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태일의 시선이 쓰레기 봉지 속을 훑는 동안, 서윤은 숨조차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처럼, 싸늘한 공포가 목구멍 깊숙이 차올랐다.


일부러 박박 구겨놓은 듯한 그 종이가 유독 태일의 눈에 띄었다. 결국 태일의 손끝에서 그 노트 종이가 딸려 나왔다. 그는 구겨진 종이를 펴더니, 그 위에 적힌 숫자들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

-누구 번호야? 이건 나서윤의 글씨체가 아닌데.


서윤의 얼굴빛이 삽시간에 하얗게 변했다.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심장이 바르르 떨렸다.


-, 전시회에 관련된 작가 전화번호예요. 명희 씨, 잘 아시죠?

-명명희? 알지. 우리 집에도 그림 몇 점 있잖아. 남미 여행 중 그린 거랑, 일본에서 귀국했을 때 전시했던 것도 있지.

-맞아요. 이번에 초대전을 기획 중이에요. 혹시 후원하실 생각 있어요?


태일은 서윤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불편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 나도 명명희 씨 팬이니 기꺼이 돕지.


그는 구겨진 노트 종이를 다시 쓰레기봉투 속에 넣고, 봉투째 손으로 꽉 비틀었다.


-리온에 전화했더니 화요일부터 휴가라던데, 왜 나한테는 출근한다고 거짓말한 거야?


태일의 목소리에는 의심과 짜증이 뒤섞여 있었다.


-갤러리 일정이 갑자기 바뀌었어요. 돌아가는 길에 명 선생님을 찾아뵈려고요.

-오늘?

-아니, 내일 뵈면 되죠. 그래서 휴가를 받은 거예요.

-그런데 전화는 왜 안 받았어? 통화만 됐어도 내가 이렇게 바쁜 와중에 여기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미안해요. 청소하다가 전화선이 빠진 줄도 몰랐어요.


서윤은 어색하게 말을 더듬었다. 입안이 메말라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태일은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더니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시 그녀를 향해 불쑥 손을 뻗어왔다. 어색하게 몸을 사리는 그녀를, 그는 노련한 종마처럼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쨌든 거짓말 한 벌은 받아야지? 안 그래?


그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끈적거리는 숨결을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손끝이 닿는 자리마다 피부는 긴장으로 굳어졌고, 뼛속 깊이 불쾌한 감각이 파고들었다그 깊고 흐릿한 감정의 틈새로, 도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녀는 몸을 살짝 뒤로 젖히며, 쉰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안 돼요. 턱이 아파서 그래요.


상처 난 턱을 손으로 감싸며 한 발 물러선 그녀의 눈빛에는, 태일이 끝내 읽어내지 못한 불신과 원망이 짙게 깔려 있었다.


-남자 마음을 그렇게 몰라? 너 때문에 내가 새벽부터 장거리 운전했잖아.


태일은 잠시 주춤했지만, 오늘따라 더욱 집요하게 굴었다.


-침대에 가서 좀 쉬자, 피곤을 풀어야지. 잠깐만이라도.


자신을 한낱 피로를 풀기 위한 도구쯤으로 여기는 뻔뻔함이, 그의 말투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온몸이 떨렸다.


미쳤어제발, 나한테서 떨어져.’


그녀는 다시 뒷걸음질했지만 태일은 사냥에 나선 짐승처럼 서서히 간격을 좁혀왔다. 그 눈빛엔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광기가 번뜩였다. 한 발, 또 한 발 뒤로 물러설수록 벼랑 끝이 가까워지는 듯했다한 남자의 폭력 앞에 굴복해야 한다는 현실이 폐쇄된 어둠 속으로 그녀를 더욱 깊이 밀어 넣었다.


도망쳐야 해. 이 더러운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해.’


이를 악물며 속으로 외쳤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아야 했다.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를 지켜내야만 했다. 숨결보다도 가느다란 희망 하나를 붙잡고, 서윤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하느님, 제발.’


그 순간, 시간마저 숨을 죽이고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지만, 세상은 끝없는 정적 속으로 잠겨 들었다. 한없는 어둠 속,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고, 손끝으로 붙든 무언의 기도는 끝내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없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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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현관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 도준의 차가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숨통을 점점 조여왔다. 서둘러 배낭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서려던 순간, 돌층계를 단숨에 뛰어 올라온 태일이 초인종을 거세게 눌러댔다. 그녀는 피할 겨를도 없이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턱은 그게 무슨 꼴이야? 어쩌다 다친 거야?


집 안으로 들어선 태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


-그게자전거 타다 넘어졌어요.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이 얼굴로 어떻게 사람들 앞에 나설 생각이야?


태일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무슨 모임이요?

-저녁에 아버지 생신 파티가 있어. 금천 강 씨 집안에선 공식 행사나 다름없는 날이지. 아버지가 당신을 친척들한테 소개하실 거야.


태일은 손을 내저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 얼굴 어쩔 거야. 우리 집안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신우건설의 강문태 고문은 권위와 겉치레, 가문과 혈통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자본과 권력은 혈연과 지연, 정략적 관계를 통해 치밀하게 축적되는 것이었고, 기성세대의 위신과 위계질서는 그 어떤 의심도 허용되지 않는 불가침의 체계였다.


강문태에게 서윤은 결코 아들의 배필로 적합하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를 중시하는 그의 눈에 서윤은 턱없이 부족해 보였고, 아들이 그런 평범한 여자에게 마음을 쏟는 것이 도무지 달갑지 않았다.

아들의 간청에 약혼은 어쩔 수 없이 승낙했으나, 그 인연이 결국 오래가지 못할 거라 여기며 결혼식을 계속 미룬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약혼식을 치른 지 벌써 일 년하고도 육 개월이 지났건만 서윤을 향한 강문태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고 의심으로 가득했다. 무심한 듯, 가끔 한마디씩 던지는 독화살 같은 말들은 서윤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았다.


-넌 얼굴에 그늘이 너무 많아. 젊은 애가 왜 그런 표정이니? 누가 죽기라도 한 거야?


-여자라면 싹싹하고 사근사근한 맛이라도 있어야지. 너처럼 울상은 곤란해. 없는 복도 달아난다니까.


실상 그는 이미 한 재력가의 외동딸을 아들의 배필로 점찍어두었고, 그 결합이 가져올 막대한 이익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2년 전, 서윤이 짐바브웨 쇼나 조각상을 성북동 집에 배달하지 않았더라면, 태일은 지금쯤 아버지가 택한 여자와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약혼 이후, 강문태 고문은 집안의 각종 행사에서 서윤을 배제하며 그녀를 의미 없는 존재로 취급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태일에게 직접 그녀를 데려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마침내 정식 며느리로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러나 오늘 밤 생일 파티에서 강 씨 일문 앞에 서야 한다는 중압감보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서윤의 마음을 훨씬 더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아래 공터에 도준의 차가 멈춰 서고, 그가 현관문 앞까지 자신을 데리러 올라올 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두 남자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상황만은 피해야 했다. 태일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집 안 구석구석을 훑었다. 그는 항상 눈치가 빠르고 직관이 예리한 남자였다.


서윤의 머릿속에서 압력밥솥 꼭지가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온도계의 수은주가 치솟았다. 공기 입자의 밀도가 임계치에 도달하기 전에,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태일은 정반대 방향으로 몸을 기울였다. 불시에 그녀를 끌어당겨 거칠게 입술을 덮쳤다. 화들짝 놀란 서윤은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쳐냈다. 황급히 돌아서서 테이블 주변을 정리하는 척 몸을 피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쳤고, 목소리는 메마른 톤으로 갈라졌다.


-, 아침부터 왜 이러는 거예요? 제 기분도 좀생각해 주세요.

-뭐야? 이건 좀 섭섭한데.

-중요한 행사라니 서둘러야겠네요. 거의 다 준비됐어요. , 쓰레기통을 안 비웠네요. 태일 씨가 제 짐을 들고 차에 가서 기다리세요. 금방 나갈게요.

-쓰레기 정도는 내가 버려줄 수도 있어. 얼른 마저 준비해.


태일이 부엌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비닐봉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어젯밤 서윤이 초록색 노트에서 찢어낸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도준이 전화번호를 적어 준,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메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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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그 즈음 도준은 거의 매일 오대산에서 아침 운동을 해왔다. 그러나 그녀와 약속이 있던 그날은 멀리 가지 않고 집 뒤 야산에 올라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른 아침 흘린 구슬땀은 몸뿐 아니라 마음속 구석구석까지 씻어내는 듯했고, 근육 깊이 배어든 개운함에 전신이 노곤하면서도 뿌듯한 성취감이 차올랐다. 그는 숲속의 신선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매일 정해둔 운동량을 오늘도 어김없이 지켜낸 셈이었다.


체력 훈련에 집중하는 동안에도 그녀와의 약속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지금 당장 보고 싶은데


그의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산길을 툭툭 밟으며 내려오다 보니, 누가 잡아끌기라도 한 듯 발길은 절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건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파란 지붕 집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가슴 깊이 설레는 감정이 커져만 갔다. 그녀에 대한 애틋한 심정, 같은 공간에 함께 있고 싶은 갈망이 그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그녀가 아직 잠들어 있을지, 아니면 벌써 일어나 아침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외출 준비를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잠깐이라도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는 기대감으로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하지만 무뢰한이 아니고서야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집 현관문을 두드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결국 그녀 집이 보이는 오솔길 어귀에서 걸음을 멈추며 스스로를 달랬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곧 그녀를 만날 수 있잖아.


그는 곧 네팔로 전지훈련을 떠날 예정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벌써부터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와의 인연이 새롭게 펼쳐지자마자 다시 헤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그렇다고 내년 로체봉 등정을 위한 이번 훈련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문 산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이토록 깊은 갈등에 빠진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일이 엇박자가 날 때도 있는 법이지. 오늘은 그저 오늘 일만 생각하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읍내 목욕탕에 들러 몸을 씻고 아침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날 아침 도준은 오로지 그녀 생각에만 사로잡힌 채 얼마 후 고모부 집에 도착했다.


대청마루의 괘종시계가 9시 종을 울리기 전, 그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 몸을 씻은 후 낚시터에서 쓸 물건들을 하나하나 차 짐칸에 실기 시작했다. 그녀를 위해 준비한 샌드위치, 커피, 생수, 잡다한 낚시용품들. 마지막으로, 그는 방으로 들어가 낡은 상자 안에 오랜 세월 고이 간직해 온 분홍신을 꺼내 왔다.


-결국 이런 날이 오게 된 거로군.


도준의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번졌다


용천 계곡 근처에, 동네 사람들만 드나드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오늘 오전, 도준은 서윤을 그곳 낚시터로 데려갈 계획이었다. 어린 시절 익사 사고가 남겼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오래 묻어둔 공포를 억지로 끄집어내는 일이 그녀에게 더 큰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다. 무서운 것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할 생각이었다. 물 공포증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약속 시각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준은 횡계 읍내 낚시 가게에 들러 민물 전자찌와 밑밥 파우더 세트를 사고 나서, 서윤이 있는 파란 지붕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숲속 비포장도로를 따라 녹슨 철조망과 배수로가 듬성듬성 이어지고, 양계장에서 흘러나온 닭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음악이나 들을까, 생각하며 라디오를 켜려던 그때였다. 검은색 BMW 한 대가 옆 샛길에서 튀어나와 거칠게 끼어들더니, 도준의 랜드로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흙먼지가 전면 유리를 덮치자, 도준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간발의 차였다. 이쪽에서 멈췄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대체 무슨 운전을 저렇게 하는 거야


도준은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도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앞으로 계속 가면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좁은 산길만 이어질 뿐이었다. 길 한쪽에는 잡초와 덤불이 무성하게 얽혀 있었고, 그 속에 오래된 표지판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곳은 막다른 길입니다. 돌아가시오.’


빛바랜 글씨는 거의 다 지워졌지만, 거뭇하게 남은 경고문의 흔적이 음습한 기운을 뿜어내며 상서롭지 않은 부적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운전자가 초행길이라 표지판을 미처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가슴 한가운데를 찌르는 듯, 이상하리만치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길 끝에 서윤의 파란 지붕 집이 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누군가가 일부러 그 집을 찾아온 것이라면, 도대체 그 정체는 누구일까.


방금 스쳐 지나간 BMW의 운전자는 신사복 차림의 남자였다.


-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서윤이 어제 했던 말이 번갯불처럼 떠올랐다.


-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


서늘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그 검은 차량이 단순히 길을 잘못 든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설마, 그녀의 약혼자?’


그런 의문이 떠오른 순간, 운전대를 쥔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더 이상 차를 움직일 수 없었다.


조수석에 놓인 분홍색 신발 한 짝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전 주인을 잃은 그 신발은, 어딘지 모르게 흐릿한 장막에 가려진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위협과 불확실한 추측들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마음을 쪼아댔다.


과연 내가 원하는 게 단순히 신발을 돌려주는 것뿐일까?’


어쩌면 오늘은 그 신발이 제 임자를 찾아가는 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두려운 건,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그는 아픈 진실을 안고 돌아서야 할지, 한 걸음 더 다가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채, 혼자 갈림길 위에 서 있었다. 무언가 자신의 등을 밀어내는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이승 저편에 아득하니 솟아 오른 로체 남벽이 떠올랐다. 자아의 한계를 시험하고, 불가능을 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그곳.


나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인가.’


짧고도 치명적인 물음이 심장 가장 안쪽을 긁고 지나갔다. 정답 없는 가설, 확신할 수 없는 명제들. 그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오는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윤은 그에게 끝없는 추측이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녀와의 인연은 허공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자일과 같았다.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목덜미 주위를 차갑게 감쌌다. 그것은 어쩌면 또 다른 운명의 시험대. 얽히고설킨 위태로운 줄에 의지한 채, 더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듯했다.


도준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차를 오솔길 옆에 천천히 세웠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마른 낙엽 하나가 차창 귀퉁이에 매달렸다. 파르르. 애잔하게 떨리는 그 나뭇잎을 바라보는 동안, 불길한 상상이 자꾸 떠올랐다.


그는 운전대를 꽉 움켜쥔 채 뚫어질 듯 정면을 응시했다.


-길을 잘못 들었을 거야. 돌아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


입속말로 낮게 웅얼거리며 마음을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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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어젯밤, 도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심장이 타들어 갈 듯 괴로웠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세 번째 벨이 울릴 때까지 그녀는 거의 숨도 쉬지 못했다. 네 번째 전화벨이 울리기 전에 그나마 제정신을 찾은 게 얼마나 다행이었던가. 그녀는 짧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


그녀의 말에 순간 고통의 그림자가 일렁이던 그의 눈빛을 또렷이 기억했다. 그러나 그는 곧 떠날 사람, 나는 이 현실 속에 남을 사람 아닌가. 이미 정해진 길 위에서 어설픈 유혹과 날것에 가까운 본능에 휘말린다면, 결국 남는 것은 깊은 회한과 상처뿐이라는 걸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낚시터까지만 가자. 오늘이 지나면 다 지난 얘기가 되는 거지.


그녀는 전화 플러그를 다시 꽂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동안 진공청소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안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기다림은 차갑게 식은 커피잔 속 침묵이자, 스스로를 시험하는 고요한 형벌이다. 시간은 황소 걸음처럼 느릿느릿 움직였고, 벽시계의 초침만이 째깍거리며 초조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청소기 선을 정리해 보관함에 넣고, 노트북을 접어 배낭의 짐 정리까지 마친 그녀는 가끔 창밖을 내다보며 그의 차가 집 앞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마침내 저 멀리서 묵직한 자동차 소리가 숲속의 아침 정적을 가르며 다가왔다. 벽시계는 거의 10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녀는 낚시터에 들렀다가 곧장 서울로 돌아갈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겨우 5분 먼저 온 거야? , 그렇게까지 딱 맞춰올 일이냐고.


장난기 어린 말투 속에는, 모처럼 소풍을 앞둔 어린 여학생처럼 들뜬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녀는 커피잔을 급하게 헹궈 식기 건조대에 엎은 뒤, 핸드백과 현관 열쇠를 챙겨 들었다. 그 사이 자동차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그녀의 심장도 덩달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떨리는 거야? 그만. 그만


손바닥으로 가슴을 다독이듯 툭툭 치며 말했다.


가슴속에서 꿈틀대던 설렘을 억누르며 창가로 다가서던 순간, 귓가를 파고든 뜻밖의 엔진음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뭐지? 그 차가 아니야?’


도준의 낡은 랜드로버와는 결이 다른, 매끄럽고 단단한 울림이었다. 순식간에 실내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따스한 온기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기다림은 때때로 마지막까지 우리의 마음을 유리구슬처럼 쥐고 흔들다가, 가장 빛나는 순간, 가장 잔혹한 미소로 모든 희망을 짓밟곤 한다.


그날 아침, 서윤은 현실이 들이민 느닷없는 형태의 맨얼굴과 마주쳤다.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이던 차는 아침 내내 기다린 도준의 낡은 랜드로버가 아니라, 서울에 있어야 할 태일의 최신형 BMW 7시리즈였다.


-아악!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손에서 현관 열쇠가 툭, 떨어졌다. 온몸에 미세한 떨림이 번지기 시작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불안하게 흔들렸다. 별장 앞 공터에 검은 흉조 한 마리가 내려앉은 듯 살얼음 같은 정적이 감돌았다. 세상의 끝에서 시곗바늘조차 멎은 것처럼, 모든 것이 정지한 순간이었다.


마침내 운전석 문이 열리고, 말끔한 신사복 차림의 태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는 늘 그렇듯, 무기력한 권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무심하고도 싸늘한 시선으로 별장을 올려다보았다. 한쪽 끝이 말려 올라가듯 일그러진 그 입매를 본 순간, 불길한 예감과 함께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태일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마음 편하게 한 적이 없었다. 차갑고 빈정대는 말투와 고압적인 태도의 저변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의 과장된 호의는 친절이라기보다 오히려 덫처럼 느껴졌고, 그 속에는 자신의 여성성을 조롱하고 무너뜨리려는 음험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평소 태일에 대한 경계심을 품고 몸을 사려왔던 서윤에게, 그의 돌연한 출현은 숨이 막힐 듯한 악몽과도 같았다. 잠시라도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렸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챈다면, 그 순간 발밑에서 지옥문이 벌컥 열릴 것임을 그녀는 본능처럼 알고 있었다.


서윤은 거친 숨을 고르며 두려움을 눌러 보려 애썼다. 곧 도준이 데리러 올 시간이었고, 그의 랜드로버가 금세 별장 앞에 도착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앞에 놓인 거대한 벽, 그 중심에는 태일이 서 있었다.


왜 그는 이곳에 나타난 걸까.


무엇 때문에 갑자기 오게 된 것일까.


어젯밤 제이와 나눈 전화 통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태일은 제이에게 서윤의 행방을 물었다고 했다. 그녀가 횡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제이였다. 그가 이 시간에 횡계에 닿으려면 적어도 새벽 7시 이전에는 성북동을 떠났어야 한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것은 분명 급한 일이 생겼기 때문일 터였다.


나를 데려가려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일이 있는 걸까?’


삶의 실체는 때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휘몰아치곤 한다. 그것은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혼란이자, 인생의 거대한 크레바스였다. 그날 금요일 아침, 서윤은 그 소용돌이 속으로 한층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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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아침 여덟 시가 막 지나서야 서윤은 눈을 떴다. 지난밤, 처음 만난 남자의 전화번호 하나를 두고 한참을 실랑이하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으니, 그리 오래 잠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투명한 햇살이 흘러내리듯 얼굴을 어루만지자, 뒤엉켰던 자책과 갈등이 희미한 신기루처럼 가볍게 흩어졌다. 그녀는 침대 위에서 팔과 다리를 길게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아아-

 

기분 좋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계단을 따라 거실로 내려갔다. 맨발로 마룻바닥을 디딜 때마다 미세하게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어린아이처럼 솟구치는 즐거움이 온몸을 감쌌다. 그녀는 스토브 위에 물 주전자를 올리고 라디오를 켰다. 제목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레게풍의 경쾌한 선율이 넘실거리며 집 안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그녀는 고양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듯 양팔을 둥글게 벌리며 가벼운 스텝을 밟았다. 햇살 가득한 아침, 새봄의 청량한 공기 속에서 그녀의 몸이 가볍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즉흥적인 리듬에 몸을 맡긴 채 빙글빙글 돌아가던 그녀는 어느새 상상 속 누군가와 춤을 추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두 남자의 시선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미 양가의 허락 아래 약혼식을 올린 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이제 막 그녀의 삶 속에 스며든 낯선 이였다.


신우건설의 후계자, 무엇이든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의 판단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강태일이라면, 이 순간을 두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냉소 어린 눈빛으로 비웃듯 한쪽 입술을 비틀며, ‘나잇값 좀 하라는 쓴소리를 던졌으리라. 나잇값과 댄스의 함수관계는 과연 어디까지 무관한 것일까. 이 환히 밝고 유쾌한 순간마저, 유치하고 철없는 치기라며 가볍게 깎아내렸을 것이다.


반면, 길 위에서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걷는 남자, 도준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렇게 춤을 추고 있는 그녀를 향해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마음속으로는 함께 발을 맞췄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들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 설렘에 주저 없이 동조해 주지 않았을까.


그녀는 불현듯 몸을 돌려 식기 건조대 위에 엎어둔 머그잔을 집어 들었다. 어제 도준이 커피를 마셨던 바로 그 잔이었다. 그의 입술이 스쳤을 자리에, 조심스레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짧았던 입맞춤의 감촉이 입술 끝에 되살아나며, 달콤한 부끄러움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내일 아침 열 시쯤 데리러 오겠습니다.


도준이 남기고 간 말이 다시금 귓가를 맴돌았다. 오늘이 그와 함께할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가슴 어딘가가 텅 빈 듯 허전해졌다.


그녀는 스스로의 변화를 절감했다. 이제껏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찾아올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준은 처음부터 다른 존재였다


그를 향한 이 갈망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새로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호기심. 이 설레는 마음이 낯설어서 나 자신의 경박함을 탓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잠시라도 그의 곁에 좀 더 머물고 싶다는 간절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 상황을 가벼운 접촉 사고라 여기고 싶었다. 그러니 가능한 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히 흘려보내는 것이 상책이었다. 고요하고 정돈된 삶의 가치를 지켜내리라, 이번에도 별다른 동요 없이 잘 지나가리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잠깐 스쳐 가는 바람일 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 잊게 될 거야.


바람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쓸쓸함이 그녀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처럼 떠올랐다.

 

멀리 보리암에서 울려 퍼진 웅장한 타종 소리가 아득히 번져왔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씩 음미하며 포크로 달걀물을 젓기 시작했다. 햄을 썰어 넣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아침부터 기름진 냄새는 내키지 않았다. 좀 더 부드럽고 간소하게 먹는 게 위장에도 편할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치고 빈 접시를 싱크대에 옮기려는데, 한 가지 의문이 불쑥 떠올랐다.


낚시터에서 보여 줄 게 있다고 했지그게 뭘까?’


그 남자는 순간의 기분에 휩쓸려, 혹은 궁색한 변명 삼아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혹시 김 씨 할아버지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하필 낚시터여야만 하는 거지. 정작 중요한 것은 보여 줄 무엇이 아니라, 어쩌면 낚시터라는 장소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생각은 자꾸만 얽혀 갈 뿐, 단 하나의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았다.


-에잇, 청소나 하자.


그녀는 마음에 남은 의구심을 털어내고 서둘러 집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릇을 모아 설거지를 마친 뒤, 행주를 빨아 싱크대 주변과 테이블 위를 닦았다. 청소기를 돌리려던 찰나, 전화 단자에서 뽑아 놓은 전화선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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