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말해서, 수다는 인간의 본성이며 인간들의 세상은 어떻게든 수다의 기회를 늘리는 쪽으로 변화해왔다. 그 덕분에 100년 전에 비해 우리는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더 많은 수다에 참여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다의 양은 증식하고 있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수다의 내용, 즉 질적인 측면도 수다의 양이 늘어난 만큼 향상되었을까?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다. 인류를 달에 보냈던 컴퓨터에 장착되었던 프로세스보다 수백 배 뛰어난 CPU가 장착된 PC나 스마트폰으로 우리가 SNS에 올리는 수다의 내용은 오히려 이전만 못하기까지 하다. 수천만 화소의 센서를 장착한 미러리스 카메라로 고작 찍어 올리는 것은 오늘 점심에 먹은 밥상이고, 화각과 조명으로 왜곡된 셀카이며, 거기에 덧붙이는 짧은 수다들은 대부분 기성품의 재활용이거나 얄팍한 '자뻑'으로 가득하니 말이다.
요컨대 예전에 우리는 원하는 만큼 수다를 떨기 어려운 세상에서 최대한 더 널리 수다를 떨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때 우리는 수다의 주체였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세상이 수다를 요구한다. 충분히 수다를 떨지 않으면 사람도 아닌 것처럼 대한다. 전에는 우리가 수다의 주인공이었다면, 이제는 수다가 우리를 좌지우지한다.
그러면 무슨 문제가 있을까?
우선 예전에 다들 입을 닫고 있었을 때에 비해 우리는 점점 더 인간 자신에게 실망하게 된다. 다들 그 천박한 심성을 수다로 까발리고 있으니 말이다. 침묵은 우리를 현명하게 만들기 전에 일단 남들로 하여금 현명하고 속이 깊은 인간으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두 번째, 수다 중심의 세상은 내향적인 사람들에게 피곤하다. 자기를 드러내는 걸 별로 즐기지 않는 내향 성격자들은 수다의 세상에서는 아웃사이더다. 게다가 내향적인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때는 조용하다가 울컥해야 자기를 표현하는 성향이 있는데, 그 때문에 SNS 속에서 말실수를 할 가능성도 높다. 사소한 말실수가 집단 폭력으로 이어지기 쉬운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그 결과가 치명적이기도 하다.
세 번째, 사생활의 노출도 문제다. 어차피 우리의 개인 정보는 이미 중국 해커들의 손에 다 들어가 있다지만, 그래도 '나만 알고 있는 나에 대한 사실'이 없이는 '개인'은 성립하지 않는데, 요즘은 무슨 씨족공동체 마을에서 사는 것처럼 다들 자기 삶을 까발린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말에 담긴 생각의 함량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점이다. 말은 원래 생각의 도구다. 고로 제대로 떠는 수다는 나와 남들에 대한 통찰과 성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생각의 양은 예전과 비슷한 상태에서 예전보다 말만 느는 것 같다.
말에 담을 생각이 부족하면 일단 말을 아껴야 하는데 조용히 가만있기는 불안하고, 그래서 내 생각 대신 남의 생각을 담고, 심지어 생각 대신 셀카나 물건 사진들로 수다를 세우는 것이다. 이게 당연하다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환멸과 좌절, 허영과 기만의 함정에 빠진다.
이렇게 보자면, 수다의 풍요는 침묵과 고요함의 가치를 깨닫게 만든다. 마치 기아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인류가 급작스레 찾아온 식량의 풍요 속에서 비만증을 겪으며 다시 자발적인 영양결핍 상태를 추구하듯, 수다의 밀도가 높아진 세상에서 우리는 자기 내면으로 침잠할 수 있는 조용한 삶을 그리워하는 거다.
현대인이 고양이에게 매료되는 건 바로 그 순간이 아닐까 싶다. 굳이 떠들거나 과시하지 않고도, 그저 무심하게 몸을 구부려 그루밍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것만으로 자신의 존재감과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동물, 심지어 느긋하게 늘어져 잠을 자는 것 만으로도 주변인을 매료시키고 (같이 수면에 빠지도록)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동물, 무위자연 無爲自然 그 자체이면서도 그것만으로 많은 추종자를 만들어내는 동물.
내가 떠들지 않으면 남들의 수다에 내 존재가 묻혀버릴까 두려워 강박적으로 더 수다를 떨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침묵하는 고양이야말로 현인과 같은 존재로 보이지 않을까.
고양이를 보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여유와 정직함의 매력일 것이다. (P.128~131 ) / 수다스러운 인간을 부탁해
-장근영 글. 그림. 사진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