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횡계 읍내는 도로포장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거리마다 흙먼지가 피어올라 읍내를 뿌옇게 뒤덮었다. 그 위로 스며든 초봄 햇살이 풍경 전체를 엷은 장막처럼 감쌌다. 중앙로를 따라 트럭과 롤러가 쉴 새 없이 오가며 땅속까지 울릴 만큼 굉음을 토해냈다. 먼지가 소복이 내려앉은 낮은 건물과 오래된 상가들 사이로 슈퍼마켓과 스키 숍, 공인중개사 사무소, 식당들의 간판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다.
이 동네는 겨울 한 철이 성수기였다. 12월 삭풍이 불기 시작하면 용평 스키장을 찾는 사람들로 이 좁은 거리도 제법 북적거렸다. 스키장은 사월까지 문을 열었지만, 그해 삼월은 유난히 따뜻했다. 슬로프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도 일찌감치 뜸해졌다. 도로에는 외지인 차량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공사장 트럭들만 먼지를 풀풀 날리며 오갈 뿐이었다.
이튿날, 도준은 오대산 등반을 마친 뒤 횡계로 돌아왔다.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몸의 감각을 다듬고 근력 훈련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거의 다 보낸 것이다. 그의 몸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절어 있었고, 어깨에는 쇠뭉치를 올려놓은 듯 묵직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다리 근육은 은근히 잡아당기듯 뻐근했다. 점심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먼저 몸에 밴 냄새를 씻어내고 싶었다.
중앙로 근처 사우나탕에는 대낮부터 술기운을 씻어내려 온 남자들이 몇 명 눈에 띄었다. 간단히 목욕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도준은 젖은 머리를 털며 느긋하게 거리를 걸었다. 늘 단골로 다니던 납작식당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었다.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소박한 분위기의 함박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빛바랜 간판 아래 황태국밥과 황태 고추장구이 사진이 붙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탓인지, 가게 안은 손님 한 명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어서 오세요. 저리로 앉으시죠.
부엌에서 나온 주인 남자가 창가 옆 빈자리를 가리켰다. 도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벗고, 좌식 테이블이 놓인 방으로 들어섰다.
흰색 모조지를 깔아놓은 밥상 앞에 앉으려던 순간,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는 무릎 주변을 마사지하듯 손으로 꾹꾹 누르며, 묵직한 다리를 천천히 상 밑으로 밀어 넣었다.
이 시큰거리는 관절통은 이미 몸에 밴 익숙한 통증이었다. 겨울마다 빠지지 않고 즐겨 왔던 모굴 스키의 흔적일 터였다. 좁고 울퉁불퉁한 슬로프를 내달리던 짜릿한 쾌감이, 그만큼 무릎 속 관절과 근육을 서서히 갉아낸 것이다.
재작년 함께 스키장에 왔던 정형외과 의사 친구가 그의 무릎 통증을 지켜보며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야, 신은 공평해. 슬로프 내려오면서 평생 쓸 무릎 다 썼잖아. 재밌게 놀았으면 아픈 것도 감수해야지. 버틸 때까지 버텨. 나중엔 인공 관절 넣어야 할지도 몰라.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도준의 귀에는 전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부실한 무릎으로, 저 검푸른 마의 벽처럼 솟은 로체 남벽에 다시 설 수 있을까. 그러나 아직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첫 시도에서 이미 8,200미터까지 올랐으니, 이번엔 정상의 마지막 구간까지 닿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삶이란 결국 모든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형상이지 않은가. 그 끝을 보기 전까진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다. 도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불길한 생각을 조용히 밀어냈다.
주인 남자가 다가와 물컵을 밥상에 내려놓았다.
-뭘 드시겠어요?
-황태국밥 하나 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는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부엌에서 식당 아줌마들이 도란도란 나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겨울엔 눈이 안 와서 다들 재미 못 봤잖아요.
-장사 안돼 큰일에요. 이러다 문 닫는 건 아닌지.
-부정적인 생각은 몸에 안 좋아요. 그럴수록 더 힘들어지지 않겠어요?
부엌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도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정적인 생각은 정신 건강에도 해롭고말고.’
스키장도, 날씨도, 밥장사도 이들에게는 모두 소중한 삶의 일부였다. 그리고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짧은 여유. 식당가 골목의 잔잔한 소음과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그는 잠시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았다.
얼마 후 식당을 나온 그는 차를 골목 어귀에 세워둔 채 큰길가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한 달 가까이 고모부 집에 머무는 동안, 슈퍼 주인과도 어느새 낯이 익었다.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서자, 마른걸레로 당면 봉지를 하나하나 닦고 있던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이구…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좀 어떠세요?
-젠장, 사방 천지가 먼지투성이라 숨도 못 쉬겠어요.
-공사 때문에 힘드시겠어요.
-누가 아니라오. 좀 보시구려. 물건들이 죄다 이 모양이니, 이렇게 매일 닦아줘야 한다니까.
-횡계가 좋아지면, 스키 손님도 늘고 좋잖아요.
-그렇긴 하죠. 나쁜 게 있으면 좋은 것도 있고. 그래야 세상만사 서로 퉁 치면서 살아가지.
가게 안은 시골 동네치고는 제법 큰 규모였다. 각종 음료수와 식료품은 물론, 크고 작은 광주리와 둥근 밥상 같은 생활용품까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공사판 먼지 속에서도 주인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매대마다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도준은 생수와 캔맥주, 짭짤한 안줏거리 몇 가지를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
-오늘도 산 다녀오는 길이요?
-네.
-아이고, 부지런도 하시지. 그럼, 또 봅시다.
-안녕히 계세요.
가게 문을 나서자, 공사판 먼지가 뿌연 연기처럼 퍼지며 시야를 가렸다. 도준은 두어 번 허공을 휘저은 뒤, 눈을 가늘게 뜬 채 맞은편 공중전화 부스로 걸어갔다.
그는 웬만한 전화번호는 거의 다 외우는 편이었다. 머리가 좋아서라기보다 숫자에 집착하는 성격 탓이었다. 머릿속에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두는 습관은 전문 산악인으로서 생사를 가르는 순간마다 큰 도움이 되었다.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 필요한 정보를 직관적으로 꺼내 쓸 수 있는 능력이 산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그런 방식을 신체적 반응처럼 익힐 때까지 오래도록 반복해 왔다.
도준은 수화기를 집어 들며 청소 용역회사를 운영하는 최윤 선배의 사무실 번호를 떠올렸다. 동전을 넣고 숫자 버튼을 누르자, 곧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사장님 조금 전까지 여기 계셨는데... 잠깐 나가셨나 봐요. 어디시라고 전해드릴까요?
-저는 도준이라고 합니다.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그러시겠어요? 그럼 5분쯤 후에 다시 전화 부탁드릴게요.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뿌연 먼지구름 사이로 자전거를 탄 여자가 나타났다. 노란색 바람막이를 입은 여자는 전화 부스가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MTB 자전거가 빠르게 전화 부스를 스쳐 지나갔다. 흙먼지가 일렁이는 도로 위로 그녀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며, 마침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도준은 문을 밀치고 나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며 잠시 서 있었다.
어제 고모부 집 마당에서 본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장면 위로 22년 전 기억 속 어린 소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인연의 시곗바늘이, 어느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듯했다.
‘또 만나는군, 꼬마 아가씨.’
도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오래된 시간의 틈 사이로, 무엇인가가 다시 깨어나는 순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