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에 맥주 한 잔>

 

나른한 오후 3시 차가운  맥주 한 잔을 마십니다.

하늘 끝 흐린 허공에 걸린 낮달은 고요히 한숨을 내쉬고

기다림에 지친 그대는 책을 옆구리에 낀 채 골목길을 서성입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속엣말로 혼자 웅얼웅얼

시계 바늘만 제자리에 멈춰 선 채 고개를 까닥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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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마 아가씨>

 

내 가슴 속에는 수줍은 꼬마 아가씨 한 명이 살고 있다.

볼은 통통하고 살갗은 연한 핑크빛이다.

시선을 약간 아래로 깔고 있는 표정에는 호기심이 가득하다.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는 눈빛이 초롱초롱 반짝인다.

살짝 벌어진 입술은 오물오물 무엇인가를 갈망한다.

부드럽고도 당당한 몸매,

슬며시 그러쥐고 있는 존재에 대한 물음.

간유리 사이로 비껴가는 정체모를 불안감처럼

미지의 나날들이 두 눈을 깜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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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꽃>

 

공원묘지 비석들은 색색가지 조화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생화를 갖다 놓고 싶어도 금방 시들어 버리니 공장에서 만든 플라스틱 꽃을 사용할 수밖에 없겠지요. 돌아가신 분이 생화와 조화를 어찌 구별할까 싶으면서도 화공약품 냄새 풀풀 날리는 플라스틱 꽃을 꽂을 때마다 어쩐지 죄송한 마음입니다.

 

이 그림은 재작년에 아버지 산소에서 가져온 헌 꽃을 화폭에 담은 것입니다. 새 꽃과 교체되자마자 바로 쓰레기통 신세가 될 뻔한 그 꽃을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가져왔습니다. 가족들 얼굴에 스쳐가던 껄끄럽고 어색한 표정들이 심히 부담스러웠지만 가끔은 모른 척 심리적 저항선을 살짝살짝 넘어서고는 합니다.

 

한동안 작업실 한쪽을 장식하고 있던 꽃을 이제야 완성했습니다. <아버지 꽃>에는 대량 생산품처럼 소모되는 헌 꿈들을 재생한다는 의미도 있고, 돌아가신 분을 기리고자 하는 애틋한 마음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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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아가씨> oil on canvas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행복한 순간을 의미한다. 

이사 온 첫날 뒤바뀐 물건들처럼 엇갈린 상대에게 그들은 묘한 감정을 느낀다.

저녁마다 달랑거리는그릇 하나를 손에 들고 국수를 사러 가는 리첸 장만옥.

그녀의 곱고 아리따운 자태를 감싸고 있는 각양각색의 중국풍 예스러운 복식들.

혼자 국수를 먹고 나온 차우 양조위는 홀린 듯 그녀의 섬세한 실루엣을 뒤쫓는다. 

골목길 층계를 따라 봄바람이 일렁인다. 

살랑살랑 그녀의 옷자락이 나부낀다.     

수줍게 비껴가는 그 시절의 달뜬 꿈 하나가   

애잔한 풍경처럼 먼지 낀 창틀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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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강가에서>2015 유화

 

나는 수풀 우거진 강가로 간다

마른 장작불처럼 타오르는 태양을 향해

아무도 오지 않는 오후, 텅 빈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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