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하늘 아래 노란 꽃
류진운 지음, 김재영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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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는 지진이 나고 홍수가 몰아쳐도 그 자리에 온갖 꽃을 피우지만, 사람심사는 혁명이네 이상이네 하면서 목숨을 갈아엎는데 심취한다. 투쟁 뒤에 합일이, 고통 뒤에 성취가 온다지만, 어느 누가 기껏 노란 꽃(죽음을 의미함)이나 피우려고 땅 속 거름 역할을 반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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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백성 사이의 漢 현대의 고전 4
히하라 도시쿠니 지음, 김동민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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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漢代 사상은 가혹한 권력 집행으로 국가 기반이 급속도로 무너진 진秦의 전철을 피하면서도, 확고한 지배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여 전개되었다. 동중서董仲舒는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을 내세워, 유학을 점지하였고, 한무제武帝는 이를 전격적으로 수용하여 제국의 사상이 나아갈 길을 예비하였다. 유가가 이상으로 삼은 봉건제도의 경제적 기반은 농민이었기에, 지식계급의 농민 보호는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현실적 요구였으며, "'백성의 부양을 받는食於人' 지배계급을 인정하는 유가의 이론은 정치권력의 입장에서는 매우 적절"한 통치 기제였다.(35) 


한대 유학자들이 통치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전으로 삼은 텍스트가 바로 <춘추春秋>이다. "노나라의 역사서에 지나지 않는 <춘추>에 대해 공자가 독자적인 견해와 비판정신을 가지고 필삭을 가했다고 해석한 것은 <맹자>부터이고, 나아가 이러한 해석을 기초로 해서 <춘추>에 경서經書로서의 권위를 부여하는 데 이른 최초의 문헌은 <순자>라고 일컬어진다. 경서로서의 <춘추>를 조술하여 부연 설명한, 넓은 의미에서의 해석서로는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 등 세 가지가 있다."(147) 이들은 성인으로 추앙받은 공자의 권위로 윤색된 <춘추>를 빌어 한漢이 주周를 계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면서 왕조의 정당성을 내세웠다.


한나라가 유교를 채용한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명분名分'이다. "포악한 진나라를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그것을 대신했던 한나라 입장에서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없애고" 법치를 부정함으로써 진나라와는 상반된 지배 원리를 표방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대의 유교는 이미 법가 이론을 포괄하면서도 위정자의 권한을 침해할 우려가 적은 적절한 타협 대상이었다. 한대 사상가들은 국가의 권위와 유교의 권위를 환치시켜, 백성들을 "국가 의지에 대한 복종이 곧 유교적 당위라고 착각하는 상태"에 빠뜨렸으며, 강고한 권력 집행을 "'유술儒術 또는 유가의 옛 의리'로 치장"하여 국가 운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데 기여하였다.(38-9)


그러나 유가는 법가와 달리 "군주권의 팽창을 무제한적으로 용인하지 않았으며, 군주권의 억제를 위한 이론도 준비했다." 동중서는 '하나로의 통일을 중시한다大一統'는 이념 아래, 군주권이 "천명天命에 의해서 그 권위가 확립"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백성은 아직 선이라고 할 수 없는 성性을 하늘에서 부여받았기 때문에 왕으로부터 성을 완성하는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며,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의 성을 완성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 자"로 규정된다.(43-4) 여기서 "군주권은 '천天'이라는 관념에 의해 주체성을 상실한다. 천명에 의해 이뤄지는 한 군주권은 하늘의 제약 아래 놓여 있을 수 밖에 없다."(45) 


천天 관념을 거부하는 통치자의 횡포와 전단專斷을 저지하기 위해 준비된 사상이 '재이설災異說'이다.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각종 이상 현상 중에서 "작은 것을 '재해災', 큰 것을 '이변異'이라고 칭"하는데, 재이설은 이러한 변괴를 군주의 행위와 결합시켜 해석한다. "정치가 그 마땅함을 잃어버리면 민중의 불평과 원망이 "사악한 기운을 발생시켜서" 인간세계의 음양은 조화를 잃는다. 이것이 곧바로 자연계의 음양에 감응해서 그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하여 뒤틀리게 만든다. "음양이 뒤틀리면 요사스러운 기운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바로 재이가 발생하게 된 원인이다." 따라서 군주는 "하늘에 순응해서 덕을 닦고", 선정을 베풀어 음양의 조화를 도모해야 한다.(48-9)


동중서에게 재이는 군주의 전단을 견책하는 수단이며, 과거의 사실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데 "전한 말기에 접어들면서 그것이 갑자기 주술적인 예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55) "<춘추>는 행위를 평가할 때 외적인 사실과 결과를 무시하고, 내적인 심의心意만을 문제삼는다. 의지의 선악만을 따지는 이러한 '특이한 논단筆法'을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마음을 따져서 죄를 결정하는 것原心定罪'이다." 즉, "<춘추>는 과거의 행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예측되는 장래의 행위에 대해서도 그 심의의 선악을 살펴서 포폄을 가한다." 나쁜 의지를 품고 있다면 "'아직 그러한 행위가 발생하기 전에未然之前' 예방하는 것을 최상"으로 여기는 예언의 성격이 덧붙여진 것이다.(56)


선악을 미리 판단하는 사유는 필연적으로 형벌 주관주의를 불러온다. <춘추공양전>의 원심정죄론에는 범죄의 환경원인론環境原因論이 깔려 있다. 이는 "환경이 나쁘기 때문에 죄가 발생하며, 특히 생활의 빈곤은 범죄의 온상이 되고, 의식이 풍족해야 예절을 알기 때문에 위정자는 민중을 위해 좀더 좋은 환경을 준비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고방식이다."(151) 원심정죄론은 덕치德治를 염두에 둔 사상이지만, '국가 권력의 남용'과 '법적 안정성의 결여'라는 부작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범죄자의 내부 심리에 개입해서 엄형중벌嚴刑重罰의 방향으로만 일방적으로 유추 해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국가주의자가 주장한 '춘추의 의리'였다."(153)


일찍이 맹자는 "인의의 덕을 통해서 난세를 통일하고, 천하에 평화를 가져오려고 했던 왕도주의를 정치사상의 중핵"으로 삼으면서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확실하게 구별했다."(217) 맹자가 처한 현실이 "패도 그 자체였기 때문에 더욱더 왕도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환담이나 왕충 같은 공양학 학자들은 패자를 왕자의 대립개념이 아니라 왕자의 낮은 단계로 상정하고, 패도를 문장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인정"하는 논리를 수용했다.(241) 이들은 위정자에게 윤리적 의무를 심어 왕도로 이끌고자 노력했지만, "판단은 군주의 의지를, 평가는 국가의 이해를 기준으로 결정"(207)되는 절대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을 군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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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노인 - 그들은 왜 위험하고 잔인한 폭력노인이 되었을까
후지와라 토모미 지음, 이성현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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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노인의 대다수는 자신을 향한 극단적 폭력, 곧 자살을 선택한다. 상처입은 소수가 외부로 분노를 발산할 때, 훨씬 더 많은 이들이 무관심에 휩싸여 자포자기 당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사회적 살인`을 방조하고 조장하는 현실이야말로 폭주노인의 음울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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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하학 연구 - 중국 고대의 사상적 자유와 백가쟁명
바이시 지음, 이임찬 옮김 / 소나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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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에는 철제 농기구와 우경牛耕 기술의 보급, 시비법施肥法과 수리 기술의 발전水利으로 농업 생산력이 급속히 증대했다. "농업의 발전이 가져온 직접적인 결과는 토지의 사유화와 토지 경영 방식의 변화였다."(28) 천자가 쇠락하고, 제후가 발흥하면서 자작농에게 조세를 수납하는 사전私田이 혈연 귀족들의 세습적 점유로 유지되던 공전公田을 대체했다. 이와 맞물려 관료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곡록제穀祿制(봉록제俸祿制)의 도입은 '사인士人'계층의 출현을 촉진하였다. "각 제후국들은 자신의 처지에 적합한 치국 방안을 찾고, 지식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 매우 절실"(33)해지면서, 인재를 예우하는 "예현하사禮賢下士의 기풍이 형성되었다."(42)


이렇듯 사인士人계층은 태생부터 통치 계급의 필요에 종속되어 있었다. "사인들은 정치에 봉사하는 과정을 통하여 학술과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켰으며, 제자백가의 학술은 바로 그들이 정치에 참여한 정신적 산물이었다."(56) 제환공과 관중의 긴밀한 협력 관계가 정착되어 있던 제나라는 여타 제후국에 비해 개명된 사회였다. "군주는 신하와 백성의 의견을 듣고 즉시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을 정도였으며, 신하와 백성이 대담하게 면전에서 군주의 잘못을 지적해도 군주의 노여움을 사지 않았다."(70) 제나라 도성 임치의 직문稷門 아래 천하의 인재를 불러모아 저술과 이론 활동을 권장하고, 정치적 의견을 제시하게 한 '직하학궁稷下學宮'은 이런 배경 아래 탄생하였다.


"전국 중후기 학술과 문화의 중심이었던 직하학궁은 동서남북의 각종 문화적 요소들이 교류하고 합쳐지는 곳이 되었다."(143) 한 자리에 모여 활발한 교류와 논쟁을 벌인 제자백가의 학설은 "본질적으로 모두 동일한 사회 현실에 대한 반영으로서, 같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여 같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것들 사이에서는 대립 이외에 일치하는 측면도 반드시 존재하였다." 즉, 직하학궁은 전국 시대 사상의 조류가 "'상멸상생相滅相生', '상반상성相反相成'하는 대립통일의 관계 속에서 병존하며 발전"하도록 장려했다.(181-2)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도가의 학술과 주장에 근거하면서도, 세상에 참여하여 치국책을 탐구한 '황로학黃老學'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나라의 전田씨 정권은 강姜씨 정권을 찬탈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염제炎帝를 물리치고 천하를 소유한 황제黃帝의 후손이라고 공언했다. "전씨 정권의 이러한 조치는 춘추시대부터 전해지던 "황제의 말"이 제나라에서 널리 퍼지고 발전하도록 크게 자극하였으며, 황제의 말과 노자 학설의 결합을 촉진하였다."(193) 황로학의 핵심사상은 "도법결합(道法結合, 도와 법을 결합)·이도론법(以道論法, 도를 근거로 법을 논함)·겸채백가(兼采百家, 제자백가의 학설을 두루 채용)"로서, "노장을 대표로 하는 전통 도가 학설을 크게 수정했으며 통치 집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태도를 취했다."(190-1)


황로학의 대표 저작으로는 <황제사경黃帝四經>과 <관자管子>가 있다. <황제사경>은 "노자와 마찬가지로 음양이 우주에서 가장 기본적인 모순이며, 우주의 운동은 음양의 대립과 통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231) 그러나 <황제사경>은 도가의 무위사상을 마냥 추종하지 않고,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이끈다. 인간은 비록 천도天道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지만, "인간이 일단 천도를 파악하고 난 뒤 자신을 위해 주동적으로 자연법칙을 이용한다면, 이때는 인간이 주主가 되고 하늘은 반대로 객客이 되는데, 이를 '천도가 순환하여 인간에 대해 도리어 객이 된다'라고 한다."(238)  


군주 역시 도道를 벗어나 통치할 수는 없다. 법法은 도道라는 우주 최고의 법칙이 사회와 정치 생활 속에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에, "군주가 입법자이기는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고, 반드시 도의 원칙을 근거로 법을 제정해야만 비로소 법의 공정성과 권위를 보장할 수 있다."(240) 이것은 "형벌은 대부까지 올라가지 않고, 예는 평민까지 미치지 않는다(刑不上大夫, 禮不下庶人)" <禮記·曲禮上>는 유가의 주장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것이다."(242) 다만, 사회는 천지음양天地陰陽을 본받아 존비귀천尊卑貴賤의 등급이 있으므로, "자신의 명분에 근거하여 자기의 권리 범위를 확정하여 분에 맞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한다.(245) 


<관자>의 법가 사상은 주류 법가였던 삼진법가三晋法家와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그것은 제나라에서 이미 오랫동안 유행하고 있었던 도가 사상을 수용하여 도가 이론을 가지고 법가 정치를 논하였으며, 이를 통해 법치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그것의 비교적 강한 이론적 성격은 냉혹하기만 한 삼진법가와 구별되는 점이다. 둘째, 그것은 인근 추로鄒魯 지역에서 들어온 유가나 묵가 등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고, 그것들의 장점을 수용하였으며, 또한 예와 법을 함께 사용해야 하는 필요성을 논증하였다."(418-9) 이것은 "도를 체體로 하고, 법을 용用으로 삼은 것"으로서, <황제사경>의 '도생법道生法'이란 명제를 발전시키고 구체화했다.(431)


황로학자들은 인간은 모두 이로움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싫어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법가法家의 학설에 동의하면서, "사람들의 물질 욕망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으며, 일정 정도 '욕망欲'의 합리성을 인정하고 또 도덕적으로도 긍정했다. 다만 어느 정도 절제할 것을 주장했을 따름이다."(207) <관자>는 "이로움을 가지고 이끈다", "해로움을 가지고 단속한다"는 한비자의 "상과 벌 '이병二柄'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도법결합道法結合' 사상을 발전시켰으니, 이는 인간 본성을 "자연에 따르고 맡긴다"는 도가의 기본 원칙을 실제 정치에 구현하면서도, 강제성을 가진 법령을 행사하는 법가의 방법론을 조화시키는 논리였다.(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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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논쟁자들 - 중국 고대 철학논쟁, 개정판 China Library 차이나 라이브러리 2
앤거스 그레이엄 지음, 나성 옮김 / 새물결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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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덕德 개념을 '도덕화'한다. 그는 전통적으로 "물리적 힘에 호소하지 않고 남을 움직일 수 있는 선악을 초월한 '위력'을 의미"하는 덕을, "도道에 따라 행동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으로 재정의한다.(36) 국가는 덕을 실천함으로써 백성들의 존경을 얻는데, 그 수단은 무력이 아니라 의례儀禮이다. 공자는 "정치가 의례로 환원될 수 있다는 신념"(37) 아래 "인은 (형식성을 극복한) 의례로 회귀復禮하는 순간 성취된다"고 말한다.(52) 또한 "자신과 타인을 동일시"하는 서恕의 원리에 충실할 때 자아는 관습과 조화를 이룬다. 공자가 지향하는 원리들의 원천은 현상으로부터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섬기는 인간적, 사회적 접촉 속에 존재한다."(67)


묵가의 이론 체계에서 "하늘과 귀신의 기능은 신상필벌에 의해 진정한 도덕을 실시하고, 세상의 불의를 교정하고 보상하기 위한" 원리에 불과하다. 이들에게는 공자나 장자처럼 사유의 간극이 뚜렷한 사상가들마저 공통적으로 느꼈던 "천명에 대한 경외심과 복종"을 찾아볼 수 없다.(98) 겸애兼愛는 오늘날 평등주의적 함의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묵가는 "위로부터의 정치"를 주장했다. 묵가는 "국가의 중앙집권화와 관료제도화를 환영"(92)했으며, 이익과 배분을 중시하는 공리주의 경향을 보여준다. "모든 행동을 이해利害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묵가에게 결과와 유리된 도덕은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101)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로 인식"한 여타 사상가들과 달리, 양가는 "출사出仕와 관련한 압력을 거부할 권리"를 최초로 주장했다. 양가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인가?"가 아니라 "진정으로 인간에게 이로운 것은 무엇인가?"이며, 더 나아가 "진정으로 나에게 이로운 것은 무엇인가?"이다. "자신의 본성性과 참된 자신眞에 충실하는 것, 그리고 소유에 구속되지 않는" 양가의 사유는 이후 도가에 전해지며, "서력 기원 초기부터는 불교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묵자는 "정의를 생명보다 높이 평가"했고, 양주는 "생명을 소유보다 높이 평가"했다.(116) 양주의 '위아爲我'를 'selfishness'가 아니라 'egoism'으로 번역하면, 두 논변은 배치되지 않는다.(121,5)


기원전 4세기에는 "논쟁의 기술에 매료되어 역설을 좋아하며, 용인할 수 없는 것을 용인하도록 만드는" 궤변론자들이 등장한다.(146) 혜시惠施와 공손룡公孫龍은 "이성에 대한 순수한 기쁨이라는 원천에 거의 근접"했지만, 중국 사상의 주류는 "유용한 목적을 상실한 문제 해결은 무의미한 경박함"(24)일 뿐이라는 말로 이들을 배척한다. 기원전 4세기 후반, 맹자와 장자에게서 발견되는 '내면에 대한 고찰'의 선구자가 송견이다. "공자와 묵자는 '행위行'를 사회적 행동"으로 국한했지만, "송견은 '마음의 행위心之行'에 주의를 환기시킨다."(182) 송견은 "개인의 자기 평가가 타자의 인정과 부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고 또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186) 


이때의 마음心은 신체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기氣를 다스려 몸이 순수한 우주의 기운, 곧 정精으로 가득 차도록 조절하는 "사유의 기관"이다. 마음은 "내면에서 덕을 성숙시켜 자동적으로 도道와 일치하게 만든다."(192-3) 기원전 4세기의 일상 어법에서 '성性'은 "충분히 보양되고, 방해받거나 외부로부터 손상을 입지 않을 경우 그 발전을 완수하는 삶의 과정을 의미했다." 인간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하는 맹자의 말은 "다른 성향들보다 도덕적 성향을 선호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우며" 이러한 선호가 "모든 사람들에게 적어도 맹아로 내재한다"는 의미이다.(245) 순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性'이 "태어나면서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쓰인다.(234)


기원전 4세기 말부터 각 학파의 문제의식이 심화된다. '의례'에 천착하던 유가는 이제 "인성이 선한가, 선악의 혼재인가, 도덕적인 중립인가"라는 문제에 매달린다. 도덕과 정치를 공리주의의 잣대로 재단하던 묵가는 "논리적으로 난공불락인 공리주의적 윤리체계를 정립하기 위하여 궤변론자들의 도구를 사용한다." 생명 보호라는 양가의 입장을 받아들인 장자는 "인간을 죽음과 화해시킬, 우주 내 인간의 위상이라는 관점을 추구한다." 세 입장 모두 여전히 "하늘과 인간의 이분법"을 고수하지만, "하늘이 인간의 도덕성을 지지하는가라는 형이상학적 회의"를 품기 시작한 것이다.(203-4) 하늘과 인간의 결별은 무無도덕적 치국책을 제시한 법가에 이르러 완결된다. 


법가로 분류되는 이들의 공통점은, "좋은 정치라는 것이 유가와 묵가가 생각하듯이 개인들의 도덕적 탁월성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제도의 기능에 근거한다는 데 확신을 가진 점이다."(499) 법가는 "인구가 적은 사회에서는 정부가 없어서 도덕적 유대에 의한 결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탄없이 인정"한다.(506) 문제는 인구 증가에 따른 공동체 규모의 확대이다. 법가의 기준들은 완전히 형성되면, 자동적으로 작용한다. "군주가 해야 할 것은 단순히 인간의 행위와 기준의 표현을 비교하여, 거기에 맞는 보상과 처벌로써 대응하는 일일 뿐, 박애나 이기적인 고려들에 좌우될 필요가 없다."(510) 


이처럼 기원전 3세기에는 시대가 변했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도가와 법가는 "성왕들에 대한 호소를 관습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했고, 후기 묵가와 순자는 "시간의 흐름에 종속되지 않는 항구적인 원리"를 찾으려고 노력했다.(401) 천명天命을 떠난 인간은 자신에 관한 사유로 복귀하여, 하늘과 땅을 잇는 삼재三材의 요소로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순자와 한비자에 이르면, 현실은 인간의 호오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으로, "인간의 독자적인 목적을 위해 조작 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399) 그러나, 서구와 달리 하늘과 인간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어서, 음양오행론을 바탕으로 "인간 도덕이 우주적 질서 속으로 통합되는 것을 보장하는 감응 체계"가 구축되기도 한다.


한제국기에 전면적으로 등장한 유가의 감응론은 "하늘과 인간 사이의 위협적인 심연을 메웠다."(578) 이러한 우주론은 "'원형과학proto-science'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 말은 근대 과학의 엄격한 검증 가능성을 결여했다는 부정적인 의미와 함께 관찰 가능한 현상을 초월적인 존재들이 아닌 현상들끼리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종교와는 대조적인 과학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도 갖는다." 중국의 선택은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상을 결정하는 문제와 인간의 목적들을 위해 세계를 조작하는 문제 모두에 대한 통합적인 해결책"이었다.(580) 법가의 엄격한 제도화마저 인간학으로 품은 중국의 사유 앞에는 인간을 탈피한 인과적 사유를 향한 노정을 가로막는 깊은 협곡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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