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역 일층카페
젖히고 누르면 입구가 열린다 내겐 그건 사각형이
다 너는 그걸 정육면체라 부른다 종이 상자다 종이
상자 안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진다 인왕산 바위에 노
을이 머문다 방패 위에도 노을이 머문다 김이 나는
에스프레소를 들고 사각형 밖에서 사각형 안을 들여
다본다 모서리 한쪽이 모자란다 내가 거기에 있다 너
의 모서리도 한쪽이 모자란다 너도 거기에 있다 그
사각형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다 서다 구르다 군
홧발 아래 멈춰선다 식어가는 에스프레소를 세 번
젓고는 방패에 찍혀 갈라진, 노을의 고통을 생각한
다 조금씩 찌그러지는 정육면체의 문을 연다 정육면
체 안에 모서리 해진 사각형들이 빼곡하고 수북하다
상자 안은 언제나 통, 통 비어 있다 (P.57 )
지워지는 화원 3
-사티에게
1
꽃의 꽃이 피었다
골목이 골목 끝에서 뛰어내렸다 사과 한 알이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날
꽃의 꽃이 피었다
어둠이 청력을 잃은 날
왼쪽이 오른쪽으로 건너간 날
널어놓은 이불 아래
잠든 고양이가 잠들어 있던 날
2
선 하나를 긋고
선 하나를 지웠다
손톱과 매니큐어 사이에
꽃과 꽃잎 사이에
피에로와 회전 목마 사이에 긋고 지웠다
이번 휴게소와 다음 휴게소 사이에
말러와 사티 사이에
뛰어내린 골목이 돌고 돌아온
닿은 눈송이와
닿지 않은 눈송이 사이에
긋고 지웠다
꽃의 꽃이 피던 날 (P.48 )
팅커벨 꽃집
흔히 녹색이나 갈색이다
악, 화상, 화악, 화탁
접꽃받침
한 개 꽃에 두 개 이상의 꽃받침
통꽃받침
통 모양의 기름진 꽃받침
꽃받침조각은 악편,
꽃잎 져도 남아 있는
늦은 꽃받침
감꽃, 나팔꽃, 완두꽃
숙존 꽃받침,
꼬다리 감이 그렇다
제때꽃받침
꽃잎과 함께 떨어진, 꽃받침
제때 사라져야지
통인시장 입구에서
꽃을 샀다
봄이다 (P.91 )
-최하연 詩集, <팅커벨 꽃집>-에서
비 오시는 날,
활짝 핀 꽃들과 더 빨리 활짝 피었던 꽃들의 잔치에 갔다.
처음엔 빨리 업무만 끝내면 곧 바로 돌아오리라 결심하고 갔는데
의외로 기쁘게, 즐겁게 있다 잘 돌아왔다.
그렇구나. 꽃들은 다 꽃들인 것이다.
개화와 낙화의 간격만 있을 뿐, 여전히 향기로웠다.
날이 흐리고 이른 가로등이 켜진 저녁,
에릭 사티의 '짐노페티'를 들으며
시인의 '팅커벨 꽃집'을 방문한다.
오래전에 자주 갔던 '경복궁역 일층카페'는
다음에나 가야겠다.
심플하고 투명한 플라스틱 컵으로, 증류수를 한 잔 마시는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