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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의 역사 - 각주는 어떻게 역사의 증인이 되었는가
앤서니 그래프턴 지음, 김지혜 옮김 / 테오리아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1장 각주─종의 기원
"1백 년 전이라면,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간단히 구분했을 것이다. 곧 텍스트는 설득하고 주는 증명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17세기에조차도 일부 호고가(好古家, antiquary)는 기록을 담은 부록에 〈증빙자료Preuves〉라는 제목을 붙였다. 반면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은 그들의 텍스트가 가장 중요한 증명, 곧 증거에 대한 통계적 분석이나 해석학적 분석의 형태를 띠는 증명을 제공하고, 주는 그 사료만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 많은 비평가들은 저자들이 사료를 오독했거나 잘못 해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고 나면 저자들이 주장을 반박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다. 그런 비판들은 대부분의 경우 한가지 일반적이고 문제성 있는 가정─저자들은 그들의 텍스트에 담긴 모든 주장의 증거를 빠짐없이 열거할 수 있다는 가정─에 부분적으로 의지한다. 하지만 사실상 누구도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사료를 전부 다룰 수는 없다. 하나의 주에 그 모두를 인용할 수는 더더욱 없다."(32-3)
"각주를 쌓아 간다고 해서 텍스트의 모든 진술이 검증된 사실로 쌓은 난공불락의 요새에 기대고 있음을 입증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각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첫째, 각주는 설득한다. 각주는 독자에게 역사가가 수용할 만한 양의 연구를 했음을, 그 분야에서 용인될 만한 충분한 연구를 했음을 확신시킨다. 치과 벽에 걸린 면허증처럼, 각주는 역사가가 자문을 구하고 추천을 받기에 〈충분히 훌륭한〉 실무자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역사가가 어떤 구체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둘째, 각주는 역사가가 실제 활용한 주요 사료를 나타낸다. 각주는 보통, 사료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역사가가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비판적인 동시에 개방적인 독자가─부분적으로─그 일을 할 수 있게 충분한 단서를 제공한다. 어떤 장치도 이보다 더 많은 정보를─혹은 더 큰 확신을─줄 수는 없다."(40-1)
"고대 세계와 르네상스 시대의 인습적인 정치사가들은 하나의 수사적 전통 안에서, 말하자면 자신의 동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정치인이나 장군으로서 글을 썼다. 그들이 생산한 역사는 사료와 연대 추정보다 미덕과 악덕에 대한 관심을 훨씬 더 크게 반영했다. 그들이 저작은 보편적인 타당성을 주장한다. 그들은 선과 악, 신중하거나 경솔한 언동과 행동의 예,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유효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교훈을 주는 예를 유려한 언변으로 묘사했다. 반대로 근대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명제를 지지하려 할 때조차 한계를 분명히 한다. 각주는 중심 이야기와 연동하지만 또한 확실히 구별되는 부차적인 이야기를 형성한다. 위쪽에 놓인 서사를 지탱하는 사유와 연구 자료를 제시하면서, 각주는 그 서사가 연구 형태, 기회 그리고 역사가가 연구하는 동안 가졌던 구체적인 질문의 종류에 따라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진 산물임을 증명한다."(41-2)
2장 랑케─과학적 역사에 관한 각주
"(2차 사료보다 1차 사료에 의지했던) 랑케는 단순히 자신이 읽고 필사하고 사용했던 것을 쌓아 두기만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1830년대와 1840년대 그의 주요 저서인 《종교개혁 시대의 독일 역사》를 가리켜 독일 기록보관소를 누빈 승리의 행진에서 얻은 결과물이라고 표현했다. 랑케는 유명해진 말로, 이 두툼한 책이 고작해야 역사학의 혁명을 한 모금 들이킨 그 전조일 뿐이라고 예언했다. 〈나는 우리가 더 이상 사료를 모방한 가공물에 근대의 역사를 근거시킬 필요가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직접적인 지식인 경우를 제외하고─동시대 역사가들의 보고서에도 근거할 필요가 없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목격자의 설명과 가장 진정서 있고 직접적인 사료들에 근거해 그 역사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인쇄된 텍스트를 찾아내고, 베껴 쓰고, 평가하고, 편집하고, 필사된 텍스트와 대조하는 고된 작업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75-6)
"예를 들어, 종교개혁의 역사에 부록으로 부칠 기록을 준비하면서, 랑케는 〈그 연구에 참여할 독자〉, 〈참여적인 독자〉를 요구하는 서문 원고를 거듭 작성했다. 그는 자신이 해당 사료 혹은 자신이 활용한 사료를 모두 인쇄할 수는 없음을 인정했다. 〈공문서 기록을 통째로 출판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적인 독자라면 최소한 그가 인쇄한 기록을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자에게, 그가 사료에서 비롯된 소소한 언어적 어려움이라고 표현한 것을 극복할 것과, 원사료가 대사건들에 대해 제공하는 〈특별히 생생한〉 설명을 따라갈 것을 촉구했다. 가능하다면, 독자는 본문과 사료를 함께 공부해야 했다." "랑케 자신은 계속해서 새로운 사료를 입수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짜릿한 발견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사료가 자신의 시야를 넓혀 주고 자신을 더 객관적이게 한다고 생각했다."(76-7)
"확실히, 이례적으로 길었던 랑케의 노년에─특히 교사로서 그의 호소가 실패하기 시작했을 때─의심이 일기 시작했다. 랑케가 특정 부류의 기록─베네치아 대사가 상원에 보낸 공식보고서 같은 것─을 과거의 상황이나 사건을 채색한 재구성물로 보지 않고, 그런 상황이나 사건으로 향하는 투명한 창으로 받아들인 것은 부당했음이 자명해졌다. 그런 기록의 작성자는 엄격한 관행의 틀 안에서 그 기록들을 작성했고, 그 청중들에게 자신이 직접 보고들은 것만 보고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일어난 일을 그대로 들려주기보다는 개인적인 이론을 확신시키려는 일이 잦았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주요 기록과 명문가의 문서를 신뢰한 랑케가 충분히 살피지 않고 역사에 대한 특정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였음이 자명해졌다. 그런 해석은 민족이나 문화에 관한 이야기─처음에 과거에 대한 랑케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이야기─보다 국가와 군주들의 이야기에 우위를 두는 것이었다."(86-7)
3장 역사가는 어떻게 뮤즈를 찾았을까─각주에 이르는 랑케의 길
"랑케는 자신의 출판인인 게오르크 라이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첫 책이 국가의 검열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인지와 같은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또한 한층 더 불안해하며 각주의 문제를 제기했다. 놀랍게도 랑케는 젊은 저자로서 부득이한 경우에만 주를 사용해야 할 것 같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불쾌감을 주는 것들을 가급적 짧게 유지했다. 〈나는 진정한 주석에 열중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했다. 하지만 이제 막 자신의 길을 만들고 자신감을 얻어야 하는 초심자의 연구에서 간접인용은 불가피하다고 느꼈다.〉 랑케는 여전히, 각주가 있음을 알리는 표시로 자신의 텍스트를 망가트리지 않고 진흙이 붙어 부어 오른 발 같은 주석으로 자신의 지면을 더럽히지 않을 방법을 찾고 싶어 했다. 그는 고전작가들의 판본에서 이미 일상적인 관행이 된 것처럼, 페이지마다 혹은 절마다 행수를 제한하고 주는 본문에 맞춰 끝에 둘 것을 제안했다. 랑케는 자신의 저작에서 주석의 존재를 기껏해야 필요악 정도로 여겼다."(91)
"젊고 무명이던 랑케가 자신은 사료고증의 형식적인 측면에는 관심도 없으며 현학적이어 보이는 것을 혐오한다고 공언했을 때, 그는 그저 점잔을 뺀 것이 아니었다. 설사 랑케가 자신의 출판인이 학문성 못지않게 문체에도 신경을 쓴다는 사실을 알았을지라도 말이다." "그는 자신의 텍스트를 하나의 전체로 만들었다. 그런 다음 그 텍스트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기 위해 자신의 책과 주, 발췌문과 요약문을 뒤졌다. 그는 이미 완성된 텍스트라는 스튜에 출전 표시라는 양념을 뿌리기 위해 그런 양념통을 사용했다. 이는 랑케가 일관되게 실천했던 바였던 것 같다. 노년에 그가 비서들과 함께 그리고 비서들을 통해 작업했을 때에도 그의 방법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젊은이들은 출전의 표시된 사항들을 추적해야 했는데, 랑케는 그저 단서만 줄 뿐이었고 때때로 그것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이 점은 〈언제나 랑케에게 납득시키기 아주 어려운 점〉이었다."(92-3)
"역사는 역사적 과거와 역사가의 연구라는 이중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는 점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는커녕, 랑케는 학계 기술자들의 추한 장치로 자신의 강력한 서사와 보기 좋게 잘 짜인 전투장면을 망가뜨리는 일을 피했다." "그는 최상의 역사적 서사는 고전적인 것이며 주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래서 학문적인 장치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런 장치 없이 글을 쓰기를 갈망했다." "랑케는 무엇보다도 〈오직 있었던 그대로만 말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러 사람이 보여 주었듯이, 역사가로서 랑케의 의도에 관한 이 유명한 격언은 사실 훨씬 더 유명한 투키디데스의 구절을 전략적으로 배치한 인용문이었다. 자신의 진지하고 정확한 설명을 위한 모델로 그리스의 정치사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을 인용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작품에 해설을 덧붙여 두 사람의 텍스트 사이에 있는 문학적 관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을 반길 리 없었다."(96-8)
4장 각주와 계몽사상가─계몽주의의 간주곡
"역사서술에서 서사와 비평적 성찰의 결합은 19세기가 동트기 전에─혹은 랑케 이전에─확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새로운 가설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예를 들어, 1768년에 티소가 《문인들의 건강에 관하여》라는 정교한 연구서를 출간했을 때, 티소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프랑스 저술에서 나날이 훨씬 더 가혹하게 인용이 추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용을 유지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해야 한다고 느꼈다. 절대 완벽하며 후속세대가 더 발전시킬 필요 없는 저작의 저자만이 인용을 멈출 권리가 있다고 티소는 설명했다. 티소 자신의 경우는 독자가 같은 문제를 계속 공격할 것이라 예상되기 때문에 자신이 사용한 사료를 표기해야 한다고 느꼈다. 결국 그는 어떤 식으로도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을 곳인 난외에 몇 마디 말을 배치해 자신이 의거한 작가들에게 〈그들에게 빚지고 있는 존경〉을 보인다고 해도 〈해로울 것이 없음〉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127-9)
"(기번을 비판한) 데이비스와 기번 모두 진지한 역사서에는 주가 있어야 한다고 전제했다." "각주는 잉글랜드의 위대한 계몽주의 역사가들이 그들이 것으로 만들기 전에 이미 역사가들의 표준적인 작업 절차의 일환이 되어 있었다." "1776년 4월 8일 데이비드 흄이 출판인 윌리엄 스트레이헨에게 보낸 편지는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의 각주가 처음엔 미주였다는 것 그리고 흄이 불평하고 난 뒤에야 그 주들이 기번의 지면 위에서 이제 우리가 그것들의 전통적인 제 위치라고 생각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 편지는 또한 기번의 각주작성의 기술적인, 곧 고증의 측면이 설명이나 형태에서 그리 혁신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흄은 역사학의 텍스트에서 간접인용을 할 때 그 진술의 전거를 확인시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도 새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그런 주가 편리한 위치, 곧 지면의 발치나 난외를 차지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권고했다."(136-8)
"기번이 미주로 처리한 《로마제국 쇠망사》 1권을 내놓기 10년 전에 이미 유스투스 뫼저는 화려하게 사료고증을 거친 《오스나브뤼크의 역사》의 예비 초판 인쇄를 마쳤다. 예외적인 개인들이 도전한 전통적 범주를 폐기하는 일보다는 그들의 업적을 주목하는 일에 훨씬 더 적극적이었던 에두아르트 푸어터는 역사서술을 다룬 20세기 초의 역사가로서 뫼저의 업적이 (비록 내용은 지극히 보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방법과 표현에서 놀랍도록 근대적이며 심지어 급진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푸어터가 인정했듯이, 뫼저는 자신이 연구한 사료를 숨김없이 밝히려고 노력했다. 요컨대,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사회, 심지어 전혀 다른 도서관에서 지내며 연구했던 18세기의 여러 역사가들이 각주를 작성했다. 역설적이지만, 역사학의 고증을 분명하게 제시하라는 요구가 확립된 시기는 현학을 세속적 미신의 한 형태로 여겨 경멸했던 계몽사상가들의 시대였다."(142-3)
5장 미래로 돌아가다 1 ─드 투, 세부사실을 고증하다
"탁월한 법률가이자 라틴어 학자였던 자크-오귀스트 드 투는 1544년부터 1607년에 이르는 자기 시대 유럽의 역사를 직접 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보댕과 마찬가지로, 드 투는 프랑스의 정치체제가 종교 전쟁에서 몰락하는 것을 목격했다. 보댕과 달리, 그는 계속해서 프랑스 가톨릭이─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은 말할 것도 없고─종교 전쟁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많은 비난을 샀다고 믿었다. 드 투는 정직하고 불편부당한 서사가 사회적 정치적 평화의 토대에 기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것은 기즈 공 같은 강력한 가톨릭 악당의 죄와 자신의 친한 친구 조제프 스칼리저 같이 학자의 면모를 갖춘 프로테스탄트의 무고함과 고귀함을 입증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서사가 불관용과 타락으로 찢긴 것을 종교적 관용과 공적인 삶의 엄격함으로 봉합할 수 있음을 증명하게 되리라는 것이다."(176-7)
"드 투는 (직접 증언을 근거로 삼아) 가능한 한 자신의 증거와 독자 사이에 자신의 라틴 문체를 제외하고 어떤 장애물도 두지 않으려고 했다." "동시대의 역사에서는 자연스럽게 직접적인 증언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드 투에게는 다른 자원도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방대한 서재를 자신과 다른 이들의 연구조사를 위한 하나의 공적 토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직무상의 위치 덕분에 자신이 접근할 수 있었던 국가 문서들을 사용했다. 랑케나 기번보다 훨씬 먼저 비평적 역사─저자가 동기를 찾고 원인을 확인하느라 부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간상에 나타난 몇 개월의 오차를 두고 고심했던 종류의 역사─가 존재했다. 드 투가 이런 종류의 역사를 쓴 유일한 저자는 아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잉글랜드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로버트 코튼이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목격자 증원과 필사본에 의지했던 캄덴 역시 놀랄 만큼 비슷한 예를 제공한다."(183-4)
"드 투가 유일하게 거부한 일은 그저 주를 덧붙이는 일뿐이었다. 주를 덧붙였다면 동시대의 모든 독자가, 나중에 자신의 작업장을 찾을 방문객을 위해 그가 비축해 둔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해적판 《현대사》를 〈정치적〉 주해로 치장한 멜키오르 골다스트에게 통역할 수 없는 라틴어로 호통을 쳤다. 그리고 드 투의 명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드 투는 그 작품의 토대에 들인 그 모든 비평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상부구조는 고전적인 것으로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그는 확실히 각주가 힘찬 그리스 로마식 열주와 지붕선을 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드 투의 측근들─누구보다도 로마의 법률가들, 곧 완전하고 정확한 인용이나 '주장'의 전통이 고대 세계에 이미 존재했던 학과의 실무자들로 이루어진 그의 측근들─사이에서 각주와 결부된 문학적인 문제와 지적인 문제 모두 많은 논의를 거쳤기 때문이다."(187-8)
6장 미래로 돌아가다 2 ─교회사가와 호고가의 개미 같은 근성
"1677년에 키르허는 암스테르담에서 웅장한 도판들을 수록해 중국의 종교적 유물과 세속적 유물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경이에 관한 저서를 발표했다." "모든 점에서 키르허는 장소, 신분, 출처를 확인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가령, 책 끝에 등장하는 비문의 사본에는 발견 장소와 일자가 함께 제시되었고 중국인 마테우스가 〈1644년 로마에서···원본으로부터 이 비문을 직접 옮겨 적었다〉는 점을 명시했다." "그가 옮겨 쓴 1차 사료들이 서로 모순될 때조차 그는 그것들을 그저 옮겨 쓰기만 했고 독자들이 그 불일치를 걱정하게 내버려 두었다." "키르허는 드 투와 전혀 다른 역사 연구 모델─어울리지 않는 생소한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백과사전적 적극성을 특징으로 하는 모델, 같은 지면 위에서 여러 목소리가 말하도록 허용하고 여러 종류의 문자가 등장하도록 허용하는 모델─을 제공했다. 무엇보다 그는 사실을 엮어 감동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일보다 사실을 확인하는 데 더 관심을 보였다."(199-203)
"정치사가는 모든 증거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대조하는 일을 고집했을 때조차 실용적인 통찰력과 무엇보다 고급한 문체를 칭찬했다. 교회사가는 지식을 높이 평가했다. 야누스 니키우스 에리트라이우스는 바로니오의 생애에 관해 쓰면서 바로니오의 경건함에 전율한 것이 아니라, 그가 〈거의 무한한 수의 책 속에 흩어져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그 모두에 통달하고, 각 주장에 대한 어떤 판단에 도달하고, 최종적으로 학식 있고 정확한 방식으로 글쓰기에 몰두한〉 엄청난 에너지에 전율했다."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른바 혁신이라는 것이 실은 복원임을 입증할 사료를 찾고 출판하는 방대한 작업에 이에 견줄만한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매튜 파커는 대리인을 파견해 잉글랜드의 섬들을 오가며 앵글로색슨어와 라틴어로 된 중세 잉글랜드 교회의 필사본 유물들을 찾게 했다."(216-7)
"묵직하게 사료를 제시한다고 해서 엄격한 객관성이 부여되지는 혹은 함축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파커는 원본 원고의 복사본에 적힌 내용을 담은 새 페이지로 빈틈을 메워 자신의 필사본을 〈개선하려고〉 전문 필경사를 고용했다. 9세기 알프레드 대왕의 생애를 다룬 아세르 주교의 전기를 출간했을 때, 파커는 이제 사라지고 없는 그 필사본의 철자, 그리고 심지어 고전적이지 않은 어휘까지 살그머니 바꾸어 버렸다." "가톨릭 학자들 역시─때로는 아주 강압적으로─그들의 증거를 조작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타콤의 개방은 초기 그리스도교도의 삶과 예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영적 열광을 만들어 냈다. 가톨릭 세계 도처에서 강력한 통치자와 부유한 도시들이 그들의 교회에 안치할 순교자의 유골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카타콤을 담당한 로마의 학자들은 이에 동조하여 (순교자들의) 유골을 수습해 골격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을 붙였다."(218-20)
7장 학식의 심연 속 명석함과 판명함─근대적 각주의 데카르트적 기원
"1700년경에 논쟁적인 문제에 몰두했던 작가─다른 작품들의 출전 표시에 나타난 모든 오류를 담고자 했던 피에르 벨의 《역사 비평 사전》이나 모세5경의 진위 여부를 분석하면서 이를 사료고증으로 뒷받침한 리샤르 시몽의 《구약의 비판적 역사》 같은 작업들에서─는 모두 자신들이 지뢰밭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럽게 각주는 숨은 공격과 공공연한 공격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으로서 역사학적인 주제와 문헌학적인 주제를 다루는 많은 작가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17세기에는 베이컨, 데카르트, 보일, 파스칼이 고대의 과학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목도되었다. 프랑스의 프롱드와 영국의 청교도가 왕의 정치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목격되었고, 라 페레르와 스피노자가 성서의 역사적 권위를 해체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권위와 증거의 문제가 모든 면에서 대두했다. 17세기 말의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지적 권위에 관한 이런 저런 물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267)
"그러나 과거를 연구하는 사람은 특별한 문제에 직면했다. 벨은 17세기 말이 경과하면서 성직자들이 보인 불관용의 일반적 형태에 저항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학문분과 전체에 대한 훨씬 더 근원적인 공격에 맞서야 했던 많은 유럽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폭넓은 영향력을 발휘했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새로운 철학을 위한 프로그램을 포함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역사학적 지식을 고사시키는 비평도 포함하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역사학과 인문학을 유익함과 엄격함에서 여행보다 나을 것 없는 유희로 폄훼했다." "벨과 그를 따라 각주를 달았던 동료들은 (수학적 형식을 역사 연구에 직접 적용하려 했던 학자들과 달리) 더 건설적인 방식으로 데카르트에 답했다." "벨은 역사의 〈확실성〉이 비록 수학의 확실성과 다르지만, 〈수학의 심오한 추상성〉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며 인간의 삶에 훨씬 더 잘 적용되며, 심지어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훨씬 더 확실하다〉고 주장했다."(267-71)
"그러나 기번이 오래 전에 지적했듯이 그리고 더 최근에 리프킹이 동의했듯이, 벨의 설명 모델에는 여전히 하나의 실질적인 특징이 결여되어 있었다. 바로 경제다. 벨은 그의 글을 급하게 썼고 이후 판본에서 본문이 아니라 해설에 새로운 정보를 추가했다. 이는 너무 복잡해서─그리고 때로는 너무 자기 모순적이어서─독자는 박식의 늪 같은 데 빠진 자신을 발견했다. 때때로 본문은 독자에게 확실한 안내나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제공하기보다 몇몇 일화를 제공하는 데에 그쳤다." "벨이 공격한 바로 그 설명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여러 해의 시간이 걸렸고 여러 지적 진영에서 온 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벨의 적수 가운데 한 사람인 동료 위그노이자 망명 지식인인 장 르클레르크는 벨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독자를 더 많이 배려한 각주 이론을 고안해 냈다." "르클레르크가 보기에 역사가가 기꺼이 각주를 사용하려는 것은 비판적 합리성의 표시였다."(278-81)
에필로그 몇 가지 결론적 각주
"17세기와 18세기 문자공화국에서 벨과 기번의 각주는 그들에게 뻔뻔함과 박식함이라는 두 가지 평판을 모두 안겼다. 그들의 장치는 그들이 자신들의 서재를 잘 활용했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몇몇 다른 사람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수사적인 서사보다 독창적인 가설에 더 풍성한 보상을 안겼던 19세기 독일의 새로운 대학 체제에서는, 텍스트보다 각주와 고증한 사료 부록이 누군가를 더 유명하게 만들 수 있었고, 비평적인 주장이 건설적인 주장보다 더 많은 모방자를 얻을 수 있었다. 하인리히 니센처럼 그 많은 총명한 젊은이들이 주석을 잘 단 그들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사료비평의 문제를 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침내 내용과 형식이 서로 일치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 유럽 주요 국가의 기록보관소가 열람실을 개방했다. 허가받은 독자들이 그곳에 보관된 (거의) 모든 사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292-3)
"출간된 것이든 출간되지 않은 것이든 사료에 아무리 접근한다 해도 역사의 미해결 문제를 모조리 해결할 수는 없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각주가 표준적인 학문적 도구의 지위로 부상하면서─많은 경우─각주의 양식은 크게 축약된 기록 인용의 목록으로 쇠퇴해 버렸다. 랑케는 근대 역사학의 장치를 창조한 연금술사로 여겨지지만, 사실 각주를 싫어했고 각주를 만드는 데에서는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나 책의 부록을 쓸 때 기울였던 세심한 주의와 창의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각주가 가장 눈부시게 번성했던 때는 그것이 본문의 진실성을 뒷받침하는 것은 물론이고 본문의 서사에 대한 역설적인 언급으로도 기여했던 18세기였다. 19세기에 각주는 비극적 코러스의 탁월한 역할을 상실했다. 많은 카르멘들처럼 각주는 노동자로 전락해 거대하고 더러운 공장에 갇힌 자신을 발견했다. 예술로서 시작된 것이 어쩔 수 없이 일상이 되었다."(295-6)
"역사가의 간접인용과 직접인용의 관행이 그의 지침에 부합하는 일은 드물다. 각주는 결코 해당 작품에서 사실에 관한 모든 진술을 뒷받침한 적이 없으며 뒷받침할 수도 없다. 모든 실수를 막거나 모든 불일치를 없앨 수 있는 장치는 없다. 현명한 역사가는 자신의 일이 페넬로페의 길쌈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안다. 무늬와 색상의 조합이 끝없이 변하면서 각주와 텍스트는 계속 함께 할 것이다. 안정성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 조건지워져 있고 오류의 가능성이 뚜렷한 각주만이 과거에 관한 진술이 확인 가능한 사료에서 도출되었음을 우리에게 보증한다. 그리고 그 점이 우리가 그 진술을 신뢰해야 하는 유일한 근거이다." "각주는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주는 예술과 과학의 불가피하고 혼란스러운 혼합, 곧 근대 역사학의 혼란스럽지만 불가피한 일부를 형성한다."(3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