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책에 대한 명상>
oil on canvas, 61×50cm, 2014
'어느 날 책 한 권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내 몸이 나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존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내 영혼뿐 아니라 나를 나이게 만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책상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 문장은 터키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 Orhan Pamuk의 장편소설 '새로운 인생 The New Life'에 나오는 첫 대목이다. 책을 펼쳐 들고 처음 두 문장을 읽고는 잠시 멍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쉽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 같은데, 그 단순함 안에 꽤나 심도 깊은 포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어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도대체 그 안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책이 있다. 요즘은 어딜 가나 스마트폰이 대세라지만 책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까지 모두 대체할 수는 없다. 독서는 하나의 경험이다. 같은 이야기를 읽었다 해도 다른 이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은 수십 권, 수백 권의 책이 되고, 수만 갈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책상 앞에 앉아 글자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듯 읽다 보면 심연 깊은 곳에서 무언가 따스하게 번져 온다. 나만의 공감과 위로, 그리고 행복 같은 것들이 온기를 품은 작은 알갱이처럼 마음속에서 회오리친다.
이제 책은 예전처럼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인테리어 장식물처럼 옛 유물의 화석으로 고착되는 동안 책들은 꺼칠하고 누렇게 들뜬 모습이다. 책 페이지마다 가득한 언어의 부호들도 시름이 깊어진 표정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그래도 어딘가에 ‘그 책’이 존재한다. 내 가슴을 단숨에 사로잡고 영혼 밑바닥까지 흔들어 놓을 ‘그 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생의 신비와 고독의 비밀을 알려 주기 위해 함께 떠나자고, 내가 다가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