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의 기억을 들춰내는 추억이 깃든 사연을 듣다보면 어느 한 지점에서 아니 어떤 단어나 문장, 혹은 그 분위기가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 놓곤 한다. '유배지의 한 끼니, 흘러간 사랑, 잃어버린 그 맛, 나그네 살이, 밥도둑- 토박이 음식' 등 다 섯장, 서른네 꼭지의 산문마다에 한둘씩 풀어늫는 추억의 레시피들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알지 못하는 세상의 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나는 자주시선을 멈추고 곧 회상(想)의 세계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아마 개정판 서문에 작가가 써 놓은  "누군가 함께 먹었던 음식의 맛에 대한 그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문장 탓이었을까?

 

내가 제 아무리 혼자하는 삶의 의미있음을 강변()하고 있지만, 그 고독의 허기를 모른 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배와 망명으로 제 땅에 있지 못했을 망정 항상 타인과 함께하는 작가의 삶의 풍성함에 시기심이 생기기도 했으니 말이다. 떠올릴 만큼 맛있었던 음식의 기억이 거의 없다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나누었던 순간이 지극히 없었던 내겐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순간 순간 나와 함께해주었던 사람들을 몇 번씩이나 생각하느라 글 읽는 것을 멈추어야 했다.

 

[기억의 고리, 그 시작과 끝]이라는 산문 속에 사랑스런 에피소드의 한 구절이 있다.  "수남아 너만 먹어!  나는 누룽지를 받아먹으면서 어쩐지 좀 부끄러웠다."

누군가 나만을 위해 몰래 건네주는 무수한 의미와 정감을 지닌 그 음식과 함께했던 추억이 내게도 아스라이 시간을 거슬러 풋풋한 행복감에 젖어들게 한다. 그리곤 "내 존재를 비춰주고 확인시켜줄 타인이라는 거울이 필요했던"이라는 [세상으로 나가는 남자의 창]에 깃든 문장에서 다시금 그 타인을 기억 속에서 더듬곤 했다. 나는 "모시조개 넣고 된장 고추장에 끓인 '냉이 토장국''같은 기억은 없다. 줄 곧 하나의 대도시에서만 살아 왔다는 것이 변명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내 존재를 비춰주었던 여인과 함께했던 동숭로 가로변(지금이야 상업성 짙은 곳으로 변했지만)의 작은 카페 '오감도'에서의 음식과 분위가 지금에도 내 가슴을 설렘으로 가득 채운다. 

 

이처럼 잠시의 행복감과 설렘의 시간으로 향기로운 추억에 잠기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고독한 식사의 허기"라는 문장이 날카롭게 나를 헤집는다. 이 달콤한 회상들, 누군가와 같이했던 순간이 이렇게도 오랜시간을 건너뛰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내가 진정한 관계들을 지니지 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파고든다. 내겐 음식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지 못한 채 그저 살기위한 하나의 습관 이상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삶의 전체가 갑자기 의미를 잃어버린것만 같다. 음식은 다름아닌 사람과의 관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 "내 시대의 추억을 되씹으면서 인생살이와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볼 작정"이라던 초판 서문의 이 문장속 단어들, '인생살이', 그리고 '사람의 관계'가 계속해서 내 입속에서 반복된다. 

'모하카르' 작은 해안마을에서  "무엇이라도 사납게 먹어치울 것 같은 식욕이 솟구친다." 던 '가스파초 수프'가 궁금해진다. 내 식어버린 삶의 열정이 살아날것 만 같다. 이 역시 함께했던 '부랑자'라로 부르던 벗이 있었기에 작가의 기억 속에서 되 살아났을 것이다.

 

언제나 나를 위해 달려오는 친구, 한 살 터울밖에 나지 않는 대학 1년 후배가 떠오른다. 그와 함께하던 음식이란 것들이 뻔 한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내가 소중하게 간직하는 기억이다. "아욱 된장국이 올라올때면 어쩐지 수저가 무겁다. 좀 잘해줄걸"하는 이젠 세상을 같이하지 못하는 옛 지기를 향한 그리움의 언어에서 "순수한 처음의 식사를 회복하는 일은 자기 시대를 정화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기본 출발점이다."라는 구절의 전정함을 곱씹게 된다. 쉽진 않겠지만 이제 나도 음식의 맛나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까보다. 그와 그녀들과 함께하는 세상, 관계가 풍성한 세계, 인생살이가 의미로 가득한 세상으로 말이다. 함께하는 세계가 있는 작가의 인생살이를 한껏 부러워하면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나미 2016-03-1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요!!

필리아 2016-03-13 16:02   좋아요 0 | URL
저는 천천히 추억들을 떠올리며 읽었어요...
 
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이라는 시간을 현재에 생각케하는 노장의 회심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인간 종(種)의 살아온 방식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인간의 삶은 계속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투명한 내 마음
베로니크 오발데 지음, 김남주 옮김 / 뮤진트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까이에 누군가 있음에도 외로움이 착 달라붙는 쓸쓸함도 있지만, 다만 같은 지붕아래 나를 이해하는 유일한 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평온한 고독감도 있다. “고요한 배타성”, “쾌적한 고독”, 바로 이러한 상태가 유지되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된 것은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 적대적으로만 바뀌어가는 그 어떤 힘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감이 아닐까?

 

작품에 마냥 취해 나 또한 감미로운 현기증과 몽롱한 분열의 상태에서 한동안 빠져나오기가 싫어진다. 사람이 그립고 사랑이 아쉽지만 정작 사람들의 무리에 휩싸이는 것만은 피하고 싶은 그런 마음, 이기적인가? 화해하라고? 불온하지만 세상의 불온함이 가득 든‘작은 상자’를 열어보면 고통스러우니 바쁜 도시생활에 휩쓸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그래야 살 수 있다고?...소설은 그래서 거침없이 나가는 주류의 세상을 파괴하고, 물건들이 사라지는 새로운 시공(時空), 새로운 삶의 체계와 세상, 그 윤곽과 형태를 찾아간다.


더없이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는‘랜슬롯’이란 사내, 그 수동은 세상에의 순종이 아니라 방심이라고, 살짝 세상 밖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 남자다. 욕망이란 것이 유실된 삶, 그래서 타인에 대한 평화로운 방심에 익숙한 사람, 그러나 삶의 우연이란 그렇게 무력하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어서, 알 수 없는 생명력이 자신의 고독한 영역에 깊숙이 쳐들어와 고요함을 붕괴시키기도 한다. 하이힐! 이 물체 고유의 관능성이 느닷없이 그에게 떨어지는 순간, 그의 삶은 살아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매혹적인 물건의 소유자, ‘이리나’, 세상에 대한 분노, 연민, “줄곧 세상의 끝으로 가서 멸종 위기의 동물을 찍어야”하는 여자, “육체가 별도로 존재하는 정서적인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여인과의 결합은 정말이지 삶이란 이렇듯 모순 같으면서 조화인 것이라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여자, 그러나 이 자유분방하고 세상의 어둠을 파헤치고 그래서 제거하는, 기성의 불온함을 걷어내고 다시 시작되도록 하려는 여인을 이해하는 과정, 아니 그러함에도 사랑하도록 하는 여인의 존재는 무엇일까?

권력을 가진 위험한 집단, 혐오의 대상들을 처단하고자 했던 여자, 세상의 분노를 착실히 지워버리려 했던 여자, 섹스는 그저 상대에게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행위에 불과한 듯 한 여자, 그 여자의 옛 남자들로부터 전해 듣는 그녀의 모습들로 인한 남자의 고통, 커져만 가는 의혹과 질투, 그 모호한 감정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래서 이 모순되는 감정 속에서 몸부림치는 남자의 상처는 안타깝기만 하다.


세상, 산다는 것이란 그 본성이 본디 당혹스러운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당혹감이란‘대상’으로부터 피어나는 건 아닐까? 소설의 남자처럼“자신과 사물들의 적대감을 혼동”했다고, 그래서 비로소 이 세상 그 누구도, 무엇도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 수 없음을 음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도 파렴치한 이들, 사악한 이들, 잔인한 이들이 벌인 온통 우울한 아침 뉴스로 시작한다. “무질서가 지배하는 헛것 같은 장소”인 이 겹겹의 혼돈이 장악하는 세상의 진실을 사소한 일상으로 덮어두면, 또는 회피하고 자신의 내면의 둥지만을 감싸 안으면 평화는 오는 것인가? 춥고 음산한 벽지와 시끌벅적한 도시도 아닌 어떤 도시의 외곽지대를 정착지로서 만족해하는 남자의 돌아왔다는 이성(理性)은 왠지 낯설다.

 

내 마음의 고동을, 밤의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그것이 위안이고 평화라는 말일까? 그럼에도 사랑하는 여인의 부재(不在)에 대한 강박적 집념, 그 지독한 감정의 내면 일기를 좇으면서 거듭 이 모순된 감성이 내 것만 같은 느낌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여자의 대항과 돌발이라는 분노의 근본과 행동에 동조하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핏줄 속에 파닥거리는 화해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그 말이 더욱 진실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이해해 주었던 세상에 유일했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페스트 2015-11-15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필리아님의 리뷰를 저희 뮤진트리 페이스북에 공유해도 될지요.

2015-11-15 2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페스트 2015-11-16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페이스북에 한번 놀어 오세요 ;;

https://www.facebook.com/mujintree/?ref=hl

헤닝 만켈 페이지도 찾아 주세요~

 
나는 남편을 죽이지 않았다
류전윈 지음, 문현선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순박하고 단순한 문장, 으레 그렇듯 세상물정 모르는 듯한 어리숙함에는 해학(諧謔)이 내재한다. 그런데 그 웃음의 문장들이 모여 엄청난 질문을 제기한다. 우린 '왜 사는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체 '삶이란 어떤 것인가' , 이게 어디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의문인가?  진부하기 그지없겠지만 소설의 대답은 '선택의 연속' , '자신의 삶을 증명하는 일련의 사건들'이라고 하는것만 같다. 그런데 이 너절하고 낡은 말이 폐부(肺腑)깊숙이 비집고 들어오고, 흩뿌리는 빗속에 고개를 떨군 빛바랜 중년의 나를 보게 만든다. 내가 증명하려했던 것은 무엇인가? 내 삶의 무수한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지 않았던가?

 

소설 속 여인 '리설련'은 29세에 시작한 소송과 고소를 20년간 지속한다. 그녀는 자기 진실을 증명하는데 삶의 시간을 보냈다. 가짜 이혼이 진짜 이혼 되어버리고, 그래서 진짜 이혼이 거짓이혼이라는 재판을 구한다. 그렇다고 진짜 이혼이 되버린 남편과 결혼관계를 유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거짓 이혼의 판결후 진짜 이혼을 하겠다는 것이니, 사실 결과적으로는 하나마나한 재판이지만 그녀는 두 번째 자식을 출산하기 위한 방법으로 남편과 위장이혼을 한 것이니 사실은 거짓 이혼이 진실이다. 허나 소송의 결과는 적법한 이혼서류와 절차를 밟은 것이므로 법률적 진실이라는 판결이다. 그녀는 패소한다. 진실이 부인된 것이다. 위장 이혼을 빌미로 이미 새 살림을 차린 남편은 당연히 이혼의 진실을 주장하고 그녀는 판결을 번복할 상급 판관들을 접촉하려 하지만 오히려 폭도로 내물리기까지 한다.

 

이제 그녀는 지방 관서의 수장들을 찾아가 호소한다. 현장, 시장, 성장, 그러나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개 촌부의 소송은 그네들의 행동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자신들의 이익에 충혈된 관료들이 이 깨알같이 작은 사건에 관여할 리 없지않은가. 그녀는 마지막 수단으로 국가의 고위관료들이 모이는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리는 베이징의 대회장에 들어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시도하고,  "억울합니다"라고 고소장을 꺼내는 순간 그녀는 대회장 경비인에게 붙들리지만 이 상황을 보게된 국가 지도자에게 여인의 사연은 전달된다. 리설련 사건을 예로들면서 인민위에 군림하지 말고 인민을 섬기라는 지도자의 말에 해당 성장은 그녀의 고소장에 거명된 법원장을 비롯한 현장, 시장들을 줄줄이 해임한다. 촌부의 이혼 소송이 고급관료들을 무더기로 파면하는, 영문도 모를 그네들의 인생을 절단내는 국가적 사건이 되어버린다. 그럼 여인의 고소는 성공한 것인가? 법률적 진실을 뒤집을 어떠한 증거도 없는 그녀의 소송은 번복되지 않는다. 그녀가 원하는 '진실의 증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매년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열리는 기간이면 그녀는 베이징으로 숨어든다. 지방행정관료들과 법원관계자들은 그녀를 소백채(小白菜 )라 부르며 머리를 내젓는다.

 

그런데 400쪽 남짓 펼쳐지는 이 장황하게 고소로 점철된 여인의 20년 세월의 이야기는 이혼소송의 대상이었던 남편의 죽음으로 그야말로 시르죽는다. 그리곤 20여쪽에 불과한 해임된 현장 '사위민'이라는 남성의 '장난'에 관한 에피소드에 무참하게 묻혀버린다. 해직된 이후 렌구수러우(連骨熟肉)라는 익힌고기를 파는 우일촌이라는 유명식당을 운영하며 가까운 벗들과 마작을 하며 "지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중 이모님의 부음을 받고 천리길을 달려가지만 명절이 겹쳐 돌아오는 열차표를 구하지 못한다. 허나 그의 지치지 않는 삶을 공유하며 함께 늙어가던 친구와의 마지막 마작 게임을 위해 어떻게든 고향으로, 그의 우일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리설련의 그것이다. "억울함을 호소합니다"라고 쓴 종이를 머리위로 올리는 순간 경찰이 덥치고, 그의 고향으로 호송된다.

 

작가의 이 기만적인 작품의 구성, [장난]은 동일한 행위가 발생시키는 양 극단의 의미를 생각케 한다. 20년의 진지함이 장난이 되버린 인생, 1분도 채 되지 않는 순간의 장난이지만 진정함이 물씬 나는 인생, 우리가 선택할 삶은 어느 것인가? 사위민이라는 인물에게 돌발적으로 다가왔던 해직, 그리고 그의 선택, 삶이 어찌 자기 뜻한데로만 흘러가겠는가?, 그러함에도 그 선택이란 또한 어떤 것인지 가공할 만한 위력을 지니고 독자를 설득한다.  어쩌면 나는 리설련이라는 여인의 삶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내가 나의 삶 내내 내게 증명하려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고 자문해본다. 오~ 지치지 않는 삶이라는 이 간결한 문장이 간절하고 깊게 다가온다. 소박한 문장이 발산하는 류전윈 특유의 해학과 삶의 의미라는 통렬한 물음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이 삶의 시간에 절로 머리를 숙이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