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정호승 지음, 황문성 사진 / 비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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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삶이니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사는 것이 힘겹게 느껴질 때면 이런 소리가 절로 나오곤 한다. 이런 상념이 반복되는 데에도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것을 보면 반백년 가까이 살아왔음에도 내면의 수양이 멀어도 한참이나 먼 것임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지를 전혀 모르는 바도 아닌데 말이다. 마침 깊고 넓은 수렁에 빠져 이것을 헤쳐 나오는 데 기력이 많이 쇠잔해 있어 그만 멈추고 그저 영원한 안식에 몸을 맡기는 것이 어떨까하는 즈음에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은 내게 주어진 어떤 계시 같은 것일까?

 

난 용기까지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더 갈 수 있는 힘이 내게 남아 있는지, 과연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싶을 따름이다. 내가 왜 힘겨워 하는 것인지, 지금의 수렁이 어떤 실체인지, 내부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 있는 것인지, 과연 빠져나와야 할 만큼 삶의 가치란 것이 존재하기는 한 것인지를.

시인의 목소리는 고독처럼 내게 가까운 그것이었다. 나 역시 그처럼‘영원한 외로움과 기다림의 고착물’이라 설명되었던 그의 詩, <입산>의 ‘골짜기’가 되곤 했으니까. 친구가 들려주는 같은 종(種)으로서의 위로 같은 것이라고 할까? 그래서 알고는 있었으나 잊어 버렸던 삶의 이해들을 다시금 상기하고 그것들의 정말의 의미를 가슴 깊숙이 받아들이는 이 과정은 내겐 절실함의 밧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 힘겨움의 본질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책은 절로 나를 이렇게 이끌고 있었다. 마음을 장악하고 있던 질문들 - 그악스럽게 탐욕에 차 소유의 집착을 부리는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를 취함을 위한 좌절은 아니었을까? 아님 주변의 온갖 것들에 분노를 뿜어내다 지레 지쳐 버린 것은 아닐까? 아직 견뎌낸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너무 나를 완전하게 채워두려고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혹여 온통 상상속의 걱정거리가 산처럼 쌓여 미리부터 질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의 답변이 아니라 그냥 듣고 토닥여주는, 바로 그 위로의 언어와 행위만으로도 족했으니까. 그러다 무심히 보았을 문장들이 내 가슴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고 나는 그것에 밑줄을 긋는다. “내 몫을 그저 있는 그대로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내 몫에 만족하고 있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의 일화가 어떤 공명을 일으켰다. 그리곤 ‘빈손’과 “바늘 하나 찌를 곳이 없는 충만을 뜻한다”는 ‘여백’의 가득함과 여유의 이해가 비로소 내 관념의 바다에 안착했음을 느끼게 된다. 손에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한 손은 늘 비워둬야 한다는 것과 영혼의 공간이 형성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의미하는 것을. 문득 오랜 친구가 언젠가 테이블 위의 주먹 쥔 내 손위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포갰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녀는 벌써 여백과 빈손이라는 삶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닐까하고.

 

나는 시인의 문장들을 다시 좇는다. 거기엔 “칼날 인(刃)자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합성어” 인(忍)자가 “가슴에 칼이 꽂힌 상태를 그냥 견디어내다.”는 뜻과 함께 놓여있다. 세상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글자라는 말의 의미가가 새롭게 다가선다. 내가 생각하는 인내는 아직 어설픈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준비하기 위한 오랜 시간의 견딤이 무엇인지를 내게 새겨두라고 다짐한다. 어부가 찢어진 그물 깁는 것처럼 준비하고 인내하는 것의 의미를. 조급하게 깁지도 않은 그물로 바다에 나가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지금까지의 내 모습은 그러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주어 담을 과실의 적음에 좌절하는 어리석음의 반복이 아니었는지를. 인생이란 바로 준비하는 과정임을.

 

이제 어느 소설가가 썼던 돌돌 흐르는 산 속‘여울물 소리’의 실체가 시인이 말하는 내면의 소리임을 알게 된다. “초가지붕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 그 진리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쥐었던 주먹을 펼치고, “허공으로 날아간 화살은 허공으로 날아간 화살일 뿐”임을, 채움이 아니라 빈 공간을 새겨두게 된다. 삶의 의미와 향기가 그득한, 그리고 위로의 힘이 되어 준 책으로 오래 기억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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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동서 미스터리 북스 52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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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하학적인 작품의 제목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 추상이 이내 구체적으로, 아니 사실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일 것이다. 추리문학에 리얼리즘을 지펴낸 작가의 역량 덕택이다. 그래서 거창하게 그의 소설에‘사회파’란 수식이 따라다니는 터일 것이다. 점을 촘촘히 이으면 선이 되듯이 흩어져있는 정황을 연결하면 거대한 네트워크, 어떤 사회적 연결망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동기와 결과의 끊을 수 없는 인과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끈질긴 인내와 노력을 요구한다. 소설은 이처럼 무관한 점들을 이어 선을 그리는 작업이다. 그 점들의 연관관계를.

 

1. 추리의 구조

 

아마 이렇듯 무심한 ‘점’들의 관계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무심성의 가장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것들의, 혹은 그 연결이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것들의 관련성과 가능성이 수면위에 드러나는 순간 아~하고 경탄의 외마디가 절로 터져 나오게 하는, 우리들의 믿음을 굳건히 해주는 그런 감동의 견인을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완전범죄’다. 정황적 증거조차도 오리무중이고, 직감과 추정에 의한 용의자의 행선 추적에서도 아무런 흠결을 찾아 낼 수 없는 완벽함만이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이 무결점의 완전성이 오히려 범죄적임을 감지하는 경찰의 직관이 소설을 끌어가야 할 정도이다. 분명 범죄로 여겨지지만 범죄로 판단할 근거가 없는 사건, 그리고 확신되는 용의자이지만 사건에 연결시킬 어떠한 빈틈이나 실책도 발견되지 않는 그런 사건이 있다. 바로 이것에 도전하는 것이 이 소설이고, 독자를 흥분시키는 요소이다.

 

큐슈의 한 해변가에 정사(情死)로 추정되는 나란히 누운 연인의 죽음이 뉴스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기차에 오르는 것을 본 목격자가 있어 단순한 정사로 판단하는 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목격이 예사롭지 않다. 무수한 선로에 들고나는 열차가 쉴새없는 역에서 건너편 기차의 사람을 명확하게 발견하는 것은 사실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다. 소설의 추리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범죄사건이 있고, 그 사건의 용의자로 추정되는 자가 있다. 그 용의자는 사건이 일어나던 날, 사건 현장인 일본의 남단인 큐슈와는 극단적으로 반대인 북부 홋카이도 지역으로 출장을 갔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 이처럼 용의자의 증거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짜임새 있게 맞추어져 있다. 이제 독자들은 소설 속 수사관과 함께 이 완벽한 알리바이들의 오류를 밝혀내는 데 동참해야만 하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소설은 더 이상 흥미를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 이 소설은 사건의 범인에 대한 확증은 없지만 누군지는 이미 독자들이 알아버린 상태로 시작되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곤 용의자가 갖추어 놓은 무흠결(無欠缺)의 증거들, 알리바이를 하나씩 파괴해 나가는 작업이다.

 

도저히 깨뜨려지지 않을 것만 같은 완벽한 알리바이들을 깨어나가는 쏠쏠한 재미의 대단함이야말로 이 작품 최고의 맛이라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각종 트릭들마저도 작중(作中) 수사관의 입을 통해 발설될 정도이고 보면 소설을 떠받치고 있는 알리바이의 견고한 조성에 대한 작가가 자부심이 느껴진다. 그런 것들을 깨부수는 재미이니 오죽 희열이겠는가. 그런데, ‘알리파이 파괴’라는 추리문학의 이 막강한 테크닉에 리얼리즘이 더해지면서 소설은 현실 속 우리들의 사회와 삶 속으로 파고든다.

 

2. ‘상식의 맹점’을 지닌 현실 사회

 

이제 안개 속에 흩어진 점들이 선으로 연결된다. 관청가의 고급 주점과 여급, 그곳에 드나드는 단골 고객인 중년의 사업가, 말기 폐환자로 요양지에서 소설을 읽고 수필을 쓰며 소일하는 그의 아내, 정부 한 부처((OO省)에서 실무의 잔뼈가 굵은 실무관료와 그의 상급자들..., 소설이 산만하게 뿌려놓은 이러한 배경들이 하나의 알리바이가 파괴될 때마다 하나의 선이 되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사건의 출발점인‘정사(情死)’란 사랑하는 연인들이 이생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마감하기 위해 선택한 결과에 붙인 이름이다. 그러니 여기에 범죄적 시선을 메어두기란 비상식적이란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한다. 아마 이 소설의, 작가의 관심은 작품의 중심구조인 알리바이의 파괴처럼 보통의 사람들이 지닌 이 상식이란 것의 파괴가 얼마나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이해인가를 말하려는 데 있다 해도 무리한 것은 아닐 것이다. 상식이 지닌 맹점을 보여주고 그것의 깨뜨림이 바로 지금의 우리 보통 사람들이 지속해야 할 사회적 책무임을 인식케 하는 치밀한 기획임인 것이다.

 

신문의 지면과 방송 뉴스에 오르내리는 이야기들, 특히 정부 및 여타 국가기관을 비롯한 지방자치단체 등의 뇌물수수를 비롯한 각종의 부정하고 부패한 사건 소식이 연일 잇닿는다. 그래서 감사원 결과가 발표되고, 검찰이 일선에 등장하여 엄중한 수사 방침을 말하지만, 매양 사람들이 수긍하기에는 턱없이 미흡한 결과만으로 흐지부지 종료되거나, 말단이나 중간실무자급의 적당한 희생양을 구속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이 현실의 리얼리티를 반영하고자 한 것인지, 용의자의 정교한 모든 알리바이를 무너뜨려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실제적인 아무런 증거도 확보한 것은 없는 상태에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추정과 정황의 확신만을 하게 되었을 뿐 법적 증거라 할 수 있는 물증은 확보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부처(OO省) 과장대리의 정사로 부정사건에 연루되었던 해당 부처의 상급자들은 오히려 승진하여 더욱 확고한 권력층이 되었다는 소문만을 전한다.

 

여기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들이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 이것들의 실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사는 모두 자살인가? 다수가 좇고 인정하면 옳은 것인가? 학연 지연 자체는 좋은 건가? 사회적 관습이라고 용인되는 무수한 욕망의 산물들은 과연 정당한 것들인가? 우리들이 인정한 상식 중 엄청나게 많은 것들은 대개 진실과 거리가 멀 것이며, 나아가 부정당하기 까지 한 것일 수 있다. 우린 이 상식의 맹점으로 인해 다수의 실패라는 경험을 반복한다. 이 상식의 파괴라는 다수의 특권을 우리들 스스로 되돌아보는 고통을 수용하지 않는 이상 사회의 건강성이나 정의는 공염불에 그치고 말지도 모른다.

 

소설은 이처럼 현실을 비틀어대는 양 현실적 결과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 실체적 의미에서 영원한 미제(未濟) 사건에 머물고 마는 것인데, 정사는 자살이란 대중의 상식이란 눈높이에 맞추면 당연히 범인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 작품의 리얼리티가 뛰어난 것이 바로 이러한 작가의 조치이며, 작품의 완성도는 급작스럽게 높아지고, 주제의식은 실천적 철학에 가닿게 되는 것이다. 소설의 독특한 추리구조 양식에 매혹되어 책장을 따라가다 보면 사회적 현실과 이성의 무능지대라는 의외의 호소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대단한 작가를 만났고, 흥미롭고 시사성 높은 주제의 작품을 만났음에 흡족한 즐거움을 숨기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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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 몽테뉴의 12가지 고민들
솔 프램튼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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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의 제목이 된 문장의 출처를 굳이 찾아보았다. 몽테뉴가 교조적 신학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박 을 위해 자신의 수상록<> 1권에 추가한 <레몽 스봉의 변호>라는 에세이 중에서 가까스로 발견했다. 인간이 다른 종(種)에 비해 우월하다는‘당연한 추정’을 극복하려는 일화의 한 토막이다. 고양이가 사람을 데리고 노는 것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당대에 얼마나 전복적인 인식이었을까에 이르면 책의 제목으로 이 문장을 선정한‘솔 프램튼’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몽테뉴에 대한 선입견인 스토아 주의자, 회의론자, 그리고 말년에는 쾌락주의자라는 도식화된 이해를 뛰어넘어 새로운 들여다보기를 예견케 하는 대목이랄 수 있다. 물론 그의 지적처럼 “결론을 추출하는 과정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과정에 가까운” 몽테뉴의 『에세(essai)』에 대해 평생에 걸쳐 써진 글들이기에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초연한 부동(不動)의 경지라는 신념에서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의 성향으로 변모하는 의식의 진행들을 선명하게 목격케 하고 있지만, 이보다는 “인간 이성의 역설적 한계를 집요하게 파고든” 진솔한 사상가의 진면목을 알아차리게 해주는 미덕에 더 큰 무게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16세기 프랑스의 시대 상황이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는 암흑의 시대였다는 측면에서 몽테뉴 역시 대학살과 전쟁과 죽음이라는 시대의 명제를 피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고난이나 죽음에서 조차 초연해야 하는 아파테이아(aphtheia)를 신조로 여기게 되었다는 기술들에는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또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의 격렬한 종교분쟁으로 인한 그치지 않는 혼란이 야기한 지적확신의 상실이 사람들을 회의주의에 젖어들게 하였다는 점 역시 상식적 설명이랄 수 있다. 이러한 시대사적 배경의 해석이 몽테뉴의 에세를 독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역시 몽테뉴라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해만큼 공감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솔 프램튼의 이 책은‘미셸 드 몽테뉴 참맛보기’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제격이지 싶다. 저자의 분석처럼 『에세(essai)』에는 ‘맛’이란 단어는 물론 관련 단어들이 엄청난 빈도로 등장한다고 하였듯이, 또한 몽테뉴 자신의 서문처럼 어떠한 사상적 결과물을 지향한 것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후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인생을 가능한 여과없이 보여주고 몽테뉴라는 인물을 마음속에 그려주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의 기록이듯이 한 사람의 진솔한 모습을 맛보고 음미하는 작업이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책을 보게 되면 설혹 몽테뉴의 일면 경박함이라든가 중용을 빙자한 모호한 처신, 천박함, 편협성, 그리고 시대적 괴리가 몰고 온 간극이 읽히지만 관용의 시선이 내면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면 소란스러운 내 비판의 눈초리는 사그라들고 몽테뉴란 인물을 순수하게 접하게 되고, 한 인간의 삶 전반을 스스럼없이 보여준 그에게 경외와 고마움의 마음과 같은 종(種)으로서의 공감의 연민마저 깃듦을 느끼게 된다.

뜬금없는 말(言) 같지만 사람은 자신의 경험의 경지를 넘어설 수 없는 모양이다. 냉정한 스토아주의자가 낙마(落馬)사고로 죽음의 순간을 경험하고서야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인식 유지능력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내면의 변화조차 드러내는 사상가의 솔직함이 몽테뉴란 인물에 더욱 매력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에세(essai)』는 테마별로 분류된 수상록이 물론 아니다. 때문에 읽다보면 방대한 분량이 산만하고 지루하기조차 하여 어떤 도달지를 알 수 없어 헤매게 되고 책을 물리게 된다. 해서 몽테뉴를 그야말로 맛만 보고 말게 되기가 일쑤다. 이것을 이 책이 어느 정도 해결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우정, 사랑, 전쟁, 죽음, 인간관계, 동물, 성, 여행, 직업...과 같은 주제들로 구분되어 비로소 한 인간의 생각을 어떤 지속성과 연관성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례로 동물과 관련한 에세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특히 말(馬)은 그것이 주제가 아니라도 빈번히 등장하면서 몽테뉴 삶의 관계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미처 알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했던 생각에 미치게 되는 것과 같다.

 

특히 당대로서는 가히 선도적이랄 수 있는, 아니 위험하기 그지없는 몽테뉴의 이교에 대한 종교적 평등성의 관점이라든가, 멕시코 원시부족에 대해 야만의 옷을 입힌 유럽인들이야말로 야만인이라고 말하는 그의 해학적 비평의식은 신선한 의외의 발견이랄 수 있다. 말을 탄 에스파냐 인에 패배한 아즈텍의 왕이 그들의 말(馬)에게 용서를 빌고, 말이 울음소리를 내자 화해와 휴전의 표시로 받아들였다면서 에스파냐인들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을 배제한 사실조차 몰랐다고 너스레를 떠는 몽테뉴의 표정에서 인간 우월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양양한 미소를 보는 것과 같다.

 

한편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몽테뉴 사후 2세기가 지나 18세기에 출간된 <<여행 일지>>의 소개가 부연(敷衍) 되면서 『에세(essai)』 내용들의 배경을 알게 되어 그 외연이 확장되는 것이고, 인간의 정신을 육체에서 분리한 근대 기계적 이성주의 효시랄 수 있는 데카르트와 대척점에 놓여 “확실성에 도달하고자 시도하지 않고 인생 그 자체를 정당화하려한” 인류 역사상 인간의식에 손을 댄 최초의 저술가로서의 몽테뉴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아마 이 책을 통해, 아니 몽테뉴로 가는 길의 안내를 통해 “인생이라는 과수원을 거니는 속도를 늦추고 가능한 한 삶의 달콤함과 아름다움을 입안가득 무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 생각”한 인간과 속도를 맞추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점일 것이다.

 

시치미 뚝 떼고 성(性)을 주제로 한 글들의 제목에 ‘베르길리우스의 시구에 붙여’라고 점잖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구를 솔직히 드러내는 그에게 점점 반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어지는 것처럼, 몽테뉴의 『에세(essai); 수상록』을 꼭 다시금 펼쳐들고 그와 같이 인생의 길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출렁거림을 느끼게 된다. 내 생의 지평을 천천히 지켜보는 여유를 선사하는 정말 맛있는 저술이라 하겠다.

 

[참조]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1)슈테판 츠바이크 著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2)미셸 드 몽테뉴 著 <<몽테뉴 수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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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 루이스 세풀베다 산문집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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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이야기꾼, 이 시인의 눈은 역시 연약한 것들, 망각한 것들, 숭고한 것들을 향해있고, 그것을 추억하고, 애도하며, 오늘을 직시하고, 미래의 당연히 그러해야만 할 방향을 생각한다. ‘칠레’는 지역적으로 우리와는 아주 먼 나라이지만 오랜 독재정권과 민주화의 길을 걷던 과정이 너무도 흡사하여 그 정서가 낯설지 않다는 것은 모순되게도‘세풀베다’와 공감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소설의 모티브가 된 이방인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었던 이주와 여행의 색다른 경험의 이야기들이 더해져 작가의 시선이 열려져 있는 진실을 향한 세계의 현상들을 공유하는 것도 이 책의 맛스러움이라 해야 하겠다.

 

독재정권에 맞서 펜으로서뿐 아니라 게릴라가 되어 육신으로 맞서 싸우던 작가로서는 칠레를 떠나 이웃나라를 전전하는 망명 아닌 망명생활이 불가피했었던 모양이다. 군부독재 권력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그를 세상에 알린 소설,『연애소설 읽는 노인』이 이러한 망명 생활의 첫 기착지인 예콰도르 누시뇨에서의 원주민인 수아르족과 함께한 공동체 생활의 결과였음을 듣게 된다. 수아르족의 보호, 거센 폭풍우를 피해 찾아든 정글의 외딴 오두막과 그를 맞아준 노인, 초라한 벽에 세워진 몇 권의 낡은 책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도 괜찮아요”라고 세풀베다를 꿰뚫듯 마음을 안아준 노인의 얘기임을. 세상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망의 소음이 차단된 곳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이처럼 이 책의 에세이들은 작가의 망명 여행기이며, 어디서든 이방인의 낯선 시선이 번뜩이고, 그래서 늘 새롭고, 내부자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순수하게 읽어낸 현실, 날 것의 거울상이 된다. 독일의 망명생활 중 순박한 웃음을 머금은 칠레의‘라 빅토리아’ 마을을 배경으로 한 유년기 아이들의 사진이 계기가 되어 청년이 되었을 아이들을 찾는 여행의 소회가 책의 첫 장을 연다.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다고 하는 나라에서 그네들이 찾아낸 사진 속 아이들 중 한 아이는 굶주린 동생들을 위해 과자를 훔쳤다는 죄로 처형되고, 그나마 생존한 아이들의 무표정과 힘겨움이 새겨진,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은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민족화해란 얼토당토않은 알맹이 없는 허튼소리로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린 권력은 여전히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핥고 있을 뿐 현실의 잔인함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을 목격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입을 모아 합창하듯이 “크면 칠레를 떠날 거예요.”라고 자신들의 미래를 외친다. 최근 통계자료에서 과반수를 넘는 한국인들이 여건만 되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답했다는 얘기와 너무도 흡사함에 움찔하게 된다. 사진에는 한 아이의 자리가 비어있고, 그 빈자리는“조국이라는 이름하에 망각으로 채워질 것”이라는 현실을 비추는 잔인한 거울의 모습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권력은 왜 이 거울너머의 진실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국민 대통합’이라고 외치는 한국의 정치권력이 진정 무엇이 통합인지 알고나 있으려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편 세풀베다는 남극 대륙에서 석유 채굴작업을 하는 거대자본이 만들어내는 종말적 현상을 목격한다. 남극해 일대의 3대 빙붕 중 하나인‘라르센 B 빙붕’이 떨어져 나와 녹아버리는 것인데, 칠레 남단에서 남극해의 장관을 보기위해 오는 유럽의 부자 관광객들을 보곤 “세상의 종말을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싶어서 돈을 뿌리며 이 먼데까지 오니, 참 희한한 일이지?”라는 조롱에서 인간의 운명이 오직 시장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공포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지나친 근심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의당 그러해야 하는 세계로 이행되고 있지 않다. 비극적인 종말이 단지 눈앞에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외면당하는 이 진실을 대체 어떻게 호소해야 할지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역사적 진실을 선취하려 했던 러시아 작가‘이사크 바벨’의 터무니없는 죽음의 얘기를 들으면서 좌절과 환멸이 지배하는 세계의 항상성을 보게 되는 것은 사실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기자 출신인 작가에겐 권력의 개들이 되어가는 언론의 모습에서 세계가 더욱 진실과 멀어지는 형상이 보였을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글이나 말에 대해 책임지려하지 않는다.”라며 오늘날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책들 옆으로 무지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쓸쓸이 지켜보아야만 했던 돈키호테”임을 말하는 낙심한 얼굴이 어른거린다.

 

또한 세풀베다 특유의 유머가 곁들인 풍자적 글들로 문학적 향기라는 즐거움도 주는데, ‘에드워드’라 불리는 수색견의 에피소드는 공권력의 맹목적 신념이 야기하는 폭력의 실체를 조명하며, 단지 발로 차는 남자의 발길질을 피하려다 바짓가랑이를 찢었다는 이유로 검찰에 상해죄로 고소된 개 ‘치키토’의 18년간 수감 이야기는 가해권력이 피해자의 저항을 폭력이라 규정하며 자유를 박탈하는 구조적 폭력의 현상을 재미있는 우화로 지펴낸다. “치키토는 절대로 그를 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 항변이 왠지 아프게 들리는 까닭이 무엇일까?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쟁취를 위한, 민중의 가슴 속에 타오르는 아름다운 꿈들의 얘기, 진실을 위해 억압과 죽음을 무릅쓴 스러져간 영웅들의 이야기가 진중한 언어로 들려진다. 길 끝에 선 노작가의 시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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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론 현대사상의 모험 10
에릭 홉스봄 지음, 강성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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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술(記述),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 역사학과 역사학자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역사의 분석과 해석과 관계하는 학문들과의 연계성을 전체사회사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역사의 정체성과 당위론에 대한 홉스 봄(Eric John Ernest Hobsbawm)식 진술이라고 해야 할까.

주로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하거나 전문지에 발표한 짧은 담론들로 구성된 글이라서 고도의 배경 학문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수월함이 있으나, 서술적 역사와 같이 일부 비판을 기초로 한 글들의 경우에는 대상학자와 저작에 대한 이해의 결여로 다소 어려움을 겪는 부분도 있다. 다만 역사를 어떠한 관점에서 인식해야 하는지, 역사란 바로 이러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아마 최고의 책이라는 점에서 사건사나 연대기정도에 익숙한 우리의 일반적 역사인식을 한 단계 올려놓아 주는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무엇보다 관심을 갖게하였던 부분은 역사에서‘과거’의 의미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하는 것과 ‘당파’. 즉 특정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입장에 자신의 의도를 종속시키는 것에 대한 지적을 들 수 있는데, 바로 근자에 기승을 부리는 뉴라이트의 비뚤어진 역사관에 대한 본질적 잘못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가의 과제는 과거의 의미의 본질을 사회 속에서 분석하고, 그 변화와 이행과정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거라고 공식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들일까? 결국 그 공식화된 기억으로서의 과거란 무수히 많은 것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것일 뿐이다. 더구나 사회에서 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의식된 역사체계 속으로 통합 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현재의 논쟁과 불확실성을 심판하는 법정이 되는 경향으로 흐를 경우 인위적 가공물이 되거나 날조되곤 한다.


역사를 정치적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악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는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을 볼 때 1947년에야 비로소 국가로 존재하게 된 파키스탄이‘5000년의 파키스탄’이라고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동원한 현재의 정당화나, 마케도니아를 말하는 그리스, 이스라엘 시온주의자들의 역사와 같은 시대착오나 날조에 대한 홉스봄의 지적은 “역사가가 자신의 책임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격정에서 비켜서 있어야 한다.”는 역사학자의 태도를 시정케 해준다. 그렇다고 역사의 당파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데올로기나 정치에 완전히 중립적이라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역사학자의 정치참여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탁상공론과 과학적 차이는 엄연히 존재하며, 과학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행위에 유혹되어 미리 결정된 자신들만의 교리를 입증하는 데만 참여하거나 실제적인 문제는 교조적 근거에서 거부하면서 사이비 문제를 제기하는 주관적 당파성은 경계하여야 할 요소임을 부인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란 대체 우리들, 오늘의 사람들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의미를 기대해야 하는 것일까? “역사학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역사변화 전반에 걸친 메커니즘 형태를, 특히 변화가 극적으로 가속화되고 확대되어온 과거 몇 백 년 동안의 인간사회의 메커니즘 형태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즉 역사는 역사적 경험과 관점의 결합에 기초해 현대사회에 대한 전망을 가능케 하며, 미래와 미래를 준비하기위해 요청되는 인간행위를 판단하는 데 필수적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특히 홉스봄은 ‘사회갈등’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한계까지 짓눌려 온 사회구조의 중요한 측면을 표현하기 때문이란 것이다. 예로서 프랑스 혁명기라는 짧은 기간이 동일시간 폭을 지닌 어떠한 시기보다 더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유독 많은 역사연구에 바쳐진 것처럼 어떤 중요한 문제들은 그 폭발의 순간에 평상시 잠재되어있던 많은 것을 드러내기에 사회의 주요변혁과 반응을 전체적으로 명료하게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홉스봄의 전체사회사, 즉 기존의 하층계급에 대한 역사, 풍속, 관습, 일상생활을 의미하는 사회사를 벗어나 경제, 정치, 문화, 종교등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한 역사인식과 관련을 맺고 있다 할 수 있겠다. 특히, ‘마르크스’의 ‘토대와 상부 구조’라는 상호작용하는 상이한 수준들로 구성된 사회라는 모델, 즉 사회현상의 위계질서를 주장하고 자기 지속적인 체계의 경향에 반작용하는 내적 긴장이 사회 내에서 존재한다는 주장에 강한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홉스봄의 역사론을 정립하는 원형적 토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회에 대한 분석도 그 사회의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과 함께 시작해야만 한다는 마르크스의‘생산양식’은 인간사회의 다양성과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토대로서 홉스봄의 역사인식에 근저를 이루고 있다 할 수 있다. 이에 더불어 반(反)주류 역사라고 부를만한 분야의 탁월한 선구자들인‘페르낭 브로델’을 비롯한 《아날학파》의 “다양한 행동, 사고, 느낌의 형태를 서로 일관된 것으로 보기위해 이러한 형태들 사이의 논리적 연관성을 발견하려한”‘망탈리테(mentalites)’는 전체사회사에 음양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마르크스가 역사학에 미친 영향이나 아날학파에 대한 몇 꼭지의 글은 그래서 이 저술, 아니 홉스봄의 역사인식에 대한 중심 사고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 된다.


한편, 19세기 프랑스 歷史家‘미슐레(Jules Michelet) ’에 이르러서야 민중사가 시작되었다하지만 대개의 지역에서는 1950년대 되어서야 비로소 민중사 즉, 국가를 형성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인 민중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던 역사가 민중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꽤나 인상적이다. 왜 역사는 왕과 황제, 지배계급 상층부만 이야기 하였을까? 역사는 통치자의 영광과 실용적 용도를 위해서만 저술되는 그러한 역사였다. 결국 사회에 대해서는 어떠한 것도 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 역사, 민중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역사. 우리 한국의 역사는 여전히 이러한 지배계급의 역사만이 얘기되고 교육의 현장에서 유리되고 있다. 고작 홉스봄의 지적처럼 보통사람의 역사를 기술하는 일부 좌파의 역사조차도 노동운동, 민주화운동의 선구자로 간주되는 인물이나 사건에 맞추어져 진정한 민중의 이야기는 하고 있지 않음에 대한 각성은 새삼스레 당혹스럽기조차 하다.


역사는 사회가 본질적으로 겪는 모든 변화에 대한 기록이다. 그래서 홉스봄이 말하는‘전체사회사’나, 역사 기술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아울러 제시되는 방법론들, 그리고 팽창된 방대한 역사 기술로서 편리한 출발점이 될 수 있는‘상황’에 대한 연구의 제안 등 진정 역사란 무엇인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차원을 달리한 역사의 이해를 갖게 해준다. 그의 저술, 『혁명의 시대』,『자본의 시대』,『제국의 시대』,『극단의 시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심층적 이해를 위한 매혹적인 입문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역사를 말하는 법을 말하는 역사서이다! 역사를 읽으려면 우선 홉스봄의 『역사론: On History』부터 읽으라고 권유하고 싶어진다.


註) 망탈리테(mentalites) : 사회문화현상의 밑바닥에 자리한 집단 무의식 또는 집합기억으로서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심성(心性)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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