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배지]

 

 

어느새 뉴욕을 떠날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 왔습니다. 내일 오후 7시쯤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서 자정 넘어 비행기를 타게 되니 정확히 오늘 밤과 내일 하루를 더 지낼 수 있다는 결론이지만 실제적으로 뉴욕에서 보내는 밤은 오늘이 마지막 입니다. 내일 낮 12시까지 체크아웃을 해야 하기 때문에 컴퓨터 앞에 장시간 앉아 있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 될 겁니다.

 

15박 17일 간의 뉴욕에서의 체류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여행 다닐 때마다 일기도 쓰고 이것저것 주어 담기 위한 작은 크로키 북을 들고 다니는 데 어쩌다 보니 그럭저럭 한 권을 거의 채워가는 중입니다. 인천 공항을 떠난 순간부터 나의 유일한 말벗이 되어 주었고 친구였으며 동반자였습니다. 이런 여행 일기조차 끄적거리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거리에서 그 긴 시간을 혼자 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로 대견하고 기특한 크로키 북입니다.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지만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은 오랫동안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적거니 그리거나 오려 붙인 것들은 사진으로 찍은 모습들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사진이 포착해 낼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입니다. 겉모습 구도 아웃라인만 똑같을 뿐 색채나 분위기도 딴판일 때가 많고, 중요한 디테일들도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요즘은 디카나 휴대폰을 사용하기 때문에 어디 가서든 사진으로 촬영 횟수는 늘어났지만 그만큼 희소가치 또한 줄어들었습니다. 예전에 필름으로 찍을 때는 사진을 현상하여 계속 들여다보기도 하고 잘 나온 것을 뽑아서 걸어놓기도 했는데 요즘은 그저 파일이나 폴더에 담아 놓고는 그만일 때가 많습니다. 저에게 여행일기란 들고 다니기도 버거운 구식 카메라를 이용해 흑백 필름으로 찍은 기억들을 다시금 현상하고 인화해서 가슴에 오래 간직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도 미술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친구나 아는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사실 집중하기 어려운 데가 바로 미술관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저 혼자였고 정말로 줄기차게 미술관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습니다. 짐을 꾸리다 그 동안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오브 아트(메트)에 들어갈 때마다 받은 입장표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옷깃에다 달고 다녀야 하는 얇은 쇠로 만든 배지가 한쪽에 쌓여 있어서 세어 보니 모두 9개나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9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메트에 갔다 왔다는 소리지요. 후반으로 갈수록, 다른 미술관이나 전시회 등을 보러 다니는 동선이 길어져 메트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짧아지긴 했지만 나름 뿌듯한 하루하루였습니다.

 

메트에는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부터 현대의 미니멀 아트나 개념미술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 에드워드 하퍼, 보나르, 마티스, 모네, 척 클로즈, 클레, 피카소, 베르베르, 드가, 고흐, 마네, 로트렉 등등의 제가 좋아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집중적으로 많이 볼 수 있어서 더욱 기뻤습니다. 그림을 관람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안 주는 선에서 잠깐씩 작품 모사를 해 보기도 했습니다. 눈으로만 볼 때와 자기 손으로 직접 그려볼 때의 경험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언제 또 뉴욕에 와서 이렇게 혼자 느긋한 시간을 보내며 렘브란트며 벨라스케스의 자화상들을 따라 그려보겠습니까. 그냥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생각 하고는, 다른 사람이 보든 말든 얼굴에 철판 한 장 깔고는 한동안 그림 앞에서 펜으로 쓱쓱쓱...

 

 

[그림, 벨라스케스와 램브란트 자화상 모사]
 

어제는 스태튼 아일랜드에 다녀왔는데 일반 가정집처럼 생긴 작은 규모의 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마주친 고야의 작품은 조금 뜻밖이었습니다. 스페인 화가 고야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최초의 다큐멘터리를 그림으로 그려낸 화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밑에 보이는 스케치도 그런 작품들 중의 하나였는데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던 터라 나중에 혹시 이런 자료라도 필요할까 싶어  어설프나마 대충 비슷하게 그려왔습니다.  

 

 [여행 일기 중 고야의 판화와 거기에 같이 전시 중인 스태튼 출신 화가 콜맨 루킨의 판화 작품을 모사한 페이지: 박물관 입장권이나 짧은 글들, 그림에 관해 적어 놓은 글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중앙에 있는 악마같이 생긴 폭군의 하반신 쪽 묘사가 별로 정확하지 않아서 조금 난감했습니다. 이렇게 작가들의 그림을 따라 그리다 보면 작업하면서 생긴 실수, 고민한 것, 갈등하고 다시 시도한 것 등을 그대로 집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림 외형으로 보이는 것만이 중요한 건 절대로 아니지만 말입니다.

 

관람객은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경비원은 백인 아줌마였는데 성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때로는 친절한 말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스태튼 출신 확 콜맨 루킨의 판화 작품들과 모노톤의 추상성이 강조된 유화작품들도 무척 신선하고 좋았습니다.

   

아, 스태튼 아일랜드는 뉴욕 맨해튼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이 이곳에 많이 정착해서였을까요. 도로라든가 건물 모습에서 어딘가 시칠리아 섬 같은 인상을 풍기고 그밖에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도 소박한 구석이 많은 섬이었습니다. 물론 오며 가며 자유의 여신상도 공짜로 구경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박물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청 안에 있는 멋진 프레스코 화들도 감상하고 히스토릭 리치몬드 타운에 가서는 오래된 저택들의 사진도 많이 찍었습니다.

 

날씨도 춥고 센디가 지나간 지도 얼마 안 되고 해서인지 거기에서도 여행자는 오로지 저 혼자뿐이었지만 나름 뜻 깊은 시간이었습니다. 80년대 초의 미국에 다시 온 듯한 느낌도 들고. 제가 그때 미국에서 대학에 다녔거든요. 제가 기억하는 진짜 미국의 모습을 그 섬에서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오전에는 메트에 가기 전에 77번가에 있는 아쿠아벨라 화랑에 잠깐 들러서 웨인 띠버드의 작품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 넣으며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직접 따라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간단한 스케치였지만 그리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웨인 띠버드'Boston Cremes'모사]

 

캘리포니아 화가 띠버드의 '파이 그림'이라면 혹시 아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92세인데 아직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 대단한 분입니다. 계속 팝 아트 계열의 그림들, 여자 구두나 사탕 아이스크림 같은 먹거리를 그리거나 혹은 도시 풍경화 같은 것들을 주요 소재로 다뤄왔는데 90세가 넘어 추상화 쪽으로 방향 선회를 하면서 굉장히 흥미진진한 작품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그분의 60년대 70년대 작품들이 더 끌리긴 합니다. 뭐랄까, 더 진지하다고나 할까.  

 

휘트니 미술관에서 띠버드의 80세 생일을 자기네들이 직접 챙겨드렸다고 하던데(서점에 계신 분에게 직접 들은 얘기 입니다.) 정말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분이라며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오늘은 아줌마 부대를 이끌고 전시 관람을 온 어느 강사 분에게 띠버드의 사생활, 부인이 아주 젊고 활동적이며 둘 사이에 5살 먹은 쌍둥이 딸인지 아들도 있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뉴욕 사람들은 띠버드의 작품을 아주 좋아 합니다. 작품 전시회 역시 연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미술관 같은 데서는 더 이상 현대 작가들의 대규모 전시회를 열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소장자들이 너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보험 문제 등이 까다롭다고요. 그래서 요즘에는 이렇게 화랑에서 밖에는 전시를 열 수 없다고 하는데 덕분에 저는 시간 날 때마다 들려서 공짜로 그림 구경도 하고 이렇게 작품 모사도 할 수 있었습니다.

 

 

[웨인 띠버드'Hot Dog Stand,2004-12' 'Pastel Scatter,1972' 모사와 숙소의 작업대 모습 일부

 

크로키 북을 정리하다 짐 가방에 챙겨온 수채화 물감을 처음 꺼냈습니다. 오늘은 계속 시커먼 빛깔의 스케치 뿐이라 색채 있는 그림을 하나 더 첨가할 생각이었는데 솔직히 썩 좋은 상태는 아닙니다. 펜으로만 그렸을 때는 그럭저럭 볼만했는데 위에 수채 물감을 입히니 밑그림이 꺼멓게 뭉개져서 신선한 맛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갤리리에 있는 그림 앞에서 다리가 뻣뻣해질 때까지 제법 공을 드린 거라 아깝기만 합니다. 막상 떠날 날이 가까워 오고 보니 그동안 뉴욕에서 지내면서 센트럴 파크에 하루쯤 사생 스케치를 하러 나가지 못한 점도 끝내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제 밤이 깊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잠깐 나가서 숙소 근처 거리 구경 좀 하다가 돌아와 잠을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문이나 문장 정리 같은 건 시간 날 때마다 다시 들어와 살펴보겠습니다. 그런 것들까지 꼼꼼히 챙기다보면 오늘 밤 안으로 이 글을 못 끝낼 것 같아 대충 여기서 정리할까 합니다. 서울 가서 마지막 글을 올리면 별 의미도 없을 것 같고...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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