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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그림을 끝까지 지켜낸 알바생은 신음을 삼킨 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서윤도 화폭이 기우는 쪽으로 휘청였으나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두 사람은 그림 양 끝을 붙잡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서윤이 묻자, 알바생이 괜찮아요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등 뒤에서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리온 갤러리의 대표, 최희숙 관장이었다. 하필 그 순간, 전시장을 지나던 참이었다.


-미친다 정말. 지금 이 작품이 얼마짜린지 알아?


쓰러진 사다리와 긴장한 직원들을 훑어보던 그녀는 곧바로 서윤이 바치고 있는 그림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윤이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관장은 손을 들어 그 말을 잘랐다.


-이 작품 훼손되면 누가 책임질 건데? 너야?


조명을 조정하던 남자 직원이 절뚝이며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사다리가 갑자기 흔들려서

-많이 다쳤어요?


서윤이 조심스레 물었다. 남자 직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고, 알바생은 어깨를 으쓱하다가 어정쩡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최 관장의 관심은 오로지 그림 상태에만 쏠려 있었다. 그녀의 안경 너머 시선은 차가웠고, 말투는 그보다 더 냉랭했다.


-이 정도라 그나마 다행이군. 쯧쯧, 칠칠맞지 못하게앞으로는 좀 더 조심들 하시지, ?


직원들은 숨을 죽인 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서윤 씨, 잠깐 내 사무실로 올라와.


최 관장은 마지막 말만 툭 던지곤, 한 치의 미련도 없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알바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손으로 떠받치고 있는 그림의 무게가 조금 전보다 훨씬 묵직하게 느껴졌다.

 

1968년에 처음 문을 연 리온 갤러리는 인사동 거리에서 한국 근현대 미술을 선도하며, 역사 깊은 화랑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곳에서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박서보, 이우환, 정창섭, 최욱경 같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뿐 아니라, 가끔은 샤갈, 마티스, 클림트, 라울 뒤피, 앤디 워홀 같은 외국 거장들의 작품도 특별 전시되었다. 또한, 장래성 있는 젊은 작가들을 꾸준히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 제작과 프로모션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다.


관장실은 리온 갤러리의 지난 세월을 집대성한 기록과 자료로 가득한, 말하자면 작은 보물창고였다. 리온의 실질적 오너이자 관장인 최희숙은 60대 후반의 여성으로, 한국 화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출발은 지금은 철거된 소공동 반도호텔 지하 갤러리의 카운터였다. 막 여고를 졸업한 풋풋한 나이에 그곳에서 맺은 화가들과의 인연은, 시간이 흐르며 한국 화랑계를 대표하는 화상으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3층 복도 끝, 리온 갤러리 관장실에 들어서면, 40평 남짓한 공간에 오래된 자료와 화집, 엽서, 도록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최희숙 관장은 데스크에 앉아 서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 번뜩이는 표정에 서윤은 순간, 어깨가 움츠러드는 기분을 느꼈다.


-작품 배치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왜 그 작품을 이제야 옮기는 거지?


그녀는 안경테를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최 회장님 사모님께서 그 작품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지 않으면 다시 가져가겠다고 하셔서요.


서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회장 사모님까지 나서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좀 지나치지 않나?

-, 당연히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가 정당하게 빌린 거잖아.

-물론이죠. 그런데, 이번 전시회를 위한 협찬이라서

-답답할 노릇이네.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 그게 무슨

-‘공작 도시시리즈는 함께 묶어서 전시해야, 그 후광을 살릴 수 있지. 안 그래?

-, 당연히이번 회고전 도록에도 차례대로 함께 실려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작품은 공작 도시시리즈 중에서도 대표작이야.

-일반에게 공개되는 것도 거의 처음이죠.

-그런 작품을 뚝 떼서 따로 전시한다고? 맨 앞에만 전시하면 장땡인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워낙에 고집이

-알았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러니 그 작품은 원래 자리로 돌려놓도록 해.

-, 네에알겠습니다.


그녀는 옛 스승의 전시회를 끝까지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어깨가 무거웠지만, 정작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현실 앞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관장이 알아서 하겠다는 말에, 서윤은 결국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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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월요일 오후, 인사동의 리온 갤러리는 전시회 준비로 분주했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이라 불리던 손문기 화백의 회고전으로, 오프닝 행사는 이틀 뒤인 수요일 정오에 열릴 예정이었다. 내일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휴관일이라서 오늘 안으로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

-, 걱정하지 마세요.


서윤은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생과 함께 커다란 캔버스를 옮기고 있었다. 나무 액자까지 씌워진 100호짜리 그림은 두 사람이 간신히 들 수 있을 만큼 묵직했다. 다른 방해물들을 피해 가며, 두 사람은 그림 표면이 가능한 한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레 이동했다그때 최승주 실장이 2층 사무실로 올라가려다 그녀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나 선생. 전시 화보와 도록은 어떻게 된 거야?

-수요일 아침에 인쇄소에서 직접 가져오기로 했어요.

-초대장 발송은?

-지난주에 모두 완벽하게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중에 이걸 다 끝낼 수 있겠어?


그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전시실을 둘러보며 던진 말이었다. 아직 설치를 마치지 못한 작품들이 벽을 따라 여럿 남아 있었다.


-거의 다 됐어요. 이제 작품에 레이블만 붙이면 됩니다.


서윤이 미소를 지으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나 선생, 분류 번호, 사이즈, 사용된 재료, 하나하나 꼼꼼히 잘 점검해. 저번처럼 뒤섞이는 일 없도록 조심하고. 다들 아셨죠?


최 실장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자,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그는 관장 최희숙의 남동생이자, 갤러리 운영 전반에 막강한 권한을 쥔 인물이었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공기가 싸늘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번져갔다리온 갤러리에 5년 넘게 몸담아온 서윤조차도 최 실장 앞에서는 업무에 필요한 말 외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이곳에서 오래 일한다는 건, 능력보다도 침묵과 인내를 먼저 배웠다는 뜻이었다.


서윤은 리온 갤러리의 큐레이터였다. 전시 기획과 작가 섭외, 작품 리스트 정리, 도록 제작과 홍보 등 갤러리 실무의 중심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늘 생각했다. 전시란 곧 균형의 예술이라고. 주제의 통일성과 시선의 흐름, 여백의 배치와 조명 각도 하나하나가 철저한 계산 아래에서야 비로소 조화를 이룬다고 믿었다. 그 조율은 캔버스 너머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동료들 사이의 공기, 말의 온도, 침묵의 간격까지. 서윤은 전시를 준비하는 공간 전체를 하나의 작품처럼 가다듬고자 했다.


최 실장이 자리를 뜨자, 전시실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다들 조금만 더 힘내요. 오늘 오버타임을 해도, 내일은 푹 쉴 수 있잖아요.


서윤이 내일이라는 단어에 살짝 방점을 찍으며 부드러운 표정으로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내일? , 내일!


직원 하나가 긴 숨을 내쉬며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 다시 힘 좀 써봐요.


서윤의 말에 알바생이 다시 캔버스를 번쩍 들었다. 그 바람에 액자가 휠 듯 출렁이며 캔버스 표면이 크게 흔들렸다.


-아아, 맙소사! 작품은 아기 다루듯 천천히.

-, 죄송합니다.


알바생이 얼굴을 붉히며 난감해했다.


이 전시는 서윤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그녀는 손문기 화백에게서 직접 그림 지도를 받으며 미술의 기초를 다졌다. 방화동 공항시장 근처에 있던 손 화실은 스승의 거처이자 작업실이었고, 입시생과 취미생이 함께 모여 그림을 익히던 공간이기도 했다. 드나드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늘 가족 같은 친밀감이 흘렀다.


선생은 늘 제자들에게 따뜻하고 자상했다. 작고 구부정한 몸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묵직한 에너지가 배어 나왔다. 깊고 맑은 눈매와 걸걸한 숨소리, 말투와 웃음, 드로잉 도구를 다루던 손끝의 습관과 팔레트 위에 물감을 짜던 손놀림까지, 모든 것이 아직도 기억 속에 또렷했다. 선생은 가끔 화실 식구들과 야외 스케치를 다녀오곤 했다. 김포의 한 시골 마을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고, 가져간 재료로 소박한 한 끼를 나누던 날들. 그가 남긴 그림일기와 예술과 삶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겹겹이 쌓여,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서윤을 만들어주었다.


리온 갤러리는 인사동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는 화랑이었다. 이곳에서의 전시는 곧 한국 미술계 한가운데에 작가의 이름을 새기는 일이기도 했다. 손 화백의 존재감은 이제 분명한 보폭으로 한국 화단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머지않아 미술 교과서에서 그의 이름을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이미 세상을 떠난 스승의 회고전을 직접 준비하고 있는 지금, 서윤에게 이번 전시는 끝까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하나의 과제이자 의무였다.


-그렇지, 그렇지. 조금만 더 왼쪽으로

-!


알바생의 이마에는 땀이 번들거렸다. 점심 이후 그는 거의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불평 한마디 없이 일하고 있는 그를 보며, 서윤은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옮기고 있는 작품은 손 화백의 1980년대 대표작, ‘공작 도시연작 중 하나였다. 마티에르의 질감을 밀도 높게 쌓아 올린 회색 화면 속엔, 무너진 철근과 도시 구조물이 서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뒤엉켜 있었다.


서울을 배경으로 한 도시 풍경화에는 거대한 기계 도시의 혼란과 욕망이 거칠고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하철 2호선 공사로 뒤엉켰던 도심, 해머 드릴의 쇳소리. 데모 진압대가 쏜 최루탄 가스와 시위대의 함성,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자동차들, 무질서하게 파편화된 거리의 모습. 그 속에 잠복한 디스토피아적 환영과 자본주의의 그늘을 손 화백은 누구보다 일찍, 누구보다 날카롭게 포착해 냈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서윤은 여전히 회색 지대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선생의 그림 앞에서, 그 시대를 통과해 온 자신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알바생과 공작 도시를 들고 중앙 갤러리 입구로 향하던 그때, 사다리가 비틀거리며 한쪽으로 쏠리는 모습이 서윤의 시야에 들어왔다.


-, 조심해!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다리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조명을 조정하던 남자 직원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다리가 쓰러지면서 이동 중이던 '공작 도시'를 그대로 덮칠 기세였다.

그 순간, 알바생이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등으로 사다리를 밀쳐내며, 한쪽 팔로는 그림을 감쌌다. 간발의 차로 더 큰 충격을 막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발등으로 그림 아래를 받쳐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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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도준은 땀에 흠뻑 젖은 채, 오대산 매표소 앞에 세워둔 4륜 구동 랜드로버로 돌아왔다. 십여 년 전에 한국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의 영사가 귀국하며 남기고 간 차였다. 겉보기엔 제법 낡고, 세월의 흔적도 역력했지만 달리는 데엔 아직 큰 문제가 없었다. 필요할 때마다 도준이 직접 손을 대어 엔진을 만지고 낡은 부품을 갈아 끼워온 덕이었다. 그렇다. 그는 그런 일을 혼자서 해낼 수 있었다. 그의 특별한 재주 중 하나는, 뭐든지 잘 뜯어고친다는 점이었다.

 

손재주는 어려서부터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속을 들여다보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고, 한번 분해한 것은 기어이 다시 조립해 내는 묘한 집중력과 끈기를 보이곤 했다.물론 그 실험이 매번 성공한 건 아니다. 덕분에 집 안의 라디오며 시계가 수난을 겪는 일도 잦았다.


부엌 창가에 놓인 라디오가 이유 없이 먹통이 되기라도 하면, 그는 어머니의 꾸중을 피해 달아나거나 동네 전파사의 딱딱한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야 했다. 양팔에 토시를 낀 수리공 아저씨가 돋보기를 들여다보며 작은 부품을 갈아 끼우고 납땜질을 하는 동안, 어린 도준은 몇 시간이고 꼼짝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외아들이었던 도준은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서 자랐다. 호기심 많고 늘 뛰어다니기 바쁜 아이였지만, 두 분은 언제나 곁에서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그 다정했던 나날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직 부모의 품이 간절하던 어린 시절, 도준은 양친을 잃고 덩그러니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2, 열세 살 도준은 잠시 강원도 고모 집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동대문 시장에서 옷감 장사를 하던 양친은 구정 대목 탓인지 간간이 전화만 할 뿐 좀처럼 데리러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도준은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기 너무 심심해. 빨리 좀 데리러 와. 안 그러면 나 혼자 서울 갈 거야.


어린 아들이 떼를 쓰듯 투정을 부리자, 부모는 그날 가게 문을 닫고 밤길을 달려 마침내 고모 집에 도착했다.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도준은 망설임 없이 짐가방을 챙겨 부모님을 따라나섰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그들 일가족이 탄 소형 세단은 비포장도로 위를 덜컹거리며 밤의 정적을 깨웠다.


-준아, 편하게 눈 좀 감고 자렴.


엄마의 잔잔한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귓가를 포근히 감돌았다. 도준은 두 분의 웃음 섞인 대화를 들으며,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강원도의 구불거리는 산길, 새벽 한 시 무렵. 비극의 그림자가 조용히 그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결에 요란한 클랙슨이 들린 것도 같았다. 아버지가 몰던 세단은 마주 오던 트럭을 피하려다 미끄러졌고,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뒤 차가운 계곡 아래로 추락했다.


어두운 혼돈 속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차는 이미 전복된 상태였다. 앞좌석에 탄 부모님은 피투성이로 정신을 잃고 있었다. 도준은 거꾸로 매달린 채, 차 안에서 필사적으로엄마’ ‘아빠를 부르며 몸부림쳤다.


처음엔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지만, 곧 그마저도 사라졌다. 그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꼼짝할 수 없었고, 그 끔찍한 순간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그 경계에 멈춰 서 있었다. 죽음은 너무도 잔혹한 얼굴로 다가왔고, 그날의 공포는 어린 소년의 영혼 깊은 곳에 새겨졌다.


119 구조대가 도착한 건, 여명의 빛이 산자락을 타고 번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데리러 오라고 떼만 쓰지 않았더라면


뜨거운 눈물이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이 전부 자신의 탓이라는 죄책감은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다.


그의 일가친척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까이 왕래하는 혈육이라곤 고모네 일가족이 전부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고모마저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도준은 고모부를 아버지처럼 의지하며 살아갔다. 고모부에게는 아들 둘이 있었지만, 고종사촌들과는 나이 차이가 커 함께 어울릴 일이 거의 없었다. 도준은 일찍이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무게에 서서히 익숙해지며 자신만의 삶을 배워나갔다.


부모님이 남긴 얼마간의 재산 덕분에 당장은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지만, 대학을 마칠 무렵엔 은행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등반과 등산 장비에 가진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결과였다.


부모님이 여전히 살아계셨다면, 매일 산에서 살다시피 하는 아들을 두고 무엇이라 했을까. 어머니라면 끊임없이 잔소리를 쏟아냈을 테고, 아버지는 중간에서 방패막이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뿐인 외아들에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들이 아닌가. 문득 부모님의 얼굴이 또렷이 떠올랐다. 그리움인지, 체념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며들며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오대산 등산로 입구에는 산행을 준비하는 등산객 서너 명이 모여 있었다. 매표소를 온종일 지키는 나이 든 직원이 도준을 보자 창구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말을 걸었다.


-오늘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는 거요?
-, 그러믄요.


도준은 뒤를 돌아보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날씨도 추운데 기운이 펄펄 솟는구려. 지극정성일세. 대체 무슨 일 하는 사람이기에 이렇게 날마다 산을 뛰어다니는 거요?
-운동 삼아 그러는 거죠. 그럼, 또 뵙겠습니다.

-조심해서 가요.

 

매표소 직원은 손을 흔들고는 다시 창구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도준은 랜드로버 운전석에 올라 엔진이 예열되기를 잠시 기다렸다. 차창 너머 보이는 나무들의 헐벗은 가지 사이로 촉촉한 봄기운이 감돌았다. 머지않아 연한 초록 새싹이 돋아나고, 풍성한 녹음이 능선을 따라 번져갈 것이다. 그는 땀이 밴 목덜미를 수건으로 한 번 훑어낸 뒤, 횡계에 있는 고모부 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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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마침내 오대산 정상에 선 도준은겹겹이 이어진 능선들을 바라보았다초봄의 골짜기마다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고그 위로 맑고 싱그러운 공기가 가득 퍼져 나갔다주변은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자연이 드리운 정적 속에서, 그는 잠시 또 다른 세계의 입구에 서 있는 듯한 낯선 감각에 사로잡혔다. 배낭을 내려놓고 몸을 풀며스포츠 음료를 한 모금씩 음미하듯 마셨다차가운 이온수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전신의 세포가 마치 스펀지처럼 그것을 빨아들였다.


오늘따라 유독 민혁과의 추억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함께 자주 오대산을 오르던 시절이 그리워서일 것이다. 어쩌면, 오늘이 민혁의 생일이라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운 옛 친구는 로체 남벽이라는 인생의 미결 과제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이제 남겨진 자가 친구가 가졌던 그 꿈의 무게까지 이어받아야 한다.


도준은 정상 정복만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정상에 오른 순간마저도 등반에 있어 하나의 과정이라 여겼다. 어떤 루트를 택하느냐, 어떤 방식으로 오르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는 등반 중 마주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분석하고, 거기서 최선의 해답을 도출하는 데 탁월했다. 특히 로체 남벽은 오랜 시간 그의 연구 목록에서 단연 최우선이었다.


도준은 이번에도 로체 남벽 8,350미터까지 최초로 오른 예르지 쿠쿠치카와 로베르트 파블로프스키의 기술을 적용할 생각이었다. 가볍고 빠른 알파인 스타일의 등반은, 대규모 인력과 장비를 동원하는 전통적 히말라얀 방식과 달리, 등반 루트와 속도, 시기까지 모든 판단을 스스로 내려야 하는 고독한 방식이다. 그만큼 더 큰 결단력과 강한 내면의 힘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경량 장비 하나로 신속하게 고도를 끌어올리는 방식은 순수한 등반의 성취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고소에서의 급격한 기후 변화에도 훨씬 유리하다. 하지만 동료의 도움도, 세르파도, 고정 로프도 없이 오롯이 자신만을 믿고 나아가야 하기에 위험도는 극단적으로 높고, 체력 소모 또한 혹독하다.


로체 남벽은 베이스캠프를 떠나는 순간부터 3,300미터에 이르는 가파른 설벽이 기다린다발 디딜 틈조차 없어, 앞발로 포인트를 찍으며 첫걸음을 내디뎌야 하고, 수직 암벽에서는 수시로 눈사태와 스노우 샤워를 견뎌야 하며, 몸을 한 치씩 끌어올릴 때마다 폐를 짓누르는 공포와 맞서야 한다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서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하지만 등반은 정상에 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산을 끝까지 내려오기 위해서는 체력 안배가 생사의 갈림길이 되며, 올라갈 때 60을 쓰고, 내려올 때 40을 남겨두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다. 도준은 그 모든 과정을,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은 완전한 자유 등반으로 오르겠다고 결심했다.


눈사태와 암석 낙하를 피하려면 밤과 이른 새벽, 얼어붙은 눈을 딛고 오르는 것이 유리했다. 낮 동안 폭포처럼 무너지는 눈사태를 피해 충분히 휴식하고, 한밤중 상단부를 공략해 정상을 찍는 전략이었다. 단시간 내 홀로 정상에 닿고 돌아오기 위해선 폭발적 근력과 순발력, 초인적 집중과 의지, 무릎 꿇지 않는 투지와 끈질긴 정신력이 필요했다. 로체 남벽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벽이자, 대자연의 너그러움 없이는 허락되지 않는 영역이었다. 그 길은 어떤 이에게도 가볍게 열리지 않았다.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서른다섯그의 나이는 이미 한계를 넘어섰는지도 모른다체력이 바닥나기 전에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공기 희박한 허공에 매달려 직벽과 맞서 싸우며 끝까지 버텨내려면 단 한 번의 실수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도준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두려움은 어쩌면 신이 마지막까지 인간에게 남겨준 생존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수없이 맞서온 감정이지만, 이번만큼은 그 무게와 깊이가 달랐다. 이건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침묵의 경고. 정말 이 벼랑 끝에 다시 매달리겠다는 건가. 나는 거기서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는 스스로를 죽음에 내맡기려 하고 있다. 이게 도대체 내가 하고 있는 일이란 말인가.


-, 아니야.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잡념을 털어내자. 민혁의 이름조차 마음에서 지워버리자.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로체뿐. 저 위에서 나를 위협하는 것은 육체의 한계가 아니라, 마음 깊숙이 자리한 불안이다. 그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와도 나는 꺾이지 않으리라. 이미 올라가기로 결심한 이상 그저 묵묵히 오를 뿐이다. 말도, 후회도, 돌아볼 이유도 없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다시금 의지의 불꽃이 타올랐다. 이는 투지가 아닌, 스스로를 끝까지 밀어붙이려는 냉정한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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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미진


히말라야 원시의 설산에서, 서로를 향한 믿음보다 강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베이스캠프를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도준과 민혁의 발걸음을 가로막는 큰 위기가 닥쳐왔다. 고도계의 바늘은 7,800미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상 능선 너머로 불길한 회색 구름이 몰려들었고, 거세진 바람은 등줄기를 타고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눈보라는 마침내 폭주하듯, 분노에 찬 짐승처럼 포효하며 사면을 휘몰아쳤다.

-날씨도 안 좋은데, 잠깐 쉬었다 갈까?
-그래. 바람이 누그러질 때까지 기다리자.

그것은 일 보 후퇴, 진정한 의미의 '전진을 위한 후퇴'였다. 로체 남벽 초등에 대한 집념으로 똘똘 뭉쳐 있던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기어코 이 악마의 벽을 넘겠다는 결심뿐이었다. 두 친구는 깎아지른 암능 틈으로 몸을 밀어 넣고, 발판이 될 만한 자리를 찾아 바닥을 다진 뒤, 눈이 얼어 단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그 위에 작은 텐트를 세웠다.

둘은 그 은신처에서 험한 날씨가 잦아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풍은 쓰나미처럼 밀려와 산허리를 할퀴었고, 계곡 어딘가에선 쪼개지듯 묵직한 천둥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눈 폭풍은 사방에서 격노한 야수처럼 울부짖었고, 거센 눈발은 캠프지를 요란한 빗소리처럼 두드려댔다. 텐트는 금방이라도 찢겨 날아갈 듯 거칠게 펄럭였으며, 유닛마다 연결된 자일은 텐트 기둥을 따라 격렬하게 흔들렸다. 침낭 속에서 체온을 나누며 몸을 웅크린 두 사람은, 차갑고 딱딱한 빵을 한 조각씩 입에 넣었다. 고독과 결연함이 응고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상이 코앞인데, 늙은 마녀가 심통을 부리네.
-우리가 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산이 우릴 간보는 것 같지 않아?

유령의 집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추위에 떨던 민혁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섬찟했다. 폭풍 속에서 텐트가 숨을 고르듯 요동쳤고, 들이쉬는 숨마다 날 선 공기가 목구멍을 긁으며 폐 속 깊숙이 얼음처럼 박혔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한 악천후라 해도, 그들은 반드시 견뎌내리라는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

-포기할 수 없어. 우리는 끝까지 버텨야 해.
-지금 뜨끈한 밀크티 한 잔만 마실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어.
-브랜디 탄 에스프레소라면, 내 목숨이랑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따뜻한 아랫목에서, 계란에 파 송송 썰어 넣고, 고춧가루 뿌린 라면 한 그릇 먹으며 야동 한 편만 볼 수 있다면, 다시는 이런 빌어먹을 산엔 오지 않겠어. 내 두 다리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아냐, 나는 야동 대신 짜장면.
-어허! 아니지. 짬뽕이지.

노호하는 바람 속에서 두 친구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지만, 서로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견딜 수 있었다. 어둠과 추락의 위협, 차가운 죽음의 기척이 사방에서 밀려왔지만, 그들의 우정은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서로를 따스하게 감쌌다.

산 능선은 이미 어두워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멀리 바룬체(7,152m)와 아마다블람(6,814m)의 정상만이 빨간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다. 금세 주위가 침침해지더니, 어느새 새카맣게 파묻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더욱 거세지며 미친 듯 울부짖었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가슴속 깊이 파고들며 숨을 옥죄었다.

-젠장, 대체 왜 이런 데 올라온 거지?
-우리 둘 다 돌았으니까.
-맛이 간 거지. 제대로.
-정신 똑바로 차려. 바람에 휩쓸리기 십상이야.
-여기서 날아가면, 뼈도 못 추릴걸.

둘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 같았다. 결코 새벽이 올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밤이었다.

일출 전의 몇 시간은 언제나처럼 지독히 춥고, 지루했다. 멀리 산봉우리 위로 어슴푸레 붉은 아침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며, 날씨가 조금씩 풀릴 조짐을 보였다. 살을 에는 바람도 점차 잠잠해졌다. 첫 햇살이 비스듬히 비추어올 무렵, 그들은 다시 빙탑에 매달렸다. 얼음 표면은 단단히 얼어 있었고, 아이젠은 그 속에 깊숙이 박혔다. 오른손에는 아이스 픽켈, 왼손에는 아이스바일을 쥐고, 발톱으로 얼음을 찍으며 한 발씩 신중하게 올랐다.

프론트 포인팅으로 얼음벽에 매달린 채, 중간 확보물로 쓸 피톤을 얼음 속 깊숙이 박아가며, 숨결과 땀방울을 빙벽에 새기듯, 조심스레 전진했다. 발 아래 끝도 모를 협곡에서는 저승사자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천 길 낭떠러지 밑에서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기다렸다. 한 발짝만 실패해도, 그곳에서 영원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늑골 모양을 한 얼음층과 녹은 눈이 바위 표면을 살짝 덮은 베르글라 지대를 지나, 홈통처럼 생긴 로체 쿠로와르까지 꼬박 12시간을 올랐다. 마침내 정상 설원을 눈앞에 둔 순간, 그때부터 눈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골짜기 위에 끼어 있던 안개가 점차 번지며 하늘을 뒤덮었다.

로체봉은 죽음을 부르듯 몸을 뒤척였고,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사나운 돌풍에 휘말리며 숨을 쉬기조차 곤란할 정도였다. 더 이상 올라가면 다시는 내려올 수 없을 것이 뻔했다. 한순간, 자연의 위엄과 잔혹함이 얽히며, 생과 사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안 되겠다. 일단 후퇴하자.

-젠장! 내가 앞장설게!

 

민혁이 절규하듯 소리치며 먼저 몸을 돌렸다시바 신은 끝내 그들을 거부한 채, 응징하듯 모든 희망을 날려버리고 있었다. 뼈저린 절망을 삼키며 돌아서야 했던 그들은, 미친 듯이 아이스 픽켈을 찍으며 목숨을 건 하강을 시작했다. 거센 풍압이 그들을 감싸고 있던 옷을 갈기갈기 찢을 듯했다. 발아래 눈은 붕괴하듯 미끄러져 내리고, 시야는 점점 더 뒤틀려갔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고, 내면 깊숙이 솟구치는 공포가 어둠의 벽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시야 확보조차 불가능한 상태에서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제트기류가 휘몰아치는 절벽 위로, 어디선가 날아온 커다란 낙석 하나가 도준과 민혁의 몸을 잇고 있던 자일에 날카로운 도끼날처럼 내리꽂혔다. 순간, 자일이 터져나가는 듯한 섬뜩한 소리를 내며 위로 튕겨 올랐다. 도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아이스 피켈을 얼음과 바위틈 깊숙이 쑤셔 박았다. 그러나 한발 앞서 내려가고 있던 민혁은 몸을 피할 겨를조차 없었다. 짐 무게를 줄이려던 선택이 결국 화근이었다.

-아아악!

민혁의 비명이 절벽을 타고 메아리치며 하늘로 흩어졌다. 시간은 블랙홀에 빨려드는 듯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채, 세상은 한순간 정적에 잠겼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공포와 함께, 생의 탯줄이 끊어지는 듯한 끔찍한 절망이 덮쳐왔다. 눈앞에서 민혁의 몸이 허공으로 던져졌다. 조금 놀란 듯,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민혁의 모습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

만년설이 뒤덮인 히말라야의 깊은 계곡 속으로, 그의 모습은 아스라이 흐릿한 그림자처럼 사라져 갔다.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 사라져가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무너져 내리는 시간의 낭떠러지를 향해, 울부짖는 목소리가 한없이 번져갔다. 이제 남은 흔적이라곤, 하늘에서 날아드는 눈보라에 묻혀버린 마지막 절규뿐이었다.

요즘도 한밤중에 문득 눈을 뜨면, 민혁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로체봉 깊은 골짜기, 바위틈 어둠 속에서 여전히 그를 부르고 있을 친구의 얼굴이. 도준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조용히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들의 등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다려라, 친구.

이제 민혁의 목숨값을 되갚아야 할 시간이다. 도준은 눈을 감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결의가 온몸을 뜨겁게 채웠다. 이번에는 반드시, 정상에 설 것이다. 한때 자일 파트너로서 나눴던 깊은 우정, 민혁의 죽음을 더는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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