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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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짝달싹 하지 못할만큼 사방이 꽉 막혀 있는 현실에 놓여있을때, 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수없이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달리 사는 방법은 없을까? 이 벽을 넘어설 방안이란 없는 것인가? 벽 너머 어딘가에 지금 여기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기대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는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삶의 진실이란 것이 있다면 저너머에 찾아야 하는 정말의 삶, 내 행복을 보장하는 의미 가득한 것이 있을까? 이제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모래의 여자>가  이런 내게 얼마나 안성맞춤의 소설이 되었는지, 우연히 집어든 소설 한 권에 이만큼 매혹된 기억이 아득하기만 하다.

 

거대한 은유인 '사구(砂丘)의 구멍' 에 갇힌 남자의 이야기다. 모래땅에 사는, 대표적 사막 곤충인 '좀길앞잡이'를 채집하기 위해 해안가 모래사막이 펼쳐진 마을에 들어선 남자는 예기치 않게 모래언덕에 깊게 파인 구멍안에 갇히고 만다.

끝도없이 흘러내리는 사구 안의 초라하게 썩어가는 집, 그리고 여자, 구멍안으로 그를 안내했던 사다리는 사라지고 남자는 고립된다. 쌓이는 모래를 방치하는 순간 모래에 파묻혀야하는 삶, "모래는 절대 쉬지 않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표를 덮고 멸망시킨다." 여자는 부지런히 모래를 양동이에 퍼담아 사구 정상의 수거자들에게 올리고, 물과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배급받는다. 매일의 반복되는 단순한 생존의 노동, 남자의 탈출을 위한 시도는 실패의 계속일 뿐이다. 소설은 이렇게 세계에서 고립된 인간의 처절한 내면의 투쟁을 쉴새없이 그려내고 있다.

 

 "Got a one way ticket to blues, woo woo...." , (중략) 상처뿐인 편도표를 쥐고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왕복표를 거머쥘 수 있는 사람에 한한다. ....절망에 차 도움을 구하는 편도파들의 아비규환을 듣지 않기위해 텔레비젼의 볼륨을 높이고 열심히 편도표 블루스를 흥얼거리는 것이다. (P156중에서) " 그래, 돌아갈, 가야할 기대가 있는 목적지가 있는 사람의 여유, 어떠한 기대도 가질 수 없는 이에게 이 노래가사는 조롱에 가깝다. 하지만 구멍 저 바깥의 세계를 단념할 수 없다. 남자는 사다리를 만들고 여자가 잠든 사이 구멍바깥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자신을 구멍에 가두고 그네들 마을의 생존을 위한 노동력으로 밀어넣은 인간들의 눈을 피해 모래길을 도주하지만 이 역시 모래늪이라는 장애에 좌절되고만다.  시간은 흐른다. 이제 그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모래와의 투쟁과 일과가 된 수작업에 충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 이런 심정일 것이다. "....아래를 보면 안 된다. 아래를 보면 안 된다! " 아무런 돌파구도 발견 할 수 없어 이윽고 저 아래로 내려가고 그 반복되는 일상에 찌들게되면 그것도 또한 익숙함, 편안함이 되어 삶의 평온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파멸이라고 생각했던 것, 자학이라고 고뇌했던 것에서 쾌유되는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만... "이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어쩔 거냐는 생각이 가장 견딜수 없어... " 사위가 어두운 밤의 고독속에서 해답없는 이 독백을 수없이 되뇌었던 적이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그럼에도 아주 작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인내아닌 인내의 시간을 지속한다. 그러다 그 작은 끈, 그 소박한 공상과 실천의 가녀린 시도끝에 왕복표를 얻는 순간이 찾아 올지도 모른다. 이윽고 남자에게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인 왕복표, 모래와 물의 얽매임을 풀어내는 유수장치를 만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유수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듯"하고,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구멍 속에 있음에는 변함이 없는데, 마치 높은 탑위에 올라 있는 듯한 기분이다. (P225 중에서)" 동일한 장소, 상태에 있음에도 벽 위에 올라선 듯한 뿌듯함, 좀체 보이지 않았던 자존의 회복을 느끼는 순간, 여기도, 저기도, 인생이란 그렇게 납득할 만큼의 이유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 이른다. 모래의 여자, 남자의 동반자가 된 구멍 속 여자의 묵묵한 삶, 결코 삶에 패배란 것은 없다고 여기는 듯한 여자의 태도, 고작 바깥 세상의 라디오와 거울만 있으면 되는 여자의 인생에 삶이란 것의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닌지. 또다른 곳에 내 마음을 달래줄 무엇이 있다는 듯이 매일을 현실로부터의 도주를 꿈꾸는 나를 이제 쉬게 할 수 있을것만 같다.  이제 남자처럼 나 역시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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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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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 국면을 클로즈업(Close-Up)하면 이렇게 보이지 않을까? 고상하고 기품있고 아름다워 보이고 관능적이기까지 한 무엇에 렌즈를 가까이 갖다대면 댈수록 이내 그 본색인 천박하고 추하거나 불결해보여 외면하고 싶은 그런것, 이 작품집을 읽는 내내 이러한 감정 상태를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곤 자살, 추방, 폭력, 고립과 같은 단어들에서 발산되는 어둠의 답답함이 시종 가슴을 압박하는 불쾌한 기분에 짓눌린 기분이었다고 해야겠다. 오늘의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이런 것이라는, 우리의 의식이 손사래를 치며 은폐시키고 있던 것들을 어쩔수 없이 마주하는 그런 수치심, 몸서리, 분노, 자괴감이 뒤엉킨 무기력 같은 것...

 

1. 너무도 현실이어서 비현실적인

 

"아버지가 칼등으로 블루길의 대가리를 찍었다."라는 첫 페이지의 문장이 시선을 장악하는 이 소설집의 첫 단편인 <미끼>의 흥건하게 흐르는 폭력의 피비린내가 훅 하고 내 정신을 훑는다. "버텨 살아남은 놈이 주인이 되는 거야, 알겠어?", 아들인 화자(話者)를 절름발이로 만들어놓은 아버지가 하는 말이다. 대어를 잡아들이는 떡밥의 비밀을 취재하기 위한 VJ의 탐욕스러움이 가세하여 이들 부자(父子)가 하는 낚싯가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폭력의 쇼는 바로 그 속성인 완력, 힘의 자기 파괴력일 것이다.  그래, 살아남은 놈이 주인이 되는 거다. 바로지금 우리의 정치사회에서 벌어지는 어이없기그지없는 쇼의 궁극이 바로 이것이지 않은가? 어떻게 이 구조적인 사슬을 끊어야 할까?  약자는 모두 쓰레기처럼 풀 숲에 던져버려지는 것이 진실인가?

 

나는 수록된 이 소설들을 모두 읽어낼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이 클로즈업된 전경들을 마주할 수 있을까하는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거의 소설집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다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단편에 이르렀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게하는 문장을 만났다. "가만히 잠든 아이의 얼굴위에 베개를 올려놓았다. 아이의 숨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가만히 베개를 누르자...."  파업 노동자인 남편의 자살 후 천문학적인 파업손해배상액을 빚으로 떠 안은 정신분열의 시어머니, 어린 두아이의 엄마가 견뎌야하는 잔인한 현실의 결말이다. 쓰레기처럼 방치되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지나치게 현실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현실,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들...

 

단편 <폭염>의 화물트럭 운전으로 딸아이를 키워내는 여인, <흉몽>의 모텔 청소부인 여인, 억척스런 생활의 몸부림에도 그네들을 모욕으로 점철시키는 우리들의 사회는  "나도 따라 죽을거야.", 혹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찢어진 눈매를 치켜보며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거나, 삶이란 절망과 고통스런 의혹일 뿐이다.

 

2. 언어나 문자 따위로 전할 수 없는

 

'다카다 아키노리'라는 일본 철학자의 '궁극의 선택'이라는 어휘가 떠오른다. "똥맛 카레와 카레맛 똥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와 같은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적 속박을 일컫는 말이다. 아마 우리들중 많은 이들은 오늘 이러한 속박을 피할 길 없는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것(사회적 속박)을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아마 자살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김이설'의 소설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물들로 가득차 있다. 내 존재를 떠 받쳐주는 타자가 없는 이들, 세계가 외면한 곳에는 항시 죽음의 그림자가 떠돈다. <폭염>, <흉몽>, <복기>, <아름다운 것들>..., 또한 한결같이 등장인물들은 아이를 갖지못한다. 이 사회의 번식녀 계급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 잔혹한 폭력의 세계...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않은'또는 '언어나 문자 따위로 전할 수 없는'이라는 비밀의 얘기로 돌아가자. 사실 우리들의 사회가 은폐한 것들의 이야기이니 이 소설집의 모든 작품들이 비밀의 발설이라 해야할 터이다. <비밀들>이라는 단편의 주인공은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인 이혼요구를 받고 친정으로 내려온 여인의 이야기다. 그런데 "내 부모와 세상이 바라는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문장이 눈길을 끈다. 사회적 속박의 다른 표현이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의 혼란과 방황이다. 온갖 편협한 편견들과 반지성이라 불리는 옹색하고 천박한 자기주장, 이미 윤리적 도덕적 올바름을 망각한 세계가 말하는 '정상'이란 단어처럼 의심스런 것도 없으리라. 이 구조적인 폭력이 여인이 온전히 서 있을 곳을 지워버린다.  "여전히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서울행 버스가 도착했다. 정수리에 박힌 햇빛이 뜨거웠다."  이 마지막 문장이 왜 그리 울려대는지...

 

"비밀을 만드는 사람은 결국 외롭게 되어있어." 라는 단편 <부고>의 문장에 가 닿는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라는 화자(話者)의 독백에서 또한 자기의 이야기가 없는 인물을 만난다. 그녀의 삶에 자기 것이라곤 일체 없다. "논문을 쓰다보면 그것이 내 논문 같고, 내가 석사 박사가 된 것 같았다. 학원으로 출근하다보면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 같았다. 상준과 누워있으면 아내 같고, 여자를 엄마라고 부른 뒤로는 여자의 친자식 같았다." 다음 시간 단위에서 발생하는 일이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들의 지속이라면 아마 우린 순간을 살아내는 것 뿐일 것이다. 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을까? 이런 상황에 계속 굴복하여 살도록 강요하는, '시몬 베이유(Simone Weil)'가 말한 '공장화된 현대사회'의 본성인 '타인의 의지로만 움직이는 물건이된 인간'을 떠 올리게 된다.

 

'OO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란,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TV광고 속 그와 그녀 같은, 드라마, 스포츠, 재벌,...의 그 무엇과 같은. 급기야 단편 <빈집>에 이르러서는 신도시에 아파트를 장만한 여자 '수정'은 이렇게 말한다.  "새 아파트는 잡지 사진과 최대한 닮은 것"으로 만들겠다고. 모방, 지속되는 결핍, 미완성의 고통만이 늘어날 것이다. 그녀는 말끔히 정리하곤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들어앉아 비로소 평온을 느낀다. 그 고요함이 마냥 지속되기를.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를. 이 은밀한 고통들, 폭력들, 속박들의 고리가 끊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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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선(善)한 악인(惡人)을 생각하며...

 

우리네 삶이란, 비좁은 가설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일 뿐이라는 듯 펼쳐지는 <파우스트>를 다시금 읽게 된것은, 자신의 살인 행위에 어떤 회한도 지니지 않은 인간, 즉 '근본악의 존재'를 그린 '정유정'의 소설 ,<종의 기원>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겠다. 그래서 '융'의 분석 심리학에 기댄  '존 샌포드'의 < 융 심리학, 악, 그림자>에서 주장하는 자기(self)의 온전함, 개성화 과정에 대한 확인을 통해 악인이라는 새로운 종자(種子)가 마치 출현한 것 같은, 아니 별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주장의 부정에 더욱 위안과 확신을 가졌다고 해야겠다. 그리곤 샌포드의 자기 입증의 반영을 위해 등장하는 신(神)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내기,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영혼을 담보로 한 계약의 실체, 인간본성의 이중성에 대한 우아하기 그지없는 삶과 죽음의 매혹적인 형상인 <파우스트>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우리들의 태도이다. 자신들에게는 티끌만큼의 악도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범죄자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마치 전혀 새로운 인종을 대하는 듯한 사람들의 역설, 그것이다. 자기 안의 악을 들여다보려 하지않는, 자기 안의 악은 은폐한 채 타인만을 판단하려는 그 시선에 대한 위화감이 왠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나만큼은 선인(善人)이고 정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몽매함 말이다.

샌포드의 주장은 이렇다. 인간의 심연에는 무수한 악이 존재하지만 그 악은 철저하게 거부되고 억압되고 침잠해 있을 뿐이다. 성적갈망, 분노, 거짓, 폭력성, 탐욕, 증오, 시기심 ...등등 어둡기만한 그것은 무의식의 저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아 있다.  즉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자아가 되기위해 억압한 그림자 - 우리가 되고자 하는 어떤 존재와 일치되지 않고 거부된 것들 - 가 바로 악(惡)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린 왜 이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에 주저하는 것일까? 아마 자신의 내면에 쌓여있는 악과 마주하는 두려움, 공포, 죄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악, 어둠의 그림자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피하려 든다. 결국 우린 가면(페르조나)을 쓴다. 다양한 세계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각기 다른 가면을 쓴다. 자아의 인격을 덮어씌우는 덮개로 포장한다.

 

그런데, 자신을 페르조나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의 세계에는 넘쳐난다. 진짜 인격이 감추어지고, 페르조나가 드러내는 역할만을 하려드는 사람들, 피상적이고, 거짓되고, 깊이가 없는 인격의 사람들, 진정한 자신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고만다. 만일 어질고, 선만을 위해서 애쓸 경우, 그 사람은 가증스러운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생기 넘치는 삶의 일부, 그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거절했을때 삶이 얼마나 위태로워 질 수 있는지,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삶의 쾌락을 위해 악마 메피스토와 계약하는 파우스트가 선 바로 그 경계일 것이다. 더 많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쌓이는 악의 축적으로 악인이 되지 않을까?

 

악인은 별난 새로운 종이거나 정상과 비정상과 같은 작위적인 분류에 의한 별종이 아니다. 자기 안의 악을 외면하고, 부인하고, 억압해온, 선한 인간이라 자처하는 인간일 뿐이다. 마침내 억압된 그림자가 차고넘칠만큼 축적된 인간이 자기의 내면을 보았을 때, 그는 자기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그려지는 '영혜'처럼 자기를 무화(無化)시키려 하거나, 그림자에 사로잡혀 <종의 기원>의 살인자처럼 그림자의 원형을 삶에서 실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오늘 우리의 사회는 선한 박애주의자의 페르조나를 쓴 악인의 전형을 보면서 촛불들을 들어 올리고 있지 않은가?

 

'파우스트'는 어떤 인간인가?  '초라하게' 책상 앞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시작되는 비극 제1부에서 " 아, 나는 이제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게다가 신학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철저히 연구했다. 그 결과가 이 가엾은 바보 꼴이구나."라고 자신의 학식과 덕망과 명예라는 선만을 위해 살아왔지만 결국에는 초췌하게 늙은 한 노인만이 남아있다는 삶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그리곤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까지 담보하면서 인생 내내 거부하고 억눌러왔던 그림자의 삶으로 향한다.  "차라리 관능의 심연 속에 들어가 이 불타는 정열을 식히게 해라! (중략) 시끄러운 시간의 여울 속으로 사건의 와중으로 뛰어들자! 거기에는 고통과 쾌락, 성공과 불만이 번갈아서 덤벼들어도 좋다."고 외친다. 파우스트는 모르고있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내기가 전제되어있다.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이다. 신(神)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파우스트를 악으로 끌어들여보라고 내어준다. 신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은 어쩌면 신의 형상을 했다는 우리 인간 개체의 총체, 즉 온전한 하나, 선과악이 공존하는 총합된 인격으로서의 자기(self)일지도 모른다. 즉, 신은 선이고 사탄은 악이라는 이분법, 또는 이원적 구성이란 공허한 말에 불과하며, 실은 신은 선악을 초월한, 혹은 인간의 언어에 불과한 선악의 총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 , 30년이나 젊어진 파우스트의 탐욕스러움,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장식된 처녀'그레첸'을 자신의 손에 넣기위한 술책과 관능적 사랑, 발푸르기스의 밤에 펼쳐지는 온갖 쾌락, 고대 그리스의 극치미(美)인 헬레나를 소유하기위해 지옥의 심연까지 내려가는 인간 욕망의 극한, 교활한 전쟁의 승리와 전리물로서의 광활한 해안영토의 취득, 나아가 드넓은 자신의 영토와 바다의 전망에 한 점의 장애까지도 제거하기 위해 노부부의 초가를 불태우는 파렴치에 이르기까지 그의 새로운 인격은 한계가 없다. 선이 억압해왔던 악의 마주함을 통해서 파우스트는 비로소 구원되고, 온전한 영혼이 된다. 우리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또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우리들의 의식적인 인격이 확실히 도덕적인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결코 악, 무의식의 그림자를 대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식함으로써 우린 그것을 절제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비극 제2부 5막, 파우스트 시신의 매장 중 천사들에게 담보로 잡아두었던 귀한(파우스트) 영혼을 빼앗기고 어이없어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허망한 주절거림을 듣게된다. 악마와 내기했던 하나님은 정말 영리했다. 선악을 넘어 비로소 '온전함'을 달성한 파우스트를 구원한 것이다. 악마는 강탈당했다고 억울해하지만 이미 이길수 없는 내기였다는 것이 시인 '괴테'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근본악이라는 것은 지극히 잔인하고 피를 얼어붙게 만들며, 인간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극한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선만을 추구하려는 한 필연적으로 빠지는 함정 이상이 아닌 것이 아닐까? 자기가 쌓아둔, 은폐시킨 자기 악으로부터의 침식, 결코 부인하고 인정할 수 없는 자아(自我)의 편협함,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자기변명 같은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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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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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제법 발칙한 동기에서 이 작품을 읽게되었다고 하겠다. 'ㅇㅇ주의자'라고 하는 범주화된 제목에 대한 저항감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사람을 어떤 특정한 부류에 카테고리화하는 것, 이를테면 문화적 구별짓기와 같이 어떤 성향이나 취향이라는 일견 순수한 것 뒤에 숨어 사회체계와 분리될 수 없는 계급적 에토스(ethos;관습)를 만들어내는 폭력의 한 양식이라는 의미에서 '채식주의자'라는 표현은 반감을 자아낸다.  멀리 갈것도 없이 연작중 첫번째 작품인 <채식주의자>에서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라고 말하는 영혜에게 남편의 직장 전무부인은 즉시 "그러니까 채식주의자시군요?"  "골고루 못 먹는 것 없이 ~(중략)~ 정신적으로 원만하다는 증거죠."라고 한 사람을 범주화 해버리는 장면에서 바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범주화의 폭력성은 요즘 부쩍 회자되고 있는 '반지성(反知性)'으로 연결되어 더욱 고착된다. '우치다 다쓰루(內田 樹)'는 그의 저서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라면, 조금만 시간을 들여 알아보면 간단하게 들켜 버릴 거짓말, 근거가 빈약한 데이터, 일리가 있는 해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례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는 것인데, 이것이 문제적인 것은 사람들, 혹은 사회를 어떤 한 방향으로 몰아 특정한 집단이나 계급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그들은 "지식도 교양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생각하는일'을 하지 않는다. 특히스스로 생각하는 일." 이라고 그 편협성과 타자에 대한 불용이라는 분리적 폭력의 한 양태를 통찰하기도 한다.

 

아마 이 지점이지 않을까 싶다. 스스로 생각하는 일을 멈춘 사람들의 세계, 그러나 맹렬한 지적 정열로 타자를 압도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한 책략만을 구사하는 데 능숙해진 사람들이 넘실대는 세계, 그렇지만 이들 아무도 자신은 범주화, 반지성의 책략을 행사하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세계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코 타자를 이해하려하거나 관용하려 하지 않는다. 영혜의 형부가 기억하는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가치외에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듯 건조한 얼굴, 상투적이지 않은 어떤 말도 뱉어본 적 없을 속된 입술"이라고 기술하는 그녀의 남편이나 고기를 안 먹는다는 영혜의 두 팔을 잡고 강제로 입 속에 고기를 쳐넣는 영혜의 아버지에게서 이 일상적인 범주화의 반지성적 폭력을 엿볼 수 있다. 게다가 <몽고반점>에서 처제인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있는 푸른 몽고반점으로부터 그녀를 오직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이용하는 실험예술가인 형부의 위선과 책략을 발견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믿는 지식과 정보에 정열적이다. 그리곤 이 열악한 것들로 상대를 누르는데 열중한다. 상대의 두려움, 공포, 고통은 이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이것이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아버지에게 손찌검, 그 폭력을 뼈속까지 받아들이고 성장했다. 그런 그녀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의 꿈을 꾼다. 꿈 꾸기 전날 아침, 남편은 그녀에게 화를 내며 재촉한다. "제기랄, 그렇게 꾸물대고 있을 거야?"  그녀의 저 침잠해 숨어있던 심연의 그림자, 그 어떤 폭력에도 저항하지 않았던 내면의 분노와 마주케 했던 촉매였을 것이다.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녀 자신의 이 폭력성과 마주한 순간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하기가 불가능 해진 것이리라. 그녀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그녀는 "무엇을 찌르려고 하는지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라면서 더이상 둥글지도 않은 자신의 가슴에서 점증되는 어둠의 그림자에 침전하는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병원 벤치에 앉아있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목이 눌려있던 새 한마리가 떨어졌을 때, 거기에는  " 포식자에 뜯긴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몽고반점>은 어떤 의미에서 지옥도를 상상케한다. 불합리하고 음란한 인간의 측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많은 모더니즘 예술을 비롯한 실험예술에서 발견되는 몰인격, 예술의 형식으로 죽음을 포용하는 그것에서. 어떤 인상적인 대상을 영상과 음악을 넣어 편집해 시각적인 작품을 만드는 일종의 실험미술가인 영혜 형부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는데, 나는 그의 지성에서 오직 악마성만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신적 시련을 겪고 있는 처제 영혜를 대상으로 '몽고반점 1 - 밤의 꽃과 낮의 꽃'이라는 영상작품을 찍어대곤, 음란과 예술의 경계, 아니 자기 욕망의 마지막까지를 채우기 위해 '몽고반점 2'를 찍는다. 나무가지와 잎사귀, 꽃이 그려진 영혜와 자신의 몸을 섞는 그 이미지를. 머리만 무거워진 현대의 불안정한 지성,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원시적이고 충동적인 것들로 나아가는 도피와 은둔의 표상, 감각에 호소하는 내용으로 채워지기는 커녕 극도로 인격이 결여돼 있는 그것, 고통스러운 자기부재를 채우려고 타인의 생명을 빨아먹는 악마적 에너지 그것 말이다.

 

<나무불꽃>에 이르러 죽음, 무화(無化), 무의식에 엉켜있는 어둠의 그림자, 그 폭력성에 대항하는 여인을 보게된다. "오랫동안 혼자여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시선으로 차창을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를 바라보는" 영혜의 언니 인혜의 시선에서. "모든 이차성징이 사라진 기이한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요양원에 누워있는 동생을 보는 그녀의 고통에서. 그녀는 비로서 이혼한 남편의 열정어린 작품과 일상의 간극이 지닌 의미, 그의 눈에 담겼던 것이 욕정도 광기도 아니라 공포였음을 인식한다. 그네들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버텨냈던 자신의 모습을 그들을 통해 비춰본다. 영혜와 인혜의 남편, 고통과 공포 그것으로부터의 궁극적인 자유라는 그네들의 동일한 방향은 소멸이다.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아예포기하는 것 이상의 자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자기가 가진 가장 소중한 대상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자유일테니까. 그래서 영혜가 향하는 곳, 더이상 고통을 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출발점인 부동(不動)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물구나무를 서서 뿌리가 내리고 대지에 굳건히 자신을 내리는 나무가 되고있다는 영혜를 보는 것은 그렇기에 참아내기 힘든 아픔이다. 그러나 무화하려는 동생에게 인혜는 말한다.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 인혜, 그녀의 구원은 삶의 견뎌냄이리라. 우리네 내면의 저 밑바닥에 있는 어둠의 그림자를 기꺼이 대면하고, 그것의 목소리를 듣고 자기의 실체를 온전히 반영하는 것 말이다. 그것에 굴복할 이유도, 그것을 외면할 것 도 아니다. 마침내 그녀는 바라본다. "초록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엇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범주화, 반지성, 폭력, 고통, 죽음, 그리고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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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30th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순수했던 옛 시절의 향수 때문일까? 아니면 진솔하게 드러낸 무의식의 욕망탓일까? 아무튼 다시금 읽게된 이 작품의 아련한 매력에 푹 젖어든다. 사랑, 상실, 순수의 기억....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 30th 기념 리미티드 에디션 P 454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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