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된 정신 - 정치적 반동에 관하여
마크 릴라 지음,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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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반동反動, reaction이란 무엇인가?" "혁명의 발생과 활력 그리고 소진에 관한 수많은 이론들과 달리 반동에 관한 한 그런 이론은 없고, 그저 반동이란 비록 사악한 동기까지는 몰라도 어쨌든 무지와 비타협성에 뿌리를 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기도취적인 확신만 있을 뿐이다. 이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두 세기 동안 세계 전역의 정치 운동에 영감을 불어넣었던 혁명의 정신은 자취를 감추었을지언정, 오히려 혁명에 맞서 생겨난 반동의 정신은 살아남아서 중동에서부터 중앙아메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매우 강력한 역사적 힘을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우리의 호기심을 유발해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 대신 우리는 일종의 우월감에 젖은 분노를 표출하다가 그나마도 그냥 접어버리고 만다. 반동주의자들은 훌륭한 지적 탐구의 변두리로 내몰려 있는 마지막 남은 '타자他者'다.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8-9)


"반동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반동주의자들 역시 혁명가들 못지않게 나름대로 급진적이며 역사적 상상의 산물들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다. 구원의 새 사회 질서와 회춘하는 인간을 기대하는 새천년의 꿈이 혁명가들을 고취시킨다. 반면에 반동주의자들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새로운 암흑시대에 돌입하고 있다는 묵시록적 공포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 같은 반反혁명 사상가들에게 1789년은 영광스러운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그 여정의 종말을 의미했다. 가톨릭 유럽이라고 하는 그 견고한 문명이 순식간에 거대한 난파선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드 메스트르와 그의 수많은 후예는 일종의 공포 이야기를 늘어놓는 달변가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에 걸친 문화와 지성의 발전이 어떻게 계몽주의라는 정점에 도달했고 그것이 구체제를 대체 어떻게 갉아먹었기에 그 체제는 도전을 받자마자 산산조각 나버렸는지 흔한 신파조로 늘어놓았다."(11-2)


"반동주의자의 신앙 고백은 억지 인과 관계로 점철되어 있다." "반동의 정신은 난파된 정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늘 원래 모습 그대로 흐르는 시간의 강물을 보지만, 반동주의자들은 천국의 파편 더미가 눈앞에서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본다. 반동주의자는 시간의 망명자다. 혁명가의 눈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찬란한 미래가 보이며 그 미래에 감전된다. 지금 시대의 거짓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온갖 광채를 발하는 과거만을 바라보는 반동주의자 역시 그런 과거에 감전된다. 반동주의자는 자기가 적수보다 더 강력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자기는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의 예언자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의 수호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반동 문학에 면면히 흐르는 그 기이하게도 신명 나는 절망감, 그 선명한 사명감을 설명해준다." "반동주의자가 전통적 인간상이 아닌, 확연히 현대적인 인간상으로 비치는 이유는 그가 가진 노스탤지어의 호전성 때문이다."(12-3)


1부 사상가들


"19세기 내내 헤겔은 옳든 그르든 세계 역사의 합리적 전개 과정을 발견한 인물로 이해되었다. 그 과정이란 근대 관료주의 국가, 부르주아적인 시민 사회, 프로테스탄트적인 시민 종교, 자본주의 경제, 기술의 진보, 그리고 헤겔 자신의 철학에서 그 정점에 이르게 될 터였다." "이런 주장에 맞서 역사(철학)으로부터 사유의 독립성을 되찾고자 희망했던 일부 반反헤겔주의자들은 칸트나 데카르트 같은 이전 철학자들에게로 회귀하라고 장려했다. 다른 이들은 더 주관적 행로를 택했다. 니체나, 세기말에 때마침 독일어로 번역되고 있던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역설들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헤겔의 역사의식이 전체 문화를 상대주의의 위기로 이끌었다는 느낌이 점점 자라나는 가운데 이러한 전환들은 뒤이어 에드문트 후설과 청년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 저술들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 "철학의 오류는 오로지 인간을 일상의 경험으로 되돌려 보내줄 새로운 종류의 치료적 사유를 통해서만 교정될 수 있을 터였다."(32-4)


"로젠츠바이크가 '20세기적 의미에서 종교를 지키기 위한 전투'를 요청한 것은 헤겔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물론 더 근거리의 목표물은 19세기 내내 독일의 종교적 사유를 지배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여러 학파였다. 다비드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같은 인물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신학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교리들을 근대적 사유와 타협시키려는 시도에서 출발했고, 이런 노력에서 헤겔은 유용한 동맹군으로 입증되었다. 헤겔은 종교가 단지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는 프랑스 계몽주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았다. 또한 근대적인 자연 정복이 종교를 소멸시킬 것이라고도 믿지 않았다. 그는 프로테스탄트주의와 근대 국가가 근본적으로 사실상 조화를 이루었으며 역사가 절정에 이르더라도 종교는 계속해서 도덕과 시민 교육을 통해 개인을 국가와 화해시키는 일을 도우면서 준準관료주의적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34-5)


19세기가 양산한, 스스로에게나 유대주의에게나 어떤 위험도 없는, 일체의 수식어가 붙지 않은 '유대인'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귀환이라는 생각은 "역사에 반대하고 종교를 옹호하며 두 전선에서 싸우는 로젠츠바이크의 전투를 연결하는 고리다. 헤겔의 역사철학에서 절정에 도달한 근대 철학은 인간을 삶에서 떼어놓았고 자신이 가진 대부분의 것들로부터 소외시켰다. 기독교이건 유대교이건 근대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을 신에게서 소외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신의 명령은 훌륭한 시민 정신과 부르주아적 예의범절 수준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만약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신에게 귀환하고자 한다면, 만약 다시 완전하게 사는 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모종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시간 속에 틀어박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으로부터 탈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 치료법이 로젠츠바이크의 저술들이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37)


"《정치 종교들Die politischen Religionen》에서 그 싹을 전부 찾을 수 있는 뵈겔린의 이야기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해 고대 근동 지역의 초기 문명들에서 시작한다. 이곳의 국가들은 자기들에게 정통성을 제공하는 신의 기운을 하사받았다." "(기독교의 부흥 이후에 등장한) 초월적인 신국神國을 인간의 지상 국가와 구분한다는 생각은 서구 역사에서 심오한 영적·정치적 함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 구분은 한편으로 왕궁을 통과하지 않고도 신에게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직접적인 인도 없이도 인간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겠다는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정신적 풍요는 정치적 빈곤의 위험을 수반했고 마침내는 인간이 신의 감시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은 유혹까지 생겨났다. 17세기와 18세기의 과격한 계몽주의는 그 유혹에 기꺼이 굴복하면서 기독교가 시작한 그 과업을 완성했다. 뵈겔린의 말을 빌리자면, 〈신을 참수해버린 것이다.〉"(59-60)


"하지만 정치가 신으로부터 근대적 해방을 이룩한 것이 곧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계몽주의는 신이 국가에 개입하지 못하게 만들었지만, 문명을 처음 생겨나게 한 신격화의 관행을 철폐할 수는 없었다. 뵈겔린의 견해에 따르면, 계몽주의 이후 근대 서구 역사에서 벌어진 일이란 곧 인간이 그 자신의 행위를 신성한 어휘들로 진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인간 자신이 전통적 권위의 원천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 질서를 창조한 일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근대의 인간은 프로메테우스가 되었다. 무엇이든지 전부 다 자기 의지대로 바꿔버릴 수 있는 신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신이 세상의 뒤로 들어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세상의 사물들이 새로운 신이 되었다〉는 뵈겔린의 말을 이해하고 나면, 20세기의 거대한 이념 운동들인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민족주의 등은 모두 선지자들, 사제들, 신전에 바쳐진 희생 제물들로 가득 찬 '정치종교들'이 된다."(60)


"뵈겔린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리게 된 사상, 곧 그노시스적인 '기독교 종말론의 내재성'을 통해 현 시대가 탄생했다는 사상 덕분에 그는 냉전과 대중문화와 학생 반란, 그리고 그 밖에 사실상 거의 모든 것에서 '서구의 위기'를 목도한 미국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많은 숭배자를 거느렸다. 뵈겔린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그노시스적인 선지자이자, 〈그노시스의 정신이 그 속을 휘젓고 있는 시시한 중재자들〉로 격하함으로써 그들과 그 아류들을 떨쳐낼 수 있는 세계사적 이유들을 제공했다. 근대 정치 혁명들, 자유 진보주의, 기술의 발전, 공산주의, 파시즘의 이력들이야말로 초월적 질서라는 바로 그 관념에 맞선 그노시스주의의 반란을 증언하는 것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뵈겔린이 이런 반란에 대해 기독교가 부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나, 미국 혁명이 그런 반란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은 어쨌든 그의 보수주의 독자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67)


"초기 저술에서 스트라우스는 '신학-정치적 문제'와 그것이 근대 계몽주의와 맺고 있는 관계에 관해 독특한 시각을 발전시켰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종교 전쟁들에 혐오감을 느끼고 고전 철학의 현실초월성에 좌절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종교와 고전 철학 둘 다에게서, 즉 아테네와 예루살렘 둘 다에게서 벗어난 새로운 유형의 사회를 창조하고 싶어 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종교를 조롱하면서 그것의 분쇄를 원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철학의 주된 관심이 진리나 아름다움이나 선에 대한 사색에서 벗어나 더 실천적인 목적들을 지향하도록 방향을 전환했다. 이 방향 전환의 기념비가 바로 프랑스의 《백과전서》다." "계몽주의의 사상가들이 기껏해야 철학과 세계가 더 악화되도록 방치함으로써 철학의 사명을 왜곡하자, 철학은 19세기에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를 탄생시키면서 절대적 진리에 도달하는 통로가 되리라는 자기확신을 신속히 잃어버렸다."(80-1)


"스트라우스는 소크라테스의 활동에서 비롯된 고대와 중세의 플라톤적 전통이 정치적 관계나 교육상의 관계에서 비밀스런 전승을 실천했다고 제안하기에 이른다." "스트라우스가 포착한 특징에 따르면 중세 초기의 이슬람 철학자 알파라비와 중세 유대 철학자 마이모니데스는 자신들이 고전 세계에는 알려져 있지 않던 계시 종교들이 설정한 강력한 규약들에 직면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계시와 철학은 결코 서로를 논박할 수 없으며 또한 어느 한 쪽을 버리지 않고 지성적으로 종합할 수도 없다고 보았다." "이것은 독자에게 진정한 철학이란 모든 신학적·정치적 몰입에서 벗어나 자유를 유지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알파라비와 마이모니데스의 성취는 철학이 비밀스런 전승으로 실천될 때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고 또 통속적으로 실천되었을 때는 어떻게 정치적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 증명해 보였다는 것이다."(83-5)


"그의 관심은 이 전통이 근대기에 들어서 어떻게 사라져버렸는지를 규명하는 데 고정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서구 사상의(그리고 암묵적으로 서구 문명의) 쇠퇴와 타락의 미토스로 전환했다. 여기서 스트라우스가 하이데거에게 진 빚이 가장 뚜렷하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저작을 함께 읽으면 역사적 비관주의가 지적 노스탤지어로 옮겨지고 그런 다음 정치적 행동으로 되먹임 되는 상이한 방식들과 관련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도 한다. 하이데거 자신이 바로 이 주로를 따라 달린 사람이다. 전도유망한 현대 철학의 위대한 희망으로 출발한 그는 10년 후 '국가사회주의의 내면적 진리와 위대성'을 찬양하는 열정적인 파시스트가 되었고 시종 〈오로지 신만이 지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라고 예언하면서 정치적 불명예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스트라우스는 정치에 결코 관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창도한 학파가 양성해낸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워싱턴 정가의 열성적인 정치 파벌로 경력을 쌓았다."(85-6)


2부 흐름들


"초기 문명들이 스스로 위안을 삼고자 사용했던 가장 흔한 역사적 신화들이 숙명적인 쇠퇴의 이야기들이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심리학적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어째서 지금의 삶이 그렇게 고단한지에 대한 현세적인 이유들을 제공한다. 우리는 황금시대 우리의 원천들에서 한참 멀리 내쫓긴 '철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괴롭다." "기독교는 숙명적 쇠퇴라는 이 옛날이야기에 등을 돌렸다." "기원후 4세기 초 사람인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오스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든 최초의 기독교 사상가인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신은 섭리의 한 손을 사용하여 아브라함에서 예수에 이르는 히브리의 역사를 인도함으로써 '복음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신은 작은 공화정이었던 로마를 거대하고 강력한 제국으로 건설했다." "에우세비오스는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라는 비관적인 이교異敎 신화에 맞서, 낙관적인 '이제 모두 안녕'을 제공했다."(105-6)


"당연히 에우세비오스주의는 신학적 올가미다. 나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 신화와 거기에 매여 있는 희망들이 무너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410년 로마 약탈 사건 이후에 이를 직접 목격했다. 로마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즉시 절망감이 퍼져 나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버린 고대 이교의 신들에게서 벌을 받은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식 사고의 방향을 역사의 흐름에서 벗어나 종말론적 결말을 지향하는 쪽으로 전환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이교적인 로마를 번성케 해서 교회와 결합시킨 이유를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고 독자들에게 말한다. 신이 로마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둔 이유도 역시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신의 소관이다.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전파하고 옳게 처신하며 계속 독실하게 신을 섬기는 것이다. 나머지는 신의 두 손 안에 있다."(106-7)


"단지 거쳐 지나가는 순례자의 교회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미지와 승리의 교회라는 에우세비오스의 이미지가 빚어내는 이 긴장은 중세 가톨릭의 시대에서는 결코 해소되지 않았다. 교황의 권위를 둘러싼 내부 갈등 및 동방 교회가 오스만 튀르크와 빚은 외부 갈등이 수세기 동안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승리를 거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랬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받은 종교개혁의 충격은 410년 이후 로마 기독교인들이 경험한 충격만큼이나 컸다. 단, 한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루터와 칼뱅과 과격한 개혁가들의 맹공 이후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결코 그들의 근대판 아우구스티누스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교회는 이런 도전들에 맞서 혁신자들을 비난하고, 일부 차이들은 묵인하고, 마지막에는 그런 혁신들이 본래 가톨릭 교리와 잘 맞는다는 방식으로 대응했다."(107-8)


"그러나 여러 문명이 단일한 하나의 '프로젝트'가 규정해놓은 불연속적인 시기들을 거치는 것처럼, 〈중세 기독교가 실패했고, 종교개혁이 실패했고, 신앙 고백적인 유럽이 실패했고, 그리고 서구 현대성이 실패하는 중〉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 삶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도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종교개혁 직전의 수십여 년 동안 서구 문명이 절정에 도달했다고 상상하는 것도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슬람 문명이 초기 칼리프 정권 때나 중세 스페인에서 절정에 도달했다고 상상하는 일이 무슬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신화들은 '가보지 않은 길'(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데에 정치 활동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식의 더 음헌한 몽상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일밖에는 하지 못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훈대로 우리는 우리가 가는 대로 우리의 길을 포장해야 할 운명이다. 나머지는 신의 소관이다."(125-6)


바울을 좌파의 보고寶庫로 승격시킨 최초의 인물은 슈미트를 숭배한 유대인이었던 야콥 타우베스다. "그의 중요한 주장은 〈바울의 당면 과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민족을 확립하고 적출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슈미트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 사용한 용어인 '정치 신학political theology'이라 부르는 것의 본보기다. 그가 의미하는 정치 신학은 법적·정치적 구조물들이 적법성을 얻거나 잃는 방식에 관련된 논의다. 이 절차는 인간이건 신이건 '주권자'가 내린 임의의 결단에 의존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슈미트에 따르면 모든 사회는 일종의 위로부터의 정치적 계시에 암묵적으로 의존하며 이 계시는 그 어떤 보편적 원리도 반영하지 않고 그 어떤 자연적 한계도 인정하지 않으며 단지 무언가를 있게 하는 의지와 능력일 따름이다." "슈미트뿐만 아니라 타우베스도 진지한 정치학은 모두 이러한 신비로운 이중적 성격을 띤다고 보았다."(132)


"1993년에 타우베스의 강연 원고가 정식 출간되자 유럽 좌파는 사도 바울을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바울에 관한 책과 논문이 드문드문 선을 보이고 있다. 일부는 흥미롭고 일부는 싸구려다. 가장 놀라운 사람은 확실히 알랭 바디우다. 1960년대 초에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루이 알튀세르에게 배운 학생이었고, 1970년대에는 급진적인 마오주의자이자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 정권의 옹호자였던 바디우는 이제 거의 여든의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중국의 문화혁명을 따뜻하게 묘사하는 글을 쓴다. 그러던 바디우가 1997년에 《성 바울 : 보편주의의 토대》를 출간했을 때 프랑스는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은 성 바울의 급진적 보편주의를 재발견해서 혁명 정치에 적용할 것을 좌파에게 요청한다. 바디우가 바울의 특출난 광신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오늘날 그는 '민주주의'라는 멋진 단어 뒤로 숨어서 너무도 졸렬하게 시치미를 떼고 있는 야비한 '자본가-의회주의'를 비난할 때 자기 말에 귀 기울이는 청중을 발견한다."(133-5)


"다른 형태의 전가 행위와 마찬가지로 반反유대주의 역시 역사적 비관론이 먹여 살리고 있다." "반식민주의 운동들은 일당 독재 정권으로 바뀌었고, 소비에트 모형은 소멸했고, 학생들은 정치를 포기하고 취업 경력을 좇았으며, 서구 민주주의 정당 체제는 고스란히 현상 유지 중이고, 경제는 부富를 생산했고(골고루 나눠 갖지 않는 채로), 세계 전체가 연결성connectivity에 홀려 있다. 페미니즘, 동성애자 인권, 가부장적 권위의 쇠퇴 등 성공적인 문화 혁명이 있었고 그것이 지금은 서구 바깥으로도 퍼저 나가기 시작한 상태다. 그러나 정치 혁명은 없었고, 이제는 일어날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겨냥할 것인가? 누가 지휘할 것인가? 그 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무도 이런 질문들에 답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이런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우리가 오늘날의 좌파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역설적 형태의 노스탤지어가 전부다. 바로 '미래'를 그리워하는 노스탤지어다."(141-2)


"그리하여 그 노스탤지어에 자양분을 제공할 수 있는 지적 보고寶庫를 찾는 아주 절박한 탐색이 이어졌다." "이를테면 정치적 지배는 맨눈에는 뚜렷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존한다는 식의 설명이었다. 에테르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나 모든 곳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미셸 푸코의 '권력' 이론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였다. 그다음은 슈미트의 복권이었다.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라면서 태연하게 옹호한 피아彼我의 구분이 정치는 투쟁이지 숙고나 협의나 타협 같은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생각들에다가 반 토막만 이해된 성 바울의 종말론을 보태보라. 기적과도 같은 구원의 혁명에 대한 확신이 실제로 다시 한번 가능할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역사에 작용하는 힘들이나 논쟁과 조직화라는 고된 노력을 통해 분출된 혁명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장 기대하기 어려울 때, 한밤의 도둑처럼 그렇게 도래하는 혁명이다."(142-3)


3부 사건들


"2015년 1월 7일 아침에 두 명의 프랑스인 무슬림 사이드 쿠아치와 셰리프 쿠아치 형제가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지의 파리 사무실에 침입해서 열두 명을 살해했다. 도주하기 전에 그들은 이 신문사가 여러 해 동안 선지자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카툰을 여러 편 실은 데 대한 복수라고 외쳤다." "이 살인 행위들은 경악보다는 공포를 자극했다. 정치적 이슬람주의는 적어도 2년 동안 프랑스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파리의 학살은 프랑스 사회에서 이슬람의 본분을 둘러싸고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문화 전쟁을 재연했으며 그 방식이 매우 심각했다. 뒤이어 나타난 격렬한 대중 토론의 양상은 친숙한 양태였다. 좌파 언론인과 정치인은 신속하게 그 공격이 〈이슬람과는 무관하다〉라고 선언하고 프랑스의 실패한 경제·사회 정책의 희생자들에게 퍼붓는 비난을 멈추라고 경고했다. 우파 진영의 비판자들은 그들이 현존하는 정치적 이슬람주의, 이민, 다문화주의의 위험성을 무시하고 있다며 비난했다."(147-9)


"그런데 그때 새로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우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가까운 과거만이 아닌 세계 역사의 흐름 전반에 관해 낭랑한 선지자의 논조로 말하는 목소리였다. 그들은 현재의 위기를 이해하려면 훨씬 더 뒤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들로, 제3공화국의 흥망성쇠로, 나폴레옹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심지어 계몽주의나 중세 때까지 한참을 뒤로 말이다. 이런저런 정부 정책이나 이런저런 개혁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 참극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저 눈을 감고 있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더는 우리의 운명을 통제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이 문제의 진실이다. 우리가 비로소 깨달은 상황은 프랑스를, 어쩌면 서구 문명 전체를 파국의 경로에 기어코 들어서게 만든 비참한 정치적·문화적 실책들이 빚어낸 예견된 결과다. 그리고 이제 그 계산서가 도착한 것이다."(149-50)


"문화적·물리적 약점 탓으로 돌려진 프랑스-프러시아 전쟁의 패배 이후로 지금껏 프랑스인들은 출생률에 집착해왔다. 오늘날 출생률은 유럽 기준으로는 비교적 높은 편이지만, 북·중 아프리카 이민자 '인종' 가족들의 높은 출생률이 그 수치를 떠받치는 것으로 보인다.(정부는 민족별 통계를 내놓지 않는다.) 이것이 극우파에게는 주요한 강박 관념이 되었다. 그들의 저술은 인구학적 관성의 힘으로 프랑스를 조용히 무슬림 국가로 바꿔놓게 될 이른바 '거대한 대체grand remplacement'가 임박했다는 예측들로 가득 차 있다. 백인 여성의 자궁은 페미니즘 때문에 시들어버렸다. 다문화주의 덕분에 밀물처럼 쇄도하는 다산多産의 이민자들이 계속 허용된다. 이것이 프랑스 무슬림들을 '국민 속의 국민un peuple dans le peuple'으로 여겨야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다. 이는 사실 우파가 현재의 위험에 맞춰 번안한 유럽 반유대주의의 고전적 주제일 뿐이다."(157)


후기


"'시대'란 우리가 역사를 읽기 쉽게 만들려고 숫자 표시 테이프 위에 적어놓은 두 개의 연도 사이에 있는 공간에 불과하다. 우리가 혼돈의 경험들에다 '사건들'을 새겨 넣을 때에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 더 가까울수록, 그리고 우리의 구분들이 사회와 더 밀접하게 관련될수록 연대학의 책임이 더 커진다. 이 말은 또한 분류법에도 해당한다. 유類 개념을 식물에 적용할 때는 반향을 얻지만,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할 때는 사정이 다르다. 후자의 위험은 바로 물상화物象化다. 이런 일은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의 분류에 도움이 되는 개념을 발전시키고 난 다음(예를 들면 '아리안' 어족) 뒤이어 그 개념이 실재에 아로새겨진 사실이라고 선언할 때 일어난다.(특징적인 문화와 역사를 지닌 동질적인 '아리안' 민족) 우리는 인종과 관련하여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배우고 있으나, 역사를 이해하는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여전히 구제 불능의 물상화하기 족속이다."(182-3)


"진보와 퇴보, 순환의 서사들은 모두 역사의 변화를 유발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우주의 자연법칙일 수도 있고, 신의 의지일 수도 있고, 인간의 정신이나 혹은 경제적 힘들의 변증법적 발전일 수도 있다. 일단 그런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슨 일이 다가올지 틀림없이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만에 하나 그런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나?" "이에 대한 응답으로, 매년 해가 지날 때마다 점점 벌어지는 찢어진 시간의 부위가 황금시대 혹은 영웅시대 혹은 그냥 평범한 시대로부터 우리를 점점 멀어지게 한다고 하는 묵시록적 역사관이 발전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실제로 역사에는 오로지 한 사건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의도했던 세계와 우리가 살 수밖에 없게 된 세계를 분리시킨 카이로스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과거에 대해 알 수 있고 또 알아야만 하는 전부다."(185-6)


# 카이로스kairos : '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제우스의 아들인 기회의 신을 뜻하기도 한다.


"묵시록적 역사 자체에도 인간적 절망의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가 있다." "이 사건들이 결정적 파열구로 집단의 기억에 아로새겨진 묵시록적 상상 속에서는 과거가 아니라 바로 현재가 타향이다. 그것이 바로 그런 상상이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젖힐 두 번째 사건을 그렇게라도 꿈꿔보려 하는 이유다. 그런 묵시록적 시선의 초점은 지평선 위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면서 그 시선은 메시아, 혁명, 지도자 혹은 시간 그 자체의 종말을 기다린다. 오로지 세상의 종말만이 지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물론 파국에 직면한 상황이라면 이 섬뜩한 확신이 실제로는 간단명료한 상식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통틀어 보건대, 그런 상상은 터무니없는 희망을 자극하여 불가피하게 실망으로 이어졌고 그런 희망을 간직했던 사람들을 훨씬 더 황폐하게 만들고 말았다. 왕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고,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패배와 파멸, 망명의 기억들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계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렸다."(186-7)


"묵시록적인 역사 서술은 결코 유행에 뒤처지는 법이 없다. 오늘날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강하고 고결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나라가 어쩌다 '60년대의 대재앙' 이후 위험한 세속 정부에게 지배되는 방탕한 사회가 되고 말았는지를 말하는 통속적 신화를 선호한다." "사정은 유럽에서 더 심각하다. 특히 동유럽에서 그렇다. 헝가리 사람들은 주변에 유대인과 집시가 그렇게 많지 않았을 때 얼마나 살기가 더 좋았는지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잃어버린 황금시대의 믿음이 가장 크게 설득력을 얻고 당연시되는 곳은 무슬림 세계다." "독실한 무슬림이라면 누구나 선지자가 7세기의 여명에 그랬듯이 지금 이 시대와 맞서 싸워야 한다. 그 선지자는 타협하지 않았고, 해방시키지 않았고, 민주화하지 않았고, 발전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신의 말씀을 대변하고 신의 율법을 실행했다. 우리가 선지자의 신성한 본보기를 따라 그 일을 성취하고 나면 영광의 시대가 영원히 되돌아올 것이다. 인샬라."(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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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학사 -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역사학은 끝났는가?
게오르그 이거스 지음, 임상우.김기봉 옮김 / 푸른역사 / 1999년 9월
평점 :
품절


서설 근대화 담론의 쇠퇴와 20세기 역사학


"(랑케적 패러다임을 비판하고, 사회·경제적 요인에 초점을 맞춘) 사회과학적 역사학이 근거했던 근대 세계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낙관론은 후기 산업 세계의 사회적 존재의 구조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함에 따라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사회과학적 역사가들은 근대 세계를 랑케 학파보다 더욱 역동적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사회 질서의 구축에 합리성을 적용하는 시도를 근대적 실존을 규정하는 긍정적 가치로 간주하였다. 역사 과정에 대한 이러한 가정들은 19세기 후반에 이미 야콥 부르크하르트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통렬한 비판에 직면했다." "여러 측면에서 1960년대는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던 근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위기 의식이 전면에 부상한 전환점이었다.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2차 세계대전이 창출했던 상황들이 확연하게 드러났는데, 그러한 상황에는 식민 제국의 종말과 비서구인들에게도 역사가 있다는 각성이 포함되었다."(21-2)


성, 인종, 종족 및 생활 양식 같은 다양한 형태의 구분들이 점차 부각되는 가운데,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의 전환은 의식에 한층 영향을 미쳤다. 처음으로 경제 성장이 배태한 부정적인 측면이 인식되어 안정적인 환경을 위협한다고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유대인 학살Holocaust이 몰고 온 충격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직후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새로운 세대가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대중의 의식 속에 스며들 수 있었다. 문명화 과정이 지닌 파괴적 측면이 점차로 의식의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몇 가지 측면에서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많은 역사가들에게 '거대 담론grand narrative'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서구 문명은 점차 여러 문명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그 어떤 문명도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함께 근대성 또한 그 특권을 상실하였다."(22-3)


"객관적으로 역사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의문시되었다는 사실은 한층 심각한 도전이었다. 근대 서구 문명의 특성에 대한 환멸로 인해 근대 과학관은 통렬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인류학자들은 삶을 이해하고 영위하는 데 있어 근대의 과학적 합리성이 '야만적인' 신비적 사고에 비해 더 유용하다고 보지 않았다." "니체는 이미 초기 저작인 『비극의 탄생』(1872)과 『삶을 위한 역사학의 효용과 오용에 관하여』(1874)에서 과학적 역사 연구와 역사 서술의 유용성은 커녕 그 가능성까지도 부정하였다. 그는 연구 대상은 역사가의 이해 관계와 편견에 의해 결정될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 서구 사상의 근간을 이루었던 하나의 믿음, 즉 사유자의 주관성을 넘어서 객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지지될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적인 논리적 사고가 신화적 혹은 시적 사고 같은 전논리적 사고보다 우월하다는 점을 부인하였다."(25-6)


"포스트모던적 비판에는 중요하고 타당한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단선적인 통합적 역사의 개념은 지지될 수 없으며, 역사는 연속성뿐 아니라 단절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포스트모던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전문적 역사학의 지배적 담론에 깊이 새겨진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을 올바르게 지적했을 뿐 아니라, 전문가의 권위로 말하는 과장된 주장들을 정당하게 공격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합리적인 역사 담론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역사적 사실과 허위의 개념을 의문시함으로써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도 던져버리는 과오를 범했다. 따라서 그들은 항상 허구적 요소를 포함하는 역사 담론과 주로 실재를 해석하는 것을 추구하는 허구 사이에 존재하는 유동적 경계뿐 아니라, 정직한 학문과 선전·선동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마저도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포스트모던적 도전은 역사 사고와 서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그 도전이 이전의 개념 및 실행과의 연속성을 파괴하지는 않았다."(32-3)


제1부 전문 분과로서 역사학의 출현


"(역사학이 철학을 대체하여 인간 세계의 의미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과학이 될 수 있다는) 랑케의 주장처럼 사물을 '비당파적unpartheyisch'으로 파악한 결과는 모든 가치의 상대성과 무의미성을 보여주기는커녕 사회 제도들이 역사적으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윤리적 특성을 지닌다는 점을 사실적으로 드러냈다. 사회제도란 비록 헤겔의 철학적 방식을 역사학적 방식으로 대체했을지라도, 랑케는 헤겔에 동의하여 현존하는 국가는 그 자체가 역사적 발전의 결과로서 하나의 〈도덕적 에너지〉, 즉 〈신의 생각〉을 구현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랑케는 에드먼드 버크의 입장에 근접하여, 혁명적 수단이나 광범위한 개혁을 통해서 기존의 정치·사회적 제도에 도전하는 것은 역사 정신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단지 〈실제 일어났던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랑케의 과거에 대한 '비당파적' 접근 방식은 사실상 현존 질서를 신이 의도했던 것으로 제시하는 결과를 낳았다."(47-8)


"(독일과 달리) 프랑스와 미국의 역사가들은 역사학과 사회과학 간에 좀더 긴밀한 연관 관계를 확립하는 데 더욱 개방적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두 나라의 상당히 다른 정치적 환경이 그러한 환경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다. 독일의 경우 사회사는 수세적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프랑스의 경우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 역사 연구에 반대하는 투쟁을 주도한 것은 사회학이었다. 1888년에 에밀 뒤르켐은 「사회학 강의」에서 역사학이 과학의 지위를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역사학은 특수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경험적 검증을 할 수 있는 일반적 진술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경험적 검증이야말로 과학적 절차와 사고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기껏해야 역사학은 엄격한 과학이 될 수 있는 사회학에 정보를 제공하는 보조 과학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경제학자 프랑수와 시미앙은 경제사만이 사회과학과 양립할 수 있는 역사학의 한 분야라고 주장했다."(61)


"19세기 말에 이르러 몇몇 중요한 신칸트주의 철학자들, 특히 빌헬름 딜타이와 빌헬름 빈델반트, 하인리히 리케르트는 그들이 자연과학에 대비하여 '정신과학 Geisteswissenschaften' 혹은 '문화과학 Kulturwissenschaften'이라 불렀던 것을 위해 명확한 방법론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 방법론들은 모두 과학의 지위를 요구했기 때문에 명확한 개념화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생명 없는 자연의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유형을 추상적인 용어로 '설명 explain'하는 '법칙 정립적인 nomothetic' 혹은 일반화하는 공식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반면, 정신과학 혹은 문화과학은 구체적인 문화적·사회적·역사적 배경 속에서 인간 행동이 지니는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 understand'하기 위해 '개성 기술적인 idiograpic' 개별화의 방법을 적용하였다." "랑케는 이러한 과정을 '감정이입 Einfuhlung'이라 칭했고, 딜타이는 '체험 Erlebnis'이라 표현하였다."(66-7)


"역사를 합리적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한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견해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버는 여전히 적어도 히브리와 고대 그리스 이래의 서구 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지성화 intellectualization'와 '합리화 rationalization'의 과정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믿었다. 이렇게 볼 때, 베버는 역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콩도르세, 헤겔 또는 마르크스의 낙관적 믿음이나, 역사는 인간이 합리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질서를 낳는다는 랑케와 드로이젠의 낙관적 믿음은 거부했을지라도, 역사에는 연속성과 일관성이 존재한다는 역사주의자의 신념과는 결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비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시각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버는 역사, 적어도 서구 역사를 특징짓는 일관성에 관련된 19세기의 핵심 개념들을 유지했다. 또한 초문화적 타당성을 지닌 논리를 따르는 과학적·사회과학적 탐구가 '객관적' 특징을 지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굳게 믿었다."(70-1)


"(역사학에 수학 모델을 적용하는) 엄밀과학을 바탕으로 작업한 역사 서술의 가장 중요한 옹호자로는 미국의 '신경제사 The New Economic History' 연구자들을 들 수 있다. 신경제사가들은 고전경제학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정치와 사회에서 분리된 경제 성장의 모델을 가지고 작업하였다. 따라서 『철도와 미국의 경제 성장』이라는 유명한 '반 사실적 contrafactual' 연구에서, 로버트 포겔과 더글러스 노스는 경제 자료만을 이용하여, 철도가 발달하지 않았다면 미국 경제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포겔은 역사과학의 객관적이며 가치 중립적인 성격을 주장했음─역사가의 비당파성과 객관성을 강조한 랑케와 다르지 않게─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치 중립적인 전제들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기존의 성장 지향적·소비 지향적 경제학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이러한 경제학에 내포된 위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78-81)


제2부 사회과학의 도전


"프랑스의 '아날' 학파는 19세기와 20세기에 대다수의 역사가들이 견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역사적 시간 개념을 제공하였다. 사실상 랑케로부터 마르크스와 베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후 미국의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가들은 역사를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일차원적 시간을 가로지르는 운동의 차원에서 파악하였다. '아날' 역사가들은 시간의 상대성과 다층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개념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였다."(85-6) "프랑스 역사학이 지리학과 경제학, 인류학 간에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는 반면, 베버를 포함한 독일의 전통은 국가와 행정, 사법을 강조하면서 그와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배경에서 뤼시앙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크가 익명의 구조에 대단히 중요성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역사인류학의 주제를 구성하는 집단 망탈리테에 깊이 새겨진 감정과 경험의 측면들에 주목했던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88)


"푸코는 '하나의' 관념은 이미 종결된 근대의 발명품이라고 간주한다. 대다수의 '아날' 역사가들도 이에 동의할 것이다. 하나의 역사적 시간 대신에 그들은 상이한 문명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각각의 문명 내에 공존하는 시간의 복수성을 발견한다. 이러한 관념은 지중해를 다룬 페르낭 브로델의 저작의 구조 속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발전되고 있는데, 그는 각기 고유한 속도를 지닌 세 개의 서로 다른 시간, 즉 하나의 지리적 공간으로서 지중해의 '거의 정지된 시간 longue duree'과, 사회·경제 구조 변화의 '느린 시간 conjonc-tures', 그리고 정치적 사건의 '빠른 시간evenements'을 구분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자크 르 고프는 「중세에서 상인의 시간과 교회의 시간」이라는 고전적인 논문을 저술했던 것이다. 직선적 시간 개념이 폐기됨과 더불어 진보에 대한 확신과 서구 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 또한 파기되었다. 인간의 역사에 대한 거대 담론이 기반할 수 있는 통일된 역사 발전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94)


"1960년대에 사회과학 전반이 계량화에 경도된 점 또한 '아날'에서도 발견된다. '아날' 역사가들은 점점 더 과학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의 연구소를 '실험실'이라고 부르고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을 운위했는데, 이는 의문의 여지 없이 사회과학이었다." "1960년대에 프랑스 사회사의 많은 부분이 계량화에 깊이 의존했는데, 이는 대량의 인구통계학적 자료에 근거하여 어떤 지역의 '전체사 historire totale'를 제시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연구는 출산에 관련된 교구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통계 자료에서 출발하여 성적 태도라는 좀더 광범위한 문제를 다루었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가장 야심적인 계량적 연구는 르 르와 라뒤리의 『랑그독의 농민들』이다. 이는 과도할 정도로 〈사람 없는 역사 history without people〉였는데, 맬서스적 가정이 제공한 인구 성장의 장기적 주기와 곡물 가격 간의 상호 연관성을 통계학적으로 분석한 것이었다."(98-9)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과 마르크스주의 사고는 마르크스주의 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의 구현이라 자임해 왔던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가들이 몰락함에 따라 그 신뢰성과 위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가 근대 역사과학에 기여한 점을 과소 평가해서는 안 된다. 만약 마르크스가 없었다면, 베버의 편에 섬으로써 마르크스의 반대편으로 스스로를 규정한 근대 사회과학의 수많은 이론들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역사학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역사학이 과학의 지위를 획득하자면 역사 발전의 법칙을 발견하고 공식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합법칙적 역사 발전의 주 동인을 경제적 불평등에 기초한 사회적 갈등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토마스 헨리 버클과 텐느와 같은 여타 실증주의자들과는 달랐다. 역사의 배후에 있는 원동력은 관념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서문에서 간명하게 진술했듯이 생산력이었다."(124-6)


"그러나 근대사의 거대한 정치적 격변과 산업 혁명을 다루던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는 곧이어 익명의 사회 과정에서 관심을 돌려, 이러한 변화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나타난 형태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르크스는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와 『독일 농민전쟁』을 통해 그와 같은 역사에 접근했다." "마르크스는 이제 자신과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묘사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며, 애국적인 기억과 상징 같은 비경제적 힘이 정치 의식과 행동에서 수행한 역할뿐 아니라 부르주아 내에서 전개된 첨예한 사회적·정치적 분열을 인식한 근대 사회의 상을 제시하였다." "한편 중세와 근대 유럽의 정치적·경제적 격변을 고찰한 영국과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적 연구는 역사에 인간의 얼굴을 부여하기 시작하였다. 앙리 르페브르는 『1789년의 대공포 : 혁명기 프랑스 농촌에서의 공포』에서 그러한 길을 준비하였다."(135-6)


"민중 문화의 역할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를 지향하는 이러한 움직임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하나를 말하라고 하면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1963)이라고 할 것이다. 저서의 표제는 〈노동계급은 정해진 시간에 뜨는 태양처럼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은 만들어질 때 거기에 존재하였다〉라는 톰슨의 테제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톰슨은 〈닫힌 체계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에서 유래한 열린 탐구와 비판의 전통〉을 구별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첫 번째의 것은 신학의 전통에 서 있고, 두 번째의 것은 활동적 이성의 전통에 속한다.〉 톰슨은 마르크스로부터 계급 개념과 함께 〈계급 경험은 대체적으로 인간이 태어나면서 속하게 되는 생산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채택한다. 그러나 여기서 계급은 〈하나의 '구조'나 심지어 하나의 '범주'가 아니라, 인간 관계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문화적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어떤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137-8)


제3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과 역사학


"사회과학 지향적 역사는 과학과 기술이 성장과 발전에 공헌했던 팽창하는 근대 산업 세계와의 긍정적인 관계를 상정하였다." "이와 달리 근대 서구 문명의 과정과 특성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가 대다수의 '신문화사 New Cultural History'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는 마르크스주의와 역설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것은 역사 서술의 해방적 기능과 관련된 마르크스주의의 견해는 공유했지만, 갑남을녀가 해방되어야 할 속박의 구조에 대해서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상당히 다르게 이해하였다. 착취와 지배의 원천은 일차적으로 정치나 경제와 같은 제도화된 구조가 아니라, 인간이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수많은 인간 상호 간의 관계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젠더 또한 새롭고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여겨졌다. 푸코가 권력 및 권력과 지식 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가로서 마르크스를 대체했던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152-4)


"(이탈리아의 카를로 긴즈부르그나 카를로 포니 같은) 일상 생활의 역사가들은 역사 연구의 주제를 권력의 '중심'이라고 하는 것에서 '주변'의 대다수 사람들로 전환해 갔다." "이들은 다수의 사람들을 군중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세계사적 과정에서 혹은 익명의 군중들 사이에서 잊혀져서는 안되는 개인들로 파악한다. 이미 톰슨은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의 목표를 〈가난한 양말직공 ··· ··· [그리고] '시대에 뒤진' 베틀 노동자를 ··· ··· 후대의 거대한 오만에서 구해내는 것〉이라고 선언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역사의 동기를 명확히 하였다. 그러나 만약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망각으로부터 구출해 내고자 한다면, 역사를 더 이상 단일한 과정으로, 즉 수많은 개인들이 묻혀 버리는 거대 담론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별적 중심을 지닌 다면적 흐름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개념적·방법론적 역사 접근 방식이 요구된다. 이제 역사가 아니라 역사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들이 문제가 된다."(159-60)


"미시사 연구자들은 역사가들이 실재하는 대상을 다룬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전통적인 사회과학적 접근 방식을 비판한 이유는 사회과학이 불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과학자들이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소규모적 삶의 구체적인 실재에 비추어 검증해보면 지지될 수 없는 일반화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미시사 연구자들은 〈중요해 보이지 않은 단일의 기호를 통해〉 접근해야 하는 '해석적' 문화 연구를 목표로 한다. 레비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시사적 접근 방식은 어떻게 우리가 다양한 실마리와 기호, 징후를 통해서 과거의 지식에 접근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실재는 역사적 텍스트 밖에 존재하며,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주장을 계속한다. 물론 지식은 매개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시사적 방법은 〈실재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역사가들이 채택하는 전통적인 단정적·권위적 담론 형태와 결별한다.〉"(167-9)


# 미시사를 향한 비판


1. 역사를 일화적인 호고好古주의로 전락시켰다.

2. (근대 세계를 혐오하고) 과거 문화를 낭만화한다.

3. 상대적으로 안정된 문화를 연구하기 때문에, 급격히 변화하는 근·현대를 다룰 수 없다.

4. 3번과 관련하여 미시사는 정치를 다룰 수 없다.


"결국 미시사는 대규모의 사회·정치적 과정을 분석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필수 불가결한 보완책으로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또한 구술사가 일정한 공헌을 할 수 있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연구는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의 역사에 새로운 관점을 추가한다. 그때까지 홀로코스트는 라울 힐베르크가 묘사했던 것처럼,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어 〈악의 일상화〉를 구현했던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관료들이 책상머리에서 수행했던 광대하고 복잡한 행정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브라우닝은 이제 〈파괴기계〉의 계서제의 밑바닥에서 개인적으로 수백만 명에 대한 처형을 단행한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수행한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101 예비경찰대대에 대한 그의 설명은 어떻게 대부분 노동계급 출신이었던 중년의 함부르크 경찰들이 뚜렷한 반유태적 감정 없이 폴란드에서 대량 학살에 가담했는지를 보여 주었다."(175-8)


"포스트모던 역사 서술 이론의 기본 관념은 〈과거에 일어난 변화에 대한 정합적인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역사 서술은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의 과거를 준거로 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와 헤이든 화이트는 역사 서술은 허구와 다르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였다." "사료에 대한 문헌학의 비판적 작업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를 넘어서 역사적 설명을 구성하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화이트의 경우 과학적 고려가 아니라 미학적·윤리적 고려에 의해 결정된다. 그는 계속해서 역사가들은 형식뿐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들이 제시하는 설명의 내용까지도 미리 결정하는 한정된 수의 수사적 가능성만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기 대문에, 우리가 보았듯이 〈역사 이야기는 언어적 허구이고, 그 내용은 '발견'된 만큼 '창안'되며, 그 형태는 과학보다는 문학과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고 주장한다."(181-2)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1916년 사후에 출판된 『일반 언어학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연관된 관념을 기초로 해서 언어이론을 공식화했다. 언어는 구문적 구조를 가진 폐쇄적인 자율적 체계를 형성하며, 나아가 언어는 의미와 의미의 단위를 의사소통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의미가 언어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생각이 언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와 역사에 대한 구조주의적 개념의 중심을 이루는 관념에 도달한다. 즉 인간은 자신이 구조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결정하는 구조─이 경우에는 언어 구조들─의 틀 내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미국에서 전개된 '신비평 New Criticism'의 문학이론과 이와는 독립적으로 바르트에 의해 시작되어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방법론에 이르는 프랑스의 문학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184-5)


"푸코가 착수한 다음 단계는 텍스트 생산에 관계하는 저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저자가 사라지면, 의도성과 의미 또한 텍스트로부터 사라진다." "푸코와 데리다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모든 텍스트에 숨겨져 있는 이데올로기적 전제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텍스트가 저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들은 소쉬르의 언어 개념을 급진화시킨다. 소쉬르의 경우, 언어는 여전히 하나의 구조를 지니며 하나의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말(기표)과 그것이 지시한 사물(기의) 간에는 여전히 통일성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데리다의 경우, 이러한 통일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명확한 의미가 없는 무수한 기표들을 본다. 명확한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그 어떤 아르키메데스의 지렛점도 없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을 위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세계에는 인간 행위자, 인간의 의지 혹은 의도가 없으며, 정합성을 완전히 결여한, 의미라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185-6)


"문화인류학자인 기어츠는 최근의 역사 사고에서 문화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 방식의 가장 중요한 추동력을 제공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스스로가 짜 놓은 의미의 그물망에 매달린 동물이라는 베버의 주장을 믿기 때문에, 나는 문화를 이러한 그물망으로 간주하며, 그것에 대한 분석은 법칙을 추구하는 실험과학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해석과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의미의 그물망'이라는 개념에 베버와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인류학자에게 문제되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두터운 묘사'라고 말한다. 방법의 대안으로서, '두터운 묘사'는 기어츠가 〈기호학적〉이라 정의하는 문화의 개념에 근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문화는 언어의 특성을 소유하며, 언어와 마찬가지로 '체계'를 구성한다. 각각의 행동과 각각의 표현이 전체로서의 문화를 반영하는 상징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해석이 가능하다."(188-90)


"낯선 문화의 '의미'는 인류학자와 직접적으로 대면한다. 이것은 이론으로 유도된 문제들을 가지고 작업하는 분석적 사회과학자와 자신들의 연구 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전통적 역사가 모두의 작품을 물들인다고 여겨진 주관적 편견의 도입을 저지한다. 그러나 사실상 기어츠의 문화 해석에는 그 어떤 통제 기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인류학자의 주관성이나 상상력이 그의 연구 대상에 다시 개입한다." "로버트 단튼은 『고양이 대학살』에서 민중문화를 되찾고자 한다. 동시에 이러한 텍스트를 자본주의 근대화의 압력 하에 있던 인쇄업의 경제적 변화에서 유래된 갈등이라는 더 넓은 컨텍스트 내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기어츠의 「발리 섬의 닭싸움」을 연상시키는 고양이 대학살에 대한 두터운 묘사를 통해 어떤 문화가 그것이 지닌 모든 복합성을 고려해서 실제로 재구성될 수 잇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191-3)


"(이와 달리 언어 혹은 담론에 핵심적인 위치를 부여하여 언어를 사회적 실재의 대용물이 아니라 실재의 길잡이로 파악하는) 경향 가운데 문화인류학과는 가장 동떨어져 있는 반면, 전통적 형태의 지성사와는 매우 가까운 것이 포코크와 퀸틴 스키너, 코젤렉에 의한 정치사상사의 연구들에서 발견된다." "이들에 따르면, 사상들은 더 이상 근본적으로 위대한 정신의 창조물로서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그 표현이 생성된 지적 공동체의 담론의 일부로 파악되어야 한다." "담론은 비교적 자율적인 행위자들의 공동체를 상정하는데, 이들은 정치적·사회적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말하기 때문에 서로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담론 개념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행위이론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담론은 정치적 실재의 형성에 기여하며, 역으로 또한 그러한 실재의 영향을 받는다."(193-5)


"역사 연구에서 '언어적 전환'은 이전의 사회경제적 접근 방식에 내재한 결정론을 깨뜨리고, 언어가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적 요소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스테드먼 존스가 주장하듯이, 이것은 사회적 해석을 언어적 해석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검토하는 문제이다. 언어적 분석은 정치사와 사회사, 문화사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연구들에서 중요한 보조 수단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우리가 이 장에서 다룬 역사가들은 언어와 수사 및 상징적 행위가 정치적·사회적 의식과 행동에 미친 영향을 강조했다. 하지만 대체로 〈실재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언어만이 존재한다〉(푸코)라는 극단적 입장을 공유하는 역사가는 거의 없었다. 대다수의 역사가들은 〈언어적 차이는 사회를 구조화하며, 사회적 차이들은 언어를 구조화한다〉라는 캐롤 스미스-로젠버그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202-3)


맺음말


"19세기는 역사 발전의 혜택에 대한 확신이 최고조에 도달한 시기이지만, 그와 동시에 근대 문화의 특성에 대한 커다란 불확실성이 싹튼 시기이기도 하였다. 초기의 비판은 19세기 문명이 대단한 가치를 부여했던 과학적 합리성과 기술적 진보, 인권의 개념 그 자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 나왔다. 거기에는 전근대적, 전산업적 세계를 향수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던 사상가들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기를 원했던 일부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때때로 반민주적인 색채를 띠었던 이러한 비판은 계몽을 통해 인간이 종속과 박탈, 폭력이라는 오래된 해악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거부하였다. 키에르케고르, 니체, 부르크하르트,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보들레르를 괴롭혔던 것은, 근대 유럽 세계에 내재한 폭력과 불의가 아니었다. 그보다도 그들은 대중화의 과정 속에서 통속화된 가치관 및 그것을 수반한 영웅주의의 몰락을 염려했다."(215)


"오스발트 슈펭글러, 아놀드 토인비 등은 역사의 단일적 통일성에 대한 관념을 거부하고, '고급 문화들'에 대한 비교사를 서술하고자 했다. 그러나 '문명화된' 민족과 '원시' 민족 간의 이와 같은 구분은 〈역사 없는 민족들〉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문화인류학에 의해 역시 거부당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역사가들에 의해 무시되었던 인구의 다른 부분들이 역사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역사의 초점은 권력의 중심부뿐 아니라 사회의 주변부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었고, 이를 통해 미시사와 복수의 역사들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역사에 방향을 제공하는 거대 담론을 발견하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곧바로 역사가 모든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사는 여전히 집단과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하나의 의미 있는 과정 대신에 이제 수많은 상이한 집단들의 실존적 삶의 경험들을 다루는 이야기들의 다원주의가 존재하는 것이다."(217)


"명백히 계몽주의는 많은 모순적인 측면들을 지닌다. 가령 계몽주의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콩도르세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과학적 지식과 그 결과인 기술적 지식을 사회의 영역에 체계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부와 복지를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콩도르세에게 과학과 기술은 확실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포함하는 인간을 무지와 박탈, 압제의 천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수단이었다. 진실로 계몽주의에는 이중적인 측면이 존재하였다. 즉 계몽주의의 보편성 및 이성적 계획과 통제에 대한 믿음은 로베스피에르에서 레닌에 이르는 급진주의자들의 유토피아주의와 전체주의의 싹을 배태하고 있다. 그렇지만 계몽된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독단적 권위와 절대적 통제에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비록 계몽주의는 단죄되었을지언정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야만일 뿐이다."(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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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와 역사가들 - 중국사 연구를 위한 입문
오카다 히데히로 지음, 강유원.임경준 옮김 / 이론과실천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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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중국인의 역사관─만들어진 '정통正統'과 '중화사상中華思想'


"지중해 문명보다는 훨씬 나중인, 서기전 221년 진 시황제의 통일이 엄밀한 의미에서 '중국'의 기원이 된다. 중국 문명의 3대 요소인 '황제'와 '도시' 그리고 '한자'가 이때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만 한자가 중국에서 극히 소수의 지배계급, 그중에서도 특수한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대중적인 문자가 아니라는 것을 주의해야만 한다. 한자에는 품사나 성性, 수數, 격格, 시제가 없으며, 한자를 엮어놓은 한문에는 문법이 없다. 한문의 의미를 해독하는 단서는 고전에서의 용례밖에 없다. 그래서 한자의 사용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고전 텍스트를 통째로 암기해야만 한다. 여기에 더하여, 한인漢人이 말하는 언어는 지역마다 차이가 크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사정도 있다. 결국 중국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언어[漢語]와 쓰는 언어[漢文] 사이의 이러한 단절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15-6)


"『사기』는 중국에서 쓰인 최초의 '정사正史'로 그 체제와 내용은 후세 중국인의 역사의식과 중국에 대한 의식을 결정했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천하'라고 부르는 지역은 자신이 섬겼던 한漢 무제武帝의 지배가 미쳤던 범위를 가리키는데,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천하'는 중국과 동의어가 된다. 게다가 사마천이 황제黃帝의 업적으로서 서술하고 있는 것은 모두 현실의 무제의 업적과 겹친다." "신화 속 황제와 현실의 무제를 연결시키는 것은 '정통'이라는 관념이다. 사마천이 그것을 채택하고 있는 까닭에 '정통'은 중국 문명 역사관의 근본이 되었다. 중국 문명 역사관은 '정통'의 역사관이다. '정통'의 역사관이란, 어떤 시대의 '천하天下'(지금으로 말하면 중국)든지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황제)가 분명히 한 명이어서 그 천자만이 천하를 통치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통'은 오제의 시대에서는 선양禪讓, 즉 어진 천자에서 다시 어진 천자로 물려주는 방식을 통해 이어졌다."(17-8)


"『사기』에서 「하본기夏本紀」, 「은본기殷本紀」, 「주본기周本紀」, 「진본기秦本紀」가 다루는 시대가 되면 제위는 방벌放伐, 즉 추방이나 정벌을 통해 손에 넣는 것으로, 이긴 쪽에게는 천명이 부여되고, 패한 쪽에게서 천명이 제거된다. 이것이 본래 의미에서의 '혁명革命'으로, '혁革'은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이때부터 '천자'는 하늘이 혁명을 명하는 자, 즉 새로운 천명을 받은 군주가 '정통'의 천자가 되었다. 그러한 과정이 하夏에서 은殷으로, 은에서 주周로, 주에서 진秦으로 거듭하여 교체되어, 마지막으로 사마천이 섬기는 한 무제가 천명을 넘겨받은 '정통'의 '천자'로서 천하를 통치한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쓰고 있는 것은 '정통' 황제의 역사인 것이다. 세계사도 아니고 중국사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국'이라는 관념이나 중국민족이라는 관념도, 사마천의 시대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한 관념은 19~20세기 국민국가 시대의 산물이다."(18)


제1장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역사의 창조


# 『사기』의 구성

1. 「본기本紀」 : 황제나 왕의 재위 중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 기술

2. 「표表」 : 정치세력의 흥망과 교체의 시간적인 관계

3. 「서書」 : 제도, 학술, 경제 등 문명의 여러 측면 개괄

4. 「세가世家」 : 진 시황제 통일 이전에 있었던 지방 왕가와 통일 이후 지방에 세웠던 역대 제후들의 행적

5. 「열전列傳」 : 저명한 인사의 행적


"『사기』가 하夏, 은殷, 주周를 진 시황제나 한 무제 등과 나란히 「본기」에 싣고 있는 까닭은 '정통正統'이라는 이론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유일무이한 ‘정통'(중국세계의 통치권)이 천하 어느 곳에서나 늘 존재하고 그것이 오제에서 하로, 하에서 은으로, 은에서 주로, 주에서 진으로, 진에서 한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정통'을 이어받는 왕조만이 '전통傳統'이 될 수 있다. '전통'을 이어받는 절차는 세습이 원칙이다. 오제五帝는 황제와 그의 자손이며, 요는 순에게로 순은 우에게로, '선양禪讓'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무력으로 하를 무너뜨린 은의 탕왕과 은을 무너뜨린 주의 무왕이 어떻게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왕조의 '덕德'(힘)이 쇠퇴하면 '천天'이 그 '명命'을 거두어들여('혁명革命') 새로운 왕조가 '천명'을 받게 되는 ('수명受命') 식으로 '정통'이 옮겨진다고 설명된다."(52-3)


제2장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단대사斷代史의 출현


"『사기』가 다루는 시대 범위는 오제五帝에서 시작하여 하, 은, 주, 진 왕조를 거쳐 사마천이 살았던 한 무제 치세의 중반까지이다. 이처럼 여러 왕조에 걸쳐 있는 체제의 역사서를 후세 중국사학사에서는 '통사通史'라 부른다. 반면 하나의 왕조만을 다루는 역사서를 '단대사斷代史'라 부른다.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고 약 180년이 지난 뒤에 반고班固(32~92년)가 『한서』 100편을 저술했다. 『한서』는 『사기』와 다르게 '단대사' 체제를 취해 서기전 206년 한 고조의 즉위에서 시작하여 한의 찬탈자 왕망王莽이 서기 23년에 멸망하기까지를 기술하고 있다. 즉, 실질적으로 한 왕조만을 다루는 역사서인 것이다. 『한서』 이후의 '정사'는 모두 '단대사' 체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한서』를 보면 고조에서 무제까지의 부분은 『사기』를 그대로 본뜬 데 불과한데, 반고가 왜 『사기』처럼 '통사'가 아닌 '단대사' 체제를 취했는가가 문제로 남는다."(60)


"한漢 황실의 외척으로 왕망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반고는 왕망을 매우 존경하였다. 유교가 반고가 살았던 후한 초창기의 통치원리가 되었던 것은 왕망의 공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망의 행적만을 기술하는 것으로는 역사가 되지 않는다. 왕망은 한 왕조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러한 전후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한 황실의 일대기를 기술해야만 하는 것이다. 앞서 사마천의 『사기』가 있어서 역사는 '기전체紀傳體'로 쓰는 것이 통념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기』의 속편이라면 몰라도 이래서는 한 무제의 치세 중반부터 시작하게 되어 역사의 서술 체계를 잡을 수가 없다. 매듭을 짓고 역사를 새롭게 기술하기 좋은 때는 한 왕조 초대 황제인 고조 유방劉邦부터이다. 그러므로 『한서』가 취한 '단대사'라는 체제는 왕망의 공적을 기술하기 위해 형편상 채택한 것이지 처음부터 '단대사'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81-2)


제3장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정통'의 분열


"중국 문명에서 역사가 '정통正統' 황제가 지배한 변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서술이라는 점은 그로부터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세계의 현실에서는 '정사正史'가 표현하는 중국인의 역사관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변화가 진행되었다. '정사正史'의 구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에 들어맞지 않게 되었지만 이미 『사기』와 『한서』를 통해 확정된 구조를 대체할 만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 중국의 역사가들은 한대漢代에 만들어진 구조의 범위 안에서만 역사를 기술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게 되었다." "『삼국지』가 서술하는 대상이 세 제국이니 그 체제가 「위서魏書」, 「촉서蜀書」, 「오서吳書」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실 황제皇帝를 다루는 「본기本紀」를 수록하고 있는 것은 「위서」뿐으로 「촉서」의 유비나 「오서」의 손권에 관한 행적은 모두 「열전列傳」으로 기술되어 있다."(93-4)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장화張華의 비호庇護를 받았던 인물이다. 장화는 문벌門閥 출신이 아닌 오로지 실력 하나만으로 사마소의 휘하에 들어갔고 마침내 진무제와 혜제의 측근으로까지 성장했다. 진수로서는 장화가 꺼릴 만한 얘기는 쓰지 않으려 했을 것이 당연하니 사마소의 부친인 사마의에게 불리한 내용은 가급적 생략하고 유리한 내용은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인지 『삼국지』는 정사正史 중에서도 그 서술이 간략하기로 유명한데 이를테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대개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이다. 당대의 역사를 쓰는 일이었기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러한 폐해는 진수가 죽은 지 150년 정도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아서 남조南朝 송宋의 배송지裵松之(372~451년)가 『삼국지』에 주석을 달아 다량의 사료를 인용함으로써 사실을 보충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99-100)


제4장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중화사상의 억지


"수당隋唐 시대의 황실은 모두 서위西魏의 우문태宇文泰와 함께 일어났다. 우문태는 선비인이었는데 534년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자 서위의 문제文帝를 지지하여 장안長安에서 독립하였고 동위東魏 고환高歡(역시 선비계)과 대립하였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정사正史'로서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을 한데 묶어서 『남사南史』를,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隋를 한데 묶어서 『북사北史』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 복수의 「본기本紀」가 있어서 각각의 국가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두 계열의 황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천명天命'이나 '정통正統'이 두 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선비계가 세운 왕조를 북조를 계승한 당나라의 정치적 입장에서 본다면 북조 역시 '정통'이라 주장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당나라와 그 이후 시대가 되면 '정사正史' 체제를 따라 역사를 충실하게 서술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 간다."(110-2)


"1004년 거란의 성종聖宗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북송을 침입하여 전주(하남성 북쪽의 복양현)에서 북송의 진종眞宗과 대치하였다. 여기서 진종이 거란의 황태후를 자신의 숙모로 대하면서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세폐歲幣로 바치겠다고 약조함으로써 거란과 북송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를 '전연의 맹약'이라 부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화의조건은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그리 문제될 것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정통'의 역사관에서 본다면, 북송으로서는 두 명의 황제가 병존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북송의 황제는 천하의 통치권을 가진 유일한 '정통' 황제가 아님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북송에게는 굴욕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새롭게 북방에서 대두한 유목민족제국을 가리켜 문화는 없고 무력만 강한 '이적夷狄'이라 멸시하는 식으로 울분을 토하였다. 바로 이것이 '중화사상'의 기원이다."(120-1)


"『자치통감』의 중화사상은 무엇보다도 남북조 시대를 다루는 태도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자치통감』은 진 시황제 이전인 서기전 403년에서 시작하여 북송의 태조 조광윤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해인 959년까지 약 1,362년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을 추적하여 기록한 역사서이다. 그런데 남북조 시대를 다루면서는 남조의 연호만을 표기하고 북조의 연호는 표기하지 않고 있으며, 동진東晉, 송宋, 남제南齊, 양梁, 진陳 등 남조에 속하는 황제들은 '황제'라 부르는 반면에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로 이어지는 북조의 황제들은 '위주魏主' '제주齊主', '주주周主'라 부르고 있다." "『자치통감』의 이러한 태도에는 북송과 대립하고 있던 거란제국, 즉 요遼나라를 북조北朝로 상정함으로 해서 요나라 황제는 '정통' 아니며 따라서 천하를 지배하는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한 가짜 황제라는 것을 멀리 돌아서 주장하고픈 심정이 숨겨져 있다."(122-4)


제5장 송렴宋濂 등의 『원사元史』─진실을 은폐하는 악폐惡弊


"원元나라에서 편찬한 『송사宋史』는 북송北宋과 남송南宋 모두를 '정통'으로 대우하고 있다. 그런데 『요사遼史』와 『금사金史』에서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황제들 역시 「본기」를 편찬하여 '정통'으로 취급하고 있다. 천하가 다시 한 번 둘로 갈라졌으며 그에 따라 '정통'도 둘이라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중국의 바깥을 지배했던 요나라의 지배권을 이어받아 중국의 북반부를 지배한 국가가 금나라이며, 금나라와 동맹부족이었던 몽골 부족에서 칭기즈 칸이 출현하여 금나라의 황제로부터 독립하였고 그가 건국한 몽골 제국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아가 남송까지도 멸망시켜 전 중국을 정복했기 때문에, 요나라와 금나라 그리고 원나라는 독자적인 일련의 '정통' 계열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원나라의 입장에서는 요나라의 황제나 금나라의 황제 모두 '정통'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원나라는 '정통'이 아닌 왕조가 되고 만다."(135)


"그러나 명나라의 시대가 되었어도 중국의 정사正史를 편찬하는 방식은 전과 변함없이 『사기』와 『한서』의 틀을 답습하였다. 명나라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가 지시하여 1370년에 완성을 본, 송렴宋濂(1310~1381년) 등이 편찬한 『원사元史』 210권은, 물론 몽골인이 남겨놓은 사료를 활용하여 편찬한 것이기는 하나 그 체제는 이전의 정사正史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어서 역사 서술의 대상도 정사가 간주하는 중국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138) "그렇기 때문에 정사의 전통에 따라 교육 받은 중국인이 『원사』를 읽게 되면, 원나라를 유목민이 중국에 들어와서 만들어놓은 중국식 왕조로 오해하는 일이 발생한다. 실제로 원나라는 온전한 유목제국이었으며, 중국식의 요소는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한다면, 한자로 명기되어 있는 관직명을 사용했다는 것뿐이다." "결국 변하지 않은 것은 '정사'의 서술형식일 뿐이지 중국의 현실 상황은 시대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거듭했다."(143-4)


제6장 기운사祁韻士의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傳』─역사에 대한 새로운 도전


"청나라가 멸망한 지 2년 뒤인 1914년에 총 68명의 학자들이 『청사淸史』 편찬에 투입되었으나,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여 관련 업무가 정체되어 있는 데다가 편찬관도 점차 줄어듦에 따라 청사관에 남아 있던 이들도 마음 놓고 편찬에 전념하기가 불가능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1928년에 겨우 원고가 대강이나마 갖추어져서 『청사고淸史稿』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150) "그런데 『청사고』에는 『명사明史』까지의 ‘정사’에는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번부세표藩部世表」나 「번부열전藩部列傳」이 대표적이다. 청나라에서 '번부'란 왕조의 발상지인 만주를 뜻하면서 청나라가 간접 통치하는 중국 이외의 주민을 가리킨다. 몽골의 호르친Qorchin 부에서 티베트까지를 아우르는 각 부의 역사를 기재해놓는 것은 이제까지의 정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까닭은 건륭제乾隆帝 시대인 1789년에 만주어에 능통한 한인 기운사가 편찬한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 120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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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역사가들 - 서양사 연구를 위한 입문
마크 길더러스 지음, 강유원, 이재만 옮김 / 이론과실천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서문


1장 역사 연구의 목적과 의도


"지식체계로서의 역사학은 서구 문명에서 장구하고 영광스러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정의와 강조점이 때때로 변해왔지만, 쓰여진 서사는 언제나 인간사에 집중했고 진실을 내세웠다. 역사가들이 진실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들의 서술이 타당하다고 믿을 만한 근거를 증거의 형태로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현대 미합중국 역사가 폴 콘킨은 간결한 정의를 제시했다. 역사란 〈인간의 과거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다.〉 여기서는 〈진실한〉과 〈인간의〉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역사를 전설, 우화, 그리고 신화와 구별하는 것은 진실의 질이며, 전설, 우화, 신화는 분명 어떤 측면에서는 타당할지 모르지만 대개 문자 그대로 보면 그렇지 못하다. 역사가는 인간의 과거에 관심을 기울이기에, 주로 자연의 사건은 인간의 활동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만 주목한다. 예를 들어 화산 폭발의 경우 주로 폼페이 같은 도시들을 묻어버렸을 때 주목을 받았다."(17-8)


"철학자 칼 포퍼는 문제의 다른 측면을 지적했다. 그는 무엇보다 사회과학자와 역사가가 의도적인 인간 활동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고찰해야 한다고 믿었다. 때로는 상황이 나빠진다. 역사적 행위자는 일련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뜻밖이거나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포퍼는 인간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의도와 결과 사이의 연계를 탐구하길 바랐다. 유럽을 정복하려는 나폴레옹의 시도는 봉건적 구조를 무너뜨려 근대화를 위한 길을 닦았다. 미합중국은 남베트남의 자결권을 보호하려고 군사력을 동원했을 터이지만, 오히려 그 작은 나라의 소멸을 앞당기고 말았다. 때로는 비극적이고 때로는 희극적인 그러한 아이러니는 인간의 경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원대한 의도는 길을 잘못 드는 경우가 아주 흔하므로 그것을 추구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목적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보다 잘 추정할 수 있다면 더욱 건설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24)


# 역사적 탐구의 3단계 모델

1.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역사적 행위자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라는 질문으로 탐구를 시작한다.

2. 〈왜?〉라는 질문을 던져 행위자들의 행동을 해명한다. 여기서 인간 활동에 대한 역사가들의 설명이나 해석이 제시된다.

3. 〈사태의 결과는 어떻게 판명되었는가? 누가 이익을 얻었고 누가 고통을 얻었는가? 그 결과는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사건의 결과를 평가한다.


2장 역사의식의 등장


"어떤 고대인들은 기록을 전혀 보관하지 않았고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역사를 복원할 수 없다. 반면 이집트인, 수메르인, 아시리아인, 히타이트인은 서기전 3천~2천 년부터 쓰여진 유물을 남겼다. 그중 다수는 위대한 인물들의 위업을 자세히 기록한 목록과 비문으로 이루어졌다. 이 기록들은 연대기에 대한 감각과 같은 원초적 역사의식의 등장은 입증했지만, 약간의 단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친다." "반면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고대인들보다 역사를 중시했다. 실제로 그들에게 역사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었고, 그들은 역사를 이해하여 자신들의 존재의 의미를 정립하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고대 유대인들은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의 신 야훼와 특수한 관계를 맺었다." "이처럼 유대인의 역사 저술은 비판적 혹은 이성적 탐구의 표명이라기보다는 종교적 경험과 신앙의 산물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굳건한 신념에 따라 해석했다."(33-5)


"희랍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던 시간 차원은 순환적 사고방식이었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같은 호메로스의 시는 웅장하고 숭고한 방식으로 과거의 영웅적·서사시적 이야기를 말했고, 희랍인들은 그것을 역사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상 그것은 역사가 아니었고, 흔히 초자연적 힘이 사건의 진행을 좌우하는 전설, 신화, 우화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처럼 역사적 정신과 무관해 보이던) 희랍인들은 역사적 사유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들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방법으로 비판적 역사를 발명했다. 고대 희랍어 '히스토르(histor)'는 법적 분쟁을 해결하는 학식을 갖춘 사람을 가리켰다. 그는 사실을 조사했고, 탐구를 통해 그 정확성을 판별했다. 그랜트는 '히스토리에(historie)'가 〈이성적 설명을 위한 조사와 현상에 대한 이해〉를 의미했다고 설명한다. 서기전 5세기에 두 천재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이성적 기법을 사용하고 역사 저술을 창시하여 지적 혁명을 일으켰다."(36-5)


"희랍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로마인들 역시 통치 엘리트의 정치적·군사적 활동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러나 그들은 희랍인들과 달리 공평성과 객관성에 관심을 덜 기울였다. 진지한 도덕주의자인 그들은 판단을 내리고 자신들이 보기에 타락한 것 혹은 모범적인 것을 묘사하는 편을 선호했다." "로마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정치적·군사적 주제에 관해 몇 권을 저술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로마제국 연대기》는 티베리우스 황제가 재위에 오른 서기 14년부터 네로 황제가 죽은 직후인 68년에 이르는 제국의 일들을 기술했다. 서기 2세기 초에 쓰여진 이 책은 로마 통치자들의 개성뿐 아니라 그들의 부패와 타락도 생생히 묘사했다. 전형적인 로마 역사가들처럼 한때 관리였던 타키투스는 공적인 덕을 칭찬하고 부도덕과 악행, 특히 황제들의 무절제와 그들을 둘러싼 이기적인 파벌을 비난했다. 그는 냉소적 아이러니와 깊은 비관론을 품은 채 그들을 책망하곤 했다."(41-3)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이원론을 체계 원리로 정립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은 역사철학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가 있다. 유대인의 개념에서 유래한 그의 시간감각은 희랍의 원운동 관념을 명백히 거부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끝없는 회전과 덧없는 반복은 사실상 신의 영향력과 의도를 수포로 돌려 역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천지창조라는 분명한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을 가진 선을 따라 역사가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은 중심적 사건을 나타냈고, 시간의 종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신자의 구원은 과정의 완성을 의미했다. 인간의 도시에 대한 신의 도시의 최후의 승리는 마지막 목적의 달성, 곧 신자들이 역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었다." "두 도시와 선을 따라 움직이는 사건들이 특징인 그 도식은 중세 전체와 그 이후에 기독교 저술가들을 강하게 자극했다."(46-7)


"중세 동안 역사적 주제를 다룬 저술가들은 1천 년 이상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력 아래에서 작업했다." "중세 저술가들이 보기에, 아버지의 권위를 가진 유일신은 논란의 여지 없이 인류 위에 위치하고 있었고, 사건들의 행로를 관찰했으며, 정기적으로 신성한 개입을 통해 그 사건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그러한 신앙의 표현은 인간 행위에 대한 논의와 현상에 대한 분석에 영향을 미쳤다. 연표와 연대기의 편자들은 종교를 인류의 궁극적인 관심사로 보았고, 역사는 목적론적인 설계에 따라 신이 미리 정한 결론을 향해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러한 성향은 인간 경험을 도덕주의적으로 심사하는 경향을 낳았다. 중세의 저술은 흔히 평결과 판결을 내렸고, 그리하여 그 객관성과 진실성에 관한 현재의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학자들은 객관성과 진실성이라는 쟁점을 근대적인 것으로 인정해왔다. 대다수 중세 연대기는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진실을 말하려는 의도였다."(48-50)


3장 근대의 역사의식


"중세 역사 서술과의 임박한 결별에 대한 최초의 암시들 중 하나는 14세기 르네상스의 초기 단계에서 나타났다.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평생 고대 로마 전통의 회복을 목표로 삼았다." "페트라르카는 (비록 기독교의 권위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로마를 조사하여 인간 존재와 그 세계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내세웠으니,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실제 사건들은 단지 상징적 중요성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다. 그는 인간의 분투와 성취가 실재한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 16세기에 또 다른 피렌체 사람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에 대한 저술을 통해 역사에서의 인간적 차원에 주의를 집중했다." "마키아벨리에게 역사란 자신의 처세술을 조명하기 위한 일종의 사례 모음집이었다. 그는 《피렌체의 역사》에서 자신의 도시에서 벌어진, 정치의 특징인 음모와 책략을 상세히 다루었고, 인간의 행위를 기회주의와 자기강화에 의해 동기화되는 것으로 묘사했다."(60-2)


# 르네상스 역사가들의 결함 : 역사적 유물을 분석할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고, 고대인들을 분석과 해석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그들을 숭배하고 모방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16~17세기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개혁과 잇따른 종교적·정치적 격변은 적대하는 파벌들이 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는 당파들이 논쟁을 위해 이용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적대하는 세력들은 현재 자신의 입장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모든 측면에서 과거를 끌어들였다."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황의 통제가 초기 교회로부터 물려받은 믿음과 실천의 순수성을 타락시켰다고 역설하며 적들을 공격했다." "일련의 논쟁은 기독교세계 전체를 갈라놓았고, 유럽 대학들에서 최초로 역사학 교수직이 마련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한 혁신은 장기적으로 보면 전문적 역사학을 보급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 획일적인 기독교적 역사 해석을 분열시키고, 역사에 대한 신성한 이해와 세속적 이해 사이의 간극을 벌렸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결과 보편사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하던 합의가 사라졌지만, 그것을 대체할 새롭고 통합적인 접근법은 곧장 등장하지 않았다."(64-5)


"17세기의 위대한 과학혁명은, 과거에 대한 신뢰할 만하고 정확한 서술을 고안하는 문제를 뒤흔드는, 또 다른 질문들을 제기했다. 뉴턴, 케플러, 갈릴레오의 발견에 이어진 과학적 세계관이 유럽 지식인들을 사로잡았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역사처럼 부정확한 탐구 분야에서 입증 가능한 지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자연과학의 옹호자들이 판단하기에) 역사가들이 수학적 이상에 부합하는 형태로 지식을 표현할 수 없다면, 그들은 〈혼란스러운 지각에 대한, 해롭지는 않으나 부적절한 향락〉에 빠진 것이거나 심지어는 〈진리에 이르는 길에서 위험한 오류〉를 시작한 것이었다." "자연과학의 옹호자들은 역사가들에게 지난 4세기 동안 가장 중요했던 인식론적 쟁점 가운데 하나를, 특히 자연과학이 인간사에 대한 연구에서 어느 정도로 지식과 이해의 형태를 결정할 수 있고 결정해야만 하는가라는 쟁점을 제기했다."(66-7)


"계몽주의 시대는 소나기를 퍼붓듯 역사 저술을 생산했고, 동시에 역사적 사유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세기에 유럽 철학자들은 인류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미신이 아닌 이성이 인간의 행위를 안내할 것이었다. 계몽주의 운동은, 일종의 필연적 결과로서, 전통적 종교의 권위에 대한 반란을 내포하고 있었다." "일선의 역사가들─볼테르, 데이비드 흄, 그리고 에드워드 기번─은 종교를 인간의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물로 묘사하여 종교의 역할을 비하했다. 볼테르는 성직자 계급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언제나 거대한 사기꾼이었다고 보았다. 실로 그들은 편협함, 불관용, 억압의 납품업자 역할을 했다. 인민을 종교적 미신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계몽주의 역사가들에게 합리성과 해방을 향한 인간의 진보를 알리는 이정표였다." "계몽주의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가치와 열망을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로의 일탈을 탈선이나 어리석은 시도로 여겼다."(70-1)


"비코는 지나치게 과장된 자연과학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응답으로서 〈새로운 학문〉을 내놓았다." "비코가 보기에 역사 연구의 적절한 수단은 철학에서, 곧 공리, 정의, 그리고 가설을 세우고 그로부터 추론하는 체계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또한 그가 언어, 역사 문학에 대한 경험적 연구라고 여겼던 문헌학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비코는 말, 전승, 이야기, 신화, 전설, 그리고 법률 체계의 뿌리를 중요한 실마리로 여겨 면밀히 조사했다. 볼테르가 보기에 지상의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초자연적 존재에 관한 이야기는 무지와 미신을 의미했다. 반면 비코가 보기에 그것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 관해, 그리고 우주에서의 자신들의 위치에 관해 가지고 있던 개념을 탐구할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비코는 맥락과 자기인식을 강조함으로써 19세기를 사로잡을 '역사주의'의 선구적 모형을 내놓았다."(78-9)


# 19세기 역사학의 갈래

1.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중에 생겨난 낭만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접근법(쥘 미슐레, 프랑수아 기조)

2. 독일에서 가장 두드러졌으며 역사의 흐름을 추상적·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간주(헤르더, 칸트, 헤겔)

3. 기록 연구에 기초한 탐구를 통해 실제 일어난 일을 밝히고자 했던 전문 역사학(역사주의 학파, 랑케)


"헤겔은 인간의 과거에 대한 헤르더의 전체론적 개념, 곧 각 단계는 뒤따르는 모든 단계를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통합성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을 지지했다. 헤겔이 보기에 계몽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는 과거를 왜곡하고 진정한 이해를 방해할 뿐이었다. 그는 역사가들이 지나간 시기와 시대를 그 자체의 관점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헤겔의 방법론적 조언을 받아들인 19세기 독일의 '역사주의' 학파는 "인간 경험의 다양성을 지적하였고, 서로 다른 사람들은 말 그대로 세상을 다르게 보았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이 과거를 이해하려면 과거 행위자들의 정신 세계에 공감하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들의 현실상(像)을 재구축해야만 했다." "이러한 방법론을 실천했던 일선의 연구자들 가운데 레오폴드 폰 랑케는 역사적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고자 했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 역사학을 근대적인 학문 분과로, 전문적인 학문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86-7)


4장 역사철학 : 사변적 접근


"(칸트와 헤겔을 거쳐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사변적 역사철학은 부분적으로는 전통적인 그 장대한 목적 때문에 20세기 들어 호소력을 일부 상실한 낡은 것이 되었다. 〈우리는 점점 더 적은 것에 관해 점점 더 많이 안다〉는 유명한 경구에 따르면, 고도로 전문화된 탐구를 수행하는 시대에 빈틈없는 관찰자들은 인간의 과거 전체를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한 신념이 거의 없었다." "많은 학자들이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렸지만, 사변적 역사의 오래된 형태들은 결코 소멸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것들은 어느 정도 변화된 형태로 살아남곤 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념과 융합했고, 세계 각지에서 지적이고 혁명적인 호소력을 유지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아널드 토인비는 보편적·철학적 역사를 구성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사변적 저술체계를 내놓았고, 라인홀트 니부어 같은 종교 사상가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리게 하는 역사에 대한 접근법을 사용했다."(108)


# 마르크스 이후의 사변철학

1. 마르크스-레닌주의 :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들은 잉여 자본의 이윤에 복무하는 제국주의 국가들로서, 이들이 벌이는 만성적인 투쟁은 혁명이 승리할 때까지 지속된다.

2. 종속이론 :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유의 변종으로서, 주변부와 식민지에서 선진세계로 부를 유출하도록 설계된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가 빈곤과 저개발의 원인이다.

3.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 문화를 생물학적 세계의 유기체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문화가 탄생기-청년기-성숙기-노년기-죽음의 단계를 거친다는 순환적 역사관을 부활시켰다.

4. 토인비의 〈역사 연구〉 : 각지의 문명들은 주어진 환경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노력에 따라 형태를 갖추었으며, 한 문명은 잇따르는 도전에 창조적으로 대응할 때 성장해나간다.

5. 프로이트 : 개인들의 정신분석에서 발견한 통찰력을 더 큰 인간 영역으로 확장했는데, 이는 〈인간 본성과 문화적 발전 그리고 원초적 경험의 침전물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6. 라인홀트 니부어 : 인간의 자유와 힘의 증대는 〈이기적인 욕망과 충동〉을 표출할 기회를 더 많이 제공했을 뿐이며,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신의 주권이 인간 경험 전체를 주재한다.


5장 역사철학 : 분석적 접근


"(과학적 역사와 전통적 역사 간의) 논쟁은 19세기 중반 실증주의의 도래와 함께 특히 두드러졌다. 주로 프랑스인 오귀스트 콩트의 저술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뒤이어 두 영국인 헨리 토머스 버클과 존 스튜어트 밀이 받아들여 정교하게 가다듬은 이 사상체계는, 자연과학의 기법을 지지함으로써 인간사에 대한 연구를 보다 체계적인 종류의 탐구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실증주의자들은 독특하거나 개별적인 사건보다는 인간사의 궤적에서 나타나는 균일성과 유사성에 주의를 집중했고, 곧이어 같은 종류의 경험들을 연결하고 있는 불변의 관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을 연구하기보다는 혁명의 현상들을 조사하려 했다. 실증주의자들은 자연 세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활동의 결과들을 지배하는 일반법칙들을 가정했고, 그것들을 발견할 만한 지적 역량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었다."(132)


"콩트, 버클, 그리고 밀이 선언한 실증주의 철학은 격렬한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논쟁에서 비판가들은 대개 〈관념론자〉라고 불렸는데, 이 학파는 독일인 빌헬름 딜타이, 이탈리아인 베네데토 크로체, 그리고 잉글랜드인 로빈 콜링우드로부터 나왔다. 그들 모두는 자연과학에서 이끌어낸 유추는 유효하지 않으며 복잡한 역사 저술에는 매우 다른 개념적 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말에 딜타이는 자연과학과 정신학을 근본적으로 구별하였다. 각각은 그 실천에 있어 확연히 다른 방법론을 필요로 했다. 딜타이에 따르면 자연과학자는 자연 내의 규칙성과 균일성을 다루는 반면, 역사가는 자연 밖의 독특하고 특정하고 되풀이될 수 없는 사건들을 다루었다." "크로체는 역사가들이 과거를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재사유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말했다. 콜링우드는 역사 연구의 대상은 (중층적인) 인간 정신의 활동이며, 역사가들은 정신의 작용을 연구함으로써 정신에 관해 배운다고 주장했다."(136-7)


"미합중국 역사가 칼 베커가 말했듯이, 〈실제 과거는 지나가버렸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재창조된 역사의 세계는 만질 수 없는 세계이다.〉 자연과학의 많은 형식들과는 달리, 역사가들이 실제 대상을 관찰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역사가들은 과거의 유물들을 이용해서 역사를 재구축하며, 언제나 관점의 제한을 받는 가능성(확실성이 아니라)에 대한 진술을 사용한다. 역사적 서사는 시각 혹은 관점을 거쳐야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시각이나 관점이 없다면 역사적 유물은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고 역사적 서사는 일관되게 전개되지 못할 것이다. 역사가들이 항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은 옳지만, 동일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반드시 지적으로 양립 불가능하거나 오류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각 견해는 다른 견해들을 풍요롭게 있게 만들 것이며, 이론적으로 볼 때 역사가들이 과거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이야기들의 수는 무한하다."(150)


6장 최근의 전문적 역사학


# 역사방법론의 분화

1. 경제사 : 산업화가 가져온 극적인 변화에 주목한 역사가들은 생산 체계와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벌이는 경제적 투쟁과 이익 추구를 분석하면서 수량화와 사회과학 방법론을 활용했다.

2. (새로운) 사회사 : 노동자, 농민, 인종, 여성 등의 범주에 속하는, 역사적 서사에서 완전히 익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지도 않았던 이들의 역사적 행위에 초점에 맞추었다.

3. 비서구사 : 여타 지역에 대해 우위를 점한 서구 중심의 보편사 혹은 세계사 개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사 개념들, 세계체제 분석, 탈식민지 연구, 서발턴 연구 등이 행해졌다.


"1930년대 독일에서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구성원들 가운데 비판적 사상가들은, 경제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한,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순진한 변종들을 거부했으며, 인간 행위를 형성하는 영향력들의 다양성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를 역설했다. 예를 들어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과 융합된 형태를 찾았다." "프랑스 학자들 역시 인간의 과거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형태의 이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1929년 마르크 블로흐와 뤼시앙 페브르가 창간한 영향력 있는 저널 〈경제사회사 연보〉를 중심으로 아날 학파를 구성한 역사가들은 당시 학계를 지배하던 역사의 흐름에 반대했다. 아날 집단은 페브르가 '사건사' 또는 '사건지향적 역사'라고 폄하한 정치, 전쟁, 외교에 국한된 강조를 거부했으며, 인간 실재의 많은 차원들을 보다 완전하게 파악하려 애썼다. 역사서술가 에른스트 브라이자흐가 설명했듯이, 이 프랑스 학자들은 인간 삶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새롭고 보다 완전한 역사를 구상했다."(171-2)


"아날 학파의 저작에서는 두 가지 특성이 두드러진다. 첫째, 아날 학자들은 전형적으로 집단의식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심성구조〉라 이름 붙은 이 현상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인간집단의 정신적·심리적 특성에 주의를 집중했으며 그럼으로써 개인들에 대한 제한적이고 근시안적인 관심 너머로 역사가들을 이끌었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집단성은 총체적 역사로 이어지는 설명을 정식화하는 데 거의 모든 것을 포함시켰다. 둘째, 앞의 경우와 비슷한 방식으로 아날 역사가들은 장기지속 개념을 사용했다. 실제로 시간 개념인 이 술어는 역사적 변화의 행로에 개입하는 구조적 연속성을 가리켰다. 장기지속은 무엇보다 토지, 바다, 기후, 그리고 식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조건들은 인간사를 안정시키는 효과를 나타냈으며 정치, 전쟁, 외교와 관련된 일시적 사건들보다 더 느린 속도와 리듬에 주목하게 했다. 더 나아가 이것들은 삶의 방식을 결정했다."(173)


"여러 종류의 특이성과 다양성이 오늘날 역사학의 기예를 특징짓고 있지만, 한 가지는 어느 정도 분명한 듯하다. 역사학은 더 이상 모든 독자의 정체성과 경험을 대변하는 공통의 이야기를 내놓지 않는다. 역사를 소비하는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백인 남성 엘리트들의 활동에 집중하는 서사들은 더 이상 만족이나 자극, 또는 진실에 도달할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일반적으로 동의하는 과거를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주의를 끌려고 경쟁하는 엘리트와 비엘리트,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인 중 하나만 강조하는 다수의 관점들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차이를 조화시킬 만한 뾰족한 방편은 없는 실정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질서정연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역사가들에게는 그러한 차이와 비일관성이 끔찍한 난관으로 작용하겠지만, 그러한 조건은 세계의 혼란과 서로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196)


7장 문화전쟁, 포스트모더니즘, 그 밖에 다른 쟁점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이성, 객관성, 그리고 진보의 가능성에 관한 계몽주의적 관념들이 전혀 타당하지 않다면,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분과에서 진실을 확증하는 부분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달갑지 않은 전망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포스트모던적 도전은 고도로 회의적인 형태의 철학 사상, 언어학, 그리고 문학 비평에서 흘러나왔다. 대체로 이 도전은 서구의 과학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세계관에 대한 환멸과 불신을 나타냈으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러한 세계관을 권력과 권위의 이용과 남용에 대한 전형적인 정당화로 인식했다. 포스트모던적 반대자들에게는 객관성이라는 관념 그 자체가 문젯거리가 되었다. 그들은 어떤 관찰자도 편견, 선입견, 이기심, 개인적 선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무언가에 관해 말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들에게 역사 속의 객관성이라는 관념은 두 배로 못마땅한 것이 되었는데, 객관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과거라 부르는 것은 순전히 상상력의 구조물이기 때문이다."(213-4)


"프리드리히 니체는 객관적으로 입증 가능한 서술이 역사가의 당파성 및 성향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역사학을 지식의 형태라는 지위에서 내쫓았다. 20세기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의 과학적 합리성이 신화적 사유 형태들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언어가 현실의 이미지를 형성하긴 하나 현실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복잡한 분석을 전개했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폴 드 만, 롤랑 바르트, 그리고 헤이든 화이트의 뒤이은 정교화 작업에서 언어 개념은 언어 그 자체를 가리킬 뿐 외부의 그 무엇도 가리키지 않는, 기호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자기 충족적 체계로 등장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역사가는 언제나 자신이 사유하는 세계 안에 갇힌 죄수이며, 역사가의 사상과 인식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범주들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모든 역사적 작업은 문학 비평의 범주들에 의해 판단되어야만 하는 문학 작업〉이 된다."(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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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3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해제 


1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와 사상의 발전 


"아테네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죽기 직전에 안티파트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상황(외국인 거주자)에 대해 불편을 느끼던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피력하고 있다. 〈아테네에서는 동일한 일들이 시민에게서만큼 이방인에게도 적당하지 않다. 아테네에서 지내는 것은 어렵다〉라고.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다른 시민들과 더불어 살며 폴리스에 [공동으로] 참여하는(koinonein) 삶 혹은 오히려 정치적 공동체(koinonia)로부터 차단된 외국인과 같은 삶, 이 둘 가운데 어떤 삶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논하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 점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학문 연구 활동에 전심전력으로 몰입할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출신이 아테네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웃사이더로서 아테네의 현실 정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그는 『정치학』에서 중립적 관점에서 당시의 정치 상황을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620) 


"『정치학』 제1권에서 자연적 노예제를 옹호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에게도 친절함을 베풀며, 자신을 돌봐준 노예들을 적절한 시점이 되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라고 유언을 남긴 점은 조금은 당혹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언장에 남긴 대로 노예를 해방시켜준 점에 비추어보면, '주인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자유라는 보상(athlon)을 얻을 수 있다'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자연에 의해 그들 양자에게 부여된 상응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 노예와 주인 서로에게 어떤 유익함과 친애(philia)가 있게〉 된다(1255b12-13)라고 말하는 점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노예인 한에 있어서는 그를 향한 친애가 없지만, 인간인 한에 있어서는 그를 향한 친애가 존재한다. ······ 인간인 한에서 친애 또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1161b2-8)라고 말하는 점을 고려하게 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사항이다."(625-6)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곳곳에 플라톤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들을 도입한 사람들이 우리의 벗들〉이라고 표명하면서 자신이 플라톤의 추종자에 속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가 스승에 대해 여러 분야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때조차도 그는 늘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채로 애정을 표명하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두고 〈사악한 사람은 찬양할 자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으로, 죽어야만 하는 인간들 중에서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플라톤만이 그 자신의 삶과 자신의 저술 탐구를 통해 인간이 동시에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줬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리학 작품을 가리키는 『오르가논』이 아카데미아 시절에 쓰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플라톤의 학생으로서 스승의 철학에 도전하는 일에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643-4) 


"『정치학』 제1권 제2장에서 피력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자연주의에 기초하는 세 가지 기본 테제는 이렇다. 첫째, 인간은 자연적으로(본성적으로) 폴리스적 동물이다. 둘째, 폴리스는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셋째, 폴리스는 자연적으로 개인에 앞선다. 다음으로 그가 냉정하고도 중립적인 태도로 정치체제에 대한 관찰자로서의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아테네에서 거류 외국인(metoikos)으로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옹호하는 정치체제는 다수가 번갈아 지배하는 민주정(인민정, 제3권 제11장 〈다중이 소수인 가장 좋은 사람들[tous aristous oligous]보다도 더 최고의 권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견해가 ······ 어쩌면 어떤 진리마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장될 수 있다고 여겨질 수 있겠다〉)과 가장 우월한 자가 지배하는 왕정(제3권 제17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이 경험한 아테네의 민주정과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의 절대적 왕권의 영향으로 추정할 수 있다."(655-6) 


# 제4권에서는 귀족정과 폴리테이아가 혼합된 '혼합정'이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상 제작학에 속하는 수사학을 '오르가논'(논리학)이나 정치학에 포함하는 것이 그 목적에 더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변증술이나 수사학적 방법이 논증을 만들기 위한 기술(dunameis tines tou porisai logous)임은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변증술에 대한 '짝패'(antistrophos)로 보았다. 하지만 수사학은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설득적 논증을 고안하는 것 이외에도 연설가는 청중의 심리와 그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만 한다. 즉, 연설가의 앎은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를 향한다. 그래서 수사학은 인간의 감정을 해부해야 하며, 설득을 목표로 하는 정치 연설가들은 경제적 문제, 군사적인 사항과 제도적인 정보를 포함한 앎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변증론』의 하나의 곁가지이자, 정당하게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도덕적 성품에 대한 탐구〉라고 말한다(『수사학』 1356a25-27)."(662-3)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은 페리파토스의 지도자였던 안드로니코스가 헬레니즘 시기의 학문 분류 방식을 좇아 편집했다는 것이 일반적 정설이다. 이에 앞서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크세노크라테스가 처음으로 학문을 삼분(三分)해서 분류했다고 하는데, 헬레니즘 시기의 스토아 철학의 주요 부분도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으로 분류된다.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벡커판의 편집 순서도 논리학에 해당하는 『오르가논』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이어서 자연에 대한 탐구에 해당하는 『자연학』을 비롯하여 생물학에 관련된 작품들, 그 뒤를 잇는 문자 그대로 '자연학 다음에 오는 것들'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이 자리하며, 다음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비롯한 실천 영역에 적용되는 윤리학 저작과 『정치학』이 그 뒤를 잇는다. 맨 끝자리에서는 제작에 관련된 탐구에 해당하는 『수사학』과 『시학』으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편집 순서는 그의 학문 분류 방식과도 얼추 맞아떨어진다."(671-2)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제6권 제1장에서 인간의 활동을 '안다(본다)', '행한다', '만든다'로 삼분하고 각각 이에 해당하는 앎을 이론지, 실천지, 제작지로 크게 구별한다. 이론지에는 자연학, 수학, 제일철학(혹은 신학), 영혼에 대한 탐구 등의 학문이 귀속되고, 실천지에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그리고 제작지에는 시학과 수사학 등이 포함된다. 이론학(epistemai)은 그 자체적인 앎을 추구하고, 실천학은 개인과 폴리스에서의 행위의 좋음과 관련되며, 제작학은 아름답고 유용한 대상을 만드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가령 선박 건조, 신발, 시(詩), 건강이나 힘과 같은 좋은 성질들이 실천학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오르가논'으로 총칭되는 논리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모든 학문을 위한 예비학이자 도구였지 결코 독립된 지위를 갖는 학문으로 분류되지 않았으며, 이런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논리학은 이론철학과 자연철학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될 수 있다."(672-3) 


"아리스토텔레스는 고결하게 저 높은 세계에 있는 것들에서만 아름다움(kalos)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생물학 탐구자로서 아무리 비천한 생명체들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가 언급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일화를 예로 들어보자. 철학자로 좋은 평판을 받던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나기 위해 그를 방문한 사람들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부엌의 화덕 가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멈칫거렸다. 그러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두려워 말라는 듯이 〈들어오시오. 여기에도 또한 신들이 있소이다〉(einai gar kai entautha thous)라고 말을 건넸다. 이 일화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하는 현상세계에서도 진리가 찾아질 수 있음을 보이면서 현상세계에 대한 탐구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모든 동물에도 무언가 본성적이고 아름다운 것〉(tinos phusikou kai kalou)이 있음을 알기 위해 우리는 주저 없이 동물에 대한 탐구에 다가서야만 한다는 것이다."(678-9)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윌리엄 키스 C. 거스리) 


1.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목표를 독단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자체의 명료화와 문제 자체들이 포괄하고 있는 난점(아포리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에 두었다. 

2. 직접 관찰한 경험과 상식을 기반으로 학적 탐구를 수행─플라톤과 비교하여 강력한 경험론적 측면─하고 있으며, 관찰과 이론이 일치하는 경우에 그 이론을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3.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정초하는 일반적인 전제를 찾는 방법이 바로 논리학이라고 보았기에, 자기의 학적 인식의 기반을 이루는 논리학을 독립적인 포괄적 체계로 논구했다. 

4. 아리스토텔레스를 특징 짓는 사유 형식은 목적론적인 사유 방식이며, 그에 따르면 한 사물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작업은 사물의 목적인을 제시하는 것과 동일하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김재홍) 


1. 해당하는 주제에 대한 일련의 엔독사(통념, ta endoxa)를 수집하여 하나의 부류로 분류한다. 여기에 속하는 엔독사는 인간이 함께 공유하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것들이다. 

2. 이것들 중에 적절한 것과 부적절한 것을 탐지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 작업은 해당 학문의 원리와 사실에 부합하는가와 관찰에 부합하는가라는 '논리적 정합성'에 따라 행해진다. 

3. 부적절한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부류의 엔독사를 만들어낸다. 가장 유력한 것들을 포함하는 최적의 부류를 선택하기 위해 매듭을 풀고, 왜 그것들이 그런지를 밝혀낸다. 

4. 경험적으로 수집된 '현상'을 개념 분석하여 정교하게 해석한 엔독사는 충분하게 증명된 것들이다. 최종적으로 남겨진 엔독사는 한 주제의 탐구를 위한 참된 후보가 될 수 있다. 


"『변증론』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탐구의 중요한 도구가 되는 변증술적 방법(dialektike)을 논하는 저작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인 분야와 경험적 탐구에 적용될 수 있는 학문 방법의 도구라 할 수 있다. 그는 학적 탐구에서 잠정적이고 단계적인 절차를 밟는 접근 방법을 취한다. 그 방법과 절차는 우선, 다루어질 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정보를 수집하여 그 문제를 적절하게 형식화하여 진술한 다음, 그 진술들이 문제의 핵심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질문으로 정립되고 있는지를 검토하고, 이어서 그 논쟁점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원래 사유 방향에 부적합한 것들은 폐기하며 새롭게 문제를 정립해나가는 길을 찾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적인 탐구의 태도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의 철학적 체계는 독단적이지 않으며, 그의 철학 방법은 진리 탐구 모형의 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704) 


"인간의 행위와 감정과 관련된 실천철학의 목적은 원칙적으로 〈앎이 아니라 행위〉이다. 앎(gnosis)은 수학과 같은 정확성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행위(praxis)를 목적으로 하는 윤리학은 개연성만 확보하면 되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제3장에서는 윤리학의 주제와 물음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윤리학적 주제들은 늘 어떤 가변성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대강에서 또 개략적으로(pachulos kai tupo) 참을 밝히는 데 만족헤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것'들에 대해 논의하고 또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전제'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에,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것'(결론)들을 추론하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윤리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그 주제의 본성(phusis)이 허용하는 한, 그만큼의 정확성을 추구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수학자에게는 엄밀한 '증명'을 요구하며, 수사학자에게는 설득적 논의만을 요구한다."(705)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의 임무가 아포리아의 해소에 있음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철학에 대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규정을 떠올리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곳에서 〈아포리아를 해소한다는 것은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법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그에게서 난점을 푸는 일(euporean)은 먼저 난점이 왜 일어나는지를 상세하게 밝혀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diaporean', 즉 난점을 상세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를(aporean) 깨달아야만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중에 가서 아포리아를 해소한다는 것은 애초의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diaporean'의 과정과 'aporean'의 과정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양자가 동의어로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diaporean'은 난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어진 난제에 얽혀 있는 사항을 상세히 들춰내는' 작업을 의미한다."(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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