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편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근심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청명하고 높은 날씨. 맑음의 빛깔 그대로 보송보송 말린 쾌적한 기분이고 싶지만, 오히려 밀려드는 괴리감에 발끝까지 저려온다. 책을 편다. 책을 본다. 활자가 이끄는 대로 좇아간다. 좇다 보니 또 이곳이다. 회피란 이름은 같은 곳을 맴돌게 하는 미로 같은 것인가 보다. 그럼 후회를 해 본다. 눈을 뜨고 있기가 민망하다. 또다시 책을 편다. 같은 곳을 반복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다른 장을 넘겨 본다. 생소한 곳을 거닐어도 의식은 과거의 이정표만을 따른다. 돌아본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몸서리가 쳐진다. 이젠 지친다. 눕는다. 왼쪽으로 누웠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돌아눕는다. 꿈을 꾼다. 책을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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