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시적인 영화 에세이,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영화적인 시집이 될 것이다.

 

 

시인이자 음악가인 강정이, 세상의 빛보다 어둠에서 더 선명하게 타오르는 영화들의 초상을 써 내려간다. 영화가 남긴 진동과 침묵을 붙잡는 시인에게 영화의 모든 장면은 몸으로 기록된다. 꿈처럼, 혹은 고백처럼. 그에게 영화란 체험에 가깝다. “영화는 망상의 거울이고, 그 거울은 결국 나 자신이다.” 그는 스크린 위 죽지 않는 영혼들의 이야기 속에서 죽지 않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투사하는지도 모른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시작으로, 줄랍스키의 포제션, 레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를 비롯해 유럽과 할리우드의 장르 영화들 그리고 한국 영화 발레리나를 거쳐 마침내 조커에 이르기까지, 그가 선택한 영화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어둠의 이야기들이다. “세상에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어둠은 항상 존재한다는 근본 사실을 상기하며 그 어둠 속에서 인간 존재의 상처, 욕망, 구원, 사랑을 시인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간다. 독자는 어느 순간, 스크린이 아니라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시적인 비평서가, 시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영화적인 시집이 될 것이다.


영화는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이다.”

 

여기 수록된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킬러, 조커, 괴물, 혁명가, 정신병자다. 이들은 사회의 정상 테두리 밖에 있거나, 그 테두리 자체의 모순을 폭로한다. 발레리나의 복수극이든 미스틱 리버의 과거의 악순환이든, 저자는 영화가 인간이 가진 "가장 첨예한 본성"을 노출시키며 현실의 역설을 역상으로 되비추는 거름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본질을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으로 정의하는 저자에게 어둠은 단순한 물리적 암흑을 넘어서 현실이 감추고 있는 것, 진짜 현실을 숨기고 있는 베일이며 영화는 그 어둠 속에 빛을 비추어 인간의 얼굴을 다시 본다. 영화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 재고 속에서 현실이 가려버리는 어떤 흑막들을 거꾸로 보여주는 영화를 탐색하지만, 어떤 답을 제시하기보단 우리와 세계 안에 언제나 존재하는 어둠을 직시한다. 그리고 빛과 어둠 사이, 허상과 실재의 틈에서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드러낸다. “엇나간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엇나감의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을 포착하여 폭력과 사랑의 공존, 꿈과 현실의 경계, 트라우마의 악순환, 정체성의 분열, 자본주의의 포섭, 죽음과 재생, 개인의 광기와 사회의 병증을 날카롭게 간파한다. 스크린 속 허구를 꿰뚫어 현실의 진실을 마주하려는 독자에게 저자는 죽든 살든, 현실도 영화도 더없이 낯설어진다면 이 책은 그나마 효능 있는 물건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시와 영화가 교차하는 미적 사유

 

여기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에는 영화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잔광과 여운, 그 흔적이 한 편의 시처럼 놓여있다.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을 보고 저자는 이렇게 쓴다. "거울은 고요한 평면이나 그 안엔 온갖 시간과 사물과 사람의 잔영들로 요란스럽다. '사랑'을 비추면 '증오'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슬픔'을 던지면 '욕망'이 반사되기도 한다." 저자는 영화 자체를 거울로 본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 내면의 가장 어두운 부분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줄랍스키의 포제션에선 "괴물을 만난 다음 더 푸르러진 하늘"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 영화 속에서 사랑은 소유욕이 되고, 소유는 폭력이 되고, 폭력은 결국 구원으로 위장한다. 인간관계의 가장 근본적인 모순이 드러나는 것이다. 안토니오 리가부에를 다룬 영화 히든 어웨이, 사진작가 디앤 아버스를 다룬 영화 , 그리고 이기 팝에 관한 다큐멘터리 김미 데인저를 보며 소위 정상성이라 불리는 일방적 질서와 억압을 해체하는 예술가의 힘을 떠올리거나 <허공에의 질주> 속에 완벽한 청년으로 살고 있는 "불사조가 된 길의 감식가" 리버 피닉스처럼, 노화하고 부패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영화 속에서만 영원을 꿈꾸듯 예술작품 속에만 영원할 수 있다는 예술가의 잔잔한 한탄도 섞여 나온다.

 

 

조커조커: 폴리 아 되에 대한 두 편의 글은 광기를 다루며 이 책의 핵심을 보여준다. 조커는 "사회적 인습 바깥으로 배제되어야 할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사회적 인습과 규율 및 편견 등을 뒤엎는 예상치 못한 대중적 역린"이다. 관객을 향해선 더욱 급진적으로 선언한다. "거기, 판결의 총신을 겨누며 슬며시 웃거나 화내고 있는 자, 당신 또한 조커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일관된 주제들을 반복하면서 명확해지는 것은 "영화 자체가 조커"라는 저자의 깨달음이다. 영화는 관객을 유혹하고, 허구로 현실을 뒤바꾸며, 스스로 가면을 쓴다.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자체를 지배한다. 더 나아가 이제 현실 자체가 영화처럼 작동한다. 나이트크롤러의 루이스가 "사실을 편집할 뿐, 진실을 말하지 않듯" 언론과 SNS, 영상 매체는 사건을 창조하고 현실을 편집하고 조작한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불안을 감지한다. 영화와 현실의 전도.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웬만한 드라마나 영화보다 훨씬 흥미롭고 요란해졌다."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졌다는 것은 무대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펑크록의 대부 이기 팝의 삶과 음악을 다룬 짐 자무시의 다큐멘터리 김미 데인저를 보며 자본주의 사회의 절박한(?) 문제들을 새로운 각으로 예리하게 설파한다. 이기 팝의 무대 공연은 극단적인 예다. 반라 상태에서 자해하고, 대놓고 음란한 포즈를 취하고, 관객 속으로 다이빙하는 '크라우드 서핑' , 이 모든 것은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현실과 구분되는 공간이었다. 과거에는 무대(영화, 연극, 음악) 위에서 "모든 게 가능하면서도 모든 게 허구"였다. 그 안에서 인간의 억눌린 본능과 광기를 안전하게 발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무대가 사라지고 현실 자체가 쇼가 되었으며, 구분할 수 없는 혼종 상태에서 "이 세계는 조만간 자폭할 것"이라는 암담한 예감을 전한다. "이구아나처럼 요리조리 몸을 비틀고 춤추면서, 모든 모욕과 환희를 인간의 가장 첨예한 본성이라 소리"치고 싶다는 저자의 마지막 말은, 절망 속에서도 성찰의 가능성을 붙들려는 저항으로 읽힌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 죽지 않는 시인의 영화에 담긴 의미가 아닐까. 시인은 죽지 않는다. 그는 계속 말하고, 계속 묻고, 계속 저항할 것이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성태 『영화 ― 존재를 위하여 2025, 불란서 책방』


1. 영화의 이름으로, 존재를 사유하다
김성태의 『영화 ― 존재를 위하여』는 제목에서부터 철학적이다. 저자는 “영화가 존재한다”는 단순한 명제를 다시 묻는다. 그 물음은 영화가 여전히 존재하는가, 혹은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라는 중층의 질문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극장에서 보던 영화는 점점 사라지고, 스크린은 스마트폰의 창으로 흩어졌다. 영화가 사라지는 시대에 ‘존재를 위하여’라는 말은 아이러니처럼 들린다. 그러나 김성태는 바로 그 ‘사라짐’의 지점에서 영화의 존재론을 다시 열어젖힌다.
그에게 영화는 단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가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즉, 영화는 사유의 도구이자 존재의 현현이다. 이 책은 영화를 산업으로서도, 예술로서도, 텍스트로서도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규정을 유예한 채, 영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이는 들뢰즈의 이미지철학, 하이데거의 존재사유, 그리고 베르그송의 지속 개념을 배경으로 하며, 영화의 시간을 ‘존재의 시간’으로 읽는 시도이다.
2. 영화의 철학, 혹은 존재의 이미지
김성태가 말하는 ‘존재로서의 영화’는 미학이 아니라 철학이다. 그에게 영화는 감각과 언어 사이, 현실과 재현 사이에 놓인 틈이다. 그 틈에서 세계는 새롭게 드러난다. 즉, 영화는 단순히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비추는 장(場)을 형성한다.
그는 영화의 본질을 ‘이미지’에서 찾는다. 그러나 이 이미지란 재현된 시각적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운동과 지속이 시간 속에서 포착된 존재의 흔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는 기록이 아니라 발생이며, 서사가 아니라 현현이다.
이러한 접근은 들뢰즈의 『시네마 1·2』와 깊이 맞닿아 있다. 들뢰즈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통해 영화의 사유 능력을 논했다면, 김성태는 그것을 한층 더 확장해 ‘존재-이미지’라는 개념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존재를 드러내는 매체이자, 존재가 자신을 감각적으로 발화하는 장치다.
그에게 영화의 목적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느껴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영화가 예술이자 철학이 되는 방식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오즈 야스지로의 정지된 컷, 베르톨루치의 붉은 사막, 김기덕의 무언의 인물들 속에서 우리는 ‘사람이 아닌 세계’의 시선을 경험한다. 그것이 곧 존재의 이미지다.
3. 실증주의 영화학에 대한 비판
김성태는 기존 영화이론의 실증주의적 태도를 비판한다. 통계, 구조분석, 장르 분류, 산업 연구 등은 영화의 외피만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 연구가 언제부턴가 ‘영화를 통해 사회를 설명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는 영화의 존재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그의 비판은 단순한 형식논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존재는 인간의 인식 이전에 있는가, 이후에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영화의 존재론을 넘어, 이미지의 존재론으로 확장된다. 즉, 영화란 인간의 눈을 거치지 않고도 존재하는 세계의 움직임이며, 인간의 감각이 그 세계를 포착하는 하나의 양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는 “영화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 세계를 사유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때 영화는 더 이상 사회적 거울이 아니라 존재의 거울이 된다. 사회적 의미와 미학적 가치의 외피를 벗긴 영화는 그 자체로 철학이 된다.
4. 영화의 소멸 이후에도 영화는 존재한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존재를 논하면서도, 그 존재가 더 이상 극장 스크린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인식에 있다. 디지털과 스트리밍의 시대, 영화는 사라지는 대신 흩어지고, 분화되고, 변형된 존재 방식으로 살아남는다. 김성태는 이것을 ‘존재의 다중적 현현’이라 부른다.
이 대목은 플랫폼 시대의 영상문화와 깊게 연결된다.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이미지 역시 영화의 한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김성태의 관점에서 보면, OTT가 영화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영화적 존재 방식이 다른 형식으로 이행한 것이다. 즉, 영화의 존재는 매체 기술에 종속되지 않는다. 영상이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 그것이 바로 ‘영화’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블루스>나 <더 글로리>, <스크린 속 AI 캐릭터> 역시 영화의 존재론적 장면으로 읽힐 수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사라졌는가? 김성태의 대답은 “아니오”다. 영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중이다. 존재는 형식보다 앞서고, 영화는 형식을 초월해 존재한다.
5. 사유의 영화와 윤리의 문제
이 책이 단지 철학적 선언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김성태가 영화의 존재를 윤리와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존재를 사유하는 것은 곧 타자를 사유하는 일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야기가 아니라, 타자의 존재를 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의 존재론은 곧 타자 윤리학으로 이어진다. 그는 영화가 우리를 세계의 고통과 타자의 얼굴 앞에 세우는 장치라고 본다. 카메라의 시선은 단지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마주보는 윤리적 행위’다.
이 윤리적 관점은 최근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현의 폭력’이 논의되는 흐름과 맞닿는다. 타자의 고통을 소비하는 영상, 트라우마를 재현하면서 오히려 상처를 반복시키는 콘텐츠는 김성태의 영화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는 영화가 존재를 드러내되, 존재를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영화의 윤리다.
6. 기억과 지속의 철학으로서 영화
김성태의 영화관은 시간의 철학이기도 하다. 그는 베르그송의 ‘지속(durée)’ 개념을 차용하여, 영화의 시간을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쌓여가는 시간’으로 본다. 영화는 한 순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이때 영화는 단지 과거를 재현하는 매체가 아니라, 존재의 흔적을 보존하고 생성하는 기억의 장치가 된다. 따라서 김성태에게 영화는 기록된 과거가 아니라 지속 중인 현재이다. 영화는 사라진 순간을 다시 불러오되,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존재를 새롭게 창조한다.
이 관점은 ‘집단기억과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당신의 연구 주제와도 직접 연결된다. 김성태의 영화론을 드라마로 확장하면, 드라마의 장면 또한 존재의 이미지로 읽을 수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려낸 1990년대의 시간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집단이 스스로의 존재를 재구성하는 시간이다. 그것이 바로 영화적 시간의 사회적 버전이다.
7.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
김성태는 영화의 언어를 ‘비언어적 언어’라 부른다. 즉, 영화는 말이 아니라 보이는 것의 언어로 존재한다. 그는 “언어가 사유를 제한할 때, 이미지는 사유를 확장한다”고 말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 시간, 관계가 영화 속 이미지로 드러날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를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영화이론이 언어 중심적 담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여주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사유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철학을 이미지로 번역하는 예술이며, 존재가 언어 이전에 발화하는 순간이다.
8. ‘존재를 위한 영화’와 ‘영화를 위한 존재’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김성태는 영화와 존재의 상호성을 말한다. “영화는 존재를 위하여 있지만, 동시에 존재는 영화를 위하여 있다.” 이는 단순한 수사적 대칭이 아니다. 그는 영화를 인간 존재의 확장으로 본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 세계를 본다면, 세계 또한 우리를 통해 영화를 본다.
그는 이를 ‘공명’이라 부른다. 영화와 인간, 이미지와 존재가 서로의 울림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공명의 감각은 결국 예술의 근원적 역할을 다시 일깨운다. 영화는 단지 현실을 재현하는 기술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반추하는 미학적 행위다.
따라서 김성태의 영화론은 기술 중심의 미디어 담론에 대한 대안적 제안으로 읽힌다. 디지털 이미지와 AI 영상이 넘치는 시대일수록, 존재의 문제를 묻는 영화철학은 더 절실해진다.
9. 비평적 논평 ― 철학과 현실 사이
그러나 이 책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저자의 사유는 지나치게 고도로 추상화되어 있어, 구체적 영화 사례나 현대 영상 환경에 대한 분석은 부족하다. 예를 들어, AI 이미지 생성이나 플랫폼 알고리즘이 ‘존재의 방식’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 또한, ‘존재론적 사유’라는 이름 아래 영화의 사회적 조건, 노동, 젠더, 재현의 문제를 다소 외면하는 측면도 있다. 영화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어떤 존재가, 누구의 존재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라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 존재를 위하여』는 하나의 출발점이다. 철학적 사유로서 영화론의 가능성을 열었지만, 그 사유를 현대 영상 현실 속으로 다시 끌어내리는 작업은 독자의 몫이다. 당신이 그 연장선에서 OTT 드라마와 기억, 알고리즘과 감정의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면, 바로 이 책이 그 이론적 뼈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10. 결론 ― 존재를 위하여, 다시 영화를 위하여
『영화 ― 존재를 위하여』는 한국 영화이론서 중 드물게 존재론적 깊이를 견지한 저작이다. 산업·정책·장르 연구에 치우친 한국 영화 담론 속에서, 김성태는 영화가 다시 철학의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영화는 인간이 만든 이미지의 집합이 아니라, 세계가 스스로를 보여주는 현상학적 장면이다. 그 장면 속에서 우리는 타자를 만나고, 시간을 느끼며, 존재의 근원을 묻는다.
따라서 영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형태는 달라질지언정, 존재를 사유하는 이미지로서 계속 남는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철저하게, 그리고 고요하게 증명한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영화를 만들고, 알고리즘이 장르를 결정하는 시대에, 김성태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는 존재하는가?” 그 물음은 곧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로 영화를 보고 있는가?”

출처 : https://www.facebook.com/share/p/1c1d3798FB/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발로통의 그림을 보는 일은 언제나 가고자 하는 곳에 닿지 못하면서도 지도를 유심히 살피는 것과 같다. 또는 분명 한 번은 와 본 곳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입구를 지나치거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쩔쩔매는 것이기도 하다. 좁은 화폭에서도 무수한 복선과 암시, 속임수가 지뢰처럼 화면 곳곳에 묻혀있다.


원색의 화려함으로 장식된 거실에서 손을 맞잡은 두 남녀의 모습이 사랑의 확인인지 파국의 전조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의 그림엔 언뜻 익숙한 이야기가 놓여 있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길을 잃고 망연히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리를 뜰 수도 없는 것이 원색과 흑백의 모호한 서사, 이미지와 표제의 충돌이 우리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물론 그대로 머무는 것 또한 쉽지 않은데 그 모호함은 우리가 수없이 보고 겪어온 바로 그 장면들이기 때문이다. 논리적 일관성이나 명백한 감정과 관계가 흔들리는 세계에 대한 재현은 사실적인 이미지 속에 배치된 어두운 그림자의 기묘한 조화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호함 속에 짧은 삶을 살아낸 청년의 이름은 자크 베르디에. 펠릭스 발로통이 쓴 소설 [유해한 남자]의 인물은 자신의 선의나 사소한 행위가 타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의식으로 어린 시절 일찍이 자신을 폐쇄한 청년이다. 자신의 단순한 행위들은 언제부터인가 타인에게는 모호한 행위, 치명적인 순간엔 유해한 행위가 되곤 했다. 그에게 세상은 명료한 그 무엇이 아니다. 무모한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혀 늘 자신을 번복하거나 포기하거나 혹은 다시 시작한다. 되풀이되는 자기 합리화, 그리고 부정과 추앙, 그 사이의 우연한 일탈은 마침내 사랑의 승리자가 되려는 순간 그 사랑을 죽음으로 인도한다. 그렇게 청년은 이해 불가의 세계에 던져진 태고의 저주가 된다.


그의 삶은 따뜻함이라곤 없던 고통의 연속이자 타인에게 다가서려 했으나 끊임없이 스스로를 밀어내버린 외롭고 메마른 삶이었다. 타인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타인에게 이해받지도 못한 채 사랑의 갈망으로 삶을 마감한 청년의 삶에서 펠릭스 발로통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참고로 [유해한 남자]를 자전적 소설이라 썼지만, 자전적 소설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따라 의견을 달리 할 수도 있겠다. 분명 [유해한 남자]는 펠릭스 발로통의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어린 시절이나 청년기의 인물 묘사는 분명 젊은 발로통의 자화상 그대로다.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장면은 그의 초기 회화의 장면 속 이야기에 닿아 있다. 그리고 자크 베르디에가 젊은 미술평론가로서 내리는 홀바인과 앵그르에 대한 평가는 발로통의 그것과 정확히 같다. 그런 이유를 들어 자전적 소설이라 소개해도 될 만하다고 생각했던 점을 밝혀둔다.


“펠릭스 발로통은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이념론자"가 아니며, 일반적으로 무기력하고 허영심 많은 어리석은 자들이 흔히 그렇듯 이론들 속에서 영혼을 고갈시키지도 않는다.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비관적이다. 그러나 이 비관주의는 공격적이지도 않고 독단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이 정확한 남자는 최선의 상황에서도 낙관적인 기대로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비관적이길 원치 않는다. 그는 매 순간 솔직함과 진실을 추구한다.”
-옥타브 미르보, 1910년 1월 10일에서 22일까지 파리 드루에 갤러리에서 열린 발로통 전시회 카탈로그의 서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극장의 유령. 저자는 자신을 그렇게 부릅니다. 때론 영화보기가 일종의 강박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고 합니다. 일견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죠. 영화란 마치 뱀파이어와 같습니다. 뱀파이어의 눈은 곧 영화의 눈이죠. 매혹하고 최면을 거는 뱀파이어에 홀린 남자, 상훈이 형이 오랜 세월 영화와 함께 살아온 삶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삶에 영화가 무엇인지 이토록 절박하게 이야기하는 책도 드물 것입니다.비로소 영화는 상훈이 형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영화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 영화의 존재를 증명하는 작업. 어떤 비평 이상으로 영화의 심연, 그 실재를 말하는 상훈이 형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1. 이 책의 제목 『극장에는 항상 상훈이 형이 있다』는 어떻게 탄생했나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까요?

 

이 책의 제목은 잘 아는 동생인 김시선 영화 유튜버로부터 시작됐어요. 시선이가 몇 년 전에 본인의 책인 오늘의 시선을 출간했을 때 영화는 사람입니다’ 챕터에 극장에는 항상 상훈이 형이 있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어요. 저에 관한 글을 써줘서 정말 고마웠죠. 그리고 제가 2023년부터 필름포럼에서 영화 토크 행사를 하고 있는데요. 토크 행사의 제목을 짓는 과정에서 시선이에게 허락을 받고 다시 극장에는 항상 상훈이 형이 있다를 사용하게 됐어요. 그게 다시 책 제목으로까지 온 거에요. 처음에 시선이의 책에 제 글이 실릴 때 걱정도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그 글 때문에 제 책 제목까지 만들어졌으니 너무 고마운 상황이 되었죠.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이번 책의 추천사를 시선이에게 받게 됐어요. 시선이가 이런 제목을 지은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이 제목은 생각할수록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하는 것 같아요. 우선 극장에는 항상 제가 있다는 건 97년부터 지금까지의 제 삶을 요약하는 말이에요. 그 결과로 대략 30년만에 책이 한 권 나올 수 있었구요. 그런데 한편으로 이 제목은 제 책에도 썼지만 사람들과의 소통에 실패했기 때문에 저는 할 수 없이 극장에라도 존재하려고 했다는 저의 비극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기도 해요. 영화와 관객의 숙명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이렇게 이 제목은 저에 대해 여러가지를 말해주는 것 같아요. 

 

2. 서문에서 이 책이 ‘영화로부터 단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한 연애편지’라고 표현했는데요, 지금은 영화가 답장을 해줬다고 느끼시나요?

 

이 질문에 대해 즉각적으로 떠오른 답변은 아직은 답장을 받지 못했다고 느낀다는 거에요. 그런데 30년간의 연애 편지로 책이 한 권 나왔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이것이 나에 대한 영화의 답변인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네요. 영화를 본격적으로 좋아하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동경해온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처럼 평론가나 감독이 되지 못하는 이상 스스로는 계속 답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최근에 이 책을 읽은 제 지인이 그가 볼 때 영화에 대한 저의 짝사랑이 짝사랑이 아니라 찐사랑인 것 같다는 말을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어쩌면 제 스스로 너무 주관화해서 그동안 영화와 저의 관계를 바라봐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더라구요. 그래도 여전히 예전에 지인에게 내가 영화를 사랑하느냐보다 영화가 나를 사랑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말을 들었던 걸 다시 떠올려본다면 아직 영화가 저에게 답장을 줬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와 나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더 탐구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거죠. 


3. 〈벌새〉를 본 날을 '기적'이라고 표현하셨어요. 그 기적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김보라 감독의 <벌새>를 본 날의 기적이 이번에 책 출간으로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하구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인생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차원에서 볼 때 인생영화들을 갖고 있는데요. 저는 제 트라우마를 치유해서 제 인생을 영원히 바꾸어버린 <벌새> 같은 작품을 인생영화로 갖고 있으니 너무 행복한 관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영화와 관객과의 관계를 논하는 데 있어서 <벌새>로부터의 치유 사례를 들면서 사람들과 심도깊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제 스스로도 너무 놀라운 경험이었기 때문이에요. <벌새>를 통한 제 스스로의 변화의 핵심은 이 영화와의 만남을 통해 제 스스로를 이전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에요. 그렇게 되자 제 삶에는 어떤 큰 에너지가 생겼고 그 에너지에 힘입어 힘든 일이 닥치더라도 이전과 다르게 한 걸음씩 전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이 자리를 빌어서 <벌새>의 감독, 배우, 스태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4. 이 책에서 본인을 ‘극장의 유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렇게 표현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략 30년간 영화에 미쳐 살아왔지만 그에 비해 사회적으로 보나 개인적으로 보나 존재감이 없는 스스로의 처지를 유령에 빗대어 설명하고 싶었어요.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극장을 떠날 수는 없지만 오랜 기간 극장에서 시간을 보낸 것을 떠올려 볼 때 극장에 왔던 수많은 관객들과 제가 과연 제대로 소통을 해왔느냐에 대해 의문이 들어요. 삶을 버티는 방식으로 극장에 남아있었던 것이지 극장에 오는 단 한 명의 사람과의 관계를 따져보더라도 저라는 존재가 상대에게 제대로 인식된 적은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어요. 상대에게 잘못이 있었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고 제 스스로가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유령이 된 것 같아요. 제가 책에서 밝힌 심리적인 문제와도 연관은 있겠구요. 스스로를 유령이라고 밝힘으로써 한편으로는 이제 유령의 처지를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 책을 계기로 타인들과 제대로 소통하고 싶어요.

 

5. 출간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 반응이나 피드백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영화 감독으로 활동 중인 동생의 말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 동생이 자기가 읽은 어떤 영화 에세이, 비평보다 개인적이고 솔직해서 좋았고 이 책은 한국의 모든 영화인들 중에 오로지 저밖에 쓸 수 없는 책이라고 했어요. 제 스스로 아직 영화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만이 쓸 수 있는 책이었다는 표현이 너무 감동적이더라구요. 저만의 고유성을 인정해준 거잖아요. 적어도 제 삶이 오롯이 담긴 책이 나왔다는 걸 상대가 인정해준 것 같아서 정말 뿌듯했어요. 다른 독자들에게도 그런 점이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네요.

 

6. 책을 통해 어떤 독자와 마주하고 싶으셨나요? 어떤 이에게 이 책이 다가가기를 바라시나요?

 

저와 같이 어떤 한 대상을 오랫동안 좋아해온 사람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는 책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이 책을 통해 그런 삶을 사는 게 결코 무가치하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 같은 심리적인 문제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삶을 버텨온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책이었으면 하구요. 영화에 국한해서 얘기하자면 저처럼 영화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영화와 현실의 관계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어떤 영화를 보고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몰랐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그런 경험을 나누거나 그런 문제를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어요제 책이 각자에게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7. 앞으로 영화와 관련해서 어떤 걸 하고 싶나요?

 

일단 나이도 있고 영화쪽에서 무슨 일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어요. 그래서 이 책의 출간이 저의 생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솔직히 있어요. 당연히 쉽지 않겠지만 앞으로도 영화평론가나 영화감독의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할 생각이에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생계형 단역 활동도 할 예정이구요. 제가 워낙 사람들에게 영화에 대한 말을 하는 걸 좋아하다가 보니 필름포럼에서 영화 토크 행사도 계속 하고 싶고 강연 시장에도 들어가서 활동하고 싶어요. 누구보다 쉽게 영화에 대해 잘 소개해주고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다음 책을 쓰게 된다면 당연히 좋겠죠. 더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려구요. 유튜브 활동을 하거나 편집을 배워서 생계와 연결해 볼 생각도 갖고 있어요. 크리스천으로서 생전에 영화적으로 훌륭한 기독교 장편 영화를 꼭 한 편 만들고 싶다는 소망도 이어가고 싶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저자는 '영화'의 존재와 변천을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작품이나 사조를 예로 들지 않는다. 그가 다루는 '영화'는 개별 작품들의 어떤 부분이 가리키는 것,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드러나는 개념이지 특정한 영화 몇 편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을 이해할 때 비로소 한 편의 영화가 좋네 나쁘네 어느 것이 더 낫네 별점이 몇 개네 하는 식의 심사위원 같은 태도에서 벗어나 더 큰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신 다른 예술과 다른 영화 이미지의 속성에 관해서, 그것이 현상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현상과 본질에 관한 합리주의/비합리주의의 다른 태도에 관해서, 예술의 고전성과 현대성에 관해서 말한다.(독자추천)

 

개별 영화 비평에서 벗어나 '영화' 자체에 대한 관점을 확립하고 싶은 영화 애호가라면 일독, 재독, 삼독을 권한다. 『'영화' - 존재의 이해를 위하여』는 관성에 가깝게 이어져 온 기존의 막연한 이해를 반박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원론에서부터 다시 대상을 생각하도록 하고, 그 이해를 토대로 역사를 다시 쓴다. 한국어 영화 서적 중 이만한 집중력과 독창성을 갖추고 지도를 그려주는 안내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기까지 하다.(독자추천)



영화라는 매체의 존재 의미를 묻다

초판 절판 이후 22년 만의 복간.

영화는 단지 이야기의 연속일까, 아니면 세계를 해석하는 철학적 사유의 장일까? 이 단순한 질문을 깊은 성찰로 이끄는 김성태의 『영화 - 존재의 이해를 위하여』는 한국어로 쓰인 영화 이론서 중 보기 드물게 영화의 존재론적 문제에 깊이 침잠하는 저작이다. 이를 통해 영화의 근본적인 성격과 영화의 본질, 구조와 기능, 현실과의 관계 등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화에 관한 질문과 사유를 다시 제기하는 이 책은 영화라는 이미지-기술의 집합체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세계를 보여주고, 어떻게 관객과 관계 맺는지에 대해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저자 김성태는 프랑스 유학 후 국내에서 영화 연구와 창작 활동을 병행해 온 영화학자다. 그의 『영화‑존재의 이해를 위하여』는 영화 그 자체를 ‘존재’의 관점에서 재고하며 ‘영화’라는 예술의 본질에 다가선다. 개별 영화 분석이 아닌 영화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영화의 탄생, 촬영·편집 기술의 발전, 관객 수용 방식, 고전에서 현대영화로의 흐름 등을 포괄적으로 서술하고 영화적 구성 요소와 재현의 문제들을 분석한다.

 

이 책 주요한 논점은 영화라는 장치 속에서 철학적 질문을 끌어내는 것이다저자 김성태는 영화를 “움직이는 철학”으로 간주하며, 영화를 통해 베르그송의 지속, 들뢰즈의 시간, 라캉의 주체 등을 관통한다. 이는 단순히 영화에 철학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구체적 형상으로 재현되고 실험되는 장이 바로 영화라는 을 밝히는 것이다. 특히 저자 김성태는 영화가 “이미지를 통한 존재의 사유”라는 관점에서, 기존의 실증주의적 영화 이론을 넘어서고자 한다. 이론으로 영화를 ‘설명’하는 것에서 벗어나 영화 자체가 하나의 존재론적 질문이자 실천이라는 인식은 이 책의 주요한 화두가 된다. 베르그송, 들뢰즈, 바쟁 등 영화철학의 주요 사상가들을 가로지르며, 저자는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미지의 층위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한다. 이미지란 무엇인가? 현실과 영화 사이의 경계는 존재하는가? 영화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영화의 형식 자체—몽타주, 롱테이크, 플랑-세껑스, 데꾸빠쥬—가 어떻게 존재성을 획득하는지 자세히 분석한다. 이를 통해 저자 김성태는 영화가 단순히 ‘무엇을’ 보여주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존재의 의미가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관객의 시선을 조직하고 현실을 분절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세계의 존재 조건 자체를 바꾸는 기술적-미학적 개입으로 읽힌다. 영화는 보는 이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의미는 관객과의 관계 안에서 생성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영화가 단지 ‘표현된 존재’가 아닌, ‘관계적 존재’로 이해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책의 1부 「‘영화’라는 존재 I ― 다른 이미지」는 영화의 형식이 단순한 시청각 재현을 넘어선 철학적 도구라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김성태는 영화가 현실을 모사한다기보다 다르게 재현하고, 다르게 보여주는 이미지라는 전제를 세운다. 특히 ‘움직임과 근대’라는 장에서, 영화가 이미지와 움직임을 통해 근대를 구현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즉 영화는 근대 시공간의 감각과 속도를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재배치하고 재조립하는 시간-운동 기계로 해석된다.

책의 2부 「존재의 진화 ― 첨가되는 개념들」은 영화가 붙잡는 세계의 다양한 층위들을 보여준다.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리얼리즘 전통의 카메라 시선), 조작된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서사적 개입과 연출의 정치성), 편집을 보여주는 영화(몽타주를 통한 인식 구조의 생성), 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시간성과 이야기성의 결합) 등 이러한 구분은 영화가 조망하는 측면에 따라 세계의 양태가 달라짐을 보여준다. 김성태는 영화가 단순한 스토리텔링 장치가 아니라, 세계를 감각하고 구성하는 복합적인 지각 기계라는 존재를 강조한다.

책의 3부 「‘영화’라는 존재 II ― 영화들을 생산하는 기계」에서는 영화 제작 장치가 현실을 어떻게 구성하고 관객을 유도하는지 설명하며 수용자 측면에서의 영화 존재를 다룬다. 그는 영화와 관객의 관계를 존재론적 상호작용으로 본다. 즉, 영화는 관객의 시선 속에서만 실재하며, 관객은 영화의 리듬, 시점, 시선에 따라 존재를 재구성하게 된다. 영화 제작과 수용의 조건을 통해 영화의 실천적 성격을 조명한다. ‘영화관과 관객’에서는 영화가 시선과 주체를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영화적 일루전’과 ‘영화적 상태’는 영화 속 몰입의 구조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드러낸다. 특히 ‘영화적 공간과 최면’에서는 영화가 감각적 설계와 편집을 통해 심리적·지각적 란 상태를 어떻게 유도하는지를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은 영화가 단순한 서사적 장치가 아닌, 현실을 기획하고 재구성하는 기계라는 저자의 기본 전제를 뒷받침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인 4부 「영화와 현실 ― 현실을 다루는 두 가지 방법」은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다룬다. 여기서 김성태는 “현실”이란 단일한 것이 아니며, 영화는 이를 여러 층위로 분할하고 새롭게 조직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화적 현실의 다층성, 일루전 구조, 몽타주 vs 데꾸빠쥬를 통한 구조 분석을 통해 영화사 속 다양한 재현 전략이 현실과 관객을 어떤 방식으로 연결해 왔는지를 탐색한다.

 

“몽타주 이후”라는 마지막 장은 개정판 출간에 맞추어 새롭게 첨가된 부분이다. 여기서 결국 영화는 존재를 ‘조립’하는 방식으로 다시 돌아가는 듯하다. 이는 들뢰즈의 시간-이미지론을 떠올리게 하며, 영화는 재현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구성 장치라는 점에서 이 책의 사유는 다시 정점에 도달한다. 예컨대 바쟁에게 영화 현실을 보존하는 기술이라면, 김성태에게 영화는 “현실을 낯설게 만들고, 재구성하는 사유의 매체”가 된다. 특히 몽타주와 롱테이크, 데꾸빠쥬 등의 영화 문법이 단순한 형식적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인식하는 틀로 작동함을 강조한다.

 

김성태의 『영화 - 존재의 이해를 위하여』는 영화와 철학, 기술과 인식, 감성과 실재 사이의 긴장관계를 영화라는 존재에 관한 사유의 탐사를 통해 해명하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실, 시간, 공간, 감각이 영화라는 장치를 통해 어떻게 다르게 인식될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깊이 성찰하고 싶은 이들, 특히 영화를 인문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책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