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한국인의 탄생 - 한국사를 넘어선 한국인의 역사, 개정증보판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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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한국인이라는 미스터리


한국인은 불운한 운명의 자식이자 혁명의 후손이다. 누가 이 한국인들, 달리 말해 남한인과 북한인, 재일교포, 조선족(재중동포), 카레이스키(고려인), 재미교포에 이르는 이들 모두를 만들었는가? 첫 번째로 지목할 우리 한국인의 공통 조상은 신화적 영역에 있는 단군 할아버지다. 역사적인, 실체를 가진 조상은 두 분이 더 계신다. 먼저 고려 임금 현종이다. 현종은 거란과의 전면전쟁을 통해 한반도 주민을 처음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틀 안에 그러모았다. 다음은 유학자이자 신국가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한국인의 구체적인 특질을 창조해냈다. 역사는 우연과 필연이 나선처럼 교차를 거듭하며 이어진 줄기다. 수많은 이들과 사건, 투쟁의 성취와 좌절이 거듭된 결과다. 그러므로 단 세 명을 중심으로 한국과 한국인을 말하려는 시도는 심한 압축이며 비약이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한국사의 모든 것’이 아니라 ‘한국인에 대한 이해’다. 이해에는 지름길이 있으며, 굳이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다. 8)


1부 한반도에 사로잡히다


1장 창세기


한반도의 자연은 거칠고 척박하며 위험하고, 많은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유럽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순수한 폭력과 완전한 정복은 한반도에서 불가능했다. 일본과도 다르다. 일본 문명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야마토(大和)인이 원주민인 에조(蝦夷)인을 ‘인종 청소’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일본 열도에서는 외부세력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원주민과 결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반대로 한반도 문명에서 외부와 토착세력의 타협은 단군뿐 아니라 고구려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皺牟王)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이렇게 묘사된다.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나는 하늘의 아들이요, 내 어머니는 하백(河伯, 강물의 신)의 딸이시다.〉 단군처럼 부모의 혈통 중 하나는 외부세력(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토착세력(하천)이다. 만약 원래의 주인과 허락받지 않은 방문자 둘 중 어느 한쪽이 확실한 우세를 점했다면 혈통이 공평하게 섞인 것이 통치의 근거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12-3)


# 추모왕(皺牟王). 보통 주몽(朱蒙)과 혼용되는 이름이자 고구려의 제1대 왕. 재위는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다. 다른 익숙한 호칭은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고조선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역시 원주민과 이방인의 평화적 결합체다. 분명히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결과적' 평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융합이 이루어진 후부터는 강한 결속력을 발휘하는 운명공동체가 되어 외세에 맞섰다는 점이 한반도 문명의 특수성이다. 처음에 예맥과 한은 달랐다. 한반도 남부에서 농경 문명을 세운 고대 한인들의 세 나라를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고 한다. 이를 합치면 삼한(三韓)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三國)은 원래 삼한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고구려는 예맥인이 지배층과 중간층을 구성한 나라이며, 백제와 신라 그리고 신라에 흡수 통합된 가야는 예맥인과 한인이 혼합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은 삼국을 삼한이라고 일컬었다. 즉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를 한반도의 토착민인 한(韓)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는 정복민과 피정복민이 철저히 불평등한 관계로 나뉜 세계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14)


2장 평화는 생존의 지옥이다


한반도인에게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생존투쟁이다. 한반도인은 무엇이든 잘 먹고, 어떤 식으로든 먹는 방법을 개발해왔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그래야만 할 정도로 먹을 것이 부족했다는 의미가 된다. 모든 먹거리 중에서도 인구부양력이 가장 높은 쌀에 대한 집착은 한국인의 유전자와도 같다. 식문화는 환경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한식은 밥을 보다 수월하고 많이 먹을 수 있도록 개발되었다. 밥 자체엔 별다른 자극이 없다. 반찬은 그대로 먹으면 너무 짜고 자극적이다. 밥과 함께 먹었을 때 간이 맞아떨어지도록 계산되어 있다. 그래서 두부와 부침처럼 짜지 않은 반찬은 간장 양념에 찍어 굳이 짜게 만든 후 입에 넣는다. 반찬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밥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신 김치는 입에 침이 고이게 해 밥이 목구멍에 잘 넘어가게끔 돕는다. 국물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식사는 밥, 국물, 찬으로 이루어진다. ‘밥과 밥을 돕는 나머지’는 한식의 기본 구성이다. 19)


쌀농사에 억지로 성공한 한국인에게 콩은 그 억지스러움을 유지하는 최고의 파트너다. 콩은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면서, 논두렁에 콩을 심으면 병충해를 막아 벼를 보호해준다. 더욱이 땅의 영양소를 빨아들이기는커녕 뿌리에 공생하는 박테리아가 천연 비료 역할을 하면서 땅의 지력(地力), 즉 땅의 생산력을 회복시킨다. 그러므로 콩으로 장을 담그는 기술의 원류가 한국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더 깊이 원조를 따지면 고구려 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에서 콩장이 유래되기 전까지 동남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생선을 삭힌 간장(피시 소스, Fish sauce)을 사용했다. 에도 시대의 정치가이자 유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1719년 경 전 20권에 이르는 일본어 사전 《동아(東雅)》를 집필했는데 거기 고려장(高麗醬)에 관한 사실이 명확히 기술되어 있다. 〈고려의 장인 말장(末醬)이 일본에 건너와서 그 나라 방언 그대로 미소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글은 고려장이라고 표기하였다.〉 23)


한반도에 진정한 의미의 태평성대란 있어본 적이 없다. 평화 역시 개인들의 생존투쟁으로 꽉 채워져 있다. 다만 혼자서 생존투쟁을 할 순 없다. 집단노동으로 쌀을 수확하기 위해 한국인은 싫어도 좁은 거리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그리하여 쌀이 인구를 부양하고 사람들은 머릿수를 유지하기 위해 쌀농사에 매달리는, 악순환인지 선순환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나는 남들의 논에서 일해주어야 한다. 남들은 내 논에서 일해준다. 내 논에서 수확된 쌀은 나의 재산인데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에게는 공공의 영역과 개인의 영역을 나누는 복잡 미묘한 감각이 발달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에게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정밀하게 뒤섞여 있었으며, 그러한 감각을 마을 공동체 구성원이 공유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비교하게 된다. 간수가 죄수를 억압하듯 감시하는 것은 아니다. 느슨한 감시다. 다른 말로 하면 면밀한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25-6)


‘한국인은 매우 무속적이다’는 말은 틀렸다. 한국인은 무속 그 자체다. 한국은 반도체와 전투기를 만드는 나라면서도 공식적으로 등록된 무당만 30여만 명이며, 실제로는 5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신기(神氣)가 아닌 도구와 점술법, 풍수와 같은 지식체계를 활용해 길흉을 점치는 역술인까지 합하면 약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본질적으로 모두가 무당인 한국인은 길몽을 꾸면 복권을 사고, 꿈자리가 사나우면 하던 일을 다시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느낌이 좋거나 나쁘다거나, 촉이 왔다거나, 감을 잡았다거나 하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미심쩍은 장소에 대해서는 ‘음기(陰氣)가 느껴진다’는 말로 불운을 미리 피하려고 한다. 이런 말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영적 능력을 나타내는 언어다. 한국의 무당은 ‘무당들의 무당’이다. 그만큼 개성도 강해서 이타적이고 동정적인 무당도 많지만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무당도 흔한데, 한국에서 타락한 무당은 고객에게 매우 위험한 존재다. 36-7)


3장 전쟁은 산성이다


한반도 문명은 가까스로 죽음을 피해왔다. 중국은 태생적으로 통합적이며 팽창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진시황(秦始皇, 진나라의 시황제)은 최초로 중원을 통일하는 동시에 중국이라는 개념을 창조했다. 한족 문명의 뿌리는 화하(華夏) 문명이며, 화하족은 한족의 원류다. 최초로 중국을 만든 진나라가 금방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면서 화하족은 한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족은 혈통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다. 한족은 전쟁에서 졌을 때도 결과적으로는 이겼다. 중국은 분열하면 통합하고, 통합하면 팽창하며, 팽창에 실패하면 분열한다. 통일 중국은 팽창을 향해 달려갔다. 진나라는 현재의 베트남을, 한나라는 고조선을 쳤다. 한반도 문명은 여러 번 멸망할 뻔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에 의해 중국화 될 뻔했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치러진 나당전쟁(羅唐戰爭, 신라-당 전쟁)에서 자칫 패했더라면 꼼짝없이 사라질 뻔했다. 42-3)


산성(山城)은 말 그대로 산세를 따라 산에 지은 성이다. 한국에서는 꼭 첩첩산중이 아니더라도, 경사지에 지은 성을 산성이라고 한다. 한국인이 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주지와 번화가 대부분은 지리학적으로 산이다. 한반도인은 흙을 조금만 파면 드러나는 암반 지대를 정복할 수 없었다. 한반도는 2/3 이상이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화강암과 변성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변성암의 대부분은 역시 단단한 편마암으로 구성된다. 침공해온 이상 외적도 한반도 안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지형은 끝없이 이어지며 이지러진 단단한 산맥에 의해 침공해온 적이 행군에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한반도인은 웬만해서는 적이 뒤에 남겨놓고 지나칠 수 없는 요지에 산성을 축조했다. 산성을 짓기 위해 기본적으로 꼭 필요한 정도만 산을 깎다가 멈춘다. 한반도에는 더 이상의 노동을 할 인력과 식량이 '없다'. 깎으며 나온 화강암으로 필요한 나머지를 만들어 화강암 산성을 완성한다. 49-51)


적에게 고통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산성 방어 체계의 첫 번째 단계는 청야(淸野, 들판을 깨끗이 비움)다. 청야는 성내에 결집하기 전에 적이 사용할 수 있는 일대의 식량과 물자를 모두 없애는 행위다. 성안에 채울 수 있을 만큼 채우고 남은 것은 불태운다. 주거공간까지 불태우는 경우도 허다하며, 우물에 독을 풀기도 한다. 그러나 침공군도 전쟁의 전문가인 이상 성안에서 버티는 시간이 대체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외적은 한국인이 산성 안에서 저항하는 시간에 충격을 받곤 했다. 인내력이야 당연하다. 한반도에 사는 이상 단군에게 강제로 배운 셈이다. 문제는 그 인내력을 다 함께 발휘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정직한 평지 위에 누가 봐도 합리적인 방식으로 세운 성은 ‘정직한’ 한계를 갖고 있다. 적의 인구와 물량 앞에 정직하게 무너진다. 한국 성의 본질은 산성이다. 한국인의 선조는 외적이 침입하면 수없이 산성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함께 견디며 싸웠다. 52-3)


평양성(平壤城)은 성에 대한 한반도의 관념이 한 곳에 모두 담긴 걸작이자 그로테스크한 괴작이다. 먼저 평양성은 지형상 평지에서 산으로, 평지성에서 산성으로 올라가는 순서대로 외성(外城)-중성(中城)-내성(內城)-북성(北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를 침탈한 적은 고구려의 성을 평지성으로 착각하고 진입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중성에서 갇히고, 중성을 돌파하면 내성에 다시 갇힌다. 이때는 미리, 아니 애초부터 고지를 점령한 상태인 고구려의 최후 수비군에게 격퇴당하는 구조다. 이때 격퇴당한 적은 거꾸로 내성에서 중성으로, 중성에서 내성으로 성벽을 뚫고 탈출해야 한다. 성벽을 완전히 탈출해도 병목현상에 걸린다. 평양성은 천연 해자(垓子)인 강물에 둘러싸여 있는데, 성 안팎을 통하는 각 문은 나가자마자 응당 있어야 할 교량 대신 곧바로 강물을 만나도록 설계되어 있다. 좁은 길을 따라 우회해야 교량을 만날 수 있다. 이때쯤에는 탈출행렬이 얽혀 이미 매복한 고구려 군사를 만나게 마련이다. 59-60)


# 평양성(平壤城). 고구려 시대에는 장안성(長安城)으로 불렸다.


4장 전쟁은 사격이다


한반도에서 생존공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군은 덜 죽고 적군은 더 죽여야 한다. 한반도가 ‘중국’을 상대하는 경우에는 교환비가 아군에 극단적으로 유리해야 한다. 유리함은 '비로소' 승부를 가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즉 압도적인 교환비는, 있으면 좋은 수준을 넘어 공기처럼 당연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은 한국인이 집착하는 무기의 형태를 규정했다. 그것은 원거리 발사 무기다. 화약 무기가 출현하기 이전에 한반도를 상징하는 무기는 활이다. 한국의 활은 북방 유목민 계통의 활로 합성궁(合性弓)이다. 합성궁이란 두 가지 이상의 이질적인 재료로 활대를 제작하는 활이다. 고대부터 이어진 한국의 합성궁은 초식동물의 뿔과 목재를 결합해 만든다. 그런데 활에 쓰는 초식동물의 뿔은 굵고 길며 형태가 단순해야 한다. 이 조건에 가장 잘 들어맞는 동물은 물소와 야크(Yak)다. 한반도에는 둘 다 없다. 그래서 조선 시대 내내 활을 만들기 위해 동남아시아산 물소 뿔을 수입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다. 63)


# 두 가지 이상의 다른 목재를 사용한다면 이는 합성궁이 아니라 복합궁(複合弓)이다.


한국인에게 화포란 ‘강한 활’이며, 쏜다는 점에서 같다. 산성과 발사는 떨어질 수 없는 한 쌍이다. 산성은 기어 올라오는 적을 쏘아 맞히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이며, 발사는 산성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행위다. 가장 천재적인 특별함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경우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적 전선을 제압한 명량해전(鳴梁海戰)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장면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전투가 이순신이 정밀하게 설계한 산성 방어와 사격전의 조합이라는 사실은 무시되곤 한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일부러 먼저 역류(逆流)를 맞는 선택을 했다. 산성 방어에서는 적이 알아서 몰려들어야 전과를 얻을 수 있다. 물론 그가 불과 13척의 전함을 지휘하는 모습을 본 일본군은 한시라도 빨리 철천지원수를 없애버리고 싶어서 다가오지 말라고 해도 달려왔겠지만, 명량은 달려드는 순간 거센 물줄기를 타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격파되기 위해 기계적으로 떠밀려가는 곳이었다. 67-8)


이순신이 관망하던 아군 전함을 불러모아 전투에 참여시킨 시각은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직전이었다. 그는 약 세 시간을 배 한 척으로 혼자 싸웠다. 소집 명령을 내릴 시간은 많았다. 그러므로 왜 굳이 그 시점이었는가 하는 비밀은 물살에 있다. 물살이 바뀌면 일본군 전함은 역류를 맞아 자동적으로 밀려가고, 조선군이 순류(順流)를 타고 전진하게 된다. 즉 일본군은 산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난다. 이순신이 원래는 육군 장교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는 한반도가 중국의 백만대군을 육지에서 상대해온 방식을 사용했다. 〈적의 공성을 좌절시킨다. 실패한 적이 물러갈 때 하나 혹은 여러 산성에서 나온 아군이 결집한다.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적의 뒤를 쳐 대량살상한다.〉 이순신은 적의 공성과 후퇴가 자연의 힘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지도록 계산했다. 물살이 바뀌자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로 바뀌었다. 이순신은 마지막 단계인 대량살상에서까지도 지상전의 이상적 결과를 해전으로 옮겨왔다. 70)


한반도 주민에게 자연과 농토는 애증의 대상이다. 저주하지만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는 없는 무언가이다. 이는 삶을 저주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한국인의 인생관과 직결되어 있다. 주어진 환경이 척박할수록 먹고살기 위해 부대끼고 씨름하고, 결국에는 깊게 이해하게 된다. 척박한 논밭에서 죽기 직전까지 노동해 수확한 곡물로 밥을 지으면 밥그릇에 달라붙은 곡식 한 톨도 버릴 수 없다. 인간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지만, 이 순서는 바뀔 수도 있다. 반대로 고통을 감내한 결과 소중해지기도 한다. 깊은 이해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찬양이나 감격과는 다르다. 인도인이나 프랑스인이 끝없이 펼쳐진 풍요로운 농경지를 바라보며 느끼는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인은 자연에 감사하지 않지만 숭고함보다 진하고 끈끈한 애착을 느낀다. 인간에게는 타인도 환경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한국의 자연과 인간이 한국인에게 가장 미움받고,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73-4)


5장 전쟁과 평화 


산성 방어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전쟁만이 숙명은 아니기에 한국인은 재난 상황에서도 산성 방어를 수행한다.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자 재난 상황을 맞아 한국인들은 결집했다. 금 모으기 운동이 과연 얼마만큼의 실효성이 있었는지는 논란이 많다. 한 가지, IMF가 강제적으로 올린 금리를 인하하는 결과를 가져온 건 분명하다. 이는 한국 경제가 외국 자본에 완전히 잠식되는 사태를 막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외환위기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과정 전체에서 금 모으기 운동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는 영 계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금 모으기의 실질적 효과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주제는 한국인의 행동 양식이지 행동의 결과가 아니다. 약 227톤의 금이 모였는데, 참여자는 무려 351만여 명이었다. 전국적으로 4가구당 1가구가 자신의 손해를 감수했다. 세계적으로 이런 사건은 극히 드물지만, 한국인처럼 나라에 불만이 많은 국민이 반대편으로 돌변하는 경우로는 아예 유일할 것이다. 75-7)


한국인이 의인으로 변하는 작동 원리와 의인의 행동 양식은 외국과 다르다. 평소에 한국인은 세상은 돈과 지위가 최고일 뿐인 지저분한 정글이고, 자신 역시 철이 좀 든 대가로 돈만 아는 속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재난 상황을 발견하면 자신만의 산성 전투에 임한다. 2001년 일본에 유학 중이던 대학생 고 이수현 씨는 신오쿠보(新大久保) 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선로에 뛰어들었다가 숨지고 말았다. 한국에는 이수현 씨와 비슷한 영웅이 정말로 흔하다. 2015년 의정부 오피스텔 건물에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지나가던 간판업자인 이승선 씨는 옆 건물 옥상을 통해 불타는 건물로 진입했다. 그는 작업할 때 쓰는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화염과 연기가 타오르는 건물 벽에 매달려 열 명의 시민을 구조했다. 건물 주민들의 체중을 오직 팔 힘만으로 견디며 구해냈는데, 당연히 생사의 위기를 여러 번 오갔다. 그리고 그는 세상의 관심을 피해 재빨리 도망갔다. 82)


한국인은 자신이 속물이라고 착각할 뿐 아니라, 착각이 진실임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평소에 한국인은 남들을 무시할 수 있는 잘난 ‘년놈’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렇듯 평시의 한국인은 평범함을 거부한다. 그러나 전시의 한국인은 특별함을 거부한다. 남들보다 희생적이면서 누구보다 조용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외적에 맞서는 산성 안은 혼자만 주목받아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원치 않게 영웅으로 추대되기라도 할라치면 자신을 뭉툭하게 깎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한국인의 선조가 한반도에 사로잡힌 탓에 얻은 특질을 천박한 숭고함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어떤 인간집단인가? 한국인은 '숭고한 속물'이다. 숭고한 속물은 평시와 전시, 생존의 지옥과 멸망의 그림자 사이에서 태어난 별종이다. 그러나 한반도가 한국인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한반도는 민족성의 얼개가 잡힌 틀이지, 민족성 자체는 아니다. 민족성이 형성되려면 먼저 하나의 민족이 탄생해야 한다. 84-5)


2부 민족의 탄생


6장 고려는 고구려다


한국인들은 고구려가 통치했던 만주와 요동을 잃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아쉬워하는 나머지, 고구려의 영토뿐 아니라 고구려 자체가 사라졌다고 착각한다. 고구려는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는 고구려다. 현대에는 고씨 왕가의 첫 번째 왕조와 왕씨 왕가의 두 번째 왕조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고대 국가를 고구려로, 중세 국가를 고려로 구분해 부른다. 물론 나도 이 구분법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부터 고구려와 고려는 동의어였다. 고구려는 첫 번째 고려고, 고려는 두 번째 고구려다. 삼한/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흔들리자 군벌이 난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펼쳐졌고, 고구려계 유민들이 후삼국 시대에 고구려를 계승해 고려를 세워 삼한을 재통일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교과서에서 본 이 명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려 건국 세력은 세간에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착각처럼 고구려 계승을 ‘정치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고구려인이었다. 87)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를 친척지국(親戚之國, 친척의 나라)이라고 불렀다. 고려인과 발해인은 고구려인이라는 의식을 공유했다. 실제로 발해는 외교문서에서 자국을 ‘고려’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두 나라 모두 왕성(王姓, 왕가의 성)은 고구려 왕가인 고(高)씨가 아니었다. 고려는 왕(王)씨의 나라이고 발해는 대(大)씨의 나라이니, 친척이라는 표현이 그림처럼 들어맞는다. 다만 이때 친척이라는 말은 현대인의 느낌보다 훨씬 강렬한 표현이다. 친척(親戚)에서 친(親)은 요즘의 ‘친구’, ‘친하다’에 함께 쓰이는 한자지만, 지금처럼 편하게 써도 되는 말은 아니었다. 親은 피로 맺어진 혈족이란 뜻이며, 한 부모에게서 나왔다는 의미다. 반면 혼인으로 맺어진 외척을 뜻하는 척(戚)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친척지국’을 현대적 느낌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한 배에서 나온 친형제자매지만 지금은 각자의 집에서 따로 사는 사이.〉 발해가 멸망함으로써 왕건은 고구려 종주권 논쟁을 공짜로 피할 수 있었다. 90-1)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을 때 당나라의 군주는 고종(高宗)이었다. 고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동(한반도)의 두 나라를 원정했지만, 고구려가 요수(遼水, 요하강)를 건너 쳐들어온 것도 아니었고, 백제가 바다(황해)를 건너 쳐들어온 적도 없다. 해마다 많은 병사를 보내느라 우리의 소모가 컸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후회된다.〉 지나치게 값비싼 실험을 한 후 한반도와 중국은 이후 암묵적 합의에 이르렀다고 확신한다. 중국은 한반도가 고개를 숙여주기만 하면 건드리지 않기로 결론을 굳히고 행동했다. 한반도 왕조는 중국이 책봉하는 제후국의 지위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체면을 세워주는 대신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는 거부하기로 했다. 이러한 타협은 그 자체로 평화다. 하지만 유목 전사들은 한반도 왕조와 주민이 중국 보병과 나눈 교훈을 알지 못했다. 고려는 유목 제국에도 같은 교훈을 주입해야 할 운명에 놓였다. 그 상대는 거란이었다. 92-3)


7장 추남과 사생아


강감찬은 고려의 개국공신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인 데다 신분과 상관없이 실력만으로 과거시험을 치러 장원급제를 거둔 수재 중의 수재였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郎, 외교부 겸 문화부 중급 공무원)으로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빼면 오랫동안 그의 기록은 별 다른 게 없다. 있다면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채 지방 행정관 노릇을 전전했으리라는 암묵적 흔적뿐이다. 강감찬이 초특급의 배경과 재능으로도 평생에 걸쳐 소외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네 글자다. 사료는 그의 생김새를 잔인하게도 ‘체모왜루(體貌矮陋, 몸은 조그맣고 생김새는 너저분함)’라고 기록한다. 한자로 쓰인 전근대 동아시아의 전통 역사기록은 외모에 대한 평가를 아끼는 특징이 있다. 정말로 특별한 외모만이 묘사된다. 고려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였다. 한국인은 외모를 떠나 인품과 실력만으로 인물을 평가해야 마땅하지 않냐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유교적 가치가 국가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의 영향이다. 97)


거란의 1차 침공은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그 유명한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끝났다(993년, 성종 12년). 하지만 1010년 말 겨울, 2차 침공에 나선 거란군의 말발굽이 개경에 드리우자 조정은 정신적으로 붕괴했다. 모두가 현종을 에워싸고 항복을 부르짖었다. 유목 전사들은 농경민의 도시를 공격할 때 항복과 저항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 후, 저항할 경우에는 함락한 도시의 주민 모두를 죽이는 습관이 있었다. 30만 야전군이 사라진 조정이 현종에게 항복을 요구한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종은 항복이 과연 옳은지 확신할 수 없어 버텼다. 유일하게 강감찬이 몽진을 주장했다. 그건 왕의 도시(개경) 대신 왕의 나라, 바로 고려의 전 국토를 걸고 끝까지 해보겠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현종은 개경에서부터 신하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배신당했다. 현종이 꼭두각시 사생아 임금이라는 사실이 두고두고 문제였을 것이다. 사생아 임금과 나이든 추남(강감찬)은 뜻을 합쳤다. 현종은 몽진을 결행했다. 104)


요 성종이 통주전투에서 승리하고 남하를 시작할 때, 양규는 흥화진에서 700명의 병사를 끌고 나와 자신만의 전쟁을 시작했다. 양규는 전투가 벌어진 통주로 간 후, 패잔병을 수습해 전력을 1700명으로 보강했다. 그의 별동 타격대는 이어서 거란군에게 넘어간 곽주성(郭州城)을 되찾았다. 곽주성을 지키는 거란군은 6천이었는데, 불과 1700의 병력으로 기습에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양규는 흥화진-통주성-곽주성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거란 침공군과 거란 본토의 연결을 완전히 끊는 치명적인 선이었다. 양규는 현종을 잡기 위해 남하하는 거란군의 후방과 보급선을 쉬지 않고 타격했다. 양규는 유격전을 치르던 중에 귀주(龜州)를 지키던 별장(別將, 중하급 장교) 김숙흥(金叔興)과 연합해 작전을 함께하는 관계가 되었다. 김숙흥은 따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거란군 1만 명의 머리를 베는 전과를 올렸다. 두 사람이 요 성종이 남겨둔 후방을 타격해 진격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면 현종은 붙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106)


쉴 새 없이 움직인 양규-김숙흥 연합 특수부대의 싸움은 1011년 3월 5일 끝났다. 애전(艾田)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둔 직후, 두 장수의 부대는 마침내 그들을 노리고 있던 요 성종의 본대(本隊)와 조우했다. 애전에서 죽은 1천 명의 거란군은 요 성종이 던진 미끼였다. 요 성종은 자신의 전쟁을 망친 주범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양규와 김숙흥은 죽음이 예정된 마지막 전투를 피하지 않았다. 최후의 결사대는 구출한 고려인들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전면 돌격을 감행했다. 양규와 그의 군사들은 고려의 평민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전원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국가의 두 가지 측면 모두에 충성했다. 하나는 왕조, 하나는 백성이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이다. 현대에는 당연한 상식이지만, 11세기의 중세 전사에게는 비범한 정신세계인 것이다. 고려왕조 역사에 영웅은 많지만, 그처럼 도덕적으로 완성된 영웅은 없다. 그러하기에 현종은 양규가 죽음으로 던진 질문에 정답을 제출해야 하는 숙명에 내던져졌다. 107)


8장 싸움터에 솟아오른 비명(碑銘)


현종은 재위 기간인 22년 전부를 극심한 가뭄, 메뚜기떼, 지진, 산사태, 거란의 2차 침공이 남긴 피폐함, 여진족과 해적의 약탈에 시달렸다. 그 상태에서 거란의 3차 침공에 대비할 비용과 인력을 마련해야만 했다. 1014년, 경군(京軍, 중앙군)의 영업전(永業田)을 회수한 일로 고위장교 김훈(金訓)과 최질(崔質)이 벌인 난을 진압한 이후, 현종은 이때부터 전쟁에서 공을 세운 전사들을 홀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위해 국가 예산을 집행했다. 높은 계급이나 군반씨족뿐 아니라 병졸, 즉 일반 백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종은 국가는 백성과 계약의 관계라는 사실을 11세기에 받아들였다. 백성이 소유물이 아니라 계약당사자일 때 국가는 백성에게 책임을 진다. 책임이란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것이다. 다음 전쟁이 다가오는 중인데 현명한 행동이었을까? 전쟁이 다가오기에 현명했다. 자신과 가족이 존중받아야 충성하는 보람도 있는 법이다. 고려는 애국할 가치가 있는 나라여야만 했다. 112-4)


계약만으로 한반도 주민을 하나로 결집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다시 말하지만 고려는 고구려와 동의어다. 국명이 고려인 나라에서 신라계와 백제계 주민이 하나가 되려면 또 하나의 역사적 진보가 이루어져야 했다. 현종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대 군주들의 능묘를 정비했다. 그리고 누구라도 삼국의 능묘를 지날 때는 의무적으로 말에서 내리고(하마, 下馬)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므로 고구려인은 신라왕의 무덤에, 신라인은 백제왕의 무덤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러면 원칙적으로 삼국의 역사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역사가 된다. 원칙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이 오면 의외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백제인인 내가 어째서 고려의 졸병이 되어 말 타는 오랑캐 놈들한테 돌격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법한 순간에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력으로 나라를 세워놓고도 관념적인 건국의 원리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내왔다. 114)


1018년 말, 이번에도 한반도의 겨울에 10만 명의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선봉은 우피실군과 천운군(天雲軍)이었다. 우피실군이 카간 개인이 소유한 군대라면 천운군은 요나라의 정규군 중 최강의 기병이었다. 요련장군(遙輦帳軍)도 포함되었다. 요련씨(遙輦氏)는 황가인 야율씨와 황후가인 술률씨를 제외하면 거란족 중 가장 고귀한 가문으로, 요련장군은 거란 모든 부족의 자체 군대 중 가장 고급이며 정예였다. 요나라는 향병(鄕兵)제도를 운영했는데, 향병이란 점령지 주민이나 피정복민을 민족 단위로 징병해 구성한 군대였다. 가장 강력한 향병 부대는 발해군(渤海軍)이었다. 이번 원정에는 발해군도 포함되었다. 총사령관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소배압(蕭排押)이었다. 이에 반해 현종이 임명한 총사령관(상원수, 上元帥)은 군대를 처음 지휘하게 된 60대의 강감찬이었다. 총 병력 20만 8천 3백 명으로, 통주전투에 투입된 병력의 2/3 수준이었다. 현종과 강감찬은 단 한 번의 도박으로 전쟁을 결론짓기로 했다. 115)


귀주대첩 이후 현종은 사과의 뜻까지 전하며 거란에 입조했다. 거란군의 대패에 환호하던 송나라만큼이나 요나라도 황당해할 일이었다. 여기엔 비밀이 있다. 고려가 황제국이 되면 다른 두 황제국과 제국 경쟁을 벌여야 했다. 여기엔 조공보다 넉넉한 하사품으로 조공국을 모집하는 출혈 경쟁도 포함된다. 제국이냐 왕국이냐는 백성의 삶의 질과 같은 실용적인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다. 동아시아 역사는 실패한 제국들의 무덤으로 가득하다. 현종은 송, 요에 뒤진 3등 제국 대신 1등 왕국이 되기로 했다. 1등 왕국이 어느 나라에 입조하는지에 따라 현재의 진정한 천자국이 결정된다. 이때부터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균형을 결정하는 조정자가 되었다. 요나라의 패전 직후였으므로 무게 추가 송나라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현종은 망설이지 않고 요나라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현종 이후 고려는 물론 조선까지 중원 제국이 가장 중요하게 대하는 1순위 왕국의 지위는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다. 123)


현종은 거란과의 모든 전쟁이 끝난 후 아직 살아있을 때부터 하늘이 내린 성군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는 심지어 조선왕조에서도 한반도 역사가 낳은 특출난 성군으로 우대받았고, 조선왕조는 그에게 제사를 올렸다.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기사를 보면 현종을 단순히 좋은 군주로 여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조선의 사관(史官, 역사를 기록하는 관료)뿐 아니라 왕들까지도 현종을 한반도 역사를 다시 세운 위인이자, 역사 자체가 현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의식을 가졌다. 단군이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시조라면, 현종은 실존했던 진짜 단군인 셈이다. 현종은 1031년 38세의 나이에 쓰러졌다. 전쟁이 끝난 후 몇 년 연속 풍년이 들어도 국가를 복구하기 버거웠겠지만, 현종은 십 년이 넘도록 멈추지 않는 가뭄과 씨름했다.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다음 달 사망했다. 사인은 과로사로 추정된다. 이 해에 요 성종과 강감찬도 명을 달리했다. 124-5)


3부 민족성의 탄생


9장 천명과 혁명 


현재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은 대략 ‘여말선초 신진사대부(고려말~조선 초의 신흥 유학자 집단)’일 것이다. 하지만 명칭은 본질이 아니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철학자'라는 사실이야말로 중요하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이 왕성(王姓, 왕의 성씨)을 왕씨에서 이씨로 바꾸고 새로운 체제를 만든 일은 혁명이다. 당시 말로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다. 그들은 혁명으로 좋은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문제는 진리와 진리가 충돌한다는 데 있다. 혁명은 하늘을 배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범죄다. 그런데 좋은 나라를 건국하는 일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혁명이란 명, 즉 천명을 갈아치운다는 뜻이다. 천명은 받는 것이고, 혁명은 하는 것이다. 천명이 수동이라면 혁명은 능동이다. ‘나를 위해’, ‘동지들을 위해’ 뒤집어엎는 행위는 역성혁명은 될 수 있어도 진정한 혁명은 아니다. ‘사회구성원 모두를 위해’ 체제를 전복하는 결단이야말로 혁명이다. 혁명의 목표는 신체제에 있다. 130-1)


자신이 섬기던 왕조를 배반하는 일은 정도전에게 커다란 좌절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혁명에 몸을 맡겼기에 돌이킬 수 없었다. 혁명, 즉 범죄를 정당화하는 방법은 분명했다. 반드시 결과가 좋아야만 했다. 조선 건국의 아버지들은 스스로 역사의 감옥에 걸어 들어갔다. 백성을 잘 먹고 잘살게 하는 일에 실패하면 죄를 짓는 셈이었다.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자들이 된다. 신진사대부들은 철학자였지만, 동아시아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동아시아에서 철학은 현실이며 정치철학이다. 간단히 말해 결과주의다. 성리학 이전의 전통 유교는 논리적이지 않다. 유교가 질서를 사랑하는 이유는 질서 잡힌 사회에서 사람이 덜 죽고 괜찮게 먹고 살기 때문이다. 공리주의(公理主義)란 간단히 말해 사회 전체에 되도록 행복은 많고 불행은 적게 하자는 말이다. 서양에서 공리주의는 치열한 철학적 증명을 거친 영국 경험론의 결론이다. 동아시아에서 공리주의는 기본 전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131-2)


자녀를 보살피는 일이 가장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국가를 사유물로 여기는 유럽 국가보다 동아시아의 유교 국가들이 공익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처자식을 어떻게 대할지는 결국 가장인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다. 가장의 권위는 확실하지만 그의 의무는 모호하다. 이런 나라에서 백성은 임금에 대해서 착한 가장이길 바라는 기대만 가질 수 있다. 조선은 달랐다. 조선은 그때까지의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대부가 임금을 감시하고 끝없이 일을 시키는 체제를 만들었다. 조선에서 임금은 공공시설이자 한 명의 정치인, 그리고 한 명의 공무원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대한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키려고까지 했었다. 개인 재산 없이 궁궐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나라에 필요한 일만 하라는 거였다. 조선의 정궁(正宮, 최고 권위의 공식 궁궐)인 경복궁은 임금을 갑갑하게 옥죄고 감시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경복궁에서 임금은 궁을 향유하는 사람이 아니다. 궁이라는 시설의 일부다. 134-5)


10장 임금의 


한국인은 조선인일 때부터 관(官)의 존재 목적을 백성을 위한 도구로 인식했다. 도구에는 임금도 포함된다. 조선에서 군주는 쓸모가 있을 때만 인정받는다. 쓸모란, 현실에서 ‘사용 가능’한 ‘실재’여야 한다. 백성이 임금을 공무원으로 사용한 확연한 예는 신문고다. 신문고 앞에는 줄이 길게 서있었기에 조선인들은 격쟁(擊錚)을 더 선호했다. 격쟁이란 문자 그대로는 두들겨 쇳소리를 낸다는 뜻으로, 일반 백성이 궁궐에 침입하거나 왕의 행차 길에 난입해 북과 꽹과리를 두들기며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행위였다. 격쟁이 소란스러움으로 이목을 끌고자 했다면 글로 조목조목 주장을 했던 상언(上言)도 있다. 상소(上疏)가 공적인 문제에 대해 공인의 자격으로 행하는 입장 표명과 요청이었다면, 상언은 사인(私人)으로서 주로 가문이나 친족, 스승이나 학우(學友) 등의 명예에 관련된 일을 진정하는 행위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민의 수렴과 민원 해결에 노력했던 정조 때에 상언과 격쟁이 가장 활발했다. 136-7)


상소는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 왕에게 전달하는 글이니 당연하지만, 비교적 대등한 관료와 사대부끼리 벌이는 말싸움도 있다. 정파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탄핵(彈劾, 상대의 죄를 책망함)이다. 한번 탄핵당하면 어떻게든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탄핵한 측은 상대를 유배 보내는 데까지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한직으로 좌천시키는 일 정도는 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탄핵의 책임을 지고 자신이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 한국인에게 시비,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은 너무나 중요해서, 오죽하면 시비를 건다는 말의 뜻이 바뀌어버렸다. ‘시비를 건다’는 원래 말뜻 그대로 ‘논쟁을 제안한다’는 말이다. 현재는 싸움을 거는 모든 종류의 짓거리를 뜻한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는 ‘힘없는 서민’이다. 논리력을 발휘할 때도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만큼 편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힘없는 서민’이라는 말이 즐겨 사용되는 이유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공격이기 때문이다. 144)


이상적으로 제시된 기본 일과에 따르면 조선 임금은 밤 11시부터 6시간 취침한다. 기상 후 한 시간은 자신보다 항렬이 높은 왕실의 어르신에게 문안을 하고, 문안을 받는다. 이 한 시간은 유교 국가의 왕으로서 유교적 가치를 재확인하는 시간이다. 이후 오전 수업과 오전 업무를 소화한다. 점심 식사 후에도 역시 수업과 업무를 치른다. 오후 5시부터는 궁궐 내 야간 숙직자를 확인한다. 숙직자 확인은 사소해 보이지만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하거나 암살의 위협에 대비하려면 필수적이다.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야간 근무와 암구호가 얼마나 필수적인지 잘 안다. 조정은 언제나 깨어 있는 상태여야 하니, 궁궐의 가장이자 군 통수권자로서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또 공부하고 왕실 저녁 문안 행사를 완수한 후, 임금 앞으로 날아온 상소문을 읽어야만 잠자리에 들 수 있다. 여기까지가 이상적인 일과다. 현실은 더 복잡하고 고단했다. 조선의 모든 불만이 임금에게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149-50)


한국인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과 그의 일파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독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현대 한국의 기준에서 그렇다. 태종은 동시대 외국의 군주들은 물론 현대의 독재자들보다도 훨씬 불편한 생활과 많은 의무를 감당해야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역대 임금의 질병과 스트레스 증상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태종은 왕이 되는 데 성공하고 왕권(王權)이 신권(臣權)과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결국 정도전이 세운 나라의 왕이라는 틀 밖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태종은 정도전의 조선 설계도면 거의 전부를 물려받았다. 정도전은 공식적으로만 역적이었을 뿐 조선왕조 내내 조선 사대부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무력은 철학자를 죽일 수 있지만, 철학을 이기지는 못한다. ‘왕의 나라’ 조선의 군주는 결국 ‘사대부에 의한 나라’에 갇힌 존귀한 포로였다. 동시에 사대부 역시도 그들 자신에게 부과한 도덕률의 포로가 될 운명이었다. 151)


11장 사대부에 의한 


현대 한국인은 민주주의 국가에 살기에 조선의 건국 이념인 민본(民本)을 멋지게 생각한다. 백성을 위한 나라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고려 시대에 혁명을 결심했다. 애초에 백성이 대체 무엇인데 신진사대부는 그들을 위해 그토록 목숨을 걸었는가? 전근대 엘리트에게 ‘민중의 삶의 질’이 목숨을 걸고 혁명을 저지를 만큼 중요했던 적은 없다. 아무리 고려왕조에 의해 민족이 탄생했다고 해도, 고려 체제는 바깥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성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지, 국가가 백성의 도구라는 사고방식은 그때껏 출현해본 적이 없다. 어엿한 국가가 탄생한 후 민중은 줄곧 국가의 재산이었다. 세금(곡물이라면 조세)은 날것으로 말하자면 착취였다. 그런데 신진사대부는 신기하게도 민중의 고통에 공감했다. 이것이 철학의 위대함이자 이념의 힘이다. 조선은 이념 국가다. 현재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국가 중 조선과 가장 비슷한 체제는 단언컨대 소련(소비에트 연방)이다. 154)


조선이 아무리 도덕적 이념 위에 세워진 국가라 한들, 사대부층이 백성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일방적인 엘리트주의다. ‘혁명이 좋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으니 너희는 그저 믿고 따라오면 된다.’ 조선의 천재 중 한 명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대표작은 《목민심서(牧民心書)》다. 여기서 ‘목’은 목양, 목축, 유목의 목이다. 백성은 가축을 치듯 ‘이끄는’ 대상이다. 사(士, 사대부)와 민(民, 백성)의 서열은 분명하고, 아주 권위적이다. 사대부가 이 정도 권위를 가질 근거가 지식이 아니라면, 남는 것은 오직 도덕성이다. 사대부의 도덕성은 백성보다 우월해야 하므로, 선량한 본바탕으로 태어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선량하기 위해 매일같이 노력해야만 한다. 정도전과 그의 동지들이 후대의 사대부들에게 떠넘긴 숙제다. 조선의 사대부는 높은 학문적 식견을 가진 경우에도 예외 없이 뻔하디뻔한 도덕 주문을 자신에게 주입했다. 157-8)


사대부는 공부하는 사람이면서, 자신이 아닌 다수의 타인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다. 유학이라는 틀 안에서 인문과 기술은 분리되지 않는다. 열 살도 되기 전에 달달 외운 ‘소학’을 죽을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수양하는 것도, 계단식 논에서 쌀 생산에 성공하는 일도 똑같이 사대부의 업이다. 20세기 한국 역사학자들은 유학이 서구의 실용적 기술에 패배했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실학’이라는 없던 단어를 억지로 만들어냈다. 그들은 ‘고리타분한 유학’과 ‘현실적인 실학’을 인위적으로 분리해냈다. 그다음 유학자들 속에서 주장에 맞아떨어져 보이는 이들을 솎아내 ‘실학자’라고 이름 붙였다. 마침내 실학과 실학자의 존재를 정설로 만들어내 교과서에 싣기까지 했다. 실학(實學)이라는 말에는 기존의 유학이 뜬구름 잡는 허학(虛學)이라는 가히 폭력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실학자’들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는 ‘유학자’로서 실용을 추구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유학은 한 번도 실학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160-1)


12장 백성을 위한 


조선의 별명 중 하나는 대식국(大食國), ‘많이 먹는 나라’였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과 일본 양쪽의 기록은 모두 조선인의 식사량이 일본인의 3배라고 증언한다. 그래서 전쟁 초기에는 조선군과 일본군 모두 정탐에 실패했다. 식량 소비량을 탐지해 적의 군세를 판단하는 건 동아시아에서 전술의 기본이었다. 외국에서 온 동맹군도 놀랐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이렇게 많이 먹는데 나라가 운영되는 게 가능한가 진심으로 물었을 정도였다. 다만 이여송은 조선의 임금과 집권층이 얼마나 가난한 살림을 유지하는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조선인들은 충분히 먹었지만, 거의 곡물과 섬유질로 영양을 채웠기 때문에 균형 잡힌 영양식은 아니었다. 서양인들은 조선인이 이웃 나라보다 고기를 많이 먹는다고 했지만, 먹을 수 있을 때 먹는 양과 자주 먹을 수 있는 사정은 다르다. 쌀을 포함한 곡물로 가장 중요한 영양성분인 단백질을 보충하려면 해결책은 단순하다. 되도록 많이 먹는 것이다. 170-1)


먹는 문제는 가장 중요한 욕망일 뿐, 욕망 전부는 아니다. ‘의식주’라는 기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인간은 사회적 성공을 꿈꾼다. 인간은 비교의 동물이다.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한다. 이 분야에서 한국인을 뛰어넘는 민족은 없다. 조선의 사대부는 관료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양민들은 눈에 불을 켜고 지주나 양반이 될 기회를 노렸다. 천민들은 양민으로 올라설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조선 시대는 매우 느슨한 신분제였다. 조선에서 신분이란 개인의 성공으로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기도 했다. 드물지만 노비 출신 재상이 배출되기도 했고, 가뭄과 자연재해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농민은 일단 살기 위해 스스로 노비계약을 하기도 했다. 조선은 모두가 잘 먹어야 한다는 관념에서는 공산주의적 면모를 지녔으면서도, 성공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는 무척 자본주의적이었다. 한국에서 평등은 모두가 꼭대기를 향해 질주할 기회를 얻는 평등이다. 한국인은 결국 모두가 양반이 되는 데 성공했다. 176)


모두가 양반이 된 현상을 두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근대 조선인-한국인이 전근대 신분제를 부정하고 극복하는 대신, 반대로 신분제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논리다. 실상은 매우 단순하다. 좋은 건 손에 쥐고 봐야 하는 게 한국인의 속성이다. 신분제를 강력히 거부하는 모범적인 현대인이 되더라도, ‘양반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멋진 사람이 되어 손해볼 것은 없다. 한국인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먹고 살게 해주는 은혜를 원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사다리 걷어차기’다. 사다리를 오르다가 떨어져 죽어도 상관없다. 단, 사다리는 있어야만 한다. 한국의 좌파와 진보정당은 이 사실을 습관적으로 망각하기 때문에 불리함을 자초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의 동물인 한국인은 ‘자신이 동의할 수 있는 정글’을 원한다. 자신의 신분과 계급을 바꾸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남들 앞에 나서고, 가끔은 무리수를 두다가 자빠져 의기소침해하는 펭수는 한국인의 사회적 욕망을 대변한다. 177-8)


백성이 욕망 추구에 자유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조선의 백성인 이상, 아무리 공권력에 떼를 쓰는 행위가 허용되어도 봐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조선은 이념 국가답게 수직적이고 획일화된 사회를 추구했다. 조선의 설계자들은 하나의 원칙으로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다. 조선에는 요즘으로 치면 ‘국민 공통 교과서’가 존재했다. 바로 《소학(小學)》이다. 사대부와 백성은 학문과 교양에서 차이가 날지라도 소학에서 만났다. 원래 10세 이하의 어린이를 위한 교재인 소학은 모든 조선인의 교집합이라 할 수 있다. 소학을 읽거나 외우지 않은 백성이라도 소학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았다. 조선은 고도의 중앙집권을 성취했는데, 소학은 정신적 중앙집권이었다. 소학이 가장 강조하는 도덕은 효(孝)다. 그런데 핵심적인 문장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바로 부모와 스승과 군주의 은혜는 같다는 명제다. 조선 질서의 토대는 효(孝)다. 효란 부모가 사랑을 주었기에 갚아야 하는 의무다. 182-3)


효의 원리를 철학적 차원에서 비정하게 파고 들어가면, 사실 장사의 논리다. 본질이 도덕적 부채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받은 게 있으니 갚아야 한다는 게 한국적 효다. 대승불교 경전인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제목은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무거운지 가르치는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불교는 철저히 개인적인 종교다. 진리로 향하는 길에 부모의 은혜와 같은 인간관계를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많은 대승불교 경전이 위경(僞經, 가짜 경전)이라지만, 부모은중경은 제목부터 대놓고 위경이다. 〈부모은중경〉은 부모가 ‘독자인 당신 따위는 상상도 못 할 고생을 치르며’ 어떻게 자식을 낳고 키웠는지 구구절절 노래한다. 자식에게 마음의 빚을 확실히 지어주기 위해 의학적으로 몹시 정확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임신부터 출산, 산후까지 산모의 신체 변화와 각종 후유증이 망라되어 있다. 조선은 공식적으로 불교를 배척한 나라이지만 부모은중경만큼은 소학의 파트너로 권장했다. 183)


13장 조선의 몰락 


한국에는 조선 사회가 한계에 부딪힌 이유를 감성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낳은 정신적 후유증을 예상하는 것이다. 양란(兩亂)에서 조정은 훌륭하게 백성을 지켜내지 못했다. 한 번은 임금이 자신의 국토 안에서 적국의 군주에게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르기까지 했다. 그래서 조선의 남성 지배층은 피지배층 앞에 면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그들은 무조건 자신에게 복종하라는 수직적이고 성차별적인 윤리를 강요하게 되었으며, 조선은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서서히 몰락해갔다는 이야기다. 실상 임진왜란은 심각한 물질적 피해를 입혔지만 정신적인 절망을 주지는 않았다. 과정이야 어쨌든 침공군을 나라 밖으로 몰아내면 승전이다. 거꾸로 병자호란은 대단한 충격이었지만, 대체로는 심리적 충격이었다. 조선은 그 충격을 잘난 척으로 메워버렸다. 조선과 명나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단 두 개의 문명국이었는데, 둘 사이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셈이 된다. 187-8)


양란은 국가체제 몰락의 단초가 되지 않았다. 두 전쟁을 합쳐도 경신대기근이라는 대재앙 앞에서는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경신(庚辛)은 경술년과 신해년을 합친 말로, 1670년과 1671년을 가리킨다. 이 시기 세계 주요 문명은 소빙하기의 도래로 굶주림과 질병이 넘쳐났다. 그러나 한반도만큼 끔찍했던 곳은 없다. 우박과 서리가 작물을 짓밟았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었는데, 비는 곡식이 충분히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내리지 않고 기다렸다가 단번에 내려 홍수를 만들었다. 메뚜기떼가 창궐했다가 사라지자 극악한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었다. 여름에 서리와 눈이 내렸다. 먹지 못한 데다가 추위에 시달리니 면역력이 떨어져 역병이 전국을 휩쓸었다. 전염병에 걸리기는 가축도 마찬가지였다. 농사일에 필수적인 소가 집단 폐사했다는 보고가 전국에서 조정으로 올라왔다. 말라죽은 작물 중에는 솜의 원료인 목화도 있었다. 그러잖아도 추위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솜을 얻지 못해 더 얼어 죽었다. 190)


기상이변과 자연재해는 1671년에도 계속되었다. 조선인들은 가족을 죽이거나 버리고, 심지어 가족끼리 잡아먹기까지 했다. 조선의 가족윤리는 양란이 아니라 경신대기근에 추락해 바닥을 쳤다. 조선에서 도굴(盜掘, 무덤 도둑질)은 문화적인 금기였다. 하지만 이때에는 도굴이 판을 쳤다. 추위를 피하려고 죽은 사람의 수의를 벗겨 입기 위해서였다. 이때쯤 조선에는 창궐할 수 있는 모든 해충이 창궐해 쌀은 물론 보리, 기장, 수수, 좁쌀, 조선에서는 희귀한 작물이었던 밀까지 파먹었다. 심지어 한국인의 반찬거리인 산나물의 잎과 뿌리까지 죄다 말라 죽었다. 경신대기근 이전까지 조선 지배층은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이기심을 절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험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대기근 이후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족과 자신을 위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가뭄이 들 때마다 부자가 굶주린 백성에게 곡물을 빌려주고 원금에 더해 이자까지 돌려받는 ‘고리대’가 성행했다. 190-1)


지주들은 대농장을 운영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한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먼저 사정이 안 좋아 고리대를 갚지 못하는 채무자의 땅을 차지한다. 채무자는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논밭에서 일하는 소작농이 된다. 지주는 가만 내버려두어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알아서 땀 흘려 일하는 소작농에게서 소작료를 걷어가면 그만이다. 자연재해가 닥쳐도 가뭄이 와도 그들의 사정일 뿐이다. 흉년이 들면 고리대에 담보로 잡힌 땅을 차지해서 좋고, 풍년이 들면 수입이 늘어서 좋다. 책임질 것 하나 없이 외주를 주고, 위험요소는 하나도 없는 속 편한 방식이다. 대기근이 불러온 양극화는 잉여자산을 소유한 이들을 상품의 판매자이자 소비자로 만들었다. 곧 상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은 열악한 곡물 생산력으로 천만 명 이상의 인구를 부양해야 했다. 자본경제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조선과 맞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다. 조선 말기에는 현재의 재벌에 해당하는 국제적인 거상(巨商)이 등장할 만큼 양극화가 진행되었다. 192-3)


조선을 멸망시킨 다른 주범은 탕평책이다. 조선에는 붕당정치가 있었다. 붕당을 정치세력으로 봐도 되고, 정당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는 여기서 붕당의 긴 역사를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붕당정치의 특징만으로도 족하다. 성리학에는 통(通)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치와 통한다는 뜻이다. 조선의 과거시험 답안지가 받은 가장 높은 등급은 대통(大通, 크게 통함)이었다. 진리와 진리가 아닌 거짓이 명확히 나뉜 세계관이다. 진리는 하나인데, 붕당은 둘 이상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와 그쪽은 추구하는 게 다른 모양이오.”하고 끝날 수는 없다. 주장이 다르면 한쪽은 통이요, 다른 쪽은 불통이다. 논리 대결이 항상 그렇듯 점점 세부적인 부분의 시시비비에 목숨을 걸게 된다. 나쁜 말로 치졸해지고 현실과 동떨어진다. 아마도 대표적인 경우가 그 유명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붕당 투쟁은 말과 글로 벌이는 내전이다. 전투에 백성들이 동원되지 않는다. 조선의 정치투쟁은 백성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진행되었다. 194-5)


21대 임금 영조에게 붕당 투쟁은 비현실적인 국력 낭비로 보였다. 그는 관념 투쟁을 멈추고 임금을 중심으로 현실적 국익을 챙기자는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했다. 탕평책은 영조가 시작해 손자인 정조가 완성했다. 두 임금이 통치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영조의 광기 어린 카리스마와 정조의 천재적 두뇌는 탕평책의 포장지를 빛냈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하자 더 큰 폐단이 다가왔다. 강력한 임금과 붕당정치가 사라지자 노론(老論)세력의 일당독재가 시작되었다. 당내투쟁에서 안동김씨가 최종 승리를 거두면서 세도정치의 막이 올랐다. 이는 북한의 조선로동당 안에서 김일성파가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를 파멸시키고 마지막으로 동지였던 갑산파마저 숙청하며 나라를 차지한 과정과 비슷하다. 세도정치 역시 특정 가문의 혈통이 국가를 사유화하는 결말로 끝났다. 세도정치가 시작된 시점에 이미 조선은 사망 신고를 받았다. 유교 국가 조선은 유교적이지 못해서 멸망한 것이다. 195-6)


문명사적으로 조선의 멸망은 예정된 것이었다. 큰 그림에서 보면 경신대기근과 탕평책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조선 시대에 이미 한반도의 농업생산력은 더 이상의 인구증가를 감당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안에서부터 붕괴할 운명이었다. 한국어에는 고리타분한 옛날을 뜻하는 ‘고리짝’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원래 사용자는 조선인들이다. 고리짝의 어원은 ‘고려였을 적’ 즉 고려 시대다. 현대인이 ‘전근대’, ‘봉건 시대’라는 표현을 쓰며 후진적인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처럼 조선인 역시 ‘고리짝’과 조선 시대를 구분했다. 조선이라는 무덤은 생각보다 단단한 토대다. 한국은 진흙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 조선은 문명의 물질적 한계 속에서 생명 연장을 위해 탄생했지만, 막대한 생산력을 가능케 한 2차 산업사회를 만나는 순간까지 민족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은 실패했으나 실패만 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한국인에게 혁명적 기질과 못된 성깔을 물려주었다. 조선인의 시신에서, 마침내 한국인이 태어났다. 201, 204)


결어 한국인의 탄생 


원칙적으로 한국인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면서 탄생했다. 실질적으로는 한국전쟁 휴전이 성사된 1953년 7월 27일에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날을 기점으로 조선인은 대한민국(남한) 국민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인민으로 갈라졌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 된 한국인은 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일어섰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한반도는 자연이 제공하는 생산력이 한계에 다다른 단계를 넘어 급속도로 고갈되어가는 상태였다. 독립 후 다른 모든 산업품목에 앞서 인공 비료부터 생산하려고 했던 건 당연하다. 현재의 한국인이라면 수없이 들어서 알고 있는 노년층의 고생담은 요즘 세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구하다. 그들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해도 굶주렸다. 그러나 살아남는 데에는 성공했다. 한국인에게 삶은 곧 노력의 연속이다. 노력은 한국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적이며, 한국인 자체다. OECD 국가 중 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이 1위인 건 당연하다. 205)


중국에는 오랜 속담이 있다. “천하는 넓고 황제는 멀다.” 이 속담은 지금 이렇게 바뀌었다. “천하는 넓고 당(공산당)은 멀다.” 한국의 중앙은 멀지 않다. 한국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의 역사는 고려 4대 임금 광종(光宗)이 호족들을 핏물로 쓸어버리면서 시작되었다. 중국에 비하면 매우 손쉬운 과정이었다. 광종의 뒤를 이은 성종은 최승로(崔承老)를 발탁해 숭유억불 정책을 폈지만, 그는 불교를 무시한 적이 없다. 성종에게 유교와 불교는 각자 다른 가치를 지닌다. 문화적인 부분은 불교에 맡기면 되었다. 국정 운영과 행정체계는 유교를 따르면 된다. 성종에게 유교는 학문도 믿음도 아니었다. 일원화된 행정이었다. 한국은 중앙정부 조직은 물론 과거제, 농경에 대한 세금계산법까지 중국의 좋은 것을 거의 전부 도입해 꽤 그럴싸하게 현지화했다. 한국은 성공적인 현대국가의 필수 조건인 중앙집권과 관료제가 가장 잘 자리 잡은 나라 중 하나다. 그 이유에 원래부터도 오랜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빠질 순 없다. 207-8)


조선 성리학의 통(通)처럼 한 글자로 동학을 설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접(接, 만남)이다. 동학 신도들이 만나는 가장 작은 모임이 접(接)이며, 접의 지도자를 접주(接主)라고 한다. 통(通)의 세계엔 고정된 이치가 있고, 공부하고 수양한 결과 이치와 통하는 인간(사대부)이 정해져 있다. 나라가 뿌리까지 썩은 조선 말기, 수탈당하던 민중은 사대부와 하늘의 이치 사이의 통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접의 가치는 통과 반대다. 접은 부당한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의 연대, 공감, 협동이다. 통은 수직적이다. 하늘의 가르침이 사대부로, 사대부의 통치가 백성으로 이어진다. 접은 수평적이다. 그렇다면 동학은 하늘의 이치와 닿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동학의 핵심 사상은 인내천(人乃天)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며 이치다. 인간은 인간인 이유만으로 존귀하며, 태어나는 순간부터 도구가 아닌 목표다. 인내천 사상은 전통적인 인(人, 다스리는 소수)과 민(民, 통치받는 다수)의 구분을 지웠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210)


3.1운동은 전국의 조선인이 참여함으로써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그리고 민주공화국 체제가 다수의 합의에 의해 도출되었다는 논리적 근거를 확보했다. 3.1운동이 일제의 무력에 진압당하고 끝났기에 실패한 독립운동이라는 관념은 현대 한국인의 착각이다. 이 운동은 민족국가의 미래 정치체제를 결정했다. 제헌헌법(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의 정당성이 3.1운동 위에 서있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의 진보진영에는 역사에 무지한 관념이 하나 있다. 서양의 완제품인 민주주의가 하늘에서 똑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이해하지도 체화하지도 못한 채 민주공화국 헌법을 덜컥 떠안게 되었다. 한국이 헌법상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민주공화국이 된 이유는 이승만을 몰아낸 4.19혁명과 전두환의 신군부에 대항한 80년대의 민주화 투쟁 덕이다. 대한민국은 1987년 군부독재를 끝장낸 6월 혁명을 통해 민주공화국으로 완성되었다. 212)


대한민국의 헌법은 강대한 위력을 발휘해왔다. 조선 성리학은 한국인을 언어로 정리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민족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무력을 동반한 권력은 문자로 쓰인 제도에 패배했다. 4.19 혁명의 명분은 헌정 가치였다.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힘은 헌법에서 나왔다. 헌법은 결코 일부 진보 지식인들의 표현처럼 ‘장식’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계엄령과 발포 명령을 거부한 군 장성들 역시 군인은 헌정 가치를 수호한다는 사명감으로 목숨을 걸었다. 한국인은 일상에서 다혈질의 기분파지만, 큰일을 위해 결집했을 땐 로고스(Logos, 옳은 말씀)의 민족이다. 6월 혁명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제도를 재확인한 사건이다. 현재 한국의 성공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는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맹자에서 탄생한 정도전의 민본, 민본을 대체한 (동학의) 인내천, 현재의 서양식 민주주의까지 한국의 정치사상은 끊기지 않은 역사적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213)


나가는 글: 한국인은 성격이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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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외로움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페이 바운드 알베르티 지음, 서진희 옮김 / 미래의창 / 2022년 12월
평점 :
절판


서론 _ ‘현대의 유행병’ 외로움 • 19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16세기가 되어서야 등장한 '외로운lonely'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두 가지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1. 친구나 함께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슬픈, 동반자가 없는, 고독한. 2. (장소) 인적이 드물고 외진'. 이 가운데 '인적이 드물고 외진 장소'라는 두 번째 뜻만 1800년경 이전에 자주 사용되었다. 이보다 전에는 '외로움loneliness'에 대한 해석은 대체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고립된 공간에 대한 물리적인 묘사와 함께 종교적 계시 그리고 인간의 죄악에 대한 도덕적인 설명과 관련되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외로움이란 단어는 〈예수가 외진 곳으로 물러나 기도했다〉(누가복음 5장 16절)와 같이 '다른 이들에게서 따로 떨어져 있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새뮤얼 존슨조차 그의 《영어사전》에서 '외로움'을 순전히 홀로 있는 상태('홀로 있는' 여우) 혹은 동떨어진 장소('후미진 바위')로 묘사했다. 이 단어에는 (신체적인 상태 외에) 그 어떤 감정적인 의미도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46-7)


"인구학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외로움이 고도로 발달하고 세계화된 세속적인 후기 근대 사회에서 생겨난 직접적이고 불가피한 결과라고 보았다. 역사학자 키스 스넬은 외로움의 가장 의미 있는 원인이 대개 가족이 사망한 후 혼자 사는 데 있다고 했다." "사회적인 인구 이동이 외로움의 원인 중 하나인 것은 틀림없지만, '외로움'이 모두가 느끼는 감정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인구통계학적 변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점점 더 개인주의적이고 세속적이 되고 소외감을 느낄 만한 여러 가지 또 다른 중요한 요소들이 수반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에는 몸과 마음에 대한 근대의 과학적인 믿음 그리고 영혼을 어떤 해석의 근거로 삼는 일이 줄어들었다는 점 또한 포함된다." "찰스 다윈의 연구와 진화 생물학의 출현은 다양한 허구의 이야기와 사회적 메타포를 통해 표현되고 소통되었다. 개인에 관한 철학이 지배적이 되었으며 개인이 사회보다 중요해지고 사회와 대립하게 되었다."(58-60)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무정하고 기계적인 산업 사회를 배경으로 외로움을 겪는 여러 유형, 특히 어린아이들을 그리곤 했다. 따라서 디킨스 소설의 남녀 주인공들(예컨대 《위대한 유산》의 핍, 혹은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은 자신을 황량하고 적대적인 세상에서 아무도 없이 혼자이며 버림받고 친구도 없는 존재로 인식했다. 이러한 인물들을 통해 19세기 산업에 대한 메타포 안에서 심리적인 모순점에 사람들의 이목을 의도적으로 집중시킬 때가 많았다. 한편으로 노동자 계급은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작업해야 했으며 이는 형편없이 야만적인 대우를 받는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실수나 나약함 때문이든 냉혹한 사회 구조나 불운으로 인한 것이든 사회 밖으로 내몰린 외로운 개인에 대한 시적인 묘사는 진화생물학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초기 정신의학의 대상인 개인(불가분의 실체이며 한계가 있는 인간이 세상과 맞서는)의 출현과도 잘 맞아떨어진다."(62)


2장 _ 피에 새겨진 질병? 


"혼자가 아닌데도 외롭다고 느껴서 생기는 불안은 고독과 외로움의 근본적인 차이와 관련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다른 이들과 공통점이 하나도 없음을 인식하는 것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플라스는 일기장에 외로움이 마음뿐 아니라 몸 전체를 망가뜨리는 것 같다고 썼다. 그러면서 외로움이 '마치 혈액에 생긴 병처럼 자기 안의 불명확한 중심'에서 비롯됐으며, 너무 온몸에 퍼져 있는 바람에 정확히 어디부터 시작된 건지도 알 수 없다고 쓰고 있다. 외로움은 감염되는 '전염병' 같았으며, 이 용어들은 외로움을 유행병으로 개념화하는 데 자주 쓰이게 되었다. 플라스에게 외로움과 향수병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향수병은 플라스가 자신을 지배하는 '쓰라린 감정'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기에 적합한 말이 되었다. 향수병에는 외로움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가 없었고, 사람들이 동조할 가능성도 훨씬 컸기 때문이다."(85-6)


"플라스의 경우에서 보듯이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종종 언급하며 관념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21세기 외로움에 관한 연구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플라스의 글에는 특히 성별이나 여성과 관련 있는 생식력을 나타내는 은유가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기형인 아이들을 낳고, 강간당하고 폭행당하는 내용을 썼는데, 이런 폭력적인 이미지는 플라스의 개인적인 편지에서도 그렇고 창작글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결혼했든 안 했든, 바쁘고 창의적이고 행복하고 현실에 만족해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자신은 정도에서 벗어난, '사랑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여자라고 느꼈다. 마음속으로는 늘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행동은 외로운 이들에게 뚜렷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외로움을 타는 사람들이 강한 인맥을 지닌 이들보다 사회성 점수가 더 낮은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인기 있고 사회 참여도 잘하며 더 행복하다는 믿음은 외로운 이들이 하는 '혼잣말'에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하다."(89-91)


"플라스는 외향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썼다. 내향성과 신경증 사이에 부정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라스는 삶을 함께할 동반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점과 모든 것이 그 판단에 달렸다는 사실 그리고 그 책임(남자들이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과 함께) 때문에 억눌리고 확신이 없었으며 그러한 문화에 스며들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토록 간절히 글을 쓰고자 하면서 어떻게 엄마와 아내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어떤 특별한 종류의 외로움은 이렇게 사회적 기대와 자기 정체성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은 성인이 되고 노년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과 똑같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사실 창의성과 정신질환이 연관된 것이라는 생각은 낭만주의 시대부터 영국 문학과 문화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여기에는 상실감 또한 내포되어 있다. 상실감은 21세기의 가장 심오한 외로움의 지표로, 외로운 마음과 사랑의 추구가 바로 그것이다."(94-5, 100)


3장 _ 외로움과 결핍 


"'영혼의 동반자soulmate'라는 단어를 문헌에 처음 사용한 이는 낭만주의 시인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였다. 《젊은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1822)에서 콜리지는 결혼이 여성들에게 '자살과 같은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콜리지는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집이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짝'이 아니라 '영혼의 동반자'를 만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서구에서 '진정한 사랑'의 전형이자 척도가 된 영혼의 동반자라는 개념의 함정은 분명하다. 모든 이에게 특별한 누군가가 있고 자신의 온전함이 그 사람을 찾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이다. 또한 이로 인해 인지와 현실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며 그 유일한 '한 사람'을 찾지 못한 이들의 경우 실패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이런 생각이 공동체 의식을 증진하는 것도 아니다. 단 한 명의 '상대'를 찾아야 하는 거라면 로맨틱한 사랑은 특히 진화생물학이나 애인이나 배우자 탐색과 연관된 개인적인 경험이라 할 수 있다."(110-2)


"《폭풍의 언덕》과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모두 여성이 '영혼의 동반자'나 의미 있는 상대를 찾으며 그 상대 없이는 외로워진다는 설정이다(한편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정상적인' 사회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두 소설 모두 자연의 속성과 가깝거나 그로부터 동떨어진 존재이기도 한 위험스러울 정도로 관능적이며 음울하고 위협적인 남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여자 주인공인 캐서린과 벨라는 모두 사회 관습과 개인적인 바람에 대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그들의 선택은 성적이고 정서적인 만족 그리고 무감동하나 순응적인 삶 사이에 놓여 있다. 이러한 선택은 눈에 보일 것인가 말 것인가, 위험에 처할 것인가 안전할 것인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강렬하고 로맨틱한 이상형이 매력 있고 (그리고 확실히 '유일한') 투쟁할 만한 사랑의 형태라는 생각을 내면화하고 불멸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만족이 결여되거나 이상형을 잃으면 감정적으로 황량하고 외로워지는 것이다."(116-7)


4장 _ 배우자를 잃은 상실감 


"노인들, 특히 80이 넘고 가까운 이들과의 이별이 빈번해지는 '초고령 노인들'에게는 상실로 인한 고통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외로움과 관련된 물건(의자뿐 아니라 슬리퍼나 찬장, 사진, 그릇이 될 수도 있다)은 노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들과 관련된 물건들이 그들이 겪은 상실 혹은 애석하게도 잃어버린 사회적 정체성을 연상시키는 기념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그리움과도 연결된다. 그리움에는 상실한 것에 대한 애도가 포함되며, 한때는 삶의 핵심이 되었던 사람들(친구, 아이들, 배우자)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 또한 들어간다. 하지만 그리움이 꼭 외로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관계라 해도 한 사람의 마음속에 간직한 관계의 조합을 통해 현재의 사회적 단절감을 조금은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수년 동안 이어지는 만성적인 외로움의 문제 중 하나는 이렇게 마음으로 그리는 관계를 회복시켜줄 기능이 없다는 데 있다."(139-40)


5장 _ 우울한 인스타그램 너무


"전보부터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모든 새로운 형태의 통신에는 그 사용과 남용, '오래된 사교의 방식'이 위협받는 것 아닐까 하는 불확실성과 공포가 늘 뒤따라왔다. 그러므로 좋거나 나쁜 영향을 만들어내는 것은 소셜미디어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을 사용함으로써 사회적 지지와 영향력 행사, 다른 이들에게 배려받고 그들과 연결된 기분(이런 모든 것이 외로운 상태와 반대로 여겨진다)과 같은 긍정적인 유대감을 경험한 사용자들은 실제 생활에서도 그러한 유대감을 경험한다. 따라서 페이스북을 기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플랫폼으로 사용하는 것이 얼굴을 맞대는 사회적인 상호작용에서의 도피용일 때보다 더 유익할 것이다. 소셜미디어 사용을 통해 원치 않는 외로움과 같이 감정적인 고초를 겪는 경우는 온라인 세계가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관계에 대해 보조적이거나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프라인 관계를 넘어서고 대체할 때다."(195-6)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영국에서 18세기 이후 사교 모임을 가지며 개인을 상업화하는 것이 지배적이 되었으며 그 결과 외로움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자신을 표현하고 소비하며 다양한 정체성을 만들고 네트워킹에서의 성공을 개인의 재산이라 여기는 소셜미디어의 몇몇 형태는 소외된 현대 개인주의의 증거로 볼 수 있다. 내가 외로움과 소셜미디어가 관련 있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소셜미디어 자체를 부정적이라고 하는 건 아니다. 반대로 디지털 세계에 개인과 사회의 삶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 커뮤니티 내의 결속에 대한 사회학적인 논의는 '정체성을 통한 결속identity bonds'과 '유대감에 기반한 결속bond-based attachment'을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외로움에 대한 개입에서 시급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어떻게 소셜미디어를 성공적이고 협조적인 방식으로 활용하느냐, 즉 '정체성'이 아니라 '유대감'을 토대로 활용하느냐가 될 것이다."(202-5)


6장 _ 똑딱거리는 시한폭탄? 


"노화와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은 역사를 초월해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 초반의 외로움에 관한 정신적 공포에 속하는 것으로 문화적인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다. 노인의 신체, 정체성, 성생활, 경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적으로 노화에 관한 문제는 최근에서야 관심을 끌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인층의 외로움에 관한 사료가 적다는 것도 그리 새삼스럽진 않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작가들은 노년에 대해 정서적인 부담이나 고립의 측면이 아닌 신체 건강에 대한 교훈적인 이야기를 주로 썼다. 즉 젊은 시절부터 자신을 돌보고, 지나친 격정은 자제하며, 노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향한 여정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젊음에 집착하고 가능하면 오랜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문화적인 서사를 지녔던 서양의 후기 근대사회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노년을 '준비'하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226-7)


"노년의 외로움이 보편적이거나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개인, 가족, 사회가 겪는 경험의 특성뿐 아니라 노화와 사회 복지에 대한 지배적인 사고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문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조언했듯 노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외로운 이보다는 '외롭지 않은' 사람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노년에 외롭지 않은 상태에 주목한다면, 개별적인 차이점을 고려하는 한편 의료 보기 차원에서 적절한 개입 방식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어떤 자료를 비교해보더라도 노화가 일어나는 것은 개인의 선택권이 없어지는 상황에 놓일 때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는 외로움과 노년의 병약함까지 생길 수 있다." "노인들을 요양원이나 다과회, 댄스파티에 모아두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이득인지는 모르지만 그것만으로 노인들의 외로운 감정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노년의 외로움에 대한 접근법을 개발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 중 하나는 그 다양성을 더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을 것이다."(234-6)


7장 _ 노숙자와 난민 


"노숙자들을 박애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은 21세기 이후부터였다. 1980년대 영국에서는 노숙자 수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주택가격 인플레이션, 임대주택 매각, 실업률 상승, 정신 건강 및 약물 관련 문제 증가, 16~17세 청소년의 주택수당 요구 금지 등의 이유로 거리에 나앉는 사람의 수가 늘어났다. 1980년대 즈음에는 빠른 도시화의 결과로 노숙자 문제가 정치적으로도 견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노숙자는 사회와 가족의 지원과 유대가 부족한 상황과 관련 있으며, 이것이 지금 논의하고 있는 사항 중 가장 핵심이다. 노숙에는 그에 수반되는 우울, 불안, 외로움, 박탈감, 가난, 학대의 반복과 함께 단순히 집이 없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비록 일반적인 주택에 대한 논의에서도 암묵적으로 노숙에 대해 그저 집이 없는 상태로 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약물 중독, 정신질환, 외로움이 높은 빈도로 발생하는 등 노숙자 문제에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250-3)


"난민과 망명 신청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과 함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압박을 받는 유별난 집단이 되어버리기 쉽다. 또한 세계적인 분쟁과 기후 변화 덕에 점차 여기저기서 눈에 띄는 집단이 되었다." "난민들은 집과 가족, 친숙한 환경, 집과 연결된 감각적인 경험(풍경, 소리, 향)에서 동떨어져 있다. 물질문화는 개인의 정서 생활과 외로움을 구성하는 데 매우 중요하며, 정체성이 담긴 이러한 물질의 상실은 공동체 인식의 결여와 함께(또한 심지어 많은 경우 사회적으로 배척을 받는 상태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꽤 치명적일 수 있다. 소외된 기분에서 생기는 외로움은 구체적으로 젊은 난민이나 망명 신청자, 특히 다른 이들에게서 고립된 채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발견된다. 웰빙이나 사회관계, 외로움보다는 외상과 실질적인 고려사항에 더 초점을 두는 보건 복지 서비스 차원에서는 난민과 망명신청자의 외로움과 같은 문제는 쉽게 간과될 수 있다."(258-9)


8장 _ 결핍 채우기 


"자기 정체성과 역사, 세상에서의 위치, 다른 이들과의 관계(과거, 현재, 미래에서의)는 음식, 책, 시계 무브먼트, 옷, 사진, 가구, 건물, 커텐, 일회용품 등과 같은 물질적인 제품들을 통해서 구조화된다. 말이나 몸짓과 더불어 사물은 우리의 신체적·정신적 세계를 구축하고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정서적인 체험을 드러내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사물 즉, 물질적인 대상은 우리가 누구이며 세상에서 우리가 어느 지점에 있는지 나타낼 수 있으며, 특히 우리의 정체성이 손상되고 표류하게 될 때(이를테면 난민이나 이주민들의 경우처럼) 그 의미가 가진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신경과학자 존 카시오포와 패트릭 윌리엄은 외로움을 개인이나 집단이 생존을 위해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는 표시인 일종의 배고픔과 비교했다. 신체적인 배고픔은 실제 체험이라는 물질적인 특성뿐 아니라 개인의 몸을 둘러싸고 사회적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생활 습관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268-9)


"외로움은 물질주의로 인한 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물질주의를 증가시키기도 한다. 외로움과 물질주의 간에 위험한 연결고리가 형성되어 순환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많은 소비재를 갈망하고 손에 넣을수록 사회적인 유대감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며,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유대감을 덜 경험할수록 소비재를 더 원하게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사람들 사이에 '관계'와 연결에 대한 기본 욕구가 있으며, 물질적인 상품들로 귀결되는 욕구 또한 인간적인 관계로 대체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개인적인 자기 표현이 아닌 사회 결속을 추구할 때도 소비 행위가 일어난다. 사회적인 정체성과 관련된 물건의 소유욕은 자신들의 공통된 뿌리와 유산을 공고히 하고 기념하기 위해 특정 물건의 소유에 의존하는 이주민 집단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가족'이나 지인, 전통 또는 개인의 삶에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해주는 특정한 물질적인 대상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속시키기도 하는 것이다."(275-7)


"감정을 일으키는 사건과 인지적인 맥락은 모든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모욕으로 인한 노여움에 굴욕감과 슬픔이 함께 물들 수도 있고, 상대 운동선수에 대한 질투가 실망과 분노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감정 상태도 그대로 변함없이 인식과 주변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외로움은 다른 대부분의 감정 상태와 달리 사회적으로 이해될 만한 몸짓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로움을 드러내는 몸과 관련된 자세나 행동은 매우 다양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행동 가운데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해석하지 못하는 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제 기능을 못 하는 코딩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짓 언어를 읽고 파악하는 것은 결국 사회적인 기술이다. 강제적으로 고독한 상태에 있었거나 사회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까 봐(혹은 거부당할까 봐) 긴장하거나 걱정할 때 정서적인 소통이 어려워질 수 있다."(294-5)


9장 _ 쓸쓸한 구름과 빈 배 


"낭만주의적인 개인주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 외로움은 사회로부터의 의식적인 분리와 고독을 통해 성스러운 자연과의 교감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본질적으로 비사교적이거나 영원히 고독하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는 그런 생각이 널리 퍼지기도 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워즈워스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과 교감하기 위해 고독한 시간을 보내고 자기 경험을 다시 생각해보는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다른 시인들이나 작가들과 함께 어울리고 도시의 흥겨움을 즐길 때는 무척 사교적이기도 했다. 사실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글 쓰는 행위는 개인적·영적인 가치뿐 아니라 사회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기계화, 도시화, 산업 혁명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하는 '어둡고 사악한 공장들'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잔혹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길을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개인의 물음에 도움이 될 만한 답을 찾는 일인 것이다."(305-8)


"버지니아 울프에게 외로움은 고통스러운 감정 상태이긴 하지만 창작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외로움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고······늘 어떤 공포가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상의 번잡한 소리와 친구들, 지인들에 둘러싸인 채 경험하는 것과는 다른 '진실'을 느끼고 전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울프는 많은 작품에서 고독과 외로움에 대한 글을 썼으며, 창작을 위해 홀로여야 하는 내적인 필요와 함께 '외적으로' 사회적인 면을 유지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시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울프가 시간의 흐름에 집착하는 것(그녀의 소설 《등대로To the Lighthouse》에 가장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또한 제대로 검토된 적 없는 시간과 외로움의 관계를 감안한다면 당연한 행동일 수 있다. 시간은 우리가 행복할 때보다 지루하거나 슬플 때 혹은 고통스러울 때 더 천천히 흐르는 것 같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이러한 주관적인 경험은 외로움에 대한 인식과 관련이 있다."(312, 315-6)


"창의력을 추구하는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내향성과 고독은 대체로 필수적인 요소다. 고요함과 고독에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가치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외로움이 파괴적인 반면 회복 기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일 경우에 한정된 것이다." "고독, 심지어 외로움의 추구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회복 혹은 창작을 위해 사회에서 물러나 있는 행동은 개인적인 집중과 심리적·예술적인 어떤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매우 필수적이지만, 그렇다고 영구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일상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21세기에 넘쳐나는 '마음챙김' 앱과 점심시간을 이용한 명상과 관련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경우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 단기간의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이 (혹은 고독이) 매일 이어지는 들리는 거라곤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밖에 없는 강제적인 고립과 과연 같을 수 있겠는가?"(323-5)


결론 _ 신자유주의 시대와 외로움의 재구성 • 327


"개인주의적인 사고, 세속주의, 과학과 의학 사이의 경쟁, 철학, 경제적 담론이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상황에서 '외로움'이라는 용어는 1800년대 세계적인 대변화로 인한 소외의 특성뿐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감정 체험의 출현을 반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아는 자애로운 신은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경쟁적인 개인주의가 끈질기게 확산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의 빈 공간이 생겨났고, 그 안에서 개인은 홀로 고립되었으며, 가족 또는 변화의 물결을 타고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소셜 네트워크에 의존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신에서부터 천사와 왕을 거쳐 농부와 땅에 이르는 모든 개체에 대하여 위계적인 질서가 세워져 있던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을 만족스러운 상태라고 여기는 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시대에는 '공공의 복지'가 우선시되었으며, 책임이 중요시되었다. 또 개인 또한 타인과 체제 그리고 자신을 보호해주는 초자연적 힘에 대한 유대감을 얻을 수 있었다."(336-7)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에서 확실한 한 가지는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와 그에 따른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염병으로 규정된 외로움은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전염이라는 말은 (감염과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는 매혹적이지만(강력하고 쉽게 은유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정치적·도덕적인 차원에서는 문제의 소지가 많다. '오염'이라는 단어의 부정적인 뜻이 연상된다면, 전염이라는 용어는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민자들을 아주 몹쓸 질병으로 묘사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건물이 있다고 해보자. 그 건물에 담긴 감정적인 언어는 소수민족을 바라보는 태도에 매우 파괴적인 결과를 일으킬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유행병' 같은 표현 역시 부정적인 사회적 반응을 유발한다. 유행병이란 말로 인해 사람들이 생물학적인 불가피성을 떠올리게 됨으로써 외로움이 문화와 환경의 산물이며 불가피한 인간 조건의 일부가 아니란 사실이 도외시될 수 있다."(3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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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 패러다임, 법 - 규칙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로레인 대스턴 지음, 홍성욱.황정하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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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 규칙의 숨겨진 역사 


"알고리즘은 산술 연산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규칙과 양적 정확성이 연관되기 시작한 역사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리즘은 고대 지중해 세계로부터 유래한 지적 전통에서 규칙의 주요 의미에 해당하지는 않았으며, 이는 심지어 수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알고리즘 제국은 19세기 초까지는 규칙의 개념 지도에서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 인구조사 등의 사업에 필요한 대규모 계산 같은 국가적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컴퓨터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미국의 물리학자 하워드 에이킨 등의 선구자들조차도 계산과 관련된 제한적인 의미에서만 알고리즘을 정의했다. 이 책의 목적은 이러한 알고리즘의 극적인 성공 역사에서 중요한 초기 사례들을 조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수학적 알고리즘이 어떻게 산업혁명 시기의 정치경제와 교차하게 되었는지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알고리즘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노동과 기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20-2)


2 고대의 규칙 : 직선 자, 모델, 그리고 법률 


"지중해의 습지와 중동의 사구沙丘 지역에는 나무처럼 키가 크고 화살처럼 곧게 뻗은 거대한 지팡이 식물인 물대가 자란다. 수천년간 이 지역에서는 물대의 꼿꼿한 줄기로 바구니, 피리, 저울대, 막대 자를 만들었다. 〈규칙〉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 단어인 카논kanon은 이 식물을 가리키는 셈족 언어에서 유래했고(고대 히브리어 카네qaneh와 동음이의어이다), 초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막대를 가리켰다가 이후에는 직선 자를 가리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카논과 동일한 고대 라틴어에 해당하는 레굴라regula는 곧은 판자, 지팡이라는 의미와 연관이 있으며, 더 은유적으로는 (〈통치하다regere〉 또는 〈왕rex〉에서와 같이) 유지하고 지시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영어 단어 ruler의 뜻에서는 여전히 두 의미의 공존을 발견할 수 있다." "카논kanon으로부터 세 가지의 주요한 의미론적 범주가 가지처럼 파생되었다. 첫째, 꼼꼼하고 주로 수학적인 정확성, 둘째, 복제를 위한 모델 혹은 패턴, 그리고 셋째 법률 혹은 법령이다."(41-4)


"재량은 판단의 한 형태이며, 규칙의 엄격성을 언제 완화해야 할지를 아는 것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포함하여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감각, 사리 분별, 통찰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재량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는데, 하나는 인지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적 측면이다. 작지만 중요한 세부사항의 차이를 지니는 사례들을 구별하는 능력은 단순한 분석적 예리함을 넘어서는 능력인 재량의 인지적 측면의 본질이다. 또한 재량은 경험의 지혜를 추가적으로 활용하여 어떠한 구별이 원리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실질적으로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파악한다." "재량은 규칙이 전제하는 범주적 체계를 보존하면서도 그러한 범주들 내부에 유의미한 구분선을 그릴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재량은 또한 인지적 능력을 뛰어넘는다. 재량의 수행적 측면은 재량의 인지적 측면에서의 통찰력을 실현할 자유와 힘을 포함한다. 재량은 마음의 문제일 뿐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다."(57-60)


"모방과 재량은 서로 다르지만 연관된 능력이다. 수도원장을 모방하는 수도사나 조각상 「도리포로스」를 모방하는 예술가는 모방하는 모델의 세세한 부분까지 단순히 복제하기보다는, 유추를 통해서 그러한 모델의 교훈을 번역하여 새로운 사례에 적용한다. 모방은 모사가 아니다." "재량과 모방은 모두 유추에 의한 추론을 포함하는 행위이며, 이는 유사점뿐 아니라 중요한 차이점까지 식별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분별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필요한 부분만 약간 수정하는 방식의 추론을 의미한다." "원칙과 모델 모두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명시적 규칙과는 다르며 판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 둘을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모델을 모방하는 데에는 원칙이 따르는 것과 다른 방식의 판단이 동원된다. 원칙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이지만, 모델은 명확하고 구체적이다." "모델을 모방하는 경우, 판단은 유추를 통해 그 경로를 도식화하면서 특수한 것에서 특수한 것으로 이동한다."(63-5)


"현대의 규칙은 논리적인 추론법이나 과학적인 자연법칙까지를 포함해서 의미하지만, 원래 규칙의 범주는 그리스어로 테크네technê, 라틴어로 아르스ars라고 알려진 분야에 적용되었다. 의학, 수사학, 항해술처럼, 계율에 따르되 실제로 행할 때의 상황에 적절히 맞추는 것이 중요한 분야들 말이다. 그리스어로 에피스테메epistêmê, 라틴어로 사이언티아scientia라고 불린 것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실을 다루었다면, 기술은 특수하고 우연적인 것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피스테메가 때때로 불변하는 형상만이 아니라 가변적인 질료도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것의 보편성을 〈항상 또는 대부분의 경우 발생하는 것〉으로 완화한다. 한편 그는 에피스테메의 확실성의 의미를 희석시킨 것과 같은 방식으로 테크네의 확실성의 의미를 강화시킨다. 우연과 사고의 발생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네는 원인으로부터의 추론과 어느 정도의 일반성의 달성을 포함한다."(69-71)


3 기술의 규칙 : 하나 된 머리와 손 


"1525년 뉘른베르크에서 예술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는 화가, 금세공인, 조각가, 석공, 목수, 그리고 〈측량법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하학 서적을 저술했다. 저명한 고전 학자들에 대한 헌사와 잃어버린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기술〉에 대한 언급은 수공예의 원칙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서 기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했던 뒤러의 야망을 보여준다." "공예 지식을 규칙으로 형식화하는 것은 그 지식에 목소리와 존엄성을 부여하자는 것이지, 이를 공방에서 제거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 초기의 초심자를 장인의 비법의 세계로 인도한 대부분의 기예서(쿤스트뷔휠라인)와 비법서들은 독자가 규칙과 비결을 읽고 그 과정을 실제로 반복적으로 시도할 것을 상정했다." "그러나 실행을 규칙으로 환원하는 것이 반드시 규칙을 이론으로 한 번 더 환원하는 작업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수공예와 과학 사이에서 이도 저도 아니게 부유하는 기술 자체의 중간적 지위처럼, 규칙도 손과 머리 사이를 맴돌았다."(75-9)


"실천을 기술로 환원하려는 근대 초기 문학에서는 항상 우연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일에 관한 주제가 등장한다. 실용 의학이나 점성술 같은 〈저급 과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술과 공예의 수행자들은 형상의 고분고분한 규칙성만이 아니라, 물질적 질료의 다루기 힘든 특이성도 마주했다. 의학, 목공예, 축성에서 특수성이 우세했던 이유는 동일하다. 질료가 형상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군사공학자 보방은 분명 세부사항의 귀재였지만, 그는 선험적인 체계주의자도 아니었고 지나칠 정도로 정확성을 강조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보방은 전투의 열기 속에서는 요새를 정교하게 측량하는 일이 위험한 방해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부사항을 광적으로 명시한 표조차도 문자 그대로 따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주로 보조자료나 확인해야 할 사항을 적어둔 목록의 역할을 했다. 규칙과 표는 기억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특정한 상황에 따라 독창성과 판단력을 발휘할 정신적 자유를 주었다."(95-7)


"실행의 성공과 실패는 세부사항에 의해서 너무나도 크게 좌우되고 그러한 세부사항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근대 초기 기술에서의 실행은 거친 통계적 방법론,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보편성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한 얇은 규칙을 적용하기에 근대 초기 실무자들의 세계는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너무도 세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설명이나 제한조건이나 예시를 제공하는 세부사항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두꺼운 규칙도 모든 세부사항을 예측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두꺼운 규칙은 실무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세부사항들과 더불어, 당면한 사례에 맞게 규칙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두꺼운 규칙은 대부분 민첩성과 판단력이 얼마나 필요할지를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자극을 주었다. 모든 사례들을 열거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기 때문에, 그 존재를 알리고 몇 가지 해결책을 모범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머지는 경험에 맡길 일이었다."(98-9)


"기계적 기술은 머리와 손, 이해와 손재주 사이의 중간적이고 모호한 지점에 존재했다.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암묵적 지식과 명시적 지식 사이에 자리했던 기술의 규칙은 항상 이 둘 사이를 오가는 지렛대의 역할을 했다. 고대로부터 시작된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철학적 대립은, 일반적인(그러나 보편적이지는 않은) 규칙과 특수한(그러나 단일하지는 않은) 사례 사이를 넘나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해 보인다. 그러나 시소의 끝이 위쪽이나 아래쪽에 머물러 있지 않듯이, 기술의 규칙의 목적은 한 극이나 다른 극에 이끌려 가서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기술의 규칙은 중간 정도의 일반화를 통해서 패턴과 유추에 대한 실행자의 안목을 가다듬도록 하고 규칙의 주요 용어를 기억에 남게 하는 특징적인 사례들을 가르쳤다. 일반화는 결코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예시와 예외도 완전한 변칙은 아니었기 때문에, 두꺼운 규칙을 완전히 흡수한 독자는 그것이 적용되는 영역의 한계도 배우게 되었다."(112)


4 기계적 계산 뒤의 알고리즘 


"현대적 의미에서 이상적인 규칙인 일반 규칙은 예시와 예외에 구애받지 않고, 구체적인 것을 규칙 안으로 들이지 않으며, 구체적인 맥락에 속하지 않고 그 위에 있다. 두꺼운 규칙은 계율과 수행 사이를 오가고, 계율과 수행은 서로를 다듬고 정의한다. 반대로 얇은 규칙은 자족적이고 명료한 것을 지향한다. 원칙적으로 보면 얇은 규칙은 분명하게 해석될 수 있다. 얇은 규칙은 설명을 멀리하며 해석학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또한 얇은 규칙은 여러 사례들을 구분하거나 특정한 상황에  따라 재량권을 행사할 필요가 없다. 얇은 규칙의 일반성은 그 규칙을 적용할 수 있는 사례가 명확하고, 규칙이 적용된다고 분류된 사례들이 모두 동질적이며, 사례 간의 동질성이 영원이 유지될 것을 전제로 한다. 컴퓨터 알고리즘이나 산술 계산이 여러 쪽에 걸쳐 작성되기도 하듯이, 얇은 규칙이 간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호해서는 안 된다. 일반적이면서도 명확한 언어인 대수학은 얇은 규칙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130)


"알고리즘에서 기술과 예시 사이의 경계는 종종 모호해진다. 수학이 기본적인 산술 연산부터 시작하여 역수 찾기, 분수를 공통분모로 통분하기, 삼각형의 면적 계산하기 등 좀더 복잡한 기술로 확장되듯이, 거의 모든 알고리즘은 다른 알고리즘으로부터 구축된다. 고대 그리스 수학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전근대적 수학 문헌들이 유클리드의 『원론』과 같이 정의, 공리, 가정으로 구성된 체계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은 적어도 암묵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기본 연산과 등식의 형태로 기초가 먼저 마련되고, 그다음의 단계들이 겹겹이 쌓이는 식이다. 어떤 교과서가 어느 〈단계〉에 해당하는지를 알아내는 확실한 방법은 설명되지 '않은' 내용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다." "작곡가가 기존 음악에서 주제 악상이나 일부 선율을 재사용하는 것처럼, 알고리즘의 탑의 낮은 층에서 제시되는 예제들은 높은 층에서 제시되는 조금 더 복잡한 알고리즘의 〈계산 모듈〉이나 〈서브루틴〉으로 재사용될 수 있다."(138-9)


"중세의 일부 아시아 지역과 16세기 유럽의 천문대에서 수행된(19세기부터는 보험국과 통계청에서도 수행된) 대규모 계산의 유일한 공통점은 천문 관측값을 정리하고, 기대 수명을 산출하고, 범죄에서 무역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한 통계를 기록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대규모의 계산이 말 그대로 노동이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한 지붕 아래 모여서 엄격한 관리감독을 받았던 18세기 중반의 제조 체계가, 증기로 작동하는 베틀이 도입되기 훨씬 전의 가족 단위의 방직 공방을 대체했던 것처럼, 막대한 계산을 수행하는 컴퓨터의 발전도 알고리즘이 기계에 의해서 안정적으로 계산되는 반세기 전에 비슷한 길을 걸었다." "프랑스 기술자 가스파르 리슈 드 프로니(1755-1839)는 분업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설명을 읽고 〈핀을 제조하듯 나의 로그 계산을 제조하겠다〉고 결심했고, 영국의 수학자 찰스 배비지(1791-1871)는 로그 계산만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 노동을 기계화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147, 149, 153)


"학생이든 실직한 장인이든 여성이든 간에 피라미드의 최하위에 있던 저임금 컴퓨터는 최소한 한 가지 중요한 지점에서 근대 이전에 알고리즘을 배우던 학생들과 달랐다. 저임금 컴퓨터는 더는 과거의 응용 사례와 새로운 응용 사례를 연결하는 유비 추론 능력을 발휘할 필요가 없었다. 절차를 세분화하고 표준화한 덕분에 그들은 문제와 해답을 미리 포장된 형태로 받아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근대 이전의 알고리즘 문헌들처럼 세부적인 것에서 세부적인 것을 귀납해내지 않아도 되었고, 초기 수학자들이 수행했던 알고리즘을 분류별로 구분해 일반화하지 않아도 되었다. 문제는 사전에 이미 다 분류되어 있었으며 풀이 절차에 관해서도 세부적인 사항이 지정되어 있었다. 어떤 컴퓨터도 이 문제가 어떤 종류의 문제인지 혹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어떤 알고리즘이 필요한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알고리즘에 대한 이들의 경험은 근대 이전에 계산을 하던 사람들의 경험과 확실히 달랐다. 이들의 규칙은 매우 얇았다."(163)


# 가스파르 드 프로니의 피라미드형 로그 작업장은 고도로 숙련된 소수의 수학자, 분석적 지식을 갖춘 7-8명의 계산원, 덧셈과 뺄셈을 할 줄 아는 70-80명의 노동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5 계산기계 시대의 알고리즘 지능 


"제4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알고리즘'이라는 단어는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를 모두 지녀왔다. 원래 의미에 해당했던 좁은 의미의 '알고리즘'은 0, 1, 2, 3, 4 같은 인도 숫자로 수행되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의 산술 계산을 의미했다. 현대적 의미의 더욱 가까운 넓은 의미의 알고리즘은 계산 혹은 문제 해결에 사용되는 모든 단계별 절차를 포괄한다. 알고리즘 지능의 역사에서는 넓은 의미의 알고리즘과 좁은 의미의 알고리즘이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주제 자체는 숫자 계산과 같은 좁은 의미의 알고리즘에 해당했다. 그러나 복잡한 작업을 정밀하게 정의된 입출력을 지닌 작은 단계들의 유한하고 명확한 순서로 구분하는 것처럼 계산을 특정한 절차와 작업의 흐름으로 변환하는 방식도 넓은 의미의 알고리즘에 해당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이루어진 계산기계의 도입과 확산은 계산을 한다는 좁은 의미의 알고리즘과 계산을 위한 조직을 만든다는 넓은 의미의 알고리즘을 모두 변화시켰다."(170-1)


"17세기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계산기계들은 각각 설계, 재료, 성능, 신뢰성에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인간 지능을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겠다고 약속했다. 기계가 지능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일부 지능은 무의식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기계적이라는 추론이 기계의 계산 능력으로부터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무의식은 주의 집중력과 기억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특이한 종류의 무의식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편으로는 계산 영재와 다른 한편으로는 계산기계 조작자를 대상으로 한 심리학 연구의 흐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계산 영재와 계산기계 조작자는 한때 서로 스펙트럼의 양 끝에 위치한다고 가정되고는 했다. 즉, 각각 숫자 천재와 숫자 부진아라고 말이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자 심리학자와 수학자들은 이러한 사례가 비정상적이라고 믿게 되었다. 위대한 수학자는 대개 계산 천재가 아니었고, 계산 천재가 위대한 수학자인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181-2)


"인간 계산원과 기계적 계산기의 상호작용은 지능을 더욱 미묘한 방식으로 변형시켰다. 계산이 지적 성취로 이해되었든 아니면 고된 노동으로 이해되었든, 계산이 왕실 천문학자에 의해 수행되었든 아니면 학생 컴퓨터에 의해서 수행되었든, 계산은 지루할 정도로 정신 소모적인 일이었다." "주의력과 정확한 계산 사이의 연결고리는 너무나도 강력해서 프로니는 지능이 가장 낮고 가장 〈자동화된〉 계산원이 가장 적은 실수를 범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했다." "그러나 더 신뢰할 만한 계산기계가 보급되자 지성과 정확성 사이의 연관관계도 끊어지고 말았다. 20세기 초에 이르면 자동화는 오류 없는 계산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이를 보장하는 존재가 되었다. 수 세기 동안 수작업으로 결과를 확인해야 할 만큼 오류를 범하던 계산기계의 오랜 역사를 뒤집은 기계 설계, 재료, 구조의 발전은 1920년대에 이르면 〈자동화된 계산〉과 〈정확한 계산〉을 동치로 만들었다."(193-4)


"계산기계를 통해서 인간 지능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는데, 그것이 인공 지능의 탄생을 위한 길을 열어주었을까? 계산기계가 기계의 내부 구조 구성부터 기계와의 세심한 상호작용을 위한 작업의 조직에 이르는 대규모의 계산 수행의 모든 단계를 최적화하는 방법을 재고해보도록 함으로써 알고리즘의 영역을 확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표준화된 단계적 절차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계산을 알고리즘적으로 만드는 것은 지능을 알고리즘으로 만드는 것과 거리가 멀다. 지능을 알고리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능을 계산의 한 형태로 환원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그것이 바람직해 보여야 한다." "인공 지능 혹은 기계 지능을 모순적이지 않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계산〉과 〈지능〉 모두를 완전히 다시 개념화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일련의 학자들이 수학적 논리를 발전시켰던 방향이며, 이는 사무실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던 대규모 계산의 수행보다는 수학의 논리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195-6)


6 규칙과 규정 


"법law, 규칙rule, 규정regulation 간의 관계는 유동적이지만 중요한 노동의 분업에 의해서 관리되어왔다. 계층 구조의 정점에는 〈법〉이 있었는데, 법은 형식의 차원에서는 일반적이었고 관할 범위는 넓었으며 막강한 권위를 지녔다. 17-18세기에 가장 보편적이고 권위 있던 법은 자연철학자 아이작 뉴턴이 공식화한 자연법칙과 후고 그로티우스(1583-1645), 사무엘 푸펜도르프(1632-1694) 같은 법학자들이 국제적으로 유효한 행위 규칙을 찾아서 체계화시킨 자연법이었다." "계층 구조의 그다음 수준에는 자연과 인간의 왕국 모두에 적용되는 〈규칙〉이 위치했다. 여름은 일반적으로 겨울보다 덥다는 날씨의 규칙이나, 유언장이 없을 때 상속인들에게 유산을 어떻게 분할해야 하는지에 관한 법적 규칙 같은 것들이었다. 규칙은 법률보다 더 구체적이고 관할 범위는 더 제한적이었다. 계층 구조의 가장 아래 수준에는 〈규정〉이 위치했는데, 이들의 관할 범위는 더 제한적이고 개수는 훨씬 더 많으며 극도로 구체적이었다."(201-2)


"〈법치주의〉라는 문구처럼 법이 규칙의 가장 위엄 있고 고상한 측면을 보여준다면, 규정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현장에서 일을 직접 처리하는 규칙에 가깝다. 법은 망원경으로 멀리 있는 별에 초점을 맞추는 규칙이고, 규정은 현미경으로 근시적인 세부사항에 초점을 맞추는 규칙이다. 이상적으로 법은 비교적 수가 적고 거의 변경되지 않지만, 규정은 수가 많고 지속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법은 보편성을 지향하며, 규정은 세부사항에 주목한다. 한편, 규칙의 의미는 둘 모두에 의해서 정의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법이 권위의 측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규정은 일상적인 경험의 측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를 두고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모든 정부 행위를 법치주의와 연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모기 떼처럼 많고 귀찮은 규정과 연관해서 논한다. 이러한 측면은 일상생활에서 규정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법과 규정 사이의 의미 스펙트럼에서 규칙의 의미가 규정에 가까운 쪽으로 옮겨졌음을 보여준다."(202-3)


"규정은 가장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규칙이다. 우주를 질서대로 움직이는 장엄한 자연법칙부터 특정한 분야에만 적용되는 세세한 규칙에 이르는 스펙트럼에서, 규정은 후자에 가까이 놓여 있다." "따라서 규정은 작은 범위 안에 모든 것이 응축되어 있는 것의 한 사례이다. 규정은 시공간의 규모뿐 아니라 복잡성과 밀도에 따라서도 급증한다. 넓은 영역에 촘촘하게 짜인 무역망은 엄청난 부와 상품을 창출하여 상업도시에서 사치 금지법을 만들어냈고, 인구 급증과 취약한 기반시설에 대한 요구사항들은 계몽주의 시대 대도시에서 교통 및 위생 규정을 만들었으며, 문해율 상승과 인쇄술의 보급은 철자법을 규칙화하려는 노력을 촉진했다. 볼로냐의 결혼식에서든 파리의 길거리에서든 인쇄된 책의 종이에서든,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이 가속화된 속도로 확장되고 강화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지 규칙은 같은 공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행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등장했다."(273-4)


"규정은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 얇은 규칙이 되기에는 너무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대응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규정은 규칙의 공포에 의한 엄격성과 영원히 지속될 새롭고 개선된 질서를 실현하려는 야망을 지닌다는 점에서, 얇은 규칙을 지향한다고 설명될 수 있다." "규정의 세부성은 규정의 수를 증가시킨다. 세부화할 세부사항은 항상 많고, 막아야 할 허점은 항상 많으며, 저지해야 할 예외와 회피는 항상 많다. 원칙적으로 규정은 만약의 경우나 부가적인 경우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규칙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리 구체적이라고 해도 예외의 발생을 방지하거나 재량권을 발휘할 필요가 없을 수는 없다. 재량권이 규칙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집행하는 사람을 위한 일방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더 많고 더 세부적인 규정은 종종 자멸적인 결과를 낳았다. 너무 많은 규정은 아무 규정도 부과되지 않은 것만큼이나 시행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276-8)


7 자연법과 자연법칙 


"모든 법은 위반될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애초 법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규칙성을 설명하는 데에 왜 〈법칙〉이라는 말을 붙여야 할까?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대부분의 무생물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어길 수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자연법칙〉이라는 개념은 은유로 받아들여야 하며, 이러한 은유는 약간 어색한 것이 맞다. 자연법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운 면이 있다. 그러한 법을 제정하는 〈자연〉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모든 인간 종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인간 본성이라면, 왜 자연법은 항상 매우 가변적인 실정법에 의해서 보충되며 때로는 모순될까? 특히 인간의 행동과 문화의 영역에서 법이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준수될 때, 자연이 가지는 입법 권한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진다. 자연법칙의 물리적 필연성과 자연법의 도덕적 권위 사이의 오락가락하는 움직임은 이 구성 요소들인 〈법칙〉과 〈자연〉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긴장 상태를 보여준다."(280-1)


"법과 자연의 모순이 가장 두드러졌던 17세기 바로 그 시대에, 그때까지 뚜렷이 구분되었던 자연법과 자연법칙의 전통이 가장 크게 공명했다. 이때가 바로 인간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서로 맞물리며 등장한 순간으로, 이 두 가지 개념은 법조인으로 훈련을 받고 새로운 토대 위에 자연철학과 법률을 확립하고자 했던 프랜시스 베이컨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같은 인물들의 저서에서 함께 등장했다. 이들의 저서에 더해 자연법 이론가인 후고 그로티우스, 토머스 홉스, 사무엘 푸펜도르프,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1655-1728)와 자연철학자 르네 데카르트, 로버트 보일, 아이작 뉴턴 같은 학자들의 연구에서도 보편적 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형성되었다. 그것은 바로 전 세계와 가장 멀리 있는 별에까지 적용되는 규칙, 인간의 정신과 사물의 질서에 영구히 새겨진 규칙,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변화하거나 예외에 굴복하지 않는 규칙, 모든 규칙 중 가장 위대한 규칙이었다."(281-2)


"불변하는 보편적 적법성에 대한 견해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날씨와 같이 변화무쌍한 현상의 변덕스러움을 연구한 박물학자들은 기껏해야 지역적 〈규칙〉들을 발견했을 뿐, 결코 안정적인 법칙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보편적인 예측이 특정 상황에서의 정의로움과 너무 자주 어긋났던 인간 세계에서는 항의가 넘쳐났다." "몽테스키외도 1748년에 발표한 『법의 정신』에서 보편법 개념에 강력히 저항하며, 법의 문자와 법의 정신 사이에서 대립하는 성 바울로의 변화를 언급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기후, 토양, 생활 방식, 종교, 부, 도덕, 예의범절에 어울리는 법이 필요했다." "몽테스키외는 자연법과 자연법칙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을 지적했다. 자연법칙은 물리적 필연성에 의해서 준수되는 반면, 자연법은 인간 이성의 동의에 의해서만 준수된다는 점이다." "18세기에 자연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자연법과 자연법칙 사이의 유비는 더욱 약화되었다."(308-9)


"그러나 두 영역을 분리하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조차도 이런 유비를 고수했다. 이마누엘 칸트는 자신이 준수할 법칙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자들의 왕국인 〈목적의 왕국〉과, 철두철미한 자연법칙에 따라 자연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인과의 왕국〉을 형이상학적, 도덕적으로 구분했다. 인간은 두 왕국 모두에 살면서 모든 것을 양쪽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첫째로 자연법칙(타율성)에 의해서 지배되는 감각의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서, 둘째로 자연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선험적이고 이성(자율성)에 근거하는 지적인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서〉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연법과 자연법칙을 거의 분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가장 위대한 규칙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을 밝혀준 보편적 적법성의 은유는 유지했다. 칸트의 정언명령, 즉 실천 이성의 궁극적 법칙은 모든 이성적 존재들에게 권고한다. 〈당신의 행동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310)


8 규칙의 변용과 파괴 


"원래 결의론은 주로 목회자의 목적에서 『성서』 및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 교회법, 학자들의 의견을 특정 사례에 적용하여 해석하는 것을 가리켰는데, 13세기부터 가톨릭 교회 전체에서 고해 신부들이 이를 수행해왔다. 이들은 모두 일반적인 규칙이나 원리로부터 문제가 되는 특정 사건으로 추론해 내려가는 대신에, 사건 자체에서부터 추론을 시작했다." "이러한 경험주의는 특정한 사례에서 보편적 규칙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찰, 실험, 통계 조사와 같은 경험주의와는 다른 부류에 속한다." "사례는 서로 다른 규칙과 원칙을 경쟁하게 하고, 〈규범과 규범의 대결〉 상태를 만든다. 즉, 오히려 규칙이 사례에 종속되는 것이다." "수많은 세부사항과 원칙 사이의 경쟁에서, 결의론자들은 확정적인 판단 대신에 그럴듯한 판단만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 결국에는 어떤 규칙이 다른 규칙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선택되었지만, 이는 다양한 규칙들 간의 경쟁을 거친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318-21)


"형평성은 법과 정의가 어긋날 때 이 둘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며,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를 위해서 법을 변용하는 관행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입법자가 예측할 수 없고 법의 엄격한 적용이 부정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사레에 법의 엄격성을 완화하기 위해서 친절함, 관용, 적절함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에피에이케이아epieikeia를 사용했다. 로마의 치안판사들은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 임시로 법을 변용하고 보완하는 관행을 제도화했다. 중세의 로마법 주석가는 형평성 개념을 공정성의 원칙에 관한 것에서 관련 법규 뿐 아니라 『로마법 대전』 전체를 고려하는 총체적인 것으로 확장했다." "그러나 결의론이 규칙과 원칙을 서로 대립시켰다면, 형평성이 논의되는 경우에는 어떤 법을 적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형평성의 이름이 시험하는 것은 법의 엄격성을 특정한 사례에 적용하는 것이 더 큰 정의에 부합하는지의 문제였다. 형평성은 법을 변용하기는 했지만 부숴버리지는 않았다."(326-8)


"근대 초기 공화주의자들은 통치자의 권력과 그 남용의 위험을 강조한 반면, 자연법 이론가들은 통치자의 지혜와 명령을 강조했다." "17세기 전반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1세의 일방적인 세금 부과와 찰스 1세(재위 1625-1649)의 죄 없는 투옥 명령 등 대권행위를 둘러싼 갈등은 왕의 특권이 〈법의 지붕 아래 놓기에는 너무 높다〉고 주장한 사람들과 국민이 〈무한한 자의적인 권력 아래에 노출될 것이며 그로 인해 복종이 끝나지 않게 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 사이의 논쟁을 촉발했다." "어떤 입법자도 미래의 모든 상황을 예견할 수는 없었고, 그 때문에 모든 법은 예외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집행적 특권은 형평성의 극단적인 형태였다. 형평성이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 개입하여 법원이 불의를 저지르지 않도록 구했듯이, 특권은 일반적인 비상 상황에 개입하여 정치체를 재난으로부터 구했다. 두 경우 모두에서 규칙이 예측하지 못한 상황은 규칙을 변용하거나 파괴하는 조치를 필요로 했다."(340-2)


"모델이나 지침으로 여겨지는 규칙들은 형식화된 규칙 자체에 가변성을 내포한다. 예시, 경험, 예외는 이러한 규칙의 계율을 더욱 두껍게 만들고 실제로 집행될 때에는 더욱 유연해지게 만든다. 변동성이 크고 예측 가능성이 낮은 세상에서 예외는 모든 면에서 규칙과도 같았다. 예외는 규칙이 예외를 포함해야 했을 정도로 너무나도 자주 발생했다. 상황에 대응하여 즉흥적으로 결정을 하거나, 규칙을 조정하거나, 상황에 적응시키는 일은 당연한 작업으로 여겨졌다. 규칙을 만드는 기술이란 예측할 수 있는 상황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을 모두 수용할 수 있도록 충분한 규칙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어떤 규칙도 재량의 필요성을 완전히 없앨 정도로 얇거나 엄격하지는 않다. 가장 얇은 규칙인 컴퓨터 알고리즘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엣 알고리즘의 오류와 과잉을 바로잡기 위해서 수많은 익명의 인간 감독자를 필요로 한다. 모든 얇은 규칙 뒤에는 그것을 따라다니면서 청소 작업을 해주는 두꺼운 규칙들이 존재한다."(346-8)


에필로그 | 따르기보다는 깨는 편이 명예가 되는 규칙들


"규칙의 적은 규칙이 부과하는 제한 때문에 종종 고난에 처한다. 분별은 모든 면에서 부정되고, 새롭고 더 나은 업무 방식은 관료주의로 인해 묵살되며, 실제 기계가 시행하는 기계적 규칙은 인간과 상황의 자연스러운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나 엄격하든 얼마나 완고하든 상관없이, 모든 규칙은 은밀한 규칙 추론을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 어떤 규칙을 따르거나 위배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명시적 규칙이 추방한 능력인 판단, 재량, 유추의 능력─모호하지만 필수적인─을 갈고닦게 된다. 이 상황에 어떤 규칙이 잘 들어맞을까? 규칙을 상황에 더 잘 맞게 조정해야 할까? 규칙의 정신이 우선해야 할까, 아니면 문자 그대로의 규칙을 우선해야 할까? 평소 이러한 문제에 대한 판단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고 확실하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규칙서 없이 규칙 위반의 상황에 빠지면, 우리는 규칙에 대해서 추론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규칙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3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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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유신 사무라이 박정희 - 낭만과 폭력의 한일 유신사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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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어떤 죽음에 붙이는 조사(弔詞)


이 책의 주인공은 ‘유신’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한국의 ‘10월 유신’에 붙는 바로 그 유신이다. 유신은 일본열도에서 태어난 하나의 정념(情念)이다. 이 정념은 야수가 되고 괴물로 진화했으며, 급기야 거대한 괴수로 자라나 무차별한 파괴를 자행하며 파멸로 치달았다. 일본이 벌인 여러 전쟁과 침략은 그 벼락부자 같은 일본의 번영과 함께 모두 ‘유신’의 결과물이다. 유신은 두 방의 핵폭탄과 함께 죽은 듯 보였으나,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박정희와 청년 장교들과 함께 부활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유신 지사 김재규에 의해 사멸한다. 자기 파괴적 운명을 갖고 태어난 유신에게 사멸은 곧 완성이었다. 공교롭게도, 하지만 유신 자신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가장 낭만적인 죽음이었다. 이 모든 사연을 하나의 이야기로 품기 위해, 나는 유신이라는 맹목적인 괴수의 일생을 연대기로 풀며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넘나들어야 했다. 그것은 죽음을 탐미한 낭만과 폭력의 역사였다. 11-2)


1장 씨앗: 바람이여, 흉포해져라


13세기 일본의 전쟁 풍경은 ‘명예전쟁’의 형태에 가까웠다. 중세 일본의 전투는 ‘나노리(名乗り)’로 시작되었다. 전투를 치루기 전 무사가 자신의 이름과 신분, 족보를 상대에게 외치는 의식이다. ‘지금까지 3승 1패’ 식으로 자신의 전투 이력을 공개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싸움은 정당하며, 상대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전투에 임하는 명분을 밝힌다. 먼저 나노리를 한 장수는 상대가 자신의 나노리를 들어주었으므로 이번에는 상대가 나노리를 끝낼 때까지 기다려주어야만 했다. 의식이 끝나면 예법에 따라 싸움은 둘 중 하나로 전개된다. 하나는 대장끼리 1:1로 싸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원한 군사 모두가 다 함께 싸우는 것이다. 둘 모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활만 사용했다. 엄밀히 말해 전투가 아니라 궁술 대결이었다. 중세 일본의 전투는 전투라기보다는 궁술과 예법, 세 과시가 어우러진 ‘활동’이었다. 이런 군대가 세계 최강의 여몽연합군을 만났을 때 벌어질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15-6)


그러나 일본의 무사집단을 차례로 휩쓸어버린 여몽연합군은 의외의 복병을 만나 자신들도 휩쓸려버렸다. 바로 일본인들이 신의 바람, 가미카제라 부르는 태풍에 의해서다. 1차 원정에서 원정군의 함대를 쓸어버린 태풍은 7년 후 2차 원정에서도 기적처럼 나타나 연합군을 쓸어버렸다. 이로써 또 하나의 관념이 탄생하였다. 몽골의 세계정복 관념이 결과적으로 일본인에게 선사한 관념은 바로 안과 밖을 나누고 ‘안’과 ‘우리’를 절대적으로 신성시하는 것이었다. 밖에서 안을 공격하는 건 사악한 행위며, 이는 결국 하늘의 응징을 받을 것이다. 일본에는 천황가의 혈통이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는 뜻의 만세일계(萬世一系)라는 말이 있다. 만세일계가 유전적으로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이 말은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독립적이고도 단순한 신화의 구조를 보여준다. 만세일계는 본질적으로 한 가문의 혈통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일본은 계속해서 일본이었으며, 다른 존재였던 적이 없다.’는 선언이다. 16-7)


여몽연합군에 맞선 일본 무사들은 용감했지만 죽기 위해 싸우는 수준이었다. 용맹은 비극이 되었고, 다시 이 비극은 가미카제에 의해 낭만이 되었다.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죽은 결과 하늘이 도와주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제사의 구조다. 세상에서 가장 탐미적인 인신공양이다. 선조들은 진심을 다해 싸우다 죽기를 반복하며 인신공양의 기우제를 지냈고, 인간들의 낭만적 죽음에 하늘은 가미카제로 응답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끝없이 자살적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전쟁수행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온 국민이 미군에 저항하다 죽겠다는 일명 ‘1억 옥쇄’는 전술이 아니라 거대한 제사 계획이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멸망을 향해 가는 행위였지만 결과는 이미 하늘의 일이었던 것이다. 가미카제를 통해 일본인들의 관념 속에서, 일본은 하늘이 지켜주는 ‘신토(神土)’임이 증명되었다. 그리고 신토를 침략한 대륙세력 특히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반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괴수가 되었다. 17)


2장 잉태: 초대받지 않은 손님


기술적 수준에서만 따진다면, 동아시아는 역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서양을 앞선 데다, 뒤쳐진 분야가 있을 때도 곧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생산에 들어가는 비용이다. 근대 서양의 힘은 공장에서 똑같은 기술적 수준의 물건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었던 데서 기인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대량생산 공정끼리 맞물려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표준화’라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함선을 예로 들면 어떤 함선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의 유무보다는 정확히 같은 기능과 신뢰성 그리고 규격을 갖춘 함선을 얼마나 쉽게 뽑아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기술 자체보다 기술의 결과를 어떻게 내놓는지가 핵심인 것이다. 사회구조와 경제체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핵심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런데 불행히도 19세기 동아시아 3국(한중일)은 서양의 기술 자체에만 시선이 사로잡혔다. 19세기 서양 문물의 뛰어남에 충격을 받은 동아시아 3국은 한자만 다를 뿐 정확히 같은 뜻을 지닌 단어를 되뇌었다. 29-30)


#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여몽연합군에 이은 두 번째 고질라는 흑선(黑船)이었다. 1853년, 페리 제독(1794-1858)이 이끄는 4척의 증기선 군함이 에도 막부의 본거지에서 가까운 우라가, 현재의 요코스카 앞바다에 나타나 개항(開港)을 요구했다. 사실 막부는 미 해군이 나타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막부는 침착하게 적당히 시간을 끌고 되돌려보냈다. 다음 해 페리 제독이 이번에는 9척의 흑선을 이끌고 왔을 때 막부는 순순히 굴복했다. 막부가 미국의 무력시위에 순응한 이유는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외려 국제적인 감각이 있어서였다. 막부는 1차 아편전쟁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어차피 9척의 흑선을 물리친다고 해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서구 열강은 그냥 물러서는 법이 없었으니까. 어쨌거나 이번에도 일본 민중이 막부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작 9척의 배에 백기를 든 사실이 알려지면서 막부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마 막부도 그 정도의 반감이 일어날 거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31)


사무라이들은 막부가 일본에 전쟁 없는 경제적 번영을 가져왔기에 불편해도 그간의 억압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막부가 자격을 상실한 이상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기에 더해 또 한 사람이 크게 분노했다. 바로 고메이 천황이다. 천황은 오히려 일본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반대로 일본의 자연물인 천황은, 자신의 인격과도 같은 일본이 허락 없이 외국에 개방되는 사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사무라이는 윗사람을 섬기고 윗사람은 더 높은 권력자를 섬긴다. 충(忠)의 최종 기착지는 쇼군이었다. 그런데 쇼군보다 더 높은 천황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더군다나 천황폐하께서도 쇼군에 분노하고 있다면! 그래서 사무라이들은 순식간에 토막(討幕), 막부를 토벌한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을 수 있었다. 하급 사무라이들은 존왕양이(尊王攘夷), 천황을 받들어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겠다는 기치를 내걸고 들불처럼 일어났다. 32-3)


3장 탄생: 신성한 타락


사쓰마는 어느 정도의 전투역량을 가진 작은 병영국가였다. 1863년 8월, 사쓰마와 영국 간에 벌어진 사쓰에이전쟁은 영어로 ‘Bombardment of Kagoshima(가고시마 포격전)’이다. (여기서 영국 함대의 후퇴로 간신히 거둔) 사쓰마의 ‘승전’은 모순적이다. 이익을 위해 승리했다기보다는 승리를 위해 파멸적인 피해를 감수했다. 천황의 인정과 승리 자체라는 추상적인 영광을 얻은 대가로 사무라이와 주민들은 전후 복구에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복구가 끝난 뒤에도 희생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다음의 더 큰 승리를 위해 더 강해져야 하므로 더 많은 비용과 노동을 투입하면서, 공동체 구성원들이 겪어야 할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가치만 남는다. 물론 가치를 위해 사대부가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민중이 헌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현실적 결과를 위한 가치여야 한다. 가치 자체만을 위한 가치는 현실을 파괴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성립된 일본제국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일이다. 42)


사쓰마에서 영국과 갈등이 높아지던 1863년 6월, 조슈에서도 서양세력을 상대로 무력 갈등이 일어났다. 6월 25일,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다 잠시 정박한 미국 상선 펨브로크 호(Pembroke)에 조슈 번의 군함과 해안포대가 갑자기 대포를 쏘기 시작한 것이다. 조슈의 번사들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실력행사를 통해 일본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면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비교적 평등한 조약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믿어서였다. 무력 갈등은 곧 시모노세키전쟁이 되었다. 서구 열강의 강력한 힘을 확인했음에도 조슈 번사들은 여러 부대들을 새로 창설하고 투쟁 일변도로 맞섰다. 조슈 번이 서양 군대에 점령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번사들은 이웃한 번인 고쿠라(小倉) 번에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고쿠라 번의 일부를 점령해 그곳에서 해안포대를 쌓아 다시 저항했다. 후퇴 없이 오직 직진만 하는 의지는 대단했지만 전황을 바꾸기는 불가능했다. 조슈는 시모노세키전쟁에서 참패했다. 43)


막말(幕末)에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이바라키현에 해당하는 미토(水戶) 번의 역할은 지대하다. 미토 번사들 역시 조슈와 사쓰마 번사들처럼 가치투쟁에 자신들의 목숨을 아낌없이 몰아넣었다. 정작 유신 정부가 수립되자 미토 번은 단 한 명의 정부 요인밖에 배출할 수 없었다. 실력 있는 번사들이 모두 죽은 후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했다. 그 모든 무모함과 과격함은 결국 옳았다. 일본은 옳은 나라이므로 이제 밖/세계를 상대로, 즉 청나라와 러시아, 미국에 싸움을 걸어야 한다. ‘상대가 강대한 데도 불구하고/옳은’ 전쟁이므로 싸운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에는 ‘상대가 강대한 만큼 무모한 전쟁이므로/옳다’는 무서운 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살아남지 못해 지워진 미토 번 대신 어쨌든 살아남아 역사에 길이 남은 죠슈와 사쓰마의 운명은 이후 일본이 겪은 폭주의 경로와 그 결과를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로 남았다. 46-7)


수많은 지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했더니 유신이라는 선물이 주어졌다. 여기서 소위 ‘지사 문화’라는 게 생긴다. 자신의 신념과 대의에 따라 목숨을 거는 행위를 존경하는 문화다. 선과 악으로 이루어진 윤리적 세계관에서 ‘나’는 올바름을 위해서 싸운다. 이때 ‘나’의 적은 올바를 수 없다. 그는 악이다. 만약 적을 인정하면 나는 싸움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투쟁을 그만두던가, 상대편을 인정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정의가 아니면 불의이기 때문이다. 미학적 세계관에서 ‘나’의 올바름은 상대적이다. 나는 나의 올바름을, 적은 그의 올바름을 위해 싸우고 죽는다. 이런 죽음은 탐미적이다. 적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아름다우면 된다. 마초적이고 생사에 초탈하면 인정해 마땅하며 감동하게 된다. ‘큰 정의’나 ‘작은 불의’ 따윈 없다. 뜻이 크거나 작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기개, 패기, 혈기, 기세 등의 말로 표현된다. 미학적 세계관은 올바름이 아니라 멋스러움을 추구한다. 52-4)


4장 팽창: 전쟁중독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스스로도 무모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은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청일전쟁에 동원된 중국군은 사실 군벌인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이 소유한 사병이었다. 사기와 훈련도에서 일본군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홍장은 자기 사병의 희생을 염려했다. 사병이 희생을 치르면 중국 내 다른 군벌들과의 경쟁에서 불리해질 뿐이다. 그래서 청군은 소극적으로 싸우며 여차하면 후퇴를 거듭했다. 바꿔 말하면, 그렇게 싸워도 일본을 이길 거라고 계산했다. 이홍장의 계산이 틀린 것만도 아니다. 일본군은 평양 전투에서 식량과 탄약을 모두 소진했다. 조슈 출신 장교들은 천황폐하의 황군은 후퇴도 항복도 할 수 없다며 최후의 자살 돌격을 준비했다. 바로 그 순간 청군이 항복했다. 일본군의 모습을 본 청군은 저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군대가 식량도 탄약도 모두 떨어졌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무모함이 상식의 선을 넘으면, 거꾸로 상식이 속아 넘어가는 법이다. 68)


19세기와 20세기 초까지의 함대는 21세기의 핵잠수함과 다르다. 필요할 때마다 육지에 배를 대고 석탄을 공급받지 않으면 배는 그저 바다를 표류하는 비싼 고철이 되고 만다. 전투력이라는 것은 사시사철 필요할 때 언제든 발휘할 수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함대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1년 내내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이 필요하다. 당시 러시아제국은 영국과 함께 세계의 2강이었다. 충분한 부동항을 확보하지 않고는,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발트함대도 영국에 대적할 수 없다. 영국이 ‘세계 최강’의 함대가 활동할 수 있도록 조건을 허락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반도는 부동항이 넘치는 곳이다. 러시아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동항 후보지는 한반도 남해였다. 일본에서는 러시아를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다른 상식적인 논의를 짓눌러버렸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청일전쟁의 승리가 선사한 관념이었다. ‘일본인은 불리하기 때문에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고 이길 것’이라는 논증이 되고 마는 것이다. 71)


애초에 패전하고 배상금을 물어야 할 때는, 상대가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어서다. 일본은 이겼다. 그러나 이기기만 했다. 모든 역량을 소진하고 껍데기만 남은 일본은 러시아에 대포 한 발 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러시아라고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러시아는 받아내고 싶은 게 있으면 다시 쳐들어와서 실력으로 받아내라고 일본에 큰소리쳤다. 결국 일본은 배상금 없는 전후처리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올랐다. 이기기만 하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받고 삶에 숨통이 트일 거라고 기대했던 일본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마침 전사자의 시체와 팔다리를 잃은 부상병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군인들의 영웅적인 희생으로 얻은 결과를 무능한 정치인들이 망쳤다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다. 도시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일본 내각은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대거 사임한 자리를 군인들이 채웠다. 결과적으로 군부의 힘이 더 강해지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일어났다. 80)


이미 일본 경제는 프로파간다로 수습할 수 없을 지경으로 붕괴한 채였다. 일본에 남은 운명은 좋아 봐야 국가 부도 사태였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쓰시마 해전을 주의 깊게 관찰한 영국은 미래 해전을 위해서는 한 단계 발달한 형태의 군함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드레드노트(Dreadnought)급 군함이다. 자금과 역량이 풍부한 서구 열강이 드레드노트급 개발 경쟁에 뛰어들자 일본이 그때껏 피눈물을 흘려가며 손에 넣은 모든 전함은 구식이 되고 말았다. 기껏 무수한 풍파를 겪으며 러시아를 꺾는 열강의 지위에 오른 일본은, 드레드노트의 시대가 오면서 순식간에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아무것도 없는 공백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이미 폭력의 트랙을 질주하던 일본은 관성대로 드레드노트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인간인 이상 더는 견딜 수 없었고, 러일전쟁을 통해 내부적으로 파멸해온 일본 역시 비참한 몰락이 예정돼 있었다. 기적이 없는 한 일본과 유신은 끝장이었다. 80)


5장 폭주: 정결한 세계를 지키는 야만


1913년 당시 일본의 총리는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 1852- 1933)다.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나 사쓰에이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전형적인 유신 지사였다. 조슈 번사보다 합리적인 경향이 있는 사쓰마 번사답게 그는 문민주의자였다(어디까지나 조슈의 관점에서다). 그가 속한 사쓰마-해군 세력에 의해 일본이 ‘나약하게 타락하는’ 모습을, 조슈 번벌은 앉아서 지켜볼 수 없었다. 사쓰마를 막기 위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가 나섰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조일수호조약으로 한반도와 인연을 맺은 정치가이자 외교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5-1915) 등과 함께 ‘조슈의 3대 인물’에 꼽히는데, 특히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제국 군국주의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유명하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해군과 지멘스 사이의 비리(해군이 말도 안 되는 높은 가격에 드레드노트 관련 제품을 구입하면, 매출액의 15% 가량을 일본 해군에 상납한다)를 독일 정부에 일러바쳤다. 93-4)


일본은 드레드노트 하나에만 국가 재정의 30%를 쏟아붓고 있었다. 현재 일본의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은 1%가 조금 넘는 수준이며, 그나마 1%의 벽도 수십 년 만에 간신히 깨졌다.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병영국가인 북한의 GDP 대비 국방비 비율이 23% 수준이다. 1913년 당시 일본인의 삶의 질은 드레드노트라는 괴물에 잔혹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해군과 외국 자본의 협잡이 드러난 것이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그런데 조슈의 예상보다 더 분노하고 말았다. 조슈 번벌은 사쓰마가 퇴진하고 자신들이 정권을 탈환하는 정도까지만 국민이 분노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일본 민중은 길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는 것은 물론이고 국회의사당에까지 쳐들어갔다. 일본 민중은 사쓰마는 물론 조슈까지 포함한 번벌 세력 전체를 타도 대상으로 삼았다. 지멘스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는 문민정부가 출범했으며, 최초로 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이어진 십수 년간의 시기를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른다. 94)


여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한국인은 구시대를 청산할 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속담처럼 문자 그대로 뒤집어 엎어버린다. 한국인은 확실한 변화가 아닌 것을 개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김영삼이 하나회를 단박에 소멸시켜 군부를 청산해버린 데에는 그의 개인적인 성품도 큰 몫을 했지만, 결국은 그러한 과단성을 한국인들이 지지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일본은 다르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문민통치가 군부통치에 근소한 판정승을 거둔 상태다. 더 냉정하게 진실을 말하자면, ‘군부가 어쩔 수 없이 문민 세력의 존재를 용인해주는 상태’다. 당시의 일본에서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 같은 사무라이 출신 군인이 일본 총리나 조선 총독이 되어도, 조슈와 사쓰마 번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데모크라시’로 불릴 수 있었다. 실제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일본 정치의 막후로 정계를 주름잡았다. 군부정치라는 간판을 내려 보이지 않는 곳에 잘 비치해두었을 뿐이다. 95)


두 번의 국제전과 드레드노트에 혈액과 장기까지 팔아치운 일본은 중환자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정도로 건강을 회복할 상태가 못 됐다. 여전히 일본은 장기적으로 멸망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계속된 우연적 행운이 이번에도 갑자기 불어닥쳤다. 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일본은 훗날 비슷한 행운을 한국전쟁을 통해 한 번 더 누리는데, 두 번 모두 세계 1류 국가로 일어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차대전 당시 미국산 공산품은 21세기 초반인 현재의 기준으로 중국제 정도의 위상을 지녔다. 일본 제품에 대한 신뢰성은 지금의 베트남제 정도였다. 양쪽 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유럽에 막대한 무역 흑자를 기록하며 일본은 되살아났다. 아니 부활한 정도가 아니라 다시 태어났다. 일본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화려한 변신에 성공했다. 1차대전이 끝나고 나면 남의 전쟁으로 우뚝 선 두 나라,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 지배권을 놓고 대결하는 시대가 온다. 97-8)


1923년, 모든 것을 집어삼킬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제국의 번벌 세력은 관동대지진이라는 기회를 틈타 ‘내부의 적’을 설정해 제국주의에 반항적이던 일본 국민을 결집하는 데 단번에 성공했다. 일본 군부에 있어 재일 조선인은, 히틀러에게 있어 독일에 사는 유대인과 같은 의미의 땔감이었다. 일제 군부는 자신들이 도취한 유신의 정념에 일반 국민을 포섭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폭력의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다. 관동대지진 2년 후 1925년, 유신은 군국주의 일본의 틀을 완성한다. 치안유지법을 통해서다. 치안유지법은 한국의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의 아버지다.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수습한다는 핑계로 실행된 치안유지법의 핵심은 두 가지다. 감히 천황제의 신성함을 의심하지 말 것 그리고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지 말 것이다(사회주의를 탄압하기 위한 명목이었다). 천황은 다시 절대적인 군 통수권자가 되어 군부가 자행하는 모든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마법의 장치가 되었다. 102)


6장 광기: 순수의 시대


유신의 폭주로 인해 실행된 치안유지법은 아이러니해 보인다. 이 법이 발효된 후부터 약속이나 한 듯 젊은 군인들이 무력을 동원해 쿠데타와 하극상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상식적으로 보면 쿠데타, 항명, 기타 다양한 폭력사고는 치안유지법으로 억압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치안유지법이 오히려 폭력투쟁의 에너지를 조장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치안유지법은 천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법의 근거로 삼는다. 즉, 천황에 대한 마음만 진심이라면, 어떤 행동도 인정받는다는 논리가 숨어 있다. 비록 죽음으로 대가를 치를지언정 결기 자체는 존중받는 ‘지사’의 시대가 다시 열린 것이다. 천황의 신성함은 절대적 진리가 되었으므로, 치안유지법 실행 이후의 폭력은 ‘내가 천황폐하를 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순수성 투쟁’의 증거로써만 가치 있게 되었다. 천황을 사랑하는 한 어떤 짓도 할 수 있으며, 폭력에 천황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유신의 광기는 중국 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06)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 만주사변은 결과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에 와서 ‘용의주도’하게 설계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건을 기획한 사람은 단 세 명의 관동군 장교였으며, 상부의 명령도 없이 제멋대로 저질렀을 뿐이다. 만주사변으로 확대된 9월 18일의 류탸오후(柳条湖)사건의 계획은 이렇다. 1928년 6월 4일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 1883-1955)가 주도한 황고둔(皇姑屯)사건으로 아버지 장쭤린을 잃은 장쉐량이 식식거리고 달려들 줄 알았는데, 국민당과 손을 잡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전쟁에 목마른 관동군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그들은 관동군이 치안을 담당한 남만주철도의 선로가 폭발한다면 장쉐량의 짓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동북군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으니 관동군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승리가 모든 과정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래서 주동자들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철로를 폭파해버렸다. 112)


관동군은 다음 해인 1932년 2월 만주를 완전히 장악했다. 일본은 생각하지도 못한 싼값에 덜컥 만주를 손에 쥐었다.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국가적 영웅이 되어 파격 승진했다. 사실 이제까지 조선과 대만은 들인 노력에 비해서 그렇게 돈이 되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조선인들의 고혈을 짜내긴 했지만, 식민지에 저지르는 악행에 비해서는 수지 타산이 좋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말도 잘 듣지 않고 쓸데없이 똑똑했다. 같은 한자 문명권 안에서 오랫동안 공존했기에 백인 통치자가 손쉽게 다루는 흑인이나 인디오보다 훨씬 골치 아픈 상대였다. 일본이 부러워하는 ‘식민지다운 식민지’는 남아프리카나 브라질, 인도처럼 광대하고 풍요로운 먹잇감이었다. 만주를 차지해 ‘식민지 갈증’이 단박에 해소된 일본이 만주사변 주동자들을 두둔하고 추켜세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의 젊은 군인들 사이에 결과는 하늘에게 맡기고 일단 무력을 휘두르고 보자는 과격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114-5)


일본의 군국주의가 완전무결하게 완성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건이 더 필요했다. 1936년 벌어진 2·26사건이다. 이 사건의 정신적 배경에는 기타 잇키(北一輝, 1883-1937)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1920년대부터 황도파 청년들의 사상적 스승 노릇을 했다. 아시아의 수많은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기타 잇키 역시 신해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신해혁명을 지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중국 현지에서 혁명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기타 데루지로(北輝次郞)였는데,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식 이름인 잇키(一輝)로 개명했다. 이 이름은 한편으로 민중 봉기를 뜻하는 일본어 잇키(一揆)와 발음이 같다. 그의 개명은 혁명가 쑨원의 호(號)가 일본식 이름인 중산(中山;나카야마)인 것과 쌍을 이룬다. 중국인인 쑨원은 일본에서 근대화를, 일본인인 기타 잇키는 중국에서 혁명을 꿈꾸는 법을 배웠다. 그는 열혈 청년들과 장교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일본 정치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118)


황도파 장교들은 어려서부터 천황제일주의를 교육받았다. 천황에 대한 충성심은 흔들림 없었지만, 일본의 현실에 대해서는 분노했다. 당시 일본은 농촌의 인구가 도시보다 많았다. 순혈이 되지 못하는 대부분의 장교들은 농촌 출신이었다. 그들은 농촌에서 지주나 사족(士族, 사무라이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에서 일반 농민의 아들, 도시의 노동계층 자제로 구성된 사병들에게 일본 민중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모순적인지 전해 들었다. 일본 민중의 삶은 엉망이었다. 사병의 부모들은 고된 노동에도 굶기 일쑤였고 자라면서 누이가 팔려가는 모습을 본 경우도 허다했다. 이들은 일본제국을 뿌리부터 뜯어고치기 위해 기타 잇키의 지령에 따라 약 1,500명으로 구성된 ‘결기(決起, 떨쳐 일어남)부대’를 결성했다. 그들의 목표는 메이지 유신보다 순수한 ‘쇼와 유신’ 그리고 ‘존황토막(尊皇討幕, 천황을 받들고 막부를 토벌함)’을 대신한 ‘존황토간(尊皇討奸, 천황을 받들고 간신을 토벌함)’이었다. 119)


2·26사건을 오해하면 안 된다. 직관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아무리 일본이 총칼을 들고 일어난 젊은 혈기를 참아주는 지사 문화에 젖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2·26사건처럼 과격한 행동은 도무지 참고 넘어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상은 반대다. 과격한 세력을 더 과격한 세력이 진압하고 일본을 완전히 거머쥔 사건이다. 그 바탕에는 순수성 투쟁이 있다. 통제파는 황도파와 경쟁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 자신도 순수해져야 했다. 순수함의 결론은 ‘고도국방국가(高度國防國家)’였다. 일본을 위해 전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 일본이 존재하는 체제다. 황도파의 사상이 사회주의적 파시즘이라면 통제파의 그것은 순수한 파시즘이었다. 관동군이 된 황도파 장교들은 만주군 소속 조선인들에게 기타 잇키의 사상과 2·26사건을 열심히 설명했다. 실패한 거사는 그들에게 낭만적인 전설이 되었다. 전설을 전해 들은 조선인 중에는 훗날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도 있었다. 120-1)


1937년 7월 7일 발발한 중일전쟁은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으로 시작된다. 그 유명한 무타구치 렌야(牟田口廉也, 1888-1966)는 독단적으로 부대를 이끌고 관할지를 넘어 루거우차오를 무단 점거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스기야마 하지메는 쇼와 천황에게 어째서 아직도 중국이 정복되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들었다. 그렇게 유신은 중일전쟁, 아니 죽음의 길로 홀린 듯 빠져들었다. 태생부터 자살적인 유신의 숙명이었다.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돈과 자원이 필요했다.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을 점령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태평양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싸워야 했다. 일본은 전쟁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위해 또 전쟁을 시작했다. 그 종착역은 필연적 죽음이었으므로, 이제 유신 자체가 된 일본은 죽음을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옥쇄, 반자이 돌격, 가미카제는 모두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123)


7장 임종: 덴노 헤이카 반자이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도 많다. 일본은 점과 선을 확보할 수 있었을 뿐 면은 차지할 수 없었다. 점은 도시, 선은 도로와 철도다. 그러나 진짜 중국은 강산과 농경지 그리고 농민이었다. 장제스와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배운 수법을 일본군에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바로 게릴라전이었다. 일본은 늪에 빠졌다. 이 경우 일반적인 집단이라면 어떻게 늪에서 빠져나올지를 고민하지만, 일본은 어떡하면 늪에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갈까를 궁리했다. 그렇게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國家總動員法)이 시행된다. 국가총동원법은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국가가 통제하는 법이다. 이 법을 무기로 일본 군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껏 처분할 수 있었으며, 노동쟁의를 포함해 모든 쟁의가 부정되었다. 이때 나온 슬로건이 거국일치(擧國一致, 온 나라가 하나로 뭉침), 진충보국(盡忠保國, 충성을 다해 나라를 지킴)이다. 국가총동원법 아래에서 일본과 식민지 민중들은 진액까지 짜이고 말았다. 129)


1941년, 평균 연령 33세인 일본 최고의 인재 35명이 선발되어 총리실 산하로 집결했다. 이들의 모임을 ‘총력전 연구소’라 불렀다. 총력전 연구소는 여름 내내 미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가정 하에 모든 상황과 가능성을 고려하여 전쟁 결과를 예측했다. 몇 번을 계산해도 결론은 명백했다. 일본은 반드시 패배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했던 도조 히데키는 젊은이들을 훈시했다. 〈연구에 대한 제군들의 노고가 크지만 실제 전쟁이란 것은 책상머리 회의와는 다르다. 러일전쟁도 모두 우리가 질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승리했다. 전쟁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제군들은 그 의외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천황이 납득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전쟁이 결정되었다. 이 전쟁은 일본 육군의 입장에서 부르는 말로는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 육지 점령전을 뜻한다. 해군 중심으로 보자면 미국과의 태평양 제해권 싸움인 ‘태평양전쟁’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결국 태평양전쟁에 수렴된다. 134-5)


일본은 홍콩, 인도차이나, 필리핀, 동인도제도, 버마를 모조리 쓸어 담으며 일단은 빈집털이에 성공했다. 현지 주민들은 처음에 일본을 환영했다. 환호성을 지른 곳도 있었고, 조용히 관찰한 지역도 일본을 우호적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적으로 돌아섰다. 일본은 공짜로 얻은 유리한 전쟁 환경을 스스로 걷어차고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특히 필리핀에서 큰 곤란을 겪었다. 필리핀 전역은 일본군과 미군을 합쳐 문자 그대로 백만대군이 뒤얽혀 싸운 초대형 전장이다. 여기서 일본은 최소 30만 이상, 최대 52만 명 이하의 전사자를 낳았다. 태평양전쟁 전사자 수의 절반 이상이 필리핀의 산악과 정글에서 죽고 말았다. 일본을 끝장낸 것은 필리핀을 떠나며 “나는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고 한 약속을 지킨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휘하의 미군이지만, 그때까지 일본군을 붙잡고 괴롭힌 건 ‘처음엔 일본군을 환영한’ 현지인 게릴라였다. 137-9)


미군의 일본 본토공격작전의 이름은 무시무시하다. 바로 ‘몰락작전(Operation Downfall)’이다. 미군 총인원 백만 명 이상이 책정되었다. 여기에 소련, 영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중화민국, 뉴질랜드가 연합군으로 참전할 예정이었다. 일본이 ‘외지(外地)’에서 저지른 악행이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일본 열도에 그 어떤 공격을 퍼부어도 도덕적인 문제가 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일본군은 치치지마(父島)에서 미군 포로를 미식과 여흥을 위해 잡아먹기도 했는데,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죽어야 할 일본인의 수는 소리 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대본영도 전쟁에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러면 항복하면 된다. 하지만 미국이 몰락작전을 수립할 즈음, 일본은 탐미적인 몰락을 꿈꿨다. 조종사와 전투기가 적함을 들이받아 자폭하는 ‘가미카제 특공’이 실시되었다. 다시금 전쟁은 제사가 되었다. 도미나가 교지는 가미카제 특공이 출격할 때면 조종사들에게 술을 따라주면서 ‘제군들은 이미 신’이라며 찬사를 바쳤다. 147-8)


일본은 가미카제가 통한다고 느끼자 아예 가미카제 전용기인 츠루기(劍, 검)를 생산했다. 이외에 1인용 인간 자폭어뢰 가이텐(回天, 회천), 인간 자폭로켓탄 오우카(桜花, 앵화), 자폭보트 신요(震洋, 진양), 인간 자폭잠수부 후큐류(伏龍, 복룡) 등 인신공양 제사용품들이 쏟아져나왔다. 일본의 공업생산력은 완전히 붕괴한 후라서, 일회용 자폭 병기 이상을 만들기도 힘들었다. 도조 히데키는 ‘1억 총옥쇄’를 부르짖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참으로 불길하게도, 1억이란 숫자엔 조선인까지 포함돼 있었다. 도조 히데키가 입에 담은 ‘죽창’은 진심이었다. 일본은 ‘본토결전(本土決戰)’ 전에 이미 사기그릇 수류탄, 유리병 수류탄을 만들어 사용했다. 금속 제련은 비용이 많이 드는 탓이었다.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학교의 책걸상을 잘라 만든 15세기 기술 수준의 화승총*, 13세기 구조의 원시적인 로켓을 제작했다. 기원전부터 사용되던 투석기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학생들에게 죽창을 사용한 창술 훈련을 시켰다. 148-9)


* 금속제 책걸상 다리를 총구로 사용했으며, 총몸과 개머리판은 책걸상의 목재로 충당했다.


일본은 미군정(GHQ)의 통치하에 들어섰다. 그런데 항복 직후의 일본에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특이한 점이 있었다. 일본은, 국가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미군을 위한 위안소(慰安所)를 설치했다. 55,000여 명의 여성이 모집되어 미군의 성욕 해소를 위해 일했다. 직관적으로 보면 더없이 비굴해 보인다. 맥아더는 위안소를 역겨워해 ‘민주주의의 이상에 방해된다.’며 폐쇄해버렸다. 어째서 일본은 자발적으로 자국 여성을 점령군에게 바쳤는가. 이는 사실 마지막 ‘전투 행위’다. 일본은 자국 군대가 그랬으므로, 미군 역시 일본 여성을 집단강간할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인에게 일본 여성의 자궁은 일본의 자연물이다. 미군 위안부는 나머지 여성을 지키기 위한 ‘최후방어선’이다. 그들의 자궁은 본토를 지키는 옥쇄이면서, 반자이 돌격이나 가미카제 특공을 감행하는 ‘병정’이었다. 남자 군인의 목숨과 여성 자궁의 순결함을 1 대 1로 치환하면 위안소 운영의 ‘관념적 실체’를 명징하게 이해할 수 있다. 150-1)


8장 부활: 윤리적 세계와 미학적 세계


1946년 5월 8일,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가 미군 수송선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름은 박정희(朴正熙, 1917-1979). 그는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한 1945년까지 관동군 장교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였지만 조선인 박정희로 되돌아왔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박성빈과 백남의 사이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초대 부통령 이시영, 2대 부통령 김성수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 이들은 조선인으로 태어나 대한제국의 근대화 시도를 목격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민족 정체성을 재확인했고, 최종적으로 한국인이 되었다. 이승만과 이시영, 김성수에게 일제강점기는 자신의 생애 안에 걸린 액자다. 반면 박정희는 태어날 때부터 국적이 일본제국이었다. 민족사(史)가 아닌 개인의 삶을 기준 삼으면 엄밀히 말해 박정희에게 광복(光復, 빛이 돌아옴)은 광복이 아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나라를 되찾지 않았다. 기존의 체제가 사라지고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154)


박정희는 태생적으로 윤리적인 세계가 아니라 탐미적 세계의 일원이었다. 박정희는 음악에 대한 감각이 예민했으며, 군사독재자라는 살벌한 이미지를 걷어내고 그의 문장을 곱씹으면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기조가 흐름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일본 영웅들의 전기를 읽고 열광했다. 나중에는 충무공 이순신과 나폴레옹의 일대기에 푹 빠졌다. 하지만 과거의 이야기보다 더 그를 사로잡은 것은 눈앞의 매력적인 존재들이었다. 박정희는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구미에서 야외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매료되었다. 일본군은 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강력하고 조직적인 집단이었다. 그들의 복장, 무기, 일사불란한 제식이 미학적 인간으로 자신을 단련한 소년에게 얼마나 인상적이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박정희 같은 인물형은 유행에 민감하다. 일본제국 체제에서 그 무엇보다 빛나는 유행은 군대였다. 그는 본국의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독자 행동한 관동군이 동아시아의 슈퍼스타로 박수갈채를 받는 모습을 보며 성장했다. 157-8)


박정희가 중위 계급을 달고 나서 불과 한 달 후, 일본 천황이 미국에 항복했다. 관동군은 해산되었고 박정희는 조선인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향했다. 한국광복군을 위시한 항일투사들이 만주군 출신 조선인을 공개적으로 모집했다. 전쟁이고 항일이고 다 끝난 마당에 어째서 만주군 장교까지 필요로 했는지 의아해 보이지만, 많은 인원이 함께 모여 안전하게 귀국하는 일은 의외로 섬세하고 치밀한 군사작전에 가까웠다. 그런 만큼 산만한 인원을 효과적으로 통솔할 인재들이 필요했다. 만주군 출신 조선인에 대한 광복군의 시각을 짧게 정리하면 아마도 ‘좀 재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민족의 일원이자 유능한 인력’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박정희는 광복군 중대장이 되었다. 광복군 병사들을 일제식으로 강압적으로 통제하다가 상급자에게 욕을 먹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만약 광복군이 조선인 일제 군관을 민족반역자라고 생각했다면 총으로 쏴 죽이면 그만이다. 그들은 그저 직업인으로 평가받았다. 162)


일제강점기 말기 대부분의 조선인 일제 군관들의 계급적 배경은 빈농이었다. 그들은 친일 지주를 비롯해 구체제 기득권에 대한 불타는 증오를 품고 있었다. 나는 ‘조선 대 일본’, ‘민족 대 반민족’으로 구분되는 전통적인 진영논리에 한 가지 주제를 더하겠다. 그것은 ‘계급’이다. 식민지 조선 내부의 계급갈등을 빼놓고는 역사적 인물들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박정희를 포함한 조선인 만주군 장교들은 계급적 배경으로는 사회주의자면서 정치적으로는 군국주의자인 묘한 집단으로 해방정국에 스며들었다. 빈농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박정희는 기타 잇키를 사상적 스승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2·26사건에서 결기부대가 구원하고자 했던 이들은 시골의 비참한 농민이었다. 물론 구원의 방식은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며, 강압적이다. 그리고 자기 파멸적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사회주의자인가, 군국주의자인가? 욕망의 화신인가? 모두 아니다. 박정희의 복합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어, 그것은 ‘유신’이다. 165-6)


1960년에는 3·15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전국이 민주화 열기로 들끓게 되자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군인들은 혼란을 틈타 군사반란으로 이승만을 몰아내기로 결의했다. 거사일은 5월 8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5월 8일보다 4월 19일이 먼저였다. 박정희는 다시 숨을 죽였다. 여론을 관찰하던 박정희는 1961년 4·19일로 다시 쿠데타 날짜를 잡았다. 그는 민주화 혁명 1주년에 다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날 것으로 확신했다. 계획대로 현실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점은 ‘유신’의 특징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병력을 시위 군중 속에 뒤섞어놓았다가 일시에 조직적으로 움직여 정부와 주요 시설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혁명 1주년, 거리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박정희는 당황했다. 이미 군대 내에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소문이 잔뜩 퍼졌다. 이 소문은 정치권에도 돌고 있었다. 돌아오기엔 너무나 먼 강을 건넜다. 게다가 5월 말 박정희는 예편될 예정이었다. 박정희는 마지막 기회에 모든 것을 걸었다. 169-70)


5·16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사적으로 특이한 쿠데타다. 해방된 지 15년 이상이 지난 상태였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신생 독립국이 되었다. 국민은 발전 없이 정체만 되어 있는 나라의 현실에 질린 상태였다. 엄밀히 말해 정체가 아니라 퇴보였다. 부패와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다. 정치권도 쿠데타 소문을 뻔히 들었지만 어찌해야 할지 몰랐고, 어떤 면에서는 담담히 반란을 기다렸다. 국민도 은근히 군대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미국 국무부의 〈팔리(Farley) 보고서〉는 장면 정부가 같은 해 4월을 넘기지 못하리라 예측했고, 심지어 공산혁명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서술했다. 박정희가 실패해도 다음, 그다음이 예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쿠데타 당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5·16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은, 당시 유행했던 짧은 문장으로 모두 설명된다. 〈올 것이 왔다.〉 그러나 쿠데타만 오지는 않았다. 군화 소리와 함께, 유신이 돌아왔다. 170)


9장 절정: 최고의 사랑, 완전한 사육


한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자주 간과되는 사실이 있다. 박정희는 군사력으로 권력을 장악했지만 엄연히 투표를 통해 국민에게 권력을 승인받았다. 박정희는 ‘만주군 출신의 쿠데타 수괴’였는데도 일반 국민은 물론 독립운동가와 민족주의자들에게까지 지지받았다. 지지하지 않는 이들도 최소한 쿠데타가 불가피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인정받은 것은 박정희의 행위지, 박정희 자신은 아니었다.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사회악 척결은 민중에게 선명한 프로파간다로 다가왔다. 옳지 않은 대신 매혹적이다. 박정희는 이를 ‘구악일소(舊惡一掃, 나쁜 옛것을 모조리 쓸어버림)’라고 이름 지었다. 구악일소는 일본의 우파 정치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가 1957년 총리로 취임하면서 주창한 ‘삼악척결(三惡剔抉)’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서 삼악은 부정부패, 가난, 폭력을 말한다. 삼악척결 역시 일본 내에서 유행어가 될 정도로 반향이 컸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는 여러 가지 면에서 쌍을 이룬다. 172-3)


박정희는 성공을 이어나가기 위해 기시 노부스케가 필요했다. 경제발전 때문이다. 경제성장에 대한 박정희의 욕망을 쿠데타로 차지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간단히 평가할 수는 없다. 이 책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유신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박정희가 그 자신의 표현으로는 ‘민족중흥(民族中興, 민족이 다시 일어남)’, 구체적으로는 한국인이 가난을 벗어던지고 잘살게 되는 일에 ‘나름의 사명감’이 있었다는 사실은 양보하지 않겠다. 이것이 20세기 신생 독립국의 수많은 독재자와 박정희의 차이점이다. 물론 나라를 망친 타국의 독재자들도 ‘나름의 애국심’은 투철했을 것이다. 대체로 독립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난 이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박정희의 애국심은 두 가지 의미에서 다르다. 첫째, 민생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었던 한국인이 ‘대체로 잘 먹고 잘사는 상태’가 그의 확고한 목표였다. 둘째, 결과주의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도 정당화된다는 믿음이다. 173-4)


박정희는 모순된 인물이 아니다. 일제 체제에서는 성공한 황국 신민(국적)이자 자랑스러운 조선인(민족 정체성)이 되면 된다. 마찬가지로 독립국이라는 조건이 주어진 상태라면 성공한 나라를 만드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박정희의 세계 속에서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변경을 넘어 해외로의 웅비는 고사하고 한 치의 앞마저 내다보지를 못하고 항시 중국, 일본, 러시아의 강압 속에 숨 막히는 질식 생활을 영위하여 온 우리 민족이었다. (…)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세계로 웅비하는 일대 선진국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좌절한다면 위의 지적대로 중국, 일본, 러시아의 3대 대국(大國)의 각축 속에 휘말려 또다시 그들의 속국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음을 통감하게 된다.〉 그가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독재자이면서, 아마도 역사상 유일하게 ‘반민족 행위에 가담했으면서도 민족의 성공에 가장 진심이었던’ 특이한 독재자였다는 사실에 불쾌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사실은 사실이다. 176-7)


박정희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반일감정, 민족주의, 애국주의를 깊숙이 심어놓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는 일본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유신과 만주국은 일본이 아니니까. 설사 일본을 좋아했어도 상관없다. 그는 반일감정이 한국인의 경쟁심을 부추기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활용했다. 내적 구조가 유신과 만주국, 관동군의 방식이어도 상관없다. 그는 철저하게 기능적인 ‘결과주의자’다. 사무라이들의 폭주로 탄생한 유신의 관념에서 조선 문인들의 붕당정치, 즉 ‘말싸움’은 한심하다. 언쟁은 절차적 정당성을 지닐지언정 아름답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박정희는 민주국가의 당연한 조건인 의회정치를 그가 혐오한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그래서 의회를 탄압했으며 본인이 창당한 공화당마저 억눌렀다.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탄압한 일제 군부와 다를 바 없다. 박정희는 진정성을 가지고 유신으로 노예가 되었던 한민족을 유신의 방식으로 번영시키려고 했다. 185)


이제 국민의 눈에는 민주주의와 미국식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 김대중이라는 신상품의 성능이 더 좋아 보였다. 박정희는 천황에 대한 사랑으로 천황을 납치하려고 한 조슈 번사들처럼, 국민을 위해 국민을 납치하려고 했다. 자신의 통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만 국민은 모른다. 그렇다면 국민을 사육해야 한다. 그저 그런 사육은 억압일 뿐이다. 박정희에게 ‘완전한 사육’은 ‘사랑’이었다. 오늘날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정직하게 이겼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으며 기존의 헌법을 정지했다. 일명 ‘10월 유신(維新)’이다. 12월, 일본제국 헌법의 직계 후배인 유신 헌법이 발효되었다. 일본제국 헌법에서 천황을 유신 체제로 바꾸고, 천황에 대한 불충을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번역하면 그대로 유신 헌법이 된다. 유신정권은 전쟁 말기 일본처럼 파멸을 향해 치달아갔다. 그 종말의 날짜는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189)


10장 완성: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김재규가 일제식 공교육을 받은 1930년대에 이미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실종되었고, 노기 마레스케는 진정한 우국지사로 숭앙받았다. 노기 마레스케를 기리는 신사는 전쟁 프로파간다 시설로 신성하게 취급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도 ‘노기 신사’를 세웠다. 김재규는 노기 마레스케를 깊이 흠모했다. 인간의 정체성은 어느 편을 들고, 누구를 적대시하는가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같은 편과 적을 나누는지가 고유한 정체성에 가깝다. 김재규를 만든 성장기에서 유년기가 한학과 김문기라면, 청소년기는 유신과 노기 마레스케였다. 김재규는 일본의 군국주의자일지언정 나라와 주군에 충성한 방식에 있어서는 노기 마레스케처럼 살고 죽기를 꿈꾸었다. 그의 이상적 남성상인 김문기와 노기 마레스케에겐 공통점이 있다. 현란한 죽음의 이미지다. 김문기는 세조에게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능지처사되었다. 일제의 교육관에서 가장 추앙받는 요소를, 일제의 교육을 받은 김재규 역시 사랑했던 것이다. 193)


이종찬(1916-1983)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군 내에서도 엘리트로 분류되었다. 이종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릴 수 있지만 그는 군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용감한 결정으로 좋은 선례를 남긴 바 있다. 1952년 7월, 이승만은 전쟁 도중 전방의 부대를 끌어들여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라남·북도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7월 4일에 공포 분위기 속에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이승만의 병력 동원 재촉이 이어지자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은 “군의 본질과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고 의식·무의식을 막론하고 정치에 관여하여 경거망동하는 자가 있다면 건군 역사상 불식할 수 없는 일대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훈령을 전체 육군에 하달하면서 이승만에 맞서고 곧 군에서 추방되었다. 이종찬은 일본군이었을 때에는 일본제국 헌법을, 국군일 때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따르는 헌정주의자였다. 김재규 역시 이종찬을 따라 헌정주의자가 되었다. 195-6)


5·16이 일어났을 때 김재규는 쿠데타에 참여하지 않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한국의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김재규는 혁명군 사령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결론이 정해진 조사를 받았음에도 김재규는 무죄 방면되었다. 정말로 비리 혐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재규가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선 박정희는 갑자기 그를 호남비료 사장으로 임명했다. 최고 권력자가 자신을 중신(重臣, 중요한 신하)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박정희에 깊이 충성토록 만들었다. 그는 박정희와 군신(君臣)관계를 맺은 것이다. 박정희의 선택은 성공했다. 김재규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호남비료 공장 건설을 예정보다 1년 단축해 완공하는 데 성공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명령을 훌륭하게 완수한 김재규를 기업가나 정치인으로 키우고 싶었지만, 김재규는 다시 군에 복귀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박정희는 아쉬웠겠지만, 김재규가 욕망을 절제하는 모습 때문에 그를 더 사랑하게 됐다. 196-7)


김재규는 3군단장으로 있다가 10월 유신을 맞게 된다. 박정희는 3성 장군인 채로 김재규를 전역시켰다. 김재규는 끝까지 군에 남아 진정으로 제2의 한국전쟁의 선봉장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주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유신정우회는 일본제국의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를 모델로 했다. 입헌정우회는 법적으로는 정당이지만 실제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만들고 이토 히로부미가 계승한 조슈 파벌의 핵심적 권력 단체였다. 유신정우회는 자동적으로 국회 의석의 1/3을 차지했는데, 누가 정우회의 일원이 될지는 박정희 개인이 결정했다. 유신정우회는 스스로의 존재 목적을 ‘유신 수호’라고 밝히고 출범했다. 김재규는 자신을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수호하는 군인으로 인식해왔다. 스승(이종찬)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은 유신에 반대하면서도 주군의 명령에 따라 몸은 유정회 의원이 되었다. 그의 세계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200)


10·26사건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김재규의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꼭 차지철을 집어넣는 실수를 범한다. 차지철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리자 권력욕 반, 충동 반으로 사건을 저질렀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김재규에게 차지철은 주군의 몸에 들러붙어 건강을 악화시키는 기생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1979년의 김재규는 죽음을 꿈꾸기 시작했다. 10·26사건을 일으키기 약 3개월 전, 김재규는 장준하의 아들에게 이제 곧 큰일이 벌어질 테니 한국을 떠나 있으라고 일러두었다. 박정희와 김재규 모두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민주주의가 산업화의 다음 단계로 도래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민주적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불러올 방법이 없었다. 김재규는 유신의 세계를 살아왔다. 자신의 세계관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끝내야 한다. 아버지와 스승과 주군의 충돌을 ‘하나의 사랑’으로 합치하는 유일한 길, 그것은 ‘아름다운 죽음’이었다. 202-4)


김재규의 목표에는 자신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체포된 후부터 갑자기 의연해졌다. 어차피 사형이 예정되어 있었다. 민주화 진영에서도 김재규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수환 추기경과의 인연으로, 종교계를 시작으로 김재규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종교계의 입김으로 민주화 투쟁에 몸담던 인권변호사들이 김재규를 변호하게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다음 독재자가 되기 위한 권력욕에 휩싸여 주인을 문 권력의 개’를 변호하는 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김재규를 접하고 그의 진심에 놀랐고, 나중에는 존경하게 되었다. 그중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를 존경하면서도 문득문득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그는 ‘확실히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은 분이 맞긴 하구나.’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김재규로부터 ‘앗사리(あっさり, 깨끗한/시원한)한 태도’라는 표현과 ‘목숨을 초개(草芥, 지푸라기)와 같이 버리는 생사관’에 대해 여러 번 들었다고 전한다. 207)


김재규가 민주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멀리 엇나간 발언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87년 6월항쟁에서 국민이 전두환을 상대로 승리하게 된 요인에 김재규의 총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쓰는 지금, 김재규는 반역자로도 불리지만 동시에 의사(義士)로도 불린다. 그러나 나는 확언한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지사이며, 최후의 유신 지사다. 유신의 완성에는 마지막 마침표 한 점이 필요했다. 그것은 김재규의 죽음이다. 1980년 5월 23일, 그는 다음날 사형이 집행될 것을 확신하고 유언을 남겼다. “나는 즐겁게 갑니다.” 1980년 5월 24일 아침. 김재규는 찬물로 몸을 씻고 새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 식사를 거르며 몸속까지 깨끗이 정돈했다. 오전 7시, 사형집행 직전 김재규는 마지막 질문을 받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그는 대답했다. “없다.” 모든 것은 무(無)로 되돌아갔다. 유신의 역사가 끝났다. 209)


후기: 유신의 제단


박물관에 있는 해시계가 가치 있는 이유는 스마트폰보다 성능이 좋아서가 아니다. 해시계는 박물관을 나와 현실에서 사용하려는 순간 무가치해진다. 유물은 유물로, 폐허는 폐허로 대해야 한다. 나는 유신의 제단에 꽃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물을 던지며 욕할 생각도 없다. 대신 오래된 정원을 폐허로 놔둔 채 거닐고 싶다. 한밤중의 폐허 위로 별빛이 내릴 것이다. 역사적 사실은 별처럼 지상의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별이 빛나는 이유는 거기에 정말로 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로부터 던져진 것이기에 현재의 틀에 과거를 끼워 맞추면 현재까지 뒤틀린다. 실체는 파도에 떠밀려온 잔해가 아니라 바다 자체에 있다. 역사란 살았다가 죽고, 시신이었다가 지상의 풀들이 자라나게 하는 거름이 되는 순환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가 각자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라는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품어야 현재를 미래에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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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사람이 사라진다 - 새로 쓰는 대한민국 인구와 노동의 미래
이철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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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안개 속에 싸인, 가리어진 길


"최근 발표된 2023년 통계청 장래인구추계의 중위 전망이 실현되는 경우, 한국의 인구는 2072년까지 약 30%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한 국가의 인구는 어느 정도 규모면 충분할까? 경제학이나 경제지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부존자원, 자본량, 기술수준 등이 주어져 있을 때 1인당 소득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인구 규모로 '최적 인구'를 정의한다. 이론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이 크기를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목표로 하는 바를 1인당 소득이 아닌 국민의 종합적인 후생으로 설정한다면, 최적 인구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향후 60년 이내에 인구가 3,500만 명으로 감소할 수 있다는 장래 인구 전망에서 더 우려되는 부분은 3,500만이라는 '규모'보다 60년 이내라는 기간이 나타내는 '속도'이다." "빠른 속도로 인구가 감소하면, 특정한 인구 규모에 맞추어진 한 국가의 여러 시스템에 심각한 불균형이 발생하고, 이로 말미암아 막대한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26-30)


"한 국가의 각종 제도는 대체로 매년 태어나는 인구 규모를 고려하여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예컨대 공적연금제도가 태동할 때 연금의 기여율과 소득대체율은 장래의 특정한 연령별 인구수를 가정하여 결정되었다. 산부인과와 소아청소년과 병원과 의사 수, 보육시설과 학교의 교사 수, 군대의 징집 인원과 총 병력 규모, 특정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의 공급량 등도 나이에 따른 인구 규모와 무관할 수 없다." "노동시장도 인구구조 변화가 초래하는 불균형 문제를 비켜 가지 못할 것이다. 일정한 나이를 넘어서면 평균적인 생산성이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인구구조 변화로 인한 실질적인 노동 투입량의 감소 규모는 더 클 수 있다. 인구변화는 직종 혹은 산업 간 노동 수급 불균형을 불러올 수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각 부문에 취업해 있는 사람들의 나이, 학력, 숙련도 등이 다르고, 이질적인 성격의 인력은 서로 쉽게 대체되기 어렵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34-5)


2장 인구변화는 노동인구절벽으로 이어질까?


"현대의 노동시장에서 생산연령인구(15~64세 인구) 규모는 일하는 사람의 수를 어림잡을 수 있는 유용한 지표이다. 하지만 생산연령인구는 실제 노동인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생산연령인구 가운데 (학생이나 조기 은퇴자를 제외한) 일부만이 노동시장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인구변화가 노동인구 규모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전망하기 위해 생산연령인구보다 경제활동인구의 변화를 살펴보는 편이 타당하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 중위 전망이 실현되는 경우, 전체 경제활동인구 규모는 2022년 약 2,938만 명에서 2072년 1,635만 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현재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유지되는 경우, 노동인구가 향후 50년 동안 현재의 약 56%로 감소할 것임을 보여준다. 매우 빠른 감소이지만 적어도 15~64세 생산연령인구의 감소에 비해서는 현저하게 느린 감소 추세이다. 그리고 15년 후인 2030년대 후반까지는 그다지 큰 폭의 감소가 발생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48, 52)


"한국은 서구 선진국과 비교할 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매우 압축적으로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경험했다는 특징을 나타낸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현재 한국에는 부모와 자식 세대는 물론이고 불과 10년 터울의 선배와 후배 사이에도 평균적인 건강과 인적자본 수준이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고령층에 진입하는 세대는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의 혜택에 힘입어 과거와 현재의 고령자에 비해 더 건강하고 생산적인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한국에서 인구 고령화가 가져올 미래의 변화를 전망할 때, 나이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효과, 즉 나이 효과(age effect)뿐만 아니라 태어난 시기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는 효과, 즉 코호트 효과(cohort effect)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통상적인 가정을 대입하면 인구 고령화의 부정적인 영향이 과대평가될 수 있다." "여기에 고령층에 진입하는 출생 코호트의 교육 수준 개선은 노동인구의 고령화로 말미암은 생산성 감소를 어느 정도 완화할 것이다."(57, 60)


3장 인구변화로 일할 사람이 부족해질까?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장기적으로 꾸준히 높아졌지만 비교 대상으로 설정한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스웨덴,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북서부 유럽 국가들에 비해 20~30%p나 낮고, 이웃 국가인 일본에 비해서도 줄곧 10%p 낮게 유지되었다. 한국이 장차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다른 국가들의 경험을 따라가리란 보장은 없지만, 지난 40년간 추세와 여성 고용을 증진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고려할 때 앞으로 더 높아질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장년여성 경제활동참가율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현재 비교 대상이 된 국가 가운데 한국보다 참가율이 낮은 국가는 프랑스뿐이다. 과거에는 전통적으로 조기퇴직 경향이 강했던 영국과 독일 같은 국가들이 2000년대 중반까지는 한국보다 낮은 참가율을 보였으나, 현재는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 일본 장년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도 한국보다 월등하게 높다."(68-70)


"현재의 한국은 노동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국가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노동시간당 부가가치로 정의한 노동생산성 지표에서 2022년 한국은 OECD 38개국 중 33위로 하위권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빠르게 개선될 수 있을까?" "먼저 여성의 생산성 변화 가능성을 살펴보자. 임금을 생산성 지표로 볼 때, 한국 여성 취업자의 생산성은 남성에 비해 낮으며, 이러한 여성의 불리함은 다른 국가보다 훨씬 더 크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이에 관한 연구들은 노동시장에서 한국 여성들이 직면하는 여러 가지 불리함, 특히 결혼이나 출산으로 발생하는 불리함을 심각한 성별 임금격차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렇게 볼 때, 일과 생활의 균형을 이루고 일터에서 여성이 직면하는 불리함을 없앨 수 있는 정책(보육 지원, 노동조건 개선, 각종 차별 금지 등)은 여성 고용을 확대하는 데 긍정적일 뿐만 아니라 여성이 가진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75-9)


"한국의 빈곤율이 아동과 청년층에서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 낮지만 50대를 넘어서며 빠르게 높아져 고령층에 이르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인다. 그렇다면 왜 50대 중반을 넘기면서 임금으로 측정한 노동생산성이 빠르게 감소할까?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많은 사람이 50대에 접어들면서 가장 오랜 기간 일해온 주된 일자리를 떠난다는 것이다. 능력이 뛰어나거나 운이 좋은 소수의 퇴직자는 이전 직장과 비슷한 일자리를 얻어서 높은 급여를 받으며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다수는 이전보다 질이 낮은 일자리 혹은 해오던 일과 관련이 적은 직종에 재취업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나이 들어도 건강과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교육, 훈련, 건강관리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완화하고, 전직 및 재취업 지원 시스템을 강화하여 개인의 역량과 선호에 맞는 일자리 이동을 쉽게 만든다면, 고령자의 고용이 확대될 뿐만 아니라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다."(79-82)


4장 인구변화로 노동시장에 어떤 불균형이 발생할까?


"앞으로 노동시장에서 나이 든 인력은 늘어나는 반면 젊은 취업자는 줄어든다. 그런데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은 인적자본의 특성과 노동시장에서 주로 맡는 일의 성격이 다르다. 각 일자리가 필요로 하는 인력의 유형도 다르다. 주로 젊은 인력에 의존하는 일자리도 있고 나이 든 사람에게 적합한 일자리도 있다. 따라서 노동인구의 나이 구성이 빠르게 바뀌면 인력 수급에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 "보건업, 음식점 및 주점업, 기타 전문·과학 및 기술 서비스업, 스포츠 및 오락 관련 서비스업 같은 업종은 20대와 30대 초반의 젊은 노동인력이 집중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농림업, 광업, 부동산업, 운송업 같은 업종에는 젊은 노동인력이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인구구조 변화로 젊은 노동인력 비중이 줄어들면 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산업의 노동 공급이 더 폭으로 감소할 것이다. 반면에 나이 든 취업자가 계속 일할 수 있는 부문에서는 인구 고령화로 인한 노동 공급 감소 효과가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다."(100-2)


"2031년까지 인구변화로 노동 공급이 가장 많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산업은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운송업으로, 그 감소 규모는 3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직별 공사업과 자동차를 제외한 소매업에서는 20만 명 이상, 음식점 및 주점업과 농림업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노동 공급 감소가 예상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부동산업, 공공행정·국방·사회보장·국제기관·외국기관, 사회복지서비스업, 교육서비스업 등에서는 노동 공급이 오히려 10만 명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직업별로 보면, 운전 및 운송 관련직에서는 약 26만 명의 노동인력 감소가 예상된다. 조리 및 음식 서비스직, 운송 관련 단순 노무직, 제조 관련 단순 노무직, 건설 및 채굴 관련 기능직 등에서도 10만 명 이상의 노동력 감소가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교육 전문가 및 관련직, 법률·행정·경영·금융 전문가 및 관련직, 경영 및 회계 관련 사무직 등의 직종에서는 인구변화로 오히려 노동 공급이 10만 명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105-8)


# 이상의 결과는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을 때 인구변화가 각 부문의 노동공급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킬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실제 취업자 변화를 예측해주지는 않는다. 가령, 사회복지서비스업은 인구변화로 노동 공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보다 훨씬 가파르게 노동 수요가 증가하면서 가까운 장래에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5장 누가 우리를 치료하고 돌볼 것인가?


"인구변화로 인한 전반적인 의료서비스 수요 증가는 장차 이 분야의 수급 불균형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의료서비스 수급 불균형 문제의 핵심은 의사 수의 부족 문제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다른 의료인력이나 시설·장비에 비해 한국의 의사 수가 상대적으로 적다. 한의사를 포함한 한국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6명으로 OECD 평균인 3.7명보다 훨씬 적고, 2.5명인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낮다. 반면 한국의 인구 1,000명당 병상, MRI, CT 수는 OECD 평균보다 훨씬 높다. 둘째, 의료서비스를 구성하는 다른 인적·물적 투입 요소에 비해 의사의 공급이 매우 경직적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신규 의사 수는 의대 정원에 의해 결정되는데, 2000년 3,507명이었던 의대 정원은 2006년까지 3,058명으로 감축된 후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의료인력 시장에 의사에 대한 수요가 늘더라도 이것이 공급 증가로 이어지기는 어려운 상황이다."(130-2)


"전체 의사 인력의 수급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면 그것으로 충분할까? 의사는 비교적 동질적인 직업군이기는 하지만 그 안에 다양한 전문 과목이 있으며, 다른 과목 의사는 이질적인 지식과 숙련을 보유한다. 특히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의 치료는 해당 분야의 전문의만 담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사 인력에 대한 총량적인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더라도 전문 과목 간 수급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 인구변화는 전체 의료서비스뿐 아니라 전문 과목별 서비스 수급에도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 인구변화로 인한 의료서비스 수요 변화가 전문 과목에 따라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출생아 수 감소는 산부인과를 찾는 임산부 수를 줄일 것이다. 또한 아동·청소년 수가 점점 줄면서 이들이 많이 방문하는 소아청소년과나 이비인후과 환자도 감소할 것이다. 반면 고령자가 많이 걸리는 각종 만성질환을 주로 다루는 신경과, 신경외과, 외과, 흉부외과 등을 찾는 환자는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136-8)


"인구 및 가구 구조 변화로 인해 가까운 장래에 고령자에 대한 돌봄서비스 수요는 매우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돌봄이 필요한 노인 가운데 공식 돌봄을 받는 노인의 비중은 매우 낮고 어떤 돌봄도 받지 못하는 고령자 비율이 3분의 1에 달한다. 이런 여건을 고려할 때, 고령자에 대한 공식돌봄서비스 수요는 전체 수요에 비해 더 빠르게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저출산 추이가 이어지면 아동 수는 장기적으로 감소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고 이에 따라 맞벌이 가구 비중이 높아지면서 보육시설 돌봄과 개인 양육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증가할 개연성이 크다." "심각한 전문 과목별 의사 인력 수급 불균형이 예상되는 의료 분야에 비해서는 덜하겠지만, 돌봄서비스에서도 돌봄 유형 간 불균형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다양한 유형의 돌봄서비스를 담당할 인력이 서로 완전하게 대체적이지 않다면 어느 정도의 유형 간 수급 불균형 문제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152-3)


6장 일터에서 젊은이가 사라진다


"청년 경제활동인구 감소는 일반적인 노동인력 감소와는 사뭇 의미가 다르다. 이는 최근 학교교육을 받아서 현재의 노동시장이 필요로 하는 최신의 지식과 숙련을 보유한 노동인력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학습 능력, 적응력, 지리적·사회적 이동성이 높은 집단의 비중이 축소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청년인력 감소는 같은 규모의 평균적인 노동인구 감소보다 노동시장에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노동시장의 기본 기능은 특정한 인적자본을 가진 노동력을 동원하여 해당 인력이 필요한 부문 혹은 지역에 탄력적으로 재배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력의 동원과 재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면 각 개인은 자신이 가장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개별 산업의 경쟁력과 국민경제 전체의 성장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노동의 이동성은 새로운 산업과 지역의 성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169-70)


"청년인력 감소가 노동시장에 일으킬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는, 첫째, 교육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이는 교육 시스템을 개선해 노동시장 수요에 잘 부합하는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현재 약 60만 명의 청년이 맡고 있는 역할을 그 절반 혹은 3분의 1 규모의 청년이 해낼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둘째, 노동시장 개혁이 필요하다. 이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훈련 프로그램 개선을 통해 다른 부문 및 유형의 인력 사이 대체 가능성을 높이고, 청년인력의 공백을 메꿀 수 있는 다른 인구집단의 고용을 확대하는 방안이다." "인구변화가 노동시장에 불러올 충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줄어드는 청년 가운데 누구 한 사람도 '낭비'되지 않도록 고등교육을 제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무엇보다 학생들에게 자신의 선호와 여건에 따른 선택과 진로 변경의 기회를 거듭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역량을 전 생애에 걸쳐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너그러운 교육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178-9, 182)


"청년인력 감소가 가져올 인력 수급 불균형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부문 간, 직장 간 이동이 효율적이고 탄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동시장을 좀 더 유연하게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줄어드는 청년인력이 이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일자리로 재배치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육과 훈련을 강화하여 다른 유형의 인력이 서로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출생아 수가 40만 명대로 떨어진 200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본격적으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면서 젊은 신규 취업자가 빠르게 감소하면 기업은 더 이상 신규 채용에 의존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청년인력 감소로 말미암아, 이미 중소기업이 오래전부터 경험하고 있는 신규 인력 확보의 어려움은 점차 중견기업을 거쳐 대기업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노동시장 변화에 대응하여, 기업은 기존 직원의 재교육·훈련이나 타 분야 출신 인력의 채용과 교육 등을 통해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는 노력을 늘려야 할 것이다."(182-3)


7장 노인을 위한 나라, 노인이 없는 사회


"미래의 고령인구는 그 수가 많아질 뿐, 현재의 고령자와 별반 다르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미래의 고령자는 현재의 고령자와는 여러모로 다를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의 압축적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고려할 때, 일찍 태어난 현재의 고령자보다 늦게 태어난 미래의 고령자가 평균적으로 더 건강하고 더 높은 수준의 인적자본을 보유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교육수준의 개선일 것이다." "65세 이상 대졸 인구는 상대적으로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집단이 될 것이다. 대졸 고령인구는 현재 전체 인구의 5% 미만이지만, 2072년이 되면 15세 이상 인구의 약 3분의 1이 65세 이상 대졸자로 구성될 것이다. 여기에 55~64세 대졸 인구를 포함하면 50년 후에는 대학을 졸업한 55세 이상 장년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전망이다." "이처럼 미래의 고령인구는 현재의 고령인구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아질 것이고, 고학령 고령인력은 전체 노동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192-7)


"게다가 미래의 고령자는 현재의 고령자보다 더 건강할 것이다. 그리고 건강상태 개선은 학력 신장과는 별도의 경로로 이들의 생산성을 높일 것이다.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이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고학력자는 일반적으로 저학력자보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위험한 행위를 덜 하며 건강과 관련된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또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의료기술을 더 잘 이해하고 의료서비스를 더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도 하다." "건강 개선에 힘입어 미래의 고령자는 더 오래, 더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 악화는 중년을 넘긴 노동자가 일을 그만두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각종 질환과 건강 악화는 중고령자의 고용뿐만 아니라 임금에 반영된 생산성을 낮추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건강이 더 나아지는 미래 고령인구는 현재의 고용인구에 비해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아지고 생산성이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197-8)


# 한국 노동시장에서 정년 연장이 효과적인 방안이 아닌 이유

1. 향후 10~20년은 노동력 총량이 부족하지 않으므로 모든 유형의 고령자의 양적 확대는 필요하지 않다.

2. 심각한 노동력 부족이 예상되는 산업(사회복지서비스 등)은 대체로 정년의 의미가 크지 않은 업종들이다.

3. 정년 연장으로 장년층 고용 확대가 예상되는 산업과 청년인력이 급감하는 부문이 그다지 겹치지 않는다.

4. 인력 부족 문제는 중소기업에서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정년연장의 혜택은 주로 대기업 중심이다.

5. 정년 연장은 '평균'을 고려하여 추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파워 시니어를 충분히 잘 활용하기 어렵다.


"산업과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고 노동시장에 파워 시니어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장차 고령인구가 생산 역량을 충분하게 발휘할 수 있게 하려면 고령 친화적인(age-friendly) 작업환경과 노동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미국의 한 연구는 고령자가 선호하는 일자리 특성으로 높은 자율성과 유연성, 낮은 스트레스와 신체적·인지적 난이도, 재택근무 가능성 등을 제시하였다. 또한 고령자가 이러한 성격의 일을 하기 위해 상당한 정도의 임금을 포기할 의사가 있음도 보였다." "흥미로운 결과는 여성과 젊은 고학력자의 고용도 고령 친화적인 일자리의 증가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젊은 세대도 자율성과 유연성이 높은 일자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감지된다. 미래에는 이 세대가 고령층에 진입한다. 따라서 일자리를 고령 친화적으로 바꾸는 작업은 베이비 붐 이후 세대, 더 나아가 지금의 젊은 세대가 나이 든 후에도 생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218-20)


8장 ‘이민자의 나라’가 우리의 미래일까?


"한국에는 어떤 특성의 외국인이 유입되고 있고 주로 어떤 부문에 취업하고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2018년부터 2022년까지의 통계청 '이민자 체류 실태 및 고용조사' 원자료를 이용하여 근래 외국인과 내국인의 특성을 비교하였다." "근래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은 내국인과 비교하여 평균적으로 약 7년 정도 젊고, 대졸 이상 학력 비율이 절반 수준이었으며, 남성 비중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외국인 취업자는 내국인 취업자와 비교해 시간당 임금이 약 25% 낮았고 근로시간이 약 18% 길었다. 유배우자 비율과 상용직 비율은 내외국인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다. 이 결과는 외국인이 평균적으로 젊지만 교육수준이난 시간당 임금에 반영된 생산성 면에서 내국인에 뒤진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들 중 전문인력 비자를 받아서 들어온 외국인은 전체의 5% 미만에 불과하다. 이처럼 지금은 외국인의 절대 다수가 비전문인력 및 이와 가까운 체류 자격으로 한국에 들어오고 있다."(235-6)


"미래에 한국 노동시장이 필요로 할 외국인력은 과거와 현재의 수요를 충족시켜준 외국인력과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장래의 노동력 부족 부문은 외국인력 집중도가 높은 부문과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는다. 가까운 장래에 노동력 부족이 가장 심각하리라 예상되는 5개 산업은 사회복지서비스업, 음식점 및 주점업, 전문직별 공사업,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운송업, 소매업(자동차 제외) 등이다. 반면 현재 외국인력은 주로 일부 제조업, 건설업, 숙박 및 음식점업, 농업 등에 집중되고 있다. 장래의 심각한 인력 부족 사태를 경고한 의료 및 돌봄 분야도 간병인 같은 일부 직종을 제외하고는 외국인력 집중도가 낮다." "이처럼 현재와 같은 외국인력 도입 시스템은 인구변화가 초래할 장래의 노동 수급 불균형 문제 대응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인구변화의 충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여건과 수요에 부합하는 새로운 외국인력 도입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241, 244)


# 외국인 정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개선책

1. 숙련 유형 및 수준에 따라 명확하게 구분된 비자체계 수립(현재는 전문인력과 비전문인력으로 단순 이분화)

2. 국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숙련을 보유한 외국인력을 국외에서부터 식별하고 채용할 수 있는 시스템 도입

3. 비전문 외국인력을 높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부문으로 배분(필요한 사업체 위주로 배정점수제 개선)

4. 외국인력의 이동성을 제약하고 노동환경 개선을 저해하는 외국인 비전문인력의 고용주 변경 제약 완화

5. 국내에 들어오는 외국인 유학생은 젊고 학력이 높고 해당 국가의 문화에 더 익숙하므로 적극적으로 영입

6. 외국인을 대상으로 교육과 훈련을 병행하여 국내 노동시장 동화를 촉진함으로써 최대의 생산 역량 유도

7. 숙련도가 높은 외국인력이 한국에 더 오래 머물며 일할 수 있는 환경 조성(배우자 취업, 자녀 교육 지원 등)


"현재까지의 외국인 정책은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면 외국인력이 탄력적으로 공급될 것임을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인구변화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외국인으로 채워야 한다는 주장 역시 과거에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줄곧 한국에 오려는 외국인이 충분히 많을 것임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몇 가지 사정을 고려할 때 이러한 가정이 현실과 크게 어긋날 가능성이 있다. 첫째, 한국과 주된 이민 송출국을 공유하는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외국인을 유치하려는 정책적 노력을 강화하면서 외국인력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강화되고 있다." "둘째, 한국에 인력을 보내고 있는 국가들이 경제발전을 경험하면서 장기적으로 인력 송출국에서 인력 수입국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 "셋째, 한국에 인력을 송출하는 국가들의 인구변화도 이 국가들이 인력 송출국에서 인력 수입국으로 전환하는 시기를 앞당길 것이다. 여기에 한국의 상대적 임금 우위가 감소하면 외국인력을 확보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258-60)


"그렇다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첫째, 한국을 외국인이 선호하는 국가로 만들 필요가 있다. 임금 우위만으로 외국인력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오래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 이외의 조건들을 매력적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임금을 지급할 때, 굳이 한국을 택할 이유를 제공해야 한다. 우선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제사회 기준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외국인 권익과 인권을 보호하는 것을 외국인 정책의 기본적인 제약 조건으로 설정해야 한다. 이는 도덕적 책무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위신을 지키고 장기적으로 우수 외국인력을 유치할 수 있는 기반이기도 하다." "둘째, 외국인력 도입을 인구문제 해소의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 태도를 버리는 편이 좋다." "모든 고통을 깨끗하게 없애면서 부작용도 없는 마법의 약은 없다. 먼 훗날까지 지속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현재의 고통과 비용을 감내하는 길이 더 현명할 것이다."(261-3)


9장 아직 정해지지 않은 인구변화의 미래를 위해


"인구변화의 미래에 적합한 사회의 비전을 모색하는 작업은 오랜 시간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아도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연구 결과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몇 가지 내용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사람을 보는 사회'이다. 나이, 성별, 출신지, 외모 등 겉으로 드러나는 부수적 특성이 아닌 역량, 성과, 경력, 잠재력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여 누구를 어떤 자리에 어떤 조건으로 쓸지 결정하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둘째는 '사람에게 맞추는 사회'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역량과 선호에 맞추어 적합한 일을 적당한 만큼 할 수 있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셋째는 '기회를 주는 사회'이다. 대학 입학이나 취업에서 자신과 맞지 않는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거듭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마지막은 '사람을 보호하는 사회'이다. 인구변화에 잘 대응할 수 있는 사회는 이동성이 높은 사회이다. 사회안전망이 잘 갖추어질 때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한 모험에 나설 것이다."(272-4)


"정책 우선순위는 먼저 인구변화로 특정한 형태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발생하는 시기를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예컨대 부문 및 유형 간 노동 수급 불균형 문제는 총량적인 노동력 부족 문제보다 더 가까운 장래에 발생할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전체 노동인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보다는 미시적인 노동시장 불균형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인구변화의 충격이 다가오는 사안도 사회적 합의와 제도 개혁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한발 앞선 대응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앞으로 4~5년 후부터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인력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이해당사자들 간 잠재적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나 필요한 법과 제도를 고치는 정치적 과정의 험난함을 고려할 때, 교육혁신과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는 일은 지금 시작해도 결코 이르지 않다."(277-8)


"저출산 완화 정책에 대한 한 갈래의 비판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는데도 합계출산율이 높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정책의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책의 효과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없었을 경우 나타났을 결과를 합리적으로 추정해야 한다." "다른 요인들의 영향을 최대한 제거하고 적절한 지표를 이용하여 분석한 연구들은 현금지원, 보육의 질 개선과 보육비 지원, 육아휴직 지원 등의 정책이 출산율을 높이는 데 어느 정도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갈래의 비판은 출산율을 높이는 것이 어차피 불가능하니 저출산·고령화 추이를 미래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비하는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면한 인구문제의 핵심은 출생아 수 감소 자체보다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사실이다. 출생아 수 감소 추이를 반전시키지 못해도 그 속도를 늦출 수 있다면 인구변화의 충격을 완화하고 대응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281-3)


"인구문제는 여러 면에서 금융위기, 안보위기, 감염병 위기 등 다른 국가적 위기와는 다른 특성을 나타낸다. 첫째, 인구변화의 속도는 상대적으로 느리다.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우리나라의 출생아 수 감소도 해가 바뀌어야 비로소 체감된다. 그리고 인구문제에 대응한 정책의 효과 역시 장기간에 걸쳐 느리게 나타난다. 둘째, 다수의 국민에게 인구문제는 당장 절실한 나의 문제가 아니다. 훗날 누군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여겨지기 쉽다. 셋째, 인구변화의 영향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인구가 줄면 오히려 삶의 질이 개선되리라는 의견도 있다. 넷째, 인구문제는 다양한 분야와 정부 기관의 업무영역에 걸쳐 있다." "인구변화에 대한 대응은 마라톤에 가깝다. 해결을 위해 애쓴 사람이 그 자리에서 결실을 얻고 공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과 국민의 삶을 어렵게 만들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2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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