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그림 김미진
그 즈음 도준은 거의 매일 오대산에서 아침 운동을 해왔다. 그러나 그녀와 약속이 있던 그날은 멀리 가지 않고 집 뒤 야산에 올라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른 아침 흘린 구슬땀은 몸뿐 아니라 마음속 구석구석까지 씻어내는 듯했고, 근육 깊이 배어든 개운함에 전신이 노곤하면서도 뿌듯한 성취감이 차올랐다. 그는 숲속의 신선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매일 정해둔 운동량을 오늘도 어김없이 지켜낸 셈이었다.
체력 훈련에 집중하는 동안에도 그녀와의 약속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지금 당장 보고 싶은데…
그의 입가에 쑥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산길을 툭툭 밟으며 내려오다 보니, 누가 잡아끌기라도 한 듯 발길은 절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누군가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건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파란 지붕 집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가슴 깊이 설레는 감정이 커져만 갔다. 그녀에 대한 애틋한 심정, 같은 공간에 함께 있고 싶은 갈망이 그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그녀가 아직 잠들어 있을지, 아니면 벌써 일어나 아침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외출 준비를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잠깐이라도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는 기대감으로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하지만 무뢰한이 아니고서야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집 현관문을 두드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결국 그녀 집이 보이는 오솔길 어귀에서 걸음을 멈추며 스스로를 달랬다.
-조금만 기다리면 돼. 곧 그녀를 만날 수 있잖아.
그는 곧 네팔로 전지훈련을 떠날 예정이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벌써부터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와의 인연이 새롭게 펼쳐지자마자 다시 헤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그렇다고 내년 로체봉 등정을 위한 이번 훈련을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문 산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후, 이토록 깊은 갈등에 빠진 것은 처음이었다.
-세상일이 엇박자가 날 때도 있는 법이지. 오늘은 그저 오늘 일만 생각하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읍내 목욕탕에 들러 몸을 씻고 아침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그날 아침 도준은 오로지 그녀 생각에만 사로잡힌 채 얼마 후 고모부 집에 도착했다.
대청마루의 괘종시계가 9시 종을 울리기 전, 그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 몸을 씻은 후 낚시터에서 쓸 물건들을 하나하나 차 짐칸에 실기 시작했다. 그녀를 위해 준비한 샌드위치, 커피, 생수, 잡다한 낚시용품들. 마지막으로, 그는 방으로 들어가 낡은 상자 안에 오랜 세월 고이 간직해 온 분홍신을 꺼내 왔다.
-후… 결국 이런 날이 오게 된 거로군.
도준의 입가에 그윽한 미소가 번졌다.
용천 계곡 근처에, 동네 사람들만 드나드는 작은 저수지가 있었다. 오늘 오전, 도준은 서윤을 그곳 낚시터로 데려갈 계획이었다. 어린 시절 익사 사고가 남겼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오래 묻어둔 공포를 억지로 끄집어내는 일이 그녀에게 더 큰 상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다. 무서운 것과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할 생각이었다. 물 공포증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약속 시각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준은 횡계 읍내 낚시 가게에 들러 민물 전자찌와 밑밥 파우더 세트를 사고 나서, 서윤이 있는 파란 지붕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숲속 비포장도로를 따라 녹슨 철조망과 배수로가 듬성듬성 이어지고, 양계장에서 흘러나온 닭 울음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음악이나 들을까, 생각하며 라디오를 켜려던 그때였다. 검은색 BMW 한 대가 옆 샛길에서 튀어나와 거칠게 끼어들더니, 도준의 랜드로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흙먼지가 전면 유리를 덮치자, 도준은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간발의 차였다. 이쪽에서 멈췄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순간이었다.
-대체 무슨 운전을 저렇게 하는 거야…
도준은 숨을 몰아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도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앞으로 계속 가면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좁은 산길만 이어질 뿐이었다. 길 한쪽에는 잡초와 덤불이 무성하게 얽혀 있었고, 그 속에 오래된 표지판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곳은 막다른 길입니다. 돌아가시오.’
빛바랜 글씨는 거의 다 지워졌지만, 거뭇하게 남은 경고문의 흔적이 음습한 기운을 뿜어내며 상서롭지 않은 부적처럼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운전자가 초행길이라 표지판을 미처 보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가슴 한가운데를 찌르는 듯, 이상하리만치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길 끝에 서윤의 파란 지붕 집이 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
누군가가 일부러 그 집을 찾아온 것이라면, 도대체 그 정체는 누구일까.
방금 스쳐 지나간 BMW의 운전자는 신사복 차림의 남자였다.
-저는 약혼자가 있어요.
서윤이 어제 했던 말이 번갯불처럼 떠올랐다.
-그러니까, 곧 결혼한다는 의미예요.
서늘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 검은 차량이 단순히 길을 잘못 든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설마, 그녀의 약혼자?’
그런 의문이 떠오른 순간, 운전대를 쥔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더 이상 차를 움직일 수 없었다.
조수석에 놓인 분홍색 신발 한 짝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래전 주인을 잃은 그 신발은, 어딘지 모르게 흐릿한 장막에 가려진 먼 미래처럼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위협과 불확실한 추측들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마음을 쪼아댔다.
‘과연 내가 원하는 게 단순히 신발을 돌려주는 것뿐일까?’
어쩌면 오늘은 그 신발이 제 임자를 찾아가는 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지금 가장 두려운 건, 그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일이었다. 그는 아픈 진실을 안고 돌아서야 할지, 한 걸음 더 다가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채, 혼자 갈림길 위에 서 있었다. 무언가 자신의 등을 밀어내는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이승 저편에 아득하니 솟아 오른 로체 남벽이 떠올랐다. 자아의 한계를 시험하고, 불가능을 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그곳.
‘나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인가.’
짧고도 치명적인 물음이 심장 가장 안쪽을 긁고 지나갔다. 정답 없는 가설, 확신할 수 없는 명제들. 그런 것들은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오는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윤은 그에게 끝없는 추측이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녀와의 인연은 허공에 흔들리는 가느다란 자일과 같았다. 언제 끊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목덜미 주위를 차갑게 감쌌다. 그것은 어쩌면 또 다른 운명의 시험대. 얽히고설킨 위태로운 줄에 의지한 채, 더는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할 듯했다.
도준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차를 오솔길 옆에 천천히 세웠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마른 낙엽 하나가 차창 귀퉁이에 매달렸다. 파르르. 애잔하게 떨리는 그 나뭇잎을 바라보는 동안, 불길한 상상이 자꾸 떠올랐다.
그는 운전대를 꽉 움켜쥔 채 뚫어질 듯 정면을 응시했다.
-길을 잘못 들었을 거야. 돌아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
입속말로 낮게 웅얼거리며 마음을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