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자서전, 어느 비평가의 유례없는 삶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이기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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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저자는 폴란드계 유태인으로, 전후 독일 문학계의 독보적인 문학 평론가이다. 그가 2차 세계대전을 살아낸 유태인이라는 사실을 접한 독자들은 당연스럽게 그에게 하나의 서사를 기대한다. 그것은 바로 생생한 고난의 여정이 배어있는 간증과 나치의 깊은 악에 대한 고발-그 방식이 격정적이든 평온하게든-그리고 그것과 대비되는 감동적인 인간의 고귀함이다.

저자의 자서전인 이 책 역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아로새겨진 생존의 흔적들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삶이라는 텍스트를 마주할 때에도 평론가라는 천직을 한시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의 사실이 아니라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살아남았는가의 해답 없는 물음에 끊임없이 천착한다.

"왜? 왜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가 살아 남게 되었는가? ... 이 질문에는 단 하나의 대답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질문을 멈출 수가 없다. pp.274~5

비평은 확고한 하나의 해답을 찾아 나서는 논증이 아니다. 비평가는 매번 달라지는 텍스트의 의미들을 놓치지 않고 묶어주는 줄기가 무엇이며 그 생명력이 어디서 오는가를 탐색하는 관찰자이다. 그에게 죽음이란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라 문학과의 결별에서 온다. 그는 전후 폴란드에서 강제로 문학 비평이 금지됐던 시기를 "무엇보다도 암울했다"고 쓰고 있다.

비평이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을 흔쾌히 인정하는 태도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을 수용하는 태도에 적절한 유사성을 부여한다. 저자는 자신의 비평을 보편화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문학에 대한 애정을 보편화하려고 했다. 그 노력의 찬란한 증거는 1988년부터 2001년까지 <문학 사중주>라는 이름으로 방송된 TV 프로의 구성에 잘 드러난다.

'방송시간은 1시간 혹은 75분, 일체의 영상이나 배경 음악을 금지하고, 작가의 낭독이나 자신의 작품에 대한 우호적인 어떠한 설명도 허용하지 않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네 명의 토론자만이 화면에 등장하여 책을 읽고 토론한다.'

그는 오로지 문학 안에서 발굴한 자신의 언어에 대해서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타인의 언어가 더 많이 생성되고 피어나도록 '항연(symposium)'을 개최한 아가톤과 같다. 한 평생을 문학의 숲에서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삶은 문학의 밖에 나와 기록하고자 한 이 책은, 그러므로 자신의 곁에 서 있는 'Bei-zich-zein'의 고백록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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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기억
미셸 라공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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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은 모든 것을 국가에 일임하고 있네. 국가가 승리자이고 개선장군이고 구세주인 셈이지. 국가가 아버지고 어머니인 셈이라고. 743)

권력은 개체를 눈멀게 한다. 국가는 그에게 장미꽃의 향기를 풍기면서 가시덤불을 안겨준다. 그와 그의 후계자를 잇는 개체의 사다리가 승천과 몰락의 롤러코스터 위에서 춤출 때, 국가는 아직 오지 않은 단 한번의 죽음을 제외한 모든 파동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유영한다. 국가는 국가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고 치부했지만, 자본이라는 물적 토대 위에 군림하는 국가는 이데올로기에 물든 이기적 유전자요, 리바이어던이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며, 모든 개체는 권력의 자장(磁場) 안에서 자아를 상실한다는 말이 진리로 통용된다. 그러나 사회에 자연 과학의 법칙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자연 과학의 법칙 역시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닌데 하물며 죽음을 제외한 어떤 것이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법칙일 수 있겠는가. 예외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한다.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면서도 뒷걸음질에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예외를 사랑한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규율에서 벗어난 개체이길 원했다. 그들은 자본의 평온한 소파에도, 이데올로기의 냉혹한 그물에도 걸려들지 않기 위해서 줄기차게 싸웠다. 그들은 패배를 예감한 것이 아니라 직감하면서도, 이미 실현된 패배를 안고 곧 다가올 패배로 걸어들어갔다. 그들의 운명은 인정하고 싶지 않고, 부정할 수 밖에 없는 부조리에 대한 항거 그 자체였다. 국가가 국가 자체를 위해 존재하듯이 아나키스트들은 반反국가 자체를 위해 소멸해갔다.

아나키스트들의 운명 앞에서 많은 상념과 회한은 하나로 무너져 내린다.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고 말라붙은 호수의 밑바닥에 남은 건 그저 슬픔, 슬픔, 슬픔 뿐이다. 그들은 승리에도 정착하지 않았고, 패배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아나키스트들은 한낮에도 어둠에 잠겨 있는 수인(囚人)이었으며, 그들이 카탈루냐에서 부르는 찬가는 숱한 장례식의 조곡으로 울러퍼졌다. 리바이어던이 포획한 세상은 그들을 혁명의 전사로 내몰았지만 그들의 심장은 사랑 앞에서만 뛰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도, 플라톤의 태양 같은 철인 통치도 개체성을 완전히 내던지고 공동체로 뛰어드는 결단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극단에 머무르는 자는 선분의 나머지를 모두 착취하지만, 극단에서 모든 걸 불태운 희생의 잿더미는 비로소 적도(適度)를 맞춘다. 적도(適度)-동양식으로 말하면 중용(中庸)인-란 중앙에 서는 것이 아니다. 적도란 운동의 '한 가운데'를 끊임없이 재설정하는 노력이다. 패자는 물러나서는 안 되는 경계선을 살아남은 자들 앞에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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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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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주제넘은 소리다. 다만 우리는 사람이 자랄 수 있는 터를 만드는 일에 도전하려 한다. p227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자본주의가 최초로 노동, 토지, 화폐를 상품화한 결과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황폐화되는 역사의 흐름을 자세히 보여준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달리 자연과 인간은 무한정의 발전(?)과 확장을 지향하는 존재가 아니라 순환의 과정을 통해 균형을 유지하는 존재이다. 봄과 겨울이 순환하고, 파종과 수확이 순환하고, 일과 휴식이 순환하는 순리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방부처리되어 세계 곳곳으로 팔려 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시골빵집에서 저자가 구운 자본론의 묘미는 거창한 혁명의 구호가 아니라 바로 이 순환 구조의 회복에 있다. 음이 절정에 이르러 양으로 전환되듯이 효모의 발효를 거쳐야 비로소 그윽한 맛을 담은 빵이 만들어진다. 효모는 그 과정에서 기후와 수질, 인간이라는 환경과 상호 작용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전한다. 인위적으로 양분이 넘쳐나는 배양액이나 숙성을 위한 플라스틱 통, 단백질이 넘쳐나는 유기농산물을 접하면 효모는 발효가 아니라 부패를 진행시킨다.

자본은 불로장생을 원했던 진시황과 같다. 부패를 연기하고, 전가하고, 거부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상품가치의 상승만을 추구한다. 밀가루에 자본이라는 효모가 들어가면 빵이 구워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구워져 나온다. 사람을 위한 이윤 추구가 아니라 자본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이윤 추구의 메커니즘이 자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육중한 톱니바퀴는 '거대한 전환'을 일으켜, 다른 세상이 있었음을,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속에서 지워버렸다.

시골빵집 주인은 이윤을 남기려고 하지 않는다. 상품과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최대한 높게 유지하여 직원 모두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상공인이 되도록 노력한다. 1년에 한 달씩 주어지는 장기 휴가는 발효과정의 정점이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그의 노력이 책 한 권에 요약된만큼의 짧은 시간과 조급함이 아니라 긴 인내와 결단 끝에 제련되어 나온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의 이상만을 보며 품평하는 사람은 그의 노력이 여전히 진행혐임을 간과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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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는 법 -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위한 짧고 쉬운 성경 안내서
오누키 다카시 지음, 최연희 옮김 / 따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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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성경이 읽기 어려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정전(正典)의 권위에서 오는 해석의 제한성
2. 일관된 기준이 없는 이야기들의 배열 순서
3. 이질적인 고대의 세계상
4. 이해할 수 없는 신의 행동

저자의 해법을 추상적으로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믿음(Glauben)과 지식(Wissen)의 구별
성경은 1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다윗의 시기만 하더라도 기원전 1천 년 경이다-많은 필자들이 참여하여 써낸 집단 기록물이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신이 일필휘지로 새긴 것이지만, 성경은 내용 자체에서 읽어낼 수 없는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과 작품마다 결이 다른 주제의식 및 구조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믿음과 다른 영역에 기록된 시간과 공간의 깊이를 잴 수 있는 잣대가 바로 지식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신약의 4대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저마다의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는데 마태복음서는 시작과 끝을 맞추는 원환 구조(Ring Composition)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이라 하라...(1장 23절)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28장 20절)

마태는 예수의 생애가 '신이 인간과 언제나 함께 있다는 사실을 실현하는 증거'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2. 믿음(Glauben)과 지식(Wissen)의 통일
그렇다면 이 지식은 우리의 내면을 어디로 이끌어가는가? 신의 아들이라 굳게 믿었던 예수의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절망 앞에서 마태는 어떻게 좌절을 극복하고 있는가? 그가 복음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단편적인 지식들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회심(metanoia)의 경험과 기쁨을 우리와 나누고자 하는 간청의 목소리인 것이다. 여기서 지식은 믿음으로 위상전환(phase shift)을 이룬다.

우리는 믿음과 지식을 구별해야 한다. 믿음은 영생을 바라보지만 지식은 그것이 유한한 삶임을 안다. 그렇지만 믿음과 지식이 화해할 수 없는 절벽에 가로막혀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지식은 기나긴 터널 속을 달리는 자동차와 같다. 막막한 운전자에게 이 어둠에도 끝이 있다는 위안을 주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밖에 있는 줄로만 알고 찾아헤매던 절대자가 내 안에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 일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장 20~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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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에델 릴리언 보이니치 지음, 서대경 옮김 / 아모르문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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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영원 속에 홀로 존재하기에 침묵 이외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아서는 피조물의 사랑 앞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신의 평화를 저주한다. 그는 신의 안식을 방해하고자 등에(쇠파리)의 역할을 자처하지만, 신은 영원히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의 간절한 성가심이 가닿지 않는다.

<사랑과 우정이 회복되지 않는 혁명이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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