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리,초록집>수채 2013

 

지난 주말에는 사생 스케치를 하러 집 근처 태리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오전에는 농수로 앞 마을길을 그렸는데 오후가 되어 햇빛이 정면으로 들이치는 바람에 자리를 옮겨 앉아야 했지요. 동네 구경을 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그늘진 나무 아래에 다시 화구를 펼쳐 놓았습니다. 바로 앞에 밭이 있는데다 좌측에 쌓인 건축자재 더미까지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심기일전 다시 발동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 걸! 커다란 트럭이 먼지를 피우며 다가오더니 하필이면 초록집 정면에 멈춰 섰습니다. 차 문이 열리더니 운전사가 내리더군요. 일을 마치고 집에 온 걸까? 점심 먹으러 온 걸까? 이미 스케치를 하고 밑칠까지 끝낸 터라 얼마나 야속하던지...굴러 온 돌이 박힌 돌에게 ‘그림을 그려야 하니 차 좀 비켜주세요!’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림<태리 초록집-2>15F 유채 2014

 

한 여름처럼 날씨는 푹푹 찌고, 풀숲 비슷한 장소여서 야생 진드기 걱정도 되고...아이고, 또 자리를 옮겨야 하나? 그래 옮기는 게 낫겠다. 아냐, 그냥 돌아갈까? 혼자 구시렁대고 있는데 다행히 트럭 운전사가 집에서 나왔습니다. 옷을 말끔하게 갖춰 입은 것으로 보아 어디 좋은 데라도 가는 모양입니다. 트럭 운전사는 사뿐하게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이내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사라져버렸습니다. 다시 찾아온 한적한 풍경, 온 누리에 깃든 평화에 하느님, 감사! 일단 하늘을 향해 윙크 한번 날려주고 고약한 진드기에 대한 걱정도 잠시 미뤄두었습니다. 바닷길 건너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한참 걸릴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요.(제주도에서 첫 번째 환자가 확진 판결을 받은 직후였거든요.)

 

<태리, 농수로 앞 마을 풍경>2013 수채

 

‘농수로 앞 마을길’은 집에 돌아와 다시 작업했습니다. 연두색 그림자가 깔린 농수로 젖빛 물결을 제대로 소화했는지 모르겠군요. 사흘에 걸쳐 엎치락뒤치락 한 덕분에 ‘초록집’에 비해 많이 가라앉은 느낌입니다. 작업 과정에서 끝마무리에 너무 공을 들이면 그만큼 생동감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일기나 편지를 쓸 때, 혹은 카톡 메시지를 쓸 때도 종종 그런 경험을 합니다. 수정할수록 점점 멀어지는 느낌.. 문장의 공식화 과정을 통한 스스로에 대한 검열...만사가 능사는 아니지요. 풀어줄 때는 팍팍 풀어주고, 죄어야 할 때는 꽉 꽉 죄고... 그런 완급 조절이 필요한 봄날의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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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2013-06-10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위가 한창 입니다.
창작활동을 위한 완급조절이 더욱 필요하지요.

김미진 2013-06-1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덥다는 데 걱정입니다. 더위 조심하시기를..

메리베리 2013-06-12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차암 정겨운 거리의 수채화네요^^ 마음마저 맑아지는.... 감상으로 ...잘 보고갑니다

김미진 2013-06-16 23:44   좋아요 0 | URL
격려의 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