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암동-산책>유채 2013-4
옛말에 생각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고 한다. 말을 타고 달릴 때, 뒷간에서 일을 볼 때, 자려고 베개를 베고 누웠을 때, 혹은 한적한 마음으로 산책길을 나섰을 때 이리저리 꼬인 생각들이 절로 풀리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머리가 복잡할 때 주로 운전을 한다. 파편처럼 조각난 아이디어들, 앞뒤가 꽉 막힌 생각들을 풀기 위해서는 그저 몇 시간이고 운전대를 잡고 냅다 질주하는 게 상책이다. ‘2시간째 같은 차선 주행 중’이라고 쓴 초보 운전자의 경고판이 이때만큼은 나에게도 해당된다.
생각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아 잠시나마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순간에도 음악은 필요하다. 차창 밖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도로 위에 가득한 소음과 나 사이에 얇은 가름막 하나를 세워두는 것이다. 생각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운전 속도를 올리지 않는 게 좋다. 차선도 거의 바꾸지 않고 3차선이나 4차선에서 유독 늦게 가는 차만 졸졸 쫓아간다. 차량사고도 예방하고 그러면서 생각의 호흡을 끊지 않기 위한 나만의 운전법이다.
정신을 모으는 데는 아무래도 클래식 음악이 좋다. 라디오는 지지직거리는 전파장애와 시엠송, 디제이들 목소리 때문에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가사가 있는 가요나 팝송 째즈 오페라 같은 것들도 생각을 뚝뚝 끊어 놓기 때문에 별로 달갑지 않다. 차 안에는 이럴 때를 대비한 몇 장의 시디가 구비되어 있다. 피아노곡이나 첼로, 플롯, 오케스트라 연주곡도 실험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템포가 빠른 바이올린 곡들이 어지러운 머리를 식히는 데는 가장 적당한 것 같다.
평소 귀에 너무 자극을 준다 싶은 바이올린 소품들이 무척이나 달콤하면서도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바이올린 선율의 예민하게 떨리는 하이 톤에는 사람의 뇌파를 자극하는 뭔가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음파의 알 수 없는 영역이 무의식에까지 끼어들어 ‘생각해, 생각해! 저 밑바닥까지 생각하라고!’ 하면서 자꾸만 내 머릿속을 걷어차는 듯하다.
음악은 또 하나의 카오스적 존재다. 그것을 받아들여 걸쇠로 죄어놓았던 의식들을 흩어놓기 위해서는 가능한 바이올린 템포가 심박수를 자극할 정도로 강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선택한 음악이 바네사 메이 풍의 격렬한 바이올린 곡들인데 그런 연주곡들을 들으며(아니, 그저 음악에 귀를 가져다 댄 채), 몇 시간쯤 달리다 보면 대개는 뭔가 꿈틀거리며 서서히 풀릴 낌새를 보인다. 평상시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것들이 단편적으로 떠오를 때도 있고, 자잘한 사념의 꼬랑지들이 이리저리 엇갈리다 한순간 총체적으로 들어날 때도 있다. 그럼 나는 어딘가에 멈춰 서서 콧잔등을 몇 번 긁적거리고는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몽땅 쏟아내듯 메모지에 받아 적은 다음 아무런 미련 없이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향한다.
사실 몇 시간의 드라이브가 내 인생까지 구제한 예는 거의 없다. 아니, 단 한번도. 머릿속을 깨끗이 정리했다 해서 삶이 그만큼 가벼워졌다거나 작업이 한결 수월해졌다는 식의 기적은 아무에게나 쉽게 찾아오지 않는 모양이다. 생각은 생각이고, 삶은 그저 삶일 경우가 대부분이니 어쩌겠는가. 어차피 인생은 혼자 끌고 가는 수레 아닌가. 그 위에는 수없이 많은 실타래와 나조차도 처음 보는 무거운 박스들, 잠재된 골칫덩어리들이 잔뜩 실려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골치 아픈 상황에 처했을 때 엉킨 실타래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가는지 궁금하다. 남태평양 타히티 섬에까지 가서 생의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고갱의 마지막 작품 제목은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가?>이다. 과연 나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이 되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쩔수 없이 감당해야 할 숙제들을 풀기 위해 오늘도 운전대를 꽉 잡은 채 도로를 주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