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프리미엄 - 한국에서 대학교육의 노동시장 가치는 하락했는가? 한국학 총서 한국의 교육과 사회이동 3
김창환.변수용 지음 / 박영스토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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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교육과 노동시장의 관계는 왜 중요한가?


"잘 알려져 있듯 지난 반 세기 동안 한국 교육은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해방 이후 한국의 교육 수준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1960년에는 25~64세의 핵심노동인구 중 1.2%만이 4년제 대학 학위를 소지했지만, 2015년에는 그 비율이 31.2%로 무려 25배 증가하였다. 남성은 2.3%에서 35.1%로 15배 증가하였고, 여성은 0.3%에서 27.4%로 90배가 넘게 증가하였다. 2년제 대학까지 포함하면 2015년 기준 대학 학위를 소지한 노동인구의 비율이 거의 절반(47.2%)에 달한다. 2020년에 실시된 인구총조사에서는 대학 학위 소지자의 비율이 전체 노동인구의 과반수를 넘어갈 것이 확실하다. 25~34세의 청년층으로 한정해도 한국의 교육팽창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대학 학위자의 비율이 1960년의 2.4%에서 2015년에는 48%로 20배 이상 증가하였다. 2년제 대학까지 포함하면 대학 학위를 취득한 청년층의 비중은 2015년 기준 77%에 이른다."(9-10)


"이러한 급속한 교육팽창은 교육, 더 구체적으로는 대학 학위의 상대적 가치를 떨어뜨렸는가?" "교육은 그 자체로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는 지위재(positional goods)이기도 하다. 지위재로서의 대학 교육의 가치는 낮아졌다. 학력 수준 측면에서 1960년에는 대학 교육을 받으면 상위 2.3%의 엘리트에 속했고, 1985년까지 상위 12.5%의 상층에 속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대학 교육이 엘리트 교육의 상징이 아니다. 94%의 핵심노동인구가 고졸 미만인 1960년대에는 고등학교는 그야말로 고등(High) 교육을 의미했다. 하지만 전체 노동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고등학교 교육을 받은 1980년대 이후 고등학교는 더 이상 고등교육을 의미하지 않게 되었다.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고등(High) 교육을 넘어 더 높은 교육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최고등 교육(higher education)〉이라고 칭해진 대학 교육은 21세기 들어 더는 엘리트 교육이 아니게 되었다. 대학 교육은 대중 교육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였다."(10-1)


"하지만 지위재로서의 대학 학위의 가치 하락이 교육이 노동시장 성취에 끼치는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교육의 팽창은 경제 성장과 직업 구조의 고도화를 수반한다. 직업 구도의 고도화는 대졸자가 선호하는 직업의 확장이다. 직업 구조의 고도화가 대졸자의 증가와 같은 속도로 이루어진다면 직업 지위의 획득에서 대학 학위의 가치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만약 직업 구조 고도화의 상대적 속도가 대졸자의 공급 확대보다 빠르다면, 지위재로서의 대학 학위의 가치 하락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의 직업 획득에서 대학 학위의 상대적 가치는 오히려 증가한다. 반대로 직업 구조 고도화의 상대적 속도가 대졸자의 공급 확대보다 느리다면, 대학 학위의 상대적 가치는 하락하고, 대졸자가 괜찮은 직업을 가질 확률은 하락하게 된다. 대학 학위의 가치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구조적 변화와 대학 졸업자 공급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11-3)


2 교육과 노동시장 관련 이론


# 교육과 노동시장 성과 간의 상관 관계

1. 인적자본론(human capital theory) : 더 많은 교육을 받은 노동자가 더 높은 임금을 받는 이유는 교육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 때문이며, 직장에서 훈련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빨리 습득할 수 있는 학습능력 자체가 교육을 통해 취득된다.

2. 선별 이론(screening theory) : 교육은 능력 있고, 새로운 것을 학습하고,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개인을 선별하여 승인한다. 즉, 교육은그 자체로 개인의 능력을 제고시키지 않지만, 노동시장에서 개인의 능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기능한다.

3. 학벌주의(credentialism) : 학벌주의는 학벌의 재생산이 (생산성과 연관된) '능력'보다는 계층적으로 우위에 선 집단의 문화자본을 재생산하는 기제이고, 이 학벌을 자본주의의 계습 재생산과 불평등 정당화를 위해서 활용한다고 가정한다.


# 소득불평등 증가의 요인

1. 숙련편향 기술변화론 : 정보·통신 등의 기술발전이 숙련편향적(이때의 숙련은 학력과 인지능력, 경험의 노하우 등을 포괄함)으로 이루어져서 숙련노동자의 생산성은 급격히 상승한 데 반해, 비숙련노동자의 생산성은 정체되어 불평등이 증가했다.

2. 수요공급론 : 기술변화가 항상 숙련노동자의 수요를 늘리는 것은 아니다(러다이트 운동). 다만 20세기 전반의 기술발전은 숙련편향적이어서 숙련노동자의 상대적 수요를 증가시켰고, 상대적 공급의 증가가 느렸기 때문에 소득불평등이 증가했다.

3. 지위재로서의 교육 : 교육은 교육받은 사람의 절대적 가치를 높이는 것(=인적자본론)에 그치지 않고, 교육받은 사람의 상대적 가치(=지위)를 변화시키기 때문에, 교육팽창과 더불어 지위재로서의 교육의 가치는 하락한다(선별이론과 밀접한 관련성).

4. 사회적 관계론 : 학력별 노동자의 생산성 변화가 아니라 노동자와 고용주, 노동자 내부에서의 사회적 역학의 변화(노조 협상력 약화, 내부 노동시장 실종 vs 개별 노동자의 소득 결정 관여 정도 확대)로 협상력이 높은 노동자의 소득이 올라간다.


3 교육과 직업: 대학 졸업장의 직업 가치는 줄었는가?


"직업 지위 취득의 대학 교육 가치 변화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의 통시적 변화이다. 통시적 변화를 보여주는 계수값이 양의 값이면,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이 증가한다는 의미이고, 음의 값이면 감소한다는 의미다. 분석 결과 준거집단(=고졸이하)의 값은 -0.0012이다. 이는 고졸, 남성의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이 매년 0.12%씩 감소했다는 뜻이다. 이에 반해 4년제 대학 졸업자의 통시적 변화는 0.002로 양의 수이며 통계적으로 유의하다. 고졸 남성에 비해서 4년제 대졸 남성의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이 매년 0.2%씩 더 커졌다. 고졸자 대비 상대적 변화가 아닌 대졸자의 절대적 변화를 계산하면 연간 0.08%(=-0.0012+0.0020)로 대졸 남성의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이 증가하였다. 매우 작은 차이처럼 보이지만, 이 효과는 장기적으로 누적된다. 이처럼 남성의 경우 직업 취득 면에서 4년제 대학 교육의 상대적 가치가 상승하였다."(61-2)


"여성의 경우는 남성과 다르다. 성, 학력별로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의 10년치 변화를 계산하면, 여성은 4년제 대졸 학위 소유자의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이 10년 평균 2.8%포인트씩 감소하였다. 고졸 여성의 10년 평균 취득 확률 감소폭이 0.1%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여 상당히 큰 폭의 감소이다. 이렇게 감소 폭이 큰 이유는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고학력 여성의 선택편향 효과가 변화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과거에는 직업 위계가 높은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만이 노동시장에 참여했다면, 지금은 더 많은 고학력 여성이 노동시장에 참여하기 때문에, 여성의 노동시장 선택편향이 완화되었다. 달리 말해, 대학의 프리미엄이 낮아진 듯 보이는 이유는, 소수 엘리트만 노동 시장에 참여하다가 다수 대졸자가 노동시장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과거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대졸 여성의 고졸 대비 상대적 우위가 지나치게 압도적이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었다."(62)


"위의 분석은 학력별 관리/전문/사무직 취득 확률의 변화가 선형적이라는 가정하에 장기적 평균적 변화를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고등교육 팽창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학력별 관리/전문/사무직 취득 확률 변화가 선형이 아니라 특정 시기에 집중된 비선형적 변화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를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4년제 대학 졸업 남성을 제외한 모든 그룹에서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이 낮아졌다. 1960~1975년과 비교해서 2005~2015년에 2년제 대학 졸업자의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이 남성은 30.8%에서 18.2%로 낮아졌고, 여성은 61.2%에서 33.5%로 급감하였다. 남녀 모두 40% 이상 폭락하였다. 고졸자의 경우는 남성은 11.5%에서 5.2%로 절반 넘게 떨어졌고, 여성은 22.6%에서 7.0%로 70% 폭락하였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남성만이 예외적으로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이 미약하나마 높아졌다."(64)


"성별로 학력별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의 변화가 다르지만, 대학 학위의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 가치를 따져보면 변화의 방향과 정도에서 성별 격차가 없다. 1960~1975년에 4년제 대학 졸업 남성은 고졸자보다 3.4배 더 관리/전문직에 종사했는데, 2005~2015년에는 그 비율이 7.8배로 늘었다. 여성은 1960~1975년에 4년제 대졸자가 고졸자보다 3.0배 더 관리/전문직에 종사했는데, 2005~2015년에는 그 비율이 7.5배로 늘었다. 비록 여성 대졸자의 관리/전문직 절대적 취득 확률은 낮아졌지만, 4년제 대학 졸업의 고졸 대비 상대적 가치는 남성과 비슷하게 상승하였다. 정리하자면, 4년제 대학 교육의 상대적 가치는 남녀 모두 높아졌고, 절대적 가치는 남성만 높아졌다. 여성의 절대적 가치는 과거보다 낮아졌지만 여전히 남성보다 관리/전문직 취득 확률이 높다(2005~2015년 기준 남성 40.8%, 여성 52.8%). 이에 반해 2년제 대학의 절대적 가치는 남녀 모두 크게 낮아졌다."(64-5)


4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소득 프리미엄은 줄었는가?


"한국은 정보기술 산업이 급속히 발전하였고, 기술발전을 위한 투자(즉 R&D 투자)도 국민총생산 대비 그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이다. 여기에 숙련편향 기술변화의 효과가 가장 크게 나타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국가이면서, 기술변화와 동시에 교육 팽창이 가장 크게 일어난 국가이기도 하다." "출생연도별로 학사 이상 학위 취득 비율을 계산한 박현준의 분석에 따르면 1950년도 출생자 중 남성은 14%, 여성은 5%만이 대학 졸업장을 취득하였는데, 1980년도 출생자는 남성은 42%, 여성은 40%가 대학 졸업장을 취득하였다. 불과 한 세대만에 남성은 대학 졸업자 비율이 3배, 여성은 8배 증가하였다." "따라서 한국은 다른 국가와 비교하여 교육 프리미엄 상승 요인(=급속한 숙련편향 기술 변화)과 하락 요인(=교육 팽창)이 모두 강하게 나타난다. 한국에서 교육 프리미엄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는 필연적인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데이터를 분석해 확인해야 할 경험적 질문이다."(82-4)


"임금구조조사, 가계동향조사, 노동패널 세 가지 자료의 분석 결과를 종합하면 한국에서 교육 프리미엄은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확실히 하락하다가 그 이후에는 전반적으로 큰 변화가 없다. 숙련편항 기술변화 가설에서 예측하듯 교육의 소득 프리미엄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교육팽창 가설에서 예측하든 교육의 소득 프리미엄이 확실히 줄어든 것도 아니다. 한국의 전반적 불평등 변화는 교육 프리미엄의 변동이 아니라 같은 학력 내 내부 불평등의 변화에 의해서 추동되었다. 전체 불평등 중 교육이 설명하는 비중이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유는 교육 수준 간 소득 격차 확대 때문이 아니다. 1990년 이후 대학 교육을 받은 코호트가 대거 핵심노동인구로 진입하여 노동자의 교육 구성이 바뀌어서 교육의 설명력이 늘어난 듯 보일 뿐이다. 각 출생 코호트 내부의 불평등을 보면 교육 프리미엄이 불평등을 설명하는 정도는 줄어들었다."(114-5)


"숙련편향 기술변화 가설의 예측과 달리 한국의 교육 프리미엄이 1980년대 이후 크게 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이후 교육 수준별 소득 격차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급격한 불평등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학력 간 불평등이 그만큼 증가하지도 않았다. 가계동향조사를 이용한 분석에서는 학력 간 격차가 오히려 줄어들었다. 교육 프리미엄의 증가가 불평등 증가의 한 요인이 되었던 미국 등과 달리 한국의 불평등 증가를 교육 수준 간 격차의 확대로 설명할 수 없다. 한국의 사례는 기술변화가 필연적으로 불평등 상승을 초래한다는 기술결정론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있다. 기술변화는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경험한다. 반도체, 휴대폰, 전자기술 개발과 공급에서 한국은 전 세계의 선도 국가이다. 전자기술혁명의 최첨단에 서 있는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숙련편향 기술발전의 가장 중요한 지표인 교육 프리미엄의 증가 경향이 나타나지 않았다."(115)


"여기에 더해, 교육 프리미엄 변화가 남녀별로 차이를 보이는 현상도 주목할 점이다. 남성 노동자는 동일 학력 내의 불평등이 1990년대 중반 이후 증가하였지만 여성 노동자는 그러한 변화가 관찰되지 않는다. 숙련편향 기술발전 가설이 맞다면 성별로 교육 간 소득 불평등의 방향이 같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남성 노동자는 교육 간 소득 불평등이 줄어들고 교육 내 소득 불평등이 증가한 데 반해, 여성 노동자는 교육 간 소득 불평등은 줄어들고, 교육 내 소득 불평등은 큰 변화가 없었다. 남성 노동자의 경우 교육이 전반적 소득을 결정하는 정도가 시간이 가면서 줄어들었다. 교육 프리미엄은 줄지 않았지만 교육의 소득 결정력은 줄어들었다는 것은, 정규직, 비정규직 여부 등 고용형태나 기업규모, 노동시간, 임금협상 등 노동시장 내부 요인의 결정력이 교육 프리미엄보다 상대적으로 커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115-6)


5 세대 불평등과 교육 프리미엄: 교육을 더 많이 받은 청년층의 노동시장 성과는 왜 다른 세대보다 낮은가?


"청년층 고용 악화는 청년층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다. 한국은 다른 어느 사회보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사회 복지의 필요성은 커진다. 한국 사회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복지 체제의 확립이 늦어졌다. 복지의 필요성은 커지는데, 세대 간 불평등의 확대는 젊은 세대의 복지 체제에 대한 저항감을 키운다. 일부에서는 복지 혜택을 젊을 때 적립한 금액에 운영수익을 더해서 나이들어 돌려받는 "적립식"을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복지는 당시 노동 세대가 낸 보험료로 당시 노인 세대가 지급받는 "부과식"으로 운영된다. 노동하는 세대가 현재 고연령층의 복지 비용을 대면, 나이들어 다음 세대로부터 복지 혜택을 받는다. 따라서 사회복지는 세대 간 타협의 산물이다. 세대 간 불평등의 심화는 한국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복지 체제로의 전환을 막고, 고령화의 부정적 효과를 상쇄시키기 위한 정책적 선택을 제한한다."(121-2)


# 세대 간 불평등을 설명하는 이론

1. 세대 갈등론(착취론) : 기성 세대가 기득권을 형성하여 청년층의 노동시장 진입에 장벽을 설치하고 노동시장의 경쟁을 낮춘다는 논리. 사회적 봉쇄가 야기하는 경력 초기의 불이익이 이후에도 더 큰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마태효과가 작용하여 누적적 불이익을 경험하게 된다.

2. 지체 진입론 : 청년층이 생애사적으로 첫 일자리와 평생소득의 상관관계를 감안하여 괜찮은 일자리를 얻기 전까지 노동시장 진입을 미룬다는 논리. 경쟁을 통한 일자리 선별이 완성되는 30대 이후에는 노동시장 진입이 완료되어 소득수준과 소득증가율이 과거와 다름없게 된다.


"20대와 30대 초반의 고용률과 소득의 변화를 코호트별─1971-75년생, 1976-80년생, 1981-85년생의 25-29세와 30-34세 구간─로 추적한 결과 한국의 20대 청년층 고용악화는 교육의 효용극대화를 위한 노동시장 진입을 미루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소득의 측면에서 신규 세대의 교육 효과가 이전 세대보다 낮아지지 않았다. 대신 교육팽창으로 인한 경쟁 격화로 20대 청년층의 고용률이 낮아지고, 노동시장 성취가 약화되었다. 더 이상 노동시장 진입을 미룰 수 없는 30대가 되면, 고용률이 추세적으로 상승한다. 이전 세대와 달리 최근 코호트가 노동시장 진입을 미룰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20대 청년층이 속한 가구의 소득 상승이다. 한국은 혼인 전까지 성인도 독립 가구를 형성하지 않는 비율이 미국이나 다른 선진국보다 높다. 이러한 문화가 20대 청년층의 노동시장 진입을 지체할 수 있는 자원을 제공하는 측면이 있다."(148-9)


"일부에서는 80년대생까지는 교육의 효과가 줄어들지 않았지만 90년대생은 다를 수 있다고 의심할 것이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90년대생에서 교육의 효과가 실제로 줄어들었는지, 90년대생의 계층지위 획득 기제가 이전 세대와 다른지는 90년대 중반생이 30대가 되어야 알 수 있다." "청년층의 일자리 문제는 최근 세대에서 교육의 효과가 이전 세대보다 낮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교육의 개인적 효과(=긍정적 교육 프리미엄)와 집단적 효과(=경쟁 격화) 간의 충돌 때문에 발생한다. 한국에서 청년층 노동시장 문제 해결은 노동시장 고도화를 통한 관리/전문/사무직 일자리의 구조적 확대를 통해서 가능하며, 그 외에 단기적 해결은 불가능하다. 청년몰 등 청년층의 창업을 통한 일자리 해결 방식은 지방자치체의 홍보를 위한 이벤트성 행사로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산업 구조 고도화를 통한 관리/전문직의 수요 창출이 가장 확실한 청년 대책이다."(149-50)


6 교육 프리미엄의 국가 간 비교


"6장에서는 PIAAC 자료를 사용하여 한국, 미국, 일본 성인의 소득과 직업에서의 교육 프리미엄에 있어서 세대 내 차이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한국 남성의 소득에서의 교육 프리미엄은 55-65세 연령대를 제외하고 미국보다 낮았지만 일본보다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에서의 교육 프리미엄의 경우 25-34세 남성을 제외하고 성별과 연령과는 상관없이 한국이 가장 높았다. 다시 말해, 한국은 25-34세 남성을 제외하고 고졸 학력 대비 4년제 대졸 이상 학력의 관리직/전문직 비율이 미국과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 사회에서 직업에서의 교육 프리미엄이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높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직업에서의 교육 프리미엄이 감소하지 않았다는 증거와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 직업 위세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168-70)


# PIAAC : OECD 회원국 16-65세의 성인을 표본으로 삼아, 언어능력, 수리력뿐 아니라 경제활동, 임금, 교육훈련 경험 등 다양한 영역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대규모 조사


7 결론: 여전한 교육 프리미엄 - 교육 개혁으로 노동시장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가?


"본문의 결과를 종합하면 한국 노동시장에서 교육, 특히 대학 교육의 가치가 지속적으로 하락했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다. 급속한 교육팽창에도 불구하고 대학 교육의 가치는 21세기에도 유지되었다. 오히려 미약하나마 증가하였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핵심적인 결론 중 하나는 〈가족배경-교육-사회경제적 지위 성취〉 경로 모형에서 가족배경(Origin)이 사회경제적 지위(Destination)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O→D 세습이 강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간접적으로 교육을 통해 계급을 재생산하는 O→E→D의 경로에서 첫 번째 단계인 O→E의 연결 강도가 강화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이에 반해 교육을 받은 후의 노동시장 성취인 E→D의 경로는 과거와 다름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한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고, 계급사다리가 무너져, 금수저─흙수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현실과 다른 인식이 널리 퍼졌을까?"(182-3)


"1960년대 10대였다가 학사 학위를 취득한 거의 모든 대졸자가 부모보다 학력이 상대적으로 상승하였다. 아마도 자신을 개천용으로 여길 것이다. 부모의 학력과 사회경제적 배경이 자신의 학업 성취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2015년에 40대는 절반 정도가 대학 교육을 받았다. 그 자녀들이 대학 교육을 받아도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자녀의 학업 성취에 끼치는 영향이 커졌기 때문이 아니다. 눈부신 고도성장과 빠른 교육팽창을 경험한 한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계층 구조의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였다. 사회의 구조적 변화로 현 시점에서의 사회구조는 과거와 크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회이동에 대한 집단의 기억은 과거의 사회구조를 분모로 하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바뀐 것은 개천에서 용이 나올 확률이 아니라 개천의 양이다. 이제는 개천이 커다랗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강으로 변하였다."(184)


"노동시장에 끼치는 교육 효과가 줄어들었다는 인식도 대졸자의 증가로 비교집단이 변화한 결과이다. 1960년대 25-34세 청년층은 4%만이 대학 교육을 받았기에 96%의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또래집단과 자신을 비교한다. 사회적 네트워크가 좁고 고립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대졸자가 고졸이나 그 미만 노동자와 자신을 비교할 수밖에 없다. 친구와 친척 중에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또래집단이 많았다. 하지만 2015년 기준으로 25-34세 청년층은 77%가 대학 교육을 받았다. 4년제 대졸자만 48%에 이른다. 비교집단이 대학 교육을 받는 또래 집단이 되고, 경험적으로 모든 격차가 대졸자 내부의 격차로 해석되기 쉽다. 절대 다수가 대학 교육을 받았기에 대졸자와 대졸 미만 노동자 간의 상호작용은 크게 줄었을 것이다. 대학 교육의 절대적 보상이 줄어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학 교육의 상대적 보상은 심리적으로 줄어들었다고 느끼게 된다."(184-5)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교육은 더 많은 개인적 혜택과 사회적 이점이 있다. 미래의 노동시장에서 교육의 중요성이 축소될 가능성은 낮다. 더 많은 교육이 계층 격차를 반드시 줄이는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교육을 제공할 때 소득 하위계층도 교육의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적어도 더 많은 교육이 노동시장에서의 계층 격차를 키우지는 않는다. 교육은 가족배경이 개인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는 O→D(Origin→Destination) 연계를 축소시키고,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사회경제적 지위가 결정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대학의 팽창과 함께 위대한 평등의 촉진자(The Great Equalizer)로서의 대학의 기능이 과거보다 약화되었는가에 대한 논쟁이 진행 중이지만,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계층에서 보다는 대학 교육을 받은 계층에서 가족 배경의 영향이 작은 것은 확실하다. 교육은 다다익선이다."(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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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용.이성균 지음 / 박영스토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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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한국사회는 최소한 초·중등학교에서 교육받을 기회와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형식적으로 동등하게 제공하고 있다. 또한 사회경제적 지위형성의 시각에서 보면, 현대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출신배경에 상관없는 기회 평등의 출발점이며, 동시에 본인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서 보상받는 사회계층 이동의 수단이다." "그러나 한국사회 교육성취의 격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관점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교육팽창과 교육기회 확대'라는 첫 번째 관점이 역사적 혹은 세대 간 비교의 시각을 반영한다면, '교육기회 및 성취의 불평등'이라는 두 번째 관점은 세대 내 혹은 동일 연령층 내부의 비교 관점에 따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교육기회 및 성취의 특징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부모세대와 자녀세대의 교육기회 및 성취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파악하고 '부모세대 요인이 자녀세대의 교육성취에 미치는 효과'를 동시에 분석해야 한다."(4-7)


2 한국사회의 교육기회 확대


"한국사회에서 교육기회 확대를 낳은 일차적 요인은 국가주도형 교육제도이다. 1953년에 도입된 정부의 의무교육제도는 초등 교육기회의 확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1970년대 실시된 중·고등학교 입시제도 변화는 중등교육의 보편화를 낳았다. 또한 1980년대의 대학졸업정원제도와 1990년대 후반기의 대학설립준칙주의는 고등교육기회를 더욱 확대하였다." "이처럼 해방 후 교육기회는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의 순서로 확대되었다. 1960년대 후반기부터 중학생 규모가 급속히 증가하였고, 이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던 1970녀대 초반부터 1990녀대 초반까지 고등학교 학생 규모가 증가하였다. 또한 1970년대 전반기에 일정 규모에 불과하였던 대학생 규모는 산업화 정책에 따른 인력수요가 높았던 1970년대 후반기부터 점차 증가하였으며, 대학졸업정원제가 실시되었던 1980년대 초반에는 좀 더 가파르게 증가하였다."(21-3)


"한국의 의무교육제도 혹은 입시제도 등이 교육기회를 확대하는 제도적 요인이라면, 공공교육예산은 제도화된 교육기회를 실현하는 재정적 요인이다." "교육재정 확대는 무상교육을 통한 교육기회의 확대를 낳았다. 1959년부터 공립 초등학교의 수업료 등을 국가가 부담하고 이후 농어촌 지역부터 전국의 모든 중학교에서 무상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많은 국민들은 과거보다 적은 부담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아울러 정부는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대학의 교육비와 각종 연구개발비용을 지원해 왔으나, 정부의 교육예산에서 고등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10%에도 못미쳤으며, 2012년에도 그 비중은 14%에 불과하였다." "한국의 공공 교육재정은 초·중등교육 팽창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나, 고등교육의 질적 개선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고등교육이 대중화 됨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이러한 교육기회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23-7)


"다만 고등교육 대중화는 고학력층 부모보다는 저학력층 부모를 둔 가정의 자녀들에게 좀 더 명확히 나타난다. 부모가 대학졸업 이상의 학력집단인 경우에 자녀가 대학졸업자인 사례는 1951~1965년 집단이나 1981~1990년 집단에서 비슷한 수준(68%)이지만, 부모가 중졸 이하의 저학력집단인 경우에 자녀의 대학졸업자 비중은 전자의 연령 집단(10.6%)보다 후자의 연령 집단(24.8%)에서 2배 정도 높다." "결국 한국사회에서 자녀세대는 부모세대보다 더 높은 수준의 학력집단으로 성장하였고 특히 과거에는 고등교육을 경험하기 어려웠던 저소득층 가정 자녀들의 대학교육 경험도 부모세대보다 더 많아졌다. 그러나 (전 국민의 고학력화에도 불구하고) 동일 연령집단 내에서 부모 학력에 따른 자녀의 학력 격차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자녀의 학력은 부모 학력으로 표현되는 가정배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34-6)


3 아버지 학력이 자녀의 교육성취에 미치는 영향 변화: 1950~1982


"3장에서 수행한 연구 결과 교육(학력)을 절대적 가치로 보느냐 상대적 가치로 보느냐에 따라 아버지 학력이 자녀의 학력에 미치는 영향을 다소 다른 추이를 보였다. 절대적 가치 층면에서는 남성의 경우 아버지 학력이 자녀 학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은 최근으로 올수록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여성의 경우도 아버지 학력이 자녀 학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 영향력의 크기는 1960년 이후로 뚜렷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상대적 가치 측면에서도 남녀 모두 아버지 학력이 자녀 학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 영향의 크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적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식의 일관된 추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3장은 1982년 이후 출생 코호트에 대한 분석은 포함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연구결과 해석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55)


"최성수·이수빈(2018)은 대졸 학력을 2년제 대졸, 4년제 대졸, 상위권 대학 졸업 여부 등으로 구분하여 교육 불평등 양상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2년제 대졸을 포함한 대졸 확률에 있어 부모 학력에 따른 격차는 1960년대 코호트에서 최대로 벌어지고 이후에 빠르게 감소하였다. 4년제 대졸 확률에 있어 부모 학력에 따른 격차는 1970년도 출생 코호트까지 증가하였다. 1980년도 출생자들에게서는 정체 또는 감소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상위권 대학 졸업 확률에 있어 부모 학력에 따른 격차는 1950~60년도 출생자들에 비해 이후 출생 코호트에서 완만하지만 의미 있게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의 결과는 한국사회의 교육 불평등이 최근에 올수록 고졸 여부에서 전문대졸 이상으로, 다시 4년제 대졸 여부로, 그리고 상위권 대졸 여부로 점차 이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한국 사회의 교육 불평등이 양적 차원에서 질적 차원으로 변화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56)


4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학업성취에 미치는 영향 변화: 2000~2018


"아버지 학력과 자녀 학력 간의 연관성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추이만으로 한국사회에서 교육 불평등이 심화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는 1장에서 살펴본 EMI 가설처럼 양적 차원에서 상급학교 진학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상위계층들은 교육의 질적 차별화를 통해 여전히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에는 고등학교 교육이 보편화되어 사회 계층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학생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있지만,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자녀들은 특목고와 같은 이른바 '엘리트 학교'로의 진학을 통해 대학 진학에 있어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실제로 특목고에 진학한 학생들의 경우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다른 유형의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의 경우에 비해 월등히 높으며, 또한 외고와 같은 특목고 졸업자는 일반고 졸업자에 비해 위세가 높은 대학으로 진학할 가능성이 크다."(59-61)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자녀의 학업성취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고려할 때, 2000년과 2018년 사이 계층 간 학업성취 격차 심화 현상은 결국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더 잘하게 되었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더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한국 학생들의 읽기점수 누적 분포의 90 백분위수에 해당하는 학생들의 점수는 2000년 607점이었으나, 2018년에는 639점으로 32점이 높아졌다. 이와는 반대로, 읽기점수 누적 분포의 10 백분위수에 해당하는 학생들의 점수는 2000년 428점이었으나, 2018년에는 379점으로 무려 50점이나 하락하였다. 결국 한국 학생들의 평균 PISA 읽기점수는 2000년에서 2006년까지 상승 곡선을 그렸으나 이후 계속 하락 곡선을 그리게 되는데, 가난한 계층의 학생들과 학업성취가 낮은 학생들의 읽기 점수가 크게 하락하면서 전체 평균을 낮추는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73)


# 질적 측면에서의 교육 불평등 심화 요인

1. 사회경제적 차원 : 1997년 외환 위기로 촉발된 소득 양극화로 가정의 교육투자 수준 격차 확대

2. 인구학적 차원 : 한부모 가정 증가, 출산율 감소, 다문화 가정의 증가로 가정 배경의 차이 심화

3. 교육제도 차원 : 고교평준화정책(1974) 같은 교육평등 정책이 무너지면서 계층 간 격차 확대


5 한국사회 교육 불평등의 기제


"미국의 사회학자 콜먼과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비슷한 시기에 개인 간 혹은 가족 구성원 간의 사회적 연대가 가져다주는 여러 이점들을 강조함으로써 사회자본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이 둘은 사회이동(social mobility)에 있어 사회자본의 역할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 콜먼은 비록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다 하더라도 자녀와의 강한 연대와 결속을 통해 부모가 자녀의 교육결과에 긍정적이고 독립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자본이 사회이동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부르디외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을수록 구조적으로 자녀와 결속을 다지기 어렵기 때문에 사회자본은 사회이동보다는 계급재생산의 기제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자본이 사회이동의 기제로 작동하는지, 교육 불평등(계급재생산)의 기제로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다."(85-6)


"문화자본은 부르디외의 문화재생산이론의 핵심 개념으로 서구사회에서의 계급재생산 현상을 설명하는 데 매우 유용한 이론이다. 문화재생산이론에 따르면, 세대 간 문화자본의 전수를 통해 계급재생산이 이루어지고, 학교는 이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학교는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자녀들에게 대물림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공간이다. 즉, 학교는 가치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특정한 언어적, 문화적 형식을 선호하는데 특히 지배계급의 문화를 반영한다. 지배계급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지배문화에 자연스럽게 노출됨으로써 학교문화에 친숙한 언어적, 문화적 성향을 입학 전부터 문화자본의 형태로 습득하게 된다. 반대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학교에서 요구하는 언어적, 문화적 성향에 친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문화자본의 불평등한 계급 간 분배는 교육 불평등을 초래하고, 이는 다시 사회 불평등으로 이어지게 된다."(87)


"한편, 사교육과 관련한 거의 모든 연구들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사교육 수요를 결정하는 핵심요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자녀가 사교육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더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부모들은 사교육 관련 정보 수집에 더욱 적극적이다. 때문에 이러한 계층 간 사교육 기회 격차가 교육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우려가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하게 확산되어 있다. 그러나 사교육 참여가 학생들의 시험 성적이나 대학 진학과 같은 교육성취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는 일관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교육결과에 대한 사교육의 효과를 검증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사교육에 참여하는 학생들과 사교육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들 간에 가정배경을 포함한 학업성취, 동기 등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94)


#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국어 학업성취에 미치는 영향 : 사회자본 〉 문화자본 〉 사교육


6 국제 비교 관점에서 본 한국사회의 교육 불평등


"2000~2018 PISA 자료를 분석한 결과, 미국과 일본의 경우 지난 20여 년간 계층 간 학업성취 격차가 전반적으로 감소하였다. 특히 미국의 경우,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지난 20여 년간 빈곤층과 상위층 자녀의 학업성취 격차가 크게 줄어들었다." "우리는 여러 요인 가운데 각 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서로 다른 교육개혁 전략에 주목하였다. 특히 미국의 경우 계층 간 학업성취 격차가 감소하고 있는 것은 지난 20여 년 간 학교 간 및 학교 내의 교육 격차를 줄이기 위해 추진해 온 정책적 노력의 결과일 수 있다. 반면, 4장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한국사회에서 계층 간 학업성취 격차가 증가하고 있는 것은, 같은 기간 형평성에 초점을 둔 교육정책에서 탈피하여 학교 선택권 확대, 교육과정의 차별화 등 수월성에 초점을 둔 교육정책을 추진해 온 결과일 수 있다. 요컨대, 교육정책의 방향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국가 내 학업성취 측면에서의 불평등은 완화 혹은 심화될 수 있다."(119-20)


7 결론: 한국사회, 교육 불평등은 심화되었는가?


"이 책에서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자녀의 교육 결과와의 연관성이 어떻게 변화 왔는지 분석하였다. 이때 자녀의 교육 결과는 교육성취(educational attaintment)와 학업성취(academic achievement) 측면을 나누어 고려하였다. 교육성취는 고졸이나 4년제 대졸과 같이 개인이 획득한 교육 수준, 즉 최종학력으로 측정될 수 있으며, 학업성취는 수능과 같은 표준화된 시험 점수나 학교 내신 성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 교육성취에 있어서 불평등은 상급학교 진학에서의 계층 간 교육기회 격차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수직적(vertical) 또는 양적(quantitative) 측면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반면, 학업성취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은 같은 학교급 내에서의 계층 간 학업성취 격차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수평적(horizontal) 또는 질적(qualitative) 측면의 교육 불평등을 의미한다." "그 결과 한국사회의 교육 불평등은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에서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7-8)


"한국사회에서 양적 측면에서의 교육 불평등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모두 존재하지만, 과거에서 현재로 올수록 심화되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교육 기회가 팽창하게 되면서 계층 간 교육 불평등은 상급학교 진학 여부보다 동일한 학교급 내에서의 차별적 교육 기회 향유라는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한국사회의 차별적 교육 기회는 고등학교 진학 단계에서는 특목고, 자사고, 일반고, 특성화고를 중심으로, 대학 진학 단계에서는 2년제와 4년제 대학을 중심으로, 그리고 4년제 대학 중에서도 세칭 SKY 대학, 인서울 대학, 지방 대학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학부모들 사이에서 '영어유치원─사립초─국제중─특목고─명문대' 혹은 '영어유치원─영재교육원─영재·과학고─명문대'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한국사회의 엘리트 코스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질적 차원의 교육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128-9)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질적 차원의 교육 불평등이 증가한 이유는 4장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사회경제적 차원, 인구학적 차원, 교육제도 차원의 요인들을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미래 한국사회의 교육 불평등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속단하기에는 이르지만 이 책의 결론을 토대로 예측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학교 선택권 확대, 교육과정의 차별화 등 교육의 수월성에 초점을 둔 교육정책 기조가 계속 이어질 경우 미래 한국사회에서 질적 차원에서의 교육 불평등은 낮은 학교급으로 이동하여 더욱 심화될 것이다. 반대로, 공통 교육과정의 강화, 공립학교 교사 순환제 등 학교 간 교육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책적 노력이 계속된다면 미래 한국사회에서 교육 불평등의 양상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교육 제도나 정책의 변화 만으로 교육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교육 제도와 정책에서 미래 한국사회의 교육 불평등의 해결책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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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 사회이동의 변화 - 한국사회 얼마나 개방적으로 변화하였는가? 한국학 총서 한국의 교육과 사회이동 1
박현준 지음 / 박영스토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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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총서 서문


# OED 연구 모형

1. 부모 계급(Origin)과 자녀 계급(Destination)의 연관성

2. 부모 계급(Origin)이 자녀 교육(Education)에 미치는 효과

3. 자녀 교육(Education)이 자녀 계급(Destination)에 미치는 효과


1 서론


"부모의 계급·계층이 자식의 계급·계층 지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탐구하는 세대 간 사회이동에는 절대적 이동과 상대적 이동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절대적 이동은 특정한 계급·계층에 속했던 부모를 둔 자식 세대가 어떻게 다른 계급·계층으로 이동했는지를 말할 때 잘 적용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지난 몇 십 년 동안 일어난 사회 변화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급속하게 줄어든 것이다. 대신에 대학 교육의 팽창과 함께 전문·관리직 비중이 노동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증가했다. 따라서 부모가 농민이었던 많은 자녀들이 더 이상 농민으로 머물지 않고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으로 상승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스토리텔링도 이런 농민에서 전문·관리직으로 세대 간 사회이동을 이룬 경험들을 반영한 것인데 이는 부모 세대 농민 계급·계층으로부터 자식 세대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으로의 (상승)이동을 가리킨다."(9)


"반면에 상대적 이동을 살필 때는 부모가 농민이었던 자녀들이 농민으로 남지 않고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으로 (상승)이동한 경우를 부모가 원래부터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에 속했던 자녀들이 농민 계급으로 '떨어지지' 않고 (즉, 하강 이동하지 않고)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에 남게 되는 (즉, 세습하게 되는) 경우를 비교한다. 부모가 농민 계급·계층에 속했던 자녀들이 자신들 역시 농민으로 남지 않고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으로 상승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 경우 분명 절대적 이동이 늘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부모가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에 속했던 자식들이 농민으로 하강 이동하지 않고 자신들 역시 전문·관리직으로 남는 경우가 (즉, 세대 간 대물림, 혹은 세습 정도가) 마찬가지로 증가하면 결국 전문·관리직 계급·계층에 도달하게 되는 데 있어서 부모 계급의 영향력은 달라지지 않는다. 즉, 상대적 이동은 변하지 않게 된다."(9-10)


2 사회이동의 개념적·이론적 논의


"결과의 불평등과 기회의 불평등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회 구성원들이 인식하는 결과의 불평등 문제가 기회의 불평등 정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소득 분포 상위 10%에 속할 가능성이 부모의 지위나 재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즉,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상위 10%에 속할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면,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더라도 그러한 상위 10%의 소득 집중도가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부모와 자식 세대 간의 소득 상관성을 분석한 미국의 경제학자들이 사용한 비유를 들자면, 소득 불평등이 증가함에 따라 계층 사다리의 제일 높은 발판과 제일 낮은 발판 사이의 간격이 늘었다고 해도 사다리의 제일 낮은 발판에서 제일 높은 발판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면, 결과의 불평등은 그런 공정한 기회를 기반으로 한 경쟁의 '당연한' 혹은 '필연적'인 결과로 인식될 수 있다."(26-7)


"사회 계층론(social stratification)이라는 사회학의 한 분야는 오랫동안 기회의 불평등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측정할지, 어떤 사회가 상대적으로 더 높거나 낮은 기회의 불평등을 보여주는지, 한 사회 내에서 기회의 불평등 정도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에 관한 다양한 이론적 논의와 풍부한 경험적 연구를 진행해왔다. 기회의 불평등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사회학자들은 직업을 기준으로 사회 계급(social class)을 정의한 뒤, 개인이 성장할 시기에(예를 들어, 14살 혹은 15살 때 무렵) 부모가 어떤 계급에 속해 있었는지를 가지고 출신 계급(origin class)을 정의하고, 본인이 달성한 계급을 도달 계급(destination class)으로 삼아,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에 얼마나 연관성이 있는지를 살펴본다. 다시 말해, 사회학자들은 사람들이 어떤 계급에서 출발해서 어떤 계급에 도달했는지를 묻는 세대 간 (상대적) 사회이동을 기회의 불평등을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로 여겨왔다."(27)


"승산비(odds ratio)는 두 출신 계급들(지금 들고 있는 예에서는 전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전문가 계급에 도달할 두 승산 간의 비율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대적인 이동 정도를 제대로 나타내준다. 승산비는 두 승산의 비율로 정의되기 때문에 특정 계급의 규모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즉, 절대적 이동, 특히 유출율을 계산하고 나서 많은 노동자 계급 출신 자녀들이 노동자 계급으로 머물지 않고 전문가 계급으로 상승 이동한다고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 자체로 사회가 더 개방적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의 상승 이동 정도를 전문가 계급 출신 자녀들이 노동자 계급으로 하강 이동하지 않고 전문직 계급에 머물게 되는 정도와 비교해서, 노동자 계급 출신 자녀들의 상승 이동 정도가 전문가 계급 출신 자녀들의 재생산 정도보다 빠르게 증가했을 때 사회가 더 개방적이 되어 간다고, 즉 사회 유동성이 증가한다고 할 수 있다."(41-2)


"계층이동 사다리가 끊겼다는 담론의 주 근거는 한국인이 점점 더 계층상승 이동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 되어간다는 사회의식 조사이다. 계층상승 이동 인식과 실제가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잠시 잊더라도 계층상승 이동 가능성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개인들이 계층상승 이동 가능성을 말할 때 보통은 자신의 전 세대, 즉 부모 세대와 비교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상승 이동할 수 있는지, 혹은 자신의 세대를 중심으로 자기 자식 세대들은 얼마나 상승 이동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주로 직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절대적인 사회이동에 관한 것이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상승 이동 가능성에 대한 비교를 포함하는 상대적인 사회 이동에 관한 것이 아니다. (특히 교육 팽창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직업구조가 더 이상 크게 변하지 않을 때, 개인들은 상승 이동의 가능성이 적다고 인식하게 된다."(66-7)


3 한국 사회의 세대 간 사회이동 추이


"정인관·박현준(2019)은 여러 서베이 자료들을 한데 모아, 아들들이 언제 태어났는지를 기준으로 1950-54년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부터 1980-84년 사이에 태어난 아들들까지 총 일곱 개의 5년 단위 출생 코호트를 구분했다: 1950-54, 1955-59, 1960-64, 1965-69, 1970-74, 1975-79, 1980-84. 30세를 기준으로 하면 1950년대와 1960년대 코호트들은 한국 경제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을 무렵에 노동시장에 있었던 반면에 1970년대 코호트들은 경제 위기 이후 한국 경제 침체, 재구조 과정, 불평등 증가라는 상황에서 노동시장에 나와 있었다. 이런 노동 시장의 차이와 아울러 교육 팽창 측면에서도 코호트 간에 차이가 존재한다." "이들 일곱 개 코호트들 사이에서 아버지 계급으로 대변되는 출신 계급과 아들 계급으로 대변되는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어떻게 변했는지 분석함으로써 세대 간 사회이동의 추세를 밝히려는 것이 정인관·박현준(2019) 연구의 기본 목표이다."(75-6)


"가장 오래된 1950-54년 출생 코호트부터 가장 최근의 1980-84년 코호트에 걸쳐 눈에 두드러지는 변화는 서비스 계급과 일상적 비육체노동자 계급의 증가이다. 이 두 계급은 주로 전문직, 관리직, 사무직, 판매직,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교육 팽창과 서비스 산업의 발전과 밀접하게 연관된 계급들이다. 이른바 화이트칼라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계급은 계속 증가해서 가장 최근 코호트에 와서는 코호트의 반수 이상이 화이트칼라 계급에 속한다." "이렇게 계급구조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서비스 계급과 일상적 비육체노동자 계급의 비중이 늘어나는 동안 농민 계급과 자영업자 계급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이처럼 네 개의 다른 계급들의 비중 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난 30년간 한국 사회의 직업·계급 구조는 급속하게 변했다. 다만 네 개의 다른 계급들 비중이 크게 변하는 동안에도 숙련노동자와 비숙련노동자의 비중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79-80)


"1950-54년 코호트의 경우 총이동율 75.6%은 상승 이동율 52.4%, 수평 이동율 17.1%, 하강 이동율 6.1%가 합쳐서 이뤄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상승 이동율은 1950-54년 코호트부터 1965-69년 코호트까지 큰 변화가 없다가 이후에 감소하기 시작해서 가장 최근 코호트인 1980-84년 출생자들 사이에서는 40.5%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열 명 중에 네 명이 자신의 아버지 계급보다 높은 위계에 속하는 계급으로 상승 이동을 경험했다. 정점을 찍었던 1965-69년 코호트의 상승 이동율 53.6%와 비교해보면 제법 큰 감소이다. 상승 이동율이 1965-69년 코호트 이후 계속해서 줄어든 반면에 하강 이동율은 처음 코호트부터 꾸준히 증가한다. 1950-54년 코호트의 경우 6.1%에 불과했던 하강 이동율이 이후 계속 증가해서 1980-84년 코호트의 경우 17.3%나 된다. 이처럼 최근 코호트에서 상승 이동율과 하강 이동율 간의 차이가 가장 작다."(85)


"농민을 포함하는 상승 이동율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출생자들 사이에서 큰 변화가 없다가 1970년대 이후 출생자들 사이에서 제법 줄어든다. 그 결과 가장 최근 코호트인 1980-84년 출생자들은 가장 낮은 상승 이동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농민을 제외하면 그 유형이 정반대이다. 계급구조에서 가장 낮은 지위를 차지했던 농민 계급을 제외하자 그만큼 상승 이동율이 줄어들어서 1950년대와 1960년대 출생자들의 경우 상승 이동율이 농민을 포함한 상승 이동율에 비해 현저히 낮다. 농민을 포함했을 때 1950-54년 코호트의 경우 과반수가 상승 이동을 경험했으나(52.4%), 농민을 제외하면 겨우 그 코호트의 열 명 중에 두 명만이(23%) 상승 이동을 경험한 것으로 파악된다." "즉, 최근 코호트들이 예전 코호트에 비해 상승 이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담론은 농민을 제외하면 상승 이동이 지금보다도 더 낮았던 예전 코호트들의 경험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88-90)


"각 코호트별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 정도, 즉 상대적 이동 정도를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추세는 이 연관성이 전반적으로 감소했다는 것이다. 즉, 최근 코호트로 올수록 아들의 계급 달성에 미치는 아버지 계급의 영향력이 감소해왔음을 알 수 있다: 증가한 것이 아니다! 1950-54년 코호트 사이에서 드러나는 출생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을 1이라고 할 때 1955-59년 코호트의 연관성은 0.85로 1950-54년 코호트에 비해 15%나 감소했다. 그 이후로 1970-74년 코호트까지는 상대적으로 변화가 없다가 가장 최근의 두 코호트에 와서 다시 감소 폭이 크다. 계속되는 감소 결과 출생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은 가장 최근 코호트인 1980-84년 코호트의 경우 1950-54년 코호트의 66%에 불과하게 된다." "지난 30년간 아들이 특정 계급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 계급이 미치는 영향력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사회이동 기회는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108-9)


"앞서 절대적 이동율 추세를 살펴보면서 농민 계급을 포함할 때와 제외했을 때의 추세가 다름을 확인했다. 출신 계급이 농민이거나 도달 계급이 농민인 모든 경우를 제외하고 새로 구성한 5X5 사회이동표를 가지고 그 결과를 낳은 분석을 해보면 농민을 제외하더라도 비슷한 상대적 이동 추세를 발견할 수 있다. 농민을 제외하면 오히려 그 추세가 보다 분명해져서 일관되게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1975-79년까지 줄어든다.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1950-54년 코호트에서 1이라고 하면, 1955-59년, 1960-64, 1965-69, 1970-74, 1975-79 코호트 차례대로 0.96, 0.96, 0.83, 0.63, 0.60이다. 즉,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1975-79년 코호트의 경우 기준이 되는 1950-54년 코호트의 연관성의 60% 밖에 되지 않는다. 그만큼 사회가 개방적이 되었다는 말이다. 가장 최근 코호트(1980-84)에 와서는 약간 증가하지만 여전히 0.65밖에 되지 않는다."(109)


"그렇다면 빠르게 지속되어 온 교육 팽창이 계속해서 약화되어 온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해진다." "정인관·박현준(2019)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1950-54년 코호트부터 1980-84년 코호트에 이르기까지 급속한 교육 팽창에도 불구하고 출신 계급(즉, 아버지 계급)이 아들의 교육 수준에 미치는 효과는 계속해서 약화되어 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 교육 기회의 불평등이 지속되었다. 이런 결과는 아들 세대가 겪었던 교육 기회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출신 계급에 따른 상대적인 교육 기회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Shavit and Blossfeld(1993)의 '지속되는 불평등' 테제를 경험적으로 뒷받침한다. 교육 팽창 정도가 다른 많은 나라에 비교해서도 남달리 컸던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 교육 불평등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시금 교육 팽창의 절대적 측면과 상대적 측면의 구별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한다."(135-6)


"그렇지만 아들의 교육 수준이 본인의 계급(도달 계급) 성취에 미치는 영향력은 계속해서 약화되어 왔다. 본인 교육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1950-54년 코호트에서 1이라고 할 때 1960-64년 코호트에서는 0.86, 1970-74년 코호트에서 0.80, 그리고 가장 최근 코호트인 1980-84년 코호트에서는 0.70으로 지난 일곱 개 코호트를 거쳐 오는 동안 교육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30% 줄어들었다." "고졸 이하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1이라고 할 때, 전문대나 대학 중퇴자들 사이에서는 그 연관성이 0.80, 대학 졸업자들 사이에서는 0.61이다. 다시 말해, 대학 졸업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은 고졸 이하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연관성의 61%에 지나지 않는다. 구성 효과에서 기대되는 것처럼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계급 성취에 아버지 계급이 미치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136-8)


4 세대 간 사회이동의 국가 간 비교


# 절대적 이동율의 국가 간 비교

1. 총 이동율 : 한국(1970-74) 〉 이탈리아(1997) 〉 노르웨이(1995) 〉 폴란드(1994)

2. 상승 이동율 : 한국(1970-74) 〉 이탈리아(1997) 〉 노르웨이(1995) 〉 폴란드(1994)

3. 하강 이동율 : 노르웨이(1995) 〉 폴란드(1994) 〉 한국(1970-74) 〉 이탈리아(1997)

4. 수평 이동율 : 한국(1970-74) 〉 이탈리아(1997) 〉 폴란드(1994) 〉 노르웨이(1995)


#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

이탈리아 1.0 〉 폴란드 0.75 〉 노르웨이 0.71 〉 한국 0.67 (즉, 한국의 세대 간 사회이동이 상대적으로 활발)


5 결론


"한국 사회에서 출신 계급·계층이 도달 계급·계층에 미치는 효과는 계속해서 약화되어 왔다." "이 책의 핵심적 결론의 하나는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 이동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 팽창은 이런 한국 사회 개방성 확대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교육 팽창과 함께 이뤄진 교육 평등화는 특히 1950-54년 코호트와 1970-74년 코호트 사이에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을 약화시켰다. 그 이후 코호트에서는 교육 팽창에 따라 대학졸업자의 비중이 증가하면서 그만큼 출신 계급과 도달 계급 간의 연관성이 낮은 집단이 전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한 구성효과의 영향을 받아 세대 간 사회 불평등이 약화될 수 있었다. 이런 결과는 요사이 대학 졸업장이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면서 대학 교육이 더 이상 사회 이동의 통로가 되지 못한다는 담론과는 거리가 멀다."(157-9)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세대 간 사회이동이 줄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는 결론은 최근에 증가한 소득 불평등의 추세가 가지는 심각성이나 의미를 축소시키지 않는다. 앞에서 계층이동 사다리를 비유로 든 미국 경제학자들 이야기를 하면서도 밝혔듯이 상층 계급에 도달할 수 있는 상대적인 가능성이 예전 세대에 비해 최근에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더라도(즉, 상대적 사회이동이 변하지 않았더라도) 혹은 심지어 상대적인 이동이 더 수월해졌다고 해도, 소득 불평등의 증가로 상층 계급과 하층 계급 간의 경제조건과 기타 생활조건 차이가 더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상층과 하층 간에 더욱 늘어가는 경제조건의 차이는 아이들에게 투자되는 자원과 시간 측면에서 상층과 하층 사이에 그 격차가 더욱 벌어짐을 의미할 수 있으며 결국 다음 세대의 사회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159-60)


"마지막으로 이 책의 가장 큰 한계 중의 하나는 세대 간 사회이동을 남성의 경험에서만 살펴본다는 것이다. 한국 여성들의 전반적인 낮은 노동시장 참여율, 그에 따른 계급 구성의 어려움, 결혼과 출산을 전후한 노동시장 이탈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들을 이유로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여성의 세대 간 이동을 살펴보지 못해 큰 아쉬움이 남는다." "나아가 한국 여성과 남성의 세대 간 사회이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 간의 수직적 연관성뿐만 아니라 횡적 연관성 즉, 여성과 남성의 결혼 동질성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결혼을 통해 여성과 남성이 어떤 계급·계층 이동을 하게 되는지 또 그러한 계급 동질혼 혹은 이질혼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면 세대 간 사회이동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개방성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실제로 여러 국가 간 비교 연구는 한국 사회의 교육 동질혼 정도가 비교적 높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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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세계사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외 지음, 이재만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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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인간 활동의 다양성과 관련된 다섯가지 주제

1. (문화 혹은 삶의 방식의) 발산과 수렴

2. (에너지 소비량을 척도로 가늠할 수 있는) 가속적 변화

3. (인위발생적인 영향에 반응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4. (인간 본성의 고정성과 보편성으로 표현되는) 문화의 제약

5. (한 집단이 다른 집단들에 영향을 끼치는) 주도권의 이동


제1부 빙하의 자식들


인류의 전 세계적 확산과 문화적 발산의 시작─약 20만 년 전부터 1만 2000년 전까지


"대양을 항해해 오스트레일리아와 '가까운 오세아니아'에 처음 닿은 주역은 (지구 여행자로서의) 인류였다. 훗날 인류는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함으로써 지구상 거주 가능한 전체 영역 중 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면적을 추가했다. 여행하는 인류가 태평양의 세 외곽 지역인 하와이, 이스터섬, 뉴질랜드에 도착한 1000년 전쯤, 육지를 걷고 바다를 건넌 인류는 마침내 지구적 종이 되었다. 이야기를 더 넓은 시야에서 보면, 호미닌의 초창기부터 인류가 아프리카 외부에 출현한 무렵까지는 세계의 4분이 1만이 정기적 거주 영역이었다. 호미닌의 역사에서 채 2퍼센트도 되지 않는 지난 5만 년 동안 인류는 숨가쁘게 이동해 나머지 4분의 3을 거주지로 삼았다. 그리고 발길을 멈추고 한숨 돌릴 무렵, 우리는 우리가 외로운 인간 종임을 깨달았다. 우리가 여행 중에 마주친 다른 호미닌 집단들은 사라졌다. 우리의 지구적 위치는 마치 크리스마스 할인 행사처럼 다양성을 대폭 줄인 생물학적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28-9)


# 호미닌Hominin : 우리와 우리의 모든 화석 조상을 포괄하는 용어


"뇌 크기가 중요한 이유는 개체들이 속한 사회적 공동체의 크기를 추론하는 데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생 비인간 영장류의 공동체 크기와 뇌 크기에 관한 연구는 뇌 크기와 사회 집단 크기 사이에 강한 통계적 관계가 있음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뇌가 클수록 개체들이 속한 사회적 공동체도 더 크다." "뇌/집단 크기 그래프의 선을 호미닌과 인류의 뇌 크기를 포함할 정도까지 연장할 경우, 우리와 같은 뇌 크기를 가진 한 영장류 공동체의 예상 구성원 수는 150이다. 이 숫자는 생물인류학자 레슬리 아이엘로와 함께 뇌 크기와 집단 크기의 관계를 처음으로 검토한 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의 이름을 따서 '던바의 수'라고 부른다. 사회적 뇌 가설은 사회적 복잡성에 관한, 즉 더 많은 수의 개인들과 관계를 맺고 사람들의 역사, 의도, 그리고 상호 작용할 때 반응하는 방식에 대한 정보를 보유하는 능력에 관한 가설이다." "수렵 채집민 집단부터 산업 세계까지 규모가 제각각인 사회들의 근저에는 공히 던바의 수가 있다."(38-40)


"인류의 진화는 순환 과정들과 그 사이사이에 발생하는 화산 폭발 같은 사건들에 영향을 받으면서 여러 지리적 규모─지구, 대양, 대륙, 지역 규모─로 전개된다." "기근의 위험을 줄이고 지역의 선택압에 대응하는 데는 두 가지 전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이동과 공유다." "환경이 어떻든 간에 이동은 생존과 성공에 필요한 핵심 전술이다. 그러므로 수렵 채집민의 경관을 대표하는 요소는 영역보다는 오솔길과 여정이다. 홀로세 동안 저위도와 중위도에서 농경을 채택했을 때, 이동성 상실은 중대한 변화였고 당연히 인구학적 결과를 가져왔다." "인류가 구사하는 둘째 전술은 사회 관계망 구축이다. 인류가 음식과 자원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오솔길은 개인의 시공간 범위를 익숙한 유전적 친족 너머로 넓혀주는 교역로, 노랫길, 혼맥이기도 하다. 지역 간 교환망과 친족 관계망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켜 '친족화kinshipping'라고 하는데, 이는 유전적 친족 관계에 기반하지 않는 관계를 맺는 우리의 능력을 의미한다."(41-2)


# 노랫길 :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지리적 정보, 중요한 지식, 문화적 가치 등을 노래로 만들어 기억하고 후세에 전달한 구전 전통


"빙하 시대의 모든 사람은 거의 똑같은 수렵 채집 경제를 영위했고, 전체 양분 중 상당한 양을 사냥을 통해 얻었다. 포식은 한 가지 점에서 정신에 이롭다. 포식은 예측 능력─사냥감과 경쟁 포식자의 움직임을 미리 짐작하는 능력─을 증진한다." "사냥꾼의 핵심 능력인 예측은 상상과 비슷하다. 상상이 눈앞에 없는 것─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이라면, 예측은 아직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이다. 우리 종이 화석 기록에 등장할 무렵, 우리 조상들은 이미 200만 년 넘게 사냥에 탁월한 유인원으로 지내온 터였다.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이거나 호모 사피엔스와 조상을 공유하는 종들은, 비록 자신 있게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성기긴 하지만, 적어도 200만 년 중 상당한 기간 동안 장식용 물건을 모으고, 안료를 사용하고, 열심히 도구를 만들어온 터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위대한 예술을 창작하고 위대한 생각을 떠올릴 만큼 비옥한 상상력을 갖춘 삶으로 도약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75-6)


"예술가들은 사유의 두 종류, 즉 종교적 사유와 정치적 사유를 엿보게 해주는 사료를 남겼다. 현대의 통념에는 뜻밖일지로 모르지만, 종교는 회의론─물질의 유일무이한 실재에 대한 의심, 또는 오늘날의 표현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전부냐는 의심─과 함께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실재, 비록 감각으로는 접근할 수 없지만 다른 수단으로는 도달할 수 있는 실재를 발견했을 때, 영혼은 인간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처음 어렴풋이 인식했을 무렵, 영혼 영역은 미묘하고 놀라운 개념이었다─물질계의 제약에 복종하는 수동적인 삶에서 무한히 변경할 수 있고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자유로 나아가는 약진이었던 것이다. 생활 환경은 시를 자극하고, 경외감을 자아내며, 불멸성에 대한 추정을 불러일으킨다. 불꽃은 꺼지고, 파도는 잠잠해지고, 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돌은 산산이 조각나지만, 영혼은 계속 살아간다."(83-4)


"네안데르탈인 매장지들은 불굴의 사유를 드러낸다. 단순한 매장은 청소 동물의 접근을 막고 시체 썩는 냄새를 가리기 위한 물질적 관심의 증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의례에 따른 매장은 오늘날의 문화들도 여전히 규정하기 어려워하는 삶과 죽음 개념의 증거다. 특정한 경우─불가해한 혼수상태와 생명 유지 장치에 의존하는 고통스러운 빈사 상태─에 우리는 삶과 죽음이 차이점이 정확히 무엇인지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음 자의 개념적 차이는 사람들이 죽은 자를 구별하기 시작한 약 4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장례는 삶을 축성했다. 그것은 곧 삶이란 경외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확신의 표현이었다. 최초의 장례는 그저 삶을 소중히 여기는 본능을 넘어섰음을 보여주는 첫 증거였으며, 그후로 줄곧 모든 도덕적 행위의 기반을 이루어왔다." "초기 무덤들의 부장품은 내세가 현세의 연장일 것임을 함축하고, 영혼의 생존보다는 지위의 생존을 확인해준다."(94-5)


"사제와 비슷하게 신성한 의복을 입거나 동물로 변장한 채 환상적 여행을 하는 인물형은 육체적 힘 외에 새로운 종류의 권력자들이 부상했음을 알려주는 증거다. 가까운 과거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알려진 사례들에서 그런 변장은 보통 사자 또는 신령과 소통하려는 노력, 즉 '내세'에 접근하려는 노력과 관련이 있다." "동물로 변장한 채 춤추는 그들은 틀림없이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고, 사람들은 영혼과 접촉하는 누군가의 호의를 얻고자 선물과 존경, 봉사, 복종을 기꺼이 바쳤을 것이다. 샤먼은 권위의 강력한 원천, 즉 가부장 남성이나 우두머리 남성을 샤먼으로 대체하는 정치적 혁명의 발화점이 될 수 있다. 동굴들을 찬찬히 훑어보면, 무력 계급과 나란히 지식 계급이 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빙하 시대 사회들은 영혼과 소통하는 엘리트를 선택함으로써 육체적으로 강한 자들이나 특권층으로 태어나는 자들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최초의 정치적 혁명이라 부를 만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100-1)


제2부 점토와 금속으로


농업의 출현부터 '청동기 시대 위기'까지 발산하는 문화들─기원전 1만 년경부터 기원전 1000년경까지


"대륙을 횡단한 새로운 규모의 접촉을 가리키는 가장 분명한 증거 중 일부는 농업노동의 1차 생산물인 작물 그 자체다. 기원전 제3천년기 중엽, 서남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작물화된 밀이 농경 공동체들을 통해 중앙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전해졌다. 그 증거가 카자흐스탄 발하슈호 위쪽 중가르산맥 비탈에 있는 선사 시대 야영지에서 발견되었다." "초기 작물들이 진화적 고향에서 먼 거리를 이동해 출현한 시기는 유라시아 곳곳의 독특한 문화적 맥락에서 가장 이른 금속 및 야금술이 출현한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두 현상 모두 기원전 제3천년기에 되풀이해 나타난 것으로 입증되었으며 간혹 더 일찍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다." "가보家寶와 도처에서 보낸 선물이 들어 있는 엘리트층의 무덤은 기원전 제2천년기의 연결망을 추적하는 데 매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무렵의 묘지에서 발굴한 인간 유골들의 화학 성분에 작물을 소비한 증거가 담겨 있는 것이다."(153-5)


"호모 사피엔스가 초목이 있는 대륙들 각각의 남단에 도달했을 무렵, 세계 기후는 가혹한 빙하기와 기온이 급격히 낮아진 신드리아스기를 지나 온난해지기 시작한 참이었다. 뒤이은 수천 년에 걸쳐 개척 삼림지가 지난 한랭기에 최대로 확장되었던 개활 초지와 툰드라 경관을 차츰 잠식해나갔다. 그후 더 풍부하고 더 넓고 더 다양한 삼림지가 개척 삼림지를 대체했으며, 전체가 나무로 덮인 경관이 꾸준히 확장된 결과 가장 추운 주변부, 가장 건조한 내륙, 가장 높은 고원만이 나무가 없는 개활지로 남게 되었다. 그렇게 온난해지는 경관 곳곳에서 우리 종은 대개 생태계들의 경계 면을 따라 놀랄 만큼 다양한 생물군계들을 퍼뜨렸다." "그 추세는 이따금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해 중단되었는데, 해당 지역들에서 그 사태는 '문명의 붕괴'로 해석되고 서술되었다. 현저한 기후 변동이 사회 조직의 심대한 변화와 정치적 조직화 및 통제 제도의 쇠퇴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으로 보인다."(157-8)


"우리는 네 지역─이집트의 나일강 중하류, 인더스강과 하라파 지역, 메소포타미아, 중국의 황허강 유역─을 발상 문명이나 위대한 문명이라 부르고, 전통적인 문명사를 서술할 때면 으레 네 지역부터 묘사한다. 네 지역을 함께 고찰하면, 공통의 생태적 얼개─점차 온난해지고 건조해지는 기후, 상대적으로 건조한 토양, 계절에 따른 강의 범람에, 따라서 관개에 의존하는 물 공급 방식─안에서 어떻게 끊임없는 발산이 문화적 간극을 만들어내는지 알 수 있다." "목축과 비교해 농업은 공간을 차지하기 위한 더 치열한 경쟁을 수반했다. 토지를 둘러싼 분쟁과 전쟁은 통치자의 지위를 강화했다. 늘어난 전쟁과 부 역시 가부장과 원로가 아니라 더 강하고 현명한 지도자가 최고위직을 쟁취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식량을 저장하고 지켜야 필요성도 통치자의 권한을 강화했다." "(식량 부족이 주기적으로 닥치는 시대에) 국가는 비축 기관으로서 재화의 재분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기근 구제를 위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174-7)


"이집트에서는 신성한 파라오의 말이 곧 법이었다. 법을 성문화하려는 욕구는 결코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종교가 도덕률을 규정했으며, 국가는 도덕률을 쉽게 변경하거나 뒤엎을 수 없었다. 기원전 2천년경 새로운 내세 관념이 등장했다. 그 이전 무덤들은 내세로 들어가기에 앞서 대기하는 방이었으며 세계는 내세의 삶을 실습하는 곳이었다. 기원전 2천년 이후에 지은 무덤들의 벽화는 신들이 죽은 자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무덤은 내세를 위한 도덕적 준비를 마친 이후 심문을 받는 장소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왕은 신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것이 현존하는 가장 이른 법률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제정된 이유일 것이다. 기원전 제3천년기 우르의 법률은 조각조각 남아 있다─본질적으로 벌금 목록이다." "기원전 18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함무라비 법전은 우리가 아는 법, 즉 예로부터 물려받거나 통치자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제정한 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왕의 명령을 영속화하는 수단이었다."(178-9)


"기록에 남은 중국의 초창기 왕권 전통 역시 왕의 지위와 수자원 관리 및 식량 분배 사이에 연관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전설상의 토목공학자인 우禹임금은 〈물길을 다스리고 큰 수로들로 흐르게 했다〉는 공적으로 칭송받았다." "(상商 왕조의) 왕은 갑골로 점치는 활동을 넘겨받음으로써 마술과 종교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능─미래를 예언하고 신의 뜻을 해석하는 기능─을 국가로 이전했다. 점복의 결과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이 이제 점술가의 소관이 아닌 세속적(비종교적) 기능이 되었다." "오늘날 파키스탄과 인도 서부에 속하는 인더스강 유역의 하라파 세계는 도시 배치와 건물 설계에서 현저한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위계적으로 나뉘는 주거 공간들은 계급 구조를, 또는 더욱 엄격한 카스트 구조를 암시한다." "그렇지만 하라파 유적들에 호화로운 무덤이 없으며, 왕의 구역이나 장신구가 없다는 사실은 이 사회들이 공화정이었거나 사제들이 운영하는 신 중심의 신정神政이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자극한다."(182-6)


"국가의 연속성을 이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기원전 1000년 무렵, 그 이전 1000년 동안 실패한 국가들이 유라시아의 경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장려한 축에 드는 제국들이 해체되었고, 가장 복잡한 여러 문화의 역사가 수수께끼 같은 참사로 인해 갑자기 단절되었다. 미로 같은 궁전에서 통제하던 식량 분배 중심지들은 폐쇄되었다. 교역도 중단되었다. 정착지와 기념비적 건축물이 버림을 받았다. 하라파 문명은 사라졌고, 크레타와 미케네 문명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히타이트의 흔적은 지워졌다. 중국의 상나라는 주나라에게 굴복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아카드 군대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자기네 언어를 퍼뜨렸다. 수메르어는 일상 언어에서 순전한 의식용 언어로 서서히 쪼그라들었다. 수메르의 도시들은 허물어졌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고지와 사막에서 온 침략자들이 자기네 왕의 통치에 위엄을 더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들에 담겨 보존되었다."(206)


제3부 제국들의 진동


기원전 제1천년기 초반의 '암흑시대'부터 기원후 14세기 중엽까지


"인류의 조건은 기후 '최적기'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시작된) 위기가 번갈아 나타나는 대순환을 경험했다." "그중에서도 2000년 주기로 나타나는 '할슈타트' 태양 대大극소기는 기원전 제4천년기와 기원전 제2천년기 말에 찾아왔고, 기원전 14세기 중엽에 다시 찾아와 소빙하기를 불러왔다. 이러한 기후 진동이 인간사의 배경을 이루었다. 기원전 1200년경부터 태양의 복사량이 감소하면서 북반구가 냉각되었고, 빙산이 북대서양으로 이동했으며, 시베리아 고기압이 형성되어 한랭 건조한 겨울바람이 유라시아와 북아메리카의 남쪽으로 매섭게 불어닥쳤다. 거대한 인도양-태평양 연안 가운데 아시아에서는 여름 계절풍이 감소한 반면, 아메리카에서는 엘니뇨로 인해 강우량이 증가했다. 아메리카는 강우량이 증가해 고통을 받은 반면, 유라시아 남부는 가뭄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해 고통받았다.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는 갈수록 가물어가는 추세에 기원전 1225년부터 1175년까지 지진이 잇따른 것으로 추정된다."(213-4)


"청동기 시대가 끝나갈 무렵 스텝 지대에서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스텝 전사가 말이 끄는 전차 전사에서 기마 전사로 바뀌었다. 둘째, 페스트의 독성이 강해지고 전염 경로가 늘어났다. 기원전 800년경부터 흑해 북쪽 스텝 지대에서 중앙아시아와 깊은 연관이 있었던 듯한 새로운 전사 문화인 스키타이 문화가 출현했다. 스키타이 전사는 기존의 장궁과 달리 말을 탄 채로 쏠 수 있는 짧은 복합궁을 휴대했다. 스키타이 문화는 유라시아 스텝에서 최초로 출현한 전사단의 문화였으며, 훗날 훈족과 튀르크족, 몽골족이 스키타이족의 뒤를 따를 터였다. 매 세기마다 기마 유목민이 등장해 유라시아 남부 가장자리에 자리한 고대의 주요 문명들을 습격하고 정복할 터였다. 기원전 800년을 전후한 태양 극소기에 흑해부터 몽골까지 스텝과 사막 지대에 습한 서풍과 겨울철 눈을 가져온 더 한랭한 기후에서 스키타이족을 시작으로 전사 사회들─더 정확히 말하면 말들─이 번성했다."(216-8)


"생산 비용이 많이 드는 청동은 엘리트 개인들의 전유물이었다. 그에 반해 철은 '민주적 금속'이었다. 철 광상은 널리 분포했고, 철 생산에는 멀리서 구해야 하는 값비싼 구리와 주석 광석이 아니라 보통사람도 구할 수 있는 나무와 칼슘만이 필요했다. 공기 주입과 융제라는 비결을 숙달하고 나자 괴철로를 조작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괴철로의 결과물은 가단성 물질이었는데, 아마도 잘 단조된 청동보다 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철은 목탄으로 가열했다가 공기 중에서 냉각시키는 뜨임tempering 처리를 통해, 또는 물에 담가 급랭하는 담금질과 다시 열을 가해 탄소를 스며들게 하는 침탄 처리를 통해 강鋼의 등급으로 변형할 수 있었다. 이 기술혁명은 주석이 몹시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강을 쉽게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 결과 무기 생산이 대폭 확대되었지만,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은 농업용과 목공용, 철공용 도구가 강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220-2)


"청동기 시대 궁전들이 붕괴됨에 따라 비교적 자율적인 교역과 상업이 철 생산법 못지않게 멀리까지 확산되었다. 이제 교역은 궁전 계획 경제의 헤게모니적 명령이 아니라 그 자체의 논리를 따랐다. 그리고 아마도 이 시대에 시장이 탄생했을 것이다. 분명 상인들은 자기 생각과 목적대로 상품을 운반했다. 적과 해적을 피하기 위해 교역은 신중하게 진행했을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토기와 금속 제품을 운반한 단거리 지역 사업에 대한 기록은 상품 교역이 엘리트층 이하 가구의 수요를 채워주었음을 시사한다. 초기 철기 시대에 등장한 이런 교역 중 일부는 근동 지역을 종횡으로 오가는, 점점 증가하는 낙타 대상隊商들이 담당했다. 이에 더해 교역의 상당 부분은 해상 교역이었다. 교역은 작고 자율적인 정치체들을 낳았는데, 그중 일부는 공화정과 유사한 상업 도시 국가였고, 다른 일부는 군소 왕국이었다." "이 교역로들은 구세계의 대부분을 연결한 세계 체제를 형성했으며, 포식성 제국이 다시 등장하도록 자극했다."(224-5)


# 기원전 1000년~기원후 1350년의 사회·정치 조직의 여섯 가지 형태(이언 모리스)

1. 수렵 채집 가족

2. 목축 부족

3. 목축 제국

4. 농경 촌락

5. '저가低價, low-end' 국가

6. '고가高價, high-end' 국가


"기원전 1000년에서 기원후 1350년 사이에 수렵 채집 가족들의 영역은 꾸준히 줄어들었는데, 농경민이 수렵 채집민을 자신들이 원하지 않거나(시베리아처럼) 아직 도달하지 못한(오스트레일리아 해안처럼) 생태적 적소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목축 부족이 점유하던 영역도 줄어들었는데, 스텝 지대의 광활한 영역들이 목축 제국들의 지배 아래 들어갔기 때문이다.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후 175년까지 농경 촌락들은 수렵 채집 가족들을 밀어내면서 점유 영역을 늘려갔지만, 그 이후 더 빠르게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농경 국가들은 대부분 농경 촌락을 희생양 삼아 전 기간에 걸쳐 영역을 엄청나게 넓혔지만, 저가 국가들과 고가 국가들 사이의 균형은 크게 변했다. 기원전 1000년에는 고가 국가가 없었으나 그후로 기원후 175년까지 별개의 두 가지 패턴이 전개되었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는 저가 국가들이 농경 촌락들을 삼키면서 성장했고, 유라시아에서는 고가 국가들이 저가 국가들을 대부분 쓸어버렸다."(313-4)


"구세계에서 가장 큰 축에 드는 국가들은 기원후 175년 한참 전에 저가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문턱에 이르렀다." "유라시아 제국들은 각기 다른 정도로 고가 모델을 향해 나아갔다. 고가 모델은 귀족층을 효과적으로 우회하여 정부와 농민층 사이에 직접적인 연계를 확립한다는 점에서 저가 모델과 구별되었다. 이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간 국가일수록 엘리트층과 농민층을 가르는 구분선을 없애는 한편 농민들에게 토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을 주고 그 대가로 왕에게 납부하는 세금과 징집 의무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행정관과 사령관으로 복무할 부유하고 교육받은 남자들이 여전히 필요했고 기원전 1000년보다 기원후 175년에 최고 부유층이 훨씬 더 부유하긴 했지만, 이제 귀족층의 권력은 대개 왕의 호의에 달려 있었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고가 국가에서는 조세가 지대보다 우위였으며, 기원후 1세기 중국처럼 반대로 지대가 조세보다 우위에 서는 순간, 국가는 다시 저가 국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336-9)


"고가 국가는 모든 종류의 조직을 재편했다. 큰 제국은 모든 종류의 서비스가 집중되는 큰 도시를 필요로 했다. 수많은 인구를 먹이기 위해 로마 제국은 지중해 전체를 언제나 굶주린 수도에 식량을 공급할 마케팅 시스템으로 바꾸었다. 큰 제국은 농산물 생산량을 늘려야 했다. 식량을 두루 운반할 수 있도록 도로와 선박, 항구를 개선해야 했다. 새로운 교환 수단도 필요했으며, 그런 이유로 지중해 동부와 중국에서 각각 독립적으로 주화가 발명되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신용 거래와 은행업 수단을 발명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쓸 줄 알아야 했고, 따라서 교육이 확대되었다. 지중해에서는 단순한 알파벳이 까다로운 음절 문자를 대체했다. 다만 아테네와 로마에서 알파벳을 배운 남성은 열 명에 한 명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값싼 도구와 무기가 충분히 필요했고, 그런 이유로 철이 청동을 대체했다. 필요가 혁신과 성장을 촉진했다."(340)


"11세기 중국의 사회 조직과 정치 조직은 1000년 전 로마의 조직만큼이나 크고 복잡했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데 반해, 유럽과 중동, 인도의 사회 조직과 정치 조직은 반대 방향으로 가다가 바이킹, 튀르크인, 아프간인의 공격에 허물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1100년에 송나라가 산업 혁명 직전까지 갔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송나라 최대 도시들에서는 주요 연료를 나무에서 석탄으로 바꾸고 있었고, 직물 제조업자들은 훗날 18세기 유럽에서 재발명된 방적기와 매우 비슷한 수력 방적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중국의 경제적 도약이 흔들린 이유는 커다란 물음이지만 대체로 운 좋은 위도대와 스텝 지대 사이에서 계속된 분규에 있을 것이다. 17세기에 전장에 효과적인 총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어떤 농경 제국도 유목민을 실제로 제압하지 못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농경 제국이 성장할수록 유목민의 먹잇감으로 주목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옛 공식은 여전히 유효했을 것이다."(350)


"지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에 따르면 〈[말을 가축화한] 시대와 콜럼버스를 비롯한 항해자들을 대양으로 보낸 사회들이 발전한 시대 사이에 대략 4000년이 흘렀으며, 그 시간 동안 그 이전과 비교해 중요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견해다. 기원전 1000년부터 기원후 1350년까지 도시, 국가, 종교 집단, 교역의 규모는 열 배 증가했다. 이 변화가 없었다면 스텝 지대를 닫을 수 없었을 것이고, 대양들을 열 수 없었을 것이며, 근대 세계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세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사회 조직과 정치 조직은 순전한 농경 환경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에 이르렀고, 세계 조직의 중심축은 서양에서 동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유라시아에서 이런 대사건들이 펼쳐지는 동안 지구의 대다수 지역들로 농경과 저가 국가가 확산되었다. 기원전 1000년에는 열 명 중 한 명만이 정부 치하에서 살았던 반면, 기원후 1350년에는 적어도 열 명 중 아홉 명이 정부의 통치를 받았다."(352-3)


제4부 기후의 반전


전염병과 추위 속에서의 확산과 혁신─14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까지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아시아를 유럽과 아메리카의 시장에 직접 연결하는 대양 횡단 교역을 개척한 유럽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교역의 양으로 보나 가치로 보나 아시아 내부의 거래가 대륙 간 거래를 크게 웃돌았다. 유럽인들에게는 이따금 폭력으로 얻는 단기 이익보다 현지 상인 및 제조업자와의 장기동맹과 협력이 훨씬 더 중요했다. 유럽인들은 주로 아시아 내부의 가격 패턴에서 수익을 얻을 기회를 찾았다. 예컨대 은과 구리의 가격은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했고 중국에서 더 비쌌으며, 금의 가격은 인도에서 높았다. 유럽인들은 다른 상품을 운송하고 거래해서 얻은 수익을 정화正貨에 투자해 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1639년은 최고의 성공을 거둔 해였는데, 일본이 다른 유럽인들이 교역을 금지하고 네덜란드측에 일본산 은을 거래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의 정화는 유럽인들이 중국과 인도에서 사업 자금을 조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74-8)


"노예의 이탈과 그에 얽힌 분쟁에서 발생한 손실이 아프리카인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주었는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유럽인은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이 인구를 잃고 야만 상태로 전락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19세기에 노예 항구 너머의 내륙까지 처음 들어간 탐험가들은 뜻밖에도 질서 정연하고 번창하고 인구가 많은 공동체들을 발견했다. 몇 가지 조건이 노예 무역이 인구에 끼친 영향을 완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인구 밀도가 꽤 높은 지역들에서 노예를 데려왔고, 같은 장소에서 계속 데려온 것이 아니라 노예 무역이 성장함에 따라 내륙으로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면서 데려오곤 했다. 그리고 남성에 편중해 수출했기에 그 반대인 경우보다 출생률에 끼친 영향이 적었다. 게다가 신세계에서 들어온 식물들, 특히 카사바 덕에 노예를 가장 많이 공급한 아프리카 중서부 지역에서 주기적인 기근이 완화되었다."(400)


"전통적인 설명에 따르면, 근대 과학은 서양, 특히 유럽의 '과학 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전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이 용어의 두 단어 모두 미심쩍다. 자연을 분류하는 새로운 방식, 즉 관찰에 근거하고 이전까지 비주류였거나 실행하지 않은 방법으로 확증하는 방식은 하룻밤 사이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의 성격이 혁명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과학이 다른 무언가를 희생시키는 '혁명'이 일어났던 것도 아니다. 과학이 세속적 학문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거니와 과학자가 성직자를 대체하지도 않았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독립적이라는 관념은 19세기 들어서야 비로소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전에는 대담한 의문이 제기될 경우 이성과 실험으로 도출한 데이터와 계시를 받아 선포한 진리 사이의 대화가 서서히 오랫동안 이어졌다." "16세기 초부터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데이터─전 세계적 문화 교류의 원인이자 결과인─에 역동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근대 과학이 출현했다."(430-1)


"19세기 초에 이르러 전통과 혁신, 르네상스와 계몽주의가 섞인 새로운 감성, 나아가 이성의 노예가 되는 데 저항하고, 감정을 존중하고, 자연에 감응하고, 인간성을 넘어 야생성과 야만 상태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감성이 형태를 갖추었다. 이 감성은 개인의 정서와 창조적 자율성을 고양시킨 예술 및 문학과 관련하여 낭만주의라는 이름을 얻었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성은 감정이라는 완충제에 부딪혔고, 자연으로 돌아가려 하고 낭만적 숭고라는 이상을 좇는 사람들에 의해 견제 받았다. 낭만주의자들은 상상, 직관, 영감에 더해 심지어 정념까지도 자유롭고 가치 있는 행동의 길잡이로 재평가했다. 그들은 인간의 소산보다 자연의 소산이 더 우월하다고 보았다. 그림 같은 경치를 찾아 그들은 산을 오르고, 화산을 들여다보고, 전 세계의 섬과 황무지 숲, 내륙 벽지를 탐험했다. 그들에게 자연과의 조우는 비이성적이거나 초이성적인 열정에 대한 이끌림과 불가분한 것이었다."(450)


"근대 초 서반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상인과 자본, 교역 허브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는 쇠퇴의 징후를 보인 반면에 리스본, 암스테르담, 런던은 새롭게 대두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특징인 해상 제국들은 느림보 거인이었다. 덩치가 지나치게 커서 관절 연결이 부실했고, 변방을 향해 기운 없이 손끝을 뻗고 있었을 뿐 기다란 팔다리를 의도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비틀거리거나 무너졌다. 1763년 프랑스는 신규 정착민이 부족해 북아메리카에서 지상 제국을 만들려던 시도를 포기했다. 1802년 아메리카에서는 프랑스의 주요 식민지였던 카리브해 아이티에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 정착민을 몰아냈다. 그 무렵 에스파냐 제국과 네덜란드 제국은 유럽 내 전쟁으로 약해지기 시작했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결국 허물어졌다.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동시에 상대해야 했던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들을 대부분 상실했다."(459-65)


"근대 초는 정부의 3대 기관 중 하나로 법률 제정을 담당하는 입법부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14세기와 15세기에 잉글랜드 군주들은 나머지 서양의 추세와 비슷하게 칙허장을 통해 법률을 도입했지만, 의회 의원들도 논쟁과 청원서를 통해 입법을 발의할 수 있었다. 법률을 제정하고 폐지하는 대의 기관의 역할이 확대된 것보다 더 근본적인 전환은 주권의 개념 자체가 변한 것이었다. 중세의 주권은 정의를 선언할 수 있는 절대적 권리로 규정할 수 있지만, 16세기 들어 주권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갈수록 법률을 제정할 절대적 권리로 이해되었다." "대개 인권을 빼앗은 사례를 계기로 논의되긴 했지만, '양도 불가능한 인권'이 있다는 생각이 차츰 계몽적 담론으로 스며들었다." "그런가 하면 개인주의─개인의 권리가 사회 집합체의 권리보다 선행하고 우선한다는 이념─가 갈수록 유기적인 '사회 계약' 개념과 경합을 벌였는데, 이에 따르면 개인들은 통치자 또는 국가에 의해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었다."(479-81)


"18세기 후반기 들어 유럽의 아시아 고립 영토들은 정복을 통해 내륙으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서양은 19세기 이후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했는데, 산업화를 이루어 화력을 대폭 강화했기 때문이다. 또한 산업화 덕에 서양은 수송의 속도를 높이고 열대 지방에 적합한 물자와 약물을 갖출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생존에 가장 적합한 장기 전략은 '토착민처럼 생활하기'였다. 동양에 상인으로 도착한 네덜란드인은 레이스타펄[식민지 시기 네덜란드인이 채택한 인도네시아 요리]을 먹는 지주로 변모했다. 아메리카에서는 정착민과 그 후손의 독특한 '크레올' 정체성이 생겨났다. 18세기 화가들이 혼성 문명의 인종적·문화적 이종 혼합을 자랑스레 드러낸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에서는 인종 배경에 제각각이면서도 공통의 정체성을 지닌 개인들로 이루어진 엘리트층이 출현했다. 영국 식민지들에서도 새로운 '아메리카인' 정체성이 형성되어, 식민지와 모국을 갈라놓은 1776년의 반란을 자극했다."(489-90)


"18세기에 유럽인은 남아프리카,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아이를 '야만으로부터 보호'하고 기독교를 포함하는 기본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며 토착민 자녀를 강제로 빼앗았다. 유럽인은 유연성과 가변성을 지닌 토착민 아이를 교육해 '문명화'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토착민 아이를 선교 유치원에서 가르친 경험은 교육이 식민주의에 필수적이었음을 입증한다. '문명화' 사명은 '타자화된' 아이를 규율하고 식민지 사회권력 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그 교육은 삼중의 목표에 이바지했다. 첫째는 식민지 관료제의 하층에서 일할 수 있도록 식민 본국의 기본적인 언어를 교육받은 사람들을 길러내는 목표, 둘째는 기독교를 전 세계에 전파하는 목표, 셋째는 어쩌면 대중을 더 많이 개종시킬 수 있을지 모르는 토착민 선교사를 양성하는 목표였다. 식민지 교육은 아동기부터 균일한 문화적·사회적·정치적 정체성 의식을 형성하기 위해 여성을 참여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젠더화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495-6)


제5부 대가속


온난해지는 세계에서 빨라지는 변화─1815년경부터 2008년경까지


# 대가속 : 인류의 능력과 영향력이 갑작스레 증대되면서 일어난 변화


"20세기 초만 해도 과학은 우리 인간이 생물권을 바꾸고 있다는 급진적인 관념을 정당화하기에는 아직 너무 부정확했다. 그러나 현대 환경 운동, 생태학과 환경 과학 같은 새로운 연구 분야들이 부상한 이후인 20세기 후반기 들어 그 관념이 주목을 받았다. 북아메리카 오대호에서 종의 변화를 연구하던 미국 생물학자 유진 F. 스토머는 1980년대 초에 '인류세'라는 용어를 사용해 자신이 관찰하고 인류의 엄청난 영향을 표현했다. 인류세 관념은 기후학자 파울 크뤼천이 2000년에 사용한 이후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다는 증거를 들어 크뤼천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 즉 광범한 석탄 연소를 처음으로 부추긴 기계가 개발된 약 200년 전부터 인류가 생물권을 바꾸기 시작했다고 본다. 〈인류세는 18세기 말부터, 즉 극빙極氷에 갇힌 기체를 분석한 결과로 알 수 있듯이 지구에서 이산화탄소와 메탄의 농도가 증가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시작되었다〉라고 크뤼천은 썼다."(504-6)


"인류가 지구의 자원을 사용하면 할수록 다른 종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은 그만큼 줄어든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생물의 멸종률은 지난 500만 년의 멸종률보다 1000배나 높게 나타나고 있다. 바츨라프 스밀은 인류의 자원 소비량 증가세와 다른 대다수 종들의 자원 소비량 감소세가 현저히 대비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통계 자료를 제시한다. 그는 19세기 초에 인류의 생물량(모든 인체에 포함된 탄소의 총량으로 측정)이 모든 야생(가축이 아닌) 포유류의 생물량을 넘어섰다고 추정한다. 1900년경 탄소를 기준으로 육생 야생 포유동물들의 생물량은 약 10메가톤, 인류의 생물량은 약 13메가톤이었다. 2000년, 육생 야생 포유동물들의 생물량은 대폭 감소한 5메가톤이었던 반면, 인류의 생물량은 크게 증가한 약 55메가톤이었다." "(여기에 가축의 생물량 120메가톤을 더한) 수치들은 2000년경 인류와 가축이 육생 포유류 전체 생물량의 97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545-6)


"근대 후기 세계의 첫째 기둥인 대중 사회는 자신의 운명을 대개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유동적이고 강력한 집단인 '대중'의 기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대중'은 그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그들은 고대 이집트에서처럼, 또는 근래까지 중국에서처럼 천년왕국적이고 막강한 전체주의 국가와 통치자에게 종속되어 있었거나, 정주 지역을 침공한 스텝 제국처럼 이동 생활을 하는 제국들의 일부였다. 두 경우에 자율성을 박탈당한 대중은 보통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18세기 유럽에서 인구 혁명이 일어난 이후, 대중은 분열을 일으키는 장거리 이주에 참여할 필요 없이 경계가 정해진 국가의 공간 안에서 강력한 행위자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서히 만만치 않은 세력이 되었다. 1789년과 1830년 프랑스 혁명은 결코 '대중 혁명'이 아니었지만, 1848년과 1870년 프랑스 혁명뿐 아니라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도 대중은 중대한 역할을 했다."(554)


"근대 후기 세계를 지탱하는 둘째 기둥은 프랑스 혁명과 함께 탄생한 근대 국가다. 근대 국가는 그 성격에 내재하는 전체주의적 목표를 추구하는 도중에 여러 외양으로 공고해지고 때로 물러졌는가 하면,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하는 다수의 형태로 조금 변경되거나 크게 변형되었다. 갖가지 특징─거의 완전한 대의민주주의, 그리고 이와 관련된 성문화와 헌법, 삼권분립─과 지난날 더 넓은 세계로 투사했던 제국의 권력을 가진 근대 국가는 전례 없는 힘의 구현체였다. 근대 국가는 권위의 다른 원천들을 대체했고, 국경 내에서 폭력을 독점했으며, 인구와 자원을 거의 불가항력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근대 국가의 권력은 지난 두 세기 동안 대부분의 문화적·지적 생산물에 그 흔적을 남겼다. 초기에 학자, 작가, 화가, 음악가는 근대 국가의 창설과 성취를 찬양했다. 그후 다른 지식인들은 근대 국가의 성격과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에 대항하는 여러 유토피아를 구상했다."(556-7)


"근대 후기 세계의 셋째 기둥은 엄청난 힘을 갖게 된 과학과 기술이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프랜시스 베이컨이 꿈꾼 '학문의 진보'는 국가 기관과 민간 기업에 힘입어 빅토리아 시대에 실현되었고, 수차례 '과학 혁명'을 거쳐 21세기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과학과 기술은 지식과 예술의 생산에 직접적으로도 간접적으로도 영향을 주었다. 새로운 제지 기술과 인쇄 기술은 세계 출판업의 중심을 영국으로 옮겨놓았다. 1980년대 중반에 도래한 전자 기술은 종전까지 인쇄물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었던 정보에 접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제 아무나 어떤 종류의 정보든 공표할 수 있고, 세계 어디서든 인터넷을 통해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이 말한 예술 작품의 '아우라', 지난날 예술 작품 복제에 신비감을 더해주었던 '아우라'는 기술적 복제로 인해 사라졌다. 지금은 예술 작품이 (심지어 원작과 똑같이) 복제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소비자 수십억 명에게 팔릴 수도 있다."(560-1)


"근대 후기 세계의 넷째 기둥은 세속화다. 네 기둥 가운데 세속화는 세계적 수준에서 문화적·정신적·지적·예술적 산물에 가장 미묘한 영향을 준다. 대중, 근대 국가, 과학과 기술은 모두 '예술과 문학'이 없는 지역에서도 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의 현존 또는 부재는 모두 정신적·지적·예술적 산물의 핵심 요소다. 예술은 인간 세계와 영원한 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변성과 영원성의 충돌을 끊임없이 묘사했으며, 그런 묘사를 통해 예술적 실천을 정당화하고 가장 깊은 의미를 표현했다. 이렇게 가변성의 조건과 거룩한 장소의 근본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세계관은 예술의 신성한 차원을 옹호한다. 그런 세계관은 인간이 존재의 신비에 반응할 때 '신성한 영감'을 받는다고 암시한다. 이런 이유로 1789년 이후 이른바 '무신론으로의 전환'은 인류의 모든 지적·예술적·정신적 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혁명이 물려준 '뒤집힌 세상'에서 신에게는 인간의 산물이라는 딱지가 붙었다."(564-5)


"기술, 국가, 대중에 대한 숭배는 세속화 과정의 완결과 맞물려 무솔리니, 히틀러, 레닌, 스탈린 치하의 국가와 같은 '현대 독재정'을 초래하는 데 일조했다. 1870~1945년의 암흑기 이전과 이후에 지식인들이 다른 세계, 즉 과거와 미래의 유토피아를 이상화하는 쪽으로 기울었던 것은 거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이번에도 19세기는 지적 추세의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대부분의 '대중'이 구체제의 신앙심을 고수하긴 했지만, 이제는 신을 대신할 존재를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식인들은 이를테면 니체가 구상한 '초인'이나, 막스 슈티르너의 '슬픈 프로메테우스' 같은 절대적이고 구속받지 않은 개인주의자를 제시했는데, 이런 인물형들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때로는 초인을 희화화하는 소설 속 세상과, 현실에서 초인을 자처하는 자들이 제안하고 만들어내고자 하는 잔혹하고 로봇 같은 국가─적을 학살하고 반대파를 말살해 구현하려는 유토피아─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574)


"견고한 부르주아지가 지배한 시장은 세계를 주도하는 힘이면서도 '질서 위반'을 허용했고 지금도 허용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예술가는 부르주아지를 즐겁헤 하려면 그들에게 '충격'을 주어야 한다." "보수주의, '반동', 구체제에 대한 온건한 향수가 남아 있긴 했지만, 학교와 대학, 학술원, 그 밖의 국영 기관에서는 전위 예술 운동이 융성했다. 전위 예술가들은 제도화된 사상 학파들과 경쟁하기를 원했다. 전위 예술가들, 그리고 근대의 새로운 산물인 '비평가'들은 다다이즘부터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운동에 '-주의(이즘)'로 끝나는 이름을 붙였다. 비평가들은 문화 생산 과정에서 공중과 예술가 사이의 중재자가 되었다─다만 비평 활동의 의도치 않은 결과로 그들의 운동은 대개 정치적 중립 지대에 고립되었다." "예술가들, 그리고 '자유로운' 지식인 일반의 절대적인 '무정부 상태', '자유', '특이성'은 시장의 요구였으며, 그런 지식인들이 생산한 '상품'을 홍보하고자 '기벽'이라는 적절한 표현이 동원되었다."(575-6)


"오늘날 포스트모던 세계에는 더이상 전위 예술이랄 것이 없는데, 모든 것이 수용 가능하고 또 실제로 수용되며 시장 자체가 극히 다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책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자신의 사망 소식을 발표한 것으로 유명하다." "새로운 기술은 그런 수완을 확장할 뿐 전혀 제약하지 않는다. 더욱이 개인 발언자와 발화된 메시지의 내용 사이의 새로운 관계는 그 발언에 내재하는 진실의 가치를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발언하는 사람이 실제 발언 내용보다 한없이 더 중요하다. 이는 근대의 성숙기뿐 아니라 포스트모던 세계에서도 가장 강력하고도 위험한 수법이다. 근대 초기에는 이단자가 누구든 간에 이단이 문제였던 반면, 근대 성숙기에는 검열이 약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형태의 사상 '필터링'이 도입되었다." "유명 인사의 축성을 받지 못한 아이디어는 대부분 결실을 맺지 못하고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들리지도 않는다."(578-9)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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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의 역사 - 각주는 어떻게 역사의 증인이 되었는가
앤서니 그래프턴 지음, 김지혜 옮김 / 테오리아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1장 각주─종의 기원


"1백 년 전이라면,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간단히 구분했을 것이다. 곧 텍스트는 설득하고 주는 증명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7세기에조차도 일부 호고가(好古家, antiquary)는 기록을 담은 부록에 〈증빙자료Preuves〉라는 제목을 붙였다. 반면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은 그들의 텍스트가 가장 중요한 증명, 곧 증거에 대한 통계적 분석이나 해석학적 분석의 형태를 띠는 증명을 제공하고, 주는 그 사료만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많은 비평가들은 저자들이 사료를 오독했거나 잘못 해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고 나면 저자들이 주장을 반박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다. 그런 비판들은 대부분의 경우 한가지 일반적이고 문제성 있는 가정─저자들은 그들의 텍스트에 담긴 모든 주장의 증거를 빠짐없이 열거할 수 있다는 가정─에 부분적으로 의지한다. 하지만 사실상 누구도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사료를 전부 다룰 수는 없다. 하나의 주에 그 모두를 인용할 수는 더더욱 없다."(32-3)


"각주를 쌓아 간다고 해서 텍스트의 모든 진술이 검증된 사실로 쌓은 난공불락의 요새에 기대고 있음을 입증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각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첫째, 각주는 설득한다. 각주는 독자에게 역사가가 수용할 만한 양의 연구를 했음을, 그 분야에서 용인될 만한 충분한 연구를 했음을 확신시킨다. 치과 벽에 걸린 면허증처럼, 각주는 역사가가 자문을 구하고 추천을 받기에 〈충분히 훌륭한〉 실무자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역사가가 어떤 구체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둘째, 각주는 역사가가 실제 활용한 주요 사료를 나타낸다. 각주는 보통, 사료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역사가가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비판적인 동시에 개방적인 독자가─부분적으로─그 일을 할 수 있게 충분한 단서를 제공한다. 어떤 장치도 이보다 더 많은 정보를─혹은 더 큰 확신을─줄 수는 없다."(40-1)


"고대 세계와 르네상스 시대의 인습적인 정치사가들은 하나의 수사적 전통 안에서, 말하자면 자신의 동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치인이나 장군으로서 글을 썼다. 그들이 생산한 역사는 사료와 연대 추정보다 미덕과 악덕에 대한 관심을 훨씬 더 크게 반영했다. 그들이 저작은 보편적인 타당성을 주장한다. 그들은 선과 악, 신중하거나 경솔한 언동과 행동의 예,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유효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교훈을 주는 예를 유려한 언변으로 묘사했다. 반대로 근대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명제를 지지하려 할 때조차 한계를 분명히 한다. 각주는 중심 이야기와 연동하지만 또한 확실히 구별되는 부차적인 이야기를 형성한다. 위쪽에 놓인 서사를 지탱하는 사유와 연구 자료를 제시하면서, 각주는 그 서사가 연구 형태, 기회 그리고 역사가가 연구하는 동안 가졌던 구체적인 질문의 종류에 따라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진 산물임을 증명한다."(41-2)


2장 랑케─과학적 역사에 관한 각주


"(2차 사료보다 1차 사료에 의지했던) 랑케는 단순히 자신이 읽고 필사하고 사용했던 것을 쌓아 두기만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1830년대와 1840년대 그의 주요 저서인 《종교개혁 시대의 독일 역사》를 가리켜 독일 기록보관소를 누빈 승리의 행진에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표현했다. 랑케는 유명해진 말로, 이 두툼한 책이 고작해야 역사학의 혁명을 한 모금 들이킨 그 전조일 뿐이라고 예언했다. 〈나는 우리가 더 이상 사료를 모방한 가공물에 근대의 역사를 근거시킬 필요가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직접적인 지식인 경우를 제외하고─동시대 역사가들의 보고서에도 근거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목격자의 설명과 가장 진정서 있고 직접적인 사료들에 근거해 그 역사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인쇄된 텍스트를 찾아내고, 베껴 쓰고, 평가하고, 편집하고, 필사된 텍스트와 대조하는 고된 작업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75-6)


"예를 들어, 종교개혁의 역사에 부록으로 부칠 기록을 준비하면서, 랑케는 〈그 연구에 참여할 독자〉, 〈참여적인 독자〉를 요구하는 서문 원고를 거듭 작성했다. 그는 자신이 해당 사료 혹은 자신이 활용한 사료를 모두 인쇄할 수는 없음을 인정했다. 〈공문서 기록을 통째로 출판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적인 독자라면 최소한 그가 인쇄한 기록을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자에게, 그가 사료에서 비롯된 소소한 언어적 어려움이라고 표현한 것을 극복할 것과, 원사료가 대사건들에 대해 제공하는 〈특별히 생생한〉 설명을 따라갈 것을 촉구했다. 가능하다면, 독자는 본문과 사료를 함께 공부해야 했다." "랑케 자신은 계속해서 새로운 사료를 입수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짜릿한 발견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사료가 자신의 시야를 넓혀 주고 자신을 더 객관적이게 한다고 생각했다."(76-7)


"확실히, 이례적으로 길었던 랑케의 노년에─특히 교사로서 그의 호소가 실패하기 시작했을 때─의심이 일기 시작했다. 랑케가 특정 부류의 기록─베네치아 대사가 상원에 보낸 공식보고서 같은 것─을 과거의 상황이나 사건을 채색한 재구성물로 보지 않고, 그런 상황이나 사건으로 향하는 투명한 창으로 받아들인 것은 부당했음이 자명해졌다. 그런 기록의 작성자는 엄격한 관행의 틀 안에서 그 기록들을 작성했고, 그 청중들에게 자신이 직접 보고들은 것만 보고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일어난 일을 그대로 들려주기보다는 개인적인 이론을 확신시키려는 일이 잦았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주요 기록과 명문가의 문서를 신뢰한 랑케가 충분히 살피지 않고 역사에 대한 특정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이 자명해졌다. 그런 해석은 민족이나 문화에 관한 이야기─처음에 과거에 대한 랑케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이야기─보다 국가와 군주들의 이야기에 우위를 두는 것이었다."(86-7)


3장 역사가는 어떻게 뮤즈를 찾았을까─각주에 이르는 랑케의 길


"랑케는 자신의 출판인인 게오르크 라이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첫 책이 국가의 검열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인지와 같은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또한 한층 더 불안해하며 각주의 문제를 제기했다. 놀랍게도 랑케는 젊은 저자로서 부득이한 경우에만 주를 사용해야 할 것 같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불쾌감을 주는 것들을 가급적 짧게 유지했다. 〈나는 진정한 주석에 열중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했다. 하지만 이제 막 자신의 길을 만들고 자신감을 얻어야 하는 초심자의 연구에서 간접인용은 불가피하다고 느꼈다.〉 랑케는 여전히, 각주가 있음을 알리는 표시로 자신의 텍스트를 망가트리지 않고 진흙이 붙어 부어 오른 발 같은 주석으로 자신의 지면을 더럽히지 않을 방법을 찾고 싶어 했다. 그는 고전작가들의 판본에서 이미 일상적인 관행이 된 것처럼, 페이지마다 혹은 절마다 행수를 제한하고 주는 본문에 맞춰 끝에 둘 것을 제안했다. 랑케는 자신의 저작에서 주석의 존재를 기껏해야 필요악 정도로 여겼다."(91)


"젊고 무명이던 랑케가 자신은 사료고증의 형식적인 측면에는 관심도 없으며 현학적이어 보이는 것을 혐오한다고 공언했을 때, 그는 그저 점잔을 뺀 것이 아니었다. 설사 랑케가 자신의 출판인이 학문성 못지않게 문체에도 신경을 쓴다는 사실을 알았을지라도 말이다." "그는 자신의 텍스트를 하나의 전체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 텍스트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기 위해 자신의 책과 주, 발췌문과 요약문을 뒤졌다. 그는 이미 완성된 텍스트라는 스튜에 출전 표시라는 양념을 뿌리기 위해 그런 양념통을 사용했다. 이는 랑케가 일관되게 실천했던 바였던 것 같다. 노년에 그가 비서들과 함께 그리고 비서들을 통해 작업했을 때에도 그의 방법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젊은이들은 출전의 표시된 사항들을 추적해야 했는데, 랑케는 그저 단서만 줄 뿐이었고 때때로 그것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이 점은 〈언제나 랑케에게 납득시키기 아주 어려운 점〉이었다."(92-3)


"역사는 역사적 과거와 역사가의 연구라는 이중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는커녕, 랑케는 학계 기술자들의 추한 장치로 자신의 강력한 서사와 보기 좋게 잘 짜인 전투장면을 망가뜨리는 일을 피했다." "그는 최상의 역사적 서사는 고전적인 것이며 주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래서 학문적인 장치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런 장치 없이 글을 쓰기를 갈망했다." "랑케는 무엇보다도 〈오직 있었던 그대로만 말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러 사람이 보여 주었듯이, 역사가로서 랑케의 의도에 관한 이 유명한 격언은 사실 훨씬 더 유명한 투키디데스의 구절을 전략적으로 배치한 인용문이었다. 자신의 진지하고 정확한 설명을 위한 모델로 그리스의 정치사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을 인용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작품에 해설을 덧붙여 두 사람의 텍스트 사이에 있는 문학적 관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을 반길 리 없었다."(96-8)


4장 각주와 계몽사상가─계몽주의의 간주곡


"역사서술에서 서사와 비평적 성찰의 결합은 19세기가 동트기 전에─혹은 랑케 이전에─확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새로운 가설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예를 들어, 1768년에 티소가 《문인들의 건강에 관하여》라는 정교한 연구서를 출간했을 때, 티소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프랑스 저술에서 나날이 훨씬 더 가혹하게 인용이 추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용을 유지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해야 한다고 느꼈다. 절대 완벽하며 후속세대가 더 발전시킬 필요 없는 저작의 저자만이 인용을 멈출 권리가 있다고 티소는 설명했다. 티소 자신의 경우는 독자가 같은 문제를 계속 공격할 것이라 예상되기 때문에 자신이 사용한 사료를 표기해야 한다고 느꼈다. 결국 그는 어떤 식으로도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을 곳인 난외에 몇 마디 말을 배치해 자신이 의거한 작가들에게 〈그들에게 빚지고 있는 존경〉을 보인다고 해도 〈해로울 것이 없음〉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127-9)


"(기번을 비판한) 데이비스와 기번 모두 진지한 역사서에는 주가 있어야 한다고 전제했다." "각주는 잉글랜드의 위대한 계몽주의 역사가들이 그들이 것으로 만들기 전에 이미 역사가들의 표준적인 작업 절차의 일환이 되어 있었다." "1776년 4월 8일 데이비드 흄이 출판인 윌리엄 스트레이헨에게 보낸 편지는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의 각주가 처음엔 미주였다는 것 그리고 흄이 불평하고 난 뒤에야 그 주들이 기번의 지면 위에서 이제 우리가 그것들의 전통적인 제 위치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 편지는 또한 기번의 각주작성의 기술적인, 곧 고증의 측면이 설명이나 형태에서 그리 혁신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흄은 역사학의 텍스트에서 간접인용을 할 때 그 진술의 전거를 확인시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도 새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그런 주가 편리한 위치, 곧 지면의 발치나 난외를 차지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권고했다."(136-8)


"기번이 미주로 처리한 《로마제국 쇠망사》 1권을 내놓기 10년 전에 이미 유스투스 뫼저는 화려하게 사료고증을 거친 《오스나브뤼크의 역사》의 예비 초판 인쇄를 마쳤다. 예외적인 개인들이 도전한 전통적 범주를 폐기하는 일보다는 그들의 업적을 주목하는 일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던 에두아르트 푸어터는 역사서술을 다룬 20세기 초의 역사가로서 뫼저의 업적이 (비록 내용은 지극히 보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법과 표현에서 놀랍도록 근대적이며 심지어 급진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푸어터가 인정했듯이, 뫼저는 자신이 연구한 사료를 숨김없이 밝히려고 노력했다. 요컨대,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사회, 심지어 전혀 다른 도서관에서 지내며 연구했던 18세기의 여러 역사가들이 각주를 작성했다. 역설적이지만, 역사학의 고증을 분명하게 제시하라는 요구가 확립된 시기는 현학을 세속적 미신의 한 형태로 여겨 경멸했던 계몽사상가들의 시대였다."(142-3)


5장 미래로 돌아가다 1 ─드 투, 세부사실을 고증하다


"탁월한 법률가이자 라틴어 학자였던 자크-오귀스트 드 투는 1544년부터 1607년에 이르는 자기 시대 유럽의 역사를 직접 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보댕과 마찬가지로, 드 투는 프랑스의 정치체제가 종교 전쟁에서 몰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보댕과 달리, 그는 계속해서 프랑스 가톨릭이─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말할 것도 없고─종교 전쟁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많은 비난을 샀다고 믿었다. 드 투는 정직하고 불편부당한 서사가 사회적 정치적 평화의 토대에 기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기즈 공 같은 강력한 가톨릭 악당의 죄와 자신의 친한 친구 조제프 스칼리저 같이 학자의 면모를 갖춘 프로테스탄트의 무고함과 고귀함을 입증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서사가 불관용과 타락으로 찢긴 것을 종교적 관용과 공적인 삶의 엄격함으로 봉합할 수 있음을 증명하게 되리라는 것이다."(176-7)


"드 투는 (직접 증언을 근거로 삼아) 가능한 한 자신의 증거와 독자 사이에 자신의 라틴 문체를 제외하고 어떤 장애물도 두지 않으려고 했다." "동시대의 역사에서는 자연스럽게 직접적인 증언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드 투에게는 다른 자원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방대한 서재를 자신과 다른 이들의 연구조사를 위한 하나의 공적 토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직무상의 위치 덕분에 자신이 접근할 수 있었던 국가 문서들을 사용했다. 랑케나 기번보다 훨씬 먼저 비평적 역사─저자가 동기를 찾고 원인을 확인하느라 부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상에 나타난 몇 개월의 오차를 두고 고심했던 종류의 역사─가 존재했다. 드 투가 이런 종류의 역사를 쓴 유일한 저자는 아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잉글랜드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로버트 코튼이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목격자 증원과 필사본에 의지했던 캄덴 역시 놀랄 만큼 비슷한 예를 제공한다."(183-4)


"드 투가 유일하게 거부한 일은 그저 주를 덧붙이는 일뿐이었다. 주를 덧붙였다면 동시대의 모든 독자가, 나중에 자신의 작업장을 찾을 방문객을 위해 그가 비축해 둔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해적판 《현대사》를 〈정치적〉 주해로 치장한 멜키오르 골다스트에게 통역할 수 없는 라틴어로 호통을 쳤다. 그리고 드 투의 명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드 투는 그 작품의 토대에 들인 그 모든 비평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상부구조는 고전적인 것으로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는 확실히 각주가 힘찬 그리스 로마식 열주와 지붕선을 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드 투의 측근들─누구보다도 로마의 법률가들, 곧 완전하고 정확한 인용이나 '주장'의 전통이 고대 세계에 이미 존재했던 학과의 실무자들로 이루어진 그의 측근들─사이에서 각주와 결부된 문학적인 문제와 지적인 문제 모두 많은 논의를 거쳤기 때문이다."(187-8)


6장 미래로 돌아가다 2 ─교회사가와 호고가의 개미 같은 근성


"1677년에 키르허는 암스테르담에서 웅장한 도판들을 수록해 중국의 종교적 유물과 세속적 유물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경이에 관한 저서를 발표했다." "모든 점에서 키르허는 장소, 신분, 출처를 확인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가령, 책 끝에 등장하는 비문의 사본에는 발견 장소와 일자가 함께 제시되었고 중국인 마테우스가 〈1644년 로마에서···원본으로부터 이 비문을 직접 옮겨 적었다〉는 점을 명시했다." "그가 옮겨 쓴 1차 사료들이 서로 모순될 때조차 그는 그것들을 그저 옮겨 쓰기만 했고 독자들이 그 불일치를 걱정하게 내버려 두었다." "키르허는 드 투와 전혀 다른 역사 연구 모델─어울리지 않는 생소한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백과사전적 적극성을 특징으로 하는 모델, 같은 지면 위에서 여러 목소리가 말하도록 허용하고 여러 종류의 문자가 등장하도록 허용하는 모델─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그는 사실을 엮어 감동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일보다 사실을 확인하는 데 더 관심을 보였다."(199-203)


"정치사가는 모든 증거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대조하는 일을 고집했을 때조차 실용적인 통찰력과 무엇보다 고급한 문체를 칭찬했다. 교회사가는 지식을 높이 평가했다. 야누스 니키우스 에리트라이우스는 바로니오의 생애에 관해 쓰면서 바로니오의 경건함에 전율한 것이 아니라, 그가 〈거의 무한한 수의 책 속에 흩어져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그 모두에 통달하고, 각 주장에 대한 어떤 판단에 도달하고, 최종적으로 학식 있고 정확한 방식으로 글쓰기에 몰두한〉 엄청난 에너지에 전율했다."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른바 혁신이라는 것이 실은 복원임을 입증할 사료를 찾고 출판하는 방대한 작업에 이에 견줄만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매튜 파커는 대리인을 파견해 잉글랜드의 섬들을 오가며 앵글로색슨어와 라틴어로 된 중세 잉글랜드 교회의 필사본 유물들을 찾게 했다."(216-7)


"묵직하게 사료를 제시한다고 해서 엄격한 객관성이 부여되지는 혹은 함축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파커는 원본 원고의 복사본에 적힌 내용을 담은 새 페이지로 빈틈을 메워 자신의 필사본을 〈개선하려고〉 전문 필경사를 고용했다. 9세기 알프레드 대왕의 생애를 다룬 아세르 주교의 전기를 출간했을 때, 파커는 이제 사라지고 없는 그 필사본의 철자, 그리고 심지어 고전적이지 않은 어휘까지 살그머니 바꾸어 버렸다." "가톨릭 학자들 역시─때로는 아주 강압적으로─그들의 증거를 조작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타콤의 개방은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삶과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영적 열광을 만들어 냈다. 가톨릭 세계 도처에서 강력한 통치자와 부유한 도시들이 그들의 교회에 안치할 순교자의 유골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카타콤을 담당한 로마의 학자들은 이에 동조하여 (순교자들의) 유골을 수습해 골격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을 붙였다."(218-20)


7장 학식의 심연 속 명석함과 판명함─근대적 각주의 데카르트적 기원


"1700년경에 논쟁적인 문제에 몰두했던 작가─다른 작품들의 출전 표시에 나타난 모든 오류를 담고자 했던 피에르 벨의 《역사 비평 사전》이나 모세5경의 진위 여부를 분석하면서 이를 사료고증으로 뒷받침한 리샤르 시몽의 《구약의 비판적 역사》 같은 작업들에서─는 모두 자신들이 지뢰밭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럽게 각주는 숨은 공격과 공공연한 공격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으로서 역사학적인 주제와 문헌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많은 작가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17세기에는 베이컨, 데카르트, 보일, 파스칼이 고대의 과학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목도되었다. 프랑스의 프롱드와 영국의 청교도가 왕의 정치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목격되었고, 라 페레르와 스피노자가 성서의 역사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권위와 증거의 문제가 모든 면에서 대두했다. 17세기 말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지적 권위에 관한 이런 저런 물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267)


"그러나 과거를 연구하는 사람은 특별한 문제에 직면했다. 벨은 17세기 말이 경과하면서 성직자들이 보인 불관용의 일반적 형태에 저항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학문분과 전체에 대한 훨씬 더 근원적인 공격에 맞서야 했던 많은 유럽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폭넓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새로운 철학을 위한 프로그램을 포함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역사학적 지식을 고사시키는 비평도 포함하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역사학과 인문학을 유익함과 엄격함에서 여행보다 나을 것 없는 유희로 폄훼했다." "벨과 그를 따라 각주를 달았던 동료들은 (수학적 형식을 역사 연구에 직접 적용하려 했던 학자들과 달리) 더 건설적인 방식으로 데카르트에 답했다." "벨은 역사의 〈확실성〉이 비록 수학의 확실성과 다르지만, 〈수학의 심오한 추상성〉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며 인간의 삶에 훨씬 더 잘 적용되며, 심지어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훨씬 더 확실하다〉고 주장했다."(267-71)


"그러나 기번이 오래 전에 지적했듯이 그리고 더 최근에 리프킹이 동의했듯이, 벨의 설명 모델에는 여전히 하나의 실질적인 특징이 결여되어 있었다. 바로 경제다. 벨은 그의 글을 급하게 썼고 이후 판본에서 본문이 아니라 해설에 새로운 정보를 추가했다. 이는 너무 복잡해서─그리고 때로는 너무 자기 모순적이어서─독자는 박식의 늪 같은 데 빠진 자신을 발견했다. 때때로 본문은 독자에게 확실한 안내나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제공하기보다 몇몇 일화를 제공하는 데에 그쳤다." "벨이 공격한 바로 그 설명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여러 해의 시간이 걸렸고 여러 지적 진영에서 온 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벨의 적수 가운데 한 사람인 동료 위그노이자 망명 지식인인 장 르클레르크는 벨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독자를 더 많이 배려한 각주 이론을 고안해 냈다." "르클레르크가 보기에 역사가가 기꺼이 각주를 사용하려는 것은 비판적 합리성의 표시였다."(278-81)


에필로그 몇 가지 결론적 각주


"17세기와 18세기 문자공화국에서 벨과 기번의 각주는 그들에게 뻔뻔함과 박식함이라는 두 가지 평판을 모두 안겼다. 그들의 장치는 그들이 자신들의 서재를 잘 활용했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몇몇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수사적인 서사보다 독창적인 가설에 더 풍성한 보상을 안겼던 19세기 독일의 새로운 대학 체제에서는, 텍스트보다 각주와 고증한 사료 부록이 누군가를 더 유명하게 만들 수 있었고, 비평적인 주장이 건설적인 주장보다 더 많은 모방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하인리히 니센처럼 그 많은 총명한 젊은이들이 주석을 잘 단 그들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사료비평의 문제를 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침내 내용과 형식이 서로 일치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 주요 국가의 기록보관소가 열람실을 개방했다. 허가받은 독자들이 그곳에 보관된 (거의) 모든 사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292-3)


"출간된 것이든 출간되지 않은 것이든 사료에 아무리 접근한다 해도 역사의 미해결 문제를 모조리 해결할 수는 없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각주가 표준적인 학문적 도구의 지위로 부상하면서─많은 경우─각주의 양식은 크게 축약된 기록 인용의 목록으로 쇠퇴해 버렸다. 랑케는 근대 역사학의 장치를 창조한 연금술사로 여겨지지만, 사실 각주를 싫어했고 각주를 만드는 데에서는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나 책의 부록을 쓸 때 기울였던 세심한 주의와 창의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각주가 가장 눈부시게 번성했던 때는 그것이 본문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물론이고 본문의 서사에 대한 역설적인 언급으로도 기여했던 18세기였다. 19세기에 각주는 비극적 코러스의 탁월한 역할을 상실했다. 많은 카르멘들처럼 각주는 노동자로 전락해 거대하고 더러운 공장에 갇힌 자신을 발견했다. 예술로서 시작된 것이 어쩔 수 없이 일상이 되었다."(295-6)


"역사가의 간접인용과 직접인용의 관행이 그의 지침에 부합하는 일은 드물다. 각주는 결코 해당 작품에서 사실에 관한 모든 진술을 뒷받침한 적이 없으며 뒷받침할 수도 없다. 모든 실수를 막거나 모든 불일치를 없앨 수 있는 장치는 없다. 현명한 역사가는 자신의 일이 페넬로페의 길쌈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안다. 무늬와 색상의 조합이 끝없이 변하면서 각주와 텍스트는 계속 함께 할 것이다. 안정성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 조건지워져 있고 오류의 가능성이 뚜렷한 각주만이 과거에 관한 진술이 확인 가능한 사료에서 도출되었음을 우리에게 보증한다. 그리고 그 점이 우리가 그 진술을 신뢰해야 하는 유일한 근거이다." "각주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주는 예술과 과학의 불가피하고 혼란스러운 혼합, 곧 근대 역사학의 혼란스럽지만 불가피한 일부를 형성한다."(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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