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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 몽테뉴의 12가지 고민들
솔 프램튼 지음, 김유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의 제목이 된 문장의 출처를 굳이 찾아보았다. 몽테뉴가 교조적 신학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박 을 위해 자신의 수상록<> 1권에 추가한 <레몽 스봉의 변호>라는 에세이 중에서 가까스로 발견했다. 인간이 다른 종(種)에 비해 우월하다는‘당연한 추정’을 극복하려는 일화의 한 토막이다. 고양이가 사람을 데리고 노는 것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당대에 얼마나 전복적인 인식이었을까에 이르면 책의 제목으로 이 문장을 선정한‘솔 프램튼’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몽테뉴에 대한 선입견인 스토아 주의자, 회의론자, 그리고 말년에는 쾌락주의자라는 도식화된 이해를 뛰어넘어 새로운 들여다보기를 예견케 하는 대목이랄 수 있다. 물론 그의 지적처럼 “결론을 추출하는 과정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과정에 가까운” 몽테뉴의 『에세(essai)』에 대해 평생에 걸쳐 써진 글들이기에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초연한 부동(不動)의 경지라는 신념에서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의 성향으로 변모하는 의식의 진행들을 선명하게 목격케 하고 있지만, 이보다는 “인간 이성의 역설적 한계를 집요하게 파고든” 진솔한 사상가의 진면목을 알아차리게 해주는 미덕에 더 큰 무게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16세기 프랑스의 시대 상황이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는 암흑의 시대였다는 측면에서 몽테뉴 역시 대학살과 전쟁과 죽음이라는 시대의 명제를 피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고난이나 죽음에서 조차 초연해야 하는 아파테이아(aphtheia)를 신조로 여기게 되었다는 기술들에는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또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의 격렬한 종교분쟁으로 인한 그치지 않는 혼란이 야기한 지적확신의 상실이 사람들을 회의주의에 젖어들게 하였다는 점 역시 상식적 설명이랄 수 있다. 이러한 시대사적 배경의 해석이 몽테뉴의 에세를 독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역시 몽테뉴라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해만큼 공감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솔 프램튼의 이 책은‘미셸 드 몽테뉴 참맛보기’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제격이지 싶다. 저자의 분석처럼 『에세(essai)』에는 ‘맛’이란 단어는 물론 관련 단어들이 엄청난 빈도로 등장한다고 하였듯이, 또한 몽테뉴 자신의 서문처럼 어떠한 사상적 결과물을 지향한 것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후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인생을 가능한 여과없이 보여주고 몽테뉴라는 인물을 마음속에 그려주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의 기록이듯이 한 사람의 진솔한 모습을 맛보고 음미하는 작업이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책을 보게 되면 설혹 몽테뉴의 일면 경박함이라든가 중용을 빙자한 모호한 처신, 천박함, 편협성, 그리고 시대적 괴리가 몰고 온 간극이 읽히지만 관용의 시선이 내면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면 소란스러운 내 비판의 눈초리는 사그라들고 몽테뉴란 인물을 순수하게 접하게 되고, 한 인간의 삶 전반을 스스럼없이 보여준 그에게 경외와 고마움의 마음과 같은 종(種)으로서의 공감의 연민마저 깃듦을 느끼게 된다.
뜬금없는 말(言) 같지만 사람은 자신의 경험의 경지를 넘어설 수 없는 모양이다. 냉정한 스토아주의자가 낙마(落馬)사고로 죽음의 순간을 경험하고서야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인식 유지능력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내면의 변화조차 드러내는 사상가의 솔직함이 몽테뉴란 인물에 더욱 매력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에세(essai)』는 테마별로 분류된 수상록이 물론 아니다. 때문에 읽다보면 방대한 분량이 산만하고 지루하기조차 하여 어떤 도달지를 알 수 없어 헤매게 되고 책을 물리게 된다. 해서 몽테뉴를 그야말로 맛만 보고 말게 되기가 일쑤다. 이것을 이 책이 어느 정도 해결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우정, 사랑, 전쟁, 죽음, 인간관계, 동물, 성, 여행, 직업...과 같은 주제들로 구분되어 비로소 한 인간의 생각을 어떤 지속성과 연관성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례로 동물과 관련한 에세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특히 말(馬)은 그것이 주제가 아니라도 빈번히 등장하면서 몽테뉴 삶의 관계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미처 알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했던 생각에 미치게 되는 것과 같다.
특히 당대로서는 가히 선도적이랄 수 있는, 아니 위험하기 그지없는 몽테뉴의 이교에 대한 종교적 평등성의 관점이라든가, 멕시코 원시부족에 대해 야만의 옷을 입힌 유럽인들이야말로 야만인이라고 말하는 그의 해학적 비평의식은 신선한 의외의 발견이랄 수 있다. 말을 탄 에스파냐 인에 패배한 아즈텍의 왕이 그들의 말(馬)에게 용서를 빌고, 말이 울음소리를 내자 화해와 휴전의 표시로 받아들였다면서 에스파냐인들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을 배제한 사실조차 몰랐다고 너스레를 떠는 몽테뉴의 표정에서 인간 우월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양양한 미소를 보는 것과 같다.
한편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몽테뉴 사후 2세기가 지나 18세기에 출간된 <<여행 일지>>의 소개가 부연(敷衍) 되면서 『에세(essai)』 내용들의 배경을 알게 되어 그 외연이 확장되는 것이고, 인간의 정신을 육체에서 분리한 근대 기계적 이성주의 효시랄 수 있는 데카르트와 대척점에 놓여 “확실성에 도달하고자 시도하지 않고 인생 그 자체를 정당화하려한” 인류 역사상 인간의식에 손을 댄 최초의 저술가로서의 몽테뉴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아마 이 책을 통해, 아니 몽테뉴로 가는 길의 안내를 통해 “인생이라는 과수원을 거니는 속도를 늦추고 가능한 한 삶의 달콤함과 아름다움을 입안가득 무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 생각”한 인간과 속도를 맞추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점일 것이다.
시치미 뚝 떼고 성(性)을 주제로 한 글들의 제목에 ‘베르길리우스의 시구에 붙여’라고 점잖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구를 솔직히 드러내는 그에게 점점 반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어지는 것처럼, 몽테뉴의 『에세(essai); 수상록』을 꼭 다시금 펼쳐들고 그와 같이 인생의 길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출렁거림을 느끼게 된다. 내 생의 지평을 천천히 지켜보는 여유를 선사하는 정말 맛있는 저술이라 하겠다.
[참조]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1)슈테판 츠바이크 著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2)미셸 드 몽테뉴 著 <<몽테뉴 수상록>>