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기원 너머의 역사담론 3
존 B. 던컨 지음, 김범 옮김 / 너머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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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성과의 요약(pp.382~397)


# 고려의 관료 제도에서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요소

1. 전통적인 종교(이데올로기)가 왕조의 정통성을 보장 : 고려의 건국을 정당화한 불교와 풍수지리설

2. 여전히 막강한 전통적인 귀속 집단의 정치력 : 지방 군현의 거의 모든 일상 행정에 관여하던 향리 가문

3. 지배 집단 구조의 연속성 : 지방 사회를 지배한 주요 가문의 세습적 특권이 중앙 관원 가문으로 연결


"고려부터 조선 전기까지 한국사의 중심적 주제의 하나는 중앙집권적 관료 제도를 창출하려는 노력이었다. 이것은 고려가 흥기하기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관료제도를 만들려는 신라 국왕들의 노력은 골품제 귀족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좌절했지만, "2세기가 넘는 통일신라의 통치는 지속적인 통일을 위한 제도적·문화적 기반을 놓았다."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물리치고 승리했지만, 반도의 장악력은 미약했다. 왕건이 이끈 체제는 대등한 세력 중에서 국왕이 실질적인 수장을 맡은 군사 지도자의 연합이었다. 전국 대부분은 중앙의 군사 지도자와 연합하거나 그 아래에 복속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사병을 지휘하고 독립적으로 지방을 통치하려는 의도를 가진 지방 호족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이처럼 고려는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통치를 수립하는 데 왕실 자체에 맞서는 권력과 권위를 누린 중앙 연합과 반도 전역에 걸쳐 높은 정도의 지방자치가 지속되었다는 두 가지 주요한 내부 장애에 직면했다."


"새 왕조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중앙 연합의 권력을 억제하고 국왕의 권력과 권위를 제고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제2·3대 국왕인 혜종과 정종의 치세 동안 일어난 유혈 사태로 임무는 좀더 쉬워졌지만, 왕권을 견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국왕은 제4대 광종이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의 공포와 과거제도의 시행─연합 세력의 군사적·정치적 지위를 격하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을 비롯한 여러 제도 개혁을 단행한 뒤 마침내 치세 후반 일련의 유혈 숙청으로 연합 세력의 배후를 파괴했다. 광종의 방법은 가혹했지만, 그 후계자가 관료 제도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고려의 제5대 국왕인 경종은 전시과를 시행해 왕조를 안정된 재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제6대 성종은 중국 삼성육부제의 모범을 받아들여 정무 관서인 중추원과 문하성을 정규 조정 안에 편성해 구조적으로 국왕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함으로써 관료적 정치체제의 창출로 나아가는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고려 전기의 국왕들은 지방 호족의 도전도 해결해야 했다. 광종의 과거제도 시행은 중앙 연합에 대항해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는 수단이 되었지만, 지방 호족의 후손이 중앙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제도적 방법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국왕이 지방 호족에게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을 사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충성을 배양하려는 왕조의 정책은 성종 때 그들의 특권을 축소해 중앙이 지방행정을 통제하는 제도 아래로 복속시키는 것으로 전환되었다. 성종은 지방 사병을 혁파하고 지방 통치 조직을 전국적인 향리 제도로 통합하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12개의 지역 거점에 설치된 목牧에 문치 행정을 처음 시행했다. 11세기 전반 현종은 소수의 중앙 관원을 지방에 파견해 그 정책을 계승했는데, 이것은 150년 동안 지방 주요 가문의 강력한 자치적인 통제 아래 있었던 군현에 고려왕조가 직접적인 감독을 시행한 첫 번째 사례였다." 


"다음 한 세기 반 동안 중앙 체제는 지방 주재를 점진적으로 확대했고, 그 결과 12세기 후반에는 전국 군현의 거의 절반이 중앙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관료 제도를 향한 명백한 전진에도 불구하고 국왕들은 고려 사회의 비교적 낮은 분화에서 부과된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10세기 중반 지주의 이해가 해상무역 세력의 이해를 무너뜨리면서 고려 국왕들은 지주 세력 이외에는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대안적 사회계층을 갖지 못했다. 광종은 지방 호족을 이용해 중앙 연합을 상쇄하려고 했지만, 호족 또한 세습적인 지주층이었다. 그 결과 과거제도를 거쳐 등용된 호족 가문의 자손들은 그들의 귀속적 특권을 이용해 자립할 수 있었고 그 후손들은 새로운 중앙 귀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2세기가 시작될 무렵, 중앙에 기반을 둔 이런 가문은 관원의 상층을 장악해 정무 기구의 통제, 토지에서 산출되는 가용 자원과 농민에 대한 접근을 놓고 국왕과 경쟁하게 되었다."


"1170년의 무신란 이후 정치권력은 문반 귀족으로부터 무신에게 넘어갔지만, 그 반란은 고려 정치체제의 기본 역학을 바꾸지 못했다. 무신 집정은 문반 귀족보다 더욱 많이 국왕을 통제했지만, 무신들은 자신 소유의 농장을 만들고 문반 귀족 가문과 혼인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위신을 높이려고 했다. 그 결과 무신 집권기 동안 많은 기존의 문반 귀족이 생존할 수 있었고 번창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고려 후기의 국왕들은 12세기의 선왕들을 괴롭혔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상황에 자신들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고려 후기 국왕들의 상황이 더 나빴는데, 무신 집권기 동안 사유지가 확대되어 가용 자원의 분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단합해 지주 귀족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상인 같은 그 밖의 중요한 사회집단이 없는 상황에서 고려 후기 국왕들과 원元 출신의 왕비들은 외국 신하·환관·노비에게 의존해 정치 운영을 통제하려고 했다."


"국왕이 지원을 의지할 만한(도시都市나 상인 집단 같은) 다른 주요한 사회계층이 없는 사회에서 대토지를 소유한 중앙 귀족의 흥기는 고려 왕권을 약화시킨 주요하고 결정적인 요소였다. 국왕이 의지할 만한 또 다른 사회집단은 신라-고려 교체기 지방 호족의 후손인 향리였다." "국왕은 향리에게 수조권의 특권을 주고 중앙 관직의 획득을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지원을 얻는 정책을 추구했다. 광종과 그 밖의 10세기 국왕들은 지방 향리를 이용해 중앙 연합의 권력을 상쇄하려고 했지만, 대안적 사회집단으로서 향리는 매우 실제적인 한계를 일부 안고 있었다. 향리는 그 자신이 대토지를 소유한 세습적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10세기의 수많은 중앙 연합 세력과 11~12세기의 문반 귀족과 전체적으로 동일한 사회계층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 향리 권력의 물질적·사회적 기반은 외침의 파괴와 중앙 귀족 가문의 경제적 이익으로 지방이 수탈되면서 전국적으로 심각하게 침식되었다."


"13세기 후반부터 14세기 중앙의 권력투쟁은 세 가지 주요한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하나는 물적·인적 자원에 접근하는 문제였다. 나라의 경작지는 대부분 농장에 편입되었고, 그 농장의 주인들은 자주 탈세할 수 있었으며, 인구의 대부분은 소작농이나 노비로 농장에 편입되었다. 국왕은 토지와 백성의 소속을 결정하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특별 기구를 이용해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다시 주장하려고 간헐적으로 시도했지만, 양반이 점점 더 자원을 지배하는 경향을 되돌릴 수 없었다." "훨씬 긴급한 문제는 공전으로 할당된 토지의 분량이 줄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려 후기 국왕들은 일상적으로 신하들에게 토지를 분급하거나 앞서 공전이었던 토지의 수조권을 주어 충성을 사려고 했다. 그 결과 조세수입이 급감했고, 상황은 왜구의 침입으로 더욱 악화되어 국가는 야전군에게 지급할 자금이 부족하고 관원들에게 녹봉을 줄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 번째 쟁점은 정치 운영의 통제와 관련된 문제였다. 권위의 부족과 자원에 대한 접근의 제한으로 곤란을 겪고, 양반이 지배하는 조정과 직면한, 고려 후기의 국왕과 원 출신 왕비들은 인사 기구와 정무 관서를 궁중으로 옮기고, 외국 신하·환관·노비 같은 비양반 출신을 임명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은 국왕과 양반이 갈등을 빚은 주요한 원인이었는데, 양반은 정규 관서에서 정치적 권한을 회복하려고 거듭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4세기 중반 원의 패권이 약화된 뒤 공민왕은 이제현 같은 개혁적 양반과 연합해 왕조의 정치제도를 다시 활성화하려고 시도했지만, 제도적 기반과 왕권은 이미 너무 약화되어 공민왕과 그 후계자들은 외척인 남양 홍씨와 이인임 일파 같은 강력한 양반 파벌에 지배되었다." 결국 공민왕과 바로 다음 국왕인 우왕의 개혁 시도는 좌절되었고 "왕조의 마지막 수십 년은 다양한 양반 집단 사이의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특징지어졌다."


"세 번째 쟁점은 중앙 조정에서 관직을 가질 수 있는 자격과 관련된 문제였다. 양반은 관직을 지냈다는 전통을 근거로 자신을 증명했기 때문에 관직 획득 자격은 사실상 왕조의 지배층에 포함되는 자격조건 중 하나가 되었다. 국왕이 환관·노비, 그 밖의 비양반 출신을 등용한 것은 이런 쟁점을 조성한 한 가지 요인이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중앙 관직을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세습 자격을 왕조의 제도적 구조에 따라 보장받았던 향리에 의해 제기되었다. 고려 후기에 지방을 떠나 대거 수도로 옮겨온 향리는 중앙 관인층을 팽창시켰으며 사회질서의 정점에 있던 양반의 지위를 약화시키려고 위협했다. 이런 문제를 다루려는 고려 후기의 노력은 향리를 지방으로 다시 돌려보내고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향리의 숫자를 제한하는 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시도는 뿌리 깊은 전통과 국왕이 향리에게 첨설직을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군직에 배치한 뒤 그 대부분을 등용하면서 좌절되었다."


"13세기 말엽 중앙 관원 가문은 자신을 (비양반 집단이나 지방 향리층 같은) 다른 사회집단과 구별하기 위해 사대부·사족·양반 같은 용어를 사용한 것에서 보이듯이, 스스로를 차별적인 사회집단으로 파악하는 의식을 발전시켰다." "14세기 후반 무렵 개혁적 양반은 자신의 권력과 권위가 관원의 지위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강력하고 효과적인 중앙 체제에 의존했다. 이런 각성은 외침을 막거나, 관원을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보호하거나, 그들에게 녹봉의 형태로 기초적인 물질적 유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는 복지를 제공하지 못하던 왕조의 무능력을 포함한 여러 요인의 영향을 받았다. 양반의 태도는 유학의 학습이 다시 활성화된 것에서도 영향을 받았는데, 그런 변화는 부분적으로 원에서 도입된 주희학파의 새로운 사상으로 국왕과 그 재상의 도덕적 지도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과 사회 변화에서 중앙 조정의 활발한 역할을 강조한 옛 고려와 북송의 고문 전통에서 발원했다."


국가의 사회·정치제도를 재점검하기 시작한 이들은 근본적인 변화를 추진할 수 있는 권력과 권위를 가진 새로운 지도자에게 충성을 돌릴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이성계가 양반 개혁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개인적 권력과 권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동북면 지방을 고려에 복속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14세기 중반 고려의 수도에 도착한 뒤, 이자춘과 이성계는 평양 조씨·황려 민씨 같은 중요한 양반 가문의 자제와 자신의 자녀를 혼인시켜 중앙 귀족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정책을 추구했다. 또한 이성계의 아들로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이성계를 즉위시키는 데 중심인물이었고, 1400년에 마침내 스스로 국왕이 된 이방원은 과거 급제자로서 개혁자들이 유교 원리에 따라 조직한 새 질서의 전망에 공감했다. 이처럼 이성계는 군사적 지도자였지만, 그와 그의 가족은 12세기 후반 조정을 장악한 무신들과는 매우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1391년 과전법은 양반 토지 소유의 기본적 형태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사전을 급격히 줄이고 공전을 크게 늘렸다. 불교 사찰이 소유한 토지와 노비의 몰수와 맞물려 과전법으로 국가는 더 많은 자원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 뒤 국력 신장의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중앙 정치제도의 개혁은 태종이 사병을 최종적으로 혁파하고 모든 병권을 국왕에게 집중시켜 새 왕실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게 된 뒤에야 추진되었다. 도당을 혁파하고 몇 개의 독립적인 관서로 신권臣權을 분산한 것은 왕권의 상당한 신장을 보여주며 양반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일부 개혁자들은 전제정치의 성장을 막는 데 유의했지만, 국왕과 신하의 권력균형을 시정하지 않고는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충분히 신장시킬 수 강력하고 효과적인 중앙 체제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다수의 양반 세력은 태종의 정치제도 개편을 지지했다."


"고려와 조선 제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방 통치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개혁자들은 낮은 품계의 지방관이 파견된 허약한 고려의 지방 통치권을, 높은 품계의 지방관이 폭넓은 통제권을 행사하는 제도로 대체했다." "이것은 국가가 토지와 인적 자원을 통제하는 데 중요했으며, 13~14세기에 지방 사회가 붕괴되어 향리가 이탈한 현상 때문에 필요한 측면도 있었다. 지방 통치 제도의 재편은 향리층의 이익을 보호했던 옛 지역적 신분제의 공식적인 종말을 알리는 신호였다. 조선 건국 이후 수도의 모든 향리는 과거에 급제했거나 특별한 공적을 세운 소수를 제외하고는 강제로 지방으로 돌려보내졌다. 향리는 더 이상 과거 응시를 보장받지 못했으며, 명예직이나 그런 칭호를 받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관원 아래서 근무하는 세습적인 서리의 지위로 격하되었다. 양반은 권력 경쟁의 주요한 근원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사회·정치적 질서의 정상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보장하려는 양반의 노력은 향리를 제거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개혁자들은 의관이나 천문관 같은 기술관─그 뒤 '중인'이 된 집단─의 후손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들을 하위 관서에 제한하는 규정을 시행했다. 신분의 범주를 유지하려는 양반의 관심은 천민이나 양인 출신이 많았던 첩의 아들들에 관련된 비슷한 규제에서도 찾을 수 있다. 향리·기술관·서자는 고려에서는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지만, 그들의 배제는 지배층의 확실한 축소를 나타냈다. 또한 처음에는 이성계가 약간 반대했지만, 개혁자들은 (고려 말기에 원元 출신의 왕비를 위시한 왕실과 더불어 일군의 정치 세력을 형성했던) 환관을 정권의 핵심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며 천민·장인·상인 출신이 과거에 응시하고 관직에 등용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시행했다. 이런 변화의 결과, 이제 양반은 한국 사회·정치적 질서의 정점에 홀로 서게 되었다."


"요컨대 조선왕조의 건국은 고려 전기 국왕들의 중앙집권적 개혁에서 처음 결과를 맺은 중앙 귀족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정치·사회제도를 재건한 것이었다. 중앙 귀족은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 동안 일정한 좌절을 겪었지만, 고려 시대 전체에 걸쳐 정치를 지배했다. 때로는 일부 가문이 쇠퇴하기도 했지만, 중앙 귀족은 고려 시대 전체와 조선 전기까지도 구조와 구성 모두에서 뚜렷한 지속성을 보여주었다." "이성계와 그의 동북면 연합은 상당한 권력과 내부 결속력을 가진 잠재적인 새로운 집단으로 등장했지만, 중앙 귀족을 대체하기보다는 그들에 동참하는 것을 선택했다." "새 왕조의 정치제도는 왕권을 상당히 신장시켰지만, 세습적인 생득적 권리와 대토지 소유의 특권 인정을 포함한 양보는 궁극적으로 왕조를 통치할 수 있는 조선 국왕의 능력을 약화시키고 조선 시대 내내 자원과 권력의 통제를 둘러싼 국왕과 양반 사이의 오랜 갈등의 무대를 마련했다."


"양반 권력의 세습적 본질과 대토지 기반은 양반을 귀족으로 보아야 할 필요를 알려준다. 그러나 주요한 중앙 관원 가문은 초기부터 계속 관료적 특징을 가졌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고려에서 과거제도의 중요성은 이미 안전한 중앙 관직에 오른 뒤에도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 많았고 최고 품계의 재추 중에도 과거 급제자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고려 시대 전체에 걸쳐 등용과 승진의 이런 양상이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중앙 양반 가문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증거와 맞물려 관료적 귀족층으로서 양반의 기원은 조선왕조의 건국이 아니라 고려 시대인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전반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지배층 내부의 상당한 연속성의 맥락 안에서 보면, 1392년의 왕조 교체는 혁명이라기보다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수립하려는 10세기의 노력이 4세기 이상 흐른 뒤에 정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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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금보다 비쌌을 때 - 충격과 망각의 경제사 이야기
알레산드로 지로도 지음, 송기형 옮김 / 까치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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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을 녹이는 데 필요한 온도(섭씨 1,535도)를 만들어내기 전까지 거의 모든 철은 운석에서 채취하였고 따라서 값이 매우 비쌌다.

2. 키프로스 섬은 청동기시대 말경(기원전 1650~110년)에 절정에 달한 구리 생산의 중심지로서 지중해 지역 전체의 가격을 좌우했다.

3. 아티케, 크레타, 아나톨리아 연안 세 지역의 중앙에 위치한 델로스 섬은 지정학적 요인 덕분에 노예무역의 이상적인 중심지였다.

4. 기원전 12세기경 지중해 문명이 몰락하면서 청동 생산에 필수적인 주석 무역이 급감하자, 야금업자들은 대안으로 철을 다루었다.

5.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지역의 광산들과 어마어마한 보물을 밑천 삼아 군사들을 후하게 대우하면서 인도 원정에 나섰다.


6.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정복한 스페인 북서부의 최대 광산(라스 메둘라스)은 약 250년 동안 로마에 금을 공급하여 제국의 발판이 되었다.

7. 서기 66년의 유대 반란을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아들 티투스는 예루살렘 신전을 약탈하여, 콜로세움 공사의 재원으로 사용했다.

8.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 제국을 선포하면서, 이교도들의 신전에서 약탈한 귀금속과 청동을 재원 삼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였다.

9. 사산 왕조를 무너뜨린 우마이야 왕조는 대대적으로 광산을 개발하고 활발한 국제 무역을 주도하여 7~12세기 황금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10. 한나라 황제들은 유목민들과의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비단을 수출했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승들은 비단 제조 비법을 훔쳐냈다.


11. 로마 제국의 쇠퇴는 유럽 광산의 생산량 감소와 폐광을 가져왔고, 중세 유럽이 등장하기 전까지 중앙아시아가 주요 광산 지역이 되었다.

12. 귀금속과 향신료, 비단에 이끌려 남쪽으로 진출한 바이킹은 전리품을 얻기 위해 무역뿐만 아니라 폭력에도 의존한 난폭한 정복자였다.

13.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광산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던 아프리카 노예들(잔즈, Zanj)은 아바스 칼리프국에 맞서 3차례 반란(7~9세기)을 일으켰다.

14. 지폐는 송나라 상인들이 최초로 발명하고 유통시켰지만 금나라, 몽골과 전쟁을 치르면서 인플레이션이 폭증하여 그 가치가 폭락했다.

15. 안데스 산맥 지역에서 산출되는 청금석과 인도산 식물에서 추출한 인디고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청색 염료를 만들어내는 값비싼 상품이었다.


16. 이탈리아 북서부의 롬바르디아인 은행가들은 교황청에 헌금하는 은 수송을 전담하면서 확보한 자금으로 양털과 백반 무역을 장악했다. 

17. 13세기 유럽 각지의 도매상들이 모인 샹파뉴의 연례 정기시장은 필리프 4세가 매긴 무거운 세금과 프랑스-플랑드르 전쟁으로 몰락했다.

18. 베네치아의 리알토 시장에서는 하루 두 번 상인들이 모여 귀금속 가격을 공식적으로 정했으며, 그 가격이 유럽 전체의 가격을 결정했다.

19. '화산 겨울'이 초래한 유럽 최악의 기근(1315~1318)으로 인구의 10~15%가 사망했지만, 남유럽 곡물상들의 투기 활동은 최악의 사태를 막았다.

20. 15세기 말부터 17세기까지 그단스크와 뤼베크를 비롯한 한자 동맹은 낮은 세금과 '발트 해의 평화' 덕분에 곡물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21. 흑사병은 임금 인상, 인력 부족에 따른 기계화, 교회의 권위 추락, 사회의 세속화와 지방 속어 확대 등 사회 구조를 완전히 재편했다.

22. 신앙심보다 이익을 좇은 피렌체 상인들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청동 대포를 대량 생산한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23. 인도 데칸 고원의 골콘다 지역은 기원전 4세기부터 1868년 남아프리카 킴벌리 광산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 산지였다.

24. 15세기 말~16세기 초, 개인 장서는 교양과 부의 상징이었으며, 유럽에서 제작되는 도서의 절반은 베네치아의 인쇄업자들이 출판을 도맡았다.

25. 로마부터 중세까지 모든 소식들은 같은 속도로 전해졌으며, 상인과 정치계, 교회는 가장 빠른 정보를 얻기 위해 막대한 돈을 기꺼이 지출했다.


26.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소식은 각국 정부와 상인들에게 속달로 전해졌는데, 기이하게도 베네치아 정치가들은 이 발견의 중요성을 외면했다.

27. 굶주림과 질병, 해상 사고, 풍토병과 성난 원주민 등 미지의 탐험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엘도라도의 부를 향한 열정과 욕망을 꺾지 못했다.

28. 대서양 항로가 열리고 베네치아의 아시아산 제품과 향신료 무역이 치명상을 입자, 베네치아는 맘루크 술탄국에 수에즈 운하 건설을 제안했다.

29. 프랑크푸르트 정기 시장은 유럽 최대의 도서 시장이었으며, 대발견 전후에는 지리상의 발전을 신속하게 반영한 지도 시장으로 군림하였다.

30. 16세기의 세계 양대 강국인 중국과 인도는 정치 혼란과 지역내 분쟁, 제위 계승을 둘러싼 골육상쟁 등에 시달리면서 점차 위상이 무너져갔다. 


31. 헨리 8세는 종교시설 폐지법을 근거로 몰수한 막대한 교회 재산을 함대 편성과 해안 방어 시스템 구축 같은 해군 강화 비용으로 사용했다.

32. 1526년부터 본격 개발된 이와미 광산에서 대량 생산된 은은 쇼군들이 내전에 활용할 화승총을 구입할 때 사용된 이상적인 화폐였다.

33. 16~18세기 세계 최대 광산 도시의 하나였던 포토시는 지상에 있는 생지옥인 동시에 (종교)전쟁에 심취한 스페인 군주들의 든든한 돈줄이었다.

34. 중세와 바로크 시대 말기의 4대 해양강국인 베네치아, 제노바, 포르투갈, 네덜란드는 인구 부족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35. 대발견 이후 스페인의 젊은 남성들은 제조업을 버리고 모험 사업에 뛰어들었고, 귀족들마저 사치품 소비에 매진하여 무역 적자를 심화시켰다.


36. 아메리카 은의 유입 규모가 유럽 금융시장의 이자율을 좌우하던 시절, 아비소(선단 정보를 항구에 미리 알려주는 쾌속선)의 역할은 지대했다.

37. 19세기 초까지 멕시코 아카풀코와 마닐라를 오가던 갤리언 선의 은 수송은 중국-아시아와 아메리카-유럽을 연결하는 통화 체제를 형성했다.

38. 스페인 남부 알마덴 광산의 수은은 은을 추출하는 아말감 방식의 핵심 요소로서, 푸거와 로스차일드 가문 같은 금융업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39. 최대 5~6만에 달하는 도공들이 작업하던 징더전(景德鎭)은 10~18세기 동안 세계 최대의 자기 산지였지만, 태평천국의 난으로 결정타를 맞았다.

40. 멕시코의 코치닐 연지벌레를 가공한 붉은색 코치닐 염료는 스페인에서 은 다음 가는 세원(稅源)이었으며, 투기꾼과 사략선의 주된 표적이었다.


41. 독일의 군소 군주들은 유대인 은행가들이 중심이 된 호프-팍토렌(궁정 은행가)의 돈으로 30년 전쟁을 치렀으며, 골동품 사치경쟁을 벌였다.

42. 에도 시대에는 고쿠(石, 성인 남성에게 1년 동안 필요한 쌀의 양)로 조세를 거두었고, 도지마 시장에서는 쌀 선도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43. 막대한 물과 에너지(목탄의 재료인 땔나무)를 소모하는 철제 대포 산업과 범선 제작 산업은 윌드 숲 같은 영국 남부의 숲들을 황폐화시켰다.

44. 말라카-고아-리스본, 광저우-나가사키, 마닐라-멕시코 통상로의 중심지인 마카오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앞선 포르투갈 삼각무역의 축이었다.

45. 1580년대부터 이와미 은광은 세계 은 생산의 1/5, 은 공급의 1/3을 점유하면서 동아시아 무역에 기여했고 일본을 국제 무역에 편입시켰다. 


46. 오스만 제국은 선박 건조에 필요한 고급 목재가 항시 부족했고, 초석 생산과 철제 대포 제작, 화페 주조 역시 목재 부족 현상을 심화시켰다.

47. 네덜란드는 조가비를 주고 구입한 맨해튼 섬을 영국인들에게 넘기고 런 섬(고급 향신료인 육두구 생산지)을 받았지만, 역사적 실패로 남았다.

48. 기름세, 오줌세, 비누세, 턱수염세, 창문세, 벽돌세, 모자세 등 과도한 세금은 생활규범을 바꿨고 때로는 반란의 도화선 역할을 하기도 했다.

49. 17세기 기온 저하는 세계 각지에서 식량 가격 폭등과 농민 반란을 초래했고, 국가의 멸망(명나라, 콩고 왕국)과 내전(무굴 제국)도 유발했다. 

50. 중앙은행과 관련 기관들은 대부분 전쟁 자금 때문에 궁지에 몰린 나라의 재정을 지원하거나 전후 채무를 장기로 전환하기 위해서 설립되었다.


51. 18세기 초 우역(牛疫)이 발생하여 유럽 가축의 90%가 죽었는데, 전염병 전파의 본거지였던 이탈리아는 수의학 연구의 본산으로 거듭났다.

52. 전쟁 상대국에 맞선 경제전의 주된 방법은 런던이 미국 콘티넨털 지폐와 프랑스 아시냐 지폐를 상대로 벌인 것 같은 위조 지폐 발행이었다.

53. 영국은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맞서 140억 프랑을 지출했는데, 이 중 10억 프랑은 동맹국들을 지원하여 '성 조지 황금 기병대'로 불리었다.

54. 1855년 미국의 고래기름 산업은 국가 산업 순위에서 5위에 오를 정도로 엄청난 활황이었는데, 곧 이어진 석유 생산이 생태계 재앙을 막았다.

55. 러시아는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하면서 토지보상금 1,500만 파운드를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빌렸는데, 이를 갚기 위해 알래스카를 매각했다.


56. 아마존 지역 중앙에 위치한 도시 마나우스는 19세기 말 고무 붐의 혜택을 크게 봤지만, 씨앗이 동남아로 밀반출되면서 독점의 막을 내렸다.

57. 1928년 새로운 유전들이 발견되면서 석유값이 60% 폭락하자, 메이저 업체들이 아크나카리 성에서 밀약을 맺어 반세기 동안 석유 값을 결정했다.

58. 1940년대 중반 나치는 비료, 폭발물, 질산 제조의 우수한 촉매제였던 백금을 확보하기 위해 금괴와 백금의 교환 비율을 5대 1까지 올렸다.

59. 미국은 무기대여법을 제정하여 소련에 450만 톤의 식품 외에도 엄청난 양의 민수 물자와 군수 물자를 지원했고, 이는 전황의 반전을 이끌어냈다.

60. 1927년 탄생한 헝가리 은화 '펭괴'는 1929년 세계 대공황과 2차대전기 헝가리 국토 파괴에 시달리면서 현대사 최악의 초인플레이션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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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사 2 - 탕평과 세도정치 : 숙종조~고종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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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숙종이 송시열계 서인들을 축출하자 남인 정권과 김석주 등 외척 세력이 득세하였다(갑신환국). 정권 교체 이후 남인은 허적·권대운 등의 탁남(濁南)과 윤휴·허목 등의 청남(淸南)으로 분열되었다.


(2) 주요 사건/인물

- 경신환국(1680) : 남인 세력에게 염증을 느끼던 숙종을 등에 업고 외척 김석주는 모종의 정치극을 꾸몄다. 기름장막 사건을 계기로 허적이 제거되고, 윤휴 역시 복선군 역모 사건에 엮여 제거된다.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재집권한다.

- 이이·성혼의 문묘종사(1681) : 서인은 자신들의 집권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서인 학맥의 원천인 이이와 성혼을 문묘종사하여 퇴계 이황과 동등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 서인의 분열 : 훈척들에 대한 이해 관계와 태조 존호가상 등을 둘러싸고 점차 분열의 조짐을 보이던 서인은 송시열과 윤증 부자간의 ‘회니시비(懷尼是非, 주자 절대주의를 부정하는 윤휴의 사문난적 시비를 둘러싸고 송시열과 윤선거·윤증 부자가 대립한 사건)’ 갈등으로 결국 노론(송시열 당)과 소론(윤증 당)으로 갈라진다.

- 기사환국(1689) : 숙종이 희빈 장씨의 아들 균(?, 훗날의 경종)이 태어난지 석 달도 안 되어 원자 명호(후궁 소생 왕자가 세자로 책봉될 수 있도록 명호를 정하는 일)를 밀어붙이자 송시열이 이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분노한 숙종은 송시열 사사, 인현왕후 민씨 폐출, 이이·성혼 문묘 출향 등을 단행하여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정권을 재수립한다.

- 갑술환국(1694) :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이 폐비 복위를 도모한 혐의로 체포되어 서인이 재차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숙종이 총애하던 숙원 최씨(영조의 생모) 독살설이 불거졌다. 여기에 왕비 장씨가 숙원 최씨를 모질게 탄압한 사실이 밝혀지자 숙종이 심경을 바꿔 남인을 축출하고 서인을 다시 등용하였다. 이이·성혼도 다시 문묘에 배향되었다.

- 병신처분(1716) : 숙종이 ‘회니시비’의 빌미가 된 윤선거 묘갈명과 ‘신유의서’를 읽은 후 노론의 손을 들어주자, 이에 힘을 얻은 노론은 윤선거 부자의 문집을 파기하고 관작을 추탈하였다. 아울러 소론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노론 전제정치가 개막된다.


경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경종은 자신을 지켜주던 소론 세력이 아버지 숙종에 의해 와해되자, 대리청정 기간동안 그의 흠결을 찾아 폐세자 명분으로 삼으려던 노론 세력의 거센 압력을 이겨내야 했다.


(2) 주요 사건/인물

- 신축옥사(1721) :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노론이 경종의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연잉군(영조)의 세제 책봉을 건의하여 성공시킨다. 그러나 세제 책봉 2개월만에 또다시 노론이 세제의 대리청정을 추진하는 무리수를 두자 소론이 경종에 대한 불경·불충죄를 공박하여 일시적으로 조정을 장악했다.

- 임인옥사(1722) : 목호룡이 노론 4대신의 자제들을 포함한 역모 기도를 고변하자, 소론은 경종의 통치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옥사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처리하였고 노론은 최대의 참변을 겪었다.


영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영조는 경종의 아우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종통상의 문제점과 노론의 재집권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한 경조 독살설에 시달렸다. 더 많은 권력을 원하는 노론과 역습의 기회를 노리는 소론 사이의 당쟁은 여전히 치열했다.


(2) 주요 사건/인물

- 을사처분(1725) : 영조는 즉위 직후 3정승 모두를 소론에서 임명하고 노·소론의 충역시비에 일체 간여하지 않겠다는 ‘시비불분(是非不分)’의 입장을 고수하는 등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순식간에 정국을 개편하여 신임옥사를 무옥(誣獄)으로 규정하고 노론 4대신의 신원을 명하는 조치를 내려 노론 집권의 명분을 세워주었다.

- 정미환국(1727) : 영조가 을사처분에 이은 정치보복을 경계하여 탕평을 환기시키면서 노론의 협조를 요청했지만, 노론 강경파는 노소병용(老少竝用)에 협조하는 노론 온건파를 극렬하게 공격한다. 노론 강경파에게 염증을 느낀 영조는 소론 정권을 수립하고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취소하였다.

- 무신란(1728) : 소론 급진파와 남인 일부가 영조의 왕위 계승 절차와 경조 독살 여부를 문제삼아 일으킨 난. 소론 정권을 붕괴시킨 무신란은 당쟁의 폐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여 탕평을 향한 영조의 각오를 더욱 단단히 다지는 계기가 된다.

- 신유대훈(1741) : 영조는 신임의리를 완전히 해결하여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때 형조참판 오광은이 대훈(大訓) 반포를 건의하자 영조는 양 당을 강경책으로 밀어붙여 ‘임인옥은 무옥이므로 피화자는 신원한다’는 최종 단안을 내렸다. 신유대훈은 서원 철폐와 전랑통청권 혁파로 이어진다.

- 을해옥사(1755) : 소론 윤지가 나주에 괘서(掛書)를 걸어 조정을 비방하고 역모를 꾀한 사실이 밝혀졌다. 격노한 영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소론 일파를 대거 숙청하여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고, 경종조 이후 발생한 일련의 사건이 소론에 근원한다고 발표하여 완전한 노론 정권을 승인하였다.


정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영조 말기 외척 세력이 성장하면서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부홍파(扶洪派, 북당 혹은 시파)와 홍봉한의 잘못을 공격하는 공홍파(功洪派, 남당 혹은 벽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을 벌였다.


(2) 주요 사건/인물

- 남당·북당의 와해(1777) :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홍국영 중심의 비척신 계열을 규합하여 외척 세력 제거에 나섰다. 우선 공홍파의 지원 아래 홍봉한 계열의 부흥파를 숙청했고, 이어 공홍파의 김구주를 유배보내어 왕권 강화를 도모했다.

- 시파와 벽파 :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고 정조의 정국 운영에 동조한 세력이며,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고 정조의 정국 운영에 반대한 세력이다. 시파와 벽파는 노론·소론·남인 모두에 산재해 있었으며, 1788년 정조가 김치인(노론)·이성원(소론)·채제공(남인)으로 3정승을 구성하면서 점차 대립이 가시화된다.

- 진산사건(1791) : 남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사건. 노·소론은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타도하려는 목적에서 진산사건을 이용했고, 결국 1792년(정조 16) 박종악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채제공 독상(獨相) 체제가 종료되었다.

- 영남만인소(1792) : 갑술환국(1694) 이후 정계에서 거의 배제되던 남인이 채제공의 정승 입각을 계기로 사도세자의 신원과 임오의리의 천명을 요구하는 만인소를 올렸다. 정조는 만인소에 심정적으로 동의하면서도 노론 벽파의 반발을 우려하여 영조의 금령을 환기시키는 원론적인 답변을 내렸다. 

- 오회연교(五晦筵敎, 1800) : 정조는 임오의리를 바로잡되 관련자를 처벌하지 않으며, 임오의리로 인해 신임의리를 번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는 벽파의 투항을 촉구하는 선언문이었는데, 그로부터 12일 뒤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사태는 미완의 종결을 맞았다.

- 산림무용론과 군주도통론 : 정조는 편협한 당색의 의리에 매몰된 산림을 더이상 신뢰하지 않았고, 군주가 사문의 정통이자 도학상의 권위를 확보한 세도의 주재자이며 의리의 주인이라는 ‘군주도통론’을 내세워 왕권 강화를 모색했다.


순조조 이후의 당쟁


(1) 시대 배경


정조의 죽음은 탕평의 종말인 동시에 벽파 정권의 시작이었다. 벽파는 정조의 정책을 무산시키는 데 주력하다가 6년만에 붕괴되고, 정국의 주도권은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외척세력에게 넘어간다.


(2) 주요 사건/인물

- 벽파의 집권(1800) : 수렴청정을 거행하게 된 정순왕후는 벽파 인물들로 조정을 구성한다. 이들은 시파의 군사적 기반인 장용영을 혁파하고, 천주교 문제를 빌미로 대대적인 남인 박해를 가하였다(신유박해).

- 벽파의 몰락(1805) : 정순왕후 사후 벽파는 순조의 정치보복을 우려하여 사도세자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정리하다가 시파의 역공을 받아 권력 중심부에서 대거 축출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동 김씨 세력이 공을 세우면서 외척으로 등장하게 된다.

-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 : 순조의 뒤를 이은 헌종조에는 외척 풍양 조씨 가문이 권력을 잡았다.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는 헌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1849)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나, 내부 알력과 조만영의 죽음(1846)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에게 넘어갔다.

-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 철종은 안동 김씨 세력을 두려워하여 국사를 독자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김좌근에게 의지하였다. 정치가 전적으로 안동 김씨 가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면서 삼정의 문란이 심해지고 마침내 진주민란(1862)을 시작으로 전국 도처에서 민란이 발생하였다.

- 대원군의 등장 : 고종의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은 수렴청정을 하는 조대비의 막후에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다. 대원군은 비변사를 약화시키고 의정부와 6조의 기능을 확대하는 한편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 결과 대원군파와 안동 김씨의 노론 보수파, 남·북인 및 박규수를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 등으로 정치 지형이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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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사 1 - 사림정치와 당쟁 : 선조조~현종조
이성무 지음 / 아름다운날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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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정치사

1. 사대부정치기 : 고려 말~조선 초 유학적 소양을 지닌 신흥 사대부들이 집권한 시기

2. 훈신정치기 : 세조대에 등장한 정란공신(靖難功臣)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훈구파가 집권한 시기(세조~중종)

3. 권신정치기 : 훈구파의 몰락과 사림파의 집권 사이의 과도기로서, 외척이 정치를 주도한 시기

4. 사람정치기 : 권신들이 물러나고 사림들이 집권하면서, 자기 분열과 붕당 간의 당쟁이 치열해지는 시기(선조~경종)

5. 탕평정치기 : 사림정치기에서 외척세도정치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영조, 정조)

☞ 이조정랑과 좌랑의 자대권과 당하통청권이 혁파(1741, 영조 17)되면서 사림정치의 토대 붕괴

6. 외척세도정치기 : 외척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가 득세하고 산림이 세도 가문의 시녀로 전락한 시기(순조~고종)


선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명종조에 외척 심의겸의 도움으로 관계에 진출한 선배 사림들과 선조조에 새로이 등장한 후배 사림들 간의 갈등이 당쟁으로 비화했다.


(2) 주요 사건/인물

- 을해붕당(乙亥朋黨, 1575) : 주요 관직의 인사추천권을 가진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심의겸과 김효원이 대립하면서 사림은 한양 동쪽에 사는 김효원을 따르는 동인과 서쪽에 사는 심의겸을 따르는 서인으로 갈라선다.

- 율곡 이이 : 철저하게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펴면서 동인과 서인을 중재했으며 종종 양쪽 모두에게 공격받았다. 서인과 가까운 교우 관계 때문에 사후에 서인의 종장(宗長)으로 추대된다.

- 기축옥사(1589) : 동인 정여립이 모반 혐의를 받다가 자살하자, 정철을 위시한 서인들은 정여립의 집에서 나온 문서들을 근거로 동인들을 역당으로 몰아 처단한다.

- 세자 책봉 논의(1591) : 동인 이산해가 선조에게 정철이 세자 책봉을 빌미로 선조가 총애하는 인빈 김씨와 그의 아들 신성군을 제거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고하여 서인을 정계에서 축출한다. 이때 동인은 서인을 대거 처벌해야 한다는 강경파와 범위를 축소하려는 온건파가 각각 북인과 남인으로 나뉜다.


광해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분열하여 각각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지원하다가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대북이 정권을 장악한다.


(2) 주요 사건/인물

- 사림 5현의 문묘종사 : 사림파는 도통(道統)을 천명하고 사림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1570년(선조 3)부터 사림 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의 문묘(文廟)종사를 수시로 청하였고, 마침내 1610년(광해군 2)에 광해군의 윤허를 받아 이를 매듭지었다.

- 회퇴변척(晦退辨斥, 1611) : 정인홍은 이황과 불화를 겪던 자신의 스승 남명 조식이 사림 5현에 거명조차 되지 않자 문묘종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분노한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렸다.

- 조목(趙穆)의 도산서원 종향 : 남인의 영수 유성룡은 관인으로서의 이황을 중시했고, 이황의 제자 조목은 향촌에서의 이황을 중시했다. <퇴계집> 간행을 둘러싸고 두 사람의 갈등이 깊어지자, 북인이 조목과 연대하여 유성룡을 파직시킨다.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그 반대급부였다.

- 폐비와 영창대군 제거 : 권력을 장악한 대북당은 광해군의 왕권을 위협하는 영창대군을 살해(1614)하고 그의 모친인 인목대비를 폐비(1618)하여 서궁에 유폐시켰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대북 실세들간의 권력 다툼과 전횡은 서인들의 반정을 초래하게 된다.


인조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이 원망을 품고, 소북이 비웃는’ 대북정권의 독주는 결국 인조반정으로 막을 내린다. 반정 후 서인은 남인과 소북 일부를 야당 삼아 연립 정권을 수립한다.


(2) 주요 사건/인물

- 공서와 청서 : 반정공신들이 국정을 전단하며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챙기는 데 몰두하자, 인조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서인의 한 갈래인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공신들의 전횡을 비판했다. 공서(功西)와 청서(淸西)로 나뉜 두 세력 갈등은 인조 7년을 전후해 노서(老西)와 소서(少西) 대립으로, 다시 병자호란의 와중에 척화와 주화 대립으로 이어진다.

- 원종 추숭(1635) : 할아버지 선조를 계승한 인조는 부친 정원군을 추숭하고자 했다. 공신을 대변하는 산림 박지계는 인조를 지지했고, 조신을 대변하는 산림 김장생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불확실한 왕통 문제로 몰락한 광해군의 사례를 목도한 인조는 자신의 왕통(王統)과 종통(宗統)을 모두 정통으로 확립하고자 했고 결국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한다.


효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효종조의 서인은 훈구세력을 대표하는 낙당(洛黨)과 원당(原黨), 그리고 김육과 김집을 대표하는 한당(漢黨)과 산당(山黨)으로 나뉘어졌다. 한당은 청서의 후인들이고, 산당은 사계(沙溪) 김장생 문하들로 구성된 호서산림들이다.


(2) 주요 사건/인물

- 한당과 산당의 대립 : 붕당의 폐해를 빌미로 낙당과 원당이 몰락한 뒤 경화사족으로 구성된 관료지향적 집단인 한당과 도학을 지향하는 유학자 집단인 산당은 대동법 시행(한당의 김육 주장)과 인재 발탁(산당의 김집 주장) 등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 북벌론 : 북벌의 명분은 복수설치(復讐雪恥, 명나라의 원수를 갚고, 삼전도의 치욕을 설욕하자)라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북벌의 수단에서 효종은 양병과 군비 확장을, 송시열은 민생 안정과 군덕(君德)을 우선시하면서 각자 왕권 강화와 도학 이상의 실현이라는 다른 꿈을 꾸었다.


현종조의 당쟁


(1) 시대 배경

효종의 급작스런 죽음과 상례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 사이에 벌어진 예송논쟁은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살아 있는 판국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으로 비화할 수 있는 문제였다. 


(2) 주요 사건/인물

- 기해예송(己亥禮訟) : 효종 사후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문제를 둘러싸고 1년복을 주장하는 서인 송시열과 3년복을 주장하는 남인 허목이 대립하는 와중에, 윤선도가 허목을 지지하면서 논의를 효종의 정통성을 둘러싼 당쟁으로 확장시켰다.

- 공의·사의 논쟁(1663) : 산당 김만균이 대의명분을 앞세워 청나라 사신 접대를 거부하자 한당 서필원이 개인의 입장보다 공무가 우선한다는 현실론을 주장하면서 당대에 팽배한 명분론에 일침을 가했다.

-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 : 효종비 인선왕후의 죽음으로 대왕대비 조씨의 상복 문제가 되살아났다. 현종은 왕의 직권으로 1년복을 선포하면서 기해예송 때 서인의 압력으로 달성하지 못한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9개월복을 주장한 서인 관료들을 정계에서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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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한국사 : 19세기, 인민의 탄생 - 조선 5 민음 한국사 5
김정인 외 지음, 강응천 엮음 / 민음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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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배층의 성리학에 대한 믿음은 강고했다. <허생전>에서 박지원은 "상인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상업을 하는 것은 결국 나라를 병들게 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는 "만 냥의 돈이 어찌 도道에 도움이 되겠소." "덕이 있으면 사람이 저절로 모인다네." "나에게 재앙을 같다 맡기면 어찌하오?"라고 말하면서, 돈을 재앙으로 인식하고 있다. 상업을 포함해 실리를 추구하는 행위는 국부를 증진시키고 나아가 기민饑民을 구제하는 등 사회적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돈을 버는 것, 부를 축적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린다면 오히려 재앙을 자초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지원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상인을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도리를 아는 양반이 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동시대의 누구보다 더 상업의 유용성과 상업 발전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박지원조차 상인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다."(52)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이 되면 상업은 새로운 발전 단계로 나아갔다. 세도 정권은 상업에 대한 불간섭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대상인의 독점을 보장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거둬들일 수 있도록 장려했다. "포구를 중심으로 하는 포구 시장권과 장시를 중심으로 하는 장시 시장권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전국적 규모의 유통망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장권을 기반으로 농촌 생산물이 농촌 장시를 통해 중간 도매상에게 매집되고, 이는 포구가 있는 산지 매집상에게로 모였으며, 다시 선상과 포구주인에 의해 서울이나 다른 지역으로 운반되는 체계가 완성되었다."(46-7) 상업 발전과 더불어 수공업으로 생산된 상품들의 수요도 증가했다. "초기의 상인들은 수공업자의 원료와 제품을 매점함으로써 수요 증가에 따른 이익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가 거듭되면서 점차 스스로 상품 제조장을 마련하고 수공업자들을 고용해 상품을 직접 생산하는 단계, 즉 선대제로 발전했다."(38) 


# 독점 상인들과 대표적인 선대제 상품

1. 시전 상인 : 종이와 도자기

2. 경강 상인 : 조선造般 산업

3. 개성 상인 : 인삼 재배 및 홍삼 가공업


"상인은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양반 의식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이를 잘 보여 주는 것이 보부상이다. 보부상은 사회의 천대에 맞서 자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노력의 하나가 바로 엄격한 규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규율은 주로 성리학적 질서를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물론 동료의 불행, 질병, 죽음을 외면한 자들도 대상이었지만, 주로 부모에 불효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없는 자, 술주정한 자, 불의를 저지른 자, 언어가 공손하지 못한 자, 어른을 능멸한 젊은이 등이 대상이었다." "이러한 행동의 뒷면에는 체제에 순응하고 기회만 되면 사회가 용인하는 질서 속으로 편입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동학농민전쟁이나 독립협회 해체 때 관의 '앞잡이'로 나서 농민이나 민중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재산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양반이나 지배 계층의 일원으로 합류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모습은 대상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53-4)


"18세기 말 이후 상인과 권력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 계기는 주교사(임금이 거동할 때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설치였다. 1794년(정조 18) 주교사를 설치해, 경강상인들의 선박을 관리했다. 따라서 주교사 당상과 경강상인 사이에 결탁 관계가 형성될 가능성도 높았다." "더욱이 18세기 말 이후에는 권력자들이 직접 상업에 투자하는 사례도 급격히 증가했다. 경강의 여객주인권을 궁방 권세가들이 많이 사들이고 있었다. 다시 말해 권력자들이 상인을 비호하는 단순한 결탁 관계가 아니라, 권력자가 직접 상업에 투자하는 사례도 빈발했던 것이다." "따라서 세도 정권하에서는 국내외 상업을 막론하고 독점 상업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폈다." "예를 들어 당시 영의정 김재찬은 1809년 흉년이 들어 서울의 미곡 공급에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에 서울로 반입된 곡물을 외방으로 유출하는 것을 금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59-61)


"19세기 조선 정부의 부세는 크게 토지에 부과되는 전정, 양인에게 부과되는 군정, 환곡 운영인 환정이 있었고, 이를 아울러 삼정이라 한다. 삼정은 총액제로 운영되었다." "조선 정부는 중앙 재정의 소요 경비를 기준으로 삼정마다 총액을 정하고, 매해 변동 상황에 대해 기계적으로 세액을 조정해 주었다." "문제는 각 군현에 할당된 세액이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세는 실제의 풍흉과는 무관하게 책정되었고, 농작물 피해를 심하게 입어 세액이 면제되는 재결災結의 수량도 현실과 맞지 않았다. 군역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총액이 결정되면 양인들이 죽거나 도망가서 수가 크게 줄어들더라도 총액을 줄여 주지 않았다. 게다가 각 군현에 세액이 할당되면, 이를 백성에게 부과하는 것은 거의 향리의 손에 맡겨졌다. 향리는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수확이 잘된 논을 면세시켜 주고, 큰 흉년이 든 논에 정상 세액을 부과하곤 했다."(66-7)


"대상인의 독점 상업을 보호하는 세도 정권의 상업 정책과 매관매직으로 인한 삼정 문란은 중소 상인, 빈민에게 큰 고통을 주었다. 특히 중국 무역을 의주상인과 개성상인에게 독점시키면서 평안도의 중소 상인은 큰 타격을 받았다. 중소 상공인들은 이러한 정부 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고 자기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 바로 그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두 세력의 대립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난을 주도한 사람들은 당시 평안도의 지역적 시장권을 장악한 중소 상인층, 대청 밀무역을 중심으로 성장을 도모하던 잠상(밀무역업자) 세력이었다. 그들이 상대한 세력은 세도 정권을 배경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 간 유통을 통해 전국의 상권을 장악한 특권 대상인층, 그리고 대청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남기던 특권적 무역 상인이었다."(70-1)


쇄국을 견지하던 흥선대원군 정권이 붕괴하고 고종이 친정 체제를 출범시킨 후 "1876년 2월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국제조약이었다." 조약에 따라 "우선 영사재판권에 의한 치외법권이 인정되고 조계인 거류지가 설정되었으며, 기존의 부산 이외에 인천과 원산 두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국내시장 보호와 국가재정 확보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관세권을 상실한 조항이었다. 강화도조약 체결에 임했던 조선의 관료들은 여전히 사대교린적인 입장에서 조약 체결에 나섰다. 그리고 근대적 관세권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 정부는 수출입세 5퍼센트를 용인할 의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관세 무역을 용인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조선은 국내시장과 발달이 미약한 국내 산업의 보호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수단이자 주요한 정부 재정원으로 삼을 수 있는 관세 수입을 박탈당했다."(88-9)


낮은 관세의 물품들이 선박을 통해 대량으로 거래되는 "조일 무역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국내의 상품유통도 그 영향을 받아 전반적으로 변화했다. 첫 번째 변화로는 조선산 쌀, 콩 등 곡물이 주로 수출되고 자본제 면제품이 수입되는 수출입 무역 구조가 점차 형성되어 간 것을 꼽을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조선의 재래적 상품유통망이 해체되고 점차 개항장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유통 구조가 형성되어 갔다." "마지막으로 외국 무역의 확대로 유통량이 증가하면서 점차 상품 생산 구조도 변화되어 갔다. 조선의 주된 수출품은 쌀과 콩 등의 곡물류였고 이들 상품은 국내 소비가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일본에 수출할 수 있었다. 그때문에 조선의 농업 생산 기반은 논에서는 쌀, 밭에서는 콩만을 경작하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요컨대 무역의 확대는 조선의 생산 구조 자체의 변동을 가져와 조선을 일본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 원료 공급지, 자본제 상품의 소비 시장으로 자리잡게 하였다."(91-2)


# 이어지는 불평등 조약 체결

1. 조미통상조약(1882.5)

2. 조청상민수륙장정(1882.8)

3. 신新조일통상장정(1883)

4. 조영수호통상조약(1883)


"19세기 중반 들어 조선 연안에 서양 선박의 출몰이 잦아지고 천주교가 확산되자 유림은 본격적으로 척사론을 제기했다. 척사의 선봉장이었던 이항로와 그의 문인들은 천주교는 물론 서양 과학기술 등도 일절 배척하면서 척사운동을 주도했다."(151) 북학의 명맥을 이어받은 재야지식인 "이규경, 최한기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이념을 정신적 기준으로 삼으면서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는 동도서기東道西器적 변통론을 제시했고 서기 수용을 위해 적극적으로 통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의 손자이자 중앙 관료였던 박규수는 유교로 서양인들을 감화하고, 중화 문명으로 귀의하는 서양인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밝혔다. "개방적 태도를 지녔던 박규수는 뒤에 일본과의 강화도조약을 주도했고 한편으로는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등을 지도해 개화당이 탄생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재야 지식인에 의해 맥이 이어지던 개방론이 박규수를 매개로 중앙 정치권에 접목되었다고 할 수 있다."(160-1)


"조선 지식인들 가운데도 1880년대 들어 일본에 건너가 문명개화론을 접하고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가장 열렬한 문명개화론자는 급진개화파와 친분이 깊었던 윤치호이다." "그는 일본을 조선이 추구해야 할 문명개화의 모델로 설정한 반면, 청은 문명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규정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인식은 급진개화파 인물들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급진개화파 인사들은 서양 정치 제도의 수용을 모색하는 등 동도서기론자들에 비해 서양 문물의 도입에 더 적극적이었지만 서양 종교도 긍정했다는 점에서 특히 동도서기론자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급진개화파의 등장으로 1880년대 초반의 지식계는 보수적 유생, 동도서기론자(온건개화파), 급진개화파가 분립하는 형국이 되었다."(168-9)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대하는 시각이 완연히 달랐던 세 집단에게 타협과 조율을 거쳐 위태로운 형국을 헤쳐나갈 역량을 기대하기란 애당초 무리였다. 


1882년 11월 고종은 기존의 통리기무아문 체제를 내무와 외무로 분리했는데 여기에는 여흥 민씨와 개화파라는 다소 이질적인 두 집단이 친위 세력으로 포진되어 있었다. "여흥 민씨도 기본적으로는 개화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김옥균 중심의 개화파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특히 차이를 보인 것은 청에 대한 인식이었는데 여흥 민씨들이 친청적이었던 데 반해 개화파는 일본에 호의적이고 청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두 세력 사이에서 매개 역할을 하던 "민영익이 결국 그의 가문 편에 섬으로써 김옥균과 갈라서게 되었고, 중요한 지원자를 잃은 김옥균은 결국 1884년(고종 21)에 갑신정변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갑신정변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이는 고종이었다. 고종을 지지하던 중요한 두 축이 동시에 무너짐으로써 정치적 기반이 크게 약화된 상태에서 청으로부터는 개화파와 연계해 반청적인 태도를 취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아 입지가 불안해졌다."(141-2)


"조선 사회에 만민 평등의 조류가 밀려들 때, 이를 정치라는 링 위에 올려 한 방의 강력한 펀치로 단숨에 해결하려는 욕망 역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욕망은 변란이란 이름으로 실현되었고, 이를 주도한 이들은 권력의 밖에서 권력을 갈망하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이 인민에게 던진 희망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새로운 세상을 이끌 정 도령'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예언을 담은 책이 <정감록>이다." "<정감록>을 세상에 전하고 나아가 스스로 정 도령이 되거나 정 도령의 출현을 돕겠다며 변란을 도모한 것은 권력의 바깥에서 소외감에 젖어 살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며 의사, 지관地官, 훈장 등으로 밥벌이를 연명하는 부류였다. 좌절과 고통만 안겨 주는 조선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을 때 <정감록> 등 비기秘記류의 책이 주장하는 역성혁명은 더 없는 이념적 무기였다."(194-5)


"삼정(전정, 군정, 환곡) 문란은 사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낡은 조세제도와 관리의 부정부패, 비리가 결합해 일으킨 비극이었다. 그 근원적 원인은 19세기다운 제도로 나아가지 못하고 '옛 것'에 매달리게 만든 퇴행적인 정치, 즉 세도정치에 있었다." "본래 수령과 아전의 과도한 권력 행사를 견제한 것은 향회, 향약 등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지방 유지들이었다. 과도한 수세 부담을 조정하고 지방 관리를 감시함으로써 인민의 삶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불행히도 19세기 들어 이러한 지방 유지 주도의 향촌 사회 운영 원리는 무너져 갔다. 18세기 후반부터 수령권이 지방 유지의 권력, 즉 향권을 압도하면서 수탈이 더욱 번성했다." "19세기는 '탐학이 풍습'인 시대였다. 인민 항쟁은 호소할 곳마저 없어 종기처럼 안에서 곪던 데가 터진 것일 뿐이었다." "인민들이 관리의 부정부패를 합법적으로 호소하고 바로잡을 제도적 길이 막혔다는 점도 항쟁을 예고하는 징표였다."(201-2)


# 인민항쟁의 유형 : 조세/군역 저항, 도망(유민화), 횃불시위, 무기명 관청 투서, 집회 조직/등소等訴 운동(소장 제출), 봉기(무장 항쟁)


"(1860년 동학을 창도한) 최제우는 하느님을 때로는 유교적 용어인 상제上帝라 부르기도 했으나, 그가 말하는 하느님은 천주교에서 말하는 오직 하나의 신인 천주와 같았다. 최제우는 하느님만 믿고 하느님만 공경하라고 가르쳤다. 천주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느님을 내 몸 안에 모시고 있다는 것, 즉 시천주侍天主를 주장한 점이다. 이는 곧 내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것이고 결국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제우에 이어 동학을 이끈 최시형은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일과 사물 안에도 하느님이 있다고 주장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경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최시형은 '하늘이 곧 나이고 내가 곧 하늘'이라는 천인합일의 평등적 주체로서 인간을 강조했다. 또한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사람을 대하기를 하늘처럼 하라'고 해 인간관계의 원리도 인간 존엄에 바탕을 둔 평등에 있다고 강조했다."(214-5)


"조선 정부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동학농민군이 전주를 향해 진군하자 비로소 대대적인 개혁으로 성난 민심을 달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황토현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하자, 청에 원군을 요청했다. 동학농민군은 청일 양국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정부와 평화조약을 맺고 무장을 해제했다. 청일 군대가 조선 땅에 주둔할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청은 물론 일본도 조선 정부의 철수 제의를 무시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내정 간섭을 물리치고 진행된) 조선 정부의 독자적 개혁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6월 21일 새벽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했다. 무력으로 자신들이 요구하는 내정 개혁안을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 달 간 경복궁을 경비한 것은 일본군이었다. 일본공사관이 발급하는 증명서 없이는 궁궐 출입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갑오개혁의 막이 올랐다."(226-7)


"(갑오개혁 당시 각종 개혁조치를 주도하고 의결하는 기관이었던) 군국기무처의 주요 구성원은 개화파 계열 인사들이었다. 그들은 반청·반反세도 사상이 강하고 전통적인 정치·사회 체제에 불만이 많은 한편, 사절단이나 유학생 등으로 일찍이 서양과 일본 문물을 접한 엘리트 관료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외국 공사관과 일정한 인연을 맺고 출세를 도모해 온 인물들로, 유달리 서자 출신이 많아 '소실小室파'로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개혁에 필요한 구상과 전문가적 소양을 갖추었으나, 10여 년 동안 권력 핵심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막상 집권하고 보니 권력을 뒷받침할 군사적·경제적 기반이 없는 것은 물론 인민의 지지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에게 집권의 기회를 준 일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228) "개화파 내각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나서야 비로소 1895년(고종 32) 1월 7일에 갑오개혁의 기본 노선을 제시한 <홍범 14조>를 발표했다."(230)


# 갑오개혁에 반영된 동학농민군의 요구

1. 노비 문서 소각

2. 7종의 천인 차별 개선, 백정이 쓰는 평량갓 없앰

3. 젊은 과부의 재혼 허용

4. 무명의 잡다한 세금 폐지

5. 관리 채용시 지벌 타파, 인재 등용

6. 기존의 공채와 사채 전부 무효화


"서양 각국에서 정당과 의회를 주축으로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제 꼴을 갖추어 가던 무렵인 1898년, 동아시아 최대의 정치 화두 역시 의회였다. 그해 일본에서는 1890년 제국의회 개원 이래 최초의 정당 내각인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이 들어섰다. 청에서는 강유위 등이 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변법자강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대한제국에서는 독립협회가 의회 개설 운동을 전개했다."(250)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긴 했지만 "보수파의 줄기찬 요구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에 역적이란 올가미를 씌우지는 않았다. 독립협회의 해산에 이은 탄압은 있었지만, 피비린내 나는 응징은 없었다. 세상은 그만큼 변해 있었다. 고종은 피의 응징 대신 체제를 다잡는 전략을 취했다. 이듬해인 1899년 대내외적으로 대한제국이 전제군주의 나라임을 공표하는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를 선포했다. 아직 인민 주권의 시대는 오지 않았고 황제권은 더욱 공고해졌다."(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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