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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설계자들 - 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
김건우 지음 / 느티나무책방 / 2017년 3월
평점 :
"안경환은 학병세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학병세대는 해방 후 나라의 사회적 중추 기능을 맡아온 실세로 각계에 진출하여 사회 기반을 형성했다. 무엇보다도 "학병은 일제 말기 조선의 최고 청년 지식인 집적체였다. 엄연한 대일본 제국의 지적 수준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던 집단"이었다. 학병세대의 범위는 어떻게 될까. 규모는 어느 정도이고,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가. 학병 대상이 되었던, 일제 말 대학을 다니던 연령층은 위로 1917년생부터 아래로 1923년생까지 1920년을 전후해 약 6~7년에 걸쳐 태어난 이들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1923년 12월 1일 이전에 출생한 학생들이 '학병' 모집 대상이 되었다. 그 후 출생한 학생들은 만 20세부터 '징병' 대상이 되었다. 1944년 당시 고등 교육을 받은 조선인 학생의 숫자는 약 72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당대 최고의 재원들이었다. 이 세대는 실제 남북한 건국과정에서 많은 일을 했다."(19-20)
"(신익희 내무부장을 규탄하면서) 장준하와 김준엽 등이 벌인 임시정부 난입 사건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몇 가지 의문을 품도록 만든다. 먼저, 일제 말 임시정부가 고작 쉰 명 정도 인원에도 동요하고 우왕좌왕할 만큼 이름뿐인 조직이었는지,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사와 정치사에 남아 있는 쟁쟁한 명사들이 아무 경력도 없는 젊은 청년들에게 왜 이렇게 '꼼짝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다. 확실한 것 중 하나는, 이들이 '보통 청년'이 아니라 '학병', 즉 젊은 엘리트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들이 정식 '군인' 신분이었다는 점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이 시기 광복군은 중국군 작전권 아래 있었으며, 소속과 계급으로 표현하면 '중국 육군 소위'였다. 광복군의 소속은 임시정부 예하였지만, 실제로는 장개석의 중국군 지휘 아래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혼란과 분열이 군인들이 물리력 행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매우 예민한 문제를 이들의 행동은 안고 있었다."(28-9)
"근대 서북의 두 거두,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이 중심이 되어 1907년에 만든 운동체 이름이 신민회(新民會)였음은 이들이 과거와 단절된 '새로움'을 얼마나 갈망했는지를 잘 말해 준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과거 유교 국가인 조선이라는 나라를 회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서북의 후예인 장준하가 훗날 1945년 8·15를 광복(光復)이 아니라 신생(新生)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족은 해방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것이지 빛을 되찾은 게 아니라는 것, 말하자면 '다시 찾을 빛'은 없었다는 것이다. 근대 서북인들이 벌인 새 문화 건설 운동의 좋은 예가 있다. 한국 현대문학을 최초로 성립시킨 문인들은 모두가 평안도 출신이다." "한국 근대문학의 대문을 열어젖힌 두 작가, 이광수와 주요한은 각각 도산의 '오른팔'과 '왼팔'에 해당했다. 이들 문인에게 '문학한다는 것'은 문화 운동의 일종이었고 나아가 사회 계몽운동과 직결되었다."(40-2)
"도산 안창호는 개화계몽기와 일제강점기에 걸쳐 서북 지식인들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조직의 중심이었다. 서북 출신의 지식인들은 안창호를 중심으로 강하게 결집했으며, 이러한 강한 결집력은 종종 다른 지식인 집단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파(경기 충청 출신)와의 갈등이다." "1920년대 이후에는 국내 우파 민족주의 지식인층에서도 기호 세력과 서북 세력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해방 후 서북 출신의 흥사단계 인맥들은, 이승만이 자유당 정권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제거되어 야당을 이루었다. 1950년대 이들은 주로 민주당 신파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안창호는 해방 전 서거했고 이광수는 전쟁 중 사라졌지만, 이 세력의 중심에는 주요한이 남아 있었다. 주요한은 해방 이후 흥사단 재건에 주력했고 정치계에 뛰어들어 1950년대 후반에는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4·19 혁명 이후 장면 내각에서는 상공부 장관을 맡기도 했다."(42-4)
"어떤 면에서 보면 일제 시기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근대화) 이념은 분단 후 한국의 195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현실화 기반이 마련되었다. 《사상계》 그룹이 목표하는 근대화한 국가상이 정치적으로 민주화되고, 경제적으로 발전된 사회였다는 것은 모델이 서구 사회였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을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서구를 모델로 근대화로 달려가겠다는 《사상계》 지식인 집단의 생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 지식인의 성향에 대한 미국 학자들의 분석을 떠올리게 한다. 얼핏 상충되어 보이는 두 요소, 즉 서구 지성에 대한 매혹과 민족주의 성향이 이들에게는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 사회에서 반식민주의적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는 적어도, 서구 사회에 대한 열망과 민족주의가 하등 모순되지 않았다. 이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민족을 위해 과거를 버리고 서구를 향해 나아간다.'"(68-9)
"1922년생 선우휘는 학병세대인데도 일제 말 학병 동원령에서 제외되었다. 이공계 및 사범계가 입대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으로 경성 사범 학생 선우휘도 그 혜택을 받았다. 그렇지만 지성사에 국한해 이야기하자면, 선우휘는 월남 학병세대의 중심에 가장 가까이 있다. 작가로서 선우휘는 1950년대 후반 형성된 지식인 사회의 최대 화두였던 '한국 사회의 근대화'를 가장 표나게 서사화한 사람이다. 1957년 제2회 동인 문학상을 수상한 「불꽃」은 단숨에 그를 문단의 총아로 만들었고, 이후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지금까지 인정된다. 동인 문학상 수상 당시 선우휘는 현역 대령이었다." "동인문학상 수상은 선우휘로 하여금 군에서 나와 직업적인 '글'의 세계로 들어가게 했다." "또한 동인문학상 수상은 《조선일보》 재입사에도 도움이 되었던 듯 하다." "1971년부터 1980년까지 선우휘는 《조선일보》 주필을 지냈고, 1980년부터 1986년 퇴임 때까지 논설 고문으로 있었다."(95-7)
선우휘는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고향 평안도쪽 사람들이라면 끝까지 돕고 보호하고자 했다. "리영희는 《조선일보》 외신부 시절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자신이 외신부장으로 있던 1960년대 중반 "이 시기 《조선일보》 국제면은 전국 신문 중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 파병에 비판적인 유일한 지면이었다." 선우휘의 삶과 생각의 궤적을 논하는 이들은, 리영희의 반공법 위반 사건을 근거로 1965년 이전의 선우휘와 이후의 선우휘를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선우휘가 아주 보수적인 인물은 아니었는데 이후로 점차 변해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전말에는 중요한 포인트 하나가 있다. 선우휘가 자신의 편집국장 직을 내놓으면서까지 리영희의 석방을 위해 뛰었던 배경에는 리영희가 '평안북도 삭주' 출신이라는 사실이 있었다. 선우휘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지만 선우휘의 삶과 생각에서 반공주의에 버금가는, 어떤 면에서 반공을 능가하는 주요한 뿌리가 '지역주의'였다."(101)
"박정희 정권과 이승만 사이에 중요한 차이 한 가지가 대학 교수의 정치 참여다. 대학 교수가 행정부와 입법부에 들어가 정치에 참여하는 '전통'이 생긴 것이 5·16 군정과 공화당 정권부터였다." "분야 특성상 법학계 쪽이 가장 앞섰다. 한태연과 황산덕은 대학 교수 출신으로 정치에 참여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다. 1916년생 한태연과 1917년생 황산덕은 학병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학병세대 맨 윗자리에 속하는 연배다. 한태연은 함경도, 황산덕은 평안도 출신으로 둘 다 이북이 고향이다. 마흔 즈음 관록이 붙을 무렵 《사상계》 편집위원도 함께 했다. 한태연이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하던 때가 1949년부터 1961년까지였고, 황산덕은 1952년부터 '정치교수'로 파면되던 1965년까지 역시 서울대 법대 교수였으니 직장 동료로서도 십 년 가량을 함께 지냈다. 이런 공통점은 시차를 두고 두 사람 다 공화당 정권에 참여함으로써 정점을 이룬다."(105-6)
"최소한 유신 이전까지는, 즉 1960년대에는 지식인의 정치 참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하나의 논리가 있었다. '근대화 인텔리겐차론'이었다. 공화당 정권 출범 이후 현실화되어 가는 '근대화'에 맞닥뜨려 '지식인의 임무'와 관련해 비판적 지식인론과 근대화 인텔리겐차론이 대립해서 등장했다. 정권의 근대화 정책 방향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대항 지점을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 비판적 지식인론이라면, 반대로 정권에 참여하여 다양한 정책들을 입안하고 운영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고 생각했던 쪽이 근대화 인텔리겐차론이었다."(110) "《한국일보》 논설위원 임방현은 1970년 5월 「정치 변동과 엘리트」라는 글에서 지식층을 향해 좀 더 분명한 주문을 했다. 지식인들이 근대화의 기간 요원이자 지도 기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지식층과 정치 엘리트 간의 대화와 협조가 개발도상국 근대화의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그는 이후 청와대 대변인을 맡으면서 유신 정권의 이데올로그가 되었다."(113-4)
"1927년 7월, 일본 유학파 여섯 명이 모여 조그만 잡지 하나를 만들었다. 《성서조선》이라는 이름의 기독교 신앙지였다. 김교신, 함석헌, 양인성, 류석동, 정상훈, 송두용 등 한국 기독 교회사에서 《성서조선》 그룹으로 명명되는 이들 여섯 명은,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모두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들이었다."(121) "어느 일본인 형사로부터 "독립운동 하는 놈들보다 더한 최악질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성서조선》 그룹은 한국 기독교 정신주의의 가장 비타협적 지점에 서 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삶 전체를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를 철저히 신봉했던 까닭에 제도권 기독교계와 끊임없이 갈등했고, 정기 독자 300명에 불과한 규모였지만, 이들은 소위 '정예'라 할 만했다. 《성서조선》의 정기 독자는 신청한다고 해서 모두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김교신에게 편지로 구독 사유를 써 보내 허락을 받아야 했다."(125)
"김교신은 직접 몸을 움직여 노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김교신 자체가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정릉 시냇가의 돌을 주워 직접 자신의 서재 건물을 지었고, 교사 생활과 《성서조선》 편집과 별도로 밭을 경작하고 과수를 했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한 해를 복역한 김교신은, 출옥 후 더는 교사 생활과 《성서조선》 발간이 불가능해지자 고향 근처인 함경도 흥남으로 가서 공장 근로자로 취업했다." "강철 같던 김교신조차 과로를 이기진 못했던 듯하다. 1945년 4월 18일, 하필 자신의 생일에 와병한 김교신은 일주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해방 불과 서너 달 전이었다. 자신이 꿈꾸던 조선을 김교신은 끝내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십대 후반 나이에 그의 학생이 되어 김교신이 사망할 때까지 따랐던 제자 한 사람이,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스승이 꿈꾸던 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매우 큰 스케일의 시도를 하게 된다. 류달영이었다."(129-30)
"해방 후 수원 모교인 서울대 농대 교수가 된 류달영은, 전쟁의 와중에 있던 1952년 피란지 대구에서 몇 년래 구상하던 책 한 권을 출간했다. 『새 역사를 위하여-덴마크의 교육과 협동조합』이었다." "이 책은 1961년 쿠데타 직후 군사 정부에서 만든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을 류달영이 맡는 계기로 작용했다."(136) "그러나 류달영의 구상은 끝내 좌초했다. 류달영은 운동 본부장으로서 자기 계획에 따라 국민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자 했지만 내부에서조차 국가주의자들과 갈등이 있었다. 류달영의 정책을 이어가던 3대 이관구 본부장도 5·16 쿠데타 주체 세력인 육사 8기생 시도 지부장들과 알력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군정 세력이 선거를 통해 '민간' 정권으로 옷을 갈아입은 직후인 1964년 2월, 재건국민운동법이 폐기되고 운동본부도 해체되었다. 결과적으로 정권에 이용당한 모습이 되었을 때, 류달영은 격분했다."(139)
#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 : 국민 교육, 향토 개발, 생활 혁신, 사회 협동 네 분야에서 운동을 벌여 후일 새마을운동의 주요 모델이 되었다.
"무교회주의자들이 구상하는 공동체에서 '조합'은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성서조선》 그룹 일원이면서 후일 풀무학교 후원회 회장을 맡아 오랫동안 도움을 주었던 장기려가, 1968년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 조합을 만든 것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조합주의의 발로였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를 표어로 장기려가 세운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이, 오늘날 세계적으로도 뒤지지 않는 한국 의료보험 제도의 모태가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로 무교회주의자들이 공동체 구상 근저에는 조합주의적인 공동체주의가 존재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대안으로 언제나 '조합'을 내세운다." "무교회주의 공동체의 이상은 〈학교이면서 교회이고, 동시에 자급자족하는 마을〉이다. 공부와 신앙과 노동의 완전한 일치를 지향하는 무교회주의 이상을 놓고 판단했을 때, 공동체 규모는 본질적으로 소형화, 소수화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157-8)
"함석헌이 자기 삶에서 절대적 존재로 모셨던 스승 류영모의 사상에는 노자가 예수만큼이나 중요한 위치에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류영모는 종교 다원주의자라 할 수 있다."(163) "함석헌의 가장 유명한 '씨알'이라는 말도 실은 류영모로부터 온 것이었다. 류영모에게서 가져왔다는 것은 동양적 사유 없이 이 용어에 대한 풀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흔히들 '씨알'을 민중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원래 이 말은 사회학적 집단인 민중과는 별 관련이 없는 개념이었다. 죽지 않는 생명으로서의 '씨'와 극대의 하늘을 의미하는 'ㅇ', 극소이자 소우주인 자아를 의미하는 'ㅏ', 활동양태로서의 'ㄹ'이 결합한 말인 씨알은 하느님(우주)의 생명이 내려와 인간의 얼이 된 존재로 해석된다. 씨알 하나에 우주가 있다는 말로 요약되는 이런 생각은 그 뿌리가 류영모에게 있었다. 류영모는 한글도 한자처럼 파자(破字)하여 해석하는 독특한 사유 습관이 있었다."(165-6)
"류영모는 '효'의 국가주의적 이념화를 극력 비판했다. 류영모에게 효와 충은 전혀 상관없는 개념이었다. 김범부에게 효란 충으로 확장되는 기본 바탕에 해당한다면, 류영모에게 부모에 대한 효는 그다음 단계에서 충으로 확장됨이 없이 곧바로 하늘로, 즉 신에 대한 경애로 상승한다. 국가는 '효'와 무관한 것이었다. 유교 윤리에 기대어 김범부와 박종홍이 국가 철학을 확립하고자 했다면, 류영모의 국가주의 비판의 밑바탕에는 노장 사상이 있었다. 제자 함석헌이 스승의 생각을 이어 노자의 평화주의에 입각해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했다. 안병무에 의하면, 함석헌은 '국민'이란 용어를 극히 싫어했다고 한다. 함석헌은 '나라 국(國)' 자를 쓰는 경우는 대개 '도둑놈'이란 뜻이라고 했다." "박정희의 국가주의는 이선근, 김범부 같은 학자를 통해 고대사에서 신라와 화랑도를 불러냈다. 화랑도의 정신은 민족 정신을 대표하는 가장 오랜 이념이라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이 만들어진 때였다."(170-1)
"월남 보수 기독교 세력이 아직 북에 있던 일제 시기, 이미 이들에 대항하는 두 지점이 형성되었다. 그중 하나가 김교신과 함석헌 등의 《성서조선》 그룹이었다. 다른 하나는 함경도와 북간도를 배경으로 캐나다 연합 교회의 지원을 받아 형성되었다. 훗날 한신 그룹으로 명명될 한 무리 기독교인들이었다." "한신(韓神)의 중심인 김재준은 함경북도 경흥 아오지에서 태어나 유년기에는 한문 교육을 받았으며 나이 스무 살에 송창근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문했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했으며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를 연구해서 졸업 논문을 썼다. 이십대 후반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웨스턴 신학교로 가서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때 공부한 신학 사상이 1930년대 보수적인 평양 신학교와 서북 장로교회로부터 비판을 받고, 후일 소위 이단 시비로 1953년 기장의 분립을 가져왔다."(176-7)
"훗날 한신 그룹의 중심이 된 인물들이 모두 김재준의 중학교 교사 시절 제자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김재준이 일제 시기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성경 교사로 근무하던 1936~1939년 사이에 한신의 인물 기반이 형성되었다. 김재준이 캐나다 장로회 계열의 은진중학교에 부임한 1936년 여름, 강원용은 학생회장이었고 안병무도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문익환은 바로 전해인 1935년 봄 평양 숭실중으로 전학했고, 가을 학기에 윤동주(시인)도 문익환을 따라 숭실에 편입하면서 은진을 떠났을 때였다. 그렇지만 문익환은 방학 때마다 부친 문재린 목사가 목회를 하던 용정에 있었고, 동생 문동환이 아직 은진중학교에 다니던 인연으로 이후 김재준 집에서 살면서 조선신학교에 편입해 정식 제자가 되었다." "문익환은 1960년대 후반 신구교 성서 공동 번역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 구약 파트 최고 책임자였다. 특히 그는 구약의 예언자 전승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다."(180-1)
"문익환만큼 대중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사상'으로서 한국 신학을 이야기할 때 안병무를 빼놓고 가기 어렵다. 한신의 인물들은 대개 민중신학적 지향을 가졌지만, 세계 신학계에 알려진 '학문'으로서의 민중신학은 안병무가 수립한 것이다." "신학도 '상황'이 던지는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어야 하며, 한국 사회 상황에서 요청되는 '한국 신학'이란 결국 민중이 처한 고난과 그 고난을 이겨내는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민중신학'이어야 한다고 안병무는 생각했다. 억눌린 자를 중심에 놓는 '민중신학'은, 안병무의 서울대 사회학과 후배인 한완상의 '민중 사회학'에도 결정적 영향을 준다. 훗날 안병무는 민중신학이 자기 삶의 주체가 된 계기를,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에 두었다. 전태일로 인해 살아 있는 민중을 보았고, 이 민중 '사건'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이다."(182-4)
"강원용은 사회 문제에 대한 기독교회의 오랜 입장, 즉 구호와 자선으로 접근하는 것이 갖는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면서, 문제를 '구조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선언했다." "그가 1962년 설립한 크리스찬아카데미의 '중간 집단 교육'은 일종의 '활동가 양성' 교육이었다. 중간 집단 교육의 목표는 사회 각 부문의 중간급 지도자와 운동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분과'의 경우 노조 미조직 현장에서 노조를 결성하거나 노동자 소그룹을 조직할 수 있는 인물을 키웠다. 이미 노조가 있는 경우에는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조로 발전하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교육 내용은 한마디로 의식화 프로그램"이었다. 이 교육이 한국 사회 운동사에 끼친 의미는 대단하다. 김세균, 신인령, 김근태, 천영세, 이우재, 한명숙, 윤후정 등 1970년대 이후 진보 진영의 '지도급' 인사들 거의가 중간 집단 교육 프로그램의 교육 담당자이거나 교육생 출신이었다."(190-2)
"민청학련 사건으로 비상 군법회의 출두가 예정된 1974년 7월 23일, 지학순은 명동성당 옆 성모병원 현관에 모인 국내외 기자들 앞에서 「양심 선언」을 낭독했다. 이 「양심 선언」은 내용에서나 그 결과에서나 큰 의미가 있다. 「양심 선언」 1항에서 유신헌법을 적시하면서 이 법이 '자연법'에 위배되므로 무효라고 했고, 3항에서는 긴급 조치야말로 가장 참혹한 '자연법 유린'의 예라고 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양심선언이었다. 선언의 마지막 부분은 왜 이 선언의 제목이 「양심 선언」인지를 이해하게 한다. 〈이상 기록한 것이 나의 기본적 주장이며 생각이다. 이 외에는 어떠한 말이 나오더라도 나의 진정한 뜻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타의에 의한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주기 바란다.〉 지학순의 양심선언은 이후 구속을 앞둔 민주 인사들이 중앙정보부의 고문 조작에 대항하는 수단이 되었고 '양심선언'이라는 말도 일반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215-6)
"1950년대 한국 민족주의란 아이러니하게도 서구(미국)를 모델로 하는 민족주의였다. 민족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버리자는, 1950년대 《사상계》 등으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의 시대정신은 서구 지향적인 것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분위기는 갑자기 변했다. 저널리즘과 대학 사회에서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1963년, 한국 문화에 대한 이어령의 에세이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가 수십만 부씩 팔려 나갔다. 대학에서는 '한국 사상사' 같은 과목이 인기를 끌었고, 1960년대 중반이 되면 한국학과 한국 문화가 학계와 문화계 전반의 화두가 되었다. 사회 전반에서 민족 담론이 활성화되고 민족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각종 움직임이 있었다. 대학 문화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판소리, 사물놀이 동아리들이 처음 제 모습을 보인 것도 이때부터였다. 국학계의 내재적 발전론도 결국 민족주의적 맥락에서 등장한 논리였다."(237-8)
# 내재적 발전론 : 한국사의 발전 동력은 자체 내에 있었으며 조선 후기에 그 맹아가 움트면서 한국사의 '자생적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이론
"조지훈에게 한국의 전통과 고전은 일종의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해방 후 우익 논객으로 좌익과 논전한 것도 좌익들이 민족 문화와 전통을 부정한다고 보았던 때문이다. 조지훈이 졸업한 혜화전문(동국대 전신)이 일제 말 불교계의 유일한 고등 교육기관이었다는 점, 해방 직후 강사를 맡았던 명륜전문(성균관대 전신)이 유학 고등 교육기관이라는 점, 후일 고려대에서 민족문화 연구 기관을 설립한 점 등을 생각해 보면, 전통의 것이라면 모두 섭렵하려는 의욕을 그는 품었던 듯하다." "조지훈은 격류하는 현대사를 민족 주체의 위기로 보았고 그 위기를 돌파하려면 민족 주체 의식 확립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민족 주체 의식 확립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먼저 스스로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이에 따라 전통 탐구가 이어졌다. 말하자면 조지훈은, 민족 문화의 새로운 창조는 전통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전형적 전통주의자이자 문화적 보수주의자였다."(248-9)
"조지훈은 학생들을 지지했고 혁명을 원했고 정권을 비판했지만, 그 기준은 언제나 '의(義)'의 문제, 올바른 '민족정신'의 문제였다. 그런데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이 '의'에 있다면, 그 '옳고 그름'의 내용을 누가 어떤 각도에서 설정하느냐에 따라 억압이 발생할 수 있다. 조지훈은 장면 정부에서 대학생들이 보인 생각과 행동들을 '방종과 무질서'로 이해했다. 5·16 쿠데타에 대해 조지훈은 다음처럼 말했다. "이번 혁명은 우리에게 자율적으로 방종에 흘렀던 자유를 당분간 제한해야 한다는 자각을 촉구하고 있다." 김수영은 조지훈 식의 논리에 숨은 문제를 통찰하고 있었다. 김수영에게 자유의 '제한'이란 자유의 '부재'를 의미했다. 김수영에게는, 자유는 사랑과 동의어였고 사랑이 없다면 진보도 없었다. 조지훈 대 김수영, 이 구도는 현대 한국의 정신사에서 보수 대 전위, 전통 대 현대의 원형을 보여 준다. 그런 의미에서 '정통' 보수주의자 조지훈과 진보적 자유주의자 김수영은 다른 모든 지성을 대표한다."(256-7)
"후일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은 이 책의 전체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평안도 출신의 1920년생 김준엽은 일제 말 조선인 학병세대로 일본군을 최초로 탈출해 장준하를 이끌어 충칭 임시정부로 인도했고, 해방 직전 광복군 장교가 돼 이범석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전쟁을 치르고 국가를 재건하던 1950년대 후반 《사상계》 그룹의 핵심이 돼 4·19 혁명의 격동기에 《사상계》 주간으로 여론을 주도했다. 요컨대 김준엽은 한국의 '정통' 우익을 대표한다."(259)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시대가 오고 9월에 헌법 개정이 이루어질 때, 김준엽은 개정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장을 명기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제헌헌법에 있던 내용을 제3공화국 공화당 정권의 개헌에서 빼버린 것을 회복한 것이다. 김준엽이 보았을 때,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의 법통에 있었다. '정통 우익'다운 역사 감각이었다."(26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