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라 여길 수 있는 우울적자리의 통합은 ‘상징 형성과 합리적 사고를 위한 능력‘ 발달의 필수조건(sine qua non)이다. 59) 대상에 대한 보다 확장된 지식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존재에 대한 지식의 연속성을 깨닫는 것과, 이를 통해 그 대상이 지닌 다른 관계들을 깨닫는 것을 포함한다.
브리튼은 또한 ‘우울적 자리와 오이디푸스적 상황을 결코 끝나지 않으며 새로운 삶의 상황마다, 발달의 각 단계마다, 경험과 지식의주요한 축적과 더불어 재작업되어야만 하는 것‘ 으로 보았다.
오이디푸스적 상황에 대한 이런 견해는 또한 자기지식(self-knowledge)이나 통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만약 사랑과 미움 속에서 인식되는 부모 사이의 고리가 아이의 마음 속에 허용될 수 있다면, 아이는 자신이 참가자가 아닌 목격자가 되는 제 삼의 대상관계의 원형을 갖게 될것이다. 그런 다음 대상관계들을 관찰할 수 있는 제 삼의자리가 생겨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또한 제 삼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타인과 상호 작용하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며, 우리 자신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다른 관점을 지닐 수있는 능력, 즉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환상과 정신병적 불안에 대해서는 한 페이지나 반 페이지에 걸쳐 자세한 색인이 있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겨우 몇 행으로 설명되어 있을 뿐이었다. 관련된 모든 글들을 읽은 후, 이 확연한 불일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기서 찾아낸 해답은 그것들이 분리된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클라인학파는 정통 프로이트학파와 신프로이트학파의 발달도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클라인학파가 초기 정서적 과정의 내용에 주의를 두고 있었던 반면, 프로이트학파는 자신들의 형식에 대한 과학적 모형들과 메타심리학적(역주: 심리학의 연구대상인 의식현상을 초월하여, 그 기초이며 그것을 규정하는 무의식의 특성과 그 활동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 표상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 환자들은 원만하게 살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생한 관계를맺지 못하며, 소속감을 느끼고 잘 살아갈 수 있게 그늘이되어 주는 자비로운 결합된 부모상이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 환자들은 그 정지상태가 더 나쁜 어떤 상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정지한 채로 남는다.
나는 프로이트학파와 클라인학파 사이의 논쟁에서 논쟁자들이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즉, 프로이트학파가 실재 부모와 의식적인 느낌에 대해이야기했던 반면, 클라인학파는 내적 대상들과 부분대상들, 그리고 굉장히 고통스럽고 언어 이전의 것인 원초적인 무의식적 환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둘째, 배경과 전경에 대한 나의 입장은 이제 초기 과정, 자리, 정서와 발달도식, 연대기, 지형학, 구조적 가설간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 클라인이 배경에 비평을 가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또한 중심적 관심사도 아니었다.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이드와 무의식의 심연이었다. 그녀가 아이들 본성의 핵심을 파고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가구조들에 대해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글을 쓰고 말한다고여겼다. 클라인에게 있어 전경이었던 것, 즉 무의식적 감정들의 상호작용이 프로이트학파에게는 배경이었다.
‘자리‘ 는 구조보다 더 중요한 개념이며, "서로 다른 핵심 감정 주위에 형성된다." 두 가지 기본 본능에 대응되는 기본적인 두 가지 심리적 지형이 있다. 그것들은 "불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감정을아 내는 개인의 역량에 따라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정신적 삶이란 곧 감정의 조절이다.
클라인학파의 설명은 나에게 진실되게 들렸다. 그것은 내가 피분석자였을 때나, 개인치료, 집단치료, 그리고 집단상담에서 치료자이자 감독자일 때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집단상담은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런 점에 입각해서 만들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오이디푸스 역동에 대한 클라인의 생각과 관련된 두 가지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첫째, 나는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클라인의 시각을 간략하게그려 보았고, 그것이 프로이트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를알아 보았다. 둘째, 여기 제시된 인간 본성에 대한 두 가지 흐름(클라인류와 프로이트류)을 하나의 사고 틀로 가져오기가 왜 그렇게 힘든지, 즉 그 두 가지 사고방식이 서로 혼합되기가 왜 그렇게 힘든지 이해하게 해주는 몇 가지 개념을 제시했다. 나는 그 이유를 각각의 틀에서 강조하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결정인자들이 서로 다른 수준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프로이트학파의 학자들은 당신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클라인학파의 학자들은 당신이 프로메테우스이기보다는 시지프스처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오이디푸스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클라인의 어떤 글에는 게이나레즈비언의 성욕이 선천적으로 병적인 것이라는 무언의가정이 있으며, 이는 프로이트는 결코 취한 적이 없었던입장이다.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성욕으로부터 이탈된모든 것을 발달상의 억제와 발육부진의 한 예로‘ 여겼다. 또한 동성애나 성도착도 질병으로 보지 않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반자연주의적 비평》
[대상관계 이론]
클라인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영향력을 확장시키고 자신의 이론에 리비도 이론의 고전적인 연대기 개념을배경으로 포함시켰지만, 이와 의견을 달리하는 학파에서는 리비도 이론의 기본 개념과 가정들에 대한 비판을 계속해 왔다.
대상관계 이론은 멜라니 클라인과로날드 페어버언(Ronald Fairbairn), 도날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의 연구에서 발전했다. 이들의 이론체계 간에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었지만(예를 들면, 페어버언은 클라인과는 달리 생물학에서 확실히 등을 돌렸다), 어머니와 다른 중요한 인물들의 좋고 나쁜 측면 및부분대상과의 관계를 강조했다는 점과, 정신분석적 사고와 임상 연구의 근본적인 과제로 본능의 표현보다는 대상과의 관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 사조에 동일한영향을 미쳤다. 이들 연구의 초점은 충동보다는 관계에있으며, 생물학주의적 메타심리학에서 명세화된 본능의목적보다는 (누군가 노래했듯) "내 창백한 안색을 장밋빛으로 물들일 수 있는 내 애정의 대상"에 있다.
대상관계 이론에 리비도는 쾌락 추구(pleasure-seeking)가 아니라 대상추구(object-seeking)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리비도가대상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관계가 리비도를결정한다. 최근에 나는 좁은 의미의 성(sex)이 심리치료훈련과정이나 지도감독, 문헌연구에서 놀라울 정도로 작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해 왔다.
프로이트학파에서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성적 반체제자들에게는 맞서 싸워야 할 문화적 규범이다. 그들(성적 반체제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성욕 안에서의재상징화와 새로운 의미부여를 주장한다.
만일 성 도착이 도처에 있는 일이라면, 예외라 말할 수 없다. 즉, 성도착이 흔한 일이고 통례는 정상이라면 ‘성도착‘은 ‘정상‘이다. 그 용어에 담긴 경멸적 함축들은 낡아 빠진 것이 되었으며, 리비도 이론과 그 이론의 핵심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있는 엄격한 발달 요건들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그 권위에 찬 타당성과 이론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양성애와 여성 동성애에 대한 글에서, 비벌리 벌취는생물학주의에 반대하고 사회구성주의에 찬성하는 유사한입장을 취한다. 그녀는 "여성 동성애와 이성애 정체성 모두는 심리적 요소들을 통합하는 사회적 구성개념이다"라고 말한다. 이 정체성들은 각 여성들마다 다르며, 각 개인의 일대기만큼이나 다양한 표현양식과 원천을 가진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성숙을 향한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가 되는 정통 리비도 이론의 발달경로에 대한 믿음은 대안적 발달도식에 대한 다원론의 증가와 더불어 어느 정도 약화되고 있다. 정신분석학적 입
나는 내 환자각각과 그 부모들 간의 독특한 오이디푸스 역동을 이해하는 것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펼치는 것을 방해하는 혼돈을 해결하는 일의 핵심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역사 속에 무수하며,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클라인의 정신분석은 우리가분열과 통합, 책임전가(轉嫁)와 배상, 미움과 사랑 사이에서 때로는 매 순간마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도전 지점에서는 반드시 이리저리 동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결코 끝나지 않을 전쟁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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