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하학 연구 - 중국 고대의 사상적 자유와 백가쟁명
바이시 지음, 이임찬 옮김 / 소나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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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에는 철제 농기구와 우경牛耕 기술의 보급, 시비법施肥法과 수리 기술의 발전水利으로 농업 생산력이 급속히 증대했다. "농업의 발전이 가져온 직접적인 결과는 토지의 사유화와 토지 경영 방식의 변화였다."(28) 천자가 쇠락하고, 제후가 발흥하면서 자작농에게 조세를 수납하는 사전私田이 혈연 귀족들의 세습적 점유로 유지되던 공전公田을 대체했다. 이와 맞물려 관료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곡록제穀祿制(봉록제俸祿制)의 도입은 '사인士人'계층의 출현을 촉진하였다. "각 제후국들은 자신의 처지에 적합한 치국 방안을 찾고, 지식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 매우 절실"(33)해지면서, 인재를 예우하는 "예현하사禮賢下士의 기풍이 형성되었다."(42)


이렇듯 사인士人계층은 태생부터 통치 계급의 필요에 종속되어 있었다. "사인들은 정치에 봉사하는 과정을 통하여 학술과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켰으며, 제자백가의 학술은 바로 그들이 정치에 참여한 정신적 산물이었다."(56) 제환공과 관중의 긴밀한 협력 관계가 정착되어 있던 제나라는 여타 제후국에 비해 개명된 사회였다. "군주는 신하와 백성의 의견을 듣고 즉시 자신의 잘못을 고칠 수 있을 정도였으며, 신하와 백성이 대담하게 면전에서 군주의 잘못을 지적해도 군주의 노여움을 사지 않았다."(70) 제나라 도성 임치의 직문稷門 아래 천하의 인재를 불러모아 저술과 이론 활동을 권장하고, 정치적 의견을 제시하게 한 '직하학궁稷下學宮'은 이런 배경 아래 탄생하였다.


"전국 중후기 학술과 문화의 중심이었던 직하학궁은 동서남북의 각종 문화적 요소들이 교류하고 합쳐지는 곳이 되었다."(143) 한 자리에 모여 활발한 교류와 논쟁을 벌인 제자백가의 학설은 "본질적으로 모두 동일한 사회 현실에 대한 반영으로서, 같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여 같은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그것들 사이에서는 대립 이외에 일치하는 측면도 반드시 존재하였다." 즉, 직하학궁은 전국 시대 사상의 조류가 "'상멸상생相滅相生', '상반상성相反相成'하는 대립통일의 관계 속에서 병존하며 발전"하도록 장려했다.(181-2)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도가의 학술과 주장에 근거하면서도, 세상에 참여하여 치국책을 탐구한 '황로학黃老學'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나라의 전田씨 정권은 강姜씨 정권을 찬탈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이 염제炎帝를 물리치고 천하를 소유한 황제黃帝의 후손이라고 공언했다. "전씨 정권의 이러한 조치는 춘추시대부터 전해지던 "황제의 말"이 제나라에서 널리 퍼지고 발전하도록 크게 자극하였으며, 황제의 말과 노자 학설의 결합을 촉진하였다."(193) 황로학의 핵심사상은 "도법결합(道法結合, 도와 법을 결합)·이도론법(以道論法, 도를 근거로 법을 논함)·겸채백가(兼采百家, 제자백가의 학설을 두루 채용)"로서, "노장을 대표로 하는 전통 도가 학설을 크게 수정했으며 통치 집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태도를 취했다."(190-1)


황로학의 대표 저작으로는 <황제사경黃帝四經>과 <관자管子>가 있다. <황제사경>은 "노자와 마찬가지로 음양이 우주에서 가장 기본적인 모순이며, 우주의 운동은 음양의 대립과 통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231) 그러나 <황제사경>은 도가의 무위사상을 마냥 추종하지 않고, 인간의 능동적인 역할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이끈다. 인간은 비록 천도天道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지만, "인간이 일단 천도를 파악하고 난 뒤 자신을 위해 주동적으로 자연법칙을 이용한다면, 이때는 인간이 주主가 되고 하늘은 반대로 객客이 되는데, 이를 '천도가 순환하여 인간에 대해 도리어 객이 된다'라고 한다."(238)  


군주 역시 도道를 벗어나 통치할 수는 없다. 법法은 도道라는 우주 최고의 법칙이 사회와 정치 생활 속에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에, "군주가 입법자이기는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고, 반드시 도의 원칙을 근거로 법을 제정해야만 비로소 법의 공정성과 권위를 보장할 수 있다."(240) 이것은 "형벌은 대부까지 올라가지 않고, 예는 평민까지 미치지 않는다(刑不上大夫, 禮不下庶人)" <禮記·曲禮上>는 유가의 주장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것이다."(242) 다만, 사회는 천지음양天地陰陽을 본받아 존비귀천尊卑貴賤의 등급이 있으므로, "자신의 명분에 근거하여 자기의 권리 범위를 확정하여 분에 맞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한다.(245) 


<관자>의 법가 사상은 주류 법가였던 삼진법가三晋法家와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첫째, 그것은 제나라에서 이미 오랫동안 유행하고 있었던 도가 사상을 수용하여 도가 이론을 가지고 법가 정치를 논하였으며, 이를 통해 법치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그것의 비교적 강한 이론적 성격은 냉혹하기만 한 삼진법가와 구별되는 점이다. 둘째, 그것은 인근 추로鄒魯 지역에서 들어온 유가나 묵가 등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고, 그것들의 장점을 수용하였으며, 또한 예와 법을 함께 사용해야 하는 필요성을 논증하였다."(418-9) 이것은 "도를 체體로 하고, 법을 용用으로 삼은 것"으로서, <황제사경>의 '도생법道生法'이란 명제를 발전시키고 구체화했다.(431)


황로학자들은 인간은 모두 이로움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싫어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법가法家의 학설에 동의하면서, "사람들의 물질 욕망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으며, 일정 정도 '욕망欲'의 합리성을 인정하고 또 도덕적으로도 긍정했다. 다만 어느 정도 절제할 것을 주장했을 따름이다."(207) <관자>는 "이로움을 가지고 이끈다", "해로움을 가지고 단속한다"는 한비자의 "상과 벌 '이병二柄'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도법결합道法結合' 사상을 발전시켰으니, 이는 인간 본성을 "자연에 따르고 맡긴다"는 도가의 기본 원칙을 실제 정치에 구현하면서도, 강제성을 가진 법령을 행사하는 법가의 방법론을 조화시키는 논리였다.(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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