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은 장희빈의 아들로 영조보다 여섯 살 많았다. 영조가태어났을 때 경종은 이미 세자였다. 차기 임금으로 정해졌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영조는 태어날 때 아무것도 아닌 왕자였을 뿐이다. - P26

경종은 즉위 이듬해에 벌써 자신의 병이 깊다며 영조를 왕세제(王世弟)로 정하고 나랏일을 넘기려고 했다. 드디어 영조가 후계자로 나랏일을 나누어 맡게 된 것이다. - P27

사건은 1721년 신축년 말부터 터졌다. 당시 남인은 이미 권력을 잃었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권력을 다투었다. 소론은 경종이 계속 통치할 것을 주장하며 영조를 견제했고, 노론은 건강한 통치자인 영조를 믿고 그를 보호하려 했다. - P27

영조는 등극 후 바로 자신의 등극을 방해한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설이 흘러나왔고, 위기를 느낀 소론 일파와 일부 남인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이 1728년 무신년의 난리, 곧 무신란(戊亂)이다. 중심인물인 이인좌의 이름을 따 ‘이인좌의 난‘으로도 불린다. - P29

첫날밤 영조는 신부의 손을 잡으며 손이 참 곱다고 했다. 그랬더니신부가 "귀하게 자라서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영조는 부인의 이런 답변을 자신의 출신을 비웃는 것으로 들었다. - P31

영조의 출신 콤플렉스는 죽는 날까지 아물지 않았다. - P32

숙빈 최씨의 출신에대해 현재 알려진 설은 세 가지다. 그것도 부모의 신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숙빈 최씨가숙종의 눈에 들 당시의 직위에 대한 것이다. 첫째 무수리설, 둘째침방내인설, 셋째 각심이설. - P34

고종의 전설까지 종합해보면, 숙빈 최씨는 침방내인의 각심이일 가능성이높다고 하겠다. - P35

인원왕후는 권력을 경종에게 넘겼을 뿐 아니라, 병약한 경종의 후계자로 영조를 지지했다. - P41

이런 상황에서 박상검 사건이 터졌다. 경종의 직속 환관인 박상점등이 궁녀와 결탁해 영조와 경종 사이를 이간했다는 사건이다. 노론과 소론의 당쟁 속에서 영조의 처지가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이들은 궁궐 안을 돌아다니는 여우를 잡는다며 덫을 놓았고 영조가 경종을 문안할 때 사용하는 출입문도 막았다. 영조가 경종을 만나 직접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막은 것이다. 이 사건으로부터 불과 몇 달 후 목호룡이 노론 인사들의 역모 혐의를 고발할 때 거기에 영조가 거론될정도로 당시 영조의 처지는 위험했다. - P42

대비의 명령은 ‘자전殿)의 명령‘이라고 하여 ‘자교(敎)‘라고 부르는데, 이는 임금의 명령에 버금가는 힘이 있었다. 영조는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원왕후의 자교로 살아났다. 영조에게 인원왕후는 권력의 전수자이자 동시에 생명의 은인이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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