난 생각에 열중하였고 순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그 오스트리아인들과 경쟁하였다."(447)


건축 분야에서 미래파 원칙(1911년)을 주창한 마리네티는 "미의 의미를 전통적인 감식가들이 안타깝게도 간과했던 미적 측면까지 확장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빠른 이동, 성장하는 세속주의, 오늘날의 물질문화와 같은 현대적 현상들의 압도적인 힘, 상상력에 의해 변화하는 것의 우월성, 이 모든 것이 건축물에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82)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적을수록 더 많다"는 짧은 명언을 남겼는데, 이 말은 "건축술이란, 남아도는 장식과 지나치게 복잡한 세부 표현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의미인 동시에 건축 과정에서 기계, 즉 말 그대로 노동력을 절감하는 장치들의 도움을 중시했다는 뜻이다."(501) 유럽에서 전체주의가 득세하자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미국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뉴욕의 미술협회 회장 월터 쿡은 "히틀러는 최고의 친구입니다. 그가 나무를 흔들었고 나는 사과를 주웠지요."라고 말했다. "그 사과의 목록은 길고 유명했으며 미국 문화를 20세기의 선두로 몰아 갔다."(532)


한편 나치 독일에서는 "제복을 입은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너무도 심각한 표정으로 차렷 자세를 한 채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진 깃발을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장관이 연출되었고, 히틀러가 두 시간짜리 연설을 하기 위해 어두운 뒷배경에서 나타나는 숨 막히는 순간에는 화려한 조명이 교묘하게 분위기를 조작했다. 또한 나치의 공공건물 설계(그리고 계획대로 지어졌을 경우는 그 건물 자체)는 기념비적 신고전주의 양식이었다. 그 민족의 신비감을 교모하게 조장한 것이다. 지독히도 선동적인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선전 영화는 모두 레니 리펜슈탈이 훌륭하게 촬영한 것이다." "히틀러 정권이 어떤 모더니즘 기법(리펜슈탈의 영화들이 가장 좋은 예다)을 이용하려고 했든 간에 이제 모더니즘의 근본 원칙, 즉 충동과 창조성을 모더니즘에 반대하는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자유주의는 나치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677-8)


"아무리 소비에트가 반체제 고급문화에 반대한 이념적 근거가 나치와 다르다고 해도 결국 그 두 체제는 거의 같아지고 말았다. 이 정권은 1952년 8월 12일, 스탈린의 피해망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디시어를 쓰는 대단히 촉망받던 다섯 명의 선도적인 작가들을 처형하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게 1958년 혁신적인 소설 <닥터 지바고>에 대해 수여된 노벨상을 거부하게 만든 것도 바로 그 정권이었다. 거부라는 극단적인 선택만이 서유럽에서 그 오래된 로맨스를 스탈린주의와 공존시킬 수 있었다. 1936년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갑자기 공격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듯 소련 공산당은 더욱 야만스럽고 천박하게 문화에 개입하였고, 그 때문에 모더니즘 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들의 서글픈 역사는 "모더니즘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정치적 자유가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라는 명제를 재차 입증한다.(691-2)


"전쟁 이후 모더니즘의 생존 위기는 단순히 재능이 탁월한 예술가들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또다시 뒤샹으로 거슬러 올라가 근본적인 철학적 반론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더 정확하게는 예술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컬러 영화, 텔레비전, 제트기의 개선을 비롯한 기술 시대의 은총 같은 진보가 필연적으로 이러한 질문들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기술의 진보는 고급문화의 평등화를 가속화했고, 그렇게 해서 모더니즘이라는, 예술에 대한 그 배타적인 태도가 전후 문화 속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본 문제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제기되었다." 미국인들은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내놓거나 맹렬하게 자율성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조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갔다. '타시슴tachisme'과 '앵포르멜art informel'이라고 명명된 추상표현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화가 잭슨 폴록은 곧 유럽에서도 제 나라인 미국에서만큼 유명해졌다."(731)


1960년대 이후 팝아트는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 대해 노골적으로 도전장을 던진 추상표현주의의 급진적인 주장들을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팝아트의 출현과 성공은 모더니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 새로운 화가들은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을 하나의 범주로 단순화하려고 하였다." "팝은 혁신적인 회화와 평범한 회화, 원본과 복제품, '사회 참여적 예술'과 '예술을 위한 예술'과 같은, 일반적으로 범주화되어 있는 영역들을 마구 뒤섞었다. 그래서 예술의 본성을 정의하고 예술의 운명을 예측해 보려는 오랜 노력을 대체로 허사로 만들어 놓았다."(737) "저급 예술과 고급 예술이 상호 작용하게 만드는 것, 즉 저급 예술을 고급 예술로 만드는 것이 로이 릭턴스타인Roy Lichtenstein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가장 유명한 차용 작품들은 성욕과 공격성을 단호하게 드러내고 있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프로이트적 관점을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746)


"워홀은 예술과 비예술의 구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뒤샹과 비슷했지만 반모더니스트적 입장에 있어서는 달랐다. 대체로 사심 없이 즐기는 뒤샹보다는 확신이 훨씬 적었고 돈에 더 비중을 두었다."(752) 전형적인 아방가르드들이 보기에 부르주아 소비 대중을 향한 작품 '판매'는 신념의 파기나 다름없었다. 물론 신념이 확고하고 부유한 데다 열정적인 모더니즘 애호가를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성공은 아방가르드의 진정한 사회적 역할에 대한 배신이었다."(755) 비평가 힐턴 크레이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심각한 예술, 그러니까 과거에 어렵고 신비롭고 비밀스럽다고 여겨졌던 예술이 팝의 확산과 함께 재미있고 쉬운 것, 눈물보다는 웃음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심각하다고 주장하는 예술을 이해하고 즐기기 쉬워졌다는 것. 잭슨 폴록 같은 이들의 작품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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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 이토록 곡해된 사상가가 일찍이 있었던가?
테리 이글턴 지음, 황정아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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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사이에 체제에 대한 견해를 수정한 대다수 급진주의자들이 단순히 주변의 면화공장 수가 줄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구레나룻이나 머리띠와 함께 마르크스주의를 던져 버린 것은 그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맞섰던 체제가 너무 강고해서 깨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커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꿀 가능성에 대한 환멸이 결정적이었다."(17) 이처럼 자본주의는 놀랄 만한 진보를 성취했지만, "단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만도 엄청나게 달려야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한계가 자본 그 자체이며 자본의 끊임없는 재생산이 자본주의의 넘어설 수 없는 경계선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20) "마르크스주의의 의미는 그것이 엄밀히 한시적이라는 데 있으며, 따라서 자기 정체성의 전부를 그것에 투여하는 사람은 핵심을 놓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그 자체이다."(14)


2.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으로만 괜찮다?


"사회주의가 되려면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넉넉해야 한다. 마르크스나 엥겔스부터 레닌과 트로츠키에 이르기까지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이와 다르게 생각한 적이 없다."(28) 물질적인 기반이 결여된 상태에서 끔찍한 희생을 강요한 스탈린주의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마르크스 작업의 평판을 떨어뜨린다기보다 오히려 그 타당성을 증언해준다."(31)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작동할 수 없다는 이들은 "풍족한 조건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 해도 복잡한 현대 경제를 시장 없이 어떻게 운영할 수 있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점점 더 많은 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놓는 대답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시장은 사회주의 경제의 빠뜨릴 수 없는 일부로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른바 시장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소유되지만 자치적인 협동조합들이 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32-3)


3.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이다?


"생산력-생산관계 모델의 명백한 결함 가운데 하나는 결정론적인 측면이다. 여기서는 어떤 것도 생산력의 전진에 저항할 수 없는 듯하다. 역사는 불가피한 내적 논리에 의해 작동한다. 역사를 관통하여 뻗어나가며 그 과정에서 여러 다른 정치적 장치들을 무너뜨리는 단 하나의 역사적 '주체'(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생산력)가 있다. 이는 복수심을 가진 형이상학적 관점이다."(51) 그러나 마르크스의 작업에는 생산력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낳는다는 생각 말고 다른 방향의 사유도 있다. 여기서는 "사회적 생산관계가 생산력보다 선차적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 사유에서는 사회적 관계와 계급투쟁을 만들어내는 인간이야말로 역사의 명실상부한 창조자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인간을 이용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역사는 인간이 자기 목적을 추구하는 활동에 불과하다"고 쓰고 있다.(56)


4.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마르크스가 (푸리에나 생시몽, 오언을) 반대했던 것은 무엇보다 순전히 논변의 힘을 통해 반대파를 이길 수 있다는 이 유토피아주의자들의 믿음이었다. 그들에게 사회란 사상의 전쟁터이지 물질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아니었다."(72) "<고타 강령 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 1875)에서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에는 그것이 태어난 자궁인 낡은 질서가 남긴 선천성 반점이 찍혀 있으리라고 쓰고 있다. 그러니 '순수한' 출발 지점이란 없다."(75) 마르크스에게 사회주의란 "우리가 집단적으로 우리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대체로) 정치적 제스처 게임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을 말한다." "진정으로 다른 미래는 현재의 단순한 연장도 그것과의 절대적 단절도 아니다." "마르크스의 해방 개념은 평탄한 연속성과 철저한 단절 둘 다를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매우 희귀한 존재, 즉 냉철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한 몽상가였다."(79)


5 .마르크스주의는 만사를 경제로 환원한다?


"경제환원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야말로 '생산'이란 단어의 가장 좁은 의미에서 생산을 위한 생산을 믿는다. 반면 마르크스는 더 폭넓은 의미에서 생산을 위한 생산을 믿는다. 그는 인간의 자기실현 자체가 목적으로 평가받아야 하며 다른 어떤 목표의 도구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112) 계급은 "경제적 실체인 만큼이나 사회적 구성체이자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것은 관습과 전통, 사회적 제도, 가치와 사유 습관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정치적 현상이다." "생산은 삶의 특정한 형식들 안에서 수행되고 따라서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노동은 언제나 의미를 띠며 인간은 의미 있는 (문자 그대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동물이므로, 노동은 결코 단순히 기술적이거나 물질적인 사건일 수 없다. 신에게 기도하거나 조국을 찬양하거나 아니면 비상금 주머니를 채우는 방법으로 볼 수도 있다. 요컨대, 경제적인 것은 언제나 그 자체보다 더 많은 것을 전제한다."(116-7)


6. 마르크스에게 세계는 물질 덩어리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은 "역사나 물질이나 정신의 노리개가 아니라 자신의 역사를 만들 능력을 지닌 적극적이고 자기결정적인 존재이다."(125) 유물론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정신'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애초에 그런 질문을 제기하지도 못한다고 답할 것이다. 사회적 협동이 없었다면 우리를 살아 있게 해주는 물질적 생산도 없었을 것이며, 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의 의미는 상당 부분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을 말한다." "의식은 어떤 유령 같은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물질 덩어리지만 독특하게 창조적이고 표현적인 덩어리이며 우리가 '정신'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창조성이다."(127) 따라서 "이 현실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현실을 우리 자신의 활동과는 별개의, 자연적이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소외라 칭한 것이다."(129)


7.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사라진 노동계급에만 집착한다?


"구분을 복잡하게 만들고 위계를 무너뜨리고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의 형태들을 잡다하게 섞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성이다. 어떤 삶의 형태도 이보다 더 혼종적이고 다원적이지는 않다. 정확히 누가 착취받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되면 이 체제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평등하다. 자본주의는 가장 독실한 포스트모더니스트만큼이나 반反위계적이며 가장 열렬한 국교회 목사만큼이나 관대한 포용주의자이다."(153)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노동계급이 점유하는 위치 때문이다. 노동계급은 커다란 망치를 다루는 근육질 남성만이 아니라 "노동력을 자본에 팔 수밖에 없고 자본의 억압적 규율 아래 신음하며 자신의 노동 조건에 대한 통제력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 모두를 포괄한다."(159)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은 "제 기능을 다하면서도 박탈당하고, 특정하면서 또한 보편적이며, 시민사회의 불가결한 일부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156)


8.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폭력적인 정치 행동을 선호한다?


사회주의 혁명은 "조직된 노동계급이 다양한 동맹 세력과 더불어 부르주아 혹은 자본주의적 중간계급을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소규모 반란 집단이 아닌 대다수의 행동이다. 사회주의는 대중적 자치에 관한 것이며,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전문 포커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혁명을 대신 해줄 수는 없다."(174) 혁명주의자들 역시 개혁을 옹호한다. 하지만 이들이 개혁주의자들과 다른 점은 "그와 같은 개혁을 더 장기적이고 더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데 있다.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조만간에 체제가 절대 양보하지 않는 지점에 이를 것이며, 마르크스주의에서 이 지점은 사회적 생산관계로 알려져 있다. 혹은, 좀 거친 기술적 용어로는, 물적 자원의 통제권을 절대 내놓지 않으려고 작정한 지배계급이다. 오직 그 지점에서만 개혁과 혁명 사이의 결정적인 선택이 중대한 문제로 떠오른다."(176)


9. 마르크스주의는 전권을 가진 국가를 믿는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 사회에서 시들어 소멸하리라 희망한 것은 중앙 행정부라는 의미의 국가가 아니었다. 복잡한 근대 문화에서는 어디서든 그런 것이 필요하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자본> 제3권에서 "모든 공동체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공동의 활동들"에 관해 썼다. 행정체로서의 국가는 계속 살아남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끝을 보고자 희망했던 것은 (지배계급을 옹호하는) 폭력의 도구로서의 국가였다."(181-2) "국가는 스스로를 위로부터 사회를 형성하는 존재로 보지만, 실상은 사회가 낳은 산물이다. 사회가 국가에서 나온 게 아니라 국가가 사회에 기생한다. 전체 구조가 뒤집힌 것이다." "마르크스의 목표는 국가와 사회, 정치와 일상생활의 이런 간극을 전자를 후자에 녹임으로써 해소하는 것이었다. 그가 민주주의라 부른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현존하는 국가는 그저 "현 체제가 입힌 인간적 손상의 일부를 닦아낼 수 있을 뿐이다."(185-6)


10. 마르크스주의는 최근의 급진적 운동에 기여한 바 없다?


로버트 J. C. 영에 따르면 1960년대 이전에 "민족주의와 식민주의 문제와 더불어 젠더라는 이슈를 체계적으로 제기하고 논의한 것은 공산주의 운동이 유일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의 권리를 확고히 옹호했을 뿐 아니라 세계 반식민주의 운동에도 가장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실제로 20세기 전반부에 걸쳐 그 운동에 가장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의 세 가지 가장 위대한 정치투쟁, 즉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여성해방, 파시즘에 대항하는 싸움의 선두에 섰다. 반식민주의 전쟁의 위대한 1세대 이론가 대다수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없어서는 안 될 출발점을 제공했다."(196-7) 또한 마르크스는 "자연 자원에 대한 단기적인 자본주의적 착취와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생산 사이의 갈등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독일 이데올로기>를 쓸 때부터 이미 "사회 분석에 지리학적이고 환경적인 요인들을 포함"시킨 현대적 환경주의자이기도 했다.(2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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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계급의 상황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재만 옮김 / 라티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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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Lage der arbeitenden Klasse in England>


◎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의 출현


"제조업은 소규모 상업 부르주아지를 파산시키는 거대한 설비를 세우기 위해, 독립적으로 일하는 수공업자들을 시장에서 몰아내는 자연력을 이용하기 위해 대규모 자본을 필요로 한다. 제조업은 노동의 분업, 수력과 특히 증기력의 활용, 기계의 활용이라는 세 가지 커다란 지렛대를 이용해 지난 세기 중엽부터 세계를 급속도로 혼란에 빠뜨렸다. 제조업은 좁게 보아 중간계급을 창출했고, 크게 보아 노동계급을 창출했으며, 때가 되면 분명 권좌에서 쫓아낼 것이긴 하지만 중간계급이라는 선택받은 이들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한편, '그리운 옛 시절'의 수많은 소규모 중간계급 사람들이 제조업으로 인해 전멸하고 부유한 자본가들과 가난한 노동자들로 갈라졌다는 것은 명백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제조업의 집중화 경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본과 마찬가지로 인구도 집중된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데, 제조업에서 인간, 즉 노동자는 제조업자가 임금이라는 형태로 이자를 지불하는, 자본의 한 조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60)


◎ 대도시 프롤레타리아트 주거지의 실상


"보통 빈민굴에는 단층이나 복층인 작은 집들이 길게 줄지어 있는데, 지하실을 주거용으로 쓰기도 하는 이 집들은 거의 언제나 대중없이 짓는다. 방 서넛과 부엌 하나를 갖춘 이 집들은 런던의 일부 지역을 뺀 잉글랜드 전역에서 노동계급의 일반적인 거처다. 거리는 보통 비포장에 험하고 지저분하며, 채소와 고기 찌꺼기가 그득하고, 하수도나 배수로가 없는 대신, 물이 고여 악취가 진동하는 웅덩이들이 있다. 게다가 형편없고 난잡한 건축 방법 때문에 다수가 모여 사는 좁은 공간에서 환기마저 원활하지 않으니, 이런 노동자가 거주 구역에 어떤 분위기가 팽배해 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맑은 날이면 거리가 빨래를 말리는 장소로 쓰여서, 집과 집 사이에 매단 빨랫줄에 젖은 옷들이 걸려 있다."


"집들 사이에 가려진 통로로 들어가면 보이는 그 불결하고 위태로운 폐허는 묘사하기 어려울 정도다. 멀쩡한 창유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벽은 부스러지는 중이고, 문설주와 창틀은 헐겁거나 깨져 있고, 문은 낡은 판자를 대충 못질해 만든 것이다. 이 도둑들의 거주지에는 훔쳐갈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문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사방에 쓰레기와 재가 무더기로 쌓여 있고, 문 앞에 부어버리는 구정물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웅덩이로 모인다. 여기서는 가난한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 급여가 가장 적은 노동자들이 도둑이나 매춘의 희생자들과 구별을 두지 않고 부대끼며 살아간다. 이들 대부분은 아일랜드 인이거나 아일랜드 혈통이다."(67-8)


◎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간의 공간 단절


"이 도시(맨체스터)는 기묘하게 건설되어서, 어떤 사람이 여기서 자기 업무와 즐거운 산책으로만 활동을 국한한다면, 몇 년 간 매일 이 도시를 드나들면서도 노동자 구역, 나아가 노동자를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현실은 대체로 무의식적이고 암묵적인 합의에 따라, 또한 노골적이고 의식적인 결정에 따라, 중간계급을 위해 떼어둔 지역과 노동자 지구들을 뚜렷하게 분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부르주아지 상층은 더 멀리 떨어진 콜턴과 아드윅, 또는 치탐 힐과 브로턴, 펜들턴의 산들바람 부는 고지대의 정원 딸린 저택에서, 멋지고 안락하고 30분이나 15분마다 맨체스터로 향하는 합승마차가 지나가는 집에서 건강에 좋은 시골 공기를 마시며 자유롭게 지낸다. 이런 배치의 가장 좋은 점은 이 부자 귀족들이 모든 노동자 구역의 오른쪽과 왼쪽에 숨어 있는 음울한 참상을 보지 않고도 그 구역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가장 짧은 도로를 이용해 상업 구역으로 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88)


◎ 부르주아지가 파괴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체에 상해를 입혔는데 그 상해가 죽음을 초래한다면, 우리는 그 행위를 과실치사라고 부른다. 만일 가해자가 자신이 입힐 상해가 치명적인 것을 사전에 알았다면, 우리는 그의 행위를 살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사회가 프롤레타리아 수백 명을 제 수명보다 훨씬 일찍 부자연스럽게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내몰 때, 즉 칼이나 총알 못지않은 폭력을 휘둘러 죽음으로 내몰 때, 수천 명에게서 생활필수품을 빼앗고 그들을 도저히 살 수 없는 위치로 몰아넣을 때, 법의 완력을 이용해 그들을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묶어둘 때, 이 희생자 수천 명이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상황이 지속되도록 허용할 때, 그럴 때 사회의 행위는 앞에서 말한 한 사람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살인이다."(142-3)


"술은 노동자들에게 거의 유일한 쾌락의 원천이며, 세상만사가 공모해 그들을 술로 이끈다. ··· 노동자의 사교 욕구는 술집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데, 다른 장소에서는 친구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어떻게 술집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이런 환경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폭음에 빠지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불가피한 일이다. ··· 음주는 더 이상 방탕한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악덕이 아니다. 음주는 하나의 현상, 선택권이 전혀 없는 대상에 작용하는 상황의 필연적이고도 불가피한 귀결이 된다."(150)


"1840년 리버풀에서 상층계급과 젠트리, 전문직 종사자 등의 평균 수명은 35세였고, 사업가와 형편이 괜찮은 수공업자의 평균 수명은 22세였으며, 숙련노동자와 날품팔이, 시중을 드는 계급 일반의 평균 수명은 15세에 불과했다. 의회의 보고서들에도 이와 비슷한 사실이 많이 담겨 있다. 사망률이 아주 높게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어린 자녀들의 음울한 사망률 때문이다. 어린이의 연약한 신체로는 열악한 생활환경의 악영향을 견뎌내기가 몹시 어렵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거나 둘 중 한 명이 사망한 가정의 아이들은 대개 방치되어 즉각 방치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 방금 인용한 보고서에 따르면 맨체스터에서 노동계급 자녀의 57퍼센트 이상이 5세 이전에 죽는 반면에 상층계급 자녀의 경우 이 비율이 20퍼센트이고 시골의 모든 계급의 자녀의 경우 32퍼센트를 넘지 않는데, 이런 사실에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155)


노동자들이 제공받는 교육의 질이 어떠한지는 어린이 고용위원회의 보고서에 실린 한두 가지 사례를 토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 "열일곱 살 먹은 한 소년은 2의 2배가 4라는 사실을 몰랐고, 자기 손에 돈을 쥐고도 2펜스가 몇 파딩[영국의 옛 화폐 단위, 4분의 1페니]인지도 몰랐다. 몇몇 소년들은 런던은 물론이고 자기들 고향에서 걸어서 겨우 1시간 거리인 데다가 울버햄프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윌렌홀Willenhall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몇몇은 여왕의 이름을 비롯해 넬슨Nelson, 웰링턴Wellington, 보나파르트Bonaparte라는 이름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 바울이나 모세, 솔로몬을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이들이 딕 터핀Dick Turpin[18세기 영국의 노상강도], 특히 잭 셰퍼드Jack Sheppard[18세기 영국의 강도, 절도범, 탈옥범]의 생애와 활동, 성격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160)


◎ 분업의 파괴성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강제노동의 영향은 분업 때문에 몇 배로 증대해왔다. 대다수 부문들에서 노동자의 활동은 매년 똑같고 매분마다 반복되는, 순전히 기계적인 하찮은 작업으로 전락한다. ··· 이런 노동은 정신활동을 할 틈을 주지 않으며, 다른 생각을 일체 못할 정도로 노동자의 주의력을 잡아끈다. 이렇게 노동하라는 형벌, 즉 먹고 자기에도 부족한 시간만을 줄 뿐 야외에서 운동을 하거나 자연을 즐길 시간을 전혀 주지 않고 정신활동을 할 시간은 더더욱 주지 않은 채 시종일관 노동하라는 형벌이 어떻게 인간이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을 완화할 수 있겠는가?"(168)


◎ 여자와 아동노동 착취


"실을 잣고 직물을 짜는 작업에서 인간 노동의 몫은 주로 끊어진 실을 잇는 것이고 나머지는 전부 기계가 담당한다. 이 일을 하는 데는 근육의 힘이 아니라 손가락의 유연성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남자는 이 일에 불필요할 뿐 아니라 손의 근육이 더 발달하기 때문에 실제로 여자와 어린이보다 부적합하며, 따라서 자연히 거의 전부 여자와 어린이로 대체된다. 이런 이유로 근육을 사용하고 힘을 쓰는 일을 증기력이나 수력이 대체하면 할수록 고용할 필요가 있는 남자의 수가 줄어든다. 또한 여자와 어린이는 임금이 더 싸고 이 부문들에서 남자보다 일을 잘하기 때문에 남자를 대체해간다. 방적 공장에서 소모방적기를 차지하는 이들은 거의 전부 여자와 소녀다."(191)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아내의 취업은 필연적으로 가정을 완전히 해체하고, 가정에 토대를 둔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런 해체는 아이들은 물론이고 부모까지도 도덕적으로 대단히 타락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생후 1년간 아기를 걱정할 시간도 없고 남들처럼 다정하게 돌볼 시간도 없는 어머니, 실제로 아기를 거의 보지도 못하는 어머니는 자식에게 참된 어머니일 수 없고, 불가피하게 자식에게 점점 무관심해지며, 모르는 사람 대하듯이 자식을 애정 없이 대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훗날 가정생활을 망치기 마련이고, 언제나 혼자 지내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이 속한 가정을 결코 편하게 느끼지 못하며, 그 결과 이미 전반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노동계급의 가정을 더욱 흔들게 된다."(194)


◎ 노동운동의 의의 


"조합과 파업은 부르주아지의 패권이 오로지 노동자들 간의 경쟁, 즉 노동자들의 응집력 부족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리고 조합은 아무리 편파적이고 아무리 편협한 길이라 해도, 바로 현존 사회질서의 핵심 중추를 겨냥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 사회질서에 엄청난 위협이 된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와 더불어 현존 사회질서 전체에 가장 쓰라린 공격을 가할 수 있는 지점은 경쟁이다. 노동자들 간의 경쟁이 타파된다면, 모든 노동자가 더 이상 부르주아지에게 착취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면, 재산의 지배는 끝장날 것이다. 임금이 수요와 공급의 관계, 노동시장의 우연한 상태에 달려 있는 까닭은 단지 이제까지 노동자들이 사고팔리는 동산으로 취급되는 처지를 감수해왔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더는 사고팔리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는 순간, 노동의 가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노동력뿐 아니라 의지까지 가진 인간의 역할을 맡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오늘날의 정치경제학 전체가 끝장날 것이다."(275)


◎ 공상적 사회주의 비판 (오언주의)


"여론의 지지를 얻는 방법 외에 다른 모든 방법을 거부할 정도로 철저하게 유순하고 평화적인 영국 사회주의자들은 기존 질서를 나쁜 그대로 받아들인다. 게다가 그들의 입장과 현재 정식화되어 있는 그들의 원리를 감안할 때,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성공을 거두기에는 너무나 교조적이다. 그들은 하층계급들의 도덕적 타락을 한탄하면서도 이런 옛 사회질서의 해체에서 진보의 요소를 보지 못하고, 유산계급의 사적인 이해관계와 위선이 부패를 훨씬 더 많이 초래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든다. 그들은 어떠한 역사적 발전도 인정하지 않거니와, 공산주의로의 이행이 가능하고 또 필연적인 지점까지 국민들이 정치적 발전이라는 행진을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도외시한 채, 국민들을 단숨에, 하룻밤 사이에 공산주의 상태로 데려다 놓으려 한다. 그들은 노동자가 부르주아에 분개하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이런 계급적 증오는 효과가 없고 결국에는 도덕적 유인만이 노동자를 목표를 더 가까이 데려간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증오 대신 현재 영국의 상황에서 훨씬 더 효과가 없는 박애와 범애를 설교한다. 그들은 심리적 발전만을, 즉 과거와 전혀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인간의 발전만을 인정하지만, 그 개인을 포함해 전 세계는 과거에 의존한다. 이처럼 그들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너무나 형이상학적이어서 거의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294-5)


◎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선동


"언젠가 나는 어떤 부르주아와 함께 맨체스터로 들어가면서 그에게 형편없고 건강에 해로운 건축 방법과 노동자 구역의 참혹한 여건에 대해 말했고, 이렇게 난잡하게 건축된 도시는 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 사람은 끝까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우리가 헤어진 길모퉁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여기서 큰돈을 벌 수 있죠.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 영국 부르주아는 돈만 벌 수 있으면 자기 노동자들이 굶주리건 말건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인생의 모든 상황이 돈을 척도라 삼아 평가되고,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것은 허튼 수작, 비실용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헛소리로 치부된다. 그런 까닭에 물물교환에 종사하는 이 유대인들은 부에 관한 학문인 정치경제학을 제일 좋아한다. ··· 부르주아는 자신이 공원들과 구매와 판매가 아닌 다른 어떤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336)


"한 계급 전체의 편견은 낡은 외투 벗듯이 떨쳐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안정적이고 편협하고 이기적인 영국 부르주아지는 편견을 떨쳐낼 여지가 가장 적은 계급이다. 이런 추론들은 모두 근거가 가장 확실한 것들이다. 결론과 전제의 근거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일부는 역사적 발전에 관한 사실들, 일부는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성요소들이 전부 명확하게 규정되고 선명하게 구분되는 영국만큼 예언하기 쉬운 곳은 없다. 혁명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평화롭게 해결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언한 것보다 혁명이 완만하게 일어날 가능성은 있다. 그렇지만 이 가능성은 부르주아지의 발전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발전에 달려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주의적 공산주의적 요소들을 흡수할수록 혁명 과정에서 유혈사태와 복수, 만행이 덜 자행될 것이다."(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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