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고모와 고모부가 한 시대를 살았던 그 집의 뒷마당에는 외양간을 개조한 작은 창고가 하나 있었다. 각종 농기구와 오래된 잡동사니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는 곳이었다.


그날 밤, 도준의 그림자가 창고 안 선반 사이에서 한동안 이리저리 움직였다. 구석구석 쌓여 있는 상자와 보따리들을 들출 때마다 손끝에서 먼지가 흩어졌다. 그는 바스러질 듯 삭은 상자들을 하나씩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분명 여기 어디에 있을 텐데


어둠 속을 오가던 손전등의 노란 불빛이 마침내 선반 구석의 작은 상자 앞에서 멈췄다.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연 도준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찾았다. 여기 있었네.


상자 안에는 어린이용 분홍신 한 짝이 놓여 있었다. 오래전 그 여름의 햇살과 바람, 어린 서윤의 발자국을 그대로 담고 있는 신발 한 짝. 도준은 그 작은 샌들을 집어 들며 미소 지었다.


- 고모가 이런 걸 버릴 리 없지.


오래전, 용천 계곡에서 마주쳤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떠내려가는 신발을 좇다 물살에 휘말린 작은 몸, 급류 속에서 끌어올린 아이는 젖은 종잇장처럼 가벼웠고, 그의 셔츠를 꼭 붙든 손은 유백색 꽃잎처럼 창백했다. 그 차갑고 여린 감촉이 아직도 그의 가슴에 남아 있었다.


-이번엔 내가 구했어.

소년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며칠 뒤, 도준은 계곡 아래에서 물살에 떠밀려온 분홍신 한 짝을 발견했다. 소녀는 이미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간 뒤였다. 도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 집을 나와 기숙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날은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도준이 짐을 싸고 있을 때, 고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속옷과 밑반찬을 챙겨 주던 고모의 시선이 책꽂이로 향했다. 거기에는 분홍신 한 짝이 놓여 있었다. 고모에게 그것은 이 방 안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퍼즐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저거 뭐야? 웬 샌들을 모셔둔 거야?

-새 신발이잖아요. 나중에 주인에게 돌려줘야 해요.

-아주 작은데? 누가 주인인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저 여기 없다고, 제 물건 막 버리진 마세요.


도준은 왠지 시무룩해 보였다.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 속에 불안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집을 떠나기 싫어 그런 것이라 생각한 고모는 어린 조카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였다.


-괜찮아. 금방 방학하면 또 볼 텐데. 우리 준이, 잘할 수 있을 거야. 힘들면 바로 연락하고. 이 고모가 당장 쫓아가서 해결해 줄 테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그해 여름, 용천 계곡에서 제짝을 잃어버린 그 분홍신 한 짝은 도준이 기숙학교로 떠난 뒤 줄곧 이 창고 안에서 잠들어 있었고, 수많은 사연과 수수께끼 같은 세월을 지난 끝에, 마침내 오늘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제 분홍색 샌들은 진짜 주인을 향한 길목에 놓여 있었다. 오래전에 묶인 매듭 하나가 스르르 풀리려는 중이었다.


이 샌들을 돌려주면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어떤 말로 그날 있었던 익사 사고에 관해 설명해야 할지, 우리의 인연이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기적 같은 우연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릴 뿐이었다.


그녀가 벌써 약혼을 했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머리 한쪽에서는 그녀와의 인연이 내일까지겠구나 싶으면서도, 세상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떠올랐다.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게 중요한 거지.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마지막 도전이 될지도 모를 로체 남벽 등정을 앞두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것, 어쩌면 그 자체로 기이한 일일 수도 있었다.


도준이 신발 상자를 들고 창고에서 나오자, 집 내실 쪽에서 희미하게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그는 장독대 앞을 지나 대청마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혹시 청소 용역회사 대표인 최윤 선배일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쳤다. 도준이 댓돌 위에서 신발을 벗으며 손을 막 뻗으려는 순간, 벨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묵직한 캔디바 형태의 노키아 폰을 집어 들고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어이쿠, 전화했으면 조금만 더 기다리시지. 안 받으면 또 걸겠지.

하지만 벨 소리는 끝내 다시 울리지 않았다. 당시는 방금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확인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도준은 그 전화가 서윤에게서 온 거라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 보지만, 그날 밤 전화가 연결되었더라면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 분홍신 한 짝은 단순한 추억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제 분신의 또 다른 한 짝을 향한 인연의 닻줄이자, 먼 여정을 품은 상징적 매개체였다. 하지만 그 신발을 찾느라 창고에서 시간을 지체한 탓에 결국 그녀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분홍신은 어쩌면 두 사람을 두고 벌이는 얄궂은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도준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손에 들고 있는 신발 상자만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내일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잡는 동안, 깜짝 선물처럼 이 분홍신을 건넬 수 있으리라.

-이 신발이 오랫동안 우리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낭만적이고도 의미심장한 한마디쯤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물에 대한 두려움은 그날 익사 사고가 남긴 깊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더는 물에 빠지는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때의 진실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용천 계곡의 개울가에서 시작된 인연은 스물두 해를 넘어 다시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었다. 그녀와의 두 번째 입맞춤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이 아닐까. 이미 다른 남자와 약혼한 상태라 해도, 그들의 관계는 어떤 현실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분홍신 한 짝은 두 사람의 운명이 오래전부터 서로를 향해 뻗어 있음을 보여주는 작고 소중한 증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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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아니다. 처음부터 그녀의 신경줄은 온통 그 노트에 쏠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층 테이블 위에 놓인 스프링 노트는 이미 그녀의 의식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외면했기에, 마음은 내내 불편했고, 스스로를 애써 다독이기만 했던 건 아닐까.


결국 다시 거실로 내려간 그녀는 그 초록색 노트를 집어 들었다. 종이의 결을 더듬듯 한 장 한 장 넘기던 끝에, 마침내 도준이 적어 준 열 자리 숫자와 마주했다. 그는 이 집을 나서려다 무슨 마음으로 이 번호를 남긴 걸까. 단순히 필요할 때 돕기 위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담은, 차마 언어로는 옮길 수 없었던 은밀한 그 무엇이었을까.


부엌 옆에 걸린 전화기가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무거운 침묵 속, 지금 당장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요구하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은 더 고모부 댁에 있을 예정인데, 그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뭐든 도와드릴게요.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전화하자.’


그 단어 하나가 강박처럼 떠오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온몸에 열기가 솟구쳤다. 그건 비상식적이면서도 부끄러운 행위였다. 그러나 근거 없는 망상이 꼬리를 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내가 전화를 걸겠다고? 말도 안 돼.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가 자신에게조차 낯설게 울렸다. 노트에 적힌 숫자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알 수 없는 기대와 초조함을 느꼈다. 진짜 왜 이러는 거야이 밤중에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지. 필요한 게 있다고 해놓고, 말끝만 흐린 채 전화를 끊을 게 뻔했다. 그리고 나중엔 자신의 바보 같은 말투와 변명을 떠올리며 몸서리칠 테지. 그녀는 심호흡을 반복하며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하루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내게 이상한 바이러스라도 침투한 거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머릿속에서 들끓었다. 노트를 번쩍 들어 올려 마구 흔들다가, 결국 항복하듯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끌림과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본능처럼, 피할 수 없는 숙명에 굴복하는 사람처럼. 떨리는 손가락으로 신중하게, 숫자 열 개를 천천히 눌러갔다.

그 남자가 있는 그곳 어딘가에서, 전화벨이 울기 시작했다.


두드드드.


전화벨이 한 번, 두 번, 세 번, 연거푸 울어댔다. 벨이 울릴 때마다 머리카락 끝이 곤두섰고, 정수리에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꽂히는 듯 온몸이 바짝 긴장했다. 심장 속 어딘가에서 근원을 알 수 없는 큰 파도가 일렁였고, 숨결마다 공기가 묵직하게 떨렸다. 그 전화벨 소리는 세 번의 심판, 세 번의 운명처럼 거침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마침내 네 번째 벨이 울리려던 순간, 참을 수 없는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 하고 비명을 지르며 수화기를 내던졌다. 다급히 전화 플러그마저 뽑아버렸다. ,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안 돼. 나 진짜 이상해졌어.


그녀는 노트를 펼쳐 번호가 적힌 페이지를 와락 뜯어내고, 주저 없이 박박 구겨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에 놀란 듯,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끝에 남은 격렬한 감정의 잔해 속에서 미련과 후회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쓰레기통 속 종이가 바스락거리며 그녀를 조롱했다.


못된 것전화 걸고 싶지? 걸어라, 어서.’


그녀는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저었다. 환청처럼 되풀이되는 그 소리에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숨 막히는 본능의 폭주를 억누르며, 결국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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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밤이 깊어가자 별장 주변은 짙은 물감이 뿌려진 푸른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습관처럼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느새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작업에 몰두할 때도, 뜨거운 녹차를 홀짝일 때도 마음 한 가닥은 늘 창밖 어둠에 닿아 있었다.


어수선한 심정으로 욕실 거울 앞에서 이를 닦고 있는데, 갑작스레 전화벨이 울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설렘이 밀려왔다. 도준의 구릿빛 얼굴과 그 짜릿한 입맞춤이 가슴을 조이듯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제이였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숨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전화 받으려고 뛰어왔어. 근데, 무슨 일이야?


서윤은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오늘 서울 온다더니, 왜 거기 있는 거야?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는 뜻이지.


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일? 지붕 공사 대금은 오늘 준다며.

-그게 다야. 빨리 말해. 지금 전시 기획안 정리 중이니까.

-거기서도 일해? 좀 쉬어라, 쯧쯧.

-제발 말해. 무슨 일이냐고.

-태일 씨가 너 어디 있냐고 전화했어.

-혹시 나 횡계 갔다고 했어? 그러지 말지.

-! 휴가받았다는 말 안 했다고 했지? 근데 그 남자, 좀 이상해. 자기 약혼녀가 서울에 없다는데 왜 나한테 짜증을 내?

-그 사람 원래 말투가 그래.

-그럼 너는 그 짜증을 매번 받아 주는 거야?

-그건 아니야미안. 대신 사과할게.

-어쨌든, 난 그 남자 밥맛이야. 완전 재수탱이야.


제이가 태일을 못마땅해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서윤이 그와 데이트를 시작했을 때부터 툴툴거리며 쓴소리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녀가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서울로 돌아갈 거라고 하자, 제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조건 우리 사무실로 와. 불금이잖아. 닭꼬치에 생맥 하나씩은 해야지.

-알았어. 가능하면 들를게.


전화를 끊고 나자, 공허함이 밀려왔다. 한 주는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고, 휴가가 별다른 성과 없이 허무하게 끝나가는 듯해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그녀는 잠시 거실을 서성이다가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파일을 열고 작업을 시작했지만, 정신은 이미 화면 밖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깜빡이는 커서는 밤의 어둠 속에서 점멸하는 불빛처럼 눈을 찔렀고, 숫자와 문장들은 행간 속에서 부유하는 암호처럼 의미를 잃었다. 쓰고 지우고, 또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손을 멈췄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와 화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노트북을 쾅 닫았다.


도준.


이미 결혼할 사람이 있는 여자가, 낯선 남자에게 이토록 끌려도 되는 걸까. ‘정신 나갔어. 뭐 하는 짓이야. 이렇게 한순간에 흔들리다니그러나 생각은 마법의 콩나물처럼 끝없이 자라났다. 지우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기억들. 불면증 환자가 잠들기 위해 잠을 내려놓아야 하듯, 강박증 환자가 생각의 루프에서 벗어나려면 그 생각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녀도 이 뒤숭숭한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그 안쪽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작은 파동이 꿈틀거렸다.


도준.


손등을 스치던 그의 손길, 귓가에 느껴지던 따뜻한 숨결, 느릿하게 퍼져 가던 낮은 목소리. 모든 순간이 가슴 저릴 만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그의 얼굴은 흐릿했다. 눈과 코, 입의 생김새를 떠올리려 애쓸수록, 뿌연 목탄화처럼 희미한 윤곽만 남았다.


그녀는 이층 침실로 올라가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해 보았지만, 의식은 오히려 더욱 명징하게 깨어났다. 흩어진 이미지들이 만화경 속 유리 조각처럼 어지럽게 맴돌았다. 기억과 감각이 뒤엉킨 혼돈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가눌 수 없었다.


-어머, 이게 뭐야? 미친 거야? 나 정말 진심인 거지?


무대 위에서 독백을 쏟아내는 배우처럼, 그녀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차분히 누워 있는 일조차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집 안을 정처 없이 떠돌기 시작했다. 층계를 내려가 거실과 손님방을 휙 둘러보고, 화장실 문을 밀어젖힌 뒤 다시 이층으로 올라가 침대 매트리스에 몸을 던지며 허공을 향해 두 발을 마구 차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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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그가 다가와 테이블 위의 펜을 집었다.


제 전화번호를 알려 드릴게요. 며칠은 더 고모부 댁에 있을 예정인데, 그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뭐든 도와드릴게요. 정말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마땅한 메모지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초록색 스프링 노트를 펼쳐 여백을 내밀었다. 그는 약간 비스듬한 필체로 휴대폰 번호 열 자리를 또박또박 적었다.


아직 통성명도 못 했군요. 저는 도준입니다.

... 저는 나서윤이에요.

서윤...


그는 그 이름을 한 번 더 입 안에서 굴렸다.

 

이름이 참 곱네요. 무슨 뜻인가요?

빛나다, 윤이 나다, 그런 뜻이에요.
그렇군요.

그의 눈가에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

당신 이름은 햇살이 비치는 물결 같네요. 고요하면서도 반짝이는.

그의 표정에도 잔잔한 빛의 파장이 일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던 이름이었다. 용천 계곡, 젖은 몸으로 바위 위에 누워 있던 어린 소녀.


서윤아!’


그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던 사람들의 발소리. 그러나 지금, 그 이름이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자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애수에 가까운 울림이 되어 가슴 깊은 곳에서 공명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서로를 바라보던 영원처럼 짧은 침묵.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스물두 해 전, 계곡물에 빠진 소녀의 폐에 생명을 불어넣던 그날의 입맞춤이 처음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은 모든 세월을 지나 도달한 진정한 의미의 첫 키스였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순간 당황했지만, 몸을 돌리거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럴 마음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불안과 욕망이 뒤섞인 이마 위로 열이 올라왔고,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의 입맞춤은 달콤하면서도 아릿했고,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뿌연 열기가 차오르듯 번졌다. ,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떨림이 부끄러울 만큼 분명하게 온몸을 감쌌다. 몸은 환희에 젖어 있었고, 마음은 여전히 불확실한 파동 속에 흔들렸다. 시곗바늘이 멈춘 듯,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내 내면을 스치는 한 줄기 속삭임이 들려왔다. 약혼자, 결혼, 가족의 기대와 책임. 빛바랜 그림자들이 다시 의식을 덮쳤다. 이 키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가장 깊은 곳에서 번지는 불꽃의 정체는 무엇인지. 자유를 향한 갈망과 두려움이 엇갈리며 그녀의 마음을 격렬하게 뒤흔들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려 했다. 가슴 깊이 그녀를 품으려 했다. 숨결과 숨결이 맞닿은 순간, 그녀는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힘껏 밀쳐냈다. 이것이 반사적인 방어 동작이었는지, 혹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잠깐만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사실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

그녀의 말들이 얼음송곳처럼 하나씩 도준의 가슴에 꽂혔다. 도준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고통과 혼란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억지로라도 참아보려 애쓰는 마음 한편에 상실감과 번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미안해요.


그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렸더라면, 오빠의 사진을 보고 부군이냐고 물었을 때 바로 약혼 사실을 털어놓았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과 스스로를 배반한 불찰이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해합니다. 저는 그냥 당신에게 끌렸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그러니 제가 미안합니다. 너무 제 감정에만 솔직했나 봅니다.


그 짧은 고백 사이로 공기마저 숨 막히게 떨려왔다. 심장은 불현듯 요동쳤고,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숨을 고르더니, 신중한 어조로 다시 말을 이었다.


저기혹시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낚시하러 가실래요? 반나절이면 충분해요.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다른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눈빛 어디에도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진심이 그녀의 가슴에 파문처럼 번져왔다.


내일은 금요일이었다. 그가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그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오전에 낚시터에 잠시 다녀온 뒤 오후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아마도 오늘의 해프닝을 핑계 삼아 조금이라도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와 이렇게 끝내야 한다는 사실은 말로 다 담기 어려운 쓸쓸함으로 그녀의 마음을 옥죄었다. 자신도 모르게 소중한 무언가를 잃는 듯한 안타까움이 가슴 한편에 자리했다.

평소 같았다면 그녀는 쉽게 흔들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며 누구에게나 한두 번은 견딜 수 없이 강렬한 무언가가 휘몰아치는 순간이 있다. 그때 우리는 두 가지 선택 앞에 선다.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아가거나, 끝내 외면하고 돌아서거나. 결국 그 감정의 무게와 책임은 공평하게 각자의 몫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좋아요. 낚시터에 갈게요. 오후에는 반드시 서울로 돌아가야 해요.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열 시쯤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의 이마에 마지막 입맞춤을 남기고 말없이 현관문을 닫고 떠났다. 돌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저녁 공기 속으로 희미해졌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대고, 어스름이 내려앉은 바깥 풍경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석양을 등진 그의 랜드로버는 붉은 후미등을 밝힌 채 저무는 빛 속으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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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그것은 일종의 결핍이었다. 하나의 얼굴로 정형화되지 않은 채 두 사람의 내면에 서로 다른 형태로 잠복해 있었다.


서윤은 안전이라는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었다. 정돈된 평온, 반듯한 윤곽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며 살아왔다. 기성품처럼 정제된 삶이었고, 오래된 희망만을 반복 재생하는 인공의 낙원에 가까웠다.


도준은 달랐다. 그는 경계라는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삶을 택했다. 원시의 대지와 더불어 충동과 감각에 몸을 맡긴 채 흘러왔다. 방향 없는 나침반처럼, 본능에 기대어 이동해 온 존재였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규범 밖에 놓인 삶이었지만, 그는 자신만의 체계와 리듬으로 그 결핍을 감당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미 설계된 틀 안에서 버텨왔고, 다른 이는 그 틀을 거부한 채 세상 끝을 향해 혼자 떠돌았다. 출발점은 달랐으나, 다름의 이면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닮음이 숨어 있었다. 양면 거울처럼 마주 선 두 얼굴이 비로소 서로를 인식한 순간이었다. 낯선 것에 대한 끌림은 익숙함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자리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에 오를 때는 장비가 워낙 많아서, 물까지 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한순간 듣기 좋은 멜로디처럼 되살아났다. 그 말에는 절제된 힘과 산을 향한 긴 호흡이 함께 배어 있었다.


칫솔도 반토막, 비누도 반토막, 그렇게 가져가는 정도예요. 고산을 등반하는 동안 눈을 녹여 물을 만들려면 연료가 많이 듭니다. 게다가 고도가 높을수록 비등점도 낮아지죠그래도 커피는 가끔 마셔요. 미지근한 물에 대충 타 마시기도 하는데, 그 밍밍한 맛이 어떨지는 짐작 가시겠죠.


서윤은 그의 목소리와 말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풍경만큼이나 생생한 현실감을 느꼈다. 장비와 눈과 연료와 비등점의 계산.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세월과 몸으로 축적해 온 경험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언어였다.


그렇군요. 조금은 이해될 것도 같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는 배낭을 짊어진 자신이 험한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싱그러운 바람결에 나무들이 숨 쉬듯 흔들리고, 깊은 계곡 사이로 놓인 구름다리가 느릿하게 출렁였다. 그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수록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인 긴장과 불안이 절로 씻겨 나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오래전부터 몸에 밴 자연의 리듬을 완전히 잊지는 못한 채 살아가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누구와도 닮지 않은 남자였다.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새로운 인류처럼 느껴졌다. 그의 세계는 늘 긴장과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삶은 생과 사의 외줄타기 위에서 치밀한 질서로 구축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영혼은 어떤 색채를 띠고 있을까. 함께할수록 끝없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남자였다. 그는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무슨 음식을 즐기는지, 사람을 판단할 때 무엇을 먼저 보는지, 소년 시절에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 외에도 궁금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여태 결혼할 틈도 없었어요. 아니, 못한 거죠. 목숨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라, 그게 편하기도 하고요.

그가 자신의 이성 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비친 건 우연이라기보다 계산된 고백처럼 느껴졌다. 아직 미혼인 그는 어떤 여자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산다고 했지만, 굳이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쩌면 서윤의 마음을 떠보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커피잔을 비우고 갑작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긴 침묵을 냉담한 거절로, 철벽같은 방어로 받아들인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벽이 가로놓였다.


그만 가봐야겠군요. 제가 꽤 오래 방해했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작별을 고했지만, 그 말끝에는 씁쓸함과 자조적인 기색이 엷게 섞여 있었다.


번거롭게 여기까지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여러모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테이블 모서리를 손끝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섭섭했지만, 이제는 그를 보내주어야 할 시간이었다.

별말씀을요. 도울 수 있는 일이면 기꺼이 해야죠. 안녕히 계십시오.
–…조심히 가세요.

문 앞에 선 그는 문고리에 손을 얹으려다 말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는 눈빛 속에 말로 다 옮기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심장도 그 여운에 반응하듯 미세하게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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