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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들 洪秀全과 太平天國 ㅣ 이산의 책 44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양휘웅 옮김 / 이산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1837년 음력 2월 말, 훙훠슈는 화 현의 현시縣試에 합격했지만 광저우에서 실시된 부시府試의 관문을 통과하는 데는 또다시 실패"한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서 잠자리에 든" 훙훠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침상 주위에 모여들어, 자기에게 지옥의 염라왕을 만나볼 것을 권하는 꿈을 꾼다." 그는 꿈에서 흑룡포를 입고 금빛 수염을 기른 아버지를 본다. "훙훠슈에게 말을 거는 그의 눈에는 분노와 슬픔의 눈물이 고여 있다."(93-4) 아버지는 훙훠슈에게 요괴들이 설치는 지상으로 돌아가야 하며, "훙훠슈의 훠(火), 즉 '불' 대신에 '완전함'을 뜻하는 취안(全)을 사용하도록 명한다."(97) 해석이 불가능한 기이한 꿈이었다.
"하루는 리징팡이 훙슈취안의 집에 들렀다가 이상야릇한 책을 보고는, 훙슈취안에게 빌려 달라고 한다." 그 책은 량아파가 성경을 재구성해 만든 <권세양언>으로서, "훙슈취안이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읽어본 적이 없는, 그렇다고 버리지도 않았던 조그만 책자이다." 책에 푹 빠진 리징팡은 훙슈취안에게 그 책을 읽어볼 것을 권했고, 훙슈취안은 그의 당부를 따랐다. 세기말의 혼돈을 묘사한 이 책자의 내용은 "훙슈취안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에 말을 걸 뿐 아니라, 1839~1842년에 광저우 일대를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던, 전쟁(1차 아편전쟁)의 세계에 말을 건다."(101) 꿈이 현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광저우 강화 직후인 1841년은 나라 안에 "민족반역자, 즉 한간漢奸이 가득하다는 믿음"이 팽배해졌다. 청조의 만주족 군관들은 외국인과 교역한 자, 중국어를 통역한 자, 그들의 배를 조종한 자를 색출하여 한족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다. 영국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모호한 반역죄를 적용하여 한족을 죽였다."(105) 유교 경전이나 고전 문헌들에서는 이 기괴한 대참사를 명확히 정의내릴만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권세양언>의 창세기와 이사야서에 묘사된 투쟁이 훙슈취안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선민의식, 우상숭배에 대한 신의 분노, 거대한 불의 형벌과 가혹한 고난, 선과 악의 세력이 벌이는 대전쟁, 세계의 최후와 천국의 도래 등 책자에 나와 있는 이상한 용어와 더 이상한 이름들을 떠올린 "훙슈취안은 그 열쇠가 자신의 머리와 마음을 열었다고 느낀다. 그가 꿈에서 보았던 금빛 수염을 가진 남자는 바로 하느님이 아버지이며, 주 여호와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참살해야 할 무수한 요괴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요괴들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훙슈취안의 형이기 때문에, 훙슈취안은 말 그대로 하느님의 중국인 아들이다."(123) 훙슈취안은 성서를 철저하게 사적私的으로 내면화한다.
오랜 방랑과 선교생활 동안 지방 지주-신사층과의 반목과 투쟁, 재판을 거친 양대 지주 펑윈산의 석방과 훙슈취안의 귀환은 쯔징산 일대에 자리잡은 "배상제회 신도들에게 새로운 열정을 가져다준다. 과거에 토착 무속巫俗에 익숙하고 무당들 사이의 신들림을 목격했던 이곳 산악지대 주민들은 이제 천당을 꿈꾼다." 배상제회 신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동안 간혹 누군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땅으로 고꾸라졌고, "그는 이따금 경고, 질책, 예언의 말을 쏟아낸다."(190) 그 중에서도 하카客家 출신의 숯쟁이 양슈칭은 빙의憑依 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발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대변자"로 인정받는다.
1849년 말 내지 1850년 초가 되면 만주족과 그들을 섬기는 관료들이 "요괴와 동일시되는 경우"가 부쩍 많아진다. "배상제회 신도들이 잡혀가 '날조된 죄명'으로 처벌을 받았던 청조의 관아는 '요관'(妖官)이 관장하는 곳으로 묘사된다."(200) 1850년 2월, 너무 많이 참아왔다고 생각한 배상제회의 근거지에서 '군'(軍)에 대한 말이 떠돈다. "이제 훙슈취안의 근거지는 이따금 '조정'(朝廷)으로 불리고, 훙슈취안은 '태평왕'(太平王)을 자처한다."(202) 1850년 7월 말, "예수는 훙슈취안에게 "천국을 위해 싸우고" "모든 강산에 대한 책임을 다하며" "온 세상에 천부와 천형의 진정한 법을 보여주고" 하느님이 그에게 그의 왕국을 통치할 '전권'을 주었음을 깨달으라고 말한다."(217)
청군이 태평군의 근거지 전역에 대한 압박을 가해오자, 1851년 8월 중순, 훙슈취안과 지도부는 태평천국운동이 발생하고 성장한 쯔징 산 일대를 버리고 새로운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노정에 오른다. 융안 성(永安城) 함락에 성공한 1851년 9월 25일, 훙슈취안이 꿈에서 "하늘에서의 첫 번째 전투를 벌인 지 14년 만에 태평군은 굳건한 지상의 성을 얻었다."(236) 역경을 이겨낸 신의 아들은 지상천국의 환희에 사로잡힌다. "훙슈취안은 태평천국 신도들에게 도덕에 대해서 일벌백계를 선언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예외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여자들과의 교제를 즐긴다."(253)
북진을 계속한 태평군은 1853년 3월 난징 공략에 성공한다. 태평군은 "모든 살아 있는 청군 요괴들을 색출하여 살육"함으로써 난징을 정화한 후에, 수도 천경(天京)을 선포한다. 당시 태평군의 편제는 "오장이 4인의 병사를 관리하고, 양사마가 5인의 오장을 포함한 25인을 통솔"하는 구조였다. 이를 본딴 25개의 가족 단위는 공동의 곡물창고와 공중公衆 예배당을 세워야 했고, 모든 가정은 "필요로 하는 음식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공동창고에 보관"해야 했다.(287-8) 통제와 절제로 점철된 사회 구조는 훗날 중국공산당이 "태평천국에 가담한 사람들을 원原사회주의자로 평가"(18)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태평천국의 신도들은 난징이 곧 지상낙원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이 천국의 성벽 너머에는 온갖 모략과 잔혹함으로 가득 차 있는 전쟁"(312)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태평군은 두 가지 중요한 실책을 범한다. 하나는 서구 열강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한 일이다. 난징을 방문한 영국 공사 본햄은 태평천국이 "구약을 바탕으로 하늘의 계시를 위조"(327)한다고 비난했고, 미국 공사 매클레인은 "그들이 성서의 진리를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서구 열강이 태평군을 지지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편에 적대적인 태평군이 안정성과 미래의 교역확대라는 측면에서 청조보다 더 큰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도부의 내분이 태평군을 침식해 들어갔다. 하느님의 대변자를 자처한 양슈칭이 성서에 기록된 내용은 의심의 여지가 있지만,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하나가 진정한 계시라는 말을 내세워, 천왕에게 바치는 '만세'(萬歲)의 영화를 요구하자, 훙슈취안은 양슈칭의 역모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난징에 진입한 북왕 웨이창후이와 친르강 장군은 양슈칭은 물론이요,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을 모조리 학살한다. 신앙도 가려주지 못하는 "믿음과 신뢰의 위기상황에서, 훙슈취안은 오직 "자기 친인척만을 신뢰했다."(401)
태평군은 상하이의 중국인 거주지 방어전에 나선 서구 열강과의 격렬한 전투에서 좌절을 겪으면서 재앙으로 빠져든다. "양쯔 강 일대에서, 한때 열렬히 선전되었던 태평천국의 토지제도는 이제 징수, 헌납, 몰수를 통해 어떤 곡식을 뽑아낼 수 있는가"(489)라는 강압으로 바뀌었고, 1861년 이후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이 단련團練을 조직하여 태평군에 맞서기 시작했다. "홍슈취안 자신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천부나 천형으로부터 (위로와 격려가 담긴) 그런 말들을 받지 않았다." 홍슈취안은 난징에서 출판한 자기 책의 마지막 부분에 양슈칭의 마지막 절규를 옮겨 적었다. "너희 하느님의 성이 불타오르리니, 그것을 구할 길은 없도다!"(501-2)
1863년 12월, 성을 방어할 방도가 전혀 없다고 간언하는 리슈청 장군에게 훙슈취안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내린다. "너는 군사가 없다고 말하지만, 하늘에 있는 짐의 병사들은 마치 물처럼 한없이 많다. 왜 짐이 요괴 쩡궈판을 무서워해야 하느냐?"(510) 지상의 병사를 잃고, 천상의 병사에게 의존하던 훙슈취안은 1864년 6월 1일,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훙슈취안의 아들이자 유주인 톈구이푸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요괴들이 지상천국을 무너뜨리는 광경을 목도한다. 체포 후, 심문관에게 자신의 가장 큰 소망이 "잡념을 다 버리고 유교경전을 공부해서, 가장 낮은 학위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 톈구이푸는 11월 18일, "열다섯 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처형된다."(5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