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료
아버지학교 10
대전일보 신춘문예 상금에서 오만 원
홍성군청 반상회보 원고료 오천 원
홍주소식 표지에 시 한 편 만 원
홍성신문 추석명절 특집으로 팔천 원
네가 원고료 보태서 봉투 안길 때마다
끼던 금반지에 한 돈씩 반 돈씩 저금했다.
한 번만 더 불리고는 그만두련다.
퉁퉁해서 농사짓는 데도 불편하고
번쩍번쩍 남세스럽고 너도 부담될 테고.
이렇게 덮씌워 반지를 키우다 보니
새 원고가 헌 원고를 덮고 가는 격이더구나.
새 원고는 늘 빛이 나야지.
근데 헌 원고가 안에서 심이 돼야
새로 쓰는 시가 더 눈부시겄지.
사람한테 헌 생각은 없는 겨.
새것이 옛것을 감싸안고 가야 하는 겨.
어떤 글이든 99.9 순금으로 말이여.
모든 건 역사가 증명하는 겨.
이만하면 원고료에 맞춤하지?
잘 새겨들었으면 넘칠 테고. (P.30 )
구두코
아버지학교 11
파전에 막걸리 마시는데
밖에서 아기 울음이 들리는 거여.
갑자기 손자가 보고파서 함께 마시던 재당숙하고
사촌아우하고 니들 광천 신혼집으로 택시를 대절한 겨.
며느리한테 연락도 않고 말이여.
벌어진 구두코 사이로 빗물 들이친 것도 몰랐다.
슬그머니 광천역 앞 구두 가게에서
네가 검정구두 한 켤레를 사 왔지.
그때 내가 한 말 맘에 두지 말거라.
낯이 빠질 때 호통부터 치는 게 아비란 작자들 아니냐?
찢어진 구두를 보고도 나 몰라라 했으면
글 쓸 자격 없다고 지껄인 것 말이여.
주정뱅이는, 사람이며 구두며 코가 성할 날 없는 거여.
글쟁이는 눈이 보배니까 짜웃짜웃 살펴봐라.
늦은 밤 식구들 품으로 귀가하는 가장의 구두는
일에 지쳐 뒤축이 닳는 법인데, 아비는 구두코가
빈 술잔마냥 쩍 벌어진 채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래도 내가 널 등단시킨 거여. 칠성제화 이만원에
친척들 앞에서 너를 공식적으로 글쟁이라고 했으니까 말이여.
근데, 그것도 미안한 일이다. 평생 펜대 굴리려면
네 구두코 또한 얼마나 빈 술통마냥 헐떡대겄냐? (P. 32 )
빚으로 사세요
아버지 학교 19
나이 들수록 빚지며 사는 게 좋더라.
어제 점심엔 칼국수 얻어먹고
저녁엔 애호박 두 덩이 선물로 받았다.
고맙네, 감싸 쥐는 거친 손길이 좋다.
나도 뭘 좀 건네야 할 텐데, 요모조모 굴려보는
애옥살이 마음살림이 좋다. 빚으로 사세요!
욕심 보따리에서 콧노래까지 흘러나오더라.
오늘 아침엔 똥만 싸지르던 이웃집 암탉이
마루 밑에 쌍알을 놓고 갔다. 둥글게 사세요!
털 빠진 암탉 등짝에 분첩이라도 토닥여줄까.
빗방울 듣기 전에 막걸리 받아놓고
호박부침개 좀 부쳐야겠다.
비 그치고 나면 눈자위에
막걸리사발처럼 달무리 젖더라. (P.41 )
영정사진
아버지학교 45
보온밥통 속 누룽지 한 덩이
한때는 불꽃과 가까운 어금니의 생이었으나
치이고 치이다가 다시 바닥으로 갈앉은 마지막 끼니
마른 멍게껍질인가 그을린 밤송인가
좀 더 검어진 설움으로 깊은 밤 찬물 속으로 뛰어드는
뒤통수뿐인 얼굴, 맹물도 아니고 숭늉도 아닌
솥 부신 물에서 우물우물 건지는 물렁니 반 사발
탄감자처럼 엎디어 절을 올립니다 (P.83 )
-이정록 詩集, <아버지 학교>-에서
1974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그를 임신한 어머니가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을 때 태동을 느꼈다고 하여
'레오나르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지.
오후에, 디카프리오가 분한 '위대한 개츠비'를 오랫만에 마음에
와 닿게 보았다. 디카프리오는 나이가 들수록 더 연기가 좋아지는
구나. ' 더 리더' 에서 케이트 윈슬렛이 그랬듯이.
2002년에 보았던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디카프리오도 생각
났고, 아직도...'위대한' 개츠비,의 그 사랑이 마음속을 맴돈다.
영화가 끝나고, 간장게장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맛있는 저녁을
먹이고 싶어, 마침 아침에 보슬비님의 서재에서 소개시켜 주신
'옹기 꽃게장'에 가서 씨원한 맥주와 함께 꽃게장을 정말 맛있게
먹고 돌아왔다.
오늘 친구가 마종기님의 <우리 얼마나 함께>와 같이 선물해 준,
이정록 시인의 <아버지 학교>를 읽는 좋은 시간. 지난 며칠간의 다운되고 지친 마음을
회복하는 연휴의 첫날 밤, 편안하고 감사하다. 이제 다시, 시작!!
고국의 시인이자 타국의 의사로 살아온 세월이 벌써 반백년. 시인 마종기는 1959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해 본과 1학년 재학중 '해부학교실'을 발표하며 의사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삶을 동시에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떠났던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늘 고국을 바라보며 울고, 웃고, 노래했다. 그 아득한 세월을 지나 의사생활에서 은퇴한 후 십 년간 고국의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과 새롭게 적은 몇 편의 글을 엮어, 산문집을 펴냈다.
시인이자 의사로 한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서정과 가치관이란 무엇일까. 그는 차가울 것만 같은 의사도, 뜨거울 것만 같은 시인도 아니다.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나 더 많은 세월을 미국에서 보냈다. 이렇게 경계인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가 그동안 참고 있던 숨을 깊게 몰아쉬며, 가슴속에 맺힌 그리움을 글로 풀어냈다.
이 책은 시인의 시집이나 다른 산문집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세세한 일상과 생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심(詩心)이 되었던 맑고 투명한 마음은 사랑하는 가족과 여러 인연들로부터 기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화작가 아버지, 현대무용가 어머니를 비롯하여 동생들과 세 아들, 친구들, 문단의 지인들과의 만남이 얼마나 정 깊었는지도 우리는 새삼 느낄 수 있다. 오십 년 세월 꾸준히 시를 써온 시인이 눈을 감고 되돌아보는 풍경에는 필연적으로 그리움의 정서가 가득하다.
눈을 감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나는 누구와 이어져 있는지.
얼마를 살고, 얼마를 울고, 얼마나 노래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