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김미진


오후 두 시경, 오늘 방문이 예정된 초등학생들이 갤러리 앞에 도착했다. ‘아현초등학교’라는 표지도 선명한 노란색 스쿨버스가 멈추자, 햇살처럼 반짝이는 아이들이 하나둘 버스 계단을 뛰어내렸다. 그들은 앞다투어 재잘거리며 갤러리 앞마당에 초등학교 운동장 같은 활기를 더했다.


버스에서 먼저 내린 선생님 두 명이 아이들의 하차를 돕고 있었다. 단정한 단발머리의 여선생은 한 명씩 손을 잡아주며 따뜻하게 맞이했고, 깔끔한 셔츠에 넥타이를 맨 남선생은 버스 앞에서 차분하게 질서를 잡았다. 1학년과 2학년으로 구성된 아이들이 갤러리를 향해 흘러가듯 움직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얘들아, 자자! 다들 선생님 보세요!


여선생이 손뼉을 가볍게 치며 아이들의 시선을 한데 모았다. 남선생은 출석부를 펴 들고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아이들은 자기 차례가 올 때마다 손을 번쩍 들고 힘차게 ‘네!’ 하고 대답했다. 서윤은 한 발짝 뒤로 비켜서서 웃음꽃처럼 환한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출석 확인이 끝난 후, 아이들은 갤러리 직원들의 안내를 따라 4층 전시관으로 향했다. 일부는 두 대의 엘리베이터에 나눠 탄 뒤 먼저 올라갔고, 나머지는 어미 오리를 졸졸 따르는 작은 오리 떼처럼 줄을 지어 천천히 이동했다.


피노키오 전시관 앞에 이르자 환상적인 동화 세계가 한눈에 펼쳐졌다.


-와아!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각국에서 모인 인형과 삽화, 입체 형상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소형 인형부터 키가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나무 조각상까지, 크기와 재질은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공통된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바로 길쭉한 코를 가진 피노키오라는 점이었다. 제페토 할아버지와 푸른 요정, 귀뚜라미도 군데군데 배치되어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상상력을 한층 풍요롭게 자극했다.


피노키오 왕국은 어느새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삼삼오오 어울려 전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진열된 작품들 사이를 탐색하거나 장난스럽게 소곤거리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한동안 자유 시간을 보낸 뒤 선생님들의 지시에 따라 하나둘 자리에 앉았다. 이제 서윤이 나설 차례였다. 그녀는 휴대용 마이크의 스위치를 켠 뒤, 전시관을 간략히 소개한 다음 피노키오와 전시물 사이에 얽힌 이야기들을 실타래처럼 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말을 하는 신기한 나무토막이 있었어요. 목수인 제페토 할아버지가 그 나무로 피노키오라는 인형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인형이 갑자기 말을 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시작했어요. 제페토 할아버지는 깜짝 놀랐답니다. 믿기 힘든 순간이었죠. 피노키오는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였는데, 거짓말을 하면 금세 들통이 났어요. 왜였을까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코가 점점 길어졌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도 혹시 거짓말을 할 때 가슴이 콩닥콩닥 뛰거나 얼굴이 화끈거린 적 있나요?

-네!

-그렇죠!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할 때 코가 길어졌지만, 여러분의 코는 그대로예요. 대신 심장은 쿵쿵 뛰고, 두 볼은 화끈거리죠. '지금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그녀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저마다 다른 모습과 색채를 지닌 각국의 피노키오 앞에서 설명을 이어가며 한동안 아이들과 함께 동화 속 세계에 푹 잠겨 있었다. 그러다 아이들을 이끌고 다음 칸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갑자기 경숙 씨가 다가와 조심스레 속삭였다.


-강수경 씨가 조금 전에 오셨어요. 지금 관장실에 계세요.


서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왜 하필 지금, 왜 이 시점에 나타난 걸까. 어젯밤 다래원 앞 골목에서의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혹시 태일이 일부러 누이를 이곳에 보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바로 그때, 전시관 입구에서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관장과 수경이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손을 흔드는 수경을 보자, 서윤은 잠시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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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방화동 집에서 인사동 리온 갤러리까지, 아무리 서둘러도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거리였다. 지하철을 타고 종로3가역에 도착한 그녀는 재킷을 벗어들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직장 상사의 눈총을 피하려면 가능한 한 1분이라도 먼저 도착해야 했다.


숨을 헐떡이며 마침내 갤러리 문을 밀고 들어서자, 탕비실에서 머그잔을 든 경숙 씨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따라 화사하게 보이는 그녀가 서윤의 후줄근한 몰골을 위아래로 훑으며 빈정거리는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하필 오늘 같은 날 지각이라니요?

-응, 집에 좀 일이 있어서.

-아까부터 관장님이 찾으셨어요. 빨리 올라가 보세요.

-진짜? 알았어.


관장이 그녀를 찾은 이유는 분명했다. 어제 명명희 선생 작업실에 다녀온 결과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성과라 부를 만한 것은 거의 없었지만, 관장이 듣고 싶어 할 말만 빠르게 추려낸 뒤 핸드백을 2층 사무실에 내려놓고는 곧장 3층으로 향했다.


관장실 안에는 서늘한 공기 속에 진한 커피 향이 감돌았다. 최희숙 관장은 올리브색 정장 안에 흰색 블라우스를 산뜻하게 받쳐 입고 있었다.


뿌리 염색 시기를 살짝 놓친 듯 앞머리 부근에 희끗희끗한 기운이 드러났다. 그녀는 서류를 넘기던 손을 잠시 멈추고 흐트러짐 하나 없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오늘 좀 늦었네. 아침잠이 많은 편인가?

-아, 아닙니다. 오늘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죄송합니다.

-어제는 어땠어? 명명희 선생님은 잘 지내시지?

-아직 일본에 계세요.

-아직도?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신 건가?


관장의 입가에는 염려보다 실망에 가까운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제는 관장님이 직접 나서셔야 할 때인 것 같아요. 김순자 씨를 설득하시든, 아니면 일본으로 건너가 명명희 선생님과 대화하시든지요.


서윤은 궁색하게 들리지 않도록 관장의 역할을 은근히 강조하며 말을 꺼냈다. 여러 번 되새긴 끝에 어렵사리 내뱉은 말이었다. 관장과 명명희 작가는 오랜 세월 두터운 친분을 이어온 사이였다. 관장실 한쪽 벽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증명하듯 명명희 선생의 젊은 시절 동양화 한 점과 유화 소품 몇 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만약 명명희 선생이 제안을 거절하면 그때는 정말 상황을 돌이키기 어려울지도 몰라.

-예전에 큰 도움을 주신 적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맞아. 명명희 선생이 힘들 때마다 내가 얼마나 든든하게 서포트했는데. 화가 한 명 제대로 키워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선생의 명성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야.

-맞아요. 관장님께서 나서시면 명명희 선생 측에서도 모른 척하지 않을 거예요.


서윤은 어제 김순자 씨 사무실에서 본 미발표작 ‘사월의 정원’에 대해 한동안 설명을 이어갔다. 명명희 선생의 그림 세계가 변곡점을 지나 더욱 깊고 넓게 확장되었다는 이야기는 최 관장의 눈빛까지 반짝이게 할 만큼 흥미로운 뉴스였다.


한국 화단의 대모를 자처하는 그녀에게, 명명희 작가의 마지막 불꽃 같은 하이라이트를 함께 만들어갈 절호의 기회였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마음속 욕망을 자극하는 눈부신 매혹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김순자 씨에게는 내가 직접 연락해 볼게. 그런데 오늘 피노키오 견학 일정은 어떻게 되지?

-오후에 한 팀 있어요. 아현초등학교에서 서른 명 정도 방문할 예정입니다.

-좋아. 이번에도 서윤 씨가 사고 없이 잘 진행해 줘.

-네. 알겠습니다. 피노키오 이야기를 적절히 섞어 해설해 주면 아이들도 흥미로워할 거예요.


리온 갤러리 4층에는 피노키오 특별 전시관이 있다. 네 구역으로 나뉜 이 공간은 피노키오와 관련된 각종 오브제와 그림, 기획 아이템들로 빼곡하다. 큰 조형물과 모형은 바닥 위에 설치 작품처럼 배치되어 있고, 작은 소품은 유리 상자나 진열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부분의 작품은 관장과 남동생 최승주 실장이 오랜 시간 세계 경매장을 누비며 수집한 것들이다.


처음부터 피노키오 테마파크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전시관답게 연중 내내 어린이 단체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아현초등학교 역시 매 학기 꾸준히 학생들을 보내오는 단골이었다. 


서윤은 오전에 처리할 일들을 정리한 뒤 사무실 데스크에 앉아 아이들에게 들려줄 전시 내용을 꼼꼼히 살폈다. 파일을 하나하나 펼치며 눈으로 따라가는 동안, 머릿속에는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호기심 어린 표정들이 스쳐 갔다. 그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피노키오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생생한 숨결로 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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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다음 날, 서윤은 평소보다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간밤의 숙취로 인해 흐릿하던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지면서, 어젯밤 인사동 골목에서 태일과 말씨름을 벌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부터 말을 놓겠다고 내둥 큰소리를 쳤지만, 그게 과연 잘한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협탁 위에 놓여 있는 알람 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에 맞춰 둔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어댔을 때 잠깐 정신이 들기는 했다. 그런데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사이 어느새 2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앗, 지각이다!


정신이 번쩍 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화장대 거울에 비친 얼굴은 푸석했고, 수세미처럼 뒤엉킨 머리에서는 쿰쿰한 머릿기름 냄새마저 났다. 하루 정도 편히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오늘 갤러리에 중요한 행사가 있어 출근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고무줄로 머리카락을 대충 묶고는 거실로 내려갔다. 속이 메스꺼워서인지 집 안에 퍼진 된장찌개 냄새가 조금 역하게 느껴졌다.


아버지의 모습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친구 부모님의 발인식에 들르기 위해 새벽같이 나가셨다고 엄마가 말했다. 출근 시간이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라도 감고 나갈 채비를 하려면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엄마, 국 없어? 속이 좀 쓰려.

-어제도 제이랑 둘이 마신 거야? 여자애들이 무슨 술을 그리 퍼마셔?

-어쩌다 그럴 수도 있지.

-에고, 내 팔자야. 딸년 술국까지 끓여 바쳐야 한다니…


엄마는 앞치마를 벗어 던지더니 낡은 동전 지갑을 챙겨 들고 허둥지둥 동네 구멍가게로 달려 나갔다. 욕실에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나오자 압력밥솥 꼭지가 딸랑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서윤은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가 가스레인지 불을 줄였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올케가 조카 선호를 안고 들어왔다. 올케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목소리까지 착 가라앉아 매가리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아가씨, 나 속상해서 죽겠어요. 선호 아빠, 또 집 나갔어요.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어젯밤에 잔소리 좀 했어요. 가장이면 최소한 생활비라도 벌어와야 할 거 아니에요? 그런데 아침에 보니, 그 인간, 이번 달 월세 내려고 모아둔 돈까지 챙겨서 그냥 튀었어요. 아휴, 이 원수! 당장 이혼할 거야. 이젠 나도 못 참아요.


올케는 아이를 소파에 눕히며 울분 섞인 말들을 쏟아냈다.


-어휴, 오빠가 또 왜 그런데요…


서윤은 머리에 수건질을 하며 담담히 대꾸했지만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오늘따라 올케의 모습이 유난히 초라하게 보였다.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옷차림, 부스스한 파마머리, 수심으로 가득한 꺼칠한 얼굴이 갑갑한 일상을 대변하는 듯했다.


-왜 다른 집 남자들처럼 성실하게 살 생각은 안 하고 순 사기꾼 같은 놈들이랑 어울리는지 모르겠어요. 미친놈! 허랑방탕한 놈!


올케는 급기야 오빠를 향해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선호는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어린아이였는데 올케의 날 선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입을 비죽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 마침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침부터 왜 애를 울리고 난리냐. 저리 비켜라.


엄마는 두부와 콩나물이 든 비닐봉지를 올케에게 떠넘기고는 어린 손자를 덥석 품에 안았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법이야. 어디서 여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가?


엄마는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올케를 향해 날카로운 눈길을 던졌다.


-어머니, 암탉이라니요. 지금이 무슨 19세기도 아니고,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요, 저희 이제 더 이상 망할 것도 없어요. 무서울 거 하나 없다고요.


만만치 않은 기세로 되받아치는 올케의 말에 엄마의 낯빛이 더욱 어둡게 변했다.


-지금 이 시어미를 찍어누르겠다는 거냐? 다 시끄럽고, 서윤이는 뭐 하니? 얼른 나갈 준비해야지.

-저도 아가씨처럼 밖에 나가서 일이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선호는 어쩌고?

-뭐, 어머니가 봐주시겠죠. 아범 대신 저라도 나서야 선호 우윳값은 벌지 않겠어요?

-내가 언제 너희를 굶기디? 오늘 내 속을 긁기로 작정했구나.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얼른 가서 콩나물국이나 끓여라. 난 선호 얼굴 좀 씻길 테니.


엄마는 선호를 번쩍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어머니, 저희 이 집에 들어와서 살아야겠어요. 이번 달 월세, 아범이 다 들고 튀었어요. 아셨죠?


올케의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엄마는 대꾸 없이 욕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 바람에 서윤의 어깨가 절로 움찔 떨렸다. 곧 욕실 안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쏟아져 나왔는데, 가족 간에 엉겨 붙은 갈등을 어떻게든 덮어보려는 헛된 소음처럼 들렸다.


자식이란 끝내 부모가 짊어져야 하는 업보일까. 오빠가 저질러 놓은 무책임한 일들이 이제 늙은 부모의 짐으로 되돌아온 듯싶어 서윤의 마음은 더없이 불편했다.


젖은 머리를 대충 말리고 가볍게 화장을 한 서윤은 빈속을 달래기 위해 식탁에 앉아서 급히 한술 뜨기 시작했다. 


올케는 옆에서 지치지도 않고 같은 레퍼토리를 되풀이했다. 왜 오빠를 도와주지 않느냐는 원망이 그 모든 말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오빠가 허풍쟁이에 노름꾼, 결국 쓸모없는 낙오자라는 말들은 사실 자신을 향해 던져진 돌멩이처럼 가슴에 콕콕 박혔다. 핏줄에 대한 험담은 여전히 불쾌하리만큼 거북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자신이 둘러메어야 할 몫처럼 버겁게만 느껴졌다.


‘왜 우리는 맨날 이 모양인가.’


서윤은 쓴 담즙처럼 치밀어 오르는 말을 애써 삼켰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계속 속이 헛헛하고 공허함만 맴돌았다.


‘어제 술을 괜히 마셨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 그다음 얘기는 나중에 해요. 이러다 진짜 지각하겠어요.


서윤은 올케의 어깨를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은 위로를 담은 토닥임이라기보다 막막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짓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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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하지만 태일이 품고 있는 상자 안에는 훨씬 더 즉물적인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결혼 절차를 계속 미루면서도, 틈만 나면 그녀를 호텔 방이라는 밀실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그런 순간마다 서윤은 마치 팔려 온 여자처럼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다뤄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때론 숨이 막히고 수치스러웠으며, 억울함이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이런 일과 이런 감정에 결코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성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우리 사이에 뭐가 더 중요한 게 있지?


언젠가 태일이 한 그 말은 서윤에게 부끄러움을 강요했다. 그때 그녀는 ‘사랑’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손에 쥐고 있는 그 단어의 무게나 형태를 온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행복은 끔찍한 재앙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른다. 만약 행복이라는 감정이 신기루처럼 부풀려진 허상이라면, 사람들은 왜 결혼을 권하고 또 요구하는 걸까. 결혼과 섹스 대신 다른 형태의 사랑도 가능하지 않을까.


-사랑의 감정은 다 비슷비슷한 걸까?


서윤의 목소리가 작게 허공에 흩어졌다. 제이가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인류애와 이성 간 사랑은 다를까?

-질문의 요지가 뭐야?

-아이에 대한 사랑과 강아지에 대한 사랑은?

-그건 그냥… 다르게 아픈 거지, 바보.


제이가 장난기 섞인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래, 나는 바보인가 보다.


서윤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무슨 일 있네. 그렇지?


제이는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서윤은 맥없는 표정으로 허공에 걸린 수레바퀴를 올려다보았다.


-‘수레바퀴 밑에서’라는 제목이 이제 이해될 것도 같아. 사랑도 결국 제자리만 맴도는 건 아닐까?


그녀가 손가락으로 수레바퀴를 가리켰다.


-넌 생각이 너무 복잡해. 힘들면 그냥 수레에서 뛰어내리면 돼.


제이가 말했다.


-아니. 난 지금, 그 바퀴 밑에 깔린 것 같아.


제이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껍데기째 바삭하게 튀긴 새우를 건네며 미소 지었다.


-얼른 먹어. 뜨거울 때가 제일 맛있어.


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들은 말없이 술을 마시고 기름진 안주로 영혼의 허기를 채웠다. 때로 침묵이 가장 깊은 대화가 되기도 하니까.


-사실은,


두 번째로 주문한 술잔이 테이블에 놓였을 때, 서윤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꾸 어떤 남자가 생각나.


제이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남자? 어떤 남자?

-저번에 횡계 갔을 때,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있어.


서윤은 비밀을 흘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도 가물가물한데, 그 사람이 떠오르면 마음이 이상해져.


제이는 기겁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렸다.


-맙소사! 다른 남자라니? 애가 큰일 날 소리하고 있네.


제이가 눈을 부라리며 종주먹이라도 들이댈 기세였지만, 서윤은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우리 내일 낚시하러 갈래요?


문득, 귓가에서 되살아나는 목소리. 가슴 한편이 여전히 저릿저릿했다. 그날, 그 순간, 그리고 그 말이 가져온 묘한 떨림. 그것은 영원히 오지 않을 내일이었고, 끝내 지켜낼 수 없는 약속이었다. 그는 누구일까. 왜 그날의 공기와 속삭임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걸까. 서윤은 참을 수 없는 감정의 역류에 목이 타는 듯 레몬 하이볼을 연거푸 꿀꺽꿀꺽 삼켰다.


-말해 봐. 누군데? 어떤 남자야?

-수레바퀴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 닿을 수 없는 풍경처럼 멀고, 그래서 자꾸 생각나는 사람.


서윤은 단어 하나하나를 어렵게 내뱉고는 자신도 모르게 푸 웃었다. 그 웃음은 슬픔 대신이었고, 그리움에 대한 한숨 소리와 같았다. 횡계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사람. 어쩌면 꿈속에서 꿈을 꾼 것이 아닌지, 문득 궁금해지는 그날의 목요일 오후.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입안에서 맴돌다 사라지는 봄날의 숨결처럼, 그렇게 희미해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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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김미진


-근데 왜 반말했는데? 둘이 싸웠어?


서윤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시선을 피했다. 정작 자신도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왜 그동안 눌러둔 말들이 터져 나온 건지, 왜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일의 차에 오르지 않은 일, 호텔에서의 식사와 디저트, 그리고 뻔히 이어질 절차를 거부한 일… 이제는 그 남자의 숨소리가 몸에 닿는 것조차 거슬렸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서윤은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가 오히려 깊은 상처를 떠안는 장면은 낯설지 않았다. 여자들은 그 어이없는 현실 속에서, 자기 몸에 가해진 폭력조차 발설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졌다. 아픈 기억은 종종 침묵 속에 묻힌 채, 잊히기만을 기다리며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다.


서윤 역시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앞에서도 태일과의 마찰에 담긴 진실을 끝내 말할 수 없었다.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알 수 없는 기세에 떠밀려 어떤 자리에 이르게 된 경험, 그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내는 일은 지금의 그녀에게 불가능했다.


여자의 몸은 순결과 욕망 사이, 그 어디쯤을 떠도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이 자신의 욕망이고 무엇이 타인에 의해 강요된 것인지 어렴풋이 알아차린 뒤에도, 그때의 기억을 자기 안에서 분리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쓰라리게 다가왔다.


-왜 싸웠냐니까?


제이가 다시 물었다.


-오늘 다래원에서 저녁 먹었는데, 그 식당이 구리다는 거야.

-다래원이 구리다고? 인사동에서 은근히 분위기 맛집인데.

-그치?

-근데… 뭐가 싫다는 거야?

-글쎄…


태일의 일그러진 표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실룩거리는 턱선, 가늘게 떨리는 콧볼, 목소리에 배어 있는 위압적인 기운. 그의 분노는 일시적인 감정의 폭발 같았지만, 그 뒤에는 그녀의 앞날을 죄어 오는 덫이 숨어 있었다. 어쩌면 오늘 일로 그가 먼저 파혼 이야기를 꺼낼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런 식으로 결말이 난다면 속이 시원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가족들, 특히 연로한 부모를 생각하자 금세 목울대가 뻐근해졌다.


-서윤아.


제이가 한참 뜸을 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결혼하면 그 집안 식구들하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안 맞는 것도 많을 거고, 은근히 무시당하는 순간도 있을 텐데.


제이가 불쑥 문제의 본질을 짚어내자, 서윤은 모른 척 술잔만 홀짝거렸다. 제이도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불확실한 미래가 메트로놈의 박자처럼 자의식을 흔들던 그때, 낡고 통속적인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결혼이 꼭 필요한 걸까?’


비록 약혼까지 한 상태였지만, 지금껏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본 적 없었다. 결혼이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면서도,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애는 하나 낳아야지’ 같은 주변의 속삭임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결혼과 육아’는 여전히 비밀 상자처럼 감춰진 미지의 영역이었다. 진실이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곁을 맴도는 시도일지도 몰랐다. 진짜가 아닌 진실은, 어떤 대답으로도 결코 완전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대학 시절, 어느 교수가 검은 천으로 덮인 상자를 내밀며 그 안에 손을 넣어보라고 한 일이 있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 채, 학생들은 긴장한 얼굴로 한 명씩 손을 집어넣었다. 서윤도 차례가 되어 동그란 구멍 안으로 손을 넣었다. 짧은 순간, 숨이 막힐 듯한 두려움 속에 어두운 허공을 배회하던 손끝. 마침내 차갑고 물컹한 무언가에 닿았던 그 촉감의 기억.


상자 안에 무엇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공포는, 지금 자신이 맞닥뜨린 삶의 ‘질문’들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삶에서 그녀는 자신의 상자 안에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반복적으로 주입된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상자 위에 검은 천을 덮어씌운 채, 그것이 달콤함의 근원인 양 가장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마음속에서 번지는 불안과 의문이 상자 안 어둠처럼 그녀의 내면을 잠식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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