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포리 다리> watercolor on paper 34X 23.7cm 2012
가을이 오면 호숫가 물결 잔잔한 그대의 슬픈 미소가 아름다워요
눈을 감으면 지나온 날에 그리운 그대의 맑은 사랑이 향기로워요
노래 부르면 떠나온 날에 그 추억이 아직도 나를 슬프게 하네
잊을 수 없는 님의 부드러운 고운 미소 가득한 저 하늘에 가을이 오면
이것은 이문세 씨가 우수에 젖은 목소리로 부르는 ‘가을이 오면’ 가사다.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가슴 한쪽에 있던 주축돌 하나가 쑤욱 빠져나가면서 그 빈자리에 아슴아슴 뭔가 피어오르는 느낌이 든다. 연초록의 뽀얀 물빛이 하염없이 번져가는 그런 순간이기도 하다.
모두들 자신만의 가을 이야기와 추억의 장면이 있을 것이다. 내게 가을은 클래식 음악과도 같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선율이 배경 음악처럼 깔리고 가을 언저리의 눈부신 풍경들이 마음에 사무치면 나도 모르게 아득하만 했던 옛 시절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오래전 어느 가을 날, 나는 차를 몰고 볼티모어 로열라 칼리지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주위 풍광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후였지만 내 마음은 청춘의 열병으로 뿌옇게 흐린 상태였다. 그때 자동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과 한적한 도로 위를 굴러다니던 은행잎들이 압도적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살다보면 인생의 퍼즐 조각들이 일시에 맞춰질 때가 있다. 내게는 그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가을날들이 거기 그 자리에서 하나로 압축된 것만 같았다.
너무 짧아서 늘 아쉬운 계절이 바로 가을이다. 이렇게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날 오후에는 슬며시 집을 빠져나와 근처 도서관 같은 곳에 가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으며 한다. 무슨 책을 읽을 지는 그 순간의 예감과 자율적인 선택에 맡긴다. 책들은 항상 운명처럼 그 자리에 꽂혀 있다가 손끝에 딸려 나온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낡은 시집이나 낭만파 시대의 고전 문학도 좋고, 자연식 영양이나 고생대 생물학에 관한 최신판 신간 서적이라도 좋다. 정신을 느글거리게 만드는 만화책만 아니라면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모두 감당할 자신이 있다. 그러다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가을 숲길의 낙엽 냄새와 사각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떠올리며 너무 무겁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미소를 지어보는 것이다.
가을 허공에는 외로움의 향기가 감돈다. 말간 햇살이 어른거리는 도서실 창가에 다시금 침묵이 흐른다. 발음과 형태 분석이 모호한 시곗바늘은 세월의 눈금을 새기고 있다. 한 권의 책은 빈 도화지처럼 하나의 우주를 내포하고 있다. 나는 의식하고자 하는 세계의 의식과 의식할 수 없는 세계의 무의식 속으로 더욱 깊숙이 잠입해 들어간다. 텅 빈 오후를 가르며 천천히 책장이 넘어가는 차락차락 소리..도서관 한쪽 끝에서 들려오는 지나간 청춘의 나지막한 기침소리..그러나 가장 완벽한 가을날 풍경 어디에도 그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