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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 새롭게 하라, 놀라게 하라, 그리고 자유롭게
피터 게이 지음, 정주연 옮김 / 민음사 / 2015년 8월
평점 :
모더니스트들은 대체로 중도가 부르주아적이고 지루하다고 생각하여 정치나 사상 면에서 극단을 선호했다. "모더니스트들은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가답게 미학적 안전지대를 벗어난 곳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꼈다. 모든 모더니스트가 군말 없이 동의했던 유일한 신념은 이랬다.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이 익숙한 것보다 낫고, 드문 것이 평범한 것보다, 실험적인 것이 상투적인 것보다 낫다." 모더니즘은 "화음과 마찬가지로 저항적 아방가르드 운동을 아무렇게나 모아 놓은 것이 아니며 그 부분들의 총합보다 더 크다. 모더니즘은 사회와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 문화 생산물과 그 생산자에 대한 새로운 평가 방식을 낳았다."(26-7) 이처럼 모더니스트들이 "서로 눈에 띄게 다르기는 하지만 뚜렷한 공통점도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이단의 유혹, 즉 관습적인 감수성에 저항하려는 충동이며, 또 하나는 철저한 자기 탐구이다."(29)
"모더니스트 진영은 결코 통일된 집단, 자발적인 동맹군이 아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고갱은 인상파들을 시각적 개연성의 노예라고 비판했다. 스트린드베리는 입센의 사상극을 몹시 싫어했고, 몬드리안은 피카소가 입체파에서 추상주의로 나아가는데 실패했다고 실망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조이스의 외설스러움에 대해 강한 우려를 품고 있었다." 가장 일관되고 가장 요란하게 아방가르드의 화합을 깨뜨린 실바도르 달리는 "기괴하고 때로는 불쾌한 초현실주의 작품뿐만 아니라 말로도 대중을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모더니스트 경쟁자들 모두를 비난했다. 달리는 자신이 "회화를 현대 예술의 공허함에서 구해 낼" 운명이라고 떠들었다. 모더니스트들은 부르주아들을 깔본 것과 마찬가지로 동료 모더니스트들도 무시했다. 꼭 깔 본 건 아니더라도 적어도 동료들이 미적 대담성이나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은 했다."(44-5)
그러나 모더니즘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적, 문화적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모더니즘은 충분히 유복하고 자유로우며, 기꺼이 모더니즘을 지지하는 든든하고 영향력 있는 후원자와 고객들이 없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47-8) 모더니스트들은 사회에 대해 도발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 화가들은 자신들이 불태우고 싶어 했던 바로 그 미술관 벽에 자기 작품을 거는 꿈을 꾸었다."(43) 저자는 "모더니즘이 고급문화의 향유자들과 생산자들 모두에게 정신적 해방감을 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것은 예술가들에게 자신들의 자유로운 공상을 진지하게 여겨도 좋다는 면허, 그렇게 오랫동안 주제와 기법을 지시해 왔던 정전을 노려보아도 좋다는 면허, 군림하는 기준을 수정하라고 요구할 수 있는 면허, 아니 더 과격하게 말하면 타도를 외칠지 스스로 결정해도 좋다는 면허, 그 혁명을 완수할 사람이 될 면허를 주었다."(62)
# 모더니즘 혁명의 조건들
1. 산업화, 도시화한 국가들의 부
2. 중산 교양층의 후원
3. 공공 시설 확대 (도서관, 미술관, 음악당)
4. 관객층의 미적 취향 다변화
5. 민주적 사회 분위기 (모더니즘은 예술 취향의 우열을 강력히 옹호한다)
6. 종교의 영향력 쇠퇴 (후기 기독교)
"보들레르는 기성 시와 회화의 지루한 재현을 아주 혐오하면서 동시에 기교가 뛰어난 대부분의 낭만주의자들이 지녔던 억제되지 않은 주관성에 대해서도 견디지 못했다. 그는 "현대적 의미에서 순수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고 반문한 뒤 이렇게 대답했다. "객체와 주체를 동시에 포함하는, 예술가의 외적 세계와 예술가 자신을 동시에 포함하는 암시적 마법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늘 주체의 반응이 극히 중요했다. 보들레르는 1859년에는 직설적으로 파리 살롱을 비평하면서 "만약 나무, 산, 강, 집의 집합, 그러니까 우리가 풍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오직 나를 통해서, 나 개인적인 시선, 내가 그 풍경에 부과하는 관념과 감정을 통해서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말했다."(67-8) 이처럼 초창기 모더니즘 시인들은 자기 시대에 몰두하면서, 외부 세계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부 세계를 "고통스러울 만큼 정직하게 인식하게 되었다."(93)
1874년 4월, 수집가들에게는 생소한 클로드 모네가 뜻을 같이하는 반아카데미 화가 스물아홉 명과 함께 파리에서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인상파 화가들은 보들레르의 그 유명한 강령을 실천하고자 자신들이 속해 있는 현재에 아낌없이 관심을 쏟고 있었다. 역사화, 즉 살롱전에서 수상을 보장받을 수 있는 매우 영예로운 장르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물론 자기성찰을 중시하는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객관적 상관물은 있었다. 그들의 그림에도 풍경, 도시, 초상과 같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소재가 있지만 그것이 화려한 장관을 이루는 것도 아니고 진짜처럼 보이지도 않으며 사실상 다른 소재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그들의 그림이 눈을 끄는 것은 활기 넘치는 강렬하고 뚜렷한 붓놀림과 화려한 색상 때문이었으니까 말이다." 본질적으로 인상파 화가들의 자기 몰두는 "아카데미 회화의 규범을 아무렇지 않게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 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거북해했고 기만당했다고 생각했다."(134-5)
"반항을 일삼았지만 이 특이한 모더니스트들은 비타협적이든 아니든 간에 결코 혼자는 아니었다. 같은 반골 동지들뿐만 아니라 그들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또 있었다. 특히 19세기부터 그들 주변에서 그들의 재능을 알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문화 중개인들이었다. 공연 주최자들은 바이올린 연주자들과 소프라노 가수들을 연주회장마다 끌고 다녔고 미술상들은 탐욕스러운 고객들에게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이런저런 보석을 사지 않으면 소장품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꼬드겼다. 또 연극과 오페라 제작자들은 화려한 무대로 관객을 유인했고 문학과 미술비평가들은 최대한 믿을 만한 어조로 혁신가들의 편을 들거나 비판했다. 이런 문화 중개인들은 대부분 문화 시장에 새로 진입한 미술, 음악, 문학 애호가들을 부추겨서 단순한 오락물을 넘어서는 세련된 것, 어려운 것, 비인습적인 것을 감상할 수 있도록 방법을 가르쳤고 더불어 그들의 취향을 형성하는 데 개입했다."(145-6)
"1890년이 되기 훨씬 전에 주로 유럽에서 이미 예술적 혁신이 눈에 띄게 가속화되고 있었다. 연주회, 낭독회,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거의 매년 놀라운, 때로운 불쾌한 일이 일어났다. 문학적 대망을 품은 소설가들은 독자들을 점점 더 버겁게 했고 심각한 시인들은 독자들에게 난해한 지식을 요구했으며 실험적 작곡가들은 쉬운 음악을 경멸했고 독창적인 건축가들은 학교에서 배운 전통적 모범에 진저리를 치며 새로운 소재와 검증되지 않은 영역을 대담하게 실험했다. 모든 고급문화 영역의 모더니스트들이 미래행 급행열차를 탄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가장 과격한 혁명가는 바로 화가들이었다."(189) 모더니스트 화가들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여러 방법 중에서 관객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길은 솔직한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런 자기 응시는 주관성의 분명한 예로 병적인 자아도취는 아니면서 정상적인 자기 몰입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195)
반 고흐는 죽기 2년 전인 1888년부터 "자기 화풍을 찾은 뒤 바라던 대로 더 내밀한 유사성을 포착할 수 있었다. 치열할 만큼 정직했기에 자신의 모습을 미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창백한, 때로는 푸르스름한 얼굴, 푹 팬 뺨, 신경쇠약의 증거들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옷이나 배경에도, 신경질적인 붓질로 스타카토 같은 평행선이나 현기증 나는 소용돌이를 그려서 자신을 드러냈다. 가장 확실하게 자신을 나타내 주는 것은 자화상이 아니라 수없이 모방된 생레미의 밤이었다. 이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별들과 비현실적으로 뾰족한 달이 생레미 마을을 비추고 있고 모든 것이 흔들리는 후광에 둘러싸여 있다. 아마도 정신적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켜 고통을 다스려 보려는 헛된 노력이었을 것이다. 후기 작품들은 불안을 억제하지 못하고 불안에 압도당하고 만 것처럼 보인다. 자화상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든 안 붙어 있든 고흐의 작품들은 모두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다."(201-2)
"모더니스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고 앙소르와 거의 정확하게 같은 시기에 살았지만 훨씬 더 멀쩡했던 노르웨이인 에드바르 뭉크(1863-1944)는 정신이상의 일란성 쌍둥이인 불안증의 화가였다."(211) "뭉크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자 흔히 현대적 고뇌의 진수로 여겨지는 <절규>는 1893년부터 여러 차례 제작되었다. <절규>에는 성별을 알 수 없는 한 인물이 뺨을 손으로 감싼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이 사람이 서 있는 긴 다리 주위에는 구름이 험악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다. 뭉크의 말에 따르면 심한 불안증을 경험한 뒤 이렇게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관객들은 그 악몽 같은 광경이, 예민한 당시 사람들이 혼잡하고 부산한 1890년대 도시에서 느끼는 신경증적 불안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하지만 뭉크는 예언자도 사회학자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 충격적인 작품은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고백이었다."(214)
"바실리 칸딘스키Vasili Kandinsky는 뮌헨에 있을 때, 1909년이거나 1910년이 다 돼 가던 어느 늦은 오후부터 더 이상 날짜 같은 무미건조하고 정확한 지표로 자신의 회고록을 어수선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는 스케치를 마치고 작업실로 돌아갔다. 그 순간이 바로 추상미술이 탄생하려는 찰나였다. 칸딘스키는 이렇게 회상했다. "별안간 내부에서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림이 광채를 뿜으며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형과 색만 있었던 그 수수께끼의 그림에 달려들었다. 그러자 곧 상황이 파악됐다. "대상이 내 그림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 사실에 대한 충실한 묘사가 미술에 대한 가장 큰 장벽처럼 보였다. 칸딘스키는 대단히 포괄적인 결론을 내렸다. "자연의 목적과 미술의 목적(그리고 수단)은 본질적으로, 태생적으로, 그리고 우주 법칙에 따라 서로 다르다." 그는 외부 세계와 전혀 상관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231)
말레비치는 물질주의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던 "칸딘스키처럼 러시아 민속 종교에 물들었지만 칸딘스키와 달리 화가인 자신을 신으로 여겼고, 몬드리안보다 더 회화를 자연과 거리가 먼 영역으로 만들었다."(238) "말레비치는 자신의 단순해 보이는 작품들이 숭고한 이데올로기의 구현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無를 대신할 무엇인가를, 자본주의의 탐욕을 대체할 예술적 감수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절대주의를 통해 내가 말하려는 것은 회화에서 순수한 감정 혹은 감각이 절대 우위라는 것이다." 그의 회고대로 정사각형의 형태로 피난했던 것은 객관적 세계라는 짐으로부터 미술을 해방시키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 쳤던 1913년의 일이었다. 그는 그 사각형이 무의미가 아니라 "무목적의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미술 작품과 화가가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 말레비치가 새로운 종교를 위한 때가 됐다고 했을 때 그 새로운 종교란 바로 새로운 미학이었다."(240)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출현한 다다이즘Dadaism의 계획은 "딱 하나라고 할 정도로 단순한데, 그것은 오로지 '부정'이었다. 다국어에 능한 루마니아 시인이자 다다의 열성 창립 회원인 트리스탕 차라Tristan Tzara는 다다의 창시자들 중 단연 가장 활발하고 끈덕지게 활동했다. 그는 자신들의 계획을 이렇게 간결하게 표현했다. "다다의 시작은 하나의 예술의 시작이 아니라 구역질의 시작이었다." 다다의 열성적 지지자들은, 가장 강경한 반체제파들을 비롯한 모든 예술가들이 부르주아 착취자 및 속물들과 타협하여 진정한 의미의 전복적 임무에 등을 돌렸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된 예술을 파괴하고자 했지만 "이것은 자기모순적 명령이었다. 예술을 없애기 위한 운동이 불가피하게 예술 작품을 생산했고, 그중 일부는 모더니즘의 반역 운동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248-9)
추상파와 입체파는 "세잔의 정물화(1907년)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 정물화들은 탁자, 의자, 과일이 담긴 그릇들을 묘사하면서 사실상 반드시 지켜야 하는 선의 기본 규칙들과 원근법들을 위반했다." 과거의 화가들은 "2차원의 매체에 3차원의 환상을 부여하려고 노력해 왔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화가들은 형태와 색의 농담을 교묘하게 조작하였다. 그런데 최초의 입체파이자 단연 가장 위대한 입체파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는 이 유서 깊은 방법들을 거부했다. 이들은 관객들에게 예술 작품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려고 했다. 그들은 실제로 융합되어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는 표면을 조각 냈고 여성의 유방이나 뺨 같은 곡선의 대상을 본래 형태로부터 파괴하여 사실상 아무것도 닮지 않은 기하학적 윤곽으로 변형하였다. 한마디로 입체파들은 고의적으로 대상의 세계를 왜곡해 표현하고 그 단편들을 조합하여 인식하는 일을 관객의 몫으로 돌렸다."(264)
산문과 시의 세계에서는 주관성을 응시하자는 모더니즘의 외침에 동조한 모험적인 소설가들이 사실주의의 성과를 거부하고, 내적 실체에 눈을 돌렸다. "간단히 말해 모더니스트 소설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억제하기, 통일성, 연대순 배열, 결말 같은 용인된 문학의 평가 기준을 전복하고 철저하게 내부로 향했다. 모더니스트의 거울은 주로 작가 자신을 비춘 것이다. 전형적인 모더니스트의 예를 들어 보자. 앙드레 지드의 가장 독창적인 작품 <위폐범들Les Faux-Monnayeurs>의 주인공 에두아르는 <위폐범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려고 한다. 이 소설은 주로 이 작품의 창조자인 지드가 길게 인용한 에두아르의 일기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니까 <위폐범들>이라는 소설이 무언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건 바로 <위폐범들>이라는 소설 자체에 대해서다. 이것은 전통적인 소설 작법에 대한 모더니즘적 저항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하찮은 현실성은 숨을 헐떡이며 뒤로 처졌다."(325)
# 전통 기법을 폐기한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들
1. 헨리 제임스 : 의사처럼 꼼꼼하게 인간의 사고와 행동의 미묘한 불화를 짚어내는 의식의 탐구 기법을 구사한다.
2. 제임스 조이스 : 풍부한 문학적 인유, 곡예에 가까운 상상력, 탁월한 언어 능력을 지닌 과격한 모더니스트이다.
3. 버지니아 울프 : 이지적인 표현으로 단단히 응축된 자신만의 세상을 그려낸다.
4. 마르셀 프루스트 : 경험은 오류와 부조화의 거대한 행렬이다. 예술만이 기억의 간극을 메울 수 있으며, 무관심하고 무자비한 시간의 파괴를 이길 수 있는 수단이다.
5. 프란츠 카프카 : 무서운 상황과 불안한 주인공을 다루면서도 내밀한 감정적 실체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고, 노련한 보고자만이 가질 수 있는 초연함을 보여준다.
"모더니즘에서 가장 난해한 분야는 음악이다. 20세기 음악의 대격변기에 아무도 의심치 않는 선구자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는 대격변 이상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한 번도 대규모 관객을 확보했던 적이 없었으며 죽은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전문가들만의 관심거리로 남아 있다. 아방가르드 회화나 소설, 건축이 얼마간 시련을 겪은 뒤 주류에 편입한 것과 달리 대부분의 아방가르드 음악은 지금도 여전히 아방가르드에 속한다."(399) "무조주의와 12음 음악은 쇤베르크의 모더니즘 증명서였으며, 베르크와 베베른 같은 후배 작곡가들은 그 새로운 질서가 얼마나 다채로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쇤베르크의 발명품과 무관한 모더니즘의 진로도 있었다. 프랑스인 작곡가 에드가 바레즈Edgard Varese와 미국인 존 케이지John Cage는 참으로 유별난 생각에 열중하였고 순전히 새로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그 오스트리아인들과 경쟁하였다."(447)
건축 분야에서 미래파 원칙(1911년)을 주창한 마리네티는 "미의 의미를 전통적인 감식가들이 안타깝게도 간과했던 미적 측면까지 확장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빠른 이동, 성장하는 세속주의, 오늘날의 물질문화와 같은 현대적 현상들의 압도적인 힘, 상상력에 의해 변화하는 것의 우월성, 이 모든 것이 건축물에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482)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적을수록 더 많다"는 짧은 명언을 남겼는데, 이 말은 "건축술이란, 남아도는 장식과 지나치게 복잡한 세부 표현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의미인 동시에 건축 과정에서 기계, 즉 말 그대로 노동력을 절감하는 장치들의 도움을 중시했다는 뜻이다."(501) 유럽에서 전체주의가 득세하자 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미국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뉴욕의 미술협회 회장 월터 쿡은 "히틀러는 최고의 친구입니다. 그가 나무를 흔들었고 나는 사과를 주웠지요."라고 말했다. "그 사과의 목록은 길고 유명했으며 미국 문화를 20세기의 선두로 몰아 갔다."(532)
한편 나치 독일에서는 "제복을 입은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너무도 심각한 표정으로 차렷 자세를 한 채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진 깃발을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장관이 연출되었고, 히틀러가 두 시간짜리 연설을 하기 위해 어두운 뒷배경에서 나타나는 숨 막히는 순간에는 화려한 조명이 교묘하게 분위기를 조작했다. 또한 나치의 공공건물 설계(그리고 계획대로 지어졌을 경우는 그 건물 자체)는 기념비적 신고전주의 양식이었다. 그 민족의 신비감을 교모하게 조장한 것이다. 지독히도 선동적인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선전 영화는 모두 레니 리펜슈탈이 훌륭하게 촬영한 것이다." "히틀러 정권이 어떤 모더니즘 기법(리펜슈탈의 영화들이 가장 좋은 예다)을 이용하려고 했든 간에 이제 모더니즘의 근본 원칙, 즉 충동과 창조성을 모더니즘에 반대하는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자유주의는 나치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677-8)
"아무리 소비에트가 반체제 고급문화에 반대한 이념적 근거가 나치와 다르다고 해도 결국 그 두 체제는 거의 같아지고 말았다. 이 정권은 1952년 8월 12일, 스탈린의 피해망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디시어를 쓰는 대단히 촉망받던 다섯 명의 선도적인 작가들을 처형하였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게 1958년 혁신적인 소설 <닥터 지바고>에 대해 수여된 노벨상을 거부하게 만든 것도 바로 그 정권이었다. 거부라는 극단적인 선택만이 서유럽에서 그 오래된 로맨스를 스탈린주의와 공존시킬 수 있었다. 1936년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갑자기 공격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듯 소련 공산당은 더욱 야만스럽고 천박하게 문화에 개입하였고, 그 때문에 모더니즘 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들의 서글픈 역사는 "모더니즘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정치적 자유가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라는 명제를 재차 입증한다.(691-2)
"전쟁 이후 모더니즘의 생존 위기는 단순히 재능이 탁월한 예술가들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또다시 뒤샹으로 거슬러 올라가 근본적인 철학적 반론에 직면하게 되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더 정확하게는 예술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컬러 영화, 텔레비전, 제트기의 개선을 비롯한 기술 시대의 은총 같은 진보가 필연적으로 이러한 질문들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기술의 진보는 고급문화의 평등화를 가속화했고, 그렇게 해서 모더니즘이라는, 예술에 대한 그 배타적인 태도가 전후 문화 속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본 문제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제기되었다." 미국인들은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내놓거나 맹렬하게 자율성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조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갔다. '타시슴tachisme'과 '앵포르멜art informel'이라고 명명된 추상표현주의에서 "가장 두드러진 화가 잭슨 폴록은 곧 유럽에서도 제 나라인 미국에서만큼 유명해졌다."(731)
1960년대 이후 팝아트는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에 대해 노골적으로 도전장을 던진 추상표현주의의 급진적인 주장들을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팝아트의 출현과 성공은 모더니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 새로운 화가들은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을 하나의 범주로 단순화하려고 하였다." "팝은 혁신적인 회화와 평범한 회화, 원본과 복제품, '사회 참여적 예술'과 '예술을 위한 예술'과 같은, 일반적으로 범주화되어 있는 영역들을 마구 뒤섞었다. 그래서 예술의 본성을 정의하고 예술의 운명을 예측해 보려는 오랜 노력을 대체로 허사로 만들어 놓았다."(737) "저급 예술과 고급 예술이 상호 작용하게 만드는 것, 즉 저급 예술을 고급 예술로 만드는 것이 로이 릭턴스타인Roy Lichtenstein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가장 유명한 차용 작품들은 성욕과 공격성을 단호하게 드러내고 있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프로이트적 관점을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746)
"워홀은 예술과 비예술의 구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뒤샹과 비슷했지만 반모더니스트적 입장에 있어서는 달랐다. 대체로 사심 없이 즐기는 뒤샹보다는 확신이 훨씬 적었고 돈에 더 비중을 두었다."(752) 전형적인 아방가르드들이 보기에 부르주아 소비 대중을 향한 작품 '판매'는 신념의 파기나 다름없었다. 물론 신념이 확고하고 부유한 데다 열정적인 모더니즘 애호가를 만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성공은 아방가르드의 진정한 사회적 역할에 대한 배신이었다."(755) 비평가 힐턴 크레이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심각한 예술, 그러니까 과거에 어렵고 신비롭고 비밀스럽다고 여겨졌던 예술이 팝의 확산과 함께 재미있고 쉬운 것, 눈물보다는 웃음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심각하다고 주장하는 예술을 이해하고 즐기기 쉬워졌다는 것. 잭슨 폴록 같은 이들의 작품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