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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은 장희빈의 아들로 영조보다 여섯 살 많았다. 영조가태어났을 때 경종은 이미 세자였다. 차기 임금으로 정해졌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영조는 태어날 때 아무것도 아닌 왕자였을 뿐이다. - P26

경종은 즉위 이듬해에 벌써 자신의 병이 깊다며 영조를 왕세제(王世弟)로 정하고 나랏일을 넘기려고 했다. 드디어 영조가 후계자로 나랏일을 나누어 맡게 된 것이다. - P27

사건은 1721년 신축년 말부터 터졌다. 당시 남인은 이미 권력을 잃었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권력을 다투었다. 소론은 경종이 계속 통치할 것을 주장하며 영조를 견제했고, 노론은 건강한 통치자인 영조를 믿고 그를 보호하려 했다. - P27

영조는 등극 후 바로 자신의 등극을 방해한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이 흘러나왔고, 위기를 느낀 소론 일파와 일부 남인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이 1728년 무신년의 난리, 곧 무신란(戊亂)이다. 중심인물인 이인좌의 이름을 따 ‘이인좌의 난‘으로도 불린다. - P29

첫날밤 영조는 신부의 손을 잡으며 손이 참 곱다고 했다. 그랬더니신부가 "귀하게 자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영조는 부인의 이런 답변을 자신의 출신을 비웃는 것으로 들었다. - P31

영조의 출신 콤플렉스는 죽는 날까지 아물지 않았다. - P32

숙빈 최씨의 출신에대해 현재 알려진 설은 세 가지다. 그것도 부모의 신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숙빈 최씨가숙종의 눈에 들 당시의 직위에 대한 것이다. 첫째 무수리설, 둘째침방내인설, 셋째 각심이설. - P34

고종의 전설까지 종합해보면, 숙빈 최씨는 침방내인의 각심이일 가능성이높다고 하겠다. - P35

인원왕후는 권력을 경종에게 넘겼을 뿐 아니라, 병약한 경종의 후계자로 영조를 지지했다. - P41

이런 상황에서 박상검 사건이 터졌다. 경종의 직속 환관인 박상점등이 궁녀와 결탁해 영조와 경종 사이를 이간했다는 사건이다. 노론과 소론의 당쟁 속에서 영조의 처지가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이들은 궁궐 안을 돌아다니는 여우를 잡는다며 덫을 놓았고 영조가 경종을 문안할 때 사용하는 출입문도 막았다. 영조가 경종을 만나 직접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막은 것이다. 이 사건으로부터 불과 몇 달 후 목호룡이 노론 인사들의 역모 혐의를 고발할 때 거기에 영조가 거론될정도로 당시 영조의 처지는 위험했다. - P42

대비의 명령은 ‘자전殿)의 명령‘이라고 하여 ‘자교(敎)‘라고 부르는데, 이는 임금의 명령에 버금가는 힘이 있었다. 영조는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원왕후의 자교로 살아났다. 영조에게 인원왕후는 권력의 전수자이자 동시에 생명의 은인이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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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비료‘가 비옥해질 가능성은 존재하는가? 한 세대가다음 세대에게 욕망의 생성력을 전도傳導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상징적 부자관계가 형성되는 효과적인 과정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텔레마코스 콤플렉스다. 텔레마코스가 정당한상속자인 이유는 그가 왕국을 물려받기 때문이 아니라, 욕망의계율이 상속될 때에만 쾌락에의 의지로 축소되어버린 자유의망상으로부터 인간의 삶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비료‘가 비옥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이 ‘욕망의 계율‘이다. - P21

이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아버지 - 교황, 아버지를 상징하는 보편적 존재의 실어증이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병적 증상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실어증 아닌가? - P29

여기서 세대의 변신이 이루어진다. 아버지-교황은 무서워서 우는, 아니, 안고 달래줘야 할 아이로 변하고 절대적인 가부장의 힘있고 성숙한 이미지는 소년의 이미지로 변한다. 여기서 세대의 역행이 이루어진다. - P29

파솔리니의 <살로>가 제안하는 난봉꾼들의 쾌락에 견주어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만들어주는 또 다른 쾌락은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다음 세대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닐까? - P38

영화 <살로>에서 음란함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어 보이는 것도바로 이 때문이다. 쾌락이 ‘말의 계율‘에서 떨어져나와 번영을누리는 현상은 상징의 기능이 쾌락의 현실을 더 이상 관리하거나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 P39

한계의 경험을 도입하는 것은 거세의 법칙이지만, 동시에치명적 쾌락의 심연으로부터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는 것 역시거세의 법칙이다. 이 법칙이 욕망을 치명적 쾌락과 전혀 다른 종류의 쾌락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보고 지지한다면, 우리는 욕망이 삶을 억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해방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 P43

이런 관점에서 ‘말의 계율‘ㅡ상징적 거세의 법칙ㅡ은 모든사회계약의 기초가 되는 하나의 교환 원리를 제시한다. 즉 인간은 모든 것을 즐기고 원하고 알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되고 싶어 하는 쾌락을 포기할 때에만 이름을 가지고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P44

타자 없이는 의미를 잃고 곧바로 시들어버리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매우 어렸을 때 버려진 아이들이 겪는 트라우마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말의 계율‘은 인간의 삶에 양분이나 다름없는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는 계율이다. - P46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존재‘의 삶은하나의 부름이며, 타자를 향한 사랑의 요구이며, 타자의 욕망을위해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다. 이 효소가 부족할 때 삶은무의미해지고, 생기 없는 삶, 삶 없는 삶으로 전락한다. - P47

삶의 인간화가 오로지 근친상간의 폐지를 경험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아버지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에게 한계가 있음(불가능의경험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말의 계율‘에 복종한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한다. - P47

이는 아버지가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해답과 결정권을 보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말을 전달하는 사람, 따라서 결정권을 포기할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말의 계율이 인간에게 새겨 넣는 불가능의 경험을 아버지가 자신의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의 계율‘은 그저 권위적 명령어에 불과할 것이다. - P47

한계의 경험을 도입하는 것은 거세의 법칙이지만, 동시에치명적 쾌락의 심연으로부터 인간의 구원을 약속하는 것 역시거세의 법칙이다. 이 법칙이 욕망을 치명적 쾌락과 전혀 다른 종류의 쾌락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보고 지지한다면, 우리는 욕망이 삶을 억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해방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 P43

말의 행사는 무엇보다 인간의 정신 속에 불가능한 차원을각인하는 상징적 기호의 행사이다. ‘말의 계율‘을 따르는 삶은
‘삶‘이 부족한 삶, ‘삶‘으로 인해 빈곤해진 삶, 상징에 힘을 빼앗긴 삶,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인간적인 삶, 삶을 향해 열려있는 삶, 욕망으로 가득한 삶, 자연을 뛰어넘어 문화의 질서 속에 깃들어 있는 삶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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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등극과 함께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미친 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일국의 임금이 된 것이다. 정조는 이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정조는 영조가 죽기 한 달 전에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아버지의 비행과 관련된 『승정원일기』기록을 지워줄 것을 청했다. 정조는 즉위 전에 이미 기록을 말소함으로써 역사 왜곡의 첫 단추를 끼웠다. - P17

임금이 조심스럽게 추진한 임금생부의 복권 작업에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수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애꿎은 피해자가 생겼다. 사도세자의 비행을 감추고 책임을 전가시킬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상로와 홍계희다. 이들은 세자의 사부이니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건전후의 사료를 쭉 살펴보면 그 책임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런데 정조의 조처로 인해 대역죄인이 되어버렸다. - P18

이 여파는 혜경궁 친정에도 미쳤다. 물론 임금의 외가라 김상로나홍계희처럼 대놓고 역적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에책임이 있다는 비난이 조정에서 끊이지 않았다. 핵심적인 쟁점은 뒤주 아이디어를 혜경궁의 친정아버지 홍봉한이 냈다는 것이다. - P18

혜경궁은 삼십 년 이상 지켜본 영조의 성격을 상찰민속(詳察敏速)‘즉 ‘꼼꼼히 살피면서 동시에 재빠르다‘고 했다(정병설옮김, 『한중록』, 문학동네, 2010, 34쪽. 이하 이 책의 인용은 책명과 쪽수만 밝힌다). 그러면서 영조가 세세히 신경을 쓰는 것을 보면 거의 병적이라고 했다. - P23

영조는 이처럼 생사(生死), 내외(內外), 호오(好惡), 애증(愛骨)을 엄격하게 갈랐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행했다. 이런 철저한 이분법적사고는 그 자체가 병이다. 한 심리학 논문에서 편집증을 가진 사람이자기를 인식하는 방법의 근저에는 이분법적 사고가 있다고 했다. 또편집증 환자는 자신의 ‘정서적 생존을 위하여 선한 것과 악한 것을엄격히 나누는데, 나쁜 것은 모두 외부로 돌린다고도 했다. - P24

혜경궁도 영조의 이런 병적인 성격이 그가 젊은 시절 겪은 시련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혜경궁이 제시한 사건은 신임년(辛年, 신축년 1721과 임인년 1722) 일과 무신역변(戊申)이다. 신임년 일이란 영조가 왕위 등극 과정에서 겪은 시련이고, 무신역변은 곧 이인좌(李佐)의 난으로 영조 치세 초기에 겪은 변란이다. - P25

임금이 될 수 없는 왕자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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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간은 사물의 원인을 모른 채 태어난다.
(………)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욕구를 의식하므로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지만 자신이 애쓰고 원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그 원인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 P14

이렇게 끝없이 계속되고무한하며 필연적이고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무의미한 세상에서 유한하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는, 가혹한 운명의 시련을 피할 수 없는 인간 같은 존재가 행복하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할까? - P15

그러나 스피노자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대해서는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공식 문서에 기록된 "극악무도한 이단 행위와 추악한 행위"로 인해 추방되었다는 사실 말고는그가 왜 추방을 당했는지도 분명치 않다. 그나마 알려진 이야기라고는 1677년 2월 21일에 요절하기 전까지의 성년기시절뿐이다. - P16

대개 삶에서 찾아오는 것, 인간의 행동으로 판단하건대 인간이 최고의 선이라고 여기는 것은 크게 부, 명예, 감각적 쾌락세 가지로 추려진다. 인간의 정신은 이 세 가지 때문에 매우산란하여 다른 선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 P18

실제로 그는 "확실한 선을 위해 확실한 악을 버려야 한다."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속적 가치에 좌우되고 덧없는 소유물에 집착하는 인습적 삶을 포기하고 궁극의 선, 즉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는 철학의 삶을 살기로 했다. - P19

스피노자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고 통합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다.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다루는 『신학정치론』에서 그는 개인과 시민으로서의 자유와종교적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정치권력이나 종교 권력이 개인이 철학적으로 사색할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 P21

『에티카』는 이와 관련은 있지만 종류는 다른 자유를 이야기한다. 사유하고 말하는 자유, 바라는 대로 행동하는 자유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주적인 행위자가 되는 자유를이야기한다. - P22

그러나 자유로운 인간(이하 자유인)은 삶을 스스로 통제한다. 반응하지 않고 행동한다. 원하는 것은 반드시 행동에 옮기되, 그가 원하는 것(그래서 곧 행위가 되는 것)은 내면의 상상, 감정, 기분이 아니라 인식에서 나온다. 자유인은정념이 아니라 이성에 이끌려 산다. 간단히 말해서 자유인의 삶은 인간에게 귀감이 되는 삶이다. - P22

스피노자의 세계에 불완전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함이있거나 어설프거나 부족한 것은 없다. 악도 없고, 본래 ‘그러해야 할‘ 상태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은 완전하다. - P23

이를테면 무한한 영속적 실체인 신 또는 자연은 무한한 완전성을 지닌다. 반면 스피노자가 영속적이고 무한하며 고유한 실체의 "유한한 양태"라고 부르는 나무나 기린, 인간과 같은 유한한 존재들은 유한한 완전성을 지닌다. 다시 말해 자연 그 자체는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자연 안에 있거나 자연에 속한 것은 자연의 완전성을 공유하고 고유의 제한적 측면 안에서 완전하다. - P24

스피노자에 따르면 "완전함과 불완전함은 사유의 양태, 즉우리가 동일한 종(種) 또는 속(屬)의 개체를 다른 개체와 비교해서 만들어 내는 개념" 또는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해당 종의 형태에 비교해서 만들어 내는 개념일 뿐이다." 어떤것이 완전하거나 불완전한 것은 단지 그 사람이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 P26

"선과 악에 관해 말하자면, 사물들이 그 자체로 고찰되는 한 그것은사물 안에 있는 어떤 실체적인 것도 나타내지 않으며, 사유의 양태 또는 우리가 사물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형성하는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 P27

선악의 문제에 정답과 오답이없으므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의견이 갈릴 때는 그저 견해의 차이를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 P27

스피노자가 천착한 좋은 삶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결국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하고 그것이 좋은 삶이라고 말할 수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선하고 완전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기준이 있는가? - P29

사실 스피노자는 그러한 기준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이 기준을 "인간 본성의 전형 (exemplar naturae humanae)"
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기호의 문제로 받아들일수 있는, 곧 보는 사람이 시각적으로 매력적이라고 느끼는나무나 먹는 사람의 입맛에 더 맞는 아이스크림의 전형과는다르다. 스피노자의 인간 본성의 전형은 주관적인 특성과무관하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형이상학적인 근거를둔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완전한지 불완전한지는 그 사람과 그가 사는 삶이 그 전형과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판단된다. - P30

스피노자는 홉스의 견해와 달리 세상에 비물질적이거나 연장되지 않은 사물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과 신체가 뚜렷이 구별되는 실체이며 인간은두 실체의 결합의 결과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에도 동의하지않는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하나의 실체, 즉 궁극적 실재는신 또는 자연밖에 없기에 인간 정신과 인간 신체는 신 또는 자연의 양태이거나 그 안에 존재하는 개체일 수밖에 없다. - P32

신 또는 자연의 근원적 본질은 능력이다. 끝없이 무한한 실체인 신 또는 자연의 본성은 끝없이 무한한 능력이다.
스피노자가 설명하는 것처럼 "신의 능력은 신의 본질 그 자체다. 이 능력은 자연 만물의 근원에 자리한다. 자연의모든 개물(個物)은 이 능력의 독자적이고 확정적인 표현이15다. 자연의 유한한 양태라는 것은 자연의 무한한 능력의 유한한 일부라는 의미다. - P33

신 또는 자연은 능력 외에도 스피노자가 ‘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지닌다. 속성이란 자연에존재하는 방식이다. 각각의 속성은 자연의 능력이 스스로를드러내 보이는 매우 일반적인 방법을 의미하는데, 이런 속성은 무한히 많다.(그렇지 않다면 신 또는 자연은 무한한 실체가아닐 테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두 가지 속성, 즉 존재 방식은 사유(본질적으로 정신적 존재 방식)와 연장(공간을 차지하는 물리적 존재 방식)이다. - P34

그러므로 각각의 정신은 모두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사유 능력의 유한한표현이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물체는 물질과 운동의 형식을취한 신 또는 자연의 무한한 능력의 유한한 표현이다. - P34

자연에 있는 모든 개물을 형성하는 능력의 유한한 일부를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라 부르는데, 이는 추구,
경향, 노력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된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활동 능력" 또는 개체의 "존재하려는 힘"이라고도 부른다.
각각의 유한한 사물에서 이 능력은 스스로를 그 사물로서유지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 P34

사실 모든 개체는 본질적으로 그런 코나투스, 즉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 그 자체다.
코나투스는 사물의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성질이 아니다. 개체는 코나투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코나투스는 "무한한 지속"을 필요로 하며 사물의 개체화의 핵심이다. 코나투스는모든 것의 "현실적 본질"을 구성한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이며 사물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 - P35

코나투스, 즉 존재를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연의 무한한 능력의 확정적이고 유한한 일부다. 인간의 정신은 이 독자적이고 유한한 노력이 사유라는 속성 아래서 나타나는 것이며, 인간의 신체는 이 독자적이고 유한한 노력이 연장이라는 속성아래서 나타나는 것이다. - P36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된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실체이고, 때로는 이 속성 아래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서파악된다."라는 인상적인 주장을 편 스피노자는 "연장의 양태와 그 양태의 관념(즉 정신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나 다만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될 뿐이다." 21라고 결론 내린다. 두가지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사물‘은 개개의 코나투스다. 한 사람의 정신은 코나투스의 한 가지 표현이며, 그 사람의 신체는 동일한 코나투스의 다른 표현이다. - P36

인간을 정신과 신체의 결합이라고 이해할 때,
코나투스는 욕구가 된다. 사람이 자신의 정신과 신체의 노력을 함께 의식할 때, 즉 욕구를 자각할 때 그것을 욕망이라고 부른다. - P37

특히 코나투스는 강화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한다. 이것이감정 또는 정서에 관한 스피노자 설명의 핵심이다. 정서란바로 사람의 활동 능력 안에서 나쁜 쪽으로든 좋은 쪽으로든 일어나는 변화를 말한다. - P38

수동적 정서, 즉 정념은 개체의 능력에 일어나는 변화로서 인과관계를 온전히 설명할수 있는 변화의 적합한 원인이 전적으로 그 개체의 내부에있지 않고 부분적으로 외부 사물에 있다. 정념은 개체가 겪게 되는 능력의 변화다. 반면 능동적인 정서는 적합한 원인이 온전히 그 개체 자체에 있는 개체 능력의 변화다. - P39

정념, 즉 외부 원인에 의한 변화는 더 나은 쪽으로의 변화일 수도 있고 더 나쁜 쪽으로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능동은 언제나 개체 능력의 향상이다. - P40

수동적 정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다른 정념들은모두 이 세 가지 정서에서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동적 정서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기쁨, 슬픔, 욕망이다. - P41

스피노자가 더 완전하고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임의적인 정의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이런 설명, 곧정신과 신체에 관한 특별한 형이상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 P44

인간 본성의 전형은 능력과 존재 지속을 위한 노력에서가장 좋은 결과를 이뤄 낸 인간이다. 곧 최대치의 코나투스를 지닌 인간이다. - P44

내가 이해하는 선이란 우리가 설정해 둔 인간 본성의 전형에 더욱 가까이 가도록 해 줌을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수단이다. 내가 이해하는 악이란 우리가 그러한 전형에 도달하는것을 방해한다고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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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마코스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복이다. - P13

오이디푸스가 법의위반에서비롯되는 비극을 상징하는 존재라면, 텔레마코스는 법의 기원비롯되는 비극을 상징한다. - P13

텔레마코스는 트로이를 함락시킨 위대한 영웅이자 이타카 섬의 왕인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귀환을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가운데 지독한 향수에 빠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텔레마코스의 ‘아버지 바라기‘는 니체가 간파한 바와 같이 결코 돌아올 수 없는 누군가를 끝없이 기다리는 우울한 운명에 빠질 수있다. - P14

우리는 아버지의 위상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동시에 텔레마코스의 시대이기도 하다. 새로운 세대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본다.  - P15

그렇다면 텔레마코스는 어떻게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젊은 세대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위상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는가? 왜 오이디푸스 혹은 아버지와의 죽음을 무릅쓴 싸움이 아닌 텔레마코스인가? 왜냐하면 가장 고귀하고 정당한 안티오이디푸스가 바로 텔레마코스이기 때문이다. - P17

텔레마코스는 아들의 아이콘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에서 ‘텔레마코스의 콤플렉스‘라고 부르는 것의 중심 주제다. 오이디푸스는 아들로 존재하는 데 실패했고 나르키소스도 마찬가지다. - P18

오늘날 젊은세대가 원하는 것은 더 이상 선과 악,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해답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적이고 역약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대답할 줄 모르지만 스스로의 삶을 통해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아버지다.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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