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간은 흐르고 시대는 변한다. 가끔은 그 변화가 너무도 빠르고 강렬해서, 시계바늘이 심장을 관통하고 나서야 알게 되거나 아예 깨닫지도 못한 채 도래하는 시대가 있다. 이념이 기술을 만나 세계를 구석구석 재편한 "극단의 시대"가 그러했다. 현실은 상대성 이론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시공간을 압착하고 구겨버리면서 모든 생명을 두들겼다. 단련된 근육은 제련된 강철 앞에 무릎을 꿇었고, 과거의 소중한 경험들은 자산에서 부채로 변질되어 황무지 티끌만큼 가벼운 생명들을 앗아갔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에 확실한 진리-성실한 소작농의 땀의 결실은 성스럽다-를 고수하고 찬미하는 '분노의 포도'는 보여주기라는 시각적 방법론을 충실히 구사하면서 사회 현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이야기는 세계상(像)을 재현하는 장면과 밀착되지만, 세계관(觀)을 펼쳐 보이는 지점에서 어긋난다. 저자가 바라는 세계는 누구나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세계이다. 그곳은 기계를 이긴 소작농이 작물과 호흡하면서 살아가는, 비옥한 대지의 세계이다.


현실의 부조리에 분노하고, 바른 말을 내뱉는 것은 쉬운 일이다. 정말로 쉬운 일이다. 아픈 사람은 위로받기 원하며, 약자일수록 자기 편에 약하다. 강자는 자기 편을 힘들여 만들지 않아도 된다. 저자의 드높은 이상과 핍진한 실천방안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나 찾아오지 않은 미래에서 주제의식을 퍼올려 작품을 한가득 채우고 있다. 가지 않은 길일수록 거기에 진리가 아니라 다양한 열매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자는 순결한 욕망으로 역사를 단축시키고자 한다. 그는 기계와도 같다.


은행은 사람하고 달라요. 사실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은행이 하는 일을 싫어하지만 은행은 상관 안합니다. 은행은 사람보다 더 강해요. 괴물이라고요. 사람이 은행을 만들었지만, 은행을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71)

트랙터는 죽어 있으므로, 너무 쉽고 효율적이다. 일에서 느끼는 경이가 사라져 버릴만큼 쉽고, 땅을 경작하면서 느끼는 경이가 사라져 버릴 만큼 효율적이다. 경이가 사라지면 땅과 일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다정함도 사라진다. 트랙터를 모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땅을 알지 못하고 땅에 애정도 없는 이방인만이 느낄 수 있는 경멸이 자라난다. 240)

사람들의 눈 속에 패배감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 속에 점점 커져가는 분노가 있다. 분노의 포도가 사람들의 영혼을 가득 채우며 점점 익어간다. 수확기를 향해 점점 익어간다. 2권, 2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