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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역사 - 루터의 신성한 공포에서 나치의 차분한 열광까지
김학이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3월
평점 :
프롤로그
"역사가 변화라면,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야 한다. 그러나 감정은 포착하기 어렵다. 감정은 이념과 달리 제도로 귀착되지 않는다. 자유는 의회와 법으로 제도화되고, 평등은 경제의 집단화로 제도화된다. 따라서 그 역사적 궤적을 추적할 수 있다. 감정에는 제도가 없지만 역사는 있다. 감정이 역사를 갖는 이유는 감정이 욕망과 규범 사이에서 인간이 느끼는 격동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비밀스럽기도 하기에 도덕규범의 피안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문제로만 간주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감정은 규범과 긴밀히 얽힌다.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는 그가 마주한 상황이 정당치 않아서다. 감정의 문화적 차원은 1970년대 이후 인지심리학에서 정밀하게 연구되고 이론화되었다. 그 실험심리학은 인간의 감성체제the affective system가 특정 현실에 당면하여 비의지적으로 감정적 반응을 발동시키지만, 그것은 실상 경험과 기대에 따라 사회 환경을 계산하고 평가하여 몸과 마음을 준비시키는 정보처리 작업의 결과라는 점을 논증했다."(10-1)
"대표적인 감정은 그 시대의 유일한 감정이 아님은 물론 지배적인 감정도 아니다. 그러나 그 감정은 해당 시대에 가장 많이 말해진 감정이고, 가장 문제시된 감정이며, 따라서 시대의 가치가 함축된 감정이고, 그리하여 사회적 연관이 엮여 있는 감정이다. 그 감정은 개념사의 '기본 개념'에서 '기본'에 해당하지만, '기본 감정'이라는 학술용어는 이미 보편적인 생물학적 감정을 지칭하기에 사용할 수 없을 따름이다. 시대적 감정은 생물학적 감정이 아니라 문화적 감정이다. 따라서 대표적인 감정을 시대별로 가려내고 그 감정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을 확인하면 각 시대의 고유성 역시 도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역사학의 의의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를 보면 공감과 혐오가 이 책에서 말하는 대표 감정이다. 그 감정 속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참여의 가치와 배제의 요구가 담겨 있고, 그 근저에 정의에 대한 우리 사회 전체의 논의가 깔려 있다. 그 두 가지 감정은 우리 시대의 지표이다."(13-4)
1장. 근대 초 의학의 신성한 공포
"시초에 공포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를 근대 독일의 시작점으로 간주하는 한 그렇다. 루터의 저술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팸플릿은 루터가 1529년에 작성한 《소교리 문답》이다. 루터는 십계명의 조항 하나하나를 간결하게 해설한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제1계명에 대하여 루터는 썼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모든 것에 앞서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제2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도 해설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우리가 하나님 이름으로 저주하지 말고 맹세하지 말 것이며······.〉 제10계명까지 모든 계명에 대하여 루터는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반복한다. 모세의 십계명에는 정작 제2계명에서만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은 신이 〈처벌하지 않고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구절이 있을 뿐인데, 루터는 모든 계명에서 신을 두려워하라고 쓴 것이다."(26-7)
"루터의 공포는 그 개인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대를 반영하는 동시에 시대를 만든 인물이다. 그 시대의 공포를 잘 드러내는 시대적 현상이 하나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 궁정 점성가를 역임했던 성직자 요한네스 리히텐베르거가 1488년에 《기이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입각한 라틴어 예언》이란 책을 발간했다." "리히텐베르거는 교회와 신성로마독일제국과 민중에게 닥칠 일들, 즉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프랑스와 오스만투르크의 침입, 플랑드르 도시들의 봉기, 별들에 의해 격동된 민중의 반란 등을 때로는 군주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서술했다." "예언서의 폭증은 중세 말의 정치사회적 격변 외에, 우주와 지상 만물과 인간을 통일체로 파악하는 지적인 혁명인 15세기 신플라톤주의에 의하여 추동되었다. 신플라톤주의는 고대 문헌의 (재)발견에 부심하던 휴머니즘 덕분에 대두했는데, 신플라톤주의는 인간을 천사의 지위로 높였지만 그것에 접속한 예언서는 인간의 공포를 강화했다."(28-30)
"16세기의 독일인들은 공포를 '예종적 공포'와 '순애적 공포'로 구분했다. 노예가 주인에게 갖는 공포인 예종적 공포는 각종의 현실적 재앙에 대한 공포로서 근본적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의 다른 이름이고, 따라서 그 자체로 죄다. 순애적 공포는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자식의 공포로서, 신에 대한 공포가 바로 그러해야 하고, 그것은 곧 구원의 길이다." "예종적 공포의 내용은 자기 자신과 세속에 대한 사랑이고, 순애적 공포의 내용은 신의 사랑에 대한 신뢰이다. 다시 말해서 순애적 공포라는 기표의 기의는 신의 사랑에 대한 신뢰이다. 신에 대한 공포에서의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예종적 공포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 선명히 대비되어 의미를 발동시킨다." "신에 대한 공포는 공포가 아니라 신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 그래서 루터가 십계명을 해설하는 가운데 신을 두려워하라고 말하는 동시에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신을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신뢰)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35-6)
"파라켈수스는 근대 해부학을 개시한 베살리우스와 혈액순환설을 제시한 하비와 함께 근대 의학의 비조로 꼽힌다." "파라켈수스는 1525년 《파라미룸 의서》라는, 자기 의학의 요점을 담은 책을 서술했다. 사후에 발간되는 그 책에서 그는 인체의 각 기관에 〈연금술사〉가 내장되어 있어서, 그것이 외부에서 들어온 음식과 공기에서 영양분과 독소를 〈분리〉시키고 독소를 체외에 내보내는데, 그 분리 작용이 오작동을 일으키면 그것이 바로 병이라고 주장했다. 파라켈수스는 연금술사를 때로는 〈원력原力archeus〉이라고 칭하는데, 다름 아닌 화학 작용이다. 파라켈수스는 연금학의 원리를 의화학적 질병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질병의 원인을 체액의 불균형이 아닌 체내의 화학 작용에서 찾았던 것이다. 파라켈수스는 또한 신이 연금술사를 인간 외에 동물 식물 광물에도 배치해두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치료법은 연금술사가 기능을 회복하도록, 금속 식물 동물에서 원력을 뽑아내어 인체에 투입하는 것이었다."(46, 57)
"파라켈수스는 병의 원인 여섯 가지를 지목하는데, 독, 자연, 별, 악마, 신 외에 인간의 〈정신〉이 그중 하나다. 그것을 파라켈수스는 의지로 칭했지만, 내용은 온전히 감정이다. 감정은 그에게 중요한 병인이었다. 다만 정말 놀랍게도 정신, 즉 감정에 의해 발생하는 병은 정신 주체의 병이 아니라 타인의 병이다. 인간의 내면이 주체의 욕망과 억압의 역동성에 의하여 병드는 게 아닌 것이다. 이는 16세기 인간의 내면이 18세기 이후의 내면과 얼마나 달랐는지 보여준다. 인간의 정신은 타인의 정신에게 자신의 의지적 감정을 강요한다. 그러면 두 정신은 투쟁을 벌이고, 이때 패배한 정신이 〈상처〉를 입는다. 〈나의 정신은 내 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나의 칼로 타인을 찌를 수 있다.〉 여기서 찔린 것은 정신만이 아니다. 정신이 찔리니 신체가 실제로 피를 흘린다. 정신의 상처가 신체의 상처로 물질화되는 것이다. 파라켈수스는 정신에 의해 찔린 신체는 외과적으로 치료하려 해도 소용없고 정신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6-7)
"파라켈수스에게서 인간의 정신과 감정은 몸과 환경의 물리적인 상호 작용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감정은 도덕과 신앙의 문제이기도 했다. 분노와 공포와 증오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표증이었다. 거꾸로 겸손과 기쁨과 사랑은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 존재의 증거였다. 따라서 감정은 멸망이냐 구원이냐의 기준이었다." "문득 치밀어 오른 부정적 감정은 악마가 자신을 장악한 증거일 수 있었다. 그렇듯 인간은 감정의 물질성과 감정의 종교성 사이의 덫에 걸린 존재였다. 종말이 임박했다고 선언된 16세기에 인간은 외적인 경건성과 일상적 행동은 물론 내밀한 감정까지 단속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그 자신만만했던 르네상스인들을 겨냥한 규율화 및 도덕화 장치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파라켈수스는 그가 거부했던 당대 종교개혁가들과 일치한다. 그 역시 근대로의 이행기에 인간을 규율화함으로써 윤리적 인간과 도덕적 사회를 생산하려던 시대적 노력의 일부였던 것이다."(80-1)
2장. 30년전쟁의 고통과 감정의 해방
"요한네스 헤베를레(1597-1677)는 제화공이다. 그는 황제에 종속되지만 기여금 납부를 제외하고는 독립을 누리던 도시, 울름의 지배를 받는 농촌 수공업자였다." "30년전쟁의 참혹한 전화를 겪으면서 헤베를레는 무엇을 느꼈을까? 헤베를레의 연대기에는 감정어가 몇 개만 등장한다. 감정 명사만 열거하자면, 비탄, 가슴 아픔, 공포, 경악, 용기, 기쁨, 신뢰 등이다. 눈에 띄는 것은 슬픔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찌된 일일까? 가족의 죽음에 대한 서술을 보면 해석의 실마리가 발견된다. 헤베를레는 단 한 번도 슬프다고 표현하지 않았다. 1634년 10월 7일 갓 태어난 둘째 아들이 죽었을 때 그는 썼다. 〈전능하신 신이시여, 심판 날에 그가 기쁘게 부활하게 하시고 그에게 영생을 주소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이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는 죽음 대부분을 그처럼 짧은 관용어로 표현했다. 루터가 신자는 죽음에 직면하여 슬퍼하되 그 슬픔이 신적인 슬픔이어야 한다고 거듭 설교했기 때문이다."(89, 93)
"그 끔찍한 고통을 기록한 연대기에서 헤베를레는 군대와 병사들에 대하여 단 한 번도 '분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미국의 역사가 캐럴 스턴스는 근대 초 영국인들의 자아 문서에서 17세기말 이전 시기에는 분노를 표현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려 9년 동안 일했지만 봉급 한 푼 못 받은 수공업 도제, 계모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모조리 빼앗긴 청교도 목사, 동료와 경제적 갈등에 휘말린 영국 국교회 수학자 등이 자서전에 자신들의 감정을 분노라는 단어로 표현하지 못했다. 그들은 〈비탄griefe〉이라고 돌려 말했다. 이는 당시 분노가 근본적으로는 신의 감정이었고, 세속에서는 제후만이 지배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일반인의 분노는 광기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헤베를레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그는 분노라는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았음은 물론, 그 많은 악행을 저지른 병사들을 '사악한'이라는 형용사로 묘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97)
"그러나 개인으로서의 헤베를레의 진면목은 다른 데서 발견된다. 그렇게 긴 개인 연대기를 작성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고유성이다." "1600년경 독일 개신교 지역의 거의 모든 교구에 초등학교가 설립되어 있었고, 도시 수공업자들의 문자 해득률은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문자 해득 능력과 글을 유창하게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따라서 헤베를레는 자신이 연대기를 썼다는 것 자체에 크나큰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더욱이 그의 연대기에는 스트랄준트 전투, 마그데부르크 파괴, 뤼첸 전투, 뇌르틀링겐 전투, 아우크스부르크의 고난, 프라하조약, 프랑스군의 진군, 베스트팔렌조약 등, 30년전쟁의 결정적 사건들이 놀랄 만큼 정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엄청난 지적 성취야말로 신분을 넘어 자신을 주장하는 그의 개인일 것이다. 그는 사회적인 '쓰인 자아'와 그것으로 채 수렴되지 않는 신분을 벗어나는 '쓰는 자아'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드러냈던 것이다."(103-4)
"페터 하겐도르프(?~1679)는 방아쟁이 수공업자 출신의 용병 병사다. 20년 넘게 전장을 누비며 폭력을 행사한 하겐도르프의 경험은 어떻게 감정으로 표현되었을까? 놀랍게도 176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연대기 전체에 감정 명사는 딱 한 번 쓰였다. 1636년 여름 벨기에 지역에서 부대원 11명과 함께 숲에서 양을 약탈할 때였다. 숲에서 2천 마리의 양이 쏟아져 나오자, 그는 양 떼 때문에 〈공포감에 숨이 멎을 듯 질려서〉 도망쳤다. 눈을 씻고 찾아보면 감정을 지시하는 일반 명사가 있기는 하다. 1631년 5월 말, 마그데부르크 파괴를 지켜보며 그는 〈그 도시가 그토록 경악스럽게 불타는 것이 나를 심장으로부터 아프게leit 했다〉고 적었다. 1642년 5월에 그는 프랑크푸르트 마인강 다리 아래 설치된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을 〈보는 것이 하나의 쾌감lust〉이라고 적었다. 하겐도르프는 연대기에 자신을 감정적 자아로 내세우지 않으려 했다. 또한 인용문 속의 공포감, 심장의 아픔, 쾌감은 모두 감정의 신체성을 보여준다."(111)
"그의 연대기는 사건에 대한 건조한 진술로 일관하지만, 지역과 마을과 도시에 대한 서술은 놀랄 만큼 서정적이다. 그가 그처럼 감정적인 인간이라면, 즉 쓰는 자아가 그토록 서정적이었다면 쓰인 자아는 왜 그렇게 무감동했을까? 다시 말해 그는 왜 자신을 그토록 무감동한 인간으로 내세웠을까? 이는 그가 군인의 직무를 인간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사무적인 업무로 내세우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력서인 연대기를 통하여 그의 문서 능력을 과시하고 더불어 자신의 직무 적합성을 자랑하려 한 것이 아닐까. 기실 연대기의 사실적인 내용 자체가 행정적이고 관료제적이다. 그 결과로서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무감동한 하겐도르프가 표현되었던 것이니, 직무와 사적 감정을 구분하는 인간이 그려진 것이다. 그런 인간은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문명화 과정의 결과로 출현했다고 강조한 '궁정인courtier'이다. 하겐도르프라는 용병 병사에게서 궁정인이 식별되다니 이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114, 118-20)
"폴크마르 하페(1587~1659)는 슈바르츠부르크 존더하우젠 백작령에서 봉급을 받는 진정한 의미의 공무원 관리였다." "하페의 연대기에서 감정은 상황으로부터 독립하지는 않았지만 규범으로부터는 완연히 독립했다. 이것은 하페가 헤베를레 및 하겐도르프와 다른 점이고, 또한 감정사의 결정적 장면이다. 특히 공포Furcht 감정이 그랬다. 하겐도르프는 그 단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았고, 헤베를레도 극히 꺼렸다. 필자는 하페의 연대기에서 그 단어의 출현 빈도를 세다가 포기했다. 문자 그대로 셀 수 없이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공포 감정이 당시에도 여전히 신적인 공포가 아니면 예종적 공포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페는 공포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 그가 순애적 공포와 예종적 공포의 구분을 몰랐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하페의 연대기에서 공포는 부정적인 대상에 한정되지 않았다. 하페는 병사들과 전쟁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된 모든 상황에 대하여 그 단어를 사용했다."(121, 129-30)
"유의할 점은 하페가 (절규문이자 통곡문인 자신의) 그토록 감정적인 기록을 〈튀링겐 연대기〉로 칭했다는 사실이다. 사적인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한 기록을 공적인 연대기로 간주한 것이다. 하페 역시 자신의 연대기가 식자층에게 읽히리라 예상했고 또 실제로 읽혔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하페는 공공성을 의식한 연대기에 자신의 감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인데, 이는 근대 초의 감정 레짐과 완전히 어긋난다. 근대 초에 인간은 공적인 기록에서는 감정을 최소화하고 사적인 편지 등에서 상대적으로 다소 자유롭게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다. 이제 바뀐 것이다. 대단히 자유로운 감정 표현이 공적 문서에 데뷔한 것이다. 기존의 감정 레짐이 무력화된 것이다. 이 역시 감정사의 결정적 장면이다. 1670년대에 이르면 감정이 특히 프랑스에서 출간된 소설과 인간학 서술에서 독립적 가치로 설파되기 시작하는데, 하페의 연대기는 그 전조가 30년전쟁의 와중에 출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133-4)
3장. 경건주의 목사들의 형제애와 분노
"경건주의는 독립 교파가 아니었다. 17세기 전반기 퓨리턴 대부분이 잉글랜드 국교회 내부에 머물면서 더욱 확실한 칼뱅주의를 관철하려 했듯이, 독일 경건주의자들은 대부분 루터파 교회 내부에 머물면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경건한 열망》을 저술한 슈페너는 교리를 문제 삼기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교회의 상태를 비판했다." "《경건한 열망》에서 슈페너는 교회 현실에 대한 진단을 세속 권력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는데, 이때 그가 적시한 문제는 〈궁정 생활〉이 관리, 일반민, 성직자들을 물들인다는 점이었다. 궁정 생활이란 빠르면 14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하여 흔히 '르네상스 궁정'으로 일컬어지던 절대주의 제후의 궁정을 뜻했고, 그 구체적인 의미는 세련된 '외적' 매너였다." "새로이 부각된 이상형은 '진정성'을 구비한 '신사'였다. 슈페너가 궁정 생활을 〈외적인 허영〉으로 선언하면서 그 반대 항으로 〈진정성〉을 제시한 것은 정확히 시대를 반영한다."(150-1, 158)
"또한 결정적인 것은, 슈페너에게 내적인 인간은 곧 감정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 그리하여 인간의 내면이란 곧 감정이었다는 점이다. 슈페너는 자신을 지극히 감정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루터 역시 격정적인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깨우침이 로마서 1장 17절(〈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했다. 그와 달리 슈페너는 신의 은총을 〈황홀하게〉 경험했다고 썼다. 신 앞에서 의로워진 루터와 황홀경 속에서 신을 만나는 슈페너의 차이가 경건주의의 본질을 말해준다. 경건주의 신자란 신을 감정적으로 확인하는 사람이다." "신앙이란 곧 사랑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말은 〈악마의 유혹〉이다. 그리고 사랑은 실천으로, 즉 선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선행이 없다면 중생도 없다. 또한 그래서 중생한 사람들이 갖는 감정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도덕감정이다! 경건주의는 도덕감정에 입각한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종교운동이었던 것이다."(158-61)
# 중생重生 : 성경을 통해 신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지점인 의인화義人化justification를 거쳐 거듭난 사람을 뜻한다.
"30년전쟁은 감정사적 격변을 일으켰다. 전쟁이 감정을 기존의 도덕규범으로부터 분리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감정 레짐이 유효성을 상실하고, 감정이 약동하게 된 것이다. 그 맥락에서 경건주의가 중생을 신을 만나는 황홀한 감정 체험으로 규정한 것은 자유로워진 그 감정에 호응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감정은 얼마나 위험한가. 그 감정은 사회적 제약을 모조리 무시할 수도 있다. 슈페너와 프랑케의 인용문을 보면 격정을 〈육체적인〉, 〈사적인〉, 〈자기 자신도 끌 수 없는〉, 〈무절제한〉 등으로 정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된 감정을 부도덕으로 직행하는 통행로로 바라본 것이다. 따라서 경건주의가 제시할 새로운 감정 레짐은 약동하는 동시에 절제된 감정이어야 했다. 그 내용은 부드러운 〈온유함〉이다. 그리고 그 신학적 내용은 〈절제의 영〉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감정 레짐의 내용은 형제애이고, 그 표현은 절제이며, '다정함'이다. 경건주의는 해방된 감정을 종교화, 재규범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162-3)
"계몽주의 목사 필립 마테우스 한에게는 지병이 있었다. 바로 멜랑콜리였다. 그는 언제나 멜랑콜리 때문에 일을 하지 못했다고 썼다. 육체를 거추장스러워 한 것이다." "작가인 카를 필립 모리츠는 1783년부터 1793년까지 《경험영혼론 저널》을 발간했고, 그 저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당대까지 유장하게 지속되어온 영혼론, 즉 인간의 내면을 인간의 정신·신체적 기능들의 교차로 설명하던 틀을 벗어나 내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그러한 방향 전환의 와중에 멜랑콜리가 신체적인 히포콘드리아 심기증과 정신적 우울로 분화된다. 그리하여 모리츠가 1785년부터 1790년까지 발표한 소설 《안톤 라이저, 심리소설》에서는 멜랑콜리가 신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사회적 억압의 결과로 제시된다. 이는 감정사의 또 하나의 결정적 장면이다. 17세기를 거치면서 규범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감정이 17세기 중반 이래 물리적 상황으로부터 분리되더니 18세기 말에는 신체와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187-9)
"목사 한의 일기는 18세기 중후반의 독일 부르주아가 1세기 전 슈페너의 부르주아와 무척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천적 사랑, 온유함, 다정함에 입각하여 공동체를 건설해야 하고 이를 위하여 분노를 억제해야 한다는 명제는 여전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목사 한은 분노를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주 터뜨렸다. 물론 그것은 한이 접촉하던 거의 모든 사람이 정당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보자면, 17세기 중반 이후 거세게 밀려든 사회적 이동성이 신분사회의 틀 내부에서 진행되다 보니 신분적 갈등과 계급적 갈등이 중첩되었고, 이는 전선을 복합화했으며, 그 귀결은 정당성 기준의 혼란이었다. 그 문제 상황은 갈수록 심화되어 18세기 중반에 이르자 슈페너으 온유함과 감성주의의 감성은 더 이상 답이 될 수 없었고, 그래서 한은 그리도 자주 분노를 격렬하게 표출했을 것이다." "다만 한은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한은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줄곧 반성했다."(201)
"한의 반성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아내와 사별하고 새 아내를 고르는 모습은 삶이 자신의 감정과 싸우고 반성하는 과정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는 새 아내가 자신의 〈제자〉가 될 수 있어서라고 변명했지만, 실상 그 선택은 육체적 감정에 대한 항복이었다." "미국 역사가 윌리엄 레디는 18~19세기 프랑스 감정 레짐에 대한 연구에서 카페, 독서회, 살롱, 프리메이슨 등의 부르주아 사회성들을 궁정문화의 외적 매너와 감정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감정의 피란처〉로 정했다." "그러나 그 피란처는 실상 숨 막힐 정도로 강력하고 위압적인 감정 통제 장치였다. 그것들은 필시 강력한 감정 통제의 기제인 동시에 감성이라는 새로운 감정 레짐을 실천하는 장이자, 그 실패를 확인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패로 얼룩진 그 경건주의적 실천이 독일인들을 깊이 내면화시켰을 것이다. 그들은 가차없는 내적 감정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도달하기 힘든 감정 레짐을 추구하면서 근대를 만들었던 것이다."(202-3)
4장. 세계 기업 지멘스의 감정
"지멘스는 가족 중심 기업이었는데, 그 면모는 19세기 독일 기업사에서 예외적이기보다 전형적이었다. 가족 기업은 창업 자본의 조달은 물론 자본 확충에도, 기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도 유리했다. 이익 배당보다 기업 자본의 안정성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경우에도 소유는 언제나 가족 내에 머물렀다. 따라서 지분 위기가 초래되는 경우는 예외였다. 모두가 지멘스와 정확히 일치한다. 가족은 제3의 생산요소였던 것이다. 가족은 생존공동체이자 자본공동체이지만 감정공동체이기도 했다." "베르너 지멘스에게 가족과 기업은 일상에서도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창업한 뒤 줄곧 공장 1층에서 살았다. 유의할 점은 신뢰와 충성이 베르너가 아우들은 물론 아내에게도 요구한 감정이었고, 회사에서도 스스로 '노동'한 감정이었다는 데 있다. 아내와 동생들의 가부장이었던 그는 마이스터와 노동자들에게도 가부장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 가부장주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223-5, 232)
"신뢰는 18세기 초까지 거의 언제나 신과 결합되어 사용되었다. 믿음은 신에 대해서 갖는 것이지 인간에게 갖는 것이 아닌 터였다." "신뢰는 감성주의를 거치면서 세속화되는 동시에 쾌감valence과 강도强度를 갖춘다. 19세기 전반기에 출간된 사전들은 신뢰란 '타인이 좋은 것을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하는 감정으로서, 그 사람은 그럴 힘과 의지를 보유하고 있는 동시에 하등의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을 만큼 우리를 휘어잡으며, 그 기대가 우리의 삶에 행복을 준다'고 풀이했다." "충성은 19세기 내내 거의 언제나 신뢰와 함께 사용되었고, 두 단어는 교환 가능했다. 충성은 18세기 감성주의에서 신뢰와 늘 함께 쓰이면서 개인의 의무로 내면화되는 동시에 쾌감과 강도를 갖추게 된다. 충성은 이때 신뢰만으로는 충분히 확보할 수 없는 것, 즉 미래적 확실성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신뢰와 충성은 그 자체로 노동자의 노동에 도덕적 차원을 부여하는 기제였고, 두 감정에 노동자를 동기화시키는 장치였다."(237-9)
"베르너의 회고록에서 부각되는 키워드는 세 개다. 첫째가 유용성이고, 둘째가 행동력이며, 셋째가 기쁨이다." "베르너는 유용성 개념을 삶의 근원적인 의미를 제시할 때 사용하면서 그것에 사업활동도 포함시킨 것인데, 유용성이란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 공리utility이다. 그것은 서양의 산업 부르주아가 자본주의와 산업활동에 부여하는 도덕적 의미 그 자체다. 물론 유용성은 감정이 아니다. 다만 베르너는 유용성이 '행동력'에 의해서만 창출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에게서 행동력은 감정과 분리 불가능했다." "회고록에서 기쁨이 일상적인 만족감으로 쓰인 경우는 다섯 번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30회의 기쁨 표현 중에서 25회가 미래의 비전, 지식의 증가, 사업, 노동, 실험, 발명, 연구, 혁명, 성채 방어, 케이블 설치, 케이블 부설에 따른 위험의 극복, 선행의 기억, 문명의 건설, 아들의 무난한 경영 상속 등을 서술할 때 사용되었다. 기쁨이 인간이 기획하고, 행동하고, 성과를 얻은 것과 결합되어 사용된 것이다."(241-2, 247-8)
"노동을 기쁨으로 정의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 아니다. 중세 기독교에서 노동은 징벌이었고, 종교개혁과 함께 신적인 소명이자 이웃사랑으로 변했으며, 독일 낭만주의 및 관념론과 함께 인간이 자신을 완성하는 윤리적 통로로 의미화되었다." "베르너의 편지를 보면, 노동은 성공에서 의미를 갖고, 성공은 기쁨을 주는데, 노동은 행동력의 소산이고, 행동력은 멜랑콜리를 극복하게 해준다. 한편에는 멜랑콜리가, 다른 한편에는 노동과 기쁨이 위치한다. 그리하여 신뢰와 충성 및 명예 외에 기본 감정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노동의 기쁨이었다. 흥미롭게도 멜랑콜리의 다른 표현으로서 1869년 미국 정신의학에서 고안된 신경쇠약이 1880년대 독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기까지 경제인이든 지식인이든 독일 부르주아들은 신경쇠약에 걸렸다며 너도 나도 의사를 찾아갔다. 바로 그 시기, 그러니까 1900년 무렵에 독일 산업세계와 학계에서 노동의 기쁨이 담론화된 것이다."(248, 251)
5장. 일상의 나치즘, 그래서 역사란 무엇인가
"무관심은 저항이 아니다. 그것은 지지하지 않는다는 의미조차 되지 못한다. 무덤덤함은 오히려 나치즘에 대한 독일인들의 태도가 지지와 반대로 이분법적으로 나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제는 나치가 그 뜨뜻미지근한 상태를 못 견뎌했다는 데 있었다. 나치는 독일인들의 삶을 문자 그대로 관통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끝도 없이 일상의 독일인들을 '동원'하려 했다. 1930년대 중반 나치당의 최하 말단 조직인 블록Blockwart이 20만 개, 나치 복지단체인 인민복지회의 블록 조직이 51만 개였다. 나치당 블록이 평균적으로 60~80개 가구를 책임졌으므로, 우리로 치면 아파트 한 동에 나치당 블록 대표가 한두 명, 노동전선 대표위원 두세 명, 인민복지회 위원이 서너 명 거주하고 있었던 것인데, 여기에 돌격대 대원 대여섯 명과 히틀러총소년단원 20~30명을 추가해야 한다." "1938년이면 독일인의 3분의 2가 어느 것이든 나치 기구 하나에는 속해야 했다."(270-1)
"나치에게는 모든 조직이 곧 도덕공동체였다. 이해관계의 조직이 아니었다. 따라서 나치즘을 해명하는 데서 도덕은 중요한 '설명' 요소이다. 그리고 나치 도덕공동체의 핵심에는 배제가 있었다." "전쟁 이전의 반유대주의가 없었다면 의당 홀로코스트도 없었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로 직결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배제와 학살은 같은 것이 아니다. 배제 없는 학살은 없지만, 학살 없는 배제는 많다. 문제는 배제가 학살로 귀결되는 경로를 밝히는 일이다. 게다가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배제에만 항의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수용소에 가둔 것에 대해서도 감히 항의하지 못했고, 개별 기업에서 나치의 간섭 덕분에 특혜를 얻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돌출하자 특혜의 범주 자체보다 해당 사람이 그 범주에 포함되어도 좋은지 다투었으며 또 그 특혜에 동승하고자 했다. 밀고는 이때 난무했다. 그 '부당한' 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그런 태도를 학살과 등치시킬 수는 없다."(274-5)
"유의할 것은 나치즘에 대한 지지 문제를 설명할 때 반드시 나치의 여론 독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원적 의사 형성 과정이 제거되자 인민의 여론도 나치즘에 부합하게 진행된 것이다." "자신은 〈진정한 독일 애국자〉이기에 나치에 반대한다고 선언한 사람들도 자신의 인종과 몸에 대하여 고민했다. 나치의 언어에 공명한 것이다. 간혹 그런 고민을 떨쳐낸 사람들은 공적 여론이 나치에게 독점되었던 탓에 자기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러자 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나치가 인민의 지지 여부를 묻고자 하면 일부의 일탈을 제외하고는 인민에게서 나치 자신의 모습만이 보인다." "그렇게 되면 '논리적으로' 현실은 자아의 확인에 불과하게 되고, 현실감각의 소실과 자기기만이 나타난다. 자신의 의지가 물리적인 객관적 한계에 부딪쳐 실현되지 않으면 의지력이 부족한 탓으로 여기게 마련이고, 의지의 실현은 미래로 이동한다. 그리하여 미래는 자기예언적 실천이 된다."(285-6)
"서부 독일 졸링겐의 김나지움 교사 아우구스트 퇴퍼빈은 언어학 박사를 취득한 지식인이자 독실한 개신교도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여다. 그는 고백교회 인근에서 발행되는 저널을 받아볼 만큼 나치에 비판적이었다." "1939년 12월과 1940년 5월에 퇴퍼빈은 일기에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학살 소문〉을 기록한다. 1942년 5월 그는 급기야 벨라루스에서 자신이 목격한 유대인학살을 기록한다." "진정 놀랍게도 그후 무려 17개월 동안 퇴퍼빈은 유대인학살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1943년 11월 중순 그는 돌연히 쓴다. 〈우리는 비단 우리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유대인만 파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유대 민족 그 자체를 절멸하려 한다.〉 그가 17개월 만에 갑자기 양심의 고통을 느낀 것이다. 이유는 우연히 만난 어느 병사의 말 때문이었다." "영국 역사가 스타가르트는 퇴퍼빈이 〈자신이 목격한 것을 보편적 맥락에 위치시키기 위해서는 논의의 자극이 있어야 했던 것 같다〉고 분석한다."(294-6)
"다시 말해서 독재 권력이 금지한 주제에 관한 한, 그에 대한 사적인 소통이 멈추면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이 정립되지 못함은 물론 도덕적 자아의 점검 작업도 멈추었던 것이고, 양심은 그 문제가 소통에 의하여 다시 주제화되어야만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1943년 9월 초 우크라이나에서 퇴퍼빈은 포로수용소의 독일군 경비병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면서까지 소련군 포로 630명을 탈출시켰다. 그런 그가 1944년 여름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전투에서 대패한 독일군 병사들을 보면서 적었다. 〈병사들은 전투에 지치고 의심으로 가득하지만 여전히 복종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진정한 명예의 한 페이지다.〉 그가 히틀러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최종적으로 버린 시점은 무려 1945년 3월이었다. 이는 나치즘에 대한 가의 입장에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의미의 층위가 얽혀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 복합성을 무시하고 나치 범죄를 '학살적 반유대주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다."(296-7)
6장. 나치 독일의 '노동의 기쁨'
"1925년에 출간된 《노동학. 기업 노동의 토대, 조건, 목표》의 기고자들은 대부분 테일러리즘을 비판했다. 노동자를 생산 도구로만 간주하여 인간으로서의 노동자를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기고자들은 노동을 '문화'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가치로서의 노동이 산업노동 현장에서 실제로 경험되고, 그리하여 노동의 기쁨이 생산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실천적 질문에 가장 가까이 답한 사람은 기계공학자인 편집자 리델이었다. 그는 인간과 기계의 관계부터 논한다. 기계는 고유한 법칙적 메커니즘에 따라 작동한다. 그러나 인간이 기계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작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기계의 낯선 운동에 〈감정이입〉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계 내부에서 작용하는 내적 역동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계의 운동이 노동자 자신의 일부로 경험될 수 있다. 요컨대 기계 작동에 대한 인지와 숙달과 그 과정에서 발동되는 감정적 동일시를 통하여 기계는 인간이 구축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309-11)
"1920년대 중반에 노동에 투여된 의미 성분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노동은 가치의 경험이자 창출이고, 그래서 문화활동이다. 둘째, 노동하는 인간은 감각 및 지각의 복합체가 아니라 영혼까지 포괄하는 총체적인 심신 복합체이다. 셋째, 기계는 인간의 세계 안으로 통합되어 인간화될 수 있다. 넷째, 노동하는 인간은 노동 과정, 그리고 노동 및 생활환경에 의하여 구성된다. 즉, 노동자는 조형적이다. 다섯째, 그 전체 과정을 통하여 노동자는 고유한 인격이되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이 다섯 가지 의미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누빔점'이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자이고, 그 의미 작동의 매개이자 결과물이 활동 감정, 가치감정, 생 감정, 노동의 기쁨이며, 그 감정의 내용은 〈존엄한 자아〉이다. 테일러리즘이 주장한 노동의 객관화가 노동의 주관화와 인격화로 전환된 것이다. 요컨데 비너와 리델은 노동의 기쁨을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과 결합시킴으로써 노동자를 동기화하고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312-3)
"1925년, 아른홀트는 '독일 기술노동교육연구소(딘타Dinta)' 소장에 임명됐다. 딘타는 나치 집권 이후 노동전선에 편입되고, 아른홀트는 노동전선 직업교육국 국장으로 변신한다. 따라서 아른홀트가 생산한 노동과학 언설은 바이마르공화국으로부터 나치즘으로 넘어가는 다리라고 할 것이다." "아른홀트의 교육시설에서는 인격 총체로서의 노동자와 가치로서의 노동이 삭제되었다. 따라서 아른홀트에게 자부심은 존엄한 자아와 그 활동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더 많이 생산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능히 감당하는 신체적 힘에서 발생한다. 갓 입소한 수련생들은 턱걸이 한 번을 제대로 못하지만, 교육장의 수련생들은 권투, 체조, 수영, 육상, 축구를 순서에 따라 실행한다. 아른홀트에게 스포츠는 매우 중요했다. 예컨대 체조는 〈인간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힘을 살아나게 하고, 끝내 자기를 관철하려는 용기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아울러 스포츠는 궁극적으로 경쟁심, 즉 상승 욕망을 자극하기 위해서도 필요했다."(314-5)
"1930년이 되자 아른홀트는 5년 전과 꽤나 달라져 있었다. 노동 감정을 강조하는 것은 같았다. 딘타의 목적은 공장을 〈창조의 기쁨〉의 샘으로 만드는 데 있고, 〈우리 노동자들은 지극히 섬세한 감수성〉을 보유하고 있기에 부정의한 대우에 가장 분노하고, 정상에 〈진정한 사나이〉가 서 있는 기업을 〈가장 사랑〉한다. 아른홀트의 강연은 노동자 인격이 아니라 〈지도자 인격〉에 맞춰져 있었다." "아른홀트는 나치당도 공유하고 있었고, 그 자신도 한때 몸담았던 자유군단의 지도자와 추종자 개념을 가져다가 자본주의 정신으로 변조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하였다. 자유군단은 전투 집단이자 정치 집단이었다. 그 조직은 사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이념 집단이자 행동 집단이었다. 그들의 이념은 민족공동체로서의 독일의 도덕적 혁신이었고, 그들의 행동은 그 이념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운동은 독립적 개인의 집합이 아니었다. 오히려 개인은 운동 속에서 신인간으로 재탄생해야 했다."(316, 320)
"1936년의 아른홀트의 언설은 1925년은 물론 1930년과도 사뭇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의미상의 듣는 이가 노동자가 아니라 기업가라는 단순하지만 결정적인 사실이다. 바이마르 시절의 그는 기업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노동자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이제 그는 노동자의 태도를 강조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기업가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집중한다." "가장 큰 차이는 언설의 중심에 1925년의 노동자의 상승 욕망도, 1930년의 지도자 인격도 아닌, 〈독일인의 유類적 특징〉이기도 한, 〈창조하는 인간〉이 놓였다는 점이다." "아른홀트의 생각이 변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순진하다. 그가 노동담론 그래프를 왼쪽으로 이동시킨 것은 나치 노동전선의 자리에서 기업가들에게 발언했기 때문이었다. 나치는 자본과 노동의 갈등을 민족공동체 속에서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치는 기업을 민족공동체라는 정치 이념으로 치환시킴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324-6)
"감정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나치 노동법에서 지금까지 그 어느 역사가도 주목하지 않은 결정적인 지점이 가시화된다. 나치 노동법은 감정법이다. 법조문이 신뢰, 충성, 배려, 명예라는 감정들로 누벼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동법을 담당하는 기관들의 명칭이 '신뢰위원회' '노동신탁위원' '사회적 명예법원'이다." "우리가 베르너 폰 지멘스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은, 신뢰, 충성, 명예가 19세기 부르주아의 대표적인 사회적 도덕감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치 노동법은 그 감정들을 자유군단 '운동'의 지도자, 추종자, 공동체의 틀 속에 배치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성립되는 기업공동체는 상호적인 동시에 위계적이었다. 기업 지도자들에게는 배려의 의무가, 추종자에게는 충성의 의무가 할당되었으나, 그 위계적 성격은 기업 지도자가 추종자의 명예를 존중해야 한다는 또 다른 의무에 의해 약화되었고, 당시 노동법원은 기업 지도자에게도 추종자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부과했다."(328-9)
"1936년의 아른홀트는 열광의 이면을 드러낸다. 그가 제시한 바람직한 인간은 타인의 감정적 반응을 예상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차분한 인간이다." "그가 노동을 의미화하는 누빔점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25년에는 사회적 상승 욕망이, 1930년에는 지도자 인격이, 1936년에는 창조하는 인간이, 1937~40년에는 성과주의적 기계-인간 합생론이 의미화의 축이었다. 아른홀트는 대단한 사상가가 아니었음은 물론 고유하게 사유하는 기술인도 아니었다.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1925년에는 우익 기업가 진영의 입장을 대변했고, 1930년에는 운동 국면의 나치즘에 영합했으며, 1936년에는 노동전선의 초기 입장을, 1937년 이후에는 전쟁 준비에 돌입한 나치즘을 대변했다. 아른홀트는 해당 국면의 나치즘을 드러낸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기에 도착한 그의 감정 레짐, 즉 성과에 진력하되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관리하는 인간이 그 시기 나치즘의 감정 레짐이었다고 할 것이다."(338, 343)
7장. 나치 독일의 '독서의 기쁨'
"나치가 금서목록을 체계화하기 시작한 때는 1935년이다. 그 시점에 괴벨스가 금서에 관해서도 독점적 권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제국문필국은 1938년에서야 비교적 정리된 목록을 완성했는데, 그때 책 4,175종 저자 565명이 블랙리스크에 올랐다. 대부분 유대인, 공산당, 사민당, 자유주의 망명 지식인, 모더니즘 저자들이었다. 기묘하게도 문필국은 목록을 사정 당국들과 공유했을 뿐 출판사와 서점에게는 〈엄격히 비밀〉에 부쳤다. 더욱이 문필국은 사전검열을 거부했다. 저자와 출판사와 서점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렇게 상황이 모호하면 작가와 출판사는 짐작만으로 쓰고 출간해야 하고, 그 현실적 결과는 자기 검열이다." "여기에 더해 수준 높은 작가들 다수가 망명을 떠나거나 침묵하거나 혹은 현명한 독자들만 알아볼 수 있는 글을 썼기에, 새로 발간되는 도서는 압도적으로 2급 작가들의 책이었다. 나치의 문학정책은 문학시장을 파괴하지는 않고 왜곡했으나 독일 문학의 수준을 추락시켰던 것이다."(379-80)
"한스 쉐퍼를 비롯한 역사가들은 나치의 영화, 연극, 소설 등에서 오락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이유가 인민 동원이 정신적인 휴식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괴벨스의 원칙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괴벨스의 정책이 나치 독일인들을 '사생활로 후퇴시킨' 것이다." "슈푀를의 코미디 소설에 대한 괴벨스의 촌평은 괴벨스 문화정책이 인민의 정신적 휴식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해석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은 슈푀를의 소설이 나치 지배권력의 일상적 작동을 방어하고 변명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치즘 하에서 독서는 고도로 정치화된 사적인 기쁨이었다〉는 라빈바흐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반면 슈푀를의 소설에는 라빈바흐가 향토소설과 달리 인종주의가 등장하지 않는다. 슈푀를의 소설이 정치적으로 형상화한 것은 인종주의와 그 속에 함축된 〈용기와 의지와 독립성과 주인적인 가치〉가 아니라, 도덕과 물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나치의 지배 기술에 순응해가는 일상의 독일인들이다."(392-3)
"슈푀를의 소설 《가스검침관》에서 두드러지는 감정은 노동 담론과 마찬가지로 열광이 아니라 차분함이다. 주인공을 빼고는 아무도 흥분하지 않는다. 주인공 역시 태평스러움을 가장하려 한다." "뻔뻔스러움이든 차분함이든 내적인 격정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똑같지만, 차분함이 적절한 또 다른 이유는 소설에 그 감정의 이면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포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슈푀를이 뜻밖에도 1930년대 나치 독일사회의 본색을 제대로 형상화했음을 볼 수 있다. 나치 독일은 개별화된 사회였다. 그리고 개별화되는 와중에 노동자들은 회사에 틈입한 온갖 나치 기관원들에게 줄을 서야 했다." "개별화는 자본에 대하여 개인을 약화시키고, 약화된 개인은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그 개인은 공포를 드러내지 않고 차분해야 한다. 순환적이다. 차분함은 공포로 이어지면서 공포를 강화하고, 그 공포를 또다시 차분함 뒤에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394, 397-9)
"공포가 지배 기술에 속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나치가 원하는 독일인은 공포에 찌든 인간이 아니었다. 공포는 인간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가스검침관은 나치가 원하던 이상적인 인간이다. 그는 야심에 괴로워하는 도덕적인 인간이고, 일확천금을 했지만 가스 검침이라는 자신의 일상 업무에 소홀함이 없는 성실한 인간이며, 국가에게 공포를 느껴 나치 독재의 작동을 도와주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엄성을 의식하고 주장하는 인간이다. 하기야 합리화에 의해 개별화된 독일인들이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고도의 성과를 발휘하도록 하는 필수적인 전제가 바로 그 자기주도성이었다. 그리고 가스검침관에게 쏟아진 돈다발은 그런 인간에게 미구에 닥칠 나치 소비 천국을 예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괴벨스가 그 소설을 마땅히 영화화해야 한다고 평한 것은 지당하다. 나치 치하 독일인들이 정신의 휴식과 재충전을 위하여 읽던 소설은 나치 정치 이념을 유쾌하게 형상화한 지극히 이데올로기적인 수단이었다."(400-2)
"유대인과 관련된 나치의 텍스트는 강도만 다를 뿐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나치당 기관지 《민족의 파수꾼》은 1942년 12월 11일의 머리기사에서 미국의 유대인들이 영국에 밀사를 파견하여 〈50만 명의 젊은 독일인들을 살해할 사디즘의 잔치〉를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그 시점은 홀로코스트가 개시되고 최소 1년 이상이 지난 때다. 1943년 10월 13일 머리기사는 연합군이 전후에 〈독일인 수백만 명을 소련에 강제노동자로 보내서 절멸시키려고 한다〉고 외쳤고, 같은 달 21일에는 강제노동의 대상을 독일의 모든 남자로 확대했다. 그 시점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정책이 단순 학살로부터 한발 물러나 '노동을 통한 절멸'로 되돌아간 때였다. 1944년 9월 26일에는 미국의 재무장관 모겐소가 〈독일인 4천만명을 퀘벡에서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그 시점은 나치가 유대인을 동유럽 학살수용소에 끌어내어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는 '죽음의 행진'으로 내몬 시점이었다."(405-6)
"1943년 봄 이후 나치는 민간인 지역까지 타격하던 영국군과 미군의 폭격을 〈유대인의 테러공격〉으로 표상했다. 그것은 민간인 지역의 폭격과 유대인을 병렬시킴으로써 폭격의 부도덕성을 이중으로 부각시키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폭격의 주체가 연합군 뒤에 숨은 유대인이고, 그 유대인이 〈혐오스러운 세균〉이라면, 공포는 더욱 용이하게 분노로 전환되지 않겠는가. 또한 연합군의 배후가 유대인일 뿐이라면, 날이 갈수록 폭격이 강해지고 독일군이 퇴각하고 있다고 하여도, 전쟁의 그 본질에 대하여 연합국을 설득하면 되지 않겠는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버텨내기만 하면, 연합군에 대한 계몽이 성공하여 결국은 연합군의 공세가 멈추지 않겠는가. 《민족의 파수꾼》이 연합국 〈국민들〉 사이에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고 계속 선전한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실상 나치 독일이 거울에서 자기 모습을 보면서 바깥세상을 판단하고 그렇게 자기기만에 빠지고 말았다는 예증이기도 하다."(408-9)
"폭격으로 사망한 독일인은 약 42만 명이다. 일부 독일인들은 폭겨과 고통을 독일의 범죄 탓으로 돌리면서도, 그 고통을 극대화하여 스스로를 희생자로 내세우기도 했다. 종전 이후 서독에 구축되는 피해자 정체성의 전조가 나타난 것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1945년 초에도 독일인들이 '공포의 운명공동체' 속에서 여전히 나치 국가에 동의하고 있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 설명은 부분적으로만 타당한 것 같다. 재난사회학을 참조하면 사태를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 연구들은 재난에 대한 대응에서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재난이 초래한 위험을 경감시키는 가장 중요한 힘은 지역공동체의 노력과 주민들의 참여이고, 그다음이 국가의 지원이다. 그 국가가 어떤 국가인지는 부차적이다." "동시에 패전에 직면한 재난사회의 삶은 우연적이었다. 삶이 우연적일수록 사회적 지평은 좁아지고, 사람들은 가장 확실한 것에 집중하게 마련이다."(410-2)
"독일인들은 더욱더 가족에게 매달렸고, 빵 한 덩어리라도 더 얻기 위하여 나치 당국에 호소하는 동시에 이웃을 무자격자로 밀고했다." "재난사회의 작동은 폭력의 지역화로도 나타났다. 1944년 가을 안보 문제가 각 지역 게슈타포 분소로 넘어오자 지역의 친위경찰은 외국인 강제노동자들을 국가의 적으로 간주하고 일말의 흐트러짐도 처형으로 처벌했다. 그리하여 연합군의 루르 지역 포위망이 좁혀지던 1945년 3월 그 지역 노동수용소 곳곳에서 수십 명을 단번에 총살하는 마구잡이 학살이 벌어졌다. 강제노동자들이 학살을 피해 탈출하여 도심으로 들어오거나 친위경찰에 의해 길거리로 내몰리자, 독일인들은 문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한 그들을 보았다. 그 현실이 마치 처음이기라도 한 양, 독일인들은 처벌 공포와 죄의식에 몸을 떨었다. 사회적 지평의 수축, 처벌 공포, 죄의식, 상호 불신, 나치에 대한 부인, 망각에의 의지, 정상성에의 강박, 가족에 대한 애착, 독일인들은 그 모든 것을 안고 승전국 군대를 맞았다."(412-3)
8장. 서독인들의 공포와 새로운 감정 레짐
"지금 돌아보면, 독일인들을 처벌 혹은 재교육시키려던 점령군의 탈나치화 작업은 솜방망이였고 실효성도 없었다. 유럽 어느 나라에도 과거청산은 없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인들은 그 미래를 몰랐다. 초기에 그 작업은 무서웠다." "모니카 블랙은 전쟁과 포스트워 시기가 독일인들에게 〈일상적 삶에 대한 일상적인 지식〉에 〈인간학적 쇼크-인간 그 자체의 쇼크〉를 일으켰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일상적 〈현실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의 당연한 구분〉이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존재, 〈걸어 다니는 귀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점은 세계가 그들에게 알 수 없는 것,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그 세계는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가 개시했던 필름누아르의 세계, 흑백의 교차로 반짝이는 표면 밑에 무시무시한 어떤 것이 버티고 있는 세계와 닮았다고, 그리하여 독일인들의 고단하지만 범속한 일상 아래 전쟁과 살인의 기억이 버티고 있었다고 강조한다."(420-2)
"전후 독일인들에게서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미군과 아렌트의 해석은 정확하지 않았을지언정, 그릇된 것 같지는 않다. 공포를 감추려는 독일인들의 표면이 무감동 외에 달리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1930년대 중후반 이래 독일의 노동 담론과 코미디 소설에서 확인했던 감정문화이다. 내용을 떠나 형식만 보자면, 공포와 차분함의 결합은 바로 나치 감정 레짐이었다. 놀랍게도 그 감정 레짐이 종전 직후의 독일에서 지속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감정 레짐이 놓인 역사적 맥락은 전혀 달랐고, 따라서 감정 실천에 의해 느껴지는 감정 경험도 아주 달랐다. 전쟁 이전에는 성과주의 시스템이 발휘하는 압력이 문제였다면, 폭격 이후에는 전쟁의 상처와 전쟁범죄가 문제였다. 앞선 감정 경험이 사회적 상승 의지의 표현이라면, 뒤의 경험은 벌거벗은 생존과 고통스런 자아 정립에 병행한 처벌 공포와 죄책감, 그리고 추후 드러나듯 자기변명이었다."(429)
"비상사태법은 국가가 외부 공격의 목전에 있거나 실제로 공격을 받는 외적인 비상사태와 자유 민주적인 기본 질서가 위협받는 내적인 비상사태가 닥치면, 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와 파업권을 제한하고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를 약화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60년에 그 내용이 알려지자 사민당과 노동조합,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거칠게 비판에 나섰다."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독일의 과거, 즉 히틀러국가가 목전에 있다고 말했다." "1961년에 위르겐 하버마스는 〈전체주의 정당〉이 〈탈정치화의 베일〉로 은폐되어 있지만, 곧 〈무관심한 대중〉이 〈강력한 권위적 국가의 지휘〉에 동원될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들은 아래로부터의 전체주의를 우려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경고에서 독일이 얼마나 히틀러국가의 망령에 쫓기고 있었는지 드러나거니와,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독일의 일급 지식인들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거리낌 없이 표현했다는 사실이다."(436-8)
"홀로코스트 재판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독일의 범죄를 본격적으로 대면하도록 유도하지 못했다. 판사들은 친위경찰은 물론 증인으로 나선 생존 유대인들에 대해서도 '초연한 거리'를 유지했다.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그때의 홀로코스트 재판은 형법에 따라 개개인의 범죄 행위와 〈저열한〉 동기를 확인하려 했을 뿐 범죄의 체제적 성격을 심문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타가 개별적인 일탈로 의미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이 있었다. 홀로코스트 재판은 '평범한 학살자' 유형과 '사디스트 학살자' 유형 두 가지를 부각시켰다. 그 두 가지 유형은 교차되기도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고문으로 악명 높던 인물이 서독에서는 흠결 없는 시민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무섭게 섬뜩한 것이었다." "프랑크 비스는 이 지점에서 절묘해진다. 홀로코스트 재판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학살에 대한 '나의 책임'을 주제화하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학살자 유형은 비판적 시선을 인간 주체의 내면으로 이동시켰다는 것이다."(440)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한 생활·주거 공동체의 최소한의 공통점은, 그들이 그곳에서 개별적인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적·감정적·물질적 결속을 얻고, 출신 성분과 무관한 평등한 사회적 접촉을 실천하며, 그럼으로써 자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모두 사회주의자였던 것도 아니다. 사민당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관성과 공동체를 결합시킬 방도를 찾고 있었고, 정신분석학에 침윤되지 않은 사람조차 사회경제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내적인 해방감과 진실된 감정 및 새로운 감정적 교류를, 요컨대 새로운 감정적 사회성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감정은 신좌파의 이론과 실천 모두의 중핵이었다. 디터 둠의 《자본주의 소의 공포》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던 것처럼, 그들은 자본주의의 결정적 특징이 부정적 감정의 생산이라고 믿었고, 유아기의 억압에서 벗어나면 진실된 감정을 회복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1970년대 신좌파는 감정을 인간의 본질로 간주했던 것이다."(450-1)
"그 대안문화 전체에서 지배적인 것은 마르쿠제의 표현으로는 〈새로운 감수성〉이요, 라이하르트의 조사로는 〈따스함〉이었다. 조심할 점은 따스함이 자연적인 감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신좌파 스스로가 이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아에 대한 고통스러운 정신분석적 작업을 통과해야만 따스함이 발현된다고 보았다. 문제는 생활·주거 공동체의 현실이 따스함을 생산하기는 커녕 그들이 적대시하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생산해냈다는 사실이다! 코뮌1은 평등한 논의의 장이 되고자 열심히 토론했다. 그러나 토론이 평등할 수는 없었다. 승자가 나타나게 마련이었다. 대안 유치원에서도 '무지한 스승'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안 유치원의 현실은 권위와 명령이었다." "공동체적 감정이 지속되지도 못했다. 내용과 형식이 모두 진부해져간 것이다. 결국 혁명적 주체의 생산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공동체일수록 그들이 극복하고자 했던 거리 두기, 차가움, 고립감이 나타났다."(452-3)
에필로그
"500년이 넘는 그 오랜 시기의 대표적인 감정 담론들을 분석하면서 필자가 도달한 결론은 '감정은 도덕공동체 구축의 핵심 기제'라는 것이다. 감정은 나만의 비밀에 속하기에 도덕공동체와 연결된다는 단언이 기이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언제나 사회와, 그리고 사회를 견지하는 도덕과 연결된다. 이는 감정이 충동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반사회적이기에 도덕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제압해야 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정반대로 감정은 그 자체로 언제나 도덕감정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늘 부도덕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조차 감정의 도덕성을 전제한다." "우리가 도덕감정을 통하여 공동체를 구축하려는 노력을 살펴보면서 얻은 결론의 결론은, 감정에 역사가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도덕적인 감정공동체를 구축한다는 목표는 언제나 같았으나, 감정에 대한 평가, 문제적인 대표 감정, 부정적 감정을 해결하는 방식, 그 모두에 깔려 있는 인간학적 감정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459, 467)
"감정은 원체 포괄적인 동시에 모호하기에 존재의 불확실성과 잘 어울린다. 감정은 합리적 인지에 선행하는 인지다. 공포에 사로잡힌 인간과 낙관적 인간은 같은 대상을 완전히 다르게 인지한다. 그리고 그 인지는 때로는 합리적 판단을 무력화시킨다. 따라서 공감이 요청된다고 말해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공감이야말로 자아에 몰두하는 개인을 소통하는 사회적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감에의 호소가 개별화되고 불확실해진 자아에게 잘 닿지 않는다는 데 있다. 따라서 감정이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말해지면 말해질수록 불확실한 개인은 공감보다는 자아의 내적 격동을 정당화하려 든다. 공감이 아니라 혐오가 작렬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감정의 역사는 현재 나의 감정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해준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게 해준다. 이를 통해 나의 사회성을 깨닫고 나의 자아실현을 재차 성찰하게 해준다. 자아는 실현하는 것이되, 성찰되는 것이다."(4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