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 수줍은 마음이 당신의 삶에 노크하는 소리 월간 정여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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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내 심상(心像)에 빈번하게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는 어린 시절 흑백TV 앞에서 보았던 몇 몇의 영화장면들이다. 그 중에서도 전쟁의 한 가운데 극히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애절(哀切)한 사랑, 그리곤 공허함만이 아프고 답답하게 다가오던 마지막 장면으로 기억되는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그 애틋함인데, 아마 소년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모양이다. 결국 영화의 원작인 레마르크의 소설을 펴들고 아주 조금씩 읽어나가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그 소년의 마음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리워하는 그 마음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는 소극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작가 정여울의 글에는 이러한 문장이 있다.

나는 우선 당신조차 알지 못하는 그 아픈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어루만지는 글을 쓰고 싶다. 마침내 당신의 상처 입은 마음 속 깊은 그곳까지 닿을 수 있도록

설혹 그것이 상처인지 아닌지 그저 막연한 결핍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심스러움이 묻어나는 똑똑하는 두드림의 소리에 문을 열면 그곳에는 부드러운 손길을 가진 진솔한 말()이 서있으리라.

 

이렇게 마주하게 된 월간 정여울은 나와의 은밀한 대화가 된다. 내 자신을 향하여 솔직한 삶을 얘기하게 한다. “나에게 부디 낯선 사람이 되지는 말아줘.” 라는 관계의 기적을 말하기 위해 인용된 이 평범한 문장이 모든 관계를 무시하는 듯한 내 오만의 밑바닥에 있는 정말의 목소리가 아닐까하는 의문의 시간이 되고, 그것은 다시금 한쪽이 열릴 때도 한쪽은 늘 닫혀있는 회전문의 비유에서 내가 침전 시켜놓은 마음의 비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묻혀있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비밀이 없으려면 아낌없이 마음을 줘야 한다.” (P56)

 

얼마나 굳게 마음이 닫혀있었는지, 관계에 얼마나 소홀했는지, 얼마나 인색한 마음이었는지를 조용히 가늠해본다. , 인과응보지. 그렇게 닫아걸고는 옛 소년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속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소년은 사람들을 많이 사랑했다. 그리고 무한한 사랑을 받았다. 소년에겐 숨길 것이 없었으니까. 정말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얼마나 열성적으로 들었던가?

 

표현보다는 수용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보세요.” (P86)

 

나이가 들며 소년의 열성적 듣기가 수그러들긴 했지만 표현보다 수용의 비중이 크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판단하려 들었던 모양이다. 작가의 지적처럼 좋다, 나쁘다, 괜찮다, 싫다, 라는 판단으로 단절을 만들어냈던 모양이다.

 

판단은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지만 사유는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에요.” (P89)

 

허겁지겁 판단하며 달려왔더니 정말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부터 일 것이다. 그럼에도 외로움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부르는 것이 그 단어임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가뭄처럼 쩍쩍 갈라진 메말라버린 심장. 그 목마름을 저 깊은 곳에선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눈부신 첫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소년이 지닌 감성, 내가 너무 멀리 도망쳐왔던 것의 실체이리라.

 

그 모든 삶의 기쁨이 오직 당신과 함께 해야만 가능한 눈부신 기적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P100)

 

작가가 말하는 부사 어쩌면의 용법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주술적 희망의 향기가 묻어나는, “가능성을 탐색하여야 할 여유의 공백을 잃어버리고 있었음을. 아마 소년을 찾는 내 여정에 월간 정여울은 동행할 것이리라.

읽는 이 마다 대화의 내용은 달라지리라. 그럼에도 문을 열면 그 진솔함에 마음을 열지 않을까? “끝내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마음 또한 어루만지는 치유자이기를 말하는 작가 정여울과 내밀한 속내를 교환하는 순수한 희열의 시간이 될 수 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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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드 베이커리 (크리스마스 에디션 리커버 한정판)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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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게 새로 장정(裝幀)된 작은 책, ‘마법사 빵집(Wizard Bakery)’의 유혹에 꼴까닥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책을 펴면 발효된 이스트의 냄새, 이른 아침 제과점 앞을 지날 때 후각을 강렬하게 자극하는 그 풍미가 확 밀려든다. 몰입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열여섯 살 소년이 황급히 도망가고 있다. 비명, 그리고 분노하는 절규의 소리가 그를 집요하게 쫓아온다. 소년은 갓 구운 빵들의 열기로 가득한 가게의 문을 민다. “나 좀 숨겨줘”,

의붓 여동생 무희의 집게손가락이 가리킨 엉뚱하고도 터무니없는 방향이 야기한 누명, 새어머니 배 선생의 분별과 판단의 이성을 상실한 맹목(盲目), 아버지의 무관심에 존재할 곳을 잃은 소년과 빵집은 그렇게 서로의 삶에 연결된다.

 

위저드 베이커리’, 이곳에선 마법이 든 빵들을 판다. 화해 100%의 효력이 있는, 보기 싫은 인간을 떨어내는, 짝사랑을 연인으로 만들어주는 것과 같은 야릇한 이름을 가진 마법의 빵들 - 메이킹 피스 건포도 스콘, 노 땡큐 사브레 쇼콜라, 체인 월넛 프리첼... - 의 주문이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물품의 상세정보사용시 유의사항을 건성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이를테면 사랑을 얻기 위해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먹이면 효력 있는 체인 월넛 프리첼이것을 사용함으로써 맺어진 인연은 함부로 끊을 수 없다는 점을.....진지하게 고민한 다음 선택해주세요.”라는 유의사항이 있다. 단순히 마법을 파는 빵집이 아니라, 자기 책임과 삶의 진실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하는 그런 영적 사유의 공간이 된다. 순간의 열정, 혹은 분노에 지배당하는 삶의 결정이 수반하는 후회와 번민(煩悶)이라는 고통에 악다구니 부리는 인간들이 스쳐간다. 자기 인식과 삶의 그 심원한 진지함을 생각조차 않는 사람들.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준 위저드 베이커리의 마법사(점장)가 짊어진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몽마(夢魔)를 기꺼이 자신의 꿈으로 안는 용기로부터, 소년은 그의 언어가 목소리가 되어 나오기 불가능 할 만큼의 저 깊은 곳의 상처들, 그 기억들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 한다. 청량리역 에 버려졌던 여섯 살 그 어느 때의 기억, 가죽 띠에 목을 맨 어머니의 잔상들, 오직 자기 영역과 소유에만 관심을 지닌 초등학교 선생인 새어머니의 이기심과 냉담, 그리고 편견과 몽매성, 자기 편의에만 열중하는 아버지의 방관적 무관심들을 현실이라는 불가피적 관계로서 수용한다. “나는 단지 거기 있었을 뿐 인데를 되뇌는 소년의 억울함에서 한 존재에게 가해진 숙명과 현상의 관계에 잠시 시선을 떨구게 된다.

 

아마 이 동화(童話)같은 소설의 깜찍스러움은 급하게 문을 닫아야 하는 빵집의 마지막으로 출력된 주문서 일 것이다. ‘마지팬 부두인형’,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하기위한 것, 소년은 도망쳐 나왔던 집을 향해 점장이 만들어준 물품을 들고 나선다. 그가 마주한 패륜(悖倫)적 현장, 칼을 쥐고 그를 향해 달려오는 배 선생, 그리곤 소년의 손에 들린 시간을 되돌릴 마법의 빵인 머랭 쿠키’....,이 때, 우린 시간을 되감아 어떤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우연이라는 삶의 숙명성을 겸허히 받아들이면 되는 것일까? 우주의 한낱 미물인 존재들이 빚어내는 그 수많은 자기변명들이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달콤한 향기에 숨겨진 마법의 빵이 어디에선가 팔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품을 읽는 시간 내내 상처받아 헐떡이는 소년을 품어주던 '위저트 베이커리'의 오븐 속에만 콕 박혀있었으면 하는 느낌이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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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새뮤얼 버틀러 지음, 한은경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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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here', 어디에도(없는)이라는 단어가 거꾸로 써진 ‘Erewhon(에레혼)’이란 이 소설은 146년 전, 18725월에 발표되었다. 19세기 중엽에 써진 케케묵은 이야기가 21세기 오늘 다시 소환되어 읽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계가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독재하지 못하게끔 우리에게 없어도 될 만큼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P257)”하는 소설 속 문장이 지닌 오늘의 현실과의 유비(類比)때문일 것이다.

 

컴퓨터 혁명이 순수한 기계적 사건에서 생물학적 격변으로 바뀌고, 권한이 인간에게서 네트워크로 연결된 알고리즘에게로 이동(호모데우스P472)”하는 현실, 더 이상 인간 자신들의 욕망과 경험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위기의 예견과 닮아있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겐 이 영국인의 직관이 더욱 빛나게 와 닿은 것은 공동(共同)이 만들어내는 믿음의 허구성과 환상성이라 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사람들이 믿기로 하면 곧 의미가 되, 그 믿음이 자신들의 질서를 구축하고, 또 그 기반위에서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양을 치는 목동인 화자(話者)가 새로운 땅과 황금을 찾아 아무도 넘어서지 못했던 아득한 산맥과 협곡을 넘어 찾아든 새로운 세계인 에레혼의 사람들이 지닌 도덕관과 세계관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다른 믿음, ‘유발 하라리의 말을 빌면, 그네들이 함께 짠 공동의 이야기망()’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리라.

 

개인의 질병은 물론 불운(不運)조차 재판을 받고 구금되는 범죄가 되고, 출생하는 것은 태어 난 자()의 책임이며, 비이성이 찬양받는 세계를 오늘 우리들의 심상에 떠올리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소설의 거의 모든 지면은 이러한 기이한 질서가 삶을 지배하는 낯선 세계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이를테면 <에레혼의 재판>이라는 장에 등장하는 한 토막의 이야기인데, 아내를 막 잃은 남자에 대한 판사의 선고는 다음과 같다. “피고는 큰 상실을 경험했다. 자연은 이러한 범죄에 심각한 벌점을 부여하며, 인간의 법은 자연의 명령을 강조해야한다. 배심원의 권고가 아니었더라면 피고에게 6개월의 노역을 선고했겠으나 ....(中略)...감형한다.” 상실이라는 불운은 자연의 섭리에 비추어 볼 때 조야하고 반사회적이라는 믿음이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같은 이야기를 믿는 한, 사람들은 똑같은 규칙을 따르고, 그 상상의 질서에 자신들 믿음의 토대를 구축한다는 이야기이다.

 

21세기 바로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질서, 도덕, 체제라는 것들 역시 이러한 이야기의 그물망에 기반한 것 아닌가? 이걸 거꾸로 새기면 사람들이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면 가치가 증발해 버리고,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호모데우스에서 유발 하라리가 적시하는 돈, , 기업, 국가와 같이 상호주관적 실재라는 것들, 그 허구적 실체에 목매는 우리들을 에레혼 사람들이 보았을 때, 그들 역시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우리의 믿음이란 것은 결국 우리네가 어떤 이야기를 직조해내느냐, 그리고 그것에 어떤 상상의 질서를 부여하려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 질수 있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아무런 의견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태도는 학문과 훌륭한 교육의 완성으로 여겨졌다.”<비이성의 대학>의 우아하게 완벽한 중립의 태도를 접하게 될 때 실소(失笑)보다는 새뮤얼 버틀러의 이 해학(諧謔)적 묘사에서 극단의 순전한 부조리가 넘쳐나는 넌더리의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은 왜일까?

 

에레혼의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이러한 가치중립적 태도는 오늘 우리네가 과학기술에 기대했던 동일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소설은 바로 여기에서 그들이 이러한 삶의 태도, 즉 이러한 믿음의 질서를 만들어 낸 동기가 소개되는데, 이 작품을 미래소설의 걸작으로 불리게 한 3개의 장으로 구성된 <기계의 책>이 그것이다. 기계파괴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논리들인데, 분명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안광(眼光)이 돋보이는 부분이랄 수 있다.

 

기계에 구속된 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기계왕국의 발전에 평생을 헌신하는 이들도 늘어난 것을 감안 해 볼 때, 기계가 인간보다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이 명백하지 않은가?(P259)” 이어서 기계는 인간의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이익을 훨씬 선호하는 경향을 착취하여...(後略)”, 그리곤 인간의 의식이 갑자기 충격을 받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소리 없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살금살금 인간은 기계에 구속되고...(後略)”에서와 같이 오늘날 잠시도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발산되는 스트레스 냄새의 유사성이다.

 

즉 에레혼은 기계파괴혁명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믿음의 세계인 것이다. 21세기 오늘, 우리들 역시 인간의 개별성이 내부에서 조용히 붕괴되는 소리를 듣고 있다.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들이 성장하면서 그것이 인간이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곳으로, 또는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으로 가는지에 대한 두려움도 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는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설 에레혼의 낯선 도덕과 믿음들의 이야기는 더더욱 인간의 믿음이라는 이 허구적 실체, 그 환상을 다시 그려 낼 수는 없는 것인지를 생각게 한다. 21세기 인간들이 믿고 있는 도덕 과 법이라는 윤리와 질서의 기반이 된 인본주의의 신화, 그 이야기를 새로 짤 수는 없는 것인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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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출판 은행나무의 문학지(文學誌) Axt 10(2017.1/2)부터 15(2017.11/12)까지, 6회에 걸쳐 게재된 작가 김 숨의 장편소설 떠도는 땅에 대한 리뷰입니다.)

 

 

월간, 격월간, 혹은 계간에 이르기까지 연재(連載)된 장편소설을 찾아 읽는 것은 내겐 손에 꼽는 극히 예외적인 독서 행위라 할 수 있다. 소설의 흐름이 단절된 상태를 다시 복원하여 기억을 되살려내야 하는 불편 때문이며, 이 과정 속에서 독서의 의지를 상실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랄 수 있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떠도는 이야기가 있어, 연결되기를 기다리게 되는 드문 경우가 발생하곤 한다. 아마 떠도는 땅의 화자(話者)들이 실려 있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아기가 태어날 땅, 그 땅이 어떤 땅일지 금실은 모른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 된다. 1937103,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라 어디로 가는지, 그것이 죽음의 처형장인지, 삶의 무대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가축운반용 열차에 실려 그저 끌려가는 여인과 그녀의 뱃속 아기, 그리고 미지의 땅에 대한 이야기임을.

 

팔다리를 접고 웅크린 사람들의 두루뭉술하게 뭉개진 윤곽으로 표현되는 조선인 무리로 그득한 열차안의 풍경, 그리고 뼈들이 구르고 구르는 동안 부서지고 마모되어서는, 마침내 열차가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가루가 될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마치 이를 잊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들이 토해내는 고독과 그리움과 생존, 안주(安住)를 향한 처절한 삶의 투쟁에 대한 기억들과 소회들이 흐른다.

 

지주의, 일본의 개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한 그릇의 죽이라도 먹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버려진 이국의 땅을 찾아든 조선인들, 무리를 이끈 가장도, 그들의 손에 이끌려온 아이도, 그리고 그 척박한 곳에서 생을 시작한 이들까지, 그네들이 이루어낸 환경에서 무참히 내쫓겨 가축처럼 실려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열차 안에서 꾸려진다. 그것은 그네들의 사연과 기억이란 기록 속을 오가며 , 삶의 뿌리가 내려지는 곳,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편견과 의혹들이 인종적으로, 때론 민족주의에 실려, 그리고 이념과 영토와 국가라는 허구적 실재가 사람들을, 땅을 어떻게 갈라놓는지를 드러내 놓는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는 능숙하게 숙련된 지식인의 언어로서가 아니라 순박함과 귀동냥한 소박한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아기도 살수 없는 그 어떤 곳으로 자신들을 이끄는 처참한 가축용 열차 칸에 태운 스탈린의 처사를 말하는 인물들의 면면이다. 유대인의 머리가 큰 것은 하도 머리를 쳐서라고 믿는 을녀, 오순, 백순, 공덕과 같은 사람들의 물음과 대답이 엮여 디아스포라(Diaspora)에 이르고, “뭔가 죄를 지었으니까 떠돌며 사는 거겠지에 도달한다.

 

소설에서는 그네들 자신에게 씌워진 죄의 굴레에 대한 인식의 대립이 인설일천이라는 두 인물에 의해 그려진다.

소련 내에 외국 스파이, 해충, 변절주의자....들로 가득하다....‘ 소련 정부가 조선인들을 탄압하기 위해 떠들어대던 말을 하고 싶은 거요?”

따지고 보면 반역자들 때문에 우리가 이 꼴을 당하는 거 아니겠소?”

누가 반역자인가요?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를 위해 싸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외치던 조선인이 반역자인가요?”

 

고난의 여정인 강제이주 열차는 이러한 담론들의 격전장이기만한 것은 아니다. 7개월 된 태아를 지닌 여인 금실인설에게 감도는 삶의 태동, 흐릿한 희망의 움, 그 잿빛 무대에서도 실낱같은 빛이 있다는 것이다. “금실의 눈길이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설을 향한다. 남편 근석에게는 느끼지 못했던 낯설고 미묘한 감정에 그녀는 어깨를 떤다.”

 

“103일 페르바야 레치카 역을 떠난 열차는 30여일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구릉들과 갈대밭뿐인 버려진 땅. 다시 반복된다. “너희는 무슨 죄를 지어서 아무것도 없는 땅에 버려졌지?” “신조차 용서 못할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버려진 거야?”

나는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허구에 대한 믿음을 가진 죄,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믿은 죄,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 죄..., 아니 죄 없이 버려진 죄. 떠난 자들을 망각한 자들의 죄....

 

80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세대들은 무심히 하바롭스크로, 블라디보스톡으로, 또한 알마타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곤 예기치 않게 위령비와 곡창지대로, 화려한 도시로 변화된 그곳들을 거닐게 된다. 소설 속의 후손들,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 형제와 자매들의 그리움과 외로움을 알지 못한 채. 땅에 대한 그 절박한 필요가 있었던 삶들에 대한 찬연(燦然)한 애가(哀歌)를 이제야 들으려 하고 듣게 된 우둔함과 부끄러움이 밀려든다.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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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황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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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각자 그 집에서 어떤 시간들을 보냈는지 나는 끝내 모를 것이었다. 그들 역시 내가 지나온 시간들의 전모를 알 리 없다. 우리 모두의 모든 순간을 지켜본 건 집뿐이었다.”

- 1<율의 이야기 P23> 에서

 

알지 못하는 것을 진정 알기위해서는 그 미지의 것에 가닿으려는 정성과 충심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일 게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의미에서 작가의 진심이 꼭꼭 눌려 써진 작품이다!’ 라고 느끼게 된다. 소설 혹은 픽션에 대해 이런 설명이 있다. 작가와 독자가 은연중에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묵계에 대한 것인데, “작가의 허구적 진술은 사실과 거짓을 나누는 판단의 체계에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에게 이 판단을 요구하며, 진실의 모습을 생각게 한다. 아마 이것이 이 소설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일 것이다.

 

소설의 표제 알제리의 유령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즉 플롯의 중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에 비로소 숨이 불어넣어져 생기를 되찾게 하는 중심 제재(題材)로써 다층의 의미를 가지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알제리의 유령연극 대본이다. 누가 썼는지, 어떤 이유로, 어떤 상황에서 써졌는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한 것인지, 그리고 이것이 어떤 사건을 만들어냈는지, 사건은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를 말하게 한다.

 

1. 거짓의 이야기

 

연극대본 알제리의 유령자본의 저자 칼 마르크스가 쓴 희곡 작품이다. 실제로 1882년 초, 마르크스는 요양을 위해 알제리의 빅토리아 호텔에서 3개월간 머물렀다. 국내 출간되었다가 지금은 절판된 알제리에서의 편지(정준성 , 빛나는 전망 )’라는 서간집은 이 시기의 마르크스를 통해 그의 사적(私的) 일상을 조명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부터 허구(虛構)와 사실의 관계가 섞이기 시작하는데,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들의 대화가 반복되는 대본의 내용과 이에 대한 진정성 넘치는 해석이 진지하게 소개되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진실 되다. 그러나 그 진실은 거짓이라는 토대위에 서있다. 거짓이냐, 진실이냐.

 

소설의 둘째 장인 철수의 이야기의 화자는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의 지향점은 어디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로 가득한 청년이다. 연극무대를 기웃거리는 그에게 알제리의 유령을 쓴 작가에 대한 관심은 그를 연극계의 천재로 알려진 인물 탁오수를 찾아가게 한다. 진실을 찾아서, 그러나 그 진실이라는 이야기 역시 오롯이 사실들만의 나열일까? 게다가 알제리의 유령은 당시 마르크스가 처해있던 궁핍과 실의를 통해 그의 가족들과 그 구성원이 겪게 되는 물질적, 심적 고난과 절망에 대한 상념으로 이끄는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 거짓된 이야기에서 삶의 진정함을 길어내는 아이러니에 매혹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진심은 어디에서도 절로 피어나는구나. 허구의 틀에서 허구를 직조하고, 그 허구가 허구가 아닌듯한 허구가 되어 사실로 승화하는 조화(Harmony)에 어찌 매료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2. 사실의 이야기

 

이렇게 작위적으로 거짓의 이야기와 사실의 이야기로 구분하는 것은 무식한 짓거리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경험의 범위에서 40년 전, 매양 매캐한 최루가스가 온 도시의 공기를 짓누르던 1980년은 내겐 지금도 날 것의 생생한 기억이니 예술인들의 한낱 문화적 놀음에 조차 폭력을 행사하여야만 했던 불의한 권력, 그것들의 제물이 되었던 이들의 이야기는 사실의 이야기에 포함시켜도 이해가 될 터이다.

 

알제리의 유령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은 1율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율(한은조)과 징(박현가)의 부모들이다. 두 부부가 어울려 술과 농담과 진심이 부조리하게 뒤섞이고, 자신들의 대화를 희곡으로 쓰기로 한다. 희곡을 무대에 올리기 전에 이들은 동료배우들에게 멋진 사기극을 연출하는데, 마르크스의 희곡작품이며, 공산당 선언을 떠올리게 하는 유령이란 제목까지, 게다가 그 입수경로조차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무지하고 불온한 권력은 여기에 고문과 죽음으로 답한다. 남은 자들의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곤 또 죽음. 이후 그들의 자녀, 그네들과 관계했던 인물들의 삶이 신산하게 펼쳐진다. 감히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한 사람들의 고통이 어딘가에 있을 터이다. 허구의 세계보다 더 허구 같은 인간사(人間史)란 사실이 어찌 이보다 솔직하게 그려질 수 있겠는가?

 

40년이 지난, 그것도 자신의 경험이 아닌 부모 세대의 이야기를 하는데, 상황에 대한 과정이나 형편이 술술 연결되어 술회되었다면 그건 온전히 허영(虛榮)이요, 허위(虛僞)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이 “~었을 것이다.”, “~었을 수도 있다.”, “아니, 모르겠다.” 라는 불명료한 기억의 인출로 시작되어, 단절되어 흐릿하기만 했던 것이 더욱 진정으로 다가온다.

 

어쩌면 소설은 황당(荒唐)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 없는 시대의 국가 폭력에 스러져간 사람들에 대한 진혼곡(鎭魂曲;requiem)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네들 이후 세대를 위한 입당송(入堂頌;introitus)일지도.

어떤 시절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이유로 죽는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 문장이 사실인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의 역사이다. 왜 알아야 하느냐고? 과거에서 해방되어 다른 운명을, 다른 세상을 상상하기 위해서이다. 설혹 그 과거의 영향을 피할 수 없을 지언정, 약간의 자유라도 있는 편이 낫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라는 말을 진짜배기로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 『공산당 선언(이진우 , 책세상 ) P15 에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中略)... 정권을 잡은 반대파들에게서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받지 않은 야당이 어디 있으며, 좀더 진보적인 반대파나 반동적인 적수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는 야당이 어디 있겠는가?...(後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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