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배지]

 

 

어느새 뉴욕을 떠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내일 오후 7시쯤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서 자정 넘어 비행기를 타게 되니 정확히 오늘 밤과 내일 하루를 더 지낼 수 있다는 결론이지만 실제적으로 뉴욕에서 보내는 밤은 오늘이 마지막 입니다. 내일 낮 12시까지 체크아웃을 해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 앞에 장시간 앉아 있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15박 17일 간의 뉴욕에서의 체류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여행 다닐 때마다 일기도 쓰고 이것저것 주어 담기 위한 작은 크로키 북을 들고 다니는 데 어쩌다 보니 그럭저럭 한 권을 거의 채워가는 중입니다. 인천 공항을 떠난 순간부터 나의 유일한 말벗이 되어 주었고 친구였으며 동반자였습니다. 이런 여행 일기조차 끄적거리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거리에서 그 긴 시간을 혼자 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로 대견하고 기특한 크로키 북입니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지만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은 오랫동안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적거니 그리거나 오려 붙인 것들은 사진으로 찍은 모습들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사진이 포착해 낼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입니다. 겉모습 구도 아웃라인만 똑같을 뿐 색채나 분위기도 딴판일 때가 많고, 중요한 디테일들도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요즘은 디카나 휴대폰을 사용하기 때문에 어디 가서든 사진으로 촬영 횟수는 늘어났지만 그만큼 희소가치 또한 줄어들었습니다. 예전에 필름으로 찍을 때는 사진을 현상하여 계속 들여다보기도 하고 잘 나온 것을 뽑아서 걸어놓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저 파일이나 폴더에 담아 놓고는 그만일 때가 많습니다. 저에게 여행일기란 들고 다니기도 버거운 구식 카메라를 이용해 흑백 필름으로 찍은 기억들을 다시금 현상하고 인화해서 가슴에 오래 간직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도 미술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친구나 아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사실 집중하기 어려운 데가 바로 미술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 혼자였고 정말로 줄기차게 미술관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습니다. 짐을 꾸리다 그 동안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오브 아트(메트)에 들어갈 때마다 받은 입장표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옷깃에다 달고 다녀야 하는 얇은 쇠로 만든 배지가 한쪽에 쌓여 있어서 세어 보니 모두 9개나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9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메트에 갔다 왔다는 소리지요. 후반으로 갈수록, 다른 미술관이나 전시회 등을 보러 다니는 동선이 길어져 메트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짧아지긴 했지만 나름 뿌듯한 하루하루였습니다.

 

메트에는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부터 현대의 미니멀 아트나 개념미술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 에드워드 하퍼, 보나르, 마티스, 모네, 척 클로즈, 클레, 피카소, 베르베르, 드가, 고흐, 마네, 로트렉 등등의 제가 좋아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집중적으로 많이 볼 수 있어서 더욱 기뻤습니다. 그림을 관람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 주는 선에서 잠깐씩 작품 모사를 해 보기도 했습니다. 눈으로만 볼 때와 자기 손으로 직접 그려볼 때의 경험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언제 또 뉴욕에 와서 이렇게 혼자 느긋한 시간을 보내며 렘브란트며 벨라스케스의 자화상들을 따라 그려보겠습니까. 그냥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생각 하고는, 다른 사람이 보든 말든 얼굴에 철판 한 장 깔고는 한동안 그림 앞에서 펜으로 쓱쓱쓱...

 

 

[그림, 벨라스케스와 램브란트 자화상 모사]
 

어제는 스태튼 아일랜드에 다녀왔는데 일반 가정집처럼 생긴 작은 규모의 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마주친 고야의 작품은 조금 뜻밖이었습니다. 스페인 화가 고야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최초의 다큐멘터리를 그림으로 그려낸 화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밑에 보이는 스케치도 그런 작품들 중의 하나였는데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던 터라 나중에 혹시 이런 자료라도 필요할까 싶어  어설프나마 대충 비슷하게 그려왔습니다.  

 

 [여행 일기 중 고야의 판화와 거기에 같이 전시 중인 스태튼 출신 화가 콜맨 루킨의 판화 작품을 모사한 페이지: 박물관 입장권이나 짧은 글들, 그림에 관해 적어 놓은 글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악마같이 생긴 폭군의 하반신 쪽 묘사가 별로 정확하지 않아서 조금 난감했습니다. 이렇게 작가들의 그림을 따라 그리다 보면 작업하면서 생긴 실수, 고민한 것, 갈등하고 다시 시도한 것 등을 그대로 집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림 외형으로 보이는 것만이 중요한 건 절대로 아니지만 말입니다.

 

관람객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경비원은 백인 아줌마였는데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때로는 친절한 말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스태튼 출신 확 콜맨 루킨의 판화 작품들과 모노톤의 추상성이 강조된 유화작품들도 무척 신선하고 좋았습니다.

   

아, 스태튼 아일랜드는 뉴욕 맨해튼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이 이곳에 많이 정착해서였을까요. 도로라든가 건물 모습에서 어딘가 시칠리아 섬 같은 인상을 풍기고 그밖에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도 소박한 구석이 많은 섬이었습니다. 물론 오며 가며 자유의 여신상도 공짜로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박물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청 안에 있는 멋진 프레스코 화들도 감상하고 히스토릭 리치몬드 타운에 가서는 오래된 저택들의 사진도 많이 찍었습니다.

 

날씨도 춥고 센디가 지나간 지도 얼마 안 되고 해서인지 거기에서도 여행자는 오로지 저 혼자뿐이었지만 나름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80년대 초의 미국에 다시 온 듯한 느낌도 들고. 제가 그때 미국에서 대학에 다녔거든요. 제가 기억하는 진짜 미국의 모습을 그 섬에서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오전에는 메트에 가기 전에 77번가에 있는 아쿠아벨라 화랑에 잠깐 들러서 웨인 띠버드의 작품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 넣으며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직접 따라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간단한 스케치였지만 그리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웨인 띠버드'Boston Cremes'모사]

 

캘리포니아 화가 띠버드의 '파이 그림'이라면 혹시 아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92세인데 아직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 대단한 분입니다. 계속 팝 아트 계열의 그림들, 여자 구두나 사탕 아이스크림 같은 먹거리를 그리거나 혹은 도시 풍경화 같은 것들을 주요 소재로 다뤄왔는데 90세가 넘어 추상화 쪽으로 방향 선회를 하면서 굉장히 흥미진진한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그분의 60년대 70년대 작품들이 더 끌리긴 합니다. 뭐랄까, 더 진지하다고나 할까.  

 

휘트니 미술관에서 띠버드의 80세 생일을 자기네들이 직접 챙겨드렸다고 하던데(서점에 계신 분에게 직접 들은 얘기 입니다.) 정말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분이라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오늘은 아줌마 부대를 이끌고 전시 관람을 온 어느 강사 분에게 띠버드의 사생활, 부인이 아주 젊고 활동적이며 둘 사이에 5살 먹은 쌍둥이 딸인지 아들도 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뉴욕 사람들은 띠버드의 작품을 아주 좋아 합니다. 작품 전시회 역시 연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미술관 같은 데서는 더 이상 현대 작가들의 대규모 전시회를 열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소장자들이 너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보험 문제 등이 까다롭다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이렇게 화랑에서 밖에는 전시를 열 수 없다고 하는데 덕분에 저는 시간 날 때마다 들려서 공짜로 그림 구경도 하고 이렇게 작품 모사도 할 수 있었습니다.

 

 

[웨인 띠버드'Hot Dog Stand,2004-12' 'Pastel Scatter,1972' 모사와 숙소의 작업대 모습 일부

 

크로키 북을 정리하다 짐 가방에 챙겨온 수채화 물감을 처음 꺼냈습니다. 오늘은 계속 시커먼 빛깔의 스케치 뿐이라 색채 있는 그림을 하나 더 첨가할 생각이었는데 솔직히 썩 좋은 상태는 아닙니다. 펜으로만 그렸을 때는 그럭저럭 볼만했는데 위에 수채 물감을 입히니 밑그림이 꺼멓게 뭉개져서 신선한 맛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갤리리에 있는 그림 앞에서 다리가 뻣뻣해질 때까지 제법 공을 드린 거라 아깝기만 합니다. 막상 떠날 날이 가까워 오고 보니 그동안 뉴욕에서 지내면서 센트럴 파크에 하루쯤 사생 스케치를 하러 나가지 못한 점도 끝내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잠깐 나가서 숙소 근처 거리 구경 좀 하다가 돌아와 잠을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문이나 문장 정리 같은 건 시간 날 때마다 다시 들어와 살펴보겠습니다. 그런 것들까지 꼼꼼히 챙기다보면 오늘 밤 안으로 이 글을 못 끝낼 것 같아 대충 여기서 정리할까 합니다. 서울 가서 마지막 글을 올리면 별 의미도 없을 것 같고...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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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유채, Garden at Sainte-Adresse, 1867]      

 

 

오늘도 모네의 정원에는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미술관은 애송이 화가에게 '오픈 북' 같은 장소다.선대의 화가는 무덤 속에서도 말을 하고 눈짓을 보내고 경청한다. 그것은 언어가 없는 언어, 전언 이전의 전언, 그리고 깨달음이다.

 

늙은 경비원은 오래된 석고상처럼 움직일 줄을 모른다. 관람객들은 전시실 통로를 따라 공기처럼 부유한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간격을 좁히며 지나간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저기 전시실에서 이곳 전시실로. 그리고

 

바라본다. 여기 앉아 팔걸이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고, 팔걸이이자의 남자는 파라솔 여자와 신사복 남자를 바라보고, 허공에 걸린 두 개의 깃발은 파리 인상파의 빛과 색채를 바라보고, 출렁대는 바다는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은 더 높은 곳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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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2012-11-19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지내다 오길~

김미진 2012-11-20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
 

[뉴욕의 쓰레기들, 어제 모습]

 

아침에 뉴욕 거리를 걷다보면 절로 고개를 젓게 됩니다. 이건 많아도 너무~많아! 뭐냐고요? 바로 쓰레기들 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쏟아낸 흔적들...어제도 이만큼씩 버렸는데 오늘은 더 커다란 쓰레기 봉지들이 거리 곳곳에 높다랗게 쌓여 있습니다. 많이 벌고 많이 쓰자! 뭐, 이런 모토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라고는 하지만 이건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 같습니다.

 

미국인들이 마냥 소비하고 버린 쓰레기들로 아메리카 대륙이 가라앉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소비자 물가지수가 내려가면 경제가 위축되고 적신호가 켜진다고 하던데 그러자니 거대한 자본주의가 미국을 통째로 깔고 앉아서 숨통을 조이는 듯합니다.

 

 

[뉴욕의 쓰레기들, 오늘 모습]

 

아침마다 거리의 그늘진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쓰레기 더미들은 뉴욕 도시의 작은 단면에 불과합니다. 쓰레기의 부정적인 측면만 부각하는 것 또한 낯선 여행자 입장에서는 섣부른 판단일 수 있습니다. 쓰레기는 한 사회의 또 다른 얼굴입니다. 그런 얼굴들, 삶의 증거물들이 모여 결국에는 그 시기의 화석대를 이루고 역사의 타임캡슐로 굳어진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History comes to life' 역사가 일상이 되는 현상들을 이 도시에서는 수시로 목격할 수 있습니다.

 

어제는 소호에 갔다가 한 갤러리에서 샤갈 그림을 실제로 판매하는 것을 보고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40호에서 50호 중간 사이즈의 유화 작품이었는데 실제로 화랑 한쪽에 그림을 걸어 놓고 콜렉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도나 주제도 작년 겨울 서울 시립미술관 샤갈 전에서 본 그 작품과 많이 흡사했습니다. 회색 빛깔 주조로 된 거리의 마을 풍경, 마을 사람들, 세로로 된 화면 구성...아마도 그때 그 그림의 주인공은 십자가를 멘 예수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사이즈는 좀 작지만 그림의 스타일이나 질적인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은 작품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저거 진짜로 샤갈이죠?"

 

밖으로 걸어 나오며 카운터에 있는 예쁘고 화려하게 생긴 백인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었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규모도 작은 화랑에 샤갈의 판화나 드로잉도 아닌 커다란 유화 그림이 걸려 있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으니까요.

 

"네, 그럼요. 샤갈 맞아요." 여자가 웃으며 상냥하게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진짜로 파는 거예요? 샤갈 그림을?"

 

"맞아요. 정말로 파는 거예요."

 

여자의 대답에 제 눈은 더욱 동그래졌습니다. 이런 질문을 해도 되나 싶으면서도 겸연쩍어 하며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어요.

 

"혹시 가격은 얼마나 돼요?"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파이브 포인트 밀리언이에요."

 

밀리언이란 단어에 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가격이 비싸서가 아니라 실제로 거래되고 있는 시세,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 오가는 액수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어제는 마침 비도 오고 약간 추웠습니다. 밖으로 나와 점심을 먹으러 가려는데 문득 그런 의문이 들더군요.

 

'그런데 포인트는 뭐지?'

 

'파이브 포인트 밀리언' 중간에 들어 있는 '포인트'라는 단어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길 가던 여자에게 조심스레 물어 보았더니 고개를 꺄웃거리며 '파이브 포인트 파이브'를 줄여서 '파이브 포인트'라고 말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그 샤갈 그림이 이곳에서 5.5밀리언 달러에 거래되고 있다는 결론입니다. 분명히 한국 돈으로 5억은 넘을 것 같고 그렇다면 50억? 아니면 500억? 제 머리로는 도무지 계산이 되지 않았습니다.

 

소호에 있는 어느 화랑에 들어갔더니 남자 큐레이터가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전시 작품에 관해서 이리 저리 설명해 주더군요. 필요하면 작품 가격이 있는 리스트도 보여주겠다면서요. 아마도 저를 미술품 콜렉터로 본 모양입니다. 젊어서는 이런 데 오면 화랑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그만큼 제가 나이 들어 보인다는 얘기겠지요. 어쩌면 동양인, 특히 동양의 중년 여자들을 바라보는 이들 시각이 그새 많이 바뀐 탓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가끔씩 이런 화랑에서 직접 작품을 구매해 가는 한국이나 일본인 사모님들이 많이 늘어났다, 뭐 그런 해석이겠죠.

 

오늘은 휘트니 미술관에 한번 가볼까 했습니다. 그런데 메디슨 에비뉴 76번가에서 쇼윈도에 근사한 미로 그림을 걸어 놓은 갤러리를 발견하고는 무조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참고로 말씀 드리는 건데, 뉴욕에서는 길거리 화랑에 들어가고 싶으면 대부분 밖에 달려 있는 초인종을 눌러야 합니다. 그러면 안에서 누군가 스위치를 누르는 찌잉 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딸깍 열립니다. 이내 문고리가 잠겨 버리는 시스템이니 타이밍을 잘 맞추어 손잡이를 잡아당기거나 문을 안으로 미는 것이 좋습니다.

 

화랑 안에 들어가면 저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며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라고 합니다. 괜히 쭈뼛거릴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예의 차원에서 옷은 조금 깨끗하게 입을 필요가 있을 것도 같군요. 그렇지만 여행 중에 옷 같은 데다 너무 큰 신경을 쓸 여유는 사실 없습니다. 저는 그냥 청바지 차림에 패딩 점퍼, 운동화, 어깨에 둘러멘 가방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그런 차림새인 저한테까지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요즘 뉴욕의 화랑들이 불경기 인가 봅니다. 어쨌거나 어제 소호에서 몇 번 그런 대접을 받고 난 터라 이제는 익숙하니 제 표정 또한 느긋했습니다.

 

메디슨 에비뉴 76번가에 있는 그 고급 화랑에서는 피카소 그림을 다섯 점이나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로스코, 레제, 마그리트, 후안 미로, 웨인 띠버드 등등, 누구나 들어 알 만한 작가들 작품들이 벽에 주르륵 걸려 있더군요. 이층에도 작품이 있다고 해서 올라갔더니 2층 데스크에 앉아 있던 여자 분이 아예 전시 작품들의 가격 정보까지 몽땅 들어있는 카탈로그를 건네줍니다.

 

저는 한쪽 소파에 앉아 그걸 들여다보며 필요한 것들을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술책에 나오는 유명 작가들의 리얼한 진면목(?)을 그대로 지나칠 수야 없지요. 그런데 그 분량이 상당 했어요. 이걸 무슨 수로 한 번에 옮겨 적나 난감하던 차에 마침 데스크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는 게 보였습니다. 타이밍이 기가 막혔습니다. 아마도 저는 전생에 스파이거나 공작원이었을지 모릅니다. 보통 때는 버걱거리던 머리가 그 순간 쾌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지체 없이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조금 손이 떨리더군요. 약간의 흥분, 결코 나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저를 밀어붙였습니다. 그다지 두꺼운 카탈로그는 아니었지만 그 안에 든 작품 정보를 한꺼번에 카피하는 방법은 그 수밖에 없었습니다. 카탈로그는 활짝 펼칠 수 없게 제본된 것이었습니다. 그걸 바닥에 내려놓고는 한 손으로는 이쪽 페이지를 누르고 오른쪽 발끝으로는 다른 쪽 페이지를 누른 다음 한 장씩 넘겨가며 디카로 펑펑 찍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 긴 시간이 흐른 건 아니었습니다. 재빨리 셔터를 누르는 동안 1층에서 직원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렸습니다. 찻잔 부딪치는 소리, 복사기 돌아가는 기계음 같은 것도 들린 듯 했습니다. 여직원의 목소리가 차츰 커지면서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금세 위로 올라올 것만 같았습니다. 어쩌면 이미 층계참 까지 올라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더욱 급해졌습니다. 아직 수집해야 할 정보들이 더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만 둘까 하는 생각도 한 순간 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중요한 것들은 가장 평범한 얼굴로 어딘가에 숨어 있습니다. 단 하나의 키워드 같은 것, 생의 어떤 암시 같은 것, 이대로 지나치면 끝내 섭섭해 질 것이 분명한 바로 그것.

 

그것이 무엇인지 저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직감하고 맹목적으로 따를 뿐입니다. 나는 한 사람의 목격자이고 수행자이며 또한 사악한 염탐꾼이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내린 임무에 불과했지만 가능한 수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 일에 속도를 올리며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아무리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카메라까지 빼앗기지 않겠지, 오로지 믿는 구석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으면서도 찰칵, 한 장 넘기고 찰칵, 또 한 장 넘기고, 또 넘기고, 또 넘기고... 마침내 임무 완성!

 

 

[로스코와 수틴의 작품 목록이 들어 있는 페이지]

 

 

 

 

[피카소 작품 목록이 들어 있는 또 다른 페이지]: 피카소는 확실히 '0'이 더 붙어 있더라고요. 휴, 이게 몇 개야? 하나 둘 셋 네엣....

 

뭐야, 이거! 겨우 이거 찍으려고 그랬단 말이야? 하실 분도 간혹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아니었다면 누가 그런 으리으리한 화랑에 가서 감히 이런 사진을 찍어 오겠습니까. 사실은... 재미있게 읽으시라고 조금 과장해서 당시 상황을 들려드렸습니다. 히히.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앞에서 뉴욕 거리에 아침마다 쌓이는 쓰레기 더미들에 관한 얘기를 잠시 거론했지요? 그렇다면 이제는 오늘 낮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관람한 웨이드 가이튼(Wade Guyton의 작품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쓰레기들 뭉치들과 가이튼의 작품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마저 있는 듯합니다.

 

휘트니 미술관은 현대 미술의 현주소 같은 곳입니다. 현대 미술이 난해하다보니 정해진 시간에 해설사인지 큐레이터인지 꽤 나이 지긋한 분들이 나와서 관람객들을 이끌고 다니며 작품 설명을 해줍니다. 나이 들어도 저렇게 멋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그들을 보면서 느꼈습니다. 아주 열정적이고 생생한 느낌을 전달해 주거든요.

   

아티스트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 발언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지우는 역할을 하는 아티스트가 있다면 어떨까요. 현재 휘트니 미술관에서 특별 전시를 하고 있는 젊은 작가 웨이드 가이튼이 바로 그런 아티스트입니다.

 

웨이드 가이튼(Wade Guyton)은 미국 인디에나 출생으로 테네시에서 성장했고, 뉴욕 헌터 대학 로버트 모리스 교수 밑에서 수학한 이제 40세 밖에 되지 않은 청년 작가입니다. 마흔 살이 청년이라니, 하며 의아해 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물론 고흐는 33 세에 죽었고 라파엘로도 37세인가에 요절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피카소는 83세까지 살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여든 넘어까지 장수했습니다. 또한 바위 위층에서 전시 중인 노병의 작가 리차드 아트스웨거가 88세의 나이에 아직까지 왕성하게 작업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가이튼은 아직도 반세기 가까이 작업실에서 더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니 '청년 작'가라는 말이 결코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가이튼이 이번 전시회에서 선을 보인 작품들은 대개 "X'라는 커다란 부호에 의해 작동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화가들은 직접 손으로 그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가능한 실물과 똑같이 그릴수 있을까. 그것에 의해 밥줄이 좌우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그러다가 카메라라는 적군이 등장한 겁니다. 초상화가들은 점점 카메라한테 손님을 빼앗기게 되었고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그러나 벼랑 끝에 서면 뭔가 항상 그 어둠 속에서 회오리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건 인생이나 예술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일군의 화가와 조각가들이 카메라의 놀라운 능력에 강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기계의 성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인간의 잠재적인 능력을 뛰어 넘을 수야 없지. 이제부터 사진기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그린 걸 그리면 되는 거야.'

 

사진기가 카피할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 20세기 현대 미술은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다시 출발했습니다. 파리의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 색채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화가들은 화폭 안에서 색채나 공간을 분할하고(입체파, 점묘파, 피카소, 쇠라), 더욱 주관적인 감성을 부여하고(표현주의, 고흐), 직접 사진 이미지를 이용하든지(드가), 아예 기계가 따라 올 수 없는 상상력과 공상의 힘(고갱, 루소, 초현실주의자들, 다다이스트, 추상화가들...)을 끌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어쩌면 웨이드 가이튼도 그런 맥락에 서 살펴볼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진 매체를 통해 축출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업을 펼쳐나갔으니까요. 사진을 작품으로 이용하다, 바로 그렇습니다.

 

 

[웨이드 가이튼 'Untitled']

 

 

이 시대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젊은 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웨이드 가이튼의 'X' 작품들은 제목 모두가 'Untitled'입니다. 제목을 붙이지 않은 탓도 있고 제목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제목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초기의 그의 작품들은 잡지책이나 신문에서 무작위로 산출한 이미지를 가져다 그 위에 다른 사람을 시켜 기계로 X를 프린트 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사회가 방출해내고 있는 과잉된 이미지들 위에 기계적인 이미지 X를 결합 시킨 거지요. 작품 재료에 엡슨의 프린트 잉크젯이라는 설명이 빠지지 않은 것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현대인들은 대개 자신만의 카메라와 컴퓨터와 프린터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구글이나 유튜브 같은 곳에 파일을 올리거나 거기에서 다운로드 받은 것들을 합성해서 프린트 할 수 있습니다. 공적인 거든 사적인 거든 그런 이미지들은 어느 곳에나 너무 많습니다. 한 개인이나 단체에게는 아주 소중한 것들이지만 너무 많다보니 일종의 쓰레기 취급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쓰레기는 길거리에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인터넷이나 잡지 신문 TV에서 과잉 생산된 이미지들이 우리를 빼곡히 둘러싸고 있습니다. 쓰레기 정보에 24시간 노출된 우리의 머릿속도 마냥 어지럽게 쉼 없이 돌아갑니다.

  

가이튼은 어디는 흘러 다니는 이미지들을 무작위로 축출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소화하고 있는데(잡지 책 한 페이지를 그냥 주욱 찢어서 사용하던가), 그것은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업과 일견 흡사하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의 접근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뒤샹은 남자 화장실에 있던 변기를 들어다가 화랑 전시실에 놓음으로써 낯설게 하기, 변기라는 용도를 '샘'이라는 제목을 가지 예술품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장소를 떠난 오브제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의미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가이튼은 뒤샹과 달리 어딘가에 있던 이미지를 끌어다가 가공과 변형과정을 거칩니다. 기계를 통해, 그것도 다른 기술자의 손을 빌려 만든 것이지만, 결국 그걸 바꾸기 위한 노력은 가이튼의 의지와 노력에서 나왔다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평론가가 그의 작품을 두고 '미술사를 붙잡고 레슬링을 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니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웨이드 가이튼 'Untitled']

 

 

웨이드 가이튼이 일관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X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가이튼은 문자적인 의미, '부정'의 의미가 절대로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현대 사회의 과잉 포장된 이미지들을 지우고 있는 걸까요. 혹은 문명에 대한 거부, 현대 미술에 대한 부정은 아닐까요. 어쩌면 자신의 운명에 대한 회의, 그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고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인간들 대부분도 약간의 저항은 있지만 결국에는 운명의 비극성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승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최후로 백기를 들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 어떤 생명체도 죽음을 넘어 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이튼은 최후의 운명성, 존재의 죽음조차도 거부하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요.

 

그의 X가 어떤 뜻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일견 부정의 부정, 긍정으로도 해석됩니다. 다시 말해서 뭔가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으니 긍정도 할 수 있다는 그런 소리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비록 기계적인 방식에 의해 모두 제작된 것이긴 하지만, 인간의 한계, 어쩔 수 없는 존재의 운명성에 대한 저항 등으로 인해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한 인간이 고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고백의 마지막은 허무함, 공백, 공허함과 또한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미국은 많은 면에서 풍요로운 나라지만 또한 너무도 텅 비고 공허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감수성을 소설 속에서 잘 녹여낸 작가가 바로 뉴욕의 소설가 폴 오스터 입니다. 그의 장편소설 '우연의 음악'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차를 몰고 끝없이 고속도로를 달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드라이브가 아닙니다. 아내가 떠난 뒤 어린 딸까지 누이에게 갖다 맡기고는 3일 동안 내리 피아노만 치다가 그것마저 팔아버리고는 마침내 길을 떠납니다.

 

그 후 이뤄진 그의 행적에는 목표점도 지행점도 없습니다. 그냥 달리고 달릴 뿐입니다.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남쪽으로 북쪽으로 온종일 매일같이 달려 나가기만 하는 겁니다. 그렇게 1년하고도 6일째 되는 날, 주인공 남자는 길에서 우연으로 포장된 어떤 허무의 공백 속으로 빨려들게 됩니다. 지난 1년간 고속도로에서 마주쳤던 허무를 실제 현실 속에서 다시 경험하게 된다, 뭐 그런 내용입니다. 나중에라도 그 책을 한번 읽고자 하시는 분을 위해 소설의 결말 부분은 생략하겠습니다.

 

폴 오스터의 다른 작품인 '달의 궁전'에 나오는 소년 역시 유일한 혈족인 삼촌을 잃은 뒤 뉴욕 거리를 마냥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소설 초반부는 주인공의 목적 없는 여정이 한동안 길게 이어집니다. 그러다 마침내 중요한 대상과 만나게 되는데 그 또한 허무의 끝을 연상시키는 터라 '우연의 음악'에 나오는 주인공의 경우와 어쩐지 흡사해 보입니다.

 

 

[잭슨 폴락 ]

 

그림에서도 절대의 고독, 우주의 고아가 된 것 같은 막막함을 담아낸 작가들이 있습니다. 잭슨 폴락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여기서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세계적 반열에 오른 1세대 미국 토종 화가 입니다. 한 미술 평론가는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을 두고 미국식 풍경화라고 말합니다. 카우보이가 달려 나가는 거친 황야 같은, 오로지 미국에서만 탄생할 수 있는 미국식 풍경화, 그 우주적인 광활함, 그 속에 깃든 어쩔 수 없는 공허와 외로움...

 

미국 사람들은 땅이 넓은 곳에 살아서 그런지 정말이지 큰 것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잭슨 폴락의 작품들 역시 규모면에서 아주 미국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수영장처럼 큰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는 작은 사이즈지만 그래도 한 200호는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주위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게 큰 작품을 통째로 찍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주로 큰 캔버스를 다루다 보니 공업용 페인트를 사용 할 때가 많습니다. 경건한 예전 그림들이나 화풍에 대한 반발로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폴락은 붓을 손에 쥐고 직접 그리기보다 물감을 나무막대기에 찍어 뿌리거나 페인트 깡통에 구멍을 뚫어 사용했습니다. 온몸으로 그림을 그린 셈인데 누군가는 그의 작품을 두고 바위에 올라가서 오줌을 싼 것 같다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에드워드 하퍼, 유채, Office in a Small City, 1953] 

 

 

애드워드 하퍼도 미국인들이 선호하는 사실주의 화가 중 하나 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국민 화가'라고나 할까요. 하퍼의 작품 역시 미국식 거대함과 그 속에 속한 인간의 왜소함 등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습니다. 너무 풍요로워서 공허해지는 정서적 공백, 그 끝 모를 허무와 고독을 하퍼의 작품 속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연의 정복했다는 말, 저는 결코 공감할 수 없습니다. 자연의 거대한 벽 앞에 선 인간은 너무도 작고 초라하고 고독한 존재들입니다. 그 곁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때론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미국식 거대한 자연은 하퍼의 그림 속에서 또한 거대한 사회구조로 변형되곤 합니다. 고작 한 사회의 부속물처럼 전락한 인간의 운명이 쓸쓸해 보입니다. 그림 속 남자는 주위의 환경에 비해 하잘 것 없을 만한 규모로 표현되었습니다. 남자는 낮에 일을 하는 동안 이렇게 창밖을 바라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도시의 삶 속에서 이런 공백을 맞이한 순간 과연 어떤 생각들을 떠올리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요.

 

휘트니 미술관에 전시된 웨이드 가이튼의 거대한 작품들, X를 기조로 하는 시리즈물들 속에서 바로 그런 느낌, 또 다른 방식의 미국식 허무와 공허를 느낍니다. 모든 것을 지우고 난 뒤의 그 텅 빈 자취, 그것을 향해 달려가고픈 막막한 감수성을 현대인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그 곳에 '실종'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습니다.

 

요즘 와서 엑스 맨 영화나 X를 내세운 많은 것들이 부각되는 걸 보면(아까는 많이 생각났었는데 지금은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대신 생각해 주십시오.) 그것은 현대인들의 무의식적인 생각들, 지워버리고 삭제하고픈 욕망을 은연중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많이 가질수록 공허하고 허전해 지는 그런 기분, 소설책이나 영화에서 많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조금씩 경험하는 느낌입니다. 없이 사는 것이 그다지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뭐 이런 허접한 결론이나 내리려고 꺼낸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제 머릿속에는 오전에 메디슨 에비뉴 76번가 화랑에서 본 피카소니 로스코 같은 작가들의 작품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마음 같아서야 이왕 본 김에 한번 질러보고도 싶습니다. 그런다고 지옥으로 끌려갈 것도 아니고..아무리 비싸도 하나쯤 가지고 싶다는 생각, 너무나 흥분되지 않습니까. 아주 작은 드로잉이라도 괜찮습니다. 내 집 거실에 미술책에서나 봤던 위대한 작가의 드로잉을 떡하니 한 점 걸어 놓는다고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거 뭐야? 누가 그린 거야?" 내 친구가 묻습니다.

 

"아, 그 드로잉? 피카소. 그림에 있는 사인을 보고도 몰라?"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합니다.

 

"피카소? 진짜 피카소?" 친구는 두 눈이 화등잔만 해져서 다그쳐 묻습니다.

 

"그럼. 이 세상에 가짜 피카소도 있니? 난 가짜 같은 건 안 키워." 주스 한 모금을 홀짝 들이키고는 턱을 더욱 높이 추켜세웁니다.

 

히히,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지요. 그러나 현실 속 실제 상황은.....뉴스를 보면 눈 먼 돈이 마구 굴러다니는 것 같던데...도대체 이놈의 돈들은 다 어디로 간 거야! 만인이 평등하다고들 그러더니만, 세상은 화가 날 정도로 불공평합니다. 아니, 이런 일로 기운 빼는 건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이름 없는 예술가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사람의 생산자이자 공급자라는 사실을 잠시 깜빡했습니다.

  

'나도 그 정도는 그릴 수 있어! 내 능력이 그들만 못한가? 이제부터 노력하면 돼. 기어코 보여 주고 말 거야.... 복수 할 거야!'

  

이런 생각들을 곱씹으며 오늘도 작업에 몰두하는 무명작가들이 이 세상에는 부지기수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 맛에 배고파도 일개 작가로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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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하늘 2012-11-17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60억 쯤?
 

마티스 [라일락, 1914]


11월 13일 화요일.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저녁도 못 먹고 그대로 쓰러져 잤는데, 오늘 아침에는 서울서 싸가지고 온 음식들도 진력이 나고 해서 미술관 가는 길에 42번가에서 내려 주위를 뺑뺑 돌며 아침 먹을 곳을 찾다가, '결국 여기밖에 없다는 결론이군.' 하며 맥도널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행 중에는 맥도날드가 나에게 일종의 구세주 같은 장소다. 오죽했으면 로마에 갔을 때도 맥도널드를 중심으로 로마 지도를 다시 그려보았겠는가. 결코 맥도널드 광신자라는 소리는 아니다. 이런 발언, 정말 정말 한심하다 하실 분도 있겠지만 어느 면에서 음식이나 분위기에 대해 까다롭다 할 수 있는 내게 최선책은 아니라 해도 확실한 차선책은 될 수 있다는 거다.

 

맥도널드 메뉴판은 어느 나라를 가나 거의 비슷하지만 안에 든 내용물의 질적 차원까지 모두 흡사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늘만 해도 아침 메뉴 중 가장 푸짐한 빅 플레러를 시켰는데 3장씩이나 함께 나온 팬케이크 사이즈를 보고는 한국 맥도널드가 너무 야박했던 건 아닌가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피도 모든 사이즈가 1달러라 해서 제일 큰 걸 시켜가지고 위층에 있는 테이블 있는 곳으로 올라가서 한참 먹다보니 나 혼자만 너무 많이 먹고 있는 건 아닌가 자책이 들 지경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음식에 대한 나의 탐욕스러운 태도를 훔쳐보며 이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저렇게 많이 먹으면서 어쩌면 저토록 마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맙소사! 조만큼씩 밖에 안 먹으면서 어쩌면 저토록 살이 찔 수 있는 거지?'

 

기름으로 바싹 튀긴 포테이토 케익에 달걀 2개와 비프 페리가 들어간 고소한 머핀, 거기다 달달한 시럽까지 끼얹은 팬케이크를 단숨에 절반가량 먹어치웠다. 팬케이크를 반씩이나 남긴 건 남들 눈치도 약간 보였기 때문인데 솔직히 그 많은 걸 다 소화시킬 자신도 없었다. 사실 미술관에 한번 들어가면 언제 시간이 흘러가는지 몰라 끼니때를 놓치곤 한다. 산악인이 히말라야 같은 고봉에 도전할 때처럼 이번이 마지막 식사다 생각하며 가능한 잔뜩 먹어 두는 것이 상책이다. 다행히 내게는 1일 2식이 딱 적당하다. 몸 상태가 그러니 아침에 얼마큼 많이 먹든지 체중 변화에 상관이 없다. 아직껏 콜레스트롤 수치도 정상이고 다른 잔병도 없고...그렇지만 이제 뼈에 바람이 숭숭 들 나이가 되었다는 걸 감안해서 커피는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요즘에는 가능한 블랙 커피는 사양하고 우유든 크림이든 잔뜩 들어 있는 커피만 마신다. 나이 든다는 것은 결국 이런 의미다. 음식을 먹을 때도 차츰 조심하게 되고, 매일 챙겨 먹어야 할 약들이 한 가지씩 늘어나는 것. 젊어서 여행을 다닐 때는 아무리 강행군을 해도 밤늦게까지 쌩쌩했는데 이제는 숙소에 겨우 기어들어 와 쫙 뻗어버리기 일쑤다. 여행도,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가능한 젊어서 맘껏 하는 게 최고인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이 들어서는 도대체 뭘 하면서 살라는 건가. 인생을 관조하며 느긋하게, 마냥 온실의 화초처럼 지내며 만보기나 차고 다니라는 건가. 아이고, 맙시사! 그런 성경 말씀 같은 소리는 사양하겠다. 현실의 이중성은 전혀 다른 설정과 적응 능력을 요구한다. 나이 들어 갱년기 오고 오춘기 증세 느껴지면 삶에 대한 중심축이 바뀐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지난 시절이나 반추하며 젊었을 때 나는 어쩌구저쩌구 그런 말이나 늘어놓으면서, 그 시절 훈장처럼 달고 다녔던 나의 오만을 또 다른 젊음의 오만 속에서 발견하고는 혼자 진저리나 쳐야한단 말인가. 아니지, 그럴수록 더 열심히 여행 다니고 꿈꾸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온몸에 오만의 향기를 친친 감고 다니는 거야말로 가장 성스러운 생활 태도 아니겠는가.  자, 정신 건강을 위한 비타민 하나 꿀꺽 삼키고 다시 일어나 구겐하임으로 출발!

 

[구겐하임 미술관]

 

산에도 산 만을 위한 산이 있고, 미술관에도 미술관 만을 위한 미술관이 따로 있다. 일례로 제주도에 있는 한라산은 정말로 산 만을 위한 산이라 할 수 있는데, 정해진 시간까지 마지막 휴게소에 가야 정상 정복이 허용되고, 몇 시간 안으로  다시 밑으로 내려와 하산해야 한다는 식의 등산객 수칙 사항을 보고는 정말로 학을 뗀 적이 있다.

 

"히말라야도 몇 번씩 갔다 온 사람이 왜 이렇게 빌빌대는 거죠?"

 

함께 동행하던 사람에게 결국 한 소리 듣고는 나도 한 마디 덧붙였다. 

 

"히말라야는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도 되는 산이거든요. 거긴 가면서 음료수 파는 데도 있고 잠잘 곳도 있고 화장실도 있다고요!!"

 

사실 한라산은 히말라야를 하나로 압축해 놓은 듯한 그런 산이다. 정상 부근에 병풍처럼 둘러싼 절경은 여기가 정말로 한국인가 싶을 정로도 감탄을 자아낸다. 그 산 속에다 휴게소를 지었으면 좋겠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 자연의 경관을 즐기고 관조하는 여유 따위, 부실한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백록담 꼭대가까지 못 올라갈 것만 같다. 그렇다면 미술관 만을 위한 미술관은 또 무슨 소리인가. 이런 말 함부로 했다가는 욕 들어 먹기 십상이지만... 사실 구겐하임은 내게 꽤나 불편했다. 그새 내가 너무 메트 미술관에 익숙해진 탓일까. 여기 와서 매일 같이 거기에 갔으니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마침 피카소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오로지 그들이 전시해 놓은 것 외에 구경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우선 실망스러웠고, 편히 앉아 작품을 볼 수 있는 벤치조차 변변히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나선형 구조의 미술관 건축물에 대해 사람들은 칭송을 아끼지 않지만 솔직히 그런 미술사나 건축학적 개론보다 내게는 그 경사로가 어지러울 뿐이었다. 겨우 어른 허리 보다 약간 높은 난간 밖으로 사람이라도 추락하면 어쩌나 싶어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 했다. 그걸 온종일 신경 바짝 세우고 지켜봐야 할 경비원들 신세도 참 딱하지 않은가.  

 

아쉽지만 사진 촬영도 일체 금물이었다. 관람객에게 허용된 범위는 일층에서 미술관 건물을 찍는 것 정도였다. 로비에 피카소 조각품이 딱 한 점 놓여 있었는데 언감생신 그 또한 카메라 렌즈에 담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렇게 깍쟁이 같은 미술관이었다니! 서비스는 아주 야막하면서 챙길 건 다 챙기는 그런 식당 같은 미술관이라고나 할까.

 

전시 내용 중 피카소 작품 외에 선심 쓰듯 칸딘스키 작품이 3점 걸려 있었는데 그 옆으로 카페테리아가 바로 연결되어 있는 걸 보고는 또 한번 휴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도 남녀공용 유니섹스라 하니 안에 들어가서도 어쩐지 불안하고. 피카소의 좋은 작품들을 많이 가져다 놓았느냐하면 그것도 약간 아리송하고....명품관에 들어가면 넓은 공간에 물건 몇 개만 전시되어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왠지 위축되고 춥고 어지럽고 다리는 아프고...이렇게 먼 곳까지 와서 계속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면 누가 좋다 하겠는가. 사실 이번 전시가 내게는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나름대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의외의 구석이 있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볼 게 별로 없으니 생각이라도 많이 해야 할터..

 

한번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잇따라 매듭이 풀리고 빗장이 벗겨지고 열쇠 구멍들이 돌아갔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거! 내가 이걸 찾아 여기까지 온 거야! 속으로 거듭 탄성을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여행 노트에 스쳐가는 생각들이 달아날까 빠르게 메모를 했다. 물론 여기서는 다  밝힐 수 없는 내용들, 작업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과 아이디어 같은 것들이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반 흥밋거리가 되지 않지만 본인에게만은 하늘이 열리는 듯한 그런 자각들. 내가 너무 부풀려서 표현을 했는지도 모른다. 글쓰기에 몰두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뻥쟁이가 될 때가 간혹 있으니까. 아무튼 어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작업실에 파묻히고픈 마음만이 간절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피카소는 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생각이 전혀 딴 데 가 있으니 피카소의 큐비즘이니 신고전주의 같은 게 눈에 들어올 턱이 있겠는가.

 

 

[센트럴 파크89번가에서 바라본 맞은편 스카이라인]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하는 사람들: 뉴욕에는 사시사철 죽기 살기로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다.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에 짧은 소매 반바지 차림으로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 살갗이 다 덜덜 떨릴 지경이다. 실제로 12월 31일 새벽 0시를 기해 센트럴 파크에 모여 거의 다 벗은 차림새로 함께 조깅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목격한 적이 있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저러다 정말로 쓰러지겠는걸. 심장마비라도 오면 어쩌지.' 싶은 나이 많은 노인이나 뚱뚱한 중년부인들, 바싹 마른 아가씨들도 간혹 눈에 띄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현대인이 집단적으로 앓고 있는 건강 걱정 증후군에 관해서 한번쯤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뉴욕에 오면 절로 떠오를 수 밖에...'러너스 하이'라는게 과연 뭔지 약간 궁금해 지기도 하고, 헉헉헉...]

 

 

구겐하임에서 나온 뒤 건너편에 있는 센트럴 파크로 들어가서 83번가까지 걷기 시작했다. 도착하자마자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거리에 다시금 투명한 햇살이 가득하다. 가을 단풍이 무르익은 센트럴 파크의 풍광은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근사하다. 형형색색의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을 밟으며 천천히 걷다보니 한참 전에 개봉했던 리차드 기어와 위노아 라이더 주연의 '뉴욕의 가을' 영상 속으로 빨려든 듯 착각마저 들었다. 영화와 현실의 차이점에 관해서 애써 논할 필요는 없다. 그냥 이렇게 뉴욕 거리의 가을을 즐기기만 하면 될 뿐이니까.   
 

[메트 미술관 이집트 관에서 바라본 센트럴 파크 가을 풍경]

 

구겐하임에서 메트까지는 고작 6블록 떨어져 있을 뿐이다. 미술관 앞 층계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해바리기를 하며 즐거운 오후 한때를 보내고 있고, 계단 바로 아래에서는 재즈 싱어들의 공연이 한창이다. 모두 나이 지긋한 흑인 남자들이었는데 주축 멤버로 보이는 할아버지뻘 되는 남자가 노래를 부리고 다른 사람들은 신나게 몸을 흔들며 화음을 넣고 있다. 더블베이스 반주가 깔린 비밥 스타일의 노래들은  아무 데에서나 쉽게 맛볼 수 없는 흥을 돋우며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킨다. 거리의 소음 조차 자연스레 배경 음악으로 녹아든다.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고, 서둘러 끝마쳐야 할 숙제도 없는 한가로운 오후였다. 먼 이국에서 온 여행자는 가방을 내려놓고 층계 한쪽에 가만히 주저 앉았다. 살갗을 간질이는 가을 햇살을 만끽하며 음악에 취해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메트 앞에서 공연하는 재즈 가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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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랄라 2012-11-15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뉴욕의 명물, 플랫 아이언 빌딩>

 

오늘도 자다가 일찍 깼습니다. 시차 적응을 못해서라거나 환경이 바꿔 신경이 예민해졌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닙니다. 다만 어제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서는 그대로 쓰러져 잤기 때문에 이렇게 이른 새벽에 깬 것입니다. 커피 한 잔을 만들어 마시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어제는 찍어온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미술관에 가는 대신 거리를 돌아다니다 책방에 갔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보여드릴 사진은 잔뜩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그림 사진만 찍다가 카메라 렌즈로 거리 풍경을 스케치 하니 이야기보따리가 하나 가득입니다.

 

우선 뉴욕 날씨가 정상 수준을 회복했다는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얇은 외투 하나면 충분할 정도입니다. 롱부츠를 입은 신은 여자들 두꺼운 노스페이스를 입고 나온 남자들이 꽤나 고생한 하루였습니다. 주말에는 미술관이 많이 붐빌 테니 오늘은 그냥 젖히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살던 23번가로 지하철을 타고 갔지요.

 

뉴욕 지하철은 아주 간단합니다. 위로 올라가거나 아래로 내려가는 것. 좌우로 가고 싶을 때는 버스를 타면 됩니다. 한 번만 지하철을 타보면 누구나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뉴욕입니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사실 저는 심한 길치입니다. 언젠가 파주 출판 단지에 간다고 차를 몰고 나갔다가 저 위에 국방 한계선(?), 헌병들이 지키고 있는 곳인데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고, 아무튼 철책으로 길을 막아 놓았더군요. '돌아가시오’ 하는 사인만 보이고. 그래서 다시 차를 돌려 그냥 집으로 와버린 적이 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길치도 뉴욕에서는 헤맬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동쪽 서쪽, 업 타운 다운 타운, 항상 이것만 기억하고 있으면 되니까요.

 

23번가와 브로드웨이가 교차하는 지하철 역 밖으로 나오니 푸른 하늘 아래 우뚝 솟은 플랫 아이언 빌딩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뉴욕의 마천루 역사에 있어 초기 작품이라 하는데 얼핏 다리미처럼 생긴 모습이 언제 봐도 신기합니다. 옛날 자기가 살던 동네를 다시 찾아간 기분은 참 묘합니다. 사람과 공간에 대한 기억들이 구석구석 담겨 있고, 예전의 내 모습 또한 저기 어딘가 길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런 사연과 장면들이 아직껏 이곳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는 듯합니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 오면 내가 주로 머물던 장소를 한번쯤 다시 기웃거리게 됩니다. 어떻게 변했는지, 얼마나 많이 내 모습을 지워버렸는지, 그로인해 내가 그 시간으로부터 얼마큼 떠나왔는지 확인하고픈 마음이 절로 드는 것입니다. 23번가 거리 모습은 거의 그대로였습니다. 새로 개축한 빌딩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지만 이 거리에 흐르는 냄새, 공기와 사람과 소리의 흐름은 7년 전 그때와 전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우리가 가끔씩 아침마다 가던 베이글 코너 가게가 새롭게 단장한 현대식 카페로 탈바꿈 했다는 사실입니다. 뉴욕에 마지막으로 하나 남아 있을 것 같은 아주 오래되고 낡은,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그런 식당이었거든요. 가게 안에서 베이글도 직접 굽고, 나이든 아저씨 서너 명이 투박한 언어로 장사를 하던 베이커리 숍이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23번가에 있는 옛날에 살던 빌딩 앞에서>

 

사보이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예전에 우리가 살던 빌딩을 바라보는 심정은 남달랐습니다. 건물 앞에서 시간이 딱 멈춰버린 듯 더 낡고 초라해진 느낌, 폐허 속 쇠락한 건물 기둥을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때도 저런 모습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주위가 그만큼 산뜻하게 정비된 탓도 있을 겁니다. 근처에 새로 생긴 콘도미니엄과 비주얼 스쿨 간판이 보이고, 길 건너에는 던킨 도넛 가게와 타이 식당 편의점 같은 것들이 새로 오픈한 듯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던 그 빌딩만이 세월의 잔재에 파묻힌 듯 더 어둡고 그늘지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옛날에 살던 집은 사람 마음을 애잔하게 만듭니다. 옛집은 옛날 내 모습이며 내 기억입니다. 옛집의 기억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지만 사실은 나로부터 분리된 그 시절의 내가 아직도 이곳 언저리를 맴돌며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이 라인, 첼시>

 

첼시 화랑 가 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육교처럼 생긴 이상한 구조물이 나타났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의 설명에 의하면 공원이라고 하더군요. 공중에 떠 있는 공원이라니! 터키인가 스페인에서 공중 정원을 본적이 있는데 이것도 그런 콘셉트로 지은 것인가 싶어 철제 계단을 밟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을 '하이 라인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 정보가 정확한 건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하이 라인은 11번가와 12번가 사이에 위치하고 12번 스트리트에서 34번 스트리트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국식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건물들 위를 가로지른 거대한 육교라 할 만 합니다.

 

사실 뉴요커들은 육교를 본적이 거의 없을 겁니다. 이곳이 새로운 명소인지 카메라를 매고 가족들 연인들과 함께 나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도시의 지붕을 가로지르는 구조물이나 중간 중간 설치된 미술조각 설치물들 모두 새로 꾸미거나 만들어 놓은 기색이 역력했고 곳곳에 심어 놓은 나무와 잔디밭 풍경도 아직까지는 어딘가 인위적인 냄새를 풍겼습니다.

 

그래도 허공에 떠 있는 이 산책로에는 센트럴 파크와는 또 다른 운치가 감돕니다. 무엇보다도 이 도시의 다른 얼굴, 지붕 위나 건물 틈새들, 오랜 세월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시간의 그림자들을 새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잘 정비된 도시라 해도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낯선 정체들이 존재합니다. 그 뒷모습의 표정과 흔적들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각도와 높이와 깊이가 필요합니다. 하이 라인은 그런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도시 지붕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일깨우고 사람들은 하이라인에 생명력을 불어 넣습니다.

 

 

<하이 라인 안의 산책로 풍경>

 

 

<하이 라인 위에서 내려다 본 23번가 도로 모습>

 

'하이 라인에서 바라본 건물과 건물들 사이의 틈새'

 

 

오후에는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바꿔 탄 뒤 유니언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토요일마다 프리마켓이 열리던 광장은 마침 공사 중이라 사방이 막혀 있었지만 공원 안은 한가하게 산책 나온 사람들이 벤치마다 가득 했습니다. 어딜 가나 자신에 대한 얘기를 떠벌리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옆에 앉아 있는 백인 아줌마에게 말을 건넸다가 무시를 당했는지 그 나이든 백인 남자는 자신의 과거사에 관해서 그리고 그 백인 아줌마의 야박함에 관해서 한참이나 큰 소리로 떠들어댔습니다. 그러나 백인 남자가 쏟아내는 무수히 많은 말들은 그 어떤 침묵의 벽도 뚫고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외면했고 민망해 했으며 심지어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백인 아줌마도 손에 들고 있는 아이팟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백인 남자의 목소리만이 울릴 뿐입니다. 계속 떠벌여 대는 그의 말들이 허공의 벽에 부딪혀 고스란히 그 자리로, 자신의 침묵 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유니언 광장의 거리 화가>

 

공원 한쪽에서 길거리 화가들을 보았습니다. 어린 소녀들입니다. 붓을 들고 쓱쓱 아주 재미 있게 그어 대고 있습니다. 주위를 지나던 나이 든 백인 여자도 붓을 한 자루 달라고 하더니 꽃이 핀 풀잎을 그려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에 몰두한 사람들, 그것을 구경하느라 발길을 멈춘 사람들.. 11월의 맑은 햇살이 부서지는 한쪽에서 한참이나 우두커니 바라보다 문득 궁금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림을 그리는 걸까. 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걸까. 색채의 아름다움 때문에, 도구에 대한 애착과 흥미 때문에, 예술에 대한 호기심, 어쩔 수 없는 끌림 때문에...아니, 그 또한 뭔가 말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 스스로의 벽에 갇혀 맴돌고 있는 언어들, 생각과 소통이 필요한 사연들을 토해내기 위해서 붓을 들고 물감을 섞고 그리고 어딘가에 화폭을 펼치고는, 그리고 또 그리고, 그러는 것이 아닐까요.

 

 

<반스 엔드 노블 서점> 
  

유니언 광장 근처에 있는 푸드 마켓에 들어가 뜨거운 클램 차우더 수프와 샐러드로 늦은 점심을 먹고는 근처에 있는 반스 엔드 노블 책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뉴욕에서 제일 큰 책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1층에서부터 4층까지 수많은 책들로 빼곡한 곳입니다. 예전에는 소설 섹션이 2층인가 3층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4층으로 옮겨져 있더군요. 그리고 4층에 있던 어린이북 섹션이 소설이 꽂혀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소설에 대한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증거가 바로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고 어쩐지 씁쓸한 느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소설은 죽었다... 그림은 죽었다...저 같은 사람에게는 결코 반갑지 않은 소리입니다. 그래도 한 겨울 히말라야 꼭대기에 있는 로지에서 난롯가에 모여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며 책의 소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7년 전 뉴욕 거리에서도 여기 저기 앉아 독서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내심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도시 어딜 가나 직사각형의 조그만 액정 화면만이 사람들의 시선을 꼭 붙잡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도 하다못해 무가지 신문을 읽는 사람도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코딱지 만한 화면이 사람들의 시간은 물론이요 영혼마저 몽땅 삼켜버릴 기세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길을 가다 혼자 웃고 떠드는 사람을 보면 실성했다고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기계에 대고 혼자 말하고 웃고, 슬퍼하고 분노합니다. 덕분에 소설책 같은 건 대형서점 이층에서 삼층으로, 삼층에서 사층으로, 사층에서 다락방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소설이 고귀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멀리 있는 손에 닿을 수 없는 것들이 더 신비해 보이는 법이니까요.

 

이러다 '죽은 자들의 도시'에 그 액정 화면만이 덩그마니 남아 동동 떠다니는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마저 듭니다. 이브 탕기의 초현실주의 그림에서처럼 모두가 사라진 회색 공간에 액정 화면들만이 살아있는 미생물처럼 증식해 가는 불길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상황을 너무 과장할 필요는 없지만, 제 표현이 조금 과하다는 건 알지만, 반스 엔드 노블에서 4층으로 쫓겨 간 소설 섹션의 실상을 보자 어쩐지 우울했습니다. 한국이라고 다른 실상이겠습니까. 돌이켜보니 교보문고에서도 참고서들이 예전에 있던 소설 자리를 빼앗았던 것 같던데...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소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듯합니다.

 

 

<'이브 탕기의 작품' 그다지 본문에 부합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아쉬운 대로 메트에서 찍은 사진을 대신 올립니다.>


밤이 되어 밖으로 나오니 유니언 광장 중간에 높이 서 있던 동상이 말을 하고 있더군요. 누군가 그 위에 이미지를 비추고 연설 내용을 크게 틀어놓은 듯합니다. 어둠 속에서 펼쳐진 일루션 효과로 인해 정말로 동상이 손을 움직이고 표정을 짓고 연설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고대의 음류 시인이 다시 환생한 듯 사람들을 발길을 멈춘 채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습니다. 어쩌면 반스 엔 노블 4층으로 쫓겨 간 책들이 이런 방식으로나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책의 또 다른 변신이라고나 할까요. 정말로 종이 문명이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방식의 메스미디어 세상이 우리 앞에 당도한 듯도 합니다.

 

 

<유니언 광장의 동상1, 낮에 촬영한 것임>

 

 

 

<유니언 광장의 말하는 동상2, 밤에 촬영한 것임>
 

돌아오는 지하철 역사 안에서 길거리 가수와 악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도나 서머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제목은 모르겠고 도나 서머의 노래 중에서 빠른 템포로 아직도 대중의 사람을 많이 받는 바로 그 곡입니다. 여가수는 아주 피곤해 보였고 남루했으며 목청에도 이미 무리가 많이 간 상태였지만 한편으로는 만족한 표정이었습니다. 누군가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그녀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매 순간 행복한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이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 가지쯤 자신에게 행복한 일을 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오늘도 행복하시기를..

  

 

<33번가 헤럴드 광장 지하철역 구내에서 공연 중인 흑인 여가수와 악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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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미 2012-11-16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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