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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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줄곧 가난을 쓴다. 아니, 빈곤을 쓴다. 그는 빈곤을 응시하고, 빈곤에 몸을 담근다. 여기에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인간은 있어도, 그러한 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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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아들 洪秀全과 太平天國 이산의 책 44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양휘웅 옮김 / 이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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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837년 음력 2월 말, 훙훠슈는 화 현의 현시縣試에 합격했지만 광저우에서 실시된 부시府試의 관문을 통과하는 데는 또다시 실패"한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서 잠자리에 든" 훙훠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침상 주위에 모여들어, 자기에게 지옥의 염라왕을 만나볼 것을 권하는 꿈을 꾼다." 그는 꿈에서 흑룡포를 입고 금빛 수염을 기른 아버지를 본다. "훙훠슈에게 말을 거는 그의 눈에는 분노와 슬픔의 눈물이 고여 있다."(93-4) 아버지는 훙훠슈에게 요괴들이 설치는 지상으로 돌아가야 하며, "훙훠슈의 훠(火), 즉 '불' 대신에 '완전함'을 뜻하는 취안(全)을 사용하도록 명한다."(97) 해석이 불가능한 기이한 꿈이었다.


"하루는 리징팡이 훙슈취안의 집에 들렀다가 이상야릇한 책을 보고는, 훙슈취안에게 빌려 달라고 한다." 그 책은 량아파가 성경을 재구성해 만든 <권세양언>으로서, "훙슈취안이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읽어본 적이 없는, 그렇다고 버리지도 않았던 조그만 책자이다." 책에 푹 빠진 리징팡은 훙슈취안에게 그 책을 읽어볼 것을 권했고, 훙슈취안은 그의 당부를 따랐다. 세기말의 혼돈을 묘사한 이 책자의 내용은 "훙슈취안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에 말을 걸 뿐 아니라, 1839~1842년에 광저우 일대를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던, 전쟁(1차 아편전쟁)의 세계에 말을 건다."(101) 꿈이 현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광저우 강화 직후인 1841년은 나라 안에 "민족반역자, 즉 한간漢奸이 가득하다는 믿음"이 팽배해졌다. 청조의 만주족 군관들은 외국인과 교역한 자, 중국어를 통역한 자, 그들의 배를 조종한 자를 색출하여 한족의 반란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했다. 영국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모호한 반역죄를 적용하여 한족을 죽였다."(105) 유교 경전이나 고전 문헌들에서는 이 기괴한 대참사를 명확히 정의내릴만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권세양언>의 창세기와 이사야서에 묘사된 투쟁이 훙슈취안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선민의식, 우상숭배에 대한 신의 분노, 거대한 불의 형벌과 가혹한 고난, 선과 악의 세력이 벌이는 대전쟁, 세계의 최후와 천국의 도래 등 책자에 나와 있는 이상한 용어와 더 이상한 이름들을 떠올린 "훙슈취안은 그 열쇠가 자신의 머리와 마음을 열었다고 느낀다. 그가 꿈에서 보았던 금빛 수염을 가진 남자는 바로 하느님이 아버지이며, 주 여호와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참살해야 할 무수한 요괴들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요괴들은 모든 인류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훙슈취안의 형이기 때문에, 훙슈취안은 말 그대로 하느님의 중국인 아들이다."(123) 훙슈취안은 성서를 철저하게 사적私的으로 내면화한다.


오랜 방랑과 선교생활 동안 지방 지주-신사층과의 반목과 투쟁, 재판을 거친 양대 지주 펑윈산의 석방과 훙슈취안의 귀환은 쯔징산 일대에 자리잡은 "배상제회 신도들에게 새로운 열정을 가져다준다. 과거에 토착 무속巫俗에 익숙하고 무당들 사이의 신들림을 목격했던 이곳 산악지대 주민들은 이제 천당을 꿈꾼다." 배상제회 신도들이 모여서 기도하는 동안 간혹 누군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며 땅으로 고꾸라졌고, "그는 이따금 경고, 질책, 예언의 말을 쏟아낸다."(190) 그 중에서도 하카客家 출신의 숯쟁이 양슈칭은 빙의憑依 상태에서 신의 음성을 발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대변자"로 인정받는다.


1849년 말 내지 1850년 초가 되면 만주족과 그들을 섬기는 관료들이 "요괴와 동일시되는 경우"가 부쩍 많아진다. "배상제회 신도들이 잡혀가 '날조된 죄명'으로 처벌을 받았던 청조의 관아는 '요관'(妖官)이 관장하는 곳으로 묘사된다."(200) 1850년 2월, 너무 많이 참아왔다고 생각한 배상제회의 근거지에서 '군'(軍)에 대한 말이 떠돈다. "이제 훙슈취안의 근거지는 이따금 '조정'(朝廷)으로 불리고, 훙슈취안은 '태평왕'(太平王)을 자처한다."(202) 1850년 7월 말, "예수는 훙슈취안에게 "천국을 위해 싸우고" "모든 강산에 대한 책임을 다하며" "온 세상에 천부와 천형의 진정한 법을 보여주고" 하느님이 그에게 그의 왕국을 통치할 '전권'을 주었음을 깨달으라고 말한다."(217)


청군이 태평군의 근거지 전역에 대한 압박을 가해오자, 1851년 8월 중순, 훙슈취안과 지도부는 태평천국운동이 발생하고 성장한 쯔징 산 일대를 버리고 새로운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노정에 오른다. 융안 성(永安城) 함락에 성공한 1851년 9월 25일, 훙슈취안이 꿈에서 "하늘에서의 첫 번째 전투를 벌인 지 14년 만에 태평군은 굳건한 지상의 성을 얻었다."(236) 역경을 이겨낸 신의 아들은 지상천국의 환희에 사로잡힌다. "훙슈취안은 태평천국 신도들에게 도덕에 대해서 일벌백계를 선언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예외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여자들과의 교제를 즐긴다."(253)


북진을 계속한 태평군은 1853년 3월 난징 공략에 성공한다. 태평군은 "모든 살아 있는 청군 요괴들을 색출하여 살육"함으로써 난징을 정화한 후에, 수도 천경(天京)을 선포한다. 당시 태평군의 편제는 "오장이 4인의 병사를 관리하고, 양사마가 5인의 오장을 포함한 25인을 통솔"하는 구조였다. 이를 본딴 25개의 가족 단위는 공동의 곡물창고와 공중公衆 예배당을 세워야 했고, 모든 가정은 "필요로 하는 음식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공동창고에 보관"해야 했다.(287-8) 통제와 절제로 점철된 사회 구조는 훗날 중국공산당이 "태평천국에 가담한 사람들을 원原사회주의자로 평가"(18)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태평천국의 신도들은 난징이 곧 지상낙원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이 천국의 성벽 너머에는 온갖 모략과 잔혹함으로 가득 차 있는 전쟁"(312)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서 태평군은 두 가지 중요한 실책을 범한다. 하나는 서구 열강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실패한 일이다. 난징을 방문한 영국 공사 본햄은 태평천국이 "구약을 바탕으로 하늘의 계시를 위조"(327)한다고 비난했고, 미국 공사 매클레인은 "그들이 성서의 진리를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서구 열강이 태평군을 지지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편에 적대적인 태평군이 안정성과 미래의 교역확대라는 측면에서 청조보다 더 큰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도부의 내분이 태평군을 침식해 들어갔다. 하느님의 대변자를 자처한 양슈칭이 성서에 기록된 내용은 의심의 여지가 있지만, 자신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나하나가 진정한 계시라는 말을 내세워, 천왕에게 바치는 '만세'(萬歲)의 영화를 요구하자, 훙슈취안은 양슈칭의 역모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난징에 진입한 북왕 웨이창후이와 친르강 장군은 양슈칭은 물론이요,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을 모조리 학살한다. 신앙도 가려주지 못하는 "믿음과 신뢰의 위기상황에서, 훙슈취안은 오직 "자기 친인척만을 신뢰했다."(401)


태평군은 상하이의 중국인 거주지 방어전에 나선 서구 열강과의 격렬한 전투에서 좌절을 겪으면서 재앙으로 빠져든다. "양쯔 강 일대에서, 한때 열렬히 선전되었던 태평천국의 토지제도는 이제 징수, 헌납, 몰수를 통해 어떤 곡식을 뽑아낼 수 있는가"(489)라는 강압으로 바뀌었고, 1861년 이후 많은 지역에서 농민들이 단련團練을 조직하여 태평군에 맞서기 시작했다. "홍슈취안 자신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천부나 천형으로부터 (위로와 격려가 담긴) 그런 말들을 받지 않았다." 홍슈취안은 난징에서 출판한 자기 책의 마지막 부분에 양슈칭의 마지막 절규를 옮겨 적었다. "너희 하느님의 성이 불타오르리니, 그것을 구할 길은 없도다!"(501-2)


1863년 12월, 성을 방어할 방도가 전혀 없다고 간언하는 리슈청 장군에게 훙슈취안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내린다. "너는 군사가 없다고 말하지만, 하늘에 있는 짐의 병사들은 마치 물처럼 한없이 많다. 왜 짐이 요괴 쩡궈판을 무서워해야 하느냐?"(510) 지상의 병사를 잃고, 천상의 병사에게 의존하던 훙슈취안은 1864년 6월 1일,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훙슈취안의 아들이자 유주인 톈구이푸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요괴들이 지상천국을 무너뜨리는 광경을 목도한다. 체포 후, 심문관에게 자신의 가장 큰 소망이 "잡념을 다 버리고 유교경전을 공부해서, 가장 낮은 학위를 얻는 것"이라고 말한 톈구이푸는 11월 18일, "열다섯 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처형된다."(5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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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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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실이 엉켜 있는 수레바퀴,

운명의 실이 풀려 있는 미로,

동심원과 네모의 순환,

그 이상은 알 수 없는 이야기(logos)



종교를 위해 죽는 것은 완전히 종교적 삶을 사는 것보다 더 단순하다. 에페수스에서 맹수들과 싸우는 것은(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렇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사도 바울로가 되는 것보다 덜 힘든 일이다. 한 번의 행동은 사람의 전 생애보다 빠른 법이다. 전투와 영광은 '수월한' 것이다. 그러니까 라스콜리니코프의 일은 나폴레옹의 일보다 더욱 지난했다. pp.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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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서진 - 청(淸)의 중앙유라시아 정복사 역사도서관 9
피터 C. 퍼듀 지음, 공원국 옮김 / 길(도서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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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패러다임으로 보면 중앙유라시아는 "근대 세계의 주요한 추세들과 격절된, 유달리 고립된 지역"이지만, 고전적인 관점 하에서는 "유라시아의 '교차로'로서 오랜 무역, 정복 그리고 종교적, 문화적인 교류를 통해 주위를 둘러싼 모든 정주 세계와 연결된 지역"이었다.(75) 칭기스칸의 몽골 제국을 유목 문명의 정점으로 파악하고, 이후를 쇠퇴기로 보는 관점은 "이미 약해진 시기부터 그 기원으로 역사를 거꾸로 읽음"(30)으로써, "초원의 지배자들이 감행한 혁신"과 우발성을 봉쇄하고, 무대 참가자들이 적극적인 행위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환경결정론적 명제이다."(34) '중국의 서진'은 이러한 관점을 역사에 성립시킨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말은 기병을 대체할 만한 수단이 나오기 전까지 최고의 전술무기였으며, "유목 경제의 기둥이자, 전쟁의 핵심 요소였다." 정주 문명들은 초지草地가 부족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수요를 충당할 만큼 말을 길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은 초원과 정주 민족들을 연결하는 고정 핀이었다." 농목 문명은 반복해서 마차馬茶 시장을 열었지만, "야만인 약탈자들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는 것은 굴욕"이라고 역설하는 비판론자들의 공격은 물론, "말의 적절한 공급을 보장하고, 변경을 약탈하지 못하도록 협정을 강제하는 지도자"(63)의 등장이 강대한 세력 결집을 불러한다는 현실적 난관에 부딪혀, 교역은 수시로 이어지고 끊겼다.  


중국 왕조들은 "평화적인 교역 관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동/서 몽골의 정치 역학 관계를 이용하여 "어떤 통치자가 강해질 때마다 다른 편을 지원해, 몽골이 통합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목"하도록 만드는 "계획적인 분할 통치 정책"(89)을 구사했다. 그러나 "장기적 안목을 지닌 초원의 지도자들은 교역 특권을 이용해 자국의 재원을 조성"하여 대륙을 위협하거나 점령하곤 했는데, "이것은 만주족 국가를 건설한 누르하치가 초기에 추구하던 전략"(104)이기도 하다. 


몽골과의 타협이나 교역을 거부하고 초원을 완전히 점령해야 한다는 강경론자들의 발언은 국력의 압도적인 우위를 변방에 실현시킬 수 있는 기술의 발전을 수반하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명이 변경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내륙으로부터 효율적으로 재원을 모으고 이를 변경으로 수송할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략물자를 화폐로 구매할 만큼 상업화가 충분하지 않았고, 한족 통치자 및 관료 세계가 초원과 격리되어 있었으며, 발달된 행정 기구가 부족"하다는 시대적 한계도 있었다. 그렇지만 "개중법과 상둔商屯을 통해 상인들의 이윤 동기를 전략적 방위에 동원"하려 했던 시도는 "후계자들에게 귀중한 경험의 보고가 되었다."(111-2)


"청은 18세기 유라시아의 팽창하는 '식민 제국' 가운데 하나였다."(417) "중앙아시아적 요소를 포함한 신층 청나라"는 몽골 원정을 감행한 강희제의 역동적인 개입을 통해 "전무후무한 팽창 프로젝트의 주체"(181)로 거듭났다. 청의 통치 엘리트들은 "안보와 자급"을 목표로 서진을 감행했으며, 이 지역을 "대규모 영구 군사 주둔지를 부양하고, 스스로 꾸려 나갈 수 있는 곳"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여기에 "이미 확립된 사회구조의 방해를 받지 않고, 행정 관료들이 새로운 통치 방법을 실험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 변경의 큰 매력이었다. 신장 점령은 "새로 열린 땅에 식민주의자들의 꿈"을 심는다는 "전 세계 제국 건설자들의 기획과 평행한 것이었다."(419-20)


변경 점령의 첫 걸음인 둔전 개발은 "순전히 군사적인 원조 아래서 진행되었지만, 민간인들이 곧 뒤를 이었다." 청의 관리들은 "농민들에게 토지소유권을 주면 경작에 더 큰 동기가 부여되리라 믿고, 민영화, 사유화 추세를 장려"(426)했지만, 군사적 통제의 약화는 제국 통치를 침식하는 원인이 되었다. 변경의 "광범위하고 다채로운 인구들은 하나의 행정 체계로 포용할 수 없었고, 개발은 오직 힘으로만 버틸 수 있는 긴장들을 야기했다." 자립 기반이 허약한 이 지역은 "19세기 동안 (변경을 지탱하던) 자원들이 내지內地로 돌려지면서 와해되기 시작한다."(444-5)


현대 중국의 역사가들은 "한대에서 당의 주둔 도시를 거쳐 지금까지 오아시스에서 중국이 연속적으로 존재했다"(418)고 서술하면서 정복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역사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점과는 다르지만, 청의 통치 엘리트들도 자신들의 정복 사업을 정당화하는 작업에 많은 관심을 쏟았다. "청의 관료들과 황제는 하늘의 뜻이 (준가르의 지도자) 갈단을 패배시켰고, 황제가 적의 죽음을 예견했으며, 갈단은 절망 속에서 자결했다는 신화를 구성해냈다."(586) 옹정제는 정복사업을 "더욱 넓은 지역으로 계속 확장되는 도덕의식"에 비유하면서,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이 '좁고 지역적이고 이기적인 견해'를 가졌다고 질책했다."(599)


청의 서진은 '중국'이라는 영토의 크기와 '한족'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18세기 중국은 민족주의의 시대가 아니었지만, 그 속에서 19세기 말 중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정의定義들이 작동하는 틀을 다져놓았다."(656) 중국 역사가들은 결코 "'정복'(쟁취爭取)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통일'이라는 말"(645)을 사용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민족들에 대한 통치를 확립하여 비한족 민족들을 종속적인 타자로서 병합하려는 제국의 기획이 포함되어 있다."(656) 유목민들을 역사에 무대에서 영구히 추방한 제국의 기획이 민족국가와 연속성을 갖는 것이다.


"국경이 확정되고 팽창이 멈추었을 때, 제국은 내부의 도전에 직면했고 영광의 시절은 끝났다."(697) 중국의 통치자들은 "러시아와 국경선을 확정하고, 준가르 몽골 국가를 멸망"시킨, 1760년을 국가 계획의 완성기로 보았다. "영세 농민들에게 출구를 마련하여 경작지에 대한 중심부의 압력"(715)을 감소해주던 "변경에서의 군사적인 도전이 종료됨으로써 점차 관료 체계에서 역동성이 빠져나갔다."(699) 그럼으로써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과 평행선을 달리던 중국은 "계속적으로 전쟁에 투자한" 유럽에 뒤쳐지게 되었고, 이들이 남쪽 해안에 등장하자 대륙의 약점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네 가지 상호작용을 하는 과정들이 청을 19세기 서구의 침투에 노출시켰다. 즉, 몽골을 격퇴한 직후 남부 해안에서 새로운 도전들이 등장한 것, 초원 유목민들에게 성공적으로 적용되던 정책들이 남쪽의 해양 환경에서 실패한 것, 중앙의 이해와 지방 세력가들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던 협상을 통한 타협이 탈중앙집권화로 옮아가기 시작한 것 그리고 16세기부터 진행되던 상업화가 중앙에 대한 충성심을 침식한 것이 그것이다."(719-20) 대륙이 초원으로, 정복이 침탈로, 제국이 식민지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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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의 혼돈 - 중국 명대의 상업과 문화
티모시 브룩 지음, 이정.강인황 옮김 / 이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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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세운 "홍무제의 목표는 (자급자족형 농경 국가를 건설하여)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농경지에 묶인 백성들은 최대 20리(12km) 내에서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고, 법으로 정한 최대 범위인 100리(58km)를 통행증 없이 벗어날 경우에는 "장형杖刑 80대에 처해졌다. 만일 신고하지 않고 국외로 나갔다 돌아오면 사형을 당했다." 사회적 신분 이동도 엄격하게 제한받았다.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공장工匠의 아들은 공장이 되어야 했고, 군인의 아들은 군인이 되어야 했다. 직업을 바꾼 자에 대한 벌은 물리적 장벽을 넘어선 자에 대한 벌만큼이나 가혹했다."(40)


"홍무제는 상업이 도시지역에 국한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상거래를 금지하거나," 농촌지역에 상업을 위한 장소를 지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100) 그러나 농촌이야말로 가장 실질적인 재화를 생산하는 전진 기지였으며, 생산물의 증대는 소작인과 지주간의 '개인적 유대감'을 "단순한 경제적 계약관계로 변화시켰다."(119) "요역徭役에서 지세地稅로의 전환은 사적 유대가 사라지는 추세를 한층 강화했고, 소작인들은 계약에 명시된 의무 이외의 요구사항에 저항"하기 시작했다.(120) 


"농작물의 생산이 늘어나자 잉여농작물을 거래할 수 있게 되었고, 잉여농작물이 정기적으로 유통되면서 전적으로 상업을 목적으로 한 작물의 재배가 생겨났다." 여기에 국가가 교통통신 수단에 많은 투자를 한 결과 "일상용품의 유통까지 용이하게 만들 정도로 인프라가 개선되었다."(31) 국가의 정보와 물자를 감당하는 수송 부담이 가중되자, "정부의 배를 부리는 뱃사람들은 제한된 분량의 개인 물자를 함께 싣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들은 직접 팔 물건이나 위탁 받은 화물을 실어, 그것을 거래한 이익으로 비용을 조달했다."(74) 결국 명의 상업화는 "자급자족 경제에서 방향을 돌린 것이라기보다는 (역설적으로) 그 결과"(32)인 셈이다.


"경제 관련 텍스트는 명조 서민문화의 일부였다."(87) 명초에는 과거제를 통한 출세길에 오르지 못한 "수만 명의 글을 아는 사람들(신사층)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어 경제생활의 문서화를 돕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90) 홍무제는 "종교개혁기 유럽의 국가들이 신기술에 직면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특정한 책을 금서"로 지정하는 방식 대신, 책에 부과하는 세금을 면제해주고, 백성들에게 주입하기 알맞은 사상을 널리 배포하는 수단으로 인쇄술을 이용했다. "홍무제의 권고와 수상이 담긴 책은 필독서였다."(94)


이는 상업의 발달이 '개명改名된 이기심'이라는 새로운 관념을 생성하고, 이 관념이 다시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순환구조를 잘 보여준다. 유학자들 중에서도 추쥔과 같은 이들은 "이런 상황에 고무되어 경제의 운용방식이나 상업활동과 관련한 국가의 역할이 적절히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상품을 재분배하고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이루는 데는 국가보다 상인이 더 낫다"(140-1)는 점을 역설하면서, 국가의 수공업 공장 운영이나 소금 같은 필수품 전매, 해금 정책 등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일조편법 시행과 유럽 상인들의 진출에 힘입어 은銀이 결제수단으로 대중화되면서 상업의 발달이 더욱 촉진된다. 1520년대부터 관료들은 해외무역을 더 강력하게 규제했지만, "대외무역 금지는 비생산적이었고 무역과 관련된 폭력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무역과 해금 사이의 긴장은 "기근으로 고통을 겪었던 1540~1550년대에 '왜구'(倭寇)를 비롯해서 이들과 결탁한 중국인 선원 및 해외상선들이 무역이 허락되지 않는 곳을 습격하면서 절정에 달했다."(167)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엄격한 유교적 신분 질서도 흔들렸다. "일부 상인은 신사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고 일부 신사는 그들을 받아들이며 고전을 연구하여 상업을 합리화할 수 있는 이론을 찾았다." 상업이 촉진한 다양한 물건들은 "신사층의 문화적 소일거리로 흡수되었고, 신사층은 예술품을 놓고 품평과 감상을 하는 동시에 이 같은 상품의 생산을 자극했다."(181-2) 그렇다고 이들이 아래로부터 유입을 마냥 반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사층은 국가 관료의 공식 권력과 발흥하는 상인층 사이에서 자신들의 비공식적인 권력이 사그라들자, "시대의 부패를 한탄하고 스스로를 문명의 마지막 대희망"(188)으로 그려냈다.


유럽과의 무역 대금으로 받은 방대한 양의 은은 물론이요, 동전의 액면가를 넘어서는 동銅 같은 귀금속을 "그냥 두기에는 경제가 너무나 활력에 넘쳐"(211) 흘렀다. 이 상황에 걸맞는 새로운 규칙이 요구되었지만, 청빈과 자선에서 근면과 이윤으로 방점을 이동한 기독교와 달리 "유교는 눈앞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준비된 이론도 제공하지 않았다."(204) 명대 후기에, 변화의 조류에 올라타는 "가장 인기 있는 방법은 가족의 자산을 부계 [남성] 친족과 함께 모아서 종족宗族의 공동자산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자본을 집약시켜 상업망에 참가한다는 의의뿐만 아니라 종족 내에서 "존경과 의무의 위계를 세워 연장자의 지위를 강화시켜주는 장으로 기능했다."(212)


명말의 상인들은 선대제先貸制를 통해 농촌 노동자들에게 "원료의 형태로 자본을 이전시키고, 그들이 생산한 상품을 통제"했던 유럽 산업자본가들과 달리, 가내 수공업으로 생산된 직물을 "헐값에 사서 비싸게 판매하는" 이득에 골몰하였다. 다나카 마사토시에 따르면, 생산자를 고리대로 옭아매어 새로운 방식을 시도할 수 없게 하는 명의 '원료-생산물 교환제'는 "생산관계를 변화시키기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로 가는) 발전의 자극 요인"(260-1)이 되지 못했다. 명대의 활력이 근세 유럽의 상업발전과 다른 길을 간 이유는 자급자족형 인프라 경제 안에서 생산, 소비되는 상품의 일부가 시장 경제를 통해 유통되긴 했지만, "시장 경제가 인프라 경제를 인수하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용해시킬 정도로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262)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정체성의 진화"를 거듭한 신사층은 "교육받은 엘리트와 돈 많은 엘리트라는 두 줄"로 사회를 단단하게 구속했다. 신사층은 겉으로는 향락과 퇴폐를 경고하면서도 상인과의 거리를 "축소하기는커녕 강화하는 방식"(330)으로 문제를 해소해 나갔다. "상업망이 없었다면 많은 신사층은 왕조교체기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청대의 신사층과 상인의 융합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제자리를 고수하는 데 성공한 이들은 "가부장주의와 위계, 지배계급의 정의라는 보수적 가치"(341)를 붙들고 중국의 사회구조를 지탱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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