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등극과 함께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미친 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일국의 임금이 된 것이다. 정조는 이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정조는 영조가 죽기 한 달 전에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아버지의 비행과 관련된 『승정원일기』기록을 지워줄 것을 청했다. 정조는 즉위 전에 이미 기록을 말소함으로써 역사 왜곡의 첫 단추를 끼웠다. - P17

임금이 조심스럽게 추진한 임금생부의 복권 작업에 누구도 감히 토를 달 수 없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애꿎은 피해자가 생겼다. 사도세자의 비행을 감추고 책임을 전가시킬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상로와 홍계희다. 이들은 세자의 사부이니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건전후의 사료를 쭉 살펴보면 그 책임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런데 정조의 조처로 인해 대역죄인이 되어버렸다. - P18

이 여파는 혜경궁 친정에도 미쳤다. 물론 임금의 외가라 김상로나홍계희처럼 대놓고 역적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에책임이 있다는 비난이 조정에서 끊이지 않았다. 핵심적인 쟁점은 뒤주 아이디어를 혜경궁의 친정아버지 홍봉한이 냈다는 것이다. - P18

혜경궁은 삼십 년 이상 지켜본 영조의 성격을 상찰민속(詳察敏速)‘즉 ‘꼼꼼히 살피면서 동시에 재빠르다‘고 했다(정병설옮김, 『한중록』, 문학동네, 2010, 34쪽. 이하 이 책의 인용은 책명과 쪽수만 밝힌다). 그러면서 영조가 세세히 신경을 쓰는 것을 보면 거의 병적이라고 했다. - P23

영조는 이처럼 생사(生死), 내외(內外), 호오(好惡), 애증(愛骨)을 엄격하게 갈랐을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행했다. 이런 철저한 이분법적사고는 그 자체가 병이다. 한 심리학 논문에서 편집증을 가진 사람이자기를 인식하는 방법의 근저에는 이분법적 사고가 있다고 했다. 또편집증 환자는 자신의 ‘정서적 생존을 위하여 선한 것과 악한 것을엄격히 나누는데, 나쁜 것은 모두 외부로 돌린다고도 했다. - P24

혜경궁도 영조의 이런 병적인 성격이 그가 젊은 시절 겪은 시련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혜경궁이 제시한 사건은 신임년(辛年, 신축년 1721과 임인년 1722) 일과 무신역변(戊申)이다. 신임년 일이란 영조가 왕위 등극 과정에서 겪은 시련이고, 무신역변은 곧 이인좌(李佐)의 난으로 영조 치세 초기에 겪은 변란이다. - P25

임금이 될 수 없는 왕자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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