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한동안 어둠에 잠겨 있던 타멜 중앙로에 전깃불이 돌아오자, 외국인 거리 특유의 활기가 다시 깨어나기 시작했다. 멈춰 있던 시곗바늘과 정지된 여백의 순간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낡은 릭샤를 끌던 운전사가 천천히 멀어지고, 옷 가게와 기념품 가게, 타로 점집 앞에도 불빛이 번지며 거리 전체가 다시금 살아 숨 쉬었다.


삼거리 반스 책방 앞에서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군밤을 팔고 있었다. 도준은 환한 불빛에 이끌리듯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매장 안에는 여행객들이 두고 간 중고 서적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고, 장식장 위에 정갈하게 놓인 그림엽서와 기념품들도 네팔 전통의 색감과 문양으로 이방인의 시선을 끌었다


도준은 작년도 판 론리 플래닛가이드북을 잠시 넘겨본 뒤, 지도들이 꽂혀 있는 섹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다양한 지역의 지도를 살펴보다가, 마침내 에베레스트가 있는 쿰부 지도를 뽑아 들었다.


잠시 후, 다시 거리로 나온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타멜의 고즈넉한 밤은 더욱 깊어가고 있었다. 여행객들이 분주히 오가고, 식당에서는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함께 샤데이가 몽환적인 목소리로 부르는 ‘Smooth Operator’가 흘러나왔다. 옷가게에 걸린 전등 불빛은 진열대 위 기념 셔츠와 손뜨개 모자, 두꺼운 스웨터들을 은은히 비추었다. 흘러넘치듯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원색들이 밤 풍경 속에 생기를 더했다.


기념품 가게 앞을 지나치려는데,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What time is it?


그는 무심코 왼손을 들어 올려 손목에 차고 있던 아보셋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느닷없이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신기하게 생겼네요. 이건 무슨 시계예요?


횡계 별장, 목요일 오후.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에게 말을 건넸던 장면이 아직 선명한 필름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차에 몸을 싣고 사라진 후로, 도준은 삶의 중심을 잃고 무기력한 시간 속을 맴돌았다. 매일같이 오대산 자락을 달리던 일상의 리듬도 흐트러졌다. 그녀가 없는 횡계는 아무도 없는 숲의 적막처럼, 이제 어떤 의미도 건네지 못했다. 결국 일주일 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충동적으로 서울 방향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그녀가 있는 도시로 가자.’


사랑이라는 열병에 잠식된 영혼은 텅 빈 갈증에 쫓기듯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그녀가 일하는 인사동 거리를 서성였다. 그림자만이라도 스칠까 하여 리온 갤러리 주변을 배회하는 일만이 그의 결핍을 붙들어두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으나, 운 좋게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그녀의 모습을 두어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가슴이 터질 듯 요동쳤지만, 차마 가까이 다가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철없던 시절의 무모한 격정은 이미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횡계 숲길에서 걸려 온 전화 한 통이 줄곧 마음을 옥죄었다.


-당신 누구야?


낯선 남자의 날카로운 목소리는 이명처럼 귓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가 약혼자였다 해도 하루 전 자신이 적어준 번호가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갔는지, 그 의문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이미 누군가의 보호와 강력한 견제 안에 놓여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앞날이 예정된 사람 앞에 무턱대고 나서는 일은 결국 불필요한 혼란만 초래할 뿐이었다. 게다가 다가올 시간에 대한 불확실성과 자신감의 결여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로체 남벽이라는 치명적인 도전이 눈앞에 버티고 있는 한, 그 어떤 약속이나 책임도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민다 해도, 언젠가 자신이 비겁하게 그 손을 놓아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김미진


네팔은 바닷길이 없는 지형 탓에 오래도록 연료 부족에 시달려야 했고, 그 고단한 일상 속에서 잦은 정전은 이미 흔한 풍경이 되어 있었다


여느 날처럼, 타멜 거리가 갑자기 암흑에 잠기자 상점가 곳곳에서 가스등이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환하게 타오르는 불빛들이 어둠을 타고 번져가며, 거리는 차츰 밤의 몽환적인 숨결을 되찾았다. 어두운 골목을 가르는 빛의 물결에는, 어디선가 되살아난 듯한 낯선 노스탤지어가 피어올랐다.


뚜벅뚜벅, 어둠이 내려앉은 포석 위로 도준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돌이 울퉁불퉁하게 깔린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무언가 이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 듯한 공허가 깊어졌다.


골목 끝 담배 가게 앞에 이르러 그는 걸음을 멈추고, 짙어가는 밤하늘을 막막한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무심결에 흘러나온 한숨이 허공 속으로 흩어졌다.


이 지독한 우울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인가?’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이 다시금 강박처럼 떠올랐다. 그녀가 탄 자전거는 앞으로만 곧장 나아가는 길을 선택한 모양이다. 나에게는 한순간의 망설임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입술을 깨문 채, 깊은 회한에 몸서리쳤다. 철이 든 후로 자신이 이토록 어리석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죽음의 경계에 익숙해진 서른다섯의 사내가, 울음을 삼키는 아이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새로운 여자와의 만남이나 격렬한 연애 감정은 더 이상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녀와의 이야기도, 잃어버린 분홍신을 되돌려주는 그 순간까지라고 믿었다. 그때가 되면 오랜 숙제를 끝내고, 미련 없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 인연의 끝자락에서 그는 아직도 그녀의 분홍신을 한 줌 쓰라린 꿈처럼 품고 있었다. 수시로 가슴을 짓누르는 멜랑콜리한 감각은, 도대체 언제부터 드리워진 그림자일까. 왜 그녀라는 흔적 하나를 이토록 지워내지 못하는 걸까.


그녀를 낚시터로 데려가기로 했던 그날, 도준은 옆 샛길에서 튀어나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검은색 BMW를 보고, ‘혹시 그녀의 약혼자일까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는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가지 못했다. 한동안 긴장된 시선으로 차창 너머를 응시하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 그녀에게서 온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숨을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낮게 뱉은 한마디가 가볍게 떨렸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로 낯선 남자의 위압적인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당신 누구야?


도준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목구멍 언저리까지 어떤 말이 치밀어 올랐다가 이내 스러졌다. 무례한 말투의 이 남자가 그녀의 약혼자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날카로운 쇳조각처럼 그의 내면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신이 던진 단 하나의 질문 같았다. 너는 누구인가. 그녀에게 너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감히 어떤 대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자신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이 번호가 왜 여기 있어? 당신 누구야?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거칠게 다그쳐왔다. 휴대폰은 손안에서 납덩이처럼 무거워졌고, 도준은 자괴감에 잠긴 채 끝내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검은색 BMW가 막다른 길 끝에서 다시 돌아 나온 건 십여 분쯤 지나서였다. 멀리서도 그녀가 조수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불길한 상상이 이 순간 눈앞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차 안의 침묵 속에 고립된 채, 그 어떤 움직임도 허락되지 않는 처지였다. 고개를 돌릴 수도,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도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녀에게, 나는 어떤 의미인가.


대답 없는 메아리, 응답받지 못한 질문이 심장을 짓눌렀다.


스물두 해 만에 기적처럼 다시 찾아온 인연이, 수많은 갈등과 망설임을 남긴 채 이번에도 그의 곁을 천천히 지나치고 있었다. 다시 그녀를 영영 잃어버려야 하는 것일까.


용천 계곡, 세찬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소녀,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던 소년의 인공 호흡. 그 모든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오래된 진실 하나로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약혼자보다 앞선 인연이었다고, 처음 사랑이고 첫 키스였다고 말하는 건 제정신 아닌 사내의 헛된 고백일 뿐이었다.


그녀는 그가 없는 미래를 향해 곧장 달려 나갔고, 그는 여전히 과거에 발이 묶인 채 여기 홀로 서 있었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헤어진 그때부터 거의 매 순간 그녀 생각이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이었고, 신열처럼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몹쓸 역병과도 같았다. 사랑인지, 연민인지, 혹은 질투인지조차 분간되지 않은 채 오직 안타까움과 그리움으로만 각인된 그녀의 얼굴이 끊임없이 눈앞을 맴돌았다.


야박하게도 그녀에게는 끝끝내 전화 한 통 없었다.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화벨이 울리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이미 완벽하게 다른 세계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 그녀가 무슨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보겠는가. 번듯한 약혼자와 축복된 결혼식, 안온한 가정의 울타리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그녀와 함께한 기억들조차 한 겹 베일에 싸인 듯 점점 흐려졌다. 얼굴 모습과 목소리, 수줍은 미소조차 아득한 장막 너머로 사라져 가는 듯했다. ‘어쩌면, 이게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그는 타이르듯 자신에게 말했다. 따뜻하고 안전한 삶이, 결국 그녀에게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김미진


파노라마 포인트정원에서는 소박하지만 활기 넘치는 바비큐 파티가 한창이었다. 한국에서 온 원정대와 방송사 관계자, 신문사 기자, 세르파들이 길쭉한 나무 테이블에 빽빽이 둘러앉아 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왁자한 대화가 밤공기를 데웠다. 허공에 매달린 노란 전구는 바람결에 가볍게 흔들리며 천막 주변을 은은하게 밝혔다. 바비큐 그릴에서 피어오른 뿌연 연기가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자욱이 퍼져나갔다.


도준이 문형근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서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들뜬 분위기는 한순간 숨을 고르듯 가라앉았고, 몇몇은 도준의 얼굴을 확인하며 긴장과 호기심이 섞인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 틈에서 작달막한 키에 왜소한 체격을 지닌 사내 하나가 유독 눈에 띄었다. 마나슬루 원정대의 대장이자, 이름만으로도 회자되는 인물, 김봉산이었다.

 

도준보다 열 살 위인 그는 8천 미터급 14좌 가운데 10개를 완등하며, 한국 산악계의 전면에 나선 지 오래였다. 그 놀라운 성과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TV 프로그램과 광고 모델 활동을 통해 더욱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다.


하지만 도준에게 고산등반의 본질은 단순히 정상에 오른 횟수가 아니라, 어떤 루트를 택했는지, 어떤 태도로 산에 접근했는지에 달려 있었다. 이 점에서 김봉산은 늘 논란의 한복판에 있었고, 본인 또한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어느새 마흔 중반에 접어든 그는 여전히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생의 전부를 건 도전이기보다, 명예와 생계를 위해 반복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산을 업으로 삼아 왔던 그는, 등반이 더 이상 특별한 선택이 아닌, 그저 오래 해온 직업이 되어버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점에서 도준은 김봉산과 전혀 결을 달리했다. 체질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렸고, 지금껏 완등한 8개의 봉우리 중 5개는 웬만한 고수들도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난이도가 극도로 높은 루트들이었다.


기록으로 따지자면 김봉산이 앞서 있었지만, 실력만큼은 도준이 단연코 한 수 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방향도 방식도 다른 두 사람이 오늘 이 정원에서 마주한 것이다.


-, 준이 아냐. 여기서 또 보네.


김봉산이 술잔을 내려놓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여전하시네요. 이번엔 마나슬루에 오르신다고요?

-괜히 또 가보는 거지, . 벌써 두 번째야. 근데 넌 또 뭘로 우릴 놀래킬 작정이야?

-놀래키다뇨. 별말씀을요.

-내가 실없는 말 하는 줄 알아? 허허. , 소개 좀 하지. 다들 이름은 아실 거야. 도준이야. 이 바닥에선 황소고집으로 꽤 이름난 친구지.


그는 연거푸 손짓하며 사람들을 돌아봤다.


-이쪽은 방송 촬영하러 같이 온 최연걸 피디.

-지면을 통해서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 작년에 K2 등정하셨죠?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피디가 정중히 명함을 내밀었다. 도준은 예의상 한 번 들여다본 뒤, 곧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이쪽은 카메라맨 김상일 씨, 오늘 바비큐 파티의 물주인 윤종일 기자, 우리 팀 막내 이종학 군, 한 명 더 있었는데 어디 갔지?

-, , 이제 좀 마십시다. 배고파 죽갔구만.


문형근이 너스레를 떨며 먼저 자리를 잡았다. 도준도 빈 의자를 끌어와 그 옆에 앉았다. 가볍게 허기를 채운 뒤, 적당한 순간에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그때 남자 요리사가 잘 구워낸 돼지고기를 두툼하게 썰어 커다란 은쟁반에 담아 왔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안줏거리와 생 미구엘 병맥주, 쿠쿠리 럼, 좁쌀을 발효시켜 만든 네팔의 전통주 '똥바(Thomba)', 그리고 누군가 인심 좋게 꺼내놓은 발렌타인 17년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김봉산이 발렌타인을 들어 올리며 잔을 권했다.


-준아, 좀 마셔라. 방금 막 서울에서 온 길이지?

-.

-우린 도착한 지 일주일 넘었어. 마저 준비하려면 사나흘 더 있어야 할 것 같고.


도준은 묵묵히 잔을 털어 넣고, 김봉산의 잔에도 술을 채워주었다. 낯선 얼굴이 하나 늘어난 탓인지, 술자리의 공기가 잠시 어색해졌다. 그는 방송국 피디와 몇 마디 주고받고 나서,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았다. 가벼운 농담과 허세가 뒤섞인 분위기보다는, 혼자 밤길을 걷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난 잠깐 볼 사람이 있어서요. 나중에 봐요.


문형근이 좀 더 있으라며 그의 옷깃을 잡았지만, 그는 끝내 그 손을 떨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김미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네팔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에 둘러싸인 내륙 국가이다. 북쪽에는 에베레스트를 포함해 해발 8000미터가 넘는 여덟 개의 봉우리가 장대한 벽처럼 이어지고, 남쪽의 테라이 지역에는 정글과 늪지대, 초원이 어우러진 국립공원들이 자리 잡고 있다.


도준이 일본과 방콕을 거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한 건 4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트리부반 국제공항에서 입국 심사를 마치고, 여행자들의 거리인 타멜에 도착했을 무렵 도시는 이미 해거름 녘의 어둑한 그림자가 골목마다 짙게 깔려 있었다.


오래된 건물 지붕 위에도 푸르스름한 밤의 정적이 내려앉았지만, 중앙로에 이르자 식당과 상점들이 빽빽이 늘어선 거리는 환한 불빛과 인파로 묘한 활기를 띠고 있었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과 낡은 차량이 뒤엉킨 사이로 자전거와 릭샤가 아슬아슬하게 틈을 비집고 지나갔다.

 

도준은 곧장 타멜 중심지 인근의 파노라마 포인트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한국인 등산가 문형근이 운영하는 이곳은 네팔을 찾는 한국 산악인들과 여행객들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었다


그는 커다란 배낭을 둘러멘 채 택시 운전사를 뒤따라 로비로 들어섰다. 라운지에서 신문을 읽던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두 팔을 벌리더니 크게 소리쳤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도준이 아냐. , 녀석!


도준이 배낭을 벗기도 전에 문형근이 달려와 얼싸안았다.


-, 잠깐만, 이것 좀 내려놓고요.


도준은 배낭을 벗어 한쪽 벽에 기대 놓았다.


문형근은 손마디 두 개가 잘려 나간 뭉툭한 손으로 도준의 어깨를 연신 두드렸다. 잃어버린 동생이라도 다시 만난 듯 몹시 반가운 표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좀이 쑤실 때가 됐을 텐데, 어째 이 귀신이 안 나타나나 했지.

-그래서 이렇게 왔잖습니까. 그동안 잘 계셨수?

-그럼. 나야 일 년 열두 달, 만고땡이지. 허허.


택시 운전사가 카운터 앞에 짐꾸러미들을 내려놓고 뚱한 얼굴로 기다렸다. 도준은 350루피를 건넸다. 택시비와 팁을 포함한 액수였다.


-통관하는 데 별문제 없었지?

-, 그럭저럭요. 빈방 있어요?

-자식, 아무려면 너 하나 재울 방 없겠냐. 정 없으면 마누라 쫓아내고, 나랑 자면 되지 뭐.

-형수님이라면 몰라도, 문 선배는 절대 노 땡큐입니다.

-애가 갑자기 부끄러움을 타네. 얌마, 팔십육 년 마칼루에서 한 달간 동거한 걸 벌써 잊었어?

-그 코 고는 소리, 진짜! 그때 생각만 해도 아직 제 머리가 어질어질해요.

-얘가 서울에만 가면 성격 개차반 돼서 돌아온단 말이야. 인간이 언제 되려나? 아무튼 앉아.


문형근은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도준은 배낭에서 디스 담배 한 보루를 꺼내 건넸다.


-그래, 나는 담배나 피우다 뒈져라, 그 얘기냐? 자식, 고맙다.

-외국 나오면 한국 담배가 그립잖아요. 여긴 어때요?

-늘 똑같지. 네팔 시계는 멈춰 있는 거 몰라? 그게 매력이지. 그래서 내가 여기 붙어 사는 거고.


그때 식당 쪽에서 누런 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파노라마 포인트를 관리하는 세르파 체링이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도준 형, 안녕하세요. 오늘 비행기로 들어오신 거예요?


오랫동안 한국 원정대 곁에서 일을 해온 그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 체링, 그동안 잘 있었니?

-그럼요. 잘 있었죠. 저 두 달 전에 결혼했어요.

-그래? 총각 신세를 면한 거야? 어쩐지 얼굴빛이 훤해졌네.

-제 와이프도 여기서 일해요. 한국 요리 잘해요. 미역국, 닭도리탕. 나중에 소개해 드릴게요.

체링은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문형근이 도준의 짐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체링, 이것들 이층으로 옮겨. 이백칠 호 비었을 거야.

-알았어요. 도준 형, 나중에 또 얘기해요.


체링은 카운터에서 열쇠를 꺼낸 후 큰 배낭부터 번쩍 짊어지고는 작은 것들도 주섬주섬 챙겨 들고, 정원으로 향하는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


객실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이층 목조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준이 묵을 방으로 가려면 바깥쪽에 설치된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열린 문 너머로 등산복 차림의 남자들이 술자리를 벌이며 둘러앉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에요?

-서울에서 신문사 기자들이랑 방송국 사람들이 몰려와서 한바탕 소란 피우는 중이야. 팔일오 특집 찍으려고 마나슬루에 올라간대. 김봉산 대장이 이끄는 팀이지. , 너는 진짜 먹을 복 하나는 타고났나 보다. 마침 새끼 돼지 한 마리 잡았거든. , 우리도 나가서 한잔해야지.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안 낄게요.

-얌마, 이제는 사람들하고도 좀 어울릴 줄 알아야지.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안 모이는 법이야. 같은 동네 사람들인데, 인사는 해야지.


도준은 평소에 남들과 쉽게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림 김미진

 

-무슨 일은 아니고요. 저번에 횡계 슈퍼에 갔는데 지갑을 두고 와서 돈이 좀 필요했거든요. 마침 그 조카분이 지나가시다가 대신 계산해 주셨어요.


서윤은 미리 준비해 온 말을 차분히 꺼내놓았다.


-액수가 꽤 되는 모양이요,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걸 보면.

-삼만 원쯤이요.

-에이, 그 정도면 그냥 넘어가도 되지. 이웃끼리야 뭐, 도울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빌린 건 갚아야죠.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몰라서요.

-준이? 준이는 지금 서울에 없는데. 얼마 전엔 또 외국 나간다고 하더니

-외국이요?

-어디라 했더라, 가물가물하네.

-,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그걸 어찌 아나. 원체 떠도는 걸 좋아하는 녀석이라.

-혹시 조카분 전화번호는 모르시나요? 휴대폰이 있는 것 같던데요.

-휴대폰? 나야 모르지. 몇 해 연락 없다가도, 서울 오면 꼭 인사하러 들르긴 한다오. 다음에 만나면, 윗집 김 여사 손녀가 다녀갔다고 꼭 전해주리다.


잠시 숨을 고른 할아버지가 천천히 질문을 덧붙였다.


-근데 아가씨 성함이?

-나서윤입니다.

-나서윤그 이름, 참 곱소. 김순내 여사가 살아 계셨더라면, 아가씨를 참 귀여워하셨을 텐데.

-고맙습니다.

-내 고향도 충청도 전의요. 김순내 여사와 나는 같은 마을 사람이었지. 어릴 적부터 한 동네에서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오. 그분 손녀이니, 내 이리 반갑지 않겠소.


그 말에 그녀의 눈빛이 잔 파문을 그리며 일렁였다. 뜻밖에 거론된 외딴 지명 하나가, 아득한 풍경처럼 마음속에 번져왔다. 충청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이 어떻게 이 산골까지 흘러와 긴 세월 이웃으로 지냈는지, 도무지 짐작할 길이 없었다. 그 인연이 어쩌다 횡계까지 이어졌는지를 묻자, 그는 한참 말없이 있다가, ‘전쟁통에 별일 다 있었지.’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김 여사 손녀를 여기서 보다니내가 손 좀 잡아 봐도 되겠소? 너무 좋아서 그냥


김 씨 할아버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서윤은 그 손을 조용히 감쌌다. 그의 손은 종잇장처럼 가늘고 부드러웠으며, 어딘지 모르게 서늘하면서도 축축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도준과의 인연이 김 씨 할아버지와 큰할머니, 그 오래전 두 사람까지 거슬러 닿아 있다고 생각하자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을 지긋이 누르는 것 같았다.


-내 저세상 가면, 김 여사께 꼭 전하리다. 당신 손녀가다녀갔다고.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작게 흔들었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이별이 찾아오는 법. 그녀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작별을 마음에 새긴 채 느린 걸음으로 병실을 나섰다.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던 누군가의 모습처럼, 무언가를 두고 온 듯한 허전함이 발끝에 걸렸다.


이 세상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도준을 떠올렸다. 우리는 정말 다시 만날 수 없는 걸까. 횡계 숲길에서 마지막으로 엇갈린 채 멀어져간 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미 지나온 막다른 골목. 잊히지 않는 추억의 뒤안길에는 공허한 상실감이 어른거렸다. 기억의 어두운 심연 속에서 나뭇잎 한 장이 바람결에 또르르 굴러갔다. 이제 그에 대한 아쉬움과 집착을 내려놓아야 할 시간일지도 몰랐다.

 

병실 문을 막 나서던 서윤은 바로 앞 복도에서 중년 여인과 마주쳤다. 보호자로 보이는 그녀는 매점에서 막 돌아온 듯, 간병 용품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누구세요? 아버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

-, . 횡계에서 할아버지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 횡계 분이시군요.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빨리 회복되셨으면 좋겠어요.


서윤은 예의 바르게 응대하며, 울컥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억눌렀다. 여인은 따뜻한 눈길을 건넸다.


-그냥 가시면 섭섭하죠. 제가 왔으니, 잠깐 음료수라도 드시고 가세요. 전 이 집 큰며느리예요.


혹시 이분이라면 도준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약이 있어서요안녕히 계세요.


쓸쓸한 감정의 잔향을 뒤로한 채 천천히 병원 층계를 내려오는 동안, 우울한 표정으로 공항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까지 출발을 망설이며 내 전화를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전화번호를 쓰레기통에 버렸던 그날의 실책이 몹시 원망스러웠다.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용기를 냈더라면. 그 어리석고 가혹했던 처사가 가슴 한복판을 저미듯 아프게 다가왔다.

 

병원 1층 현관문 앞,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삶이라는 미로 안에서 누구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각자의 흐름에 따라 빙빙 맴도는 듯한 움직임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링거 거치대에 의지해 느리게 걸음을 옮기는 환자들, 급한 걸음으로 분주하게 드나드는 방문객들, 능숙한 손끝으로 의료 장비를 다루며 이동하는 병원 직원들, 휠체어를 밀고 조심스레 지나가는 간병인들, 그리고 보조대를 짚고 작은 발걸음을 떼는 노인들.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삶과 죽음. 그 사이 어딘가에 기적처럼 맺었던 인연조차 이토록 쉽게 엇갈려 버릴 수 있다는 걸까. 그렇다면 도준도, 한때 스쳐 간 허무한 그림자처럼, 영영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사라진 걸까. 오직 함께였기에 가슴 깊이 스며들었던 행복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꿈이 되어 이제 멀어져 버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