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
이강수
햇빛 고운 봄의 울타리
죽으려고 찾아든 자리
담배 한 개비
간절하다
죽어야 말을 할 수 있기에
내 발로 길을 물어
내 눈으로 한발짝씩 더듬어 올라갔다
하늘이 맷돌로 내려 앉아
갈고 엎고
또 갈아 대도
죽어서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나의 마지막 말이
바람을 타고
살아 있는 자에게
즐거운 각성으로 귀를 열고
시뻘건 벌판을 메운 보리싹으로
노래를 채우고
쑥대 밑에서 보스라진들
죽어서 진정 살아가는 모습이
아프지만 않은 것을 (P.68 )
나는 그대를 보내지 못한다
홍전식
그대 꿈꾸던 세상
사람 사는 세상이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한
나는 그를 보내지 못한다
그대 꿈꾸던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한
나는 그를 보내지 못한다
그대 꿈꾸던 차별 없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 한
나는 그를 보내지 못한다
그대 꿈꾸던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 한
나는 그를 보내지 못한다
나는 보고 싶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이 함께 웃는 세상을 보고 싶다
나는 보고 싶다
분단의 장벽을 넘어
더 이상 전쟁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평화로운 나라를 보고 싶다
그대가 우리와 함께 꿈꾸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진 날 나는 그를 보낼 것이다
내게 살아 있는 그대 (P.88 )
스스로 산이 되어버린 당신
이희경
2002년 4월 27일 대통령 후보 수락연설 후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뭐 하시지요?
저는, 또 이기고 여러분에게 약속했던 일을 할 겁니다
그런데 걱정 됩니다
저는 할 일이 많은데 여러분은 제가 대통령 되면 뭐 하지요?
여러분말고도 흔들 사람, 뒤통수 칠 사람, 앞길 막을 사람 꽉 있습니다
감시 좀 해주세요
흔드는 사람도 감시 좀 해주세요"
큰 산 노무현의 오직 하나의 당부
감시 좀 해주세요....
그 부탁을 들어 드리지 못한 마음의 빚은
나무 밑둥에 박힌 옹이가 되어
해마다 5월이면 열병처럼 일어난다
정작 자신은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았던 당당했던 큰 산
"난 봉화산 같은 존재야. 산맥이 없어. 담배 하나 주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스스로 봉화산이 되어버린 당신
정의를 말하고 불의에 항거하는,깨어 있는
작은 봉화산들의 외침은
이제 스스로 산맥이 되어
메마른 들판에 휘몰아치는 불길처럼 번져나간다
5월의 열병 끝에 타는 목마름으로
그를 불러본다
들.리.십.니.까? (P.78 )
세상에서 가장 먼길을 돌아
최일걸
부엉바위에서
비통한 심정과 결연한 의지로
지그시 허공을 내딛었던 두 발이
힘차게 자전거 페달 밟자
봄볕이 환하게 길을 열어젖힙니다
급하게 밑줄을 긋는 자전거
두 바퀴 속에서
사람이 사는 세상
우리가 기어이 가야만 하는
세상이 빙글빙글 맴을 그립니다
바큇살에 손녀의 해맑은 웃음이 걸립니다
자전거에 매달린 작은 수레에 손녀를 태우고
이처럼 신이 나서 페달을 밟는 그도 웃습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손녀를 태우고
세상 끝까지 가고 싶었을 겁니다
세상이 그의 주검 앞에 엎드려 고개를 숙일 때
오히려 고개를 들고 조막손으로
승리의 V를 펼쳐 보였던 어린 손녀만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을 돌아
할아버지가 돌아오고 있음을.....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온 몸을 던진 그가
살 오른 듯 탱탱한 자전거 바퀴를 굴리며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P.100 )
우리의 자존심
송문길
큰 별 하나가
새벽에 떨어져
가슴을 아프게 한다
가시는 길
새벽에 비치는 별 따라
아름다운 나라 가소서
우리의 자존심
스스로 지키게 놓아두고 (P.138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4주기를 맞아, <꽃, 비틀거리는 날이면>-에서
![](http://image.aladin.co.kr/product/2642/10/cover150/895639203x_1.jpg)
【출판사 서평】
* 대한민국의 시인들이 노무현을 추모하며 보내는 5월의 시!
시집 사상 최초가 될 만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시인 47명, 일반인들 74명이 엔솔로지 형식의 시집을 들고 노무현의 삶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한 행군에 나선 것이다. 여기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한 편의 시로 애달픔을 노래하고 있다. "아주 작은 비석 하나 세우라"는 그의 무소유적 소망에 대해 살아있는 자들은 그의 인간적 매력에 답하는 의미에서 이 시집을 작은 "시비詩碑"로 바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시인들은 모두 이 시집이 널리 읽혀 세월이 흘러도 바래지 않을 노무현 정신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시심을 다독였던 것이다. “강물은 바다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그의 신념을 믿으며 그 희망에 대한 염원과 사랑을 여기 추모시집에 담아냈다. 강물처럼 ‘사람 사는 세상’이 온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 노무현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라며 시인들은 마음속으로 통곡을 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