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무력 정치사 - 민족주의자와 경찰, 조폭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
존슨 너새니얼 펄트, 박광호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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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1980년대 말 학생, 노동자, 지식인, 종교 단체, 중산층이 단합하여 권위주의 지배를 종식시킨 이후 국가는 중산층이 계속 방관자 입장을 취하도록 애써왔다. "한국사에서 주목할 만한 함의 하나는 국가와 비국가 폭력 전문 집단이 강제 철거와 노동 억압 시장에서 협력한 것이다. 왜 유독 강제 철거와 노동 억압인가? 그 답은 이 둘 모두가 중산층의 사회경제적 안녕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강제 철거는 무엇보다, 주택 공급을 늘릴 뿐 아니라 강력한 경제 성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사회 기반 시설을 증진하는 대규모 재개발과 [도시] 미화 사업의 일부이다. 또한 노동 불안은 국가의 경제적 활력을 위협한다. 그런데 그런 사업에서 국가의 폭력 행위는 정치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런 사업 대다수에서 국가는 폭력에 연루되지 않을 수 있다. 즉 실제로 폭력을 수행하는 행위자가 아니라 폭력의 관리자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런 사례에서 중산층은 뚜렷이 침묵을 지킨다."(21-2)


2장 국가와 국가 권력: 이론적 고찰


"선진국에서는 비국가 집단을 과거보다 덜 사용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국가는 하청 강제력을 이용한다. 다만 국가가 제공하는 합법적 틀 내에 있는 하청 집단들을 주로 이용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나 국가와 초법적 활동을 하는 비국가 집단들 사이의 협력과 공모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다양한 수준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 국가 형성에 관한 문헌은 현대의 발전된 정치체에서 이런 집단의 다양한 역할을 대개 가리거나 철저히 무시한다. 사실 그런 제도적 협약을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정당한 폭력 자원과 부당한 폭력 자원, 합법적 서비스를 명령하는 자와 불법적 서비스를 명령하는 자라는 엄격히 양분된 개념들이 복잡해진다. 더욱이 물리적 능력과 민주주의 능력, 이 둘이 모두 강한 정치체에서도 그런 사례들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면, 그런 현상은 그저 약하거나 실패한 국가에서만 나타난다는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26-7)


3장 한국의 무력 시장: 사법부에서 경찰, 국정원까지


"행상은 사회계층에서 맨 밑바닥에 위치했는데, 대개 '태생이 천한,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로 여겨졌고 실제로도 그런 대우를 받았다. 행상, 특히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행상들은 높은 계층의 약탈을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박원선에 따르면 "고려왕조 말엽, 지방 관리의 갈취와 산적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행상들이 큰 무리를 이루었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대동단결해 상인 조합을 조직했다." 달리 말해 행상의 재산권과 안전권에 대한 집행이 공적 영역에서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적 보호에 대한 수요가 생겨났던 것이다. 19세기에 행상들은 조선 정부와 중요한 관계를 형성했다. 국가는 그들에게 반관半官 징수원(시장에서 판매세 징수), 밀정, 염탐꾼의 역할을 요구했고 무력 충돌이 일어날 때에는 이들을 지원 부대로 뽑기도 했다. 이런 긴밀한 관계와 다양한 역할로 인해 그들은 가장 중요하고 유력한 비정부조직이 되었다."(52-3)


"현대의 범죄 폭력 집단의 역사적 기원은 해방 후 정치, 경제 무대를 지배한 불법 무장 '청년 집단'의 역사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정계 보스와 실세들과의) 광범위한 관계망을 통해 비국가 범죄 집단들은 박정희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 국가 형성에서 막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61년과 1963년 사이 박정희의 지배 아래 경찰은 조직적 활동으로 범죄 집단의 일원 약 1만 3000명을 체포했다. 사회 혼란에 책임이 있는 집단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는 것이 공식 명목이었다. 2004년에 발간된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1차 영문보고서는 대개 그런 활동이 시민들의 승인을 얻어냈다고 말한다. 대중의 지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유용했다. 비록 이후 박정희가 1963년, 1967년, 1971년에 대통령직을 얻기(유지하기) 위한 노력에서는 꼭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범죄 조직들이 흔히 박정희 반대파의 기반이었다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53-5)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잔혹하게 억압한 뒤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권력 공고화 과정에서 시민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한편 대중의 환심을 사는 이중 전술을 사용했다.〉 전두환 행정부는 이를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구호 아래 실시하며 군사 반란을 정당화하려 했다. 이런 정책의 일환으로 처음에는 계엄포고령 제13조 선포, 그리고 1980년 사회안전법을 통해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범죄자와 반체제 인사들을 체포했다. 군경은 전 지역에 내려진 체포 할당에 따라 영장 없이 시민 6만 7055명을 구금했고 그 중 4만 명을 군대가 운영하는 악명 높은 캠프인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이런 '사회 정화' 및 '각종 일제 단속' 정책들은 정부가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사회에 심어주었을 뿐 아니라 경찰과 범죄자들이 점점 더 서로 친밀해지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관대한 처분을 내리거나 노동 캠프로 보내는 것은 경찰의 특권에 달려 있었다."(55-6)


"조직범죄 집단들은 여러 합법 사업에도 관여한다. 유력한 혐의들(합법적인 바, 단란주점, 레스토랑 운영 등) 외에도, 민간 경비 산업의 성장은 강제력 행사 전문 틈새시장을 제공했다. 1976년 용역경비업법이 생기며 합법화된 민간 경비 산업은, 국가가 이전까지 직접 담당하던 강제 철거 같은 일들을 1980년대 중반 이후 민영화하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주로 건물을 보호하거나 호송 업무를 하는 집단들과는 달리) 주로 강제에만 집중하는 집단들은 '용역 회사'로 불리고, 더 넓게는 '건설 용역'으로 불리기도 한다. 용역 회사들은 대개 공식 등록이 되어 있고 그런 이유로 합법적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전술들은 흔히 본질상 범죄적이다." "강제 철거 외에도 '용역 회사'는 파업 분쇄를 비롯한 노동 문제에도 깊게 관여한다. 용역 회사가 출현해 강제 철거와 파업 분쇄에도 관여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초에 사회가 점차 투쟁적 사회로 변모하게 된 것, 그리고 민주화 운동과 맥락이 닿는다."(59-60)


"1970년대부터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까지 조직 폭력 집단들 사이의 관계는 경쟁적이고 폭력적이었다. 한국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유력한 행위자 다수를 체포하고 기소해 감옥에 넣은 것도 이 시기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연이어 체포하고 구금하는 동안 다양한 범죄 행위자들이 길고 잔혹한 감금이라는 경험을 공유하면서 점차 서로 친해졌다는 것이다. 그런 공유된 경험은 느슨한 협력 조합, 즉 '형제애'가 형성되는 촉매가 됐다. 일종의 공제조합처럼 상호 보호비를 모으는 이런 조합들은 서로 더 쉽게 협력하거나 협조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집단 간 갈등을 줄이고자 조직됐다."(64) "(보스들의 모임은 조직 간의 분쟁 해결 외에도 지역 사회를 타겟으로) 장학금, 임대료 지원, 기타 재정 관련 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이 계획의 목적은 일단은 지역사회와 더 나은 관계를 유지해 지역사회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고, 가장 중요하게는 지역 경찰과 정치인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66)


4장 국가 추구자, 민족주의자, 불법 무장 단체: 대한민국의 시작


"본디 식민지 시기부터 조직적 범죄와 폭력에 관여한 조직들은 정치권력들의 정쟁 도구로 이용됐다. 가장 유명한 무리는 김두한이 이끄는 조직과 정진영(또는 정진룡)이 이끄는 조직이었다. 이 둘은 모두 항일 활동으로 유명해졌는데, 나중에는 일본인에 고용되어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 의용정신대)을 조직하고 이끌어 사실상 합법적 테러리스트가 되었다. 1945년 식민 지배가 끝나면서 김두한과 정진영은 자신들이 거느린 용역들을 정당과 실세에게 대여했다. 김두한은 우익에 붙었고, 정진영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위해 일했다." "이 집단들은 정치사회화 과정과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을 모집하는 데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으며, 결국 각 정계 보스와 정파 형성을 위한 권력의 기초를 마련했다." "폭력적 정치 활동이라는 '더러운 일' 외에도 대개 불법 자금에 의존하는 그런 집단들은 강제된 혹은 '지발적 기부금'에 기댔는데, 그 액수는 놀랍게도 1949년 국가 세입의 절반쯤이나 됐다."(74-5)


"정치 깡패, 민족주의자, 불법 무장 단체, 국가 행위자 사이 협력의 시대는 이승만 이후 시기에도 규모가 훨씬 작아지긴 했지만 각기 다른 수준으로 계속됐다. 박정희가 무력 시장을 대체로 강화할 수 있었고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제력의 공적 자원을 통해 무력 시장을 지배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임기 전반에는 적어도 민주주의를 약속하며 활동해야만 했다. 이승만 정권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회 세력을 흥분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1961년과 1970년 사이 그런 협력을 추동한 논리는 국가의 고능력과 저자율성을 고려할 때 규범적 이해와 상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가 권위주의를 공식적으로 도입하자 한국의 국가강도는 고능력, 고자율성으로 바뀌었다. 요컨대 국가는 과거와 같은 그런 협력적 관계가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한동안 단절되었던 그런 관계는 1980년대 중반에 전두환이 박정희의 후임으로 들어서면서 회복된다."(93-4)


5장 국가 확장, 시민사회의 발흥, 그리고 전술의 변화: 박정희에서 전두환까지


"(국가와 비국가의 협력 관계는) 전두환 시기 노동 시위 억압과 강제 철거 부문에서 다시 시작했다. 전두환이 고도로 발달된 강제력을 뽐내던 국가를 물려받았음에도 협력 관행을 다시 활성화한 것은 국가 자율성이 가파르게 하락한 결과였다. 가장 중대한 것은 인구가 과거에는 시골의 농민이 지배적이었다가, 필요하다면 커다란 압력을 가하려 하고 또 그런 힘이 있는 교육받은 도시민으로 빠르게 변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유롭고 공정한 민주 선거는 1987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은 그 전부터 이미 정치 엘리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무력 시장에서 국가와 비국가가 다시 협력하게 됐다는 것은 국가가 값싼 노동력과 재개발이라는 공공재(증가하는 중산층이 요구한 재화)를 공급할 필요가 있었고, 동시에 바로 그 재화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강제력을 사용하는 일에서 일어날 사회 세력으로부터의 처벌을(그리고 국제적 비난을) 편하게 피하려 했다는 것이다."(97)


"선거 민주주의로 이행하기 전인 제3민주화 국면(1984~1987년)이 특히 중요하다. 1983년 전, 강제 철거와 관련해서 국가는 재개발 과정에서 사실상 모든 면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목동 재개발 과정에서 대규모 시위들이 한창 벌어지는 동안 그 과정을 민영화하면서 달라졌다. 노동 억압과 관련해서는 민간 경비 회사와 기타 비국가 행위자들(예컨대 구사대)을 허가하는 조치가 이른바 노동자대투쟁(1987~1989) 기간 중인 중인 1987년에 시작됐다."(117-8) "1987년 전, 노동을 포함한 시민사회의 다양한 부분과 중산층 사이의 동맹은 권위주의 통치 체제를 제거하는 목표를 공유했다. 정치 문제가 해결되자 중산층은 흩어졌다. 노동자와 학생의 급진적 집단들이 잠재적으로 국가와, 더 중요하게는 자신들의 지위에 유해하다고 본 것이다. 이 분열은 연이은 정부들이 흔히 민간 대리인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키고 질서를 유지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핵심 요소의 하나였다."(120)


6장 강제 철거의 정치: 목동 재개발에서 인사동 노점상 철거까지


"1960년대 초 판자촌을 없애는 표준 절차는 주택을 헐고, 필요하다면 주민들을 강제로 도시 바깥으로 내쫓는 것이었다. 내쫓긴 철거민들은 동일한 혹은 그보다 열악한 다른 주택을 짓곤 했다. 그러니까 도시로 돌아와 집을 다시 짓는 것이었다. 이런 철거 정책은, 판자촌이 특히 취약한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날 때도 시행됐다." "(철거민들은 시청에 항의하거나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는 방식으로 철거에 대응하기도 했지만) 가장 흔한 것은 철저한 물리적 저항이었다. 경찰과 지역 행정관들은 건물 철거와 강제 퇴거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경찰이 주민을 내쫓기 위해 불도저, 물대포, 최루탄을 사용하는(미국 남부의 민권 운동 시기를 연상시키는) 광경이 비일비재했다. 1966년과 1970년 사이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은 '불도저'라는 별명이 붙은 이였다. 특히 시청이 스스로 많은 수의 철거민을 감당하기 힘들 때, 용역들이 간간이 동원됐다. 하지만 경찰은 의심할 나위 없이 이 모든 일의 선두에 섰다."(124-5)


"1972년 초, 서울특별시청은 1971년 11월 이전에 지은 판잣집은 부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항공사진을 통해 판자촌 약 17만 3900곳이 확인됐고, 그 소유권이 사실상 합법화됐다. 이로써 본질상 두 유형의 판자촌 주민이 탄생했다. 적어도 약간의 권리가 있는 판잣집 소유주와 권리가 없는 세입자 말이다." "재개발 정책은 두 집단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다. 소유주들은 단순히 퇴거해 보상을 받기도 했을 뿐 아니라 지역의 재개발과 향상이 지가 상승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큰 이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세입자들은 스스로 퇴거하거나 강제로 쫓겨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이 정책으로 판잣집 소유주는 정부 편에 서게 됐고 세입자는 국가 세력, 부동산 투기꾼, 건설회사, 더 많은 상업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업가들, 그리고 극심한 주택 부족으로 증가한 집값에 직면한, 점점 늘어나는 서울의 중산층에 맞서는 자리에 서게 됐다."(125-6)


정부가 주도한 목동 사업 이후 "공공 관리 재개발 모델을 대신해 공동 재개발 사업 체계가 개발됐다. 이 계획에서는 재개발 과정이 사실상 민영화되어 재개발 이후 남은 이익이 얼마든 그것은 회사로 돌아간다." "공동 재개발 사업은 중요한 일들을 했다. 첫째, 전에는 제한했던, 판잣집 소유주로 인정된 이들의 수를 확대했고 그에 따라 기존의 소유주와 세입자 사이의 연대가 깨졌다. 결국 잠재적 저항 수준을 일부분 효과적으로 감소시켰다. 둘째, 더 중요한 것으로, 이전까지 정부에 지워졌던 재정 부담을 없앴다. 정부는 재정 부담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재산세도 더 걷게 됐고, 그와 동시에 당시 1970년대 오일 위기의 여파로 인한 해외 건설의 감소로 큰 타격을 입었던 국내 사업 시장을 확대할 수 있었다. 셋째, 정부의 역할을, 단지 그 과정을 간접적으로 관리하고 사용되지 않는 국유지를 판매하는 역할로 축소했다. 시 관리들은 강제 퇴거 같은 좋은 소리 들을 게 없는 조치들을 직접 수행하지 않게 됐다."(131-2)


7장 노동 억압의 정치: 한국노총, 구사대에서 컨택터스까지


"1987년 이후 노동자들의 요구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중반까지 파업과 노동쟁의의 주된 이유였던 경제적 이해를 넘어섰다. 특히 파업들은 민주적이고 독립적인 노조를 설립할 권리, 그리고 노조의 이해가 아니라 집단행동을 억압하는 데 이용됐던 국가조합주의적 노조들을 제거하는 데 집중했다. 달리 말해 노조 활동들은 작업장의 민주화에 집중했다. 국가의 대응은 흥미롭다. 1987년 8월 초까지, 정권은 노동쟁의에 방관자적 태도를 보였다. 예컨대 당시 정권은 경찰을 눈에 띄게 동원해 노동자들의 저항을 억압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민주주의의 창시자라는 자신의 새로운 이미지가 '퇴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국가의 초기 무대응은 정주영이 두 가지 보호 전략을 쓰는 계기가 됐다. 첫째, 구사대를 만들었다. 둘째, 용역들을 모집해 다루기 힘든 노동자들과 파업들을 진압하는 데 사용했다. 다른 기업들도 그에 따라 구사대를 만들고 노동을 억압하는 주요 강제 집단을 고용했다."(153-4)


8장 결론, 그리고 한국 사례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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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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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히스테리와 광기 속에서 / 1976년


"긴급조치 9호 발표가 있은 지 9개월여 후인 1976년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민주화 진영의 큰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또는 '명동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선언은 서울 명동성당에서 3·1 기념 미사를 통해 발표되었다." "'3 ·1 민주구국선언’의 초안은 김대중이 작성했다. 김대중은 그 이전 명동성당에서 추기경 김수환을 만나 〈내가 투옥되는 것으로 국민들에게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주고 싶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새로운 전기'가 만들어지기엔 세상은 너무 얼어붙어 있었다. 3월 5일 문공장관 김성진은 이 선언에 대해 〈헌법질서를 파괴하려는 비합법 활동〉이라고 주장했으며, 서울지검은 '정부전복 선동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정부 여당의 '전가의 보도'는 여전히 월남 패망이었다. 3월 17일 신민당 의원 한병채가 명동 사건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공화당 의원 홍병철은 〈한 의원을 월남으로 보내라〉라고 야유했다."(25-8)


"1975년 5월 21일 박정희와 회담한 이후 변질된 김영삼의 행보는 민주화운동에 찬물을 끼얹었을 뿐만 아니라 신민당의 내분을 몰고 왔다. 1976년 5월 25일에 치러진 신민당 전당대회가 〈우리 야당사에서 가장 추악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당시의 내분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는 박 정권의 공작정치가 개입된 탓이 크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영삼과 신민당이 면책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5·25 전당대회를 전후하여 김영삼 등의 주류에 도전하는 비주류는 이철승, 고흥문, 신도환, 정해영, 김원만, 정운갑 등을 중심으로 하여 1975년의 '박-김 회담 의혹', '김옥선 파동 때의 굴복' 등을 걸고 넘어졌다. 비주류는 당헌을 고쳐 집단체제로 가자고 주장했고, 김영삼은 단일지도체제를 고수하겠다며 파벌 세력 강화로 맞섰다. 이런 갈등은 결국 수백 명의 주먹 부대와 각목이 난무하는 폭력 충돌로 이어졌다."(32-3)


# 각 파가 전당대회를 따로 개최하여 주류의 김영삼과 비주류의 김원만이 각각 선거관리위원회에 당 대표 등록을 신청했지만 모두 각하되고, 김영삼은 총재 지위가 6월 9일자로 소멸되자 6월 11일에 사퇴함. 9월 15일에 전당대회를 다시 개최하여 이철승 389 대 김영삼 364로 이철승 대표최고위원 선출


"1976년 10월 24일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한국 정부의 기관 요원인 박동선 씨가 1970년대 연간 50만 내지 1백만 달러 상당의 뇌물로 90여 명의 의원과 공직자를 매수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한국 정부, 미국 정치인들에게 수백만 달러 뇌물 제공'이라는 톱기사 제목과 함께 무려 10면에 걸쳐 내보냈다."(61) "이 사건은 비단 미국의 정·관계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박동선은 한국 권부와 유착, 미국의 쌀 수입 중개권을 획득해 커미션을 챙기는 방법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고, 그 돈 가운데 일부는 미국 정계뿐만 아니라 박 정권의 정치자금으로도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막대한 액수의 돈이 박 정권에 흘러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박동선이 미시시피나 루이지애나 같은 쌀 생산 주 출신 의원들을 대상으로 로비를 벌인 결과) 한국은 비싼 값으로 쌀과 다른 작물을 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한국 내의 부정부패 차원에서도 깊이 살펴봐야 할 사안이었다."(63-4)


8장 '1백억 달러'의 빛과 그림자 / 1977년


"1977년 1월 20일 '인권대통령'을 표방한 지미 카터의 대통령 취임 이후 코리아게이트 파문은 더욱 확대되었다." "2월부터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한미 관계 조사권을 위임받은 프레이저 위원회가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미 선거 공약에서 인권·도덕 외교와 주한미군 철수를 내걸었던 카터는 3월 10일 한국 정부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하였다." "11월에는 중앙정보부 워싱턴 실무책임자인 참사관 김상근이 망명을 했는데, 그 배후에는 이미 미국에 망명해 있던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있었다. 김상근 망명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그 해 12월 4일 해직되고 그 후임에 김재규가 임명되었다. 프레이저 위원회는 37명의 증인을 출석시킨 가운데 20여 회의 청문회를 열었는데, 이 청문회의 핵심은 김형욱과 김상근의 증언이었다. 김형욱과 김상근은 6월 10일까지 청문회 증인으로 소환되어 '박정희의 가슴에 통한의 못질'을 하는 증언을 하였다."(69-70)


4월 19일에 일어난 '백지 팸플릿' 사건은 1977년의 얼어붙은 정국을 잘 보여준다. "사건 내용은 간단하다. 4·19를 맞아 연세대 몇몇 학생들이 그날 백지를 돌렸을 뿐이다. 굳이 언어로 말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이심전심으로 통할 수 있을 만큼 박 정권의 광기는 극을 치닫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지 성명서는 각자 읽고 싶은 대로 읽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학생들은 백지를 돌린 지 채 1분도 안 되어 경찰에 끌려갔다. 〈경찰에선 그 흰 백지에 뭐가 들었나 싶어 햇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불에 태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백지를 마이크로필름쯤으로 아는 그 멍청이들의 눈에 그런다고 뭐가 보일 리가 있을까. 죄목은 씌워야겠고, 찾아낸 물증은 없고, 궁지에 몰린 멍청이들이 생각해낸 죄목은 참으로 기발하다. 이름하여 '이심전심 유언비어 유포죄'. 결국 이 해괴망칙한 죄목에 걸린 4명 중 김철기 씨는 제적되고 나머지는 정학을 맞았다.〉"(96)


"박정희가 농촌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가 하는 증언은 무수히 많다. 그는 생각뿐만 아니라 직접 몸으로도 보여 주었다. 그는 농민들의 술인 막걸리를 좋아했고 자주 농민들과 같이 어울리는 모습을 신문과 방송을 통해 유감 없이 보여 주었다. 혹자는 그게 다 '이미지 조작'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원초적인 농촌 사랑을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박정희의 농촌 및 농촌 사랑은 직접적이었으나 심리적이고 지엽적이었던 것임에 반해, 농촌과 농민에게 가해진 불이익은 간접적이었으나 사회적이고 구조적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흑백 TV도 제대로 못 보는) 가난한 농민을 위해 컬러 TV 방영을 할 수 없다는 박정희가 그 가난한 농민들의 자식들이 도시의 공장에서 인권유린을 당하는 것에 대해선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그들을 빨갱이로 모는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이 그러한 이중성을 잘 말해 준다고 하겠다."(109)


9장 동일방직과 현대아파트 / 1978년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중심은 주로 중소기업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박 정권의 폭압적인 노동 통제, 한국노총의 어용화, 상대적 임금 우위 등의 이유로 대기업에선 노동운동이 일어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은 임금인상이나 부당해고 반대, 근로조건 개선 그리고 노조결성과 활동보장 등을 내걸고 싸웠는데, 운동이 크게 일어난 기업의 내부 사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인간적 모독이 투쟁의 주된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절대 빈곤하에서도 인권운동의 성격이 강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박 정권하에서의 인권운동은 불가피하게 반독재투쟁의 성격일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가공할 정권의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민주노조운동에 가장 큰 힘을 보태준 건 종교단체들이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도시산업선교회의 역할이 지대했다. 박 정권을 비롯하여 민주노조운동에 반대하는 세력이 도시산업선교회를 그대로 놔둘 리 만무했다."(134-5)


"동일방직은 전체 1천3백 명의 노동자 중 1천 명 이상이 여성 노동자였는데, 이들 여성 노동자들은 도시산업선교회 등의 헌신적인 지원에 힘입어 최소한의 인권을 지키고자 하는 수준의 노조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1972년 한국 최초로 여자지부장을 선출해 모범적인 민주노조의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회사는 1975년 말부터 남자 대의원들을 동원하여 어용노조화를 시도하였다. 회사 측의 공작에 대해 정현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자 공원들이 대부분인 공장에서도 현장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것은 남자이고, 여자들의 의견은 참고조차 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또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을 경우에도 초기에는 대부분의 간부직은 남성들에 의해 독차지되기가 일쑤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을 깨뜨리려고 하는 기업주들은 노동조합의 힘의 원천이 남자 노동자라는 판단 아래 남자 분회 간부를 매수하는데, 이는 상당한 정도로 성공하여 그들은 주로 노동조합 파괴에 앞장서게 된다.〉"(148-9)


"4월 1일자로 무더기 해고를 당한 1백24 명의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올려져 전국의 공장에 배포되었다. 이들의 재취업을 막기 위해 박 정권이 그렇게 한 것이다. 다른 건 다 제쳐 놓더라도 박 정권의 재취업 방해 공작이 잘 말해 주듯이, 〈동일방직 사태는 단순한 노사분규나 노동청에서 말하는 노조 안의 조직분규가 아니라 정부·노총·회사가 합작하여 산업선교와 관련된 민주노동운동을 파괴함으로써 산업선교와 노동운동 모두를 말살하려는 첨예한 실례〉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박 정권의 만행에 대해 언론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완전한 침묵을 지켰다."(156-8)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유신체제라는 거대한 바위에 던져진 한 알의 계란과도 다를 바 없었다. 여성 노동자들을 '공순이'로 조롱하거나 폄하했던 사람들 역시 유신체제의 그런 야만적인 음모극에 조연 역할을 했다는 걸 부인하긴 어렵다."(164)


"박정희 정권은 점점 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와 박정희 이상으로 심한 권력 중독에 빠진 그 주변 충성파들만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조갑제는 1979년 박 정권의 파국은 이미 1978년에 시작된 것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78년은 긴급조치 9호의 공포에서 벗어난 민주화운동 세력의 저항이 본격화된 해이기도 했다. 3년 묵은 긴급조치 9호는 그 약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중요 학생 사건 일지에 따르면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1975년엔 10건, 1976년엔 13건, 1977년엔 23건으로 늘더니 1978년엔 31건으로 급증했다. 1978년의 학생 사건들 가운데 3분의 2는 통일주체대의원 선거와 그들에 의한 대통령 선거 시기를 전후하여 일어났다.〉 대통령 선거는 1978년 7월 6일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 한국인권운동협의회는 대통령 선거를 (공산국가에서 형식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에 빗대어) 조롱하는 전단을 찍어 뿌렸다."(175-6)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를 한 건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고 통행금지까지 하루 해제하고 고궁을 무료 개방하였으며, 1천3백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하는 등 선심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취임식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서중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국의 축하사절로는 만주침략의 중심 인물로 전범 A급이었던 전 일본수상 기시가 이끈 일본인 12명뿐이었다. 유신체제의 '원조격'인 대만에서조차 민주화를 추진하고 있어서인지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외국특별경축사절을 공식 초청하지 않았다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체육관에서 당선된 유신 대통령 취임에 경축사절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유신체제로 한국은 따돌림 받았고 한국인 모두는 미개인 취급을 받았다.〉" "김대중은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12월 27일 서울대병원에서 가석방되었지만 곧바로 자택 연금을 당했고, 신문 방송은 김대중에 대해 일체 보도를 금지당했다."(179-80)


"투기와 부정부패 열풍 속에서 죽어나는 건 가난한 서민들이었지만, 그들에겐 탈출구가 없었다. 저항의 길을 꽉 막혀 있었다. 점점 더 두텁게 형성되어 가고 있던 중산층은 탐욕의 문화에 몸을 내맡겼다. 이와 관련, 김교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제 욕구의 충족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찾게 됨에 따라 박정희의 통치는 끝없는 경제과실을 약속해야 했으며, 이를 공급하는 것을 정치의 전부로 생각하게끔 되었다. 여기에 중독되다시피 하여 국민 쪽에서도 한 가지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은 또다른 경제 욕구를 요구하여 성장정책은 멈출 줄 모르는 직선행을 계속해야 했다. ····· 이 같은 물질적 상승 작용이 몰고 온 국민적 규모의 과열 현상은 마침내 모두가 앞을 다투어 돈을 벌겠다는 배금사상을 초래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투기열병으로 말미암아 유신 후반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열병이 뒤범벅이 된 사회 불안과 혼미의 길을 치닫게 되었다.〉"(187)


10장 박정희 시대의 종말 / 1979년


"1979년 4월 16일 중앙정보부는 소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을 발표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크리스천 아카데미 내 불법 용공 비밀서클 결성〉이라는 제목의 반공법 위반 사건이었다. 3월 9일부터 4월 4일까지 중앙정보부에서 관련자들에게 갖은 고문을 해서 조작해낸 이 사건은 박 정권의 말기적 증상을 잘 보여 주었다. (중간에 서서 화해를 모색해보겠다는 이들의 '중간집단운동'에 대해서조차 박 정권은 반공법을 들이밀고 고문을 자행했다.) 1980년 1월 항소심 판결에서 이우재는 징역 및 자격정지 5년, 한명숙은 2년 6월, 장상환은 2년을 선고받았으며, 신인령은 집행유예, 김세균은 선고유예, 황한식과 정창렬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크리스천 아카데미를 주도했던 목사 강원용도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심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 "법을 집행하는 기관들은 인권침해를 아예 상습화, 생활화하였고, 고문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듯 그것마저 상습화, 생활화하였다."(205-7)


"박 정권의 정보기관들은 정권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는 데에도 치열한 경쟁을 했다. 중앙정보부가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을 발표한 지 4일 후인 4월 20일, 치안본부는 〈북괴 지령에 따라 통혁당을 재건하여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결정적 시기에 봉기하여 대한민국을 전복, 적화를 기도해 오던 고려대노동문제연구소 총무부장 임동규 등 7명을 간첩 및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송치했다〉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조사가 착수되어 한 달 후 같은 시기에 대대적으로 발표된 것인데,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은 중앙정보부 작품인 반면, 이 사건은 치안본부 작품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1980년 4월 22일 항소심에서 임동규는 무기(남민전 사건에도 연루), 지정관은 징역 및 자격정지 7년, 양정규는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 6월, 박현채는 징역 및 자격정지 2년 선고를 받았다."(210-1)


"6월 29일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2박 3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동경에서 열린 선진 7개국 정상회담을 마치고 내한한 것이었다. 그러나 6월 30일과 7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은 국제 관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최악의 것이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 정진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 대통령이 약속을 깨고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들먹이자 다음 날 2차 회담에서는 미국 측이 한국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며 구속 중인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했다. 카터는 준비해 둔 100명의 정치범 구속자 명단까지 내밀면서 벤스 국무장관에게 이를 발표토록 했다. 박 대통령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구겨졌음은 물론이다.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한국에는 한국식의 인권이 있다'며 카터의 구속자 석방 요구를 '지나친 내정 간섭'이라고 몰아붙였다. 박정희·카터 회담은 결국 참담하게 막을 내렸다.〉"(220-2)


"절대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한 박정희는 점점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79년 8월 9일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백87명이 사기성 폐업에 항의하여 야당인 신민당사 4층을 점거하고 벌인 항의 농성 사건도 박정희의 종말을 재촉한 사건이었다."(227) "(동생들의 학비와 부모님의 약값을 벌기 위해 철야작업한다는) 노동자들의 사연은 박 정권의 안중에 없었다. 박 정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오직 정권안보였다. 8월 11일 새벽 2시경 경찰은 이른바 '101호 작전'으로 불리는 농성 진압 작전을 개시하였으며, 그 와중에 YH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박 정권의 폭력에 항의하여 신민당은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카터가 방한한 지 불과 40여일 만에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해 미 국무부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8월 14일 미 국무부는 〈경찰측 행위의 책임자에 대해 한국 정부가 합당한 처벌을 하기 바란다〉라고 논평했고, 8월 15일 박 정권은 〈미국은 명백한 내정 간섭을 하고 있다〉라고 답했다."(230-1)


"박 정권은 1979년 들어 '성장'과 '안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조건 한 방향을 향해 밀어붙이기만 하는 개발독재 성장주의의 부작용과 폐해가 극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는 단호한 의지나 군사작전식 대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정상호는 〈1978년부터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경제위기는 박 정권의 해결 능력을 넘어선 것이었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태생적 한계인 정당성의 부재를 보완하기 위해 성장과 수치의 경제에 포박당해 있었다.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 물량 위주의 성장정책에서 안정화 기조로의 전환은 단순히 관련 장관의 교체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신 선포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중화학공업 정책의 전반적 실패를 자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유신 정권의 물적 토대였던 독점자본의 이해와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이었다.〉"(254-5)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열흘 후에 10·26 사건이 벌어지자)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부분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임명했다. 그러나 실세는 정승화가 아니었다. 10월 27일 중앙정보부는 보안사에 완전히 접수당했고, 중앙정보부의 부서장급 20여 명은 온갖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절대권력 박정희가 사라진 공간에서 주도권이 중앙정보부에서 보안사로 넘어간 것이었다. 한국 군부의 노른자위를 점령하고 있는 하나회의 우두머리인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박정희 살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이후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11월 3일 박정희의 국장(國葬)이 치러졌고, 11월 6일 전두환이 TV 카메라 앞에서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민주공화당은 대통령의 서거로 공석이 된 총재를 선출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 11월 12일 당 고문 김종필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267)


"12·12 쿠데타가 벌어진 1979년 말은 정치적으론 '서울의 봄'을 예고하는 상황이었는지 몰라도 경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 해 초 '이란혁명'으로 이란의 석유 생산량이 감소되면서 번진 파장은 12월 중순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열린 산유국회의(OPEC)가 원유값을 일시에 4배로 올리기로 결정하는 사태까지 빚고 말았다. 이른바 제2차 오일 쇼크가 발생해 기름값이 2배로 뛰면서 한국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고 있었다." "대중은 절대 빈곤하에서보다는 경제성장의 과실의 맛을 조금 본 상태에서 경제에 대해 더욱 큰 두려움을 갖는다는 가설은 1980년대 초 한국 사회에서 설득력을 갖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김재규는 사형당하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 23일에 남긴 유서에서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고 말했지만, 바로 그 며칠 전 민주주의는 광주에서 처참한 학살극과 함께 다시 무덤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304-6)


맺음말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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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0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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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수출전쟁과 안보전쟁 / 1973년


"6개의 전략 산업을 선정해 육성하겠다는 1 ·12 선언에 따라 1973년 5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박 정권은 재정·금융·조세상의 특혜와 지원을 주어 대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하였으며, 이에 따라 산업별로 울산(석유화학·비료), 구미(전자), 포항(철강), 옥포(조선), 온산(비철금속), 창원(기계) 등에 특화된 공업단지를 조성하였다. 박 정권은 1974년엔 '국민투자기금법'을 마련하여 조성한 기금 가운데 해마다 68%를 중화학공업 부문에 지원하였다. 또 14개 중요 산업에 처음 3년 동안 100%, 다음 2년 동안 50%의 내국세 감면 혜택을 주었고, 중화학고업 제품을 수출하여 생긴 소득에도 소득세와 법인세를 50% 감면하는 파격적인 조취를 취하였다. 이러한 여러 특혜 때문에 국민의 조세 부담은 점점 늘어나 1973년에는 12.6%이던 것이 1981년에는 18.2%까지 뛰었다."(16-7)


"1972년 사토 이후 총리가 된 다나카는 포항제철에 대한 일본의 자금 및 기술 지원에 대해, 포항제철이 건설되면 남한은 북한보다 더 우월한 철강 생산 능력을 갖게 될 수 있으며 일본의 1차적 의도는 남한 내의 저항 세력이 북한의 이익에 따르지 않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2차적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자본이 침투하면서 한국의 대일 의존도는 깊어지고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누렸던 미국의 지위를 점차 대신해 나갔다. 한국의 공장들은 주요한 설비재뿐만 아니라 원자재·중간재와 기술을 일본에서 계속 도입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가동할 수 없었다. 한국은 일본에서 반도체·통신장비·기계 같은 자본재·내구소비재·중간재를 수입하고 이를 텔레비전·자동차·철강재로 만들어 미국에 되팔았다. 한·미·일 무역구조는 일본이 미국과의 무역마찰을 줄이는 데 이용되었다.〉"(54)


"한국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의 수는 1971년 9만 6천여 명에서 1972년 21만 7천여 명으로 급증하였고, 1973년에 43만 6천여 명으로 또 한번 급증하였는데, 그것은 1972년 일본이 중국과 외교 정상화를 하면서 대만과의 유대가 끊어지는 바람에 일본인들의 섹스 관광지가 대만에서 한국으로 바뀐 것에 기인한다." "1973년은 외화벌이를 위해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해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부터 관광 기생들에게 허가증을 주어 호텔 출입을 자유롭게 했고, 통행금지에 관계없이 영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박 정권은 매매춘 여성들에게 안보 교육을 포함하여 자신들이 국가 경제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에 대한 교양 교육을 실시하여 외국인에게 최대한 서비스를 하도록 독려하였다. 그 교육 내용은 〈일제시대 정신대를 독려하였던 독려사와 너무 흡사하여 '신판 정신대 결단식' 같았다.〉"(58-9)


"매매춘의 국책 사업화는 비단 일본인 관광객들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다. 70년대부터 주한미군이 그러한 국책사업의 주요 고객으로 등장했다. 60년대만 하더라도 박 정권은 기지촌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70년대 초에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한 이른바 '닉슨 독트린'의 발표 이후에는 주한미군을 붙잡아 두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러한 정책은 주로 미군의 기지촌 환경 개선 요구에 적극 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주한미군과 박정희 정권은 1971년부터 1976년까지 합동으로 '군기지 정화운동'을 실시하였는데, 이 운동은 사실상 박 정권이 전담하다시피해서 추진되었다."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매월 실시하는 교양 강좌에서는 시장, 지역의 공보관, 경관 등이 인사말을 하면서 〈미군을 만족시키는 여러분 모두가 애국자들이다. 여러분 모두는 우리 조국을 위해 외화를 벌려고 일하는 민족주의자들이다〉라고 말하곤 했다."(70-1)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1970년 대통령 선거 당시 그걸 예견했던 김대중은 신병 치료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김대중은 그 다음 날 동경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정희 비상계엄령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박 대통령의 이번 조치는 통일을 말하면서 자신의 독재적인 영구집권을 목표로 하는 놀랄 만한 반민주적 조치이다. 박 대통령의 이와 같은 행위는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한 위대한 한국민의 손에 의해 반드시 실패하리라고 확신한다.〉"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발기인대회를 연 김대중은 4일 후 한민통 동경본부를 결성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에 입국한 7월 10일에서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8월 8일, 김대중은 동경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납치되었다. 결국 김대중은 미국의 개입으로 납치된 지 5일 만인 8월 13일 살아서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78-80)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터진 제4차 중동전쟁의 여파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 가공할 공포로 다가왔다." "정부는 유류 공급을 17%로 줄이고 제한적으로 송전 조치를 단행하였다. 공장들은 일제히 조업 단축에 들어갔다. 11월 8일자 신문들에 실린 대형 기사의 제목들은 당시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차량, 난방 유류 5% 절감〉, 〈걷기운동〉, 〈대낮 소등 생활화〉, 〈광고 네온사인 규제〉, 〈목욕탕 신규허가 억제〉, 〈광광, 레저여행도 규제〉, 〈계속 악화되면 택시 풀제 등 2단계 조치 실시〉. 거리엔 가로등이 꺼졌고, 상점의 네온사인도 꺼졌다. 밤거리는 어두워져 사람들은 서둘러 귀가했으며 가정에서도 전등을 한 등씩만 켰다." "이듬해 3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가를 3개월간 동결하겠다고 발표해 한숨 돌리긴 했으나, 그 파동의 영향은 1974년에 물가가 42.1%나 인상되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100-2)


5장 긴급조치와 민주화투쟁 / 1974년


"1973년 12월 24일 김수환, 함석헌, 천관우, 장준하, 김동길, 계훈제, 백기완, 법정, 김재준, 박두진, 이호철, 백낙준, 김윤수, 김찬국, 안병무, 홍남순 등 각계 민주 인사 30명이 발기인이 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선언이 터져 나왔다. 그 날 민주 인사들은 서울 YMCA 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한다는 걸 선포했다." "국무총리 김종필은 12월 26일 밤 9시 40분부터 1시간 40분 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한 특별연설에서 개헌운동의 즉각 중지를 요구하면서 강력한 처벌을 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였고, 이는 다음 날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개원 청원 서명운동은 그런 정도의 위험으로 주저앉을 성질의 운동이 아니었다." "이에 크게 당황한 박 정권은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 제53조에 따라 대통령에게는 이른바 긴급조치권이 부여되었는데, 박정희는 이 긴급조치라는 전가의 보도를 빼든 것이다."(121-3)


"(대학생 총궐기가 일어난) 4월 3일 밤 10시,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온 박 정권은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는데, 이는 민청학련 관련자 처벌을 주목적으로 삼은 것이었다. 긴급조치 4호는 문교부 장관에게 학생들이 반체제운동을 계속하면 대학을 폐교시킬 수 있는 권한마저 부여했으며, 심지어 학생의 '정당한 사유 없는 결석이나 시험 거부 행위'에 대해서도 5년 이상의 징역에 최고 사형까지도 선고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130) "핵심 주동자인 이철이 체포된 다음 날인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을 받은 민청학련을 적발하였다〉고 주장했다. 민청학련은 학생들이 유인물에 편의상 붙인 호칭이었는데도, 중앙정보부는 이를 폭력으로 정부 전복을 노린 전국적인 불순 학생조직인 양 거창하게 부풀려서 발표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만들어내는 낯익은 용공 조작 수법을 되풀이했다."(132)


"중앙정보부 발표에 의하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서 관계 기관의 조사를 받은 사람만도 1천2백4명에 달했으며, 피고인들 중에는 이철, 유인태, 여정남, 나병식, 윤한봉, 정상복, 안양로, 이근성, 김영일(김지하), 류근일, 김병곤 등 기독청년 및 학생운동권 핵심 인물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약 3개월 후 군법회의는 1백80명의 피고인 중에서 14명에 사형, 13명에 무기징역, 그리고 28명에는 15년에서 20년을 구형했다. 당시 선고는 구형한 그대로 떨어졌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변호사 한승헌은 그러한 재판에 대해서 '자판기 판결' 또는 '정찰제 판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사건은 〈기소자들의 선고형량 합계가 1천6백50년이나 되어 단일 사건으로는 세계 사법사에도 전무후무한 기록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아울러 또 하나의 세계적인 기록을 세웠는데, 변호사 강신옥이 법정에서 변론 도중 끌려나가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133-4)


1974년 8월 15일에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 기도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8월 21일, 책임을 지고 물러난 박종규의 후임으로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었다." "(박정희에게 신앙과도 같은 충성심을 지녔던) 차지철은 경호실 차장 밑에 행정차장보와 작전차장보를 새로 만들어 현역 장성들을 데려다 앉혔으며, 청와대 내외 경호병력인 수경사 30경비단과 33경비단을 대대급에서 연대급으로 격상시켰다. 또 경호실 요원의 복장을 히틀러의 SS친위대 복장처럼 변경시켰다. 더욱 놀라운 건, '경호목적상 필요한 경우 수경사를 지휘할 수 있다'는 대통령령을 제정하여 민간인 경호실장이 군 지휘권까지 행사할 수 있게끔 만든 것이었다. 전임 경호실장 박종규는 대통령의 '신변 경호' 뿐만 아니라 '심기 경호'를 내세웠는데, 차지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위(保衛) 경호'라는 새로운 경지를 선보였다."(152-3)


"또 차지철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대통령 경호위원회'라는 특별 기구를 만들기까지 했다." "차지철이 친 '인의 장막'은 그 누구도 뚫고 들어가기 어려웠다. 장관도 차지철이 허락하지 않으면 박정희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장관들에게 대통령 결재를 받을 문서를 꼭 하루 전에 자기 방에 갖다 놓도록 요구했다. 그는 〈일본 명치유신 때 어느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문서의 귀퉁이에 독약을 발라 놓은 일이 있었다〉라는 이유를 댔지만, 그 핑계를 대고 정보를 독점하고자 했던 것이다. ... 1976년 12월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었을 때만 해도 김재규와 차지철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을 거치지 않고 대통령을 만났다는 이유로 장관의 정강이를 발로 차는 차지철과 명색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상호 충돌은 이미 예고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에 따른 '정보 전쟁'과 그 여파는 박정희 유일체제를 용납한 한국 사회의 비극이었다."(156-7)


"박 정권은 늘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앞장서는 『동아일보』에 대해 집중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 운동을 무력화시키고자 하는 음모를 꾸몄는데, 그게 바로 12월 16일에 시작된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이었다. 이는 박정희의 〈『동아일보』를 혼내 주라〉는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가 획책한 것이었다. 박 정권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 『동아일보』에 광고를 주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1975년 1월 23일까지 『동아일보』 상품 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다." "광고탄압을 주도한 중앙정보부 뒤에는 박정희가 있었다. 당시 대미 로비스트 김한조는 미국의 반응이 나쁘므로 광고탄압을 중단해야 한다고 박정희에게 건의했지만, 박정희는 듣지 않았다." "그 대신 국민들의 격려광고가 쇄도하여 『동아일보』 광고면은 한동안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삽니다〉, 〈작은 광고들이 모두 민주 탄환임을 알라〉 같은 국민들의 격려문으로 채워졌다."(182-3)


6장 폭력과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 1975년


"민청학련 및 인혁당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사형을 선고받은 8명은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다음 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새벽 6시에 사형을 집행했으니 상고가 기각된 지 채 하루도 안 된 20시간만이었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흥선, 이수병, 하재완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러나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해 중형 선고를 받은 학생들은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으니, 이는 당시의 법이라는 건 박정희와 그 하수인들의 기분 내키는 대로였다는 걸 의미한다. 김삼웅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긴급조치 4호를 통해 반체제적인 학생들과 이들의 배후라고 판단한 교수, 종교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것이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조작이었다. 특히 인혁당 재건위라는 공안 사건을 통해 학생들에게 겁을 주고, 학생 시위가 북한측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국민들에게 선전하여 이를 탄압하고자 했던 것이다.〉"(227-8)


"4월 30일 패망한 베트남은 한국에게 무엇이었을까? 베트남 특수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파병 군인들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베트남 파병 군인들은 지금까지도 고엽제 피해와 다른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정부는 그간 그들을 외면해왔다. 또다른 문제도 있다. 문부식은 베트남전쟁과 광주민중항쟁이 무관치 않다며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끔찍한 폭력을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 참전 용사들이 벌어들인 달러는 그들의 부모 형제가 사는 한국 사회의 농촌 구석구석까지 전해졌다. 한국인들이 그야말로 고루고루 '달러의 맛'을 본 시기가 그때이다. 그것을 대가로 한국인들은 폭력에 대한 무감각,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되어도 된다는 윤리적 감각의 황폐화, 말하자면 '성장의 열매'와 폭력이 공존하는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249)


"5월 13일에 공표된 긴급조치 9호는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하였다. 〈일체의 유언비어 날조 및 헌법 비방 행위 금지, 학생 집회 및 시위 금지〉 등도 당연히 따라 붙었다." "변호사 이정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름하여 긴급조치 9호! 산천이 떠는 법률이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권자이고 헌법 재정 권력자로서의 국민이 '헌법'이라고 입만 벙긋해도 긴급조치 9호의 올가미가 다가오고 있었고, '헌법'이라는 글자가 인쇄된 유인물만 들고 다녀도 수사기관에 불려가야 했다. ····· 망치질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으며, 제3의 쿠데타임과 동시에 민주정치를 박살내는 핵폭탄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1974년 1월 8일에 나온 긴급조치 1호 이래로 그간 공표된 긴급조치의 모든 반민주성을 포괄한 긴급조치의 결정판이었다. 긴급조치는 한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 9호는 햇수로 5년, 날수는 1천6백69일(4년 6개월)이나 지속되면서 8백여 명의 구속자를 낳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250-2)


"1975년 7월 8일 사회안전법, 민방위기본법, 방위세법, 교육관계법 개정안 등 소위 '4대 전시입법'이 발표되었고, 7월 16일 국회 회기 만료 직전에 휴회 선언을 틈타 새벽 3시에 여당 의원들만으로 날치기 통과되었다. 사회안전법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자에 대해 출옥 후에도 보안처분을 하도록 규정하였고, 보안처분은 2년 단위로 무제한 연장 가능하게 만들었다. 민방위법은 '베트남 사태'를 계기로 안보 위기 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제정된 것으로 17~50세의 남자를 대상으로 준군사적인 민방위대를 조직하도록 규정하였다. 교육관계법 개정안은 교수 재임용제의 신설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 법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병영 체제화를 위한 것이었다." "1971년 4월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서준식은 7년의 형기를 다 마치고도 복역 기간 중인 1975년에 제정된 바로 이 사회안전법에 소급 적용당하여 모두 4차례에 걸친 보호감호 처분으로 계속 감옥살이를 하였다."(261-3)


"4·19 이후 폐기되었던 이승만 시기 어용의 대명사인 학도호국단이 이름 하나 바뀌지 않은 채 25년 만에 다시 등장하였다. 학도호국단 창설 설치령은 박정희와 김영삼의 회담이 있은 후 5월 21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쳤고, 그 결과 9월 2일 중앙학도호국단이 발단하였다." "그 시절 학도호국단을 직접 겪은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일주일씩 경주 화랑 수련원에 보냈는데, 일정에는 매일 한두 시간씩 박정희 전 대통령 어록을 들으며 명상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정신 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일주일 후 퇴교할 때에는 정말로 애국심에 불타 올라 태극기를 보며 애국가 부르면서 감격에 겨워 엉엉 울면서 나오게 만들었다. 나치 치하 독일이나 북한 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몇 십년 전 대한민국이 이야기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바랐던 청년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으니, 그에게 당시의 청년문화는 사회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2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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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9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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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도시에 빨려 들어가는 농촌 / 1970년


"박정희는 1970년 여름까지만 해도 교련 반대시위를 주도했던 학생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그들의 주장을 듣기도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학생들이 불의를 보고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라며 학생들의 기개를 칭찬해 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은 사람을 바꾼다." "게다가 박정희는 한국인의 민족성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일제의 식민통치 선전술을 그대로 신봉한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결코 민족주의자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5천 년을 전면 부정한 후에 남을 수 있는 '민족'이란 게 과연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만이 5천 년의 역사를 개신(改新)할 수 있다는 '자기주의자'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박정희는 점점 더 민주주의를 낭비로 간주하게 되었으며, 이런 생각은 1971년 대선 이후 더욱 심해졌다. 그는 '건설적인 토론과 경쟁' 대신 '억압적인 지시와 응징'이 자신의 종교라 할 '조국 근대화'를 위해 훨씬 더 적합하다는 빠져들게 되었다."(21-3)


"수출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구호가 말해 주듯이, 오직 '수출만이 살길'이었다. 수출 경쟁력은 싼 노동력이었다. 군인이 돈 받고 일하는가? 아니다. 군인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 군인들과 동일시된 수출 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신성한 '조국 근대화'를 위해 희생해야만 했다." "반면 수출 전사 지휘관들이 받은 특혜는 엄청난 것이었다. 일반 대출 이자율이 25%를 할 때에도 수출 특융 이자율은 6%에 불과했고, 수출용 원자재 수입에는 세금을 전액 면제했고, 수출 소득에 대해서도 소득세를 80%나 감면해 주었다. 그 당시에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던 해외여행도 수출 전사 지휘관들에겐 예외였다. 어디 그뿐인가. 수출 전사 지휘관들은 밀수를 저질러도 그들을 처벌하는 것이 수출에 지장을 줄 것 같으면 박정희는 검찰에 수사 중단 지시를 내리곤 했다. 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수출 전시(戰時) 상황이었기 때문이다."(24-5)


"(경제개발의 가시적인 성과 중에서도)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가 가장 드라마틱한 성과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경부고속도로는 〈가슴이 뛸 정도로 흥분되는 민족사적 금자탑〉으로 다가왔다. 박정희가 7월 7일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준공식에서 〈이 공사는 민족의 피와 땀과 의지의 결정이며 민족적인 대예술 작품〉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66)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는 일본의 동명고속도로 건설비의 8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건설공사라기보다는 군사작전이었다고 보면 된다. 박정희의 경제 브레인 오원철이 고속도로 건설 동기, 추진 방법, 공사 방식이 모두 군대식이었다고 말한 건 정곡을 찌른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도 〈박 대통령이 현장을 돌며 마치 전쟁처럼 지휘한 것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다. 박 대통령은 선전을 포고하고 전략을 세웠으며 직접 전투병사들을 지휘했다〉고 말한다."(69-70)


"고속도로는 농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속도로 개통 이전만 해도 농촌 인심은 매우 순박했다. 사실 바로 그 덕분에 고속도로 용지도 평당 평균 236원(당시 담배 한 갑에 40원)이라는 헐값에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속도로 개통 이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1967년 12월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이 발표되고, 뒤이어 1970년 1월 서울의 강남개발계획 발표 이후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려 수도권 토지는 '돈 놓고 돈 먹기판'이 되어 버렸다. 바로 이런 투기 열풍이 농촌까지 파고 들어간 것이다. 고속도로 건설은 땅값에 영향을 미쳐 영농의 영세화를 초래하고 농민들의 주거지 상실로 인한 이촌 현상을 유발시켰다. 게다가 고속도로 건설회사가 주변의 젊은 청년들을 고용함으로써 영농 의욕 감퇴와 노동력 부족 현상을 야기시켰다. 급속하게 진행된 고속도로 주변의 지붕개량 사업은 농민들에게 부담을 주고 정부에 대한 반발 의식까지 자아내게 만들었다."(74-5)


"7월 6일 미국은 주한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의 철수 방침을 한국 정부에 통고했다. 8월 24일 내한한 미국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는 1년 후인 1971년 6월 말까지 철수 방침을 밝히는 동시에 〈앞으로 5년 이내에 나머지 주한미군도 완전히 철수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택한 것은 '자력 방위'였다. 박정희는 이미 1970년 1월 9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1970년을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로 정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연 3년에 걸쳐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이라는 국정지표를 제시한 것이었다." "박정희는 북한과의 대결에서 시간을 벌고 (1971년 대선에서 높은 통일 여론을 지지표로 연결하려는) 목적으로 8월 15일, 광복절 25주년 기념사에서 북한이 전쟁도발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과 '선의의 경제 경쟁'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그간의 입장과는 달리 공식적으로 북한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87-8)


"전태일의 분신은 지식인들의 양심을 강타했다. 이광일은 전태일의 자살이 〈이제까지 대중의 가슴속에 '위대한 작가' 또는 '보편적 지식의 소유자'로 새겨져 있던 지식인에 대한 관념을 뒤흔든 계기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11월 21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전태일 사건과 관련하여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를 '정치 문제화'하였다. 11월 22일 새문안교회 대학생부 학생 40여 명은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와 그 공모자인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는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박정희는 1971년 1월 17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노동 문제를 거론하였으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선거공약으로 내놓았다. 전태일의 분신 자살 사건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벌어지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04-5)


"1970년 12월 10일엔 대통령 특별보좌관 제도가 발족되었다. 이 제도도 대학교수 등과 같은 지식인 영입의 창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20세기 초반 한국 철학의 중심 인물'로 평가되어 온 박종홍이었다. 박종홍은 이미 5·16 쿠데타 직후부터 쿠데타 권력기관인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사회분과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군사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지만, 그의 특별보좌관직 수락은 이제 한 발이 아닌 두 발을 다 군사정권에 들이밀겠다는 것으로 간주되어 당시 〈한국 지식계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박종홍은 1971년 1월 1일자 일기에서 〈나는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 왔다. 왜 스스로 실천을 못하고 진리라면서 그 실천을 남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참으로 교육자라면 스스로 실천해 보여야 할 것이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은 진리뿐이다. 나는 진리를 위하여 진리를 몸으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고 썼다."(111-3)


2장 박정희 1인 체제의 완성 / 1971년


"4·27 선거가 열흘도 남지 않은 시점인 4월 18일 '선거를 틈타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암약'해왔다는 혐의로 재일교포 대학생 서승, 서준식 형제 등 '간첩' 10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준식은 7년 형을, 서승은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서승이 10개월 가량 김대중의 측근 김상현의 집에 기거한 적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 공산혁명 기도, 김대중과의 관계를 자백하라고 서승을 포함한 다른 관련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129-30) "물론 그 사건은 철저히 조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들 형제의 북한 여행을 간첩 행위로 연관시키며 한 편의 무서운 음모극을 연출했다. 김대중의 측근 김상현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박정희 후보가 질 경우 서승 사건과 연계시켜 선거 자체를 뒤엎어 버리려는 전략이었다고 한다. 조봉암이 그런 식으로 죽어 갔던 것 아닌가.〉"(132)


"박정희는 4·27 대선에서 유권자들에게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에 약한 우리 국민의 심성을 파고들어 제법 재미를 보았다. 김대중이 4월 17일 전주 유세부터 〈박 정권이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라고 폭로했기 때문에 박정희로서는 그에 대항할 필요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그 아이디어가 『조선일보』에서 나왔다는 게 흥미롭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 초기부터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일영의 집을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질 만큼 『조선일보』와는 가까웠는데, 박정희와 『조선일보』의 상부상조 관계는 70년대 내내 지속된다." "4월 25일 서울 유세에서 박정희는 눈물까지 흘리며 〈더 이상 여러분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호소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김대중의 폭로 그대로 박정희는 이후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유신으로 국민의 투표권을 아예 박탈해 버렸으니 말이다."(139-40)


"곧이어 치러진 5·25 총선에서는 153개 지역구에서 공화당 86명, 신민당 65명이 당선되었고, 전국구를 합친 의석 수는 공화당 113석, 신민당 89석이 되었다. 공화당 현역 의원 26명이 무더기로 낙선한데다 공화당은 서울의 17개 지역에서 단 1석만을 건졌고, 제7대 국회 때보다 야당 의석이 2배로 늘어나, 5·25 총선 결과는 〈당시의 형편으로 미루어선 야당의 실질적인 대승〉으로 간주되었다. 이 선거 결과를 1년 5개월 후에 나타난 유신체제와 연계시켜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정치학자 김세중의 주장이다. 〈1971년 총선에서 국회의원 3분의 2 의석 확보에 실패한 박정희는 헌법개정이라는 법 절차를 밟아 장기집권을 모색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번에는 비상계엄의 선포 아래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는 식의 비상한 방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유신체제 도입의 권력정치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147)


"신민당은 9월 30일 '실미도 특수군 난동, 광주단지 시위, 한진빌딩 난동, 기동경찰 총기 난사, 무장공비 마을 점거, 독침간첩 자살 등 흐뜨러진 치안에 대한 문책'을 이유로 내무부 장관 오치성 해임건의안을 발의하였다." "찬성에 표를 던진 공화당 표가 20표 넘게 나와 해임결의안이 통과되자 박정희는 자신의 지시를 거부한 일부 공화당 의원의 항명에 격노해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항명 주동자를 색출해 '엄중히'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 결과 다음 날 23명의 공화당 의원이 연행되어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극심한 구타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강제 탈당 당하고 국회의원직마저 박탈된 김성곤과 길재호는 정치적으로 모든 걸 잃고 한동안 미국으로 유랑 생활을 떠났으며, 공화당 지도부는 대대적으로 개편되어 박정희 친정체제가 강화되었다. 공화당은 이후 박정희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청와대에 종속되었다."(183-4)


# 10·2 항명 사건 : 김종필 견제용으로 박정희가 구축해놓은 공화당 4인(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백남억) 체제 붕괴


"10월 12일에는 국방부 장관과 문교부 장관의 공동 명의로 교련거부학생 전원을 징집한다는 담화가 발표되었다. 학원자유화를 외치던 학생들은 부정부패자 공개를 요구하면서 군인들의 학원 난입을 규탄하였으며, 중앙정보부 철폐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이 구호는 박 정권의 최대 약점들을 건드린 것이었다. 이에 박 정권은 '10·15 위수령' 발표로 대응하였다. 10월 15일 박정희는 특별법령 9개항을 발표하면서 서울 8개 대학에 무기휴업령을 내렸다. 서울대 등 주요 대학들에는 위수군이 진주하면서 1천8백89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이어 전국 23개 대학에서 177명의 학생이 제적되어 그 중 대부분이 강제 징집되었으며 군대에서도 끊임없는 보안사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10월 16일에는 고려대 무장군인 난입에 항의하는 '지식인 64인 선언'이 나왔고, 이로 인해 리영희, 천관우 등 언론인들이 언론계에서 쫓겨났다."(189-90)


3장 영구집권을 위한 '10월 유신' / 1972년


"1972년 7월 4일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해 전 국민을 통일 열기에 들뜨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합의했다는 남북공동성명은 첫째로 민족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주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했다. 둘째는 통일은 무력 행사에 의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실현해야 하고, 셋째는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무엇보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즉, 평화통일의 3대 원칙으로서 자주·평화·대단결을 내걸었던 것이다."(211-2) "7·4 남북공동성명은 나중에 남북 양쪽에서 동시에 일어난 체제상의 대변화로 인해 '정치적 쇼'였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지만, 그런 문제들을 떠나서도 그 기본 정신이 관련 사안에서마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유럽거점 간첩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김규남을 비롯하여 각종 간첩 혐의로 복역중인 30여 명의 사상범들이 남북공동성명 직후에 전부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215)


"70년대 초, 박정희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한국 경제는 엉망이었다. 외국 차관을 가져다 쓴 기업체들이 대규모로 부실 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1969년 5월, 83개 업체 중 45%가 부실 기업체로 분류되었다. 부실 기업들은 더욱 사채에 의존하게 되고 그래서 금융 부담이 가중되어 부실화되는 악순환의 덫에 갇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은 사채를 동결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기업들이 쓰는 돈의 30%가 사채였는데, 금리가 연리 30% 이상이었다." "이른바 '8·3 긴급경제조치'의 주요 내용은 8월 9일까지 신고된 기업보유 사채는 앞으로 3년간 갚지 않고(3년 거치) 그 후 5년간 월리 1.35%(연리 16.2%)로 분할 상환토록 하며, 정부가 2천억 원을 마련해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단기 고리의 대출금 중 30%를 연리 8%,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으로 대환해 준다는 것 등이었다." "'8·3 긴급경제조치'로 사채 전주 노릇을 하던 5·16 주체들의 부정축재 규모가 꼬리를 잡히기도 했다."(217-8)


"1972년 10월 17일 중앙청 앞에 탱크가 등장했다. 박정희 정권은 '7·4 남북공동성명'으로 국민의 통일 열기를 한껏 고조시킨 뒤, 그로부터 3개월여 후인 10월 17일, 통일을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대통령 종신제를 보장하기 위한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언하였다. 박정희가 보기에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건 북한 공산당이나 할 짓이었기 때문에, 반대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고문으로 '빨갱이'라고 실토케 한 다음 죽이거나 오랫동안 감독에 가둬야 마땅했다."(222) "10월 17일 오후 7시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국회를 강제 해산했고 정당과 정치 활동도 금지되었다. 헌법 기능은 정지되었고 그 권한은 박정희가 장난감처럼 주무르는 비상국무회의가 가져갔다. 쉽게 말해, 박정희 개인이 곧 법이요 진리인 그런 철권통치 체제가 구축되었던 것이다. 물론 언론은 사전 검열을 받았으며 대학은 아예 문을 닫아 버렸다."(224)


"박 정권은 10월 27일 대통령 종신제를 기조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발표했는데, 이 헌법 개정안은 11월 21일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통과되었다."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으나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고, 각급 법관에 대한 임명권을 모조리 대통령에게 귀속시켜 사법부까지 행정부에 종속시켰다. 국회의원 선출은 임기 6년에 전국 73개 지역구에서 1구 2인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바뀌었다. '동반 당선' 또는 '나눠먹기식' 제도였다. 또 제6대 국회부터 채택한 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일괄 추천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국회의원 정족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3명을 일괄 선출하는 제도(유신정우회)가 도입되었다. 대통령이 마음대로 임명하는 새로운 전국구 제도였던 것이다."(230-3)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국제사회의 승인을 확대한) 김일성은 대내적으로 더욱 큰 것을 얻었다. 김일성 1인 지배체제 및 세습을 강화한 것이다." "북한도 북한식 '10월 유신'을 꿈꾸었으며 박정희의 '10월 유신'과 거의 동시에 그걸 해치웠다. 북한은 '10월 유신'이 있은 지 2개월여 후인 12월 27일, 1948년 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을 새로 만들어 1인 지배체제를 강화하였다. 새 헌법은 집단 지도체제에서 후퇴하는 것과 기존의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강화하였다. 즉, 〈헌법에 내놓고 김일성 1인의 절대적 독재체제를 보장〉한 것이다. 김일성은 그러한 체제 구축의 다음 수순으로 1973년 9월 김정일을 조선노동당의 최고 권력기관인 비서국의 비서로 격상시켰다. 1970년 발행된 『정치용어사전』은 '세습적 계승'을 '착취사회의 반동적 관행'이라고 비난했으나, 1973년 12월에 대체 출판된 『정치사전』은 이 항목을 삭제했다."(238-9)


"유신헌법안 기초에 참여한 중앙대 교수 갈봉근은 『신동아』 기고 글에서 '권력의 인격화' 이론을 전개했다. 그는 〈권력의 인격화 현상이 정치적 후진국가권에 속하는 국가군에 있어서는 발전의 첫 단계가 될 뿐만 아니라 통합과 통치의 최적 수단〉이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권력의 인격화 현상은 실은 보편적이며 정상적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은 세계 도처에서 모든 정치체제에 확대 편재하고 있다. 오히려 권력이 비인격화될 때가 비정상적인 것이다. 이번 유신헌법안의 특징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가와 민족의 번영 및 안정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이념을 구현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프랑스의 영광된 회복을 위하여 제정된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이 드골 대통령의 정치적 이념의 구현이었다는 점과 비길 수 있을 것이다.〉"(245-6)


"박정희가 생각한 새마을운동은 일종의 '민족성 개조운동'이었다. 그의 새마을 관련 담론에는 반드시 '근면·자조·협동'이 들어간다. 이는 박정희가 보기에 한국인, 특히 농민들에게 그게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된, 박정희 자신의 말을 들어보자. 〈1971년은 바로 우리가 자조와 근면과 협동의 정신을 전국의 마을마다 번지게 만든 획기적인 한 해였다. 긴 겨울철의 농한기에 아무 하는 일 없이 나태와 안일에 빠져 음주나 도박으로 소일하는 퇴폐적인 풍조를 없애기 위해, 대대적인 환경개선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렇듯 인간성 개조를 꿈꾼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공화당의 산하 운동쯤으로 만드는 걸 어찌 용납할 수 있었겠는가. 박 정권의 외무장관을 지낸 이동원도 〈이렇게 게으르고 단결심이 없어서야 어찌 일본을 이기겠소〉라는 박정희의 말이 〈소위 '새마을운동'으로 불리는 민족성 개조론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265)


"박정희는 〈충무공으로 상징되는 호국정신을 북한의 주체사상을 압도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까지 생각〉하고 이순신 숭배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극성스러운 성웅 만들기 작업에 대해 최상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순신은 욕망도 야망도 없다. 나라사랑만 있을 뿐이다. 민족반역자도 독재자도 욕하지 않는다. 일본제국이든 대한제국이든 국가라면 무조건 받들 뿐이다. 빨갱이로 집어넣고 고문을 해도 '아야' 소리도 안 낸다. 묵묵히 백의종군을 다짐할 뿐이다. 이 사람이 바로 민족반역자들이 발명한 성웅, 일명 '바보 이순신'이다. ····· 성웅은 머릿속에 '나'는 없고 '국가'만 있는 인간상이다. '나'를 잃어버린 존재다. 이런 성웅의 정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멸사봉공(滅私奉公) 정신이다. 즉 '성웅=멸사봉공 정신'이다. 멸사봉공, 박정희는 이 말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그는 1939년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충성 혈서'에도 이 구절을 빠뜨리지 않았다.〉"(273-4)


"한국노총은 1970년 1월 30일 노동조합의 정치참여를 선언하였다. 원칙적으로는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었으나, 문제는 오직 여당에만 참여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노총은 1971년 국가보위법 선포 직후 국가비상사태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섰으며, 국가비상사태에서 정권이 내건 총화단결 등과 같은 슬로건에 호응하여 모든 노동자들이 따라야 할 행동지침까지 선포하였다. 또 그 해에 노총위원장 최용수는 직능대표로서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였다." "10월 유신 선포 후에는 〈구국통일을 위한 영단을 적극 지지한다〉는 제하의 성명을 내고 산별 노조별로 계몽유세반을 편성하여 유신체제 지지를 유도하기 위한 전국 유세 활동에 들어갔다. 이런 유세 활동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국노총 사업보고에 따르면, 1971년 1천6백56건에 달했던 노사분규 발생 건수는 1972년 346건, 1973년 367건으로 감소하였다."(2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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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설계자들 -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김건우 지음 / 느티나무책방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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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환은 학병세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학병세대는 해방 후 나라의 사회적 중추 기능을 맡아온 실세로 각계에 진출하여 사회 기반을 형성했다. 무엇보다도 "학병은 일제 말기 조선의 최고 청년 지식인 집적체였다. 엄연한 대일본 제국의 지적 수준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던 집단"이었다. 학병세대의 범위는 어떻게 될까. 규모는 어느 정도이고,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가. 학병 대상이 되었던, 일제 말 대학을 다니던 연령층은 위로 1917년생부터 아래로 1923년생까지 1920년을 전후해 약 6~7년에 걸쳐 태어난 이들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1923년 12월 1일 이전에 출생한 학생들이 '학병' 모집 대상이 되었다. 그 후 출생한 학생들은 만 20세부터 '징병' 대상이 되었다. 1944년 당시 고등 교육을 받은 조선인 학생의 숫자는 약 72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당대 최고의 재원들이었다. 이 세대는 실제 남북한 건국과정에서 많은 일을 했다."(19-20)


"(신익희 내무부장을 규탄하면서) 장준하와 김준엽 등이 벌인 임시정부 난입 사건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몇 가지 의문을 품도록 만든다. 먼저, 일제 말 임시정부가 고작 쉰 명 정도 인원에도 동요하고 우왕좌왕할 만큼 이름뿐인 조직이었는지,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사와 정치사에 남아 있는 쟁쟁한 명사들이 아무 경력도 없는 젊은 청년들에게 왜 이렇게 '꼼짝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확실한 것 중 하나는, 이들이 '보통 청년'이 아니라 '학병', 즉 젊은 엘리트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이 정식 '군인' 신분이었다는 점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이 시기 광복군은 중국군 작전권 아래 있었으며, 소속과 계급으로 표현하면 '중국 육군 소위'였다. 광복군의 소속은 임시정부 예하였지만, 실제로는 장개석의 중국군 지휘 아래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혼란과 분열이 군인들이 물리력 행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매우 예민한 문제를 이들의 행동은 안고 있었다."(28-9)


"근대 서북의 두 거두,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중심이 되어 1907년에 만든 운동체 이름이 신민회(新民會)였음은 이들이 과거와 단절된 '새로움'을 얼마나 갈망했는지를 잘 말해 준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과거 유교 국가인 조선이라는 나라를 회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서북의 후예인 장준하가 훗날 1945년 8·15를 광복(光復)이 아니라 신생(新生)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족은 해방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것이지 빛을 되찾은 게 아니라는 것, 말하자면 '다시 찾을 빛'은 없었다는 것이다. 근대 서북인들이 벌인 새 문화 건설 운동의 좋은 예가 있다. 한국 현대문학을 최초로 성립시킨 문인들은 모두가 평안도 출신이다." "한국 근대문학의 대문을 열어젖힌 두 작가, 이광수와 주요한은 각각 도산의 '오른팔'과 '왼팔'에 해당했다. 이들 문인에게 '문학한다는 것'은 문화 운동의 일종이었고 나아가 사회 계몽운동과 직결되었다."(40-2)


"도산 안창호는 개화계몽기와 일제강점기에 걸쳐 서북 지식인들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조직의 중심이었다. 서북 출신의 지식인들은 안창호를 중심으로 강하게 결집했으며, 이러한 강한 결집력은 종종 다른 지식인 집단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파(경기 충청 출신)와의 갈등이다." "1920년대 이후에는 국내 우파 민족주의 지식인층에서도 기호 세력과 서북 세력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해방 후 서북 출신의 흥사단계 인맥들은, 이승만이 자유당 정권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제거되어 야당을 이루었다. 1950년대 이들은 주로 민주당 신파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안창호는 해방 전 서거했고 이광수는 전쟁 중 사라졌지만, 이 세력의 중심에는 주요한이 남아 있었다. 주요한은 해방 이후 흥사단 재건에 주력했고 정치계에 뛰어들어 1950년대 후반에는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4·19 혁명 이후 장면 내각에서는 상공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42-4)


"어떤 면에서 보면 일제 시기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근대화) 이념은 분단 후 한국의 195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현실화 기반이 마련되었다. 《사상계》 그룹이 목표하는 근대화한 국가상이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사회였다는 것은 모델이 서구 사회였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서구를 모델로 근대화로 달려가겠다는 《사상계》 지식인 집단의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 지식인의 성향에 대한 미국 학자들의 분석을 떠올리게 한다. 얼핏 상충되어 보이는 두 요소, 즉 서구 지성에 대한 매혹과 민족주의 성향이 이들에게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 사회에서 반식민주의적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적어도, 서구 사회에 대한 열망과 민족주의가 하등 모순되지 않았다. 이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민족을 위해 과거를 버리고 서구를 향해 나아간다.'"(68-9)


"1922년생 선우휘는 학병세대인데도 일제 말 학병 동원령에서 제외되었다. 이공계 및 사범계가 입대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으로 경성 사범 학생 선우휘도 그 혜택을 받았다. 그렇지만 지성사에 국한해 이야기하자면, 선우휘는 월남 학병세대의 중심에 가장 가까이 있다. 작가로서 선우휘는 1950년대 후반 형성된 지식인 사회의 최대 화두였던 '한국 사회의 근대화'를 가장 표나게 서사화한 사람이다. 1957년 제2회 동인 문학상을 수상한 「불꽃」은 단숨에 그를 문단의 총아로 만들었고, 이후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지금까지 인정된다. 동인 문학상 수상 당시 선우휘는 현역 대령이었다." "동인문학상 수상은 선우휘로 하여금 군에서 나와 직업적인 '글'의 세계로 들어가게 했다." "또한 동인문학상 수상은 《조선일보》 재입사에도 도움이 되었던 듯 하다."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선우휘는 《조선일보》 주필을 지냈고, 1980년부터 1986년 퇴임 때까지 논설 고문으로 있었다."(95-7)


선우휘는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고향 평안도쪽 사람들이라면 끝까지 돕고 보호하고자 했다. "리영희는 《조선일보》 외신부 시절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자신이 외신부장으로 있던 1960년대 중반 "이 시기 《조선일보》 국제면은 전국 신문 중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비판적인 유일한 지면이었다." 선우휘의 삶과 생각의 궤적을 논하는 이들은, 리영희의 반공법 위반 사건을 근거로 1965년 이전의 선우휘와 이후의 선우휘를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선우휘가 아주 보수적인 인물은 아니었는데 이후로 점차 변해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전말에는 중요한 포인트 하나가 있다. 선우휘가 자신의 편집국장 직을 내놓으면서까지 리영희의 석방을 위해 뛰었던 배경에는 리영희가 '평안북도 삭주' 출신이라는 사실이 있었다. 선우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지만 선우휘의 삶과 생각에서 반공주의에 버금가는, 어떤 면에서 반공을 능가하는 주요한 뿌리가 '지역주의'였다."(101)


"박정희 정권과 이승만 사이에 중요한 차이 한 가지가 대학 교수의 정치 참여다. 대학 교수가 행정부와 입법부에 들어가 정치에 참여하는 '전통'이 생긴 것이 5·16 군정과 공화당 정권부터였다." "분야 특성상 법학계 쪽이 가장 앞섰다. 한태연과 황산덕은 대학 교수 출신으로 정치에 참여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1916년생 한태연과 1917년생 황산덕은 학병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학병세대 맨 윗자리에 속하는 연배다. 한태연은 함경도, 황산덕은 평안도 출신으로 둘 다 이북이 고향이다. 마흔 즈음 관록이 붙을 무렵 《사상계》 편집위원도 함께 했다. 한태연이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던 때가 1949년부터 1961년까지였고, 황산덕은 1952년부터 '정치교수'로 파면되던 1965년까지 역시 서울대 법대 교수였으니 직장 동료로서도 십 년 가량을 함께 지냈다. 이런 공통점은 시차를 두고 두 사람 다 공화당 정권에 참여함으로써 정점을 이룬다."(105-6)


"최소한 유신 이전까지는, 즉 1960년대에는 지식인의 정치 참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하나의 논리가 있었다. '근대화 인텔리겐차론'이었다. 공화당 정권 출범 이후 현실화되어 가는 '근대화'에 맞닥뜨려 '지식인의 임무'와 관련해 비판적 지식인론과 근대화 인텔리겐차론이 대립해서 등장했다. 정권의 근대화 정책 방향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대항 지점을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 비판적 지식인론이라면, 반대로 정권에 참여하여 다양한 정책들을 입안하고 운영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고 생각했던 쪽이 근대화 인텔리겐차론이었다."(110) "《한국일보》 논설위원 임방현은 1970년 5월 「정치 변동과 엘리트」라는 글에서 지식층을 향해 좀 더 분명한 주문을 했다. 지식인들이 근대화의 기간 요원이자 지도 기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지식층과 정치 엘리트 간의 대화와 협조가 개발도상국 근대화의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그는 이후 청와대 대변인을 맡으면서 유신 정권의 이데올로그가 되었다."(113-4)


"1927년 7월, 일본 유학파 여섯 명이 모여 조그만 잡지 하나를 만들었다. 《성서조선》이라는 이름의 기독교 신앙지였다. 김교신, 함석헌, 양인성, 류석동, 정상훈, 송두용 등 한국 기독 교회사에서 《성서조선》 그룹으로 명명되는 이들 여섯 명은,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모두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들이었다."(121) "어느 일본인 형사로부터 "독립운동 하는 놈들보다 더한 최악질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성서조선》 그룹은 한국 기독교 정신주의의 가장 비타협적 지점에 서 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삶 전체를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를 철저히 신봉했던 까닭에 제도권 기독교계와 끊임없이 갈등했고, 정기 독자 300명에 불과한 규모였지만, 이들은 소위 '정예'라 할 만했다. 《성서조선》의 정기 독자는 신청한다고 해서 모두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김교신에게 편지로 구독 사유를 써 보내 허락을 받아야 했다."(125)


"김교신은 직접 몸을 움직여 노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김교신 자체가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정릉 시냇가의 돌을 주워 직접 자신의 서재 건물을 지었고, 교사 생활과 《성서조선》 편집과 별도로 밭을 경작하고 과수를 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한 해를 복역한 김교신은, 출옥 후 더는 교사 생활과 《성서조선》 발간이 불가능해지자 고향 근처인 함경도 흥남으로 가서 공장 근로자로 취업했다." "강철 같던 김교신조차 과로를 이기진 못했던 듯하다. 1945년 4월 18일, 하필 자신의 생일에 와병한 김교신은 일주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해방 불과 서너 달 전이었다. 자신이 꿈꾸던 조선을 김교신은 끝내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십대 후반 나이에 그의 학생이 되어 김교신이 사망할 때까지 따랐던 제자 한 사람이,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스승이 꿈꾸던 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매우 큰 스케일의 시도를 하게 된다. 류달영이었다."(129-30)


"해방 후 수원 모교인 서울대 농대 교수가 된 류달영은, 전쟁의 와중에 있던 1952년 피란지 대구에서 몇 년래 구상하던 책 한 권을 출간했다. 『새 역사를 위하여-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이었다." "이 책은 1961년 쿠데타 직후 군사 정부에서 만든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을 류달영이 맡는 계기로 작용했다."(136) "그러나 류달영의 구상은 끝내 좌초했다. 류달영은 운동 본부장으로서 자기 계획에 따라 국민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자 했지만 내부에서조차 국가주의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류달영의 정책을 이어가던 3대 이관구 본부장도 5·16 쿠데타 주체 세력인 육사 8기생 시도 지부장들과 알력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군정 세력이 선거를 통해 '민간' 정권으로 옷을 갈아입은 직후인 1964년 2월, 재건국민운동법이 폐기되고 운동본부도 해체되었다. 결과적으로 정권에 이용당한 모습이 되었을 때, 류달영은 격분했다."(139)


#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 : 국민 교육, 향토 개발, 생활 혁신, 사회 협동 네 분야에서 운동을 벌여 후일 새마을운동의 주요 모델이 되었다.


"무교회주의자들이 구상하는 공동체에서 '조합'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성서조선》 그룹 일원이면서 후일 풀무학교 후원회 회장을 맡아 오랫동안 도움을 주었던 장기려가,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 조합을 만든 것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조합주의의 발로였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를 표어로 장기려가 세운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이, 오늘날 세계적으로도 뒤지지 않는 한국 의료보험 제도의 모태가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로 무교회주의자들이 공동체 구상 근저에는 조합주의적인 공동체주의가 존재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대안으로 언제나 '조합'을 내세운다." "무교회주의 공동체의 이상은 〈학교이면서 교회이고, 동시에 자급자족하는 마을〉이다. 공부와 신앙과 노동의 완전한 일치를 지향하는 무교회주의 이상을 놓고 판단했을 때, 공동체 규모는 본질적으로 소형화, 소수화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157-8)


"함석헌이 자기 삶에서 절대적 존재로 모셨던 스승 류영모의 사상에는 노자가 예수만큼이나 중요한 위치에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류영모는 종교 다원주의자라 할 수 있다."(163) "함석헌의 가장 유명한 '씨알'이라는 말도 실은 류영모로부터 온 것이었다. 류영모에게서 가져왔다는 것은 동양적 사유 없이 이 용어에 대한 풀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흔히들 '씨알'을 민중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원래 이 말은 사회학적 집단인 민중과는 별 관련이 없는 개념이었다. 죽지 않는 생명으로서의 '씨'와 극대의 하늘을 의미하는 'ㅇ', 극소이자 소우주인 자아를 의미하는 'ㅏ', 활동양태로서의 'ㄹ'이 결합한 말인 씨알은 하느님(우주)의 생명이 내려와 인간의 얼이 된 존재로 해석된다. 씨알 하나에 우주가 있다는 말로 요약되는 이런 생각은 그 뿌리가 류영모에게 있었다. 류영모는 한글도 한자처럼 파자(破字)하여 해석하는 독특한 사유 습관이 있었다."(165-6)


"류영모는 '효'의 국가주의적 이념화를 극력 비판했다. 류영모에게 효와 충은 전혀 상관없는 개념이었다. 김범부에게 효란 충으로 확장되는 기본 바탕에 해당한다면, 류영모에게 부모에 대한 효는 그다음 단계에서 충으로 확장됨이 없이 곧바로 하늘로, 즉 신에 대한 경애로 상승한다. 국가는 '효'와 무관한 것이었다. 유교 윤리에 기대어 김범부와 박종홍이 국가 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면, 류영모의 국가주의 비판의 밑바탕에는 노장 사상이 있었다. 제자 함석헌이 스승의 생각을 이어 노자의 평화주의에 입각해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했다. 안병무에 의하면, 함석헌은 '국민'이란 용어를 극히 싫어했다고 한다. 함석헌은 '나라 국(國)' 자를 쓰는 경우는 대개 '도둑놈'이란 뜻이라고 했다." "박정희의 국가주의는 이선근, 김범부 같은 학자를 통해 고대사에서 신라와 화랑도를 불러냈다. 화랑도의 정신은 민족 정신을 대표하는 가장 오랜 이념이라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 만들어진 때였다."(170-1)


"월남 보수 기독교 세력이 아직 북에 있던 일제 시기, 이미 이들에 대항하는 두 지점이 형성되었다. 그중 하나가 김교신과 함석헌 등의 《성서조선》 그룹이었다. 다른 하나는 함경도와 북간도를 배경으로 캐나다 연합 교회의 지원을 받아 형성되었다. 훗날 한신 그룹으로 명명될 한 무리 기독교인들이었다." "한신(韓神)의 중심인 김재준은 함경북도 경흥 아오지에서 태어나 유년기에는 한문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 스무 살에 송창근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문했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했으며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를 연구해서 졸업 논문을 썼다. 이십대 후반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웨스턴 신학교로 가서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때 공부한 신학 사상이 1930년대 보수적인 평양 신학교와 서북 장로교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후일 소위 이단 시비로 1953년 기장의 분립을 가져왔다."(176-7)


"훗날 한신 그룹의 중심이 된 인물들이 모두 김재준의 중학교 교사 시절 제자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김재준이 일제 시기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성경 교사로 근무하던 1936~1939년 사이에 한신의 인물 기반이 형성되었다. 김재준이 캐나다 장로회 계열의 은진중학교에 부임한 1936년 여름, 강원용은 학생회장이었고 안병무도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문익환은 바로 전해인 1935년 봄 평양 숭실중으로 전학했고, 가을 학기에 윤동주(시인)도 문익환을 따라 숭실에 편입하면서 은진을 떠났을 때였다. 그렇지만 문익환은 방학 때마다 부친 문재린 목사가 목회를 하던 용정에 있었고, 동생 문동환이 아직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인연으로 이후 김재준 집에서 살면서 조선신학교에 편입해 정식 제자가 되었다." "문익환은 1960년대 후반 신구교 성서 공동 번역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 구약 파트 최고 책임자였다. 특히 그는 구약의 예언자 전승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다."(180-1)


"문익환만큼 대중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사상'으로서 한국 신학을 이야기할 때 안병무를 빼놓고 가기 어렵다. 한신의 인물들은 대개 민중신학적 지향을 가졌지만, 세계 신학계에 알려진 '학문'으로서의 민중신학은 안병무가 수립한 것이다." "신학도 '상황'이 던지는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어야 하며, 한국 사회 상황에서 요청되는 '한국 신학'이란 결국 민중이 처한 고난과 그 고난을 이겨내는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민중신학'이어야 한다고 안병무는 생각했다. 억눌린 자를 중심에 놓는 '민중신학'은, 안병무의 서울대 사회학과 후배인 한완상의 '민중 사회학'에도 결정적 영향을 준다. 훗날 안병무는 민중신학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된 계기를,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에 두었다. 전태일로 인해 살아 있는 민중을 보았고, 이 민중 '사건'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182-4)


"강원용은 사회 문제에 대한 기독교회의 오랜 입장, 즉 구호와 자선으로 접근하는 것이 갖는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면서, 문제를 '구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선언했다." "그가 1962년 설립한 크리스찬아카데미의 '중간 집단 교육'은 일종의 '활동가 양성' 교육이었다. 중간 집단 교육의 목표는 사회 각 부문의 중간급 지도자와 운동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분과'의 경우 노조 미조직 현장에서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동자 소그룹을 조직할 수 있는 인물을 키웠다. 이미 노조가 있는 경우에는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조로 발전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교육 내용은 한마디로 의식화 프로그램"이었다. 이 교육이 한국 사회 운동사에 끼친 의미는 대단하다. 김세균, 신인령, 김근태, 천영세, 이우재, 한명숙, 윤후정 등 1970년대 이후 진보 진영의 '지도급' 인사들 거의가 중간 집단 교육 프로그램의 교육 담당자이거나 교육생 출신이었다."(190-2)


"민청학련 사건으로 비상 군법회의 출두가 예정된 1974년 7월 23일, 지학순은 명동성당 옆 성모병원 현관에 모인 국내외 기자들 앞에서 「양심 선언」을 낭독했다. 이 「양심 선언」은 내용에서나 그 결과에서나 큰 의미가 있다. 「양심 선언」 1항에서 유신헌법을 적시하면서 이 법이 '자연법'에 위배되므로 무효라고 했고, 3항에서는 긴급 조치야말로 가장 참혹한 '자연법 유린'의 예라고 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양심선언이었다. 선언의 마지막 부분은 왜 이 선언의 제목이 「양심 선언」인지를 이해하게 한다. 〈이상 기록한 것이 나의 기본적 주장이며 생각이다. 이 외에는 어떠한 말이 나오더라도 나의 진정한 뜻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주기 바란다.〉 지학순의 양심선언은 이후 구속을 앞둔 민주 인사들이 중앙정보부의 고문 조작에 대항하는 수단이 되었고 '양심선언'이라는 말도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15-6)


"1950년대 한국 민족주의란 아이러니하게도 서구(미국)를 모델로 하는 민족주의였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버리자는, 1950년대 《사상계》 등으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의 시대정신은 서구 지향적인 것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갑자기 변했다. 저널리즘과 대학 사회에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1963년, 한국 문화에 대한 이어령의 에세이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수십만 부씩 팔려 나갔다. 대학에서는 '한국 사상사' 같은 과목이 인기를 끌었고, 1960년대 중반이 되면 한국학과 한국 문화가 학계와 문화계 전반의 화두가 되었다. 사회 전반에서 민족 담론이 활성화되고 민족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각종 움직임이 있었다. 대학 문화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판소리, 사물놀이 동아리들이 처음 제 모습을 보인 것도 이때부터였다. 국학계의 내재적 발전론도 결국 민족주의적 맥락에서 등장한 논리였다."(237-8)


# 내재적 발전론 : 한국사의 발전 동력은 자체 내에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 그 맹아가 움트면서 한국사의 '자생적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이론


"조지훈에게 한국의 전통과 고전은 일종의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해방 후 우익 논객으로 좌익과 논전한 것도 좌익들이 민족 문화와 전통을 부정한다고 보았던 때문이다. 조지훈이 졸업한 혜화전문(동국대 전신)이 일제 말 불교계의 유일한 고등 교육기관이었다는 점, 해방 직후 강사를 맡았던 명륜전문(성균관대 전신)이 유학 고등 교육기관이라는 점, 후일 고려대에서 민족문화 연구 기관을 설립한 점 등을 생각해 보면, 전통의 것이라면 모두 섭렵하려는 의욕을 그는 품었던 듯하다." "조지훈은 격류하는 현대사를 민족 주체의 위기로 보았고 그 위기를 돌파하려면 민족 주체 의식 확립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민족 주체 의식 확립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먼저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이에 따라 전통 탐구가 이어졌다. 말하자면 조지훈은, 민족 문화의 새로운 창조는 전통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전형적 전통주의자이자 문화적 보수주의자였다."(248-9)


"조지훈은 학생들을 지지했고 혁명을 원했고 정권을 비판했지만, 그 기준은 언제나 '의(義)'의 문제, 올바른 '민족정신'의 문제였다. 그런데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의'에 있다면, 그 '옳고 그름'의 내용을 누가 어떤 각도에서 설정하느냐에 따라 억압이 발생할 수 있다. 조지훈은 장면 정부에서 대학생들이 보인 생각과 행동들을 '방종과 무질서'로 이해했다. 5·16 쿠데타에 대해 조지훈은 다음처럼 말했다. "이번 혁명은 우리에게 자율적으로 방종에 흘렀던 자유를 당분간 제한해야 한다는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 김수영은 조지훈 식의 논리에 숨은 문제를 통찰하고 있었다. 김수영에게 자유의 '제한'이란 자유의 '부재'를 의미했다. 김수영에게는, 자유는 사랑과 동의어였고 사랑이 없다면 진보도 없었다. 조지훈 대 김수영, 이 구도는 현대 한국의 정신사에서 보수 대 전위, 전통 대 현대의 원형을 보여 준다. 그런 의미에서 '정통' 보수주의자 조지훈과 진보적 자유주의자 김수영은 다른 모든 지성을 대표한다."(256-7)


"후일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은 이 책의 전체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평안도 출신의 1920년생 김준엽은 일제 말 조선인 학병세대로 일본군을 최초로 탈출해 장준하를 이끌어 충칭 임시정부로 인도했고, 해방 직전 광복군 장교가 돼 이범석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전쟁을 치르고 국가를 재건하던 1950년대 후반 《사상계》 그룹의 핵심이 돼 4·19 혁명의 격동기에 《사상계》 주간으로 여론을 주도했다. 요컨대 김준엽은 한국의 '정통' 우익을 대표한다."(259)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시대가 오고 9월에 헌법 개정이 이루어질 때, 김준엽은 개정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장을 명기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제헌헌법에 있던 내용을 제3공화국 공화당 정권의 개헌에서 빼버린 것을 회복한 것이다. 김준엽이 보았을 때,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에 있었다. '정통 우익'다운 역사 감각이었다."(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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