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진포, 안행마을3> Watercolor on paper 39X 27.7cm 2012

 

 

초가을 뭉게구름이 솜사탕처럼 피어오릅니다. 오늘 하루도 작업실 안을 맴돌며 지난 주말 야외 스케치를 나가서 찍어 온 사진들을 보고 또 보고, 그러면서 하품도 몇 번 했습니다. 아, 밖으로 놀러나가고 싶다. 그런 유혹이 없지 않았지만 꾹 눌러 참았습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덕진포 전경을 그렸습니다. 거의 같은 장소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는 쌍둥이 그림입니다. 화면 하단에 있는 앞부분 공간을 확장하여 야채를 심어 놓은 밭과 비닐하우스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어제 한번 시도했다가 잘 안되어 그냥 그 부분을 빼버렸는데,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 같은 것 때문에 재도전했습니다. 지평선 우측을 들어 올려 화면 속 긴장감을 더한 것도 약간의 변화라면 변화일 수 있습니다.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그리다보면 어쩐지 지루한 데다 집중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작업하는 동안 가능한 재미있으면 좋겠다. 제가 신봉하는 유일한 종교가 바로 그런 겁니다. 죽을 때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온종일 추적추적 비가 내렸습니다. 밤 9시가 넘어 작업이 끝났는데 팔레트에 짜 놓은 초록색 물감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예전에 쓰던 약간 싸구려 물감이긴 하지만 그냥 씻어내기 아까워(팔레트에는 물감 칸이 남아 있는 곳이 없음), 화면 우측에 있는 커다랗고 시커먼 나무에 유화를 그릴 때처럼 찍어 발랐지요. 어이쿠, 그냥저냥 괜찮은 걸요! 색유리를 겹쳐 놓은 것 같은 수채화 특유의 느낌이 아니라 찐득찐득하면서도 두툼한 질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덕분에 좌측과 밸런스가 깨진 느낌이었지만 일단 한 호흡 끊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채화 그림은 함부로 손 뎄다가 피를 볼 때가 많습니다. 막판에는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한 발 더 갈 것인가, 여기서 멈출 것인가. 항상 그런 선택의 갈림길이 함정처럼 제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실 속에서도 그렇고, 작업에서도 그렇고. 뭐,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작업에 대한 몰입도가 높아지는 듯합니다. 물감 물을 머금은 수채화 용지가 잘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헤어드라이어 덕분에 별 지장은 없습니다. 그림을 그리다 말고 헤어드라이어를 작동시키면 거실에서 졸고 있던 니코가 다가와 고개를 까딱거리며 이상하다는 듯 쳐다봅니다. 지금 뭐하는 거야? 이제 5살이 된 니코는 아주 호기심이 많은 강아지 입니다.

 

작업 중에는 배경 음악처럼 늘 라디오를 틀어놓습니다. 날씨 탓인지 청취자들의 사연도 무척 센티멘털하고 몽롱했습니다. 디제이들까지 덩달아 축축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잡으며 '가을' '빗물'에 얽힌 노래들만 줄줄이 틀어 댔습니다. 온종일 최헌 씨 노래만 네다섯 곡쯤 들은 것 같습니다. '가을비 우산 속' '오동잎'... 이게 언제 적 가요인데. 상상력의 한계가 따로 없군! 라디오를 흘겨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면서도 뭔가 가슴 한쪽을 살짝 누르는 느낌이었습니다.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왜 이렇게 짧은지... 장난꾸러기 같으면서도 섹시했던 그 미소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가수는 노래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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