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리스 서사시이다. 이 작품은 ‘고전’이란 단지 오래 묵은 세월의 무게로 지탱되는 원로원의 수장 같은 존재가 아니라, 지난한 세월조차 흩어버리지 못한 삶에 대한 시원(始原)적 통찰이 담겨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세상만사에 지치지도 않고 간섭을 일삼는 ‘일리아스’의 신들은 전혀 신성하지 않다. 그들은 불멸의 존재이지만 필멸의 인간보다 나약하고 변덕이 심하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운명이란 이름으로 얽혀 있지만, 신들은 일시적인 아픔 앞에서 리셋 버튼을 남발한다. 그러므로 고향을 못내 갈구하는 오뒷세우스와 달리 신들에게는 향수병 같은 ‘그리움’이 없다. 그들은 어디든지 자유로이 운행할 수 있지만 발목이 피로에 잡혀 고단해질 때 간절히 되돌아갈 거처가 없다. 넥타르 한병, 암브로시아 한 접시면 더한 기쁨도, 더한 슬픔도 없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필멸의 인간은 그 경계를 찢고 나가려는 일탈의 충동을 끊임없이 발산하지만 신들에게는 파토스에 대한 자각이 없다. 그들은 슬픔이라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사로잡는 정념의 실체를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서사시 이후로 그리스인들은 자유로운 신들의 관용(?)을 찬양하고 숭배하면서도 공허함은 떨어냈다. 어찌 보면 ‘오뒷세이아’는 ‘일리아스’라는 영웅의 세계를 탈피해가는 그리스 세계의 변화상을 상징한다. 인간은 신화를 매듭 짓고 역사를 자신의 필치로 써내려갔다. 이후 벌어진 전제정과 민주정, 폴리스와 제국의 긴장과 붕괴는 지극히 인간적인 흔적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