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행마을>watercolor on paper 33.8X 23.3cm 2012
밤이 깊었습니다. 너무 졸려서 자꾸 하품이 납니다. 오늘 오후에는 어제부터 계속 그리던 작품 하나를 망치고야 말았습니다. 더 이상 손을 써볼 수 없는 상태라 결국 입술을 깨물며 꽉꽉 구겨서 휴지통에 쑤셔 넣었습니다. 분명코 이 세상에는 망친 작품들만의 무덤이 어딘가에 존재할 거라 믿습니다. 그동안 제가 망쳐버린 작품들이 한꺼번에 응어리진 표정으로 저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왠지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뭐든 쉬운 일은 없습니다. 수채화도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는 좀 풀리는 듯하다가 다음 날에는 완전히 감을 잃어버린 채 헤매는 꼴입니다. 무엇보다도 빠르고 단호한 붓질이 중요한데 붓을 함부로 휘둘렀다가는 그림에 ‘뽕기’가 들어가기 십상입니다. 그런 식으로 습관이 붙었다가는 더더욱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뽕기’라는 단어가 다소 거친 표현이긴 하지만 달리 떠오르는 단어가 없어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사용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작품은 오미희 씨 방송이 시작된 얼마 후부터 다시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간에 잠깐 쉬기는 했습니다. 남편이 출장 중이라 모처럼 싱글 시절의 자유를 만끽하며 혼자 저녁도 먹고(달랑, 김밥 한 줄), '착한 남자' 시청도 하고(요즘 제가 꽂힌 드라마입니다. 송준기, 화이팅!)...그러다가 내일을 위해 잘 준비를 하다말고 다시 화실로 들어가서 심기일전 붓을 집어 들고는 결국 새벽까지 일했습니다. 그 다음에 사진 찍고, 알씨로 용량 줄여서 사이트에 입력하고...휴우! 정말 긴 하루였습니다. 게다가 별로 할 말도 없으면서 이렇게 쓸데없이 주절거리기까지 하고...
이번에 사용한 수채화 용지는 100% 코튼으로 된 황목 파브리아노 제품 입니다. 그동안은 주제나 기법에만 신경을 썼지 재료에 대한 것은 부차적인 문제로 여겼는데 진작부터 이 용지를 사용하지 않은 게 후회막급입니다. 요리사가 좋은 요리를 할 때는 우선 재료부터 잘 선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로 유화 작업만 하다 보니 수채화 쪽 재료에는 뭐든 대충 대충이었습니다. 대학 시절 이후 본격적으로 수채화 작업에 매달렸던 적이 없었거든요. 뭐랄까, 일종의 보조 수단 정도로만 여겼지요.
그런데 종이 하나의 위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붓 터치가 그대로 살아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번져가는 느낌이 놀랍습니다. 질감이 거칠면서도 단단한 것이 수채화 물감을 아주 잘 받혀준다고 할까요. 물이 묻어도 종이가 잘 우그러지지 않습니다. 약간 안쪽으로 우묵하게 들어갔다가 금세 빳빳하게 마르면서 원상복구 됩니다. 그동안 너무 엉성한 요리사 노릇만 한 것 같습니다. 재료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 신중함, 작품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부터 챙겨야한다는 아주 기초적인 상식을 되뇔 따름입니다. 그러고 보면 살아가는 일에도 기초적인 매뉴얼로 인해 어그러지는 일이 태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뭔가 이상하게 안 풀린다 싶으면 인생 매뉴얼 1조 1항부터 새로이 점검해 볼 필요가 있겠구나 싶습니다.
요즘에는 계속 사진을 곁에 두고 작업하고 있습니다. 직접 밖에 나가 그리면 좋겠지만 여건 상 사진으로 찍을 당시의 기억들을 되새기며 색채와 분위기를 조율합니다. 다행히 이번 주 주말에 다시 야외 스케치 하시는 분들과 함께 덕포리 안행마을에 가기로 했습니다. 덕포진과 덕포리를 자꾸 혼동하게 되는데...저번에 다녀온 곳은 덕포진이었고 이번에 가는 곳이 덕포리 입니다. 죄송..암튼, 벌써부터 잔뜩 기대가 됩니다. 날씨도 좋을 거라 하니 멋진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