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도넛과 파이>oil on canvas 61×50cm 2014

 

살아간다는 것은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전제로 한다. 주식은 끼니마다 '가능한' 제때 챙겨 먹어야 할 음식이지만 간식 역시 행복한 쉼표를  영유하기 위한 주요 먹거리다. 온종일 뭔가에 몰두하거나 몰두하기 싫어지는 일상 속에서 괜히 달달한 게 자꾸 당긴다 싶으면 그만큼 속이 허하고 뒤숭숭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어쩐지 입안도 깔깔하고 맘속도 텁텁한 이런 날 오후에는 향기 좋은 원두커피 한잔에 베이커리 온기 가득한 도넛 생각이 간절하다.

 

도넛은 소비자가 선호하는 맛에 대한 느낌만큼이나 종류도 다양하다. 내가 좋아하는 도넛은 부드럽고 촉촉하면서도 쫄깃쫄깃한 ‘허니딮’이다.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노란 표면에 하얀 설탕가루를 살짝 입힌 모습이라니! 입안 가득 침샘을 자극하는 맛의 향연에 적막했던 오후 한때가 투명한 햇살처럼 반짝인다.

 

도넛 중간에 구멍을 뚫어놓은 건 밀가루 반죽을 튀길 때 기름 온도를 골고루 배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는 여배우 골디 혼이 메릴 스트립이 쏜 장총에 맞아 복부에 큰 구멍이 뚫리는 난감한 장면이 등장한다. 신비의 명약을 먹은 터라 생명 유지에는 별 지장이 없지만 자기 몸에 난 흉측한 구멍이 당황스럽다.

 

어, 내 드레스를 망쳐 놨어! 가만 두지 않을 테다.... 근데, 손이 들락거리잖아! 저쪽도 보여! 가뜩이나 큰 그녀의 눈이 더욱 커진다. 고개를 수그려 몸의 동공을 통해 들여다본 세상이 키르코의 그림 속 풍경인 양 어딘가 기우뚱하니 낯설게 다가온다.

 

 

그림<꽃과 로션 병들>oil on canvas 61×50cm 2014-16

 

동그라미는 그 자체로 안도 되고 밖도 될 수 있다. 존재에 대한 긍정을 뜻하기도 하고 부재를 암시하기도 한다. 두 개의 동그라미로 구성되어 있는 도넛, 그 전체는 또 하나의 동그라미를 형성한다. 한 개의 도넛은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며, 세상의 총집합은 도넛에 대한 각국의 취향과 맞물려 있다. 커피와 함께 동그라미 세상을 조금씩 음미하다 보면 금방 녹아들 듯옛 기억 한 자락이 혀끝에 감겨온다. 추억 하나의 도넛과 추억 하나의 동그라미가 그렇게 입안에서 골고루 잘 씹힌 후에 어둠 속 미로를 향해 서서히 빨려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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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 2014-04-07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넛에 대한 글을 읽으며, 고 김지원 작가를 생각했습니다. 인상적이어서 메모를 해두었는데..
"나는 가끔 동그라미라는 생각을 한다. 이리 봐도 절대 안전한 동그라미 이고, 저리 봐도 절대 안전한 동그라미 인데, 살아가며 여러 경험을 하는 동안에 이해의 영역이 넓혀지면 그 동그라미는 커진다, 아니 안 커지고는 배겨낼 수가 없다." 김지원씨가 이상문학상을 받은 뒤 수상소감에 쓴 말이라고 합니다.
저는 도넛 중에 가장 기본인 팥빵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동그라미의 의미는 생각지도 않은채 먹는 행위에 집착해 허겁지겁 쑤셔넣은 기억밖에 없습니다.
승화된 현실을 지향하면서도 먹는 행위에 있어서 저는 너무 본능적 입니다.언제 저라는 사람은, 빵을 먹으면서 동그라미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을 투영해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림이 주는 달달한 도넛의 풍요롭고 충만한 느낌은 저의 오후시간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4-08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림 <태리의 봄 편지>oil on canvas 61×50cm 2014

 

봄이 오면 묵은 빨래들을 깨끗이 빨아 마른 햇살에 널고 싶다. 따스한 커피 한잔 손에 들고 창가에 앉아 아직 오지 않은 그대를 기다리리라. 춥고 소란했던 계절이 아쉬운 듯 천천히 걸어간다. 오후 한기 드리워진 창틀에 수국 한 다발 올려놓고 낮은 음악소리에 귀 기울이며. 저기 멀리서 오는 그대. 성큼성큼, 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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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동막골, 어느 농가 앞에서>oil on canvas 61×50cm 2014

 

바람결에 따스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봄이 오면 시간을 쪼개 써야 할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요즘에는 가능한 그림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날짜의 흐름이 속도를 점점 높여 가는 듯해서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르겠습니다. 종일 작업실에만 있다 보면 세상이 흐릿하게 멀어집니다. 낯선 질문들 앞에서 종종 당황스러워 할 때도 있고, 산중턱에 이르러 숨이 가빠질 때도 있습니다. 집을 찾지 못해 헤매는 아이처럼 좁은 골목길을 빙빙 돌다보면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그래도 이 세상에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건 분명 고마운 일입니다.

 

 그림<금요일의 정물 '멕시코 밀짚모자와 과일들'> oil on canvas 61×50cm 2014

 

오래전 멕시코에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고대 아즈텍 문화가 융성하게 꽃을 피웠던 치첸이차에는 젊은 여자들을 제물로 삼았던 깊고 어두운 우물이 있습니다. 소설가 하루키의 작품에는 초원의 끝이나 주택가 뒤편에 존재하는 잊혀진 우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런 우물의 실체와 마주한 듯 잠시 신비한 환영 속에 사로잡혔습니다.

     

아즈텍 피라미드는 이집트 가자 지역의 피라미드들 보다는 고대 동방의 지구라트 쪽에 가깝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이 한 사람을 위한 무덤이었다면 지구라트는 수메르인들의 중심축 역활을 하던 신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즈텍의 피라미드 역시 신을 모시던 거대한 석재 건축물입니다. 지구상에 더 이상 아즈텍 문명은 존재하지 않지만  오랜 세월 묵묵히 견뎌온 그 존재만으로도 경이롭습니다. 

 

깎이지를 듯한  피라미드를 오르는 일은 꽤나  버겁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거의 정상까지 올라 가서 오후 햇살을 맞으며 한동안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아득하게 멀어지던 지표면의 흔적들, 신전의 계곡들 사이를 맴돌던 서늘한 바람결, 어딘선가 다가와 잠시 메이리치던 소리의 울림, 신탑을 배경으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던 하늘. 그런 기억의 감각들이 아직도 고운 빛깔로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 올린 정물화에는 당시 치첸이차 근처에서 구입한 멕시코 모자를 담았습니다. 모자를 부서지지 않게 서울까지 가져오느라 당시에는 고생도 좀 했지만 이제는 멕시코의 광휘를 한껏 머금은 추억의 기념품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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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꽃에 관한 명상> oil on canvas 53×45cm 2014

 

밤 늦게까지 텔레비전 화면이 들썩거립니다. 소치 올림픽 스케이트 경기를 중계방송 중입니다. 파리 여행 중에 민박집에서 쇼트트랙 선수 김동성 씨를 직접 만난 적도 있는 터라 더욱 관심이 쏠립니다. 전지훈련 중에 한국 음식이 그리워 그곳에 왔다는 김동성 씨의 발은 대단한 명성을 지닌 선수답지 않게 의외로 작고 여리게 보였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에 스케이트 부츠 사이즈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선수들 신발은 맨발에 직접 본을 떠서 만든다고 해서 신기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선수 생활을 하느라 항상 꽉 끼는 슈즈를 신어서 발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탕! 총소리와 함께 선수들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아나운서 목소리가 빨라지고 관중석 열기도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빙판 위의 선수들이 산소 탱크처럼 가쁜 숨을 뿜어냅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케이트 날이 빠르게 교차합니다. 선수가 도는 건지 얼음판이 도는 건지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시합 초반 50미터 안에 제대로 된 포즈를 잡아야 자기 페이스를 쫓아갈 수 있다고 해설자가 말합니다. 시선은 화면에 둔 채 괜히 딴 생각을 더듬고 있습니다. 우리는 몇 미터 안에 포즈를 잡아야 하는 걸까. 어떤 포즈가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걸까. 인생 또한 만만치 않은 자신만의 경주입니다.

 

선수들은 빙상 위를 돌고, 또 돕니다. 우리도 인생이라는 빙판 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습니다. 선수들의 근육질 허벅지가 오늘따라 더욱 든든해 보입니다. 우리에게도 인생의 근육이 필요합니다. 0.1초를 사이에 두고 순위가 뒤엉켜 있는 박빙입니다. 0.1초가 그토록 긴 시간이었다는 게 새삼 놀랍습니다. 그 자리에 서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을까요. 마지막까지 선전을 기원하며 열띤 응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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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에 관한 명상> oil on canvas 61×50cm 2014

 

‘어느 날 책 한 권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내 몸이 앉아 있던 책상과 의자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내 몸이 나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존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내 영혼뿐 아니라 나를 나이게 만드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이 놓여 있는 바로 그 책상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터키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장편소설 ‘새로운 인생’에 나오는 첫대목입니다. 책을 펼쳐들고 처음 두 문장을 읽고는 잠시 멍했습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쉽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 같은데 그 단순함 안에 꽤나 심도 깊은 포스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도대체 그 안에는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책이 있습니다. 요즘은 어딜 가나 스마트 폰이 대세라지만 책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까지 모두 대체할 수는 없겠지요. 독서는 하나의 경험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읽었다 해도 다른 이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 권의 책은 수십 권 수백 권의 책이 되고, 수만 갈래의 길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책상 앞에 앉아 글자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듯 읽다 보면 심연 깊은 곳에서 뭔가 따스하게 번져옵니다. 나만의 공감, 위로와 행복 같은 것들이 온기를 품은 작은 알갱이처럼 회오리칩니다. 

 

이제 책은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인테리어 장식물처럼 옛 유물의 화석으로 고착되는 동안 책들은 꺼칠하니 누렇게 들뜬 모습입니다. 책 페이지마다 가득한 언어 부호들도 시름이 깊어진 표정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립니다. 그래도 어딘가에 '그 책'이 존재합니다. 내 가슴을 단숨에 사로잡고 영혼 밑바닥까지 흔들어 놓을 '그 책'이 나를 기다립니다. 생의 신비와 고독의 비밀스러움을 알려주기 위해서 함께 떠나자고 내가 다가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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