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역사 - 루터의 신성한 공포에서 나치의 차분한 열광까지
김학이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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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역사가 변화라면,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야 한다. 그러나 감정은 포착하기 어렵다. 감정은 이념과 달리 제도로 귀착되지 않는다. 자유는 의회와 법으로 제도화되고, 평등은 경제의 집단화로 제도화된다. 따라서 그 역사적 궤적을 추적할 수 있다. 감정에는 제도가 없지만 역사는 있다. 감정이 역사를 갖는 이유는 감정이 욕망과 규범 사이에서 인간이 느끼는 격동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비밀스럽기도 하기에 도덕규범의 피안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문제로만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감정은 규범과 긴밀히 얽힌다.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가 마주한 상황이 정당치 않아서다. 감정의 문화적 차원은 1970년대 이후 인지심리학에서 정밀하게 연구되고 이론화되었다. 그 실험심리학은 인간의 감성체제the affective system가 특정 현실에 당면하여 비의지적으로 감정적 반응을 발동시키지만, 그것은 실상 경험과 기대에 따라 사회 환경을 계산하고 평가하여 몸과 마음을 준비시키는 정보처리 작업의 결과라는 점을 논증했다."(10-1)


"대표적인 감정은 그 시대의 유일한 감정이 아님은 물론 지배적인 감정도 아니다. 그러나 그 감정은 해당 시대에 가장 많이 말해진 감정이고, 가장 문제시된 감정이며, 따라서 시대의 가치가 함축된 감정이고, 그리하여 사회적 연관이 엮여 있는 감정이다. 그 감정은 개념사의 '기본 개념'에서 '기본'에 해당하지만, '기본 감정'이라는 학술용어는 이미 보편적인 생물학적 감정을 지칭하기에 사용할 수 없을 따름이다. 시대적 감정은 생물학적 감정이 아니라 문화적 감정이다. 따라서 대표적인 감정을 시대별로 가려내고 그 감정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을 확인하면 각 시대의 고유성 역시 도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역사학의 의의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보면 공감과 혐오가 이 책에서 말하는 대표 감정이다. 그 감정 속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참여의 가치와 배제의 요구가 담겨 있고, 그 근저에 정의에 대한 우리 사회 전체의 논의가 깔려 있다. 그 두 가지 감정은 우리 시대의 지표이다."(13-4)


1장. 근대 초 의학의 신성한 공포


"시초에 공포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를 근대 독일의 시작점으로 간주하는 한 그렇다. 루터의 저술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팸플릿은 루터가 1529년에 작성한 《소교리 문답》이다. 루터는 십계명의 조항 하나하나를 간결하게 해설한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제1계명에 대하여 루터는 썼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것에 앞서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제2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도 해설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우리가 하나님 이름으로 저주하지 말고 맹세하지 말 것이며······.〉 제10계명까지 모든 계명에 대하여 루터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반복한다. 모세의 십계명에는 정작 제2계명에서만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은 신이 〈처벌하지 않고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구절이 있을 뿐인데, 루터는 모든 계명에서 신을 두려워하라고 쓴 것이다."(26-7)


"루터의 공포는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대를 반영하는 동시에 시대를 만든 인물이다. 그 시대의 공포를 잘 드러내는 시대적 현상이 하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궁정 점성가를 역임했던 성직자 요한네스 리히텐베르거가 1488년에 《기이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입각한 라틴어 예언》이란 책을 발간했다." "리히텐베르거는 교회와 신성로마독일제국과 민중에게 닥칠 일들, 즉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프랑스와 오스만투르크의 침입, 플랑드르 도시들의 봉기, 별들에 의해 격동된 민중의 반란 등을 때로는 군주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서술했다." "예언서의 폭증은 중세 말의 정치사회적 격변 외에, 우주와 지상 만물과 인간을 통일체로 파악하는 지적인 혁명인 15세기 신플라톤주의에 의하여 추동되었다. 신플라톤주의는 고대 문헌의 (재)발견에 부심하던 휴머니즘 덕분에 대두했는데, 신플라톤주의는 인간을 천사의 지위로 높였지만 그것에 접속한 예언서는 인간의 공포를 강화했다."(28-30)


"16세기의 독일인들은 공포를 '예종적 공포'와 '순애적 공포'로 구분했다. 노예가 주인에게 갖는 공포인 예종적 공포는 각종의 현실적 재앙에 대한 공포로서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죄다. 순애적 공포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자식의 공포로서, 신에 대한 공포가 바로 그러해야 하고, 그것은 곧 구원의 길이다." "예종적 공포의 내용은 자기 자신과 세속에 대한 사랑이고, 순애적 공포의 내용은 신의 사랑에 대한 신뢰이다. 다시 말해서 순애적 공포라는 기표의 기의는 신의 사랑에 대한 신뢰이다. 신에 대한 공포에서의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예종적 공포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선명히 대비되어 의미를 발동시킨다." "신에 대한 공포는 공포가 아니라 신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그래서 루터가 십계명을 해설하는 가운데 신을 두려워하라고 말하는 동시에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신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35-6)


"파라켈수스는 근대 해부학을 개시한 베살리우스와 혈액순환설을 제시한 하비와 함께 근대 의학의 비조로 꼽힌다." "파라켈수스는 1525년 《파라미룸 의서》라는, 자기 의학의 요점을 담은 책을 서술했다. 사후에 발간되는 그 책에서 그는 인체의 각 기관에 〈연금술사〉가 내장되어 있어서, 그것이 외부에서 들어온 음식과 공기에서 영양분과 독소를 〈분리〉시키고 독소를 체외에 내보내는데, 그 분리 작용이 오작동을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병이라고 주장했다. 파라켈수스는 연금술사를 때로는 〈원력原力archeus〉이라고 칭하는데, 다름 아닌 화학 작용이다. 파라켈수스는 연금학의 원리를 의화학적 질병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질병의 원인을 체액의 불균형이 아닌 체내의 화학 작용에서 찾았던 것이다. 파라켈수스는 또한 신이 연금술사를 인간 외에 동물 식물 광물에도 배치해두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치료법은 연금술사가 기능을 회복하도록, 금속 식물 동물에서 원력을 뽑아내어 인체에 투입하는 것이었다."(46, 57)


"파라켈수스는 병의 원인 여섯 가지를 지목하는데, 독, 자연, 별, 악마, 신 외에 인간의 〈정신〉이 그중 하나다. 그것을 파라켈수스는 의지로 칭했지만, 내용은 온전히 감정이다. 감정은 그에게 중요한 병인이었다. 다만 정말 놀랍게도 정신, 즉 감정에 의해 발생하는 병은 정신 주체의 병이 아니라 타인의 병이다. 인간의 내면이 주체의 욕망과 억압의 역동성에 의하여 병드는 게 아닌 것이다. 이는 16세기 인간의 내면이 18세기 이후의 내면과 얼마나 달랐는지 보여준다. 인간의 정신은 타인의 정신에게 자신의 의지적 감정을 강요한다. 그러면 두 정신은 투쟁을 벌이고, 이때 패배한 정신이 〈상처〉를 입는다. 〈나의 정신은 내 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나의 칼로 타인을 찌를 수 있다.〉 여기서 찔린 것은 정신만이 아니다. 정신이 찔리니 신체가 실제로 피를 흘린다. 정신의 상처가 신체의 상처로 물질화되는 것이다. 파라켈수스는 정신에 의해 찔린 신체는 외과적으로 치료하려 해도 소용없고 정신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6-7)


"파라켈수스에게서 인간의 정신과 감정은 몸과 환경의 물리적인 상호 작용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감정은 도덕과 신앙의 문제이기도 했다. 분노와 공포와 증오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표증이었다. 거꾸로 겸손과 기쁨과 사랑은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 존재의 증거였다. 따라서 감정은 멸망이냐 구원이냐의 기준이었다." "문득 치밀어 오른 부정적 감정은 악마가 자신을 장악한 증거일 수 있었다. 그렇듯 인간은 감정의 물질성과 감정의 종교성 사이의 덫에 걸린 존재였다. 종말이 임박했다고 선언된 16세기에 인간은 외적인 경건성과 일상적 행동은 물론 내밀한 감정까지 단속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그 자신만만했던 르네상스인들을 겨냥한 규율화 및 도덕화 장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파라켈수스는 그가 거부했던 당대 종교개혁가들과 일치한다. 그 역시 근대로의 이행기에 인간을 규율화함으로써 윤리적 인간과 도덕적 사회를 생산하려던 시대적 노력의 일부였던 것이다."(80-1)


2장. 30년전쟁의 고통과 감정의 해방


"요한네스 헤베를레(1597-1677)는 제화공이다. 그는 황제에 종속되지만 기여금 납부를 제외하고는 독립을 누리던 도시, 울름의 지배를 받는 농촌 수공업자였다." "30년전쟁의 참혹한 전화를 겪으면서 헤베를레는 무엇을 느꼈을까? 헤베를레의 연대기에는 감정어가 몇 개만 등장한다. 감정 명사만 열거하자면, 비탄, 가슴 아픔, 공포, 경악, 용기, 기쁨, 신뢰 등이다. 눈에 띄는 것은 슬픔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찌된 일일까? 가족의 죽음에 대한 서술을 보면 해석의 실마리가 발견된다. 헤베를레는 단 한 번도 슬프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1634년 10월 7일 갓 태어난 둘째 아들이 죽었을 때 그는 썼다. 〈전능하신 신이시여, 심판 날에 그가 기쁘게 부활하게 하시고 그에게 영생을 주소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이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죽음 대부분을 그처럼 짧은 관용어로 표현했다. 루터가 신자는 죽음에 직면하여 슬퍼하되 그 슬픔이 신적인 슬픔이어야 한다고 거듭 설교했기 때문이다."(89, 93)


"그 끔찍한 고통을 기록한 연대기에서 헤베를레는 군대와 병사들에 대하여 단 한 번도 '분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의 역사가 캐럴 스턴스는 근대 초 영국인들의 자아 문서에서 17세기말 이전 시기에는 분노를 표현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려 9년 동안 일했지만 봉급 한 푼 못 받은 수공업 도제, 계모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모조리 빼앗긴 청교도 목사, 동료와 경제적 갈등에 휘말린 영국 국교회 수학자 등이 자서전에 자신들의 감정을 분노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들은 〈비탄griefe〉이라고 돌려 말했다. 이는 당시 분노가 근본적으로는 신의 감정이었고, 세속에서는 제후만이 지배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일반인의 분노는 광기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헤베를레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그는 분노라는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았음은 물론, 그 많은 악행을 저지른 병사들을 '사악한'이라는 형용사로 묘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97)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헤베를레의 진면목은 다른 데서 발견된다. 그렇게 긴 개인 연대기를 작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고유성이다." "1600년경 독일 개신교 지역의 거의 모든 교구에 초등학교가 설립되어 있었고, 도시 수공업자들의 문자 해득률은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문자 해득 능력과 글을 유창하게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따라서 헤베를레는 자신이 연대기를 썼다는 것 자체에 크나큰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연대기에는 스트랄준트 전투, 마그데부르크 파괴, 뤼첸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아우크스부르크의 고난, 프라하조약, 프랑스군의 진군, 베스트팔렌조약 등, 30년전쟁의 결정적 사건들이 놀랄 만큼 정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엄청난 지적 성취야말로 신분을 넘어 자신을 주장하는 그의 개인일 것이다. 그는 사회적인 '쓰인 자아'와 그것으로 채 수렴되지 않는 신분을 벗어나는 '쓰는 자아'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드러냈던 것이다."(103-4)


"페터 하겐도르프(?~1679)는 방아쟁이 수공업자 출신의 용병 병사다. 20년 넘게 전장을 누비며 폭력을 행사한 하겐도르프의 경험은 어떻게 감정으로 표현되었을까? 놀랍게도 176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연대기 전체에 감정 명사는 딱 한 번 쓰였다. 1636년 여름 벨기에 지역에서 부대원 11명과 함께 숲에서 양을 약탈할 때였다. 숲에서 2천 마리의 양이 쏟아져 나오자, 그는 양 떼 때문에 〈공포감에 숨이 멎을 듯 질려서〉 도망쳤다. 눈을 씻고 찾아보면 감정을 지시하는 일반 명사가 있기는 하다. 1631년 5월 말, 마그데부르크 파괴를 지켜보며 그는 〈그 도시가 그토록 경악스럽게 불타는 것이 나를 심장으로부터 아프게leit 했다〉고 적었다. 1642년 5월에 그는 프랑크푸르트 마인강 다리 아래 설치된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을 〈보는 것이 하나의 쾌감lust〉이라고 적었다. 하겐도르프는 연대기에 자신을 감정적 자아로 내세우지 않으려 했다. 또한 인용문 속의 공포감, 심장의 아픔, 쾌감은 모두 감정의 신체성을 보여준다."(111)


"그의 연대기는 사건에 대한 건조한 진술로 일관하지만, 지역과 마을과 도시에 대한 서술은 놀랄 만큼 서정적이다. 그가 그처럼 감정적인 인간이라면, 즉 쓰는 자아가 그토록 서정적이었다면 쓰인 자아는 왜 그렇게 무감동했을까? 다시 말해 그는 왜 자신을 그토록 무감동한 인간으로 내세웠을까? 이는 그가 군인의 직무를 인간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사무적인 업무로 내세우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력서인 연대기를 통하여 그의 문서 능력을 과시하고 더불어 자신의 직무 적합성을 자랑하려 한 것이 아닐까. 기실 연대기의 사실적인 내용 자체가 행정적이고 관료제적이다. 그 결과로서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무감동한 하겐도르프가 표현되었던 것이니, 직무와 사적 감정을 구분하는 인간이 그려진 것이다. 그런 인간은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문명화 과정의 결과로 출현했다고 강조한 '궁정인courtier'이다. 하겐도르프라는 용병 병사에게서 궁정인이 식별되다니 이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114, 118-20)


"폴크마르 하페(1587~1659)는 슈바르츠부르크 존더하우젠 백작령에서 봉급을 받는 진정한 의미의 공무원 관리였다." "하페의 연대기에서 감정은 상황으로부터 독립하지는 않았지만 규범으로부터는 완연히 독립했다. 이것은 하페가 헤베를레 및 하겐도르프와 다른 점이고, 또한 감정사의 결정적 장면이다. 특히 공포Furcht 감정이 그랬다. 하겐도르프는 그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았고, 헤베를레도 극히 꺼렸다. 필자는 하페의 연대기에서 그 단어의 출현 빈도를 세다가 포기했다. 문자 그대로 셀 수 없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공포 감정이 당시에도 여전히 신적인 공포가 아니면 예종적 공포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페는 공포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 그가 순애적 공포와 예종적 공포의 구분을 몰랐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하페의 연대기에서 공포는 부정적인 대상에 한정되지 않았다. 하페는 병사들과 전쟁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 모든 상황에 대하여 그 단어를 사용했다."(121, 129-30)


"유의할 점은 하페가 (절규문이자 통곡문인 자신의) 그토록 감정적인 기록을 〈튀링겐 연대기〉로 칭했다는 사실이다. 사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한 기록을 공적인 연대기로 간주한 것이다. 하페 역시 자신의 연대기가 식자층에게 읽히리라 예상했고 또 실제로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하페는 공공성을 의식한 연대기에 자신의 감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인데, 이는 근대 초의 감정 레짐과 완전히 어긋난다. 근대 초에 인간은 공적인 기록에서는 감정을 최소화하고 사적인 편지 등에서 상대적으로 다소 자유롭게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다. 이제 바뀐 것이다. 대단히 자유로운 감정 표현이 공적 문서에 데뷔한 것이다. 기존의 감정 레짐이 무력화된 것이다. 이 역시 감정사의 결정적 장면이다. 1670년대에 이르면 감정이 특히 프랑스에서 출간된 소설과 인간학 서술에서 독립적 가치로 설파되기 시작하는데, 하페의 연대기는 그 전조가 30년전쟁의 와중에 출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133-4)


3장. 경건주의 목사들의 형제애와 분노


"경건주의는 독립 교파가 아니었다. 17세기 전반기 퓨리턴 대부분이 잉글랜드 국교회 내부에 머물면서 더욱 확실한 칼뱅주의를 관철하려 했듯이, 독일 경건주의자들은 대부분 루터파 교회 내부에 머물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경건한 열망》을 저술한 슈페너는 교리를 문제 삼기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교회의 상태를 비판했다." "《경건한 열망》에서 슈페너는 교회 현실에 대한 진단을 세속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는데, 이때 그가 적시한 문제는 〈궁정 생활〉이 관리, 일반민, 성직자들을 물들인다는 점이었다. 궁정 생활이란 빠르면 14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흔히 '르네상스 궁정'으로 일컬어지던 절대주의 제후의 궁정을 뜻했고, 그 구체적인 의미는 세련된 '외적' 매너였다." "새로이 부각된 이상형은 '진정성'을 구비한 '신사'였다. 슈페너가 궁정 생활을 〈외적인 허영〉으로 선언하면서 그 반대 항으로 〈진정성〉을 제시한 것은 정확히 시대를 반영한다."(150-1, 158)


"또한 결정적인 것은, 슈페너에게 내적인 인간은 곧 감정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 그리하여 인간의 내면이란 곧 감정이었다는 점이다. 슈페너는 자신을 지극히 감정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루터 역시 격정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깨우침이 로마서 1장 17절(〈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했다. 그와 달리 슈페너는 신의 은총을 〈황홀하게〉 경험했다고 썼다. 신 앞에서 의로워진 루터와 황홀경 속에서 신을 만나는 슈페너의 차이가 경건주의의 본질을 말해준다. 경건주의 신자란 신을 감정적으로 확인하는 사람이다." "신앙이란 곧 사랑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악마의 유혹〉이다. 그리고 사랑은 실천으로, 즉 선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선행이 없다면 중생도 없다. 또한 그래서 중생한 사람들이 갖는 감정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도덕감정이다! 경건주의는 도덕감정에 입각한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종교운동이었던 것이다."(158-61)


# 중생重生 : 성경을 통해 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지점인 의인화義人化justification를 거쳐 거듭난 사람을 뜻한다.


"30년전쟁은 감정사적 격변을 일으켰다. 전쟁이 감정을 기존의 도덕규범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감정 레짐이 유효성을 상실하고, 감정이 약동하게 된 것이다. 그 맥락에서 경건주의가 중생을 신을 만나는 황홀한 감정 체험으로 규정한 것은 자유로워진 그 감정에 호응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감정은 얼마나 위험한가. 그 감정은 사회적 제약을 모조리 무시할 수도 있다. 슈페너와 프랑케의 인용문을 보면 격정을 〈육체적인〉, 〈사적인〉, 〈자기 자신도 끌 수 없는〉, 〈무절제한〉 등으로 정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된 감정을 부도덕으로 직행하는 통행로로 바라본 것이다. 따라서 경건주의가 제시할 새로운 감정 레짐은 약동하는 동시에 절제된 감정이어야 했다. 그 내용은 부드러운 〈온유함〉이다. 그리고 그 신학적 내용은 〈절제의 영〉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감정 레짐의 내용은 형제애이고, 그 표현은 절제이며, '다정함'이다. 경건주의는 해방된 감정을 종교화, 재규범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162-3)


"계몽주의 목사 필립 마테우스 한에게는 지병이 있었다. 바로 멜랑콜리였다. 그는 언제나 멜랑콜리 때문에 일을 하지 못했다고 썼다. 육체를 거추장스러워 한 것이다." "작가인 카를 필립 모리츠는 1783년부터 1793년까지 《경험영혼론 저널》을 발간했고, 그 저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당대까지 유장하게 지속되어온 영혼론, 즉 인간의 내면을 인간의 정신·신체적 기능들의 교차로 설명하던 틀을 벗어나 내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방향 전환의 와중에 멜랑콜리가 신체적인 히포콘드리아 심기증과 정신적 우울로 분화된다. 그리하여 모리츠가 1785년부터 1790년까지 발표한 소설 《안톤 라이저, 심리소설》에서는 멜랑콜리가 신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사회적 억압의 결과로 제시된다. 이는 감정사의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이다. 17세기를 거치면서 규범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감정이 17세기 중반 이래 물리적 상황으로부터 분리되더니 18세기 말에는 신체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187-9)


"목사 한의 일기는 18세기 중후반의 독일 부르주아가 1세기 전 슈페너의 부르주아와 무척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천적 사랑, 온유함, 다정함에 입각하여 공동체를 건설해야 하고 이를 위하여 분노를 억제해야 한다는 명제는 여전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목사 한은 분노를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주 터뜨렸다. 물론 그것은 한이 접촉하던 거의 모든 사람이 정당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17세기 중반 이후 거세게 밀려든 사회적 이동성이 신분사회의 틀 내부에서 진행되다 보니 신분적 갈등과 계급적 갈등이 중첩되었고, 이는 전선을 복합화했으며, 그 귀결은 정당성 기준의 혼란이었다. 그 문제 상황은 갈수록 심화되어 18세기 중반에 이르자 슈페너으 온유함과 감성주의의 감성은 더 이상 답이 될 수 없었고, 그래서 한은 그리도 자주 분노를 격렬하게 표출했을 것이다." "다만 한은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한은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줄곧 반성했다."(201)


"한의 반성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내와 사별하고 새 아내를 고르는 모습은 삶이 자신의 감정과 싸우고 반성하는 과정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는 새 아내가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라고 변명했지만, 실상 그 선택은 육체적 감정에 대한 항복이었다." "미국 역사가 윌리엄 레디는 18~19세기 프랑스 감정 레짐에 대한 연구에서 카페, 독서회, 살롱, 프리메이슨 등의 부르주아 사회성들을 궁정문화의 외적 매너와 감정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감정의 피란처〉로 정했다." "그러나 그 피란처는 실상 숨 막힐 정도로 강력하고 위압적인 감정 통제 장치였다. 그것들은 필시 강력한 감정 통제의 기제인 동시에 감성이라는 새로운 감정 레짐을 실천하는 장이자, 그 실패를 확인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패로 얼룩진 그 경건주의적 실천이 독일인들을 깊이 내면화시켰을 것이다. 그들은 가차없는 내적 감정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도달하기 힘든 감정 레짐을 추구하면서 근대를 만들었던 것이다."(202-3)


4장. 세계 기업 지멘스의 감정


"지멘스는 가족 중심 기업이었는데, 그 면모는 19세기 독일 기업사에서 예외적이기보다 전형적이었다. 가족 기업은 창업 자본의 조달은 물론 자본 확충에도, 기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도 유리했다. 이익 배당보다 기업 자본의 안정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경우에도 소유는 언제나 가족 내에 머물렀다. 따라서 지분 위기가 초래되는 경우는 예외였다. 모두가 지멘스와 정확히 일치한다. 가족은 제3의 생산요소였던 것이다. 가족은 생존공동체이자 자본공동체이지만 감정공동체이기도 했다." "베르너 지멘스에게 가족과 기업은 일상에서도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창업한 뒤 줄곧 공장 1층에서 살았다. 유의할 점은 신뢰와 충성이 베르너가 아우들은 물론 아내에게도 요구한 감정이었고, 회사에서도 스스로 '노동'한 감정이었다는 데 있다. 아내와 동생들의 가부장이었던 그는 마이스터와 노동자들에게도 가부장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 가부장주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223-5, 232)


"신뢰는 18세기 초까지 거의 언제나 신과 결합되어 사용되었다. 믿음은 신에 대해서 갖는 것이지 인간에게 갖는 것이 아닌 터였다." "신뢰는 감성주의를 거치면서 세속화되는 동시에 쾌감valence과 강도强度를 갖춘다. 19세기 전반기에 출간된 사전들은 신뢰란 '타인이 좋은 것을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하는 감정으로서, 그 사람은 그럴 힘과 의지를 보유하고 있는 동시에 하등의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을 만큼 우리를 휘어잡으며, 그 기대가 우리의 삶에 행복을 준다'고 풀이했다." "충성은 19세기 내내 거의 언제나 신뢰와 함께 사용되었고, 두 단어는 교환 가능했다. 충성은 18세기 감성주의에서 신뢰와 늘 함께 쓰이면서 개인의 의무로 내면화되는 동시에 쾌감과 강도를 갖추게 된다. 충성은 이때 신뢰만으로는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것, 즉 미래적 확실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신뢰와 충성은 그 자체로 노동자의 노동에 도덕적 차원을 부여하는 기제였고, 두 감정에 노동자를 동기화시키는 장치였다."(237-9)


"베르너의 회고록에서 부각되는 키워드는 세 개다. 첫째가 유용성이고, 둘째가 행동력이며, 셋째가 기쁨이다." "베르너는 유용성 개념을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제시할 때 사용하면서 그것에 사업활동도 포함시킨 것인데, 유용성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공리utility이다. 그것은 서양의 산업 부르주아가 자본주의와 산업활동에 부여하는 도덕적 의미 그 자체다. 물론 유용성은 감정이 아니다. 다만 베르너는 유용성이 '행동력'에 의해서만 창출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에게서 행동력은 감정과 분리 불가능했다." "회고록에서 기쁨이 일상적인 만족감으로 쓰인 경우는 다섯 번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30회의 기쁨 표현 중에서 25회가 미래의 비전, 지식의 증가, 사업, 노동, 실험, 발명, 연구, 혁명, 성채 방어, 케이블 설치, 케이블 부설에 따른 위험의 극복, 선행의 기억, 문명의 건설, 아들의 무난한 경영 상속 등을 서술할 때 사용되었다. 기쁨이 인간이 기획하고, 행동하고, 성과를 얻은 것과 결합되어 사용된 것이다."(241-2, 247-8)


"노동을 기쁨으로 정의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 아니다. 중세 기독교에서 노동은 징벌이었고, 종교개혁과 함께 신적인 소명이자 이웃사랑으로 변했으며, 독일 낭만주의 및 관념론과 함께 인간이 자신을 완성하는 윤리적 통로로 의미화되었다." "베르너의 편지를 보면, 노동은 성공에서 의미를 갖고, 성공은 기쁨을 주는데, 노동은 행동력의 소산이고, 행동력은 멜랑콜리를 극복하게 해준다. 한편에는 멜랑콜리가, 다른 한편에는 노동과 기쁨이 위치한다. 그리하여 신뢰와 충성 및 명예 외에 기본 감정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노동의 기쁨이었다. 흥미롭게도 멜랑콜리의 다른 표현으로서 1869년 미국 정신의학에서 고안된 신경쇠약이 1880년대 독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경제인이든 지식인이든 독일 부르주아들은 신경쇠약에 걸렸다며 너도 나도 의사를 찾아갔다. 바로 그 시기, 그러니까 1900년 무렵에 독일 산업세계와 학계에서 노동의 기쁨이 담론화된 것이다."(248, 251)


5장. 일상의 나치즘, 그래서 역사란 무엇인가


"무관심은 저항이 아니다. 그것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미조차 되지 못한다. 무덤덤함은 오히려 나치즘에 대한 독일인들의 태도가 지지와 반대로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제는 나치가 그 뜨뜻미지근한 상태를 못 견뎌했다는 데 있었다. 나치는 독일인들의 삶을 문자 그대로 관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끝도 없이 일상의 독일인들을 '동원'하려 했다. 1930년대 중반 나치당의 최하 말단 조직인 블록Blockwart이 20만 개, 나치 복지단체인 인민복지회의 블록 조직이 51만 개였다. 나치당 블록이 평균적으로 60~80개 가구를 책임졌으므로, 우리로 치면 아파트 한 동에 나치당 블록 대표가 한두 명, 노동전선 대표위원 두세 명, 인민복지회 위원이 서너 명 거주하고 있었던 것인데, 여기에 돌격대 대원 대여섯 명과 히틀러총소년단원 20~30명을 추가해야 한다." "1938년이면 독일인의 3분의 2가 어느 것이든 나치 기구 하나에는 속해야 했다."(270-1)


"나치에게는 모든 조직이 곧 도덕공동체였다. 이해관계의 조직이 아니었다. 따라서 나치즘을 해명하는 데서 도덕은 중요한 '설명' 요소이다. 그리고 나치 도덕공동체의 핵심에는 배제가 있었다." "전쟁 이전의 반유대주의가 없었다면 의당 홀로코스트도 없었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로 직결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배제와 학살은 같은 것이 아니다. 배제 없는 학살은 없지만, 학살 없는 배제는 많다. 문제는 배제가 학살로 귀결되는 경로를 밝히는 일이다. 게다가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배제에만 항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수용소에 가둔 것에 대해서도 감히 항의하지 못했고, 개별 기업에서 나치의 간섭 덕분에 특혜를 얻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출하자 특혜의 범주 자체보다 해당 사람이 그 범주에 포함되어도 좋은지 다투었으며 또 그 특혜에 동승하고자 했다. 밀고는 이때 난무했다. 그 '부당한'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그런 태도를 학살과 등치시킬 수는 없다."(274-5)


"유의할 것은 나치즘에 대한 지지 문제를 설명할 때 반드시 나치의 여론 독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원적 의사 형성 과정이 제거되자 인민의 여론도 나치즘에 부합하게 진행된 것이다." "자신은 〈진정한 독일 애국자〉이기에 나치에 반대한다고 선언한 사람들도 자신의 인종과 몸에 대하여 고민했다. 나치의 언어에 공명한 것이다. 간혹 그런 고민을 떨쳐낸 사람들은 공적 여론이 나치에게 독점되었던 탓에 자기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자 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나치가 인민의 지지 여부를 묻고자 하면 일부의 일탈을 제외하고는 인민에게서 나치 자신의 모습만이 보인다." "그렇게 되면 '논리적으로' 현실은 자아의 확인에 불과하게 되고, 현실감각의 소실과 자기기만이 나타난다. 자신의 의지가 물리적인 객관적 한계에 부딪쳐 실현되지 않으면 의지력이 부족한 탓으로 여기게 마련이고, 의지의 실현은 미래로 이동한다. 그리하여 미래는 자기예언적 실천이 된다."(285-6)


"서부 독일 졸링겐의 김나지움 교사 아우구스트 퇴퍼빈은 언어학 박사를 취득한 지식인이자 독실한 개신교도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여다. 그는 고백교회 인근에서 발행되는 저널을 받아볼 만큼 나치에 비판적이었다." "1939년 12월과 1940년 5월에 퇴퍼빈은 일기에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학살 소문〉을 기록한다. 1942년 5월 그는 급기야 벨라루스에서 자신이 목격한 유대인학살을 기록한다." "진정 놀랍게도 그후 무려 17개월 동안 퇴퍼빈은 유대인학살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1943년 11월 중순 그는 돌연히 쓴다. 〈우리는 비단 우리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유대인만 파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유대 민족 그 자체를 절멸하려 한다.〉 그가 17개월 만에 갑자기 양심의 고통을 느낀 것이다. 이유는 우연히 만난 어느 병사의 말 때문이었다." "영국 역사가 스타가르트는 퇴퍼빈이 〈자신이 목격한 것을 보편적 맥락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논의의 자극이 있어야 했던 것 같다〉고 분석한다."(294-6)


"다시 말해서 독재 권력이 금지한 주제에 관한 한, 그에 대한 사적인 소통이 멈추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정립되지 못함은 물론 도덕적 자아의 점검 작업도 멈추었던 것이고, 양심은 그 문제가 소통에 의하여 다시 주제화되어야만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1943년 9월 초 우크라이나에서 퇴퍼빈은 포로수용소의 독일군 경비병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면서까지 소련군 포로 630명을 탈출시켰다. 그런 그가 1944년 여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전투에서 대패한 독일군 병사들을 보면서 적었다. 〈병사들은 전투에 지치고 의심으로 가득하지만 여전히 복종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진정한 명예의 한 페이지다.〉 그가 히틀러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최종적으로 버린 시점은 무려 1945년 3월이었다. 이는 나치즘에 대한 가의 입장에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의미의 층위가 얽혀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 복합성을 무시하고 나치 범죄를 '학살적 반유대주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296-7)


6장. 나치 독일의 '노동의 기쁨'


"1925년에 출간된 《노동학. 기업 노동의 토대, 조건, 목표》의 기고자들은 대부분 테일러리즘을 비판했다. 노동자를 생산 도구로만 간주하여 인간으로서의 노동자를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기고자들은 노동을 '문화'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가치로서의 노동이 산업노동 현장에서 실제로 경험되고, 그리하여 노동의 기쁨이 생산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실천적 질문에 가장 가까이 답한 사람은 기계공학자인 편집자 리델이었다. 그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부터 논한다. 기계는 고유한 법칙적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한다. 그러나 인간이 기계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작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기계의 낯선 운동에 〈감정이입〉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계 내부에서 작용하는 내적 역동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계의 운동이 노동자 자신의 일부로 경험될 수 있다. 요컨대 기계 작동에 대한 인지와 숙달과 그 과정에서 발동되는 감정적 동일시를 통하여 기계는 인간이 구축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309-11)


"1920년대 중반에 노동에 투여된 의미 성분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은 가치의 경험이자 창출이고, 그래서 문화활동이다. 둘째, 노동하는 인간은 감각 및 지각의 복합체가 아니라 영혼까지 포괄하는 총체적인 심신 복합체이다. 셋째, 기계는 인간의 세계 안으로 통합되어 인간화될 수 있다. 넷째, 노동하는 인간은 노동 과정, 그리고 노동 및 생활환경에 의하여 구성된다. 즉, 노동자는 조형적이다. 다섯째, 그 전체 과정을 통하여 노동자는 고유한 인격이되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이 다섯 가지 의미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누빔점'이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자이고, 그 의미 작동의 매개이자 결과물이 활동 감정, 가치감정, 생 감정, 노동의 기쁨이며, 그 감정의 내용은 〈존엄한 자아〉이다. 테일러리즘이 주장한 노동의 객관화가 노동의 주관화와 인격화로 전환된 것이다. 요컨데 비너와 리델은 노동의 기쁨을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과 결합시킴으로써 노동자를 동기화하고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312-3)


"1925년, 아른홀트는 '독일 기술노동교육연구소(딘타Dinta)' 소장에 임명됐다. 딘타는 나치 집권 이후 노동전선에 편입되고, 아른홀트는 노동전선 직업교육국 국장으로 변신한다. 따라서 아른홀트가 생산한 노동과학 언설은 바이마르공화국으로부터 나치즘으로 넘어가는 다리라고 할 것이다." "아른홀트의 교육시설에서는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자와 가치로서의 노동이 삭제되었다. 따라서 아른홀트에게 자부심은 존엄한 자아와 그 활동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많이 생산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능히 감당하는 신체적 힘에서 발생한다. 갓 입소한 수련생들은 턱걸이 한 번을 제대로 못하지만, 교육장의 수련생들은 권투, 체조, 수영, 육상, 축구를 순서에 따라 실행한다. 아른홀트에게 스포츠는 매우 중요했다. 예컨대 체조는 〈인간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힘을 살아나게 하고, 끝내 자기를 관철하려는 용기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아울러 스포츠는 궁극적으로 경쟁심, 즉 상승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314-5)


"1930년이 되자 아른홀트는 5년 전과 꽤나 달라져 있었다. 노동 감정을 강조하는 것은 같았다. 딘타의 목적은 공장을 〈창조의 기쁨〉의 샘으로 만드는 데 있고, 〈우리 노동자들은 지극히 섬세한 감수성〉을 보유하고 있기에 부정의한 대우에 가장 분노하고, 정상에 〈진정한 사나이〉가 서 있는 기업을 〈가장 사랑〉한다. 아른홀트의 강연은 노동자 인격이 아니라 〈지도자 인격〉에 맞춰져 있었다." "아른홀트는 나치당도 공유하고 있었고, 그 자신도 한때 몸담았던 자유군단의 지도자와 추종자 개념을 가져다가 자본주의 정신으로 변조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하였다. 자유군단은 전투 집단이자 정치 집단이었다. 그 조직은 사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이념 집단이자 행동 집단이었다. 그들의 이념은 민족공동체로서의 독일의 도덕적 혁신이었고, 그들의 행동은 그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운동은 독립적 개인의 집합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은 운동 속에서 신인간으로 재탄생해야 했다."(316, 320)


"1936년의 아른홀트의 언설은 1925년은 물론 1930년과도 사뭇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의미상의 듣는 이가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가라는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사실이다. 바이마르 시절의 그는 기업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노동자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이제 그는 노동자의 태도를 강조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기업가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집중한다." "가장 큰 차이는 언설의 중심에 1925년의 노동자의 상승 욕망도, 1930년의 지도자 인격도 아닌, 〈독일인의 유類적 특징〉이기도 한, 〈창조하는 인간〉이 놓였다는 점이다." "아른홀트의 생각이 변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하다. 그가 노동담론 그래프를 왼쪽으로 이동시킨 것은 나치 노동전선의 자리에서 기업가들에게 발언했기 때문이었다. 나치는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민족공동체 속에서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치는 기업을 민족공동체라는 정치 이념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324-6)


"감정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나치 노동법에서 지금까지 그 어느 역사가도 주목하지 않은 결정적인 지점이 가시화된다. 나치 노동법은 감정법이다. 법조문이 신뢰, 충성, 배려, 명예라는 감정들로 누벼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동법을 담당하는 기관들의 명칭이 '신뢰위원회' '노동신탁위원' '사회적 명예법원'이다." "우리가 베르너 폰 지멘스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은, 신뢰, 충성, 명예가 19세기 부르주아의 대표적인 사회적 도덕감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치 노동법은 그 감정들을 자유군단 '운동'의 지도자, 추종자, 공동체의 틀 속에 배치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립되는 기업공동체는 상호적인 동시에 위계적이었다. 기업 지도자들에게는 배려의 의무가, 추종자에게는 충성의 의무가 할당되었으나, 그 위계적 성격은 기업 지도자가 추종자의 명예를 존중해야 한다는 또 다른 의무에 의해 약화되었고, 당시 노동법원은 기업 지도자에게도 추종자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부과했다."(328-9)


"1936년의 아른홀트는 열광의 이면을 드러낸다. 그가 제시한 바람직한 인간은 타인의 감정적 반응을 예상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차분한 인간이다." "그가 노동을 의미화하는 누빔점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25년에는 사회적 상승 욕망이, 1930년에는 지도자 인격이, 1936년에는 창조하는 인간이, 1937~40년에는 성과주의적 기계-인간 합생론이 의미화의 축이었다. 아른홀트는 대단한 사상가가 아니었음은 물론 고유하게 사유하는 기술인도 아니었다.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1925년에는 우익 기업가 진영의 입장을 대변했고, 1930년에는 운동 국면의 나치즘에 영합했으며, 1936년에는 노동전선의 초기 입장을, 1937년 이후에는 전쟁 준비에 돌입한 나치즘을 대변했다. 아른홀트는 해당 국면의 나치즘을 드러낸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기에 도착한 그의 감정 레짐, 즉 성과에 진력하되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는 인간이 그 시기 나치즘의 감정 레짐이었다고 할 것이다."(338, 343)


7장. 나치 독일의 '독서의 기쁨'


"나치가 금서목록을 체계화하기 시작한 때는 1935년이다. 그 시점에 괴벨스가 금서에 관해서도 독점적 권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제국문필국은 1938년에서야 비교적 정리된 목록을 완성했는데, 그때 책 4,175종 저자 565명이 블랙리스크에 올랐다. 대부분 유대인, 공산당, 사민당, 자유주의 망명 지식인, 모더니즘 저자들이었다. 기묘하게도 문필국은 목록을 사정 당국들과 공유했을 뿐 출판사와 서점에게는 〈엄격히 비밀〉에 부쳤다. 더욱이 문필국은 사전검열을 거부했다. 저자와 출판사와 서점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렇게 상황이 모호하면 작가와 출판사는 짐작만으로 쓰고 출간해야 하고, 그 현실적 결과는 자기 검열이다." "여기에 더해 수준 높은 작가들 다수가 망명을 떠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현명한 독자들만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썼기에, 새로 발간되는 도서는 압도적으로 2급 작가들의 책이었다. 나치의 문학정책은 문학시장을 파괴하지는 않고 왜곡했으나 독일 문학의 수준을 추락시켰던 것이다."(379-80)


"한스 쉐퍼를 비롯한 역사가들은 나치의 영화, 연극, 소설 등에서 오락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이유가 인민 동원이 정신적인 휴식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괴벨스의 원칙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괴벨스의 정책이 나치 독일인들을 '사생활로 후퇴시킨' 것이다." "슈푀를의 코미디 소설에 대한 괴벨스의 촌평은 괴벨스 문화정책이 인민의 정신적 휴식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해석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은 슈푀를의 소설이 나치 지배권력의 일상적 작동을 방어하고 변명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치즘 하에서 독서는 고도로 정치화된 사적인 기쁨이었다〉는 라빈바흐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반면 슈푀를의 소설에는 라빈바흐가 향토소설과 달리 인종주의가 등장하지 않는다. 슈푀를의 소설이 정치적으로 형상화한 것은 인종주의와 그 속에 함축된 〈용기와 의지와 독립성과 주인적인 가치〉가 아니라, 도덕과 물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나치의 지배 기술에 순응해가는 일상의 독일인들이다."(392-3)


"슈푀를의 소설 《가스검침관》에서 두드러지는 감정은 노동 담론과 마찬가지로 열광이 아니라 차분함이다. 주인공을 빼고는 아무도 흥분하지 않는다. 주인공 역시 태평스러움을 가장하려 한다." "뻔뻔스러움이든 차분함이든 내적인 격정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똑같지만, 차분함이 적절한 또 다른 이유는 소설에 그 감정의 이면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포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슈푀를이 뜻밖에도 1930년대 나치 독일사회의 본색을 제대로 형상화했음을 볼 수 있다. 나치 독일은 개별화된 사회였다. 그리고 개별화되는 와중에 노동자들은 회사에 틈입한 온갖 나치 기관원들에게 줄을 서야 했다." "개별화는 자본에 대하여 개인을 약화시키고, 약화된 개인은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그 개인은 공포를 드러내지 않고 차분해야 한다. 순환적이다. 차분함은 공포로 이어지면서 공포를 강화하고, 그 공포를 또다시 차분함 뒤에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394, 397-9)


"공포가 지배 기술에 속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나치가 원하는 독일인은 공포에 찌든 인간이 아니었다. 공포는 인간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가스검침관은 나치가 원하던 이상적인 인간이다. 그는 야심에 괴로워하는 도덕적인 인간이고, 일확천금을 했지만 가스 검침이라는 자신의 일상 업무에 소홀함이 없는 성실한 인간이며, 국가에게 공포를 느껴 나치 독재의 작동을 도와주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엄성을 의식하고 주장하는 인간이다. 하기야 합리화에 의해 개별화된 독일인들이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고도의 성과를 발휘하도록 하는 필수적인 전제가 바로 그 자기주도성이었다. 그리고 가스검침관에게 쏟아진 돈다발은 그런 인간에게 미구에 닥칠 나치 소비 천국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괴벨스가 그 소설을 마땅히 영화화해야 한다고 평한 것은 지당하다. 나치 치하 독일인들이 정신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하여 읽던 소설은 나치 정치 이념을 유쾌하게 형상화한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수단이었다."(400-2)


"유대인과 관련된 나치의 텍스트는 강도만 다를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나치당 기관지 《민족의 파수꾼》은 1942년 12월 11일의 머리기사에서 미국의 유대인들이 영국에 밀사를 파견하여 〈50만 명의 젊은 독일인들을 살해할 사디즘의 잔치〉를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그 시점은 홀로코스트가 개시되고 최소 1년 이상이 지난 때다. 1943년 10월 13일 머리기사는 연합군이 전후에 〈독일인 수백만 명을 소련에 강제노동자로 보내서 절멸시키려고 한다〉고 외쳤고, 같은 달 21일에는 강제노동의 대상을 독일의 모든 남자로 확대했다. 그 시점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정책이 단순 학살로부터 한발 물러나 '노동을 통한 절멸'로 되돌아간 때였다. 1944년 9월 26일에는 미국의 재무장관 모겐소가 〈독일인 4천만명을 퀘벡에서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그 시점은 나치가 유대인을 동유럽 학살수용소에 끌어내어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는 '죽음의 행진'으로 내몬 시점이었다."(405-6)


"1943년 봄 이후 나치는 민간인 지역까지 타격하던 영국군과 미군의 폭격을 〈유대인의 테러공격〉으로 표상했다. 그것은 민간인 지역의 폭격과 유대인을 병렬시킴으로써 폭격의 부도덕성을 이중으로 부각시키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폭격의 주체가 연합군 뒤에 숨은 유대인이고, 그 유대인이 〈혐오스러운 세균〉이라면, 공포는 더욱 용이하게 분노로 전환되지 않겠는가. 또한 연합군의 배후가 유대인일 뿐이라면, 날이 갈수록 폭격이 강해지고 독일군이 퇴각하고 있다고 하여도, 전쟁의 그 본질에 대하여 연합국을 설득하면 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버텨내기만 하면, 연합군에 대한 계몽이 성공하여 결국은 연합군의 공세가 멈추지 않겠는가. 《민족의 파수꾼》이 연합국 〈국민들〉 사이에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고 계속 선전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실상 나치 독일이 거울에서 자기 모습을 보면서 바깥세상을 판단하고 그렇게 자기기만에 빠지고 말았다는 예증이기도 하다."(408-9)


"폭격으로 사망한 독일인은 약 42만 명이다. 일부 독일인들은 폭겨과 고통을 독일의 범죄 탓으로 돌리면서도, 그 고통을 극대화하여 스스로를 희생자로 내세우기도 했다. 종전 이후 서독에 구축되는 피해자 정체성의 전조가 나타난 것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1945년 초에도 독일인들이 '공포의 운명공동체' 속에서 여전히 나치 국가에 동의하고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설명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것 같다. 재난사회학을 참조하면 사태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 연구들은 재난에 대한 대응에서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재난이 초래한 위험을 경감시키는 가장 중요한 힘은 지역공동체의 노력과 주민들의 참여이고, 그다음이 국가의 지원이다. 그 국가가 어떤 국가인지는 부차적이다." "동시에 패전에 직면한 재난사회의 삶은 우연적이었다. 삶이 우연적일수록 사회적 지평은 좁아지고, 사람들은 가장 확실한 것에 집중하게 마련이다."(410-2)


"독일인들은 더욱더 가족에게 매달렸고, 빵 한 덩어리라도 더 얻기 위하여 나치 당국에 호소하는 동시에 이웃을 무자격자로 밀고했다." "재난사회의 작동은 폭력의 지역화로도 나타났다. 1944년 가을 안보 문제가 각 지역 게슈타포 분소로 넘어오자 지역의 친위경찰은 외국인 강제노동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일말의 흐트러짐도 처형으로 처벌했다. 그리하여 연합군의 루르 지역 포위망이 좁혀지던 1945년 3월 그 지역 노동수용소 곳곳에서 수십 명을 단번에 총살하는 마구잡이 학살이 벌어졌다. 강제노동자들이 학살을 피해 탈출하여 도심으로 들어오거나 친위경찰에 의해 길거리로 내몰리자, 독일인들은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그들을 보았다. 그 현실이 마치 처음이기라도 한 양, 독일인들은 처벌 공포와 죄의식에 몸을 떨었다. 사회적 지평의 수축, 처벌 공포, 죄의식, 상호 불신, 나치에 대한 부인, 망각에의 의지, 정상성에의 강박, 가족에 대한 애착, 독일인들은 그 모든 것을 안고 승전국 군대를 맞았다."(412-3)


8장. 서독인들의 공포와 새로운 감정 레짐


"지금 돌아보면, 독일인들을 처벌 혹은 재교육시키려던 점령군의 탈나치화 작업은 솜방망이였고 실효성도 없었다. 유럽 어느 나라에도 과거청산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인들은 그 미래를 몰랐다. 초기에 그 작업은 무서웠다." "모니카 블랙은 전쟁과 포스트워 시기가 독일인들에게 〈일상적 삶에 대한 일상적인 지식〉에 〈인간학적 쇼크-인간 그 자체의 쇼크〉를 일으켰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일상적 〈현실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의 당연한 구분〉이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존재, 〈걸어 다니는 귀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점은 세계가 그들에게 알 수 없는 것,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그 세계는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가 개시했던 필름누아르의 세계, 흑백의 교차로 반짝이는 표면 밑에 무시무시한 어떤 것이 버티고 있는 세계와 닮았다고, 그리하여 독일인들의 고단하지만 범속한 일상 아래 전쟁과 살인의 기억이 버티고 있었다고 강조한다."(420-2)


"전후 독일인들에게서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미군과 아렌트의 해석은 정확하지 않았을지언정, 그릇된 것 같지는 않다. 공포를 감추려는 독일인들의 표면이 무감동 외에 달리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1930년대 중후반 이래 독일의 노동 담론과 코미디 소설에서 확인했던 감정문화이다. 내용을 떠나 형식만 보자면, 공포와 차분함의 결합은 바로 나치 감정 레짐이었다. 놀랍게도 그 감정 레짐이 종전 직후의 독일에서 지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감정 레짐이 놓인 역사적 맥락은 전혀 달랐고, 따라서 감정 실천에 의해 느껴지는 감정 경험도 아주 달랐다. 전쟁 이전에는 성과주의 시스템이 발휘하는 압력이 문제였다면, 폭격 이후에는 전쟁의 상처와 전쟁범죄가 문제였다. 앞선 감정 경험이 사회적 상승 의지의 표현이라면, 뒤의 경험은 벌거벗은 생존과 고통스런 자아 정립에 병행한 처벌 공포와 죄책감, 그리고 추후 드러나듯 자기변명이었다."(429)


"비상사태법은 국가가 외부 공격의 목전에 있거나 실제로 공격을 받는 외적인 비상사태와 자유 민주적인 기본 질서가 위협받는 내적인 비상사태가 닥치면,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와 파업권을 제한하고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를 약화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60년에 그 내용이 알려지자 사민당과 노동조합,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거칠게 비판에 나섰다."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독일의 과거, 즉 히틀러국가가 목전에 있다고 말했다." "1961년에 위르겐 하버마스는 〈전체주의 정당〉이 〈탈정치화의 베일〉로 은폐되어 있지만, 곧 〈무관심한 대중〉이 〈강력한 권위적 국가의 지휘〉에 동원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들은 아래로부터의 전체주의를 우려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경고에서 독일이 얼마나 히틀러국가의 망령에 쫓기고 있었는지 드러나거니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독일의 일급 지식인들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는 사실이다."(436-8)


"홀로코스트 재판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독일의 범죄를 본격적으로 대면하도록 유도하지 못했다. 판사들은 친위경찰은 물론 증인으로 나선 생존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초연한 거리'를 유지했다.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그때의 홀로코스트 재판은 형법에 따라 개개인의 범죄 행위와 〈저열한〉 동기를 확인하려 했을 뿐 범죄의 체제적 성격을 심문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타가 개별적인 일탈로 의미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이 있었다. 홀로코스트 재판은 '평범한 학살자' 유형과 '사디스트 학살자' 유형 두 가지를 부각시켰다. 그 두 가지 유형은 교차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고문으로 악명 높던 인물이 서독에서는 흠결 없는 시민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무섭게 섬뜩한 것이었다." "프랑크 비스는 이 지점에서 절묘해진다. 홀로코스트 재판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학살에 대한 '나의 책임'을 주제화하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학살자 유형은 비판적 시선을 인간 주체의 내면으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440)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한 생활·주거 공동체의 최소한의 공통점은, 그들이 그곳에서 개별적인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적·감정적·물질적 결속을 얻고, 출신 성분과 무관한 평등한 사회적 접촉을 실천하며, 그럼으로써 자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모두 사회주의자였던 것도 아니다. 사민당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관성과 공동체를 결합시킬 방도를 찾고 있었고, 정신분석학에 침윤되지 않은 사람조차 사회경제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내적인 해방감과 진실된 감정 및 새로운 감정적 교류를, 요컨대 새로운 감정적 사회성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감정은 신좌파의 이론과 실천 모두의 중핵이었다. 디터 둠의 《자본주의 소의 공포》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던 것처럼, 그들은 자본주의의 결정적 특징이 부정적 감정의 생산이라고 믿었고, 유아기의 억압에서 벗어나면 진실된 감정을 회복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1970년대 신좌파는 감정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했던 것이다."(450-1)


"그 대안문화 전체에서 지배적인 것은 마르쿠제의 표현으로는 〈새로운 감수성〉이요, 라이하르트의 조사로는 〈따스함〉이었다. 조심할 점은 따스함이 자연적인 감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신좌파 스스로가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아에 대한 고통스러운 정신분석적 작업을 통과해야만 따스함이 발현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생활·주거 공동체의 현실이 따스함을 생산하기는 커녕 그들이 적대시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생산해냈다는 사실이다! 코뮌1은 평등한 논의의 장이 되고자 열심히 토론했다. 그러나 토론이 평등할 수는 없었다. 승자가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대안 유치원에서도 '무지한 스승'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안 유치원의 현실은 권위와 명령이었다." "공동체적 감정이 지속되지도 못했다. 내용과 형식이 모두 진부해져간 것이다. 결국 혁명적 주체의 생산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공동체일수록 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거리 두기, 차가움, 고립감이 나타났다."(452-3)


에필로그


"500년이 넘는 그 오랜 시기의 대표적인 감정 담론들을 분석하면서 필자가 도달한 결론은 '감정은 도덕공동체 구축의 핵심 기제'라는 것이다. 감정은 나만의 비밀에 속하기에 도덕공동체와 연결된다는 단언이 기이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언제나 사회와, 그리고 사회를 견지하는 도덕과 연결된다. 이는 감정이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반사회적이기에 도덕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제압해야 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정반대로 감정은 그 자체로 언제나 도덕감정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늘 부도덕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조차 감정의 도덕성을 전제한다." "우리가 도덕감정을 통하여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살펴보면서 얻은 결론의 결론은, 감정에 역사가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도덕적인 감정공동체를 구축한다는 목표는 언제나 같았으나, 감정에 대한 평가, 문제적인 대표 감정, 부정적 감정을 해결하는 방식, 그 모두에 깔려 있는 인간학적 감정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459, 467)


"감정은 원체 포괄적인 동시에 모호하기에 존재의 불확실성과 잘 어울린다. 감정은 합리적 인지에 선행하는 인지다.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과 낙관적 인간은 같은 대상을 완전히 다르게 인지한다. 그리고 그 인지는 때로는 합리적 판단을 무력화시킨다. 따라서 공감이 요청된다고 말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공감이야말로 자아에 몰두하는 개인을 소통하는 사회적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감에의 호소가 개별화되고 불확실해진 자아에게 잘 닿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감정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말해지면 말해질수록 불확실한 개인은 공감보다는 자아의 내적 격동을 정당화하려 든다. 공감이 아니라 혐오가 작렬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감정의 역사는 현재 나의 감정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해준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해준다. 이를 통해 나의 사회성을 깨닫고 나의 자아실현을 재차 성찰하게 해준다. 자아는 실현하는 것이되, 성찰되는 것이다."(4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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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살아남기 - 우리가 몰랐던 신기한 전쟁의 과학
메리 로취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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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제2의 피부(전쟁 때 입는 것)


"폭발로 공기가 가속되어 밀려 빽빽해지면, 사람을 납작하게 짓누를 수도 있다. 더 세부적으로 보면, 압력파는 옷을 피부에 찰싹 달라붙게 하는데, 그러면 전달되는 열이 더 커지고 화상이 더 심해질 수 있다. 현재의 방염 육군 전투복 천인 디펜더 M이 내세우는 속성 중 하나는 불이 붙으면 풍선처럼 부풀어서 몸에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소방관 제복에 종종 쓰이는 노멕스는 방염 성능이 뛰어나다. 그래서 옷에 불이 붙기까지 적어도 5초는 벌게 된다. 모든 군복을 노멕스로 만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습기에 취약해서다. 중동에서 땀을 쏟으면서 달리는 군인들에게는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불꽃이 없어도, 의류는 불이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면의 자연발화 온도는 약 370도다. 중요한 것은 노출 시간이다. 핵폭발 때 생기는 열파는 극도로 뜨겁지만, 빛의 속도로 지나간다." "폭탄이 터질 때 빠르게 지나가는 열파라면, 단 몇 초 동안 견디는 방염 천도 엄청난 차이를 낳을 수 있다."(20-4)


"물이 주성분인 액체는 대부분 표면 장력이 세다. 즉 물을 흘렸을 때 물 분자들이 천의 표면을 이루는 대부분의 분자들보다 자기들끼리 서로 더 강하게 결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뜻이다. 알코올처럼 표면 장력이 약한 액체는 물처럼 천 위에 방울을 형성하지 않고, 곧바로 스며들어서 천을 적신다." "초방수 피막은 수련의 잎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수련 잎의 표면을 전자 현미경으로 보면 오돌토돌 미세한 돌기들로 가득 뒤덮여 있다. 마찬가지로 천에 오돌토돌한 작은 돌기들을 붙이면, 천과 그 위에 쏟아지는 액체 사이의 접촉과 상호 작용이 줄어든다." "이 신기술은 화학적/생물학적 방호복에 쓰일 것이다. 초방수 천을 사용한 의복에 닿는 물질의 95퍼센트가 그냥 굴러 떨어져 나간다면, 독성 물질에 결합할 활성탄 수용체가 훨씬 더 적어도 된다는 의미다. 좋은 일이다. 두꺼운 활성탄 층을 가진 의복은 덥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공기 필터를 끼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방호복은 무엇보다도 편해야 한다."(28-30)


2장 붐박스Boom Box(폭발문 지대에서 차량을 모는 사람들의 안전)


"이라크에 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미 육군은 차량에 멕서스 장갑판을 장착하려 시도했다. 마크는 회상한다. 「그걸로는 로켓포를 막지 못해요.」 육군은 반응 장갑 타일을 덧붙인다는 생각도 했다. RPG에 타격을 입으면, 충전재가 폭발한다. 바깥을 향한 이 폭발은 RPG의 폭발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한다. 문제는 지나가던 사람이 그 폭발에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값싸고 더 단순한 방법이 먹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철망형 장갑이라는 튼튼한 강철 격자를 두른 차량이다. 날아오는 RPG 포탄은 격자의 그물코에 주둥이가 박혀서 불발탄이 된다." "철망형 장갑이 너무나 잘 막는 바람에 이라크 반군은 RPG를 대체로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제 폭탄을 만드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라크전 초기에 그들은 사제 폭탄을 도로 양편에 매설했다. 이 사제 폭탄이 차량의 옆쪽을 강타하자, 육군은 차량 옆구리에 장갑판을 덧대고 차 유리를 〈교황 유리〉로 교체했다."(47-8)


# 스트라이커Stryker : 미 육군이 쓰는 8륜 장갑차, 교황 유리 : 교황의 순방 행사 차량에 붙이는 두께 약 5센티미터의 투명한 장갑판


"아프가니스탄 반군은 도로 옆이 아니라 도로 한가운데에 폭발물을 매설하여 밑에서 차량을 공격하는 방법으로 전환했다. 대부분의 트럭이 그렇듯이, 당시 미국의 전투 차량은 차대가 편평했다. 나중에 나온 차량들은 V자나 이중 V자 모양의 차대로 폭발 에너지가 비껴가도록 한 반면, 편평한 차틀은 폭발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그리고 좌석이 승객 칸 바닥에 볼트로 고정되어 있어서, 폭발 에너지가 탑승자의 발, 척추, 골반으로 고스란히 전달되곤 했다." "더 신형 차량은 좌석 밑에 여유 공간을 두고 있다. 그러면 폭발의 힘이 바깥으로 방출되면서 빠르게 줄어든다. 그래도 30~60센티미터 이내에서는 에너지가 대단히 응축되어 있어서 고체 탄환처럼 작용하여 차량 바닥을 뚫을 수 있다. 차체가 뚫리면서 온전했던 원형을 잃는 순간, 부서져 나간 모든 조각과 부품은 발사체가 된다. 육군 병사와 해병 대원은 비행기 조종사가 방호복을 입는 대신에 깔고 앉는 것과 같은 이유로 험비 바닥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두곤 했다."(49)


3장 귀를 이용한 전투(군대 소음의 수수께끼)


"수십 년 동안 귀마개를 비롯한 수동적인 청력 보호 수단들은 군 청력 보존 사업들에서 주된 방어 무기가 되어 왔다. 대다수의 귀마개는 소음을 30데시벨쯤 줄여 준다. 꾸준히 들려오는 지겨운 배경 소음을 줄이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브래들리 전투 장갑차가 아스팔트 위를 덜거덕거리며 지나가는 소음(130데시벨)이나 블랙호크 헬기의 푸드득 소리(106데시벨) 같은 것들이다. 30데시벨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중요하다. 시끄러운 소음의 세기가 3데시벨 커질 때마다 청력 손실 위험이 없는 노출 가능 시간은 절반씩 줄어든다. 사람의 맨귀는 85데시벨(고속도로 소음, 혼잡한 식당)까지의 소리에는 하루에 8시간씩 노출되어도 청력 손실이 없다. 115데시벨(사슬톱, 록 콘서트 무대 바로 앞)의 소음은 안전한 노출 시간이 30초에 불과하다. AT4 대전차 화기가 뿜는 187데시벨의 소음에는 1초밖에 견디지 못하는데, 그 짧은 노출에도 보호되지 않은 맨귀는 청력이 영구적으로 저하된다."(67-8)


"귀마개가 제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깊이 꽂기 위해서는 귓바퀴를 잡아당겼다가 놓아야 한다. 전투 헬맷을 쓴 채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여유를 허용하는) 1차원적인 전쟁터는 더 이상 없다. 어디든 최전선이 될 수 있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IED가 폭발하고 실력 행사가 이루어진다. 귀마개로 청력을 보호하려면, 정찰하는 13시간 내내 끼고 있어야 한다. 그 시간 중 95퍼센트는 아무런 큰 소리도 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 끼고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팰런은 이렇게 말한다. 「군대에는 소음 문제가 없어요. 조용한 게 문제지요.」" "최고의 임무 수행 능력을 지닌 부대에서는 청력 손실이 어느 정도만 일어나도 〈사살 비율〉(없앤 적의 수를 생존한 부대원의 수로 나눈 값)이 50퍼센트 줄어들었다. 잘 듣지 못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총을 쏘거나 달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 능력이 방해를 받자, 그들은 더 주저하게 되었다."(79, 83)


4장 허리띠 아래(가장 잔인한 총격)


"IED는 두세 개씩 함께 묻는다. 하나는 차량에 탄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다. 다른 폭탄은 도우러 오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다. 화이트는 칸다하르 주의 부비트랩이 가득한 길에서 통로 확보 임무를 맡아서 지휘 통제 차량을 타고 가던 중에 첫 폭발을 목격했다. 그는 전투 공병 소대를 이끌고 있었다. 도로, 벽, 엄폐호, 다리 등을 건설하거나 파괴하는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부대다. 그 분쟁 지역에서 미국과 나토와 협력하는 아프간 육군 병사들이 탄 험비 차량은 앞서 가지 말라는 화이트의 경고를 무시했다. 세 명이 죽고, 세 명이 다쳤다. 차량이 옆으로 넘어지면서 길을 막았기에, 치우기 위해 공병대가 파견된 것이다. 화이트가 묻혀 있던 압력판을 밟는 순간,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10킬로그램짜리 〈희생자 작동형victim-operated〉 IED였다." "「몸을 일으켜서 지혈대를 꺼내 오른쪽 다리에 묶으려 했는데, 다리가 없는 거예요.」 왼쪽 다리는 길이는 온전했지만, 종아리 부위가 찢겨 날아가고 없었다."(89)


"화이트의 수술에서는 한 가지 의아함을 느낄 수도 있다. 간호사가 황갈색의 표준 살균제를 수술 부이에 바르고 있다. 그런데 사타구니가 아니라 얼굴에 바르고 있다. 보조 외과의인 몰리 윌리엄스 소령은 요도를 늘이는 데 쓸 조직을 화이트의 볼 안쪽에서 띠 모양으로 떼어 낸 조직으로 만들 것이라고 설명한다. 입 조직은 우수한 요도 대체물이 된다. 무엇보다도 털이 없다. 소변에는 광물질이 들어 있어서, 요도에서 털이 자라면 엉겨 붙어 쌓일 것이다. 요로결석은 소변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끊고, 소변을 눌 때 엄청난 통증을 일으키는 골칫거리다." "집도의인 제임스 제지어는 말한다. 「또 입은 오줌을 견뎌 냅니다.」 그는 입이 본래 축축한 곳에 알맞게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팔뚝 아래쪽이나 귀 뒤쪽의 털이 없는 피부로도 요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만, 소변에 자주 젖다 보면 손상될 수 있다. 일종의 기저귀 발진이 요도 안에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염증이 조직을 먹어치우면서 구멍이 난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결과다."(93)


5장 기이해질 수 있다(성기 이식에 바치는 찬사)


"간이나 콩팥과 달리, 얼굴이나 손은 피부, 근육, 점막의 다양한 집합, 즉 복합 조직이다. 음경이라면, 거기에 발기 조직도 추가된다. 몸은 한두 종류의 조직만 받아들이고 다른 조직은 거부할 수도 있다. 피부는 특히 문제를 일으킨다. 피부는 보호 장벽이기 때문이다. 면역학적으로 삼엄한 경계 상태를 유지한다. 이 몸의 보초병을 속이기 위해, 환자에게 기증자의 골수를 주입한다. 골수는 면역 세포를 만드는 일을 한다. 기증자의 골수는 환자 자신의 골수를 대체하지는 않지만, 면역 체계를 얼마간 재프로그래밍 한다. 몸은 새로 이식된 부위를 점점 수상쩍게 여길지 모르지만, 통째로 제거하는 일까지는 하지 않는다. 거부될 위험이 더 낮다는 것은 면역 억제제가 덜 필요하다는, 따라서 투여량을 더 줄일 수 있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부작용도 더 적어지고 환자도 더 건강해진다. 골수 주입 같은 신기술들은 목숨을 구하는 용도가 아닌 형태의 이식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윤리적 균형의 저울을 기울였다."(110-1)


"이식된 부위에는 죽음의 기운이 어려 있다.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생되었기 때문이다. 환자가 그 점을 얼마나 불편하게 느낄지 상상할 수 있다. 콩팥이나 허파 같은 내부 장기는 이식의 심리적 영향이 대체로 적다. 눈에 안 보이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니까." "성형 및 재건 외과의인 데이먼 쿠니의 경험은 달랐다. 「나는 그것이 몸이 온전한 사람의 오만임을 깨달았어요. 당신과 나는 두 손을 지니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손을 얻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겁니다. 하지만 한 손을 잃은 채로 사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거든요.」 쿠니는 자기 수술진이 손을 이식한 환자 6명 모두가 수술에서 깨어난 즉시, 그 손을 자신의 손으로 여기는 것을 보았다. 아직 감촉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도 그랬다." "낯선 사람의 얼굴을 이식 받았을 때에도 당사자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심란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식의 대안이란 얼굴이 아예 없는 채로 사는 것이니까."(115-6)


6장 포화 속 살육(의무병은 어떻게 대처할까?)


"초기 인류로부터 진화한, 우리의 뇌에 새겨진 생존 전략은 위협이 닥치면 아드레날린을 분출하고, 아드레날린은 코르티솔이 혈액으로 왈칵 쏟아지도록 자극한다. 코르티솔은 허파에는 산소를 더 많이 빨아들이라고, 심장에는 두 배 또는 세 배 더 빨리 뛰어서 그 산소를 더 빨리 온몸으로 보내라고 재촉한다. 한편 간은 포도당을 토해 냄으로써, 그런 일들에 쓸 연료를 공급한다. 필요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신체 부위로 산소와 연료를 보내기 위해, 팔과 다리의 큰 근육에 있는 혈관들은 팽창하는 반면, 우선순위가 더 낮은 기관들(위장과 피부 같은)로 뻗은 혈관들은 수축된다.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주요 기관인 전두엽도 배급 제한을 받는다." "설상가상으로, 근육의 능력 발휘를 충돌질하는 아드레날린은 신경 활동도 증진시킨다. 그래서 몸이 덜덜 떨리게 된다. 여기에 구급 헬기의 움직임과 진동까지 고려하면, 위생병이 얼마나 힘겨운 도전 과제에 직면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136)


"터널시tunnel vision라는 전문 용어는 주의가 협소해진다는 뜻이다. 그것 역시 선사 시대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생존 스트레스 반응의 재앙을 일으키는 한 요소다. 다른 것들을 다 배제하고 오로지 위협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가리킨다. 브루스 사이들은 어느 의사와 불안해하는 인턴의 재미있는 사례를 들려준다. 의사는 교통사고 환자의 찢긴 상처를 꿰매라고 인턴을 응급실로 보냈다. 인턴은 꿰매는 일에만 너무 몰두하다 보니, 환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투 치료의 주된 스트레스 요인은 모든 훈련 시뮬레이션에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위생병을 훈련시키는 또 다른 방법은 자동적으로 하게 될 때까지 어떤 기술을 무수히 연습시키는 것이다. 전두엽이 무단 외출할 때, 이성이 결석할 때, 근육 기억이 남아서 일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연습을 충분히 반복하면, 극도의 생존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응급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피를 흘리는 상황에서도 말이다."(143, 149)


7장 땀 흘리는 총알(열기 속 전쟁)


"땀은 시원하지 않다. 피만큼 따뜻하다. 본질적으로 땀은 피다. 땀은 혈장에서 나온다. 혈장은 피에서 주로 물로 이루어진 무색의 성분을 가리킨다. 땀은 증발을 통해 열을 식힌다. 열을 공기로 내보내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몸이 과열되기 시작할 때, 피부의 혈관은 확장되어서 피가 피부로 더 많이 향하게 된다. 피부의 모세 혈관으로부터 뜨거운 혈장이 땀샘─약 240만 개의─을 통해 몸의 표면으로 스며 나와서 증발된다. 증발을 통해 몸에서 수증기 형태로 열이 빠져나간다." "땀을 흘리면서 계속 일하면, 그들이 쓰는 근육은 몸이 땀을 흘리는 데 쓰는 혈액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혈액을 차지하려는 이 경쟁의 가장 약한 결과는 열 탈진과 열 실신이다. 피가 몸을 식히기 위해 피부로 흐르는 한편으로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산소를 전달하기 위해 근육으로도 흐르다 보면, 피를 뇌로 보내는 데 필요한 혈압을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산소를 운반하는 피가 뇌로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기절한다."(155-8)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헐거운 옷을 입으면 더 시원한 이유는 전도로 설명할 수 있다. 헐렁한 셔츠는 뜨거워지지만, 옷이 피부에 닿아 있지 않기 때문에 꽉 끼는 티셔츠와 달리 몸으로 열을 전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공기가 수분으로 포화되어 있을 때에는 땀이 증발할 곳이 없다. 피부에 물방울처럼 고였다가 얼굴과 등을 따라 흘러내린다. 더 중요한 점은 땀이 몸을 식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온이 섭씨 33.3도 미만일 때, 몸은 더 차가운 공기로 열을 발산함으로써 저절로 식을 수 있다. 이 온도를 넘어서면 열은 발산되지 못한다. 발산의 짝은 대류다. 우리의 몸이 주변에 형성하는 가열된 축축한 공기의 구름은 피부로부터 위로 올라가고, 그 빈자리를 더 차가운 공기가 와서 메운다. 그리고 더 건조할수록, 더 많은 땀이 증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산들바람은 몸이 주변에 만들어 내는 습한 공기 막을 날려 버림으로써 몸을 식힌다. 밀려드는 공기가 더 차갑고 더 건조할수록, 몸은 더 빨리 식는다."(163, 160-1)


8장 질질 싸는 네이비실(국가 안보 위협 요소로서의 설사)


"이른바 〈현대 의학의 아버지〉인 윌리엄 오슬러는 1892년에 이질이 〈병사들에게 화약과 총알보다 더 치명적이었다〉라고 썼다. (〈이질〉은 병원체가 창자의 내층에 침입하여 세포와 모세 혈관의 내용물이 새어 나오게 하고, 이질 특유의 증후군을 일으키는 감염병을 포괄하는 용어다). 1848년 멕시코 전쟁 때 미국인 1명이 전투로 사망할 때마다 7명이 병으로 죽었으며, 대부분은 설사 때문에 죽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설사나 이질로 죽은 병사는 95,000명이었다. 베트남 전쟁 때는 말라리아에 걸려서 입원한 군인보다 설사병으로 입원한 군인이 거의 4배 더 많았다." "해군 대령 로버트 필립스는 재수화액에 포도당을 첨가하면 장의 염분과 물 흡수력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병원에 가서 정맥주사로 수액을 맞는 대신 재수화액을 마시는 방법으로도 수분을 보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 방법으로 의료 시설이 부족한 오지에서 싸우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178-9)


"세균성 이질을 일으키는 주된 병원체인 시겔라와 캄필로박터는 독소를 전달하는 〈분비 기구〉를 휘두른다. 피하 주사기 겸 총검으로 장 내층의 세포에 독소를 주입함으로써, 세포들을 죽이고 그 내용물이 흘러나오게 만든다. 이 유출은 설사를 일으키는 데 한몫을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퇴역하는 세포들이 아주 많아지면, 장 전체가 물을 흡수하는 본래의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다. 그 결과 음식 찌꺼기는 소화관을 따라 가면서 점점 물기가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묽은 상태로 남아 있다. 장관 응집성 대장균ETEC이라는 세균은 다른 방식으로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이 세균을 장을 뒤덮어서 흡수를 막는 세균 밀집 대형, 살아 있는 비닐 랩이 된다. 콜레라균과 장관 응집성 대장균은 화학 무기 공격도 가한다. 둘 다 세포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펌프를 약탈하여 독소를 만드는 데 쓴다. 징발된 펌프는 환자가 물을 마셔서 보충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세포로부터 물을 빨아내기 시작한다."(182)


9장 구더기 역설(전쟁터의 파리, 좋은 쪽과 나쁜 쪽)


"〈상처 부위의 옷을 제거하는 순간, 상처에 수많은 구더기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에 나는 경악했다.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나는 서둘러서 이 끔찍해 보이는 생물들을 씻어 냈다. 그리고 상처를 식염수로 씻자, 놀라운 광경이 드러났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분홍빛 육아 조직이 상처를 채우고 있었다.〉 1917년, 미국 원정군의 외과의 윌리엄 베어는 일부러 상처에 구더기를 들끓게 해서 치료를 돕는다는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생각을 어떻게 떠올렸는지를 그렇게 설명한다. 지저분한 파리 유충은 죽은 고기나 썩어 가는 고기를 좋아한다. 그 고기가 열린상처의 일부라면, 먹는 행위는 일종의 자연적인 죽은 조직 제거 기능을 수행한다. 죽었거나 죽어 가는 조직을 제거하면 감염이 억제되고 치유가 촉진된다. 죽은 조직에는 혈액 공급이 안 되어서 면역 방어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세균이 들끓기 쉽다. 그 결과 건강한 조직에도 감염이 일어나고 염증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치유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208-9)


# 분홍빛 육아 조직 : 빠르게 불어나면서 상처를 치료하는 어린 조직


"구더기의 입 부위는 삐걱거리면서 움직이는 휘어진 커다란 낫처럼 보인다. 구더기의 몸에서 유일하게 키틴질로 된 부위다. 축축하고 하얗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다른 부위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갈색의 단단한 부위다. 다행히도 죽은 조직 제거 구더기 요법을 받는 환자의 상처 깊숙한 곳에 있는 조직─죽은 조직이든 살아 있는 조직이든─에는 감각 신경이 없다. 감각 신경은 피부의 맨 위쪽 층에 깔려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세균과 죽은 조직의 잔해까지 다 제거하고 싶다면, 구더기를 외과의로 택하라.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펙은 폭발로 입은 상처의 죽은 조직을 초기에 제거하는 데 구더기를 쓰자는 주장을 결코 한 적이 없다. 구더기는 치료가 한참 진행된 군인에게 쓰일 것이다. 즉 아마도 흙 같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유별나고 강력한 항생제 내성 균주가 폭발로 상처에 아주 깊이 다량으로 침투해서, 난치성 감염이 일어날 때 말이다. 이런 합병증은 자주 나타난다."(214-5)


10장 죽이지 않는 것은 악취를 풍기게 할 것이다(냄새 폭탄의 역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정보기관이었던 OSS는 국방 연구 위원회NDRC 무기 개발자들의 지원을 받아서 악취 물질을 직접 개발하러 나섰다. 회고록에 나온 바에 따르면, 러벌이 원래 받은 명령은 〈심한 설사를 일으키는 역겨운 냄새〉 물질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누구, 나?〉는 러벌이 SAC-23 계획에 붙인 위장 명칭이었다." "NDRC는 추가 요구 조건을 정했다. 〈역분사가 일어나지 않으면서〉 퍼지는 〈범위〉가 적어도 3미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행할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야 한다.〉또 시선을 끌지 않아야 한다. 빗물, 비누, 용매에 씻기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몇 시간 동안 수치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군사적으로 〈악취제malodorant〉, 곧 비살상 악취 무기는 그보다는 〈지역 거부terrain denial〉을 일으키는 데 더 널리 쓰인다. 사람들이 표적지인 땅에서 기어 나오도록(또는 그 땅을 피하도록) 하는 용도다. 베트콩 땅꿀, 테러리스트의 은신처, 무기 저장소 등에서 말이다."(230-3)


"1944년 11월 9일에 〈누구, 나?〉의 최종 검사 보고서가 나왔다. 아서 D. 리틀의 1945년 2월 19일 자, 〈누구, 나?〉 최종 보고서 목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동양인을 진료한 경험이 많은 한 해군 의사와 논의한 끝에, 확실하게 혐오감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 악취는 단 두 종류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컹크 냄새와 시체 냄새다. 〈누구, 나?〉를 토대로 삼지만, 대변 냄세를 스컹크 냄새로 대체함으로써 우리는 〈누구, 나?〉Ⅱ를 개발했다. 이 제품은 지독한 냄새를 지니며, 침투성과 지속성이 더 강하다. 일본인에게 요구되는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것이 확실하다.〉 마침내 〈누구, 나?〉 500개와 〈마크Ⅱ 오리엔탈 누구, 나?〉 100개가 제조되었다. 하지만 전선으로 보내진 것은 한 병도 없다. 이유는? 국방 연구 위원회가 일본인에게 쓸 지속성과 침투성이 훨씬 큰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 나?〉의 두 번째이자 최종 보고서가 나오기 17일 전,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다."(241-2)


11장 옛 친구(상어 기피제를 시험하는 방법)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군 역사상 열대 해역과 그 상공에서 전투를 벌인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침몰하는 배나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탈출했다가 상어에게 공격을 받고 잡아먹힌 이야기가 해군과 공군에 떠돌기 시작했다(제1차 세계대전이 펼쳐진 북대서양의 차가운 물에는 그들을 잡아먹을 존재가 없었다)." "미 해군은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비록 고위 인사 중 한 명이 해군 중에서 상어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한 공식 기록이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걱정한 것은 군의 사기였다. 근거가 있든 없든 간에, 상어가 무섭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타려는 병사들이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스튜어트 스프링어는 그 터무니없는 역설을 이렇게 표현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는 되었지만, 조국을 위해 잡아먹힐 준비가 되었느냐는 다른 문제다.〉 적어도 기피제는 상어를 겁내는 비행사를 위한 심리 치료제 역할을 할 터였다."(251-4)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내내, 해군 고위층에서는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해군 의료국 국장인 로스 T. 매킨타이어 소장은 포장지에 굵은 대문자로 찍힌 샤크체이서라는 글자가 그것을 보기 직전까지 탈수, 굶주림, 익사, 열기, 추위 같은 해양 생존의 진정한 위협들에 몰두하고 있던 마음에 공포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사실상 사기를 높이기보다는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극히 타당한 문제를 지적했다. 매킨타이어의 말을 빌리자면, 상어가 해군 병사에게 가하는 〈위협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얼마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일까? 다양한 견해가 나와 있지만, 진행 과정의 어느 시점에 남태평양 함대 사령관은 모든 해군 기지와 병원선에 〈상어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진정한 사례〉가 있으면 알려 달라는 통신문을 보냈다. 취합해 보니, 단 두 건이었다. OSS는 정보기관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보고서를 없애 버린 것이다. 그것은 OSS에게 또 하나의 악취 폭탄이었다."(259-60)


12장 가라앉는 느낌(바다 밑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감압병을 이해하려면, 부엌의 탄산 가스 발생기를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 거품이 이는 물은 감압병에 걸린 수돗물이다. 액체가 든 용기에 압축 공기를 불어넣으면, 기체 중 일부는 액체에 들어간다(그 기체는 평형이라는 더 큰 대의를 위해 〈용액으로〉 들어간다). 이제 통 속의 압력을 갑작스럽게 해방시킨다고 하자. 병이 열렸거나 잠수부가 수면으로 쑥 헤엄쳐 올라올 때처럼 말이다. 공기 압력을 통해 액체에 불어넣은 기체 분자들은 이제 용액 밖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그렇게 빠져나온 기체 분자들은 서로 결합하여 공기 방울을 형성한다. 그냥 그렇게 뭉친다. 이제 이제 당신은 쉬이익 소리가 나는 청량한 물 한 잔을 얻는다. 아니면 시야가 어른거리는 감압병 증상을 얻거나. 감압병은 공기 방울들이 몸속을 돌아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피떡처럼 작용하면서 중요한 기관으로 향하는 혈액의 흐름을 막거나, 조직을 찢어서 통증을 일으키거나, 혹은 양쪽 다 하거나 등등의 일을 한다."(296-7)


"잠수부는 천천히 올라옴으로써 감압병을 피할 수 있다. 그러면 혈액에서 생겨나는 기체가 허파로 보내져서, 내쉬는 숨을 통해 그냥 몸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이 공기 방울의 주범은 질소다. 공기에는 질소가 아주 많이 들어 있고, 질소는 지방에 녹아들어서 숨어 있곤 한다). 잠수부가 가압된 공기를 호흡하는 시간이 더 길수록, 공기가 더 강하게 압축되어 있을수록, 내보내야 하는 질소의 양도 더 많아지고, 따라서 더 천천히 올라와야 한다." "아주 깊이 내려간 상태가 아니라면, 비상 탈출구 안에서 1분쯤 가압 공기를 호흡하는 것 정도로는 시간이 짧아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잠수함이 침수된다면, 유입된 물이 쓰레기 압축기처럼 공기를 압축할 것이다. 수심 240미터에서는 비상 탈출구의 공기를 심하게 가압해야 하므로(바깥의 수압과 평형을 이루어서 해치를 열 수 있게 하려면), 그 공기를 1분 동안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감압병 위험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많은 질소가 몸에 녹아들 것이다."(297-8)


13장 위와 아래(잠수함 승무원은 잠을 자려고 애쓴다)


"그렉 벨렌키 대령은 수면 시간이 하루 8시간에서 4~5시간으로 줄어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안다. 며칠에 걸쳐 인지력이 감소하다가, 새로운 안정 상태에 들어선다. 수면 시간이 더 줄어들수록, 정신적 능력이 퇴화하다가 안정 상태에 들어가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더 늘어난다. 어떤 정신 능력을 말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능력이 그렇다. 수면이 부족하면 기억력이 떨어지고, 사고, 의사 결정, 이성과 감정의 통합을 담당하는 신경망도 약해진다. 벨렌키는 이렇게 말했다. 「일하다가 문제가 생겨서 그냥 포기할 때가 있지요? 그런데 잠을 푹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해결책이 떠오르고요? 잠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겁니다. 뇌를 정상 수준으로 돌려놓는 겁니다.」" "『군 작전 노트 소식지』는 여기서 더 크고 굵은 활자에 밑줄과 기울임체까지 써서 강조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매일 방해받지 않고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하면 며칠 사이에 피로가 쌓여서 술 취한 것과 비슷한 기능 결핍 상태가 된다.〉"(305-6)


"햇빛은 가장 강력한 체내 시계 조정자다. 우리 몸에는 눈의 막대 세포와 원뿔 세포 외에 제3의 광수용체가 있다. 이 광수용체는 햇빛의 청색 파장에 맞추어져 있다. 이 빛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정보는 솔방울샘으로 들어간다. 솔방울샘은 몸의 천연 수면제인 멜라토닌을 만드는 곳이다. 햇빛은 멜라토닌 생성을 중단시키고, 그럼으로써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하루 주기 변경에 따른 생체 시계 이상은 수면 시간 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각성도와 수행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편이 공정할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잠수함 부대는 〈6시간〉이라는 근무 일정표를 써 왔다. 당직 6시간, 기타 업무와 훈련 등 6시간, 개인 활동과 취침 6시간이다. 그런 다음 다시 당직을 선다. 하루 일정을 18시간으로 정한 결과, 각 선원은 24시간마다 6시간씩 당직을 한 번 더 서게 되었다. 문제는 이 일정표에 따른 활동이 개인의 생물학적 리듬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이 몹시 잠들기를 원하는 시간에 일하게 된다."(323-5)


14장 사자死者로부터의 피드백(시신은 어떻게 사람이 계속 살 수 있게 돕는가)


"골수 주사는 정맥 주사의 사촌격이다. 정맥보다는 골수를 통해서 수혈을 하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가 피를 다량 잃는다면, 혈관벽이 팽팽하지가 못해서 혈관을 찾아 바늘로 찌르기가 어렵다. 핀으로 새로 분 풍선을 찌르는 것과 파티를 한 뒤 일주일 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풍선을 찌르는 것의 차이다." "예전이었다면, 이 남자의 멋진 가슴 근육이 그의 죽음에 관여했을 수도 있다. 매일 같이 역기를 들어 올리는 육군 병사나 해병대원은 가슴 근육이 너무나 우람해지는 바람에 허파가 쪼그라들었을 때─총알이 허파를 뚫는 바람에 허파의 공기가 그 주변 공간으로 빠져나가서 쌓일 때 같은─문제가 생기곤 한다. 그럴 때에는 바늘로 가슴을 찔러서 공기압을 줄여야 하는데 근육이 두꺼워서 바늘이 근육을 뚫고 더 안쪽까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남성 부상 환자의 약 절반이 그러했다. 미군 법의관시스템AFMES이 제공한 야전 피드백 덕분에, 지금은 우람한 병사에게는 더 긴 바늘을 쓴다."(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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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죄책 - 일본 군국주의 전범들을 분석한 정신과 의사의 심층 보고서
노다 마사아키 지음, 서혜영 옮김 / 또다른우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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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책은 2000년에 출간된 『전쟁과 인간』의 재판(再版)으로, 새롭게 보강된 내용은 없다.


서장 죄의식을 억압해온 문화


"패전 직후의 쇼크, 감정 마비와 혼란이 가라앉은 뒤, 일본인의 반응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반응은 '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 가담자와 피해자를 뭉뚱그려 아무도 벌하지 않는다. 〈이겨도 져도 어차피 전쟁은 비참한 것〉이라는 입장에서 평화를 제창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것은 평화운동으로 나타났다. 평화운동에도 두 가지 흐름이 있다. '아무도 벌하지 않는다'는 절대 평화를 주장하는 무리와, 스스로를 벌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반전 세력(사회주의권)과 호전 세력(미국)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무리가 있었다." "두 번째 반응은 '물질주의로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전쟁에 의한 마음의 상처를 물질주의 가치관으로 덮어씌우고, 물량에서 미국에 진 것이니까 경제를 부흥하고 공업을 재건해서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는 것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세였다. 거기에는 정신적 퇴폐와 중국 문명에 대한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이 숨어 있었다."(20-1)


제1장 의사와 전쟁


"나는 지금까지 전범으로 중국의 수용소에 잡혀 들어갔었던 일본군 출신들을 많이 만나왔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나는 중국인을 학살했다. 그러므로 사정이 어찌 됐건 그들도 나를 죽일지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크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아사는 생체 해부를 했으니까 (죄인지 아닌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자신도 생체 해부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싹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마음속에서 변명하고 있는 거죠. '명령이었다, 어쩔 도리 없었다, 전쟁이었다, 이런 일은 흔했다, 여기저기서 범상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고. 이제 전쟁은 끝났고요.〉 여기에는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집단에 준거해서 사는 인간의 정신세계가 잘 나타난다. 자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집단으로 있는 한 불안하지 않다. 집단이 혼란에 빠질 때는 자신도 혼란에 빠지지만, 그때뿐이다. 집단은 끊임없이 개개인이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호하게 흐리고, 집단이 요구하는 모든 행위에 동의하도록 한다."(50-1)


제2장 길 아닌 길


"신학교 교수 구마노 요시타카가 저술한 『종말론과 역사철학』(1933년 9월)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이 있다. 〈교회는 자신이 속한 국가에 대해 충성과 근로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는 변증법적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자연법을 넘어 성스러운 의지로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이 의지의 대변자로서 각각의 민족과 그 문화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전쟁 시기와 패전 이후까지 일본의 지식인들이 품고 있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국가권력이 국민정신의 총동원을 목표로 검열을 강화할 때, 천황제 국가의 악에 대해 의연하게 반대할까, 아니면 침묵할까, 그것도 아니면 검열을 비껴갈 듯 말 듯한 발언을 해서 결국에는 탄압당할까, 셋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은 변증법이라는 주문에 의지해 명확한 대립을 모호하게 피하며, 자신들의 이론이 '높은 차원에 서서 파악하는 것'이라거나, '단번에 파악하는 것'이라고 떠들어댔다."(89-91)


제3장 마음이 병드는 장병들


"1940년 8월부터 12월에 걸친 팔로군의 대공격으로 타격을 입은 일본 북지나군은 중국공산당의 해방구를 없애기 위해, 훗날 중국이 이른바 '3광 작전(살광[殺光, 남김없이 죽인다], 소광[燒光, 남김없이 태운다], 창광[창光, 남김없이 빼앗는다])'이라 부른 작전을 실행했다. 일본군 병사들은 자신의 인격을 해체하지 않고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비윤리적 행위를 작전으로 명령받았고, 신체를 극한까지 흥분시키면서 이를 실행에 옮겨야 했다. 견딜 수 없어 도망치면 적 앞에서 도망쳤다는 이유로 사살당했고, 일본에 있는 이들의 부모형제는 '비국민'의 가족이라며 손가락질당했다. 억지로 몸을 추스르더라도, 어느 순간 거부반응이 시작된다." "오가와는 '전쟁신경증'이란 개념조차 몰랐지만, 다수의 심인성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히스테리성 경련 발작, 보행 장애, 반신불수, 실어증, 자해. 이 모두는 심인성 증상이었으며, 신체의 병변은 없었다. 밤중에 가위눌려 갑자기 일어나 소리 지르는 야경증 환자도 적지 않았다."(110-2)


"오가와는 강한 척하는 인간의 어쩔 도리 없는 나약함을 줄곧 보아왔다. 만주사변 직후 펑톈에서 경비를 서던 학생들의 공포심과 그것을 견디다 못한 살인.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의 초년병 교육 시절, 인격이 퇴행하여 죽음에 빨려들어 가던 병사들의 모습. 스자좡병원과 베이징 제1육군병원에서 전쟁 영양실조증으로 왜소하게 오그라들어 죽어가던 병사들. 혹은 자살하는 병사. 그들은 약탈 전쟁에 적응할 수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도망죄로 총살당하기 직전의 병사들. 기나긴 비인간적인 시간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격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이한다." "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세대는 가미가제특공대를 통해, 그 '영웅적인 죽음'만을 보고 전쟁을 관념적으로 파악한다. 건강한 남성의 죽음은 관념적으로 미화되기 쉽다. 전쟁터의 최전선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관념에 의한 미화에 집착한다. 그러나 오가와는 현실의 시간은 길고 거기서 인간은 철저하게 몸과 마음이 짓이겨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125-6)


제4장 전범 처리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된 초기에는 고지마도 집단의 힘을 믿고 간수를 향해 고함치고, '동기(同期)의 벚꽃' 같은 전쟁 전의 유행가를 부르며 지냈다." "고지마는 이른바 '완고(頑固) 분자'였다. 딱딱한 변명의 갑옷을 두르고 웅크리고 있는 수인들에게 중국 쪽이 취한 방침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본군이 저지른 일들을 알려주는 것, 군대 하나하나는 자신이 관여한 전쟁터밖에 모른다. 게다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지금 당장 직시하는 일은 괴롭다. 그래서 관리소 측은 중국 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지금도 전쟁 피해가 얼마만큼 지속되고 있는지 등의 외부의 사실을 알리는 방법을 취했다. 다른 하나는 충분한 보살핌이었다. 둘다 푸순전범관리소에 배속된 혁명군 병사들이 해방군이 되어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인간관계였다. 거기에 하나 더, 이 두 가지 방침을 지탱해준 것은 '시간'이었다. 천천히 시간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렇게 기다려줌으로써 전범들의 태도 변화에 대비하고자 했다."(149-51)


제5장 탄바이, 죄를 인정하다


"죄를 고백한 뒤, 고지마와 다른 전범들은 빨리 각자에게 걸맞은 형을 선고받고 용서받기를 바랐다. 마음은 온통 일본으로 돌아갈 날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다." "1956년 6월 21일, 기소 면제 결정을 듣는 순간, 그저 '돌아갈 수 있다'는 환희가 가득 차 올랐다. 지금까지의 죄의 자각도, 어떤 형벌이든 달게 받겠다던 반성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톈진을 향해 떠나는 기차 안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톈진에 도착한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일주일 정도 있었는데 여전히 밤이면 잠들지 못했죠. 일본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해서요. 그 정도로 내 마음은 온통 일본에 돌아간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감쪽같이 속였다' 하는 기분이었어요. 평생 죄를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는 둥, 그럴듯한 소릴 해댔지만, 귀국했을 때의 내 모습은 중국 쪽이 말하는 제국주의 사상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요?〉" "고지마가 개인으로서 전쟁범죄와 맞서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173-8)


제6장 슬퍼하는 마음


"고지마는 구체적인 사실을 중시하는 남성이다. 감정을 억제하고 공상을 배제한다. 그것은 근대 일본의 교육이 추구한 바이다. 또한, 시대가 전쟁을 수행할 실무자를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일본 남성에게 기대됐던 성격 특성은, 푸순전범관리소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오호연 지도원은, '제국주의 사상'이라는 말로 고지마가 감정 표현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감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지만, 죄의식에 생명을 주는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푸순에서의 체험이 없었더라면, 슬픔을 느낄 힘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슬픈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야말로 고지마를 감정을 지닌 인간으로 존재하게 해준다. 그는 푸순전범관리소에서 6년의 준비기간을 거쳤고, 자신이 죽인 아이의 얼굴을 고스란히 떠올리는 체험을 했다. 이때, 고지마가 죽인 사람들은 비로소 얼굴과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지마가 인간다운 감정을 되찾는 일이기도 했다."(188-9, 198-8)


제7장 과잉 적응


"도미나가의 고백에는 일본 군대 시스템이 어떻게 단순한 청년을 살인 수행의 부품으로 변화시켰는지에 관한 중요한 관점이 제시된다. '전쟁은 인간을 잔혹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반화는 사고의 태만에서 비롯된다. 구체적인 전쟁이 있고, 각각의 군대가 있으며, 그런 구체적인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잔혹해진다. 도미나가는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징병되자, 다른 고학력자들처럼 당연히 견습 사관을 지원했다. 그리고 야전 소대장(소위)이 되었다. 〈내 부하인 부사관, 병사들은 모두 역전의 용사들이다. 나만 전투 경험이 없다. 이런 부하를 지휘하려면, 포로 한 명도 못 벤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소대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나는 '인간이기'보다는 '야전 소대장이기'를 선택했다.〉 소속 집단에 적응하고자 하는 노력, 그리하여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마음, 즉 일본형 상승의식이 그를 잔혹성을 느끼지 못하는 살인 기계로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잔혹행위를 거부할 수 있을까?"(220-1)


제8장 복종으로의 도피


"칼 야스퍼스는 『죄책론』(1946)에서 죄의 개념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형법상의 죄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규정이 결론지은 '평화에 대한 범죄' '전쟁범죄' '인도에 대한 범죄' 등을 범한 행위에 대한 책임이다. 정치상의 죄란, 국민은 그가 속한 국가가 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정치에 무관심했던 점, 정치 권력을 나치에게 넘겨준 점도 정치상의 죄다. 도덕상의 죄는, '명령에 따랐다'고는 하지만 나치 정권을 지지하고, 거기에 관여했다면 죄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도덕상의 죄의 심판자는 자기 양심이며, 타자는 그 사람과의 정신적 교류를 통해 책임을 물을 뿐이다. 형이상의 죄에서는, 범죄가 저질러질 때 그것을 지지하거나 관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신 앞에서 죄가 추궁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도덕상의 죄와 형이상의 죄는, 오직 개인만이 이것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의 죄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죄는 끝나는 일이 없다'고 글을 맺었다."(240-1)


제9장 죄의식 없는 악인


"나가토미 히로미치는 지독한 악행을 저질렀다. 고쿠도칸전문학교 학생 시절, 우익 학생운동 활동으로 난징 학살에 가담했고, 이후 스스로 원해서 상하이 특무기관에 들어가, 1941년부터 북지나에 파견되어 제37사단 중기관총중대 병사로서 산시성에서 온갖 난폭한 짓을 저질렀다. 그 잔혹함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부하였던 중국인으로부터 '염라대왕'이라 불렸다. 패전으로 현지 제대한 후에도 잔류 일본군을 조직하여 국민당계의 군벌 옌시산과 협력해 인민해방군과 싸웠다. 그가 해방군에게 체포당한 것은 1949년 4월이었다. 스무 살에 중국에 건너간 지 12년이 흘러 있었다." "1949년 4월 24일, 타이위안은 함락되고, 나가토미는 포로가 되었다. 그를 포함한 포로들은 성내 병사에 수용됐다. 야식 때가 되면, 해방군 병사들은 각자 휴대한 쌀을 꺼내어 포로들을 위해 밥을 지어주고, 자신들은 조밥을 먹었다. 포로는 병사에서 자고, 해방군은 야외에서 잤다. 나가토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259, 271)


제10장 세뇌


"나가토미가 귀국한 1960년대 일본 사회에는 그가 저지른 일들의 의미를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점에서 상처를 입었으며, 상처 입지 않은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사람은 없었다." "이는 전쟁 시기에 나가토미가 한 행위와 근본적으로 통한다. 개인으로 돌아와 사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인으로서 책임을 자각하는 일은 결코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억압과 따돌림, 그는 그런 억압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나가토미는 아직 마음에 상처 입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문화 속에서 자라난 자신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후반생을 반전운동에 바치며 살았다. 나가토미의 얘기를 듣고 있자면, 전쟁이 직접 관여한 자를 모두 푸순전범관리소에 넣는 것 이외에는, 표면적이라도 일본인들을 바꿀 길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사회가 변화할 때마다 세뇌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 의해 일본 전후 사회가 형성되어 갔다."(288, 296)


제11장 '시켜서 한 전쟁'에서 '스스로 한 전쟁'으로


"1989년 3월,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의 '치안 제21국'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그곳은 폴포트 일파에 의해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처형으로 내몰린 시설이다. 이전에 리세(고등학교)였던 교실에는 철골만 남은 침대, 철 족쇄, 전기충격 장치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핏자국이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벽에 걸린 칠판에는 고문받을 때의 요령이 백묵으로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묻는 말에 답하라. 일부러 멍청한 척 굴지 말아라. 그것은 혁명을 모독하는 짓이다. 너에게는 자신의 실책에 대해 말하는 것도, 혁명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채찍질, 전기충격에 소리 지르지 말아라. 캄보디아 크롬을 사용하지 말아라. 위반하는 자는 열 번 채찍으로 맞거나 다섯 번 전기충격······〉" "관동군 참모본부의 「포로심문요령」에는 이와 똑같은 사고방식이 담겨 있다. 이러한 것은 다른 문화에도 전파되는 것일까? 아니면 유사한 상황에서 인간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일까? 아마 그 둘 다일 것이다."(312-3)


# 캄보디아 크롬 : 남베트남 남델타에 사는 크메르인의 말


제12장 공명심


"쓰치야 요시오는 생물학적으로 매우 뛰어난 소질을 타고났다. 사고력, 주의력, 기억력이 모두 뛰어나고, 건강할뿐더러 강인했다. 그는 성실하고 마음이 따뜻한 부모 밑에서 착실하고 의심할 줄 모르는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가난했다. 그는 전쟁 시기에 일본 국가가 요구하던, 건장하고 인고를 견딜 줄 아는 병사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이상적인 남자였다. 그는 가난했기 때문에 소학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러나 성실한 성품이라 소학교의 선생님을 존경했고, 선생님은 천황제 군국주의와 만주 개척의 야심을 그에게 주입했다." "그는 타고난 소질에 힘입어 군국주의에 과잉 적응하고 가난을 극복했지만, 그 종착역은 인간성의 상실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지니지 못한 지성은 비판 정신, 사물을 상대화해서 보는 힘이었다. 그것은 일본 교육이 가장 싫어하는 성격의 지성이었다. 쓰치야는 공명심에 불타올라 수많은 중국인을 체포·고문하면서 '특고(특별고등경찰의 준말)의 신'이라 불릴 정도가 됐다."(324-5)


제13장 탈 세뇌


"학습에 이어,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열거했다고 해도, 그것은 기억의 단순한 재생에 불과하다. 사건으로 정리하고 지적으로 반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감정을 되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때의 행위는 당시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끔 방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정이 통하는 인간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무감각한 채로 체험해 왔던 행위를 돌아보고, 추상 속에서 다시 느끼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도입부에서 류 반장과 같은 감정이 풍부한 사람을 향한 신뢰를 쌓고, 그와의 교류를 통해 군국주의 청년이 되기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회로를 통해, 쓰치야에게는 고통받아온 중국인에게 공감하고, 그렇게까지 잔학했던 자신을 자각하고, 무감각해져 있던 자신을 느낄 능력이 생겼다. 범죄를 저질러놓고도 상처 입지 않는 자는, 느끼고 생각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는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찢어진 틈새로 감정을 토해내고, 마침내 이데올로기의 갑옷을 부쉈다."(361-2)


제14장 양식(良識)


"일본군이 네그로스섬의 미군을 항복시키고 상륙한 것은 1942년 5월 22일. 원주민은 일본군을 해방군이라 여긴 듯, 2개월간 전혀 저항이 없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각지에서 수탈을 계속한 결과, 섬 전체에서 게릴라전이 확산됐다. 일본군은 의심스러운 남자들을 잡아와서 폭행과 물고문을 한 후 마지막에는 구덩이를 파서 찔러 죽였다. 중국을 점령하고 저질렀던 만행이 그대로 필리핀으로 옮겨졌다." "일본인은 이 전쟁에서 두 곳에 전선을 펼치고 있었다. 하나는 군비에 기초한 합리적 사고와 죽기를 각오하면 어떠한 일도 가능하다고 선동하는 비합리적 정신주의가 대치하는 전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중에게 받아들여지고 민중의 지지를 받아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민중을 지배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결국에는 적으로 바꿔버리고 있는가 하는 사회관의 전선이었다. 오노시타 다이조는 전자의 전선에 대해서는 그다지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후자의 전선에서 일본의 패배를 확실하게 내다보고 있었다."(378-9)


제15장 아버지의 전쟁


"전후세대가 부모나 친척의 입을 통해 들은 전쟁은, 전사 통지, 공습의 공포, 소개(疏開), 전쟁 때와 이후의 식량난 등이었다. 부모 세대는 이런 기억을 즐겨 얘기했다. 그것은 난관을 극복해온 자기 긍정의 감정과 함께 전해졌다. 그러나 부모들은 결코 그들이 저지른 침략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자라난 전후세대는 핵전쟁 반대를 외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당신들은 과거에 무엇을 했는가?〉라는 비판을 들으면 할 말을 잃는다. 반론이나 변명으로 할 수 있는 말은 몇 가지 있다. 〈책임은 행위지가 지는 것이다,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나 개인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하는, 어쩌면 옳아 보이는 전제를 깔고 논리를 비약한다." "그러나 그렇게 반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생활하는 일본 사회를 자신의 역사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을. 전후세대가 개인으로서 져야 할 전쟁 책임은 물론 없지만, 침략전쟁에 빠져든 사회나 문화, 그리고 국가의 책임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394-5)


제16장 계승되는 감정의 왜곡


"아버지 세대가 숨겨왔고 때로는 폭력으로 왜곡시켜온 침략전쟁의 사실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음침한 일이다. 그 음침함은 아버지 세대가 보여준 잔학성이 아니라, 그 잔학성을 부인하려 했던 아버지 세대의 자세에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 음침함을 청명하게 벗겨내지 않는 한, 감정의 풍요로움은 되찾을 수 없다. 감정의 풍요로움이 없는 한,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능력은 생기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강제로 연행하여 학대하고 죽인데 대해서도, '듣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상하느냐 마느냐, 보상액을 얼마로 하느냐만이 문제가 된다. 피해자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묻고 공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상처 입은 사람은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의해, 자신의 무력한 체험을 정리하고 존엄을 되찾을 수 있다. 그것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보상금이 화제가 된다면, 피해자는 더욱 모욕당했다고 생각하게 된다."(440-1)


제17장 감정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풍부한 감정을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상처 입을 줄 아는 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부드러운 감정은 단번에 회복되지 않는다. 나는 우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책에서 각 장에 소개한 사람들이 했듯이, 우리가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자 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된다. 전후 반세기가 지나 늦은 감도 있지만, 지금이라도 전쟁 시기를 산 사람들은 동시대인이 무엇을 했는지, 전후세대는 부모나 조부모가 무엇을 했는지, 물어봐야 한다. 물어봐서 알아갈 때 우리는 다음 단계에 도달한다.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알아야만 죽어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생생하게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에 의해, 고지마가 10여 년이란 세월이 걸려서야 자신의 정신적 외상을 느낀 것처럼, 굳어 있는 정신에 균열을 만들 수 있다." "알고 서로 이야기하는, 그리고 느끼는, 이 두 단계를 차례로 거쳐서, 우리는 상처 입을 줄 아는 부드러운 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4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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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의 변곡점 - 핵물리학자가 들여다본 북핵의 실체
시그프리드 헤커 외 지음, 천지현 옮김, 김동엽 감수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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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시작하며


"평양은 지난 30년에 걸쳐 번갈아가며 (군사와 외교 전선 가운데) 어느 한쪽 노선을 다른 노선보다 우선해왔지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느 하나에만 매진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워싱턴의 초점은 오로지 (북한의) 비핵화에 맞춰져 있었다. 처음부터 평양에게 외교냐 핵개발이냐 양자택일을 강요하며 정치적 중간지대를 없애버렸다. 평양의 이중경로 전략에 대처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외교를 위한 결정적 기회들을 놓치고 북한의 행동들을 일부 잘못 해석함으로써 결국은 나쁜 결정을 내렸다. 내가 언급한 변곡점이란 이런 순간들을 말한다." "북한은 종종 두개의 평행전선, 즉 핵무력을 구축하거나 핵·미사일 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기술/군사적 전선과 미국과의 전략적 협상을 모색하는 협상/외교적 전선을 따라 움직였다. 워싱턴은 북한이 이런 평행 전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심증을 가졌을 때조차 평양을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했다."(30-1)


2장 핵에 대한 기초 정보


# 핵무력을 위한 기술적 필수 조건

1. 폭탄 연료 : 우라늄235와 플루토늄239 농축

2. 무기화 : 핵무기 설계, 제조, 실험 과정

3. 운반 수단 : 핵폭탄을 운반 수단(발사체)에 결합


"1992년이 되자 북한 체제를 떠받치고 있던 소련의 안보 지원과 재정 원조가 완전히 붕괴했다. 소련이 붕괴하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이 소련에 맞서 억지책의 일환으로 배치했던 핵무기를 감축하는 일방적 조치를 취했다. 그 목적은 흔들리는 자국의 붕괴를 막고 자국 핵무기를 안전하게 유지하려 고군분투하는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것이었다. 부시는 전세계 육상·해상 기지에 배치된 전술핵무기들을 모두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워싱턴은 그동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정책을 고수해왔으므로 이제 와 남한에서 핵무기를 철수한다고 특정하여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남한의 노태우 대통령은 이렇게 공표할 수 있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이 시각, 우리나라 어디에도 단 하나의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미국 핵무기가 한반도에 있는 한 남북 간의 핵 협상은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북한의 입장에 부응하기 위해 다듬어진 발표였다."(57-8)


"그 직후인 1992년 초, 북한과 남한은 양국 모두가 〈핵무기를 실험도, 제조도, 생산도, 취득도, 보유도, 저장도, 배치도, 사용도 하지 않겠다〉 그리고 〈핵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1992년 즈음 북한은 이미 핵무기 개발에서 큰 걸음을 내디딘 상태였다. 새로 가동에 들어간 방사화학실험실에서 5MWe 원자로의 사용후 연료로부터 소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함으로써 표면상으로는 민간 용도인 영변 핵단지에서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북한의 이런 핵무기 야심에 대한 워싱턴의 우려가 커짐에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은 아직 발생기에 있는 핵 프로그램을 미국과의 관계를 진전시키는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겠구나 깨달았다. (북한 핵 프로그램에 대한 IAEA의 안전조치를 전제로) 1993년 6월 북미회담의 무대가 마련되었고, 이 회담은 1994년 10월 최초의 핵 협상인 북미제네바합의의 조인으로 결실을 맺었다."(58-9)


3장 2004년 1월 이전의 상황


"1994년 북미제네바합의 당시, 미국 협상단을 이끌고 있던 로버트 갈루치는 이 협상이 완성되더라도 폭탄과 미사일로 가는 잠재적 경로를 모두 차단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이 협상이 당시의 가장 큰 위험, 즉 플루토늄을 통해 폭탄으로 가는 길은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북한은 이미 5MWe 원자로와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포함하여 영변에서의 플루토늄 가동을 동결하고, 2000년대 초가 되면 해마다 플루토늄을 300킬로그램 가까이 생산할 수 있었을 더 큰 규모의 원자로 2기 건축을 중지하겠다고 합의한 바 있었다. 미사일과 우라늄 농축을 명시적으로 다루는 더 엄격한 제한은 실현도 검증도 불가능할 듯했다.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잠재적 확산 위험은 관리 가능한 정도로 여겨졌고, 그 비용도 주로 남한과 일본이 부담하게 될 터였다. 갈루치를 위시한 협상단은 조약을 맺을 때 필수적인 의회 승인을 피하기 위해 이 협상을 조약이 아닌 정치적 합의의 형태로 구상했다."(64-5)


"북미제네바합의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워싱턴에는 제풀에 늪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듯 보이는 밉상 정권을 구제해줄 마음이 없었다. 서울에서는 남한의 김영삼 대통령이 이 협상에 강하게 반대했다. 협상 과정에서 서울이 소외되었다고 느낀 것이 그 주된 이유였다. 그는 1994년 7월 초 김일성과의 정상회담을 준비해왔으나, 그달 말 김일성이 사망하자 그것으로 북한 정권의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보았고, 김일성의 아들에게 상황이 이롭게 돌아가도록 해줄 일이라면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 훨씬 더 큰 문제는 합의문 서명 2주 뒤 미국에서 치러진 선거 결과 민주당이 상·하원 모두에서 공화당에 다수당 자리를 내주며 완전히 판이 뒤집혔다는 사실이다." "북미제네바합의는 완전히 당파적 사안이 되어서 합의 이행을 위한 거의 모든 조치에 반대하는 측이 그 정책의 가치를 문제 삼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정책이 클린턴 정부와 엮였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65-6)


"부시 정부는 클린턴 시절 (칼을 갈며) 때를 기다리고 있던 강경파 보수 인사들을 영입했다. 그중 가장 거침없는 두 명, 존 볼턴과 로버트 조지프가 각각 국무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요직을 차지했다. 그들은 북한식 접근법은 핵 프로그램을 위한 시간을 벌려는 도발과 위기, 그후 일시적 해소의 반복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2002년 여름, 정보당국은 북한의 비밀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최신 평가를 내놓았다. 새로운 정보 보고서에는 평양이 원심분리기 프로그램을 위한 재료와 부품들을 대량 입수하려 시도하고 있다는 증거가 담겨 있었다." "이 보고와 첨부된 정보 보고서는 이미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북미제네바합의에 치명타를 날리기에 충분했다. 존 볼턴에 따르면, 그 보고서는 〈북미제네바합의를 박살내기 위해 [그가] 찾고 있던 망치〉였다. 볼턴과 같은 부시 정부의 강경파 관료들은 이 정보를 〈기만〉의 증거이자, 반드시 응징이 따라야 할 〈도덕적 모욕〉이라고 규정했다."(69-71)


"평양과의 직접 협상은─그들의 믿음대로라면, 그런 대화는 미국 외교관을 납치하려고 설계된 함정일 터이므로─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에, 부시 정부는 다자간 협상 방식을 채택했다. 중국은 중간자적 위치의 영향력 있는 북한의 후원자로 여겨졌다. 부시 정부는 중국을 끌어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베이징에 주도적 역할을 넘기기로 했다. 중국은 지지부진한 몇차례 3자회담(북한, 중국, 미국)을 주선했고, 이후 평양이 마지못해 참여하기로 동의하면서 6자회담(남한과 일본, 러시아까지 포함)으로 알려지게 된 협상장이 열렸다." "북한은 미국에게 제네바합의 하의 의무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미국은 북한이 먼저 핵 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CVID)〉에 무조건 동의해야 미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할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평양은 더이상의 회담은 필요 없을 것으로 본다고 선언하고 정식 협상을 연기했다. 2003년 12월로 예정된 6자회담 재개 계획은 결국 백지화되었다."(75-7)


4장 〈우리가 만든 걸 좀 보시겠습니까?〉


"영변 방문 후 귀국한 나는 뉴스 매체들 모두에게 사실상 같은 얘기를 했음에도, 기사와 논평은 상이하게 나왔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사설을 통해 그들이 〈양두구육 북한 관광〉이라고 규정한 우리의 방문을 때리고, 북한이 클린턴 정부를 〈현혹시켜〉 북미제네바합의를 맺는 데 사용했던 그 똑같은 〈플루토늄 쇼〉에 넘어가지 않은 부시 정부의 결기를 칭찬했다. 모두가 곧이곧대로 설명하는 것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 당시의 나도 알았고 그 이후의 미국 정부들도 알게 되었듯이, 우리가 영변에서 목격한 것에 양두구육이라거나 눈속임 같은 것은 없었다. 내 보고를 북한이 집요하게 폭탄 제조를 추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었을텐데도, 워싱턴의 강경파들은 북한의 핵시설들을 방문할 수 있었던 사람의 보고를 폄훼하는 쪽을 더 선호했다. 방문하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사실에 입각한 보고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북한에 대해서 이미 마음을 정해놓았던 것이다."(135)


"로스앨러모스로 돌아와서, 우리는 영변에서 쐬었을지도 모르는 방사선의 양을 측정해보았고, 체내 감마 방사선 초과치가 없음을 확인했다. 나는 또한 로스앨러모스의 동료들과 함께 내가 방문을 통해 발견한 바를 재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실험실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내가 영번에서 손에 들어본 유리병에 정말로 플루토늄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영변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무기급 플루토늄을 만들 수 있으며 8천개의 사용후 연료봉을 전부 재처리했다는 북한의 주장이 믿을 만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또한 북미제네바합의 동안 북한이 영변 밖에서 무기 설계와 무기 연구개발 활동을 계속함으로써 대비책을 세워두고 있었을 법하다는 것이 거의 명확했다. 그럴 경우, 비록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으나 당시 북한이 가장 최근에 재처리된 플루토늄을 가지고 이미 나가사키 유형의 초보적인 핵폭탄 한두개 정도는 만들었을 것이라고 나는 기꺼이 단언할 수 있었다. 실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137)


5장 볼턴의 망치가 가져온 참혹한 결과


"북미제네바합의 파기 자체도 나쁜 결정이었지만, 그 결과에 대비하지 못한 것은 더더욱 위험한 짓이었다. 영변 플루토늄 단지 동결은 북미제네바합의의 핵심 요소였다. 이것이 북한 핵 프로그램의 완전 폐기를 향한 한발짝에 불과하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것은 가장 시급한 일이기도 했다. 플루토늄 생산, 추출의 중단은 폭탄 연료가 없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1994년부터 2002년까지는 플루토늄이 생산되지 않았다. 북미제네바합의가 없었더라면 북한은 5MWe 원자로를 가동할 수 있었을 것이며, 동시에 1994년 건설 중이던 더 큰 규모의 원자로 2기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북한은 해마다 300킬로그램에 가까운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워싱턴은 지금도 5MWe가 8년 동안 가동되지 않고 더 큰 2기의 원자로 건설이 취소된 것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20년도 더 지난 지금, 내 추산으로는 북한의 플루토늄 총보유량이 50킬로그램 미만일 것이기 때문이다."(142)


"2004년 2월 말 제2차 6자회담이 열렸다. 미국 측 협상자로 나선 제임스 켈리는 CVID 원칙을 고수하고, 시작부터 우라늄 농축 문제를 포함하여 완전 공개를 밀어붙이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부시 정부의 강경파들은 리비아에서 그들이 거둔 성공을 재현할 생각이었다. '그때그때의 분납 방식'이 아닌 신속한 폐기 선행이 목표였다. 북측은 '보상을 조건으로 한 동결'을 바라고 있었다.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도 계속 부인했다. 당연하게도, 회담은 진전 없이 끝났다." "2005년 2월 북한 외무성의 고위급 성명이 나왔다. 부시가 재임을 시작하고 불과 몇주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 성명은 북한이 〈자위적 차원에서 핵무기를 제조했다〉고 선언했다. 사실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보유국이 되기 위한 문턱을 넘었다는 공식 선언이었다. 놀랍게도 이 일은 워싱턴에 더 큰 긴박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워싱턴은 이것을 평양이 협상 지렛대를 얻기 위해 벌이는 술수 정도로 보았던 것이다."(151-2)


6장 다시 북한으로: 〈해가 서쪽에서 뜨기 전에는 경수로는 안 돼〉


"존 루이스와 나는 두 번째 북한 방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5년 9월 8일, 콘돌리자 라이스 장관의 국무부 집무실을 찾았다. 나는 라이스 장관에게 기술적인 면에서 5MWe 원자로가 대략 26개월동안 전출력으로 가동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는 점, 리홍섭 소장이 그 원자로가 앞으로도 수십년 더 운영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지난 방문 이후 북한은 그들의 재처리 효율과 속도를 높여왔다. 그들은 2차 완전 재처리 작업을 완료하는 중이었으며 폭탄을 두 개 더 만들기에 충분한 10~12킬로그램의 플루토늄을 추출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리 소장은 아직도 지난 10년간 방치되어 있던 50MWe 원자로 건설을 재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2004년 방문 당시 우리가 본 바로는 그 원자로는 복구 불가능해 보였으나 리 소장은 여전히 그것을 완공할 방법을 모색 중이었다. 그의 말로, 200MWe 원자로는 완전히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여서 아마도 그냥 포기할 가능성이 컸다."(191)


"우리는 김계관 부상의 경수로를 요구하는 단호한 주장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그가 우리와의 대화를 〈경수로 없이는 합의도 없다〉는 말로─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끝냈다고 말이다." "나는 만약 북한이 그들의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택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 길로 미래 어느 시점에 경수로가 들어온다면 그것도 위험을 감수할 만한 괜찮은 거래일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아무 합의 없이 계속 플루토늄이 생산될 수도 있는 다른 선택지를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랬다. 경수로를 지원하면서 북한에서의 우라늄 농축이나 재처리를 금지하는 합의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사실 김계관 부상은 그런 것들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친 바 있었다. 존 루이스와 나는 정부가 미래의 경수로를 위해 당분간 KEDO 조직을 원래대로 유지하기를 제안했다. 라이스 장관은 이런 주장에 다른 의견을 비치지 않았으나, 이날로부터 11일 후 6자회담 다음 회기에서 힐은 KEDO가 그해 말 해산될 것이라고 선언했다."(192-3)


"이 시점 북한은 기껏해야 서너개의 원시적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들을 실험해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런 폭탄을 확실하게 운반할 수 있는 검증된 미사일 체계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2002년 중대 경제개혁을 개시한 김정일의 입장에서 보아도 외교는 중요했다. 그런 개혁들이 성공하려면 우호적인 대외 안보 환경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외교적 협상 모색은 비록 그동안 핵 프로그램 추진을 멈출 의도는 없었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 힐의 노력이 6자회담 공동선언에 집중되어 있는 동안 밥 조지프와 그의 일당은 미국의 독자 성명에 담긴 터무니없는 요구로 6자회담 과정을 장악하고 완전히 탈선시키는 일을 해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군비 축소를 주장한 것, KEDO 해산을 선언한 것, 그리고 〈적절한 시기〉를 먼 미래로 못 박은 것, 이것들의 조합은 강경파들의 승리로 판명났다. 미국의 강경파은 공동선언이 시험받을 기회조차 없애버렸다."(205-3)


7장 김정일: 시간을 벌다


"2005년 9월 이후 (북한) 외교의 역할은 이제 핵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핵·미사일 개발을 추진할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공동선언 이후 며칠 동안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계속해서 강경 노선을 밟았다. 라이스 장관은 미국이 경수로를 '논의'라도 할 마음을 먹으려면 북측의 군비 축소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 대통령은 검증 조항들이 공동성명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어떤 합의든 검증하기 위해서는 북한 전체를 샅샅이 들여다볼 수 있는 미국인들이 검증을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분명 이 모든 것들이 북한에게는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지만, 북한 외무성은 자신들이 여전히 〈기존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NPT에 돌아가며 IAEA의 시찰을 허용할 것을 공약한다〉는 인상을 풍겼다. 이런 언급들은 북한이 외교에 한발을 걸치고 있음으로써 핵개발을 위한 시간을 벌려고 했다는 사실과 더 맥이 통하는 것이었다."(209-10)


"2006년 10월 9일 아침 이른 시각에 평양은 임박한 핵실험의 시간과 장소, 예상 폭발력을 베이징에 통지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행했다. 그 어떤 나라도 최초의 핵실험을 하면서 그런 통지를 한 적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세계의 지진관측소들이 북한 동북부의 평계리 부근으로부터 퍼져나오는 약하나마 분명한 신호를 기록했다. 약한 신호는 낮은 폭발력을 의미했으나, 북한이 여덟번째 핵 선언 국가가 된 것만은 분명했다. 곧바로 전세계로부터의 규탄이 잇달았으나, 북한이 핵의 길로 가지 않도록 막으려던 모든 노력이 실패했음을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험 전 백악관이 보여주었던 매파 전선은 거의 하룻밤 새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응징을 강조하며 강경파들이 유엔 결의안을 받아냈지만, 대통령과 라이스 장관에게는 부시 정부 6년 동안 그들이 북한을 상대해온 그 모든 일들이 효과가 없었다는 점이 명확해졌을 것이다. 그들은 외교적 해법을 좇는 방향으로 재빨리 선회했다."(220-1)


8장 〈미국에 성공이라고 전하시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자부심이 넘칩니다.〉


"핵실험이 끝나자마자, 서방 분석가들 대부분은 이번 실험이 미미한 핵 폭발력만을 보여주며 끝났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걸 덮어버릴 그것의 의미를 간과했다. 폭발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자신이 핵보유국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했음을 선언했다. 나에게 가장 놀라웠던 것은 북한이 국제사회를 똑바로 쳐다보며 그 정치적 결과를 관리하는 동안 보여준 그 능란함이었다. 미국, 남한, 일본, 심지어는 중국까지 예상된 규탄을 쏟아내고 난 후, 그들은 모두 북한을 달래 다시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려는 옛 입장으로 즉시 돌아갔다. 그리고 평양은 그것을 마다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북한 외교관들은 핵실험이 억지력, 대등한 지위, 그리고 6자회담에 돌아갈 힘을 주었다고 믿었다. 나는 서면 개요를 준비해 워싱턴DC에서 열리는 내셔널프레스클럽의 공청회에서 그것을 발표했다. 그 공청회가 열린 워싱턴DC에서는 미국 정부가 북한의 핵실험을 안절부절 못하는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228, 253-4)


9장 2007년: 다시 협상 테이블로


"평양은 핵실험으로 국내외적 이익을 얻었지만, 핵무기를 보유하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즉 안보 강화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 그 실험의 성공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공에 못 미치는 실험을 시행했다는 사실이 평양을 안보 측면에서 이전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 놓이게 했다. 핵 억지력에 대한 북한의 주장은 그 실험이 없었더라면 더 믿을 만하고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었다. 북한의 실제 능력에 대한 모호함이 남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실험은 틀림없이 북한의 핵 전문가들에게 문제점을 고칠 방법에 대한 값진 기술적 통찰력을 부여해주었겠지만, 그것은 핵 장치를 실전 배치할 수 없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었고 이는 곧 북한이 다시 핵실험을 실시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북한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2차 핵실험으로 가는 기술적 진로는 상당히 곧게 뻗어 있었다. 북한의 설계자와 엔지니어들은 아마 첫 폭발 바로 다음 날부터 작업에 착수했을 것이다. 정치적 진로는 그만큼 확실하지는 않았다."(259)


"나는 김정일이 1차 핵실험으로 배척(혹은 군사적 대응)보다는 오히려 외교적 지렛대를 얻은 것 같다는 점을 깨닫고, 김계관을 비롯한 외교관들에게 워싱턴과의 관계 정상화를 진전시킬 협상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한번 더 기회를 주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는 외교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핵·미사일 팀에게 작업을 계속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중경로 전략의 두 갈래 길 모두에 청신호가 켜진 것이었다. 외교가 핵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시간 벌기에 불과했던 2002~2006년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2007년 10월 3일자 2차 행동 성명에서 미국은 북한에게 그해 말까지 모든 핵 프로그램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신고하라고 주문했다. 평양도 영변의 시설들을 불능화하는 것에는 동의했고, 핵 물질이나 기술, 노하우를 이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반복했다. 이 두번째 약속은 시리아 사태 이후 이렇게 이른 시기에 북한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분명 뻔뻔스러운 얘기였다."(265-8)


# 시리아 사태 : 2007년 9월 6일 이스라엘이, 북한의 도움을 받아 건설 중이던 시리아의 원자로를 공습해 폭파한 사건


10장 2007년과 2008년의 방문: 불능화 확인을 위해 다시 영변으로


"영변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들이 보기에 불능화 조치의 목적은 그들의 시설을 다시 가동하기 어렵게, 그러나 불가능하지는 않게 만드는 데 있다고 설명했다." "5MWe 원자로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구체적인 불능화 조치로 원자로 외부의 보조 냉각관이 절단되어 바닥에 놓여 있는 모습 등을 보여주었다." "6월에는 해외 뉴스 매체들 앞에서 대대적으로 팡파르를 울리며 냉각탑을 날려버렸다. 북한은─두 대의 대형 이산화탄소 송풍기를 제거한다거나 노심을 못 쓰게 만들기 위해 가돌리늄을 붓는 것 같은─더 영구적인 불능화 조치에 대한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당분간은 미국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불능화 단계를 돌이킬 수 있는 정도까지만 계획하고 있다고 다시 강조했다. 이는 북한이 추구하고 있는 이중경로 접근법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그런 노선이 어떤 것인지를 더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절대로 한쪽 경로에만 몰두하지 말 것. 항상 다른 길을 열어놓을 것."(298-300)


"미국으로 돌아온 후 나의 결론은, 만약 미국을 비롯한 다른 4개 당사국이 2007년 10월의 약속을 지킨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부가 플루토늄 생산시설을 영구 폐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협상이 실패할 경우 그 시설들을 재가동하기 위한 대비책도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취해진 불능화 조치가 차후 있을 수 있는 플루토늄 생산 재개를 효과적으로 지연시킬 것임을 확인했다. 영변 플루토늄 생산 단지의 영구 폐쇄라는 결실을 보려면 불능화 단계를 완료하고 완전 폐기 단계로 나아가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터였다. 이런 일이 이뤄진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폭탄을 더이상 만들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시점이 되면 북한에 남은 것은 플루토늄 생산 시설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HEU 프로그램은 아직 생산 단계에까진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추가적 핵실험이 없는 한 북한은 더 성능 좋은 폭탄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었다."(311-2)


# HEU :  고농축 우라늄


11장 2008년: 거의 다 와서 모든 것이 무너지다


"힐과 김계관은 2008년 3월에 제네바, 4월에는 싱가포르에서 만나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합의에 도달했다. 미국 입장에서 합의의 핵심 목적은, 북한이 5MWe 원자로의 불능화를 완결하고 플루토늄 비축량을 빠짐없이 설명하도록 그 앞길을 치우는 것이었다. 그에 호응하여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고 적과의 거래행위법에서 면제해주기로 되어있었다. 협상을 촉진하기 위해 힐은 중대한 양보를 했다. 그는 북한이 공개적으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과 시리아에서의 핵확산 행위에 대해 확인하거나 시인할 필요 없이 그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기존 입장을 완화한 것이다." "워싱턴의 대체적인 반응은 신속하고도 가차없었다. 힐은 북한에 미국을 팔아넘긴 인물로 여겨졌고, 워싱턴의 대외정책 관련 기관들 대부분으로부터 집중포화를 당했다. 당시 정부 밖에서 의견을 내던 존 볼턴은 힐의 행보를 〈빌 클린턴이나 지미 카터의 대본에서 나온 것 같다〉며 조롱조로 평가했다."(323-4)


"7월 둘째 주 베이징에서 열리는 6자회담에 참석하는 힐의 손에는 드서터가 작성한 비타협적 검증 프로토콜이 들려 있었다. 그 검증 프로토콜은 북한은 미국이 의심하는 어떤 현장에서든 모든 물질에 대한 완전한 접근을 허가할 것, 검증단이 분석용 샘플을 국외로 반출하도록 허용할 것, 핵 물질과 핵 관련 장비의 전체 수출입 기록을 제공할 것 등을 명시했다. 이런 강경 노선의 요구를 듣고 김계관은 격노했다." "뒤이어 부시 대통령은 방콕 방문 연설 중에 까다로운 추가 요구를 제시했다. 그는 우라늄 농축과 확산 행위도 검증 조치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북한이 〈폭정을 끝내고 자기 주민들의 존엄과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고까지 말해버렸다. 북한과 무슨 일을 이루어낼 만큼 힐의 백악관 내 입지가 확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결국 8월 26일 평양은 영변 핵심 핵시설의 불능화를 중단하고 그 시설들을 〈원래 상태로〉 복구하기 위한 조치를 고려할 것이라고 선언했다."(328-30)


12장 2009년의 방문: 〈어디까지 나빠질지는 모르는 겁니다.〉


"2008년 여름 김정일이 뇌졸증을 앓게 되면서 게임은 끝이 났다. 평양은 김정은 승계계획을 탄탄대로에 올려놓기 위해 핵 노선을 전면으로 끌어올리고 외교는 필요하다 하더라도 시간을 벌기 위한 조역 정도에 두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평양이 오바마 정부를 향해 떡밥을 던져놓은 것으로 보였다. 우리는 북한이 위성 발사를 실행하고, 그러면 미 정부가 어쩔 수 없이 2006년 발사에 대응하며 세운 선례에 비추어 강력한 유엔 안보리 제재를 요구하게 되는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면 다시 평양은 2차 핵실험을 실시할 정당성을 얻게 될 터였다. 2차 핵실험은 세계에, 그리고 스스로 제기능을 할 수 있는 핵무기가 있다는 것을 믿도록 만들기 위해 복한으로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북한이 7월 미사일 발사를 시도하고, 부시 정부가 그것을 이용해 유엔 안보리 제재에 대한 지지를 끌어오므고, 이에 북한이 10월의 1차 핵실험으로 맞대응한 2006년의 사태를 다시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343)


13장 2009년과 2010년: 오바마가 내민 손을 외면하다


"2009년 4월 5일 늦은 오전 북한은 동해위성발사장에서 이미 통보했던 위성 발사를 시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로켓 발사는 도발 행위이자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런 행위가 평양을 국제사회로부터 더욱 고립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오바마는 이것을 임기 초 그의 지도력에 대한 시험이라고 여겼다." "미 정부는 4월 12일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성명을 주도해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북한의 위성 발사를 규탄하면서 결의안 1718을 준수하고 미사일 실험을 멈출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방면에서〉 자국 수호를 위한 핵 억지력을 높여갈 것이며 경수로 건설을 검토하고 2007년과 2008년 불능화된 시설들을 복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위성을 궤도 진입시키는 기술적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평양의 정치적 목표는 달성되었다. 미국의 대응은 2009년 5월 25일 북한이 2차 핵실험을 하도록 앞길을 닦아주었다."(353-5)


"한편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금융 시스템의 붕괴와 그것의 국제적 여파를 해결하는 일에 몰두해야 했다. 북한과의 협상을 통해 얻을 것이 별로 없다는 정부 초기의 판단은 오바마의 남은 임기 동안에도 그다지 변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동북 아시아 내에서도 북한은 이웃 나라들과 별로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2009년 8월 전 대통령 전 대통령 김대중의 장례식에 대표단을 보내면서 김정일은 남한과의 더 나은 관계 및 이명박과의 남북회담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이 막대한 보상 보따리를 요구한다는 이유로 김정일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워싱턴의 어법을 흉내라도 내듯 〈그는 평양에 있는 그 고집 센 정권에게 (···) 단지 대화에 합의했다는 것만으로 보상을 주는 패턴을 깨고 싶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도쿄도 납북자 문제에 집중하며 평양을 향한 강경책을 견지했다. 베이징 역시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중국의 불만 때문에 양국 관계가 다시 악화된 상태였다."(358-62)


"미 정부는 클린턴 장관이 〈전략적 인내〉라고 칭한 기조로 정착하는 중이었다. '전략적 인내'란 북한 측의 〈못된 행동에 보상하는 것〉에 대한 공공연한 반감을 중심으로 하고,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끝낼 협상에 진지한 열의를 보여주는 경우에만 고위급 회담으로 돌아가겠다는 조건부 의지와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또 도발 행위에 대한 대응으로 평양을 향한 경제적·외교적 압박의 수위를 점진적으로 높여가는 일이 그뒤를 따랐다." "2010년 3월 26일 북한의 공격으로 서해에서 초계 중이던 천안함이 침몰하고 46명의 해군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북한과 남한 및 미국의 관계는 특히 긴장감을 띠게 되었다. 4월 오바마 정부가 핵태세검토보고서를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북한과 이란이 '열외국', 즉 미 핵무기의 공격 목표가 될 수 있는 예외적 국가로 분류되었다. 5월 국제조사단은 천암함 침몰에 북한의 책임이 있음을 명시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과의 거의 모든 교역을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365-6)


14장 2010년 방문: 〈내일이면 더 놀라게 될 겁니다.〉


"외무성 신임 부상 리용호는 오바마 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하나의 국가로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적으로만 바라본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전세계 192개 국가 중 188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이란, 쿠바, 부탄,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맺지 않았다고 그는 지적했다. 그는 미국이 공화국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한 정상적인 대화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더욱이 오바마 정부의 이른바 전략적 인내 정책은 공화국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생각해내지 못한 워싱턴의 무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했다. 평양에는 전략적 인내가 북한에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는 말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경수로를 마무리하고 그 [저농축 우라늄] 연료를 생산할 시간을 줍니다. 우리는 기다릴 수 있어요. 시간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니 말입니다.〉 리 부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는 미국이 공화국에 계속 적대적으로 나오는 한 그들 옆에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391-2)


"귀국 후 나는 정부 인사 다수와 대중들이 미국 첩보의 실패라고 부르는 사건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어떻게 북한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감시를 받는 곳에 현대적 원심분리기 시설을 짓는 동안 그것을 감지하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핵 원자로와 달리 원심분리기 시설이 숨기기 쉽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북한이 2천대의 원심분리기를 엄밀한 감시를 받는 영변 핵단지에 들여오면서 미국 정보계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하나의 경고 신호였다." "우리는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것을 막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을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방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대하라는 페리 프로세스의 권고를 재차 언급했다." "하지만 북한이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우리가 클린턴 장관에게 브리핑을 한 바로 그날, 11월 23일 북한은 서해 분쟁 해역에서 남한이 영유한 여러 섬 중 하나인 연평도를 포격했다. 이 포격으로 남한 해병 2명, 건설노동자 2명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394-6)


15장 2010년 11월부터 2012년 4월까지: 로켓과 함께 날아간 협상


"2012년 3월 16일, 북한은 4월 15일 김일성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극궤도 지구관측위성 광명성 3호를 발사할 생각이라고 발표했다. 미 국무부는 이에 대응하여 윤달 합의에 미사일 실험 및 위성 발사 금지가 명기되어 있음을 언급했다. 위성 발사는 위장된 (장거리) 미사일 개발일 수 있으며 ICBM 기술의 로켓 발사를 금지하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위반이 될 것이라고 했다." "며칠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대변인은 우주조약에 따르면 북한에 발사를 실행할 권한이 있음을 지적하며, 북한의 평화로운 위성 발사 계획에 대한 정식 담화를 내놓았다. 북한은 또 운반용 로켓 잔해가 인접국들에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안전한 비행 궤도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2012년 2월 29일에 북미 양국이 각자 발표한) 윤달 합의의 가장 큰 패착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 모라토리엄에 무엇이 포함되는지에 대해 양측이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는 데 있었다. 그 합의는 건설적 모호함의 산물이었다."(408-9)


"김정은은 4월 13일 위성 발사를 강행했다. 그의 할아버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위성 발사는 그의 아버지가 사망 오래전에 내린 결정이었다. 새로 지도자가 된 그가 이 계획을 바꾸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발사 시도 후 백악관은 예상했던 그대로 식량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바마 정부는 유엔 안보리를 통한 추가 제재나 다른 징계를 추진할 계획은 없었고, 그보다는 기존 유엔 결의안의 집행 강화를 추진할 계획이었다. 정부는 더이상의 대화 진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북한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길을 가고 있으며, 오바마 대통령은 북한이 다시 미국의 〈사전 조치〉에 부응할 때에만 대화에 나설 것이라는 백악관 성명이 발표됐다." "4월 18일, 윤달 합의가 북한의 위성 발사 때문에 폐기되었다는 미국의 성명이 반복되어 나오던 끝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도 협의를 폐기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이 외교의 길을 뒤로 하고 다시 핵 노선으로 향할 길이 열린 셈이었다."(410-2)


16장 〈멍청한 로켓 발사 한번 때문에 미국은 이걸 다 날리는 건가?〉


"윤달 합의의 파국은 미국의 정책과 기술적 평가가 유리된 또 하나의 예였다. 위성을 궤도에 올리려는 북한의 시도를 이유로 윤달 합의를 파기함으로써 오바마 정부는 감시자들을 영변 핵단지 현장에 다시 돌려놓고 그곳 원심분리기의 회전을 멈추고 또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실험 모라토리엄을 이룰 기회를 놓쳐버렸다. 미국이 영양 원조 20만톤을 약속하기만 했다면 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이 발사를 평양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어도 될 만한 상대인지 알아볼 리트머스 시험지로 이용했다. 그런 시험은 워싱턴의 기준으로는 낙제점을 받도록 정해져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북한은 미국이나 유엔 안보리가 뭐라고 하든 줄곧 자기들은 위성 발사를 주권 사항이라고 여긴다는 주장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설정된 리트머스 시험이라면 평양이 그 상투적인 순환고리를 따르고 있다는 대통령의 믿음을 재확해줄 수밖에 없을 터였다."(416-7)


17장 전략적 인내에서 점잖은 무시로


"2013년 2월 12일 오바마 대통령이 두번째 임기를 시작한 직후, 평계리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가 그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 북한의 3차 핵실험이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7에서 14킬로톤의 핵폭발 위력을 기록했다. 2차 핵실험보다 크고 히로시마 폭발과 비슷한 규모였다. 평양은 이번 실험이 설계 목표에 도달했으며 이로써 그들의 핵 억지력이 〈다각화〉되었음을 증명했다고 발표했다." "이 3차 핵실험은 1기 오바마 정부의 대북 정책 실패에 느낌표를 찍는 사건이었으나 워싱턴이 그들의 전략을 재검토하도록 이끌지는 못했다." "2013년 여름이 되자 오바마 대통령은 그가 이란에 한 제안에서 돌파구가 열릴 가능성을 보고 북한 문제에서는 더욱 손을 떼게 되었다. 8월 이란의 온건파 정치인, 특히 싸움꾼인 마흐무드 아마디네자드와 비교했을 때 훨씬 온건한 하산 로하니가 이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오바마는 로하니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이란과의 대화 재개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428-30)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의 폭발력은 3차 핵실험과 마찬가지로 7~14킬로톤 규모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그들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으며 그 실험은 〈소형 수소폭탄의 위력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발표했다." "2016년 9월 북한은 그들이 5차 핵실험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기연구소(NWI)가 성명을 내어 그 실험이 〈마침내 화성 포대의 전략 탄도 로켓에 탑재할 수 있도록 규격화된 핵탄두 운동의 구조와 특성을 시험하고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이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다양한 핵분열 물질을 생산하고 이용하는 기술을 확고히 하여 더 강력한 타격력을 지닌 더 작고 더 가벼우며 다각화된, 다양한 핵탄두를 필요한 만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며 탄두의 '규격화'를 칭송했다." "설득력 있는 증거는 못 내놓았지만, 북한은 한가지만은 확실히 했다. 이것이 그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며, 9월의 핵실험은 중요한 또 한걸음이라는 것이었다."(437-9)


"그것이 전략적 인내였든, 깊은 불신이었든, 점잖은 무시였든 간에 오바마 정부는 북한의 위협을 상황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최우선으로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들은 그 문제를 무시무시한 경고와 함께 트럼프에게 넘겨버렸다." "그들은 공직에서 물러나 정부에 몸담았던 시절에 대한 회고록을 쓰면서도, 전 대통령을 필두로 해서 핵심 관료들 모두가 하나같이 북한을 뒷전 취급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할 때 한차례 핵실험을 실시했고 초보적 핵무기 다섯개 정도를 만들 만큼 플루토늄을 축적해놓았으나 이런 것을 미사일로 실어 나를 역량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백악관을 떠나는 시점에 북한은 네차례 더 핵실험 경험을 쌓았고 대략 25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충분한 플루토늄과 고농축 우라늄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십수번의 미사일 실험 성공을 통해 미사일 역량을 인상적으로 증명한 상태였다. 김정은은 마침내 지역 내 미국의 자산과 우방을 위협하는 핵무력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444-5)


18장 2017년의 〈화염과 분노〉


"미사일 분석가 마커스 실러는 북한의 미사일 프로그램이 해외로부터의 지원과 조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지난 몇년에 걸쳐 북한의 미사일 발사율이 다른 미사일 개발 국가들의 경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실험 횟수는 너무 적은데 성공률은 너무 높다는 것이었다. 예외라면 높은 실패율을 기록한 위성 발사와 무수단 미사일이 있는데 이 둘은 모두 아마도 북한 로켓 중 가장 토착적이었을 것이다." "김정은 지도 하의 북한은 훨씬 더 많은 횟수(2017년에만 24차례 시행)의 시험 발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실험 패턴까지 변경해 기존의 실험장에서만 하던 방식을 벗어나 북한 전역을 옮겨다니며 발사를 실행했다. 핵위협방지구상/비확산연구센터의 분석가들은 이것을 엄청나게 중요한 전략 전환이라고 칭했다. 달리 표현해, 이번 발사 훈련들은 이 정권이 가지고 있을 법한 전국의 미사일 부대에 핵무기를 배치하려는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460-1)


"2017년 12월 초, 전직 고위 외교관이자 정무 담당 차관인 제프리 펠트먼 유엔 수석특사가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김정은에게 보내는 친서를 들고 북한을 방문했다." "펠트먼은 그로부터 3년도 더 지난 후 BBC에 출현해, 2017년 말 평양 방문 초청을 받은 경위와 미 국무부가 그의 방문을 탐탁치 않아 했던 당시 사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몇주 뒤 구테흐스 사무총장이 북한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다. 구테흐스는 트럼프에게 〈제프 펠트먼이 평양으로 와서 북한 사람들과의 정책 대화를 이끌어달라는 이상한 초청을 받았음〉을 알려주었다. 이에 트럼프가 구테흐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이렇게 말했다고 펠트먼이 말했다. 〈제프 펠트먼은 평양에 가야죠. 가서 북한 사람들에게 내가 기꺼이 김정은과 마주 앉을 용의가 있다는 말을 전하라고 하세요.〉 2017년 트럼프가 김정은과 대립하던 하나의 장을 닫고 2018년 극적으로 180도 방향 전환을 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제안이었다고 나는 믿는다."(478-9)


19장 올림픽에서 싱가포르에서


"트럼프의 시선이 온통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에 꽂혀 있던 이때, 맥매스터를 볼턴으로 교체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볼턴은 외교 자체를 매우 회의적으로 보았고 북한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트럼프는 보좌관들에게 자기는 〈지금의 추진력을 놓치고〉 싶지 않다며, 〈이거야말로 큰 건이다. 만일 우리가 협상을 이뤄낸다면, 그것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협상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볼턴은 트럼프의 심경 변화에 대해 〈그것은 낙심천만한 일이었다. 우리는 거의 그 덫을 피할 수 있을 뻔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에게 그 덫이란 김정은과의 싱가포르 회담 개최였다. 『그 일이 일어난 방』에서 볼턴은, 어차피 싱가포르 회담이 진행될 것이라면 〈법적 구속력이 있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트럼프가 덜컥 동의해버릴 수도 있는 부적절한 문서의 해악을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어야 함을 깨달았다고 진술한다."(488-91)


"볼턴이 계획했던 그대로, 싱가포르 성명에는 트럼프가 덜컥 동의해버릴 수도 있는 부적절한 문서의 해악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 어떤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항도 담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북한이 내세우던 〈단계적·동시적 행동〉도 피할 수 있었다. 북한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커다란 진전으로 보았다. 북한 국영 매체는 굉장한 성공이라고 이 회담을 치켜세우며 공식적인 공동성명처럼 읽히는 상세한 보도를 했다." "이제 정상회담의 약속을 현실화하는 어려운 외교적 작업이 시작될 차례였다. 그러나 양측이 두 정상의 만남을 바라보는 방식에 이견이 있었고, 그것이 앞으로 나가려는 걸음의 발목을 잡을 터였다. 트럼프의 발언은 더 안전한 세계를 만들었다든지 김정은과 개인적 관계를 확립했다든지 하는 그의 주장처럼, 주로 정상회담의 업적이라고 스스로 평하는 것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북한에게는 이것이 워싱턴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수십년 묵은 한반도의 반목을 해소할 기회였다."(499-500)


20장 하노이의 탈선 열차


"볼턴은 7월 초 평양 재방문 준비를 하는 폼페이오에게 미국이 평양으로부터 〈그들의 핵 및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신고를 제공한다〉는 확약을 받기 전까지는 그 어떤 진지한 협상도 시작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그러면 1년 안에〉 군축 작업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볼턴은 이것이 협상을 믿고 진행해도 될지 시험해볼 기회이자 김정은이 싱가포르 합의를 진짜로 지킬 생각이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될 것이라고 했다. 볼턴에 따르면 폼페이오도 원칙상 동의하고 그의 협상작전에 적용했다고 하는, 이런 충고가 협상 과정 전체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에게 싱가포르 합의는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 시작보다는 종전선언을 통한 〈평화체제〉 확립에 더 집중하는 과정을 의미했다."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약속을 시험하고자 했던 것과 유사하게, 평양이 전쟁 종식 선언에 집중하는 것은 북한과의 신뢰를 쌓고자 하는 워싱턴의 〈강력한 의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505-7)


"2018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열린 평양 정상회담에서 김정은과 문재인은 앞길에 대해 유사한 구상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김정은은 경제 쪽으로 선회할 생각이었고 문재인은 남한과 북한의 경제적 통합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정상회담을 찍은 사진들은 거의 형제애에 가까운 우정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김정은은 문재인이 핵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따라서 그 문제에 관해서는 워싱턴의 정책이 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상황이었다." "외교 전선에서 실무를 맡은 비건의 가장 큰 도전은 워싱턴 내부로부터 왔다. 볼턴은 북한의 완전 항복에 미달하는 모든 합의를 막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다. 볼턴의 관점은 NSC 관계자들 다수가 원칙적으로 공유하고 있었고, 비건의 상급자인 폼페이오 장관도 대체로는 그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맨 위에 있는 트럼프는 그만의 의제를 고수했다. 언론을 사로잡고 국내 정치에서 이익을 챙겨줄 대타협을 성사시키는 데 중점을 둔 의제였다."(512-3)


"제재 해제라는 사안은 하노이 정상회담의 실패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볼턴에 따르면,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협상을 깬 것은 바로 제재를 해제하라는 그의 제안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회담 중 제재 해제를 트럼프에게 내민 경위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미국 쪽에서는 김정은이 요구하는 것의 가격이 너무 높다는 데에 의견일치가 있는 듯 보였다. 평양은 민간 분야에 대한 제재 해제를 원한 반면, 워싱턴은 북한을 비핵화로 몰 수 있는 데 필요한 최대 압박을 가하는 것이 바로 그런 제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압박 작전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강경파 제재 옹호론자들은 이런 실패에 대해 언제나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충분히 엄격하지 않았고 충분히 오래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아한 점은 리용호 외무상이 기자회견에서 제재 해제는 북한이 최우선 과제가 아니었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반면 미국 측은 평양의 비핵화 제안과 제재 해제 요구 사이의 간극이 하노이에서 풀기에는 너무 크다고 보았다."(530-1)


21장 관측을 마무리하며: 변곡점과 실수


"나는 왜, 3대를 이어온 북한의 김씨 정권이 각각 중요한 시기마다 미국에 진정한 가능성을 제공하는 외교를 추구한다고 믿게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북한이 (이중경로 전략 속에서도) 이 외교 노선을 그 나라의 대외 안보 상황을 개선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핵무력이 아니라 주적과의 화해를 통해 체제 안정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북한은 이를 통해 경제를 개발하고 중국의 그늘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숨 쉴 공간을 확보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달리 말해, 평양은 그들의 생존에는 핵무기가 도움이 되겠지만 번영을 위해서는 외교가 필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셈법이 워싱턴에 여러번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때마다 워싱턴은 그것을 허비해버렸다." "변곡점은 관리가능한 정도의 위험만 감수하면 평양이 핵무기 폐기로 가는 외교의 길을 따라나서도록 워싱턴이 효과적으로 유도할 가능성이 있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이 결정한 미국의 정책은 한반도의 핵 위험을 오히려 악화했다."(543-5)


"가장 치명적인 분기점은 부시 정부가 합의를 깨는 일의 위험을 충분히 평가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1994년 북미제네바합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2002년 10월이었다. 클린턴 정부가 끝날 때 북한은 핵무기가 없었다. 고작해야 몇킬로그램도 안 되는 플루토늄뿐, 플루토늄 생산 활동도 없었다. 비축된 농축 우라눔도 없었을 것이며 원심분리기 프로그램은 걸음마 단계였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미사일 발사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지 4년이 되어가던 때였고, 그 모라토리엄으로 미사일의 사거리와 정교함을 발전시킬 능력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북한에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도록 설득할 가장 좋은 기회였다." "협상 파기에 대해 부시 정부가 명시적으로 밝힌 이유는 평양이 비밀리에 우라늄 농축을 추진함으로써 북미제네바합의를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진짜 이유는 주로 정치적인 것으로, 클린턴 정부의 중요한 대외정책 업적 중 하나인 〈북미제네바합의에 대못을 받으려는〉 것이었다."(545-6)


"하노이가 (또다른) 가장 심각한 변곡점인 이유는 정상회담이 열릴 즈음에 이미 북한의 핵무력이 규모와 정교화 면에서 막대하게 성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핵단지는 점점 더 강력해지는 핵폭탄을 연이어 실험함으로써 주목할 만한 성공을 보여주었다. 전략로케트군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군산 복합체도 계속해서 인상적인 미사일 발전상을 알렸다. 그들은 정권이 쉽게 폐쇄해버리기는 어려울 정도의 규모로 성장한 상태였고 아마 그 영향력도 커져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노이에서의 김정은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감축하는 대담한 조치를 취할 의지가 있어 보였다. 그가 트럼프에게 말한 대로, 그 모든 일이 단번에 이루어질 수는 없었겠지만 그는 미국이 관계 정상화를 향한 조치를 취하는 것에 상응하여 그 방향으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노이에서 걸려 있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전의 변곡점에서 협상을 피하기보다는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어야 했지만, 워싱턴은 그러지 못했다."(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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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 미국에 미련을 버린 북한과 공포의 균형에 대하여
정욱식 지음 / 서해문집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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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 북한, 미국에 미련을 버리다


# 북핵과 미 안보 전략 간의 긴장

1. 1992년 북한의 비밀 핵무기 개발 의혹과 이에 따른 북한의 NPT 탈퇴 선언

2. 1990년대 중반 미사일방어체제(MD) 설치의 명분으로 '북핵 위협론' 제기

3. 2010년대 미중 전략경쟁의 여파로 북한에 대해 '전략적 인내' 정책 실시

※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미국이 핵실험 등 북한의 움직임에 직접 반응하지 않고 한미일 군사협력과 대북 제제에 주력한다는 방침


"김정은의 '결심'에 변화가 포착된 것은 2018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이어진 '톱-다운' 방식의 남북·북미 협상이 허망하게 끝난 뒤부터다. 많은 전문가는 그 가운데서도 2019년 2월에 일어난 2차 북미정상회담의 실패, 즉 '하노이 노딜No Deal'이 김정은의 변심에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여기에 같은 해 6월 30일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번개팅'은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낳았다. 하노이 노딜이 김정은에게 '충격'이라면, 판문점 번개팅 이후 일련의 흐름은 김정은을 변심을 넘어 또 다른 '결심'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두 번째 결심이란 북한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대한 미련을 접고 핵무력을 정치·안보·경제·외교를 아우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체國體'로 삼은 것이다. 이후 김정은의 두 번째 결심은 미국의 정권교체 소식에도 흔들림이 없다." "그는 〈미국에서 누가 집권하든 미국이라는 실체와 대조선 정책의 본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며 '대미 장기전'의 결의를 다졌다."(34-5)


2 2019년 여름의 파국


"이른바 '판문점 번개팅' 자리에서 트럼프는 그해 8월로 예정된 한미연합훈련 취소를 약속한다. 김정은은 북미 실무회담에 응하겠다고 화답했다." "이후 볼턴은 자신이 북핵 동결안의 제안자로 지목한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정책 결정과정에서 소외시키려고 했다. 북한이 판문점 회동 이후 북미 실무회담을 8월로 제안했는데 정작 회담 파트너인 비건이 미국의 대북정책 결정에서 소외된 셈이다." "또 하나의 합의는 한미연합훈련 중단 약속이다. 그런데 판문점 회동 이후에도 한미 양국은 연합훈련의 중단이나 연기를 발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볼턴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2019년 7월 청와대를 방문해 정의용 안보실장과 한미연합훈련 실시를 합의했다. 대통령의 약속을 참모가 뒤집은 셈이다." "정상 간의 합의를 뒤집고 2019년 8월에 한미연합훈련을 강행하는 대신 북미 실무회담이 열렸다면 상황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때마침 9월에 훼방꾼 볼턴이 경질되었기에 더욱 그렇다."(43-7)


3 남북, 역대급 환대에서 근친증오로


"2018년 8월, 종전선언을 둘러싼 한미 간 엇박자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지난 6월에 나온 싱가포르 북미공동성명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한반도에서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순서로 구성되었다. 무엇보다 평화체제는 평화협정 합의안의 이행 과정에서 구축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완전한 비핵화가 이뤄지는 최종단계에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은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구상이었다." "또한 북한은 당시 공동성명의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트럼프 행정부가 말한 〈동시적·병행적 이행〉에 당연히 제재 완화가 포함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음날 정상회담의 후속 협상 테이블에서 폼페이오는 제재 완화는 비핵화가 완료될 때 고려할 사안이라며 〈동시적·병행적 이행의 예외〉라고 못 박았다." "북한 입장에선─한국 대통령이 회담 상대거나 중재자로 나선─남북·북미 정상회담의 주요 합의가 공수표가 되는 걸 지켜본 셈이다."(58-62)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은 김정은이 트럼프의 의중을 직접 확인하는 자리였다.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의 완전 폐쇄와 대북 제재 완화를 골자로 하는 1단계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를 거절했고 회담은 결렬되었다. 트럼프가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중단을 약속한 한미연합훈련도 2019년 3월부터 '축소된 형태'로 재개되었다. 한국 정부의 첨단 무기 도입도 이때부터 본격화한다."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는 한미연합훈련 예고에 이어 '2020-2024 국방중기계획'을 발표했다. 5년간 290조 원을 투입하는 대규모 군비증강 사업으로, 이 또한 2018년 남북 정상이 합의한 '단계적 군축'을 뒤엎는 정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재인은 '남북한이 힘을 합쳐 일본을 따라잡자'는 메시지(2019년 광복절 경축사)를 던졌고, 북한은 〈삶은 소대가리 앙천대소할 노릇〉이라며 〈남조선과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끝끝내 남북관계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62-5)


"이 책을 쓰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산이라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전시작전권 환수와 종전선언은 모두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다가 무산된 정책이다. 문재인은 임기 막바지까지 종전선언과 전작권 환수에 공을 들였다." "문재인 정부에 따르면 종전선언은 '정치적으로는 종전인데, 법적·체계적으로는 정전'이다. 또 한국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인지, '끝내자'고 선언하자는 것인지도 불분명했다." "전임 박근혜 정부와 미국의 합의에 따르면, 한국이 전작권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비증강을 바탕으로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한 초기 대응 능력을 확보하고 연합훈련을 통해 한국군의 작전권 행사 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이를 그대로 계승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연합훈련 및 대규모 군비증강이 양립 불가능한 노선임이 분명해졌을 때도 후자를 선택하고 말았다. 요컨대 그럴 의도가 아니었을지라도, 문재인은 자신의 평화정책을 전작권 환수의 조건에 종속시킨 셈이다."(70-2)


4 이어달리기와 담대한 구상


"한미 양국은 2023년 3월 세계 최대 규모의 연합훈련(Freedom Shield, 자유의 방패)에 돌입했다. 문재인 정부 중후반에 전구戰區급, 즉 전면전을 상정한 대규모 훈련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기반으로 한 지휘소 연습으로, 실기동 훈련은 대대급 이하에서 주로 실시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정상화'를 내걸며 실기동 훈련도 전구급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북한 역시 '압도적 대응'을 공언하면서 맞불을 놓고 있다. 3월 16일에는 평양 순안에서 동해상으로 ICBM 화성 17형을 시험발사했다. 딸 김주애를 데리고 참관한 김정은은 〈우리 공화국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며 조선반도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연습을 번번히 벌리고 있는 미국과 남조선에 그 무모성을 계속 인식시킬 것〉을 다짐했다." "이처럼 한미동맹과 북한은 갈수록 닮은꼴이다. 한미가 '압도적 대응'을 공언하면 북한도 똑같이 응수하고 '김정은 정권의 종말'이라는 위협엔 '남조선 괴뢰정권 종말'로 되받아친다. 말뿐이 아니다. 행동도 닮고 있다."(91-3)


5 한반도, 불가역적 핵시대로 접어들다


"한국전쟁 때부터 미국이 북한에 가한 '지속적이고 계획적이며 반복적인' 핵위협은 상수다. 변수는 북한의 핵무장 여부였다. 그런데 길게는 30년, 짧게는 2년간의 비핵화 협상 끝에 북한이 내린 결론은 '부질없다'는 것이다. 김정은 정권은 핵무력을 '국체'로 삼기로 했다. 김정은 정권은 핵이 재래식 군비 절감과 군민융합, 그리고 군수-민수 전환을 촉진해 경제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적대국인 한미일을 상대로는 '억제력'이 되고 우방국인 중러를 상대로는 '자주의 무기'가 될 수 있다며, 핵무장을 통해 전략국가─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모두 갖춤으로써 미국 본토를 실제 타격할 수 있는 국가─가 되리라 자신한다. 2022년 9월 최고인민회의 법령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를 채택한 것은 그 결정판이다. 김정은은 〈핵보유국으로서의 우리 국가의 지위가 불가역적인 것이 되었다〉라고 선언했다. 북한의 핵무장도 사실상 상수가 된 것이다."(102-3)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본격화한 이후, 한미 대응의 초점은 '맞춤형 억제'였다. 주목할 점은 북한 역시 핵무력의 다종화 및 핵 정책 법령화를 통해 '맞춤형 억제'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전술핵 강화를 통해 유사시 핵무기 사용 의지를 과시하고 다양한 작전에 활용하는 능력을 갖추겠다는 뜻이다. 북한의 전술핵 보유 논리는 미국의 입장과 판박이다. 북한은 2021년 1월 전술핵 개발을 공식화한 이후 핵무력의 '효과성과 다각화'를 강조했다. 작전 목적과 타격 대상에 따라 다양한 수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도 비슷한 표현을 쓰면서 전술핵 개발·보유를 정당화해왔다. 전술핵이야말로 핵능력과 전략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증대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과 미국은 자신들의 핵무기 사용 옵션이 허풍이 아님을 전술핵을 통해 증명하려고 한다. 전략핵무기(전략핵)에 견줘 폭발력을 크게 낮춘 전술핵은 언제든 실전에 동원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104-7)


6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난을 보는 다른 눈


"북한은 2021년 7월 유엔에 5개년 계획의 '전략적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하면서도, 〈2015~2019년 5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5.1%〉라고 보고했다. 5개년 계획 당시 북한은 미국이 제재로 경제발전에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음을 호소하며 제재 해결을 강력히 요구하는 입장이었다. 제재의 고통을 강조하려는 북한으로선 유엔에 거짓으로 높은 성장률을 써낼 이유가 없다." "경제제재는 비핵화를 비롯한 대북정책의 강력한 도구였다. 경제난에 빠진 북한으로선 제재 해소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런 북한이 제재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물론 제재 해결이 여전히 '불감청고소원'이겠지만, 핵 포기를 압박하거나 거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남북 경제협력 재개를 위해서는 제재 해결이 필수다. 그럼에도 북한이 '제제 해결'에서 '제제와 더불어'를 선택했다는 것은 남북경협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는 의미다.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128, 133-4)


7 병진노선은 망국의 길일까?


"병진노선의 핵심은 '안보의 경제성'이다. 그리고 이는 재래식 군비를 축소하면서 핵전력의 증강으로 이를 상쇄하려고 한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룩New Look', 이를 그대로 모방한 소련의 흐루쇼프, '양탄일성兩彈一星'(원자탄·수소탄과 인공위성)을 완성함으로써 경제발전을 꾀한 중국의 덩샤오핑 등의 맥을 잇는 유서 깊은 논리다. 가까이는 경제발전과 자주국방을 동시에 추구한 박정희 정권이 핵개발을 시도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런데도 유독 북한의 병진노선에 대해서만큼은 비관적 견해가 절대다수다. '북한의 핵무장과 경제발전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게 상식으로 통용된다. 여기에 경제난의 원인이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진단과 '주민들은 굶주리는데 핵개발에만 매달린다'는 비난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북한의 병진노선의 핵심 기조 역시 핵무력 건설을 통해 '자위적 억제력'을 추구하고 재래식 군비 부담을 줄여 경제건설과 인민 생활 향상에 쓰겠다는 것이다."(147-9)


8 북핵 인플레이션과 대북 억제 결핍감


"북핵 인플레이션, 즉 북핵 위협을 과장하는 언동의 최고봉은 북한이 핵무기를 앞세워 남벌南伐, 즉 적화통일에 나설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이런 주장의 논리 구조는 대략 이렇다. 1단계로 북한이 파괴력이 낮은 전술핵무기를 동원해 남한에 기습적인 핵공격을 가하거나 위협한다. 2단계로 북한이 전략핵무기인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미국의 대도시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다. 3단계로 북한이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주요 기지에 핵미사일 공격을 가해 한미연합 전력을 무력화하고 특수부대를 투입해 남한의 주요 시설을 장악한다. 끝으로 북한이 지상군을 투입해 한반도 무력통일을 완성한다." "그러나 북한이 핵을 앞세워 남벌을 시도하는 순간 지구상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할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될 것이다. 생존을 위해 핵무기를 만든 북한이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핵전쟁을 선택할 리 없다는 지적은 이러한 맥락이다."(161-5)


"대북 억제는 '결핍'이 아니라 차라리 '과잉'이다. 한미는 1970년대 후반부터 '팀 스피릿' 연합훈련을 통해 강력한 대북 억제를 추구했다. 얄궂은 사실은 북한이 핵개발에 나선 이유 중 하나가 이 훈련에서 느낀 공포감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결핍감에 시달리면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과도하게 억제하려고 할수록 정작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억제가 힘들어진다는 역설을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한미, 혹은 한미일이 대북 억제 강화를 이유로 군사력과 준비태세를 강화할수록 북한도 마찬가지 선택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한국이 이미 충분히 강력한 미국의 확장억제를 더 강화해달라고 매달릴수록 미국은 한국에 부당청구서를 당당히 내밀 것이다. 한국이 미국에 준 돈이 남아도는데도 방위비 분담금을 인상하라는 요구에서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이기적 행태는 절제를 모른다."(170-2)


9 핵공유는 왜 나라마다 다를까?


"1953년에 체결된 정전협정에는 '신무기 반입 금지' 조항이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핵공유 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정전협정 위반이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대규모의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데 따르는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싶었다. 그 대안이 핵무기 전진 배치다. 그럼 미국은 정전협정과 한국 내 핵무기 배치 사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풀었을까? 한국과 협의 없이 몰래 갖다놓는 방식이다. 당연히 한미 핵공유 협정도 없었다. 미국은 핵무기 배치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NCND'를 고수했다.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 배치 사실을 인정한 것은 1975년이다.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을 눈치챈 미국이 이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2023년 4월 채택된 워싱턴 선언에는 한국이 NPT와 한미원자력협정을 준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는 한국이 독자적인 핵무장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다름없다. 여기에는 어떤 식이든 핵공유는 불가하다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178-80)


10 한반도에서 '공포의 균형'은 가능할까?


"한반도는 여러 차례 전쟁 위기를 맞았지만, '끝이 보이는' 위기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날 이런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갈등의 중재자'가 사라졌고, 무엇보다 북한이 대화와 관계 회복에 흥미를 잃은 상황에서 한미를 상대로 대화에 나서라는 조언 자체가 먹히질 않는다." "한반도 위기가 남북관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도 눈에 띄는 현상이다. 과거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는 주로 북미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북폭론과 북한의 전쟁 불사론이 맞선 1994년 상반기, 아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과 김정일 정권의 핵개발 재개가 충돌한 2003년, 2017년 초 김정은-트럼프의 드잡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2020년부터 갈등의 진앙은 남북관계로 바뀌었다. 그해 6월 북한이 대북 전단 살포를 빌미로 개성공단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것은 남북관계의 파국을 상징한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관계는 시계 제로에서 한 발도 내딛지 못하고 있다."(192-5)


11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이 진짜 온다


"'한미일 남방3각 동맹 대 북중러 북방3각 동맹'이라는 이분법적 오해는 오랫동안 '흥미로운 허상'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70년간 한반도에서 이 같은 대결 구도가 실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3년 들어 미국이 추진한 MD는 북한을 명시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잠재적 적으로 삼았다. 요컨대 애초부터 한미일 대 북중러의 갈등 구조를 잉태한 전략인 셈이다. 미국이 한일은 포섭 대상으로, 북중러는 위협으로 삼으면서 양진영 간 갈등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다. 이때 동북아시아 질서의 강력한 변수로 등장한 것이 북한이다.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맞서 2003년부터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한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한미일은 물론이고 중러도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협상 테이블이 6자회담(2003~2008)이다. 미국 주도의 MD가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을 잉태했다면, 북핵은 사상 처음으로 동북아 주요국이 모두 참여하는 다자회담을 낳았다."(199, 203)


"6자회담은 한반도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동북아 평화안보체제를 추구했다. 하지만 2008년 청와대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이명박 정부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해 8월 김정일이 뇌질환으로 쓰러지자 북한의 붕괴와 흡수통일 실현이 눈앞에 잡히는 듯했다. 이명박 정부는 기다리기로 했다. 이러한 이명박의 '통일몽'은 2008년 12월 6자회담 결렬로 이어졌다. 곧 망할 북한과의 협상을 부질없는 짓으로 간주한 것이다. 2009년 1월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이 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어땠을까? 당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의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2008년부터는 금융위기가 미국과 서방세계의 경제질서를 강타했다. 반면 중국은 빠르게 부상하고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선택은 6자회담 재개가 아닌 한미일 군사협력이었다. 6자회담은 의장국인 중국의 위상에 이로운 일이고,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미일의 결속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이다."(203-4)


"중국과 러시아 두 나라는 2017년까지만 해도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면 대북 규탄과 제재에 동참했다. 그러나 2020년 이후엔 북한의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 급증하는데도 추가 제재 불가를 외치고 있다. 왜 그럴까? 전통적으로 북핵문제는 미중러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협력적 의제였다. 이견이 있을지언정 비확산이라는 국제규범의 규정력은 확실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신냉전의 기운이 확연해지면서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비확산보다 세력균형이 훨씬 중요해진 것이다. 이는 중러가 공식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공인할 수는 없어도 세력균형의 관점에서 북핵을 묵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러로서는 미국과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미국이 동맹을 규합하자 북핵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이다. 미국이 중동의 세력균형을 위해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중국 견제를 위해 인도의 핵무장을 묵인한 것처럼 말이다."(208-9)


12 다시 친해질 수 없다면


"싸우지 않는 남북관계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미중관계에 힌트가 있다. 두 나라는 치열한 전략경쟁을 벌이며 험한 소리도 주고받지만, 경쟁과 갈등이 무력충돌로 번지지 않도록 가드레일(안전장치)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을 이루고 있다. 두 나라는 한반도-동중국해-대만해협-남중국해 등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면서도 무력충돌이 가져올 재앙을 의식하면서 대화에 임하고 있다." "사실 남북한에도 거대한 가드레일이 있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양쪽 155마일에 걸쳐 2km씩 설정된 비무장지대DMZ가 그것이다. DMZ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북접경지역을 완충지대로 만들어 무력충돌을 예방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비무장지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중무장지대로 바뀌었고 수차례 충돌도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 비무장지대의 취지를 살리는 동시에 이를 인근 지역으로까지 확대하자는 복안을 담은 것이 바로 9·19 남북군사합의다."(220-1)


13 그래도 대안을 찾는다면: 사즉생의 해법은?


"놀랍게도 '한반도 비핵화'는 합의된 정의가 없다. 우선 북한이 말하는 '조선반도 비핵화'와 미국이 요구하는 '한반도 비핵화'가 달랐다. 북한은 자신의 핵무기 포기뿐만 아니라 미국 핵위협의 근본적인 해결까지 요구했고, 미국은 자신이 핵에는 손을 대지 않고 북핵만 폐기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한국의 경우에는 정권에 따라 달랐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를 공식적인 용어로 사용하면서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상태〉로 정의한 반면,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를 공식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 대체할 용어인 '한반도 비핵지대'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남북한은 핵무기를 개발·생산·보유·실험·접수를 하지 않고,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또 핵보유국들은 남북한에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가하지 않고 핵무기 및 그 투발수단을 배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법적 구속력을 갖춘 형태로 보장한다.〉"(230-1)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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