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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묵자를 읽다 - 생활 밀착형 서민 철학자를 이해하는 법 ㅣ 유유 동양고전강의 7
양자오 지음, 류방승 옮김 / 유유 / 2018년 9월
평점 :
1 시류에 휩쓸리지 않은 독창적인 사상가
『사기』에서 “묵적墨翟은 송宋의 대부大夫”라고 말했지만 동주 시기의 문헌 어디에서도 묵적이 귀족 신분의 대부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고, 송나라 사람인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춘추 시대에 이미 국적과 신분이 계속 바뀌는 평민이 등장했습니다. 경대부는 봉지封地와 관직이 있어 국적이 명확했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그의 제자들만 봐도 이 나라의 출신이면서 저 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예가 있지요. 귀족 신분이 아닌 평민은 세상이 어지러운 시기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자유롭게 옮겨 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신분의 제약이 크지 않았고 원래의 국적을 유지하거나 고집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사료에서 묵자의 출신을 확인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귀족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귀족 신분 없이 난리 속에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 이를 통해 위로 올라가 각국의 통치 계급을 찾아갑니다. 그는 노, 송, 제, 초, 위衛 등 여러 나라를 갔지만 어떤 나라가 그의 고국이라고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16)
서주西周가 흥성했던 시기를 숭상한 공자는 주나라 문화에 함축된 정신을 발굴하는 데 힘썼고, 그러한 인문 가치를 회복해 난세를 구하고 싶어 했습니다. 반면 봉건 귀족 계급에 단 한 번도 속해 본 적이 없었던 묵자는 봉건 질서 바깥의 시선으로 봉건 질서에 내재한 결점이 바로 난리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봉건 질서는 혈연관계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결정되는 ‘친친’親親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집니다. 묵자는 이 점을 겨냥해 그와 철저하게 반대되는 ‘겸애’를 들고 나왔습니다. 묵자의 겸애는 모든 사람이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가족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죠. 또 봉건 질서는 상례喪禮와 장례葬禮를 통해 대를 잇는 계승 관계를 강화했는데, 묵자는 ‘절장’節葬을 주장하여 상례와 장례에 대한 중시를 부수고자 했습니다. 봉건 질서는 음악과 주연酒宴으로 상호 간의 관계를 강화했는데, 이에 묵자는 음악이 사치이자 낭비라는 관점의 ‘비악’非樂을 주장했습니다. 17)
『묵자』의 「경 상」經上, 「경 하」經下, 「경설 상」經說上, 「경설 하」經說下, 「대취」大取, 「소취」小取 여섯 편을 통상 ‘묵변’墨辯이라고 부릅니다. 시간대로 보면, ‘묵변’이 만들어진 시기는 비교적 늦어 묵자의 시대보다 뒤였으리라 짐작합니다. 내용으로 보면, ‘묵변’은 논리학과 윤리학을 다룬 편들로, 어떻게 추리하고 논변해야 가장 효과가 있을지 탐색하고 논합니다. 따라서 ‘묵변’을 보면, 묵자 자신이 의식적으로 논변에 흥미를 가졌기에 후대의 묵가에서 이렇게 주장을 담아 엮어 냈다고 믿을 이유가 됩니다. 묵자와 묵가는 처음으로 ‘변’을 연구해, ‘변’의 논리와 원칙을 귀납하고 정리하고자 했고, 그 방법론은 훗날 독립해 나와 ‘명가’를 이루었습니다. 더 시간이 지나 ‘같음과 다름을 밝히고, 이름과 실제를 살피는’ 방법은 다시 법가法家에서 그대로 가져다 ‘법’의 규범을 정리하는 데에 이용했습니다. 이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중국 고대사상사에서 중요한 흐름 중 하나입니다. 25-6)
『논어』에서 공자는 각종 사건과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 선과 악, 좋고 나쁨 같은 도덕적 판단을 직접 드러냅니다. 이것이 ‘논’論입니다. ‘논’의 핵심은 평가와 판단으로, 공자는 자신의 평가와 판단으로 결론을 냅니다. 하지만 추론 과정이나 배경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논어』를 읽을 때 최대한 추론 과정과 배경을 새롭게 구성해 봅니다. ‘논’의 단점은 결론이 유용되기 쉽다는 것, 즉 원래의 추론 과정 및 배경과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원래 의도를 바꾸거나 심지어 왜곡하기가 몹시 쉽다는 것입니다. 전국 시대의 큰 특징 중 하나는 말과 표현 방식의 주류가 ‘논’에서 ‘변’辯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입니다. ‘변’은 다원화 및 상호 간에 충돌하는 의견과 입장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사람들이 대화할 때의 공통 인식이 점점 얄팍해진 데서 비롯됩니다. 전에는 서로 어떤 일과 가치관에 대해 필연적이고 공통된 관점이 있었기에 그 부분의 설명을 생략하고 자신이 얻은 지혜와 결론만 내놓으면 됐지만 이제는 불가능해진 겁니다. 26)
2 진실로 실천하기 쉬운 겸애
난세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던 시대에 사람의 상상력은 무한히 확대되고, 수많은 사람이 각기 다른 답안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바로잡고 미래를 계획하려는 이런 시도는 공통된 질문과 도전에 부딪힙니다. ‘일리 있는 말이긴 한데, 그게 가능할까? 실현할 방법이 있어?’ 현실에 초점을 맞춰 나온 질문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이치로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자연스럽고 유력한 답을 여기서 묵자가 제시합니다. ‘가능해. 역사에 구체적인 사례가 있으니 부정할 수 없지.’ 이런 영향을 받는 사람은 대체로 새로운 주장을 제기하려는 사람이었고, 그들은 모두 기이한 압박을 느껴 한사코 역사 속에서 사례를 찾아 자신의 주장이 실행 가능하다는 근거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 토론이 당연히 활발해졌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주장에 다 역사의 실례가 있을까요? 개혁 추구의 이상을 가진 사람들은 수백 년 역사 속에서 어떻게 사례를 찾았을까요? 34-5)
한 가지 방법은 아주 먼 옛날의 역사에서 찾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역사 사례를 지어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쉽게 하나로 융화되었습니다. 주나라 이전의 고대 역사는 본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어렵기에, 지어낸 얘기를 역사 속에 끼워 넣는다고 한다면 보통 오래된 이야기일수록 안도감과 신뢰감을 얻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중국 역사는 전국 시대에 전에 없이 팽창했고, 고대사는 훨씬 오래된 시대로 확장됐습니다. 후대의 엄격한 금석학金石學이나 고증학考證學, 나아가 현대의 고고학이 발달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오직 전국 시대에 전해진 자료에 근거해 고대사를 기록하고 이해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 고대사는 당연하게도 과장된 색채가 강해졌죠. 묵자가 두루 서로 사랑하고 모두 서로 이롭게 하는 것이 실천 가능함을 증명하기 위해 든 첫 번째 사례는 하나라 우임금입니다. 우임금이 고생을 자처한 이유는 이기심이 아니라 백성을 행복하게 해 주고 남을 자신처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35-6)
〈노인이 편안하게 생을 마치고, 장성한 사람은 쓰일 곳이 있으며, 아이는 자랄 곳이 있고, 홀아비와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불구자는 모두 보살펴 주는 곳이 있다.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鰥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있는 이 단락은 후에 ‘대동’大同으로 불립니다. ‘대동’의 핵심은 친족의 경계를 허물어 친족이 없거나 친족을 잃은 사람도 사회에서 편안하게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는 봉건 질서의 주요 내용을 확장하고 수정한 것으로, 묵가의 ‘겸애’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겸애 중」 전편을 관통하는 핵심 논리는 ‘윗사람이 모범을 보이면 아랫사람이 본을 받는다’는 ‘상행하효’上行下效로, 묵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거나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주가 선호하고 앞장서서 제창하면 나머지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를 따라오게 돼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전파력이 강한 신념입니다. 36-8)
3 주나라 문화에 도전하다
묵자의 핵심 사상으로 ‘겸애’와 함께 ‘비공’非攻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을 죽이면 불의라 이르고 반드시 한 사람 죽인 죄를 묻는다. 만일 이렇게 말해 나간다면, 열 사람을 죽일 경우 불의가 열 배가 돼 반드시 열 사람 죽인 죄를 받아야 하고, 백 사람을 죽일 경우 불의가 백 배가 돼 반드시 백 사람 죽인 죄를 받아야 한다. 이에 대해 천하의 군자가 모두 알고서 비난하며 ‘불의’라고 말한다. 지금 크게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불의에 이르러서는 비난할 줄 모르고 오히려 칭송하며 ‘의’라고 말한다. 실로 그 불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을 적어서 후세에 남긴 것이다. 만약 그 불의를 알았다면 어찌 불의를 적어서 후세에 남겼겠는가? 殺一人, 謂之不義, 必有一死罪矣. 若以此說往, 殺十人十重不義, 必有十死罪矣. 殺百人百重不義, 必有百死罪矣. 當此, 天下之君子皆知而非之, 謂之不義. 今至大爲不義攻國, 則弗知非, 從而譽之, 謂之義. 情不知其不義也, 故書其言以遺後世. 若知其不義也, 夫奚說書其不義以遺後世哉?〉 49)
「비악」과 「절용」에서 묵자는 예악을, 특히 음악을 불필요한 낭비라고 여겼습니다. 의복의 기능은 겨울에 추위를 막고 여름에 더위를 막는 것입니다. 주거의 기능은 겨울에 찬바람과 추위를 피하고 여름에 더위와 비를 피하며 도둑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무기의 기능은 외적과 도적을 저지하고 물리치는 것이며, 교통수단의 기능은 각기 다른 지형에서 사람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것입니다. 이런 기본 기능으로 보자면 이것들을 어떻게 제작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판단이 섭니다. 「절용 상」에는 “加輕以利”(가경이리)가 두 번 나옵니다. ‘加輕’(가경)은 사실 덜라는 뜻입니다. 묵자는 기능과 무관한 장식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기능, 즉 ‘쓸모’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절용’節用을 ‘재물을 절약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묵자의 진의는 ‘용’用에 드러나 있고 모든 것은 ‘용’으로 귀결되기에, ‘쓸모없는 것’無用을 덜어서 ‘쓸모 있는 것’用을 배로 늘린다는 뜻으로 ‘절약하다’節가 되는 것입니다. 52-3)
묵자의 또 다른 핵심 사상으로 ‘명귀’와 ‘천지’가 있습니다. ‘명귀’는 귀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고, ‘천지’는 의지를 가진 인격천人格天이 존재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논지는 인본을 중시하는 주나라 문화와 완전히 상반됩니다. 하지만 이 주장들은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가 교차하는 시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묵자의 개인 색채가 강한 ‘명귀’와 ‘천지’, 운명론을 부정하는 ‘비명’은 후대 묵가조차 외면해 버렸으니까요. 이 밖에 묵자는 ‘상현’을 주장했습니다. 친족을 주로 등용하는 당시 봉건 관습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는 묵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당시 빠르게 형성된 공통된 인식이었습니다. 봉건 질서를 보존하고 주나라 초기의 이상적인 사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공자도 일단의 능력 있는 제자를 양성해 친족 관계가 아닌 제후나 대부에게 임용하도록 추천했습니다. 이런 시대 변화와 치열하고 잔혹한 경쟁 앞에서 누구나 인재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에 ‘상현’에는 반대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