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라 여길 수 있는 우울적자리의 통합은 ‘상징 형성과 합리적 사고를 위한 능력‘
발달의 필수조건(sine qua non)이다. 59) 대상에 대한 보다 확장된 지식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존재에 대한 지식의 연속성을 깨닫는 것과, 이를 통해 그 대상이 지닌 다른 관계들을 깨닫는 것을 포함한다. 

브리튼은 또한 ‘우울적 자리와 오이디푸스적 상황을 결코 끝나지 않으며 새로운 삶의 상황마다, 발달의 각 단계마다, 경험과 지식의주요한 축적과 더불어 재작업되어야만 하는 것‘ 으로 보았다.

오이디푸스적 상황에 대한 이런 견해는 또한 자기지식(self-knowledge)이나 통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만약 사랑과 미움 속에서 인식되는 부모 사이의 고리가 아이의 마음 속에 허용될 수 있다면, 아이는 자신이 참가자가 아닌 목격자가 되는 제 삼의 대상관계의 원형을 갖게 될것이다. 그런 다음 대상관계들을 관찰할 수 있는 제 삼의자리가 생겨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또한 제 삼의 자리에서 우리 자신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타인과 상호 작용하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며, 우리 자신의 관점을 유지하면서 다른 관점을 지닐 수있는 능력, 즉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한다.

환상과 정신병적 불안에 대해서는 한 페이지나 반 페이지에 걸쳐 자세한 색인이 있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겨우 몇 행으로 설명되어 있을 뿐이었다. 관련된 모든 글들을 읽은 후, 이 확연한 불일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기서 찾아낸 해답은 그것들이 분리된 주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클라인학파는 정통 프로이트학파와 신프로이트학파의 발달도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클라인학파가 초기 정서적 과정의 내용에 주의를 두고 있었던 반면, 프로이트학파는 자신들의 형식에 대한 과학적 모형들과 메타심리학적(역주: 심리학의 연구대상인 의식현상을 초월하여,
그 기초이며 그것을 규정하는 무의식의 특성과 그 활동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 표상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 환자들은 원만하게 살아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생생한 관계를맺지 못하며, 소속감을 느끼고 잘 살아갈 수 있게 그늘이되어 주는 자비로운 결합된 부모상이 없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 환자들은 그 정지상태가 더 나쁜 어떤 상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정지한 채로 남는다.

나는 프로이트학파와 클라인학파 사이의 논쟁에서 논쟁자들이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즉, 프로이트학파가 실재 부모와 의식적인 느낌에 대해이야기했던 반면, 클라인학파는 내적 대상들과 부분대상들, 그리고 굉장히 고통스럽고 언어 이전의 것인 원초적인 무의식적 환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둘째, 배경과 전경에 대한 나의 입장은 이제 초기 과정, 자리, 정서와 발달도식, 연대기, 지형학, 구조적 가설간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 클라인이 배경에 비평을 가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또한 중심적 관심사도 아니었다.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이드와 무의식의 심연이었다. 그녀가 아이들 본성의 핵심을 파고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가구조들에 대해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글을 쓰고 말한다고여겼다. 클라인에게 있어 전경이었던 것, 즉 무의식적 감정들의 상호작용이 프로이트학파에게는 배경이었다.

 ‘자리‘ 는 구조보다 더 중요한 개념이며, "서로 다른 핵심 감정 주위에 형성된다." 두 가지 기본 본능에 대응되는 기본적인 두 가지 심리적 지형이 있다. 그것들은 "불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감정을아 내는 개인의 역량에 따라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정신적 삶이란 곧 감정의 조절이다. 

클라인학파의 설명은 나에게 진실되게 들렸다. 그것은 내가 피분석자였을 때나, 개인치료,
집단치료, 그리고 집단상담에서 치료자이자 감독자일 때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집단상담은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런 점에 입각해서 만들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오이디푸스 역동에 대한 클라인의 생각과 관련된 두 가지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첫째, 나는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클라인의 시각을 간략하게그려 보았고, 그것이 프로이트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를알아 보았다. 둘째, 여기 제시된 인간 본성에 대한 두 가지 흐름(클라인류와 프로이트류)을 하나의 사고 틀로 가져오기가 왜 그렇게 힘든지, 즉 그 두 가지 사고방식이 서로 혼합되기가 왜 그렇게 힘든지 이해하게 해주는 몇 가지 개념을 제시했다. 나는 그 이유를 각각의 틀에서 강조하고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결정인자들이 서로 다른 수준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몇몇 프로이트학파의 학자들은 당신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에, 클라인학파의 학자들은 당신이 프로메테우스이기보다는 시지프스처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오이디푸스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클라인의 어떤 글에는 게이나레즈비언의 성욕이 선천적으로 병적인 것이라는 무언의가정이 있으며, 이는 프로이트는 결코 취한 적이 없었던입장이다.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성욕으로부터 이탈된모든 것을 발달상의 억제와 발육부진의 한 예로‘ 여겼다. 또한 동성애나 성도착도 질병으로 보지 않았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반자연주의적 비평》


[대상관계 이론]

클라인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영향력을 확장시키고 자신의 이론에 리비도 이론의 고전적인 연대기 개념을배경으로 포함시켰지만, 이와 의견을 달리하는 학파에서는 리비도 이론의 기본 개념과 가정들에 대한 비판을 계속해 왔다.

대상관계 이론은 멜라니 클라인과로날드 페어버언(Ronald Fairbairn), 도날드 위니콧(Donald Winnicott)의 연구에서 발전했다. 이들의 이론체계 간에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었지만(예를 들면, 페어버언은 클라인과는 달리 생물학에서 확실히 등을 돌렸다), 어머니와 다른 중요한 인물들의 좋고 나쁜 측면 및부분대상과의 관계를 강조했다는 점과, 정신분석적 사고와 임상 연구의 근본적인 과제로 본능의 표현보다는 대상과의 관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 사조에 동일한영향을 미쳤다. 이들 연구의 초점은 충동보다는 관계에있으며, 생물학주의적 메타심리학에서 명세화된 본능의목적보다는 (누군가 노래했듯) "내 창백한 안색을 장밋빛으로 물들일 수 있는 내 애정의 대상"에 있다.

대상관계 이론에 리비도는 쾌락 추구(pleasure-seeking)가 아니라 대상추구(object-seeking)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리비도가대상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관계가 리비도를결정한다. 최근에 나는 좁은 의미의 성(sex)이 심리치료훈련과정이나 지도감독, 문헌연구에서 놀라울 정도로 작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경험해 왔다.

프로이트학파에서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성적 반체제자들에게는 맞서 싸워야 할 문화적 규범이다.
그들(성적 반체제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성욕 안에서의재상징화와 새로운 의미부여를 주장한다.

만일 성 도착이 도처에 있는 일이라면, 예외라 말할 수 없다. 즉, 성도착이 흔한 일이고 통례는 정상이라면 ‘성도착‘은 ‘정상‘이다. 그 용어에 담긴 경멸적 함축들은 낡아 빠진 것이 되었으며, 리비도 이론과 그 이론의 핵심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있는 엄격한 발달 요건들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그 권위에 찬 타당성과 이론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양성애와 여성 동성애에 대한 글에서, 비벌리 벌취는생물학주의에 반대하고 사회구성주의에 찬성하는 유사한입장을 취한다. 그녀는 "여성 동성애와 이성애 정체성 모두는 심리적 요소들을 통합하는 사회적 구성개념이다"라고 말한다. 이 정체성들은 각 여성들마다 다르며, 각 개인의 일대기만큼이나 다양한 표현양식과 원천을 가진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성숙을 향한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가 되는 정통 리비도 이론의 발달경로에 대한 믿음은 대안적 발달도식에 대한 다원론의 증가와 더불어 어느 정도 약화되고 있다. 정신분석학적 입

나는 내 환자각각과 그 부모들 간의 독특한 오이디푸스 역동을 이해하는 것이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들의 능력을 충분히펼치는 것을 방해하는 혼돈을 해결하는 일의 핵심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역사 속에 무수하며, 오늘날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클라인의 정신분석은 우리가분열과 통합, 책임전가(轉嫁)와 배상, 미움과 사랑 사이에서 때로는 매 순간마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도전 지점에서는 반드시 이리저리 동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결코 끝나지 않을 전쟁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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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이디푸스 시기에 보이는 여러가지 특성들을 성인이 된 이후에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판타지와 집착, 과도한 애착, 그리고 아버지에대한 적개심과 경쟁심이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무의식에서는 끊임없이 가상의 아버지와 자신을 비교하며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치료 후반기에 그는 자신이 바람을피우려고 하는 이유도 바람둥이 아버지에 대한 경쟁심과 아버지보다 우위에 서고 싶은 욕구일 수 있음을 이해했습니다.

진성 씨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싫어하는 부모의 부분이라도 그것이 부모를 상징하는 대표성을 갖는다면, 무의식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더한 행동을 하라고 시킬 것입니다.
무의식에는 선과 악, 좋고 나쁨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아버지를 이기고 싶다는 욕망을 이루려고 합니다.

극복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신에게 아버지에 대한 경쟁심이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아버지와 다른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것이 아버지도 자신에게 원했을 행동이라고 여겼습니다.
우리 안에는 아버지를 경쟁자로 보는 마음도 있지만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또한 있습니다.
사실은 그 힘이 더 강합니다.

남자아이와 마찬가지로 여자아이도 오이디푸스 시기에는동성 부모인 어머니에겐 경쟁심과 적개심을, 이성 부모인 아버지에겐 소유욕과 이성적인 사랑을 느낍니다. 아버지를 두고 어머니와 경쟁하는 삼각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어머니를 아버지의 관심에서 소외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가득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잘 해소되지 않은 여성은 성인이 되면 극화적이고 전시적인 성격을 보이며,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유부남을 반복해서 사랑하는 것은 이런 소망을 가장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형태일 수 있습니다. 유부남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의 대상인 아버지를 상징하고, 유부남의 부인은 자신의라이벌이었던 어머니를 상징합니다. 어릴 적 극복하지 못한 근친상간적인 터부는 사회적 터부로 변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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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개인의 발달과 인류 역사 모두에 있어서, 근친상간 금기를 다른 모든 금기들의 토대로 보았다. 죄책감은 야만적이고 탐욕스러운 충동들과 싸우는 데 있어서필수적인 무기이며 성적 에너지의 승화는, 굳이 구별할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모든 문화와 문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모든 신경증의 ‘주요 콤플렉스‘
혹은 ‘핵심 콤플렉스‘ 라고 불렀다. 1920년 판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Three Essays on Sexuality』에 추가된주석에서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정신분석학 체계 전체가 기초하고 있는 움직일 수 없는 초석임을 분명히했다.

지구상의 모든 아이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라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이 과제에실패한 사람은 신경증의 희생양이 된다.

문명의 진보를 위해 우리가 치른 대가는 ‘죄책감의 증가에 따른 행복의 상실‘이다. 그는 이것을 ‘우리 연구의 최종결론‘ 이라고 불렀으며, 이런 이유로 이 책의 제목을 ‘문명 속의 불만이라붙이면서 문명과 불만의 두드러진 병치 상태를 나타내고있다. 즉, 문명이 불만을 일으킨다.

여기서 나는 프로이트가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이고 생물학주의적이며 역사적 상대성의 여지를 거의 남겨두지않았다는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들의 논지 두 가지를 더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프로이트가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보편적이며 생물학적으로 물려받은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할지라도, 동시에 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해소가 바로 그 생물학유산으로부터 우리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해 준다고보았다. 

둘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보편성이 곧 오이디푸스적힘들이 역사적 발달과 문화적 상대성의 영향을 받지 않고표현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프로이트는 소포클레스 시대의 사회적 관습과 셰익스피어 시대의 사회적 관습을 비교하였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보편성을 주장했던 꿈의 해석』(1900)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처음 언급한 다음 곧바로 이 중요한 주제의 역사성을 강조했다.

전경으로 드러나는 것은 정서와 자리(position) 간의 상호작용이다. 클라인에게 있어서 ‘자리‘는 불안과 방어,
대상관계(object relation)와 충동의 배열(constellation)이다.29) 근본적인 분열이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에 존재하며, 그로 인해 우리는 사랑과 미움, 감사와 질투 같이 짝을이룬 감정들을 전체대상과 부분대상 모두에 대해 느끼게된다.

자리와 정서에 대한 이 개념들과 함께 하는 또 다른기본적인 내용이 있다. 클라인의 발달도식에서 최초의 상태는 프로이트의 발달도식에서처럼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정신병적 불안 상태에서는 무의식에 존재하는두 가지 기본 방식인 편집-분열적 자리 (paranoid-schizoidposition)와 우울적 자리(depressive position)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통합된 지각이 계속해서 깨어진다. 여기서 우울적 자리는 전체대상과의 관계에서 보다 성숙하고 통합된 사고를 하는 상태를 말하며, 분열적 자리는 부분대상 관계가 우세한 상태를 말한다. 이 두 자리는 결국 두 자리 사이에서의 동요를 보여주는 양방향 화살표로 연결된다.(편집- 분열적 자리 <ㅡ >우울적 자리).

살펴보면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완벽한 비극이라 부른 희곡이자 또 다른 비극 후보인 『햄릿』에 영향을 준고전인 『오이디푸스 왕」에 대해 별안간 통찰을 얻게 되어다. 30) 만약 오이디푸스가 언제 근친상간을 저질렀는가를물어본다면, 그 대답은 흔히 이야기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시각에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자신의 아이가 자신을 죽이고 부인과 결혼하리라는 신탁을 들은 라이오스 왕이 아들이 태어나자 그 아이를 학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밀한 연구를 통해 학대 받은 많은 사람들에대한 이야기가 드러날수록, 이것이 그 이야기의 전부가아님을 알게 된다. 그의 무의식에 관해서, 아주 색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소포클레스가 최초의 클라인학파였다는 몇 가지 증거가 있는데, 만약 우리가 내면세계에 주목했다면 라이오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명해 줄 수는 있는, 아주 초기의 오이디푸스에게 있었던 충동들을 알았을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만약 프로이트류의 아기였다면 세 살 반 즈음 마음속에서근친상간을 범했겠지만, 그는 충실한 클라인류의 아기처럼 출생 직후부터 그런 충동들을 가지고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류의 아기가 가지는 일차적 나르시시즘이 아닌, 대상관계를 출생시점부터 가졌다.

1928년 작 논문에서 클라인은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투사적 동일시*가 하는 역할을 완전히 구성해 냈으며,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관한 클라인학파의 현대적 유추의 모든 기본 요소들을 제공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1919년에꿈의 해석」에서 다루어졌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가 인류의 역사와, 종교 및 도덕성의진화에 대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중요한 설명을 해 준다는 것을 이후의 연구들이 보여 주고 있다"는 주석을 덧붙였다. 그는 칼 융(Carl Jung)의 영향으로 1910년에 ‘콤플렉스‘ 라는 용어를 추가했으며,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토템과 금기」에서 원시부족민의 아버지 살해가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며 인간 역사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다.

클라인은 자신이 ‘오이디푸스적 상황‘
이라 부른 것이 전 생애에 걸쳐 반복해서 나타난다고 보았으며, 이를 프로이트의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구별한다.

클라인은 초자아가 구강기부터 존재한다고 보았다. "환상의 삶과 상반된 감정들의 동요 속에서, 리비도체계의 각 단계에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대상들,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부모를 내사하고(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요소들로부터 초자아를 형성한다. 아동의대상관계와 관련된 모든 요소들은 초자아 형성에 처음부터 관여한다." 

처음에 아동이 받아들이는 것은 전체로서의 부모가아닌 특정한 부분들, 즉 의미 있는 부분대상들이다.
..

처음으로 내사하는 대상, 즉 어머니의 가슴은 초자아의 토대를 형성한다......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있어서 최초의죄책감은 어머니, 주로 그녀의 젖가슴을 소유하려는 구강-가학적 욕망(oral-sadistic desire)에서 기인한다(아브라함),

따라서 죄책감이 발생하는 시점은 유아기이다.

클라인의 마지막 주장은, 프로이트의 발달도식에서는 신중하게 구별되는 개념들을 그녀가 뒤섞는다는 인상을 뒷받침해 주는 구절로 시작된다.

클라인은 "공격적인 대상관계의 원형을수립하는 특별한 형태가 있는데, 나는 그 과정을 ‘투사적동일시‘라 부를 것을 제안한다"라며 자신의 가장 심오한 개념적인 투사적 동일시 기재를 명명했다. 투사적 동일시는 편집-분열적 자리의 핵심을 차지하며, 여기에서는 분열, 투사 기제, 부분대상 관계가 주가 된다.

"클라인에 의해 기술된 초기 오이디푸스 갈등은 유아의 세계가 광범위하게 분리되고 주로 부분대상과 관계를 맺는때인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일어난다."

만약 발달과정이 만족스럽게 진행된다면, 좋은 내적 대상과의 안정적 관계는 통합, 분열의 치유, 투사의 철회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우울적 자리에 도달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할 수 있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해 나감으로써 우울적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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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미성숙한 채로 남게 되고 다음 단계로 성장해 가지 못하며 한쪽 부모 혹은 양쪽 부모 모두가 자신을 꼼짝 못하게 한다고 느낀다. 그 외에도 직업을 가질 때나 대인관계를 맺을 때 심리적인 문제들을 수용하기보다는 행동화(acting-out)해 버리고, 충동 조절이 되지 않아 권위적인 대상과의 관계가 어려운 등 많은 문제를 겪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청소년기에 성욕 및 권위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다시 나타나며, 부모 한쪽이 사망했을 때에도 동일한 현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 통과의례들을 성공적으로 거치지 못한사람들(환자들)은 해결되지 못한 오이디푸스적 문제들을가지게 된다. 그 중 하나는 부모를 능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성취감과 만족감을 가로막으며 ‘오이디푸스적승리‘ 로 인해 보복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귀착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동화적 혹은 마술적 해결을 기대하면서 정서적인 성장 없이도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환자들은 자신의 치료사를 부모와 동일한 대상으로 경험하게 되고, 한때 부모에게 했던 것처럼 치료사를 사랑하게 된다. 즉, 분석 과정에서 환자는 부모와 가졌던 익숙한 오이디푸스 역동을 재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분석관계는 근친상간적 구도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동시에, 근친상간 욕망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희망을갖게 하고 분석을 통해 그 욕망을 억제하게 함으로써 근친상간적 구도를 약화시킨다. 분석적 구도가 깨지는 것은 언제나 아동학대의 위험을 수반하며, 현재의 환자 혹은 이전의 환자와 동침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전통적으로 오이디푸스 시기는 만 세 살 반에서부터 여섯 살까지를 말한다(일부에서는 다섯 살까지라고도 한다). 이 시기에 초자아가 형성되며 이후로 잠복기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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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신을 당해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의 감정이 생기면 우리가 원하든원치 않는 뇌의 ‘편도체(amygdala)‘라는 부위에 차곡차곡 저장된다. 편도체는 ‘무의식의 뇌‘라고 불리는데, 감정은 저장되고 시간이 지나면사건은 의식에서 지워져 깨끗이 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약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전혀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수치스러운 감정들이 불현듯 튀어 오르는 이유도 편도체때문이다.

그런데 유사한 상황에 노출되어 긴장하거나당황해 이성의 힘이 풀려버리면 의식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것이다. 정서지능(EQ)으로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골먼은 이러한 상황이 납치범들이 항공기를 납치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여 ‘편도체 하이새킹(amygdala hijacking)‘이라 부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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