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김미진


인사동 밤거리에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윤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섰다. 뿌옇게 흐린 유리 벽 너머로, 수묵화처럼 번지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아스라이 멀어져 간 옛 기억들을 떠올렸다.


방화동 손 화실을 다니던 어린 시절, 손문기 선생을 따라 드나들던 인사동 거리에서 그녀는 운 좋게 한국 화단의 원로 거장들을 먼발치에서 뵐 수 있었다. 이름으로만 듣고 작품으로만 알던 대가들을, 숨죽이며 지켜본 기억은 놀람과 설렘 그 자체였다.


사춘기 소녀에게 꿈과 낭만을 선사하던 예술가들의 거리. 지금은 그 모든 시간이, 그녀가 매일 맞서는 현실과 책임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덧 29세가 된 그녀에게는 때때로 숨을 돌릴 만한 공간이 필요했다. 공중전화 부스는 그럴 때마다 잠시나마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은밀한 쉼터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오늘 밤, 전화 수화기를 손에 쥔 서윤의 마음은 무거웠다.


강태일과 약혼한 지도 어느새 1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는 까다롭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의 기준으로 늘 그녀를 대해왔다. 지금도 그가 미간을 찡그린 채 자신의 전화만을 기다리고 있을 걸 생각하자 몸이 절로 굳어졌다. 그는 즉시 연락이 안 되면 괜한 짜증으로 그녀를 힘들게 했고, 자신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대하는 태도 역시 용납하지 않았다.


서윤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전화번호를 눌렀다. 전화벨이 세 번 울렸다. 미간을 찌푸린 채 전화통을 바라보고 있을 태일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 네 번째 전화벨이 울리고 나서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바빴나 봐?

-미안해요. 전시 준비하느라 자리에 없었어요.

-아직 일 안 끝났어?

-, 뒷마무리가 남았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내일 쉬는 날이잖아. 12일 여행 가자고. 오늘 밤 떠났다가 내일 오후에 돌아오면 돼.


그의 말투는 유독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움이 서윤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의 뜻에 반하는 말을 꺼내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12일의 여행이라니. 젊은 남녀에게 그것은 은연중에 하룻밤의 관계를 전제하는 말이 아닌가.


나를 너무 쉽게 여기는군.’


서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더 이상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최근 들어 그가 점점 더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마음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 싫어? 우리 밤에 같이 있었던 것도 꽤 오래됐잖아.


강태일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들떠 있었다. 그 안에 조급한 갈증이 묻어났다.


-아니, 그건 알지만

-뭐가 문제야? 내가 지금 당장 데리러 갈게.


잠시 망설이던 서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생각할 틈도 없이 둘러댄 말이었다.

 

-아니요. 내일 출근해야 해서요.

-출근해?


그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번 전시를 수요일에 제대로 오픈하려면 정리할 게 아직 많아요.

-너무하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이잖아. 리온에서 사람을 너무 부려 먹는군.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못 끝낸 거예요. 제 책임이니 끝까지 해야죠.

-, 그런데 거그 갤러리 언제까지 다닐 셈이야? 이제 쉴 때도 되지 않았어?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은 미래의 배우자를 향한 배려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질문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것만 귀하게 여겼고, 타인이 지닌 가치나 바람쯤은 쉽게 흘려보냈다.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서윤은 고개를 저었다. 인사동 거리를 밝히는 크고 작은 불빛들이 그녀의 혼란스러운 마음처럼 흔들렸다. 소녀 시절, 예술가의 꿈을 처음 품게 했던 이 거리. 그 꿈을 지키기 위해 버텨온 시간과 노력만큼은 허망하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의 요구에 맞춰 움직이고, 약속을 조율하고, 성적 주체성을 내어준 채 여행에 나서고, 가족사마저 복잡한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결혼 후 펼쳐질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묶이지 않은 채,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가고 싶었다. 한 집안의 울타리에 갇혀 쉽게 소진될 인생이라면, 지금껏 애써 걸어온 이 길은 애초부터 의미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서윤은, 곧 남편이 될 약혼자와의 잠자리가 꺼림칙하다는 말을 끝내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아직 너의 여자가 아니라고, 쉽게 허락할 내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긋는 일도 그녀에겐 쉽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앞으로 닥칠 일보다 방화동 식구들의 얼굴을 먼저 떠올렸는지 몰랐다. 늙으신 아버지는 은퇴를 앞두고 있었고, 병약한 어머니는 여전히 자주 자리에 눕곤 했다. 집안의 기둥이어야 할 오빠는 사업 실패 이후 신용불량자가 되어,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집안 사정들을 떠올릴수록, 그녀는 도무지 자기 입장만을 앞세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 지금은 좀 그래요


태일은 신경을 건드리는 말들을 이어갔지만, 서윤은 늘 그러하듯 감정을 숨긴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마침내 전화를 끊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오늘 하루는 유난히 길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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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사무실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가 눈에 띄었다. 그 위에는 강태일의 이름과 함께 회신 부탁이라는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서윤은 수화기를 집어 들려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우건설의 후계자인 강태일을 처음 만난 건, 서윤이 뉴욕대 미술사 프로그램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였다.


그 무렵 리온 갤러리에서는 아프리카 조각전이 한창이었다. 최희숙 관장이 직접 짐바브웨에서 선별해 온 쇼나 조각은, 새로운 문화에 대한 열망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당시 한국 미술계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서윤은 작품 목록을 손에 든 채 전시장을 찾은 컬렉터들을 일일이 응대하고 있었다.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이나 야수파의 원시주의와 연결 지어 덧붙이는 그녀의 설명만으로도 관객들은 20세기 초 파리 아방가르드의 현장에 직접 서 있는 듯한 몰입과 감동을 표했다. 짐바브웨의 열악한 경제 사정과 환율 변동으로 인해 작품 가격이 예상보다 낮게 책정되었다는 것도 전시회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이국의 원시성과 현대 미술적 맥락이 결합된 전시는 컬렉터들의 예술적 향수를 자극했고, 작품 구매 열의는 한층 고조되었다.


강태일도 그때 자기 누나 강수경과 함께 리온 갤러리를 찾았다.


-짐바브웨의 쇼나 조각은 전통적인 아프리카 석조 예술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입니다. 석영, 말라카이트, 록 마블, 호화석 등으로 다듬어진 이 조각들은 부드러운 표면 덕분에 섬세한 조형을 가능케 하며, 그 독특한 윤기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신입 큐레이터였던 서윤이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태일은 두 눈을 반짝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서윤은 어딘지 모르게 끈적이는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애써 모른 척 외면하며 준비한 말만 끝까지 전한 뒤 자리를 피했다.


쇼나 조각전이 끝난 얼마 후, 서윤은 관장의 요청으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성북동에 있는 강태일의 본가로 향했다. 조각상을 직접 배달하기 위해서였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언덕길 골목으로 차량이 들어서자, 주차장과 맞닿은 문을 지나 드넓은 정원이 펼쳐졌고, 집 울타리 안은 대도시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고요와 적막이 감돌았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길래 이렇게 꾸미고 살지? 집도 무슨 미술관 같잖아.

-, 조용히 해.


작품을 함께 나르던 남자 직원들이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잔디밭에 놓인 디딤돌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프렌치 도어 양식의 현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 큰 거실에는 대동여지도 같은 고서화와 고가구, 오래된 골동품들이 품격 있게 놓여 있었다. 그날 배달된 쇼나 조각은 모두 여덟 점이었다.


-어서 와요. 그런데 아프리카 조각인지 뭔지, 전시장에서 봤을 때와는 좀 다른 것 같네. 안 그런가?


강태일의 누나 강수경은 서윤을 마치 자기 밑에 있는 여직원처럼 대하며, 무례하게 굴었다. 그런 누나 옆에서 어슬렁거리던 태일이 입꼬리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은 채, 서윤에게 느닷없이 데이트를 제안했다.


-우리 언제 같이 저녁 먹을래요? 그쪽에 흥미가 있어서

-미쳤니? 처음 보는 여자한테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


강수경은 눈을 부라리며 남동생을 나무랐다.


-처음 보긴? 그때 리온에서 만난 큐레이터, 나서윤 씨잖아.


인사동 첫 만남부터 몹시 눈에 거슬리던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윤은 더욱 불쾌함을 느꼈다. 리온 갤러리의 일개 큐레이터라는 직함이 이런 자리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들이 속한 세상과 자신의 세계가 너무 다르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들 앞이라도 함부로 얕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조각품 자리 배치가 끝난 후, 서윤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 했다.


-, 잠깐만요. 제가 실례를 했다면 용서하세요.


태일은 그녀 앞으로 다가서며 짐짓 성의를 담은 표정으로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이제 갤러리로 돌아가야 해서요.

-그렇군요.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나면 좋겠네요.


서윤은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일주일 뒤, 강태일이 서윤 앞에 다시 나타났고, 그 후 벌어진 여러 사건과 기막힌 사연들이 결국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한때 조각품을 배달하던 갤러리 여직원은 어느새 성북동 유력가 집안의 약혼녀가 되어 있었다. 강태일의 아버지 강문태는 신우건설의 창립자였고, 그의 맞아들인 태일은 스탠퍼드 MBA를 마치고 귀국한 뒤 전략기획실장으로 근무 중이었다. 수도권 재건축 사업을 기반으로 굳건한 실적을 쌓아온 이 중견 건설사는 업계에서도 묵직한 실속형회사로 평가받았다.


-성북동의 컬렉터라. 이제 신분 상승 사다리에 올라타신 건가요?


언젠가 친구 제이가, 비아냥조로 서윤에게 던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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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최 관장은 회고전에 관해 몇 가지 문제점을 더 지적하다가,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목소리 톤을 낮췄다.


-명명희 선생님, 요즘은 어떠신가?

-?

-벌써 연세가 일흔 중반이잖아. 어디 예전만 하시겠어.

-, 네에.

-그래도 작업은 꾸준히 하시는 거지?

-저기매일 작업실에 계시는 것 같아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명명희 화백은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원로 화가로, 일제 강점기 시절 홀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선구적이고 독립적인 여성 작가였다. 시중에 진품을 위조한 모조품들이 횡행할 정도로, 그녀의 작품 가치는 한층 더 치솟아 있었다. 서윤이 갤러리 리온에 입사한 뒤 처음 참여한 전시도 바로 명명희 화백의 개인전이었다. 그 전시를 계기로 서윤은 선생 측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자연스레 신뢰를 쌓아왔다.


-내년 상반기 중에 명명희 선생의 미공개작들을 모아 개인전 기획했으면 좋겠는데. 어때?

-, 글쎄요


서윤은 잠시 머뭇거리다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명명희 선생은 한동안 위작 사건에 휘말려 법적 송사를 치른 뒤로, 대외 활동은 물론 전시에서도 한발 물러난 채 지내왔다. 그 일 이후로는 외부인과의 만남마저 피하고 있었다.


-선생님 건강 더 나빠지기 전에, 특별전처럼 전시 한번 기획해 봐.

-제가요?

-이 일만 성사되면, 내가 힘 좀 써볼게.

-? 무슨

-, 모교에서 미술사 강의하고 싶잖아. 거기 학장을 내가 잘 알아. 어때, 나쁘지 않은 거래지?


최 관장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인간관계란 보이지 않는 거래와 은밀한 욕망으로 촘촘히 엮인 그물 같은 것. 그런 셈법을 읽고 조율하는 데 있어 그녀만큼 노련한 이도 드물었다.


서윤은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입시학원 강사 일을 병행하며 미술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리온에 입사한 뒤에는 문예진흥원 연구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1년간 뉴욕대에서 객원 연구원으로 미술사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리온은 이름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화랑이었지만, 권위적이고 이기적인 오누이 밑에서 직원들은 늘 소모품처럼 다뤄졌다. 오너의 잇속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이곳에서, 서윤의 큐레이터라는 직함은 허공에 잠시 걸어둔 명패처럼 공허했다.


언제 잘릴지 모를 현실을 떠올릴 때마다, 차라리 대학 강단에서 미술사를 가르치며 경력을 쌓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속내를 관장은 이미 빤히 꿰뚫고 있었다. 내년이면 어느새 서른. 리온에서 점점 좁아지는 자신의 입지를 생각할 때, 관장의 눈 밖에 나는 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였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휴가 줄게. 당분간 갤러리에 나올 필요 없어.

-? 그게 무슨손문기 선생님 오프닝은 어쩌고요?

-손 화백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거 나도 잘 알지. 그런데 어차피 돌아가신 분이잖아. 기자들 대접하고 홍보는 최 실장이 맡을 거고, 서윤 씨가 컬렉터들을 직접 상대할 것도 아니고, 그렇지?


그녀의 청소년기를 보듬어준 옛 스승을 기리는 회고전이었다. 오프닝 행사에는 예전 방화동 화실 식구들도 몇몇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했잖아. 좀 쉬어야지. 그렇다고 마냥 무작정 쉬라는 건 아니고

-그럼

-이번 기회에 명명희 선생 작업실도 방문하고미공개 작품들이 얼마나 쌓였는지 확인하는 게 좋겠지? 선생 개인전 기획안도 한번 작성해 보고. , 대전 시립 미술관에 좋은 전시회 있던데 거기 포함해서 몇 군데 둘러봤으면 해. 이번 기회에 우리 리온을 위해 서윤 씨 능력을 한 번 보여줘. 지금 우리가 원하는 건 바로 그거야.


최 관장은 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했다. 우리라니. 우리속에 는 존재하는 걸까.


-알겠습니다.


서윤은 손바닥에 자국이 날 정도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곳에서 과연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창밖에는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먼 거리에서, 아득한 밤의 소음이 번져왔다. 그건 먼 우주에서 실려 온 정체 모를 수신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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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그림을 끝까지 지켜낸 알바생은 신음을 삼킨 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서윤도 화폭이 기우는 쪽으로 휘청였으나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두 사람은 그림 양 끝을 꼭 붙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서윤이 묻자, 알바생이 괜찮아요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등 뒤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리온 갤러리의 대표, 최희숙 관장이었다. 하필 그 순간,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관장이 1층 메인 전시실로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미친다 정말. 지금 이 작품이 얼마짜린지 알아?


쓰러진 사다리와 긴장한 직원들을 훑어보던 그녀는 곧바로 서윤이 바치고 있는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윤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관장은 손을 들어 그 말을 잘랐다.


-이 작품 훼손되면 누가 책임질 건데? 너야?


조명을 조정하던 남자 직원이 한쪽 다리를 절며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사다리가 갑자기 흔들려서

-많이 다쳤어요?


서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 직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알바생은 어깨를 으쓱하다가 어정쩡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최 관장의 관심은 오로지 그림 상태에만 쏠려 있었다. 그녀의 안경 너머 시선은 차가웠고, 말투는 그보다 더 냉랭했다.


-이 정도라 그나마 다행이군. 쯧쯧, 칠칠맞지 못하게앞으로는 좀 더 조심들 하시지, ?


직원들은 숨을 죽인 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서윤 씨, 잠깐 내 사무실로 올라와.


최 관장은 마지막 말만 툭 던지곤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알바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그림의 무게가 조금 전보다 훨씬 묵직하게 느껴졌다.

 

1968년에 처음 문을 연 리온 갤러리는 인사동 거리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을 선도하며, 역사 깊은 화랑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곳에서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박서보, 이우환, 정창섭, 최욱경 같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뿐 아니라, 가끔은 샤갈, 마티스, 클림트, 라울 뒤피, 앤디 워홀 같은 외국 거장들의 작품도 특별 전시되었다. 또한, 장래성 있는 젊은 작가들을 꾸준히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 제작과 프로모션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


관장실은 리온 갤러리의 지난 세월을 집대성한 기록과 자료로 가득한, 말하자면 작은 보물창고였다. 리온의 실질적 오너이자 관장인 최희숙은 60대 후반의 여성으로, 한국 화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출발은 지금은 철거된 소공동 반도호텔 지하 갤러리의 카운터였다. 막 여고를 졸업한 풋풋한 나이에 그곳에서 맺은 화가들과의 인연은, 시간이 흐르며 한국 화랑계를 대표하는 화상으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3층 복도 끝, 리온 갤러리 관장실에 들어서면, 40평 남짓한 공간에 오래된 자료와 화집, 엽서, 도록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최희숙 관장은 데스크에 앉아 서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번뜩이는 표정에 서윤은 순간, 어깨가 움츠러드는 기분을 느꼈다.


-작품 배치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왜 그 작품을 이제야 옮기는 거지?


그녀는 안경테를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최 회장님 사모님께서 그 작품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지 않으면 다시 가져가겠다고 하셔서요.


서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장 사모님까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좀 지나치지 않나?

-, 당연히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가 정당하게 빌린 거잖아.

-물론이죠. 그런데, 이번 전시회를 위한 협찬이라서

-답답할 노릇이네.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 그게 무슨

-‘공작 도시시리즈는 함께 묶어서 전시해야, 그 후광을 살릴 수 있지. 안 그래?

-, 당연히이번 회고전 도록에도 차례대로 함께 실려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작품은 공작 도시시리즈 중에서도 대표작이야.일반에게 공개되는 것도 거의 처음이잖아. 그런 작품을 뚝 떼서 따로 전시한다고? 맨 앞에만 전시하면 장땡인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워낙에 고집이

-알았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 그 작품은 원래 자리로 돌려놓도록 해.

-, 네에알겠습니다.


그녀는 옛 스승의 전시회를 끝까지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어깨가 무거웠지만,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흔들렸다관장이 알아서 한다니, 더는 나설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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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월요일 오후, 인사동의 리온 갤러리는 전시회 준비로 분주했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이라 불리던 손문기 화백의 회고전으로, 오프닝 행사는 이틀 뒤인 수요일 정오에 열릴 예정이었다. 내일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휴관일이라서 오늘 안으로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

-, 걱정하지 마세요.


서윤은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과 함께 커다란 캔버스를 옮기고 있었다. 나무 액자까지 씌워진 100호짜리 그림은 두 사람이 간신히 들 수 있을 만큼 묵직했다. 다른 방해물들을 피해 가며, 두 사람은 그림 표면이 가능한 한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레 이동했다그때 최승주 실장이 2층 사무실로 올라가려다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나 선생. 전시 화보와 도록은 어떻게 된 거야?

-수요일 아침에 인쇄소에서 직접 가져오기로 했어요.

-초대장 발송은?

-지난주에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중에 이걸 다 끝낼 수 있겠어?


그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전시실을 둘러보며 던진 말이었다. 아직 설치를 마치지 못한 작품들이 벽을 따라 여럿 남아 있었다.


-거의 다 됐어요. 이제 작품에 레이블만 붙이면 됩니다.


서윤이 미소를 지으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나 선생, 분류 번호, 사이즈, 사용된 재료, 하나하나 꼼꼼히 잘 점검해. 저번처럼 뒤섞이는 일 없도록 조심하고. 다들 아셨죠?


최 실장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자,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그는 관장 최희숙의 남동생이자, 갤러리 운영 전반에 막강한 권한을 쥔 인물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공기가 싸늘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번져갔다리온 갤러리에 5년 넘게 몸담아온 서윤조차도 최 실장 앞에서는 업무에 필요한 말 외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이곳에서 오래 일한다는 건, 능력보다도 침묵과 인내를 먼저 배웠다는 뜻이었다.


서윤은 리온 갤러리의 큐레이터였다. 전시 기획과 작가 섭외, 작품 리스트 정리, 도록 제작과 홍보 등 갤러리 실무의 중심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늘 생각했다. 전시란 곧 균형의 예술이라고. 주제의 통일성과 시선의 흐름, 여백의 배치와 조명 각도 하나하나가 철저한 계산 아래에서야 비로소 조화를 이룬다고 믿었다. 그 조율은 캔버스 너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동료들 사이의 공기, 말의 온도, 침묵의 간격까지. 서윤은 전시를 준비하는 공간 전체를 하나의 작품처럼 가다듬고자 했다.


최 실장이 자리를 뜨자, 전시실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다들 조금만 더 힘내요. 오늘 오버타임을 해도, 내일은 푹 쉴 수 있잖아요.


서윤이 내일이라는 단어에 살짝 방점을 찍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내일? , 내일!


직원 하나가 긴 숨을 내쉬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 다시 힘 좀 써봐요.


서윤의 말에 알바생이 다시 캔버스를 번쩍 들었다. 그 바람에 액자가 휠 듯 출렁이며 캔버스 표면이 크게 흔들렸다.


-아아, 맙소사! 작품은 아기 다루듯 천천히.

-, 죄송합니다.


알바생이 얼굴을 붉히며 난감해했다.


이 전시는 서윤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손문기 화백에게서 직접 그림 지도를 받으며 미술의 기초를 다졌다. 방화동 공항시장 근처에 있던 손 화실은 스승의 거처이자 작업실이었고, 입시생과 취미생이 함께 모여 그림을 익히던 공간이기도 했다. 드나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늘 가족 같은 친밀감이 흘렀다.


선생은 늘 제자들에게 따뜻하고 자상했다. 작고 구부정한 몸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묵직한 에너지가 배어 나왔다. 깊고 맑은 눈매와 걸걸한 숨소리, 말투와 웃음, 드로잉 도구를 다루던 손끝의 습관과 팔레트 위에 물감을 짜던 손놀림까지, 모든 것이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했다. 선생은 가끔 화실 식구들과 야외 스케치를 다녀오곤 했다. 김포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가져간 재료로 소박한 한 끼를 나누던 날들. 그가 남긴 그림일기와 예술과 삶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겹겹이 쌓여,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서윤을 만들어주었다.


리온 갤러리는 인사동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는 화랑이었다. 이곳에서의 전시는 곧 한국 미술계 한가운데에 작가의 이름을 새기는 일이기도 했다. 손 화백의 존재감은 이제 분명한 보폭으로 한국 화단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미술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을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미 세상을 떠난 스승의 회고전을 직접 준비하고 있는 지금, 서윤에게 이번 전시는 끝까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하나의 과제이자 의무였다.


-그렇지, 그렇지. 조금만 더 왼쪽으로

-!


알바생의 이마에는 땀이 번들거렸다. 점심 이후 그는 거의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일하고 있는 그를 보며, 서윤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옮기고 있는 작품은 손 화백의 1980년대 대표작, ‘공작 도시연작 중 하나였다. 마티에르의 질감을 밀도 높게 쌓아 올린 회색 화면 속엔, 무너진 철근과 도시 구조물이 서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뒤엉켜 있었다.


서울을 배경으로 한 도시 풍경화에는 거대한 기계 도시의 혼란과 욕망이 거칠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하철 2호선 공사로 뒤엉켰던 도심, 해머 드릴의 쇳소리. 데모 진압대가 쏜 최루탄 가스와 시위대의 함성,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자동차들, 무질서하게 파편화된 거리의 모습. 그 속에 잠복한 디스토피아적 환영과 자본주의의 그늘을 손 화백은 누구보다 일찍, 누구보다 날카롭게 포착해 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서윤은 여전히 회색 지대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선생의 그림 앞에서, 그 시대를 통과해 온 자신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알바생과 공작 도시를 들고 중앙 갤러리 입구로 향하던 그때, 사다리가 비틀거리며 한쪽으로 쏠리는 모습이 서윤의 시야에 들어왔다.


-, 조심해!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다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조명을 조정하던 남자 직원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다리가 쓰러지면서 이동 중이던 '공작 도시'를 그대로 덮칠 기세였다.

그 순간, 알바생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등으로 사다리를 밀쳐내며, 한쪽 팔로는 그림을 감쌌다. 간발의 차로 더 큰 충격을 막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발등으로 그림 아래를 받쳐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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