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정지된 세계의 일부처럼, 시간은 멈춘 듯 천천히 흘러갔다. 도준은 찌를 바라보며 떡밥을 꾹꾹 주무르다가, 가끔 물가로 다가가 낚싯대를 들었다 놓곤 했다.


-이 호수엔 늙은 붕어가 한 마리 있어요. 육십 년이 넘도록 살아남았다니, 거의 귀신 같은 녀석이죠. 한 번 물에 담갔던 찌도 단박에 알아챈다고 해요. 그래서 진짜 꾼들은 여기 올 때마다 찌며 떡밥을 새로 만들어 와요.

-왜요?

-낚시 가게에서 파는 걸로는 도저히 잡을 수 없거든요. 그 특유의 냄새 때문이겠죠.

-아, 그렇군요.

-낚시꾼들이 여기서 잃어버린 낚싯대가 수도 없이 많아요. 어쩌다 그 녀석이 잡히는가 싶으면, 어느새 낚싯대를 물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죠.

-호수 바닥 어딘가엔 낚싯대가 아주 많겠네요.

-늙은 붕어가 그걸로 용궁을 지었을지도 모르죠. 하하.


도준의 웃음소리가 잔물결처럼 호수 표면에 번져갔다. 그는 낚싯대를 걷어들여 떡밥을 살펴보고는 다시 수면을 향해 낚싯줄을 던졌다. 물 위에서 찌가 잠시 뒤뚱거리더니, 금세 빨간 윗부분만 남기고 꼬르륵 가라앉았다.


그는 낚시 상자에서 주먹만 한 버너를 꺼냈다. 작은 냄비에 생수를 붓고 불을 붙이자, 파란 불꽃이 날름거리며 냄비 바닥을 핥았다. 차츰 자잘한 기포가 피어오르고 물이 데워지는 소리가 잔잔히 번져왔다.


-낚시터에서 자기가 먹을 것 이상으로 잡는 사람들을 보면, 왠지 마음이 불편해져요. 어쩌면 우리가 하는 낚시도 인간에게 남아 있는 살해 본능이 문화적으로 변형된 형태 아닐까요?

-살해 본능의 표현이라고요?


서윤은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원시인들은 먹기 위해 사냥을 했죠. 몸집이 더 크고 사나운 동물과도 싸워야 했어요. 라스코 동굴벽화도 사냥을 위한 주술이었다는 해석이 있잖아요. 사냥을 나서기 전에, 많이 잡게 해달라는 뜻으로 그렸다는 거죠.

-주술 기도를 위한 부적 같은 거였네요.

-부적치고는 사이즈가 좀 크긴 했죠.

-후후…

-이제 더 이상 사냥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지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그 본능이 남아 있는 거 같아요. 아직도 전쟁을 하고, 마녀사냥을 하고… 아, ‘라이프’ 잡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이 생각나네요. 한 남자의 머리에 총구가 겨눠져 있었어요. 그는 몇 초 뒤 목숨을 잃었죠. 그 장면은 ‘이 남자는 곧 죽는다’는 설명과 함께 사진 속에 박제되어 박물관에 전시됐어요.

-어머, 맙소사…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휴머니즘이라는 게… 그 안에 감춰진 다른 얼굴이 있는지도 모르죠.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윤은 그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그것은 어떤 결론이라기보다, 오래 묵혀 둔 생각이 잠시 고개를 내민 것처럼 느껴졌다. 거칠거나 과장된 기색은 없었다. 다만 살아오며 스쳐 갔을 장면 하나가, 그의 이야기 너머로 무심히 비쳐 보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지금의 이런 말들조차, 그가 무슨 의도가 있어서 꺼낸 것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캠핑 버너 위에서 냄비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도준은 캔커피 두 개를 뜨거운 물에 담가 데운 다음, 그중 하나를 수건으로 감싸 그녀에게 건넸다. 손안의 캔을 천천히 굴리자 따스한 온기가 몸속 깊은 곳까지 퍼지는 느낌이었다. 다시금 낚싯줄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수면에 닿은 찌가 이내 균형을 찾아갔다. 파장을 일으키며 번져가던 둥근 원들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혼자 여행 다닐 땐, 주로 무슨 생각을 하세요?

-산에 오를 땐 산만 생각해요.

-참 이상한 분이네요. 겨우 잡은 물고기를 다시 놔주고, 내려올 산을 그렇게까지 힘들게 또 올라가고… 두렵진 않나요? 깊은 골짜기에서 길을 잃거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쳐 움직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잖아요.

-진짜 두려움은… 글쎄요. 두려움 그 자체를 마주 보는 일이 아닐까요. 실패하면 어쩌나, 외로움을 견딜 수 있을까, 이러다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런 생각들은 어쩌면 핑계일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늘 미래에 사로잡혀 있죠. 마치 지금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요.

-그 누구도 자기 미래를 예측할 수 없잖아요. 안 그런가요?

-맞아요. 산을 오르다 보면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할 때가 있죠. 여행도 그렇고요. 멀리서 보면 길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한 발씩 내딛다 보면 어느새 닿아 있어요. 그 순간에 나를 맡기는 것, 그게 전부예요.


그의 말에는 오랜 세월 몸으로 통과해 온 시간과, 그 속에서 한 걸음씩 버텨온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단단한 내공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허무도, 신비주의도 아니었다. 오히려 삶의 본질을 응시하는 투명한 통찰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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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가파른 언덕을 힘차게 올라가던 랜드로버가 잠시 멈춰 섰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드넓은 호수가 아스라이 펼쳐졌다. 녹색 수면 위로 산그림자가 은은하게 드리워졌고, 반짝이는 햇살에 잔물결이 일렁였다. 두 사람은 홀린 듯 경이로운 호숫가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 호수가 있었다니, 정말 놀라워요.


서윤의 입에서 조용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는 바닷가보다 여기가 더 좋습니다.

-저도요. 파도를 보면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요.

-여긴 괜찮은가요?

-도준 씨가 곁에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요.


도준이 차에서 내려 짐칸 문을 열었다. 낚시 도구와 다른 장비들을 꺼내는 손끝이 바빠졌다. 서윤도 옆으로 다가가 눈치껏 손을 보탰다. 낚싯대, 접이식 의자, 보온병, 다양한 낚시 도구들, 그리고 간식거리와 낚시용 미끼가 담긴 누런색 아이스박스. 그들의 손길이 닿은 물건 하나하나가 소박한 여정의 짐처럼 하나둘 쌓여갔다.


그는 바닥에 놓인 찌낚시 도구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낚시를 하려면 자리를 잘 골라야 합니다. 물고기가 입질하는 자리가 따로 있거든요. 며칠 전에도 밤새 꿈쩍하지 않더니, 해 뜰 무렵에 두 마리를 연달아 낚았죠. 그것도 제법 큰 녀석들이었어요.


그는 오른팔을 번쩍 들어, 팔뚝만 한 붕어를 보여주듯 주먹을 쥔 채 팔꿈치를 가리켰다. 표정에 어린아이 같은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서윤의 머릿속에 커다란 은빛 붕어 한 마리가 떠올랐다. 낚싯대 끝에 매달린 채 꼬리를 푸드덕거리며, 물을 뚝뚝 떨구는 모습. 햇빛에 번쩍이는 비늘의 광채까지 선명했다.


-그렇군요. 정말 기다린 보람이 있었겠네요.


서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은 잠시 시선을 멀리 두었다가, 굴참나무 가지가 늘어진 물가를 가리켰다.


-그때 저기서 잡았죠. 바로 저기요.


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는 밀짚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낚싯대를 드리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도준은 아쉬운 듯 말끝을 흐렸다.


-이거 참… 좋은 자리를 선점당했네요. 어쩔 수 없죠. 우린 저쪽으로 가요.


그는 턱짓으로 물가에 고정해 놓은 길쭉한 낚시 좌대를 가리켰다. 서윤은 그 위에서 낚시를 하자는 뜻인가 싶어 잠시 망설였다.


-저긴… 좀 무서울 것 같은데요.

-걱정하지 말아요. 뒤쪽으로 떨어져 앉으면 괜찮아요.


도준은 부드럽게 웃으며 먼저 발을 내디뎠다. 서윤은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랐다. 두 사람은 잡목이 쓰러져 있는 가파른 둔덕을 서로 부축하며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바스락거리는 낙엽과 흙냄새. 하늘거리는 바람결이 피부를 스쳤다. 호숫가에 이르러 도준은 낚시 좌대에서 한참 물러난 위치에 접이식 의자 두 개를 펼쳤다. 서윤이 자리에 앉자, 도준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무섭지 않아요? 의자를 좀 더 뒤로 뺄까요?

-아뇨, 괜찮아요. 저 나무판 위에만 안 올라가면 아무 문제 없어요.

-우린 여기 있으면 돼요. 시선을 멀리 두면 물결 때문에 어지럽지도 않을 거예요.

-네, 그렇게 할게요.


도준은 잠시 바람의 흐름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좀 차네요. 이걸 걸치세요.


그는 겉에 입고 있던 회색 폴로 셔츠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녀를 넉넉히 감싼 셔츠에는 그의 체취가 배어 있었다. 한 남자의 냄새가 이렇게 따뜻하고 진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서윤은 그의 품에 안긴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람과 물 냄새, 그리고 그의 체취가 뒤섞인 공간 속에서 조용한 설렘과 묘한 용기가 그녀 안에 서서히 피어났다.


도준은 능숙하고도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물가에 두 대의 낚싯대를 설치했다. 삼단 낚싯대를 길게 펼친 뒤, 찌를 꿰고 추와 바늘을 매달았다. 손목의 탄력을 이용해 낚싯대를 가볍게 휘두르자, 낚싯줄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수면을 향해 날아갔다. 곧 물 위로 작은 수포가 피어올랐고, 둥근 파문이 번져나갔다. 삼색 줄무늬 찌가 또렷이 중심을 잡았다.


낚싯대를 지지대에 걸쳐 놓은 도준은 서윤 곁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바람 한 줄기가 스쳐 가며,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에 가까운 평온이 내려앉았다. 서윤은 연녹색 빛을 머금은 수면을 바라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도준은 낚싯줄을 드리운 채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차오른다고 했다.


-깎아지른 절벽에 매달린 순간엔 아무 생각도 못 해요. 놀이기구를 타고 떨어질 때처럼 몸이 붕 뜬 감각이 계속되죠. 그런 데 있다가 지상으로 내려오면, 일상이 다 시시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점점 더 높은 곳, 더 위험한 길을 찾게 되는 건지도 몰라요. 마약 환자가 점점 강한 자극을 찾듯이요.


도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낚싯대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낚시가 필요한 거죠.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에요. 찌만 바라보며 그냥 있다가 보면, 마음속 감정이 가라앉아요.


서윤은 그의 말을 하나씩 따라가며 머릿속에 장면을 그려보았다. 수직의 절벽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그의 모습, 그리고 지금처럼 고요한 물가에 앉아 있는 그의 뒷모습. 그 두 개의 형상은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닮아 있었다. 하나는 삶의 모든 것을 건 극한의 순간이고, 또 하나는 그 긴장을 비워내는 고요한 수행이었다. 둘 다 마음의 방향을 멈추고, 오로지 한 점에 몰입해야만 닿을 수 있는 자리. 무념무상의 틈에서 본질을 붙잡으려면, 그만큼 깊은 정신적 수양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남자는, 그런 방식으로 자기만의 윤리와 생을 일관되게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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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카페 주차장에 서 있는 랜드로버를 보자 서윤의 콧등이 시큰했다. 지난봄, 횡계 숲길에서 그와 헤어지던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태일의 BMW가 그녀를 태운 채 도준의 랜드로버를 스쳐 지나갔던 그날 이후, 얼마나 많은 날들을 혼자 애태우며 견뎌왔던가. 오늘 다시 그의 차에 올라타려니 어색함 속에 잔잔한 위로가 밀려왔다.


세월의 흔적이 깃든 차 안, 기름 냄새가 낯설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안정감을 주었다. 밀폐된 공간에 대한 저항감도 일지 않았다. 태일의 BMW가 강요하던 차가운 압박감과 달랐다. 도준의 낡은 랜드로버가 품은 따스한 온기, 그 안에 몸을 기대는 순간 편안함이 스며들었다.


오랜 기억의 무게보다, 한순간 사고처럼 밀려온 친밀감이 더 강력했다. 3일간의 운명 같았던 만남. 단 한 번의 키스가 이른 봄날의 화양연화처럼 마음을 흔들었다. 그 떨림 하나로, 지난 시간 전체가 송두리째 뒤집혔다. 기억이 몸속에서 부서지고, 심장이 울렸다. 횡계의 흙먼지를 일으키며 우연처럼 다가온 남자가 이제 그리움으로 변해 곁에 앉아 있었다. 그를 눈앞에 두고도, 현실 속 꿈처럼 아득했다.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서울에서도 자전거를 타나요?

-가끔 한강 고수부지에서요.

-헬멧은 꼭 쓰는 거죠?

-또 넘어질까 봐요?

-자전거 사고가 의외로 많아요. 다치면 큰일이잖아요.


서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준이 빙그레 웃더니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그녀는 기어 레버를 움직이는 그의 크고 두툼한 손을 바라보았다. 횡계 별장에서 자신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당기던 바로 그 손이었다. 손끝의 감촉이 은밀한 환영처럼 살갗을 스치고, 숨결이 닿을 듯한 상상에 온몸이 조용히 전율했다. 그의 뜨거운 손길이 다시 다가온다면, 나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 손끝이 닿는 순간, 혹은 그 손이 다가오는 그 짧은 틈.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지금 어디에 가는 건가요?

-화성이요. 석담리 근처 낚시터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려요. 혹시 피곤하면 잠깐 눈 붙이셔도 됩니다.

-아뇨, 괜찮아요. 전혀 피곤하지 않은걸요.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마음 한편에는 미묘한 설렘과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도준이라는 남자가 불러일으킨 봄바람이었다. 가슴은 두근거리고, 그녀는 전혀 다른 여자가 된 듯했다. 현실과 단절된, 오직 그들만의 세상. 그녀는 모든 걱정을 잊고 싶었다. 단지 오늘, 이 하루만큼은. 그와 함께 존재하기 위해.


얼마 후, 서서울 요금소를 빠져나온 랜드로버는 안산 분기점에서 안중 방면으로 핸들을 틀었다. 서해안 도로를 따라 석담리에 가까워지자, 흑갈색 곰솔 군락지와 해수욕장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졌다. 출렁이는 물결 위, 푸른빛 하늘가에 초승달 모양의 낮달이 나지막이 걸려 있었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 한쪽에서는 낚시꾼들이 긴 낚싯대를 드리운 채 묵묵히 바다를 응시했다. 가느다란 엿가락처럼 뻗어 오르는 해송 숲과 방풍림 사이로, 한가로이 주말을 즐기는 가족 단위 나들이객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가요?

-아뇨, 우리가 갈 곳은 따로 있어요.


랜드로버는 석담유원지를 지나며 속도를 올리더니, 어느새 경사가 급하고 인적이 드문 샛길로 접어들었다. 창밖으로 스쳐 가던 바다가 점점 멀어지고, 주변은 온통 숲과 흙냄새, 바람의 숨결로 채워졌다.


-이제부터 좀 더 빨리 달릴 생각이에요. 이런 길은 천천히 가나 빠르게 가나 덜컹거리긴 마찬가지예요. 괜찮으시겠어요?

-좋아요. 맘대로 하세요.


도준은 기어를 변속하며 핸들을 꺾었다. 엔진이 으르렁거리며 깊은 숲으로 달려들었다.


산길은 더욱 험해지고, 자갈이 튀는 소리와 함께 차체가 크게 요동쳤다. 랜드로버는 굽이진 언덕길을 힘차게 올랐다. 그녀는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차체의 움직임에 따라 튀어 오르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불안보다 먼저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틀 안에서만 살아온 삶이 이 대지의 진동 속에서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처음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었고, 숨을 깊게 들이쉴 때마다 바람과 흙, 나무 냄새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창문을 끝까지 열자, 거센 바람이 얼굴을 때리듯 휘몰아쳤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날리도록 내버려두었다.


-무섭지 않아요?


도준이 외치듯 묻자, 그녀도 소리치듯 답했다.


-아뇨. 안 무서워요!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성숙을 위해 껍질을 벗는 게처럼 버거웠던 인생의 꺼풀 하나를 벗어내고 있었다. 어떤 낯선 용기, 아니 본능 같은 것이 몸속에서 꿈틀대었다. 더는 어제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예감이, 기분 좋은 두려움처럼 심장 깊숙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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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도로 위, 차들은 한낮의 강물처럼 느릿하게 흘러갔다. 차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대시보드 위에 청량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동을 걸자 라디오에서 익숙한 기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그는 나지막이 음률을 따라 흥얼거리며 신사역 쪽으로 차를 몰았다. 브로드웨이 극장 건너편, 카페 아르테가 오늘의 약속 장소였다. 유리창 너머 사람들을 스치듯 훑었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건물 뒤에 차를 세운 그는 꽃다발을 손에 쥔 채 카페 안으로 발을 옮겼다. 거리가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자, 미소년처럼 생긴 종업원이 다가왔다. 도준은 스파클링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스피커에서 카디건스의 ‘러브풀’이 끝나고, 새비지 가든의 ‘트룰리 매들리 딥리’가 흘러나왔다. 종업원이 가져온 레모네이드로 목을 축이려는 순간, 카페 앞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서윤이 내렸다. 도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이내 다시 앉았다. 손바닥으로 턱선을 가볍게 훑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운전사에게 몇 마디를 건넨 뒤 차 문을 닫고 카페를 향해 다가왔다. 그때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옷자락이 몸의 곡선을 따라 우아하게 일렁거렸다.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원피스 차림에 손에는 눈부시게 하얀 린넨 가디건을 들고 있었다. 긴 머리는 하나로 느슨하게 땋아 내렸고, 어깨에는 커다란 왕골 숄더백이 무심히 걸려 있었다.


그녀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기요!


도준이 손을 번쩍 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려는 어린 소녀의 무의식적인 행동 같았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며 그의 가슴이 사르르 떨렸다.


그녀가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그의 감각이 하나씩 열렸다. 몸과 마음이 오로지 그 순간에 사로잡히는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점점 느려졌다. 그녀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긴 자취를 남겼다. 그는 숨을 삼켰다. ‘저기, 그녀가 오고 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믿기 어려울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일찍 오셨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감미로운 선율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아뇨, 조금 전에요. 서윤 씨, 많이 보고 싶었어요.


도준은 말을 약간 더듬었다. 더 이상 로체 직벽만을 향해 돌진하던 천하무적의 원시인 같은 사내가 아니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 수줍게 서 있는 한 어린 소년. 22년 전 횡계로 되돌아간 듯,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그녀는 턱을 살짝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그 순간, 도준은 심장이 당기는 듯한 달콤한 통증을 느꼈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만큼 강렬한 충동이었다. ‘약혼자가 있는 여자’라는 사실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꽉 끌어안고 싶다는 뜨거운 욕망이 온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때, 종업원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뚜벅뚜벅 울리는 발소리가 금기를 일깨우는 현실의 경고음처럼 그의 깊은 심연을 두드렸다. 그녀는 풋,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의 뜨거운 열정을 읽고 있었다. 마음을 들켜버린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종업원이 물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얼음은 듬뿍 넣어 주세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죠?


그녀는 도준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빛을 살피더니 겸연쩍은 듯 손끝으로 가볍게 부채질을 했다. 도준은 문득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우선 날씨 이야기로 어색한 기운을 덜어보려는 걸까.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스피커에서는 크랜베리스의 ‘링거’가 잔잔히 흘러나왔다. ‘장미를 살 걸 그랬나.’ 다시금 마음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그는 망설이듯 옆 의자에 두었던 꽃다발을 들어 조심스레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어머나, 프리지어네요. 저한테 주는 거예요? 정말로 저한테요?


도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도준의 입가에도 웃음기가 번졌다. 짧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종업원이 음료를 들고 오다가 홀 중앙에서 멈춰 섰다. 앞 테이블에 있던 여자들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사랑에 빠진 사람들 곁에는 투명한 빛의 막이 감돌기 마련이었다. 그 안에서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세상의 소음도 잠시 스러졌다. 도준과 서윤 사이로 스며든 공기는 미세한 전류처럼 파동을 일으켰다. 그들의 숨결 하나하나가 온화한 향기가 되어 홀 전체에 퍼져나갔다.


-당신에게는 장미보다 프리지어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저를 위해 꽃집에 다녀오신 거죠? 저는 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밝게 웃었다. 도준은 그 안에 스쳐 지나간 엷은 감정의 물결을 느꼈다.


-아니요. 오늘 이렇게 와 주셨잖아요. 그거면 충분해요.


그녀는 말없이 꽃의 향기를 맡았다. 은은하게 번지는 꽃내음처럼 그녀의 미소가 살포시 피어났다. 햇살처럼 스며드는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눈부셨다. 윤기 흐르는 머릿결, 가녀린 목과 얇은 옷감이 그려 내는 가슴과 허리의 유려한 곡선을 바라보며, 그녀의 몸이 지금, 한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생의 빛을 발하고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녀의 약혼자는 어떤 사람일까.’


그 질문이 떠오른 순간, 마음 한쪽이 쑤시듯 아려왔다. 어쩔 수 없는 질투, 패배 의식 같은 것이었으리라. 애써 시선을 거두려 했지만, 모든 빛이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여자와 결국 헤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나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그녀는 내 앞에 있지 않은가.


한여름 해바라기처럼 목마른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종업원이 건넨 유리잔에서 물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컵에 든 얼음이 찰랑거렸다. 그녀는 찬 음료를 몇 번에 나눠 들이켰다.


-아직도 자다가 물에 빠지는 꿈을 꾸나요?


한참 만에 도준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가끔요. 그건 왜요?

-제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자, 가시죠.


도준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의 발끝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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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도심의 빌딩 숲 사이, 호수처럼 맑게 번진 하늘이 눈부셨다. 가로수 길 위에는 잘게 부서진 햇살이 반짝였고, 초여름 공기에는 가슬가슬한 서늘함이 스며 있었다. 사람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거리를 거닐었다. 도준은 은행 앞 빈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운 뒤, 잠시 망설이다 길가의 꽃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 문을 여는 순간, 향긋한 꽃내음이 그를 감쌌다. 실내 곳곳에는 흐드러지게 핀 색색의 꽃들과 정성 들여 가꾼 화분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꽃집 출입에 익숙하지 않은 그는 문턱을 넘으려다 멈춰 섰다. 한꺼번에 몰려드는 화려한 조명과 색채의 향연 속에서, 그는 현실에서 한 발 비켜선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카운터 뒤에는 레이스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진한 핑크색 방울철쭉을 포장하다 말고, 유치원 원장처럼 부드럽게 감겨오는 음색으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무슨 꽃을 찾으시나요?

-글쎄요. 먼저 좀 둘러볼게요.

-네네. 그럼 구경하세요.


도준은 진열대 사이를 걸으며 꽃들을 살펴보았다. 은은하면서도 화사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였지만, 그 안에 선 그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다. 손끝으로 꽃잎을 스치듯 어루만지자, 여리고도 보드라운 감촉에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조차 잠시 잊은 듯했다.


그가 살아온 세계는 거대한 바위와 얼음벽, 거친 바람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이 작은 꽃집은 섬세한 균형과 정제된 아름다움이 흐르는 곳, 전혀 다른 자연이었다. 철든 이후로 줄곧 산을 올랐고, 천년설이 흩날리는 히말라야에도 여러 차례 도전해 왔다. 그런 그가, 이 작은 공간에서 어쩐지 말문이 막힌 채 서 있었다.


꽃들은 향기롭고 찬란했지만, 누군가의 손길과 의도가 빚어낸 조형물이기도 했다. 이곳은 그가 경험해 온 자연과는 결이 다른 세계였고, 동시에 가공된 아름다움이 숨 쉬는 공간이었다. 그에게는 낯선 질서였다. 만약 서윤이 아니었다면, 그는 평생 이런 곳에 들어올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로 인해 펼쳐진 세계는 그에게 기이하고도 매혹적인 지각의 전이를 일으켰다.


도준이 선뜻 꽃을 고르지 못하자, 점원이 다가왔다.


-어떤 꽃을 드릴까요?

-글쎄요… 좀…

-혹시, 어느 분께 선물하실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 순간, 도준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아니, 뭐…


그는 말끝을 흐리며 귀 뒤를 긁적였다. 어느 분이라니. 그녀는 내게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직 그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존재로 영원히 남을지도 몰랐다. 도준이 눈을 끔뻑이며 대답을 망설였다. 점원이 빙긋 웃었다.


-혹시 여자분께 드릴 거면, 나이를 살짝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으음… 젊어요.

-아, 젊은 여자분이시군요! 혹시… 여자 친구?


도준은 머리를 만지며 눈을 피했다.


-호호, 다들 처음엔 그렇게 쑥스러워하죠. 얼굴이 빨개졌네요.


점원이 눈을 찡긋하며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어… 어떤 꽃이 좋을까요?

-글쎄요, 꽃은 다 예쁘죠. 여자분들은 남자분이 주는 꽃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죠. 처음이라면 장미가 무난하지 않을까요?

-아, 그런가요…

-그렇죠. 장미죠.


잠시 후, 꽃집을 나선 도준의 손에는 프리지어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장미를 살 걸 그랬나…


그녀에게 이 꽃이 괜한 짐이 되지는 않을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분명, 손 닿지 않는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었다.


-괜찮아. 겨우 꽃 한 다발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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