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총, 투표 - 왜 독재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폴 콜리어 지음, 윤세미.윤승용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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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절차를 학습(學習, 배운 바를 일상에서 꾸준히 익힘)하지 않는 공동체에는 언제든지 '미친 민주주의(democrazy)'의 그림자가 드리울 가능성이 상존한다. 최빈국은 그러한 사회적 자본을 모을 시간과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지만, 우리의 뒤틀린 일상은 어디 그런 변명이 통하겠는가.



(최빈국까지 확산된) 엄청난 정치 지형의 변화는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선거 제도의 확산이었다. 그런데 승리자의 권력에 제한이 없다면, 선거는 사실상 생사의 문제가 된다. 이러한 생사 투쟁이 선거 관리 규칙의 지배 아래 있지 않으면 선거 참가자들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민주주의(democracy)가 아닌, `미친 민주주의(democrazy)`다. pp.23-24

민주화가 평화 유지를 더 어렵게 만드는 실례를 원한다면 이라크를 보라. 현 체제의 한계가 무엇이든, 사담 후세인 체제보다는 훨씬 민주적이다. 하지만 후세인 통치하의 이라크는 평화로웠다. 비록 매력적인 평화는 아니었지만, 그것도 일종의 평화였다. 다만 국민의 동의보다는 선제적 탄압에 의존했다. 그리하여 억압 기술의 약화는 곧 민주주의로부터 초래되는 정치적 폭력 위험의 증가라고 난 생각했다. (...) 최빈국에서 민주주의의 책임성과 합법성의 효과가 정치적 폭력의 위험성을 감소시키지 않는 단도직입적인 이유는 이 나라들에서는 민주주의가 책임성이나 합법성을 담보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p.34

전통적 경제에서 집단에 대한 충성심은 때로 다른 집단에 피해를 입히는데, 주로 경쟁 집단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현대 경제에서의 종족에 대한 충성심은 다른 집단에 훨씬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공적 자금은 한 집단의 집단행동이 다른 집단을 훼손시켜가며 가질 수 있는 공동 재원이 된다. 이 단계에서 종족 집단에 대한 도덕적 의무는 전체 사회의 도덕적 의무와 충돌한다. (...) 일반적으로 이들 국가에서 도덕성은 종족 정체성이 사회에 해가 되더라도 집단에는 가치 있는 행동으로 여기게 한다. pp.66-67

선거가 치러지기 전에는 선거만이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이므로 모든 정당이 참여할 만한 인센티브가 있다. 때문에 정당은 선거 캠페인에 모든 동력을 쏟고, 결과적으로 위험성은 줄어든다. 하지만 선거 결과가 정해지면, 승리자와 패배자가 생긴다. 당연히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패배한 당은 승자를 축하하고 충실한 반대 세력을 구성해야 한다. 집권당의 권력 남용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패배한 당은 5년 안에 권력을 다시 잡을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분쟁 이후 상황은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승자는 신이 나서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지 않는 자유로운 권력을 기대한다. 이렇게 되면 패배자는 상대의 손안에 있는 자신의 운명을 예상하고, 이제는 폭력을 사용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다. p.98

죄수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은 협력이다. 아프리카는 군비 지출을 줄일 수 있는 집단행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협력에서의 진짜 문제는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각 정부는 인접국이 군비 지출을 감소하도록 격려하면서 자신은 그러지 않는다. 협력이 이루어지도록 돕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직접적인 것은 중립적 경찰이 실행에 옮기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이 경찰은 원조의 비정상적 누출을 막는 후원자나 무기 교역 금지를 내리는 유엔일 수도 있다. pp.138-139

전통적으로 최빈국들의 정부는 힘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에 대해 자신들을 반대하는 국제 시스템의 피해자로 여긴다. 식민지로 있다가 어렵게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아직도 더 강한 나라로부터 괴롭힘을 당한다고, 이런 강자와 약자 이미지가 역기능을 불러 일으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최빈국 정부가 주권을 아주 적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갖고 있다. (...)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들 국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공공재 가운데 하나가 정부의 책임성이다. pp.229-230

현실적으로 일반적인 최빈국 사회는 국민 주권(national sovereignty)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국가의 형태를 갖추고는 있으나 아직 국민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선거 행위나 당선자에게 충분한 제한을 두는 결속력이 부족하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주권’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이 민족 주권을 부러워하는 것은 곧 자신의 권력을 질투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 엘리트 집단은 국민의 요구에 응하는 것보다 국민 주권에 대해 지나친 열정을 갖고 있는데, 나는 이를 "얻어먹기보다는 죽는 게 낫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숭고할지 몰라도 엘리트가 배고픔을 겪는 게 아닌 것을 감안하면 생각이 바뀐다. pp.23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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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성리학 성리총서 13
피터 K. 볼 지음, 김영민 옮김 / 예문서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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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는 한당漢唐 제국과 달리 강성한 부족들 사이에 위치한 "동등자 속의 중국(China among equals)"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11세기에 등장한 사士들은 "앎, 의미, 행위에 진정한 기초가 있어야만 한다"는 믿음을 공유하면서, 과거의 절대적 보편주의의 모습을 바꾸어 존속시키고자 했다.(29) 그 중 하나는 '문화적 보편주의'로서, "문명이란 모든 이가 배우고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며, 모든 이가 "학學에 의해 사士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다른 하나는 "모든 존재가 같은 도덕적 본성을 부여받았다는 것"으로서, 신유학자들은 "도덕이란 모든 이에 의해 공유"될 수 있기에, 여진족이나 몽고족도 "학學의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39-40)


1050년 즈음의 이상주의적인 사士들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이 전 세계에 질서를 가져올 것이라는 "송나라 건국의 신념에 충실"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가 북부를 정복하여 안정적인 국가를 건설하자 상업이 발전하고, 생산력이 높은 남부 지방에서는 "정부 역할의 축소를 요구"하는 사유가 흥성하였다. 국가 행정기구는 실질적으로도 두 배 정도 늘어난 인구를 따라잡지 못하여 지방사회의 통제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부에 대한 정부의 몫을 줄이고 화폐공급을 유지하며 민영 부문이 주도하는 경제성장을 촉진할 것을 요구"하였고, 지방 사士들이 "공공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관료체제 밖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물었다."(50) 


"1050년에 이르면 과거시험은 관료제에 들어갈 수 있는 주된 수단이자 고위관직에 오르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68) 관직 등용의 문이 좁아지자, 신유학자들은 "사士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 더 이상 관직봉직이 아니라 과거시험이 테스트하는 종류의 교육을 획득하였느냐의 여부"라고 규정지었다. 이들은 "지도적 지방사족과 통혼"하여 고향에서의 입지를 다졌고, 정부의 지원 없이 "출판 지원, 사당과 서원의 건립, 의창義倉(charitable granary)에 대한 기부, 종법체계의 확립"을 이루어냈다.(60) "남송대 그리고 그 이후의 신유학자들은 사적인 부의 독립성을 옹호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이익이나 정치적 파워가 도덕과 동등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다."(59) 


당대의 사士들은 당나라 스타일의 "시를 짓는 기술을 습득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문文에 담긴 이상을 이해한다거나 문文에 담긴 이상에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이들은 과거시험 공부를 대체할 수 있는 '고문古文'을 진흥시켰는데, "고대의 문文이란 (하夏·은殷·주周라는) 이상적인 세계로의 접근 통로를 제공하는 텍스트(경전), 그리고 그러한 텍스트들의 스타일, 둘 다를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고문古文을 공부한다는 것은 곧 성인들의 가치를 배우는 일인 동시에 그 가치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이었다.(95-6) 사士의 관점에 따르면, 송나라는 "한당 제국의 역사와 단절되어야만 고대의 성취에 다가갈 수 있었다."(98)


사士는 "개인이 자기 안에 어떤 실질적인 것을 함유하고 있고, 그것이 개인으로 하여금 사물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학學은 이제 "통치자가 교화敎化를 행하는 것을 돕거나 아랫사람들의 느끼는 바를 소통하게 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통치자에게 무엇을 해야할지를 알려주는 수단"이 되었다.(119-120) 정이程頤는 유학자가 여타 지식인들과 다른 핵심적 요소가 바로 '도道의 추구'라고 보았다. 그는 과거의 유학자들이 도 자체보다는 도에 대한 지식에 다가서는 매체(경전, 글쓰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비판하면서, "도덕적 학學은 ‘진정한 유학儒學’ 스승과의 실제 대면"을 통해서만 기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42)


"도덕적 앎을 위해서는 사물의 본래적 질서와 리理를 알아서 그것을 행동의 기초로 삼을 것이 요청된다."(188) 그러한 앎은 "사물의 의존 관계(本末)와 순서(終始)에 대한 이해에 기초"하며, "사물의 리理에 대한 이해라는 근본적인 작업으로부터 시작해야 평천하平天下에 이르는 각 단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188-9) 신유학자들이 보기에, 통치자는 "피라미드의 정점이라기보다는 아치의 쐐기돌 같은 존재, 즉 그가 제자리에 있음으로 해서 그를 포함한 전체 구조물이 성공적인 작동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그러한 존재였다."(205) 정부는 '신민新民'을 행해야 하는데, "신민이란, 각자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도덕적 본성을 재활성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였다."(209)


신유학자들은 리理를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묘사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동시에, 사물이 어떻게 작용해야만 하는지를 판별해 내는 규범적 용어로 사용"한다. 이는 리理에 따르는 사물이 "보다 큰, 자족적이고 유기적인 전체의 일부로서 조화롭게 기능할 수 있게끔 작동함을 의미한다."(262-3) 기氣는 사람마다 다르며, "욕망의 충족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각자가 목전의 욕망을 달래기 위한 것만 움켜쥐려 들기 때문에, 그 사회는 곧 자기만족을 위한 난폭한 경쟁으로 빠져들게 된다."(275) 따라서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리理의 통일성을 자각"해야 하며, "자아 외부에 있는 사물의 리理를 깨닫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학學이 추구하는 바이다.(277)


송대의 신유학자들이 "우주, 인간사회, 학설, 마음의 통일성을 예외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주장"하긴 했지만, 이것이 "차이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주학에서 말하는 ‘리일분수理一分殊'는 "모든 사물이 하나의 리라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각 사물은 또한 자기 나름의 리에 의해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리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각자 특정한 관계망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대우받아야 함을 의미한다."(322) 신유학자들이 추구한 유기적 통일성은 역사적 주장이나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믿음(에 대한 의식적인 헌신)을 천명한 것"에 불과하다.(313)


지역공동체를 장악한 "신유학자들은 혈연에 기초한 전례단위로서의 가족에 초점을 맞추었다."(378) 예禮를 실천하는 가족家族과 씨족氏族은 "사회적 맥락에서 작동하는 도덕적 실체"였으며, 족보에 기반한 씨족은 "세대를 넘어서까지 가家들 간의 연속성을 유지해 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390) 신유학자들에게 예禮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리理에 사회적 표현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예禮는 "질서 있고 조화로운 세계를 위한 모델이었고, 삶의 모든 측면을 조화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는 실천의 총체였으며, 오랫동안 도교와 불교에 물든 주민들을 그 영향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비강제적 수단이었다."(379) 


"신유학자들은 문학적 성취나 배움보다는 윤리적 행동이 개인의 가치를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역사를 초월하는 진리를 추구하였으므로, 역사의 교훈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430) 이들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기보다는 인간으로서 관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정치의 인격화와 도덕화였다."(434) 지배 이데올로기로 고착된 신유학은 고증학에 이르러서야 중요한 단절을 맞는다. 고증학은 "사물에 필연적인 리理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회피"하며 고대를 "성인됨을 추구하는 이들의 도덕적 앎의 근원"이 아니라, "누적적 연구의 대상이자 학의 방법론의 가장 중요한 실험장"으로 간주하였다.(4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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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의 사유세계 - 주자학의 패권
호이트 틸만 지음, 김병환 옮김 / 교육과학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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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년 여진족이 중국 북방을 정복하여, 북송北宋이 몰락하자 "유가 지식인들은 충성과 절개를 지키지 못하였거나 심지어 오랑캐에게 몸을 의탁한 사대부들에게 큰 수치심을 느꼈다." "많은 유학자들은 문화와 도덕관을 부흥시키는 것이야말로 국가를 재건하고 외적의 세력을 축출할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 아래 "어떤 전통이 비로소 ‘도道’에 대한 정확한 해석인지, 어떤 전통이 유교 사회의 가치 기준이 될 수 있는지를 심도있게 토론하였다."(26) 그러나 고종은 "진회(秦檜, 1090-1155)의 주화파가 의견이 다른 인사들을 탄압하는 것을 용인하였으니, 특히 금과의 전쟁을 강경하게 주장하는 도학인사들을 배척하였다."(30)


이런 상황에서 "도학道學 인사들은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유대를 형성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하였으며, 사회 정치 문화를 개선함으로써 도덕가치를 부흥시키고 유학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서원은 도학 집단의 중요한 활동 중심이었으며, 그들은 서원에서 각종 예의 규범을 실행하였고 단체의 책임감과 응집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학생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예를 행하고 제단 앞에서 유가의 성현과 선사先師들을 향해 향을 피워 공경을 다함으로써 도학 전통 내부의 연속성과 응집력을 강화했다. 도학 인사들은 서로 이끌고 도와주었으며, 관직 추천이나 승진 시에 특히 서로를 후원하여 훗날 그들이 매우 크게 성공할 수 있게 하였다."(15) 


대표적인 도학자인 정이는 "오늘날의 학자들은 세 부류로 나뉜다. 문장에 능한 자는 문사文士라 하고, 경전을 담론하는 자는 강사講師에 가까우며, 오직 도를 아는 자만이 바로 유학자이다"라고 말했다. 즉, "'도道'를 아는 학자만이 비로소 '유儒'라고 불릴 수 있으며, 전통적인 문학과 유가의 <오경五經>을 연구하고 익히는 것은 더 이상 유학자를 가늠하는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19) 이들은 구양수(歐陽修, 1007-1072), 왕안석(王安石, 1021-1086), 소식(蘚軾, 1036-1101)같은 문사형 인사들이나 전통 방식을 옹호하는 '세유世儒'에 맞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했으며, 그 중심에는 동시대 학인들과의 논쟁과 대립을 통해 도학 이론을 가다듬은 주희朱熹가 있다.


장구성張九成은 "불교가 유교의 기본인 삼강오상三綱五常을 파괴하고 윤리적 실천의 결핍을 초래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는 참선 정좌에 만족하지만, 도덕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수신 양성을 그치지 않아 더욱 완전한 자아와 사회를 건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36) 호굉胡宏은 "앎[知]이 실천[行]에 앞선다고 독실히 믿었고, 불교가 유가의 ‘심心’과 같은 개념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고 여겼다. 호굉은 선종의 영향을 뿌리 뽑고 경전과 역사를 연구하여, 고대의 이상적 제도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38)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본심을 체득하는 수양 공부를 중시했으며, 수양을 통해 "인仁과 지智가 합일된 연후에야 군자의 학문이 성취된다"고 보았다.(45)


1160년대에 이르러, 주희는 "소식형제와 장구성 및 여본중이 유가경전과 노자, 장자, 붓다의 사상을 혼합"하여 "이단의 사설邪說이 차츰 발전하여 기세를 떨친다고 생각했다."(52) 장식張栻은 "그들도 사실 유가의 도덕을 따르지 않는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면서도, "그렇기에 ‘우리 도당[吾儒]’과 각종 이단의 가르침을 추구하는 무리들을 구분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57) 장식은 "유가의 기본인 가정·사회 윤리가 인간의 삶과 국가 생존의 근본"(63)이라 믿었으며, "반드시 격물格物의 수양 공부로 리理에 대한 인식을 강화해야만 비로소 주관적 편견을 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67)


여조겸呂祖謙은 “한 스승만을 따르지 않았고 한 학설만을 추종하지 않”는 학문 방식을 통해 다른 도학파들의 사상을 결합하였다.(106) 그는 "모든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만의 편견이나 선입견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편견의 원천이 되는 곳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고치기 위해 도덕적 노력, 즉 공부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9) 그는 "풍속은 단지 우리들이 만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풍속이 어떻게 좋아질 수가 있겠는가?”라면서, 학생들이 과거 시험에 적극적으로 응시하여, "정치의 중심지인 조정에서부터 사회를 변화시킬 것"을 요청했다.(118-9)


주희와 여조겸은 "불학과 도학과의 경쟁, 교육제도 개선 그리고 유학의 발양"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의식과 단결을 강화할 수 있는 서원 재건에 주력한다. 여조겸은 주희와 함께 "왕안석 신법 중 교육제도의 폐단을 비판하며, 학교교육이 과거科擧를 위한 문장연습에 치중하고 있는 점에 반대"하고, "유가경전의 학습과 도덕 교육을 강조"하여, 서원을 중심으로 "정이·정호와 장재의 학설을 심도있게 연구한다."(147) 주희와 여조겸은 "'천심天心'이 곧 '군자의 마음'이라고 여겼다." 주희는 "성인이 그 마음을 극진히 해서 천天과 본성을 알게 되고 만물과 합하여 일체가 될 때, 성인의 마음은 ‘천심’과 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161)


1180년대 이후로 "주희는 정치적 함의가 짙은 ‘오당吾黨’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도학 동도同徒들을 지칭했으며, 그들의 문화적·정치적인 사명을 제시하여 간접적으로 조야의 여러 유생과 학인들을 향해 도전했다."(172) 그는 "흑과 백을 구별하지 않으면 옳고 그름을 논할 수도 없다. 함부로 ‘무당無黨’을 말하는 것은 도를 더 혼란하게 한다”고 하면서, 당을 구별하지 말 것을 제창하는 인사들을 질책하고, 도학에 한층 짙은 정치적 색채를 입혀나갔다. 주희는 "국내 학술의 폐단은 두 가지 설에 불과하다. 강서의 돈오頓悟와 영강의 공리주의인데, 만약 온 힘을 다해 이들과 쟁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도는 밝아질 수 없다"는 말로 도학 내부에서 사상 논쟁을 벌여나갔다.(177)


진량陳亮은 "모든 원칙을 판단할 수 있는 추상적인 혹은 초월적인 표준은 없다고 여겼다."(223) 그는 주희의 불변하는 기본 가치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여, "도道가 역사 발전과 인류의 행위에 내재되어 있으며, 시간과 상황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237) 주희는 유일한 도를 바탕으로 모든 만물과 제도를 평가해야 비로소 “천지의 불변하는 이치와 고금에 통용되는 옳음을 나 자신 안에서 얻어”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영원히 존재하는 불변적 도덕규범의 도와 역사 속에서 단속적으로 실현된 도라는 함의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도를 구분한다." 주희가 보기에 "도道는 본래 소실된 적이 없고, 단지 인간이 도를 준수하지 못했을 뿐이다."(241-2)


주희가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학문 연구와 도덕 훈련을 강조한 것과 달리, 육구연陸九淵은 모든 사람이 "맹자가 말한 '본심'과 인의예지 '사단四端'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육구연은 "사단은 곧 마음이며,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것이 곧 마음이다. 사람에겐 모두 이 마음이 있으며, 마음엔 모두 이 이치가 있으니, 마음이 곧 이치理致”라는 말로 '심즉리心卽理' 사유를 전개하였다.(255) 주희는 "마음이 곧 리理"라는 논리는 불교도의 견해와 같은 것으로, 이는 경전經典 연구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소홀히 하면서, 쉬운 수양 방법으로 본심의 각성覺醒에 도달하려는 방식이라고 준엄하게 비판했다.


주희는 "지식에 매우 의미 있는 독자적 지위를 부여했으며, 지식이 도덕윤리의 기초라고 생각했다."(287) 그는 <대학大學>, <중용中庸>의 주석을 지으면서 자신이 공자와 맹자로부터 북송사자北宋四子에게 직접적으로 전승된 도통道統의 계승자임을 은연중에 암시하였다. 육구연은 "전통과 도통을 정의하는 주희의 권위를 의심"하면서, "동도同道들과 학문을 토론하여 ‘하나의 올바른 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300) 주희는 그의 말이 합당한 표준이 되지 못한다고 반박하면서도, "표준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주희는 육구연이 자기 마음속의 판단을 지나치게 중시하여 "전통적인 경전의 판단에 의거하지 않았다"고 공격할 뿐이었다.(299)


"1241년 1월, 송나라 이종은 칙령을 반포하여 정통 사상으로 도학을 전면 수용"하였다. 남송 정부가 입장을 바꾼 이유는 "몽고인들이 북방에서 공묘를 건설하고 과거제도를 시행"하는 등, 자신들이 "유가 문화를 후원하는 신정권이며 나아가 중국의 합법적인 통치자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315) 주희의 후학들은 자신들이 "대도大道를 혼란케 하는 학자와 대항한다고 자임하였다."(310) "주희, 주돈이, 장재 및 정씨 형제의 초상화가 공자사원"에 모셔졌고, 주희의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註>는 도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번영"시켰다고 공인되었다. "왕안석의 위패는 공묘에서 퇴출되고, 태학은 도통을 전수한 성인과 현인들에게 경의를 표할 것을 명령"받기에 이르렀다.(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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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석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장하석 지음 / 지식플러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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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철학, 진리와 이성(의 관계)에 대한 다원화된 질문들의 향연. 과학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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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의 형성과 전개
고지마 쓰요시 지음, 신현승 옮김 / 논형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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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사人事'에 의해 '천재天災'가 발생한다는 논리를 '천견론天譴論'이라고 칭한다. 저자에 따르면 천견론은 과학이나 신앙이 아니라, 정치 공간에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동원된 정책 수단이다. 정치의 득실과 재이災異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은 순자荀子나 왕충王充 같은 송대宋代 이전의 사상가들이 이미 주장한 바이지만, 송대에도 천견론은 소멸되기는커녕 군주가 "이치[理]에 의거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이끄는 방편이었다. 신종대를 보면, 재해와 이변은 신법에 반대하는 대신들이 왕안석의 전횡을 타도할 때 뿐만 아니라, 왕안석에 의해 "일어나야 할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것을 경하"하는 대응 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30)


왕안석은 그저 재이와 연관된 사태를 소멸시키려는 사고방식에서 한걸음 나아가 "군주는 재이를 계기로 자신의 행동이 '천하의 올바른 이치[天下之正理]'에 맞는지를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군주된 자의 근심은 이치를 궁구하지 않는 것"에 있으며, "궁리窮理야말로 정치의 요체"인 것이다.(56) "재이가 구체적인 사상에 대한 '응보[應]'가 아니며 군주의 수덕修德에 의한 궁리가 중심 과제"가 되면서, "리理의 권위를 보증"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여기서 변함없이 '천天'이 등장한다. 단, 이때의 천天은 "리理의 근본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고 군주의 시책에 일일이 끼어들어 쓸데없이 참견을 하는 유의지자有意志者"의 의미를 상실한다.(57)


이로써 재이는 "어떤 개별적 현상에 의해 기계적으로 발생"하는 사태가 아니라 "군주의 마음의 준비에 대한 감시와 억제 기능을 가진 현상으로서 파악"되었다.(71) 주희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일신一身의 사욕私慾을 이겨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으로 돌아간다"고 주석을 달았을 때, '예禮'의 치환이 '천리의 절문'인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주희는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우선시하는 욕망이 기질氣質로서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여 "'천리의 절문', 즉 규범으로서의 예禮에 합치한 말과 행동을 해 나가는 것이 당연히 사람으로서의 올바르고 본래적인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80)


"북송北宋에서 맹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제일인자는 왕안석이다."(98) 왕안석은 "당대唐代 이래로 중시되어 오던 시부詩賦를 시험과목에서 제외하고, 그 대신에 책策(시사문제에 관한 대책)과 논論(역사비평)을 중시하였다." 또한 "'겸경兼經'이라는 명칭 하에 <논어>와 <맹자>를 모두 과거의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결국 <맹자>는 이러한 계기를 시작으로 하여 경서로서의 취급을 받게 되었다."(101) 왕안석은 "본성[性]은 서로 가까운 것이지만, 습관[習]이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論語> 陽貨)는 공자의 말을 빌어, 성性에 선험적인 시비是非나 선천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性이 원인이 되어 구체적인 형태로서 발현한 상태가 문제"라고 말하였다.(99)


주희는 "본성 그 자체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왕안석과 호남학파의 주장을 배척하고, 인의예지仁義禮知를 본성으로 인정한 한유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장재張載의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합한 것'이라는 규정"을 기본으로 삼아, 사람은 본래 선한 본성을 갖추고 있으며, 다만 "기질의 소위所爲에 의해 악행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 세상에서 악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질을 선으로서의 본성으로 되돌리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인의예지를 "사람의 마음에 미리 부여된 리理로 간주하는 것"이 주희의'성즉리설性卽理說'이다. 아울러 이러한 리理는 그 "본래적인 올바름과 선함"의 근본 원리인 천天에 기대고 있기에, 성性은 리理를 통하여 우주와 연결된다.(110-2)


주희는 자신을 비롯한 도학자들이 맹자를 마지막으로 끊어진 도통道統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했다. 주희와 그 문류門流가 보기에 당대는 공자와 맹자가 통치자에게 도道를 가르치던 상황과 유사한, 그들 나름의 '르네상스'였다. 주희에 따르면 "요순에서부터 공자·맹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그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도道'는 그 후 천사백 년에 걸쳐서 단절"되었는데, "그것을 다시 부흥시킨 이가 바로 주돈이이고, 그러한 성과가 <태극도설>이다."(157) 주희가 '성性과 정精'을 분리한 것처럼, "리理에는 형상이 없으며 기氣에 붙어 있는 것"이라는 자신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창할 때 "<태극도설>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구절은 아주 적당한 재료"였다.(168-9)


이제 "도道의 담당자는 군주의 지위를 얻은 자에게만 한정될 수는 없다. 오히려 공자 이후는 '왕王'이 아니라, '사師'라고 하는 것이 도통 계승자의 성격이 되었다."(199) 주자학이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독서인讀書人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서 그들에게 살아 있는 목표를 제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때의 독서란 "성인이나 현인들이 글로 써서 남긴 텍스트 등을 통하여 마땅히 그러해야 할 세상의 올바른 모습에 관하여 배우는 작업이었다."(202) 사서학四書學을 학습하여, 오경五經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 "<주례>는 국제國制, <의례>는 가례家禮로 삼고, 여기에 <예기>를 더한 삼례의 학을 부흥시키는 것"이 주희의 실천적 목표였다.(221)


<주례>를 중핵으로 삼아, "치민治民을 위해서는 확고한 (국가) 조직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고 방식"은 왕안석의 신학에서 유래한다. 이에 대항하여 등장한 "정이의 도학道學·리학理學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위정자 자신의 인격 도야와 민중에 대한 풍속 교화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통치 제도를 중시하는 주례형周禮型과 수양 교화를 중시하는 대학형大學型"은 서로를 배제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수레의 양쪽 바퀴와 같은 관계로 청말淸末에까지 이르렀다. 다만 주자학에서는 이념으로서의 수기치인이 압도적인 무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형大學型으로 그 무게 중심이 기울어지게 되었다."(243-4)


비록 왕수인이 주창한 명대의 양명학이 각자에게 '천리로서의 양지良知'가 갖추어져 있다는 취지에서, '심心·성性·리理'를 구별하는 주희의 사고방식에 반대했지만, 이들의 관점이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바로서의 리理에 대하여 존경의 염念을 가지고 경건하게 유지하는" '존덕성尊德性'과 "학문에 의해 견문을 넓히고 리理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해가는" '도문학道問學'을 이항 개념으로 구분 짓고, 주자학과 양명학을 대비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후세에 만들어진 이미지에 근거한 이야기이다."(131-3) 제3자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에게, 주자학이나 양명학이나 모두 '송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었다.


"주자학을 따르든지 아니면 양명학에 영합하든지 간에 명대明代 독서인들이 공통 과제로서 삼았던 것"은, '송학'이 품고 있던 문제인 "수신을 완성한 인물이 지도자가 되어 형성·유지해갈 질서를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자 실천방안이었다. 여기서 "정돈된 질서, 즉 그들의 용어로 '예교禮敎'가 한층 더 전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것이 거경궁리居敬窮理에 의한 것이든지, 아니면 현성양지現成良知 이든지 간에 궁극적인 목표는 동일하였다. 단지 그 방도가 달랐을 뿐이다."(250) 실천론을 배제하고 심성론心性論으로 축소시킨 '송학'은 한당漢唐의 훈고학을 재평가하는 자신들의 방법론을 '한학漢學'으로 칭한 청대 고증학자들이 창안해낸 개념이다.(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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