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 오늘의 유럽을 낳은 최초의 영토 전쟁 1618~1648
C. V. 웨지우드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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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독일과 유럽: 1618년


"17세기의 전반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정부의 일상 업무는 짜임새가 없었고, 정치인들은 별다른 지원도 받지 못하고 활동했다. 단적으로 말해 효율성과 충성심은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대다수 정치인들은 자금과 정보의 항구적인 누수가 불가피하다는 전제에서 활동해야 했다. 당시 유럽의 외교 속도는 통신과 교통의 중요한 수단인 말이 달리는 속도와 같았다. 정치적 필연성이 자연의 무의미한 개입에 종속되어 있었던 셈이다. 강풍이 불거나 폭설이 내리기만 해도 국제적 위기가 완화되거나 가속될 수 있었다." "정보 전달이 여의치 않은 탓에 여론이 지배 세력에게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도시에서는 정보가 어느 정도 확산되고 초보적인 여론의 표출도 가능했으나, 정치적 정보를 흡수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부유층과 지식인층뿐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힘도 없고 무지하고 무관심했다. 대체로 개별 정치인의 공적 행위와 사적 특성이 균형을 이루지 못했고, 왕조의 야심이 유럽의 외교관계를 지배했다."(30)


"서유럽 나라들은 대부분 귀족정치의 정부 형태를 취했고, 토지가 곧 권력인 사회였다. 그런데 토지 대신 화폐가 실질적인 힘으로 등장한 상황에서도 그런 체제가 온존되었다. 정치권력을 장악한 소수는 그 권력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부를 갖지 못한 반면, 상인계급은 재력은 갖추었으나 권력을 갖지 못했다. 따라서 양측의 대립은 점차 빈번해졌다." "이렇게 볼 때 중간계급이 정치적 발언권을 요구하게 된 근원적인 요인은 자유주의적 원칙에 기인한 것이라기보다는 효율적인 정부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정부 아래서 편안하게 살기보다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정부 아래서 불편하게 사는 것을 더 좋아할 만큼 고결한 사람은 거의 없다. 보헤미아의 대의정부가 실패한 이유는 타도한 전제정치보다 행정에 크게 서툴렀기 때문이다.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가 무너진 이유도 신이 내린 왕권이 취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부가 무능했기 때문이다."(33-5)


"한편, 대립하는 종파들 간의 증오는 더욱 격화되었다. 자신이 사는 나라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늘 위험에 처했다." "종교개혁 초기에 가톨릭 지배자들은 약점을 가진 탓에 신교 신민들에게 상당한 양보를 해야 했다. 그래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신교 국가 내의 가톨릭 공동체보다 가톨릭 국가 내의 신교 공동체가 더 많았다.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가톨릭 국가들은 내부의 신교 공동체를 용인했다. 당연히 가톨릭 측은 점점 불만과 위기를 느꼈다. 반면에 신교 측은 자신들의 특권을 약간만 침해당해도 공식적으로 신교 정부를 통해 항의를 표출했다." "결국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교권을 재통합한다는 꿈을 버렸다. 가톨릭이 재통합에 실패한 것은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두드러진 원인은 있다. 교회의 운명이 오스트리아왕실(합스부르크)과 긴밀하게 얽히면서 왕실의 영토 욕심이 가톨릭교회를 옹호했어야 할 세력들을 분열시켰던 것이다."(42-3)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지배자들은 서로 300년 동안이나 반목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에스파냐에게 당면한 문제는 네덜란드의 반란이었다. 네덜란드 북부의 신교 지역은 네덜란드 연방을 형성해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1527~1598)에게 반기를 들었다. 40년 간의 전쟁 끝에 1609년 그들은 다음 왕인 펠리페 3세(1578~1621)와 강화 조약을 맺고 독립과 향후 12년 동안의 휴전을 얻어냈다. 하지만 네덜란드 지역은 포기하기에 너무도 중요했으므로 에스파냐 정부는 휴전 기간을 평화의 서곡으로 여기지 않고 반란을 최종적으로 진압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 활용했다. 1621년 휴전이 끝나자 곧바로 유럽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모든 신교 군주들은 자유 공화국의 소멸을 막고 합스부르크 왕조와 가톨릭교회의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 부르봉과 합스부르크의 숨겨진 적의, 에스파냐 왕의 임박한 네덜란드 공격, 이 두 요인이 1618년 유럽 정치인들의 행동을 지배했다."(45-6)


"에스파냐에서 폴란드까지, 프랑스에서 스웨덴령 핀란드의 동쪽 경계와 발트 해의 동결항(凍結港)들까지 유럽 정치의 주요 무대는 독일이었다. 독일 지역에는 독립 소국들의 방대한 집단이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칭으로 뭉쳐 중부 유럽의 지리적·정치적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부르봉 왕조의 경쟁, 에스파냐 왕과 네덜란드의 경쟁, 가톨릭과 신교의 경쟁에서 독일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에스파냐 왕은 군대와 돈을 북이탈리아에서 네덜란드로 쉽게 수송하려면 라인 강이 필요했다. 프랑스 왕과 네덜란드도 에스파냐의 물자를 차단하기 위해 라인 강 주변의 동맹 세력이 필요했다. 또 스웨덴 왕과 덴마크 왕은 발트 해 연안에 동맹 세력을 구축해 서로 다투었고, 폴란드 왕이나 네덜란드와도 싸웠다. 교황은 독일에 합스부르크 황제에 반대하는 가톨릭 세력을 형성하고자 했으며, 사보이 공작은 황제로 선출되기 위한 공작을 꾸몄다."(53)


"황제와 신하들 간의 대립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독일의 숙명이었다. 자유시들이 군주들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군주들이 황제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보다 한층 더 심했다. 자유시들은 '독일의 자유'라는 원칙에 동조했으나 군주들도 과연 진심으로 동조하는지는 회의적이었다. 특히 시민들은 과거에 상전으로 모셨던 지주 귀족들을 의심했다. 그래서 믿지 못할 집단과 행동을 같이해 뭔가를 얻어내려 애쓰느니 차라리 지금 이대로가 더 낫다고 여겼다. 그 반면 교회의 가톨릭 지배자들은 가톨릭 황제의 편을 들었다. 그들은 황제가 적대적이고 때로는 이단적인 군주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리라고 믿었다. 이렇게 지주, 시민, 성직자, 농민이 각자 계급의식을 고도로 발전시킨 탓에 공공의 이익보다 분파적 이해관계가 더 중시되었다. 또한 각 집단들이 따로 군사 조직을 거느리게 되면서 그렇잖아도 위험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63)


"붕괴하는 제국에 통합성을 부여한 것은 공통의 신앙이었다. 그러나 신교가 동맹관계에 있던 공국들을 흩어놓고, 야심찬 군주들이 그 틈을 타 황제에게 반기를 들자 수백 년간의 전통이 무너졌다." "서로 반목하는 가톨릭, 루터교, 칼뱅교에는 한 가지 공통적인 요소가 있었다. 군주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각각의 종교를 이용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자유를 요구하는 군주들이 절대주의 원칙을 고수하는 것은 너무 노골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을 황제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운동과 상인과 농민의 격렬한 봉기는 아래로부터의 반란과 위로부터의 억압 사이에 끼인 이 불운한 지배자들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한편에서는 군주들과 황제의 다툼, 다른 한편에서는 군주들과 백성들의 다툼이 진행되면서 군주들은 한 손에는 자유의 횃불을 움켜쥐고, 다른 손에는 독재의 칼을 뽑아들었다."(67-9)


2장 보헤미아의 왕위: 1617~19년


"보헤미아 왕국은 크지 않았으나 그 왕권에는 슐레지엔과 라우지츠 공국, 모라비아 변경국의 군주권까지 달려 있었다." "가장 부유한 보헤미아가 다른 세 지역을 지배했다. 이곳에서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막 태동하기 시작한 신앙의 독립, 민족의 통합, 정치적 자유를 추구하는 운동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체코인은 언어에서 독일인과 구분되었고, 종교와 기질에서 슬라브인과 달랐다. 자립심이 강하고 수완이 좋은 그들은 예부터 이재에 밝기로 유명했으며, 노동의 가치를 찬양하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비잔티움의 전도사들에게서 그리스도교를 배웠지만 예배 형식을 자신들에게 맞게 변형시켰다. 이후 가톨릭교회에 편입된 이후에도 그들은 예배를 볼 때 토착 언어를 사용하고, 자신들의 수호성인으로 그리스도교의 유명한 성인이 아니라 자신들의 왕이었던 바츨라프 1세(907~929)를 선택했다. 이처럼 보헤미아에서 왕의 지위와 권위는 다름 아닌 백성들의 애정에서 비롯되었다."(99)


"보헤미아의 위험은 정치와 종교가 지나치게 활발하고 여러 종교와 계층의 요구가 상충한다는 점이었다 국가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고, 종교적 자유를 쟁취하려는 세력도 있었으며, 중앙정부가 의회를 장악해야 한다고 보는 세력도 있었다." "루터파, 양형영성체파, 칼뱅파, 가톨릭은 각각 서로의 불관용을 두려워했다. 사실상 보헤미아의 독립을 위해서는, 여러 세력들 간의 균형을 유지해주고 있긴 하나 예전만큼 인기가 없는 하나의 왕조, 즉 합스부르크 왕을 폐위시켜야만 했다. 어쨌든 이 불편한 중립은 점차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마티아스 황제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제국과 보헤미아에서 그의 후계자는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이미 악명이 널리 알려진 슈타이어마르크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될 공산이 컸다. 그렇게 되면 그는 슈타이어마르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헤미아의 신교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부를 철저히 짓밟을 게 뻔했다."(103)


# 양형영성체주의(兩形領聖體主義, utraquism) : 평신도들은 성화된 빵만 먹고 사제들은 빵과 포도주를 먹는 가톨릭교회식 성만찬을 개혁하려 한 운동


# 1617년 6월 17일 페르디난트 선출 표결 통과


"8월 28일 암울한 예측이 빗발치는 가운데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 선출이 진행되었다." "마침내 새로 선출된 황제가 보장해야 할 신민들의 법적 권리들이 기록된 두툼한 문서가 페르디난트에게 건네졌다. 그는 신속하게 문서를 훑어본 뒤 마치 춤이라도 추려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선서를 하러 앞으로 나갔다. 바깥에서는 새 황제가 관례에 따라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낼 때 환호를 보내기 위해 수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군중 앞에 나서기 직전에 프라하의 소식이 전해졌다. 군중 가운데 일부가 술렁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그 소식을 옮겼다.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에서 폐위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흥분에 휩싸여 소란스러워지는 가운데 군중들 위쪽의 큰 창들이 활짝 열렸다. 발코니에 페르디난트가 등장했다. 그는 보헤미아 왕위에서 쫓겨났으나,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선거와 선서까지 마친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황제였다."(131-2)


"보헤미아의 왕과 황제가 새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에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곤혹스러워졌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그의 표는 페르디난트에게 갔는데, 거의 동시에 그는 페르디난트에게 강제로 왕관을 빼앗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프리드리히는 명분상 반란 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도덕적인지, 황제에게 의무를 다하는 것이 신성한 일이지 둘 다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한편에는 독일 군주로서의 그의 충성심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보헤미아인들에게 무분별하게 일고 있는 그의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만약 그가 페르디난트를 버린다면 그는 황제와 싸우는 게 아니라 제국의 경계 바깥에 있는 지역의 폐위된 왕과 싸우는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보헤미아를 버린다면 그는 자신을 믿어준 사람들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었다. 전자는 뻔한 정치적 핑계에 불과하고, 후자는 도덕적 배반이 된다. 1619년 9월 28일 그는 비밀리에 반란 세력에게 왕위를 받아들이겠다고 통지했다."(133-5)


3장 에스파냐의 경보, 독일의 경종: 1619~21년


"1620년 3월 페르디난트가 뮐하우젠에서 소집한 회의는 반대파의 힘과 단결을 보여주었다." "참석자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가톨릭동맹, 요한 게오르크 작센 선제후의 대표단이었다. 여기서 페르디난트는 오버작센 지구에 속한 세속화된 주교구의 신앙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루터파와 가톨릭의 지지를 모두 얻었다. 그 대가로 그들은 보헤미아가 제국의 일부분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프리드리히는 제국의 평화를 해쳤으므로 법에 의해 가혹한 징벌의 대상이 되었다. 4월 30일 프리드리히에게 6월 1일까지 보헤미아에서 물러나라는 황제의 명령이 반포되었다. 이 최후통첩을 거부하는 것은 곧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1620년 6월 1일부터 독일의 모든 충성스러운 사람들은 공공의 평화를 의도적으로 파괴한 프리드리히를 반대해야 했다. 이제 황제는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보헤미아의 적법한 왕으로서 모든 무력을 동원해 반역자를 처단할 터였다."(144-5)


"프리드리히의 비극은 결말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일부 가톨릭 예언자들은 그가 겨울 한 철 동안만 왕위에 있을 것이라며 그를 '겨울왕'이라고 불렀다. 예언과 달리 그는 봄과 여름까지 버텼지만 매달 재앙의 새로운 전조가 나타났다. 1620년 초에 그는 새 왕국의 주요 지역을 방문했다. 브르노, 바우첸, 브로추아프에서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무리가 올로모츠의 교회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그 도시의 신민들 가운데 절반이 그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순진하고 선의를 가진 지배자가 그처럼 빠른 시간에 미움을 사게 된 경우도 드물다. 프리드리히는 새 신민들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대신들에게는 경멸을, 백성들에게는 증오를 샀다. 신하들 앞에서 소심해지는 성격과 익숙치 않은 보헤미아어, 자신이 수호하겠다고 서약한 체제의 특질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평소만큼의 지성도 보여주지 못했다."(157-9)


"신교 군주들은 프리드리히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또한 가톨릭 세력은 페르디난트를 지지하는 것으로 외국의 간섭을 방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유럽에는 프리드리히나 보헤미아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오스트리아 왕가를 두려워하거나 라인 유역을 탐내는 군주들은 많았다." "프랑스, 영국, 덴마크보다 당장 심각한 위험에 노출된 나라는 네덜란드 연방이었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서둘러 덴마크 왕과 조약을 맺는 한편 만스펠트에게 서신을 보내 신교의 대의에 충성할 경우 후히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1621년 4월 9일 에스파냐와의 휴전기간이 종료되었다. 그 닷새 뒤 보헤미아 왕과 왕비는 헤이그에 도착해 지배 군주에 걸맞은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4월 27일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라인 영토 탈환을 위해서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아들이는 조약에 서명했다. 이리하여 독일 비극의 제2막이 시작되었다."(179-81)


4장 페르디난트 황제와 막시밀리안 선제후: 1621~25년


"자신의 불행한 나라에 대한 페르디난트의 판결은 곧바로 내려졌다. 보헤미아의 선출 군주제는 폐지되고, 왕권은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세습되었다. 신앙의 자유를 허가한 '황제의 칙서'는 프라하가 약탈될 때 빈으로 보내졌으나, 페르디난트가 직접 찢어버렸다는 과장된 소문도 돌았다." "칼뱅교와 양형영성체주의 이단들은 뿌리가 뽑혔으나, 루터파 교회는 작센 선제후와의 약속을 감안해 계속 용인되었다. 페르디난트는 세 가지 방침을 정했다. 반란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정치·경제적으로 파멸시키고, 민족적 특권을 폐지하고, 신교를 근절하는 것이었다. 리히텐슈타인은 불안한 마음에서 자비를 베풀거나 적어도 신중하게 조처해야 한다고 항의했으나 그의 의견을 무시되었다. 보헤미아에 대한 응징은 곧 새 정책의 출발점이었다. 이제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는 신앙 면에서 통일된 하나의 국가가 될 것이며, 가톨릭 유럽의 재건에 가장 중요한 토대인 빈에서 그 관리를 맡을 것이었다."(186-7)


"막시밀리안이 선제후가 되자, 페르디난트도 미처 대비하지 못한 거센 항의가 일었다. 에스파냐 대사는 축하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고, 이사벨 대공비는 공개적으로 반대와 불만을 토로했다. 작센 선제후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도 새 동료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제 페르디난트는 자기 힘의 한계를 알았다. 그의 힘은 그의 군대가 통제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군대는 여전히 가톨릭동맹과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레겐스부르크의 신교 대표들은 불만의 표시로 더 이상 전쟁 비용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들은 저항에 나서기에는 힘이 달릴지 모르지만, 자신들의 자유를 공격하려는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선제후 직위의 양도로 추방령은 완료되었지만, 결국 입헌주의자들이 쫓겨난 프리드리히에게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동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가톨릭 군주들과 신교 군주들의 분열은 위험할 정도로 커졌다."(211-2)


"1623년 한 해 동안 독일의 자유와 신교의 대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합스부르크 왕조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상황은 프리드리히의 정책을 계획한 사람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에스파냐 왕녀와 웨일스 공(후에 영국 찰스 1세)의 결혼 협상을 추진하던 영국 왕 제임스 1세는 에스파냐 측에 신뢰감을 보여주기 위해 독일에 남은 프리드리히의 마지막 요새인 프랑켄탈에서 영국군을 철수시켜버렸다. 또한 동시에 그는 프리드리히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촉구하면서 프리드리히의 맏아들을 황제의 딸이나 막시밀리안의 조카딸과 약혼시키려 했다. 스웨덴 왕과 덴마크 왕은 같은 편에서 함께 싸우려 하지 않았다. 프랑스 정부는 내부 혼란에 시달렸고, 오라녜 공은 네덜란드 국경을 방어하는 데 급급해 라인 영토를 되찾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그 원대한 계획 중 실천된 것은 베틀렌 가보르의 헝가리 공격과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이 니더작센 지구로 진출한 것뿐이었다."(234)


"리슐리외는 합스부르크 왕조를 타도하기 위해 유럽에서 신교의 대의를 끌어안았지만, 사정은 무척 복잡했다. 그 자신은 비록 귀족들과 외교권에서 지배적인 종교에 대해 냉소적인 무관심으로 일관했어도 여전히 신앙심이 독실한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비정통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 군주제의 안정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슐리외에게는 다행히도, 슈타트론 전투에서 패배했던 바로 그날 로마에서 바르베리니(1568~1644)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누스 8세로 선출되었다." "우르바누스 8세는 진심으로 그리스도교권의 평화를 원하면서, 합스부르크 왕조를 유럽의 항구적인 위협 요소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의 평화를 바랐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합스부르크의 침략을 저지하는 세력을 거부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므로 프랑스 가톨릭 세력은 자신들이 낸 세금이 네덜란드와 독일의 이단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어도 발 뻗고 편히 잠잘 수 있었다."(245-6)


"바이에른을 제외한 리슐리외의 동맹자들은 공동의 적을 향해 한 발 더 다가섰다. 1624년 6월 10일 콩피에뉴에서 프랑스 정부와 네덜란드 정부는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숙명적 라이벌이자 적수들이 마침내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닷새 뒤 영국도 가담했다. 7월 9일에는 스웨덴 왕과 덴마크 왕이 합류했고, 11일에는 프랑스, 사보이, 베네치아가 발텔리나에서 공동 작전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10월 23일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고, 11월 10일에는 프랑스 공주 헨리에타가 웨일스 공과 약혼했다." "전쟁은 독일 내에서 시작되었고, 독일 내에서 끝나게 되었다. 제국에 못지않게 정치가 복잡다단한 독일 각지의 공국에서 7년간 전쟁이 지속되자 이제 리슐리외도 통제할 수 없는 사태로 흘러갔다. 북독일의 주교구들만 해도 분쟁거리가 너무 많았다. 상황은 순식간에 리슐리외의 손아귀를 벗어났다."(250-1)


5장 발트 해를 향해: 1625~28년


"합스부르크 왕조는 적들이 프랑스의 도움을 받자 그에 대응해 자신들은 발렌슈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또 적들이 발텔리나를 점령하자 그들은 브레다를 빼앗았다. 이제 위험한 북부의 연합이 남았는데, 이에 대해서도 합스부르크는 계획이─북부 연합과 사이가 좋지 않아 고립될 것이 분명한 한자동맹을 끌어들인다는─있었다." "6월에 발렌슈타인의 임무는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약속한 대로 군대 모집을 끝내고서, 잘 무장된 병력을 거느리고 보헤미아 국경에 이르렀다." "새로운 제국군이 전장에 투입되고 브레다가 함락되자, 발텔리나의 프랑스군도 점점 버티기 어려워졌다. 리슐리외 정부는 그 고개를 무한정 점령하고 있을 만큼 자원이 풍족하지 못했고, 국내 사정도 불안정했다. 언제라도 궁정 음모나 지역 반란이 일어나면 균형이 무너질 태세였다. 게다가 북부에서는 이지 그가 추진한 대동맹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258-9)


"프랑스가 동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을 때 마지막 재앙이 닥쳤다. 리슐리외는 위기에 처한 이 방대한 동맹을 떠받치는 아틀라스였다. 하지만 1626년 봄 프랑스에서 위그노의 반란이 일어나 국내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는 발텔리나를 점령하고 있던 병력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오라녜 공은 작은 함대를 마련해 라로셸의 위그노 요새를 공략하려 했으나, 네덜란드 선원들은 동료 신교도를 공격하는 배에 타지 않겠다고 버텼다. 이처럼 때를 잘못 맞춘 네덜란드 선원들의 열정은 결국 독일 신교의 대의가 붕괴하는 데 일조했다. 1626년 3월 26일 리슐리외가 몬손 조약을 맺고 발텔리나에서 철수하자 그 고개는 다시 에스파냐에게 활짝 열렸다. 이제 신교의 대의와 독일의 자유를 옹호하는 세력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만 남았다. 다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동맥이 트였다."(265-6)


"1625~26년 유럽에서는 합스부르크 왕조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또한 세습 영토에서는 그보다 더 중요하고 비극적인 움직임이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제국의 채무를 갚기 위해 희생된 오버외스터라이히의 농민들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치하에서 심한 착취를 당했다." "겨우내 농민들은 속수무책으로 시달렸으나, 1626년 봄이 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5월 17일 하이바흐에서 명령을 집행하러 보낸 제국군 병사들과 주민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막시밀리안이 파견한 총독 헤르베르스토르프가 사태를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농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1만 6천여 명의 농민들이 지역 정부가 있는 린츠로 갔다. 그들이 든 검은색 깃발에는 저승사자의 머리와 '어쩔 수 없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그들은 반란에서 이기든 지든 반란 지도자들이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결국 그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다."(272-3)


"유럽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바이에른 공작이 선제후에 오른 것도 정치인들에게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지도적인 군주였고, 반강제로라도 선제후들의 재가를 얻어냈다. 그에 비해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 왕의 신하인 보헤미아 귀족보다도 지위가 더 낮은 소지주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뷔르템베르크와 헤센의 지배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 군주의 지위에 오르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발렌슈타인이 메클렌부르크 공작이 된 지 17일이 지났을 때, 마인츠 선제후는 페르디난트에게 동료 선제후들의 이름으로 된 성명서를 전달했다. 발렌슈타인에게 계속해서 제국군의 지휘를 맡기되, 그를 군주로 선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누가 마인츠 선제후의 옆구리를 찔렀는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페르디난트와 그의 장군이 승리의 행진을 거듭하는 동안,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은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까지는 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287-90)


6장 교착: 1628~30년


"발렌슈타인의 힘이 커지자 페르디난트는 토지반환령(Edict of Restitution)을 적절히 집행하면 합스부르크 권력에 이익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다. 1628년 후반 페르디난트는 대내 정책에서 그 구상을 앞세웠다." "페르디난트는 전체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즉, 전체적으로는 독일 전역이 대상이고, 구체적으로는 마그데부르크 주교구에 해당하는 계획이었다. 우선 그는 1555년 이후 신교 측에 부당하게 편입된 모든 교회령을 원래대로 복원하려 했다. 제국의회에서 이 조치를 가결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에 황제의 칙령으로 집행할 작정이었다. 여기에는 신교도 축출과 아울러 황제의 통치권을 시험한다는 이중의 목적이 있었다. 페르디난트가 신민들에게 강요한 변화는 혁명에 가까웠다. 독일 북부와 중부 전역의 경계선들을 모조리 바꾸는 엄청난 변화였다. 세속 재산으로 부를 얻은 군주들이 한순간에 하급 귀족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303-5)


"1629년 3월 6일 페르디난트는 무방비 상태의 독일에 토지반환령을 반포했다. 대단히 가혹한 명령이었다. 우선 칼뱅파의 합법성이 부인되었고, 다음으로 교회 토지에 대한 신교도의 매입 권리가 부인되었다. 교회의 토지는 양도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합법적으로 매매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래 교회가 소유했던 토지를 정당하게 취득한 사람이라 해도 피해를 입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교회 토지와 관련된 이전의 법적 판결이 일체 부인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황제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독단적으로 법과 법적 판결을 바꾼 것이었다. 행정관들은 혹시 누군가가 제국의회의 재가를 얻지 않은 칙령이라고 불평한다면 그 사람에게 제국의 절대주의 정책을 설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페르디난트는 영리하게도 칙령을 집행하는 데 발렌슈타인의 군대를 이용했다. 가톨릭동맹이 막강한 지원자를 공격함으로써 참된 신앙의 대의를 침해하려 할 리는 없지 않은가?"(308-9)


"1630년 여름에는 독일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0년 간의 전쟁으로 제국의 절반 이상이 군대의 점령이나 통과로 그 후유증이 심각했다. 소가 병들고, 사람도 동물도 모두 굶주리고,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1625년부터 1628년까지 4년 연속 흉년이 들어 독일의 재난은 더욱 심각해졌다. 전염병은 굶주린 사람들을 대량으로 희생시키고, 난민 수용소를 덮쳤다. 원래는 근면했던 사람들이 빈곤과 기근으로 희망과 수치심을 잃고, 구걸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점잖았던 시민들도 서슴없이 이웃집에 가서 동냥을 했다. 그러나 동정심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자선도 바닥을 드러냈다. 추방된 목사들은 전국을 떠돌며 자신을 받아주려는 사람이 아니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헤맸다. 오버팔츠의 가톨릭 사제들은 추방되었던 사람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당시 굶주리는 선임자들을 구제해 달라고 정부에 탄원했다."(322)


"1630년 8월, 페르디난트는 가톨릭 선제후들을 진정시킨다는 정치적 이유를 들어 발렌슈타인을 해임했다. 그러나 토지반환령은 신앙을 이유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제국 내에서 페르디난트의 정책은 무너졌다.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독일을 통합하기는커녕 분열시켰고, 막시밀리안과 가톨릭동맹은 다시 페르디난트의 정책을 지배하게 되었다.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의 두 신교 선제후는 동료들로부터 떨어져나가 새로 반대파를 형성했다." "페르디난트도, 막시밀리안도 실패했다. 요한 게오르크는 국내 문제를 다룰 만큼 강력한 국내 기구를 형성하려 애쓰고 있었다.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30년 전쟁 중 독일 시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의 끝이자 외국 시기의 시작에 해당한다. 스웨덴 왕이 포메른에 상륙했다. 독일 백성들은 또다시 그들이 시작하지도 않았고 중단시킬 수도 없는 전쟁의 공포에 휩싸였다. 12년 간의 재앙을 끝내는데 실패한 회의는 앞으로 18년간 재앙이 더 계속되리라는 신호탄이었다."(333-4)


7장 스웨덴 왕: 1630~32년


"이후 2년간 독일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면 한 가지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구스타프의 진짜 적은 페르디난트가 아니라 개방 정책을 취한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였다." "페르디난트는 단지 구스타프의 목표일 따름이었다. 구스타프도 자신의 신앙에 투철했으나 스웨덴의 영토를 확장하고 발트 해를 확보하기 위해 싸웠다. 구스타프의 적은 가톨릭이 아니라 독일의 연대를 지지하는 모든 세력이었다. 그리고 그 지도자는 요한 게오르크였다. 이 상황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었다. 우선 페르디난트와 구스타프가 표면에 내세운 가톨릭과 신교의 갈등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은 사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반 유럽인들은 그것을 궁극적이고 유일한 문제로 여겼다. 두 번째로, 파리, 마드리드, 빈의 공식 정책을 지배하는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의 정치적 경쟁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상황에 묻혀버린 독일인과 스웨덴 침략자의 직접적인 다툼이 있었다."(350-1)


"요한 게오르크는 독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의 조치를 취했다. 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신교와 정치 체제의 옹호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막후에서 신교의 다수 여론을 장악했다. 드디어 칼뱅파와 루터파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스웨덴 왕의 동맹자인 메클렌부르크의 두 공작과 헤센 방백도 라이프니츠 선언에 서명함으로써 외국의 간섭 없이 사태를 타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제 구스타프의 확실한 동맹자는 마그데부르크, 포메른 공작, 보헤미아의 프리드리히만 남았다. 요한 게오르크는 강력해진 자신의 지위를 한껏 이용했다. 황제를 겁주어 협상 테이블로 이끌어낼 수 있다면 스웨덴 왕도 싸움 없이 굴복시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다가오는 위험을 알았든 몰랐든, 페르디난트에게는 단 한 가지 답밖에 없었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라 성전(聖戰)의 지도자였다. (그가 보기에) 만에 하나 토지반환령을 포기할 수 있으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353-5)


"역사에는 물질적 중요성과 무관하게 도덕적 영향을 미친 사건들도 있게 마련인데, (구스타프가 틸리의 가톨릭 군대를 물리친) 브라이텐펠트 전투가 바로 그런 사례였다. 당시에나 이후에나 유럽의 신교도들은 구스타프가 그날 펠리페 2세 시절 이후 유럽을 괴롭혀오던 가톨릭-합스부르크 독재를 끝내고 해방을 가져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은 구스타프가 독일 땅을 밟기 전에 교황과 리슐리외의 적대가 이미 오스트리아 왕가의 종교 정책을 크게 약화시켰다. 브라이텐펠트의 전장에서 그는 합스부르크 나무의 뿌리가 아니라 가지를 친 것에 불과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젤란트 연안에서 군대 병력을 싣고 온 에스파냐 함대가 상륙할 준비를 하던 중 네덜란드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 사건은 라이프치히 전투에 가려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오스트리아 왕가에 준 타격은 더 켰다. 왕가의 미래는 무엇보다도 에스파냐의 부활에 달려 있었는데, 네덜란드에서의 패배는 그 부활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376-7)


"고립무원의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에게 다시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황제와 황제의 오만한 아들 페르디난트 대공은 그에게 어떤 조건이든 동의하겠다면서 어서 군대를 이끌고 오라고 애걸했다. 마침내 발렌슈타인은 확고한 실권을 쥐고 당당히 복귀했다." "그가 복귀했다고 해서 즉각 스웨덴 왕의 움직임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발렌슈타인은 일단 보헤미아에서 작센군을 내몰아야 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가톨릭 측이 상황에 대한 절대적 통제권을 장악한 그는 늘 그랬듯이 요한 게오르크를 매수해야 스웨덴 왕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작센군을 공격하는 대신 정중하게 동맹을 제의함으로써 그들이 평화롭게 국경 너머로 철군하도록 유도했다. 물론 이로 인해 요한 게오르크와 스웨덴 왕이 결별하지는 않았으나, 발렌슈타인의 의도는 절반쯤 달성되었다. 구스타프는 작센군에 의지해 보헤미아를 장악했으므로 작센군이 철수하자 자연히 동맹관계를 의심하게 되었다."(392-4)


"구스타프는 발렌슈타인에게 강화의 조건을 제시했지만 그 조건은 제국군이 전장에 있는 상황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페르디난트가 가장 취약했던 시기인 1631~32년 겨울에도 강화를 맺는 데 실패했다. 구스타프처럼 타고난 정복자는 아무리 평화를 희구하더라도 항상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독일로 행군하는 동안 스웨덴 왕은 이른바 미래 건설 계획(Norma Futurarum Actionum)을 마련했다. 이것은 제국을 전면적으로 재편하려는 구상으로, 이론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승리한 뒤에도 실현이 불가능했다. 그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가 결코 의지할 수 없는 한 가지 요소, 즉 독일 지배자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는 그들의 진정한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정책의 변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타협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으나, 그는 타협 없이 독일의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411-2)


# 11월 16일,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프 아돌프 사망


"뤼첸 전투가 끝나고 며칠 뒤 비텔스바흐의 프리드리히는 더 이상 팔츠 선제후도, 보헤미아 왕도 아닌 신분으로 라인의 바하라흐에 갔다." "거기서 전염병에 걸린 프리드리히는 11월 29일 숨을 거두었다.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처럼 그는 방랑자였고, 부랑자였다." "이리하여 신교 대의의 가장 성공적인 옹호자와 가장 크게 실패한 옹호자가 2주일 간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실 1619년에는 비록 인물은 없었어도 신교 대의의 형편은 더 나았다. 적어도 독일인들은 선택의 자유를 갖고 있었다. 구스타프는 황제를 격파하고, 요한 게오르크를 핍박해 싸우게 하고, 리슐리외의 정책을 역이용했으나 시계추를 되돌려놓지는 못했다. 기회는 1619년에 사라진 뒤 두 번 다시 오지 않았다. 구스타프는 독일 신교도들의 꺾이고 마비된 의지를 뒤바꾸지 못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물리쳤으나 아무것도 건설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갈가리 조각난 독일 정치를 남겨둔 채 전장을 떠났다."(412-3)


8장 뤼첸에서 뇌르틀링겐까지, 그리고 그 이후: 1632~35년


"1634년 9월, 스웨덴의 야전사령관 호른과 작센-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가 지휘하는 신교 부대는 헝가리 왕 페르디난트와 에스파냐의 추기경 왕자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가톨릭 부대와 뇌르틀링겐에서 맞붙었다. 종교적 측면에서 뇌르틀링겐 전투는 가톨릭 세력에게 브라이텐펠트 전투의 참패를 복구해준 압승이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스웨덴 군대의 명성에 치명타를 가하고, 에스파냐 군대에 큰 명예를 안겼다. 그러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리슐리외에게 신교의 대의를 지휘할 권리를 주었으며, 독일 비극의 종막을 올렸다. 이제 부르봉과 합스부르크는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뇌르틀링겐 승리는 꺼져가는 촛불이 마지막 불꽃을 피워올린 데 불과했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에스파냐군과 제국군은 다시 분열되었다. 추기경 왕자는 피콜로미니가 지휘하는 독일 지원군을 거느리고 라인으로 향했고, 헝가리 왕은 프랑켄과 뷔르템베르크를 거쳐 서쪽으로 이동했다."(469-70)


"1634~35년 겨울은 부르봉과 합스부르크의 노골적인 분쟁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보낸 휴지기였다.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제국의 평화가 가능해 보인 마지막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손을 잡아끌면서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켜 타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평화를 안착시키기 위한 협상이 틀어지면서 새로운 전쟁 동맹이 탄생한다. 한편으로 프라하 강화, 다른 한편으로 에스파냐에 대한 프랑스의 선전포고로 이어진 그 협상은 새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지난 17년 동안 암암리에 변화해온 분쟁의 배경은 이제 변태를 완료했다. 연로한 황제, 작센과 브란덴부르크와 바이에른의 선제후들, 스웨덴 총리, 리슐리외는 여전히 기존의 노선을 고수했지만, 그들 주위에 새 시대의 병사들과 정치인들이 생겨났다. 전쟁 속에서 성장한 그들은 낯선 종교적 이념을 경계하며 냉소하고 경멸하는 데 익숙한 자신들의 입장을 선배들에게 내보였다."(473)


"과거에 종교가 차지했던 정신적 확신의 빈틈을 메우려면 새로운 정서적 충동을 찾아내야 했다. 이 무렵 민족주의 정서가 성장해 그 틈을 메웠다. 절대주의와 대의제는 종교의 지지를 잃은 대신 민족주의의 지지를 얻었다. 바로 그것이 후반에 접어든 전쟁에서 중대한 요소였다. 신교도와 가톨릭교도라는 말은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 독일인, 프랑스인, 스웨덴인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와 적들의 싸움은 서서히 두 종교의 싸움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각 민족과 국가들 간의 싸움으로 바뀌었다. 옳고 그름의 새로운 기준이 정치계에 생겨났다. 교황이 합스부르크 성전에 반대하고 나섰을 때, 그리고 가톨릭의 프랑스가 위대한 추기경의 영도 아래 신교 스웨덴에 자금을 지원했을 때, 기존의 낡은 도덕은 무너졌다. 어느새 십자가가 국기로 바뀌었고, 빌라호라에서 외치던 '성모 마리아'라는 함성은 뇌르틀링겐에서 '에스파냐 만세'로 바뀌었다."(474-5)


"아버지를 대신해 국가수반으로서의 지위를 급속히 다져가던 헝가리의 페르디난트가 새로운 상황을 통제하려면 한 가지 선택이 반드시 필요했다. 즉, 그는 자신이 독일 군주인지 오스트리아 군주인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의 선택은 오스트리아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기질에서나 성질에서나 남방계에 속했다. 아버지 페르디난트 2세는 북방 진출로 스웨덴 왕의 반발을 받았고, 자기 손으로 엘베 강에서 에스파냐에 이르는 발렌슈타인의 제국을 희생시켰다. 독일 통합의 주요한 수단이었던 종교는 오래전 그의 세계가 젊었을 때 슈타이어마르크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했으나 그의 수중에서 붕괴했다. 그가 평생을 걸고 이룩한 성과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슐레지엔,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 카르니올라, 티롤 등의 국가들을 통합해 후대에 등장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기반을 놓은 것이었다."(475-6)


"1635년 5월 21일 프랑스 정부의 의무에 따라 프랑스의 사자는 브뤼셀의 광장에서 신앙이 독실한 프랑스 왕 루이 13세가 가톨릭 군주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에게 선전포고를 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9일 뒤 빈에서는 프라하 강화 협상의 조건이 공표되었다. 어떤 군주든 조약에 동참하고 싶으면 할 수 있었다. 조약의 조건은 독일에 평화를 안착시킨다는 점에서 작센 측에 크게 유리했고, 제국에도 어느 정도 유리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라인 강 좌안에서 스웨덴의 동맹으로 나서서 에스파냐에 선전포고를 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프라하 강화에 조인한 국가들은 스웨덴군을 독일에서 몰아내야 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도 상대해야 했다. 그런데 프랑스와 충돌할 경우에는 에스파냐 왕과 뜻을 같이해야 했다. 결국 프라하 강화는 전쟁 동맹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고, 동맹에 동참한 국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오스트리아 왕가의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독일 비극의 종막이 올랐다."(485)


9장 라인 쟁탈전: 1635~39년


"독일에서 황제의 입지는 어느 때보다 튼튼해졌다. 그의 군대와 동맹자들의 군대는 라인 강 우안, 뷔르템베르크, 슈바벤, 프랑켄을 거의 다 점령했다. 이 새 정복지들이 군대를 부양하는 부담을 떠맡게 되자 오스트리아 영토는 한숨 돌렸다. 요한 게오르크는 페르디난트의 하위 동맹자가 되었고,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은 항의를 해봤으나 이내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프라하 강화에 서명하기를 거부한다면 리슐리외에게 합류하는 것 이외에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헝가리 왕은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아버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연합을 조직하고, 소수의 칼뱅파를 고립시켰다. 칼뱅파는 평화를 교란하고, 외국과 동맹을 맺는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독일 바깥에서도 황제의 입지는 매우 튼튼했다. 스웨덴 정부의 적대를 받는 대신 그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과 우호를 맺었다. 말하자면 (스웨덴 총리인) 옥센셰르나의 등 뒤에서 갑자기 지뢰를 폭파시킬 수 있게 된 셈이었다."(489-90)


"에스파냐의 모든 가문에게 유럽의 상황은 우호적이었다. 영국 정부는 에스파냐하고만 우호를 유지하면서 유럽에서 중립 정책을 추구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추기경 왕자가 자신의 기지와 매력으로 플랑드르의 평화를 실현해, 60년 전 돈 후안(1547~1578, 16세기 후반 네덜란드 총독을 지낸 에스파냐의 군사령관)의 위업을 재현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왕가는 이런 이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전쟁의 부활이 예고되고 있었다. 펠리페 4세와 올리바레스가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령 네덜란드의 동맹 세력에게 자율적으로 그들의 능력을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면 만사가 잘 굴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일을 일일이 지시했고, 황제에게 자금 지원을 대가로 복종을 강요했다." "추기경 왕자는 에스파냐 왕의 휘하에 속한 총독의 신분이었으므로 항의할 수도 없었다." "재앙이 펠리페 4세의 정부를 덮쳤을 때 왕은 자금을 외부에 공급할 여력이 없어졌고, 에스파냐는 오스트리아를 파멸의 길로 끌고 갔다."(491-2)


"추기경의 외교와 정치적 야심은 프랑스의 군사력과 비례하지 않았다. 이 점을 잘 알았던 그는 가급적 전면전을 회피했다. 어쩔 수 없을 경우 그는 푀키에르를 독일로 보내 병력을 충원했다. 프랑스에서 모집한 병력은 신뢰하기 어렵고, 훈련도 형편없고, 걸핏하면 탈영하는 데다 주로 신교도라는 게 그의 우려 섞인 불평이었다. 한편 귀족들은 또다른 어려움을 야기했다. 군대는 여전히 봉건적 질서에 묶여 있었으므로 전쟁을 치를수록 자기 영토에서 병력을 충원한 젊은 귀족의 권력이 증대했다. 계급으로서의 귀족, 특히 젊은 귀족들은 리슐리외에게 치명적인 세력이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군주제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태동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했다. 게다가 그들은 군인으로서도 명령에 잘 복종하지 않았다. 한 젊은 귀족은 자기 부대의 나쁜 상태가 왕에게 보고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상급 지휘관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런 군대로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497)


"베른하르트의 군대를 손아귀에 넣은 리슐리외는 발렌슈타인을 고용했을 때의 페르디난트 황제와 비슷했다. 전적으로 신뢰할 수도 없고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도 아니지만, 용병 장군은 확실히 자신의 미래를 해치는 짓은 하지 않을 테고 자신에게 보수를 주는 정부의 성공을 위해 일할 터였다. 유일한 큰 위험은 리슐리외가 계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리슐리외의 행정부는 다른 측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재정적으로는 취약했다. 세수입을 관리하는 수완이 부족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프랑스의 재정을 좀먹는 특권과 관습의 뿌리가 너무 깊었다." "프랑스의 주요 세원은 다루기 까다로운 계층인 빈농들이었다. 농민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의 근간이었다. 이들은 검소하게 살면서 고된 일을 하고 완고한 성격을 갖고 있어 억압에 쉽게 반발했다. 그래서 이미 1630년에 디종, 1631년에 프로방스, 1632년에 리옹에서 세금으로 인한 폭동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501)


"1636년 12월 22일, 프라하 강화의 확산과 공인을 위해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선제후단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헝가리 왕이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군주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가급적 독일인을 군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제국 내에 군대가 무제한으로 주둔하는 일을 금하고, 왕이 사적으로 중시하는 오스트리아 법이 제국에까지 적용되지 않도록 하고, 헌법을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대관식의 선서는 늙은 황제가 17년 전 서명했던 것보다 더 엄격하지도, 더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페르디난트 2세의 입헌주의 정책이 계승되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영토를 탈환하고, 강화하고, 이단을 제거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얻었고, 다수의 독일 군주들을 자신의 전쟁에 동참시켰으며, 이들의 계승을 공고히 다졌다. 입헌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1636년의 레겐스부르크 회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힘이 독일에서 정점에 달한 순간이었다."(504-5)


10장 에스파냐의 몰락: 1639~43년


"펠리페 2세 시절에도 이따금씩 제기되던 공공의 불만은 펠리페 3세의 치세에 시끄러운 소음으로 커졌고, 펠리페 4세의 치하에는 우레와 같이 터져나왔다. 게다가 통화를 서툴게 관리한 탓에 일부 지역에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물물교환이 부활했다. 1640년대 초반 에스파냐로 오는 모든 물자의 3/4은 네덜란드 선박들이 운송을 담당했다. 그런데 통상과 방어를 담당한 이 함대가 크게 축소된 탓에 불법 거래는 근절될 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에스파냐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1639년 함선 77척으로 구성된 에스파냐의 대함대가 네덜란드의 용감한 제독 트롬프(1598~1653)에게 밀려나 영국의 중립 해역으로 대피했다. 거기서 함대는 해상법과 영국 정부의 무기력한 항의를 모두 무시한 채 불리한 상황에서 공격에 나섰으나, 결국 70척이 침몰하거나 나포되었다. 이 참패는 에스파냐 해군력에 결정타였다. 1631년의 패배 이후 비틀거리던 거인은 이때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529)


"에스파냐에서 자금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제국군은 급료의 지불과 보급 체계가 유지될 수 없었다. 게다가 갈라스나 레오폴트 대공이나 조직적 수완은 빵점이었다. 그들의 한 부하는 〈달리 돈이 없기 때문에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라고 썼다. 양측에서 모두 중앙통제가 느슨해졌고, 지휘관들은 부대를 거느리고 식량을 구하러 멀리까지 나갔다. 식량을 찾는 데 남다른 후각을 가진 지휘관은 발렌슈타인처럼 간주되어 막강한 권위를 누렸다. 병사들이 이 부대에서 저 부대로 탈영하는 것은 그렇잖아도 늘 파악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제는 아예 어느 부대의 전리품과 식량 보급이 좋다 싶으면 부대장이 누구인지 따지지도 않고 제멋대로 부대를 옮겼다." "누더기 차림의 무리들이 아무런 대의명분도, 특정한 전략도 없이 먹을 것을 찾고 위험한 싸움은 피하겠다는 일념으로 독일 전역을 헤매고 다녔다. 식량을 눈앞에 두었을 때는 상대를 가리지 않고 싸웠다."(536)


"전쟁의 시대에 태어난 프리드리히 빌헬름─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의 아들─은 전쟁 특유의 기회주의와 부도덕을 비롯해 오로지 실용성만 부각되는 풍조를 잘 이용했다. 그는 자기 왕조의 물질적 이득이나 어쩌면 신민들에게까지도 득이 되는 일을 위해서라면 위험과 고통을 무릅썼다. 그것이 그에게는 정의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독일의 대의를 위해서는 한 푼도 내놓지 않았다. 훗날 그는 독일인을 위해 독일의 수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유명한 선언을 발표했으나, 그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하나의 특별한 물길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더 나중에 그는 프랑스가 지원하는 자금을 짐짓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척하면서도 비밀리에 받았다. 그는 포메른을 마그데부르크와 교환하고, 나중에 술책을 부려 되찾았다. 그의 대내 정책은 엄격하고 유익하고 강력했으나 인기가 없었다. 그의 대외 정책은 아버지가 물려준 누더기 같은 영토에서 프로이센을 만들어냈는데,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중요한 인물이다."(540)


"1642년 무렵에는 프랑스군도 많이 변했다. 리슐리외는 돈을 절약하고 지휘관, 특히 귀족의 권력을 억제하기 위해 병력의 규모보다 기술적인 측면에 더 집중했다. 왕의 지원을 얻어 그는 규율을 더 엄격하게 집행하고, 욕살 같은 사소한 죄에도 엄벌을 가하기로 했다. 또한 종군자의 수, 특히 부대를 따라다니는 여자들의 수를 줄이려 했지만 항상 성공하지는 못했다. 나아가 그는 권력이 아니라 재능에 의한 승진의 길을 닦음으로써 농민, 기술자, 상점 주인, 곤궁한 귀족의 아들도 야심과 지성을 가졌다면 충분히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리하여 10년에 걸친 노력 끝에 병사들은 고도로 훈련된 기계 같은 군인이 되었고, 특히 포위전의 기술과 인내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래서 적의 편에서 넘어온 탈영병이나 포로가 섞여도 군대의 기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과거에 스웨덴군이 그랬던 것처럼 강렬한 민족의식이 발달했다."(557)


"1643년 5월, 국경 요새 로크루아에서 앙갱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멜로가 지휘하는 에스파냐군이 맞붙었다. 로크루아 전투는 에스파냐군의 재앙으로 끝났다. 1만 8천 명의 보병 가운데 7천 명이 사로잡히고 8천 명이 전사했는데, 그 대부분이 에스파냐 병사들이었다. 대포 24문을 포함해 무수한 무기와 군대 장비가 앙갱 공작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전승을 거둔 그는 로크루아에 개선했다." "그것은 에스파냐군의 최후였다. 기병대는 살아남았으나 규율과 사기가 무너진 데다, 에스파냐군의 강점인 보병대가 없으면 무용지물이었다. 로크루아에서 에스파냐군은 뇌르틀링겐에서 스웨덴군이 그랬던 것처럼 명성을 크게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 명성과 목숨을 바꿔야 했다. 고참병들은 죽었고, 전통은 사라졌으며, 새 세대를 육성할 지휘관은 남아 있지 않았다. 로크루아 앞의 전장에 오늘날에도 서 있는 소박한 회색 비석은 에스파냐군의 묘비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웅장했던 에스파냐 왕국 자체의 묘비이기도 하다."(564)


11장 평화를 향해: 1643~48년


"1644년 12월 4일, 베스트팔렌에서 강화 회의가 개막되었다. 황제(페르디난트 3세)가 회의를 재가한 지 18개월이나 지난 때였고, 함부르크 대표단이 처음 정했던 회의 날짜보다 32개월이나 늦은 시기였다. 그러나 회의가 지속된 3년 10개월 동안에도 독일에서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제국 내에서는 평화를 바라는 마음을 통합적으로 드러내지도 못했고, 그것을 표출할 만한 통로도 없었다. 군주들이나 목소리를 낼 만한 힘을 가진 세력들은 일반적인 의미의 평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실제 행동에 들어가면 그들은 언제나 사적인 이득을 챙기기 위해 전쟁을 좀 더 지속하려 했다. 베스트팔렌 회의가 거의 끝날 때까지도 상황은 내내 그랬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헤센-카셀 방백, 팔츠 선제후 등 10여 명은 뭔가를 피하거나 얻기 위해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보헤미아 신교 망명자들처럼 힘이 없는 집단도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비준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나섰다."(580)


"또 다른 문제는 회의 기간 내내 적대 행위가 지속된 것이었다. 전쟁이 완전히 중지되었다면 협상이 훨씬 더 빨리 타결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이었으므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의 외교관들은 전쟁의 향방에 따라 결정을 내리려 했다. 전장에서 좀 더 이득을 얻지 않을까 싶어 계속 현안을 뒤로 미루었다. 특히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보다 자원이 풍부하고, 경제·사회적 압박이 비교적 적었던 탓에 결론을 무한정 연기하는 경우가 잦았다. 원하는 것을 잃느니 차라리 결정을 영원히 내리지 않겠다는 자세를 자랑처럼 내보이는 것이 프랑스 대사들의 주요 전술 가운데 하나였다. 수석대사인 롱그빌은 숙소 주변에 채마밭을 가꾸고 아내까지 불러들였는데, 뮌스터에 얼마든지 머물 수 있다는 시위였다. 이에 발맞춰 마자랭─1642년 12월 4일, 리슐리외가 사망한 뒤 그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추기경─은 군 지휘관들에게 전장에서 무력으로 압박을 가하라고 지시했다."(582-3)


"알자스와 포메른을 둘러싼 협상에서 각국 지배자들은 제국의 영토와 수천 명의 신민들이 얽혀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기보다 마치 자신의 사유재산을 처분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스웨덴으로 넘어간 포메른에 비하면 알자스 주민들의 형편은 그래도 좀 더 나았다. 사실 이곳에는 묘한 모순이 있었다. 황제는 양도된 영토를 제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고 싶었으나 프랑스 왕은 그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언뜻 보면 페르디난트가 냉정한 태도를 보이고, 프랑스가 관대한 제스처를 취한 듯하지만 실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물론 경계선의 변화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프랑스가 알자스를 제국의 명패 아래 보유한다면 프랑스 왕은 제국의회에 대표를 보내 독일 사태에 계속 간섭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결국 그 복잡한 문제는 타협이 이루어졌으나, 어느 작가는 그것을 '영원한 분쟁의 불씨'라고 불렀다. 어쨌든 황제는 알자스에 관한 자신의 권리를 프랑스 왕에게 양도했다."(599-600)


"모든 세력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은 단연 종교 문제였다. 가톨릭 측은 교회가 1627년에 소유했던 모든 토지를 요구했고, 신교 측은 1618년의 상황으로 돌아가자고 요구했다." "한편, 토지반환령은 영구히 보류되었고, 군주가 자신의 종교를 바꿀 권리와 백성들이 자신의 뜻대로 종교를 선택할 권리가 승인되었다." "화해의 뜻으로 페르디난트 3세는 회의 초기에 칼뱅파를 제국 내의 셋째 종교로 승인했다. 하지만 만사가 우호적으로 타결되는 듯 싶었을 때 그는 돌연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열정을 드러냈다. 신교 측은 충격을 받았고, 가톨릭 측은 격분했고, 아직 불안정한 합의는 위험에 처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영토 내에서 신교도에 대한 관용을 단호히 거부하고, 교황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또한 그는 1624년을 종교 화해의 해로 삼자는 제안도 거부하고, 자신의 외교로 프라하 강화에서 만들어냈던 1627년의 기준도 강력히 부정했다."(602-3)


"프라하 시민들이 곤경에 처해 있는 동안 페르디난트는 종교적 신념과 아버지의 유산, 왕조의 의무에 사로잡혀 강화 조약에 서명을 거부했다. 외관상으로는 종교적 타협이 장애물이었으나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그의 에스파냐 친척들이 네덜란드와 강화를 맺고 간신히 프랑스를 동등한 자격으로 대하게 되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실망을 주겠는가?" "그러나 바이에른은 추스마르스하우젠에서 패배하고, 프라하는 포위되고, 레오폴트는 랑스에서 꺾였다.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종교적 화해를 받아들이고 강화 조약에 서명했다. 뮌스터의 대표들은 3분이면 서명할 강화 조약을 황제처럼 3년이나 끌지는 않았다. 결국 1648년 10월 24일 토요일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그러고도 9일 동안 더 싸운 뒤에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프라하에 전해졌다. 그곳에서도 곧 축포를 하늘로 쏘아올리고, 테데움 성가를 부르고, 교회 종을 울려 전쟁이 끝났음을 알렸다."(612-3)


12장 평화 이후


"비로소 30년 만에 독일 땅에 평화가 깃들었다. 그러나 베스트팔렌에서 몇 가지 문제의 타결에 실패한 것 때문에 협상 전체가 위험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가톨릭 측도, 신교 측도 자신들의 몫을 타협적으로 결정한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러한 타결 결과를 실행하기 위한 조치도 없었다. 억지로 실행하려 하면 전쟁이 재개될 게 뻔했다. 교황 대사는 타결 내용 전체가 교회의 이익에 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또다른 불씨를 피워올렸다. 에스파냐 정부는 황제가 비열하게 자신들을 버렸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약탈자인 로렌의 샤를은 조약에서 완전히 배제된 탓에 독일 땅 하머슈타인에서 요새를 철거하지 않았다. 에스파냐는 프랑켄탈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만토바 공작은 프랑스 정부가 자신의 영토 일부를 자신의 의견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양도했다고 항의했다. 강화 조약이 체결된 지 5년 반이 지난 1654년 5월이 되어서야 마지막 적대적인 주둔군이 독일에서 철수했다."(619)


"사회 질서의 붕괴, 행정과 종교의 지속적인 변화로 중앙행정이 느슨해진 결과, 일부 지역에서 농민의 지위가 약간 상승했지만 그다지 현저한 변화는 아니었으며, 그 변화를 유발한 상황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작센에서는 평화가 도래하자마자 귀족들이 정부의 농민 지원에 불만 섞이 야유를 퍼부었다. 옛날에는 농노가 토지를 떠날 수 없었으나 전란의 혼돈 속에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해 장사를 배웠다. 그 결과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노동자의 자식들이 자라서 가내공업으로 가계 소득을 증대시켰다. 전쟁이 내내 지속되었다면 지주 귀족들은 이런 현상을 당혹스런 심정으로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겠지만, 평화가 오자 모든 게 달라졌다. 작센의 지주 귀족들은 그들에게서 돈을 빌린 선제후를 압박해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자기 집에서 가내공업도 하지 못하게 하는 법을 반포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전쟁이 낳은 한 가지 발전이 사실상 소멸해버렸다."(629)


"상업을 담당한 중간층은 전쟁으로 오랜 기간 쇠퇴를 겪어 힘이 크게 위축되었다. 미래의 부르주아지는 독립적 상인층이 아니라 종속적 관리층이었으며, 자유롭고 실험적인 계급이 아니라 기생적이고 보수적인 계급에서 생겨났다. 정부에 종속되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배자의 이익과 동일시한 시민들은 귀족과 농민 간의 완충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도시의 비중과 문화는 살아남았으나 이제는 군주의 호의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였다. 군주는 되살아나는 도시생활에까지 보호 권역을 확대하고, 성벽 도시를 전략적 거점으로 이용해 자신의 영토를 방어했다.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던 도시 공동체의 예술이 시들고, 그 대신 절제되고 점잖은 지방정부의 문화가 발달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실생활이나 독일인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거리가 먼 모방적인 수준 높은 문화였지만, 좋게 보면 소도시 차원에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국제적이고 세련되고 상징적인 문화이기도 했다."(631-2)


"전쟁의 정치적 결과로 제국의 국경이 달라졌다.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은 기존 상황을 추인한 데 불과했다. 그러나 알자스와 서(西)포메른은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제국의 영토였으나 실은 외국 열강의 수중에 있었다. 특히 알자스의 양도는 영구화되었다. 독일로서는 4대 강 어귀를 모두 외국에게 내준 셈이었다. 라인 삼각주는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가 차지했고, 엘베 강, 오데르 강, 비스와 강은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가 각각 관할했다. 엘베 강과 비스와 강의 상황은 1618년으로 되돌아간 것이지만, 네덜란드가 라인 강의 출구를 사실상 소유하고 오데르 강을 스웨덴이 장악한 것은 독일의 상업과 자존심을 크게 위축시켰다." "전쟁이 끝나자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은 군주밖에 남지 않았다.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는 행정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자치보다는 전제정치가 현실적으로 더 효과적이었고, 선거제보다는 관료제가 더 적절했다."(633-4)


"정치적 변화의 범위를 제국으로 한정해보면, 교회와 국가 간의 균형은 이미 1618년에 이동하는 중이었으며, 피를 흘리지 않고도 충분히 진행될 수 있었다. 칼뱅파는 공식 승인되지는 않았으나 전쟁 전보다 교도 수가 더 늘었다. 독일의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은 처음부터 특권층의 저항을 받았다. 1618년 무렵 군주들의 분리주의적 전제정치는 황제와 귀족에게 확실히 승리했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결국 제국은 지리적으로도 축소되었다. 페르디난트 3세는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오스트리아' 안에 몸을 웅크렸다. 그는 뮌스터에서 오스트리아와 인근 지역의 왕-황제로서 참여했고, 이후에도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강화가 체결된 것과 군주들이 각자 외국과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함으로써 제국은 사실상 하나의 국가와 같은 위상으로 전락했다. 제국의 잔해에서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작센, 그리고 나중에 프로이센이 되는 브란덴부르크가 성장해 나왔다."(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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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나날과 <논리철학논고>의 탄생
앨런 재닉, 스티븐 툴민 지음,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문제와 방법에 관하여


"우리가 다루려는 주제는 네 겹으로 되어 있다. 한 권의 책과 그 책의 의미, 한 인간과 그의 사상, 한 문화와 그 문화의 주요 관심사, 한 사회와 그 사회의 문제들이 그것이다." "그 사회란 로베르토 무질이 자신의 소설 《특성없는 남자》 1권에서 매우 감각적인 냉소를 담아 포착해 낸 바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25년에서 30년 사이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던 빈 사회를 일컫는다. 그 문화란 아직 유아기에 있거나 언뜻 그렇게 보이는 20세기 문화로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르놀트 쇤베르크, 아돌프 로스, 오스카어 코코슈카, 그리고 에른스트 마흐 같은 사람들로 대표되는 1900년대 초반의 '모더니즘' 문화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빈의 으뜸가는 철강 부호이자 예술 후원자의 막내로 태어나 넥타이와 가족의 재산을 벗어 던지고 톨스토이적인 검소함과 금욕의 삶을 택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다. 끝으로 그 책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이다."(14-5)


"학술적인 기준으로 볼 때 우리의 목표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즉 우리는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주제를 제각기 나머지 주제들을 숙고하고 연구하는 거울로 활용하고자 한다. 우리의 생각이 옳다면 합스부르크 제국의 쇠퇴와 몰락 과정에서 드러난 핵심적인 취약성들은 그곳 시민들의 생활과 경험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고, 그리하여 그것은 가장 추상적인 분야까지 포함하여 당시의 사상계 및 문화계 전역에서 활동하던 예술가와 작가들이 공유하는 핵심적인 관심사들을 형성하고 조건 짓게 되었다. 그 결과 카카니아─(합스부르크) '제국과 황실' 그리고 '똥의 나라'라는 이중의 뜻을 지닌 표현─적인 환경의 문화적 산물들은 그것들이 창작된 사회, 정치 및 윤리적 맥락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조명해 줄 수 있는 어떤 전형적인 특징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앞으로 주장하겠지만, 바로 그런 특징들이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가장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15)


"우리가 《논고》의 출판을 철두철미하게 철학적 논리학의 역사상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으로만 간주한다면, 그 책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 통째로 불가사의한 것으로 남고 만다. 분명히 논리학, 언어 이론, 그리고 수리철학 내지 자연과학의 철학에만 전력투구하는 듯이 보이는 70여 쪽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다섯 쪽의 결말 부분(명제 6.4 이후)에 느닷없이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유아론, 죽음, 그리고 '세계의 바깥에 놓여 있어야만' 하는 '세계의 의미'에 관한 독단적인 논제들과 연달아 부딪히게 된다. 논리철학적인 예비 작업과 막판에 등장한 이들 도덕 신학적인 금언들에 각각 할당된 지면이 완벽한 불균형을 이루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유혹은, 그 마지막 명제들을 그저 부수 의견이라 치부하고 마치 어떤 법정 판결의 말미에 겉치레로 제기되는 건성의 추가 조항인 양, 그냥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었다."(30)


"그러나 우리가 케임브리지에서 오스트리아로 지역을 옮겨 그곳에서는 《논고》가 흔히 윤리적인 논문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앞서 제기한 의문은 그야말로 생생한 문제가 된다. 비트겐슈타인과 가장 친했던 오스트리아인들은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문제를 놓고 고심할 때, 그 문제는 언제나 윤리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키르케고르의 모습을 곧장 떠올렸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눈에 《논고》는 단지 윤리에 관한 한 권의 책 이상의 것이었다. 《논고》는 윤리의 본성을 보여준shown 윤리적인 행위deed였던 것이다." "엥겔만은 다른 모든 종류의 지적인 토대로부터 윤리학을 떼어 내고자 하는 시도가 비트겐슈타인의 기본적인 사유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윤리학은 '말없는 신념'의 문제이고, 확실히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관심사는 바로 그 근본적인 개념에서 나온다고 본 것이다."(30-1)


2 역설의 도시, 합스부르크 빈


"구舊 빈의 온갖 이중성과 역설 중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수백 년 동안 합스부르크의 수도였던 이 도시가 '통상적인 이름조차 없던' 한 왕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이다! 항상 그렇듯 무질이 최고의 해설을 제공한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에게 그 나라는 제국-황실이자 제국과 황실이었다.  (···) 국가 제도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였지만, 그 통치 체계는 관료적이었다. 통치 체계는 관료적이었지만, 삶에 대한 일반 대중의 태도는 자유주의적이었다. 법 앞에서 모든 시민은 평등했다. 그러나 물론 모든 사람이 시민은 아니었다. 부여된 자유를 매우 엄격하게 행사하는 의회가 존재하지만, 정작 의회의 문은 대개 닫혀 있었다. 하지만 '긴급 공권력 사용 법안'이라는 것도 있기 때문에, 그 법안을 이용하면 의회 없이도 일처리가 기능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절대주의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순간마다 군주는 이제는 다시 의회 정치로 복귀해야만 할 때라고 선포했다.〉"(50-1)


"누구든 19세기 합스부르크의 역사를 연구하고 나면, 역사를 이해하는 한 가지 설명 양식인 헤겔주의 변증법의 매력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합스부르크의 역사는 특정한 한 상황이 그 반대의 상황을 낳는 경우가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라틴어 대신 독일어를 도입함으로써 제국의 행정에 효율을 기하려는 노력은 그 반작용으로 헝가리와 체코의 문화적 민족주의를 낳았고, 그것은 뒤이어 그 민족들의 정치적 민족주의로 발전하였다. 슬라브 민족의 정치·경제적 민족주의는 차례로 독일 민족의 정치·경제적 민족주의를 낳았고 그것이 이번에는 다시 반유대 정책을 낳았으며, 그에 따른 유대 민족의 당연한 반응으로 시온주의가 등장하였다. 얼핏 보아도 이 정도면 머리에 현기증이 나기에 충분하다. 합스부르크의 하우스마흐트Hausmacht 이념─합스부르크 왕가는 하느님이 부리는 지상의 도구라는 생각─은 군부와 국가 재정에 관한 황제의 절대적인 통제권에 집중되어 있었다."(56)


"빈 부르주아 사회의 특수한 성격을 설명해 줄 어떤 단일한 요인을 추려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영역에서 빚어진 자유주의의 실패이다. 아마도 합스부르크 군주국에서 자유주의가 사산아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은 합스부르크가 자도바 전투에서 완패한 후 비스마르크의 처분에 따라 그저 우연히 권력을 쥐게 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그 기반이 너무나 미약했으므로, 1890년대에 이르자 모든 힘이 바닥났고, 빈 정계를 지배하고 나선 신흥 대중정당들의 약진에 밀려나고 말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게 구질서의 일부가 되지 못했던 중산층에게, 탐미주의는 사무에 절어 사는 그들이 삶에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따라서 세기의 전환기에 빈의 탐미주의와 대중적인 정치 운동은 자유주의의 쌍둥이 고아로서 나란히, 그러나 각기 독립적으로 등장하였다."(70-1)


"빈의 이력에서 아마도 가장 기이한 역설은 나치의 '최종 해결책'과 시온주의자들의 유대 국가 정책이 모두 그곳에서 생겨났을 뿐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르츨의 시온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흥미로운 유형의 반유대주의의 소산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간절히 바랐던 바로 그 유대교로부터의 탈출이 실패함으로써 빚어진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헤르츨의 유대 국가 창도의 직접적 발단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그가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관람하고 얻은 '경험'이다. 그 오페라가 상연되는 동안 비합리적인 민중 정치학의 진리는 섬광 같은 직관으로 그에게 선명히 다가왔다. 유일한 해답은 유대인이 손님이나 침입자 신세가 아니라 그야말로 진정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있었다. 헤르츨에게 그 일은 바그너의 종합예술Gesamtkunstwerk을 예술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번안하는 작업에 해당했다."(87-91)


3 카를 크라우스와 빈의 마지막 나날


"《나의 투쟁》의 저자에게 빈이 '가장 고되지만 빈틈없는 학습장'이었던 것처럼, 바로 그렇게 카를 크라우스에게 빈은 '세계 파괴의 실험장'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크라우스는 빈을 휘젓고 있는 비인간화의 힘을 슈니츨러나 무질보다 좀더 예리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과는 달리 단지 증세를 진단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목숨을 건 수술만이 이 사회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대의 히브리인들처럼 빈 사람들은 정도를 벗어나 방황하고 있었고, 크라우스는 그들의 독선을 질책하기 위해 보내진 예레미야였다. '빈의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빈적인' 이 예지자의 무기는 논쟁과 풍자였다. 빈 사람들에게 예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으며, 그중에서도 문학, 연극, 음악이 특히 그러했는데, 이런 주제들에 대한 빈 사람들의 취향은 (크라우스의 견해에 따르면) 그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되어 있던 도덕적 이중성을 반영하고 있었다."(102)


"여성성에 대한 크라우스의 개념은, 그가 존경과 거부를 동시에 표명했던 오토 바이닝거의 작업과 나란히 대비해 가면서 이해해야 한다." "바이닝거에게 '남성의 관념'은 완벽한 합리성과 창조성이다. 반면 남성과 정반대인 '여성의 관념'은 성적 희열을 희구하는, 원리상 충족될 수 없는 매우 음탕한 충동이다. 여성성의 본질은 '대모신magna mater'의 고대 신화 속에 표현되어 있다. 대모신은 우주적인 미완의 생식력을 뜻하며,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비합리성과 혼돈의 원천이다. 여성의 성기가 신체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처럼, 그 성적인 관념도 여성의 영혼을 구성하는 자체 가동의 사유이다." "바이닝거는 인간의 역사가 이룩한 모든 긍정적인 성과는 남성적 원리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모든 예술과 문학과 법률 제도 등은 이러한 남성적 원리에서 샘솟은 것이다. '불멸의 여성성'은 우리를 진보와 발전으로 이끌기는커녕 역사상에 나타난 파괴적이고 무정부적인 모든 사건과 경향에 책임이 있다."(109-11)


"한편, 여성에 대한 크라우스의 생각은 (바이닝거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달라고의 생각과 비슷하다. 여성의 감정상의 본질은 음탕하지도 않고 무정부주의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오히려 부드러운 환상에 가까우며, 인간의 경험에 내재해 있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의 무의식적인 기원으로서 역할을 한다. 바로 거기에 모든 영감과 창조성의 원천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성 그 자체는 단지 하나의 테크닉에 지나지 않으며, 남성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보는 여성해방주의자의 그림 자체는 바이닝거의 견해만큼이나 왜곡된 것이며, 바로 문명의 기원을 근절시켜 버리려는 시도인 것이다." "크라우스에게 남자와 여자의 조우는, 이성이 환상의 수원水原에서 풍요를 공급받게 되는 '기원'이다. 이런 조우의 산물이 바로 예술적 창조성과 도덕적 고결성이며, 그것은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113-5)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무의식은 크라우스가 생각하는 개념과 정확히 반대된다. 프로이트의 이드는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충동들이 뒤섞여 들끓는 덩어리로서, 이성이 기껏해야 견제 정도밖에 할 수 없는 대상이다. 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는 욕구불만의 소산이며 그러한 충동들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필수불가결한 부수물이었다. 크라우스에게 이런 식의 설명은, 개인과 사회가 가진 건전한 모든 것들의 원천인 창조적 환상과의 연관성을 모조리 끊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신화는 그것이 바꾸어 놓고자 한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고, 그 신화 자체가 그것이 치유하고자 했던 질병의 또 한번의 발병인─〈정신분석학은 그것이 정신질환의 치료법이라고 생각하는 유형의 정신질환이다.〉─셈이었다. 사실상 정신분석학은 빈의 중산층을 괴롭힌 정신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라기보다 그런 문제들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117)


"카를 크라우스의 삶과 저술을 하나로 통합하는 핵심적인 개념은 사실적 담화의 영역과 문예의 영역 사이의 '창조적 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성격이나 품행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좋은 발상의 효력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사람만이 교조주의자가 될 여지가 있다. 그것은 크라우스의 견해와는 정반대의 생각이다. 크라우스는 이성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고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논쟁이 지니는 인격적 본성의 근거를 형성하는 것이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것은 그런 발상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표현파에 대한 그의 비판은, 자신들의 논점을 주장하기 위해 새로운 효과만을 추구하는 작가들을 향했을 뿐,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과 극작가 프랑크 베데킨트 같은 탁월한 표현파 예술가에게까지 확장되지는 않았다. 고결한 인간들, 인품을 갖춘 탁월한 작가들은 어떤 사조에도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137)


"말을 능숙하게 조작하는 작가는 그 재능만큼이나 비도덕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고결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한 인간과 그의 작품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한 작가의 사례가 바로 하인리히 하이네였다. 그는 독일어에는 적절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문예란을 독일에 도입한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하이네가 기법의 명수였다는 사실은 그의 사례를 더욱 비참한 것으로 만들었다. 크라우스의 견지에서 볼 때 기법은 이성과 계산의 산물이며, 따라서 언제나 수단에 그쳐야 한다. 그러나 하이네는 그런 기법 자체를 하나의 목적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하이네가 예술 및 도덕의 담론과 사실의 담론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분별하지 못하였을 때, 그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었다. 크라우스는 그러한 '창조적 분리'의 실패는 사실적인 것의 위조로 이어지고, 결국은 미적이고 도덕적인 것의 타락이나 왜곡으로 귀결된다고 선언하였다."(137-9)


4 사회 비판과 예술 표현의 한계


"1890년대 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던 회화 양식은 자연주의naturalism와 관학주의academicism 그림들이었다." "1897년에 구스타프 클림트는 열아홉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예술원을 자퇴한 후 '분리파'를 결성했다. 클림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23년 전에 프랑스의 인상파를 통해 점화된 예술의 혁명이 마침내 오스트리아에까지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이 화가의 목표였던 시대는 지나갔다. 20세기는 그 시대만의 양식을 가져야만 한다. 따라서 그 운동의 구호는 〈시대는 그에 맞는 예술을, 예술은 그에 맞는 자유를〉이 되었다. 클림트가 이 운동에 제공한 것은, 그림이란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고착된 견해가 아니라 다만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향도의 정신이었다. 이러한 비교조적인 접근은 이들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자유에, 그리고 새로운 세기의 정신을 반영하게 될, 이른바 '새로운 예술'에 그야말로 본질적인 것이었다."(146-7)


"분리파 건축가와 설계자들은 클림트의 장식 양식을 열광적으로 수용하였으며, 훗날 철저한 가능성의 추구를 신조로 삼게 되는 사람들만이 이들에 필적하게 된다. 클림트의 장식 양식을 수용한 건축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오토 바그너였다. 한때 예술원에서 건축학 교수를 지낸 적이 있던 그는 1899년에 분리파에 합류하였다. 초창기에 바그너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을 설계하고 역사적인 양식을 옹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당대의 건축 설계의 원천이 다름 아닌 당대의 사회생활과 문화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파스텔 풍으로 채색된 부드러운 외관을 띤 그의 건물들은 곡선보다 직각을 강조했다. 말도 많던 카를 광장 지하철 역사를 설계할 때도, 곡면을 일부 채택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직각의 형태들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물의를 일으킨 우편저축은행 청사 역시 바그너의 기념비적인 상상력이 발휘된 건물이었다."(150)


"분리파 회원들은 그 사회의 기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과격한 도전을 벌였지만, 예술을 삶에 좀더 밀착시키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은 결국 목표에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의 탐미주의는 단지 치장에 관한 당대의 견해를 변화시키는 정도만 성공했을 뿐이다. 그들은 몇 가지 증상을 치유했지만, 질병 그 자체를 고치지는 못했다. '젊은 빈'의 경우도 그랬지만 분리파 회원들 역시 마땅히 그 사회의 일부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비롯된 그들의 모반 또한 그 사회의 기존의 여건 안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무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빈'이 지닌 가치관의 피상성을 폭로하는 작업을 크라우스가 직접 떠맡았던 것처럼, 분리파에게 닥친 슬픈 현실, 즉 그들 역시 기성 사회의 구성원들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는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아돌프 로스의 몫으로 남았다."(153)


"로스는 건축과 설계에 나타나는 모든 형태의 장식에 맞서 싸우는 전쟁을 선포했다. 다다이즘 예술가들이 성서로까지 추앙한 논문 〈장식과 범죄〉에서, 로스는 실용적인 물건들에 덧씌운 모든 형태의 장식을 비난했다. 그는 당시 유럽 사람들이 실제로 몸에 문신을 새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동시대 사람들의 타락상을 읽어 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군주국 중산층의, 소위 '훌륭한 취향'은 그들이 세련된 야만인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로스는 정부가 응용 예술을 가르치는 예술원의 설립을 후원하면서부터 이중 군주국의 정치적 쇠락이 시작되었다고까지 주장했다. 사물을 더는 실제 모습 그대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만이 그토록 장식에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이다. 좀더 건전한 앵글로색슨 세계에서는 용도가 우선이며, 장식은 그야말로 부차적인 치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단언했다."(153-4)


"빈 대학의 음악 교수인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에 따르면, 음악은 결코 '음악적 관념'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주제를 가지지 않는다. 〈주선율 또는 주선율들이야말로 음악 작품의 진정한 주제이다.〉 작곡이란 〈인간 유기체와 소리 현상을 모두 지배하는 어떤 기초적인 법칙들〉에 따라 주선율들을 명료화하는 것이다. 그런 법칙들 중에서 으뜸인 것은 주선율을 전개하고 변주할 때 적용하는 '화성 진행의 근본 법칙'이다. 그것은 작곡의 논리적 기반을 공급한다. 따라서 작곡가는 일종의 논리학자라고 볼 수 있으나, 그의 연산은 어떠한 상위 언어로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가 없다. 음악 자체의 바로 그러한 본성 때문에 작곡가가 만든 것을 말로 기술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음악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고자 하는 사람은, 오로지 그 작품이 연주되는 것을 들으면서 작품 안에 담겨 있는 선율의 화성구조를 미학적으로 분석할 때만 답을 발견할 수 있다."(166)


"쇤베르크는, 바그너가 지도 동기leitmotif를 사용함으로써 한슬리크가 음악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작곡의 논리'에 나름대로 중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한슬리크는 지도 동기를 불필요한 꾸밈이라며 무시해 버렸다.)" "그는 바그너가 무대 위의 연기와는 별개로 악보 내부로부터 오페라를 통합하려는 최초의 '의식적인'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음악에 위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쇤베르크는 바그너,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과 같은 작곡가들이 화성을 과도하게 사용했다는 점에서 한슬리크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한 측면은 그들이 효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한 것이었지만, 작곡의 구조는 마땅히 음악적인 것이어야 했다. 여기서 쇤베르크의 견해에 따르면, 이 질병의 진정한 치료제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화성 이론뿐이었다. 한슬리크의 어휘를 빌자면, 수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바로 '작곡의 논리'였다."(167-8)


"회화에서 코코슈카가 나타나기 위해 먼저 클림트가 있어야 했고, 건축에서 아돌프 로스가 있기 이전에 오토 바그너가 있었던 것처럼, 쇤베르크가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던 도시 빈에는 이번에도 역시 그러한 과도기적인 작곡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바로 구스타프 말러였다." "말러가 쇤베르크에게 남긴 유산은, 소리의 문제에 있어서 '진실성'이 '인습'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작곡가는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표현하기 위해 작곡한다는 것이다. 쇤베르크는 그 생각을 충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미래의 작곡가들이 자기 자신을 가장 엄격한 훈련의 대상으로 삼을 때만 비로소 그 길을 열 수 있게 되리라고 주장했다. 말러에게는 자기표현과 자기 훈련이 모두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그의 비범한 일생의 역작들이 설명된다. 모든 진실한 음악의 경우가 다 그렇듯이, 그의 혁신적인 환상은 그의 음악적 관념들이 솟는 원천이었다."(171-3)


"〈세계는 오로지 우리의 감각들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에른스트 마흐는 주장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오로지 감각에 대한 지식만을 가진다.〉 이어서 마흐는 물리학이란 수학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감각 자료들sense data을 연결하고 상호 관련시키는 일종의 속기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호프만슈탈에게 시의 목표는 자아와 세계 간의 통일성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바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호프만슈탈이 보기에는 만일 마흐의 생각이 옳다면 분명히 시인은 자신의 시구 안에서 과학자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실재reality'를 표현하게 되는 것 같았다. 과학자는 감각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다. 왜냐하면 과학자는 수학을 이용하는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그 감각들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인은 가능한 한 철저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자신의 감각을 직접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존재인 것이다."(194-5)


"개념과 이미지는 진리의 주관성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호프만슈탈이 마침내 정주하게 된 예술의 도구는 바로 종합예술이었다. 그것은 모든 분야의 예술을 하나로 통합하여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 필적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즉 시와 극, 그리고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청중들에게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경험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호프만슈탈은 미적으로 완벽한 그림들을 통해 세계를 포착해 내려는 시도를 접은 대신,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의 현실적 경험을 전달하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세계의 인상들을 전달하고자 했던 시도를 포기하는 대신, 인간과 도덕의 본질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단지 생각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변모시키는 데 목적을 둔 매체를 채택했다. 이 과제는 단지 글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으며, 아마도 오페라적인 풍유를 통해서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200)


"무질은 프라하 출신은 아니었지만 인간 심연의 그 무엇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언어적 무능력에 관한 우려를 역시 전쟁 이전부터 릴케, 카프카와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관학교 시절을 다룬 자전적인 소설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그의 소설은 충격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무질은 그런 학교들에 만연되어 있던 동성애 문제를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 문제는 소설의 핵심이 결코 아니었다. 소설은 퇴를레스가 학교 당국에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설명해야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을 때 대단원에 도달한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언어는 가장 진실한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주관성의 심연 속에 영원히 내밀한 것으로 남게 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무질의 인생과 저술 양쪽에서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진 문제였다."(202-3)


5 언어, 윤리, 그리고 표상


"19세기 후반까지 언어철학의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이차적인 문제로 남아 있었다. 긴 안목으로 보자면,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마누엘 칸트였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고, 뒤이은 백 년의 세월 동안 그의 '비판' 계획에 담긴 여러 함축들은 점차 독일의 철학계와 자연과학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결과적으로 언어의 문제들이 철학의 큰 그림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모든 철학적 인식론이 최우선적으로 다룬 논제는 '감각지각'과 '사유'였다. 그것들은 최우선적이고 독립적인 경험의 요소들로 간주되었고, 반면 언어는 그렇게 형성된 지식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부차적인 도구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칸트가 지식에 '구조'를 부여하는 '판단 형식'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지금까지 언어와 문법에 부수적인 역할만이 할당되어 온 것에 대한 암묵적인 이의 제기였던 것이다."(208-9)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판단의 논리적 혹은 언어적 형식은 진정한 '경험'의 형식이기도 했다. 지식은 단지 형식 없는 전前개념적인 감각 입력, 즉 인상들의 개념적 해석에만 관련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 경험은 그 자체로 인식적인 구조와 더불어 나타난다. 그 구조는 오로지 판단 형식들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으며, 그러한 형식들 자체는 오로지 논리적 문법의 표준 형식들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경험론자들처럼 지식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날것 그대로의 감각 인상raw sense impression에서 시작하는 대신, 이제 우리는 경험의 기본 자료란 구조화된 감각적 '표상들Vorstellungen'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언어와 사유의 공통 형식들은 아예 처음부터 우리의 감각 경험, 즉 표상들에 끼워 넣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이성의 한계 혹은 범위는 또한 암묵적으로는 표상과 언어의 한계 혹은 범위이기도 하였다."(209)


"마우트너의 유명론적인 '언어비판'을 직접적으로 자극한 것은 그의 주변에서 민중Volk, 정신Geist 등과 같은 어마어마한 추상적 어휘들을 사용해 가며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인 주술을 목격하게 된 데 따른 반발심이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좀더 단순하고 구체적인 어휘들을 이용해 추상적인 어휘들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문제에 관한 러셀의 견해는, 부분적으로 그가 사회주의에 대해 가진 초창기 관심과 '국가'와 같은 거창한 정치적 추상체들에 대해 가졌던 의구심에서 자극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엄격한 유명론을 견지한 마우트너에게 '개념'은 '개체'의 묶음을 명명하거나 기술하기 위해 채택된 단어들일 뿐이다. 따라서 일반명사는 진정한 '존재자entity'의 이름이 아니라 개체들의 집합의 이름, 혹은 기술description이다. 마우트너는 개념이란 어휘나 말과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결국 개념은 사유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210)


"마우트너를 무엇보다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추상명사나 일반명사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일반인들의 경향이었다. 그는 추상체를 구상화하고자 하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경향이야말로 사변적인 혼란의 원천일 뿐 아니라, 세계 내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불의와 사악함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과학에서는 힘, 자연의 법칙, 물질, 원자, 에너지 등과 같은 오도된 개념들이 그런 종류의 것들에 해당한다. 철학에서는 실체, 대상, 절대자라는 개념이, 종교 사상에서는 신, 악마, 그리고 자연법이라는 개념이, 정치와 사회 분야에서는 인종, 문화, 언어 등의 개념과 더불어 그것들의 순수성이나 모독에 대한 강박관념이 마찬가지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모든 경우에서, 구상화는 '형이상학적인' 것들의 존재를 가정하는 일을 수반한다. 그래서 마우트너는 형이상학과 독단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며 또한 불관용과 불의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211-2)


"언어는, 사람들이 '행위'할 때 그들 사이의 매개자가 된다는 바로 그 이유로, 오히려 사람들이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할 때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대양이 대륙을 갈라놓으면서도 동시에 합쳐 놓듯이, 언어 또한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인 동시에 장애물인 것이다. 〈언어는 고독한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오로지 인간들 사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두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 두 사람이 그 낱말들로 동일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어가 본질적으로 은유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말 그대로 언어는 그 본성상 애매한 것이다. 그 누구도 자기가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고 있다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말은 부단한 생성의 과정 속에 있다.〉 언어뿐 아니라 문화 전체도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태에 있다. 어떤 것도 그대로 있지 않다."(219)


"언어비판이 향해 가는 종착점은 메테를링크의 신성한 침묵이다. 이른바 〈우리가 진정으로 말해야 할 것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침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한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 마우트너가 따라간 길의 종착점이다. 그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에크하르트와 쿠사누스 곁에 자신의 자리를 잡는다." "〈만일 어떤 지적인 독자가 회의주의적 개념, 이른바 실재의 이해불가능성에 대한 통찰이 단지 여러 가지 부정적 진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국은 긍정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기뻐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지식이다. 철학은 인식론이다. 인식론은 언어비판이다. 그러나 언어비판은 자유로운 사유를 위한 노동이다. 인간은 일상의 언어를 활용하든 철학적인 언어를 활용하든 세계에 대한 은유적인 기술 이상의 것을 성취하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225)


"에른스트 마흐만큼 자신이 속한 문화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과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모든 지식을 감각으로 환원시키는 마흐의 견해는 그의 모든 사유의 근거가 되는 토대를 형성한다. 모든 과학적 노력의 과제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감각 자료를 기술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흐는 감각 자료를 좀더 중립적이고 어물쩍한 어휘인 '원소element'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했는데, 그것이야말로 과학의 단순성 혹은 경제성의 측면을 잘 드러낸다. 그러므로 마흐의 관점은 철저한 현상론자의 관점이다. 세계는 감관에 나타나는 것들의 총합이다. 그래서 꿈은 다른 어떤 원소들의 집합과도 다를 바 없이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가 된다. 왜냐하면 '외적' 경험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내적' 경험도 경험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개념, 관념, 표상도 모두 '원소들'의 집합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해 주는 종적 개념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마찬가지로 감각 자료로 환원된다."(227-9)


"마흐는 물리 이론이란 경험을 단순화하는 감각 자료의 기술들이며, 과학자는 그것을 통해 앞날의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수학의 기능은 그 자체가 지닌 조직화의 힘을 통해 감관이 지각한 것을 단순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이론에 대해서는 그것이 더 유용하다거나 덜 유용하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은 참이라거나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론의 본성이란 감각들을 판단한다기보다 그것들을 기술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형이상학적인 요소들은 과학의 본질적 특성, 즉 경제성을 거스른다. 뉴턴 물리학에서 나타나는 '절대' 공간, 시간, 그리고 운동이라는 개념은 그저 불필요할 뿐이다. 〈이 절대 시간은 그 어떤 운동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측량될 수 없다. 그것은 따라서 실천적인 가치도, 과학적인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무익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232-3)


"대개 20세기의 과학은 마흐의 '기술記述'보다는 헤르츠의 '모델'을 더 선호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아무런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흐의 실증주의가 미친 영향은, 예를 들면 '관찰 가능한 것'의 우선성에 관한 양자 물리학자들의 논증들(예를 들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논증들) 속에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러한 불편한 관계가 플랑크에게는 곧 과학 공동체로부터의 도편추방의 시대를 의미했다. 자신의 작업이 헤르츠와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인정한 볼츠만은, 마흐와 오스트발트를 비롯해 그들의 추종자들이 쏟아붓는 가혹한 비판을 견딜 수 없었다." "1906년경 형이상학에 맞서던 그간의 투쟁은 생기를 잃은 채 독단적인 경험론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모든 가설적 구조들은 금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만일 오늘날의 과학계에서 이런 태도가 대체로 사라지고 없다면, 그것은 헤르츠의 후계자들 덕분이다."(246)


# 헤르츠의 모델 : 수학적인 공식이 물리학의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골격을 제공하고 물리적인 실재에 논리적인 구조를 부여한다는 사실, 그런 구조나 모델의 구성 요소들이 지각으로부터 도출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관찰된 사건들의 가능한 배열들에 대응한다는 관점


"(어떤 이론적 표상의 영역을 그 내부로부터 보여주는) 헤르츠의 방법은 특정한 표상 체계 바깥에 존재하는 더 일반적인 원리들에 호소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당 이론에서 의미 있게 표상할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의 총합을 규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칸트의 비판 계획이 가지는 본격적인 철학적 위력을 인정할 줄 아는 교육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이야말로 헤르츠를 선호하게 된 중요한 요점이었다. 왜냐하면 칸트의 주요한 야심 가운데 한 가지 역시, 외재적인 형이상학적 가정들에 전혀 의존하지 않은 채 '이성'의 전반적인 한계 영역을 그 내부에서부터 보여 주는 방식으로 구획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칸트는 (합리적으로 말해서) 형이상학의 의문들이란 그렇게 구획된 이성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거나 그것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결국 형이상학은 '알 수 없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꼴이라는 사실을, 그냥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247-8)


"'이성의 한계' 이론을 좀더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계Schranken와 한계Grenzen에 대해 칸트가 행한 구분을 주목해야 한다. 칸트는 〈(연장된 존재들 내에서) 경계란 언제나 어떤 한정된 장소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곳을 에워싸고 있는 공간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한계는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다만 양이 절대적으로 완전하지 않는 한에서 그 양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不定的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수학과 자연과학에서 인간의 이성은 경계가 아니라 한계를 수용한다. 즉 이성은 실제로 무언가가 이성과 상관없이 존재하며 이성이 결코 그것에 도달할 수 없음은 수용하지만, 어떤 시점에 이르면 이성이 자신의 내적인 진보에서 완결을 보게 되리라는 주장은 수용하지 않는다.〉" "수학과 물리학이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의 수는 경계 지어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견은 현상으로 한계 지어져 있다."(251)


"쇼펜하우어 자신이 칸트주의적인 견해를 넘어섰다고 주장하게 된 근본적인 요점이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순수한 사변적 이성의 영역을 '표상Vorstellung으로서의 세계'로 변환시킨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객체object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전前칸트주의적인 독단론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주체subject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즉각 피히테 식의 관념론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지각의 심적 이미지로서의 표상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그런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표상은 그것으로부터 도출되는 추상적인 개념들, 이른바 종種, 혹은 집합 개념의 표상이나 예술의 대상인 플라톤적인 이데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주체를 세계 내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본 것이다." "객체는 오로지 그것들이 알려지는 한에서만 존재하며, 주체는 오로지 인식자인 한에서만 존재한다."(258-60)


"칸트와는 달리 쇼펜하우어는 도덕성의 기반이 순수한 선험적 개념이 아니라 경험적인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경험적인 것만이 실재하며, 오로지 경험적인 것만이 의지를 움직일 수 있다. 선험적이고 개념적인 어떤 것이 의지를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은, 의지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어떤 것에 자극받아 작용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강력한 논증을 통해 합리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고 결과적으로 덕스러운 것이 완전히 합치한다는 칸트의 생각을 혹평한다. 쇼펜하우어에게 합리성은 윤리적으로는 중립적인 의미를 띠며, 따라서 덕스러운 것도 사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인간이 훨씬 더 다양한 유형의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능력을 뜻할 뿐이다. 즉 추상적인 개념을 이용해 주변 환경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사유 능력의 결과, '인간은 자유롭다'고 이야기된다."(262-3)


"칸트적인 사유에 남아 있는 스콜라주의의 잔재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공격은 도덕성을 감정과 의도에 직접 의존하게 만드는 수순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칸트가 구분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별개의 것은 아니었던 사실과 가치의 영역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는 더욱 확고하게 분리되었다. 쇠렌 키르케고르의 사상에서는 이러한 분리가 다리를 놓을 수도 없을 정도로 깊은 골이 된다." "쇼펜하우어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기꺼이 대신하는 인간만이 진정으로 도덕적이다. 반대로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도덕성은 비사회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도덕성은 사람들 각자가 신과 직접적으로 맺고 있는 절대적인 관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적인 인간의 목적은 '부조리 속으로의 도약'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도약을 통해 유한한 인격체는 자기 자신을 무한한 자에게 전적으로 위탁하게 된다. 이런 관계 하에서라면 친구나 동료 인간은 불필요한 타자가 되는 것이다."(265-6)


"개인이 오직 하나뿐인 책임의 담지자이며, 종교와 도덕적 경험의 오직 하나뿐인 주체이다. 이런 개인이 질식할 것만 같은 군중 속에서 길을 잃었으며, 키르케고르는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암울한 상황에 주목하게끔 만드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보았다. 케리케고르는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에 맞서 방대한 논쟁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논쟁이 그가 말한, 소위 간접적 의사소통의 본질적인 요소를 형성하였다." "간접적 의사소통, 혹은 '반성의 수단으로서의 의사소통'은 소크라테스의 양식에 의거한 지적이고 도덕적인 산파술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앎의 문턱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스스로 그 문턱을 넘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사변은 '객관적인 진리'에 관심이 있지만, 기독교는 주관적인 진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주관적인 진리라는 개념은 키르케고르의 모든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다."(268-70)


"19세기 말에 그러한 결론을 가지고 일반적인 대중 독자층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소설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였다. 그의 작품과 키르케고르의 저술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그들의 개념과 '간접적 담화'와 '삶의 의미'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는 분명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톨스토이는 도덕성이란 본질적으로 감정에 근거하며, 예술을 '감정의 언어'라고 보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말은 이성적 사유의 매개체였다. 따라서 톨스토이에게 예술은 도덕적 교훈을 널리 퍼뜨리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 매개체였다. 그러나 도덕적 삶에 관한 톨스토이의 견해를 자세히 보면,그는 키르케고르보다는 쇼펜하우어와 일치하는 면이 더 많다. 톨스토이의 경우, 만일 도덕성이 사회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예술은 인간의 삶의 조건이며 인간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감정의 전도체이다."(272)


"칸트의 비판철학으로부터 톨스토이의 우화에 이르는 역사적인 연속성이 완전하지도, 직접적이지도 않지만, 그 안에는 쇼펜하우어가 착수하고 키르케고르가 완성한 어떤 논리적인 발전이 존재한다." "행위의 모든 다양한 영역에서 이성의 한계를 구획하려는 시도로 시작한 이 작업은 가치의 영역에서 이성의 타당성에 대한 즉각적인 부인으로 결말을 맺었다. 그러므로 이성의 범위에 한계를 설정하려는 시도는 궁극적으로 가치, 도덕, 그리고 삶의 의미가 오로지 합리적인 사유의 경계선을 넘어서 있는 정서의 영역 안에서 간접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논의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귀결되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러한 발전 과정에 관계된 모든 사람은 사상가, 예술가, 그리고 사회비평가들로 이루어진 빈의 한 세대 전체에 자연스러운 매력을 발산하였다. 그 세대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가치관으로부터 아예 자신들의 계층 전체가 소외되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276-7)


"헤르츠와 볼프만은 물리과학의 논리적 명료화와 체계적 이론의 경험적 적용이 실제로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그림적 표상bildiche Darstellung을 제공하는지 보여 주었다. 여기서 'bildiche Darstellung'이라는 어구는 마우트너가 의미했던 '은유적인 기술'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서, 이른바 수학적인 모델을 가리킨다. 그것은 제대로만 적용된다면 세계에 대한 참되고 확실한 지식을 산출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칸트의 근본적인 반형이상학적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이른바 물리 이론에 담긴 언어의 한계를 전적으로 '그 내부로부터' 구획함으로써 그 임무를 수행해 왔다. 따라서 헤르츠와 볼츠만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키르케고르와 톨스토이의 윤리적 견해에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다시 말해 그들의 도움으로 과학 이론의 기술적記述的인 언어가 어떻게 물리학의 사실적인 탐구에서 '표상적인' 용법을 획득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하나의 합당한 후속 단계(언어 비판)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279-80)


6 다시 생각해 본 《논리철학논고》


"앞선 장에서 우리는 당대 합스부르크 빈 사회의 교양을 갖춘 모든 사유하는 인간들에게 후기 칸트주의의 비판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보여 주었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우리는 1) 빈에서는 전반적인 철학적 '언어비판'의 필요성이 이미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쓰기 15년 전쯤부터 대두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2) 그러한 포괄적인 언어비판을 처음 시도했던 마우트너의 이론적 결함이 한 가지 해소되지 않는 매우 구체적인 난점을 남겼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헤르츠와 볼츠만의 물리학을 키르케고르와 톨스토이의 윤리학과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을 단일하고도 일관된 설명 속에서 찾을 수만 있다면, 그러한 난점이 극복될 수도 있으리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우리의 분석을 통해 도달한 가설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처음부터 몰두해 있는 문제이자 《논고》의 집필이 지향할 목표를 결정해 준 문제란, 바로 그 '일관된 설명'을 찾는 문제였다는 것이다."(284-5)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자체에 관한 글은 상대적으로 적게 읽었던 것 같다. 음악의 쇤베르크와 회화의 코코슈카처럼 그는 직업주의를 중시하지 않았고, 그저 무신경하게 자기 자신을 독학으로 공부한 철학자라고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해서 그에게 감명을 준 몇 안 되는 철학 저술가 중 한 명은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였다. 18세기에 괴팅겐 대학교의 자연철학부 교수였던 리히텐베르크는 크라우스의 존경을 받았고 마흐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는 당시에 유행하였던 금언체 양식의 철학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쇼펜하우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런 점에서 보면 《논고》에 담긴 금언들 역시 단지 시대적 조류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일 뿐이다. 리히텐베르크는 이론물리학과 언어철학 양쪽에 모두 저술을 남겼는데, 실제로 그 기저에 깔린 정신은 (폰 브릭트가 말한 대로) '비트겐슈타인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인다."(297)


"공학도 비트겐슈타인은 마우트너 같은 사람의 철학적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표상적인' 언어가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물리학에서, 마우트너에게 은유적인 기술을 뜻했던 'bildiche Darstellung'이라는 표현을 헤르츠적인 의미로 극단적으로 재해석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통해 자연현상을 의미 있게 표상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물리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얘기하는 똑같은 원리들이 기계를 제작하는 데도 실제로 적용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열렬한 헤르츠주의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역학에서 그림, 즉 '모델'의 형태로 공적 용법의 표상Darstellungen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역학이 물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분과로 간주될 수 있다는 확신은, 물리학자가 역학의 현상을 나름대로의 '모델'로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현상에 부여하게 되는 수학적 구조의 귀결이었다."(302-3)


"더 나아가 그러한 표상은 그 자체의 수학적 형식에 의해 그 적용 범위가 대체로 결정된다는 측면에서 자기한계적self-limiting이라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므로 최소한 한 분야의 언어는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역학의 언어로서,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다시 말해 세계의 '표상'을 수학적인 그림의 형태로 제공하기에 충분한 일의성과 올바른 구조를 갖춘 언어이다." "그래서 만일 누구든 그에 상응하는, 그러나 완벽하게 포괄적인 '언어의 수학'을 확립할 수만 있다면, 마흐나 마우트너처럼 역학적 개념의 심리적·역사적 발전을 연구하는 대신에, 헤르츠가 역학의 수학적 구조를 고려하여 역학을 철학적으로 안전한 기반 위에 올려놓고 결과적으로 역학 비판을 변모시킬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반적인 언어의 본성과 한계를 '그 내부로부터' 설명해 줄 '언어비판'을 수행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303-4)


"비트겐슈타인이 자연스럽게 프레게와 러셀의 작업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던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왜냐하면 러셀의 초기 저술들에 나타난 철학적인 기획은 일반화된 형태로 헤르츠 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명시적으로 정의된 형식적 모델에 입각하여 명제들의 진정한 형식을 표현할 수 있는 '명제 계산법propositional calculus'에 도달하였다. 그로부터 귀결된 형식주의는 실제 세계의 '대상들'을 한데 묶어 '사실'로 만들어 내는 상응하는 구조들을 언어의 내부적인 구조가 어떻게 표상하는지 보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명제의 참된 논리적 형식은 종종 자연 언어의 오도된 문법적 외관에 가려져 있으며 그러한 참된 형식은 《수학 원리》에 담긴 논리적 기호들로 표현될 때 가장 잘 포착된다는 러셀의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에게 근본적인 실마리를 제공하였다."(305)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명제들은 어떤 상황이나 대상들의 배열(더 일상적으로는 '사실fact'이라고 불리는)에 대해 우리가 구성한 표상들이다. 명제는 그러한 사실의 정확한 재현물이 아니라 단지 그러한 사실의 본질적인 측면, 다시 말해 이름들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들과 관계사들에 의해 표상되는 대상들 간의 논리적 관계들을 재현하는 것이다." "원리상 비트겐슈타인의 모델은 대상들에 관해, 그것들을 명명하고 그것들의 배열을 기술하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주장할 수 없다. 이름 혹은 기호들 간의 확정적인 관계가 바로 명제의 뜻sense이다. 〈모델이 표상하는 것은 그것의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델이 기호들에 관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이름 혹은 기호가 지칭하는bedeuten 대상들이 실제로 그렇게 배열되어 있다면, 그 명제는 참이고 그 모델은 옳다. 그렇지 않다면, 그 명제는 거짓이고 그 모델은 옳지 않다. 어느 경우든 〈한 모델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 모델을 실재와 비교해 보아야 한다.〉"(310-1)


"따라서 두 가지 점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모델 이론에 본질적이다. 하나는 진리대응론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모든 기술적인 언어 사용을 허용하고 정당화해 주기에 충분한 '동형성Verbindung'이 언어와 실재 사이에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언어의 논리적 구조는 우리가 대상들의 특정한 배열이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선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끔 해 준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체계 안에서 '진리표truth table'가 수행하는 기능이다. 진리표는 어떤 모델이든 그 모델의 선험적인 진리 가능성들을 확립한다. 한 명제에 들어 있는 기호들에 가능한 모든 '진릿값truth value'이 부여되고 나면, 그중에서 어떤 것이 참인 가능성들인지 결정될 수 있고, 그 명제의 뜻, 다시 말해 그 기호들 간에 성립된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되는 관계가 무엇인지 주어질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어떤 한 모델이 논리적 공간에서 어떠한 상황을 나타내는〉 방식이다."(311)


"비트겐슈타인에게 결국 언어와 세계의 관계 그 자체는 다른 모든 비사실적인 숙고의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명제들은 모델화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실재를 기술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명제는 동시에 자신이 실재를 어떻게 기술하는지를 기술할 수 없다. 그러지 않고 그것을 굳이 기술하려고 한다면, 자기 지시적self-referential이 되어서 결국에는 무의미해지고 말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모델은, 모델이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모델은 사물들이 세계 내에 존재하는 방식을 모델화하였고, 따라서 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모델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것은 모델 그 자체의 본성으로 볼 때 분명한 것이다. 모델은 사실적이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감히 표상할 수 없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의 명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318-9)


"우리의 가설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이 착수한 문제는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일반적인 언어비판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하나는, 논리학과 과학에는 일상적인 기술적 언어 안에서 수행하는 적절한 역할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 현상에 대한 수학적 모델에 어울리는 세계의 표상을 산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 가치, 그리고 인생의 의미'에 관한 질문들은 이 기술적 언어의 한계 바깥에 놓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간접적'이거나 시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일종의 신비적 통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수행한 작업의 첫째 부분은 헤르츠가 물리과학의 언어에서 모델과 표상에 대해 시도한 분석을 확장함으로써 성취되었고, 그는 이러한 확장을 위하여 프레게와 러셀의 명제 계산을 그 기본 골격으로 활용하였다. 그가 수행한 작업의 둘째 부분은 부정적인 방식 외에는 말로써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었다."(319-20)


"사실의 세계에 가치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의 밖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 수수께끼란 없다. 세계의 의미는 사실적인 것의 바깥에 있다. 이러한 가치와 의미의 영역에는 명제도 없고 사실도 없다. 오로지 역설과 시가 존재할 뿐이다. 크라우스의 말처럼 〈해결책 없는 수수께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 오직 그 자가 예술가다.〉 논리학이 어떻게 세계를 표상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 세계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함께 '신비로운 것'을 구성한다. 두 영역 모두, 명제들이 결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영역들이다. 따라서 '보여 줌'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계와 논리가 맺는 관계,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들과 세계의 뜻, 혹은 의미가 맺는 관계가 그것이다. 이런 측면을 명제들의 논리적 구조 내부로부터 보여 주는 일의 미덕은, 그럼으로써 사실의 영역과 가치의 영역이 과학적으로 단호히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이다."(324)


"이성과 환상을, 물리학자의 수학적 표상과 시인의 은유를, 직접적인 기술적 언어와 '간접적 의사소통'을 분리시킴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확신했다. 모델 이론은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지식이 가능한가를 설명해 주었다. 그 이론의 수학적(논리적) 기반은 어떻게 명제들의 구조가 그것들의 한계를 보여 주는지, 다시 말해 어떻게 명제들의 구조가 과학적(합리적) 탐구의 한계를 결정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모델 이론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삶의 의미'가 말해질 수 있는 것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는 것이며, '삶의 의미'는 문제라기보다 수수께끼로 언급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해결하거나 답해야 할 질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델 이론은 삶의 의미가 이성의 범주들을 통해서는 논의될 수 없는 주제라는 키르케고르의 생각을 확인한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삶의 의미는 더는 학문적인 질문이 아니었다."(331-2)


7 인간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후기 철학


"빈학파의 논리실증주의가 모양을 잡아 가고 있던 1920년대 중반의 매우 중요한 시기에, 그 학파에 관여한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모두 비트겐슈타인과 《논고》의 권위를 깊이 존중하였다. 그렇지만 정작 비트겐슈타인 본인은 방관자인 채로 남아 있었고, 점차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30년대 초에 이르자, 그는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그의 독창적인 생각으로 간주하고 있는 생각과 주장들로부터 스스로 완전히 결별하고 말았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논고》에 담긴 은유들을 〈뚫고, 올라가, 넘어서서〉 마침내는 그것들을 '정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애초에 언어에 관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바로 그 난점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의 난점들은 해결하지도 못하고 내버려 둔 채,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철학적 학설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안한 《논고》의 논증을 전혀 새로운 주장의 원천으로 변모시키고 있었다."(361-2)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뉴턴 식의 역학이 세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말해 주는 것은 이것이다. 즉, 그런 이론은 우리가 실제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 그대로 세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흐가 흄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칸트의 역할을 맡은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흄에 대한 칸트의 반격을 재연하면서, 다만 인식론적이라기보다는 언어적인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언어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이용할 수 있으리라 희망을 품었던 '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라는 결정적인 착상은 미혹일 뿐이었다. 언어적인 영역과 세계 사이의 관계들, 이를테면 의미, 사용, 혹은 언어 사용에 수반되는 일종의 사용 설명서 같은 것들은 형식적 정의에 관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단지 '터득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364-5)


"난파 중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와 문화 속에서 자란 중부 유럽의 젊은 지성인들에게 이러한 철학적인 개혁은 신선한 공기를 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실제로 대략 《논고》의 5분의 4는 굳이 명백한 오해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직설적이고 근엄한 실증주의적 표어들의 원천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이들 젊은이들이 독해한 바대로, 그 책은 웅장하고 매우 전문적이었으며 외형상으로는 미신에 대한 최후의 탄핵 선고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일단 실증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나자, 사람들은 그에게서 다른 어떤 빛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가 1929년 이후로 철학에 복귀하여 이전과는 대조되는 두 번째 철학함의 국면으로 점차 접어들게 되었을 때에도 그의 새로운 방식은 실증주의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초기의 실증주의적 입장을 새롭고 심도 깊은 기반 위에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비추어졌다."(366-7)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그 이전부터도 《논고》가 실증주의적이기는커녕 정확히 그 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기를 바랐다. 빈의 실증주의자들이 '중요한' 것을 '검증 가능한' 것과 동치로 보고, 모든 검증 불가능한 명제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단히 처리해 버렸을 때, 《논고》의 결론부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만이 홀로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고 분명히 주장되었다(비록 소귀에 경 읽기인 셈이기는 했으나). 《논고》는,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명제들로 포착해 내기에 부적절한 것들 안에서만 '더 높은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명제'로 '그릴' 수 있는 '사실'이란 우리의 도덕적 복종이나 미적 승인에 관한 그 어떤 본질적인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로 내뱉을 수 없는 것' 앞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택한 침묵은 실증주의자들의 것과 같은 조롱의 침묵이 아니라, 존경의 침묵이었다."(367-8)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은 더는 언어의 '형식적인 구조'에 있지 않았고 '명제'와 '사실' 사이에 상정되는 구조적인 유사성 같은 것에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를테면 물리학 내에서라면,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그림적' 표상을 제공해야 할 특별한 이유들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라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명제들을 '사실의 그림들'로 간주해야 할 이유가 덜하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것들 대신 행동으로서의 언어에 주의를 집중하였다. 그는 상이한 표현들의 사용을 지배하는 실천적인 규칙들, 그러한 규칙들이 적용하는 언어게임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언어게임들에 유의미성을 부여하는 더 폭넓은 차원의 삶의 형식들을 분석하는 데 몰두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초월적인' 문제의 핵심은 더는 언어적 표상의 형식적인 성격 안에 놓이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그것은 '인간의 자연사' 속의 한 요소가 되었다."(373)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더욱 심오한 문제들은, 심지어 수학에서조차, 수학적인 계산의 내적 정연함이 아니라 그런 계산이 외재적인 적절성을 획득하게 되는 규칙 순응적인 행동을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특정한 발화의 '의미'는 바로 그 표현들이 관례적으로 사용되는 규칙 순응적이고 기호 사용적인 활동('언어게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차례로 그러한 기호 사용적인 활동들은 더욱 폭넓은 활동의 패턴들(즉 '삶의 형식들')로부터 그 유의미성을 이끌어 낸다. 삶의 형식은 그러한 활동을 담고 있으며, 그러한 활동들은 삶의 형식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초월적인' 문제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은, '삶의 형식'이 '언어게임'을 위한 합당한 맥락들을 창조하는 그 모든 다종다양한 방법들과, 그럼으로써 그 언어게임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의 범위와 경계를 어떻게 정하게 되는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 된다."(375)



8 직업주의와 문화: 현대 사조의 자살


"후기 합스부르크 빈이 (크라우스가 표현한 것처럼) '세계 파괴의 실험장'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비트겐슈타인 세대의 지적인 청년들에게 그곳이 가혹한 시험대였던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이중 군주국, 합스부르크의 하우스마흐트, 이교도인 투르크족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하기 위해 300년 전에 형성된 이래 경쟁국인 오스만 제국에 인접한 상태로 조용히 화석화되어 온 포 계곡에서부터 카르파티아 산맥에 이르는 길게 뻗은 엄청나게 넓게 펼쳐진 영토, 그리고 무엇보다도 1800년 이전에 프란츠 황제가 처음으로 이룩했고 메테르니히와 프란츠 요제프가 영구화한 중앙집권적 전제정권 등 모든 정치적 권위와 사회적 통제의 전체적인 친근한 발판들이 갑작스레 해체되어 버렸고, 이에 따라 빈 사람들은 사지가 잘려 나간 자신들의 공화국을 위해 1920년대의 유럽에서 자신들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궁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401-2)


"실용주의적인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기나긴 세월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찾아온 사회 정치 운동의 건설적인 가능성들을 잘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새로운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제도와 사회적 관행을 건설하는 일에 착수한 그들은 더는 소외의 원인을 (특히 키르케고르적인 형태의 극단적인 소외의 원인을) 이전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생 오스트리아에서는 지성인들이 수행해야 할 적극적인 활동들이 많았다." "헌법의 뼈대를 갖추어야 했고, 의회를 세워야 했으며, 효과적인 사회민주주의 체계가 순조롭게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합스부르크의 극단적 보수주의라는 사회 전반의 장애물은 마침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실용주의자들은, 지금은 미래를 지향하고 건설적인 일들을 찾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마흐의 역사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실증주의는 그 형이상학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호소력을 지녔다."(403-4)


"실용주의적 태도를 가진 1920년의 사람들에게 《논고》에 담긴 언외言外의 요점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인 도덕적 개인주의는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을 놓고 볼 때, 그 책에서 중요하게 보인 것은 오로지 건설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부분들, 이를테면 그 책에서 소개한 형식적인 기법들, '그림들'의 체계로서의 언어에 대한 이론적 모델, 진리표 그리기 방법뿐이었다." "1920년대의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실증주의와 실용적인 기술적 문제들을 지향하는 자연스러운 전환이 목격되었다. 삶, 사유, 예술의 모든 영역이 새로운 부흥을 요청했다. 중요한 것은, 활용 가능하고 효과적인 최신의 과학적 기법들을 건설과 개혁이 위대한 과업에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 그야말로 이론과 지적 활동의 핵심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논리실증주의의 성서로서 얼토당토 않은 호소력을 발휘하게 되었다."(410)


"1920년대에 성취한 예전 취향과 인습으로부터의 해방은 자연과학과 여타의 지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예술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한 기술적 혁신을 자극하였다. 예전의 합스부르크 영토와 독일과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낡은 독재 권력이 힘을 상실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나(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시와 문학, 회화와 영화 제작, 음악과 건축 등의 분야들이 강렬한 기법상의 실험 단계로 돌입하였고, 그러는 동안 예술가와 작가들은 이전까지 향유해본 적이 없었고 또 그때 이후로도 (특히 러시아에서는) 향유하지 못하게 되는 고도의 자유를 만끽하였다. 당시는 모든 예술의 분양에서 새로운 시작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적 언어나 음악이나 회화가 과연 무언가를 표현하거나 표상할 수나 있는 것인지에 관한 전쟁 이전의 모든 비판적 의심들은 파기되었다. 실증주의적 태도는 행동을 낳았다. 해야 할 일은 단지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진척시키는 것뿐이었다."(413)


"문화 할거주의가 퍼져 나가는 가운데, 이제 예전의 낡고 진부한 정통적 관행들은 말끔히 잊혀졌다. 그러나 크라우스적인 '고결한 인간들'이 각기 스스로 판단해 선택한 매체와 절차를 통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창조적 환상을 펼쳐 갈 수 있는 문화적 민주주의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대신, 예술의 전문 직업화 또는 결국은 낡은 정통적 관행 대신에 새로운 정통적 관행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물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러한 새로운 직업적 정통성의 관행은 특별한 일련의 기법들을 통해 규정되었다. 이제 직업적으로 훌륭한 행동이란 자신이 특별한 스타일이나 방법을 숙달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1890년대의 탐미주의는 약 30년이 지난 후의 매우 다른 환경에서, 그리고 매우 다른 인식론적 토대에서, 예술의 전문 직업화 속에 사회학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화가는 화가는 화가이고, 음악가는 음악가는 음악가이다.〉)"(415-6)


# A painter is a painter is a painter while a musician is a musician is a musician.


"음악에서건 건축에서건, 1914년 이전에 쇤베르크와 로스라는 '비판적' 세대가 수행한 기술적인 혁신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르러 형식화되었고,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지나치게 장식적인 양식만큼이나 인습적인 것이 되어 버린 강압적인 반장식적 양식의 기반이 되었다." "시와 문학, 회화와 조각, 그리고 심지어는 물리학과 순수수학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각 경우마다 이를테면 공리화, 혹은 도약률sprung rhythm, 조작주의, 혹은 비구상 예술 등의 새로운 기법들은 처음에는 19세기 후반으로부터 떠넘겨진 예술적이고 지적인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도입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고도 합당한 새로운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지만,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현대 시인, 추상 미술가, 철학적 분석가 등 새로이 전문 직업화된 학파들이 사고파는 물건이 되어 버림으로써, 결국에는 도리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423)


# 도약률sprung rhythm : 하나의 강세가 넷까지의 약한 음절을 지배하며, 주로 두운, 중간운 및 어구의 반복에 의하여 리듬을 갖추는 일종의 운율법


9 후기: 소외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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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시어도어 래브 지음, 강유원.정지인 옮김 / 르네상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1장 중세 서구의 통일성들


# 중세 유럽인들의 삶에 기본적인 동일성을 부여한 요인들

1. 교회 : 교황(사제)의 높은 권위와 지역에 뿌리내린 교회(수도원)들이 예배와 축제 등을 통해 일상생활에 부여하는 통일성

2. 전쟁 :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춘 영주의 군사적 보호 아래 일정한 생산물과 노역을 보답으로 제공하면서 살고 있는 지역민들

3. 농노의 예속상태 :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토지를 경작하면서 그 대가로 보호와 기본적 생존을 보장받는 권리와 의무 관계

4. 도시 구조 : 농촌에 비해 더 많은 경제적·정치적 권리, 특권을 가진 수공업 길드들, 도시를 서로 연결하는 무역상·상인들

5. 정치 형태 : 사회질서의 최상부에 (신에게 통치권을 부여받은) 한 명 또는 소수가 자리잡고 있는 피라미드식 위계 모형

6. 교육제도 : 3학(문법·논리학·수사학) 4과(산술·기하·음악·천문학)로 구성된 대학 커리큘럼과 식자들의 공용어인 라틴어

※ 존재의 대연쇄 : 중세 유럽인들의 삶을 포괄하는 사유


2장 다시 만들어진 유럽: 르네상스를 향하여


# 중세 유럽인들의 삶에 균열을 가져온 사건들

1. 종교 : 보니파키우스 8세(재임 1295~1303)의 간섭에 저항한 군주들의 조치는 아비뇽 유수로 이어지고 곧 교황의 권위와 군주의 통치권을 구분하는 이론적 논의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2. 전쟁 : 아쟁쿠르 전투(1415)에서 잉글랜드의 보병과 궁수들이 프랑스의 정예 기병대를 격퇴하면서 중세의 전쟁 수행 방식은 수명이 다해갔으며, 화약의 사용은 이에 종지부를 찍었다.

3. 질병 : 흑사병의 도래로 인구가 급감하면서 교회의 권위가 붕괴되고 산업·상업분야의 변화가 촉진되었으며, 고용구조, 사회계급 간의 관계 등도 과거와 결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4. 인문주의 : 고대 원전 연구, 실천적 삶과 관조적 삶의 대결, 자연에 대한 관심, 중세 변증법과 다른 논리학 체계, 가까운 선례가 아니라 머나먼 과거에 의지하려는 욕구 등이 생겨났다.

5. 시각예술 : 두치오, 치마부에, 조토 등 사람들이 화가의 이름을 알기 시작했고, 상징적 재현보다는 명확히 표현된 풍경 묘사, 3차원적으로 표현된 인물, 강렬한 감정 등이 중시되었다.


3장 르네상스 문명


# 르네상스 시기를 특징 짓는 요인들

1. 화약 : 비교적 싼 비용으로 장비를 갖출 수 있는 포수는 기사나 장궁병보다 쉽게 훈련이 가능했고 따라서 군대 규모와 군비 지출, 그리고 거기서 야기되는 인명 손실이 급격히 증가했다.

2. 새로운 국가 체제 : 권력의 중앙집중화, 광범위한 관료체제화, 급속한 조세인상, 전쟁수행 능력의 엄청난 확대, 전통적으로 독립적인 권위를 누렸던 계급들의 편입 등이 진행되었다.

3. 엘리트 문화 : 중세 귀족은 군사적 역할을 가능하게 한 장비와 용맹으로 공동체를 뒷받침했지만, 점차 세련된 문화적 성취, 지성과 취향, 스타일의 우월함이 위신의 원천이 되었다.

4. 해외 정복 : 아시아와 대서양 너머로 활동공간이 확대되면서 자기규정적 집단성을 나타내는 말로 '유럽'이라는 단어가 '기독교 세계'를 대체했고, 야만인에 대한 혐오가 크게 증가했다.

5. 자본주의 : 시장 경제와 노동분업, 새로운 금융제도의 확산, 지속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정신과 태도 함양,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을 착취하는 도시 부르주아지의 성장 등이 나타났다.

6. 과거 지향 : 중세를 배척하고 머나먼 과거에서 모범을 찾는 태도, 개인의 개선과 더불어 공공선을 추구하는 미덕 등은 교육, 문학, 예술, 종교, 정치사상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7. 종교개혁 : 성경과 교부로 돌아가자는 신학자들의 요구는 과거 지향적 태도와 일맥상통했으며, 특히 루터와 그의 계승자들은 중세의 외피를 제거한 순수한 기독교를 재창조하고자 했다.

8. 세속화 : 관찰과 수학적 논의를 전개한 갈릴레오, 왕권의 세속화를 옹호한 마키아벨리, 신성함의 역할을 제한한 데카르트 같은 인물의 등장으로 종교적 심성과 권위는 서서히 쇠퇴했다.


"1600년 경 '국가'라는 단어가 일상 용어로 등장하면서, 국가는 국민과 정부 어느 쪽에도 종속되지 않는 비인격적 존재로 규정되었다(같은 시기에 사업체들도 이와 유사한 비인격성이 덧붙여졌다). 16세기 초에 이탈리아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개별적인 탐구 영역으로 분리했지만, 유럽 전역에서 등장한 그의 계승자들─특히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프랑스의 장 보댕, 네덜란드의 휘호 흐로티위스, 그리고 영국의 토머스 홉스─은 그보다 더 많이 나아갔다. 그들은 특정 국가나 지역의 구체적인 이익을 대체한 자연법 개념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국가에서 그 인격적이고 신성한 토대를 분리해낸 지리적·역사적 분석을 구상해냈다. 독점적 왕조주의─국가는 통치하는 왕가의 소유물이라는 믿음으로, 루이 14세의 '짐이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의 주장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음에도, 국가의 비인격성은 정치가들의 사유에까지 침투하기 시작했다."(73-4)


"귀족을 길들이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여기서 중요한 과제는 복속시키는 것보다는 흡수하는 것이었다. 군주는 수 세기 동안 지방을 지배해온 귀족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없다면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필요한 건 복종이나 마지못해 하는 협조가 아니라 진정한 동반자 관계였다. 통치자는 시골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영토 전체에 걸쳐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체제의 효율성을 처음으로 보여준 조짐은 중세 말기 잉글랜드에서 나타났다. 지방의 유력가들이 무급 행정직책을 맡고 의회에 참석함으로써 국가 통합을 돕고 그럼으로써 중앙정부의 의사결정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측 동반자들은 17세기 중반에 한쪽이 다른 쪽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분명히 알려준 혹독한 내전을 치르고서야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78)


"영토를 기반으로 한 정체들이 견고화된다는 사실 자체는 그 정체들 사이의 상호 관계가 체계화되어야 함을 의미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 시험적으로 시작된 외교적 관계와 절차의 정교한 네트워크가 유럽 전역에서 확립되었다." "이 과정을 가장 예리하게 관찰한 이들 중 하나인 리슐리외 추기경이 《정치적 유산》에서 군주들은 언제나 협상을 해야 한다고 권고한 것은 주목할 만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기회들을 놓쳐버리고 외교의 바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분명했다. 1648년의 조약들에서 유럽의 영토국가들 상당수는 처음으로 그들의 두드러진 차이점들을 가능한 한 많이 그리고 단번에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국가 형성에 성공했을 때에만 그들은 코앞에 당면한 구체적인 갈등의 해결─이는 이해당사자들이 기껏해야 둘이나 셋이었던 이전의 모든 평화주의의 목표였다─을 넘어서 대규모 국제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80-1)


"귀족들이 새로운 자기상을 만들어냈던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화약전이 야기한 변화하는 요구에 맞춰가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변화들도 있었다. 미적인 감수성이 세련된 신사의 표식이 될 수 있었다면, 관리자로서의 기술 역시 그러했다. 문서기록이 늘고 복잡한 시장이 번성함에 따라, 대지주들이 성공적으로 재산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알아야 하는 것뿐 아니라 수리능력도 더욱더 필요해졌다. 그들은 점점 더 자신과 후손들을 위한 교육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전례 없는 숫자로 아들들을 대학에 보냈다. 동시에 귀족들은 상당히 폭발적으로 도시 저택을 짓기 시작하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관심사들을 좇았다. 이전에는 귀족들이 파리나 런던 같은 도시의 문화와 권력 중심지 가까이에 그렇게 많은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이 서로 가까운 곳에 밀집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교 '시즌'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다."(87-9)


4장 위기에 처한 문명


# 르네상스의 이상들을 파괴한 일련의 사건들

1. 해외 진출 : 인구 증가와 경제 위기가 맞물리면서 해외진출이 가속화되었고, 새로 만난 미지의 땅과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진리들에 의혹을 품게 만들었다.

2. 무력충돌 : 영토로 규정된 중앙집권국가 개념이 구체화되면서 국가가 강대해지고, 이에 따라 군대 규모와 살상력이 증가하면서 정부와 신민, 국가 간의 관계에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3. 종교전쟁 : 루터의 개혁으로 촉발된 종교갈등은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극도로 훼손하면서 유럽대륙을 무차별적인 학살로 몰아넣었고, 이단 배척의 희생양으로 마녀사냥이 자행되었다.

4. 자연철학 : 천문학과 물리학, 해부학 등에서 나타난, 실험을 중시하는 사고의 전환은 불온한 사상 취급을 받았으며, 한 세기 이상 낡은 관념들과 공존하면서 회의와 혼란을 심화시켰다. 


"거의 200가지 이해의 당사자들을 대표하는 109명의 공식적 대표자들이 독일 북서부의 베스트팔렌 지방에 모여 5년간 꾸준히 협상한 끝에 1648년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외교 역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참가자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남아서 새로 그릴 지도에 골몰하며 몸소 그 절차들을 궁리해낸 것만으로도, 기본적으로 외교의 체계와, 그리고 이후 몇 세기 동안 유럽을 지배하게 될 국제적 합의의 기준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빈틈없는 대표자─시에나의 거물급 금융 가문의 일원이자 후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가 된 키지 추기경─가 협상에 참석하고 있었음에도, 교황청은 그 최종적인 조약이 교회의 이해에 불리한 것으로 파기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파기는 가톨릭 신자들에게조차 무시당했다. 이것은 전쟁의 참상이 막을 내렸다는 것뿐 아니라 종교적 증오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데 대한 안도감의 신호였다."(144-5)


"독단적인 중앙정부가 지방과 지역의 권리를 짓밟는 일은 국제관계에서 일어난 화염과 맞먹는 수준으로 일촉즉발의 위기들을 초래했다." "인쇄술은 신문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낳음으로써 기존 권위에 대한 전복적인 비판을 유포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른바 '국가의 비밀arcana imperii'이라는 정부의 본질에 관한 논의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직업상 비밀에 대한 통치자들의 독점권을 훼손하였다. 신문은 새로운 모임의 장소와 연결됨으로써 특히 더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유럽에 새로이 들어온 산물인 커피의 소산이었다. 커피숍은 신문이라는 17세기의 발명품을 급속도로 확산시켰고, 거의 항상 신문들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전례가 없었던 공공의 장소와 공적인 담화가 생겨나는 첫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이는 '공적 영역'이라 일컬어진 새로운 것으로 결국에는 사회적 관계들을 돌이킬 수 없이 변화시키게 된 강력한 정치적 효과들을 지니게 된다."(147)


"성경과 초기 교부들에게로 돌아가려는 루터의 시도와 함께 시작된 기독교 세계의 분열은 막대한 불안을 초래했다. 또 인쇄술의 발명은 새로운 사상들에 대한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그 사상들이 가져온 효과의 가속화도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에 따른 소요들에 대한 한 반응이 고대 사상의 또 다른 조류인 회의주의로 돌아가려 한 것이었음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서로 적대하는 세력들이 상호배제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진리들을 주장하고 있었으니 그러한 주장들의 본질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 당연하게만 보였다. 그 결과 16세기는 회의주의자들의 황금기가 되었다. 종교개혁 직전에 나온 에라스뮈스의 《우신예찬》부터 몽테뉴의 설득력 있는 탐구들을 거쳐 셰익스피어의 광대들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이르기까지 의심하는 자와 바보처럼 보이는 자들이 지혜의 횃불들로 떠올랐다." "스토아 철학의 부흥 역시 그 시대의 불확실성에 맞서는 방어물로서 의도되었다."(152)


"16세기에 위기의식이 고조됨에 따라 회화와 조각의 주도적인 양식에도 그 위기의식이 반영되었는데, 그 양식이 바로 매너리즘이다. 15세기 동안 예술가들은 페트라르카가 인도하는 대로 고대를 모방하면서 원근법과 자연세계의 묘사에 통달하게 되었다. 그들은 1500년대 초에 이르면 전성기 르네상스의 표본인 라파엘을 연상하게 되는 고요함을 담아낼 줄 알게 되었다. 그러나 1520년에 라파엘이 세상을 떠난 후, 점차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왜곡이 나타났고, 고통 받는 인물들과 소용돌이 치는 듯 불안정한 구성에 새로이 초점이 맞추어졌다." "미켈란젤로의 노예들은 대리석의 구속에서 해방되려 몸부림치고, 파르미지아니노의 인물들은 불가해한 몸짓과 기이한 자세를 부여받았으며, 티치아노의 후기 걸작들의 제재는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며, 엘 그레코의 구성은 당황스럽고 인물들은 길게 늘여져 있다. 이 모든 것이 회의는 커져만 가고 해답은 여전히 포착되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조짐들이었다."(164-5)


"1590년대부터는 바로크 예술가들이 방향을 바꾸어 강한 힘과 감정으로써 감상자들을 압도하려고 했다. 그들도 여전히 고대세계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이제 그들은 매너리스트들의 망설임과 당황은 뒤에 남겨두고 대신 자신감과 장엄함을 뿜어냈다. 그들의 강점은 격앙된 극적 순간의 묘사였다. 거대한 캔버스와 장관을 이루는 건물들, 화려한 색채, 그리고 강렬한 인물들은 경외감과 묵종의 상태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이들을 휩쓸어버렸다. 이 양식은 무엇보다도 바로크의 독단성과 현혹시키고 영감을 줄 수 있는 바로크의 위세를 좋아했던, 절대주의 군주들과 반종교개혁 교회의 후원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할 운명이었다. 1500년을 전후한 결정적인 몇십 년 이후, 정치적 변화와 다른 종류의 변화들이 초래한 문제들은 점점 더 심화되었고, 안정과 확실성을 회복할 수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새로운 가정들과 기대들로 넘어가야만 했다."(165-7)


5장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 1640년대 이후에 두드러진 전환기의 양상들

1. 정치 영역 : 지역 자치체들과 중앙정부 사이의 갈등이 중앙정부의 승리로 일단락되면서, 국가는 국민 생활 전반을 보호, 통제하게 되었고, 범유럽적인 국제적·군사적 체제가 모색되었다.

2. 정신 영역 : 미래를 예언하고, 병을 치유하고, 운명을 지배하는 감춰진 세상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혹은 신적인 존재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공식적인 믿음의 지위에서 내려왔다.

3. 문예 영역 : 본질에 대한 강조와 진지한 야망이 위트와 가벼운 대화로, 위엄 있는 종교적 회화가 차분한 전원풍의 회화로, 처벌과 억압보다는 격려하는 교육으로, 그 양상이 변모해갔다.

4. 과학 영역 : 당대에 만연한 회의와 불확실성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는, 자신들이 진리를 발견했다는 결정적인 주장을 하고 그 진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자들의 손에 넘어갔다.


"국가 건설 과정은 대체로 중세 초기부터 왕들과 군주들이 맞서 싸운, 가장 중요한 권위의 원천이었던 귀족과 도시, 그리고 교회라는 세 세력 모두를 상대로 진행되었다. 정부들은 17세기의 마지막 30년 정도에 이르러서야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구체화된 그 연합의 가장 주목할 점은 귀족과 중앙의 동반자 관계가 강화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중앙정부들이 영토 전역에 미치는 통제력을 확립해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의지한 가장 중요한 행정가들은 명령하는 일에 익숙하고 이제는 이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교육과 행정의 기술까지 갖추고 있던 귀족들이었다." "이런 관계는 유럽의 모든 수도에서 뚜렷이 드러났는데, 잉글랜드의 향신이든, 아니면 프랑스의 문관과 무관 귀족이든 요점은 동일했다. 지역에서의 권리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정부에 봉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게 더 많았던 것이다."(176-8)


"누군가가 이러한 정치구조를 '앙시앵 레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다음 250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유지되었던 바로 그 체제였다. 세습귀족은 몇 세기 동안의 투쟁을 거친 후에 정부와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을 방해하는 것은 간간이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공격뿐이었다. 경제사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면서 상업적 성공은 귀족계급으로 진입할 기회도 제공했다." "서구의 도시들이 17세기 중반의 위기 이후 자치를 위한 투쟁을 그만두고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중앙집권정부에 통합되어 들어간 것은 모든 당사자들에게 이로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상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정책을 만들 수 있었고, 정체들은 사회의 중요한 부문으로부터 세금과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교회들까지 비종교적인 이익에 굴종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구조가 자리 잡았음을 확증해줄 뿐이었으며,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들이 보았다면 몹시 놀라고 또 기뻐했을 것이 분명한 구조였다."(179-80)


"이 패턴의 중요한 예외가 바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이다. 그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고, 최초로 러시아 해군을 창설했다. 가문의 세습이 아니라 정부 관직을 귀족의 표식으로 만들었으며, 교회를 왕실의 통제 아래 두었고, 외국인을 싫어하는 러시아를 개방하여 수많은 서구의 공학기술자와 건축가, 병사와 예술가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했다. 또 그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이 복잡한 관료제를 통해 중앙의 권력을 부과하여, 러시아는 그 이후로 줄곧 관료의 포화상태에 놓이게 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손댈 수 있는 거의 모든 제도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쳤다. 그 개혁들이 가져다준 모든 혜택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들은 러시아 사회에 그 이후 지속적인 긴장을 초래했다. 그 긴장들이란, 이를테면 서구를 환영헤야 하는가 아니면 거부해야 하는가, 변화는 보통 사람들의 운명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희망은 언제나 좌절되고 말 것인가 하는 것들이었다."(184-5)


"기독교가 유럽을 정복한 이래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겨져왔던 신앙의 체계에서 막대한 변화의 첫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처음으로 종교적 신앙 자체가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세계로의 이 놀라운 도약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무신론자'라는 단어는 이후 몇십 년 동안까지도 욕설로 남아 있었다(홉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했던 중상이었다). 그러나 17세기의 후반기에는 앞으로 다가올 것에 관한 다양한 조짐들이 나타났다." "좀 더 개괄적으로 보자면, 30년전쟁의 여파로 일어난 '열광'과 열정에 대한 반응이 이전의 회의주의와 스토아주의의 일부 관심사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갔던 것이다.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은 데카르트조차도 인식에 관한 탐구를 신이 아니라 정신에서 시작했으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식과 사고의 안내자로서 신앙보다는 이성을 강조하는 것이 용인할 수 일이 되었다."(203-4)


"17세기가 끝날 무렵, 특히 천문학과 물리학의 진보를 정점에 올려놓은 뉴턴의 역작이 출간된 1687년 이후에는 새로운 조건들이 실효를 발휘하고 있었다. 이제 과학에 부여된 권위는 르네상스의 가정들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는데, 그것은 과학의 성취들이 이른바 '책들의 전쟁'에 결정적인 논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날카로운 언어로 씌어진 논문들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고대와 근대의 상충하는 장점들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글들에 담긴 맹렬함은 전통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얼마나 고집스럽게 고수하려 했는지, 그리고 새로운 것의 옹호자들이 얼마나 다급하게 진보를 추구했는지 잘 보여준다. 거기에는 르네상스의 가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고대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필사적인 마지막 시도가 걸려 있었다." "뉴턴 이후로 그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보라는 꽤 다르고 근대적인 개념이 제안되기 시작했다."(208-9)


"르네상스의 종말을 측정하는 척도로 두 가지를 골라야 한다면, 태곳적부터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가정들, 즉 전쟁을 바라보는 태도의 새로운 전환과 공적인 영역에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의 극적인 후퇴를 꼽을 수 있다. 즉 사람의 가장 훌륭하고 용맹스러운 상태를 보여주는 것은 전쟁이라는 가정과, 공적인 정책을 가장 잘 결정하는 방법은 초자연적인 통찰을 통하는 것이라는 가정 말이다. 한층 더 강력하게 표현하자면, 르네상스의 응집력을 해체한 두 가지 주요 동력은 30년전쟁과 과학혁명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사회와 문화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아간 것은 바로 전자에 대한 급격한 반감과 후자에 의해 자극된 새로운 사고방식이었으니 말이다. 그 결과 마침내 반전의식이 지배 엘리트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고, 과학자들의 합리적이고 수학적인 주장들이 권위나 신성함에 대한 의지에 승리를 거두었을 때 우리는 새로운 시대가 탄생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213-4)


6장 예술, 예언, 그리고 르네상스의 종말


"화약은 개인의 허장성세를 말 그대로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가 30년전쟁을 단순히 여러 전쟁들 중 하나일 뿐 특별히 다를 것은 없다고 치부하지 않으려면,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그 전쟁이 극단적인 잔인함과 폭력의 상징이었으며, 수 세대에 걸쳐 인간의 악행의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이었을 정도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정치나 20세기의 양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그 무엇도 그 맹렬성과 잔인함과 파괴력에 필적하지 못했다. 1차세계대전의 전운이 몰려오고 있던 무렵 독일의 장군 헬무트 폰 몰트케가 앞으로 다가올 상황을 암시하고자 했을 때, 그는 (섬뜩하게도) 그 전쟁이 30년전쟁을 4년이라는 기간에 몰아넣은 것과 같을 거라고 예언했다. 그러므로 그 전쟁이 야기한 외상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전쟁의 광포함이 심화되면서, 영웅주의에 대한 대안이 새로운 관심을 끌었고, 유럽의 기성사회 내에서 처음으로 반전정서가 존중 받게 되었다."(216-7)


"이 변화가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설명하려면, 유럽 미술에서 가장 흔한 제재들 중 하나인 군주들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된다. 사회의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군사적인 복장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의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이 드러난다고 생각해왔고, 또 언제나 다른 어떤 모습보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를 더 좋아했다. 그들이 가장 좋아했던 포즈는 무장을 갖추고 말을 탄 모습으로, 이는 로마 시대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명한 조각상에서 따온 포즈였다." "17세기에도 말 탄 모습의 초상화가 누린 인기의 기세는 누그러들 줄 몰랐다. 그런데 어느새 그 전통이 힘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판 블루먼의 '말보로와 그의 장교들'의 시기에 이르면 그것은 상례가 되었고,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조차도 그 알레고리적 효력을 되살리지 못했다. 그렇게 오래된 장르에서 일어난 이러한 확신의 상실은, 30년전쟁기에 처음으로 완전하고 분명하게 드러난 전사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초래한 희생이었다."(217-8)


"당연하지만 전투도, 승리를 미덕과 동일시하는 것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각 개인들조차도 한 가지 생각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루벤스는 《평화와 전쟁》을 그린 후로도 오랫동안 영웅적인 초상들과 군사적인 공예품들을 계속 만들었다. 벨라스케스도 '브레다'를 그렸다고 해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을 표현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말년에는 에스파냐 궁정의 가정적인 장면들에 점점 더 집중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이 변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념적인 성격이 약해진 17세기 말과 18세기라는 시대가 전쟁과 그 의미를 훨씬 더 사실적이고, 모호한 뉘앙스를 곁들인 균형 잡힌 방식으로 다루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789년 이후에 다시금 강렬한 열정들이 전쟁에 생명을 불어넣었을 때, 또다시 영광과 잔인함이 전쟁의 지배적인 이미지로서 인정받으려는 투쟁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246)


"초자연적인 것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면, 우리는 17세기의 어떤 소책자에서나, 1650년부터 1666년까지 매년 재림과 종말, 메시아 출현, 또는 심판의 날에 대한 예언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666년에 대한 것이 특히 흔했는데, 또 다른 인기 있는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13장 끝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666이라는 숫자에 1천을 더하는 것은 거의 자명한 일처럼 여겨졌고, 그리하여 1666년이라는 당대와 연관된 햇수를 찾아낸 것이다." "유럽의 모든 지역에서 자신이 비전을 보았다고 주장한 이들은 수십 명이나 되었다." "유럽의 모든 지역에 그런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점과 권위층과 마찰을 빚는 그들의 경향, 그리고 때때로 그들이 떨친 국제적인 명성은, 그들이 그 시대의 문화 내에서 대표하고 있던 현상의 중요성을 입증해준다."(251-3)


"사람들이 예언가들에게 이끌린 것은 정확한 예측을 기대해서가 분명히 아니었다. 예를 들어 퀘이커 교도이면서 비전을 통해 예언했던 제임스 네일러는 10년이 조금 더 되는 동안 44편의 예언 책자들을 펴냈지만, 그의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그리고 당국을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그가 말한 구체적인 내용들이라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발휘한 최면적인 효과였다. 1650년에 그가 어떤 교전이 있은 지 얼마 후 설교를 했을 때, 한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던바의 전쟁터에 있었을 때보다 제임스 네일러의 설교를 들었을 때 더 큰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카리스마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세대에서 힘을 지녀왔던 것이다. 그보다 우리는 지옥불이, 그 메시지의 신비적이고도 묵시록적인 내용이 왜 그렇게 큰 호소력을 발휘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예언 자체가 이 세계 안에서 하나의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254)


"점성술과 메시아 신앙 그리고 예언이 한 지점에서 만난 결과, 1652년과 1654년에 불길한 예언들이 번성한 것은 묵시록적 열광에 대한 당대의 개방성에 자극된 것이 분명하다. 1654년의 일식에 대한 가장 악명 높은 논평이 그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 저자는 천지창조로부터 노아의 홍수 사이에는 1,656년이 흘렀기 대문에 그리스도의 탄생 후 1,656년이 흐른 뒤에 새로운 홍수(이번에는 물이 아니라 불로 된)를 예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일식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언들과 불길한 전조들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폭넓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그런 현상에 대한 오래된 전통적인 믿음과 1640~50년대의 격변들과 불안감들을 감안하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놀라운 것은 그러한 강박관념이 사라진 엄청난 속도였다. 이 방향전환이야말로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시대가 끝났다는 가장 확실한 신호 중 하나다."(260-1)


"이 방향전환에 대해 다양한 설명들이 제기되었는데, 그중에는 점점 더 합리적인 논변만을 고집하던 철학자, 법학자, 성직자, 의사들이 비판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고, 과학의 입지 상승과 자연에 관한 과학의 새로운 이해 때문이라는 설명, 그리고 군사적·정치적·사회적 격동이 진정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중 마지막 설명이 가장 이치에 맞다. 세기 중간의 위기가 가라앉으면서 서구 사회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점성술과 예언의 힘도 쇠퇴했다. 그것은 진지한 예언들의 상당수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런 예언들을 믿어야 할 필요성이 더 이상 급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분명했다. 야수들의 해라던 1666년은 1652년과 1654년의 일식들에 비해 더 큰 집단히스테리를 일으키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방대한 문화적·사회적 현상 하나가 몇 세기 동안 번성하다가 그만큼 갑작스럽게 황급히 후퇴한 것이다."(261-2)


7장 혁명과 근대


"1700년을 전후하여 유럽인들이 따르기 시작한 새로운 야망들은 종종 '계몽의 프로젝트'라는 말로 요약되며, 이는 두 가지 추구를 포괄한다. 하나는 자연에 대한 통제의 추구이며, 다른 하나는 그 정도가 더욱 확대된 사회적 평등의 추구였다. 이 두 목적은 모두 사실상 그 시대가 가장 열중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목적들은, 때로는 근대라는 개념과 연관되기는 하지만 더욱 설명적인 명칭을 붙여줘야 마땅한 더욱 큰 기획의 일부일 뿐이다.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볼 때 1700년경부터 1900년경까지의 세월은 혁명의 시대로 간주하는 것이 제일 낫다." "1700년경부터 시작된 두 세기 동안 유럽 사회는 고대에 대한 존경을 털어내버렸고, 전쟁의 영광에 의혹을 제기했으며, 초자연적인 것의 권위를 제한했고, 중앙집권화된 정치적 권위와 교회의 역할에 관한 여러 분쟁을 마무리 지었다. 이때 유럽을 완전히 집어삼킨 혁명의 물결은 여섯 가지 주요 요소를 갖고 있다."(269-70)


# 혁명 시대의 주요 요소

1. 정치혁명 : 미합중국을 탄생시킨 독립전쟁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여러 독립 정체들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걸쳐 수립되었으며, 어느 정부든지 국민의 요청에 한층 귀기울였다.

2. 산업혁명 : 새로운 생산품들, 어느 때보다 광범위한 자원들을 조직적으로 운용하는 공장제도, 전례 없는 막대한 자본 축적은 새로운 경제적 삶이 향상되라라는 희망찬 기대를 낳았다.

3. 통신혁명 : 광범위한 운하 연결망 건설은 수송 속도를 높여주었고, 증기 동력의 활용은 육로와 해로를 이용한 여행 형태를 바꾸었으며, 전보와 전화는 먼 거리를 즉각 연결해주었다.

4. 사회혁명 : 대규모 인구 이동을 수반한 도시의 엄청난 성장은 소비사회를 탄생시켰고, 중간계급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에게도 자유재량을 부여해주는 등 그 변화는 극적이고 폭넓었다.

5. 국제관계 혁명 : 유럽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탐험과 해외 정착은 그 범위를 훨씬 더 확장하여 제국주의로까지 치달았으며, 그 과정에서 전지구적 경제권이 점진적으로 확립되었다. 

6. 문화혁명 : 문해력을 갖춘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교육 저변이 유럽 인구의 모든 계층으로 확대됨에 따라 문화향유층이 늘어나고 엘리트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선이 흐려졌다.


"서구세계를 휩쓴 정치혁명들에 핵심적이었던 것은, 그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산물이었던 야심찬 사회이론들과 이데올로기들과 프로그램들이었다. '이즘들'의 시대였던 것이다. 유력한 저술가들에게 영감을 받은 거대한 운동들이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민족주의는 더욱 폭넓은 대중에게 변화의 청사진을 제시한 대의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들일 뿐이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이나 생시몽,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들이나 논평가들의 저술만이 정치적 풍경 변화를 도왔던 것은 아니다. 선전의 새로운 형식들─신문과 연설과 문학과 예술을 통해 전달된─도 열광과 집단적 감정을 선동하는 데 일조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대규모의 인력과 여론 동원력을 지닌 국가는 개인 정체성의 초점이 되고, 공동의 진보와 영광을 향한 장대한 계획들의 초점이 되었다. 국가주의적 안건들의 열광적 추구, 특히 그 외적 형태인 제국주의는 그 시대의 한 특징이었다."(272)


"1789년이라는 다사다난한 해는 문화혁명의 가장 완벽한 예를 하나 보여준다. 우리는 보통 바스티유 감옥 습격일인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날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날짜를 이틀 전인 1789년 7월 12일로 잡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날 약 3천 명에 달하는 또 다른 파리인들 무리가 상당히 다른 공공시설에 침입했다. 바로 오페라 극장이었다. 오페라처럼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한 예술─악기 연주와 성악, 문학, 춤, 건축, 의상 디자인까지 결합하는─이 19세기의 가장 중심적인 표현양식 중 하나로 꽃을 피웠다는 것은 새로운 상황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페라는 17세기에 바로크적 야심을 반영하면서 시작되었고, 18세기 내내 주로 귀족들의 관심거리로 남아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이 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민중은 오페라 극장을 당시 인기를 누리던 장관 자크 네케르의 해임에 대한 자신들의 좌절감을 표출하는 자연스러운 장소로 여겼던 것이다."(278-80)


"이 시대 역시 종말을 맞았다. 귀족의 특권을 종식시키고, 참정권을 확대하고, 정치적 참여를 확대하라는 요구가 높아지면서, 그리고 경제적 변화의 결과들이 자리를 잡고, 지구적 관계와 제국주의적 야망에 생긴 변화들이 새로운 국제관계의 풍경을 창출해내고, 여성해방운동(이제는 1879년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이 불러일으킨 충격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렵다)과 종교적 소수자들의 운동이 점점 더 큰 힘을 받게 되면서, 그리고 전통적 윤리와 기독교에 대한 프리드리히 니체의 공격에서부터 미술의 근본원리들에 대한 인상파의 문제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적 혁신들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막대한 압력이 축적되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30년전쟁과 17세기 중반의 사건들, 그리고 1800년을 전후한 수십 년 동안의 혁명적 격동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막대한 경기침체, 그리고 이제 지구적 문명이 되어버린 세상을 휩쓴, 수 세기 동안의 문화적 가정들의 전복에 비하면 사소해 보인다."(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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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 오브 타임 - 브라이언 그린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진화, 그리고 끝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와이즈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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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영원함의 매력: 시작과 끝, 그리고 그 너머


"이 책의 목적은 '지금 여기'의 특별함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과학이라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의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기나긴 여행을 떠날 참이다. 이 여행길에서 초기의 혼돈으로부터 생명과 마음이 탄생하게 된 과정을 살펴볼 것이며, 자신이 단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호기심 많고, 열정적이고, 근심 많고, 자기 성찰적이고, 창의적이면서 회의적인 마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종교의 탄생과 창조적 표현에 대한 욕구, 과학의 약진, 진리 탐구, 그리고 영원에 대한 갈망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도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한다. 프란츠 카프카가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했던 영원에 대한 갈망은 미래로 향하는 여정의 핵심 키워드이며, 우리는 여기에 기초하여 행성과 별, 은하, 블랙홀에서 생명과 마음에 이르는 모든 현실적 존재의 미래를 평가할 것이다. 이 여정에서 눈에 띄게 빛을 발하는 것은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인간의 정신이다."(36)


2장 시간의 언어: 과거와 미래, 그리고 변화


"(동전 100개를 던졌을 때 나오는 경우의 수를 구할 때) 우리는 동전 무더기의 분포를 낱개로 분석하지 않는다. 29번 동전이 앞면이 나왔는지, 71번 동전이 뒷면이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분포 상태이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앞면과 뒷면의 비율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그룹의 '희귀성'이 동일하지 않다는 점이다. 평등은커녕, 최고 1,000억X10억X10억 배까지 차이가 난다. 그래서 동전 100개를 마구 섞은 후 테이블에 던졌을 때 100개 모두 앞면(또는 뒷면)이 나오면 소스라치게 놀라고(이 그룹의 멤버는 단 1개뿐이다), 뒷면이 1개 나오면 조금 덜 놀라고(멤버 수=100), 뒷면이 2개 나오면 1개 나온 경우보다 조금 덜 놀라고(멤버 수=4,950), 앞면과 뒷면이 50개씩 나오면 너무 평범해서 하품이 나온다(멤버 수=약 1,000X10억X10억). 그룹의 멤버 수가 많을수록 그와 같은 결과가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각 그룹의 크기다."(51-2)


"(동전의 개별적 상태를 무시하고 진행하는 동전 던지기를) 예로 든 이유는 과학자들이 증기 기관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물 분자나 지금 당신이 숨 쉬고 있는 방 안에 떠다니는 공기 분자와 같이 수많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는 물리계를 분석할 때, 그와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외관상 동일한 배열을 하나의 그룹으로 묶었을 때 얻는 이득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작위로 허공에 던진 동전 무더기의 최종 상태가 '멤버 수가 많은 그룹'에 속할 확률이 높은 것처럼, 무작위로 부딪히는 입자들도 마찬가지다. 증기 기관 속의 수증기이건 방 안의 공기이건 간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배열(멤버 수가 가장 많은 배열)을 알면 계의 거시적 물리량을 예측할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양이다. 물론 이것은 통계에 입각한 예측이지만, 입자의 수가 충분히 많으면 맞을 확률이 매우 높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많은 입자의 궤적을 일일이 계산하지 않고서도 원하는 답을 얻어냈다는 점이다."(53-5)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경험하는 상태는 거의 대부분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이다. 고-엔트로피 상태는 구성 입자의 다양한 배열을 통해 구현될 수 있으므로 전형적이고 평범하면서 흔한 상태다. 반면에 당신이 저-엔트로피 상태와 접하면 일단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엔트로피가 낮다는 것은 거시 상태를 유지하면서 바꿀 수 있는 배열의 수가 적다는 뜻이어서, 고-엔트로피 상태보다 드물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질서 정연하게 가공된 물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설명이 필요하다. 무작위로 움직이는 입자들이 저절로 뭉쳐서 계란이나 개미집, 또는 머그잔이 만들어질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물체를 볼 때마다 생명 활동이나 생명체의 의지가 개입되었다고 생각한다. 계란과 개미집, 그리고 머그잔은 자연에 존재하는 입자의 무작위 배열에 특별한 형태의 생명 활동이 개입되어 질서 정연한 배열로 재탄생한 것이다."(58-9)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 법칙이고 제2법칙은 엔트로피 증가 법칙이므로, 독자들은 두 법칙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법칙은 깊은 곳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둘 사이의 관계는 〈모든 에너지가 다 같은 형태로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폭발 전 다이너마이트에 내장된 에너지는 고품질 에너지에 해당한다. 즉, 에너지가 좁은 영역에 집중되어 있고 사용하기도 쉽다. 그러나 폭발이 일어난 후에는 이 에너지가 '넓게 퍼져 있으면서 활용하기도 어려운' 저품질 에너지로 바뀐다. 또한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면 제2법칙에 따라 질서가 무질서로 바뀌므로 낮은 엔트로피는 고품질 에너지에, 높은 엔트로피는 저품질 에너지에 대응시킬 수 있다." "미래는 왜 과거와 다를까? 답은 간단하다. 미래에 발휘되는 에너지는 과거에 발휘되었던 에너지보다 품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미래는 과거보다 엔트로피가 높다."(62-3)


3장 기원과 엔트로피: 창조에서 구조체로


"뉴턴 이후로 중력은 반대 개념이 없는 독불장군으로 군림해 왔다. 인력과 척력이 모두 존재하는 전자기력과 달리, 중력은 오직 인력으로만 작용하는 힘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밀어내는 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빅뱅을 연구하던 미국의 물리학자 앨런 거스는 공간이 '우주 연료'라는 특별한 물질로 가득 차 있고, 그 안에 포함된 에너지가 별이나 행성처럼 특정 지역에 집중되지 않고 공간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면, 중력이 밀어내는 쪽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지름이 10억X10억X10억분이 1미터밖에 안 되는 작디작은 영역에 특별한 형태의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있고(이것을 인플라톤inflaton이라 한다.), 이 에너지가 욕실의 수증기처럼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으면, 밀어내는 중력이 폭발적으로 작용하여 순식간에 현재의 관측 가능한 우주만큼 팽창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밀어내는 중력이 빅뱅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다."(80-2)


"빅뱅 직후의 공간은 여전히 인플라톤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 상태도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인플라톤장의 양자요동은 빅뱅의 잔광에 국소적인 온도 변화를 초래했고, 인플레이션이 끝날 무렵에는 입자의 밀도도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즉, 인플라톤장의 값은 완벽하게 균일하지 않고 '거의 균일했다'는 뜻이다. 이 변화는 다음 단계인 별과 은하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주변보다 밀도가 조금이라도 높은 지역은 조금 강한 중력을 행사하여 많은 입자를 모을 수 있었고, 입자가 모여들수록 중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더 많은 입자가 모여들었다. 이것을 '중력의 눈덩이 효과'라 한다. 이런 상태로 수억 년이 지난 후, 입자 밀집 지역은 질량과 압력, 그리고 온도가 엄청나게 높아져서 자체적으로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양자적 불확정성이 인플레이션에 의해 확대되고 중력의 눈덩이 효과에 의해 특정 지역에 집중되면서, 빛나는 점(별)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91-2)


"신용카드의 빚이 많아지면 통장에 돈을 입금하여 잔액을 늘리거나 파산을 선언하여 상황이 종료되듯이, 기체 구름 중심부의 온도와 압력이 임계점을 넘으면 핵융합nuclear fusion이라는 물리적 과정이 시작되면서 자기 증폭 과정이 종료된다. 핵융합은 원자 집단의 온도와 밀도가 충분히 높을 때 원자핵에 변화를 초래하는 현상으로, 천연가스 연소와 같은 화학 반응보다 훨씬 깊은 단계에서 일어난다. 화학적 연소는 원자 내부에 있는 전자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반면, 핵융합은 원자 중심부의 핵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이렇게 깊은 단계에서 원자핵이 합병되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면서 입자의 속도가 빨라지고, 이로부터 외부로 향하는 압력이 생성되어 안으로 향하는 중력과 균형을 이룬다. 간단히 말해서, 핵융합 때문에 수축이 중단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안정된 상태에서 열과 빛을 방출하는 거대한 천체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것을 한 글자로 줄인 것이 바로 '별star'이다."(100)


"(중력이 촉매 역할을 해서) 일단 핵융합이 시작되면 별은 수십억 년 동안 자체 동력을 공급하면서 복잡한 원자핵을 만들어 내고, 빛과 열을 통해 다량의 엔트로피를 외부로 방출한다. 핵융합의 부산물(무거운 원소와 빛)은 당신과 나를 포함하여 더욱 복잡한 구조체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력은 별이 형성되고 상태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힘이지만, 수십억 년 동안 최전선에서 제2법칙을 수호해 온 일등 공신은 단연 핵력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중력은 주인공이라기보다 핵력과 동업 관계에 있는 파트너에 가깝다." "핵력은 중력의 도움을 받아 엔트로피 2단계 과정을 실행하고, 그 덕분에 물질은 우주 전역을 무대 삼아 춤을 추고 있다. 이것은 빅뱅 직후부터 우주라는 상설 극장에서 한시도 쉬지 않고 공연되어 온 장엄한 무용극으로, 그동안 수많은 스타(별)를 배출했다. 그리고 별에서 방출된 열과 빛은 주변 행성에 '적어도 한 번 이상' 생명체를 탄생시켰다."(104-5)


4장 정보와 생명: 구조체에서 생명으로


"빅뱅 직후 숨가쁘게 진행된 사건의 속도와 비교할 때, 별의 내부는 수백만 년 동안 유지될 수 있는 매우 안정된 환경이었다." "그래서 (구조가 가장 단순한 몇 종류의 원자만 생성된) 빅뱅 때와는 달리 수소가 융합하여 헬륨으로 변한 후에도 융합 공정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질량이 큰 별은 주기율표에서 제법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질 때까지 융합 반응을 계속 일으킬 수 있으며, 그 부산물로 다량의 열과 빛을 방출한다. 예를 들어 질량이 태양의 20배인 별은 처음 800만 년 동안 수소를 융합하여 헬륨을 생산하고, 다음 100만 년 동안 헬륨을 융합하여 탄소와 수소를 만들 수 있다. 이 시점부터 중심부의 온도는 더욱 높아지고 원소 생산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는 계속 가동된다. 그 후 약 1,000년 동안 탄소 원자핵으로부터 나트륨(Na)과 네온(Ne)이 생산되고, 그 다음 6개월 동안은 마그네슘(Mg), 그다음 한 달 동안은 황(S)과 실리콘(Si), 그다음 약 10일 동안은 남은 원자핵을 모두 태워 철(Fe)이 만들어진다."(119-20)


"그렇다면 구리와 수은, 니켈 같은 원소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금, 은, 백금 같은 귀금속은 어디서 왔으며, 이보다 훨씬 무거운 라듐, 우라늄, 플루토늄 같은 방사성 원소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과학자들은 그 출처로 두 곳을 지목했다. 별의 중심부가 대부분 철로 채워지면 융합 반응이 중단되어 밖으로 밀어내는 에너지가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별은 자체 중력으로 수축되기 시작한다. 별이 무지막지한 중력에 의해 안으로 붕괴되는 것이다. 별의 질량이 충분히 크면 붕괴가 빠르게 진행되어 중심부의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내파implode되는 물질이 중심핵에 되튀면서 엄청난 충격파가 바깥쪽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이 충격파 때문에 별의 중심부는 더욱 강하게 압축되어 무거운 원자핵이 합성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주기율표에서 철보다 무거운 원소의 일부는 이 혼돈의 와중에 생성된 것이다. 별의 중심부에서 발생한 충격파가 표면에 도달하면 다양한 원소들이 우주 공간에 뿌려진다."(120-1)


"2개의 중성자별neutron star이 충돌하는 초대형 사건에서도 철보다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질 수 있다. 중성자별은 수명을 다한 별의 잔해로서 질량이 태양의 10~30배 정도이며, 대부분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어서(중성자는 베타 붕괴를 통해 양성자로 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입자다), 새로운 원자핵이 생성되기에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지면 다량의 중성자가 우주 공간으로 연기처럼 흩어지는데, 이들은 전기전하가 없어서 척력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몇 개의 그룹으로 쉽게 뭉쳐진다. 그 후 중성자의 일부가 카멜레온처럼 양성자로 변신하여(이 과정에서 전자와 반뉴트리노anti-neutrino가 방출된다)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별의 내부에서 생성되어 초신성이 폭발하거나 중성자별이 충돌할 때 우주 공간으로 뿌려진 원소들은 장구한 세월을 떠돌다가 거대한 기체 구름으로 뭉쳐서 별과 행성이 되고, 그중 일부는 우리의 몸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모든 물질의 기원이다."(121-2)


"핵융합으로 우리의 태양이 탄생한 후 수백만 년 사이에 회전 원반의 일부 파편들(약 0.3%)이 역시 자체 중력으로 뭉쳐서 태양계의 행성으로 진화했다. 이들 중 가볍고 휘발성이 강한 물질(수소, 헬륨, 메탄, 암모니아, 물 등)은 태양의 강한 복사radiation에 떠밀려 태양계 외곽의 차가운 지역에 축적되었고, 이곳에서 자체 중력으로 응집되어 목성과 토성, 천왕성, 해왕성과 같은 가스형 행성이 되었다. 반면에 철과 니켈, 알루미늄처럼 무겁고 단단한 물질은 태양과 가까운 곳에서 뜨거운 환경을 이겨 내고 수성, 금성, 지구, 화성 같은 바위형 행성으로 진화했다. 행성은 태양보다 훨씬 가벼웠기 때문에, 압력에 저항하는 원자 고유의 능력만으로 적절한 크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중력에 의해 수축되면서 중심부가 어쩔 수 없이 뜨거워졌다. 하지만 핵융합을 일으키기에는 턱없이 낮은 온도였기에, 다행히도 생명체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다(물론 다른 태양계에도 지구와 비슷한 행성이 존재할 수 있다)."(124)


"물 분자의 기하학적 구조는 우주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 분자의 구성 원자들은 넓은 V자 형태로 배열되어 있는데, 꼭짓점에 산소 원자가 있고 2개의 수소 원자는 갈라진 가지의 양끝에 자리잡고 있다. H2O 분자는 전체적으로 중성이지만 산소 원자의 전자 포획 본능이 워낙 강하기 때문에, 수소와 결합했을 때 음전하(전자)의 위치가 산소 쪽으로 약간 치우치게 된다. 그래서 H2O의 산소 원자는 음전하를 띠고, 2개의 수소 원자는 양전하를 띤다." "이 미세한 불균형이 없었다면 생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 분자는 전하가 비대칭으로 분포되어 있어서 거의 모든 물질을 녹일 수 있다. 음전하를 띤 산소 원자는 주변의 양전하를 무조건 끌어당기고 양전하를 띤 수소 원자는 주변의 음전하를 무조건 끌어당긴다. 전하를 띤 물질이 물속에 오래 잠겨 있으면 물 분자의 양끝이 전하 갈퀴처럼 작용하여 물질을 갈가리 찢어 놓는 것이다." "이 과정을 두 글자로 줄인 것이 '용해'이다."(132-3)


"살아 있는 조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명을 정의하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에 도달하게 된다. 모든 세포는 출처에 상관없이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당신에게 세포 1개를 보여 준다면 그것이 쥐의 세포인지 개의 세포인지, 거북이인지 거미인지, 집파리인지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수집된 증거에 의하면 모든 생명체의 기원은 하나의 공통 조상으로 수렴한다. 모든 생명체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두 가지 특징이 이 사실을 더욱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우리에게 친숙한 '정보'다. 세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저장하고 활용하는 방법은 생명체의 종류와 상관없이 거의 동일하다. 두 번째 특징은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다. 즉, 모든 생명체에서 세포가 에너지를 입수하고, 저장하고, 활용하는 방법도 거의 동일하다. 그토록 다양한 지구 생명체들이 이런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들이 하나의 조상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다."(134-5)


"살아 있는 세포의 배터리는 전기 배터리와 비슷하다. 일상적인 배터리와 다른 점은 전자 대신 양성자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인데, 양성자들 사이에도 전기적 척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작동 원리는 거의 같다." "몇 가지 숫자만 확인하면 세포 공장의 지칠 줄 모르는 기능을 실감할 수 있다. 평범한 세포 1개가 1초 동안 정상 기능을 유지하려면 약 1천만 개의 아데노신 3인산[ATP] 분자가 필요하다. 우리 몸은 수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1초 사이에 무려 1억X1조 개(10^20개)의 ATP 분자가 소모되는 셈이다. ATP가 소모되면 원자재(ADP와 인산염)로 분해되고, 양성자 배터리로 구동되는 터빈에 의해 다시 ATP로 재생되어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포 전체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사람의 평균 에너지 소모량을 생각할 때, 세포 터빈의 생산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당신이 속독의 대가라고 해도, 이 한 문장을 읽는 동안 당신의 몸은 5억X1조 개의 ATP 분자를 생산했다. 그리고 방금 3억X1조 개가 추가되었다."(144-5)


"RNA는 한 가닥짜리 짧은 DNA(DNA의 반쪽)에 염기가 달려 있는 형태로서, 모든 생명체의 필수 구성 요소이자 매우 다재다능한 분자다. '지퍼가 풀린' DNA 가닥의 일부를 본뜨는 것도 RNA의 기능 중 하나인데, 이것은 치과 의사가 환자의 윗니와 아랫니를 분리한 상태에서(즉, 입을 벌린 상태에서) 치아의 본을 뜨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 정보는 세포의 다른 부분으로 전달되어 특별한 단백질을 합성하는 지침이 된다. 그러므로 DNA와 마찬가지로 RNA분자도 세포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의 일부다. 그러나 RNA와 DNA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DNA는 '세포의 활동을 지시하는 지혜의 원천'이라는 우아한 직책으로 만족하지만, RNA는 온갖 화학 과정에 직접 관여하는 등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세포의 리보솜ribosome(아미노산을 조립하여 단백질을 만드는 초소형 공장)은 특별한 형태의 RNA(리보솜 RNA)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RNA는 소프트웨이면서 하드웨어이기도 하다."(154-5)


"또한 RNA는 자신의 복제를 촉진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초기 지구에서 RNA 분자가 계속 복제되던 중 우연히 변이가 발생하여 진화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가정해 보자. 변형된 RNA는 화학 물질 스튜에서 일부 아미노산을 사슬처럼 연결하여 최초의 단백질(오늘날 리보솜에서 생성되는 단백질의 단순한 초기 버전)을 만든다. 이렇게 탄생한 기초 단백질 중 일부가 우연히 RNA의 복제 효율을 향상시켰다면(촉매 반응도 단백질의 임무 중 하나다) 커다란 보상이 되돌아온다. 즉, 단백질은 변형된 RNA를 더욱 번성하게 만들고, 수적으로 우세해진 돌연변이 RNA는 더 많은 단백질을 합성하게 되는 것이다. RNA와 단백질의 상호 협조하에 스스로 보강하는 화학적 반응이 반복되면서 분자의 변이는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식으로 세월이 흐르다가 분자의 전술은 또 한 차례 새로운 혁신을 맞이하게 된다. 2개의 레일로 이루어진 초보적 형태의 DNA 사다리가 등장하여 더욱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복제가 가능해진 것이다."(156-7)


# 'RNA 세계' 가설


5장 입자와 의식: 생명에서 마음으로


"챌머스는 〈마음이 없는 입자에서는 의식이 생성될 수 없다〉는 믿음 하에 전자기학의 탄생 배경을 마음속에 새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물리학자들이 〈전통적인 과학을 사용하여 전자기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과감하게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던 것처럼, 의식의 수수께끼를 해결하려면 물리학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한계를 넘는 한 가지 방법은 개개의 입자들이 '더 이상 근본적 설명이 불가능한 의식의 씨앗'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의기양양한 전자'나 '심술궂은 쿼크'가 연상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것을 원시의식proto-consciousness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서술은 '자연의 기본 단위에 스며 있으면서 더 이상 축약될 수 없는 주관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포함하는 쪽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 가설에 의하면 모든 입자들은 이미 알려진 물리적 특성(질량, 전기전하, 핵전하, 양자적 스핀 등) 외에, 지금까지 무시되어 왔던 원시의식을 갖고 있다."(194-5)


"그렇다면 〈원시의식이란 대체 무엇이며, 그런 것이 어떻게 입자에 스며들게 되었는가?〉 당연한 질문이지만 애석하게도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제안자인 챌머스조차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따지면 다른 물리량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나에게 질량과 전기전하에 대하여 위와 비슷한 질문을 해도 분명히 실망할 것이다. 입자들이 어떻게 질량이나 전기전하를 갖게 되었는지는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질량이 중력을 창출하고 거기에 반응한다는 것, 그리고 전기전하가 전자기장을 창출하고 거기에 반응한다는 것뿐이다." "중력과 전자기력의 경우, 본질적인 정의를 작용과 반응으로 대치하는 것이 교묘한 속임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두 힘의 수학 이론으로부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시의식도 정교한 수학 이론이 개발되면 정확한 예측이 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아직은 그런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195-6)


"신경과학자 마이클 그라지아노가 제안한 인식 이론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두뇌 기능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방금 출고된 새빨간 페라리를 살펴본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페라리의 다양한 특성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수백 년 전에 과학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페라리 자체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은 서로 90도 각도를 이룬 채 1초당 약 400조 회 진동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전자기장)으로, 3억 m/s의 속도로 당신을 향해 날아온다. 이것이 빛의 물리적 특성이며, 당신의 눈에 도달하는 정보의 실체다. 그렇다. 물리적 서술에는 색상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전자기장이 당신의 눈에 도달하여 망막의 감광 세포(빛을 감지하는 세포)를 자극하면 전기 신호가 생성되어 두뇌의 시각피질로 전달되고, 이곳에서 정보 처리 과정을 거쳐 특정 색으로 해석된다. 즉, 색이란 물체의 본질이 아니라 두뇌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표상일 뿐이다."(203)


"그가 제안한 이론의 핵심은 〈당신이 세부 사항에 아무리 신경을 쓴다 해도, 정신적 표현은 항상 단순화된다〉는 것이다." "주변 환경에서 접하는 모든 것을 마음속에서 단순화하는 것은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마음이 생존에 필요한 다른 정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빨간색 페라리를 바라볼 때, 당신은 자동차의 간편한 도식뿐만 아니라, '페라리에 집중하고 있는 당신'에 대한 간편한 도식도 함께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세상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임의의 대상을 마음속에 떠올릴 때 대부분의 세부 사항은 생략된다. 뉴런이 활성화되는 과정과 정보 처리 과정, 그리고 복잡한 신호 교환은 모두 무시되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만 부각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인식awareness'이라 부른다. 우리의 의식이 마음속에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화된 도식을 선호하는 뇌의 성향이 무언가에 집중하는 자신에게도 적용되어, 집중을 유발한 물리적 과정이 무시되기 때문이다."(204-6)


"그라지아노의 이론처럼 물리학에 기초한 가설의 매력은 의식을 '생명이 없고, 생각도 없고, 감정도 없는 구성 성분'으로 축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의식을 완벽하게 설명하려면 신경학neurology이라는 방대한 영토를 정복해야 한다. 그러나 낯선 영역에서 온갖 덤불을 헤치며 힘들게 나아가야 하는 챌머스의 가설과 달리, 물리학에 기반을 둔 그라지아노의 접근법을 수용하면 전통적인 과학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아도 된다. 문제는 이질적인 영역을 애써 탐험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 지도를 전례 없이 세밀하게 작성하는 것이다. 굳이 초과학적인 불꽃이나 물질의 신비한 특성을 소환하지 않아도 의식이 자연스럽게 유도된다. 평범한 법칙에 따라 평범한 과정을 수행하는 평범한 물질들이 '사고'와 '느낌'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다." "커피잔을 구성하는 입자들과 그들 사이에 작용하는 바로 그 힘이 복잡다단한 마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206-7)


6장 언어와 이야기: 마음에서 상상으로


"언어학자 대니얼 도어는 언어의 사회적 기능이 기존의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언어가 상호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는데, 가장 중요한 기능은 '다른 사람의 상상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언어를 사용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사회적 거래는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당신과 내가 함께 무언가를 보거나, 듣거나, 맛본 후에 몸짓과 소리, 또는 그림을 통해 각자의 느낌을 설명한다면, 이미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코코넛을 먹어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맛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고, 추상적인 사고나 내면의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준 일등 공신이 바로 언어다. 언어 덕분에 인류는 교류의 장을 엄청나게 확장할 수 있었다." "인류는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가장 보편적이면서 영향력이 강한 행동, 즉 '스토리텔링'으로 이어지게 된다."(242-3)


"('적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스토리텔링은 현실 세계에서 겪게 될지도 모를 상황을 미리 연습하여 필요한 기술을 연마하는 '재미있고 안전한' 두뇌 운동이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종합하여 '상상의 목록'을 만들어 놓으면, 자신이 겪어 본 적 없는 비상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대립(갈등)'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어려운 문제가 등장한다. 우리는 내적 또는 외적으로 위험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현실적이건 상징적이건,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등장 인물이나 스토리, 또는 스토리를 전개하는 방식에서 놀라움과 즐거움, 그리고 경외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갈등 요소가 빠지면 따분한 이야기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갈등과 어려움이 없으면 이야기의 가치는 급격하게 떨어진다."(249-51)


"그렇다면 이 독특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화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낳았을까? 학자들은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 인간이 진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성이 어떤 동물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일하면서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 완벽한 조화는 아니더라도, 협동 정신을 충분히 발휘하면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무리의 안전뿐만 아니라 혁신과 참여, 위임, 그리고 공동의 목적이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성공적인 집단이 되려면 이야기를 통해 들은 다양한 경험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제롬 브루너는 〈우리는 주로 이야기를 통해 경험과 기억을 체계화한다〉고 지적하면서 〈인간에게 이야기를 통해 소통하고 간접 경험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집단생활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신화, 기담, 우화에서 일상적인 사건의 수려한 서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야기는 인간이 갖고 있는 사회적 본성의 핵심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감정을 교환한다."(255-6)


"마음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대상에 마음을 부여하는 습성이 있다. 다른 사람과 직접 접촉하지 않고 먼 거리에서 바라보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에게 자신과 비슷한 마음을 투영한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바람직한 습성이다. 낯선 사람이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행동하면 경계를 풀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의도와 욕망을 부여하여, 그들을 사람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상에 마음을 투영하는 우리의 습성은 가끔씩 정도를 지나칠 때가 있다. 물론 이것도 진화론적으로는 좋은 습성이다. 달빛에 비친 작은 나무를 사자로 오인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표범이 다가오면서 내는 소리를 나뭇가지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로 착각했다간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그래서 주변 사물에 속성을 투영할 때에는 과소평가보다 과장하는 쪽이 유리하다."(265)


7장 두뇌와 믿음: 상상에서 신성(神聖)으로


"19세기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초기 인류가 사후 세계의 개념을 떠올리게 된 원인이 꿈이라고 주장했다. 매일 밤마다 기이하고 유별난 이탈을 겪으면서 눈에 보이는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꿈이건 악몽이건 간에,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구를 꿈에서 만났다가 깨어나면 그들이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미묘한 통로를 통해 그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고대인이 남긴 문헌을 해석해 보면, 그들은 꿈을 '다른 세계로 가는 창문'으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수메르인과 이집트인은 꿈을 신과 접촉하는 통로라고 믿었으며, 구약과 신약 성서에서도 신의 계시는 주로 꿈속에서 이루어진다. 현대에도 고립된 사회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호주 원주민들에게 드림타임Dreamtime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최종적으로 돌아갈 곳을 의미한다."(273-4)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은 깨어 있는 동안에도 사방에 존재한다. 지구와 하늘에 작용하는 강력한 힘(중력)과 예측하기 어려운 일상적인 사건들,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 요소들의 그 대표적 사례다. 집단 속에서 성공적으로 진화해 온 우리는 여럿이 함께 겪은 사건의 원인을 다른 존재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 선조들은 번개가 치거나 강물이 범람하거나 지진이 일어날 때마다 어떤 생각하는 존재가 이런 일을 일으킨다고 생각해왔다. 그들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자신의 한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막강한 힘을 휘두르는 존재를 떠올렸다. 의도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간에, 그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대부분의 원인을 하나의 존재에게 돌리면 무작위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일관된 관점에서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인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의 행동을 감시하고 운명을 좌우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만들어 냈고, 친숙한 성격에 걸맞은 외모와 이름까지 부여했다."(274-5)


"인간이 종교적 신념을 갖게 된 것은 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거나 독실한 마음을 낳는 신체 기관 때문이 아니라, 진화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장구한 세월 동안 투쟁해 왔기 때문이다." "보이어는 창 던지기(사냥)와 짝짓기(번식), 그리고 자기편 만들기(친화력)를 수행하는 신경학적 과정을 '추론시스템inference system'이라고 불렀다. 이 시스템의 성능에 따라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할 수 있는 개체와 그렇지 않은 개체가 결정된다. 보이어가 제안한 가설의 핵심은 이 추론시스템이 고대인의 종교적 기질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초자연적 존재와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 관계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이타적 관계'로부터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기꺼이 희생하고, 기도하고, 선행을 베풀겠다. 그 대신 내일 전투에서 당신(초자연적 존재)은 내가 이기도록 도와줘야 한다. 이와 반대로 나쁜 일이 벌어지면 자신(또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 신성한 존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며 자책하고 반성한다."(278-9)


"보이어의 저서 《종교해설》에 따르면, 생존 경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두뇌는 종교를 포용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패키지 진화'의 또 다른 사례다. 종교적 믿음이 생존 경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하나의 습성으로 굳어진 것은 적응력을 높여 주는 다른 기능과 패키지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종교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진화를 통해 단 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생겼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설탕 바른 도넛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보이어가 말한 '종교를 포용하는 특성'이란, 두뇌의 추론시스템이 종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공감 능력 덕분에 고대인의 종교적 습성은 세계적 규모의 종교 단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 유령이건, 신이건, 귀신이건, 악마이건, 성자이건, 영혼이건 간에, 종교적 상상은 마음의 진화를 견인해 온 지휘자였다. 사람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교리에 따라 행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다 보니 널리 퍼지게 된것이다."(279)


"종교가 널리 퍼진 것은 인간의 적응력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령, 공동생활을 하는 집단의 규모가 친족을 훨씬 능가하는 경우, 집단을 위해 개인이 희생하도록 유도하는 유전적 '당근'이 존재할 것인가?" "집단의 모든 구성원을 자기 친족처럼 여기도록 만들면 된다. 진화생물학자 데이비드 슬론 윌슨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20세기 초에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제안한 이론을 발전시켜서 사회적 결속의 원동력을 설명한 바 있다. 종교는 교리와 의식, 관습, 상징, 예술, 그리고 행동 지침이 강조된 하나의 '이야기'로서, 종교적 행동에 신성함을 부여하고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정서적 충성심을 확립하여 가족 못지않은 결속력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어도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유전적으로 별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뭉쳐서 함께 일하고 보호하게 된 것이다."(280-1)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과학이 객관적이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연에 접근하고 있지만, 이 작업을 수행하는 주체는 개인의 내면 세계임을 강조했다(내면에서 느끼는 것은 물리 법칙이 아니라 자연 현상의 아름다움과 두려움, 동트는 새벽과 무지개의 '약속', 천둥의 '목소리', 여름에 내리는 비의 '온화함', 별들의 '웅장함' 등이다). 데카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도 내면의 경험이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유일한 경험이라고 믿었다. 과학은 객관적 현실을 추구하지만, 우리는 오직 마음이라는 주관적 과정을 통해 현실을 접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는 '객관적 현실'이란 주관적인 마음의 산물인 셈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수련(여기서는 '영적 수련'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을 '주관적 경험에 기초하여 내면 세계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면, 교리와 객관적 현실이 일치하는지의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종교적 또는 영적인 가치를 탐구할 때에는 바깥 세계의 특성을 증명하는 데 연연할 필요가 없다."(309)


8장 본능과 창조력: 신성함에서 숭고함으로


"사회화社會化는 하나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으며, 인간이 집단을 이루게 된 것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여러 학자들은 인간이 친사회적 성향을 갖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예술을 꼽았다. 당신과 내가 같은 일을 하면서 상대방의 감정적 반응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면, 서로 협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를 들어 당신과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음악 행사에 자주 참여하여 에너지 넘치는 리듬과 멜로디에 함께 열광한다면, 마치 같은 공동체에 속한 듯 강한 유대감을 느낄 것이다. 단체로 드럼을 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춰 본 사람은 그 느낌을 잘 알고 있다. 예술을 매개체로 삼아 강렬한 감정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동체 의식이 형성된다." "집단에 정서적으로 동화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살아남을 확률이 높으므로, 집단의 유대감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견고해진다."(329-30)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새로운 실험이나 데이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상대성이론을 구축한 과정은 가장 높은 수준의 창조적 예술 활동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캐나다 출신의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는 바흐의 음악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선율은 전치轉置와 반전, 역행을 정신없이 반복하면서도 새롭고 완벽한 하모니를 창출한다··· 이것이 바로 바흐가 천재임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다.〉 아인슈타인의 천재성도 이와 비슷하다. 그는 기존의 이론을 쌓아 올린 벽돌을 낱낱이 해체한 후, 새로운 개념이 적용된 청사진을 토대로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렸다. 흥미로운 것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연구 과정을 종종 음악에 비유했다는 점이다. 그는 가끔 방정식과 수학 기호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상대성이론이 지배하는 우주의 영상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우주의 리듬을 듣고 패턴을 상상하면서 현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통일성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이 실행했던 예술이다."(331-2)


"예술은 개인의 신체적 한계나 일상적인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무한정 펼칠 수 있는 상상의 장을 제공한다. 진실에 집착하는 마음으로는 무한히 펼쳐진 가능성의 세게에서 극히 일부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데 익숙해진 마음은 상투적인 생각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한 사고를 펼칠 수 있다. 창의적 사고와 혁신은 주로 이런 마음에서 탄생한다." "강렬한 예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정화淨化한다. 이 경험은 돌부리에 채였을 때 발가락에 느껴지는 통증만큼이나 현실적이다. 우리는 예술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고, 나와 진실의 관계는 예술을 통해 더욱 확고해진다.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고, 분석하고, 해석하면 이런 경험을 좀 더 체계화시킬 수 있지만, 오직 나 혼자 겪었던 강렬한 느낌은 언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언어에 기초한 예술(시, 에세이, 소설 등)도 가장 강렬하게 남는 것은 문자가 아니라 이미지와 감동이다."(330-6)


"자신이 원하는 만큼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나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창의적인 마음은 불멸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고 영원을 굽이쳐 흐를 수 있으며, 끝없는 시간을 추구하거나, 경멸하거나, 두려워하는 이유를 깊이 사색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수천 년 동안 예술가들이 해 온 일이다." "한정된 시간밖에 인지할 수 없는 우리는 예술을 통해 영원이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추구해 왔다. 삶을 성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죽음도 성찰하게 된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죽음을 성찰하면서 죽음의 위력에 도전하고, 죽음의 필연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죽음을 초월한 세계를 상상했다. 학자들이 예술의 진화적 유용성과 사회 결속에 공헌한 정도, 그리고 고대인의 삶에 미친 영향을 아무리 열심히 파헤쳐도,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삶과 죽음, 유한과 무한 등)을 표현하는 가장 획기적인 방법이 예술이라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340-5)


9장 지속과 무상함: 숭고함에서 최후의 생각으로


"우주 공간 전체를 '암흑에너지dark energy'가 균일한 밀도로 가득 메우고 있다고 가정하면 은하들이 빠르게 멀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은하는 물질의 집합체이므로 잡아당기는 중력을 발휘하여 은하들끼리 멀어지는 속도를 늦추고 있다. 또한 공간에 균일하게 분포된 암흑에너지는 밀어내는 중력을 발휘하여 은하들끼리 멀어지는 속도를 점점 더 빠르게 가속시킨다. 우주 공간의 팽창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는 것은 암흑에너지에서 유발된 척력이 은하들 사이의 인력(중력)보다 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빅뱅 때 일어났던 과격한 팽창에 비하면 지금의 팽창은 아주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암흑에너지의 양이 너무 많아도 안 된다. 지금과 같은 가속 팽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암흑에너지는 공간 1m^3 당 '100와트짜리 전구를 2천억분의 1초 동안 밝힐 수 있는 양'으로 충분하다. 터무니없이 작은 양 같지만 공간이 워낙 넓기 때문에, 모두 합하면 천문학자들이 관측한 팽창 가속도가 거의 정확하게 구현된다."(364-5)


"암흑에너지를 수학적으로 표현해 보면 앞으로 점점 약해져서 가속 팽창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고, 점점 강해져서 가속도가 더 커질 수도 있다." "밀어내는 중력이 점점 강해지는 추세가 장기간 계속되면 언젠가는 잡아당기는 힘을 압도하고 모든 것을 갈가리 찢어 놓을 것이다. 당신의 몸이 지금과 같은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원자와 분자를 강하게 결합시켜 주는 전자기력과, 원자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합시켜 주는 강한 핵력strong nuclear force(강력) 덕분이다. 이 힘들이 공간을 확장시키는 힘보다 (아직은) 훨씬 강하기 때문에 당신의 몸이 하나의 덩어리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신의 몸이 확장되는 것은 공간 팽창 때문이 아니라 다이어트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충분히 흘러서 밀어내는 힘이 강해지면, 우주 공간뿐만 아니라 당신의 몸속에 있는 공간도 전자기력이나 강한 핵력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확장된다. 결국 당신의 몸도 부피가 커지다가 결국은 산산이 분해될 것이다."(365-6)


# 빅 립big rip(거대한 균열)


"밀어내는 중력이 일정하다는 것은 공간의 팽창 가속도가 일정하다는 뜻으로, 약 1조 년 후에는 팽창 속도가 광속을 초과하여 모든 은하들이 빛보다 빠르게 멀어질 것이다." "은하는 팽창하는 공간을 타고 빛보다 빠르게 멀어질 수 있지만, 은하에서 방출된 빛은 광속을 초과할 수 없기 때문에 지구에 도달하지 못한다. 강물에서 상류 쪽을 향해 노를 젓는 카약 선수가 유속보다 빠르게 노를 젓지 않는 한 흐르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처럼, 빛보다 빠르게 멀어지는 은하에서 방출된 빛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미래의 천문학자가 가까운 별을 마다하고 멀리 떨어진 은하에 망원경의 초점을 맞춘다면 칠흑 같은 어둠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은하들이 팽창하는 공간에 실려 떠내려가다가 천문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지평선cosmic horizon'을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간의 가장자리에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 있어서, 모든 은하들이 그 아래로 추락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367-9)


# 사실 팽창하는 공간에는 앞뒤의 개념이 없다. 공간은 모든 방향으로 팽창하기 때문에, 은하에서 방출된 빛은 어떤 방향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생각의 종말이 닥칠 것으로 예상되는) 10^50년은 터무니없이 긴 시간이다. 빅뱅 후 지금까지 흐른 시간보다 10억X10억X10억X10억 배 이상 길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긴 시간인 10^75년을 1년에 비유하면 10^50년은 당신이 책상 위의 전등을 켰을 때 전구에서 방출된 빛이 당신의 눈에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보다 짧다. 그리고 우주의 수명이 영원하다면 이 또한 찰나에 불과하다. 이렇게 방대한 시간 규모에서 우주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충 다음과 같을 것이다.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한 직후에 생명체가 등장하여 아주 잠시 동안 존재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러나 우주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생명체는 곧바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20세기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은 우주의 미래가 암울하다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러나 우리를 비추는 빛과 우리가 떠올리는 생각은 단명하지만, 과학은 이것이 정말로 희귀하고, 경이롭고, 가치 있는 사건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396)


10장 시간의 황혼: 양자, 개연성, 그리고 영원


"생각하는 존재가 모두 사라진 후에도 물리 법칙은 자신이 해 왔던 일을 계속할 것이다. 우주의 현실을 펼쳐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물리 법칙의 본분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양자역학과 영원은 강력한 결합을 형성한다. 양자역학은 모든 가능한 미래를 허용하는 아주 특별한 부류의 '꿈꾸는 몽상가'다. 물론 모든 미래를 마구잡이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각 미래마다 특정한 확률이 주어져 있다. 개중에는 우주의 나이만큼 기다려야 한 번쯤 일어날 정도로 확률이 낮은 미래도 있는데, 현실적인 시간 규모에서 이런 것은 완전히 무시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현재 우주의 나이가 무색해질 정도로 방대한 시간 규모에서는 확률이 거의 0에 가까운 사건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다. 게다가 우주의 수명이 무한하다면 이런 사건이 무한 번 일어난다. 아무리 작은 수라 해도 무한대를 곱하면 무한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이 은밀한 곳에 숨어서 현실로 구현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399-400)


"스티븐 호킹은 빛(복사)을 발하는 블랙홀의 온도 공식을 유도해냈는데, 이에 따르면 질량이 달보다 큰 블랙홀의 온도는 현재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마이크로파 우주배경복사의 온도(2.7K)보다 낮다. 언뜻 들으면 잘난 체하는 사람들의 잡담거리 같지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블랙홀 근처에서는 열이 차가운 공간에서 블랙홀로 흐른다. 블랙홀은 호킹복사를 방출하고 있지만, 방출량보다 많은 열을 공간으로부터 흡수하여 질량이 서서히 증가한다. 지금까지 관측된 가장 작은 블랙홀도 달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블랙홀은 덩치를 키워 나가는 중이다. 그러나 우주는 계속 팽창하면서 온도가 낮아지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마이크로파 우주배경복사의 온도가 블랙홀보다 낮아져서 에너지 흐름이 역전될 것이다. 이때가 되면 블랙홀은 에너지(열)를 방출하면서 수축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시간이 충분히 흐르면 결국은 블랙홀도 사라질 운명이다."(408)


"물리학자들이 '시간의 끝end of time'에 비유하는 시기에 도달하면, 가끔 전자와 양전자가 나선 궤적을 그리며 서로 가까워지다가 소멸되고 이때 방출된 섬광이 작은 점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질 뿐, 대부분의 공간은 암흑 천지다. 암흑에너지가 모두 사라져서 공간의 팽창 속도가 잦아들면 대형 블랙홀에 입자가 축적되어, 복사를 방출하는 속도가 느려지면서 수명이 좀 더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암흑에너지가 남아 있으면 가속 팽창 때문에 입자들이 점점 더 빠르게 멀어져서 마주칠 기회가 거의 없다. 흥미로운 것은 이 상황이 빅뱅 직후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다. 빅뱅이 일어난 직후에도 공간은 분리된 입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단, 우주 초기에는 입자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서 별이나 행성 같은 천체가 형성될 수 있었지만, 우주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입자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이 계속 팽창하기 때문에 질량 덩어리가 형성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411)


"힉스장의 변화는 '양자터널효과quantum tunneling effect'라는 양자적 현상을 통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전자를 '특별히 아주 작게 제작된' 샴페인 잔에 가두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까?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얌전하게 있는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전자가 잔을 탈출하여 바깥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이용하면 전자가 잔의 내부나 바깥에서 발견될 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데 잔이 두꺼울수록, 그리고 잔이 높을수록 전자가 탈출할 확률은 낮아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자가 탈출할 확률이 0이 되려면 잔이 무한이 넓거나 키가 무한히 커야 한다. 고전적이건 양자적이건, 현실 세계에 이런 잔이 존재할 수는 없다. 즉, 전자가 잔을 탈출할 확률은 0이 아니다. 물론 이 확률은 거의 0에 가깝지만 충분히 긴 시간 동안 기다리면 언젠가 전자는 잔의 외부에서 발견된다." "힉스장이 양자터널을 겪으면서 값이 바뀐다면 우주의 장기적인 운명도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416-7)


"양자 세계에서 전자가 가끔씩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는 것처럼, 힉스장의 값도 장애물을 통과하여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이런 일이 발생해도 전 공간에 퍼져 있는 힉스장의 값이 동시에 변하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영역에서 양자효과가 무작위로 발생하여, 그곳의 힉스장이 장벽을 뚫고 다른 값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샴페인 잔을 탈출한 구슬이 더 낮은 곳으로 굴러가는 것처럼 힉스장의 값도 낮은 에너지로 떨어지고, 그 주변의 힉스장도 낮은 에너지의 영향을 받아 양자터널을 시도한다. 힉스장의 값이 변한 공간은 동그란 구를 형성하는데, 이 효과가 도미노처럼 퍼지면서 구의 반지름이 점점 커지다가 결국은 모든 우주를 뒤덮게 된다. 구의 내부에서는 힉스장의 변화와 함께 입자의 질량이 변하여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우리에게 익숙한 특성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질량이 달라진 입자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새로운 구조물과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단언할 수 없다."(418-9)


"최후의 순간이 오면 우리가 지금까지 습득하고, 발견하고, 창조한 모든 것들을 캡슐에 담아서 이곳보다 좋은 영역에 도달하기를 기원하며 우주 공간으로 띄워 보낼 수도 있다. 우리의 혈통이 영원히 이어질 수 없다 해도, 우리가 이룩한 모든 것을 요약하여 영원한 혈통을 물려받은 종족에게 전달함으로써 우리의 흔적을 영원히 남길 수는 있지 않을까? 가리가와 빌렌킨은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도이치의 사상에 기초하여 이 시나리오를 분석한 끝에 〈희망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한히 긴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우주에서 무작위로 발생한 양자요동이 가짜 캡슐을 양산할 것이므로, 우리 후손이 만든 진짜 캡슐은 그 속에 섞여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양자적 잡음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 우주에서 오랫동안 우주를 생각해 온 생명과 사고는 언젠가 반드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는 영원을 상상할 수 있고 영원에 도달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직접 만질 수는 없다."(436)


11장 존재의 고귀함: 마음, 물질, 그리고 의미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생명을 불어넣는) 이 자각 능력에 기초하여 시간의 시작부터 수학 이론으로 예측 가능한 최후의 순간까지, 모든 시간대를 탐험했다. 이 내용은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남아 있을까? 당연히 있다. 세부 사항들이 보강되거나 다른 내용으로 대치될 수도 있을까? 물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양한 시간대를 거쳐 오면서 목격했던 탄생과 죽음, 출현과 붕괴, 그리고 창조와 파괴의 리듬은 우리가 떠난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엔트로피 2단계 과정과 진화의 선택력은 혼돈 속에서 고도의 질서를 창출하지만, 별과 블랙홀, 행성과 인간, 그리고 분자와 원자는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다가 결국은 모두 분해될 것이다. 종류에 따라 수명은 천차만별이지만 당신과 내가 죽고,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하고, (적어도 우리 우주 안에서) 모든 생명과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물리 법칙이 낳은 평범한 결과 중 하나일 뿐이다. 한 가지 색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446-7)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개인적인 사망과 멸종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삶의 가치를 높이고, 후자는 퇴색시킨다. 이 깨달음은 그 후로 몇 년 동안 미래를 생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젊은 시절에 수학과 물리학의 시간을 초월한 위력을 절감하고 나름대로 미래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미래는 바위와 나무, 사람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 방정식과 수학 정리, 그리고 물리 법칙이 난무하는 추상적 세계였다. 나는 플라톤주의 신봉자도 아니면서 시간과 물질계를 초월한 수학과 물리학에 절대 가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인류 종말 시나리오가 내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방정식과 수학 정리, 그리고 물리 법칙은 진리에 다가가는 수단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런 것들은 칠판에 휘갈기거나 학술지와 교과서에 인쇄된 기호의 집합일 뿐이다. 이들의 가치는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창출되며, 그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451)


"우리가 목격한 모든 시간대를 하루로 압축하면, 최초의 생명체가 출현하여 최후의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빛이 원자 1개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짧다. 물론 (인류가 자멸하건, 멸종하건, 다른 은하에서 새로운 서식지를 찾건 간에) 인간이 존재한 기간은 이보다 훨씬 더 짧다. 그렇다. 우리는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시적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존재하는 짧은 시간은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시간이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자기 성찰을 통해 만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형이상학적 가치를 창출했다. 영원히 변치 않을 유산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우주의 타임라인을 조망한 우리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목표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소규모의 입자들이 모여서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얼마나 단명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연결 관계를 확립하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풀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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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2021-05-15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장까지 읽다가 정리한글일 보며 흐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청양 2021-05-15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까지 읽으면 어떤생각이 들까? 지금으로서는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반야심경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완벽한 이론 - 일반상대성이론 100년사
페드루 G. 페레이라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서문


"일반상대성이론에 관한 이야기는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 10년 동안 명백해졌듯이, 만일 일반상대성이론이 옳다면, 우주의 대부분은 빛을 내지 않는다. 우주는 빛을 방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반사하거나 흡수하지도 않는 물질로 가득 차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관찰 증거는 압도적이다. 우주 전체의 거의 3분의 1이 마치 성난 벌떼처럼 은하들 주위에 모여 있는 비가시적이며 무거운 물질, 곧 암흑물질(dark matter)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3분의 2는 공간을 팽창시키는 기묘한 존재인 암흑 에너지(dark energy)가 차지한다. 겨우 우주의 4퍼센트만이 우리에게 익숙한 재료, 곧 원자(atom)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미미한 존재인 셈이다. 단,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옳다는 전제 아래에서 말이다. 우리가 일반상대성이론의 한계에 접근하는 중이고, 그 이론에 금기 가기 시작했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16)


1 사람이 자유낙하한다면


"물리학과 역학의 법칙들은 물체가 어떻게 운동하는지, 힘을 받으면 어떻게 가속하거나 감속하는지에 관한 규칙들이다." "관성 기준틀이란 일정한 속도로 운동하는 기준틀을 말한다. 당신이 멈추어 있는 장소에서, 이를테면 서재나 카페에서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관성 기준틀 안에 있는 것이다. 또다른 고전적인 예는 아무 진동 없이 매끄럽게 전진하는 창 없는 열차의 내부이다. 당신이 그런 열차 안에 앉아 있다면, 열차가 전진하는지 여부를 알아낼 길이 없다. 원리적으로, 한 관성 기준틀이 빠르게 운동하고 다른 관성 기준틀이 멈추어 있을 때, 두 관성 기준틀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해야 한다. 당신이 한 관성 기준틀에서 실험을 하여 어떤 물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한다면, 그 결과는 임의의 다른 관성 기준틀에서 얻은 측정 결과와 동일해야 한다. 물리학 법칙은 어느 관성 기준틀을 기준으로 삼든지 상관없이 동일하다."(23)


"제임스 클라크 맥스웰은 전기력과 자기력을 관련짓는 새로운 법칙을 발견했다." "가령, 막대자석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기력을 느끼고 전기력은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막대자석 옆으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사람은 자기력뿐 아니라 약간의 전기력도 느낀다. 맥스웰은 전기력과 자기력을, 관찰자의 위치나 속력과 상관없이 일정한 하나의 힘으로 통합했다. 그런데 뉴턴의 운동 법칙들과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들을 조합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세계가 정말로 양쪽 법칙들을 모두 따른다면, 한 관성 기준틀에서는 아무 힘도 느끼지 못하지만 다른 관성 기준틀에서는 힘을 느끼는 장치를 자석과 전선과 도르래 등으로 제작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하다. 즉, 관성 기준틀들을 구별할 수 없어야 한다는 규칙이 깨진다. 따라서 뉴턴의 법칙들과 맥스웰의 법칙들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법칙들에 존재하는 이 '비대칭성(asymmetry)'을 수정하고 싶었다."(23-4)


"뉴턴이 설명한 중력은 아인슈타인의 아름답고 간결한 상대성이론의 두 전제 모두를 위반했다. 우선 뉴턴의 이론에서 중력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만일 두 물체가 갑자기 서로의 곁에 놓인다면, 두 물체 사이의 중력은 그 즉시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력이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까지 이동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상대성원리에 따라서 어떤 신호, 어떤 효과도 광속보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없다면, 그런 즉각적인 효과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에 못지않게 난처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역학과 전자기학을 조화시켰지만 뉴턴의 중력 법칙을 도외시했다는 사실이었다. 뉴턴의 중력은 서로 다른 관성 기준틀에서 다르게 보였다." "여러 해 뒤에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을 하면서) 새로운 중력 이론의 단초를 떠올렸다. 〈만일 사람이 자유낙하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무게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28-9)


"당신이 토끼 구멍으로 들어가 자유낙하는 앨리스라고 상상해보자. 중력을 받아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당신의 낙하속력은 일정한 비율로 증가할 것이다. 그 증가 비율, 곧 가속도는 중력의 효과와 정확히 일치할 것이고, 따라서 당신은 당신을 끌어당기거나 미는 힘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물론 쏜살같이 공간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기분은 틀림없이 끔찍하겠지만 말이다. 이제 여러 물체들이 당신과 함께 떨어진다고 상상해보자. 책, 찻잔, 당신과 마찬가지로 겁에 질린 하얀 토끼 따위가 말이다. 그 모든 물체들도 중력의 효과와 일치하는 비율로 가속할 것이고, 따라서 함께 떨어지는 당신 주위에 둥둥 떠 있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몸무게를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 물체들은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모든 생각은 가속도 운동과 중력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우리가 상상한 자유낙하에서는 중력과 가속도 운동이 정확히 상쇄된다."(29)


"그렇게 낙하하는 사람을 상상한 1907년의 그 어느 날,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가속도 사이에 틀림없이 심층적인 관련성이 있으며 그 관련성이 자신의 상대성이론으로 중력을 기술하기 위한 열쇠임을 깨달았다. 만일 상대성원리를 수정하여 물리학 법칙이 서로에 대해서 일정한 속력으로 움직이는 여러 기준틀에서뿐 아니라 가속하거나 감속하는 기준틀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되도록 만들 수 있다면, 중력이론과 전자기학과 역학을 융합할 수 있을 법했다. 비록 구체적인 방법은 몰랐지만, 아인슈타인의 이 찬란한 통찰은 상대성이론을 더 일반화하는 과정의 첫걸음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원리과 거기에서 도출한 귀결들에 관하여」라는 보고서에서, 중력이 있으면 광속이 달라지고 시계가 더 느리게 작동할 것임을 지적했다. 그렇게 상대성원리를 일반화하면 어쩌면 수성 궤도의 미세한 일그러짐도 설명할 수 있을 법했다."(30-1)


2 가장 값진 발견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도출되는 예측 하나는 먼 별들에서 방출된 빛이 태양처럼 크고 무거운 천체를 가까이 스쳐지나면, 그 빛의 진로가 휘어진다는 것이었다. 에딩턴은 그런 먼 별의 무리인 히아데스 성단을 연중 두 시점에 관찰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먼저 아무것도 시야를 가리지 않고 히아데스 성단에서 오는 빛을 중간에서 구부릴 천체도 없을 때 그 성단에 속한 별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측정할 것이었다. 그런 다음에 그는 태양이 히아데스 성단 앞에 놓였을 때 다시 한번 그 별들의 위치를 측정할 것이었다. 이 측정은 태양의 밝은 빛이 달에 거의 다 가려지는 개기일식 중에 실시해야 할 것이었다. 1919년 5월 29일이 되면, 히아데스 성단이 태양의 바로 뒤에 놓여 측정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치 변화가 약 1,000분의 4도, 곧 1.7초라면, 아인슈타인의 예측이 정확히 옳음이 입증될 것이었다. 이것이 에딩턴이 품은 간단명료한 목표였다."(48)


"에딩턴의 도박은 보람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일반상대성이론을 검증하고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물리학의 예언자로 우뚝 섰다. 이때 이후 에딩턴은 새로운 상대성이론을 논할 때는 누구나 조언을 구하는 극소수의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그의 견해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해석하거나 발전시킬 방향에 관한 지침으로서 누구의 견해보다 더 높은 권위를 누렸다. 또한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에딩턴의 극적인 탐사는 아인슈타인을 슈퍼스타로 만들었다. 에딩턴의 발견은 아인슈타인의 인생을 바꾸었고, 일반상대성이론의 인기와 명성을 과학이론으로서는 누리기 힘든 수준으로, 적어도 한동안은 올려놓았다. 아인슈타인은 수백 년 동안 최고 권력자로 군림해온 뉴턴을 몰아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비록 난해하고 극소수만 이해하는 수학적 언어로 표현되어 있었지만, 에딩턴의 검증을 멋지게 통과했다."(52)


3 옳은 수학, 형편없는 물리학


"1917년,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방정식들을 푸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몇 가지 전제를 채택했다. 그의 이론에서는 물질과 에너지의 분포가 시공의 행동을 결정했다. 따라서 우주 전체를 모형화하려면,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아인슈타인은 첫 시도에서 가장 단순하면서 가장 논리적인 전제를 채택했는데, 그것은 물질과 에너지가 시공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는 전제였다." "이 전제 하에서 장방정식들은 훨씬 단순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주 기이한 결론이 나왔다. 즉, 아인슈타인의 방정식들은 그런 우주가 진화한다고 예측했다. 어느 시점에서인가, 고르게 퍼진 에너지와 물질의 조각들 모두가 조직화된 방식으로 서로에 대해서 운동하기 시작할 것이었다. 가장 큰 규모에서는 그 무엇도 멈추어 있지 않을 것이었다. 결국에는 만물이 쪼그라들면서 시공을 끌어당겨 우주 전체가 붕괴하여 사라질 것이었다."(54-5)


"우리 은하 바깥의 모습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 당시의 천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도 하늘이 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우주가 수축하거나 팽창한다는 증거는 없었다. 결국 자신의 물리학적 직관과 선입견을 따르기로 한 아인슈타인은 진화하는 우주를 자신의 이론에서 배제하기 위해서 한 가지 수정을 제안했다. 그는 장방정식들에 새로운 상수항을 추가했다. '우주상수(cosmological constant)'로 불리는 그 항의 역할은 우주의 내용물 전체가 발휘하는 중력을 정확히 상쇄함으로써 우주를 안정화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온 우주에 골고루 퍼져 있다고 전제한 에너지와 물질, 곧 평범한 내용물 전체는 시공을 끌어당기는 반면, 우주상수는 시공을 밀어내 우주의 수축을 막는다. 이 밀어냄과 끌어당김이 우주를 미묘한 균형상태로 유지한다. 아인슈타인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은 정적인 상태로 말이다."(55-6)


"1922년, 「공간의 곡률에 관하여」라는 획기적인 논문을 발표한 소련의 수학자 알렉산드르 프리드만은 아인슈타인이 얻은 결과를 무시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물질과 우주상수가 우주의 기하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하나의 수, 곧 공간의 전반적 곡률이 시간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사실이었다. 우주 속의 평범한 물질, 즉 곳곳에 흩뿌려진 별들과 은하들은 공간을 끌어당기고 수축시킬 것이었다. 만일 우주상수가 양수라면, 우주상수는 공간을 밀쳐내고 팽창시킬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두 효과가 균형을 이루어 공간이 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프리드만은 이 정적인 해가 한 가지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해는 우주가 진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질의 영향이 우세한가 우주상수의 영향이 우세한가에 따라서 우주가 수축하거나 팽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60)


# 수학적으로 팽창하는 우주 모형을 제시한 학자들 : 드 지터 - 프리드만 - 르메트르 / 팽창하는 우주 모형을 관찰로 입증한 학자들 : 허블 & 휴메이슨


4 수축하는 별


"1939년,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지도학생 하틀랜드 스나이더와 함께 무거운 별이 일생을 마칠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해햐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이하고 이해하기 힘든 해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거의 25년 동안 어두운 배경에 웅크리고 있던 해였다. 오펜하이머는 충분히 크고 조밀한 별은 일생을 마치면서 수축하여 보이지 않게 될 것임을 발견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잠시 후 〈그 별은 멀리 떨어진 관찰자와의 소통을 단절하기에 이르고 오직 그 별의 중력장만 존속한다.〉 마치 빛과 에너지로 이루어진 수축하는 공 주위에 신비로운 장막이 드리워 그 공을 외부세계로부터 감추는 듯할 것이며, 시공은 휘어져 탄탄하기 그지없는 매듭을 이룰 것이었다. 아무것도, 심지어 빛도 그 장막 바깥으로 탈출할 수 없을 것이었다. 오펜하이머가 얻은 결과는 아인슈타인 방정식에서 나온 또 하나의 수학적 괴짜였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79-80)


"오펜하이머와 스나이더가 이 결과에 도달하기 거의 25년 전에 독일 천문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행성이나 별 같은 구형 질량 주위의 시공을 연구했다." "당신이 별에 접근하면,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만일 별이 작지만 충분히 무겁다면, 별은 어떤 구형 곡면에 의해서 가려져 그 곡면 너머의 모든 것은 보이지 않게 된다. 여러 해 뒤에 오펜하이머와 스나이더가 발견하게 될 장막이 바로 이 곡면이다. 이 곡면을 통과해 밖으로 나가려는 모든 것을 좌절시킨다. 무엇이든 별에 너무 접근하다가 그 구형 경계면 안으로 떨어지면 다시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 경계면은 귀환불능 지점이다. 슈바르츠실트의 이상한 구면 밖으로 나가려면, 광속보다 더 빠른 속력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르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슈바르츠실트는 반세기도 더 지나서 '블랙홀(black hole)'로 명명될 대상을 발견한 것이었다."(81-2)


5 완전히 돌았어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들을 연구해 도출한 괴델의 해는 한 가지 기이한 특징이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모든 우주와 극적으로 달랐다. 프리드만과 르메트르의 우주에 사는 관찰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시공의 다양한 구역을 탐사할 수 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과거를 뒤에 남기고 점점 더 늙어간다. 그 우주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명확히 구분된다. 그러나 괴델의 우주에서는 그렇지 않다. 만일 관찰자가 충분히 빠르게 움직인다면, 그는 회전하는 시공을 가로질러 원래 위치로 돌아올 수 있다. 심지어 정확하게 움직이기만 하면, 시공여행을 통해서 그 여행을 떠나기 전의 자기 자신에게로 가서 여행을 가로막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괴델의 우주에서는 과거로 여행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정말로 자연을 반영한다면, 우리의 세계 경험과 크게 어긋나는 괴델의 부조리한 우주는 실재하는 물리적 가능성이다."(121-2)


6 라디오 데이스


"프리드만의 모형이나 르메트르의 모형에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때 도달하는 우주의 시작은 공간 전체가 단일한 점에 무한히 집중된 순간에 해당했다. 다시 말해서 공간, 시간, 물질이 바로 그 최초 순간에 생겨났다. 호일과 그의 친구들이 보기에 이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소리였다. 훗날 호일이 말했듯이, 〈그것은 과학적으로 서술할 길이 없는 비합리적 과정이었다.〉 무에서 유가 나오는 창조를 어떤 물리학 법칙들로 서술할 수 있겠는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고, 호일이 보기에는 〈기본 전제를 빼돌려서 직접적인 관찰의 도전을 결코 받을 수 없는 곳에 놓은 명백하게 미흡한 생각〉이었다. 이들의 반발은 에딩턴이 르메트르의 〈태초의 알〉을 소스라치며 폄하했던 일을 연상시켰다." "본디와 골드는 최초 순간─또는 나중에 호일이 붙인 이름으로는 '빅뱅'─을 거의 추상적이고 미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즉, 시작은 없을 테고, 항상 (한결같은) 정상상태에 머무는 영원한 우주만 있을 터였다."(134-5)


"전파는 빛 파동과 유사하게 행동하지만, 파장이 가시광선보다 10억 배 길다. 우리 눈에 눈에 보이는 가시광선(햇빛의 대부분을 이룬다)의 파장은 100만 분의 1미터 미만이다. 대조적으로 전파의 파장은 1밀리미터에서 수백 미터까지 다양하다. 칼 잰스키는 우리 은하가 대단히 많은 전파를 밤낮으로 방출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보기에 태양은 우리 은하 전체보다 훨씬 더 밝지만 그렇게 많은 전파를 방출하지 않았다. 1933년에 발표한 논문 「우주에서 기원하는 듯한 전기적 교란」에서 잰스키는 모든 전파 방해의 원인을 세계적으로 분류하고 전파가 날아오는 방향을 보여주는 지도를 제시했다. 그의 논문은 우주를 관찰하는 새로운 방법을 시사했다. 렌즈가 장착된 거대한 망원경을 산꼭대기에 설치하는 대신에, 이 새로운 관찰은 철조망, 강철 막대기, 접시를 가지고 탁 트인 평원에서 할 수 있었다. 먼 천체의 희미한 빛을 관찰하는 대신에, 천문학자들은 우주에서 오는 전파를 포착할 수 있었다."(139-40)


"정상우주론을 살펴보던 마틴 라일에게 어두운 전파원의 개수와 밝은 전파원의 개수 사이의 비율은 우리가 사는 우주의 유형을 알려주는 좋은 단서이다. 먼 전파원에서 오는 전파는 오랫동안 이동하여 우리에게 도달하므로, 먼 전파원을 관찰할 때 우리는 과거의 우주를 관찰하는 셈이다. 만일 우리가 호일, 골드, 본디의 정상상태 우주에서 산다면, 전파원들의 밀도는 시간에 따라서 변함없이 일정할 것이다. 따라서 특정 부피 안에 있는 전파원의 총 개수는 그 부피에 정비례해야 한다. 반면에 프리드만과 르메트르가 제안한 것과 같은 진화하는 우주 모형에서는, 우주의 밀도가 지금보다 과거에 더 높다. 따라서 멀고 어두운 전파원이 가깝고 밝은 전파원보다 더 많아야 한다. 그러므로 어두운 전파원의 개수와 밝은 전파원의 개수를 세서 비교하면, 우리 우주가 빅뱅 모형에 부합하는지 아니면 정상상태 우주 모형에 부합하는지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143)


7 휠러리즘


"존 아치볼드 휠러가 유능한 제자 찰스 미스너와 함께 개발한 아이디어는 일반상대성이론에 전하(electric charge)를 추가하되, 어떤 전하도 도입하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휠러가 이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서 고안한 휠러리즘은 〈전하 없는 전하(charge without charge)〉였다. 이들은 사고실험에서 여러 수학 기법을 이용하여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시공 구역에 구멍을 뚫고 그 구멍들을 '웜홀(wormhole)'이라는 관으로 연결했다. 그리고 터널과 유사한 그 웜홀로 전기장선들(electric field lines)을 꿰는 데에 성공했다. 웜홀의 한쪽 끝에서 빠져나오는 장선들은 그 끝이 마치 양전하를 띤 것처럼 음전하를 끌어당기게 만들 것이었다. 웜홀의 반대쪽 끝으로 들어가는 장선들은 그 끝이 마치 음전하를 띤 것처럼 행동하게 만들 것이었다. 요컨대 웜홀은 서로 멀리 떨어진 양전하와 음전하의 쌍처럼 행동할 텐데, 실제로 이 상황은 전하를 띤 입자들과 전혀 무관하다."(151-2)


"〈질량 없는 질량(mass without mass)〉이라는 휠러리즘도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질량을 가진 대상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설명하지만, 휠러는 아인슈타인이 얻은 결과들을 질량과 전혀 상관없이 도출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싶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빛은 질량과 마찬가지로 공간을 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광선 다발을 압축하여 그 다발이 공간과 시간을 충분히 많이 휘게 만들 수 있다면, 광선 다발이 질량 덩어리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휠러는 제안했다. 그런 빛 뭉치, 즉 휠러가 '지온(geon)'으로 명명한 대상은 무게를 가질 것이고 다른 지온들을 끌어당길 것이었다. 이때 광선들은 휘어져서 도넛 모양의 코일을 이루어야 하고 또한 쉽게 해체될 수 있지만 실제 질량 없이 질량의 효과를 발휘할 것이었다. 휠러는 또다른 학생 킵 손과 함께 지온이 즉각 블안정해지지 않으면서 자연에 존재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작업에 착수했다."(152)


"그리고 당연히 양자와 일반상대성이론을 조화시키는 문제도 있었다. 이 문제는 너무나 훌륭하고 너무나 극단적이어서 휠러로서는 해결을 시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휠러는 만일 당신이 아주 작은 규모의 시공을 관찰할 수 있다면, 기이한 효과들의 발생을 보기 시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큰 규모에서 시공은 질량을 가진 대상들(휠러가 고안한 지온과 웜홀도 포함된다)에 의해서 완만하게 휘어지기는 했어도 매끄럽게 보이겠지만, 작은 규모에서 당신은 있는 줄 몰랐던 울퉁불퉁함을 보게 될 것이었다. 정말로 성능이 좋은 현미경으로 관찰한다면, 시공이 마구 요동하는 상태임을 발견할 것이다. 실제로 양자 불확정성 때문에 시공은 아주 작은 규모에서는 부글거리는 거품더미처럼 보여야 한다. 우리가 시공의 근본적인 울퉁불퉁함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흐릿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152-3)


8 특이점


"일찍이 오펜하이머와 스나이더는 단순한 근사(approximation)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해를 구성했다. 즉, 완벽한 구형의 물질 덩어리가 쪼그라드는 상황을 전제했다. 휠러는 그것이 너무 심한 이상화(理想化)라고 보았다. 실제로 수축하는 별이 지구처럼 울퉁불퉁하다면, 수축과정이 심하게 왜곡되어 특이점이 아예 형성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저 펜로즈가 〈구형 대칭성을 깨는 불규칙성들이 시공 특이점의 발생을 막을 수 없다〉는 증명을 담은 논문을 내놓았다." "그는 임의의 시공을 대상으로 삼고 그 시공의 가장 기초적인 속성 몇 가지와 그 시공에 들어 있는 물질의 유형을 살펴봄으로써 그 시공이 어떤 일을 겪을지를, 즉 한 점으로 수축할 것인지 아니면 무한히 팽창할 것인지를 확실히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규칙들을 휠러가 〈최종상태 문제〉라고 부른 중력 붕괴 문제에 적용하여 특이점이라는 결과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179-81)


"마틴 라일은 케임브리지의 정상우주론을 무너뜨리려는 노력에서 처음에는 실패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데이터는 향상되고 있었다." "마틴 리스는 적색편이가 측정된 퀘이사 35개를 표본으로 삼고 이들을 세 무리로 분류했다. 한 무리는 낮은 적색편이를 나타냈다. 즉, 이 무리는 시간 공간적으로 지구에서 가까운 퀘이사들이었다. 둘째 무리는 중간 수준의 적색편이를 나타내는 퀘이사들이었고, 마지막 무리는 높은 적색편이를 나타내는 먼 과거의 퀘이사들이었다. 우주가 시간에 따라서 진화하지 않는다고 보는 정상우주론이 옳다면, 위의 세 무리에 대략 같은 개수의 퀘이사가 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리스는 첫째 무리에 속하는 최근의 퀘이사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의 모든 퀘이사가 셋째 무리에 속했다. 그래프를 그려보니 모든 것이 명백했다. 다시 말해서, 퀘이사의 개수가 시간에 따라서 변화했고(과거에 더 많았고), 따라서 정상우주론은 옳지 않았다."(182-3)


"1968년 2월, 벨과 휴이시를 비롯한 공동 저자들은 〈맥동하는 전파원들에서 나오는 이례적인 신호가 멀라드 전파천문대에서 포착되었다〉면서, 〈그 복사[신호]는 우리 은하 내부의 국지적 천체들에서 나오는 듯하며 백색왜성이나 중성자별의 진동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차트 용지에 기록된 스파이크들이 밀도가 높은 전파원인 백색왜성이나 중성자별의 진동 혹은 맥동을 보여준다고 추측했다." "펄서(pulsar)는 중성자별의 존재를 보여주는 최초의 실질적인 증거였다. 펄서는 실은 맥동하지 않고 회전한다. 회전하기 때문에 주기적인 신호를 방출하는 것이다. 아무튼 펄서는 중력 붕괴의 과정을 완전히 규명하려면 채워넣어야 할 단계로서, 란다우가 상정하고 오펜하이머가 연구하고 휠러와 그의 제자들이 아주 꼼꼼하게 탐구한 가상의 천체였다. 펄서는 펜로즈의 불가피한 특이점이 형성되기 직전의 마지막 단계였다."(187-9)


9 통합의 슬픔


"(중력을 설명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은 (강한핵력, 약한핵력, 전자기력을 설명하는) 양자물리학과 양립할 수 없는 유일한 이론으로 남아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와 양자물리학의 토대를 조화시키는 통일을 향한 첫걸음은 폴 디랙 자신이 전자를 기술하기 위해서 개발한 근본 방정식─이른바 디랙 방정식─이었다. 양자물리학 방정식들은 시스템(예컨대 수소 원자에서 양성자에 속박된 전자)의 양자상태가 시간에 따라서 어떻게 진화하는지 알려준다. 양자물리학은 공간과 시간을 아주 명확하게 구분한다. 반면에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 공간과 시간을 합쳐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시공으로 만든다. 또 역학 법칙들과 빛에 관한 법칙들을 합쳐서 일관된 틀에 맞추어 넣는다. 폴 디랙은 이 틀에 양자물리학 법칙들도 맞추어 넣는 데에 성공했다. 디랙의 방정식 덕분에 양자물리학까지 포함해서 물리학 전체가 특수상대성원리에 따를 수 있게 되었다."(197-9)


"디렉이 발견한 방정식은 페르미온인 전자의 양자물리학적 행동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도 부합하게 기술한다. 구체적으로 이 방정식이 기술하는 것은 공간상의 특정 위치에 있거나 특정 속력을 가진 전자를 발견할 확률이다. 디랙은 공간을 따로 떼어내지 않았다. 대신에 디랙의 방정식은 특수상대성이론이 요구하는 대로 시공 전체에서 하나의 일관된 방식으로 정의된다. 이 방정식에는 자연세계와 기본 입자들에 관한 통찰과 정보가 풍부하게 들어 있다. 디랙 자신도 놀랐지만, 또한 그의 방정식은 반입자(antiparticle)의 존재를 예측했다. 반입자는 짝을 이루는 입자와 질량은 같지만 전하량이 반대이다. 전자의 반입자는 양전자(positron)라고 한다. 양전자는 다른 모든 면에서 전자와 똑같지만 음전하가 아니라 양전하를 띤다. 디랙의 방정식에 따르면, 전자와 양전자가 둘 다 자연에 존재해야 한다." "실제로 1932년에 우주선(cosmic ray)에서 양전자가 발견되었다."(200)


"1974년 2월에 열린 옥스퍼드 심포지엄에서 호킹은 양자물리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이 결합할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블랙홀이 실은 검지 않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빛을 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후 40년 동안 양자중력이론을 바꾸게 될 희한한 주장이었다." "1970년대 초에 스티븐 호킹은 이미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의 소속은 응용수학 및 이론물리학과(DAMTP)였다. 데니스 시아마의 지도를 받은 호킹은 로저 펜로즈와 함께 연구하여 시간의 시초에 특이점이 존재했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1970년대 초에 그는 우주론에서 블랙홀로 관심을 돌려서 브랜던 카터, 베르너 이스라엘과 함께 블랙홀은 털이 없음을 최종적으로 증명했다. 이 증명에 따르면, 블랙홀은 자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상실한다. 그리고 질량과 회전과 전하량이 같은 블랙홀들은 모두 똑같은 모습이다."(208)


"사건지평 근처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호킹은 거기에서 기이한 것을 발견했다. 양자물리학은 진공에서 입자와 반입자의 쌍이 생겨나는 것을 허용한다. 평범한 조건에서는 입자와 반입자가 생겨나자마자 곧바로 충돌하여 소멸한다. 그러나 호킹이 발견했듯이 사건지평 근처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 즉, 반입자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가고 입자는 남는 경우가 일부 발생한다. 이 과정이 거듭되면, 반입자들은 블랙홀로 빨려들고, 블랙홀은 고에너지 입자들의 흐름을 느리지만 확실하게 방출할 것이다. 호킹은 방출되는 입자들이 광자처럼 질량이 없을 경우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상세히 계산한 끝에, 멀리 떨어진 관찰자는 블랙홀이 흡사 희미한 별처럼 믿기 힘들 정도로 약한 빛을 내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한 우리의 태양을 비롯한 별들처럼 블랙홀에도 온도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었다."(212)


"요컨대 호킹은 일반상대성이론이 예측하는 블랙홀이 양자물리학 때문에 빛을 방출하고 온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단히 명료한 수학적 결론이었던 이 발견에서, 호킹은 블랙홀이 방출하는 복사의 온도가 블랙홀의 질량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계산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예컨대 질량이 태양과 같은 블랙홀은 온도가 10억 분이 1 켈빈일 것이고, 질량이 달과 같은 블랙홀의 온도는 약 6켈빈일 것이었다. 블랙홀이 빛을 냄에 따라서, 블랙홀의 질량은 조금씩 줄어든다. 이 과정은 엄청나게 느리게 진행된다. 태양 질량의 블랙홀이 질량을 모두 잃으려면(호킹의 표현으로는, 〈증발하려면〉),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훨씬 더 작은 블랙홀들은 훨씬 더 빨리 증발할 수 있다. 예컨대 질량이 약 1조 킬로그램인 (천체물리학의 기준에서는 작은) 블랙홀은 우주의 수명보다 짧은 시간 안에 증발할 것이며 마지막 10분의 1초 동안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방출할 것이다."(213)


10 중력을 보았다 


"중력파와 중력의 관계는 전자기파와 전자기력의 관계와 같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파동은 시공 자체의 잔물결일 것이다. 시공은 말하자면, 물웅덩이처럼 행동한다. 당신이 웅덩이에 돌멩이를 던지면, 잔물결이 일어나서 웅덩이의 가장자리까지 퍼져나간다. 전자기파나 물웅덩이의 잔물결과 마찬가지로, 중력파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에너지를 운반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기파와 달리, 중력파는 포착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중력파는 중력 시스템에서 그 외부로 에너지를 운반하기는 하는데, 이 운반의 효율이 아주 낮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1억 5,000만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도는데, 이 과정에서 지구는 중력파를 방출하면서 천천히 에너지를 잃고 태양에 접근한다. 그러나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는 아주 천천히, 대략 하루에 양성자의 지름만큼 줄어든다. 즉, 지구가 존속하는 기간 내내 지구는 태양에 겨우 1밀리미터쯤 접근할 것이다."(218)


"1974년, 미국의 천체물리학자 조지프 테일러와 러셀 헐스는 중성자별 두 개가 아주 짧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주위를 도는 것을 발견했다. 한쪽 중성자별은 1,000분의 몇 초마다 폭발적으로 빛을 내뿜는 펄서여서, 이 별이 고요한 짝별 주위를 도는 모습은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테일러와 헐스는 서로의 주위를 도는 이 중성자별들의 위치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하게 측정했다. 이 성취는 일반상대성이론 연구를 위한 새롭고 완벽한 실험실을 발견한 것과 같았다. 아인슈타인은 (비록 말년에 이 주장을 철회하긴 했지만) 서로의 주위를 도는 두 천체는 에너지를 주위 시공으로 방출하면서 서로에게 점점 더 접근하여 결국 충돌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중성자별은 서로의 주위를 돌면서 중력파를 방출하여 에너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이 천체들은 중력파의 존재를 비록 간접적이지만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였다. 측정 결과는 명확했으며 이론과 멋지게 일치했다."(228)


11 암흑 우주


"1979년에 로버트 디키와 짐 피블스는 「빅뱅 우주론─수수께끼들과 묘안들」이라는 논문에서 성공적인 빅뱅 이론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몇 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우주는 빅뱅 이론에 부합하기에는 너무 균질적인 듯하다. 그 균질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이미 있었지만, 디키와 피블스는 만족스러운 설명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왜 시공의 기하학과 대조적으로 공간의 기하학은 이토록 단순한 듯할까? 공간은 전반적으로 곡률이 0이고 고등학교 수준의 유클리드 기하학 법칙들을 따르는 듯하다. 예컨대 평행선들은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는 법칙이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법칙은 예외 없이 참인 듯하다." "현재 우주 공간의 곡률이 거의 0인 듯하다면, 과거에 우주 공간의 곡률은 지금보다 더 0에 가까웠어야 한다. 요컨대 우리가 사는 우주는 개연성이 극도로 낮은 우주이다. 과연 태초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253-4)


"겨우 1년 후, 우주론은 초기 우주의 진화에 관한 단순한 제안 하나 때문에 완전히 뒤집혔다. 그 제안의 요점은 우주의 인플레이션(cosmic inflation)이었다. 관련 아이디어는 일찍부터 불명료한 형태로 떠돌았지만, 스탠퍼드 선형가속기 센터의 박사후연구원 앨런 구스에 이르러 처음으로 우주 인플레이션의 핵심이 제시되었다. 구스는 몇몇 대통일이론─전자기력, 약한핵력, 강한핵력을 단일한 힘으로 통합하려고 애쓰는 이론─에서 여러 장들 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높은 에너지를 가지고 다른 모든 장들을 압도하는 상태에 우주가 갇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상태에서 우주는 급팽창할 것이었다. 혹은 구스의 표현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을 겪을 것이었다. 비록 구스의 원래 아이디어는 결함이 있는 것─만일 우주가 그런 상태에 갇힌다면, 그런 상태를 벗어날 길이 없다─으로 판명되었지만, 다른 연구자들이 새로운 인플레이션 방식들을 신속하게 제안했다."(255)


"인플레이션은 공간의 곡률을 거의 한순간에 0으로 만들어버린다. 당신의 손 안에 들어갈 만한 크기의 풍선을 거대한 펌프로 부풀려 거의 한순간에 지구만큼 크게 만든다고 상상해보라. 이제 당신의 눈앞에 놓인 풍선의 일부는 완전히 평평하게 보일 것이다. 또한 인플레이션은 우주를 엄청나게 균질한 상태로 만들 것이다." "인플레이션은 아주 이른 시기의 우주에서 구조의 성장이 시작될 길도 열어준다. 우주가 인플레이션을 겪는 동안, 시공 구조의 미시적 양자요동이 급격히 확대되어 거대한 규모가 되었을 것이다. 시카고 천체물리학자들이 간결하게 설명한 대로 인플레이션은 〈내부 우주와 외부 우주〉를 연결했다. 내부 우주(inner space)란 양자와 근본적인 힘들의 세계였고, 외부 우주(outer space)란 일반상대성이론이 진가를 발휘하는 장소, 곧 상식적인 의미의 우주였다. 이제 우주론의 새로운 목표는 내부 우주와 외부 우주 간의 연결 단서를 찾아내는 것이었다."(255-6)


"피블스는 은하를 나선형으로 배열된 채 중력으로 서로를 끌어당기면서 회전하는 입자들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가 모형에 회전을 부여하면 어김없이 은하가 해체되었다. 은하 중심의 별 집단이 은하의 팔들로 분산되고 결국 은하 전체가 흩어졌다. 오스트리커와 피블스는 회전하는 입자들을 보이지 않는 질량으로 이루어진 공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모형을 안정화하려고 했다. 이 질량 공─이른바 '무리(halo)'─의 중력을 추가하여 은하의 해체를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무리는 어두워서(비가시적이어서) 망원경에 포착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안정적인 모형을 구성하려면 역설적이게도 이 어두운 물질, 곧 암흑물질이 별들을 이루는 물질보다 훨씬 더 많아야 했다." "1982년, 새로운 우주 모형을 구성하기 시작하면서 피블스는 원자들과 더불어 암흑물질을 모형에 집어넣기로 결정했다. 정확히 말해서 그는 우주가 거의 온통 정체불명의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전제했다."(258)


"여러 가지 기본적인 관찰 데이터와 상충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자와 물리학자 대다수가 차가운 암흑물질 모형을 받아들였다. 그 모형은 개념적으로 단순한 데다가 인플레이션 모형과 잘 어울리고 은하들에 암흑물질이 있다는 증거에도 부합했다. CDM(Cold Dark Matter, 차가운 암흑 물질) 모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 모형을 더 발전시키고 어떻게든 수정하는 방법들을 모색했다." "그러나 차가운 암흑물질 모형이 가진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모든 시도에서 가능한 해결책의 하나로 번번이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가 튀어나왔다." "우주의 조성, 나이, 기하학, 기본 요소들은 여러 해, 심지어 몇십 년 동안 불확실했다. 다양한 제안들이 예외 없이 찬반양론에 부딪혔고, 우주론에서는 과학 못지않게 미학이 중요했다. 우주론 연구자들은 각자 취향에 따라서 마음에 드는 이론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이론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우주상수이론이 승자가 된 것이었다."(260-7)


12 시공의 끝


"물리적 정보가 항상 보존된다는 것은 양자물리학 법칙들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러나 블랙홀들이 존재한다면, 블랙홀들은 복사를 방출하고 증발할 텐데, 이는 우주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원인과 결과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 곧 뉴턴의 물리학과 아인슈타인의 물리학과 양자물리학의 기본 전제를 폐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호킹의 강연은 동료 물리학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많은 이들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무턱대고 거부했다. 만일 정보가 사라진다면, 예측력을 가진 과학으로서 물리학은 미래가 없었다. 물리학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블랙홀이 기존의 생각보다 훨씬 더 풍부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즉, 블랙홀이 새로운 유형의 미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정보를 저장할 수 있고 수명을 마칠 때 그 정보를 다시 외부세계로 방출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 증명은 오직 양자중력이론에서만 나올 수 있었다."(274-5)


"끈이론(string theory)은 1960년대 후반에, 말하자면 가내공업 수준으로 출발하여 입자가속기 실험들에서 출현하던 이색적인 새 입자들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기본 아이디어는 점과 같은 대상으로 여겨진 그 입자들을 출렁거리는 끈으로 간주하면 더 잘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끈이론에 따르면, 입자들의 질량 차이는 공간에 떠다니는 미세한 끈이 진동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이 접근법의 특별한 장점은 단 하나의 끈으로 모든 입자들을 기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끈이 더 많이 출렁거릴수록, 끈의 에너지가 높아지고 끈에 대응하는 입자의 질량이 증가한다. 이것도 일종의 통일이기는 했지만, 기존에 제안된 어떤 통일과도 전혀 달랐다. 근본적인 끈의 개념은 매혹적이지만 처음부터 결함이 있었다. 끈이론을 이용하여 물리적 예측을 시도할 때마다 무한대 값들이 튀어나왔고, 그 값들을 양자전기역학이나 표준 모형에서처럼 재규격화할 수 없었다."(277-8)


"1984년,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머리 겔만의 보호를 받던 끈이론가 존 슈워츠가 런던에서 온 젊은 영국인 물리학자 마이클 그린과 팀을 꾸렸다. 두 사람은 끈이론이 실은 양자중력이론으로서 더 유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이들은 양자중력이론이 몇몇 조건들을 충족하고 몇몇 대칭성들을 가진다면, 10차원 우주를 기술하는 끈이론이 양자중력이론을 포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세기 막바지에 이르러 끈이론의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고 환호도 뜨거웠지만, 끈이론의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고 할 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가용한 끈이론의 버전이 너무 많은 듯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설령 한 버전을 고수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세계와 대응할 가능성이 있는 해들이 어마어마하게─각각의 버전에 10^500개씩─ 많았다. 끈이론가들은 이 무수히 많은 가능한 우주들을 통틀어 '풍경(landscape)'이라고 불렀다. 요컨대 끈이론은 여전히 특정 사안에 대해서 유일한 예측을 내놓을 수 없었다."(278-80)


"스티븐 호킹이 블랙홀 정보 역설을 제안한 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합의된 앙자중력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중력이론을 추구하는 두 진영의 반목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기반이 존재한다. 근본적으로 새롭고 거의 공유된, 시공의 본성에 대한 견해가 등장하는 중이다. 끈이론부터 고리 양자중력이론, 더 나아가서 일반상대성이론을 양자화하려는 기타 모든 틈새의 시도들까지, 거의 모든 접근법들은 시공을 진정으로 근본적인 대상으로 보는 견해를 포기한다. 이 통찰은 호킹의 블랙홀 복사 발견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으며 블랙홀에서 정보가 소멸하고 물리학의 예측 가능성이 종말을 맺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 "만일 블랙홀의 표면에 정말로 정보가 깃들어 있다면, 그 정보는 블랙홀 복사(호킹 복사)에 실려 점차 외부로 방출될 수 있다. 따라서 결국 완전히 증발할 때까지 블랙홀은 애초에 삼킨 정보를 모두 방출할 것이며, 정보의 소멸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287-9)


13 화려한 추정


"1965년부터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우주론과 중력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대세와 상관없이 나름의 속도로 연구했다." "짧고 명쾌한 한 논문에서 사하로프는 시공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환상에 불과하며 실재의 복잡한 양자적 본성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시공을 보고 시공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는 것은 물, 결정(結晶), 기타 복잡한 시스템을 보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당신이 본다고 생각하는 바는 실은 더 근본적인 실재를 대충 그린 그림일 뿐이다. 물의 모습은 물 분자들의 양자적 속성들과 물 분자들이 서로 느슨하게 결합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이 속성들과 결합 방식 때문에 물은 투명한 액체로서 출렁거리며 물답게 행동한다. 물론 세부사항은 다르지만, 사하로프의 전반적인 견해는 오늘날 우리가 시공을 보는 방식을 선취했다. 양자중력이론이 40여 년 동안 발전하여 도달한 지점을 사하로프는 이미 그때 내다보고 있었던 셈이다."(297)


"사하로프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연구했고, 물의 점성이나 결정의 탄성이 근본적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시공의 기하학이 실은 근본적이지 않다고 추측했다. 점성이나 탄성은 실재에 관한 더 기초적인 기술(記述)에서 창발(創發)하는 속성들이다. 마찬가지로 중력은 물질의 양자적 본성에서 창발한다. 사하로프의 짧은 세 쪽짜리 논문의 놀라운 결론은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들이 그런 전제에서 자연스럽게 창발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양자세계가 시공의 기하학을 자연스럽게 유발한다는 것이다. 사하로프의 중력유발이론(induced theory of gravity)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어느 정도 유사했지만, 알고 보면 더 복잡한 방정식들로 이어졌다."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사하로프의 이론 사이의 차이는 블랙홀 근처나 모든 것이 뜨겁고 조밀했던 최초의 우주에서 시공이 심하게 휠 때, 또는 휠러의 양자 거품더미가 중요해지는 미시 규모에서만 드러날 것이었다."(297-8)


14 엄청난 일이 곧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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