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다시 쓰기 - 다중인격과 기억의 과학들
이언 해킹 지음, 최보문 옮김 / 바다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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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다중인격은 여러 방식으로 지식의 대상이 되었다. 사진은 다중성의 초기(1870~1880년대) 수사법 중 하나였다. 이 책의 종장으로 가면서 내가 초점을 맞춘 주제는, 기억에 관한 지식으로 알려진 새로운 과학이 영혼을 세속화하기 위해 어떻게 철저히 의도적으로 창조되었는지가 될 것이다. 그전까지 과학은 영혼의 연구에서 배제되어왔다. 기억에 관한 새로운 과학들은 서구의 사상 및 실천에서 그 질긴 정수精髓를 정복하기 위해 출현했다. 그것이 내가 언급한 서로 다른 모든 지식과 수사를 '기억'이라는 주제 아래에 연결시키는 결속체이다. 가족이 붕괴할 때, 부모가 아이를 학대할 때, 근친강간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려 할 때, 우리는 영혼의 결함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영혼을 지식으로, 과학으로 대체할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영적인 전쟁은 영혼이라는 명시적 영역 안에서가 아니라,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전제된, 기억의 영역에서 벌어진다."(23-4)


#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영혼은 불멸하는, 본질적인 단 하나의 것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존재하는 여러 측면(품성, 이해, 사랑, 열정, 시기, 후회 등)의 이상한 혼합물을 말한다.


1장 다중인격은 실재하는가? 


"다중인격은 실재하는가, 아닌가?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독자들 누구도 이 질문은 하고 싶어지지 않기를 희망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어떻게 개념들의 이러한 설정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삶, 관습, 과학을 만들고 주형하기에 이르렀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두 가지는 여전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기억과 정신적 고통이다. 이 질환이 하나 이상의 인격들과 관련되건 아니면 하나보다 적은 인격의 파편들이건 간에, 또 해리든 와해든 간에, 이 장애는 어린 날의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으로 추정된다. 그때의 잔혹함의 기억은 숨어 있지만, 인격의 진정한 통합과 완치를 위해서는 기억해내야만 한다. 다중인격과 그 치료법은, 기억의 본질에 관한 축적된 지식을 통해서 그 괴로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가설에 기반한 것이다. 나는 다중인격에 대한 신념을 의문시하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옹호자와 반대자 모두가 기억이 영혼의 열쇠라는 가정을 왜 당연시하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40-1, 46)


2장 다중인격이란 어떠한 걸까? 


"많은 다른 인격들은 본 인격 안에 또 다른 인격들이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특히 치료를 시작할 때 자신이 다중인격임을 부인하는 본 인격이 더욱 그러하다. 반면 어떤 다른 인격은 다른 인격들의 존재를 알고, 서로 잘 알기도 하고, 말도 나누고, 합동해서 활동하기도 한다. 이는 공共의식 혹은 공재共在의식이라고 불린다. 다른 인격들은 서로 말싸움하고 으르렁거리거나 서로 위로하기도 한다. 한 다른 인격이 등장하면 또 다른 인격은 왼쪽 귀에서 저 인간은 얼마나 얼간이 같은지 모르겠다고 투덜댄다. 많은 치료사들은 여러 다른 인격들이 서로를 다 아는 완전한 공존은 통합에 필요한 단계이므로 다른 인격들을 서로 소개시키려 노력한다. 진단을 받자마자 다른 인격들이 튀어나온다는 말은 아니다. 한 임상가가 말하기를, 다중인격을 치료하는 일은 담요 아래에 숨어 있는 고양이들이 싸움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많은 소리와 움직임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고양이 하나하나를 알아보기는 어렵다고."(57)


3장 다중인격운동 


"다중인격운동의 본질적 요소는 아동학대에 관한 미국의 강박과 그에 대한 감응, 혐오, 분노, 공포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다중인격운동의 일대기를 연 것은 바로 1973년에 출간된 《시빌》이다. 《시빌》은 코넬리아 윌버가 시빌을 치료한 사례보고이다." "윌버의 작업은 아동기의 트라우마를 적극적으로 찾으려 했다는 것에서 다중인격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그녀는 시빌의 다중성을 어머니의 심술궂고 징벌적인 그리고 흔히 성적인 폭력에서부터 추적해 들어갔다. 아동학대와 가정 내의 변태적 성생활 사이의 연관성에 관해 대중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시빌의 어머니의 행동은 학대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물론 집안에서 발견된 고문 도구라는 것이, 당시에는 가정집에 흔히 비치되는 잡화라서 그 물건의 존재만으로 가학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책이 출간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화된 후에는 그 실재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76, 79-82)


"돌이켜보면, 랠프 앨리슨은 최초로 다중인격장애 치료계획안을 고안한 명예로운 선구자로서, 이는 과학적으로 적절해 보인다. 그러나 다중인격운동을 점화시킨 것은 바로 그가 행한 홍보활동이었다. 1970년대 후반, 미국정신의학협회 연례총회에서 다중성 워크숍을 기획하고, 본 프로그램에서 발표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였다. 그는 다중인격 정신치료를 위한 두 가지 소책자를 유포했다. 그가 제안한 내재적 자아 조력자Inner Self Helper(ISH)라는 개념은 적어도 초기에는 일부 주류 정신과의사들에게 신중하게 받아들여졌다. 그가 말한 개념에서, 조력자는 현대 다중인격이론이 그려낸 다른 인격들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어린 날 트라우마에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조력자는 증오할 줄을 모른다. 조력자는 오직 사랑만 느끼고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신에 대한 믿음을 표현한다." "앨리슨은 ISH란 〈실제로는 양심〉이라고 했다. 그는 환자에 관해 더 잘 알기 위해 조력자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87-8)


# 차후에 앨리슨은 잔혹한 강간-살해 범죄를 저지른 마크를 연구한 후 '선한 내재적 조력자 가설'을 폐기한다. 


4장 아동학대 


"아동학대는 다중성을 이해가 될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최근의 이론에 따르면, 대부분의 다중인격은 어린아이일 때 해리dissociation가 시작된다. 이 원인론이 임상경험으로 충분히 확인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의 신념이 되었는지를 알아보려면, 아동학개 개념의 궤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생각하는 즉시 이해되는 명료한 개념도 아니고, 사례에 주목해도, 자신의 기억을 들여다봐도 그렇듯 명료하게 떠오르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피해자 쪽에서는, 학대 경험이 자명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 사건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일이었을지와 상관없이, 사회적 의식이 고취된 뒤에야 비로소 '아동학대'로서 경험되고 기억되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과거의 행위를 새롭게 해석할 새로운 서술의 발명과, 커다란 사회적 동요다. 주디스 허먼의 저서 《트라우마와 회복》에 적혀 있듯이, 〈트라우마는 정치적 운동과 동맹을 맺어왔다.〉"(100-1)


"의료화는 성, 계급, 사악함보다는 덜 흥미를 끌었지만, 그래도 어떤 관점에서는 아동학대 개념의 증명서다. 특정 유형의 사람들─예컨대 아동학대 가해자, 피학대아동 같은─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런 이들에 관한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 지식이 온전하다면, 온갖 종류의 학대행위, 가해자, 피해자는 다양한 유형의 의학적, 정신의학적, 통계적 법칙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들 법칙은 아동학대를 어떻게 개입하고 예방하며 개선할지를 알려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중인격은 아동학대를 발판으로 해서 '지식의 대상'으로 발돋움했다." "원인 규명은 지식의 대상이다. 만일에 아동학대가 소위 자연종이라 불리는, 오직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한 종류이자 자연법칙의 지배하에 있는 다른 사건과도 엮여 있는 그러한 것이라면, 아동학대는 어떤 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아동학대에 관한 의학지식은 사건의 종류와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는 법칙에 관한 지식이다. 일련의 새로운 지식체계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106-7)


"전통적인 근친강간의 금기는 성교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근친강간과 아동학대가 동일선상에 놓이자 근친강간의 개념이 급격히 확장되었다." "이 사건들은 엄청난 해방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여자들 그리고 점차로 많은 남자들이 혈연관계 안에서, 혹은 결혼관계나 편의적 관계 안에서 대개는 남자들에게 당했던 처참한 경험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아버지, 삼촌, 할아버지, 사촌, 계부, 남자친구, 동료, 애인, 사제가 그 남자들이었다. 어머니와 이모나 숙모와 강요된 성관계를 가진 기억도 있었다. 그 일을 입 밖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카타르시스였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 순간의 폭력이나 다시 다가올 폭력에 대한 공포만이 아니라, 계속 붕괴되어가는 인격과, 어떤 인간과도 애정과 신뢰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어간다는 데에 있다. 성적 반응이 왜곡될 뿐만 아니라, 애정에 대한 반응 또한 일그러져간다. 구타당한 아기들이 아니라 구타당한 삶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다중인격 임상가들이 밝히려 했던 것이었다."(112)


5장 다중인격의 젠더 


"남자보다 훨씬 더 많은 여자들이 다중인격으로 진단되는 것은 왜인가? 네 가지의 설명이 제시되는데, 모두가 다중인격의 배경 이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첫째로, 범죄 가설이 있다. 잠재성 남성 다중인격은 폭력적이어서 의사보다는 경찰의 손에 잡힌다. 둘째로, 다중인격은 은연중에 자신이 속한 문화적 환경에 어울리는 선택을 한다는 견해가 있다. 해리 행동은 여자들이 선호하는 스트레스의 언어다. 심지어 도피 수단일 수도 있다." "남자들이 선택하는 스트레스 표현방식은 알코올이나 폭력 등이다. 셋째는 인과적 설명이다. 다중성은 어린 날의 반복적인 아동학대, 특히 성학대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이다. 소녀들이 소년보다 훨씬 더 자주 학대의 대상이 된다고 간주된다." "넷째는 암시의 요소를 강조하는 설명이다. 북미에서 치료과정에 있는 여자들은, 심지어 전형적인 권력구조를 피하려 적극 애를 쓰는 여자일지라도, 같은 상황에 있는 남자들보다는 더 쉽사리 치료적 기대치에 협조한다."(127-8)


"학대를 강조하는 일은 흔히 힘을 부여하는 동기가 된다고 말해왔으나,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이는 루스 레이스의 분석인데, 그녀는 드물게 다중인격을 정면으로 다룬 페미니스트 학자다." "레이스의 글에 따르면, 로즈는 〈캐서린 매키넌, 제프리 마송 등이 무의식적 갈등의 개념을 배척하고, 대신 내부/외부라는 경직된 이분법을 수용해서, 폭력이란 전적으로 그 개인의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여성은 완전히 수동적인 피해자라는 퇴행적인 정치적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밖에 없게 된다〉라고 비판한 것이다." "결론 중 하나로서 이런 종류의 분석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학대, 트라우마, 해리에 관한 현재의 이론들은 또 다른 여성 억압의 순환고리 중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전보다 더 위험한 이유는, 전적으로 '피해자'의 편이라고 자칭하는 이론가와 임상가들이 그것을 이유로 환자를 자율적인 한 개인이 아니라 무력한 자로 구성해내기 때문이다."(131-2)


6장 원인 


"인과적 일반화는 양 극단 사이에 위치한다. 한 극단에는 엄격한 보편성이 있다. K 종류의 하나의 사건 또는 조건마다 J 종류의 하나의 사건 또는 조건이 결과로 나타난다. 옛날 물리학은 그런 법칙을 선호했다. 다른 한 극단에는 상당한 필요조건fairly necessary conditions이라는 실로 조심스러운 설명이 있다. K 종류의 사건 또는 조건이 없이는 J 종류의 사건 또는 조건이 나타날 가능성은 낮다. 그 사이에 개연성과 경향이 있다. 〈정신의학 역사상 주요 질환의 특수 병인에 관해 이렇게 잘 알게 된 적이 없었다〉라고 로웬스타인은 말했다. 이를 주장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이 주요 질환에 관한 어떤 일반적인 인과적 설명이 그 배경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장은 엄격한 보편성처럼 엄중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상당한 필요조건이면 충분하다. 로웬스타인이 의미했던 상당한 필요조건이란, 〈어린 시절의 극심하고 반복적인, 전형적으로 성적인 트라우마가 없이는 다중인격이 나타날 가능성은 적다〉일 것이다."(141-2)


"'상당한 필요조건'은 다중인격의 특성화와 함께 진화했다. 코넬리아 윌버와 리처드 클러프트가 했던 이 신중한 말을 생각해보라. 〈다중인격장애를 가장 편협하게 이해하자면, 아동기에 발병하는 외상후해리장애이다.〉 여기에서 아동기의 발병시기와 트라우마의 존재 여부는 경험주의적 귀납이나 통계적으로 확인 가능한 '상당한 필요조건'의 일부가 아니다. 그건 그 말을 한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이고, 그들이 'MPD(Multi Personality Disorder)'라고 칭할 때 의미하는 것이다. 방법론적으로든 과학적으로든 틀린 것은 없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양쪽 방식을 합쳐서 하는 말뿐이다. 이는 (a)'다중인격장애'(혹은 해리성정체감장애) 개념을 초기 아동기의 트라우마로 정의하려는 경향과 (b)이를 발견된 것처럼 단언하는 것, 즉 다중인격이 어린 날의 트라우마로 발생한다고 단언하려는 경향을 말한다. 그 장애가 무엇인지 먼저 정의한 다음에 그 원인을 발견했다고 우리 스스로를 기만해서는 안 된다."(142)


"반복적 아동학대가 다중인격의 원인이라고 정신의학이 발견한 건 아니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그 행동과 그 기억 모두가 치료사에 의해 조장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건 내가 주장하는 논지가 아니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훨씬 더 뿌리 깊은 것으로서, 말하자면, 바로 그 인과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의 주조 방식이다. 일단 그 개념을 얻게 되면, 우리는 인간을 만드는making up people, 또는 우리 자신을 만드는 실로 강력한 도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현재의 자신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모델에 따라 우리가 끊임없이 구성하고 있는 영혼을 우리는 구성한다." "다중성의 인과론에는 두 부분이 있다. 아동학대라는 기회원인occasioning cause이 한 부분이다. 다른 부분은, 어떤 아이들은 더 큰 해리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로 인해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게 되고, 이 해리능력은 측정할 수 있기에 어느 정도인지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161-2)


7장 해리의 양적 측정 


"설문지는 다중인격이 객관성과 정당성을 갖추게 만드는 방법이며, 치료사들로 하여금 자신은 과학적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한 인류학자는 설문지의 일차적 목적이 정신과 입원이나 클리닉에서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해리장애에 관한 지식의 객관성을 구축하기 위함이라는 의견을 냈다. 해리 경험 설문지는 자격을 갖춘 전문가의 진단과 채점된 점수를 비교해서 확인되고 기준치가 조정된다. 그 과정에 부차적이기는 하나 필요한 확인 절차가 있다. 처음에 정상으로 채점된 사람이 몇 개월 후 다시 두 번째로 설문지에 답할 때에도 대략 같은 식으로 반응하는가? 계속 설문지가 개발되어가면서 새로운 설문지의 기준치 조정에 사용되는 것은 이전의 설문지 결과 및 이후의 임상적 판단이다. 그리하여 상호 일치하고 자기확증적인 검사도구의 네트워크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인터뷰 설문지 결과를 자기기입식 설문지 결과와 비교하고, 이 둘은 전문가의 임상적 판단과 비교한다는 식이다."(169)


"해리 설문지의 기준치 조정에는 표면적이지만 실은 매우 중대한 문제가 있다. 기준치 조정은 어떤 동의된 판단에 비추어야 하는가? 해리장애 분야에는 어떤 합의된 판단도 없다. 많은 선도적 정신과의사들은 그런 분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관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과 그 병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판단에 비추어서 기준치 조정이 된 해리척도가 아니다. 그 해리척도는, 그보다는, 정신의학 내에 있는 다중인격운동의 판단에 비춰서 조정된 것이다. 그들의 판단이 과학 수치처럼 객관적이라고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 기준치 조정 과정은 여타 분야에서 사용되는 방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문제는, 그 설문지들이 독립적 기준에 비춰 조정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일단 내적 일관성이 충분한 통상적 통계비교검사법 일습을 다 적용했다면, 충분한 수의 도표와 도식을 다 만들어냈다면, 통계적 유의성을 확보했다면, 마침내 전체 구조는 객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169-71)


8장 기억 속의 진실 


"1982년 의식적이고 악마숭배적인 아동학대가 대중의 인화점을 건드렸을 때, 괴이한 고발이 잇따라 제기되었다. 악마는 미국 TV 토크쇼의 스타가 되었다." "이런 소란은 다중인격운동을 곤혹스럽게 했다. 다중인격은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의식 고취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여 그 원인론으로 정당성을 획득했다. 악독하게 학대받았다는 주장이 점차 신용을 얻어가던 운동 초기에는 입증이 되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환자들이 근친강간을 기억해내자 그 말을 믿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용기를 북돋아주기까지 했다. 다양한 요소가 혼합된 치료법이 개발되고, 그 치료법은 기억을 끌어올리고 아동학대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다른 인격들을 유도해냈다. 트라우마는 가공된 상상의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났던 실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어서 아동학대운동이 이교의례 학대로 영역을 넓히자, 환자들은 점차로 이교에 관한 무서운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이야기는 점차 현실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것으로 변모해갔다."(189-91)


"이 일에 관해 체계적인 공식 조사가 이루어진 곳은 오직 영국뿐이다. 해당 위원회는 3년이 넘게 정보를 수집했고 그 결과가 1994년 6월 출판되었다. 고문, 강제 낙태, 인간 제물, 식인, 수간이 포함된 악마숭배의례를 〈규정하는 특징〉은 〈성적·신체적 아동학대가 주술적 혹은 종교적 목적을 지향하는 의례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위원회는 악마숭배의례 학대를 공개적으로 주장한 사례 84명을 조사했으나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위원회는 많은 사례에서 어린이들이 더 일상적인 방식으로 학대받고 있다는 것에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전 세계적인 악마 음모론이라는 우화에 대해서는 엄밀히 말해서 믿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서, 유용한 근거를 갖춘 것으로 신뢰할 수 없다." "음모론과 마녀사냥은 그 설명에 관한 한 서로의 거울 이미지다. 사악한 이교의례가 항상 주변에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비슷한 사건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대중적 촌극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196-7)


9장 정신분열증 


"오이겐 블로일러(1857~1939)는 20세기 초에 진단범주로서의 정신분열증을 창시한 인물로 유명하다. 정신증의 주요 분류는 에밀 크레펠린(1856~1926)에 의해 확립되었다. 한쪽에는 조울증manic-depressive illnesses이 있고, 다른 쪽에는 청소년기에 발병해서 치매에 빠진다고 하여 조기치매라 불리는 게 있었다. 1908년, 블로일러는 몇 년간 자신의 조교들을 교육하던 내용을 책으로 출판했다. 그는 크레펠린이 발병시기에 초점을 맞춘 것은 틀렸다고 했다. 그 어떤 기존 명칭도 이 수수께끼 질병에는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블로일러는 '분열된 뇌의 질병'의 의미로 그리스어에서 따온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이라는 명칭을 정했다. 그가 말한 것은, 이중의식의 원형처럼 인격들이 분열하여 한 개인을 번갈아 지배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 기능의 '분열'〉을 지적한 것이었다. 아주 단순화하면, 주변을 인식하는 기능과 그걸 느끼는 기능이 분열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이성과 감성 사이의 분열을 의미한다."(214-5)


10장 기억의 과학이 출현하기 전 


"프랑스 역사가 알랭 부로는, '슬리퍼sleepers'가 중세 절정기인 12세기 말과 13세기에 의미심장한 현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후일 몽유증이라고 불리게 될 일종의 몽환 상태에 빠진 개인들로 보인다. 슬리퍼가 중요한 이유는, 그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지적, 형이상학적 그리고 실질적으로 신학적 문제를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깨어 있을 때와는 다른 특성과 스타일로, 때로는 폭력적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금지된 행위를 했다. 그 상태가 끝나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혼란스러워했다." "토마스주의자들은 하나의 육체에는 오직 하나의 영혼만 있다고 주장했다. 스콜라 신학 심리학에서 영혼은 인간의 〈실체적 형상〉이다. 소수의 반토마스주의자들이, 슬리퍼와 같은 인간에게는, 각 상태에 하나씩 두 개의 실체적 형상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알랭 부로는 말했다. 이는 책임과 관련해서 중요한 문제였다. 소수파는 패했다. 따라서 슬리퍼들은 주변화되고 뒤이어 병리화되었다."(240-1)


"다중인격의 전신前身에는 두 개의 증상언어가 있었다. 하나는 주로 유럽대륙에서 쓰이던 자연적 몽유증이라는 언어로서, 인위적 몽유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증상언어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것으로, 이중의식의 언어였다." "1816년 메리 레이놀즈는 〈여자에게 나타난, 매우 특별한 이중의식 사례〉라고 기술되었다. 여기서 '이중'은 두 개를 의미하므로, 두 개 이상의 인격이 교차하는 상태는 아닐 터이고, 오늘날과 같이 17개 혹은 100개의 인격 파편은 더더욱 아닐 터이다. 그러나 '의식'이라는 단어는 더욱 강렬한 느낌을 주는데, 그건 수동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작용이나 상호작용의 의미도 없고, 완숙한 인격을 암시하는 것도 없다." "그녀에 관한 최초의 짤막한 기술은 그 제목이 〈이중의식 혹은 동일한 개인에게 들어 있는 인간의 이중성duality〉이었지만, 〈인간의 이중성〉은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중의식은 인기를 얻었고, 19세기 거의 내내 잉글랜드에서 의학적 진단범주에 들어갔다."(245-6)


11장 인격의 이중화 


"이폴리트 텐은 절충주의 유심론자들이 말하는 자율적이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아self 또는 영혼soul이라는 개념, 〈유일하고, 지속적이며, 항상 동일한 나I or me, [그리고] 다양하고 일시적인 나의 감각, 기억, 심상, 생각, 지각, 이해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배척했다. 그는 자유의지 문제에 관한 칸트식 해법, 즉 '나'는 현상계의 인과법칙에 종속되지 않는 본체적 자아라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자아란 역사를 지닌 헤겔적 존재자라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는 자아는 로크식의 개인으로, 의식, 감각, 기억으로 이루어진 복합체다. 따라서 1876년 이중화된 인격이 신문 1면에 등장했을 때 그는 무척 기뻐했다. ('이중화된 인격'에서 주목할 점은, 나눠진 것이 수동적인 성질의 의식이 아니라 인생, 인격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몸 안에서 교차하는 두 개의 자아는 각각의 인식과 일련의 기억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텐은 생각했다. 거기에는 초월적 영혼도, 본체적 자아도 없다."(267)


12장 최초의 다중인격 


# 파리의 남성 정신병원 비세트로의 수석의사인 쥘 부아쟁이 자신의 담당 환자 루이 비베─인격 분열을 동반하는 대大히스테리아 사례로 제시된─에 대해 설명한 날인 1885년 7월 27일부터 '다중인격'이 존재하게 되었다. 


13장 트라우마 


"샤르코는 히스테리아가 신체적 트라우마로 생길 수 있다고 가르쳤다. 기억상실 등의 증상을 일으킨 정신적 트라우마도 있었다. 더 큰 관심을 받은 연구는 직접적 두부외상이 야기하는 기억상실이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두부외상은 항상 존재했고, 의심의 여지 없이 기억상실을 일으켰지만, 이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는 1870년 이후에야 시작되었다." "심리적 트라우마, 회복된 기억, 정화abreaction에 관한 학설은 진실의 위기를 불러왔다. 이 학설을 개척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인 프로이트와 자네는 정반대 방식으로 위기를 마주했다. 자네는 거짓말과 만들어진 거짓기억으로 환자들이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다면 거짓을 말하는 데에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을 가지지 않았다. 그에게 진리는 절대적 가치가 아니었다. 프로이트에게는 진리가 절대적이었다. 프로이트는 진정한 이론Theory을, 다른 모든 것이 종속되어야 할 거대이론을 목표로 했고, 자신의 환자도 그들 자신의 진실을 직면해야 한다고 믿었다."(306-7, 318)


"잃어버린 기억과 회복된 기억에 관한 한, 우리는 프로이트와 자네의 후계자들이다. 한 사람은 진리를 위해 살았고, 상당히 오랫동안 자신을 기만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심지어는 자기 기만을 스스로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다른 한 사람은 훨씬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으며, 환자에게 거짓을 말함으로써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러면서 자신이 다른 숭고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았다." "트라우마의 심리화는 오랫동안 존재론에 공헌해왔던 영혼의 영적 고통이 이제는 숨겨진 심리적 고통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고통은 우리 안에 내재된 유혹에 의해 생긴 죄악의 결과가 아니라, 밖에서 우리를 유혹한, 죄지은 자가 일으킨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 혁명은 트라우마를 축으로 그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트라우마는 자네가 심리적 트라우마에 관한 최초의 통찰을 《철학비평》에 발표한 1887년 이후부터 심리화가 되었다. 바로 그해에 유럽의 다른 한쪽에서는 니체가 《도덕의 계보》를 탈고했다."(319-20)


14장 기억의 과학들 


"1861년이 되어서야 해부학자들은 두개골을 열어볼 수 있었고 정신기능의 손실에 해당하는 뇌의 손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폴 브로카(1824~1880)가 그러했다. 〈이 사례에서, 전두엽의 병변이 언어기능 상실의 원인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뇌의 운동성 언어중추인 브로카 영역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1879년 헤르만 에빙하우스(1850~1909)는 심리학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확립했다. 에빙하우스는 다른 종류의 지식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형태의 기억을 연구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무의미한 음절을 기억해내는 실험을 했다." "에빙하우스의 업적이 중요한 점은 연구자료의 통계처리법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기억은 일련의 무의미한 음절을 기억해내는 능력의 맥락에서 조사되어야 한다고 했다. 다음에는 이 기억해내는 능력의 통계분석을 고안해야 한다고 했다. 에빙하우스는 전형적 인간인 자신을 대상으로 연구에 착수했지만, 그 행동은 오직 통계적 정밀 검토를 통해서만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329-31)


"리보는 자신의 책에 스코틀랜드 학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적을 정도로 영국의 연합주의 심리학─관념 간의 연합association에 의해 인간의 의식이 형성된다는─의 충실한 신봉자였다. 유익하게도, 그는 기억이 마치 하나의 능력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며, '기억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기술, 지식 등 습득된 여러 다른 종류의 능력이 뇌의 다른 부위에 저장된다는 데에서 연역해낸 추론에 불과하다. 리보는, 마음과 뇌의 관계는 당대 대부분의 실증주의자나 과학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프로그램으로 연관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기억이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사실이고, 우발적으로만 심리적 사실이 된다〉고 적었다." "그는 그저 순수하게 추론적인 신경생리학의 한 부분으로 그렇게 적었을 뿐이다. 의식은 신경계통에서 일정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특정 사건(당시 용어로는 '방출')을 의미한다. 같은 종류의 사건이지만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나는 것은 무의식이다."(334-5)


"리보와 그의 동료 연구자들의 중요성은 그들이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식을 제공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기억에 관한 진정한 지식, 과학적 법칙으로, 지금도 〈리보의 법칙〉이라 불린다. 그가 그 법칙에 붙인 이름은 퇴행regression 또는 복귀reversion의 법칙이다. 어떤 병리에 의해서든 간에 〈기억의 점진적 파괴는 논리적 순서, 즉 법칙을 따라 진행된다. 불안정한 기억에서부터 안정된 기억으로 점차적으로 진행되어간다.〉" "우리의 관심은 이 법칙이 어떤 종류의 법칙이고자 하는지에 있다. 그것은 객관적 진리이다. 그것은 사실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사실이라는 것은 병리학적 정신의학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기억의 상실, 망각에 관한 법칙이다. 그 법칙은 신체적 손상에 의한 망각과 정신적 쇼크로 인한 망각을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그것은 옛 의미의 트라우마와 앞으로 나오게 될(리보의 시점은 1881년이다) 트라우마의 의미를 모두 설명한다."(337-8)


15장 기억-정치 


"잠시 인류학적 관점으로 생각해서, 집단기억을 유지하는 것이 집단정체성과 차별성을 견고히 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보면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홀로코스트 기억의 정치는 인간사회의 오래된 관행 중 하나다. 개인적 기억의 정치는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물론 집단적 기억과 개인적 기억 사이에 상호연관이 있음을 나는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둘 사이의 확실한 연결고리 하나는 트라우마다. 트라우마성 스트레스의 과학으로부터 알게 된 것에는, 강제수용소 생존자 자신 및 그 자손들은 아동학대 피해자만큼 심리적으로 고통받는다는 사실이 있다. 그러나 이는 한 방향으로만 투영해서 본 것 같다. 이 말은, 홀로코스트 기억은, 트라우마학學이 존재한 적이 없다 할지라도, 또 기억의 과학들이 19세기 말에 출현하지 않았더라도, 집단기억의 한 부분이 되었을 것이고 그와 연관된 정치가 있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개인적 기억의 정치는 이들 과학이 없었더라면 결코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342)


"개인적 기억의 정치는 특정한 유형의 정치이고, 지식을 둘러싼, 혹은 지식에 관한 권리를 둘러싼 세력다툼이다. 그 정치는 특정 종류의 지식이 존재할 가능성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개인에 관한 사실의 주장과 반박이 끝없이 이어지고, 이 환자에 대한, 저 치료사에 대한 주장이 악덕과 미덕에 관한 사회적 관점과 결합된다. 표층지식을 두고 경쟁하는 주장들의 저변에는 심층지식이 자리잡고 있다. 그 심층지식은 참-또는-거짓을 확인해줄, 기억에 관한 사실들의 존재에 관한 지식이다. 과학으로 알려주는 기억의 지식에 관한 가정이 없다면, 이런 종류의 정치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적대하는 진영들은 각 표층지식의 기반 위에서 세력다툼을 하지만, 심층지식이 있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인정한다. 각 진영은 서로에게 반대하고, 자기들이 더 나은, 더 정확한, 최고의 근거와 방법론에서 끌어낸 표층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야말로 트라우마의 기억을 기억해낸 자와 그것에 의문을 품은 자 사이의 대결이다."(343)


16장 마음과 몸 


"서구 역사에서 다중인격의 진행과정이 알려주는 것은, 보통 사람이나 전문가가 무엇을 말할 태세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불안한 마음의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 소통하려 들지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마음을 연구하는 모든 철학자가 주목해야 할, 마음의 다른 상태가 있을 가능성을 자연의 실례로부터 찾지 못한다." "다중인격은 마음에 관해서 '직접적으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말은, 마음(혹은 자아 등등)에 관한 실질적 철학의 주제를 다룰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 현상은 분명 그 현상과는 완전히 독립적인 이유를 가진 마음에 관한 어떤 주장을 예시해줄 수는 있다. 그렇다면, 그 현상은 철학적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가 아닐까? 아니다. 다중현상은 단지 색채를 더해줄 뿐이다. 다중인격에 현실적 삶의 모습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때로 근거처럼 보이지만, 예시되는 학설은 다중인격과 상관없는 원칙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다중인격의 존재로써 입증되지도 않는다."(359-60)


17장 과거 속의 불확정성 


"나는 인간 유형의 고리 효과에 대해 종종 말해왔다. 고리 효과란, 한쪽에는 사람들이, 다른 한쪽에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동을 분류하는 방식이 있어서 그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말한다. 특정 유형의 사람이라고, 또는 특정 행위를 한다고 간주되는 것이 그 개인에게 다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새 분류방식이 그렇게 분류된 사람에게 조직적으로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그렇게 분류된 사람들이 지식을 가진 자, 분류하는 자, 분류의 과학에 대항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이 분류된 자들을 변화시키고, 그리하여 그들에 관한 지식을 다시 변화시킨다(되먹임 효과). 여기에 변수를 더해보자. 사람과 행동을 분류할 새로운 분류법이 발명되고 새로 주조되면, 좋든 나쁘든 간에 한 사람의 개인이 되는 새로운 방식이 창조되고, 새로운 선택의 길이 열린다. 새로운 서술이 나타나고, 따라서 새로운 서술하의 행위가 출현한다. 실질적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관점에서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것이다."(385-6)


"이는 옛 행위를 재서술하는 것, 특히 새롭게 만든 서술형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서술하에 놓인 옛 행위는 기억 속에서 재경험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그 서술이 정말로 새로운 서술이고, 기억된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에 그 서술이 가능하지 않았거나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제 기억 속에서 경험되는 무언가는 어떤 의미로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행위는 있었지만, 새로운 서술하의 그 행위는 아니었다. 더욱이, 그 사건이 이렇듯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될 것이라고는 확정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사건들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미래에 새로운 서술이 출현할지 확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의 말은 확실하게 되풀이해야겠다. 억제된 기억이든 억압된 기억이든 간에, 완전히 확정되어 있는, 끔찍한 사건에 대한 똑바른 기억 또한 이 세상에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탐색하는 기억은 그러한 것의 주변에 있는 것이고, 더 직접적인 회상과는 다른 정신적 기전으로 인해 야기되는 기억이다."(400-1)


"기억을 서사로 간주해야 한다는 신조는 기억-정치의 한 측면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만들어냄making-up으로써, 즉 우리의 과거에 관한 이야기를 엮어냄으로써,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구성해낸다. 우리가 자신에 관해 말하는 이야기, 또 자신에게 말해주는 이야기는 우리가 무엇을 했고 어떻게 느꼈는지에 관한 기록이 아니다. 그 이야기는 세상과 맞물려야 하고, 적어도 외견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조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진짜 역할은 하나의 삶, 어떤 개성, 하나의 자아를 창조하는 일이다. 기억을 서사로 보는 시각은 흔히 인도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반反과학적이라고 제시된다. 이는 기억을 신경학적 프로그램으로 이해하는 시각과 분명 상충된다." "그럼에도 기억-정치는 바로 실증주의 심리학의 과학적 배경에서 생겨났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동기는 영혼을 우리가 그것에 대해 지식을 가지고 있는 무언가로 대체하려는 세속적 욕구였다."(403-4)


18장 거짓의식


"내가 거짓의식으로 의미하려는 것은 아주 평범한 것이다. 즉 자신의 특성과 과거에 관해서 종요롭게 거짓믿음을 형성해온 사람들의 상태이다. 거짓의식은 그 상태에 빠진 당사자에게 책임이 없을지라도 당사자에게 유해한 상태라고 나는 논증하겠다. 거짓기억은 거짓의식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보통 '거짓기억증후군'은 그 개인에게 결코 일어난 적이 없던 사건들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기억 패턴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사건을 (대개가 그렇듯이) 부정확하게 기억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건들과 조금이라도 비슷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실, 소위 거짓기억증후군은 반대-기억증후군contrary-memory syndrome으로도 불리는데, 진짜 기억처럼 보이는 그 기억은 거짓일 뿐만 아니라 현실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원형적인 예를 들자면, 〈자기가 했던 말을 취하한〉 어떤 사람은, 삼촌이 자신을 자주 강간했다고 기억한 것 같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음을 이제 깨달았다고 말한다."(416)


"금방 예로 든 반대-기억과 대체로 비슷한, 단지 사실이 아닌 기억인 단순-거짓-기억merely-false-memory에서는 삼촌이 진짜 가해자인 아버지의 가림막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기억은 현실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거는 근본적으로 다시 주조된 것이다." "기억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에는 잘못된-망각wrong-forgetting이 있다. 자신의 성격이나 성질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인 과거의 핵심 사항을 억제suppression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억압repression이 아니다. 억압은 사건이 의식적 기억에서 사라져버리고, 욕동drive과 성향도 의식적 욕구desire에서 사라지는 가설적 기전이다. 그 가설에서는, 억압 자체는 도덕적 주체의 자리에서 행하는 고의적이거나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어떤 기억이 의도적으로 억제되어 있다면, 거짓의식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이들 세 가지와 그 외의 가능성 있는 것들을 한데 묶어 기만적-기억deceptive-memory의 표제로 분류하려 한다."(416-7)


"자신만만하고 노골적인 회의론자는 이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가볍게 털어내지만, 덜 오만하고 더 성찰적인 의혹을 품은 사람들은 환자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었음을 인정한다." "그들은 다중인격 치료가 거짓의식으로 이끌지 모른다고 경계한다. 아동학대의 기억처럼 보이는 것이 반드시 틀린 것이라거나 왜곡되었다는 노골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 기억은 충분히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최종 결과는, 온전한 개인이 되려는 목적을 실현하는 인간이 아니라, 철저하게 주조된 인간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경계를 하는 것이다. 그건 자기 인식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자기 이해를 흉내내는 소란스러운 재잘거림으로 더 악화된 개인이다. 일부 페미니스트도 이와 같은 도덕적 판단을 공유한다. 너무 잦은 다중인격 치료는,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는 자기 이야기를 소급해서 창조해내고, 여성은 스스로는 인생을 버텨나갈 수 없는 수동적 존재라는 옛 남성 모델을 암묵적으로 확인시켜준다고, 그들은 덧붙인다."(4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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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와 타협 - 임진왜란을 둘러싼 삼국의 협상 동북아역사재단 교양총서 11
김경태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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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부 전쟁 전야 


1. 임진왜란과 사람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투 방식을 선호하였는데 이것이 그를 일본 장악으로 이끈 힘 중 하나였다. 또한 히데요시는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교섭으로 전환하는 속도도 빨랐다." "'일본 통일'을 완수한 히데요시는 일본의 생산 체제를 새로운 기준으로 편성하였다. 동일한 기준 척도를 사용해 전국의 토지를 조사하여 각 토지의 생산량을 확정하는 동시에, 해당 토지를 경작할 사람도 정하였다. 토지 경작자인 농민층은 토지 소유자인 다이묘에게 직속되었고, 따라서 그 사이에 있던 중간층의 수탈을 배제되었다. 배제된 중간층은 농민이 되거나 다이묘에 속하는 무사가 되어야 했다. 다이묘는 히데요시가 명령하면 확정된 생산량에 따라 군사를 동원해야만 했다. 히데요시가 생산 체제를 급격히 재편한 가장 큰 목적 중 하나는 단기간에 대규모의 침략군을 편성하기 위해서이지 않았을까?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된 일본은 그의 의도에 따라 침략 체제의 길을 착실히 밟아 가고 있었다."(18-20)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의 해결은 선조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명나라의 법전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이자 이성계의 정적이던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는 고려 말에 명으로 도망친 윤이와 이초의 모함에 의한 것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이를 수정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명에서 조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고 미루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선조대에 더욱 적극적으로 수정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1588년 유홍이 개정된 『대명회전』 한 질을 가지고 오면서 최종적인 해결을 보게 되었다. 선조는 신하들의 요청으로 '정륜입극 성덕홍렬正倫立極 盛德洪烈'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200년간 각고의 노력으로도 이루지 못한 '윤리를 바로 세운 커다란 공'을 다름 아닌 선조가 세운 것이다." "후대에 선조가 재위한 시기를 '목릉성세穆陵盛世'로 칭송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없었더라면 선조의 시기는 티끌 하나 없는 융성한 시대로 기억되었을 것이다."(22-4)


"임진왜란 당시 명의 황제였던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에게는 '태업한 황제'라는 오명이 따라다닌다. 그런데 그에게 또 다른 별명이 있다. 바로 '고려 황제'다. 황제의 업무를 거부하던 신종이 유독 열성을 다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조선은 명의 구원병을 움직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신종을 칭송하였고, 신종은 자신의 언행에 열렬히 반응해주는 조선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선물을 내려 주었다. 국내의 정치는 상관하지 않고 조선의 일에 팔을 걷고 나서는 신종을 두고, 중국인들은 '고려 황제'라며 비꼬았다. 신종은 선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어린 시절 왕위에 올라 유능한 스승들을 만나 정치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는 점과 그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 흔들림 없이 권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강하게 느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선조가 신하들 사이의 정치 분쟁에 개입하면서 자신에게 권위가 집중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한 반면, 신종은 정치를 외면해 버렸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27-8)


2. 전쟁 전 세 나라는 어떤 관계였을까 


"본래 조선인이 외국을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나라의 공식적인 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사절만이 외국을 경험할 수 있었다. 조선과 가장 가까운, 그리고 '익숙한' 외국은 명이었다." "사행원들은 정해진 길을 따라 북경에 들어간 후에도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없었다. 조선의 사신에게는 주어진 임무가 있었다. 대개 조선 국왕의 국서國書를 명 황제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북경의 지정된 숙소에서 대기하다가, 명 황제의 조회에 참석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고, 명 황제의 회답을 받아 돌아가는 임무 외에 개인적인 행동은 허가되지 않았다." "한편 명에서도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조선의 사절과 같이 정기적인 형태는 아니었으며 규모도 크지는 않았지만, 국왕의 책봉이나 명나라의 중요한 일을 전하기 위한 사절들이 조선을 방문하곤 했다. 그렇다면 명나라 사람들은 실제의 조선을 얼마나 알 수 있었을까. 중요한 것은 조선 사람이든 명나라 사람이든 자신이 보고 싶은 면만을 보고자 했다는 사실이다."(31-4)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1587년에 쓰시마對馬의 소씨宗氏에게 조선 국왕으로 하여금 일본으로 항복하러 오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데요시가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던 관념의 한 면을 보여 준다. 그는 조선이 쓰시마 옆의 어느 지역 정도이며 자신의 명령에 쉽게 따를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인식을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1590년 조선 국왕에게 보낸 국서의 내용이다. 그중에서 자신이 명을 침략할 예정이니 그때가 되면 협조하라는 대목에 주목해 보자. 이는 조선과 명이 맺고 있던 관계, 곧 '명 중심의 국제 질서'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거나 이를 무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전쟁이 시작된 후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들은 조선이 매우 넓고, 조선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으며, 조선인들이 자신들을 '해적'이라고 여기며 도망치거나 공격한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세 나라 모두 자신이 인식하고자 하는 모습으로만 남을 인식하고 있었다."(35-9)


3. 침략의 서막 


"1590년, 조선에서는 통신사행단을 구성하였다. 정사正使에 황윤길, 부사副使에 김성일, 서장관書狀官에 허성이 임명되었다. 이들이 들고 간 조선 국왕의 국서는 '일본 국왕'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고 앞으로 신뢰 관계를 맺어 우호를 유지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이때 오다와라 지역의 호조씨를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출진한 상태였다. 다른 나라의 사신을 불러 놓고 자리를 뜬 데다가 기약도 없이 기다리게 한 행위, 그 자체가 외교 관계에서 있어서는 안 될 무례한 행위였다. 물론 히데요시는 통신사 일행을 항복 사절로 여기고 있었기에 이러한 행위를 꺼리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국왕의 국서를 받은 히데요시가 내놓은 답서에서 〈나의 소원은 세 나라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余願只願顯佳名於三國而已〉라는 부분은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 일면을 보여준다. 히데요시의 야망은 그 실현 가능성과 별개로 이제 조선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 되었다."(42-4)


2부 전쟁과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 


1. 벽에 부딪힌 전쟁, 협상의 시작 


"일본군의 요구는 표면적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구한 대로 길만 비켜 주면 일본군은 조선에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은 채 조용히 명으로 향했을까? 국왕을 데리고 여기를 피하라는 요구는 히데요시의 말과 같이 조선에서 통치권을 포기하고 일본의 요구에 전면적으로 따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당초부터 히데요시는 조선을 일본과 동등한 나라로 보고 협조를 부탁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고 할지라도 조선이 오랜 기간 관계를 맺어 온 나라인 명을 '배반'하고 일본에 협조할 리가 없었다. 이덕형을 답을 듣고 저들은 〈명 침략에 협조해 달라〉는 명분은 물론 〈명 침략을 위한 길을 빌려 달라〉는 요구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았다. 일본에서 교섭을 전담하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쓰시마 측 인물들은 이후 더 이상 조선에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후일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에서 보낸 교섭자 심유경과의 대화에서 전혀 다른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58-9)


"명은 복잡한 관료 체계와 지방 조직을 갖춘 큰 나라였다. 장수를 임명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파견하는 일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많은 시간이 들었다. 따라서 그 전에 조선이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당하지 않도록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이 목적으로 선발되어 조선으로 왔으며 이후의 강화 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인물이 바로 심유경이다." "1592년 8월 17일에 의주에서 선조와 만난 후 곧장 평양성으로 향한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와 만나 50일간의 휴전을 약속하고 돌아왔다.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편지도 하나 얻어냈는데 다만 명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원할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앞서 조선과의 교섭에서는 명을 침략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태도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명과 교섭하는 자리에서 명을 침략하겠다는 말은 당연히 통하지 않을 것이다. 교섭 상대가 받아들일 만한 조건을 제시한 후 유리한 지점을 찾아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68-9)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심유경을 붙잡은 채로 12월 25일 의주에 들어왔고, 평양성으로 진격하였다. 한편 평양성의 일본군은 휴전 기간 동안 안심하며 심유경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나라의 대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명군은 심유경의 이름을 사칭하여 평양성에서 일본군을 불러내어 습격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성 전투가 재개되었다. 일본군의 저항은 거셌다. 현재 전해지는 〈평양성탈환도平壤城奪還圖〉 등에도 나타나 있듯이 일본군은 성벽에 빼곡히 늘어서서 창을 들이밀거나 조총을 쏴대어 명군과 조선군이 접근하기 어렵게 하였다. 성안에는 여러 겹의 방어 구역을 설치해 두었다. 그러나 명군은 이전의 패배를 통해 배운 점이 있었다. 성을 공격하기 위해 대포 등의 무기를 준비해 온 것이다. 병력도 일본군을 압도하였다.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은 평양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하였다. 이후 일본군은 한성으로 모여들었다. 1593년 1월의 일이었다."(71)


2. 협상의 조건, 허세와 타협 


"원래 히데요시가 조선에 직접 건너와 일본군을 지휘할 계획이었다.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지 않고 중대한 결정을 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끝내 조선으로 오지 않았고, 모친의 사망 등으로 나고야를 떠나 있는 기간이 생기면서 조선 현지 사정의 전달과 명령의 하달 사이에 시간차가 크게 발생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빠르게 태세 전환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히데요시가 조선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1593년 1월 23일에 일본군은 명군에 밀려 한성으로 후퇴했다는 사실과 군량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히데요시가 이 서신을 받은 것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는 마침내 꿈에서 깨어났다. 4월 12일에 구체적인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 그는 한성에서 퇴각하라는 명령과 동시에 진주성을 남김없이 섬멸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전쟁이 불리한 상황에 빠졌음을 깨달은 이후 히데요시의 전략적 전환은 매우 빨랐다."(83-5)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 강화 조건을 간단히 요약하면 ①명나라와 일본의 혼인, ②무역 재개, ③화친 서약, ④조선 4도의 할양, ⑤조선 왕자와 신하를 인질로 요구, ⑥조선 왕자(임해군과 순화군)의 송환, ⑦조선의 서약서 작성이다." "교섭이 언제까지나 평행선을 달릴 수는 없었다. 타협 지점을 찾아야 했고, 마지막으로 히데요시는 본심을 내비쳤다. 히데요시는 사실 영토나 보물과 같은 실물을 요구하지 않겠으며, 무엇보다 명예가 중요하니 영토를 줄 수 없다면 이를 대신할 다른 무언가를 달라고 하였다." "요약하자면, 그는 결코 유리하지 않은 입장에서 손에 쥔 것도 없이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얻고자 하였다. 협박과 허세, 회유와 설득을 함께 사용하였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그가 필요로 한 것은 혼례(인질=명예)와 영토(실물)였고, 그중에서 좀 더 중요시한 것은 명예였다. 협상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히데요시는 매우 현실적인 교섭가였다. 그는 시세의 변화에 대한 적응이 매우 빨랐다."(86, 95-6)


"1593년 6월 말, 부산에 머물러 있던 심유경이 한성으로 출발하였다. 당초에 '히데요시의 7개 조건'을 최초로 전달받은 이들 중 하나가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심유경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상의하여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 혼례와 조선 영토 할양은 사실상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가 고안한 방법은, 고니시 조안 등 '일본 사신' 일행을 명나라 조정에 보내 사죄의 뜻을 표하고 명나라의 고위 관료를 일본으로 파견하게 하는 것이었다. 명나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칙사의 화려한 행렬이 교토에서 히데요시를 접견하는 장면이 연출된다면, 히데요시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1593년 8월 이후, 명군은 무장 유정을 지휘관으로 하는 일부 병력만을 남기고 모두 철수하였다. 일본군도 울산에서 거제, 김해 지역에 이르는 일부 지역을 지킬 병력만 두고 나머지는 철수하였다. 전쟁이 강화 교섭기로 접어들었다."(101-2)


3. 조선과 명, 명과 명, 일본과 일본의 갈등 


"조선이 판단하기에 명군 지휘부는 교섭을 추진하는 절차를 지키지 않을 뿐더러 교섭의 내용도 거짓투성이였다. '히데요시는 명 침략의 야욕을 가졌던 자이며 지금도 전혀 반성하고 있지 않은데 그가 책봉과 조공을 바란다니 이는 심유경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결국 교섭은 파탄이 나고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 조선이 강화 교섭 자체에 반대하고 전쟁만을 우선하였던 것이 아니라, 당시 명군 지휘부의 강화 교섭 방식을 불신한 것이었다. 게다가 강화 교섭이 진행되면서 송응창의 조선 비난과 권한 남용이 심해지자 조선의 저항감이 높아져 갔다. 이대로 명군 지휘부에 끌려다니다가는 후일 교섭이 파탄 나고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명나라가 더 이상 조선을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1594년 2월, 마침내 조선 사신 김수가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는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성곽을 늘리고 있으며 도발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명을 침략하려 한다는 소문 등을 보고하였다."(108-9)


"1595년 5월 22일, 히데요시는 3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명·조선과 일본의 화평 조건'을 제시하였다." "첫 번째 조건은 조선의 왕자다. 그런데 영토에 대한 규정이 여전히 흥미롭다. 조선의 8개 도 중에서 일본이 4개 도를 가지고 있다고 전제한 것이다. 명과 조선은 인정하지 않았던 전제조건이다. 어쨌든 히데요시는 이 전제를 근거로 조선의 왕자가 인질로 온다면 그의 영지로 내리는 형식을 취하여 '일본이 가지고 있는' 4개 도를 돌려주겠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명과 조선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심유경이 조선의 왕자(인질)를 데리고 웅천 왜성에 온다면 일본이 만든 왜성 중 10개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칙사, 즉 명나라 사신에 대한 부분이다. 명나라에서 파견한 사절의 행렬이 자신에게 오는 장면이 실현된다면 '명나라가 사죄를 하였다'라며 선전할 수 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양보'를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히데요시의 양보가 조선의 입장에서는 전혀 양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124-7)


3부 협상 결렬, 다시 시작된 전쟁 


1. 1596년 9월, 오사카에서 벌어진 일 


"마침내 9월 1일 책봉사가 오사카에서 히데요시를 만났고 대화를 나누었다. 9월 3일 책봉 의례가 행해졌다. 히데요시는 기쁘게 책봉을 받았고 이로써 '일본 국왕'이 되었다. 강화 교섭에 공로를 세운 이들도 함께 명나라의 관직과 그에 상응하는 관복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의 통신사에 대해서는 전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책봉 의례가 끝난 후 며칠 동안 심유경이 직접 히데요시와 만나 이야기하고 서신도 전했으나 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히데요시는 〈명은 자신을 책봉해 주었으니 적대시하지 않겠으나 조선은 무례하니 화친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책봉사와 통신사에게 즉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고, 조선을 다시 침략할 의지를 밝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여러 가지 소문이 난무하였으나 공통된 부분은 〈명과는 적대하지 않겠다〉, 〈조선은 무례하니 다시 침략하겠다〉였고, '무례'의 근거는 〈명과 일본의 교류를 방해〉했으며 〈통신사가 늦게 옴〉 그리고 〈왕자가 오지 않았다〉였다."(136-8)


"히데요시는 왕자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책봉사와 통신사로 만족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책봉사의 책임자였던 이종성이 도망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통신사가 책봉사보다 늦게 온 데다가 관직이 높지 않은 자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이대로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책봉 의례를 마친 후, 그는 책봉사 일행과 담판을 하여 조선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낼 약속을 받고자 하였다. 그는 명나라를 적대해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명은 이미 책봉사를 보냈기에 더 이상 받아 낼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조선에 집중하였다. 책봉사는 그의 요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명나라가 종주국이 되어 책봉까지 해주었는데 무엇을 더 바란다는 것인가. 같은 국왕의 나라인 조선과 '화해'하고 전쟁을 끝내라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전쟁 위협을 가해서 혹은 정말로 다시 전쟁을 일으켜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자 했다. 교섭 결렬 선언 후 히데요시의 요구는 단순해졌다.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것이었다."(140-1)


2. 새로운 전쟁과 협상의 재개 


"정유재란은 임진왜란과 여러 부분에서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1597년 2월 21일 일본군 장수들에게 내린 명령서에서 그 일면을 살펴보자. 총 21개 항목 중에서 열일곱 번째는 〈전라도는 철저히 공략하고 충청도와 그 외의 지역은 가능한 만큼만 공격할 것〉, 열아홉 번째는 〈군사 행동이 끝난 후에는 성을 지을 장소를 논의하고 다수결로 성을 지킬 장수를 정한 뒤, 일본으로 돌아오기로 결정된 장수들이 성을 쌓을 것〉이다. 이는 곧 이 전쟁이 명나라를 침략하거나 조선 전역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일본군은 실제로 충청도 직산稷山까지 북상하여 전투를 치른 후 남하하여 남해안에 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일본군은 조선 백성을 사로잡아 포로로 끌고 가거나, 코와 귀를 베어 가는 일을 자행하였다. 이 전쟁은 영토를 얻을 가능성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의 영토를 주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었기에 조선인 납치를 허락하거나 코와 귀를 증거로 포상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147-51)


3. 전쟁의 종결 - 전쟁과 평화, 전투와 강화 교섭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는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공식적인 철수 명령은 그의 사후 당분간 히데요리를 보좌하여 공동으로 정권을 담당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다이로大老들에게 맡겨졌다. 그들의 고민도 적지 않았다. 일본군은 무조건 철수해야 했다. 전쟁의 명분은 이미 사라졌다. 전쟁을 일으킨 자도 죽었다. 일본군을 최대한 안전하게 귀국시킨 후, 하루라도 빨리 일본을 안정시켜야 했다." "일본 측은 조선에 왕자는커녕 자그마한 공물을 요구할 상황도 아니었다. 몸만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어도 다행이었다. 일본군의 교섭은 오직 무사 철수를 목표로 할 뿐이었다. 이는 일본군과 대치 상태에 있으면서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명군의 이해 관계와 맞아 떨어졌다." "한편 진린은 이순신의 설득에 마음을 바꾸었다.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수군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러 온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수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160-3, 166)


"〈이슬로 왔다가 이슬로 사라지는 삶인가. 나니와(오사카)의 영광은 꿈속의 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전에 남긴 시다. 오로지 서정적이고 몽환적이기만 하다. 이 시처럼 히데요시는 자신의 영광스럽던 시절에 대한 기억과 자식에 대한 걱정만을 지닌 채 영원한 잠에 들었을 것이다. 그는 사라졌지만 우리는 그의 행위가 가져온 참혹한 전쟁을 기억해야만 한다. 명의 황제 신종 만력제는 1620년까지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는 혼란기에 빠져들었다. 황제는 여전히 국내 정치 문제의 해결에 관심이 없었다. 후계 구도에 대해서도 손을 놓았다. 신종 만력제의 사후 명나라는 약 24년을 더 지탱하다 멸망하고 말았다. 선조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국왕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 있었다. 신하들의 경쟁 구도를 교묘히 이용하여 정치의 중심에 자신을 두었고, 광해군 책봉 문제와 영창대군의 탄생으로 오히려 그에게 권력이 집중되게 하였다. 선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왕권은 약해지지 않았다."(167-9)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전 정권의 전쟁을 반성하며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명당 유정이 일본 내부의 정치 상황과 이에야스의 의도를 알기 위해 일본까지 파견되기도 하였다. 조선은 오랜 교섭 끝에 조건을 정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국왕으로 일본을 장악하고 있으며 국교를 요청한다는 국서를 보낼 것, 그리고 임진왜란 때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범릉적犯陵賊)을 잡아 보내라는 것이었다. 국서는 이에야스가 정권의 담당자로서 공식적으로 국교를 요청한다는 증명이었고, 범릉적의 송환은 조선에 행한 범죄를 반성하라는 요구였다. 절차와 명분을 중요시하는 조선의 조건이었다. 조건은 우여곡절 끝에 '성사'되었다. 이후 국서는 수정 과정을 거쳐야 했고, 범릉적은 진범이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은 국서를 받아들이고 범릉적을 처형함으로써 일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1607년 조선에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후 조선과 일본의 우호 관계는 에도 막부가 멸망하기까지 250여 년이나 이어졌다."(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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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와 천조의 중국사 - 하늘 아래 세상, 하늘이 내린 왕조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단죠 히로시 지음, 권용철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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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제1장 넓은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  -춘추 · 전국시대


"천조天朝라는 것은 글자에서 읽히는 것과 같이 '천자天子의 조정'을 가리킨다." "천조 혹은 천자가 통치하는 공간이 천하天下이다. 일찍이 중국인의 마음속에는 하늘의 관념이 있었는데, 이에 따르면 우주를 주재主宰하는 하늘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천하를 통치할 대행자를 덕이 있는 사람 중에서 선택하여 그에게 천명天命을 내려 하늘의 아들, 즉 천자에 임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천자란 하늘의 위임을 받아 천하를 통치하는 덕을 갖춘 사람인데, 천자가 덕을 잃어 천의(天意, 실제로는 백성의 뜻이다)에 반하여 멋대로 행동을 하게 되면 하늘은 분노하여 다른 사람에게 천명을 내리게 된다. 이른바 혁명革命이다. 옛날부터 새로운 왕조의 창설자는 이전 왕조가 덕을 상실했기 때문에 새롭게 자신이 천명을 받았다고 하는 천명사상으로 자신의 왕조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진奏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이래, 적어도 유교가 국교화되었던 한대漢代 이후는 황제가 천자로서 천하를 통치하는 구도가 확립된다."(18-9)


"그렇다면 애초에 천하란 도대체 무엇일까? 〈넓은 하늘 아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모든 땅에는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시경』소아小雅·북산北山〉 천하의 중심에는 반드시 천자(왕)가 존재하고 그 위덕威德이 미치는 범위가 천하인 것이다. 천하와 천자는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니 이것이 현재의 세계라는 개념과는 크게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관념적으로 천하는 천자의 덕에 응하여 마음대로 신축伸縮하고, 명확한 경역境域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천자의 덕이 높으면 높은 만큼 천하는 확대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축소되는 것이다. 현실의 황제가 통치하는 천하도 이와 같은 것으로, 영역의 확대 및 조공국의 증대는 황제가 덕을 갖추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천하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현실의 왕조 치하에 있어서는 천하가 넓은 의미[중화와 화이의 지역을 모두 포함한 지역], 좁은 의미[중국 왕조가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지역] 두 가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20-2)


"넓은 의미의 천하에서 기능했던 것은 화와 이의 명분을 올바로 만드는 화이 질서이고, 천조가 이 질서를 올바르게 운영하는 한 천하는 안정된다. 한편 좁은 의미의 천하(중국 국내)에서는 천조를 이끌어가는 사람인 천자의 정당성이 요구되는데 특히 유교가 정통 사상이 된 이후에는 덕치德治와 예치禮治가 군주 지배의 근거라고 여겨졌다." "예禮라고 하는 것은 예의범절 등 일상적인 행동거지도 포함되지만, 보다 넓게는 질서유지를 위한 규범(준칙) 또는 규범의식이나 혹은 이러한 것들의 구체적인 행위 형식인 의레와 제도를 의미한다. 예는 곧바로 넓은 의미, 좁은 의미의 두 가지 천하를 포괄하고 천조의 휘하에서 세밀한 예치의 구조가 형성되어간다. 이후에 천조 중국은 예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예치 국가 중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제 이 책에서는 천자 혹은 천조에 의해 넓은 의미, 좁은 의미 두 가지 천하에서 이루어지는 예치(덕치)주의의 통치 구조를 천조 체제天朝體制라고 칭하고자 한다."(43-4)


제2장 천조 체제의 구조 -진·한


"천조의 예치 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군주가 집행하는 하늘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 두 가지 의례이다. 군주는 이 두 가지 제사 의례를 수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보장했다. 제천 의례와 조상 제사는 왕조 지배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었고, 군주의 전권專權 사항이 되어 역대 왕조에서도 답습되었다." "두 가지의 제사 중의 하나에서는 하늘의 아들(천자)로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했는데 이는 수도의 남쪽 교외(즉, 남교南郊)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교사郊祀라고 칭해진다. 또 하나는 왕조 창업자의 자손에게 천자의 혈통이 계승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조상(선왕)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했고, 이는 선왕의 위패(즉, 신주神主)를 안치한 종묘에서 실시되었다. 하늘에 대한 제사인 교사와 선왕에 대한 제사인 종묘사는 군주가 행하는 대표적인 제사가 되었고, 이후 유교가 완전히 국교화되는 후한(25~220) 이후가 되면 교묘郊廟로 총칭되면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46-8)


"전한 말기, 왕망 시대부터 후한에 이르는 시대는 참위사상(讖緯思想, 일종의 예언설)의 유행, 왕조 교체 등의 사정도 있어서 유가가 황제 지배의 정당화에 기를 쓰고 노력하던 시대였다." "원래는 다른 존재였던 황제와 천자는 유가의 조작操作을 통해 동일화, 일체화가 시도되면서 황제 한 사람이 두 가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일찍이 주 왕조의 군주는 천자(수명자)와 왕(통치자) 두 가지 칭호를 사용했고, 한 이후의 군주는 천자(수명자)와 황제(통치자)의 두 가지 칭호를 구분해 사용하면서 절대 권력자로서 천하에 군림했던 것이다. 황제는 단순히 법의 강제력만으로 민중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다. 천명을 받은 덕을 갖춘 천자라야 사람들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고, 덕치와 예치를 내세우면서 그 신분을 보장했던 것이다. 황제가 여러 종류의 예를 제정하여 계속 천자라고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다. 황제의 호칭과 천자의 호칭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명, 청 시대에 이를 때까지도 변경되지 않았다."(57-8)


"천하일가天下一家란 유교의 궁극적인 이념으로 천하가 하나의 가족이 되는 것을 말한다. 유교의 논리는 『대학』大學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가족애를 순차적으로 확대하여 이를 천하에 이르기까지 넓혀가는 것이다." "그런데 천하를 황제의 집안이라고 해석하면, 사심私心이 생기는 소강의 세에서도 천하일가의 실현이 가능해진다. 왕조의 성립 자체가 천하일가이기 때문에 황제는 공공연히 천하일가를 표명하면서 하늘의 보장을 획득한다. 여기에서 천자의 천하 통치와 황제의 군현 지배는 완전히 겹쳐지게 되고, 이른바 천자와 황제의 일체화가 완성된다." "천하일가를 실현했던 황제는 천자로서 행하는 제천 의례를 통해 천하일가를 하늘에 보고했고, 황제로서는 선제先帝의 종묘를 제사지내는 것으로 자신의 지위의 정통성을 얻었다. 공적인 천자로서의 제천 의례와 사적인 황제로서의 종묘 제사, 두 가지의 본질적은 모순은 천하일가를 바꾸어 해석하는 것으로 해소되었던 것이다."(61, 67)


# 『예기』의 예운편에서는 '천하를 공적인 것으로 삼는' 시대를 '대동大同의 세世'(요·순시대)라고 부르고, '천하를 집으로 삼는' 와중에 가장 평화롭게 다스려지는 시대를 '소강小康의 세世'라고 칭했다.


제3장 북쪽의 천하, 남쪽의 천하 -한·위진남북조(1)


"고대 중국인 속에서 발생했던 중화(중하, 화)라는 관념은 항상 이적(夷狄, 오랑캐)과 대비되는 것으로 발전해왔다. 이러한 화와 이의 구별(유가의 말에 따르면 '화이의 별別'이라고 부른다)은 중화 왕조의 대외 정책을 일관하는 구조였고 역대 왕조들은 화와 이의 차이를 둘러싸고 다양한 해석을 행했다. 이 경우에 일반적으로 화와 이의 구별은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졌고, 화의 우위성이 끊임없이 강조되었던 것에 대해서는 1장에서 지적했다. 두 가지 관점이란 다음과 같다. (1) 민족의 차이(한족인가, 그렇지 않은가), (2) 지역의 차이(중심인가, 주변인가), (3) 문화의 차이(예, 의의 유무)" "(1), (2)에 비해 (3) 문화의 차이는 민족적으로는 한인이 아니더라도 중화 문화인 이른바, '예, 의'를 체득하면 화가 된다는 관점이다. 화의 입장에서 말하면 중화의 천자가 행하는 덕화德化를 통해 이를 화로 변화시키는 것이고 또한 천자가 통치하는 천하가 주변을 향해 확대된다는 것이기도 했다."(74-7)


"그렇지만 어느 정도 예, 의의 유무로 정당화를 시도한다고 해도 한족의 이夷에 대한 민족적인 멸시 관념을 완전히 불식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기능 개념은 결국 위정자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는 개념이고, 실체 개념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족문제는 이가 화를 통치하는 한, 항상 최대의 현안 사항으로 지속되었다. 결국 지배 민족이 된 이는 한족의 천시를 받는 채로 화를 향한 독자적인 행보를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한 현실에 가장 먼저 부딪쳤던 것은 4세기 이래 화북에 잇달아 정권을 수립했던 이른바 오호五胡였다. 오호가 한족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머지않아 화북을 통일하여 남북조시대의 북조를 탄생시켰고, 그 속에서 수, 당 왕조가 엄연히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 호족胡族의 중화 지배는 점차 한족에게도 수용되었고, 어느덧 호와 한의 융합이라는 국면이 일상적인 모습이 되어갔다. 그렇다면 호족은 어떤 방법으로 화이의 구별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79-80)


"불과 5살 때 즉위한 북위의 6대 황제 효문제孝文帝는 머지않아 친정을 시작하면서 한 가지 정책에 착수했다. 이것이 북위가 중화 왕조로 이행하는 것을 단숨에 가속화시키게 되었다. 역사상 유명한 효문제의 화화華化 정책이다." "선비족의 중국화에는 호복胡服, 호어胡語의 금지와 호족의 성姓을 한족의 성으로 변경하는 것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조치들은 선비족을 한족과 동등한 입장에 두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효문제의 통치 방침은 선비족을 철저하게 중국화하는 것으로, 화이의 구별을 지양하는 문벌 귀족제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미 이 시기에는 선비족의 다수가 한어를 이해했고, 이전에 비하면 화화 정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효문제는 그러한 상황을 더욱 밀어붙였고, 선비족을 중화 문화 속에 녹아 들어가게 만들고자 했다고 생각된다. 효문제의 입장에서는 이것만이 호와 한이 어우러진 최고의 경지였고, 중원 왕조의 확립을 향한 커다란 도전이기도 했다."(98-101)


제4장 천하와 천하 질서 -한·위진남북조(2)


"중국 왕조가 동아시아의 번왕을 내신으로 삼은 것은 전연에 의한 고구려왕의 책봉이 그 효시이다. 355년, 전연은 고구려의 고국원왕에게 '(사지절, 도독)영주제군사, 정동장군, 영주자사, 낙랑공, 고구려왕'이라는 관직을 하사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주제군사, 정동장관(이상은 무관), 영주자사(문관)'는 내신에게 수여되는 관위였고, '낙랑공'은 5등작의 제1등 공작이었으니 똑같이 내신에게 사용되는 작위였다. 본래 외신의 왕작만 가지고 있던 고구려왕의 내신화가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연이 370년에 멸망하자 고구려는 413년 동진으로부터 책봉을 받는데, 전연과 거의 같은 관직을 수여받고 있다. 물론 번왕의 내신화라고 해도 완전히 중국 왕조의 내신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번왕이 내신으로 관료제적 질서 속에 그 위상이 부여되었던 것은, 중국 왕조에게 있어서 국내의 신하와 동등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번왕에 대한 영향력을 일정 정도 행사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의미한다."(135-6)


"거꾸로 번왕의 입장에서 보면, 내신이 되는 것으로 중국의 권력 중추에 가까워지게 되었고 이것은 대내적으로도 그리고 대외적으로도 자신의 기반 강화와 연결될 수 있었다. 특히 대내적으로는 중화 황제로부터 인증 받은 왕, 장군의 신분으로 부하들에게 관작을 임시로 수여하면서 중화 황제의 승인(관직 수여)을 얻어 국내의 정치적 질서를 강화했다. 왕권의 취약함을 중화 황제의 권위를 통해 보강했던 것이다. 즉 번왕의 내신화는 화와 이 쌍방에게 있어서 이득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남조와 북조 양쪽과 번국의 이해가 가장 첨예한 형태로 드러났던 곳은 복수의 번국이 대립하고 항쟁했던 한반도였다. 북쪽에서부터 공세를 가하는 고구려에 대해 백제와 신라는 항상 수세의 입장에 놓여 있었는데, 여기에 남쪽에서 왜국도 가담하면서 한반도의 국제 정세는 어지럽게 변화했다. 삼국과 왜국은 반도에서의 주도권 쟁탈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중국 왕조의 권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136-7)


제5장 중국의 대천하와 왜국의 소천하 -남조, 수, 당


"이상하게도 478년에 왜왕 무가 조공한 것을 마지막으로 왜국의 내조來朝는 바로 중단되어 버렸다." "왜국의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왜국 측의 사정과 크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사정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왜국 국내에서의 왕권 확립과 이에 동반하여 이루어진 중국 중심 책봉 체제로부터의 이탈 움직임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의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왜국의 독자적인 천하관의 형성이다." "일본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고분에서 와카타케르의 이름이 새겨진 도검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야마토 왕권의 지배권이 확대되고 있음을 뒷받침하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동시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도검에 새겨진 '천하'라는 두 글자이다. 물론 도검에 새겨진 천하는 어디까지나 왜국 입장에서 본 천하인 것이고, 그 천하를 통치하는 사람이 치천하대왕이라고 하는, 왜국의 독자적인 천하관이 생겨났음을 눈치챌 수 있다."(142-4)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반도 삼국 중에서 개별적인 천하관 형성의 움직임이 최초로 드러났던 것은 고구려에서였다. 위대한 부친인 호태왕(재위 391~412)을 현창하기 위해 장수왕(재위 413~491)이 414년에 건립했던 유명한 호태왕(광개토왕) 비문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백잔(百殘, 백제), 신라는 예로부터 속민屬民으로서 조공을 해왔다.〉 조공이란 바로 천하라는 공간에서 화와 이의 상하 관계를 표현하는 개념이고, 천하를 전제로 삼아 성립된 것이다. 사실 호태왕 시대 북부여의 지방관이었던 모두루의 묘지墓誌에는 〈천하 사방에서 이 국군(國郡, 고구려의 땅)이 가장 성신聖信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되어 있어 이미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천하관이 존재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고구려에서는 호태왕 시기에 영락永樂이라는 연호가 제정되었는데, 왜국의 최초 연호라고 알려진 다이카[大化]보다도 250년 이상 빠르다. 이 연호 제정에 더해 천하, 중화, 조공이라는 개념도 왜국보다 앞서 형성되었다."(148-9)


"왜왕은 대천하에서의 동이(번왕)와 소천하의 천자라는 이중 잣대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 두 가지 기준의 조화를 이루어내기 위해 왜국이 선택했던 방책은 책봉을 받지 않으면서 조공하는 것이었다. 책봉을 하지 않아도 수의 입장에서는 왜국이 조공국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고, 왜국의 입장에서는 수의 신하가 아니라는 점이 입증되는 것이다. 동이의 왜국은 태연하게 수에 조공을 하면서도 자국의 논리를 관철시켰다. 이를 통해 소천하의 천자로서 가지고 있는 왜왕의 긍지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고대국가의 완성은 왕권의 완성이었고 또한 일본 천하관의 완성이기도 했다. 일본은 국내에서 중화(중국)라고 공언했고, 국가의 실효적 지배 영역인 '화내'化內와 왕화王化가 미치지 않는 '화외'化外를 합하여 일본의 천하로 삼는 고유한 천하관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이 경우에 화외로는 '이웃 국가'[隣國]인 당, '번국'인 신라 그리고 '이적'인 하이, 준인, 남도인南島人 등이 『대보령』大寶令으로 규정되었다."(156-8)


제6장 동아시아의 천하 시스템 -당


"일본의 소천하가 완성된 것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중국에서는 북조로부터 탄생한 수가 남북조를 통일하면서 오랜만에 하나의 천조, 하나의 천하로 된 본래의 중화 왕조를 회복시켰다. 수의 뒤를 이은 당을 합해서 흔히 수당제국이라 부른다. 다만 영역의 측면에서는 당이 훨씬 광대했고, 적극적인 대외 확장 정책과 더불어 당은 유사 이래 최대의 판도를 보유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동부에 군림했다. 특히 태종 이세민(재위 626~649)은 중화의 천자이면서 유목민의 수장으로서, 중화와 이적에 군림하는 유일무이한 제왕으로 명성을 떨쳤다. 당은 복속한 이민족들에 대해 한대 이래의 전통적인 수법으로 지배를 행했다. 기미정책羈縻政策이라 불리는 것으로, 기미의 기羈는 말의 재갈을 고정시키기 위해 재갈에 매는 것이었다. 미縻는 소의 고삐를 의미한다. 소와 말을 묶어놓아 풀어놓지 않는 것과 같이 이민족의 부족장에게 당의 관직을 주면서 회유하고 그들을 통해 이민족 전체를 간접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이었다."(166-7)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와는 달리 당의 북방, 서방에서 유목과 농경을 영위하던 여러 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은 당보다 훌륭하면서 열등하지 않은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이 군신관계를 적용할 수 없었다." "이에 당은 돌궐, 위구르, 토번 등 유목민의 여러 국가(토번도 일단 유목국가에 포함시켜 둔다)와 한집안이 되었는데 이는 바꾸어 말하면 천하일가 아래에서 개별적인 서열이 장인-사위, 아버지-아들, 형-동생 등의 종법 질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과 유목민의 여러 국가들 사이에 임시로 만들어진 천하일가를 상정하고, 당의 천자와 번왕을 가족에 비견하여 양자의 관계를 규정한 것이다. 이는 또한 천조의 궁극적 이념인 천하일가의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진, 화와 이가 공존하는 넓은 의미의 천하에서 가시화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본래 군신 질서가 적용될 수 없는 유목민의 여러 국가들을 천하일가의 개념으로 연결시키면서 천조의 논리에 끌어들인 것이 종법 질서였다고 볼 수 있다."(180, 184)


"당대의 동아시아를 살펴보면, 당을 중심으로 하는 대천하와 당의 주변을 둘러싼 주위 여러 국가들이 소천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중국으로부터 비교적 멀리 떨어진 일본과 베트남이 거의 모든 것을 소천하로 재현했던 소제국小帝國의 양상을 드러냈던 것에 반해, 이웃 국가인 신라나 고려 혹은 발해 등은 대천하에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개념들이 소천하에서 표면화한 일이 거의 없었다. 어디까지나 잠재적 요소로서 존재했던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국제정치 시스템을 일극적一極的, 일원적인 책봉 체제론 개념으로 파악하기에는 반드시 무리가 있다. 책봉(조공) 관계도 포함하는 대천하와, 중국 주변에 있는 여러 개의 소천하가 천하 관념을 매개로 하여 유기적으로 느슨하게 연결된 정치 시스템, 여기에서는 이를 '천하 시스템'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자 한다. 이는 또한 10세기 이후 다극화와 다원화의 경향이 강해지는 동아시아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새로운 관점이 된다."(191-4)


제7장 천조의 행방 -오대십국, 송, 요, 금


"송 태종을 계승한 진종(재위 997~1022)은 1004년에 요遼와 '전연의 맹'을 체결한다. 전연의 맹의 특징은 뭐라고 해도 양국의 영토를 획정하는 명확한 국경선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그 국경을 유지하고 양국의 대립을 회피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 서서(誓書, 서약서)에서 언급한 약속이었고, 이후 중국과 주변 여러 국가들 사이에 맺어졌던 몇 개의 맹약들에서도 모두 전연의 맹이 그 본보기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실제로 1044년에 송과 서하 사이에 맺어진 '경력화약'慶歷和約에서는 송을 군주, 서하를 신하로 삼는 군신 관계로 정했지만 세폐와 국경의 획정은 전연의 맹에 준하여 행해졌다. 또한 시대가 흘러 1142년에 금과 남송의 '소흥화의'紹興和議에서는 금이 군주이고 남송이 신하가 되면서 거꾸로 '군신 관계'가 맺어진 것을 제외하면 그 이외에 국경, 세공歲貢, 서서, 사절의 교환 등은 모두 전연의 맹이 본보기가 되었다. 11세기 초부터 13세기 초를 '맹약의 시대' 혹은 전연 체제라는 용어로 통괄하는 까닭이다."(218-9)


"적어도 당시의 송과 요가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주권국가들의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양국이 대등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맹약에 의해 영토를 획정했고, 평등한 입장에서 서서와 치서 문서를 교환했고, 절대적인 군신 질서 대신에 상대적인 종법 질서를 적용했고, 혹은 서로 간에 북조와 남조 등의 호칭을 사용했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물론 대등했다고 해도 양국의 관계가 완전히 평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상대적이라고 여겨지는 종법 질서도 송이 형이고 요가 동생이 되었듯이 명확하게 상하 관계가 포함되어 있었고, 송에게 일방적으로 부과되었던 세폐도 요가 상위의 입장에서 취한 조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요의 입장에서는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했던 것이었고, 송은 그럭저럭 체면을 지켰다고 하는 것이 실상에 가깝다." "이렇게 획득한 대등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요가 중국의 원칙에 따랐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즉, 천하 관념은 전연의 맹의 성립으로 소멸된 것이 아니었다."(220-1)


"그런데 금과 맺은 소흥합의(1142)에는 전연의 맹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었다. 이때에 중국 황제가 외국 군주에 대해 처음으로 정식 신하를 취했던 것이다. 소흥화의가 송에게 있어서 매우 굴욕적인 것으로 여겨진 이유는 명분상의 상하 관계까지 포함하여 모든 측면에서 송이 하위에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금의 장종(재위 1189~1208)과 선종(재위 1213~1223)을 섬겼던 한인 조병문 등은 『춘추』의 논법을 들고 나와 화와 이의 차이는 민족의 차이가 아니라 예와 의의 유무라는 것을 맹렬히 강조했다. 여기에 중원을 영유하고 있다는 정통 의식도 더해지면서 금도 후반으로 가면 남송을 '만황'蠻荒, '도이'島夷 등으로 부르며 이적으로 여기는 관점이 생겨났다. 금이 문화, 지역의 측면에서 자국을 중화로 여겼던 것에 반해 남송은 민족의 측면에서 금을 이적으로 여기며 폄하했다. 이는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희에게서도 보이는데, 그의 사상 기조에는 '화이의 구별' 의식이 짙게 드러나고 있다."(232, 242)


제8장 천하일가의 완성 -원


"원과 청은 국가의 성립 과정이 다르다. 왜냐하면 청은 후금국이 그대로 발전하여 중국을 영유한 국가인 것에 반해 원은 유라시아 규모로 팽창했던 대몽고국이 얼마 후 분열되어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탄생했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누르하치를 청의 창업자인 태조라고 부르는 것은 어떠한 위화감이 없지만, 칭기즈칸을 원의 태조라고 호칭하는 것은 반드시 유보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하게 되면 칭기즈칸은 대몽고국 창설자이고, 원은 대몽고국이 분열된 이후에 탄생한 여러 칸국 중에서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된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칭기즈칸은 원의 창업자인 동시에 다른 여러 칸국의 창업자이기도 하다는 것인데, 이를 일부러 원 태조라고 하는 중화풍의 창업자로 만들어버렸던 것은 쿠빌라이의 국가가 조작한 결과였다. 중화 지역에서 성립한 쿠빌라이의 국가(=원 왕조)는 한법을 따라 칭기즈칸을 국가의 시조로 떠받들며 중화 제국의 겉모습을 보강했던 것이다."(255-6)


"쿠빌라이가 자립했던 1260년 5월, 대몽고국에서 최초로 연호가 만들어졌다. 그 연호는 중통中統이었다. 중통은 중화 지역에서 정통 왕조를 개창했다는 쿠빌라이 국가의 결의 표명이었다. 본래 하늘의 아들(천자)이란, 공간(천하)과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고, 연호는 천자가 다스리는 천하에 흐르는 시간을 표시하는 것이다. 연호는 항상 천자에 뒤따르는 것이었고, 그 치세를 상징하는 기호의 역할을 맡았다. 중국 왕조가 전통적으로 책봉국에게 역歷을 수여했던 것은 책봉국들이 중국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천자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는 것을 명확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정삭(正朔, 역)을 받든다'라고 한다. 쿠빌라이가 연호를 제정한 것은 그가 중화풍의 천자로서 중화 지역에 군림하고 있다는 것을 내외에 천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제 쿠빌라이의 국가는 예전 칭기즈칸 시대의 대몽고국과 같지 않다. 머지않아 쿠빌라이의 국가가 가진 독자적인 천하관 아래에서 중화풍의 국호를 제정하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257-9)


"1264년 막냇동생 아릭부케를 타도한 쿠빌라이는 연호를 중통에서 지원至元으로 바꾸었다. 새 연호인 지원은 『역경』의 〈지극하도다, 곤원坤元이여. 만물이 그러므로 생겨나고, 이에 하늘에 순종하고 이어받는구나〉에 근거한 것으로, 이때의 연호 개정에는 특별한 목적이 담겨 있었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한지에서 전통적인 천조의 논리를 따라 쿠빌라이의 국가가 천조로서 가진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보다 반석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건원의 건乾은 하늘이고 곤원의 곤坤은 땅이며 원元은 시초始初를 의미한다. 즉 건원이란 천지만물의 근원이 있는 우주 생성의 원리 혹은 하늘 그 자체를 가리킨다." "결국 지원이라는 연호는 하늘의 법칙으로 쿠빌라이의 중화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1271년 11월, 쿠빌라이는 새로운 국호를 정하고 천하를 향해 공표했다. 국호는 대원大元이었다. 정식으로는 대원 예케 몽골 울루스, 즉 대원대몽고국大元大蒙古國이고 줄여서 대원국이다. 이른바 원조元朝의 탄생이다."(260-1, 264)


제9장 천하일가에서 화이일가로 -명


"원·명 혁명은 일반적인 역성혁명과는 달리 이夷에서 화華로의 왕조 교체가 수반되었다. 따라서 화(명) 스스로 이(원)의 중화 지배를 인정하고 이에서 화로의 왕조 교체를 정당화해야 했다. 이는 주원장이 북벌을 할 때 내린 격문檄文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격문에 따르면, 이전에는 이였던 원도 덕을 갖춘 군주(쿠빌라이)가 천명을 받으면서 중국에 들어와 중화 지역을 통치했다. 그러나 이미 덕을 상실하여 이로 돌아가 버린 지금은 중화의 지역을 떠나 덕을 갖춘 새로운 군주(주원장)에게 그 지위를 양도해야 한다. 원이 이민족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쫓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덕을 상실하고 이적으로 회귀한 원이 중화의 땅(=중국)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문제인 셈이다. 〈중국은 안에 있으면서 이적을 제어했고, 이적은 밖에 있으면서 중국을 받을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화이의 차이를 안과 밖(중심과 외연), 예와 의의 유무로 해석하면서 완벽하게 원·명 혁명이 정당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286-9)


"확실히 명은 민간무역의 측면에서는 폐쇄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외 정책 자체는 소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 간에는 다른 시대 이상으로 적극적인 교류가 전개되었다. 홍무 연간에만 해도 17개의 국가가 내공來貢하여 명 황제와의 사이에서 군신 관계가 맺어졌던 것은 적극적 외교의 표방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주원장이 이렇게까지 화이 통합에 힘을 들인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원·명 교체기의 혼란으로 붕괴되었던 국제 질서를 재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왕조인 명에게는 그러한 의무가 있었다. 또한 명의 직전에 있었던 원이 화와 이를 포함한 광대한 영역을 보유한 다민족 복합국가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명이 원을 대신해 새롭게 천명을 받은 이상,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원에 필적하는 혹은 원 이상의 영역을 지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단순히 중화의 부흥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이夷에 대한 지배도 실현할 필요가 있었다."(302-4)


"일반적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 질서를 조공 체제라고 칭하는데 단적으로 말해서 조공 제도가 완전히 체제화했던 것은 이후에도 이전에도 명대뿐이다. 3대 황제 영락제(재위 1402~1424)는 이를 화이일가의 관념으로 보강했다." "영락제와 참모들의 목표는 황제와 번왕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 혹은 할아버지와 손자인 '의제적 가족 관계'로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면복을 하사한 조선과 일본은 아버지와 아들, 피변관복을 하사한 류큐와 안남 등 그 이외의 국가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가 되어 모든 번왕이 가족 질서 속에 배치되었다. 화이 질서는 가족 질서로 전환되어 마땅히 화이일가의 상황이 화와 이의 넓은 의미의 천하에서 구현되고 가시화된 것이었다. 화이일가의 구현 배경에는 대외 정책이 조공 제도로 일원화되었던, 명의 이른바 조공일원체제가 있었다." "조공일원체제로 인해 모든 번왕이 책봉을 받고 관복을 수여받는 것으로 명의 황제와 번왕 사이에 가족 질서도 설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319-20)


제10장 화이변태와 중외일가 -청


"청조의 3대 황제인 순치제(재위 1643~1661)가 말한 천하일가란, 만주족과 한족이 가족과 같이 일체화한 상황을 의미한다. 명의 영락제는 전통적인 천하일가를 대신하여 화이일가라는 관념으로 자신의 천하 통치를 정당화했다. 이가 화를 지배하는 청대에는 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꺼렸고, 만한일가라는 청조 특유의 독자적인 관념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청조는 이 관념을 실제 정치에서도 구현해 보였다.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만한병용책滿漢倂用策이다. 관청의 정점에는 반드시 만주인과 한인 두 사람을 두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피했다. 예전에 원조에서 관청에 반드시 몽골인으로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두어 한인에 대한 감시를 행했던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청조는 가능한 한 만한滿漢이 대등해보이는 조치를 시행했다. 만한 서로 간의 통혼을 장려했던 것도 하나의 예이다. 만한의 대립이 남아 있던 국가 초기에는 청조가 만한일가를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340-1)


"그러나 본래 만한일가는 만인(때로는 몽골인도 포함)과 한인에 한정되는 개념이었고, 이 용어 자체는 그 이상으로 넓어질 수가 없었다. 다민족국가인 청조에게 있어서는 결코 만족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만한일가와 함께 천하일가라는 용어도 국가 초기 이래 일반적으로 활용되었다. 다만 실정에 가장 적합한 화이일가만은 청조에서 계속 단연코 거부했다. 그러한 와중에 새로운 주장이 나왔는데, 바로 '중외일가'라는 용어이다. 원래 중외中外는 조정과 지방, 혹은 국내와 국외 등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의 지리적, 공간적인 범위를 표시하는 개념이다. 이는 또한 장성을 사이에 두고 그 남쪽의 중국과 북쪽의 만주와 몽골, 나아가서는 중심이 중화와 주변의 이적이라는 관계를 순수하게 지리적인 관점에서 다시 파악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일가라는 솔직한 표현을 싫어했던 청조에게 있어서 가장 알맞은 용어였고, 전 시대에 걸쳐 천하일가와 함께 청의 통치 방침으로서 선전되었다."(341-2)


"건륭제(재위 1735~1796)는 중국 본토에서는 황제로서 군림했고, 만주와 몽골 지역에서는 한汗이었으며, 티베트에서는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이었고, 신강 위구르에서는 이슬람교의 보호자로서 행동했다. 바로 다민족국가인 청조의 성격을 한 몸에 체현한 사람이 건륭제였던 것이다. 오족(五族, 만·한·몽·화·장)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민족이 독자적인 문화를 계속 유지하면서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계. 이른바 오족 공존五族共存의 세상이야말로 건륭제가 바라마지 않는 이상적인 천하였다. 이런 어려운 요구에 건륭제 자신이 대응한 것이 그가 만들어낸 '황청의 중하(중화)'였다." "여기서 중화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구별은 청조에 대해서 공순恭順한가 아니면 반역적인가에 따라 이루어졌고, 순종과 거역의 이치가 양자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청조의 판도에 들어오면 중화이고, 그래서 복종하는 번부의 백성은 황제에게 덕화된 중화의 백성으로 여겨지면서 겉보기에는 중국 본토의 백성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되었다."(352-4)


제11장 중화민족의 대가정 -근현대


"청조를 유지하는 것(변법파)과 청조를 부정하는 것(혁명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고, 이것은 그대로 만주족의 처우와도 연결되었다. 변법파는 만주족의 중화 지배를 인정하면서 한족을 포함한 오족의 공존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를 풀어서 말해보면, 건륭제가 실현한 '황청의 중하'를 유지하면서 '황청의 대일통'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시작으로 열강의 침략에도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편 혁명파의 생각에서는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어떻든 간에 부패해버린 만주족의 청조를 타도하고 한민족에 의한 공화제 국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정한 중화를 회복하고 내부의 결속을 도모해야 열강에 대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만주족을 중화에서 쫓아내 혁명을 성취할 필요가 있다. 황청의 중하 속에서 균형을 지키고 있던 '대일통'과 '화이의 구별' 관념은 각각 변법파와 혁명파라는 양극단으로 분열해버렸던 것이다."(378-9)


"종래 중국에서는 수많은 왕조가 흥망을 거듭했지만, 일본의 국호처럼 시대를 초월하여 불리는 국가의 명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량치차오는 천하의 중심이면서 문명이 뛰어난 지역을 막연하게 지칭하는 중국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국민국가의 명칭으로 삼자고 주장했고, 후세에 점차 정착하게 되었다. 1901년, 량치차오는 국가 명칭으로서의 중국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받아들인 민족이라는 개념을 결합해 중국 민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2년에는 중국 민족을 대신해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고, 이를 근대의 국민국가를 이끄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국민의 개념에 견주고자 했다. 즉 당시 청조 치하의 사람들에게 중화민족이라는 아이덴티티(귀속 의식)를 가지게 하는 것으로 '중국' 국내의 사람들에게 결속과 통일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민족 복합국가로서 대청 왕조의 성격은 중화민족이라는 허구 아래에서 확고하게 중화민국에도 계승되었다."(384-5)


"한편 일본에 망명한 쑨원은 도쿄에서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하여 혁명운동을 지속했고 얼마 후 1919년에는 국민정당인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이 시기에는 임시대총통 시대와는 달리 그의 오족공화에 대한 생각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쑨원이 구상한 중화민족이란 『임시약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률적으로 평등한 오족의 총칭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한민족이 주체가 되는 중화민족이다. 쑨원은 분명하게 이적에 대한 멸시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우월한 한민족이 열등한 이민족을 한민족으로 동화시키는 것으로 중화민족이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이를 쑨원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라고 칭하기도 한다. 한민족이 중화민족이 된다고 해도 실체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다. 다만 한민족 이외의 여러 민족들은 한화되면서 문명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중화민족 개념의 제시는 직설적인 한화漢化라는 표현을 피해간 현대판 화화華化정책이기도 했다."(387-8)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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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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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그대에게


유신시대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뼈대를 만든 시기다. 유신체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민주화운동 세력조차 유신시대에 만들어진 사람들이었다. 1970~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한마디로 유신의 몸과 광주의 마음을 가진 세대였다. 그들은 목이 터져라 자유와 민주를 외쳤지만 정작 자유를 누려본 적도, 민주주의가 몸에 밸 기회도 갖지 못한 불행한 세대였다. 유신시대는 일제가 키워낸 식민지 청년들이 장년이 되어 사회를 운영해간 시기였다. 이 시기는 친일잔재 청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 친일잔재를 청산하려던 세력이 거꾸로 친일파에게 역청산당한 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참혹하게 보여준 시기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의 ‘퇴행’은 박정희가 체질에 맞지 않는 미국식 민주주의의 틀을 벗고 젊었을 때부터 익숙한 일본식 모델을 ‘한국적 민주주의’로 포장해 들고나온 것이었다. 유신시대는 김근태와 그 벗들에게 내란음모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을 뒤집어씌운 자들이 일으킨 진짜 내란의 시대였다. 15-6)


제1부 헌정의 파괴


1971년 4월의 제7대 대통령 선거와 5월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박정희에게 큰 충격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김대중의 거센 도전을 받아 상당히 고전했고,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여당인 공화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야당인 신민당이 의석을 크게 늘리며 개헌 저지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제 헌법 절차에 따라 정상적인 방법으로 박정희가 대통령직 네 번째 임기에 도전하는 길은 완전히 막혀버린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야당에 정권을 내준다는 것은 꿈도 꿔본 적이 없고, 집권 세력 안에서도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집권 세력 안에서 김종필이 2인자로 부상하는 것을 막으려 공화당 안에 백남억, 김성곤, 길재호, 김진만 등을 주축으로 한 ‘4인 체제’를 구축했다. 4인 체제의 실력자였던 김성곤(쌍용그룹 창업주)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로 5·16 직후 김일성의 밀사로 남파되었다가 처형당한 황태성 등과 함께 경북 지방에서 좌익 활동을 한 바 있었다. 20)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으로 정치자금을 주무르며 실력자로 부상한 김성곤은 1975년 박정희가 물러나는 것을 전제로 2원집정부제 개헌에 대한 구상을 다듬으면서, 지방의 시장·군수와 경찰서장 등에 자기 사람을 심는 데 분주했다. 박정희는 김종필(JP) 계열의 내무장관 오치성을 내세워 김성곤 등 4인 체제가 지방 요직에 심어놓은 사람들을 제거했고, 이에 분노한 김성곤 등은 야당이 내무장관 해임 건의안을 내자 이에 동조하여 오치성의 해임 건의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이것이 유신 1년 전의 이른바 10·2 항명파동이다. 박정희의 특명으로 김성곤 등 공화당 의원 23명이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고문과 구타를 당했는데, 김성곤은 콧수염이 뽑히는 모욕을 당하기까지 했다. 10·2 항명파동으로 공화당 안에서 박정희의 친정 체제가 확립되었다. JP계와 4인 체제 사이의 이이제이, 3선개헌과 정보정치의 주역이었던 ‘날으는 돈가스’, ‘공포의 삼겹살’ 김형욱에 대한 토사구팽 등을 거치며 집권 세력 내부를 완전히 평정한 것이다. 20-1)


미국 대통령 닉슨은 1969년 7월 아시아에 있는 미국의 동맹국은 “스스로가 자신의 방위에 대하여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미국은 이 정책에 따라 베트남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고, 한반도에 주둔했던 미군의 철수도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의 전면남침이 임박했다고 떠들어댔지만, 미국은 유신이 선포된 1972년 10월의 한반도 안보 상황은 한국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파악했다. 무엇보다도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중국과 소련 두 사회주의 강대국은 서로 반목하면서 각각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런 데탕트 분위기에서 이북이 중국이나 소련의 지원 내지는 동조 없이 한반도에서 전면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한반도 안팎으로 여러 가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자 박정희는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이어 12월 27일 새벽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22-3)


박정희는 유신 쿠데타를 준비하면서 미국과 협의하거나 미국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 국무총리 김종필이 주한 미국대사 하비브를 통해 미국에 공식적으로 계엄 선포와 국회 해산에 대해 통보한 것은 유신 선포 하루 전인 1972년 10월 16일 저녁이었다. 하비브는 뒤늦은 통보에 불쾌해했지만, 국회에서 야당 의원이 공개적으로 비밀공작의 윤곽을 꼬집어 말할 정도로 소문이 파다했던 초헌법적 조치가 곧 취해질 것이라는 점을 미국이 사전에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에서 한 발을 빼기 시작한 미국은 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반공독재 체제를 강화하여 미국이 한 발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려는 것을 묵인해줄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는 박정희보다 3주 앞선 9월 21일, 공산주의자와 파괴분자들이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촉발하고 있다며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켰다. 마르코스의 독재 체제 강화를 묵인했던 것처럼 미국은 박정희의 독재 체제 강화를 묵인해주었다. 27)


박정희에게는 메이지유신 말고도 따라 배운 또 하나의 유신이 있었다. 바로 유산된 유신, 쇼와유신(昭和維新)이다. 군부 내의 급진파 청년장교들과 기타 잇키(北一輝) 같은 초국가주의자들은 메이지유신을 재현해보자고 1936년 2월 26일 천황 친정을 명분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조선총독을 지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등 대신 여럿을 살해했지만 천황의 복귀명령으로 진압되어 주동자 15명이 사형을 당했다. 의회정치의 타도, 구정치인들의 부정부패 일소, 재벌 해체, 빈부격차 해소 등을 주장한 박정희의 생각은 쇼와유신을 추진하다가 진압당한 황도파 청년장교들의 생각을 빼닮았다. 1930년대 일본의 급진파 청년장교들이 10년 정도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못 견디고 뛰쳐나갔다면, 박정희는 1년여에 불과했던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 실험이 혼란이라며 판을 깨버렸다. 박정희의 강력한 식민지 체험이 만들어놓은 내면화된 세계관이 해방 30년이 다 되어서 제도로, 체제로 등장한 것이다. 33-4)


제2부 헌법 위의 한 사람


유신헌법 제40조는 대통령이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일괄 추천하여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을 투표에 부쳐 선출하도록 했다. 형식적으로는 간선의원이지만 사람들은 ‘관선의원’이라 불렀다. 이렇게 추천받은 국회의원의 임기는 지역구에서 선거로 선출된 의원 임기 6년의 절반인 3년이었다. 국회는 지역구에서 선거를 거친 ‘민선의원’ 146명과 대통령이 임명한 ‘관선의원’ 73명으로 구성되었다. 유신정우회(약칭 유정회)는 이렇게 선출 방식도 다르고 임기도 절반밖에 안 되는 73명의 ‘여권’ 의원들이 모인 교섭단체였다. 유신국회였던 제9대와 제10대 국회에서 의석수로는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정당이 아니니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편찬한 《대한민국정당사》에는 나오지 않는다. 유정회는 원내 제1교섭단체였지만 정당도 아니었고 정강정책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서 이른바 ‘신체제’를 표방하면서 여러 정당들이 해산한 뒤 통합되어 출현한 대정익찬회와 유사하다. 37-9)


박정희는 5사단장 시절에 만난 윤필용을 총애하여 7사단장, 1군 참모장, 군수기지 사령관, 1관구 사령관 등 새로운 보직을 맡을 때 대부분 윤필용을 데리고 갔다. 5·16 군사반란 당시 윤필용은 육군대학에서 수학 중인 관계로 이른바 ‘혁명주체’가 아니었지만, 박정희와의 개인적인 인연 덕분에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또는 비서실장 대리로, 육군 방첩대장, 수경사령관으로 20년간 최측근에서 박정희를 보좌했다. 윤필용은 육군 방첩대장으로 있던 1965년 5월 원충연 대령 등이 주도한 쿠데타 모의를 적발하는 공을 세웠다. 원충연은 윤필용이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을 할 때 최고회의 공보실장을 맡았던 박정희의 또 다른 측근이었다. 1960년대 초반에 발생한 수많은 반혁명 사건은 사실 모두 조작된 것인데, 원충연 사건만큼은 병력 동원이 계획된 실체가 있는 사건이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다른 반혁명 사건의 주역들은 모두 금방 풀려났지만, 원충연은 박정희가 죽고 난 다음에야 16년 만에 풀려났다. 43-4)


유신을 단행하기 이전에도 박정희는 2인자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조금 치고 나간다 싶으면 다른 측근들의 견제가 집중되었다. 김종필 세력이 칼을 맞았고, 김성곤 등 4인 체제도 몰락했다. 유신을 전후한 시기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이후락이 평양에 가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와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내자 그의 대중적 인기는 치솟았다. 유신의 기획과 실행 과정에서 이후락의 역할은 뚜렷했다. 윤필용도 처음에는 이후락을 견제했으나 이후락에 대한 박정희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보고 그와 손을 잡았다. 이후락과 윤필용이 가까워지는 것을 정작 그들의 보스 박정희는 바라지 않았다. 박정희뿐이 아니었다. 김재규의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을 맡은 강창성은 이후락-윤필용의 구도에 맞서 박종규와 손을 잡았다. 이들 4인 이외에 박정희의 측근 한 사람이 등장한다.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뒤 서울신문사 사장으로 있던 박정희의 골프 파트너 신범식이다. 45)


윤필용이 이후락과 작당하여 박정희가 노쇠하였으니 물러나게 하고 다음은 ‘형님’(이후락)이 해야 한다는 불경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을 박정희에게 고자질한 이가 바로 신범식이다. 신범식도 자신이 윤필용 사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강창성은 윤필용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육사 11기 이하의 장교들로 구성된 하나회라는 비밀 사조직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강창성은 사건을 확대하여 하나회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를 준비했다. 위기에 빠진 전두환, 노태우를 구해준 것은 박종규와 서종철(국방부 장관), 진종채(박정희의 대구사범 후배로 전두환의 전임 보안사령관) 등 영남 출신 장성들이었다. 그들은 박정희에게 강창성을 보안사령관에 그대로 두면 “경상도 장교의 씨가 마르겠다”며 박정희 자신이 군대 내의 친위대로 육성한 하나회가 초토화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일국의 장성을 잡아다 모진 고문을 가한 강창성은 전두환 등 신군부가 집권한 뒤 감옥에서 삼청교육을 받았다. 45-7)


윤필용 사건으로 방아쇠가 당겨지면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났고, 그 여파로 박정희 주변의 권력구도가 크게 변화했다.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을 제외하고는 핵심 측근들 모두가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갔다. 윤필용은 감옥으로 갔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김형욱은 윤필용이 잡혀가자 바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핑계로 대만으로 빠져나갔다가 미국으로 망명해버렸다. 이후락은 윤필용 사건으로 흔들린 입지를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 납치 사건에 적극 나섰다가 교체되었고, 강창성은 토사구팽당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반박정희 정서가 폭발하도록 하여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미수(육영수 서거) 사건을 낳았고, 경호실장 박종규는 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 후임자가 된 것이 차지철이고, 중앙정보부장 자리는 신직수를 거쳐 김재규에게 돌아갔다.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구도는 박정희 자신만이 전모를 알고 있는 윤필용 사건에서부터 짜인 것이다. 48)


1974년 1월 8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1호의 주요 내용은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긴급조치로 금지한 행위를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 역시 금지되었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대통령의 명령이 법률과 동일한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긴급조치이니 3권분립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박정희의 집권 18년 중 절반 이상인 120개월가량이 계엄령, 위수령, 비상사태 또는 긴급조치였다. 유신시대는 1973년에 몇 달과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이듬해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될 때까지의 몇 달 만을 제하곤 쭉 긴급조치의 억압과 공포가 지속된 시기였다. 60)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통일운동가 8명의 목숨을 앗아간 박정희 정권 시기 최악의 공안사건이다. ‘재건’이란 말로 알 수 있듯이 이미 1964년에 인혁당(인민혁명당)이란 이름의 단체를 결성하려 했다는 대대적인 공안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1964년의 사건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10년 뒤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2차 인혁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두 사건은 주요 피해자는 물론 그 가해자도 겹친다. 1차 사건 당시의 라인업이 중앙정보부 수사과장 이용택, 검찰총장 신직수, 법무부 장관 민복기였다면, 10년 뒤 이용택은 중앙정보부 6국장, 신직수는 중앙정보부장, 민복기는 대법원장으로 사건을 처리했다.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은 엄청난 고초를 치렀음에도 개별적으로 공개적인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지만, 1차 인혁당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인지 비밀지하혁명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데는 주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험난한 세월은 이들을 비껴가지 않았다. 65)


비도덕적인 유신정권은 학생과 시민들이 불법적인 체제에 도전하는 것을 못 견뎠다. 그들에게는 이 저항의 배후에 반드시 ‘불순세력’이 있다는 강박증이 있었다. 그 강박증은 불순세력이 없으면 만들어내기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었다. 1964년에 인혁당이 조직된 바 없으니 인혁당 ‘재건’이란 시나리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재판과정에서도 고문으로 받아낸 진술 이외에 “반국가단체 결성 및 국가전복기도를 위한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조직명, 강령 및 규약, 조직체계, 조직활동 관련 물증이 제시되지 않았다.” 참으로 기가 막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2차 인혁당 사건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부르고 있지만 ‘인혁당 재건위원회’라는 반국가단체는 비상군법회의 검찰 측 공소장이나 대법원 판결문 어디를 보아도 만들어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인혁당 재건위’가 아니라 ‘인혁당 재건단체’라는 모호한 말로 배후조직의 성격을 규정했고, 박정희 정권은 무고한 사람을 8명이나 잡아 죽였다. 68)


#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들 : 서도원,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도예종, 하재완, 여정남, 송상진


제3부 금기, 저항, 상처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면서 박정희는 우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리의 출생의 의미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규정해버렸다. 일본 군국주의식 사고방식이 꽉 박힌 박정희와 자유를 추구하는 젊은 세대는 맞지 않았다. 인혁당 사람들을 사형시킨 1975년에 박정희 정권은 무려 225곡의 가요를 금지곡으로 묶었고, 대마초 단속을 통해 이장희,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 등 인기 절정의 가수를 포함한 27명을 구속했다. 김민기나 신중현은 이름이 들어가면 무조건 금지되는 영예를 누렸다. 〈아침이슬〉도 금지곡이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구절은 검열관의 귀에는, 태양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이고, 묘지는 박정희 치하의 남조선이고, ‘붉게 타오르고’는 적화통일로 들렸던 모양이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는 월북을 기도하는 노래처럼 들렸고, 가는 데마다 ‘하면 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던 시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패배주의의 상징으로 퇴출당했다. 98-9)


1968년에 교통사고로 숨진 모더니스트 김수영은 버드 비숍의 여행기를 영어로 읽다가 득도하듯이 단절된 전통과 만나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라는 절창(〈거대한 뿌리〉)을 남겼다. 그 후배들도 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더러워진 전통, 흩어져버린 민중과 다시 만났다. 청년문화 논쟁은 ‘엘리트’와 ‘대중’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심화시켜 우리가 잃어버린 ‘민중’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감도 한층 심화시켜주었다. 1960년대에 사람들은 미친 듯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한편에는 패티 김의 〈서울의 찬가〉가 있었고, 또 한편에는 김지하의 〈황톳길〉이나 〈서울길〉이 있었다. 이제 박정희의 〈잘살아 보세〉도, 대중가요 〈흙에 살리라〉도 불편해했던 도시적 감성을 지닌 젊은이들은 제 목소리로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아침이슬〉)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김지하가 〈아침이슬〉을 처음 듣고 예견했듯이 앞으로 무엇이 올 것인지,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젊은이들은 저 거친 광야로 나섰다. 100)


자본주의화를 겪은 모든 나라에는 저마다의 슬프디슬픈 여공애사(女工哀史)와 소년노동의 피눈물 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유산에 식민지 지배와 전쟁과 압축적 근대화를 겪은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슬프기로 한다면야 다른 어느 나라의 자매들보다 더 슬픈 이야기가 많지만, 다른 나라 여공애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빛나는 순간들을 갖고 있다. 흔히 유신시대라 불리는 1970년대에 노동운동의 주역은 여성 노동자였다. 장기간에 걸친 군사독재에서 1970년대처럼 노동운동 내에서의 성비가 여성 쪽으로 기울었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여성 노동자들은 1970년대 내내 노동운동을 책임졌고, 대학생들조차 변변히 데모를 하지 못했던 유신의 마지막 순간 YH 사건을 통해 철옹성 같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 단초를 열었다. 너무나 단단했기에 작은 충격도 흡수할 여지가 없어 깨져버린 박정희 정권과는 반대로, 그 시절의 여성 노동자들은 한없이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히 강해질 수 있었다. 101)


자본은 늘 재단사가 미싱사를, 미싱사가 미싱 보조를, 미싱 보조가 시다를 갈구게 하여 생산목표를 달성했다. 그래도 군대와 달랐던 것은 담임은 반장을 야단치고, 반장은 조장을 야단치고, 조장은 또 어린 여공을 야단치다가 서로 붙잡고 막 울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소박한 자매애, 형제애가 노동운동의 기초였다. 신순애는 ‘중등수업 무료’라는 유인물을 보고 찾아간 노동교실에서, 어느 날 사장이 “깡패가 죽어서 가마니로 덮어놨으니 구름다리 밑에 가지 마라”라고 했던 말의 주인공이 전태일임을 처음 알았다. 장시간 고된 노동을 마치고 공부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여기서만큼은 그를 ‘7번 시다’가 아닌 신순애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7번 시다 신순애는 2년 반 동안 같이 일한 7번 미싱 언니의 이름을 모른다. 또래의 청소년들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를 책으로 배웠지만, 이제 비정규직의 어머니가 된 그 시절의 여공들은 그 시를 노동조합이나 야학에서 눈물로 체험했다. 106)


1970년대에 민주노조의 깃발이 오를 수 있었던 데는 개신교의 산업선교회와 천주교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같은 산업선교 또는 노동사목 조직의 역할이 매우 컸다. 너무도 열악한 노동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해보려는 노동자들이 손을 내밀 곳이라곤 교회밖에 없었다. 분신 1년여 전 전태일은 “저희들의 아버님”인 ‘국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식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라며 탄원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반도상사 노동자들이 호소문을 전하려 노동청에 찾아가자 노동청 간부들은 “일도 안 하고 유인물이나 뿌리고 다니는 나쁜 아이들”에게 이런 불순한 짓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범죄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 당시 노동운동의 지원에서 종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나 빨갱이로 몰릴 가능성이 적었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 권력이 쉽게 탄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25-6)


1970년대 들어 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동일방직, 반도상사,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등에 연이어 민주노조가 들어선 것은 5·16 군사반란 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직된 노총과 산별연맹이라는 공식적인 체계에 균열이 발생한 것을 의미했다. 유신정권은 이 균열의 진원지로 두 단체를 지목했다. 특히 1974년 2월 반도상사의 농성으로 분출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어용노조 결성을 통해 체제 내로 흡수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중앙정보부는 적극적으로 산업선교회와 노동자들을 분리하려고 하는 한편, 산업선교회에 대한 전면적인 내사에 착수했다. 중앙정보부는 1974년 5월에 조화순 목사를 구속했다. 표면적으로는 노동자들과 함께 간 야외예배 설교를 문제 삼은 것이지만, 사실은 반도상사 노조 결성의 배후로 지목한 것이다. 전두환이 광주학살로 집권한 뒤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노동조합법을 개악할 때 악명 높은 ‘3자개입 금지’ 조항을 넣은 것은 바로 산선의 활동을 의식한 결과였다. 127)


제4부 유신의 사회사


나는 박정희 시대의 특징을 ‘조국 군대화’라 부르고 싶다. 전쟁이 법적으로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고 60만이 넘는 대규모 상비군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었지만, 민간인인 이승만이 지배했던 시기와 군인인 박정희가 지배한 시기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유신 직후인 1973년 1월 20일 박정희는 국방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앞으로 법을 만들어서라도 병역을 기피한 본인과 그 부모가 이 사회에서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는 사회기풍을 만들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박정희는 병무비리의 근절을 위해서는 병무청만이 아니라 유관기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로 1973년 2월 26일 대통령 훈령 제34호로 ‘병무행정 쇄신에 관한 지침’을 제정했다. 이에 따르면 “병역기피자는 유신과업과 국민총화를 저해하는 ‘비국민’적인 행위자”로 규정되었다. ‘비국민’(히코쿠민)이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쟁책동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을 체제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즐겨 쓰던 흉포한 언어였다. 153-4)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박정희는 사회 저명인사나 특권층, 부유층의 자식들에 대해서 열외를 인정하지 않고 엄격하게 관리했다는 점이다. 유신시대에는 고위공직자나 재벌, 언론사 사주, 국회의원 등 상류층 자식들의 병적기록표에는 ‘특’이라는 도장이 찍혀 별도의 관리를 받았다. 이렇게 열심히 병역기피자를 없앤 것은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낳았다. 상당한 비율의 병역기피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징병제도가 운영되다가 갑자기 병역기피자가 일소되었다는 것은 군대에 사람이 차고 넘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사정권은 방위 제도를 만들고 전투경찰을 만들어 소집된 청년들을 정권유지를 위해 써먹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남았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기업에 배치되어 병역의 의무를 대신하는 산업특례요원들이었다. 기업이 자격을 취소하면 당장 현역으로 끌려가야 하는 산업특례요원은 군대라는 목줄로 죄어 맨 현대판 노예노동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군인들이 장악한 국가는 자본에 이렇게 베풀 줄 알았다. 156)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군의 공세가 강화되고 공산군이 사이공이나 프놈펜에 몇 킬로미터까지 육박했다는 보도가 거의 매일 신문에 실리던 1975년 초반은 한국에서 반유신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던 때였다. 4월 17일 크메르 정부는 공산 크메르루주군에 항복을 선언했고,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자 이웃 라오스의 좌우 연립정부에서 우파는 사실상 몰락했다. 인도차이나에서 도미노 이론이 현실로 나타나는 가운데 박정희는 모든 긴급조치의 종합판이라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비판과 반대를 금지했다. 5월 21일의 여야 영수회담 이후 그동안 나름 유신반대 투쟁에서 일익을 담당해온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8월 17일 반유신 세력의 통합을 위해 애써온 마지막 독립군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월남 패망’의 위기는 박정희로 하여금 잠시나마 민주화운동 세력의 거센 도전을 뿌리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164-5)


어쩌면 베트남 파병은 이남보다 이북에 더 극단적인 변화를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김일성은 베트남을 한국의 제2전선으로 보고 대규모 파병을 단행한 박정희에 맞서 한반도를 베트남의 제2전선으로 만들기 위해 이북 사회가 조금이나마 유연성을 견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의 정치사에도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위로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황영시, 유학성, 장세동, 안현태 등 신군부의 주요 인물들이, 아래로는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상당수가 베트남에 파병된 자들이었다. 이들 중 실제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자는 극소수라 하더라도, 유격대원과 민간인의 구분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베트남전쟁에서 민간인을 잠재적 베트콩으로 보고 총을 겨눴던 경험을 가진 자들이 광주학살의 주역이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베트남에서 부와 경력을 쌓은 일부 장교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하나회와 같은 사조직으로 똘똘 뭉쳤다. 167-8)


유신 쿠데타로 또다시 헌법을 짓밟은 직후인 1973년 1월의 연두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10월유신이라고 하는 것은 곧 새마을운동이고, 새마을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곧 10월유신”이라고 선언했다. 박정희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신시대는 곧 새마을운동의 시대였다. 김정렴을 비롯한 유신정권의 핵심요인들이 입을 모아 증언하듯이 새마을운동은 “순전히 박 대통령의 개인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새마을 교육에서 활용되던 교재를 보면 “각하께서는 (중략) 새마을운동의 개념에서부터 사업 내용, 그리고 전개 방향에 이르기까지의 자세한 지침을 손수 구상하셨고, 때에 맞추어 국민 앞에 제시·설명하셨다”고 한다. 박진도와 한도현이 잘 설명했듯이 “새마을운동은 처음부터 정연한 이론이나 체계를 갖고 시작된 것이 아니고, 최고 지도자의 소박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한때 국정의 최고 정치철학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그렇기에 새마을운동은 “박정희라는 개인 그리고 유신체제를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177-8)


많은 관찰자들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1930년대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농촌진흥운동을 빼닮았다고 지적한다. 박정희가 1970년 제창한 ‘새마을 가꾸기’란 조선총독부의 ‘아타라시이 무라 쓰쿠리’를 글자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농촌진흥운동이 박정희에게 미친 영향을 가장 상세히 기술한 것은 조갑제였다. 최길성 교수의 연구성과를 인용하여 조갑제는 새마을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의 유사성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운동의 이념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이 ‘자조, 자립, 협동, 충효애국’이고 그것의 집약적 표현이 국민교육헌장이었던 데 대해서 우가키 총독의 농촌진흥은 ‘자립, 근검, 협동공영, 충군애국’과 교육칙어였다. 박정희, 우가키 두 사람 다 농촌 출신 군인이었다. 두 운동의 현장 지도자들은 새마을연수원과 농도강습소에 의해 각각 양성되었다. 〈새마을노래〉와 〈농촌진흥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농가경제 5개년 계획, 육림일과 애림일, 모범 부락의 선정 등 공통점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178-9)


1968년 7월 15일 문교부 장관 권오병은 국민학교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1969학년도부터 중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추첨으로 입학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중학교 무시험 제도의 채택은 중등교육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데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에 더해 유신 쿠데타 직후의 추상같은 분위기에서 박정희 정권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대한 평준화를 단행했다. 1974학년도부터 서울과 부산에서 인문계 고등학교는 연합고사를 통해 학군별로 총인원을 선발하여 추첨 배정하는 방식으로, 1975년도에는 대구, 인천, 광주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당시는 한국 사회에 일류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연·학벌 사회가 강력히 자리 잡고 있던 때였다. 그 정점에는 경기고-서울대의 특권적 교육재화를 보유한 사람을 가리키는 ‘케이에스(KS) 마크’가 있었다. 서울에는 5대 공립이니 5대 사립이니 하는 명문고가 있었고, 전국 각 지역에도 지역의 명칭을 딴 명문고들이 강력한 학연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201-3)


박정희는 이 학연 체제의 바깥에 있었다. 박정희 자신만이 아니었다. 이후락, 김형욱, 박종규, 차지철 등 군 출신 실력자는 말할 것도 없고 민간 관료 중에도 명문고 출신이 아닌 자가 훨씬 더 많았다. 명문 고등학교를 나온 육사 출신과 서울법대 출신들이 세상을 쥐고 흔들며 ‘육법당’의 전성시대를 구가한 것은 박정희가 죽은 다음의 일이다. 박정희는 명문 고등학교의 기득권을 박탈하는 악역을 경기고 출신인 민관식에게 맡겼다. 훗날 민관식은 자신이 경기고 출신이 아니었다면 평준화라는 개혁을 도저히 실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무시험과 같은 충격요법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입시지옥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회적 병폐라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단단히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벌과 일류 고등학교를 따지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 중학과 고교의 평준화는 박정희가 늘 입에 달고 살았던 ‘가난한 농민의 아들’다운 정책이며 그가 행한 가장 급진적인 사회개혁이었다. 203)


제5부 유신체제의 붕괴


1960년대 말 이후 한국의 수출 팽창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발이었다. 1964년 중국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미국 재무성은 1966년 2월 ‘중공봉쇄’라는 기본정책에 따라 유럽으로부터 원료원산지 증명이 없는 가발을 일체 수입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제재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로 중국제 원료를 사용한 제품으로 미국 시장의 90퍼센트를 석권하고 있던 이탈리아의 가발 산업이 몰락했다. 당시 뉴욕의 한국무역관 부관장으로 있던 장용호는 한국산 가발이 유망할 것이라 생각하여 무역공사를 사임하고 발 빠르게 왕십리에 종업원 10명의 소규모 가발공장을 차렸다. 장용호는 회사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따서 YH무역이라 지었고, 부사장에는 동서인 진동희를 앉혔다. 가발은 불티나게 팔려 YH무역은 2년 만에 면목동에 5층 건물(현재의 녹색병원)을 마련했고, 인천에 제2공장을 지었으며, 창사 4년 만인 1970년에는 종업원 수가 무려 4,000명을 넘어섰다. 장용호는 1973년 고액 개인소득자 순위에서 무려 7위를 차지했다. 207-8)


유신체제의 억압에 대한 불만은 널리 퍼져 있었지만 1979년 상반기에는 그 불만이 저항으로 표출되지는 못했다. 사복들이 캠퍼스에 쫙 깔려 있고, 로마병정 같은 복장을 한 전경들이 여러 대의 닭장차에 타고 앉아 있던 대학가에서 1979년에는 1학기가 다 가도록 이렇다 할 학생 데모조차 일어나지 못했다. 겉으로 볼 때는 태평성대였다. 학생들도, 야당 정치인들도, 재야인사들도, 민주투사들도 깨지 못한 그 위장된 태평성대를 제일 먼저 깨고 나온 것은 “이 나라의 배고프고 예쁜 아가씨들”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야당 당사로 뛰어들면서 YH무역 사건은 한 개 회사의 노사문제가 아니라 정국의 뇌관이 되었다. 이 충격파를 흡수하기에 유신체제는 너무나 경직되어 있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간 지 만 24시간이 된 8월 10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고위대책회의는 신속한 강제해산을 결정했다. 진압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실신해 업혀가다 깨어나 농성장에 남은 스물둘 김경숙이었다. 212-3)


때로는 대사(큰 뱀), 때로는 왕사쿠라라 불렸던 유진산의 죽음은 싫든 좋든 한국의 야당사에서 한 세대가 저물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유신체제와의 정면대결을 회피했던 것은 꼭 유진산만이 아니었다. 유신헌법의 중선거구 제도에 따라 공화당과 사이좋게 동반 당선된 대다수의 신민당 의원들은 좀 더 ‘현실적’이고 좀 더 타협적이었다. 그러나 대의원들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야당다운 야당, 정권을 비판하고 견제하고 싸우는 야당을 바랐다. 1979년 5월 30일에 거행된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의원들은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다”고 외친 김영삼을 선택했다. “신민당은 유신체제에 참여하고 있으며 유신체제가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체제라고 보는 견해는 크게 잘못”이라며 중도통합론을 강조해온 이철승이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더라면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로 농성장소를 옮기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216-9)


유신의 종말이 채 20일도 안 남았던 1979년 10월 9일, 내무부 장관 구자춘은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이 “북괴의 폭력에 의한 적화통일혁명노선에 따라 대한민국을 전복,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라는 불법불온 단체의 전모를 파악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남민전이 북의 지령을 받지 않는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이라고 했지만, 속칭 반체제와는 성격이 완전히 판이하다고 강조했다. 남민전 사건은 일반 국민, 나아가 당시의 ‘반체제’ 재야인사나 청년학생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남조선’이라는 명칭, 북의 김일성에게 ‘피로써 충성을 맹세’하는 서신을 보냈다느니, ‘남조선해방전선기’를 걸어놓고 칼을 잡고 가입선서를 했다느니, 총기와 폭약을 준비했고 실제로 무장조직을 만들어 재벌 집을 털었다느니 하는 내용은 남민전이라는 이름의 조직이 기존의 민주화운동 선상에 출현했던 여러 조직이나 운동 행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220)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연쇄살인이 있고 채 1년이 안 된 1976년 2월 29일, 청계천 3가의 태성장이라는 중국음식점에서 이재문, 김병권, 신향식 등 3인은 남민전의 결성식을 가졌다. 이재문은 1차 인혁당 관련자이고, 김병권은 해방전략당, 신향식은 통혁당 관련자였다. 꼭 그렇게 모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1960년대를 대표하는 전위조직 관련자들 중에서 탄압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남민전이 결성되고 바로 다음 날인 3월 1일, 명동성당에서는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 후보 김대중, 원내 최다선 의원 정일형, 종교인 함석헌 등 저명인사 11인이 서명한 ‘3·1 민주구국선언문’이 3·1절 기념미사의 마지막 순서로 낭독되었다. 시위도 농성도 없이 달랑 선언문 한 장 성당에서 읽었을 뿐인데 김대중 등 11명이 구속되었다. 공개적인 영역, 합법적인 영역에서의 모든 활동은 철저히 차단된 것이다. 독재정권에 대한 싸움을 포기한다면 모를까, 투쟁을 한다면 비합법, 비공개, 지하활동밖에는 길이 없었다. 223-4)


경찰이 남민전이라는 거대한 지하조직을 적발한 것은 뜻하지 않게 유신정권의 심장부에서 권력투쟁을 격화시켰다. 중앙정보부는 방대한 조직망에도 불구하고 남민전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수집하지 못했다. 남민전과 같은 조직을 적발해내는 것이 중앙정보부의 임무였음에도 대어를 낚은 것은 경찰이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남민전 사건이 터지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무능을 질타했고, 박정희도 김재규에 대한 신임을 거두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남민전 사건은 김재규가 박정희의 신임을 잃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그 구성원들도 남의 달콤한 꾐에 속아 넘어가는 단순한 사람들이 아닌 교사, 학생, 지식인 등 이른바 ‘아는 사람’들이며 사회지도층도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썼다.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남민전에는 오른쪽으로는 이재오에서, 왼쪽으로는 김남주에 이르기까지 인재가 참 많았다. 유신은 그런 시대였다. 그 어둠의 시대는 남민전의 적발과 함께 저물어가고 있었다. 226)


1979년 8월의 YH 사건 이후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부마항쟁의 발발과 계엄령 선포 등으로 상황은 절정을 향해 숨 막히게 치달아가고 있었다. 파국은 너무나 갑자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와버렸다. 유신체제 수호의 총책임자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친형과도 같은 각별한 사이였던 박정희를 총으로 쏴 죽인 것이다.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 사건 수사 책임자 전두환은 10·26 사건을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고 어처구니없는 허욕으로 빚어낸 내란 목적의 살인 사건”이라고 규정했다.1 박정희의 추종자들에게 이 사건은 ‘패륜아’ 김재규가 공적으로는 ‘국부’요, 사적으로는 ‘은인’인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는 자들이 자기들끼리 총 쏘고 죽이며 엄벙덤벙 난리굿을 친 사건이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김재규의 어설픈 총질로 민중봉기에 의한 유신정권 타도의 기회를 날려버린 아쉬운 사건이었다. 242)


우리 역사에는 또 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을 거치면서 너무 얌전해진 탓인지 진보진영에는 대의를 위해 제 몸을 불태우고 제 피를 흘린 열사들은 일일이 이름을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넘치지만, 제 목숨을 바쳐 적의 피를 흘리게 한 의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른쪽 동네라고 사정이 다른 것은 아니다. 친일파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김재규는 5·16과 유신이라는 박정희의 내란에 동행했으면서도 결국 이 내란을 종식시켰다. 김재규의 행동을 내란 목적 살인으로 몰고 간 것은 전두환의 내란이었다. 김재규가 사형당한 것은 광주에서 민중항쟁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4일이었다. 252-3)


에필로그 – 도청에 남은 그들을 기억하자-광주, 그 장엄한 패배


광주 사람들은 광주의 소식이 전해진다면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대구에서도 시민들이 마땅히 들고일어날 것이라 기대했다. 전국의 시민들이 들고일어나야 살인마 전두환의 집권을 막을 수 있을 텐데 어느 곳에서도 그런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공수부대를 몰아냈을 때의 기쁨도 잠시,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감이 몰려왔다. 총을 내려놓자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날 모두가 총을 내려놓았다면 광주는 우리 가슴에 오늘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았을 것이다. 끝까지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승패가 문제가 아니었다. 왜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인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걍’ 내려놓을 수 없었다. 텅 빈 도청에 전두환과 그 졸개들이 씩 웃으며 들어온다면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뭐가 되고, 지금까지 싸운 건 또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산 사람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내려놓자고 했고, 죽은 이들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놓을 수 없었다.” 257)


도청의 진압이 있고 꼭 1년 뒤인 1981년 5월 27일 서울대에서 벌어진 광주학살진상규명 시위가 진압되어 갈 때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고 도서관 5층에서 공부하던 김태훈이라는 학생이 ‘전두환을 처단하라’라는 구호를 세 번 외치고 몸을 던졌다. 그 꼴을 안 보았으면 모를까, 본 사람들은 또 광주의 자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광주의 죽음과 대면하면서 1970년대의 낭만적인 민주화운동은 치열해졌고, 엘리트 중심에서 보다 민중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83년 9월 김근태를 의장으로 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었을 때 민청련의 상징은 두꺼비였다. 옴두꺼비는 뱀의 길을 가로막아 스스로 잡아먹히지만, 뱀의 몸 안에 독을 뿜어 죽게 하고 그 몸 안에 알을 낳아 수백 마리의 새끼 두꺼비들이 뱀의 몸을 파먹으며 자란다는 것이다. 수많은 광주의 자식들은 ‘1980년 5월 26일 밤 내가 광주에 있었더라면 나는 총을 들었을까’라는 질문을 내려놓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2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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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5.18 - 정치군인들은 어떻게 움직였나
노영기 지음 / 푸른역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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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5·18진상규명투쟁의 역사 


"5·18의 가장 큰 특징은 '피해자나 참여자는 많으나 가해자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누가 군인들에게 총과 칼, 곤봉 등을 쥐어 주고 폭행과 발포를 사주했는지 아직도 미궁이다.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은 아니다. 군, 그중에서도 보안사령부의 자료, 행정기관 자료, 민간 자료 등 방증 자료들은 넘칠 정도로 많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2019년 8월 5일, 16세의 고등학생으로 5·18항쟁에 참여해 '막내 시민군'으로 불렸던 박정철이 동지들의 곁으로 떠나갔다. 5·18의 진상규명과 연구가 '진행형'이어야 하는 이유는 넘치도록 충분하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후과는 역사 왜곡이다.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억지는 과거의 왜곡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왜곡하며, 더 나아가 과거와 현재가 쌓아나갈 미래까지 왜곡한다.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이 필요한 이유이며, 40년이 지난 오늘 다시 5·18에 주목하는 이유이다."(32-4)


1_유신의 그림자


"박정희 정권은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제1호는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헌법 개정이나 폐지를 제안하거나 청원하는 일체 행의를 금지하며, 이를 위반할 때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와 함께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중앙정보부가 수사할 수 있는 긴급조치 2호를 동시에 선포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974년 1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이끌던 장준하와 백기완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이로부터 시작된 긴급조치는 1975년 5월 19일 결정판인 긴급조치 9호로 이어졌으며, 1979년 12월 8일 해제될 때까지 무려 2,159일간의 이른바 '긴급조치(긴조)의 시대'를 만들었다. 긴급조치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곤 했다."(42)


"대통령 박정희가 남긴 유산 중 하나는 군대를 자주 정치에 동원해 민간사회를 직접 통제한 것이었다. 1963년 12월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박정희 정권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시위 진압에 군대를 동원하곤 했다. 1964년 6·3항쟁,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와 1979년 10월 부마항쟁 등의 현장에는 늘 군대가 출동했다. 계엄령 외에 위수령도 적극 활용했다. 1965년 4월 19일과 8월 26일, 1971년 10월 15일, 그리고 부마항쟁 때의 마산 지역에는 위수령을 선포했다. 특정 지역에 한정시켜 발동한 위수령은 그 모법母法조차 불분명한 대통령 명령이었다." "공격형 특수부대인 공수부대를 시위 진압에 투입한 것도 신군부가 처음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공수부대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시위 진압이었고, 평시에도 공수부대의 훈련에는 시위 진압훈련인 '폭동진압훈련'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 세력이 병영을 벗어나는 그 순간부터 공수부대는 정치에 동원됐다."(45-6)


"1980년 2월 18일 육군본부에서는 1·2·3군사령관과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후방의 충정부대에 특별지시를 내린 것이다. 1/4분기의 폭동진압교육훈련(충정훈련)을 2월 중 조기 실시해서 완료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공수부대도 정규 교육훈련을 거의 포기한 채 오로지 충정훈련에 매진했다. 주간에는 CS탄, 500-MD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됐고, 매일 밤 출동 준비 군장을 꾸렸다가 해체하는 혹독한 훈련이 기계처럼 반복됐다. 의아한 점은 당시 국방장관이던 주영복은 폭동 진압훈련을 실시하라는 육군본부의 지시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육군본부의 특별지시에 따라 강원도 화천에 주둔한 11공수여단에서도 충정훈련이 강화했다. 공수부대는 아니지만 후방의 충정부대로 배치된 20사단도 충정훈련을 실시했다." "이렇듯 1980년 2월부터 군은 충정훈련을 강화하고 있었다. 충정훈련은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66-7)


"〈부마지역 학생 소요사태 교훈〉은 보안사령부에서 작성한 일종의 작전평가서이다. 1976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이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10월 18일 00시 01분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해병 7연대를 부산대에, 3공수여단을 동아대에 각각 출동시켰다. 이날 부산의 남포동 등 7곳의 시위 발생 지역에 3공수여단을 투입, 〈철저하고 간담이 서늘하게 진압작전을 실시〉하여 〈학생이나 깡패들의 데모 의지〉를 〈말살〉시켰다. 다음 날에는 1공수여단과 5공수여단을 부산 지역에 추가 배치하고, 특전사령부 지휘부도 부산으로 이동시켰다. 10월 20일에는 1공수여단 2대대와 5공수여단을 마산 지역에 투입했다. 보고서에는 시위계층을 〈학생이나 깡패들〉로 명시하고 있다. 이 점은 5·18항쟁을 왜곡하는 논리 및 단어와 유사하다. 보안사령부는 5·18항쟁을 주도한 계층을 '학생, 깡패, 불순분자, 야당 정치인' 등으로 언급하고 있다. 항쟁 주체를 특정 계층으로 축소시켜 계엄군의 진압작전을 정당화하는 논리이다."(69-70)


2_5·17쿠데타-비상계엄 전국 확대


"무력으로 국회 개원을 막아 헌정질서를 유린한 신군부는 5월 31일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발족시켰다. 신군부는 국보위를 설치한 뒤 개헌뿐 아니라 언론 통폐합 및 언론인 해직, 공무원 숙청, 10·27법난, 삼청교육대 설치 및 운영 등 무소불위의 불법적인 일들을 저지르며 제5공화국의 출범을 기획했다." "한편 5월 15일 서울역에서 회군한 전국대학 총학생회장단은 가두시위를 일시 중단하고 정부 발표를 기다리기로 결의했다. 국회 개원과 함께 학생들도 군 개입의 명분을 제공하지 않으려고 시위를 일시 중단한 것인데, 이는 신군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었다." "당시는 야권과 국민들이 힘을 모아 유신체제를 청산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였다.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민주공화국에 어울릴 만한 헌법을 채택하여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국민들의 바람이 멀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군부는 중앙정보부와 육군본부 보고서의 마지막 단계인 군 투입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85-7)


"신군부는 5월 초순경부터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상정했다. 국내에서 가두시위가 발생하여 사회가 혼란해졌으므로, 이에 대처하여 국난을 극복하려고 군이 나선다는 게 군 동원의 명분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신군부가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정당한 조치로 만들기 위해 꾸며낸 거짓이었다." "5·17비상계엄 확대 조치 이후 보안사령부에서 작성한 〈5·17전국 비상계엄의 배경〉에서는 〈학원 및 노조의 소요사태로 극도의 사회혼란, 적색분자 개입의 본격화, 국민경제의 도탄〉 등을 틈타 북한의 비정규전 부대가 침투하면 국가가 망하게 될 것이므로 〈국가를 보위하고 3,7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며, 안정 속에 성장과 발전을 희구하고 있는 대다수 국민의 여망에 부응코자 5·17조치가 필요하다〉고 결론내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신군부가 〈북한의 비정규전 부대의 침투〉를 꺼내들고 있다는 점이다. 5·18항쟁을 왜곡하는 논거가 이미 1980년 5월부터 등장하고 있었다."(88-9)


"최규하 대통령의 특별성명은 '북괴 남침설'을 재확인하는 성명이었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은 5월 17일 자로 '정치 활동의 금지, 정치 활동 이외의 옥내외 집회의 신고 및 언론의 사전 검열, 대학의 휴교, 태업 및 파업의 금지,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 금지, 선동적 발언 질서문란 행위 금지,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 등을 규정한 포고령 10호를 공포했다. 포고령 10호에 따라 헌법에 보장된, 심지어 유신헌법에서조차 보장된 국민들의 기본권은 무시되었고 계엄포고 위반을 들어 무차별적으로 국민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한국사회는 다시 1979년 10·26 이전의 유신독재 시절 긴급조치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계엄령이 작동하는 시대로 되돌아갔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령 해제는 국회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탱크와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는 국회 개원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1980년 5월에도 끝내 국회의 문은 열리지 못했다."(111-2)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군과 대통령의 주장은 '대국민 사기극'에 다름 아니었다. 1979년 12월 북한은 1980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참가할 것을 제안했다. 북한의 제안에 대해 정부는 1980년 1월 24일 남북조절위원회를 통해 남북 총리회담을 개최하자고 역제안했다. 그리하여 1980년 2월 6일 판문점에서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 접촉'을 시작으로 이후 총 10차례의 실무회담이 열렸다. 정부는 5월 초순부터 계속해서 국민들에게 '북한 남침설'을 유포시켰다. 그러면서도 2주에 한 번씩 북한과 회담하고 있었다. 심지어 5월 21일 전남도청 앞을 비롯해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이 집단발포하고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다음 날인 5월 22일에도 남북회담 실무진이 판문각에서 접촉했다. 국민들에게는 북한의 남침 위협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면서 그 위협의 배후이자 당사자인 북한과 실무 접촉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112-3)


"전국총학생회장단 회의에서 가두시위의 중단을 결정하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다른 지역에서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간 반면, 광주에서는 5월 16일, 시내 9개 대학 학생과 시민 등 3만여 명이 오후 3시부터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 시국성토대회를 열었다. 시국성토대회에서는 각 대학 학생대표들이 함께 작성한 〈제2시국선언문〉(5월 15일 자)이 낭독됐다." "경찰은 주변의 질서유지에만 힘쓰고 학생들도 담배꽁초와 휴지를 줍는 등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가두시위와 집회를 마쳤다. 횃불시위를 마친 학생운동 지도부는 사태를 관망한 뒤 5월 19일 다시 성토대회를 열자고 결의하고 자진 해산했다. 5월 18일까지 시국을 관망하자는 전국총학생회단의 결의안에 따른 결의였다. 경찰이 시위를 지켜보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위 대열을 보호해주는 가운데 5월 16일의 집회 및 횃불시위는 아무런 불상사 없이 끝났다. 그러나 이날의 평화로웠던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120-3)


3_항쟁의 시작


"5·17조치가 공표됨과 동시에 5월 18일 새벽 전국의 201개 보안시설에 총 2만 4,740명(2,009/22,731)의 계엄군이 배치됐다. 이날 전국의 주요 도시에 배치된 계엄군 병력 중에서 2만 2,342명(1,865/20,477)이 전국 92개 대학에 들어간 반면, 국가의 주요 보안시설 109개에는 불과 2,398명(144/2,254)이 배치됐다. 정부와 신군부의 주장처럼 북한의 남침 위협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국가 보안시설의 경계를 강화하고 계엄군 병력도 그곳에 집중 배치되어야 하는 게 상식에 맞다. 그런데 이날 전국 국가 보안시설에 배치된 계엄군의 비율은 채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광주에서 학생 시위가 발생하고 시민항쟁으로 전환되자 서울에서 광주로 계엄군 병력이 추가 파견됐다. 5월 19일부터는 광주 시내에 2대의 장갑차가 돌아다니고 헬기가 떠다녔다. 5월 27일 최종 진압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이 실시될 때는 광주 시내에 18대의 탱크까지 진입했다."(126-8)


"계엄사령부 법무처는 5월 18일 법무기관에 법무장교를 감독관으로 파견하고, 5월 20일부터는 대법원과 법무부에 각 1명씩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또 계엄사령부는 각 지역의 계엄분소장들에게 5월 20일부터 6월 19일까지 한 달 동안 〈사회안정과 질서유지를 위해〉 군경합동 단속을 실시하여 〈사회의 암적 존재인 폭력깡패를 발본색원〉하라고 지시했다. 동시에 깡패 단속은 지역 책임제로 하되 〈암적 깡패는 군재에 회부〉하고 단속 결과를 매일 보고토록 지시했다." "주목할 것은 '지역 책임제'라는 형식을 빌려 연행자의 수를 지역별로 할당한 점이다. 단속 대상인 〈암적 깡패〉의 인권은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 외 대상자들의 인권도 무시될 수밖에 없다. 명확한 기준이 없을 경우 임의의 원칙, 다시 말하면 군이나 행정기관의 자의적 판단 아래 국민들의 인권이 말살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지역 할당제는 삼청교육대의 피해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됐다."(133)


"7공수여단 31대대가 전북대를 점거하고 학생들을 체포하던 도중 전북대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북대에 진주하던 공수부대를 피해 도망하던 전북대 학생 이세종(농학과 2학년)이 사망했는데, 7공수여단은 그 사인을 '좌상박부 골절 및 우측 두개골 함몰 골절'로 인한 즉사로 상급 부대(전교사: 전남·북계엄분소)에 보고했다. 그리고 〈변사자는 이 포위망을 탈출을 목적으로 지상 13미터 동 회관(학생회관) 옥상 북편 전등주에 매달려 은신하려다 힘이 빠져 변사한 것〉이며, 〈첩보 즉시 전주지검 안상수 검사가 현장에 입장, 지휘하여 진상규명 후 사체를 전북의대 부속병원 시체실에 안치 중〉이라고 보고했다." "안상수 검사는 2004년 10월 11일 열린 17대 국회의 전북도교육청 국정감사 자리에서 자신이 보기에는 〈총 개머리판에 맞아서 사망〉했으나 〈수사권이 비상계엄하라서 군부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끝까지 밝히지 못해 〈분통을 터뜨린 일이 있었다〉고 발언했다."(142-3)


4_폭력과 야만의 시간


"학생들이 시내에서 시위하자 5월 18일 오전 11시 40분경부터 전남도경 안병하 국장의 지휘 아래 경찰이 진압에 나섰다. 경찰이 투입되기 전인 오전 11시에 전남도경국장은 〈분산되는 자는 너무 추격하지 말 것, 부상자가 발생치 않도록 할 것, 기타 학생은 연행할 것〉을 지시하고, 11시 55분에는 〈연행 과정에서 학생의 피해가 없도록 유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있었던 학생들의 가두시위, 특히 5월 16일의 횃불시위 등에서 시민과 학생들을 보호하던 경찰에 비해 이날 진압의 강도는 강했다. 군이 모든 걸 장악하고 있는 비상계엄 아래에서 평화를 지향한 그의 소신은 실현되기 힘든 '이상'에 가까웠다. 5월 27일 이후 안병하 전남도경 국장은 '직무유기' 혐의로 서울의 합동수사본부에 소환되어 수사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합수부에서 14일간 고문을 받은 뒤 '자진 사표' 형식으로 석방되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88년 10월에 사망했다."(149-52)


"공수부대가 광주 시내에 투입되어 잔혹하게 시위를 진압할 결과 5·18항쟁기 최초 희생자가 발생했다. 최초 희생자는 5월 19일 새벽 3시경 국군통합병원에서 사망한 김경철이다. 보안사령부의 〈검시결과 보고〉에 농아자로 기술된 것처럼, 그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이었다. 그는 5월 18일 오후 친척을 배웅하고 귀가하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혀 외마디 소리 한 번 제대로 못 지른 채 온몸을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검시결과 보고〉에서 그의 사인은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에 의한 뇌진탕'이었으며, 예리한 물체로 인한 타박사로 기록됐다. 〈검시조서〉에 서술됐듯이 그는 머리에서부터 몸통 아래에 이르기까지 온몸을 구타당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그는 병원으로 후송됐고, 결국 머리 뒷부분을 맞아 입은 뇌출혈로 사망에 이르렀다." "김안부도 공수부대에 무자비하게 구타당한 뒤 사망했다.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한 뒤 광주공원 부근에 처참하게 남겨진 그의 시신을 가족들이 수습했다."(168-9)


"학생들이 주도하며 수백 명 단위로 시위하던 5월 18일과 달리 5월 19일부터는 시민들이 시위에 본격 참여함으로써 그 숫자가 전날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전날의 참상을 목격한 시민들이 최소한의 자구책을 마련하고 서서히 항쟁의 주역으로 시위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진압하는 양상도 크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의 수가 전날에 비해 크게 늘어나고, 시위 진압에 사용된 장비도 달라졌다. 5월 18일에는 오후 4시부터 7공수여단의 2개 대대가 투입되어 진압했는데, 5월 19일부터는 서울에서 급파된 11공수여단의 3개 대대가 오전부터 광주 시내에 추가 투입됐다. 이날 충정작전 수행을 위해 차량 37대(장갑차 2대 포함)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이 기갑학교장에게 내려졌다. 광주 시내 상공에는 5월 19일 오전부터 헬기가 출현했고, 광주시 동구청에는 10시 57분경 〈상공에 헬리콥터 비행 순찰 중〉이라고 보고됐다."(179-80)


"5월 19일 시위 진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수부대원들이 금남로 한복판에서 믿을 수 없이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더욱 큰 문제는 5월 19일의 진압이 무자비한 폭력에 더하여 금남로 한복판에서 연행한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는 야만의 행동을 자행했다는 사실이다." "광주 시내에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는 대한민국의 국민인 광주 시민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5월 19일에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연행한 시민들의 겉옷을 벗겨 속옷만 입힌 채 기합(원산폭격)을 주었다. 동구청 민원실과 같은 관공서까지 쫓아 들어와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한 뒤 연행해갔다. 관공서만이 아니었다. 민가, 병원, 학원, 숙박시설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뒤따라와 난폭한 행동을 저질렀다.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시위 진압 광경이었다. 후방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위 진압'이라기보다는 흡사 '전쟁터에서 적국의 한 도시를 점령한 승리자들이 벌이는 비이성적 폭력'에 가까웠다."(181, 184)


"5월 19일의 전교사 계엄회의와 2군사령부의 지시에 보이듯이 군은 시민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하는 5월 19일부터 이를 '도시게릴라식 소요 및 난동'으로 규정하며 강력하게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즉 군은 시민들을 '도시게릴라'로 규정하여 강력한 진압을 예고하고 있었다. 또한 〈치명상을 입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한 타격〉을 주문하고 있다. 실제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도 더욱 강력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공수부대원들의 폭력 강도가 상부의 명령에 의해 더욱 상승한 셈이었다. 5월 19일 중앙기동예비대이던 3공수여단의 추가 파병이 결정되고 이동이 시작됐다." "아직 전교사에서 추가 병력 파병을 요청하지 않은 시각인데도 3공수여단의 파병이 결정된 것이다. 이는 광주의 상황이나 정식 명령계통과는 상관없이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의 활동이 지역의 계엄분소와 별개로 독자적으로 전개된다는 의미이다."(209-11)


"군 최고 지휘부는 광주의 계엄군에게 광주 시내에서 발생하는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라고 계속해서 명령했다. 군 최고 지휘부의 명령은 공수부대의 지휘관들과 현장의 공수부대원들에게 하달되면서 진압의 폭력과 야만성을 증폭시켰다. 한 공수부대원의 수기는 당시 11공수여단이 점거한 조선대에서 벌어진 일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최고 지휘부의 명령이 현장에서는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 집합된 병력에게 다시 구타를 강력하게 하지 않는다고 더 강하게 무자비하게 구타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 이병을 불러내더니 이 병사는 구타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엎드려" 하더니 자신이 휴대한 진압봉으로 엉덩이를 열 대 때리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얼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군요. 머나먼 광주에서까지 자기 부하를 구타하는 중대장이 죽도록 미웠습니다. 그리고 시위대에 대한 증오심은 더 강하게 생각만 나는 것입니다.〉"(224)


5_항쟁과 발포 사이


"'시민들의 시위와 공수부대의 진압 및 해산'의 구도를 뒤집은 것은 5월 20일 오후부터 시작된 기사들의 차량 시위였다. 공수부대의 폭력과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분노하던 기사들이 5월 20일 오후 무등경기장 앞으로 차를 몰았다." "맨주먹으로 공수부대에 맞서던 시민들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금남로로 진입하는 차량 대열을 보고 감격해하며 합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나는 시위 군중들이 공세가 거세지자 공수부대를 비롯한 군경은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5월 20일 밤 광주시청을 지키던 3공수여단 병력이 시민들에게 포위당하며 고립됐다. 이에 전남대에 있던 3공수여단 본부중대 병력들이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광주시청으로 지원을 나갔다. 그런데 3공수여단 작전참모와 작전과 선임하사의 지휘 아래 지원을 나가던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집단발포했다. 5·18항쟁 기간 처음으로 군이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시작한 것이다."(246-9)


"광주역 앞에서 발생한 3공수여단 집단발포는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먼저 3공수여단이 집단발포에 이르는 과정과 시간이다. 지금까지 3공수여단의 집단발포는 시민들이 차량을 이용, 공수부대를 공격하여 3공수여단의 대원들이 사망하거나 다치게 되자 발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보안사령부 자료에 의하면 21시 50분에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가 8톤 트럭에 치어 사망한 뒤 각 대대에 M-16 소총 실탄을 나눠주고 장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하지만 3공수여단 본부중대의 지원 병력이 전남대에서 광주역으로 출발한 때는 이보다 앞선 시각이다. 따라서 시민들이 자신들을 향해 발포하는 공수부대를 차량으로 공격한 것이라 추정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분노한 시민들이 격렬하게 대항한 까닭에, 시민과 공수부대원들 모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3공수여단 철수과정에서 희생된 시민들의 시신은 5·18항쟁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53-6)


"광주에서 시민에게 처음으로 무기가 반출된 때는 5월 21일 새벽이다. 시민들은 광주세무서를 불태우며 직장 무기고에 보관 중이던 카빈 소총 50정 중 17정을 반출했다. 이날의 무기 반출은 5·18항쟁에서 시민이 무장하고 군에 대항한 근거로 제시됐다. 그러나 당시 광주세무서에서 반출된 총은 실탄이 없는 빈 총이었으며, 군에서도 이 점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군에서는 〈광주세무서에서 CAR 17정 분실(20일 야간), 실탄 1,800발 사전 회수 통합 보관〉하고 있었다. 세무서뿐만이 아니었다. 당수 광주 시내의 실탄과 노리쇠 등은 전교사와 31사단이 이미 군부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빈 총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군 자료의 용어와 서술 기조가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시위하는 시민들을 '시민'과 '학생' 또는 '군중'으로 표현했지만 방송국과 세무서 방화가 있은 뒤부터는 '폭도' 또는 '난동자'라 칭하며 시민 저항의 성격을 왜곡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폭도가 등장하는 것은 5월 20일 21시 5분의 보고이다."(258-9)


"5월 21일 새벽 3공수여단이 전남대로 철수한 뒤 시민들은 광주역 부근에서 처참하게 내팽개쳐진 두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희생자들은 허봉(19)과 김재화(34)였다. 허봉의 사인은 '우측 두정골 열상, 좌측 좌두부 좌상'이었다. 사망 경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는 광주역 광장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한 뒤 피 흘리며 죽어갔다. 김재화는 광주역 광장에서 총상을 입고 노광철의원으로 옮겨졌으나 5월 21일 새벽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34세로, 사인은 '좌측 흉부 우측 흉부 관통상(M16)'이었다. 이들 사망자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광주역 부군에서 총상이나 타박상을 입었다." "5월 21일 새벽, 광주역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신은 그때까지 광주 시민들의 가슴에 쌓인 슬픔과 분노에 불을 지폈다. 광주 시민들은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시민들은 태극기를 덮은 두 구의 시신을 손수레에 싣고 전남도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공수부대를 광주 시내로부터 쫓아내기 위해서였다."(260-2)


"각종 자료와 증언에 기초하여 5월 21일 오후 1시 전후의 상황을 다시 구성해보겠다. 5월 21일 새벽 5시경 광주역에서 참혹한 두 구의 시신을 발견한 시민들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오전 10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전남도청 앞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전남도지사와 시민 대표들의 협상에서 시민들은 '정오까지 공수부대의 철수'를 비롯한 정부의 만행 인정과 사과 및 보상 등을 요구했다. 공수부대를 비롯한 계엄군은 점차 전남도청 쪽으로 밀려나며 시민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후 1시 무렵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자 시민들은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시민들이 금남로에 있던 계엄군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져 불이 붙자 계엄군 측 장갑차 한 대가 뒤로 물러났다. 이 무렵 시민들이 당일 오전에 아세아자동차로부터 꺼내온 장갑차가 전남도청 앞 분수대의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로 인해 계엄군의 저지선이 붕괴되고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도청 분수대 뒤쪽과 전남도청 및 그 주변으로 피신했다."(284-5)


"전남도청 앞을 돌아 빠져나갔다가 다시 금남로에 나타난 시민 측 장갑차와 뒤따라온 버스가 또다시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뒤이어 11공수여단 63대대 8지역대 권용운 일병이 장갑차에 깔려 희생됐다. 시민이 몰던 장갑차가 잠시 멈춘 다음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나갈 무렵 공수부대원들이 장갑차를 향해 일제히 집단발포를 시작하고, 장갑차를 뒤따르던 버스를 향해서도 일제 사격했다. 그즈음 전남도청에서 〈애국가〉가 방송되고 분수대 부근의 공수부대원들이 본격적으로 집단발포했다. 이후 대열을 정비한 공수부대는 수협 등 주변 건물의 옥상에 저격병들을 배치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전남도청에서 100~300미터 떨어진 곳까지 저지선을 설정하고 그 안으로 들어오는 시민들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금남로와 충장로 등지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쓰러졌다. 금남로와 노동청 쪽 방향에 배치된 계엄군 장갑차도 금남로 쪽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실시했다."(285)


"계엄군의 집단발포에 놀라고 분노한 시민들은 곧바로 무기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무장했다. 국가폭력에 대한 시민들이 무장저항, 부당한 공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불복종이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총을 든 시민들은 최소한의 자구책, 생존을 위해 총을 들었지만 언제라도 공권력의 잘못이 고쳐지고 평화가 찾아온다면 총을 내려놓겠다는 입장이었다." "시민들은 광주 이외의 지역에서 무기를 구했다. 주로 경찰서와 지서와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 등지에서 무기들을 꺼냈고, 화순 무기고(화순탄광)와 같이 폭발물이 있는 곳에서 무기와 폭발물을 구해 무장했다. 당시 각 지역의 경찰서 및 지서에는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대부분 광주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무기를 꺼내 가는 시민들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무장한 시민들이 광주 시내에 나타난 시각은 대략 5월 21일 오후 2시 30분 전후이다. 자료들에는 이날 오후 3시 무렵부터 총격전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96-300)


"계엄군이 광주 시내에서 퇴각한 것은 작전상 후퇴일 뿐 진압작전의 근본적인 수정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계엄사령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하며 토벌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광주는 '외부의 불온세력'과 연계된 '폭도'들이 점거한 '불량도시'로 규정됐다. 계엄군의 작전은 광주와 외부를 단절시키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군에 자위권이 발동되고, 많은 양의 실탄이 병사들에게 주어졌다. 게다가 금남로를 비롯한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이 퇴각하여 외곽을 봉쇄할 병력들이 충분해졌다." "5월 21일 이후 실시된 계엄군의 광주 봉쇄는 새로운 '경계'를 통한 '구분 짓기'를 의미한다. 계엄군이 설치한 바리케이드는 단순히 시민들의 출입을 막는 데 그치지 않았다. 시민들의 출입을 군이 가로막는 것도 문제이지만, '폭도'와 '양민'을 가르는 경계가 만들어진 게 더 큰 문제였다. 이 바리케이드는 이후 외곽 봉쇄 기간 내내 '학살의 경계선'으로 기능했다."(310-2)


6_일어서는 광주


"시민군은 광주 시민들의 두터운 지지와 후원 속에 탄생한 조직이었다. 나이와 직업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손에 총을 들 수 있는 거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박남선은 전남도청 본관 1층의 전남도청 서무과에 시민(군)상황실을 차리고 상황실장을 맡아 시민군을 조직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항쟁 초기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시민군의 주력도 대학생에서 청년들로 바뀌어갔다. 총을 잡은 시점에는 차이가 있지만, 시민군은 대부분 5월 21일 오후 전남도청 앞에서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는 장면을 보거나 듣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총을 들었다." "시민군 중 순찰대들은 일상적인 치안 유지뿐 아니라 사고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차량 통제까지 했다. 5월 22일부터 차량등록증을 발급하고 5인 1조씩 순찰대를 구성했다. 5·18항쟁을 왜곡하려는 극우세력들은 이들을 '광수 몇 호'라 부르며 북한의 특수부대원들로 매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금남로나 충장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들이었다."(349-51)


"지금 와서 보면 민군 협상은 논의는 가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떤 결정도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한 협상이었다. 시민 대표들은 시민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실질적인 대표단이었던 반면, 전교사의 군인들은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전남·북 계엄분소의 지휘부, 즉 계엄사령부의 하급 부대 실무자들일 뿐이었다. 군이 시민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하지도 않았고 다른 의미 있는 상황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수습위원들이 무기 회수에 나서자 시민(군)들은 강력 반발했다. 시민들은 무조건 무장해제(반납)만을 강요하는 군의 압박에 반발했다." "군이 시민대표단과의 협상을 계속하며 시간을 끌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계엄사령관이 한미 간 협의, 지역감정, 민간인 인질 등을 이유로 5월 24일까지 진압작전(상무충정작전)을 연기토록 지사하고, 국방부장관은 5월 25일 이후로 연기하도록 했다. 결국 전교사 사령관의 지휘 아래 5월 27일 01시에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됐다."(357-9)


"시민 내부의 강온파 간 대립과 갈등은 세력 분화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5월 25일 밤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구성됐다. 이날 새로 구성된 '민주시민투쟁위원회' 조직의 총 12명의 지도부 중 7명이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경력이 있었다. 정상용·이양현·윤강옥 등은 민청학련사건 등 시국사건과 관련하여 구속 또는 제적당한 뒤 학외에서 활동했다. 윤상원과 김영철은 들불야학에서 강학으로 함께 활동하며 노동운동과 주민운동을 전개해왔다. 정해직은 교육운동을, 박효선은 극단 광대를 만들어 문화운동을 전개해왔다. 5월 26일 밤 항쟁 지도부는 계엄군이 재진입할 것을 예상하며 시민군을 재편하여 광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하여 최후 항전에 대비했다."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은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서 두렵거나 무서운 사람, 처자식이 있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시오〉라고 권유했다. 또 항쟁 지도부는 계엄군이 본격 진입하기에 앞서 여성과 어린 중고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364-6)


"5월 23일 국방부 출입기자단 21명이 국방부 대변인의 안내를 받으며 광주를 방문 취재했다. 이들이 촬영한 장면은 광주국군통합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들(현역, 민간인)의 치료 장면, 병원 앞에서 군인과 폭도가 대치하고 있는 광경, 광주 시가지 항공 촬영, 불에 탄 MBC 건물, 도청 주변 폭도 동정, 시가지 차량 및 시민 움직임, 차량 소실 현장 등이었다. 5·18항쟁이 폭도들의 행위라는 인식을 심으려는 목적에서 의도된 사진 촬영이다. 국방부는 이들에게 헬기를 비롯한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국방부 출입기자단과의 기자회견에는 5·18항쟁을 인식하는 군이 시각이 담겨 있다. 군은 기자들에게 (데모대 진압과정에서) 선무와 발포 명령이 없었기에 사태가 악화됐고, 불순집단이 섞여 있으며, 시민들의 저항을 〈반정부 폭도〉들의 행위로 낙인찍고 있다. 오늘날 5·18항쟁 왜곡의 주요 근거가 이미 1980년 5월 22일 국방부 출입기자단과의 회견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375-7)


"5·18항쟁의 왜곡과 관련해 또 언급되어야 할 부분은 보안사령부에서 고급 장교들을 광주에 파견한 점이다. 5월 19일 오전 9시경 보안사령부 참모회의에서 광주 상황에 대해 토의한 뒤 당시 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인 최예섭 준장을 파견했다. 보안사령부는 광주일고·육사 출신의 홍성률 대령도 광주로 파견했다. 홍성률 대령은 1979년 '10·26'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9사단장 노태우에게 '대통령 유고' 소식을 알리는 개인 서신을 직접 전달한 인물이다." "상무충정작전의 실행을 앞두고 보안사령부는 군의 진입에 앞서 시민군의 무선을 감청하려는 목적에서 515보안부대를 5월 26일 오후 7시 광주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이 과정에서 송정리비행장과 전교사에 대기 중이던 계엄군들에게 총 6,300만원의 돈과 중식용 소 7마리가 내려졌다. 이 중 보안사령관이 금일봉을 내린 게 흥미롭다. 보안사령관이 적지 않은 금일봉을 내린 것은 당시 누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다."(398-400)


"공수부대가 행동을 개시한 시각은 5월 27일 01경부터였으며, 03시 30분부터 미리 정해진 광주 시내의 주요 지점으로 은밀히 침투했다. 상무충정작전이 본격 시작된 것이었다." "3공수여단이 새벽 4시 51분에 무장 헬기 지원을 요청했고, 전교사는 5시 35분에 헬기를 지원했다. 5시 28분에 군은 전남대병원을 점거했다. 특공 임무를 마친 공수부대가 보병부대에 점거시설을 인계하고 광주 시가지에서 철수를 완료한 시각은 3공수여단이 7시 5분, 7공수여단이 7시 15분, 11공수여단이 7시 25분이다. 뒤이어 보병부대가 광주 시내에 주둔하는 것으로 5월 27일 새벽에 전개된 상무충정작전은 일단락됐다." "전남도청을 비롯한 광주 시내 곳곳에는 시민들이 흘린 핏자국이 남겨지고 탄흔이 새겨졌다. 그렇게 5월 27일 아침이 찾아왔다.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전남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는 탱크가 자리했다. 국민들을 학살한 자들은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을 들락거렸다."(408, 412-5)


"광주에 배치된 각 부대의 총 병력은 2만 365명(4,727/1만 5,590)이었다. 원래 전남·북 계엄분소인 전교사의 병력에 특전사령부 병력(3·7·11공수여단)과 20사단 병력이 더해진 통계이다. 총 47개 대대라는 엄청난 규모의 병력에 총 30대의 헬기와 항공기(O-1), 전차, 장갑차, 각종 차량 등의 장비까지 동원했으니 정부와 군, 신군부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전쟁을 벌였던 셈이다. 5·18항쟁 기간 동안 총 2만 365명이 군인들은 총 51만 2,626발의 실탄을 사용했다. 발포하지 않은 계엄군을 감안하면 1인당 50여 발 이상 발포했고, 공수부대는 100여 발 이상의 실탄을 사용한 셈이다. 이는 5월 21일 이후 계엄군이 집단발포하고 무차별적으로 사격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상무충정작전 직후 전남대병원과 조선대병원 소속 의사들과 보건소 의사들이 민간인 희생자들의 시신을 검안했다. 이후 검찰은 민간인 희생자 수를 총 142명으로 발표했다."(418-20)


"5·18을 무력진압하고 며칠 뒤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를 발족시켰다. 김대중을 비롯한 36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도 8월 13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8월 6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했다. 중장으로 승진한 지 불과 5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8월 16일 오전 9시 15분부터 9시 40분까지 합동회의를 가진 최규하 대통령은 오전 10시에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8월 18일 오전 10시 8분에 청와대를 나와 사저로 출발했다.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뒤이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펼쳐졌다. 이날부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안보보고회를 비롯해 21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려 전두환 장군을 국가원수로 추대했다.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그를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는데, 총 투표자 2,525명 중 1명이 기권했다 그리하여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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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 2025-12-08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